화엄경의해백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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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經義海百門
화엄경의해백문
京 大薦福寺 沙門 法藏 述
경 대천복사 사문 법장 술
夫緣起難思。諒遍通於一切。法界叵測。誠顯現於十方。莫不性海沖融應人機而表一。智光赫奕耀世間以通三。殊勝微言輕毫彰於圓教。奇特聖衆纖埃現以全身。逈超情慮之端。透出名言之表。
대저 연기(緣起)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진실로 일체에 두루 통하고, 법계(法界)도 헤아리기 어려우나 참으로 시방에 나타나 있다. 성품의 바다는 가득차서 넘쳐흘러 사람들의 근기에 응하지 않음이 없으나 하나로 표현되고, 지혜의 빛은 밝게 빛나 세간을 비추되 셋에 통한다.
특히 뛰어나고 미묘한 말씀인 원만한 가르침은 가벼운 터럭으로 드러내고, 뛰어나며 특이한 성자들은 온몸으로서 티끌에 나타낸다. 생각의 끝을 멀리 뛰어 넘었으며, 이름과 말을 나타내려 뛰어 나왔다.
竊見玄綱浩澣。妙旨希夷。覽之者詎究其源。學之者罕窮其際。由是微言滯於心首。恒為緣慮之場。實際居於目前。翻為名相之境。
추측하여 보니 신묘한 가르침은 넓고 크며, 현묘한 내용은 심오한 진리이다. 살펴보는 자는 어떻게 그 근원을 연구할 수 있으며, 배우는 자는 그 한계를 찾기가 어렵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미묘한 말은 시작하는 마음부터 막히고, 항상 연(緣)이 되어 생각할 때, 실제 눈앞에 있어도 거꾸로 이름과 모습의 대상으로 삼을 뿐이다.
今者統收玄奧。囊括大宗。出經卷於塵中。轉法輪於毛處。明者德隆於即日。昧者望絕於多生。得其意則山岳易移。乖其旨則錙銖難入。
이제 현묘하고 심오함을 남김없이 죄다 싸서 가진 큰 종지에 거둔다. 티끌 가운데에서 경권이 나오고, 터럭에서 법의 바퀴를 굴리는 것이다. 총명한 자는 바로 그 날에 덕이 높을 것이고, 어리석은 자는 여러 생이 지나도 희망이 없을 것이다. 그 뜻을 얻는다면 큰 산이라도 쉽게 옮길 수 있으나, 그 뜻에 어긋나면 조금도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輒於一塵之上。顯其實德。窮茲性海。覽彼行林。總舉十門。別開百義。參而不雜。義煥爛於篇題。理昭彰於文字。庶入道之士。粗觀其致焉。
문득 하나의 티끌 위에서 그 참된 덕(德)을 드러내고 성품의 바다를 찾아내며, 그 행(行)의 수풀을 살펴보고, 모두 열 가지 부문(門)으로 말하고, 따로 백 가지 뜻으로 연다.
가지런하며 섞이지 않아 한 진리가 밝다. 뜻은 각 편의 제목에 드러나 있고, 이치는 문자에 밝게 나타나 있다. 바라건대, 도(道)에 들고자 하는 자는 경전을 대략적이라도 살펴보기 바란다.
所列名目。條之如左
나열하여 내세우는 이름과 조목은 다음과 같다
緣生會寂門第一 實際斂迹門第二 種智普耀門第三 鎔融任運門第四 體用顯露門第五
差別顯現門第六 修學嚴成門第七 對治獲益門第八 體用開合門第九 決擇成就門第十
제1. 연으로 생긴 것은 적멸로 돌아가는 부문. 제2. 실제가 자취를 거두는 부문.
제3. 일체종지가 두루 빛나는 부문. 제4. 녹이고 융합함을 마음대로 쓰는 부문.
제5. 본체와 작용을 밖으로 드러내는 부문. 제6. 차별되게 나타나는 부문.
제7. 닦고 배워서 장엄을 이루는 부문. 제8. 대치하여 이익을 얻는 부문.
제9. 체(體)와 용(用)을 열고 합하는 부문. 제10. 결정하고 선택하여 성취하는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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緣生會寂門第一
제1. 연(緣)으로 생긴 것은 적멸(寂滅)로 돌아가는 부문
夫緣起萬有。有必顯於多門。無性一宗。宗蓋彰於衆德。分其力用。則卷舒之趣易明。覽其玄綱。則理事之門方曉。今就體用而言。略分十義
대저 연(緣)으로 인하여 온갖 유(有-있다는 것)가 일어난다. 유(有) 반드시 여러 부문으로 나타나는데, 자성(自性)이 없는 하나의 종지(宗旨)이다. 종지는 대개 여러 가지 덕을 드러낸다. 그 작용하는 힘을 나누면 맒과 폄에 나아가기 쉬움을 밝히고, 그 신묘한 가르침을 살펴보면 진리와 현상의 부문을 비로소 알게 된다. 지금 체(體)와 용(用)에 나아가 말하는데 대략 열 가지 뜻으로 나눈다.
一明緣起 二入法界 三達無生 四觀無相 五了成壞
六示隱顯 七發菩提 八開涅槃 九推去來 十鑑動靜
1. 연기를 밝히다. 2. 법계에 들다. 3. 생겨남이 없음을 깨닫는다. 4. 모습이 없음을 관찰하다. 5. 이루어짐과 무너짐을 이해하다. 6. 숨음과 드러남을 보이다. 7. 보리심을 내다. 8. 열반을 열어 보이다. 9. 오고 감을 따져보다. 10. 움직임과 고요함을 살펴보다.
初明緣起者。如見塵時。此塵是自心現。由自心現。即與自心為緣。由緣現前。心法方起。故名塵為緣起法也。經云。諸法從緣起。無緣即不起。沈淪因緣。皆非外有。終無心外法。能與心為緣。縱分別於塵。亦非攀緣。然此一塵圓小之相。依法上起。假立似有。竟無實體。取不可得。捨不可得。以不可取捨。則知。塵體空無所有。今悟緣非緣。起無不妙。但緣起體寂。起恒不起。達體隨緣。不起恒起。如是見者。名實知見也
1. ‘연기(緣起)를 밝히다’는 티끌을 볼 때에 이 티끌은 자기의 마음에서 나타난다. 자기의 마음에서 나타나므로 말미암아 그대로 자기의 마음과 더불어 연(緣)이 된다. 앞에 나타난 연(緣)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법(法)이 바야흐로 일어나기 때문에 티끌이라는 이름이 연(緣)이 되어 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법은 연에서 일어나니, 연이 없으면 일어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인연에 빠지는 것은 모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자기 마음 바깥에는 법이 없고, 마음과 더불어 능히 연이 될 수 있는데, 티끌에 대하여 멋대로 분별을 한다. 또한 반연(攀緣-경계에 대하여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둥글고 작은 모양의 하나의 티끌은 법에 의지하여 일어나지만 거짓으로 세운 것이므로 있는 듯하지만, 결국 실체(實體)가 없으므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티끌의 체(體)는 공(空)하여 유(有)가 없는 것임을 알아라.
지금 깨달은 연(緣)은 연(緣) 아니며 일어남이 없고 묘함이 없다. 다만 연(緣)이 일어나는 체(體)는 고요하여 일어남이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 연(緣)에 따라서 일어나지 않거나 항상 일어나는 것을 체달(體達-사물의 참된 모습을 통달함) 하라. 이와 같이 보는 것을 참된 지견[知見-사리(事理)를 얻어 아는 견해)이라 한다.
二入法界者。即一小塵。緣起是法。法隨智顯。用有差別。是界此法。以無性故則無分齊。融無二相。同於眞際。與虛空界等遍通一切。隨處顯現無不明了。然此一塵。與一切法各不相知。亦不相見。何以故。由各各全是圓滿法界。普攝一切更無別法界。是故不復更相知相見。縱說知見。莫非法界知見。終無別法界可知見也。經云。即法界無法界。法界不知法界。若性相不存。則為理法界。不礙事相宛然。是事法界。合理事無礙。二而無二。無二即二。是為法界也
2. ‘법계(法界)에 든다.’는 곧 하나의 티끌은 연으로 일어나는 법(法)인 것이다. 이 법은 지혜(智慧)를 따라 나타나서 작용[用]에 차별이 있는 것이 이 법계이다. 이 법(法)은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영역이 없고 원융(圓融)하여 두 모습이 없다. 참된 진리가 허공계(虛空界) 등과 더불어 일체에 두루 통하고, 장소에 따라 나타남이 분명하지 않음이 없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하나의 티끌은 일체법(一切法)과 더불어 각각이어서 서로 알지 못하며 서로 보지도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각각이 온전함으로 말미암아 이 원만한 법계가 일체를 두루 거두므로 다시 다른 법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도 다시 서로 알지 못하고 서로 보지 못함이 없다. 설사 알고 본다고 말하더라도 법계를 알고 보는 것이 아니다. 끝내 다른 법계를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에서 이르기를 “법계에는 다른 법계가 없으므로 법계는 법계를 알지 못한다. 이 성품의 모습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으므로 진리의 법계이고, 현상의 모습에 걸림이 되지 않는 분명한 것이 현상의 법계이다. 진리와 현상이 합하면 걸림이 없고, 둘인데 둘이 없으며, 둘이 없음이 곧 둘이다. 이것이 법계이다.”라고 하였다.
三達無生者。謂塵是心緣。心為塵因。因緣和合。幻相方生。由從緣生。必無自性。何以故。今塵不自緣。必待於心。心不自心。亦待於緣。由相待故。則無定屬緣生。以無定屬緣生。則名無生。非去緣生說無生也。論云。因不自生。緣生故。生緣不自生。因生故。生今由緣生。方得名生。了生無性。乃是無生。然生與無生。互成互奪。奪則無生。成則緣生。由即成即奪。是故生時無生。如是了者。名達無生也
3. ‘생겨남이 없음을 깨닫는다.’는 티끌은 마음의 연(緣)이고 마음은 티끌의 인(因)이다. 인과 연이 화합하여서 환(幻)같은 모습이 바야흐로 생겨난다. 연을 따라서 생기기 때문에 반드시 자성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이 작은 티끌은 자기의 연이 아니므로 반드시 마음을 기다려야 하고, 마음도 자기의 마음이 아니므로 또한 연을 기다려야 한다. 서로 기다리는 까닭으로 정해진 것이 없는 연으로 생겨남 에 속하는 것이다. 정해진 것이 없는 연에 의해 생겨남에 속하므로 ‘무생(無生-생겨남이 없다)’이라 한다. 연으로 생겨남을 버리고 생겨남이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논(論)에서 이르기를 “인(因)은 스스로 생겨남[生]이 아니고 연(緣)이 생겨남[生]인 까닭이다. 연(緣)이 생겨남[生]은 스스로 생겨남[生]이 아니고 인(因)이 생겨남[生]인 까닭이다. 생겨남[生]은 이 연(緣)으로 말미암아 생겨남[生]이다. 바야흐로 ‘생겨남[生]’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생겨남[生]은 자성이 없으니 ‘생겨남이 없음[無生]’임을 깨달아라. 그런데 생겨남[生]과 생겨남이 없음[無生]은 서로 이루고 서로 뺏으니, 빼앗기면 생겨남이 없음[無生]이고, 이루면 연(緣)으로 생겨남[生]인 것이다.
이룸 그대로이고, 빼앗음 그대로인 까닭으로 생겨날 때가 바로 생겨남이 없음[無生]이다.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을 ‘생겨남이 없음[無生]을 이해한다.’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四觀無相者。如一小塵圓小之相。是自心變起假立無實。今取不得。則知。塵相虛無。從心所生。了無自性。名為無相。經云。諸法本性空。無有毫末相。然相雖取不得。詮無之義非絕。以相無體性法即立。以法為無相之佐由不失法相故。相即非相。非相即相。相與無相。實無差別也。此無相義。如繩上蛇。全言無蛇。當知。繩是無蛇之依。今法是無相之法。全以法為無相之相也
4. ‘모습 없음[無相]을 관찰함’은 이 둥글고 작은 모습의 하나의 작은 티끌이 스스로의 마음이 변하여 일어나지만 거짓으로 세웠으므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지금 취하여 얻지 못한다. 티끌의 모습은 텅 비어 없으니 마음 따라 생긴 것임을 알아라. 자성이 없으므로 ‘모습 없음[無相]’이라 한 것임을 알아라.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법의 본래의 성품이 공(空)하여서 털끝만큼의 모습도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습을 비록 취하여 얻지 못하지만, 없다는 뜻을 설명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습으로써 체(體)의 성질이 없는 법을 세우고, 법으로써 모습 없음을 도우므로 법의 모습을 잃지 않는 까닭이다. 모습이 곧 모습이 아니고, 모습이 아님이 곧 모습이므로 모습[相]과 모습 없음[無相]이 진실로 차별이 없다.
이러한 모습 없음의 뜻은 ‘새끼줄 위에 있는 뱀을 보고 온전히 뱀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라. 새끼줄은 ‘뱀이 없다’라는 것에 의지하는 것이고, 지금의 법은 ‘모습 없음[無相]’에 의지하는 것이니, 온전히 법으로써 모습 없음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五了成壞者。如塵從緣起立。是成即體。不作於塵。是壞今由了緣非緣。乃名緣成。了壞非壞。乃名緣壞。以壞不妨始成於法。是故壞時正是成時。以成無所有。是故成時。正是壞時。皆同時成立。無先無後。若無壞即成。是自性有。若無成即壞。是斷滅空。成壞一際。相由顯現也
5. ‘이루어짐[成]과 무너짐[壞]을 이해함’은, 티끌이 연(緣)을 따라 일어나니, 이루어짐[成]이 체(體)이고, 티끌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무너짐[壞]이다.
지금은 연(緣)이 연 아님[非緣]을 이해하였으므로 ‘연을 이루어 졌다’라고 하고, 무너짐이 무너짐 아님을 이해하였으므로 ‘연이 무너졌다’라고 한다. 무너짐은 법이 처음 이룸을 방해하지 않는 까닭으로 무너질 때가 바로 이루어 질 때이고, 이루어짐은 있는 것이 없으므로 이루어질 때가 바로 무너질 때이다. 모두 한꺼번에 이루어지므로 앞뒤가 없다. 만약 무너짐 없음이 바로 이루어짐이라면, 자성유(自性有)이고, 만약 이루어짐 없음이 바로 무너짐이라면 단멸공(斷滅空)이다.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동시이므로 서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六示隱顯者。若觀塵相不可得時。即相盡而空現。由見相時不即於理。是故事顯而理隱。又此塵與諸法。互相資相攝。存亡不同。若塵能攝彼。即彼隱而此顯。若彼能攝塵。即塵隱而彼顯。隱顯一際。今但顯時。已成隱也。何以故。由顯時全隱而成顯。隱時全顯而成隱。相由成立。是故隱時。正顯顯時正隱也
6. ‘숨음과 드러남을 보임’은 이 티끌의 모습을 관하여 얻을 수 없을 때, 모습이 다하면 공(空)이 나타난다. 모습을 볼 때 진리 그대로임이 아님으로 말미암아 현상이 드러나면 진리는 숨는다. 또 이 티끌과 더불어 모든 법이 서로 돕고 서로 거두기 때문에 존망(存亡)이 같지 않다. 만약 이 티끌이 저것을 거둘 수 있다면 저것은 숨고 이것이 드러나고, 만약 저것이 티끌을 거둘 수 있다면 티끌은 숨고 저것이 드러나므로 숨고 드러남이 동시이다.
지금은 단지 드러날 때 이미 숨음만이 이루어졌으니 무슨 까닭인가?
드러날 때 온전히 숨으므로 드러남이 이루어지고, 숨을 때 온전히 드러나므로 숨음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까닭으로 숨을 때가 바로 드러남이고 드러날 때가 바로 숨음이다.
七發菩提者。謂此塵即寂滅涅槃無性乃是佛菩提。智所現故。今由了達一切衆生及塵毛等無性之理。以成佛菩提智故。所以於佛菩提身中。見一切衆生成正覺轉法輪也。又衆生及塵毛等。全以佛菩提之理成衆生故。所以於衆生菩提身中。見佛發菩提心修菩薩行。當知。佛菩提更無異見。今佛教化塵內衆生。衆生復受塵內佛教化。是故佛即衆生之佛。衆生即佛之衆生。縱有開合。終無差別。如是見者。名發菩提心。起同體大悲。教化衆生也
7. ‘보리심(菩提心)을 낸다.’는 이를테면, 이 티끌은 적멸(寂滅)ㆍ열반(涅槃)ㆍ무성(無性)이며, 나아가서 부처 보리(菩提)인데, 지혜에서 나타난 까닭이다.
일체의 중생(衆生) 및 티끌과 털 등의 자성이 없는 이치와 부처 보리의 지혜로 이루는 까닭을 지금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부처 보리(菩提)의 몸 가운데에서 일체 중생이 정각을 이루는 것과 법륜(法輪)을 굴리는 것을 본다. 또 중생 및 티끌 · 털 등이 온전히 부처 보리의 이치로써 중생을 이루는 까닭으로 중생이 보리(菩提)의 몸 가운데에서 부처 보리의 마음을 내어 보살행을 닦는 것을 본다.
마땅히 알라. 부처 보리는 다시 달리 볼 것이 없음을. 지금 부처님이 티끌 안에서 중생을 교화하시고, 중생이 다시 티끌 안에서 부처님의 교화를 받는다.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은 중생 의 부처님이고, 중생은 부처님의 중생이므로 설령 열고 합함이 있을지라도 끝내는 차별이 없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을 이름 하여 ‘보리심을 내고 동체대비(同體大悲-같은 몸이라 알고 있는데서 일어나는 자비심)를 일으켜서 중생을 교화한다.’라고 한다.
八開涅槃者。謂不了塵顯迷顯為生。復見塵隱迷隱為滅。即依流動生滅之相。緣於塵上。迷心變起。謂是眞實。今求生滅之相。竟無起處。亦無可得。動念自亡。妄想皆滅。隨其滅處。名大涅槃。故經云。流轉是生死。不動名涅槃
8. ‘열반(涅槃)을 열어 보임’은 이를테면, 티끌이 드러남을 이해하지 못하여 미혹(迷惑)이 드러나면 생(生-나는 것)이 되고, 티끌이 숨는 것을 보고서 미혹이 숨으면 멸(滅-사라지는 것)이 되니, 곧 흘러 움직이는 생멸(生滅)의 모습에 의한 것이다.
티끌로 말미암아 미혹한 마음이 변하여 일어나면 이것을 진실이라 한다. 생멸의 모습을 구하지만 끝내 일어나는 곳도 없고 또한 얻을 수도 없다. 생각의 움직임이 스스로 없어지면 망상(妄想)도 모두 사라진다. 그것이 사라진 곳을 따르는 것을 대열반(大涅槃)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유전(流轉-빙빙 돎)하면 생사(生死)이고, 움직임이 없으면 열반(涅槃)이다”라고 하였다.
九推去來者。謂塵隨風東去時。求去相不可得。隨風西來時。求來相亦不可得。皆唯塵法。竟無來去之相。以無實故。來時無所從來。去時亦無所去。經云。法無去來。常不住故。良以了塵去來無體。所以去來即無去來。無去來而恒來去。一際成立。無有彼此之差別。是故經云。菩薩不來相而來。不去相而去。所以不移塵處。而詣十方。恒不離十方。而入塵處。恒不來去。而來去之量。等於法界也
9. ‘오고 감을 따져봄’은 이를테면, 티끌이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갈 때 가는 모습을 볼 수 없고, 바람을 따라 서쪽으로 갈 때도 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모두 오직 티끌의 법이고 끝에는 오고 가는 모습이 없으니 실체(實體)가 없기 때문이다. 올 때도 따라 온 것이 없고 갈 때도 가는 것이 없다.
경에 이르기를 “법은 오고 감이 없으며, 항상 머무름도 없는 까닭이다”이라 하였다. 이것은 진실로 티끌이 오고 가는 실체가 없음을 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고 감이 곧 오고 감이 없는 것이고, 가고 옴이 없으면서도 항상 가고 옴이 동시에 이루어져서 저것과 이것에 차별이 있지 않다.
이런 까닭으로 경에 이르기를 “보살은 오는 모습 없이 오고, 가는 모습 없이 간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티끌이 있는 곳에서 옮기지 않고도 시방으로 나아가며, 항상 시방을 떠나지 않고도 티끌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항상 오고 감이 없으나 오고 감을 헤아림이 법계와 같다.
十鑒動靜者。謂塵隨風飄颻。是動寂然不起是靜。今靜時由動不滅。即全以動成靜也。今動時由靜不滅。即全以靜成動也。由全體相成。是故動時正靜。靜時正動。亦如風本不動能動諸物。若先有動。則失自體。不復更動思之
10. ‘움직임과 고요함을 살펴봄’은 이를테면, 티끌이 바람을 따라 휘날리면 움직임이고, 움직임이 조용하여 일어나지 않으면 고요함이다.
고요할 때 움직임이 사라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바로 온전히 움직임으로써 고요함을 이루고, 움직일 때에 고요함이 사라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바로 온전히 고요함으로써 움직임을 이룬다. 온전한 체(體)로 말미암아 서로 이루는 까닭으로 움직일 때가 바로 고요함이고, 고요할 때가 바로 움직임이다. 바람은 본래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물질을 움직일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에 먼저 움직임이 있다면, 스스로의 체(體)를 잃어버려 다시는 움직이지 못한다. 생각해 보라.
然上諸義緣生既立。理不合孤窮萬有以為同括。無盡而成總。若尋其奧。雖處狹而常寬。欲究其淵。縱居深而逾淺。緣起之義其大矣哉
그런데 이상의 모든 뜻은 연(緣)이 생겨남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이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를 궁구해 보면 같이 묶는 것이 되고, 다함이 모두 이루는 것이다. 이 오묘함을 살펴보면 비록 좁은 곳에 있으나 항상 느긋하고, 깊은 곳을 궁구 하면 설사 깊은 곳이라도 더욱 얕아지니, 연기(緣起)의 뜻은 크기도 하다.
화엄경의해백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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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際斂跡門第二
제2. 실제(實際)가 자취[跡]를 거두는 부문
夫歸宗巨壑亡委輸於百川。會寂眞源銷緣成於萬有。是故衆流亡而相盡。多緣寂而法空。歸體息於攀緣。奪相止於迷惑。
대저 종지의 거대한 골짜기로 되돌아가면 모든 강에서 흘러들어와 맡긴 것이 없어진다. 적멸의 참된 근원으로 모이면 모든 존재에 연(緣)으로 이룬 것을 붙들어 맨다. 이런 까닭으로 뭇 흐름이 없어지면 모습이 다하고, 많은 연(緣)들이 사라지면 법이 공(空)하며, 체(體)로 돌아가면 연(緣)에 매달린 것에서 쉬게 되고, 모습을 잃게 하면 미혹이 그친다.
今就理而言。略顯十義
지금 이치 측면에서 대략 열 가지 뜻을 드러낸다.
初二無我 二明遮詮 三如虛空 四不生滅 五無自他
六無分別 七入不二 八無差別 九明一味 十歸泯絕
1. 두 가지 무아를 밝히다. 2. 차전을 밝히다. 3. 허공과 같다. 4. 생멸이 아니다.
5. 자타가 없다. 6. 분별이 없다. 7. 불이에 들어가다. 8. 차별이 없다.
9. 한 맛임을 밝히다. 10. 민절로 돌아가다.
初明二無我者。謂能分別塵相者。是人所分別之塵。從緣具體。是法由相虛假似有而無實體。即為人無我。經云。我尚不可得。非我何可得。由塵從緣而無自性。是法無我。論云。若法從緣生。此則無自性。以人法二俱無我為一味也
1. ‘두 가지 무아(無我)를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의 모습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고, 분별 받는 것인 티끌이 연(緣)을 따라 체(體)를 갖춘 것이 법이다. 모습은 비고 거짓으로 있어 실체가 없으므로 인무아(人無我)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나[我]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내가 아닌 것[非我]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티끌이 연(緣)을 따르지만 자성이 없으므로 법무아(法無我)이다. 논에 이르기를 “만약 법이 연(緣)을 따라 생긴다면, 이 법은 자성이 없다”라고 하였다
사람과 법이 모두 무아(無我)이므로 한 가지 맛이 되는 것이다.
二明遮詮者。
2. 차전(遮詮)을 밝히다
*차전(遮詮): 의리(義理)에 상위(相違)되는 것을 배척하여 그 이치를 표현하는 것.
問曰。塵是有耶。答曰不也從緣無自性即空故。
<질문> 티끌은 있는 것인가?
<대답> 아니다. 연을 따라 자성이 없으니, 그대로 공이기 때문이다.
問塵是無耶。答不也。不礙緣起有故。
<질문> 티끌은 없는 것인가?
<대답> 아니다. 연이 일어남에 걸림이 되지 않으므로 있는 것이다.
問塵亦有亦無耶。答不也。空奪有盡唯空。有奪空盡唯有。互不存故。
<질문> 티끌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인가?
<대답> 아니다. 공(空)이 유(有)를 없애 버리면 오직 공(空)뿐이고, 유(有)가 공을 없애 버리면 오직 유(有)뿐이므로 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問塵是非有非無耶。答不也。不礙俱存故。俱除計有無之見。非無法也。經云。但除其病而不除法。是為護過
<질문> 티끌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것인가?
<대답> 아니다. 함께 존재함에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있다 · 없다’라는 헤아림만을 함께 없앨 뿐이지 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에서 이르기를 “단지 그런 병(病)만 없앨 뿐이지 법을 없애지는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틀리는 것을 지켜 주는 것이다.
三如虛空者。謂塵體空無所有。即無分限亦不可取捨。而遍通十方。能與一切理事解行等為所依。而有無盡大用。猶如虛空。與一切法為依。而全建立。無有分限。遍通十方。猶如虛空。即得虛空智虛空身無礙用也
3. ‘허공과 같음’은 이를테면, 티끌의 체(體)는 공하여 있는 것이 없으므로 한계가 없으며, 또한 버리고 취할 수도 없지만 시방에 두루 통한다.
능히 일체의 진리ㆍ현상ㆍ이해ㆍ행위 등이 의지할 것이 되며 다함이 없는 큰 작용[用]이 있다. 마치 허공과 같아서 일체법의 의지처가 되며, 온전하게 만들어 세우지만 한계가 없으므로 시방에 두루 통한다. 마치 허공과 같아서 허공지(虛空智-진여)와 허공신(虛空身-법신)의 걸림 없는 작용을 얻는다.
四不生滅者。謂塵從風起散。而有生滅之相。今推生相滅相。悉皆空無。經云。因緣故法生。因緣故法滅。由生時是無性生。由滅時是無性滅。以無性故生即不生。滅亦不滅
4. ‘생멸(生滅)이 아님’은 이를테면, 티끌이 바람을 따라 흩어지면 생멸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지금 생(生)의 모습 멸(滅)의 모습을 헤아려보니 모두 다 공이고 없다.
경에서 이르기를 “인연 때문에 법이 생기고, 인연 때문에 법이 사라진다.”라고 하였다. 생길 때는 자성이 없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사라질 때도 자성이 없이 사라진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생김이 곧 생김이 아니고, 사라짐 또한 사라짐이 아니다.
五無自他者。謂塵是緣為他也。心是因為自也。今心不自心。必待於緣。既由緣始現。故知。無自性也。又塵不自塵。亦待於心。既由心方現。故知。無他性也。又一切法。皆不自生。亦不他生。故無自他也。今言自他者。非別異見。自是他自。他是自他。自他一際。自在說也。論云。自性亦不有。他性亦復無
5. ‘자타(自他)가 없음’은 이를테면, 티끌은 연(緣)이니 다른 것[他]이 되고, 마음은 인(因)이니 자기(自己)가 된다. 이 마음은 스스로의 마음이 아니므로 반드시 연을 기다려야 한다. 이미 연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나타난 것이므로 자기의 성질[自性]이 없음을 알라.
또 티끌은 스스로의 티끌이 아니므로 역시 마음을 기다려야 한다. 이미 마음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나타났으므로 다른 성질[他性]이 없음을 알라. 또 일체의 법은 자기가 생긴 것도 아니고, 또한 다른 것이 생긴 것도 아니므로 자타가 없다. 지금 자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특별히 달리 보는 것이 아니다. 자기는 다른 것의 자기이며, 다른 것은 자기의 다른 것이다. 자기와 다른 것이 하나이므로 자재하게 말한다.
논에서 이르기를 “자성(自性) 또한 있는 것이 아니며, 타성(他性) 또한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六無分別者。謂見塵圓小之相好惡飛颺者。是自心分別也。即此分別之心。緣塵而起。尋起無體。名相自亡。是無分別。但分別情破。說為無分別。非如木石。經云。法從分別生。還從分別滅。又云。無分別智分別無窮。無窮之相性分別滅由分別無體。即分別無分別。由無體不礙緣。即無分別恒分別
6. ‘분별(分別)이 없음’은 이를테면, 티끌의 둥글고 작은 모습을 보고 ‘좋다’ ‘싫다’라는 생각이 각각인 것은 자기 마음의 분별이다. 곧 이 분별하는 마음은 티끌에 연(緣)하여 일어난다. 일어나는 것을 살펴보면 체(體)가 없고, 이름과 모습이 본래 없으니 이것이 분별없음이다. 단지 분별하는 생각을 깨뜨리려고 분별없음을 말하는 것이지 나무나 돌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경에서 이르기를 “법은 분별을 따라 생기고 또 분별을 따라 사라진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분별없는 지혜로 분별함이 끝이 없다”라고 하였다. 끝이 없는 모습의 성질에서는 분별이 사라지므로 체가 없으니 곧 분별이 분별없음이며, 체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연에 걸림이 아니므로 분별없음이 항상 분별이다.
七入不二者。謂見塵與心有二。二即無二也。若執塵心為一。遮言不一。以迷心所見非無緣故。若執塵心為二。遮言不二。以離心外無別塵故。由心與塵二即無二。唯心無體。一亦無一。由一無一。由二無二。一二無礙。現前方入不二。當經云。無二智慧中。出人中師子。不著一二法。知無一二故
7. ‘불이(不二)에 들어감’은 이를테면, 티끌과 마음이 둘이 있은 것을 보지만, 둘이 그대로 둘이 아니다.
만약 티끌과 마음은 하나라고 집착하면 ‘하나가 아니다’라고 말하니, 미혹한 마음으로 본 것이라 연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티끌과 마음이 둘이라고 집착하면 ‘둘이 아니다’라고 말하니, 마음 바깥에 떠나 있는 다른 티끌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과 티끌이 둘이므로 말미암아 둘이 아니며, 오직 마음은 체(體)가 없으므로 하나 또한 하나가 아니다. 하나로 말미암아 하나가 없고, 둘로 말미암아 둘이 없으므로 하나와 둘이 걸림 없이 앞에 나타나야만 바야흐로 둘이 아님[不二]에 들어가게 된다.
당연히 경에서 이르기를 “둘이 아닌 지혜 가운데에서, 사람 가운데서 사자가 나왔으니, 하나와 둘이라는 법에 집착이 없고, 하나와 둘이 없음을 아신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八無差別者。謂見塵相圓小。與一切法分齊有異。是為差別。觀塵無體一切皆空。唯理所現無復異體。是無差別。又此理性隨緣成一切法。非無分齊。是即差別。經云。諸法無差別。唯佛分別。知了差無差法。非無理事故。然差別緣起萬有無差法界一空。由空與有同別互融。會萬有以為一空。差即無差。觀一空而成萬有。無差即差。差與無差一際顯現。四句作之可見
8. ‘차별(差別)이 없음’은 이를테면, 둥글고 작은 티끌의 모습을 일체법과 영역(領域)이 다르다고 보면 차별이다. 티끌을 관찰하면 체가 없고, 일체가 모두 공이다. 오직 진리에서 나타난 것이고 없고, 다시 다른 체가 없으므로 차별이 없다. 또 이 진리의 성품[性]은 연을 따라 일체법을 이루지만 영역이 있으면 곧 차별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법은 차별이 없지만, 오직 부처님만이 분별하여 아신다.”라고 하였다. 차별과 차별 없는 법을 이해하여 알면 진리와 현상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별된 연기는 모든 존재이고 차별이 없는 법계는 하나의 공이다. 공(空)과 유(有)의 같음과 다름이 서로 화합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존재를 모아서 하나의 공으로 되는 것으로써 차별이 곧 차별 없음이다. 하나의 공이 모든 존재를 이룸을 관찰함에 차별 없음이 그대로 차별이고, 차별과 차별 없음이 동시에 나타난다. 사구(四句)로 만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구(四句): 긍정부정으로부터 되는 네 개의 판단 형식. 긍정, 부정, 긍정인 동시에 부정,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님.
九明一味者。謂塵從緣成立。皆無自性。縱理事教義萬差。莫不唯空寂一味。秖以緣起萬差。說空一味。若無萬差。是唯一味。若舉空即一味唯空。若舉性即一味唯性。若舉如則一味唯如。類顯可知
9. ‘한 가지 맛임[一味]을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은 연을 따라서 이루어지므로 모두 자성이 없다. 설사 진리 · 현상 · 가르침 · 뜻이 많은 차이가 있더라도 오직 공적(空寂)의 한 맛뿐이다. 다만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많은 차이가 있을 뿐이므로 ‘공(空)의 한 가지 맛’이라 한다. 만약 많은 차이가 없다면, 이것은 오직 한 가지 맛뿐이다. 만약에 공에서 말한다면 한 가지 맛은 오직 공뿐이고, 만약에 본성(本性)에서 말한다면 한 가지 맛은 오직 본성뿐이며, 만약에 진여(眞如)에서 말한다면 한 가지 맛은 오직 진여뿐이다. 같은 종류를 나타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十歸泯絕者。謂心與塵互相泯絕。若以塵唯心現。則外塵都絕。若以心全現塵。則內心都泯。泯則泯其體外之見。存則存其全理之事。即泯常存即存常泯。四句可知然上諸義實際難思。心行罕緣其致。眞源叵測名言詎賾其端。
10. ‘민절(泯絶)로 돌아감’은 이를테면, 마음과 티끌이 서로 뺏어 없애는 것이다. 만약 티끌이 오직 마음에 나타난다면, 티끌 밖으로 모두 없애는 것이 되고, 만약 마음이 온전히 티끌에 나타난다면, 마음 안에서 모두 없애는 것이 된다. 없앰은 그 체(體) 바깥에 보이는 것을 없앰이고, 있게 함은 그 온전한 진리의 현상을 있게 함이다. 없앰 그대로 항상 있게 함이고, 있게 함은 그대로 항상 없앰이다. 사구(四句)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모든 뜻의 실제(實際)는 헤아리기 어렵다. 마음의 행함이 그물로 연을 끌어들여 그 이치의 참된 근원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이름과 말로 어찌 깊은 그 끝을 찾겠는가?
然無言不絕言。依體興其萬用無事不辯事。隨緣顯。以一空明事。要必談空。說體寧不開用。是故斂迹則緣心罔托。亡相乃妄識無依。方得稱於緣生。將符順於法界
그러나 말 없음은 말이 끊어진 것이 아니고 체(體)에 의지함과 더불어 그 많은 작용이 현상을 현상이라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연을 따라 하나의 공으로 드러난다. 하나의 공으로서 현상을 밝히는 데는 반드시 공을 말해야 하는데, 체(體)를 말함에 어찌 작용을 말하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남아 있는 흔적을 거두어들이면 연에 이끌리는 마음이 남에게 의존(依存)함이 없고, 모습을 없애서 허망(虛妄)된 알음알이에 의지하는 것이 없어야만, 바야흐로 연으로 생긴다 말할 수 있으며, 나아가 법계에 순조롭게 들어맞게 될 것이다.
화엄경의해백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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種智普耀門第三
제3. 일체종지(一切種智)가 두루 빛나는 부문
夫大智照明就纖毫而觀性海。眞源朗現即微塵以眺法身。磊落雲繁。一多開而隨應。崔嵬岳聚理事分以成形。
큰 지혜가 밝게 빛난다. 가는 터럭에 나아가서 본성의 바다를 관찰하니, 참된 근원이 밝게 나타나 작은 티끌 그대로가 바라보니 법신이다. 돌무더기가 떨어지고 구름이 몰려들고, 하나와 여럿이 열림이 응함에 따르고, 높고 높은 산들이 진리와 현상으로 나뉘어 모습을 이룬다.
今就體用現前。略分十義
지금은 본바탕과 작용이 나타남에 나아가 대략 열 가지 뜻으로 나눈다.
一顯如量 二分六通 三明難思 四生佛家 五示圓音
六辯依正 七會機感 八施佛事 九開五眼 十分三智
1. 헤아림 그대로임을 드러내다. 2. 육신통으로 나누다.
3. 생각하기 어려움을 밝히다. 4. 부처님 집에 태어나다.
5. 원만한 소리를 나타내 보이다. 6. 의보와 정보를 말하다.
7. 근기에 감응하여 만나다. 8. 부처님이 가르침을 베풀다.
9. 오안을 열어 보이다. 10. 세 가지 지혜를 나누다.
初顯如量者。謂塵體空無。是如理。不礙事相宛然。是如量。今塵性。順眞則無分齊。一切事法。全依性顯。是故一塵中見一切事。此事是如理智中如量之境界也
1. ‘헤아림 그대로 임을 드러냄’은 이를테면, 티끌의 체는 공하여 없음이 진리와 같고, 현상의 모습이 걸림 없이 뚜렷하게 드러남이 헤아림과 같다. 티끌의 본성이 진리를 따르므로 영역이 없으며, 일체 현상의 법은 온전히 본성에 의지하여 드러난다. 이런 까닭으로 하나의 티끌 가운데에서 일체의 현상을 보며, 이 현상은 진리인 지혜 가운데의 헤아림인 경계이다.
二分六通者。謂此塵無體。不動塵處。恒遍十方剎海。無去來之相。是神足通。經云。不起于座。遍遊十方。又見。塵法界無際。而有理事教義一切等。諸菩薩皆同證入。皆同修習。此法更無別路。是他心通。又見塵法界解行現前之時。即知。過去曾於佛所親聞此法。以觀心不斷。是故今日得了。為宿命通。又見塵性空寂無相可得。即無二見。若見相即為二見也。由無相即無有二。名天眼通。經云。不以二相見名眞天眼。又了塵無生。無性空寂。即執心不起。是漏盡通。經云。斷結空心。我是則無有生。又聞說塵法界差別之聲。即知。一切聲全是耳不復更聞也。然此聞無緣無得。於聲悟一切法。是常聞一切佛法。為天耳通也
2. ‘육신통(六神通)으로 나눔’은 이를테면, 이 티끌은 체가 없으므로 티끌이 있는 곳에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항상 시방의 국토와 바다에 두루 하지만 오고 가는 모습이 없다. 이것이 신족통(神足通)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시고 시방에 두루 노니신다.”라고 하였다.
또 보니, 티끌 법계는 끝이 없으며 진리 · 현상 · 가르침 · 뜻 · 일체 등이 있는데, 모든 보살들이 다 같이 깨달음에 들어가 다 같이 닦고 익혀 이 법에 다시금 다른 길이 없다. 이것이 타심통(他心通)이다.
또 티끌 법계를 보고 이해와 행이 앞에 나타날 때, 바로 알라, 과거 일찍이 부처님을 가까이하여 이 법을 듣고, 마음을 관하는 것을 끊지 않았던 까닭으로 지금에 깨달았으면 숙명통(宿命通)이 된다.
또 보니, 티끌의 본성은 공적하여 모습이 없는 것을 얻는데 바로 둘이 아님을 보는 것인데, 만약 모습을 본다면 바로 두 가지로 보는 것이 된다. 모습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바로 둘이 아니면 천안통(天眼通)이라 한다.
경에서 이르기를 “두 가지 모습으로 보지 않는 것이 참된 천안(天眼)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또 티끌은 태어남이 없고 자성이 없어 공적한 것임을 깨달아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누진통(漏盡通)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번뇌[結]를 끊어 빈 마음인 내가 곧 번뇌가 생겨남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티끌 법계가 말하는 차별의 소리를 듣고는 바로 알라, 일체 소리가 온전히 이것뿐임을, 도 다시 다른 소리를 듣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들음은 연이 없어 소리에서는 얻을 것이 없다. 이렇게 일체의 법을 깨닫고 일체의 부처님 법을 항상 듣는 것이 천이통(天耳通) 된다.
*결(結): 결박한다는 뜻. 몸과 마음을 결박하여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하는 번뇌.
三明難思者。謂塵不壞小量。而遍十方普攝一切。於中顯現。斯由量即非量非量即量。又居見聞之地。即見聞之不及。處思議之際。即思議之不測。皆由不思議體自不可得故。即思不可思。經云。所思不可思。是名為難思
3. ‘생각하기 어려움을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은 작은 헤아림도 무너뜨림 없이 시방에 두루 하여 일체를 두루 거두는 가운데에 나타난다. 이것은 헤아림이 곧 헤아림 아님으로 말미암아 헤아림 아님이 곧 헤아림인 것이다. 또 보고 듣는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보고 들음에 미치지 못하며, 생각의 끝에 있으면 생각으로는 헤아리지 못한다. 모두 불가사의한 체는 스스로 얻을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곧 생각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생각한 것은 생각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생각하기 어렵게 된다.’라고 한다.
四生佛家者。佛以眞如法界無生之理為家。今見塵無生無性時。即此智從無生法顯生故。名生佛家也。經云。於法不分別。是則從如生。又云。普於三世佛法中。知無生已而化生但契義理即名生佛家。是佛之子。亦名佛出現也(有本云。無生之理菩提涅槃為家)
4. ‘부처님 집에 태어남’은 부처님은 진여법계의 태어남이 없는 이치로써 집을 삼는다. 이 티끌의 태어남이 없음과 자성이 없음을 볼 때, 이 지혜는 태어남이 없는 법[無生法]으로부터 나온 까닭으로 부처님 집에 태어남이라 한다.
경에서 이르기를 “법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으니, 이 법은 진여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삼세(三世)의 부처님 법 가운데 두루 하지만, 태어남이 없음을 알고서 변화로 태어난다[化生]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단지 뜻과 진리에 틀림없이 서로 꼭 들어맞으므로 곧 ‘부처님 집에 태어난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부처님의 아들이며 또한 부처님의 나타나심이라 한다.
[어떤 본(本)에는 ‘태어남이 없는 진리인 보리 열반을 집을 삼는다.’라고도 하였다.]
五示圓音者。謂此說塵之音。然音具足智慧之藏。隨眾生機。有深淺之感。若於聲上。了大小音韻是假立空無所有故。然聲是實者。此乃小乘機性。即愚法教顯也。於聲上即知聲事無體。會事顯理者。此由大乘機性。即終教顯也。於聲上即知大小音聲空無所有。生心動念即乖法體。一味一相不可分別者。此乃大乘機性。即頓教顯也。於聲上了知聲是緣起法界菩提涅槃主伴自在。一即一切一切即一。如帝釋殿珠網重重無盡境界。此由一乘機性。即圓教顯也。此一音上。由機有大小。令此法門亦復不一。一切諸聲。各各如是。乃為如來無礙圓音法輪常轉爾
5. ‘원만한 소리를 나타내 보임’은 이를테면, 이것은 티끌을 말하는 소리이다. 그러나 지혜의 곳간을 다 갖추어 있지만, 중생의 근기를 따라서 깊고 얕은 감응이 있다. 만약 소리의 크고 작은 울림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거짓으로 세운 것으로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소리를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하면, 이것은 소승(小乘) 근기(根機)의 성질이므로 우법교[愚法敎]를 나타냄이다.
소리에서 소리의 현상은 실체가 없음을 알고, 현상을 모아 진리를 나타내는 것은 대승 근기의 성질이니, 곧 종교(終敎)를 나타냄이다.
소리 위에서 크고 작은 소리가 공하여 있는 바가 없음을 알고서 마음을 내고 망념을 일으키면, 법의 체와 어긋나므로 한 가지 맛[一味]ㆍ한 가지 모습[一相]을 분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대승(大乘) 근기의 성질이니, 곧 돈교(頓敎)를 나타냄이다.
소리에서 소리를 연기법계ㆍ보리열반ㆍ주반(主伴)이 자재함ㆍ하나가 바로 일체이고 일체가 하나임을 이해하여 알면, 마치 제석천의 보배 그물의 구슬이 거듭 거듭함이 다함이 없는 경계인 것과 같다. 이것은 일승 근기의 성질이니, 곧 원교(圓敎)를 나타냄이다.
이 하나의 소리에서 근기의 크고 작음이 있으므로 이 법문으로 하여금 하나가 아니게 한다. 일체의 모든 소리도 각각 이와 같으며, 여래의 걸림 없는 원만한 소리가 되어서 항상 법륜을 굴린다.
*우법교(愚法敎): 자기들의 법만 고집하고 대승의 심묘(深妙)한 이치를 모르는 것.
*종교(終敎): 일체 만유가 진여를 본체로 하고 연기하는 것이라 하는 대승 종극(終極)의 교리.
*돈교(頓敎): 원만하게 익은 근기에 대하여 常·無常·空·不空의 가르침을 동시에 말한 것.
*원교(圓敎): 『화엄경』과 같이 윗 근기에 도달한 자를 위하여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문을 말한 것.
六辨依正者。謂塵毛剎海是依。佛身智慧光明是正。今此塵是佛智所現。舉體全是佛智。是故光明中見微塵佛剎。又剎海微塵。全用法界性。而為塵體。是故塵中見一切佛說法化生等事。當知。依即正正即依。自在無礙。乃至塵毛國土一一事法。各各如是。全佛依正也
6.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를 말함’은 이를테면, 티끌과 터럭의 국토와 바다는 의보이고, 부처님 몸의 지혜의 광명은 정보이다. 지금 이 티끌은 부처님 지혜에서 나타난 것이다. 체(體)을 들면 온전히 부처님 지혜인 까닭으로 광명 가운데에서 작은 티끌의 부처님 국토를 본다. 또 국토와 바다의 작은 티끌은 온전히 법계 성품의 작용이며 티끌의 체가 되는 까닭으로 티끌 가운데에서 일체의 부처님이 설법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등의 일들을 본다.
마땅히 알라. 의보가 곧 정보이며, 정보가 곧 의보이므로 자재하여 걸림이 없으며, 티끌과 터럭의 국토에 이르기 까지 하나하나의 현상의 법도 각각 이와 같은 온전히 부처님의 의보와 정보이다.
七會機感者。謂塵如如平等法界。隨智所顯。機大則義顯亦大。機小則理顯亦小。隨衆生之根性。有證悟之淺深。是為機感。即此機感。全如來法身而應現也
7. ‘근기에 감응하여 만남’은 이를테면, 티끌의 여하고 여한 평등한 법계는 지혜를 따라 나타난 것이다. 근기가 크면 뜻을 나타냄도 역시 크고, 근기가 작으면 이치를 나타냄도 또한 작다. 중생의 근기와 성품을 따라 깨달음을 얻음에 깊고 낮음이 있으니, 이것이 근기에 감응하는 것이다. 곧 이렇게 근기에 감응하여 온전히 여래의 법신이 부응하여 나타난다.
八施佛事者。謂塵音聲文字。皆悉性離即解脫故。此無性文字。非事之事。以空無故。佛智所顯。隨所施為。不失法界。即為佛事。經云。有所施為。無非佛事
8. ‘부처님이 가르침을 베푸는 것)은 이를테면, 티끌의 소리와 문자는 모두 그 성품을 떠나 있으니, 바로 해탈이기 때문이다. 이 본성이 없는 문자는 현상 아닌 현상인데 공하여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 지혜에서 나타난 것이므로 베풀게 되는 것을 따라서 법계를 잃지 않게 되니, 곧 부처님의 일[가르침을 베푸는 것]이 된다.
경에서 이르기를 “베풀게 되는 것이 있으면 부처님의 일이 아님이 없다”라고 하였다.
九開五眼者。謂塵無性之色為肉眼也。塵是緣起之法為法眼。塵性空故無所有是慧眼。塵無相可得。息諸分別。不二見故名為天眼。塵性空寂。無相可得。依正無礙念劫圓融有無平等。名為佛眼。然不可以五眼見於塵。但於塵處隨顯立名也
9. ‘오안(五眼)을 열어 보임’은 이를테면, 티끌이 자성 없는 물질이면 육안(六眼)이 되고, 티끌이 연기의 법이면 법안(法眼)이고, 티끌의 본성이 공적하므로 있는 것이 없으면 혜안(慧眼)이다. 티끌은 모습이 없음을 알고 모든 분별을 쉬어 두 가지로 보지 않으므로 천안(天眼)이라 하고, 티끌의 본성이 공적하여 모습이 없으므로 의보와 정보가 걸림이 없으며, 찰라와 겁이 원융하고 유(有)와 무(無)가 평등하면 불안(佛眼)이라 한다.
그러나 위의 오안(五眼)으로 티끌을 볼 수 없으나, 단지 티끌이 있는 곳에서 나타남을 따라 이름을 세운 것이다.
十分三智者。謂達塵性空無之理。決擇邪正。順理入眞。此決擇之心。是加行智。又見此塵全是亡言絕慮。性超圖度能所不起動念亦非。此為正體智。又見塵緣起幻有不礙差別。雖種種差別莫不空無所有。以不失體故。全以法體而起大用。一多無礙主伴相攝。一即一切。一切即一。是為後得智
10. ‘세 가지 지혜를 나눔’은 이를테면, 티끌의 본성이 공하여서 없는 이치를 이해하여 알면 삿됨[[邪]과 바름[正]을 잘 가리어 이치를 따라서 진리에 들어가니, 이렇게 잘 가리는 마음이 가행지(加行智)이다.
또 이 티끌은 온전히 말의 경계를 떠났고, 생각의 영역이 끊어졌으며, 본성은 헤아림을 벗어나 변하여 일어날 수 있는 생각이 아닌 것을 보면, 이것은 정체지(正體智)이다.
또 티끌이 연으로 일어나 환(幻)으로 있는데 차별에 걸림이 되지 않는다. 비록 가지가지로 차별되지만 공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으므로 체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온전히 법의 체로써 큰 작용을 일으켜 하나와 여럿이 걸림이 없고, 주인과 손님이 서로 거두며, 하나가 곧 일체이며 일체가 곧 하나라고 보면, 후득지(後得智)이다.
그런데 위의 모든 뜻에서 법은 제한된 영역이 없다. 반드시 동시에 나타나니, 진리가 차별됨에 걸림이 되지 않고 숨음과 나타남이 동시이다. 작용은 파도가 치솟는 것 같고, 가마솥의 끓는 물과 같아 온전히 진리의 체로써 운행한다. 체는 깨끗한 거울과 맑은 물처럼 연을 따르지만 적멸로 돌아가는데, 이 햇빛이 쏟아져 비추는 것처럼 무심히 시방을 밝히고, 맑은 거울의 단정한 모습처럼 움직이지 않고 만 가지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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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의해백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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鎔融任運門第四
제4. 녹이고 융합함[鎔融]을 마음대로 운용하는 부문
夫性海無涯。衆德以之繁廣。緣生不測多門由是圓通。莫不迴轉萬差卷舒之形。隨智鎔融一際開合之勢。從心照不生機。縱差別而恒順用非乖體。雖一味而常通。
대저 본성의 바다는 끝이 없어 여러 가지 덕이 많고 많으며, 연으로 생겨난 것은 헤아릴 수 없나니, 여러 가지 부문[門]이 이로 말미암아 원만히 통한다. 회전(廻轉)하면 만 가지가 차별 아님이 없으며, 펴고 거두는 모습은 지혜를 따른다. 녹이고 융합함이 동시이며, 열고 합하는 형세는 마음을 따르나 비춤은 낌새를 내지 않는다. 설사 차별이 있으나 항상 작용을 따르고, 체를 어긋나지 않는다. 비록 한 가지 맛이나 늘 통한다.
今就體勢而言。略分十義
지금은 본체의 형세에 나아가서 대략 열 가지 뜻으로 나눈다.
一會理事 二達色空 三通大小 四收遠近 五明純雜
六融念劫 七了一多 八會通局 九明卷舒 十總圓融
1. 진리와 현상을 모으다. 2. 색과 공을 이해하다. 3. 크고 작음에 통하다.
4. 멀고 가까움을 거두다. 5. 순일함과 섞임을 밝히다. 6. 찰라와 겁을 융통하다.
7. 하나와 여럿을 이해하다. 8. 통함과 국한됨을 회통하다. 9. 맒과 펼침을 밝히다.
10. 원융함을 총합하다.
初會理事者。如塵相圓小是事。塵性空無是理。以事無體。事隨理而融通。由塵無體。即遍通於一切。由一切事事不異理。全現塵中。故經云。廣世界即是狹世界。狹世界即是廣世界
1. ‘진리와 현상을 알아봄’은 예컨대, 티끌의 모습은 원만하고 작은 것이 현상이고, 티끌의 본성이 공하여 없는 것은 진리이다. 현상은 체가 없는 것으로써 현상이 진리를 따라 융통하며, 티끌이 체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일체에 두루 통한다. 일체 현상의 현상은 진리와 다르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온전히 티끌 가운데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넓은 세계가 바로 좁은 세계이며, 좁은 세계가 곧 넓은 세계이다”라고 하였다.
二達色空者。如見塵從緣成立是色。色無體故是空。空若無色而言空。即是無世諦之妄色。因妄色而有眞諦之真空。色若無空而言色。即是無眞諦之眞空。因眞空而有世諦之妄色。今但了妄無體。即是眞空。非無色名空也。經云。色性自空。非色滅空
2. ‘색(色)과 공(空)을 이해함’은 예컨대, 티끌을 봄에 연을 따라 이루어진 것은 색이고, 색은 체가 없기 때문에 공이다. 공을 만약 색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말한다면, 이것은 속제(俗諦)의 허망한 색[妄色]이 없는 것이므로 허망한 색으로 인하여 진제(眞諦)의 진공(眞空)이 있는 것이다. 색을 만약 공이 없으므로 색이라 말한다면, 이것은 진제의 진공이 없는 것이므로 진공으로 인하여 속제의 허망한 색이 있는 것이다. 지금 단지 망(妄)에는 체가 없음을 이해하여 알면, 곧 진공일 뿐, 색이 없음을 공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경에서 이르기를 “색의 본성은 본래 공이지, 색을 없앤 공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三通大小者。如塵圓相是小。須彌高廣為大。然此塵與彼山。大小相容。隨心迴轉。而不生滅。且如見高廣之時。是自心現作大。非別有大。今見塵圓小之時。亦是自心現作小。非別有小。今由見塵。全以見山。高廣之心。而現塵也。是故即小容大也。經云。金剛鐵圍數無量。悉能安置一毛端。欲明至大有小相。菩薩因此初發心
3. ‘크고 작음을 통함’은 예컨대, 티끌의 둥근 모습은 작음[小]이고, 수미산의 높고 넓음은 큼[大]이다. 그런데 이 티끌과 저 산의 크고 작음이 서로 받아들이며 마음을 따라 회전(廻轉= 굴림)하지만 생멸(生滅)하지는 않는다. 또 마치 산의 높고 넓음을 볼 때, 이것은 자기 마음으로 큼을 만들어 나타내는 것일 뿐 별도의 큼이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지금 티끌의 둥글고 작은 모습을 볼 때 역시 자기 마음이 작음을 만들어 나타내는 것일 뿐 별도의 작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티끌을 봄으로 인하여 온전히 산의 높고 넓음을 보는 마음을 가지고 티끌을 나타낸다. 이런 까닭으로 작음이 큼을 받아들인다.
경에서 이르기를 “금강산 철위산의 수효가 한량없으나 모두가 하나의 터럭 끝에 잘 둔 것이니, 지극히 큰 것이 작은 모습에 있음을 밝히고자 보살이 이것으로 인하여 처음 마음을 내었다”라고 하였다.
四收遠近者。謂此塵是近。彼十方世界是遠。今塵無體。該通一切十方。即此十方全是塵之十方。是故遠恒近也。然十方雖遠。秖是塵性之十方。縱超不可說世界。亦是不出塵性。何以故。塵量無體。等虛空界。不可出過故。是故一切十方。唯塵性顯也。又雖離此至十方。時亦見此塵。何以故。由塵無體。事隨理而融現。是故塵性。遍一切時。塵事亦同顯現。此乃一塵中顯現一切。而遠近彼此宛然。十方入一塵中。遠而恒近。塵遍十方。近而恒遠。塵與十方。近之與遠。一際顯然。更無別異思之
4. ‘멀고[遠] 가까움[近]을 거둠’은 이를테면, 이 티끌은 가까움이고, 저 시방세계는 멂이다. 지금 티끌은 체가 없지만 일체 시방에 모두 통하는데, 이 시방은 온전히 티끌의 시방이다. 이런 까닭으로 멂이 항상 가까움이다.
그러나 시방이 비록 멀지만 단지 이 티끌 본성의 시방이다. 설사 불가설세계(不可說世界)를 뛰어 넘었다 하여도 역시 티끌의 본성을 나오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티끌을 헤아림은 체가 없어 허공계와 같아서 넘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 시방은 오직 티끌의 본성이 나타난 것이다.
또 비록 이것을 떠나서 시방에 이를 때에도 또한 이 티끌을 보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티끌은 체가 없으므로 말미암아 현상이 진리를 따라서 원융(圓融)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티끌의 본성이 일체에 두루 할 때 티끌의 현상도 똑같이 나타난다.
이것은 한 티끌 가운데 일체가 나타나지만 가까움과 멂이 이것과 저것에 분명하다. 시방이 하나의 티끌 가운데로 들어가는데 멀지만 항상 가까움이며, 티끌이 시방에 두루 하므로 가까운 것이지만 항상 멂이다. 티끌과 시방세계, 가까움과 멂이 한꺼번에 나타나기 때문에 별도로 다름이 없다. 생각해 보라.
五明純雜者。謂塵無生。即一切法皆無生是純。即塵無生義中。具含理事。亦空亦色亦菩提亦涅槃等是雜。理不礙事。純恒雜也。事恒全理。雜恒純也。由理事自在。純雜無礙也
5. ‘순일(純一)함과 섞임[雜]을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은 생기는 것이 없음으로 곧 일체법이 모두 생기는 것이 없는 순일함이다. 티끌의 생기는 것이 없는 뜻 가운데는 진리와 현상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므로 또한 공이며, 색이며, 또한 보리(菩提)이며, 열반(涅槃) 등인 것이 섞임[雜]이다. 진리가 현상을 장애하지 않으므로 순일함이 항상 섞임이며, 현상이 온전히 진리이므로 섞임은 항상 순일함이다. 진리와 현상이 자재하므로 순일함과 섞임이 걸림이 없다.
六融念劫者。如見塵時。是一念心所現。此一念之心現時。全是百千大劫。何以故。以百千大劫由本一念方成大劫。既相成立。俱無體性。由一念無體。即通大劫。大劫無體。即該一念。由念劫無體。長短之相自融。乃至遠近世界。佛及衆生。三世一切事物。莫不皆於一念中現。何以故。一切事法。依心而現。念既無礙。法亦隨融。是故一念即見三世一切事物顯然。經云。或一念即百千劫。百千劫即一念
6. ‘찰라[念]와 겁[劫]을 통함’은 예컨대, 티끌을 볼 때, 이것은 일념(一念)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이 일념의 마음이 나타날 때가 온전히 백천대겁(百千大劫)이다.
무슨 까닭인가? 백천대겁은 본래 일념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대겁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미 서로 이루어졌으므로 모두 체가 없다. 일념은 체가 없으므로 말미암아 바로 대겁에 통하고, 대겁도 체가 없으므로 바로 일념을 통한다. 일념과 겁에는 체성이 없으므로 길고 짧은 것에 스스로 융통하며, 나아가 멀고 가까움의 세계, 부처와 중생, 삼세(三世)의 일체 사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념 가운데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현상의 법은 마음에 의하여 나타나기 때문이다. 찰라가 이미 걸림 없으므로 법도 또한 따라서 융통한다. 이런 까닭으로 일념에 바로 삼세의 일체 사물이 나타남을 보는 것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일념이 곧 백천겁이며, 백천겁이 곧 일념이다”라고 하였다.
七了一多者。如塵自相是一。由自一不動。方能遍應成多。若動自一。即失遍應。多亦不成。一二三皆亦如是。又一多相由成立。如一全是多。方名為一。又多全是一。方名為多。多外無別一。明知。是多中一。一外無別多。明知。是一中多。良以非多。然能為一多。非一然能為多一。以不失無性。方有一多之智。經云。譬如算數法從一增至十。乃至無有量。皆從本數起智慧無差別
7. ‘하나[一]와 여럿[多]을 이해함’은 예컨대, 티끌 스스로의 모습은 하나이니, 스스로의 하나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두루 응할 수 있어 여럿을 이루게 된다. 만약 움직인다면 스스로의 하나를 바로 잃게 되어 두루 응하는 여럿도 또한 이루지 못하게 된다. 1ㆍ2ㆍ3 모두 역시 이와 같다.
또 하나와 여럿이 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예컨대 하나는 온전한 여럿이라야 바야흐로 하나라 하는 것이며, 또 여럿은 온전히 하나라야 비로소 여럿이라고 하니, 여럿을 떠나서 따로 된 하나는 없다. 여럿 가운데 하나이므로 하나를 떠나서 따로 여럿이 없음을 분명히 알 것이며, 하나 가운데 여럿임을 분명히 알라. 참으로의 여럿이 아니지만 하나인 여럿이 될 수 있고, 하나가 아니지만 여럿인 하나가 될 수 있다. 자성이 없음을 놓치지 않아야만 바야흐로 하나와 여럿의 지혜가 있게 된다.
경에서 이르기를 “비유하면 산수법(算數法)과 같아서 하나(一)에서부터 더해나가 열(十)에 이르고 나아가 헤아림이 있지 않는 데에 다다름이 모두 근본수(根本數)로부터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에 지혜에는 차별이 없다”라고 하였다.
八會通局者。謂塵之小相是局。即相無體是通。今無邊剎海。常現塵中乃通恒局。一塵全遍剎海乃局恒通又不壞小而容大。即不思議。一塵廣容佛剎。不泯大而居小。即不思議。佛剎海常現塵中。是為通局無礙也
8. ‘통함[通]과 국한됨[局]을 회통(會)함’은 이를테면, 티끌의 작은 모습은 국한됨이고, 바로 모습이 체가 없음은 통함이다. 지금 그지없는 땅과 바다가 티끌 가운데 항상 나타나므로 통함이 항상 국한됨이며, 한 티끌이 땅과 바다에 온전히 두루 하므로 국한됨이 항상 통함이다. 또 작은 것을 무너뜨리지 않고서 큰 것을 받아들임으로 불가사의한 하나의 티끌이 부처님의 땅과 바다를 널리 받아들인다. 큰 것을 없애지 않고서 작은 것에 머물러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땅과 바다가 항상 티끌 가운데 나타난다. 이것이 ‘통함과 국한됨이 걸림 없음’이다.
九明卷舒者。謂塵無性舉體全遍十方是舒。十方無體隨緣全現塵中是卷。經云。以一佛土滿十方。十方入一亦無餘。今卷則一切事於一塵中現。若舒則一塵遍一切處即舒常卷。一塵攝一切故。即卷常舒。一切攝一塵故。是為卷舒自在也
9. ‘맒[卷]과 펼침[舒]을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은 자성이 없어 체가 온전히 시방에 두루 한 것이 펼침이고, 시방은 체가 없어 연을 따라 온전히 티끌 가운데 나타난 것이 맒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하나의 부처 국토가 시방에 가득하며, 시방이 한 국토에 들어가는데 남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맒은 곧 일체의 현상이 한 티끌 가운데 나타나고, 펼침은 곧 한 티끌이 모든 곳에 두루 한다. 바로 펼침이 항상 맒이니 한 티끌이 일체를 거두는 까닭이다. 바로 맒이 항상 펼침이니 일체가 한 티끌을 거두기 때문이다. 이것이 ‘맒과 펼침이 자재함’이다.
十總圓融者。謂塵相既盡惑識又亡。以事無體故。事隨理而圓融。體有事故。理隨事而通會。是則終日有而常空。空不絕有。終日空而常有。有不礙空。然不礙有之空。能融萬像。不絕空之有。能成一切。是故萬像宛然。彼此無礙也
10. ‘원융함을 총합함’은 이를테면, 티끌의 모습이 이미 다하면 미혹한 알음알이[識]도 없어진다. 현상은 체가 없음으로써 현상이 진리를 따라서 원융하며, 체에는 현상이 있으므로 진리는 현상을 따라서 통하여 모인다. 이것은 곧 때가 다하도록 유(有)이며 항상 공이다. 공(空)은 유(有)를 끊어버리지 않으니 때가 다하도록 공이며 항상 유이다. 유는 공에 걸림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유에 걸림이 되지 않는 공이 만 가지 모양을 융합할 수 있고, 공을 끊지 않은 유가 일체를 이룰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만 가지 모양이 분명하여 이것과 저것에 걸림이 없다.
然上諸義鎔融之勢。因無性以得通。任運之形。因緣起而得會。一多全攝窺一塵。所以頓彰。彼此相收瞻纖毫以之齊現。良以心通則法門自在。義顯則大智由成。尋之者詎究其源。談之者罕窮其奧。任運之用。何可稱哉
그러나 이상의 모든 뜻에서 녹이고 융합하는 형세(形勢)는 자성이 없으므로 인하여 통할 수 있고, 마음대로 운용하는 형태는 연기(緣起)로 인하여 모을 수 있다. 하나와 여럿을 온전히 거두므로 하나의 티끌을 살펴보면 단박에 드러나는 까닭에 이것과 저것이 서로 거두므로 가는 터럭을 바라보면 나란히 나타난다.
진실로 마음으로써 통하면 법문(法門)이 자재하고, 뜻을 드러내면 곧 크나큰 지혜가 이루어진다. 찾는 자여! 어찌 근원을 궁구하고, 말하는 자는 깊은 뜻을 끝까지 다하여, 마음대로 운용하는 일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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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의해백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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體用顯露門第五
제5. 체(體)와 용(用)을 드러내는 부문
夫法體圓通眞源滿徹。顯則十方洞鑒示。乃一切咸彰。指微塵以覩玄宗。舉纖毫而觀佛境
대저 법의 체는 원융하게 통하고, 진리의 근원은 빈틈없이 통한다. 나타나면 곧 시방을 밝게 비추고, 나타냄에 일체가 모두 드러나니, 작은 티끌을 꼭 집어서 현묘한 가르침을 보이고, 가는 터럭을 거론(擧論)하여 부처의 경계를 관찰한다.
今達妄開真。略分十義
여기서는 허망을 알고 진실을 열어 보이는데, 대략 열 가지 뜻으로 나눈다.
一顯光明 二了境智 三明生了因 四明佛境 五辨因果
六明佛性 七表性德 八自心現 九出世間 十托生解
1. 광명을 드러내다. 2. 경계와 지혜를 이해하다.
3. 생인과 요인을 밝히다. 4. 부처 경계를 밝히다.
5. 인과를 말하다. 6. 불성을 밝히다.
7. 성품의 덕을 나타내다. 8. 자기의 마음이 나타낸 것임을 밝히다.
9. 세간에서 벗어나다. 10. 사물에 의탁하여 이해를 내다.
初顯光明者。謂見塵中法界真如理事之時。顯了分明。此是智慧光明照也。若無智光。則理事不顯。但見法時。是心光明。由積智功圓。是故放一光明。則法界無不顯示。常觀察一切法界。是為放光明照一切也
1. ‘광명을 드러냄’은 이를테면, 티끌 가운데 있는 법계ㆍ진여ㆍ진리와 현상을 볼 때, 드러남이 분명한데 이것은 지혜의 광명으로 비춘 것이다. 만약 지혜의 광명이 없다면 진리와 현상이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법을 볼 때, 이 마음의 광명뿐이니 쌓아올린 지혜의 공덕이 원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광명을 놓으면 법계가 나타나 드러내지 않음이 없다. 항상 일체의 법계를 관찰하니, 이것은 광명을 놓아 일체를 비추게 되는 것이다.
二了境智者。如一塵圓小事相是世諦。了塵無生無性是眞諦。彼眞俗二諦。是所依之境。此貫達之心。是能依之智。此智於境。無復能取所取二種分別。何以故。今智由法成時。方得言智。離法則無能分別之智。法由智顯時。方得言。法離智亦無所分別之境。以心智寂故。雖流照而常安。由法隨緣故。雖空寂而恒用
2. ‘경계와 지혜를 이해함’은 예컨대, 한 티끌의 둥글고 작은 현상의 모습이 속제(俗諦)이고, 티끌이 생김이 없는 것이며 자성이 없는 것임을 이해한 것은 진제(眞諦)이다. 저 진제와 속제의 두 가지 진리는 의지하는 경계이고, 이 꿰뚫어 통달하는 마음은 의지할 수 있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경계에 대하여 다시 능취(能取-능동으로 동작하여 취하는 것)와 소취(所取-움직이는 것으로서 동작을 취하는 것)라는 두 가지 분별이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지혜가 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므로 비로소 지혜라고 말할 수 있다. 법을 떠나면 곧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없고, 법이 지혜로 말미암아 드러날 때 비로소 법이라 말할 수 있다. 지혜를 떠나면 또한 분별할 경계가 없고, 마음의 지혜가 공적하므로 비록 비추지만 항상 평안하고, 법이 연을 따르기 때문에 비록 공적한 까닭으로 비록 널리 비추지만 항상 평안하고, 법이 연을 따르는 까닭으로 말미암아 비록 공적(空寂)하지만 항상 작용한다.
三明生了因者。謂塵體空寂緣起法界之義。由智方顯。是了因。見塵體已修於解行。生起力用。是生因。然生即無生。還同法體。了亦非了。豈等緣生。生之與了。無有差別。生則約行。了則據體。無體即體。了則無生。體即無體。生還為了。契同一際。無所分別
3. ‘생인(生因)과 요인(了因)을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의 체는 공적한 연기법계라는 뜻인데, 지혜로 말미암아 비로소 드러난 것이 요인(了人)이다. 티끌의 체를 보고 나서 이해와 행에 대하여 닦아 작용하는 힘을 일으키는 것은 생인(生因)이다.
그런데 생김은 이 곧 생김이 없음이니 도리어 법의 체와 같고, 요인 또한 요인이 아닌데 어찌 연이 생기는 것과 같겠는가? 생인과 요인은 차별이 없으니, 생인은 행의 측면이며, 요인은 체를 근거로 한 것이다. 체가 없음이 바로 체이므로 요인은 곧 생인이 없고, 체는 곧 체가 없음이기 때문에 생인이 도리어 요인이다. 틀림없이 서로 꼭 들어맞아 동일한 것이므로 분별할 것이 없다.
四明佛境者。謂塵體不可得。此不可得。是佛得塵相無分齊無可依。此無依。是佛依塵體不生。此不生是佛生塵無分別。是佛分別。由無得無依無生。方能建立一切法。又塵全見更不可見乃至不可聞。皆是佛見聞。經云。所見不可見。所聞不可聞
4. ‘부처 경계를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의 체는 얻을 수 없는데, 이 얻을 수 없는 것이 부처의 얻음이다. 티끌의 모습은 영역이 없고 의지함이 없는데, 이 의지함이 없는 것이 부처의 의지함이다. 티끌의 체는 태어남도 없는데, 이 태어남이 없는 것이 부처의 태어남이다. 티끌은 분별이 없는데, 이것이 부처의 분별이다.
얻음도 없고 의지함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으므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일체의 법을 만들어 세울 수 있다. 또 티끌을 온전히 봄에 다시 볼 수가 없으며, 나아가서 들을 수 없음 이르기까지 모두 부처님의 보고 들음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보는 것도 볼 수 없으며, 듣는 것도 들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五辯因果者。塵即是緣起事相現前為因。即事體空不可得是果。果不異因。全以因滿稱為果也。由因不異果。全以果圓稱之為因也。若因不得果。果亦非果也。若果不得因。因亦非因也。皆同時成立無別異故。是故初發心時。便成正覺。成正覺已。乃是初心。經云。初發心時便成正覺。悉與三世諸如來等
5. ‘인과(因果)를 말함’은 티끌이 바로 연을 일으키어 현상의 모습으로 앞에 나타난 것이 인(因)이고, 바로 현상의 본체는 공하여 얻을 수 없는 것이 과(果)이다. 과는 인과 다르지 않으므로 온전히 인이 가득한 것을 과(果)라 하고, 인은 과와 다르지 않으므로 온전히 과가 원만한 것이 인이다. 만약 인이 과를 얻지 못한다면 과 또한 과가 아니다. 만약 과가 인을 얻지 못한다면 인 또한 인이 아니다. 모두 동시에 이루어지니 구별에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처음 마음을 낼 때 곧 바로 정각을 이루는 것이며, 정각을 이루고 나서 처음 마음을 내는 것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처음 마음을 낼 때에 곧 바로 정각을 이루니, 모두 삼세의 모든 여래와 더불어 똑같다”라고 하였다.
六明佛性者。謂覺塵及一切法。從緣無性名為佛性。經云。三世佛種。以無性為性。此但一切處。隨了無性即為佛性。不以有情故有。不以無情故無。今獨言有情者。意在勸人為器也。常於一塵一毛之處。明見一切理事。無非如來性。是開發如來性起功德名為佛性也
6. ‘불성(佛性-부처 성품)을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 및 일체의 법은 연을 따른 것이므로 자성이 없음을 깨달은 것을 불성(佛性)이라 한다.
경에서 이르기를 “삼세의 부처 종자는 자성이 없는 것으로 성품(性品)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단지 모든 곳에 자성이 없음을 이해함을 따라서 부처 성품을 삼은 것일 뿐이지, 유정물(有情物)이므로 부처 성품이 있고 무정물(無情物)이기 때문에 부처 성품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오직 유정물만을 말한 것은 사람들에게 권하여 근기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항상 하나의 티끌, 하나의 터럭에서 일체의 진리와 현상을 분명히 보면 여래 성품 아님이 없다. 여래 성품을 일으키는 공덕을 열어내는 것을 불성(佛性-부처 성품)이라 한다.
七表性德者。
7. ‘성품의 덕을 나타냄’은
問塵是有耶。答是非有之有。如水月鏡像。經云。非有是有。
<질문> 티끌은 있는 것인가?
<대답> 있지 않으면서 있는 것이니, 물에 비친 달. 거울 속에 비친 모습과 같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있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塵是無耶。答是有之非有空無性也。經云。有是非有。
<질문> 티끌은 없는 것인가?
<대답> 있으면서 없는 것이니, 공이어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있는 것이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塵是亦有亦無耶。答從緣生故有。無自性故空。空有一際自在成也。論云。以有空義故。一切法得成。
<질문> 티끌은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한 것인가?
<대답> 연을 따라 생긴 까닭으로 있는 것이고, 자성이 없어 공인 까닭에 공(空)과 유(有)가 하나로써 자재하게 이루어진다. 논(論)에서 이르기를 “공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일체의 법을 이룰 수 있다”라고 하였다.
問塵是非有非無耶。答有相空相俱不可得也。互相奪盡。無所成立。今此性德。但無執著。不礙分別。論云。若因有與無亦遮亦應。聽離言心不著。是則無有過
<질문> 티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대답> 유의 모습과 공의 모습 둘 다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서로 빼앗아 버리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이 성품의 공덕은 단지 집착이 없는 것이지만 분별에 걸림이 되지 않는다.
논(論)에서 “만약 유와 무로 인한다면 가로막기도 하고 또한 응하여 듣기도 하는데, 말을 여의고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면 허물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八明自心現者。如見此塵時是自心現也。今塵既由心現。即還與自心為緣。終無心外法。而能為心緣。以非外故。即以塵為自心現也。離心之外。更無一法。縱見內外。但是自心所現。無別內外。此無過也
8. ‘자기의 마음이 나타낸 것을 밝힘’은 예컨대, 티끌을 볼 때에 이것은 자기의 마음이 나타낸 것이다. 티끌이 이미 마음에서 나타났으므로 말미암아 도리어 자기의 마음과 더불어 연이 된다. 결국 마음 바깥에는 법은 없으며 마음이 연이 된다. 밖이 아닌 까닭에 바로 티끌로써 자기의 마음이 나타낸 것이다. 마음을 떠난 바깥에는 다시금 한 법도 없다. 설사 안과 밖을 볼지라도 단지 자기의 마음이 나타낸 것이니 달리 안과 밖이 없다. 이것은 잘못이 없다.
九出世間者。謂見塵色相作實解。即為處世間。今塵相空無所有。是出世間也。經云。三世五蘊法說名為世間。斯由虛妄有。無分別則出世間也
9. ‘세간에서 벗어남’은 이를테면, 티끌의 색상(色相)을 보고 실제(實際)라고 이해하면, 세간의 처지가 된다. 티끌의 모습을 공하여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면, 세간에서 벗어난 것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삼세의 오온법(五蘊法)을 세간이라 한다. 이는 허망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니, 분별이 없으면 곧 세간에서 벗어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十托事生解者。如見塵相。是事於事處貫達。即無生之理現前。是謂托事生解也。又別托外物以表此法。表塵法自在故。以塵表之顯法潤益故。以雲雨表之。顯塵性德深廣故。以海表之。如是無量。更有所表。各異。以智推之
10. ‘사물에 의존하여 이해함’은 이를테면, 티끌의 모습이 현상임을 보고 현상이 있는 곳에서 꿰뚫어 이해하여, 바로 생기는 것이 없는 이치가 앞에 나타난 것을 ‘사물에 의존하여 이해함’이라 한다. 또 바깥 사물에 특별히 의존하여 이러한 법을 나타내기도 한다. 티끌의 법이 자재함을 나타내는 까닭에 티끌로써 나타내고, 법이 늘어남을 나타내는 까닭으로 구름과 비로써 나타내고, 티끌의 성품의 공덕이 깊고 넓음을 나타내는 까닭으로 바다로써 나타내니, 이와 같은 것이 한량없다. 다시금 나타내는 것이 각각 다르니, 지혜로써 미루어 생각해 보라.
然上諸義。惑盡智生相亡體顯。差別緣起。方騰性海之波。一味眞源。用顯隨緣之鏡。會眞之道失。何遠哉
그러나 이상의 모든 뜻은, 미혹이 사라지면 지혜가 생기고, 모습이 없어지면 체가 나타난다. 차별된 연을 일으키는 것이 바야흐로 본성의 바다의 파도에서 일어나고, 한 가지 맛인 참된 근원이 연을 따르는 거울에 작용하여 나타나는데, 참된 길을 만나는 것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
화엄경의해백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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差別顯現門第六
제6. 차별되게 나타나는 부문
夫滿教難思。窺一塵而頓現。圓宗叵測。觀纖毫而頓彰。然用就體分。非無差別之勢。事依理顯。自有一際之形。
대저 가득한 가르침은 생각하기 어렵지만 하나의 티끌만 보아도 문득 나타나고, 원융한 종지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가는 터럭을 관찰하여도 단박 드러난다. 그러나 용의 측면에서 체를 나누면 차별 없는 형세가 아니고, 현상은 진리에 의해 나타난다. 본래 있는 하나의 모습이다.
今且略舉大綱。以顯十義
지금 우선 중요한 것을 간략히 거론하여 열 가지 뜻을 나타낸다.
一明止觀 二開二諦 三出入定 四通性起 五辨六相
六顯帝網 七鑒微細 八通逆順 九定主伴 十登彼岸
1. 지와 관을 밝히다. 2. 이제를 열어 보이다. 3. 삼매에 들고 나오다.
4. 성기를 알아보다. 5. 육상을 드러내다. 6. 제망중중을 나타내다.
7. 미세를 살펴보다. 8. 거스름과 따름을 통하다. 9. 주인과 손님을 정하다.
10. 피안에 오르다.
初明止觀者。如見塵無體空寂之境為止。照體之心是觀。今由以無緣之觀心通無性之止體。心境無二。是止觀融通。由止無體不礙是心故。是以境隨智。而任運。由觀心不礙止境故。是以智隨法而寂靜。由非止觀以成止觀。由成止觀。以非止觀。二而不二。不二而二。自在無礙
1. ‘지(止)와 관(觀)을 밝힘’은 예컨대, 티끌은 체가 없어 공적한 경계로 보면 지(止)이고, 체를 비추는 마음은 관(觀)이다. 지금 이끌림 없이 관찰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자성이 없는 지(止)의 체를 통하면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니어 지와 관이 원융하게 통한다.
지(止)는 체가 없어 관찰하는 마음을 장애하지 않는 까닭으로 경계는 지혜를 따라서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다. 관찰하는 마음이 지의 경계를 장애하지 않는 까닭으로 지혜가 법을 따르지만 아주 고요하고 고요하다.
지(止)와 관(觀)이 아님으로 말미암아 지와 관을 이루고, 지와 관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지와 관이 아니다. 둘이지만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니지만 둘이어서 자재함에 걸림이 없다.
二開二諦者。謂如見塵相圓小。幻有現前。是世諦。了塵無體。幻相蕩盡。是眞諦。今此世諦之有。不異於空相。方名世諦。又眞諦之空。隨緣顯現。不異於有相。方名眞諦。又空依有顯即世諦。成眞諦也。由有攬空成。即眞諦成俗諦也。由非眞非俗。是故能眞能俗。即二而無二。不礙一二之義歷然。經云。於解常自一。於諦常自二。通達此無礙。眞入第一義
2. ‘이제(二諦)를 열어 보임’은 이를테면, 티끌의 모습을 보고 둥글고 작은 환(幻)으로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 속제(俗諦)이고, 티끌의 체가 없음을 이해하여 환(幻)의 모습이 없어진 것은 진제(眞諦)이다.
지금 이 속제의 유(有)가 공(空)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야 비로소 속제라고 한다. 또 진제의 공이 연을 따라 나타나서 유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야 비로소 진제라고 한다. 또 공은 유를 의지하여 나타나므로 바로 속제 그대로 진제를 이루고, 유는 공을 잡아서 이루어지므로 바로 진제 그대로 속제를 이룬다.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기 때문에 진제일 수 있고 속제일 수 있다. 바로 둘이면서 둘이 아니고, 하나와 둘이 장애하지 않는 뜻이 분명하다.
경에서 이르기를 “이해의 측면에서는 항상 본래 하나이지만, 진리의 측면에서는 항상 본래 둘인 것이다. 이러한 걸림 없음을 통달하면 참으로 제일의(第一義)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三出入定者。謂見塵性空。即是十方一切眞實之理。名為入定也。然見此塵無性空理之時。乃是十方之空也。何以故。由十方之心。見於一塵。是故全以十方為塵。定亦不礙事相宛然。是起然起之與定俱等虛空界。但以一多融通同異無礙。是故一入多起。多入一起。差別入一際起。一際入差別起。悉皆同時一際成立。無有別異。當知。定即起起即定。一與一切同時三昧起。一切塵中入正受。一毛端頭三昧起
3. ‘삼매에 들고 나옴’은 이를테면, 티끌의 본성이 공적함을 보고 바로 시방 일체의 진실한 진리를 보는 것을 ‘삼매에 든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 티끌이 자성이 없어 공한 진리임을 볼 때, 시방이 공한 까닭은 무엇인가? 시방의 마음으로 하나의 티끌을 보기 때문이니, 이런 까닭으로 온전히 시방으로서 티끌의 삼매가 된다.
또한 현상의 모습이 분명하여 장애하지 않는 것이 삼매에서 일어남이다. 그런데 삼매에서 일어남이 모두 허공계와 같다. 단지 하나와 여럿이 융통하므로 같고 다름에 걸림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하나에서 들어가 여럿에서 일어나고 여럿에서 들어가 하나에서 일어나며, 차별로 들어가 같은 곳에서 일어나고 같은 곳에서 들어가 차별에서 일어나니, 모두 다 동시이며 한꺼번에 이루어져 다름이 없다.
마땅히 알라. 선정에 들어감이 바로 선정에서 나옴이고, 선정에서 나옴이 바로 선정에 들어감이며, 하나와 일체가 동시에 삼매에서 일어나며, 일체의 티끌 가운데에서 바른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삼매에 들고, 하나의 터럭 끝에서 삼매가 일어나는 것임을.
四通性起者。謂塵體空無所有。相無不盡。唯一眞性。以空不守自性。即全體而成諸法也。是故而有萬像繁興。萬像繁興而恒不失眞體一味。起恒不起。不起恒起。良以不起即起。起乃顯於緣生。起即不起。不起乃彰於法界。是故此塵即理即事即滅即生。皆由不起而起也。此塵亦空理亦壞亦隱。由起而不起。是故終日繁興。而無施設也
4. ‘성기(性起)를 알아봄’은 이를테면, 티끌의 본체는 공하여 있는 것이 없으며, 모습이 다하지 않음이 없어 오직 하나의 참된 성품일 뿐이다.
공은 자성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바로 온전한 본체이며 모든 법을 이룬다. 이런 까닭으로 만 가지 모양이 무성하게 일어난다. 만 가지 모양이 무성하게 일어나나 항상 참된 체의 한 가지 맛을 잃지 않는다. 일어나지만 항상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지 않지만 항상 일어난다.
진실로 일어나지 않음이 바로 일어남으로써 일어남은 연이 생겨남으로 나타나고, 일어남이 바로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지 않음이 법계에 뚜렷하다. 이런 까닭으로 이 티끌은 진리 그대로이고, 현상 그대로이며, 사라짐 그대로이고 생겨남 그대로여서 모두가 일어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이 티끌은 또한 공하므로 진리가 무너지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일어나지 않는 까닭으로 종일토록 무성하게 일어나되 베풀어 차리는 것이 없다.
五顯六相者。今塵全以理事解行教義以成緣起。此為總也。由塵總義現前。方於塵處。辨體用解行教義。各各差別。是別也。此一塵處所辨諸義。各各無性。互不相違。是同也。此一塵處。諸義體用性相各各差別。是異也。此一塵處。諸義現前塵法方立。是成也。此一塵處。諸義各各顯自性相終不相成相作。是壞也。一切諸法。皆具此六相。緣起方成。若不如此。則失六義也
5. ‘육상(六相)을 드러냄’은 지금 티끌이 온전히 진리ㆍ현상ㆍ이해ㆍ실행ㆍ가르침ㆍ뜻으로 연기(緣起)를 이루는 것이 총상(銃相)이다. 티끌의 총상의 뜻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티끌에서 본체ㆍ현상ㆍ이해ㆍ실행ㆍ가르침ㆍ뜻을 각각 차별되게 구별한 것이 별상(別相)이다. 이 하나의 티끌에서 구별한 모든 뜻이 각각 자성이 없어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 동상(同相)이다. 이 하나의 티끌의 모든 뜻인 본체ㆍ작용ㆍ본성ㆍ모습이 각각 차별된 것이 이상(異相)이다. 이 하나의 티끌의 모든 뜻이 앞에 나타남에 티끌의 법이 비로소 세워지는 것이 성상(成相)이다. 이 하나의 티끌의 모든 뜻이 각각 자성의 모습을 나타내어 끝에는 서로 이루고 서로 만들지 않는 것이 괴상(壞相)이다.
일체의 모든 법이 다 이러한 여섯 가지 모습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연기(緣起)가 바야흐로 이루어진다. 만약 이와 같지 않으면 여섯 가지의 뜻을 잃게 된다.
六顯帝網者。謂塵無體。顯現一切緣起理事。菩提涅槃教義。及解行等。由此諸義無性。理通十方。圓明一際。或一現一。或一現一切。或一切現一。或一切現一切。四句同時。一際顯然。重重無盡。自在現也。如帝釋殿珠網。重重互現無盡。論云。帝網差別。唯智能知。非眼境界
6. ‘제망중중(帝網重重)을 나타냄’은 이를테면, 티끌은 실체가 없지만 일체의 연기(緣起)ㆍ이사(理事)ㆍ보리(菩提)ㆍ열반(涅槃)ㆍ교의(敎義) 및 해행(解行) 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뜻은 자성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진리는 시방에 통하여 원만하고 분명한 하나의 진리이다. 어떤 때는 하나가 하나를 나타내고, 어떤 때는 하나가 일체를 나타내며, 어떤 때는 일체가 하나를 나타내고, 어떤 때는 일체가 일체를 나타낸다.
네 가지 문구(文句)가 동시라서 한결 같이 드러나므로 거듭거듭 다함이 없이 자재하게 나타난다. 마치 제석천의 보배 그물이 거듭거듭 다함이 없는 것과 같다.
논에서 이르기를 “제석천의 보배 그물의 차이와 다름은 오직 지혜로만 알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七鑒微細者。謂此塵及十方一切理事等。莫不皆是佛智所現。即此佛智所現之塵。能容持一切剎海事理教義。無不具足。所以然者。由十方差別雖多。恒是一塵之十方。一塵雖小。恒是該通一切之塵。是故顯現。無有先後。不礙差別。遠近宛然。經云。微細世界中。容受大世界。境界無不了。智慧山王行。又云。於一塵中。普現三世一切佛剎等。又云。乃至一塵一毛一世界一佛一衆生等。皆如是頓顯故
7. ‘미세(微細)하게 살펴봄’은 이를테면, 이 티끌 및 시방의 일체 진리와 현상 등은 모두 부처 지혜에서 나타낸 것 아님이 없다. 바로 이 부처 지혜에서 나타난 것인 티끌이 능히 일체 국토와 바다의 현상ㆍ진리ㆍ가르침ㆍ뜻을 받아들여 지닐 수 있어 다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시방에 차별이 비록 많지만 항상 하나의 티끌의 시방이고, 하나의 티끌이 비록 작지만 항상 일체 티끌에 모두 통하는 까닭에 나타남에 앞과 뒤가 없고, 차별에 걸림이 없고, 멀고 가까움이 분명하다.
경에서 이르기를 “미세한 세계 가운데에서 큰 세계를 받아들이어 경계를 이해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지혜산왕(智慧山王-부처님)의 행(行)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하나의 티끌 가운데에서 삼세의 일체 부처님 국토 등을 두루 나타낸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하나의 티끌ㆍ하나의 터럭ㆍ하나의 세계ㆍ한 부처ㆍ한 중생 등을 나타낸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이와 같이 단박 나타내기 때문이다.
八通逆順者。謂舉塵相。不必見理為逆。以塵無體即空為順。由相取不可得。逆則常順。以理不礙事。順則常逆。由事理融通。是以逆順無礙自在用也
8. ‘거스름[逆]과 따름[順]을 통함’은 이를테면, 티끌의 모습을 말함에 반드시 진리를 보지 않는 것이 거스름[逆]이고, 티끌은 체가 없어 공 그대로인 것은 따름[順]이다. 모습을 얻을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거스름이 곧 항상 따름이며, 진리가 현상을 장애하지 않으므로 따름은 곧 항상 거스름이다. 현상과 진리가 융통하므로 말미암아 거스름과 따름이 걸림 없이 자재하게 작용한다.
九定主伴者。謂塵是法界體無分齊。普遍一切。是為主也。即彼一切各各別故是伴也。然伴不異主。必全主而成伴。主不異伴。亦全伴而成主。主之與伴。互相資相攝。若相攝彼此互無。不可別說一切。若相資則彼此互有。不可同說一切。皆由即主即伴。是故亦同亦異。當知。主中亦主亦伴。伴中亦伴亦主也
9. ‘주인[主]과 손님[伴]을 정함’은 이를테면, 티끌 법계의 체는 영역이 없어 일체에 두루 미치는 것이 주인이며, 이런 일체가 각각 다른 까닭으로 손님이다. 그러나 손님은 주인과 다르지 않으므로 반드시 온전히 주인이지만 손님을 이룬다. 또한 주인이 손님과 다르지 않으므로 주인과 손님이 서로 돕고 서로 거둔다. 만약 서로 거두면 피차가 서로를 없어 일체를 다르게 말할 수 없고, 만약 서로 돕는다면 피차가 서로 있으므로 일체를 같게 말할 수 없으니, 모두 주인 그대로이고 손님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마땅히 알라. 주인 가운데 주인이면서도 또한 손님이며, 손님 가운데 또한 손님이며 또한 주인인 줄을.
十登彼岸者。謂塵名相生滅。是此岸。今了塵名相空寂不生不滅。是彼岸。但以不了為此。了即為彼。依了不了邊…。寄彼此以言之。經云。菩薩不住此岸。不住彼岸。而能運度衆生於彼岸
10. ‘피안(彼岸)에 오름’은 이를테면, 티끌의 이름과 모습이 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차안(此岸)이다. 지금 티끌의 이름과 모습이 공적하여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음을 이해하여 안 것이 피안(彼安)이다. 단지 이해하여 알지 못하면 차안이 되고 이해하여 알면 피안이 된다. 이해하여 알았는지 이해하여 알지 못했는지에 의거하고, 피차라는 것에 의존하여 말한 것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보살은 차안에도 머물지 않고 피안에도 머물지도 않지만, 중생을 피안으로 실어 나를 수 있다”라고 하였다.
然上諸義體無別異。舉則全彰。理不殊途。談皆頓顯。良以二邊…相盡差別體融。隨智卷舒。應機屈曲。是故言起。即起誰云路之不通。舉多即多。孰談法之無在。自非逈超特達捿心物表之者。焉能了此乎
그러나 이상의 모든 뜻에서 체는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없으므로 체를 들어 보이면 온전히 나타나며, 진리는 그것 말고 다른 길이 없으므로 진리를 말하면 모두가 단박 드러난다. 진실로 양변(兩邊)의 모습을 다한다. 차별된 체를 융통하므로 지혜를 따라 말고 펄치며, 근기에 응하여 굴곡(屈曲) 한다.
이런 까닭으로 일어남을 말하면 바로 일어남에 누가 길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여럿을 말하면 바로 여럿인데 누가 법이 없다고 이야기 하는가? 스스로 멀리 뛰어넘고 특별하게 통달하여서 마음에 기대어 사물을 나타내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여 알 수 있겠는가?
화엄경의해백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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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學嚴成門第七
제7. 닦고 배워서 장엄을 이루는 부문
夫菩提大寶性起靈珠。既琢既磨。資智慧。而觀察為調為舒。藉解行以嚴成。
대저 보리의 큰 보배와 성기(性起)의 신령스런 구슬을 다듬고 갈았으니, 지혜를 의지하여 관찰하고, 고르고 폈으니 이해와 행을 빌려 장엄을 이룬다.
今總舉大綱粗分十義
지금은 총괄적으로 중요한 것을 들어 열 가지 뜻으로 나눈다.
一法供養 二弘六度 三修解行 四常莊嚴 五明智慧
六崇善根 七了夢幻 八曉鏡像 九達五蘊 十不共法
1. 법공양을 밝히다. 2. 육바라밀을 널리 펼치다. 3. 이해와 실행을 닦다.
4. 항상 장엄하다. 5. 지혜를 밝히다. 6. 선근을 받들다.
7. 환과 꿈임을 이해하다. 8. 거울 속의 영상임을 깨닫다. 9. 오온을 이해하다.
10. 불공법을 밝히다.
初法供養者。謂以無生心中施一切珍寶。乃至微塵。皆能攝於法界。即以此法界一塵。而作供養。以此供養。乃至遍通三世一切諸如來前。無不顯現。彼諸如來。無不攝受。何以故。由塵即攝法界。是理與佛體性。法界相應是故遍至一切佛所。名廣大供養。無空過者。經云。諸供養中法供養勝
1. ‘법공양을 밝힘’은 이를테면, 생김이 없는 마음으로 일체의 진귀한 보배와 작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베풀어 주면 모두 법계에서 거둘 수 있으니, 바로 이 법계의 하나의 티끌로써 공양을 하는 것이다. 이 공양으로써 삼세의 일체 모든 여래 앞에 두루 통하여 나타나지 않음이 없으며, 저 모든 여래가 섭수하지 않음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티끌이 법계를 섭수하는 이치는 부처 체와 성품과 법계와 더불어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두루 일체 부처 처소에 이르는 것을 이름 하여 ‘광대한 공양에는 헛되이 보냄이 없다’라고 한다.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공양 가운데 법공양이 가장 뛰어나다”라고 하였다.
二弘六度者。如見塵緣起無盡。理事中說。施一切眾生。是檀波羅蜜。又塵相空無。即無非可防。無惡可斷。是尸羅波羅蜜。又塵相空無所有。則緣心不起。息諸惱害。是羼提波羅蜜。又塵無體時執心自盡。離於妄念。是精進波羅蜜。經云。若能心不妄。精進無有涯。又以塵無性。心亦自寂。是禪波羅蜜。經云。不見心相。是名正定。又塵緣起無生無相空寂之理。是智慧波羅蜜。經云。色不生。是般若波羅蜜。生常以如理六度。修明其心。亦不礙事六度。饒益衆生理事不二。為實行也。不以理中具六而礙事六。但了事為理也
2. ‘육바라밀을 널리 펼침’은 예컨대, 티끌을 봄에 연기(緣起)의 다함이 없는 진리와 현상 가운데에서 일체중생에게 말하여 베푸는 것이 보시(布施)바라밀이다. 또 티끌의 모습이 공하여 없으므로 막을 것이 없고, 악을 끊을 것이 없음이 지계(持戒)바라밀이다. 또 티끌의 모습은 공하여 있는 것이 없으므로 마음에 이끌림이 일어나지 않고 모든 뇌(惱)와 해(害)를 쉬는 것이 인욕(忍辱)바라밀이다. 또 티끌의 체가 없을 때 집착하는 마음이 저절로 다하여 허망한 생각을 여의는 것이 정진(精進)바라밀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만약 마음이 망령되지 않을 수 있다면 정진에는 끝이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또 티끌은 자성이 없으므로 마음 또한 스스로 고요한 것이 선정(禪定)바라밀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마음의 모습을 보지 않는 것을 바른 삼매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또 티끌은 연기(緣起)이고 생김이 없음이고 모습이 없음이므로 공적한 진리가 지혜(智慧)바라밀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물질을 내지 않는 것에서 반야바라밀이 나온다.”라고 하였다.
항상 진리에 맞는 육바라밀로 그 마음을 닦아 밝히고 또한 현상에도 걸림이 없는 육바라밀로 중생을 요익하게 하니, 진리와 현상이 둘이 아님이 참된 행이 된다. 진리 가운데 갖추어진 육바라밀이 현상의 육바라밀을 장애하지 않으므로 단지 현상이 진리가 됨을 이해하여 알 뿐이다.
*뇌(腦): (1) 俱舍宗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집착하여 다른 이의 용서를 받지 않고 스스로 고민하는 심리작용을 말합니다. (2) 唯識宗에서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놀라게 하며 어지럽게 하는 마음
*해(害): (1) 俱舍宗에서는해(害)란 다른 이에게 위해(危害)를 가하고자 하는 심리 작용입니다. (2) 唯識宗에서는 살심으로 상대를 때리거나 결박, 협박하려는 마음작용이다.
三修解行者。謂於塵處。悟達理事色空無性之義。是解也。理解在心。是智也。行通為行。若行心作眞解作俗解。非名解也。不作一切解。解心無寄。是為大解也。又若起心。作凡夫行。作聖人行。亦非行也。不作一切行。行心無寄。是名大行。行非是過。由心起作。解亦非過。由心住著。常無住著希望。乃是眞解行也
3. ‘이해[解]와 행(行)을 닦음’은 이를테면, 티끌에서 진리ㆍ현상ㆍ색ㆍ공이 자성이 없는 뜻을 깨달아 아는 것이 이해이고, 진리가 마음에 있음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행을 통하여 행하게 되는데, 만약 행하는 마음을 지어 진리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에만 머문다면 세간의 이해를 하는 것이므로 이해라 하지 않는다. 일체의 행을 짓지 않아서 행하는 마음이 의존함이 없음이 크게 이해함이다.
또 만약 마음을 일으켜 범부의 행을 짓거나 성인의 행을 짓는다면 역시 행이 아니다. 일체의 행을 짓지 않아서 행하는 마음이 의존함이 없음이 크게 하는 행이다.
행이 그릇되어 잘못된 것은 마음을 일으켜 지었기 때문이고, 이해 또한 그릇되어 잘못된 것은 마음에 머물러 집착하기 때문이다. 항상 머물러 집착하거나 바라는 것이 없음이 참된 이해와 행이다.
四常莊嚴者。如以智心觀察。全塵法界緣起現前無有分別。是為嚴淨佛土。又修戒願理事。解行圓明。全塵法界理智圓通功德顯示。是為莊嚴佛身。又說示塵體緣起主伴帝網。微細曉示一切。是為轉淨法輪。於一切處皆是莊嚴。不礙七寶。以用莊嚴
4. ‘항상 장엄(莊嚴)함’은 예컨대, 지혜의 마음으로 온전한 티끌의 법계연기가 앞에 나타남을 관찰하지만 분별이 없음이 부처 국토를 장엄하여 깨끗하게 함이다.
또 지계ㆍ원력ㆍ진리ㆍ현상ㆍ이해ㆍ행을 닦아 원만하게 밝아져 온전히 티끌 법계의 진리의 지혜가 원만하게 통하고 공덕을 드러내어 나타냄이 부처 몸[佛身]을 장엄함이다. 또 티끌의 체ㆍ연기ㆍ주반ㆍ제망ㆍ미세를 말하여 나타내는데, 일체를 나타내어 보여 알아듣게 일러주는 것이 청정한 법륜을 굴리는 것이 된다. 일체의 곳을 모두 장엄하는데, 일곱 가지 보배를 써서 장엄하는데 걸림이 없다.
五明智慧者。謂塵從緣成假。持似有所現。此達有之心是智。即此假持幻有畢竟空無所有。此觀空之心是慧。若住於空。即失有義。非慧也。若住於有。即失空義。非智也。今空不異有。有必全空。是為智慧也。要由名相不存。方名智慧。若存名相。即非智慧也。由不存即是存。存即是不存也
5. ‘지혜를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은 연으로부터 이루어져 거짓으로 버티고 있는 듯이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유(有)를 이해하여 아는 마음이 지혜(智-작용하는 슬기)이다. 바로 이러한 거짓으로 버티어 환(幻)으로 있는 것은 끝내는 공이므로 있는 것이 없다. 이러한 공을 관찰하는 마음이 혜(慧-근본슬기)이다.
만약 공에만 머물면 바로 유(有)의 뜻을 잃게 되므로 혜(慧)가 아니며, 만약에 유(有)에만 머물면 공의 뜻을 잃게 되므로 지(智)가 아니다.
지금 공은 유와 다르지 않아서 유는 반드시 온전한 공이다. 이것이 지혜인데, 반드시 이름과 모습이 있지 않아야만 바야흐로 지혜라고 한다. 만약 이름과 모습이 존재한다면 지혜가 아닌 것이다. 존재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바로 존재하고 존재함이 바로 존재하지 않음이다.
六崇善根者。謂顯塵是法界涅槃。及以解行。此皆從塵處所顯發。是故即以塵為善根也。常觀察修習。是為於塵處而種善根而長養之。所有一切塵毛剎海。佛及衆生。常應如是也
6. ‘선근(善根)을 받들다’는 이를테면, 티끌은 법계이고 열반이며 이해와 행임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티끌에서 나타나 나온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바로 티끌로써 선근(善根)을 삼는다. 항상 관찰하고 닦고 익히는 것이 티끌에서 선근을 씨를 심고 기르는 것이 된다. 일체에 있는 티끌과 터럭, 국토와 바다, 부처와 중생에 항상 응함이 이와 같다.
七了夢幻者。謂塵相生起迷心為有。觀察即虛。猶如幻人。亦如夜夢。覺已皆無。今了虛無。名不可得。相不可得。一切都不可得。是為塵覺悟空無所有
7. ‘환(幻)과 꿈임을 이해하여 안다’는 이를테면, 티끌의 모습이 생겨 미혹한 마음이 있게 되지만 관찰해 보면 텅 빈 것이다. 마치 헛보이는 사람 같고, 또한 꿈과 같아서 깨고 나면 모두 없다. 이제 텅 비어 없음을 이해하여 알았으니, 이름을 얻을 수 없고 모습도 얻을 수 없으며 일체를 다 얻을 수 없다. 이것이 티끌이 공하므로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八曉鏡像者。謂塵相大小。但似有顯現。畢…竟取不可得。故知。塵即虛無。如鏡中之像。經云。觀察諸法。如電光。如水月鏡中之像。似有非有。取不可得故。以塵空寂不礙假相。宛然於法界中假實二義。但由影像也
8. ‘거울 속의 영상(映像)임을 깨달음’은 이를테면, 티끌 모습의 크고 작음은 단지 거짓으로 있음[似有]이 나타난 것이므로 끝내는 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알라, 티끌이 텅 비어 없음이 거울 속 영상과 같은 것임을.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법을 관찰해 보면, 마치 번개 불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으며, 거울 속 영상과 같아서 있는 것 같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티끌은 공적하지만 거짓 모습이 분명하여 걸림이 없다. 법계 가운데 거짓과 실제의 두 가지 뜻은 다만 영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九達五蘊者。如塵質礙為色。心領納是受。現塵假相於心是想。心緣塵取捨是行。辨了於塵是識。今了塵無體。緣慮自亡。經云。三世五蘊法。說名為世間。斯由虛妄有。無即出世間
9. ‘오온(五蘊)을 이해하여 앎’은 예컨대, 티끌의 성질에 걸림이 있음은 색(色)이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수(受)이고, 티끌의 거짓 모습이 마음에 나타난 것이 상(想)이고, 마음이 티끌에 이끌리어 버리고 취하는 것이 행(行)이며, 티끌을 가려내는 것이 식(識)이다. 이 티끌이 체가 없음을 이해하여 알면, 연으로 인하여 생각하는 것이 저절로 없어진다.
경에서 이르기를 “삼세의 오온법이 세간(世間)인데, 이것은 허망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니, 허망이 없으면 세간에서 벗어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十不共法者。謂二乘凡夫。見塵有相有體。但見一塵。而無自在業用。今則不爾。不與彼同。此要達塵無體證之。以成佛土。依塵修起智慧。莊嚴法身。然小恒容廣大世界。一塵常能普攝一切。是為不共法也
10. ‘불공법(不共法)을 밝힘’은 이를테면, 이승(二乘)의 범부(凡夫)는 티끌을 모습이 있고 체가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티끌만을 볼 뿐 자재한 업(業)의 작용이 없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므로 저들과 같지 않다. 반드시 티끌이 체가 없음을 알고, 그것을 증득하여 부처 땅[佛土]을 이루는 것으로써 티끌에 의지하여 닦아 지혜를 일으키고 법신(法身)을 장엄한다. 그리하여 작은 것이 광대한 세계를 항상 받아들이니, 하나의 티끌에서도 항상 일체를 두루 거둘 수 있다. 이것이 ‘불공법(不共法-다른 것과 같이 하지 않는 법)’이다.
然上諸義體雖空淨。資行願以嚴真性。縱包含依智慧而開顯。是故體稱本有。行約修生。生即不生。還同本體。體亦非體。復等修生。何曾體而礙生。生而失體。得意亡言。千里跬步。豈與夫懵道之子同年而語哉
그러나 이상의 모든 뜻은 체가 비록 공하고 청정하지만 행(行)과 원(願)을 도와서 진리를 장엄하고, 본성이 비록 일체를 포함하고 있지만 지혜를 의지하여 널리 드러난다. 이런 까닭으로 체는 본유(本有-본래 있는 성질의 덕)에 들어맞고, 수행(修行)은 수생(修生-수행한 공력에 의하여 생김)을 따른 것이다.
태어남이 곧 태어남이 아니므로 도리어 체와 같고, 체는 또한 체가 아니므로 다시 수생(修生)과 같은데, 어찌 일찍이 본체가 태어남을 장애하겠는가? 태어나지만 체를 잃지 않으므로 뜻을 얻으면 말을 잃게 된다. 천리가 멀지 않은데, 어찌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와 함께 어울려 말하고 있는가?
화엄경의해백문-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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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治獲益門第八
제8. 대치(對治)하여 이익을 얻는 부문
夫病起藥興。妄生智立。務止啼於楊葉。資靜亂於空業。百非息於攀緣。四句絕於增減。然而悟緣無體。智則自融起用。恒沙無非清淨。
대저 병이 일어나면 약이 흥하고 망념이 생기면 지혜가 서게 된다. 버드나무 잎으로 우는 아이를 힘써 그치게 하고, 허공이 하는 일[空業]을 도와서 어지러움을 고요하게 한다. 모든 그렇지 않은 연에 이끌림을 쉬게 하고, 사구(四句)로는 늘림과 줄임[增減]을 끊는다. 그러나 연에는 체가 없음을 깨달으면 지혜는 곧 저절로 융성하여 작용을 일으키니, 항상 청정하지 않음이 없다.
今略分十義。以明對治
지금 대략 열 가지 뜻으로 나누어 대치(對治)를 밝힌다.
치
一觀十二因緣 二修四威儀 三明三性 四顯教義 五示法輪
六知無常 七入真如 八出魔網 九消藥病 十離解縛
1. 십이인연을 관하다. 2. 사위의를 닦다. 3. 삼성을 밝히다. 4. 가르침과 뜻을 드러내다.
5. 법륜을 보이다. 6. 무상을 알다. 7. 진여에 들어가다. 8. 마의 그물에서 벗어나다.
9. 약과 병을 없애다. 10. 풀고 묶임을 떠나다.
初觀十二因緣者。謂於塵上名相所惑。不了無體。是無明緣。於塵上心計生起。是行緣。於塵上分別之心恒轉流注。是識緣。於塵上妄識依止成種。是名色緣。於塵上六根受入。是六入緣。於塵上根塵相對。是觸緣。於塵上領納塵境。是受緣。於塵上樂受自潤。是受緣。於塵上不了即空。是取緣。於塵上愛集成業。是有緣。於塵上業熟起五蘊身。是生緣。於塵上名相變壞。是老死緣。今了塵名相空寂。則心不緣隨了之時緣自寂滅
1. ‘십이인연(十二因緣)을 관함’은 이를테면, 티끌 위에서 이름과 모습에 미혹되어 체가 없음을 이해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연(無明緣)이다. 티끌 위에서 마음으로 헤아림이 생겨 일어나는 것이 행연(行緣)이다. 티끌 위에서 분별하는 마음을 항상 굴리어 흘리어 넣는 것이 식연(識緣)이다. 티끌 위에서 허망하게 분별하는 식(識)에 의지하여 종자를 만드는 것이 명색연(名色緣)이다. 티끌 위에서 육근(六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육입연(六入緣)이다. 티끌 위에서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이 상대하는 것이 촉연(觸緣)이다. 티끌 위에서 티끌의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수연(受緣)이다. 티끌 위에서 즐거이 받아들여 스스로 젖어드는 것이 애연(愛緣)이다. 티끌 위에서 공(空)임을 이해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취연(取緣)이다. 티끌 위에서 애(愛)를 쌓아 업(業)을 이루는 것이 유연(有緣)이다. 티끌 위에서 업이 익어 오온의 몸을 일으키는 것이 생연(生緣)이다. 티끌 위에서 이름과 모습이 변하여 무너지는 것이 노사연(老死緣)이다.
지금 티끌의 이름과 모습이 공적함을 이해하여 알면 마음으로 반연(攀緣)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여 아는 때를 따라서 연이 스스로 적멸(寂滅)한다.
二修四威儀者。於塵上開顯法界法門。曉示一切群生。是行。經云。菩薩有二種行。所謂聞法行。樂聽法故。說法行。利益衆生故。於塵上平等大智隨順觀察。塵從緣起無生無相。是住。經云。所謂隨順住。住正法故。於塵上空寂甚深之義。是坐。經云。所謂坐師子座。演說甚深法故。於塵上名相蕩盡觀心寂滅淡泊無為。是臥。經云。所謂寂靜臥身心淡泊故。又禪定臥。正念思惟觀察故。不礙事處。四威儀即事恒理也
2. ‘사위의(四威儀=行 住 坐 臥를 행함)를 닦음’은 티끌 위에서 법계의 법문을 나타내어 보여 일체 중생에게 깨우쳐 보이는 것이 행(行)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보살에게는 두 가지의 행이 있다. 이른바 법을 듣는 행이니 법을 듣기 좋아하기 때문이고, 법을 말하는 행이니 중생을 이익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티끌 위에서 평등한 큰 지혜로 티끌은 연을 따라 일어난 것으로 생겨남이 없고 모습이 없음을 차례로 관찰하는 것이 주(住)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이른바 차례에 따라 머무니, 정법에 머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티끌 위에서 공적하고 깊고 깊은 뜻이 좌(坐)이다. 경에 이르기를 “이른바 사자좌에 앉으시니, 깊고 깊은 법을 연설하기 위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티끌 위에서 이름과 모습을 모두 없애버려 마음이 적멸하고 담박(淡泊)하여 함이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 와(臥)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이른바 고요하고 조용하게 누워 있는 것은 몸과 마음이 담박하기 때문이며, 또 선정으로 누워 있는 것은 바른 생각으로 차례에 따라 관찰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현상의 곳마다 사위의(四威儀)에 걸림이 없으므로 바로 현상이 항상 진리이다.
三明三性者。謂塵上迷心所執計有相生以為實也。今了塵圓小之相。取不可得。惑相自亡。是為遍計相。無性為人無我也。又塵與自心為緣。心法方起。今了緣無自體。依心方現。無自體生。是為依他也。無生性是法無我也。由二義現前。乃圓成勝義性也
3. ‘삼성(三性=세 가지 성질)을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 위에서 미혹한 마음으로 집착하여 모습이 생겨남이 있다고 생각하여 사실로 삼는 것이다. 지금 티끌의 둥글고 작은 모습을 취할 수 없음을 이해하여 알면 미혹한 모습이 스스로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변계상(遍計相-이리 저리 억측을 내는 모습)이며 자성이 없는 것이니, 인무아(人無我)이다.
또 티끌이 자기의 마음과 더불어 연이 되면 마음의 현상이 바야흐로 일어나는데, 지금 연이 스스로의 체가 없음을 이해하여 알면, 마음을 의지하여 스스로의 생겨남이 없고, 바야흐로 나타나는 것이 다른 모습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타(依他 다른 인연에 의지하는 것)인데, 생겨남에는 자성이 없는 것이니, 법무아(法無我)이다.
두 가지 뜻이 앞에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이에 뛰어난 뜻의 성품을 원만히 이룬다.
四顯教義者。謂塵能表生信解。令通達故是教。即解之時句味可詮是義。即此塵具足法界理智。是無盡教義也。教無實體。隨器施設。義無實趣。隨智開合。了妄無體。教亦非教。經云。我說十二部經。如空拳誑小兒。是事不知。名曰無明
4. ‘가르침과 뜻을 드러냄’은 이를테면, 티끌이 믿음과 이해를 냄을 나타낼 수 있고 통달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 가르침이고, 바로 이해할 때에 구절(句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 뜻이다. 바로 이 티끌이 법계의 진리와 지혜를 모두 갖춘 것이 다함이 없는 가르침의 뜻이다. 가르침은 체가 없지만 근기를 따라 베푸는 것이며, 뜻은 참으로 나아감이 없지만 지혜를 따라 열고 닫는 것이다. 망념(妄念)이 체가 없음을 이해하여 알면 가르침이 또한 가르침이 아니다. 경에서 이르기를 “내가 12부경을 말한 것은 빈주먹으로 어린 아이를 속인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을 무명(無明)이라 부른다.
五示法輪者。塵處開演。如上法門。隨心迴轉清淨顯然。是謂轉無盡法輪也
5. ‘법륜(法輪= 법의 바퀴)을 보임’은 티끌에서 위와 같은 법륜을 열어 펼치는데, 마음을 따라 회전(廻轉)하여 청정하게 두드러지게 뚜렷한 것이 다함이 없는 법륜을 굴림을 말한다.
六知無常者。謂塵念念生滅是無常。即生滅無體是為常。即生滅不生滅名凝然常。經云。不生不滅是無常義。即常不礙隨緣。即常不異無常。又無常體寂滅。即無常不異常。若去無常。即常義亦失。若去常即無常義亦失。當知。常即無常。無常即常也
6. ‘무상(無常)을 앎’은 이를테면, 티끌이 생각 생각마다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항상 함이 없음이고, 생기고 사라지는 것의 체가 없는 것이 항상 함이다. 바로 생멸하지만 생멸하지 않는 것을 항상 하는 응연(凝然-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 꼼짝하지 않는 모양)이라 한다.
경에서 이르기를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다”라고 하였으니, 무상(無常)의 뜻이다.
항상 함은 연을 따름에 걸림이 없고, 항상 함은 무상(無常)과 다르지 않다. 또 무상(無常)의 체가 적멸하니, 무상이 항상 함과 다르지 않다. 만약 무상을 버리면 항상 함의 뜻도 잃게 되고, 만약 항상 함의 뜻을 버리면 무상의 뜻도 또한 잃게 된다. 마땅히 알라. 항상 함이 곧 무상이며, 무상이 곧 항상 함인 줄을.
七入真如者。謂一塵隨心迴轉。種種義味成大緣起。雖有種種。而無生滅。雖不生滅。而恒不礙一切隨緣。今無生滅是不變。不礙一切是隨緣。即此隨緣不變
7. ‘진여(眞如)에 들어감’은 이를테면, 하나의 티끌은 마음을 따라 회전하여 가지가지의 의미로 큰 연기(緣起)를 이룬다. 비록 가지가지가 있지만 생멸이 없으며, 비록 생멸이 없지만 항상 일체의 연을 따름을 장애하지 않는다. 지금 생멸이 없는 것은 변하지 않음이고, 일체를 장애하지 않는 것은 연을 따름이다. 곧 이것은 연을 따름이 변하지 않음이다.
八出魔網者。若於塵上。心計生滅違順有無緣慮等。是處魔網也。於塵上能觀察平等一味眞實。而無生滅之見。即出魔網。經云。衆魔者樂生死。菩薩於生死而不捨故
8. ‘마(魔)의 그물에서 벗어남’은 만약 티끌 위에서 마음으로 생멸(生滅)ㆍ위경(違境)과 순경(順境)]ㆍ유무[有無-유견(有見)과 무견(無見), 상견(常見)과 단견(斷見)]ㆍ연려(緣慮) 등을 따지는 것이 ‘마의 그물에 갇히는 것’이다. 티끌 위에서 평등한 한 가지 맛의 진실을 관찰할 수 있지만 생멸에 대한 견해가 없는 것이 ‘마의 그물에서 벗어남’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마의 무리들은 생사(生死)를 좋아하지만,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않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위경(違境)=괴로움을 느끼는 경계. 자기의 몸과 마음에 고통을 주어 성내게 하는 차별적인 현상.
*순경(順境)=제 뜻에 맞는 경계. 이에 의하여 탐욕의 번뇌가 생기게 됨. 몸과 마음에 알맞는 대경.
*유견(有見)=상견(常見). 세계와 개인존재(心身)가 항상 있다고 고집하는 견해.
*무견(無見)=단견(斷見). 세계와 개인존재의 끊겨 사라짐을 고집하는 견해.
*연려(緣慮)=바깥 사물(事物)을 보고 생각하는 마음.
九銷藥病者。如見塵大小生滅有無流動是病。了大小無大小。了生滅不生滅。知有非有等是藥。藥即非藥。以無妄可斷故。病亦非病。以智深達故。當知。動心緣境即為病。經云。何謂病本。謂有攀緣
9. ‘약(藥)과 병(病)을 없앰’은 티끌의 대소(大小)ㆍ생멸(生滅)ㆍ유무(有無)ㆍ유동(流動·)을 보는 것은 병이다. 대소를 이해하여 알면 대소가 없고, 생멸을 이해하여 알면 생멸이 없으며, 유를 이해하여 알면 유가 아님을 아는 것 등이 약이다. 약은 곧 약이 아니니, 망념은 가히 끊을 것이 없는 까닭이며, 병 또한 병이 아니니, 지혜로 깊이 이해하여 알기 때문이다.
당연히 알라, 연의 경계에 움직이는 마음이 바로 병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무엇을 병의 근본이라 말하는가? 연에 이끌리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十離解縛者。謂於塵上執生滅之相是縛。了生滅相不可得是解。經云。有慧方便。解無慧方便。縛但了相非相。於縛常解。若住無相解還是縛。了妄無體。縛即非縛。縛既無縛。解亦無解。經云。諸法無縛。本解脫故。諸法無解。本無縛故
10. ‘풀고[解] 묶임[縛]을 떠남’은 이를테면, 티끌 위에서 생멸의 모습에 집착하는 것이 묶임이고, 생멸의 모습은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여 아는 것은 풀림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지혜가 있으면 방편에서 풀리고, 지혜가 없으면 방편에 묶인다.”라고 하였다. 단지 모습이 모습 아님을 이해하여 알면 묶임에서 항상 풀리게 된다. 만약 모습 없음에 머물면 풀림이 도리어 묶임이 되고, 망념에 체가 없음을 이해하여 알면 묶임이 곧 묶임 아니다. 묶임에 이미 묶임이 없으므로 풀림 또한 풀림이 없다.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법은 묶임이 없으니 본래 해탈이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풀림이 없으니 본래 묶임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然上諸義妄情增起緣於名相。以心行迷識住生於有無。而成結業。所以病妄則藥妄。舉空拳以止啼。心通則法通。引虛空而示遍。既覺既悟。何滯何疑。消能所以入玄宗。泯藥病而歸法界
그러나 이상 모든 뜻에서, 허망한 마음은 이름과 모습에 이끌리어 더욱 일어나고, 마음의 행위는 미혹한 식에 머물러 있음과 없음이라는 분별을 내어 업을 지어 만든다. 그런 까닭으로 병이 허망하면 약도 허망한 것이므로 빈주먹을 들어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이고, 마음이 통하면 법도 통하므로 허공에 이끌어서 두루 함을 보이는 것이다. 이미 깨달았으니 무슨 걸림이 있겠으며, 어떤 의심이 있겠는가? 능동(能動)과 소동(所動)을 버리고 종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약과 병을 없애고 법계로 돌아가라.
화엄경의해백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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體用開合門第九
제9. 본체와 작용을 열고 합하는 부문
夫玄宗渺漭在緣起而可彰。至道希夷入法界而無見故。標體開用助道之品蓋多。就性明緣差別之門不一。合則法界寂而無二。開乃緣起應而成三。動寂理融方開體用。
대저 현묘한 종지는 아득하고 넓지만 연기에서 드러날 수 있고, 지극한 도는 심오하여서 법계에 들어가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체를 나타내고 용을 열어 보임에 도를 도우는 품이 많다. 본성에 나아가 연을 밝히니, 차별의 부문이 하나가 아니다. 합하면 법계가 적멸이라 둘이 없고, 나누면 연기에 응하여 셋을 이루고, 움직임[用]과 고요함[體]의 진리를 융합함에 이르러서 바야흐로 체와 용을 연다.
今就大況而言。略分十義
지금은 큰 상황에 나아가 대략 열 가지로 나누어 말한다.
一顯人法 二世流布 三觀體用 四五分法身 五開三藏
六即不即 七異不異 八明本末 九會三乘 十畢竟空
1. 사람과 법을 드러내다. 2. 세간에 유포하다. 3. 본체와 작용을 관하다.
4. 오분법신을 밝히다. 5. 삼장을 열어 보이다. 6. 그대로임과 그대로가 아님을 밝히다.
7. 다름과 다르지 않음을 밝히다. 8. 근본과 지말을 밝히다. 9. 삼승을 회통하다.
10. 필경공을 밝히다.
初顯人法者。謂能達塵者是人。所了塵者是法。即此人法相由顯現。由人方能顯法。由法以用有人。論云。以人知有法。以法知有人。離人何有法。離法何有人。今以人無相故。方為顯法之人。以法無性故。方為成人之法。二而不二。不二而二也
1. ‘사람과 법[人法]을 드러냄’은 이를테면, 티끌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사람이고, 티끌을 이해한 것은 법이다. 곧 이러한 사람과 법이 서로 말미암아 드러나 나타난다. 사람을 말미암아야 비로소 법을 나타낼 수 있고 법으로 말미암아야 쓰고 있는 사람이 있다.
논에서 이르기를 “사람으로서 법이 있음을 알고, 법으로써 사람이 있음을 안다. 사람을 떠나서 어떤 법이 있겠으며, 법을 떠나 무슨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지금 사람의 모습이 없는 까닭으로 바야흐로 법의 사람을 드러내게 되고, 법이 본성이 없는 까닭으로 바야흐로 사람의 법을 이루게 된다. 사람과 법은 둘이지만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니지만 둘이다.
二世流布者。謂今見此塵名相大小。是世流布而共說也。然塵體全法。無復種種差別。全以用不異體。是故存此假名。經云。一法有多名。眞法中即無。不失法性故。流布於世間
2. ‘세간에 유포(流布)함’은 이를테면, 지금 이 티끌의 이름과 모습과 크고 작음을 봄이 세간에 유포하여 똑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티끌의 체는 온전한 법이므로 가지가지의 차별 이 없다. 온전한 작용[用]이 다른 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 빌린 이름이 있는 것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하나의 법에는 많은 이름이 있으나 참된 법 가운데에는 없다. 법의 성품을 잃지 않는 까닭으로 세간에 유포한다.”라고 하였다.
三觀體用者。謂了達塵無生無性一味是體。智照理時不礙事相宛然是用。事雖宛然。恒無所有。是故用即體也。如會百川以歸於海。理雖一味。恒自隨緣。是故體即用也。如舉大海以明百川。由理事互融故。體用自在。若相入則用開差別。若相即乃體恒一味。恒一恒二。是為體用也
3. ‘체(體)와 용(用)을 관함’은 이를테면, 티끌이 생겨남이 없음ㆍ자성이 없음ㆍ한 가지 맛을 이해하여 아는 것이 체(體)이고, 지혜로 진리를 비추어 볼 때 현상의 모습이 분명한 것을 장애하지 않는 것이 용(用)이다.
현상이 비록 분명하나 항상 있는 것이 없으므로 작용이 바로 체이다. 마치 수많은 강이 모여서 바다로 가는 것과 같다. 진리가 비록 한 가지 맛이나 항상 스스로 연을 따르므로 체가 바로 용이다. 마치 큰 바다를 가지고 수많은 강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진리와 현상이 서로 융통하여 융합하므로 체와 용이 자재하다. 만약 서로 들어간다면, 곧 용이 나누어져 차별되고, 만약 서로 그대로면 체는 항상 한 가지 맛이므로 항상 하나이면서 항상 둘이다. 이것이 체와 용이다.
四明五分法身者。謂塵空無所有。即無非可防。是戒身。以塵無相心自不緣。是定身。了塵空寂是慧身。由塵空無則不緣於有。不住於相。是解脫身。由了塵體。更無異解。是解脫知見身。身以依止為義。謂智依法顯。而得成立故。為法身也
4. ‘오분법신(五分法身)을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은 공하여 있는 것이 없으니, 막을 것이 없는 것이 계신(戒身)이고, 티끌은 모습이 없으니, 마음이 스스로 이끌리지 않는 것이 정신(定身)이며, 티끌이 공적함을 이해하여 아는 것이 혜신(慧身)이다. 티끌이 공하여 없으니, 곧 유에 이끌리지 않아 모습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해탈신(解脫身)이고, 티끌의 체(體)을 이해하여 알아 다시 다른 이해가 없는 것이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이다. 몸은 의지하는 것으로써 뜻을 삼으니, 이를테면 지혜는 법을 의지하여 드러내어 이루어는 것이므로 법신(法身)이 된다.
五開三藏者。謂塵是法界體性及涅槃。皆由大智所現。而行照也。即以文字記持。塵處所現之理。書之於簡為經。即修多羅藏也。謂塵處觀察。體性不住名相。隨順調伏。令息諸惡。是戒即毘奈耶藏也。於塵上體用法智眞妄相對。發智生解。事方究竟。是論即阿毘達磨藏也
5. ‘삼장(三藏-經, 律, 論)을 열어 보임’은 이를테면, 티끌의 법계ㆍ체(體)ㆍ성(性)ㆍ열반은 모두 큰 지혜로써 나타낸 것이며 비춤을 행하는 것이다.
바로 티끌에서 나타난 진리를 문자로 기록해 그것을 죽간에 써서 둔 것이 경인데, 곧 수다라장[經藏]이다. 티끌에서 체(體)ㆍ성(性)을 관찰하고 이름과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차례에 따라 조복(調伏)시켜 모든 악을 쉬게 하는 것이 계(戒)인데, 곧 비나야장[律藏]이다. 티끌 위에서 체(體)ㆍ용(用)ㆍ법(法)ㆍ지혜의 참됨과 허망함이 상대하여서 지혜를 내고, 이해를 내어 현상을 끝까지 밝혀내는 것이 논(論)인데, 곧 아비달마장[論藏]이다.
六明即不即者。如塵相圓小分齊無體。唯法故說即也。不礙塵相宛然故。說不即也。秖由塵相不即於法。會通而言方為即也。又由塵即法故是即。不礙緣起是不即也
6. ‘그대로임[卽즉]과 그대로가 아님[不卽불즉]을 밝힘’은 티끌의 둥글고 작은 모습의 영역은 체가 없고 오직 법인 까닭에 ‘그대로이다’라고 말하고, 티끌의 모습이 분명함을 장애하지 않는 까닭에 ‘그대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단지 티끌의 모습이 법에서 그대로가 아니므로 말미암아 잘 모아 통하도록 해서 말하여야 바야흐로 그대로임이 된다. 또 티끌이 법 그대로인 까닭으로 말미암아 그대로이고 연기(緣起)를 장애하지 않으므로 그대로가 아님이다.
七明異不異者。謂塵之事相是異。克體唯法是不異。秖由法體不異即異義方成。以不失體故。秖由塵事差別即不異義方成。以不壞緣起方言理也。經云。甚奇世尊。於無異法中而說諸法異
7. ‘다름과 다르지 않음을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 현상의 모습은 다름[異]이고, 체를 끝까지 다하면 오직 법뿐인 것이 다르지 않음[不異]이다. 단지 법과 체가 다르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바로 다름의 뜻이 바야흐로 이루어지니, 다름이 본체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티끌의 현상의 차별로 말미암아 다르지 않음의 뜻이 바야흐로 이루어지게 되고, 연기(緣起)를 무너뜨리지 않음으로써 바야흐로 진리라고 말한다.
경에서 이르기를 “매우 기이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다름이 없는 법 가운데에서 모든 법의 다름을 말씀 하십니다“라고 하였다.
八明本末者。謂塵空無性是本。塵相差別是末。末即非末。以相無不盡故。本亦非本。以不礙緣成故。即以非本為本。雖空而恒有。以非末為末。雖有而恒空。當知。末即隨緣。本即據體。今體為用本。用依體起。經云。從無住本立一切法
8. ‘근본(根本)과 지말(枝末)을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은 공하여 자성이 없는 것이 근본[本]이고, 티끌 모습의 차별은 지말[末]이다. 지말은 바로 지말이 아니니, 모습으로써 다하지 않는 까닭이다. 근본 또한 근본이 아니니, 연으로 이룸을 장애하지 않는 까닭이다. 바로 아님으로 근본을 삼음으로써 비록 공이지만 항상 유이며, 지말이 아닌 것으로 지말을 삼으니, 비록 유이지만 항상 공이다.
마땅히 알라. 지말은 바로 연을 따른 것이고, 근본은 바로 체를 의거한 것임을.
지금 체는 용의 근본이 되고, 용은 체를 의지하여 일어난다.
경에서 이르기를 “머무름이 없는 근본으로부터 일체의 법이 세워진다.”라고 하였다.
九會三乘者。謂見塵相空無所有。然法是實。據此見為小乘。悟塵從緣。息於緣慮。據此見為中乘。了塵無性。無生空寂一味。據此為大乘。今法是一。學者分三。非以學三令法亦三。非以法一令學亦一。但人自三乘法非三也。當知。一即三乘。所學之歸一也。三即一乘。隨應之機有三也
9. ‘삼승(三乘= 세 가지 탈 것)을 모음’은 이를테면, 티끌의 모습은 공하여 있는 바가 없다. 그런데 법이 실재한다고 하는 이런 견해에 의거하면 소승(小乘)이다. 티끌이 연을 따름을 깨닫고 연(緣)을 보고 생각하는 마음을 쉬는 이런 견해에 의거하면 중승(中乘)이다. 티끌은 자성이 없고 생겨남이 없고 공적한 한 가지 맛임을 이해하여 아는 이런 것에 의거하면 대승(大乘)이 된다.
지금의 법은 일승(一乘)인데 배우는 자가 삼승(三乘)으로 나누었다. 배우는 것으로써는 세 가지 탈 것이 아니므로 법으로 하여금 또한 셋이 아니게 하고, 법은 하나가 아니므로 배우게 하게끔 또한 하나가 아니게 한다. 다만 사람이 세 가지 탈 것을 쫒았으나 법이 셋인 것은 아니다. 마땅히 알라. 일승은 바로 삼승이니, 배운 것은 일승으로 돌아간다. 삼승이 바로 일승이므로 응하는 근기를 따라 삼승이 있는 것임을.
十畢…竟空者。謂塵不泯事相。而常空寂。是為畢…竟空也。今事相雖存。即相不可得。名亦不可得。理義不可得。以一切不可得。名為畢…竟空。非無表說也。然畢竟空。空時不礙塵法宛然。塵法宛然。恒畢竟空
10. ‘필경공(畢竟空)을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은 현상의 모습을 없애지 않지만 항상 공적하므로 필경공이다. 지금 현상의 모습이 비록 존재하지만 바로 모습을 얻을 수 없고, 이름 또한 얻을 수 없으며, 진리와 뜻도 얻을 수 없다. 일체를 얻을 수 없음으로 이름 하여 필경공이라 하지만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경공이 공할 때에도 티끌의 법이 분명함을 장애하지 않고 티끌의 법이 분명하나 항상 필경공이다.
*필경공(畢竟空)=허망한 견해를 깨뜨리기 위하여 이상(理想)을 공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공은 유(有)에 상대하는 단공(單空)이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상대적인 공을 다시 공한 절대 부정의 공. 이 일체의 공까지도 공하였다는 것을 필경공이라 함.
然上諸義法體不空。緣生非有。非有之有即有。遍於十方。不空之空即空。成於一切。用開差別諸法宛而星羅體合事銷多門寂而雲斂
그러나 이상의 모든 뜻은 법의 체는 공하지 않고, 연으로 생겨난 것은 유가 아니다. 유가 아닌 유는 유 그대로 시방에 두루 하고, 공이 아닌 공은 공 그대로 일체를 이룬다. 작용이 차별되게 열리어 모든 법이 분명하지만 별처럼 널려져 있고, 체는 합하고 현상은 녹이어 여러 부문이 공적하지만 구름처럼 거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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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의해백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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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學嚴成門第七
제7. 닦고 배워서 장엄을 이루는 부문
夫菩提大寶性起靈珠。既琢既磨。資智慧。而觀察為調為舒。藉解行以嚴成。
대저 보리의 큰 보배와 성기(性起)의 신령스런 구슬을 다듬고 갈았으니, 지혜를 의지하여 관찰하고, 고르고 폈으니 이해와 행을 빌려 장엄을 이룬다.
今總舉大綱粗分十義
지금은 총괄적으로 중요한 것을 들어 열 가지 뜻으로 나눈다.
一法供養 二弘六度 三修解行 四常莊嚴 五明智慧
六崇善根 七了夢幻 八曉鏡像 九達五蘊 十不共法
1. 법공양을 밝히다. 2. 육바라밀을 널리 펼치다. 3. 이해와 실행을 닦다.
4. 항상 장엄하다. 5. 지혜를 밝히다. 6. 선근을 받들다.
7. 환과 꿈임을 이해하다. 8. 거울 속의 영상임을 깨닫다. 9. 오온을 이해하다.
10. 불공법을 밝히다.
初法供養者。謂以無生心中施一切珍寶。乃至微塵。皆能攝於法界。即以此法界一塵。而作供養。以此供養。乃至遍通三世一切諸如來前。無不顯現。彼諸如來。無不攝受。何以故。由塵即攝法界。是理與佛體性。法界相應是故遍至一切佛所。名廣大供養。無空過者。經云。諸供養中法供養勝
1. ‘법공양을 밝힘’은 이를테면, 생김이 없는 마음으로 일체의 진귀한 보배와 작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베풀어 주면 모두 법계에서 거둘 수 있으니, 바로 이 법계의 하나의 티끌로써 공양을 하는 것이다. 이 공양으로써 삼세의 일체 모든 여래 앞에 두루 통하여 나타나지 않음이 없으며, 저 모든 여래가 섭수하지 않음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티끌이 법계를 섭수하는 이치는 부처 체와 성품과 법계와 더불어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두루 일체 부처 처소에 이르는 것을 이름 하여 ‘광대한 공양에는 헛되이 보냄이 없다’라고 한다.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공양 가운데 법공양이 가장 뛰어나다”라고 하였다.
二弘六度者。如見塵緣起無盡。理事中說。施一切眾生。是檀波羅蜜。又塵相空無。即無非可防。無惡可斷。是尸羅波羅蜜。又塵相空無所有。則緣心不起。息諸惱害。是羼提波羅蜜。又塵無體時執心自盡。離於妄念。是精進波羅蜜。經云。若能心不妄。精進無有涯。又以塵無性。心亦自寂。是禪波羅蜜。經云。不見心相。是名正定。又塵緣起無生無相空寂之理。是智慧波羅蜜。經云。色不生。是般若波羅蜜。生常以如理六度。修明其心。亦不礙事六度。饒益衆生理事不二。為實行也。不以理中具六而礙事六。但了事為理也
2. ‘육바라밀을 널리 펼침’은 예컨대, 티끌을 봄에 연기(緣起)의 다함이 없는 진리와 현상 가운데에서 일체중생에게 말하여 베푸는 것이 보시(布施)바라밀이다. 또 티끌의 모습이 공하여 없으므로 막을 것이 없고, 악을 끊을 것이 없음이 지계(持戒)바라밀이다. 또 티끌의 모습은 공하여 있는 것이 없으므로 마음에 이끌림이 일어나지 않고 모든 뇌(惱)와 해(害)를 쉬는 것이 인욕(忍辱)바라밀이다. 또 티끌의 체가 없을 때 집착하는 마음이 저절로 다하여 허망한 생각을 여의는 것이 정진(精進)바라밀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만약 마음이 망령되지 않을 수 있다면 정진에는 끝이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또 티끌은 자성이 없으므로 마음 또한 스스로 고요한 것이 선정(禪定)바라밀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마음의 모습을 보지 않는 것을 바른 삼매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또 티끌은 연기(緣起)이고 생김이 없음이고 모습이 없음이므로 공적한 진리가 지혜(智慧)바라밀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물질을 내지 않는 것에서 반야바라밀이 나온다.”라고 하였다.
항상 진리에 맞는 육바라밀로 그 마음을 닦아 밝히고 또한 현상에도 걸림이 없는 육바라밀로 중생을 요익하게 하니, 진리와 현상이 둘이 아님이 참된 행이 된다. 진리 가운데 갖추어진 육바라밀이 현상의 육바라밀을 장애하지 않으므로 단지 현상이 진리가 됨을 이해하여 알 뿐이다.
*뇌(腦): (1) 俱舍宗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집착하여 다른 이의 용서를 받지 않고 스스로 고민하는 심리작용을 말합니다. (2) 唯識宗에서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놀라게 하며 어지럽게 하는 마음
*해(害): (1) 俱舍宗에서는해(害)란 다른 이에게 위해(危害)를 가하고자 하는 심리 작용입니다. (2) 唯識宗에서는 살심으로 상대를 때리거나 결박, 협박하려는 마음작용이다.
三修解行者。謂於塵處。悟達理事色空無性之義。是解也。理解在心。是智也。行通為行。若行心作眞解作俗解。非名解也。不作一切解。解心無寄。是為大解也。又若起心。作凡夫行。作聖人行。亦非行也。不作一切行。行心無寄。是名大行。行非是過。由心起作。解亦非過。由心住著。常無住著希望。乃是眞解行也
3. ‘이해[解]와 행(行)을 닦음’은 이를테면, 티끌에서 진리ㆍ현상ㆍ색ㆍ공이 자성이 없는 뜻을 깨달아 아는 것이 이해이고, 진리가 마음에 있음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행을 통하여 행하게 되는데, 만약 행하는 마음을 지어 진리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에만 머문다면 세간의 이해를 하는 것이므로 이해라 하지 않는다. 일체의 행을 짓지 않아서 행하는 마음이 의존함이 없음이 크게 이해함이다.
또 만약 마음을 일으켜 범부의 행을 짓거나 성인의 행을 짓는다면 역시 행이 아니다. 일체의 행을 짓지 않아서 행하는 마음이 의존함이 없음이 크게 하는 행이다.
행이 그릇되어 잘못된 것은 마음을 일으켜 지었기 때문이고, 이해 또한 그릇되어 잘못된 것은 마음에 머물러 집착하기 때문이다. 항상 머물러 집착하거나 바라는 것이 없음이 참된 이해와 행이다.
四常莊嚴者。如以智心觀察。全塵法界緣起現前無有分別。是為嚴淨佛土。又修戒願理事。解行圓明。全塵法界理智圓通功德顯示。是為莊嚴佛身。又說示塵體緣起主伴帝網。微細曉示一切。是為轉淨法輪。於一切處皆是莊嚴。不礙七寶。以用莊嚴
4. ‘항상 장엄(莊嚴)함’은 예컨대, 지혜의 마음으로 온전한 티끌의 법계연기가 앞에 나타남을 관찰하지만 분별이 없음이 부처 국토를 장엄하여 깨끗하게 함이다.
또 지계ㆍ원력ㆍ진리ㆍ현상ㆍ이해ㆍ행을 닦아 원만하게 밝아져 온전히 티끌 법계의 진리의 지혜가 원만하게 통하고 공덕을 드러내어 나타냄이 부처 몸[佛身]을 장엄함이다. 또 티끌의 체ㆍ연기ㆍ주반ㆍ제망ㆍ미세를 말하여 나타내는데, 일체를 나타내어 보여 알아듣게 일러주는 것이 청정한 법륜을 굴리는 것이 된다. 일체의 곳을 모두 장엄하는데, 일곱 가지 보배를 써서 장엄하는데 걸림이 없다.
五明智慧者。謂塵從緣成假。持似有所現。此達有之心是智。即此假持幻有畢竟空無所有。此觀空之心是慧。若住於空。即失有義。非慧也。若住於有。即失空義。非智也。今空不異有。有必全空。是為智慧也。要由名相不存。方名智慧。若存名相。即非智慧也。由不存即是存。存即是不存也
5. ‘지혜를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은 연으로부터 이루어져 거짓으로 버티고 있는 듯이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유(有)를 이해하여 아는 마음이 지혜(智-작용하는 슬기)이다. 바로 이러한 거짓으로 버티어 환(幻)으로 있는 것은 끝내는 공이므로 있는 것이 없다. 이러한 공을 관찰하는 마음이 혜(慧-근본슬기)이다.
만약 공에만 머물면 바로 유(有)의 뜻을 잃게 되므로 혜(慧)가 아니며, 만약에 유(有)에만 머물면 공의 뜻을 잃게 되므로 지(智)가 아니다.
지금 공은 유와 다르지 않아서 유는 반드시 온전한 공이다. 이것이 지혜인데, 반드시 이름과 모습이 있지 않아야만 바야흐로 지혜라고 한다. 만약 이름과 모습이 존재한다면 지혜가 아닌 것이다. 존재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바로 존재하고 존재함이 바로 존재하지 않음이다.
六崇善根者。謂顯塵是法界涅槃。及以解行。此皆從塵處所顯發。是故即以塵為善根也。常觀察修習。是為於塵處而種善根而長養之。所有一切塵毛剎海。佛及衆生。常應如是也
6. ‘선근(善根)을 받들다’는 이를테면, 티끌은 법계이고 열반이며 이해와 행임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티끌에서 나타나 나온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바로 티끌로써 선근(善根)을 삼는다. 항상 관찰하고 닦고 익히는 것이 티끌에서 선근을 씨를 심고 기르는 것이 된다. 일체에 있는 티끌과 터럭, 국토와 바다, 부처와 중생에 항상 응함이 이와 같다.
七了夢幻者。謂塵相生起迷心為有。觀察即虛。猶如幻人。亦如夜夢。覺已皆無。今了虛無。名不可得。相不可得。一切都不可得。是為塵覺悟空無所有
7. ‘환(幻)과 꿈임을 이해하여 안다’는 이를테면, 티끌의 모습이 생겨 미혹한 마음이 있게 되지만 관찰해 보면 텅 빈 것이다. 마치 헛보이는 사람 같고, 또한 꿈과 같아서 깨고 나면 모두 없다. 이제 텅 비어 없음을 이해하여 알았으니, 이름을 얻을 수 없고 모습도 얻을 수 없으며 일체를 다 얻을 수 없다. 이것이 티끌이 공하므로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八曉鏡像者。謂塵相大小。但似有顯現。畢…竟取不可得。故知。塵即虛無。如鏡中之像。經云。觀察諸法。如電光。如水月鏡中之像。似有非有。取不可得故。以塵空寂不礙假相。宛然於法界中假實二義。但由影像也
8. ‘거울 속의 영상(映像)임을 깨달음’은 이를테면, 티끌 모습의 크고 작음은 단지 거짓으로 있음[似有]이 나타난 것이므로 끝내는 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알라, 티끌이 텅 비어 없음이 거울 속 영상과 같은 것임을.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법을 관찰해 보면, 마치 번개 불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으며, 거울 속 영상과 같아서 있는 것 같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티끌은 공적하지만 거짓 모습이 분명하여 걸림이 없다. 법계 가운데 거짓과 실제의 두 가지 뜻은 다만 영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九達五蘊者。如塵質礙為色。心領納是受。現塵假相於心是想。心緣塵取捨是行。辨了於塵是識。今了塵無體。緣慮自亡。經云。三世五蘊法。說名為世間。斯由虛妄有。無即出世間
9. ‘오온(五蘊)을 이해하여 앎’은 예컨대, 티끌의 성질에 걸림이 있음은 색(色)이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수(受)이고, 티끌의 거짓 모습이 마음에 나타난 것이 상(想)이고, 마음이 티끌에 이끌리어 버리고 취하는 것이 행(行)이며, 티끌을 가려내는 것이 식(識)이다. 이 티끌이 체가 없음을 이해하여 알면, 연으로 인하여 생각하는 것이 저절로 없어진다.
경에서 이르기를 “삼세의 오온법이 세간(世間)인데, 이것은 허망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니, 허망이 없으면 세간에서 벗어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十不共法者。謂二乘凡夫。見塵有相有體。但見一塵。而無自在業用。今則不爾。不與彼同。此要達塵無體證之。以成佛土。依塵修起智慧。莊嚴法身。然小恒容廣大世界。一塵常能普攝一切。是為不共法也
10. ‘불공법(不共法)을 밝힘’은 이를테면, 이승(二乘)의 범부(凡夫)는 티끌을 모습이 있고 체가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티끌만을 볼 뿐 자재한 업(業)의 작용이 없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므로 저들과 같지 않다. 반드시 티끌이 체가 없음을 알고, 그것을 증득하여 부처 땅[佛土]을 이루는 것으로써 티끌에 의지하여 닦아 지혜를 일으키고 법신(法身)을 장엄한다. 그리하여 작은 것이 광대한 세계를 항상 받아들이니, 하나의 티끌에서도 항상 일체를 두루 거둘 수 있다. 이것이 ‘불공법(不共法-다른 것과 같이 하지 않는 법)’이다.
然上諸義體雖空淨。資行願以嚴真性。縱包含依智慧而開顯。是故體稱本有。行約修生。生即不生。還同本體。體亦非體。復等修生。何曾體而礙生。生而失體。得意亡言。千里跬步。豈與夫懵道之子同年而語哉
그러나 이상의 모든 뜻은 체가 비록 공하고 청정하지만 행(行)과 원(願)을 도와서 진리를 장엄하고, 본성이 비록 일체를 포함하고 있지만 지혜를 의지하여 널리 드러난다. 이런 까닭으로 체는 본유(本有-본래 있는 성질의 덕)에 들어맞고, 수행(修行)은 수생(修生-수행한 공력에 의하여 생김)을 따른 것이다.
태어남이 곧 태어남이 아니므로 도리어 체와 같고, 체는 또한 체가 아니므로 다시 수생(修生)과 같은데, 어찌 일찍이 본체가 태어남을 장애하겠는가? 태어나지만 체를 잃지 않으므로 뜻을 얻으면 말을 잃게 된다. 천리가 멀지 않은데, 어찌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와 함께 어울려 말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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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의해백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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體用顯露門第五
제5. 체(體)와 용(用)을 드러내는 부문
夫法體圓通眞源滿徹。顯則十方洞鑒示。乃一切咸彰。指微塵以覩玄宗。舉纖毫而觀佛境
대저 법의 체는 원융하게 통하고, 진리의 근원은 빈틈없이 통한다. 나타나면 곧 시방을 밝게 비추고, 나타냄에 일체가 모두 드러나니, 작은 티끌을 꼭 집어서 현묘한 가르침을 보이고, 가는 터럭을 거론(擧論)하여 부처의 경계를 관찰한다.
今達妄開真。略分十義
여기서는 허망을 알고 진실을 열어 보이는데, 대략 열 가지 뜻으로 나눈다.
一顯光明 二了境智 三明生了因 四明佛境 五辨因果
六明佛性 七表性德 八自心現 九出世間 十托生解
1. 광명을 드러내다. 2. 경계와 지혜를 이해하다.
3. 생인과 요인을 밝히다. 4. 부처 경계를 밝히다.
5. 인과를 말하다. 6. 불성을 밝히다.
7. 성품의 덕을 나타내다. 8. 자기의 마음이 나타낸 것임을 밝히다.
9. 세간에서 벗어나다. 10. 사물에 의탁하여 이해를 내다.
初顯光明者。謂見塵中法界真如理事之時。顯了分明。此是智慧光明照也。若無智光。則理事不顯。但見法時。是心光明。由積智功圓。是故放一光明。則法界無不顯示。常觀察一切法界。是為放光明照一切也
1. ‘광명을 드러냄’은 이를테면, 티끌 가운데 있는 법계ㆍ진여ㆍ진리와 현상을 볼 때, 드러남이 분명한데 이것은 지혜의 광명으로 비춘 것이다. 만약 지혜의 광명이 없다면 진리와 현상이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법을 볼 때, 이 마음의 광명뿐이니 쌓아올린 지혜의 공덕이 원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광명을 놓으면 법계가 나타나 드러내지 않음이 없다. 항상 일체의 법계를 관찰하니, 이것은 광명을 놓아 일체를 비추게 되는 것이다.
二了境智者。如一塵圓小事相是世諦。了塵無生無性是眞諦。彼眞俗二諦。是所依之境。此貫達之心。是能依之智。此智於境。無復能取所取二種分別。何以故。今智由法成時。方得言智。離法則無能分別之智。法由智顯時。方得言。法離智亦無所分別之境。以心智寂故。雖流照而常安。由法隨緣故。雖空寂而恒用
2. ‘경계와 지혜를 이해함’은 예컨대, 한 티끌의 둥글고 작은 현상의 모습이 속제(俗諦)이고, 티끌이 생김이 없는 것이며 자성이 없는 것임을 이해한 것은 진제(眞諦)이다. 저 진제와 속제의 두 가지 진리는 의지하는 경계이고, 이 꿰뚫어 통달하는 마음은 의지할 수 있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경계에 대하여 다시 능취(能取-능동으로 동작하여 취하는 것)와 소취(所取-움직이는 것으로서 동작을 취하는 것)라는 두 가지 분별이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지혜가 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므로 비로소 지혜라고 말할 수 있다. 법을 떠나면 곧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없고, 법이 지혜로 말미암아 드러날 때 비로소 법이라 말할 수 있다. 지혜를 떠나면 또한 분별할 경계가 없고, 마음의 지혜가 공적하므로 비록 비추지만 항상 평안하고, 법이 연을 따르기 때문에 비록 공적한 까닭으로 비록 널리 비추지만 항상 평안하고, 법이 연을 따르는 까닭으로 말미암아 비록 공적(空寂)하지만 항상 작용한다.
三明生了因者。謂塵體空寂緣起法界之義。由智方顯。是了因。見塵體已修於解行。生起力用。是生因。然生即無生。還同法體。了亦非了。豈等緣生。生之與了。無有差別。生則約行。了則據體。無體即體。了則無生。體即無體。生還為了。契同一際。無所分別
3. ‘생인(生因)과 요인(了因)을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의 체는 공적한 연기법계라는 뜻인데, 지혜로 말미암아 비로소 드러난 것이 요인(了人)이다. 티끌의 체를 보고 나서 이해와 행에 대하여 닦아 작용하는 힘을 일으키는 것은 생인(生因)이다.
그런데 생김은 이 곧 생김이 없음이니 도리어 법의 체와 같고, 요인 또한 요인이 아닌데 어찌 연이 생기는 것과 같겠는가? 생인과 요인은 차별이 없으니, 생인은 행의 측면이며, 요인은 체를 근거로 한 것이다. 체가 없음이 바로 체이므로 요인은 곧 생인이 없고, 체는 곧 체가 없음이기 때문에 생인이 도리어 요인이다. 틀림없이 서로 꼭 들어맞아 동일한 것이므로 분별할 것이 없다.
四明佛境者。謂塵體不可得。此不可得。是佛得塵相無分齊無可依。此無依。是佛依塵體不生。此不生是佛生塵無分別。是佛分別。由無得無依無生。方能建立一切法。又塵全見更不可見乃至不可聞。皆是佛見聞。經云。所見不可見。所聞不可聞
4. ‘부처 경계를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의 체는 얻을 수 없는데, 이 얻을 수 없는 것이 부처의 얻음이다. 티끌의 모습은 영역이 없고 의지함이 없는데, 이 의지함이 없는 것이 부처의 의지함이다. 티끌의 체는 태어남도 없는데, 이 태어남이 없는 것이 부처의 태어남이다. 티끌은 분별이 없는데, 이것이 부처의 분별이다.
얻음도 없고 의지함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으므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일체의 법을 만들어 세울 수 있다. 또 티끌을 온전히 봄에 다시 볼 수가 없으며, 나아가서 들을 수 없음 이르기까지 모두 부처님의 보고 들음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보는 것도 볼 수 없으며, 듣는 것도 들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五辯因果者。塵即是緣起事相現前為因。即事體空不可得是果。果不異因。全以因滿稱為果也。由因不異果。全以果圓稱之為因也。若因不得果。果亦非果也。若果不得因。因亦非因也。皆同時成立無別異故。是故初發心時。便成正覺。成正覺已。乃是初心。經云。初發心時便成正覺。悉與三世諸如來等
5. ‘인과(因果)를 말함’은 티끌이 바로 연을 일으키어 현상의 모습으로 앞에 나타난 것이 인(因)이고, 바로 현상의 본체는 공하여 얻을 수 없는 것이 과(果)이다. 과는 인과 다르지 않으므로 온전히 인이 가득한 것을 과(果)라 하고, 인은 과와 다르지 않으므로 온전히 과가 원만한 것이 인이다. 만약 인이 과를 얻지 못한다면 과 또한 과가 아니다. 만약 과가 인을 얻지 못한다면 인 또한 인이 아니다. 모두 동시에 이루어지니 구별에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처음 마음을 낼 때 곧 바로 정각을 이루는 것이며, 정각을 이루고 나서 처음 마음을 내는 것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처음 마음을 낼 때에 곧 바로 정각을 이루니, 모두 삼세의 모든 여래와 더불어 똑같다”라고 하였다.
六明佛性者。謂覺塵及一切法。從緣無性名為佛性。經云。三世佛種。以無性為性。此但一切處。隨了無性即為佛性。不以有情故有。不以無情故無。今獨言有情者。意在勸人為器也。常於一塵一毛之處。明見一切理事。無非如來性。是開發如來性起功德名為佛性也
6. ‘불성(佛性-부처 성품)을 밝힘’은 이를테면, 티끌 및 일체의 법은 연을 따른 것이므로 자성이 없음을 깨달은 것을 불성(佛性)이라 한다.
경에서 이르기를 “삼세의 부처 종자는 자성이 없는 것으로 성품(性品)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단지 모든 곳에 자성이 없음을 이해함을 따라서 부처 성품을 삼은 것일 뿐이지, 유정물(有情物)이므로 부처 성품이 있고 무정물(無情物)이기 때문에 부처 성품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오직 유정물만을 말한 것은 사람들에게 권하여 근기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항상 하나의 티끌, 하나의 터럭에서 일체의 진리와 현상을 분명히 보면 여래 성품 아님이 없다. 여래 성품을 일으키는 공덕을 열어내는 것을 불성(佛性-부처 성품)이라 한다.
七表性德者。
7. ‘성품의 덕을 나타냄’은
問塵是有耶。答是非有之有。如水月鏡像。經云。非有是有。
<질문> 티끌은 있는 것인가?
<대답> 있지 않으면서 있는 것이니, 물에 비친 달. 거울 속에 비친 모습과 같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있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塵是無耶。答是有之非有空無性也。經云。有是非有。
<질문> 티끌은 없는 것인가?
<대답> 있으면서 없는 것이니, 공이어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있는 것이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塵是亦有亦無耶。答從緣生故有。無自性故空。空有一際自在成也。論云。以有空義故。一切法得成。
<질문> 티끌은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한 것인가?
<대답> 연을 따라 생긴 까닭으로 있는 것이고, 자성이 없어 공인 까닭에 공(空)과 유(有)가 하나로써 자재하게 이루어진다. 논(論)에서 이르기를 “공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일체의 법을 이룰 수 있다”라고 하였다.
問塵是非有非無耶。答有相空相俱不可得也。互相奪盡。無所成立。今此性德。但無執著。不礙分別。論云。若因有與無亦遮亦應。聽離言心不著。是則無有過
<질문> 티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대답> 유의 모습과 공의 모습 둘 다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서로 빼앗아 버리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이 성품의 공덕은 단지 집착이 없는 것이지만 분별에 걸림이 되지 않는다.
논(論)에서 “만약 유와 무로 인한다면 가로막기도 하고 또한 응하여 듣기도 하는데, 말을 여의고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면 허물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八明自心現者。如見此塵時是自心現也。今塵既由心現。即還與自心為緣。終無心外法。而能為心緣。以非外故。即以塵為自心現也。離心之外。更無一法。縱見內外。但是自心所現。無別內外。此無過也
8. ‘자기의 마음이 나타낸 것을 밝힘’은 예컨대, 티끌을 볼 때에 이것은 자기의 마음이 나타낸 것이다. 티끌이 이미 마음에서 나타났으므로 말미암아 도리어 자기의 마음과 더불어 연이 된다. 결국 마음 바깥에는 법은 없으며 마음이 연이 된다. 밖이 아닌 까닭에 바로 티끌로써 자기의 마음이 나타낸 것이다. 마음을 떠난 바깥에는 다시금 한 법도 없다. 설사 안과 밖을 볼지라도 단지 자기의 마음이 나타낸 것이니 달리 안과 밖이 없다. 이것은 잘못이 없다.
九出世間者。謂見塵色相作實解。即為處世間。今塵相空無所有。是出世間也。經云。三世五蘊法說名為世間。斯由虛妄有。無分別則出世間也
9. ‘세간에서 벗어남’은 이를테면, 티끌의 색상(色相)을 보고 실제(實際)라고 이해하면, 세간의 처지가 된다. 티끌의 모습을 공하여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면, 세간에서 벗어난 것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삼세의 오온법(五蘊法)을 세간이라 한다. 이는 허망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니, 분별이 없으면 곧 세간에서 벗어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十托事生解者。如見塵相。是事於事處貫達。即無生之理現前。是謂托事生解也。又別托外物以表此法。表塵法自在故。以塵表之顯法潤益故。以雲雨表之。顯塵性德深廣故。以海表之。如是無量。更有所表。各異。以智推之
10. ‘사물에 의존하여 이해함’은 이를테면, 티끌의 모습이 현상임을 보고 현상이 있는 곳에서 꿰뚫어 이해하여, 바로 생기는 것이 없는 이치가 앞에 나타난 것을 ‘사물에 의존하여 이해함’이라 한다. 또 바깥 사물에 특별히 의존하여 이러한 법을 나타내기도 한다. 티끌의 법이 자재함을 나타내는 까닭에 티끌로써 나타내고, 법이 늘어남을 나타내는 까닭으로 구름과 비로써 나타내고, 티끌의 성품의 공덕이 깊고 넓음을 나타내는 까닭으로 바다로써 나타내니, 이와 같은 것이 한량없다. 다시금 나타내는 것이 각각 다르니, 지혜로써 미루어 생각해 보라.
然上諸義。惑盡智生相亡體顯。差別緣起。方騰性海之波。一味眞源。用顯隨緣之鏡。會眞之道失。何遠哉
그러나 이상의 모든 뜻은, 미혹이 사라지면 지혜가 생기고, 모습이 없어지면 체가 나타난다. 차별된 연을 일으키는 것이 바야흐로 본성의 바다의 파도에서 일어나고, 한 가지 맛인 참된 근원이 연을 따르는 거울에 작용하여 나타나는데, 참된 길을 만나는 것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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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의해백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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差別顯現門第六
제6. 차별되게 나타나는 부문
夫滿教難思。窺一塵而頓現。圓宗叵測。觀纖毫而頓彰。然用就體分。非無差別之勢。事依理顯。自有一際之形。
대저 가득한 가르침은 생각하기 어렵지만 하나의 티끌만 보아도 문득 나타나고, 원융한 종지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가는 터럭을 관찰하여도 단박 드러난다. 그러나 용의 측면에서 체를 나누면 차별 없는 형세가 아니고, 현상은 진리에 의해 나타난다. 본래 있는 하나의 모습이다.
今且略舉大綱。以顯十義
지금 우선 중요한 것을 간략히 거론하여 열 가지 뜻을 나타낸다.
一明止觀 二開二諦 三出入定 四通性起 五辨六相
六顯帝網 七鑒微細 八通逆順 九定主伴 十登彼岸
1. 지와 관을 밝히다. 2. 이제를 열어 보이다. 3. 삼매에 들고 나오다.
4. 성기를 알아보다. 5. 육상을 드러내다. 6. 제망중중을 나타내다.
7. 미세를 살펴보다. 8. 거스름과 따름을 통하다. 9. 주인과 손님을 정하다.
10. 피안에 오르다.
初明止觀者。如見塵無體空寂之境為止。照體之心是觀。今由以無緣之觀心通無性之止體。心境無二。是止觀融通。由止無體不礙是心故。是以境隨智。而任運。由觀心不礙止境故。是以智隨法而寂靜。由非止觀以成止觀。由成止觀。以非止觀。二而不二。不二而二。自在無礙
1. ‘지(止)와 관(觀)을 밝힘’은 예컨대, 티끌은 체가 없어 공적한 경계로 보면 지(止)이고, 체를 비추는 마음은 관(觀)이다. 지금 이끌림 없이 관찰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자성이 없는 지(止)의 체를 통하면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니어 지와 관이 원융하게 통한다.
지(止)는 체가 없어 관찰하는 마음을 장애하지 않는 까닭으로 경계는 지혜를 따라서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다. 관찰하는 마음이 지의 경계를 장애하지 않는 까닭으로 지혜가 법을 따르지만 아주 고요하고 고요하다.
지(止)와 관(觀)이 아님으로 말미암아 지와 관을 이루고, 지와 관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지와 관이 아니다. 둘이지만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니지만 둘이어서 자재함에 걸림이 없다.
二開二諦者。謂如見塵相圓小。幻有現前。是世諦。了塵無體。幻相蕩盡。是眞諦。今此世諦之有。不異於空相。方名世諦。又眞諦之空。隨緣顯現。不異於有相。方名眞諦。又空依有顯即世諦。成眞諦也。由有攬空成。即眞諦成俗諦也。由非眞非俗。是故能眞能俗。即二而無二。不礙一二之義歷然。經云。於解常自一。於諦常自二。通達此無礙。眞入第一義
2. ‘이제(二諦)를 열어 보임’은 이를테면, 티끌의 모습을 보고 둥글고 작은 환(幻)으로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 속제(俗諦)이고, 티끌의 체가 없음을 이해하여 환(幻)의 모습이 없어진 것은 진제(眞諦)이다.
지금 이 속제의 유(有)가 공(空)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야 비로소 속제라고 한다. 또 진제의 공이 연을 따라 나타나서 유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야 비로소 진제라고 한다. 또 공은 유를 의지하여 나타나므로 바로 속제 그대로 진제를 이루고, 유는 공을 잡아서 이루어지므로 바로 진제 그대로 속제를 이룬다.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기 때문에 진제일 수 있고 속제일 수 있다. 바로 둘이면서 둘이 아니고, 하나와 둘이 장애하지 않는 뜻이 분명하다.
경에서 이르기를 “이해의 측면에서는 항상 본래 하나이지만, 진리의 측면에서는 항상 본래 둘인 것이다. 이러한 걸림 없음을 통달하면 참으로 제일의(第一義)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三出入定者。謂見塵性空。即是十方一切眞實之理。名為入定也。然見此塵無性空理之時。乃是十方之空也。何以故。由十方之心。見於一塵。是故全以十方為塵。定亦不礙事相宛然。是起然起之與定俱等虛空界。但以一多融通同異無礙。是故一入多起。多入一起。差別入一際起。一際入差別起。悉皆同時一際成立。無有別異。當知。定即起起即定。一與一切同時三昧起。一切塵中入正受。一毛端頭三昧起
3. ‘삼매에 들고 나옴’은 이를테면, 티끌의 본성이 공적함을 보고 바로 시방 일체의 진실한 진리를 보는 것을 ‘삼매에 든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 티끌이 자성이 없어 공한 진리임을 볼 때, 시방이 공한 까닭은 무엇인가? 시방의 마음으로 하나의 티끌을 보기 때문이니, 이런 까닭으로 온전히 시방으로서 티끌의 삼매가 된다.
또한 현상의 모습이 분명하여 장애하지 않는 것이 삼매에서 일어남이다. 그런데 삼매에서 일어남이 모두 허공계와 같다. 단지 하나와 여럿이 융통하므로 같고 다름에 걸림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하나에서 들어가 여럿에서 일어나고 여럿에서 들어가 하나에서 일어나며, 차별로 들어가 같은 곳에서 일어나고 같은 곳에서 들어가 차별에서 일어나니, 모두 다 동시이며 한꺼번에 이루어져 다름이 없다.
마땅히 알라. 선정에 들어감이 바로 선정에서 나옴이고, 선정에서 나옴이 바로 선정에 들어감이며, 하나와 일체가 동시에 삼매에서 일어나며, 일체의 티끌 가운데에서 바른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삼매에 들고, 하나의 터럭 끝에서 삼매가 일어나는 것임을.
四通性起者。謂塵體空無所有。相無不盡。唯一眞性。以空不守自性。即全體而成諸法也。是故而有萬像繁興。萬像繁興而恒不失眞體一味。起恒不起。不起恒起。良以不起即起。起乃顯於緣生。起即不起。不起乃彰於法界。是故此塵即理即事即滅即生。皆由不起而起也。此塵亦空理亦壞亦隱。由起而不起。是故終日繁興。而無施設也
4. ‘성기(性起)를 알아봄’은 이를테면, 티끌의 본체는 공하여 있는 것이 없으며, 모습이 다하지 않음이 없어 오직 하나의 참된 성품일 뿐이다.
공은 자성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바로 온전한 본체이며 모든 법을 이룬다. 이런 까닭으로 만 가지 모양이 무성하게 일어난다. 만 가지 모양이 무성하게 일어나나 항상 참된 체의 한 가지 맛을 잃지 않는다. 일어나지만 항상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지 않지만 항상 일어난다.
진실로 일어나지 않음이 바로 일어남으로써 일어남은 연이 생겨남으로 나타나고, 일어남이 바로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지 않음이 법계에 뚜렷하다. 이런 까닭으로 이 티끌은 진리 그대로이고, 현상 그대로이며, 사라짐 그대로이고 생겨남 그대로여서 모두가 일어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이 티끌은 또한 공하므로 진리가 무너지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일어나지 않는 까닭으로 종일토록 무성하게 일어나되 베풀어 차리는 것이 없다.
五顯六相者。今塵全以理事解行教義以成緣起。此為總也。由塵總義現前。方於塵處。辨體用解行教義。各各差別。是別也。此一塵處所辨諸義。各各無性。互不相違。是同也。此一塵處。諸義體用性相各各差別。是異也。此一塵處。諸義現前塵法方立。是成也。此一塵處。諸義各各顯自性相終不相成相作。是壞也。一切諸法。皆具此六相。緣起方成。若不如此。則失六義也
5. ‘육상(六相)을 드러냄’은 지금 티끌이 온전히 진리ㆍ현상ㆍ이해ㆍ실행ㆍ가르침ㆍ뜻으로 연기(緣起)를 이루는 것이 총상(銃相)이다. 티끌의 총상의 뜻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티끌에서 본체ㆍ현상ㆍ이해ㆍ실행ㆍ가르침ㆍ뜻을 각각 차별되게 구별한 것이 별상(別相)이다. 이 하나의 티끌에서 구별한 모든 뜻이 각각 자성이 없어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 동상(同相)이다. 이 하나의 티끌의 모든 뜻인 본체ㆍ작용ㆍ본성ㆍ모습이 각각 차별된 것이 이상(異相)이다. 이 하나의 티끌의 모든 뜻이 앞에 나타남에 티끌의 법이 비로소 세워지는 것이 성상(成相)이다. 이 하나의 티끌의 모든 뜻이 각각 자성의 모습을 나타내어 끝에는 서로 이루고 서로 만들지 않는 것이 괴상(壞相)이다.
일체의 모든 법이 다 이러한 여섯 가지 모습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연기(緣起)가 바야흐로 이루어진다. 만약 이와 같지 않으면 여섯 가지의 뜻을 잃게 된다.
六顯帝網者。謂塵無體。顯現一切緣起理事。菩提涅槃教義。及解行等。由此諸義無性。理通十方。圓明一際。或一現一。或一現一切。或一切現一。或一切現一切。四句同時。一際顯然。重重無盡。自在現也。如帝釋殿珠網。重重互現無盡。論云。帝網差別。唯智能知。非眼境界
6. ‘제망중중(帝網重重)을 나타냄’은 이를테면, 티끌은 실체가 없지만 일체의 연기(緣起)ㆍ이사(理事)ㆍ보리(菩提)ㆍ열반(涅槃)ㆍ교의(敎義) 및 해행(解行) 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뜻은 자성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진리는 시방에 통하여 원만하고 분명한 하나의 진리이다. 어떤 때는 하나가 하나를 나타내고, 어떤 때는 하나가 일체를 나타내며, 어떤 때는 일체가 하나를 나타내고, 어떤 때는 일체가 일체를 나타낸다.
네 가지 문구(文句)가 동시라서 한결 같이 드러나므로 거듭거듭 다함이 없이 자재하게 나타난다. 마치 제석천의 보배 그물이 거듭거듭 다함이 없는 것과 같다.
논에서 이르기를 “제석천의 보배 그물의 차이와 다름은 오직 지혜로만 알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七鑒微細者。謂此塵及十方一切理事等。莫不皆是佛智所現。即此佛智所現之塵。能容持一切剎海事理教義。無不具足。所以然者。由十方差別雖多。恒是一塵之十方。一塵雖小。恒是該通一切之塵。是故顯現。無有先後。不礙差別。遠近宛然。經云。微細世界中。容受大世界。境界無不了。智慧山王行。又云。於一塵中。普現三世一切佛剎等。又云。乃至一塵一毛一世界一佛一衆生等。皆如是頓顯故
7. ‘미세(微細)하게 살펴봄’은 이를테면, 이 티끌 및 시방의 일체 진리와 현상 등은 모두 부처 지혜에서 나타낸 것 아님이 없다. 바로 이 부처 지혜에서 나타난 것인 티끌이 능히 일체 국토와 바다의 현상ㆍ진리ㆍ가르침ㆍ뜻을 받아들여 지닐 수 있어 다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시방에 차별이 비록 많지만 항상 하나의 티끌의 시방이고, 하나의 티끌이 비록 작지만 항상 일체 티끌에 모두 통하는 까닭에 나타남에 앞과 뒤가 없고, 차별에 걸림이 없고, 멀고 가까움이 분명하다.
경에서 이르기를 “미세한 세계 가운데에서 큰 세계를 받아들이어 경계를 이해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지혜산왕(智慧山王-부처님)의 행(行)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하나의 티끌 가운데에서 삼세의 일체 부처님 국토 등을 두루 나타낸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하나의 티끌ㆍ하나의 터럭ㆍ하나의 세계ㆍ한 부처ㆍ한 중생 등을 나타낸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이와 같이 단박 나타내기 때문이다.
八通逆順者。謂舉塵相。不必見理為逆。以塵無體即空為順。由相取不可得。逆則常順。以理不礙事。順則常逆。由事理融通。是以逆順無礙自在用也
8. ‘거스름[逆]과 따름[順]을 통함’은 이를테면, 티끌의 모습을 말함에 반드시 진리를 보지 않는 것이 거스름[逆]이고, 티끌은 체가 없어 공 그대로인 것은 따름[順]이다. 모습을 얻을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거스름이 곧 항상 따름이며, 진리가 현상을 장애하지 않으므로 따름은 곧 항상 거스름이다. 현상과 진리가 융통하므로 말미암아 거스름과 따름이 걸림 없이 자재하게 작용한다.
九定主伴者。謂塵是法界體無分齊。普遍一切。是為主也。即彼一切各各別故是伴也。然伴不異主。必全主而成伴。主不異伴。亦全伴而成主。主之與伴。互相資相攝。若相攝彼此互無。不可別說一切。若相資則彼此互有。不可同說一切。皆由即主即伴。是故亦同亦異。當知。主中亦主亦伴。伴中亦伴亦主也
9. ‘주인[主]과 손님[伴]을 정함’은 이를테면, 티끌 법계의 체는 영역이 없어 일체에 두루 미치는 것이 주인이며, 이런 일체가 각각 다른 까닭으로 손님이다. 그러나 손님은 주인과 다르지 않으므로 반드시 온전히 주인이지만 손님을 이룬다. 또한 주인이 손님과 다르지 않으므로 주인과 손님이 서로 돕고 서로 거둔다. 만약 서로 거두면 피차가 서로를 없어 일체를 다르게 말할 수 없고, 만약 서로 돕는다면 피차가 서로 있으므로 일체를 같게 말할 수 없으니, 모두 주인 그대로이고 손님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마땅히 알라. 주인 가운데 주인이면서도 또한 손님이며, 손님 가운데 또한 손님이며 또한 주인인 줄을.
十登彼岸者。謂塵名相生滅。是此岸。今了塵名相空寂不生不滅。是彼岸。但以不了為此。了即為彼。依了不了邊…。寄彼此以言之。經云。菩薩不住此岸。不住彼岸。而能運度衆生於彼岸
10. ‘피안(彼岸)에 오름’은 이를테면, 티끌의 이름과 모습이 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차안(此岸)이다. 지금 티끌의 이름과 모습이 공적하여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음을 이해하여 안 것이 피안(彼安)이다. 단지 이해하여 알지 못하면 차안이 되고 이해하여 알면 피안이 된다. 이해하여 알았는지 이해하여 알지 못했는지에 의거하고, 피차라는 것에 의존하여 말한 것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보살은 차안에도 머물지 않고 피안에도 머물지도 않지만, 중생을 피안으로 실어 나를 수 있다”라고 하였다.
然上諸義體無別異。舉則全彰。理不殊途。談皆頓顯。良以二邊…相盡差別體融。隨智卷舒。應機屈曲。是故言起。即起誰云路之不通。舉多即多。孰談法之無在。自非逈超特達捿心物表之者。焉能了此乎
그러나 이상의 모든 뜻에서 체는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없으므로 체를 들어 보이면 온전히 나타나며, 진리는 그것 말고 다른 길이 없으므로 진리를 말하면 모두가 단박 드러난다. 진실로 양변(兩邊)의 모습을 다한다. 차별된 체를 융통하므로 지혜를 따라 말고 펄치며, 근기에 응하여 굴곡(屈曲) 한다.
이런 까닭으로 일어남을 말하면 바로 일어남에 누가 길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여럿을 말하면 바로 여럿인데 누가 법이 없다고 이야기 하는가? 스스로 멀리 뛰어넘고 특별하게 통달하여서 마음에 기대어 사물을 나타내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여 알 수 있겠는가?
화엄경의해백문-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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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擇成就門第十
제10. 결택하여 성취하는 부문
夫緣情未泯。見有正邪。法體隨迷故。隨緣而生滅。法界沖寂。泯寂滅以是非。今欲顯其實趣簡彼權門。使皂白以雙分令眞妄而兩別。
대저 마음이 연에 이끌림을 아직 없애지 못하고, 견해에 정견(正見)과 사견(邪見)이 있다. 법의 체가 어리석음을 따르는 까닭으로 연을 따르며 생멸하고, 법계는 텅 비어 고요한데 적멸을 없애고 옳고 그름만을 따진다. 지금은 그 진실에 나아가 드러내고자 권문((權門-方便門)으로 가려낸다. 흑과 백으로 하여금 쌍으로 나눠지게 하고, 참됨과 허망으로 하여금 양쪽으로 구별되게 한다.
略舉大綱。題茲十義
간략히 골자를 들어 열 가지 뜻으로 나타낸다.
一簡正見 二辨染淨 三顯無知 四佛出世 五辨四依
六除業報 七定權實 八明頓漸 九入佛海 十證佛地
1. 정견을 가려내다. 2. 물듦과 깨끗함을 가리다. 3. 무지를 드러내다.
4. 부처가 세상에 출현한. 5. 네 가지 의지함을 말하다. 6. 업보를 제거하다.
7. 방편과 실제를 정하다. 8. 돈과 점을 밝히다. 9. 부처님 바다에 들어가다.
10. 부처님의 지위를 증득하다.
初簡正見者。如見塵名相是邪。見塵空寂是正。又若以見見於塵。此非為正。以不見見於塵。此亦非正。但知塵全是見。不復更見。以不見見於塵也。然見此塵時。不可以慧眼見法眼看佛眼觀肉眼視天眼瞻見於塵也。以塵即慧即法即佛即肉即天。不復更以慧眼見眼見。又若見即不見。謂以見見即不契塵也。若不見即見。謂更將不見以見於塵。亦不契於塵也。若不見即不見。謂不知塵是見。名為總不見也。若見即見。謂知塵全是見。方名為見。經云。見者即是垢。彼則無所見。諸佛離所見。是故見清淨
1. 정견(正見)을 가려냄‘은 예컨대, 티끌의 이름과 모습을 보는 것은 사견(邪見)이고, 티끌의 공적함을 보는 것은 정견이다. 또 만약 견(見-사고(思考)함)으로 티끌을 본다면 이것은 정견이 아니며, 불견(不見-사고(思考)하지 않음)으로 티끌을 보는 것도 정견이 아니다.
다만 티끌은 온전히 보임[見]이므로 또 다른 보임[見]이 없으니, 불견(不見)으로써 티끌을 보는 것임을 알 뿐이다. 그러나 티끌을 볼 때에 혜안(慧眼)ㆍ법안(法眼)ㆍ불안(佛眼)ㆍ육안(肉眼)ㆍ천안(天眼)으로 보아도 티끌을 볼 수가 없다. 티끌은 혜안(慧眼)ㆍ법안(法眼)ㆍ불안(佛眼)ㆍ육안(肉眼)ㆍ천안(天眼)에 그대로 있으므로 다시금 다른 혜안(慧眼) 등의 오안(五眼)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또 만약 보임[見]이 바로 보임이 아님[不見]이라면, 보임[見]으로써 보임[見-티끌]을 보는 것이므로 바로 티끌과 계합하지 못한다는 말이 되고, 만약 보임 아님[不見]이 바로 보임[見]이라면 다시금 보임 아님[不見]을 가지고 티끌을 보는 것이므로 또한 티끌에 계합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만약 보임이 아님[不見]이 바로 보임이 아님[不見]이라면 티끌이 보임[見]임을 알지 못하여서 모두 보임 아님[不見]이라는 말이 되고, 만약 보임[見]이 바로 보임[見]이라면 티끌이 온전히 보임[見]임을 아는 것이므로 비로소 보임[見]이라 말할 수 있다.
경에서 이르기를 “보는 것이 바로 허물이니, 저것[티끌]은 볼 것이 없도다. 모든 부처는 보는 것을 떠났으므로 봄이 청정하도다.”라고 하였다.
二辨染淨者。謂見塵生滅有無是染。即體不生不滅非有非無是淨。若空異於有。則淨不名淨。以迷空故。若有異於空。則染不名染。以執有故。今有即全空。方名染分。空即全有。方名淨分。由空有無礙。是故染淨自在也。經云。染而不染。不染而染
2. ‘물듦[染]과 깨끗함[淨]을 가림’은 이를테면, 티끌의 생멸과 유무(有無)를 보는 것은 물듦이며, 체가 생김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은 깨끗함이다.
만약 공이 유와 다르다면 깨끗함은 깨끗함이라 할 수 없는데, 공에 미혹했기 때문이다. 만약 유가 공과 다르다면 물듦을 물듦이라 할 수 없으니, 유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가 바로 온전히 공이므로 비로소 물듦이라 하고, 공이 온전히 유이므로 비로소 깨끗함이라 한다. 그러므로 물듦과 깨끗함이 자재하다.
경에서 이르기를 “물들지만 물들지 아니하고, 물들지 않지만 물든다.”라고 하였다.
三顯無知者。謂了知塵時。塵全是知也。終不以知知於塵也。若以知知於塵。有所不知也。若知於知。此無知不異知也。今塵即是知。不復更以不知知於無知者。但無能所之知非無知也。經云。顯現一切法。各各不相知
3. ‘무지(無知= 앎이 없음)를 드러냄’은, 이를테면, 티끌을 이해하여 알 때 티끌은 온전히 앎[知]이다. 그러나 끝내는 앎으로써는 티끌을 알지 못한다. 만약 앎으로써 티끌을 안다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음이다. 만일 앎에 대하여 안다면 이것은 무지(無知)가 지(知)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지금은 티끌이 바로 앎이므로, 다시금 알지 못하는 것으로써 앎이 없음[無知]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다. 다만 능소(能所)의 앎이 없을 뿐이지, 앎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법(一切法)을 나타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四佛出世者。今如來出現。全以塵無自性。法界緣起菩提涅槃。以為如來身也。此身通三世間。是故於一切國土一切眾生。一切事物。一切緣起。一切業報。一切塵毛等。各各顯現。如上諸義。菩提涅槃等。為佛出世也。若一處不了即不成佛。亦不出現。何以故。由不了塵處。仍是無明。是故不成佛。亦不出現也。具如性起品文思之
4. ‘부처가 세상에 출현함’은 지금 여래께서 출현하심은 온전히 티끌의 자성이 없으므로 법계연기(法界緣起)와 보리열반(菩提涅槃)으로 여래의 몸을 삼은 것이다. 이 몸이 삼세간(三世間)에 통하는 까닭으로 일체국토(一切國土)ㆍ일체중생(一切衆生)ㆍ일체사물(一切事物)ㆍ일체연기(一切緣起)ㆍ일체업보(一切業報)ㆍ일체(一切)티끌 등에 각각 나타난다.
위와 같은 모든 뜻인 보리열반 등이 부처의 출현이다. 만약 한 곳에서라도 이해하여 알지 못하면 부처를 이룸도 아니며 출현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티끌의 처소를 이해하여 알지 못하므로 무명(無明)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부처를 이룸이 아니며, 또한 출현도 아니다. 구체적인 것은 「성기품」과 같으니 생각해 보라.
五辨四依者。謂心了塵空寂不緣名相。是依智不依識。謂了塵是緣起之法非在分別。是依法不依人。謂了塵無生無相之義。不在文字。是依義不依語。謂了塵上。若具顯一切法界。非有分限。此則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
5. ‘네 가지 의지함을 말함’은 이를테면, 마음으로 티끌의 공적함을 이해하여 알고 이름과 모습에 연(緣)하지 않는 것은 ‘지혜에 의지하고 알음알이에 의지하지 아니함’이다.
티끌은 연기법(緣起法)임을 이해하여 알고 분별을 하지 않는 것은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아니함’이다.
티끌의 생겨남이 없음[無生]과 모습 없음[無相]의 뜻을 이해하여 알고 문자를 있지 않는 것은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아니함’이다.
티끌 위에 이 일체의 법계가 모두 나타나고 있고 한계가 있지 않음을 이해하여 알면, 이것은 ‘경의 뜻을 이해하여 알고 의지함이고, 경의 뜻을 이해하여 알지 못하고 의지함’이다.
六除業報者。謂塵上不了自心。謂心外有法。即生憎愛。從貪業成報。然此業報。由心迷塵妄計而生。但以有顯現。皆無真實。經云。猶如淨明鏡隨其面像現。內外無所有。業報亦如是。迷者謂塵相有所從來而復生滅。是迷。今了塵相無體。是悟。迷本無從來。悟亦無所去。何以故。以妄心為有。本無體故。如繩上蛇。本無從來。亦無所去。何以故。蛇是妄心。橫計為有。本無體故。若計有來處去處還是迷。了無來去是悟。然悟之與迷。相待安立。非是先有淨心後有無明。此非二物不可兩解。但了妄無妄。即為淨心。終無先淨心而後無明。知之
6. ‘업보(業報)를 제거함’은 이를테면, 티끌 위에서 자기의 마음을 이해하여 알지 못하고 마음 밖에 법이 있다고 하여, 바로 미워하고 사랑하므로 탐업(貪業)을 따라 과보(果報)를 이룬다. 그러나 이 업보(業報)는 마음이 티끌에 미혹하였기 때문에 망령된 생각을 내는 것이다. 다만 나타남이 있을 뿐이므로 모두 실체는 없는 것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마치 깨끗하고 맑은 거울이 거울의 면을 따라서 비친 모습을 나타남에 안과 밖이 모두 있는 것이 없듯이 업보(業報) 또한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미혹하다는 것은 티끌의 모습이 따라 오는 것이 있다고 하여 다시 생멸(生滅)을 내는 것이 미혹함이고, 지금 티끌의 모습이 체가 없음을 이해하여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미혹은 본래 오는 것이 없으며 깨달음 또한 가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허망한 마음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므로 본래는 체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새끼줄을 뱀으로 생각한 것과 같아서 본래 온 것도 없으며 또한 가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뱀은 허망한 마음으로 인하여 마음대로 생각하여 있는 것이므로 본래 체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오는 곳과 가는 곳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도리어 미혹한 것이고, 오고 감이 없음을 이해하여 알면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깨달음과 미혹함은 서로 마주보고 나란히 마주 서있는 것이므로 먼저 깨끗한 마음이 있고 뒤에 무명(無明)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두 물건이 아니므로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허망함[妄]과 허망하지 않음[無妄]만을 이해하여 알면 바로 깨끗한 마음이 되니, 결국 깨끗한 마음은 앞에 있고 무명은 뒤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라.
七定權實者。謂塵事是權。空寂是實。然實非實。以理不礙事故。權亦非權。以事體即空故。若作權解實解。此非善解。若知權實俱不可得寄言以明法體。是名善解也
7. ‘방편[權]과 실제[實]를 정함’은 이를테면, 티끌의 현상은 방편이고, 공적함은 실제이다. 그러나 실제는 실제가 아니니, 진리가 현상을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고, 방편은 방편이 아니니, 현상의 본체가 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만약 ‘방편이다’, ‘실제이다’라는 이해를 내면 ‘좋은 이해’가 아니며, 만약 방편과 실제는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말에 의탁하여서 법의 본체를 밝힌 것임을 안다면 ‘좋은 이해’라고 한다.
八明頓漸者。若於塵處。了幻相不可得。方見無相。了塵無自性。方見無生。了塵色無體。方見空。如此推尋。方見名為漸。今不待推尋。而直見諸法無性空寂。如鏡現像。不待次第。對緣即現為頓
8. ‘돈(頓)과 점(漸)을 밝힘’은 만약 티끌 처소에서 환(幻)의 모습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여 알면 바야흐로 모습이 없음[無相]을 봄이고, 티끌은 자성이 없음을 이해하여 알면 바야흐로 생겨남 없음[無生]을 봄이다.
티끌의 색은 체가 없음을 이해하여 알면 바야흐로 공을 봄이다. 이와 같이 살펴 나아가 바야흐로 보는 것이 점차[漸]이다.
지금 살펴 나아감을 기다리지 않고 모든 법의 자성이 없음과 공적함을 바로 보기를 거울 속에 비쳐 나타난 모습처럼, 차례를 두지 않고 연(緣)을 대하자마자 바로 나타나는 것이 단박[頓]이다.
九入佛海者。謂全塵處。見如上百門義。並是佛大願海。大智慧海。大方便海之所顯現。乃至一切塵。一切毛。一切國土剎海。一切佛及眾生。一切事物等。莫不皆空。是佛智慧大海無邊無盡。深廣不可測也。當知。學者若於塵處見一切法界者。即是入佛法界智慧海也。若以開合卷舒或塵內或毛孔而能資攝。一即一切。一切即一。可說即不可說。主伴自在。依正無礙。普是如來智海之業用。若人如是通達者。與如來等也
9. ‘부처님 바다에 들어감’은 이를테면, 온전히 티끌에서 위와 같은 백 가지 부문의 뜻을 보는 것이다. 아울러 이 부처님의 큰 원(願)의 바다ㆍ큰 지혜(大智慧)의 바다ㆍ큰 방편의 바다에서 나타난 것이며, 내지 일체의 티끌ㆍ일체의 터럭ㆍ일체의 땅과 바다ㆍ일체의 부처와 중생ㆍ일체의 사물 등이 모두 공아님이 없는 것이다. 이 부처 지혜의 큰 바다는 다함이 없이 깊고 넓어 헤아릴 수가 없다.
마땅히 알라. 배우는 자가 만약 티끌에서 일체의 법계를 본다면, 곧 부처 법계의 지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열고 닫고, 맒과 펼침으로써 혹은 티끌 안에서 혹은 털구멍 안에서 능히 도와 거둘 수 있다. 하나가 곧 일체ㆍ일체가 곧 하나ㆍ말할 수 있음이 말할 수 없음ㆍ주인과 손님이 자재함ㆍ의보와 정보가 걸림 없으니, 두루 이 여래 지혜 바다의 업(業과 용(用)을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통달하는 하는 것은 여래와 더불어 동등한 것이다.
十證佛地者。謂塵空無我無相是地。然此地體性。猶未清淨。以從我相彰得。了心猶未寧。亦是垢見。若作遠離空無相之念者。猶為垢心。謂有遠離之想未止也。今不作遠離之想。亦無動念者。由初得念息。近從動念處顯也。今者無作遠離之念。亦無不作遠離之念者。此地顯時。即智慧不得以方便詮。不得以文字說。當自顯然。此猶假論。若稱理而言。非智所知。如空中鳥飛之時迹。不可求依止迹處也。然空中之迹。雖無體相可得。然迹非無。此迹尋之逾廣。要依鳥飛方論迹之深廣。當知。佛地要因心相而得證佛地之深廣也。然證入此地。不可一向住於寂滅。一切諸佛法不應爾。當示教利喜。學佛方便。學佛智慧。具如此地義處。思之
10. ‘부처 지위를 증득함’은 이를테면, 티끌의 공(空)ㆍ무아(無我)ㆍ무상(無相)이 지위이다. 그러나 이 지위의 체와 성품은 아직 청정하지는 않다. 아상(我相)에 따라서 얻어 드러냄이니, 마음을 이해하여 앎에 있어서 아직은 평온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때 묻은[번뇌가 있는] 견해이다. 만약 공하여 모습이 없기 때문에 멀리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짓는 것은 오히려 때 묻은 마음이니, 이를테면 멀리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그치지 못한 것이다.
이 멀리 떠나야한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지만 처음 생각을 쉬었음으로 말미암아 움직이는 마음을 따라 나타남에 가까운 것이다. 이 멀리 떠나야 한다는 마음을 짓지 않음도 또한 멀리 떠나지 한다는 생각을 짓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 지위가 드러날 때가 지혜이니, 방편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문자로도 말할 수 없지만, 마땅히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이것도 오히려 말을 빌렸을 뿐이니, 진리라고 말한다면 지혜로 아는 것이 아니다. 마치 허공 가운데에 새가 날 때 자취가 의지하는 곳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공중 가운데에 자취는 비록 체가 없어 모습을 얻을 수 없지만 자취가 없음은 아니다. 이 자취는 찾을수록 깊고 넓은데 반드시 새의 날아가는 방향에 의거하여 자취의 깊고 넓음을 말해야 한다.
마땅히 알라. 부처 지위는 반드시 마음의 현상으로 말미암아 부처 지위의 깊고 넓음을 증득할 수 있음을. 그러나 이 지위에 증득해 들어가면 한결 같이 적멸에만 머물 수는 없으니, 일체 모든 부처의 법이 응당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마땅히 가르침의 이로움과 즐거움을 보이어 부처님의 방편을 배우게 하고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지위의 뜻이 갖추어진 곳을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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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공부한 것이 미진하여 다시 여러 가지를 참고하여 공부한 것입니다. 적은 지식으로 잘못 해석한 부분이나 오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지적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18년 11월 17일
현무(玄武) 합장(合掌).
[출처] 화엄경의해백문-10|작성자 밝은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