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국제사회론과 세계질서의 변화
I. 서론
* 주저:<무정부적 사회>(The Anarchical Society)
* 불은 영국파
* 영국파의 주요 특징은 국제관계를 체계(system)가 아니라 사회(society)로 파악한다.1)-->무정부상태에 놓여 있는 국가들간의 관계가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말과 사회를 이루고 있다는 말은 어떠한 차이가 있나?<--존재론과 인식론의 상이성에 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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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파(불) |
미국파 |
국제관계 |
사회로 파악 |
체계로 파악 |
사고의 중심 |
불은 국가와 국제사회간의 존재론적 상호규정성을 인정하면서도 국가 중심적 시각에서 국제사회론을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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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자 개체의 속성을 기초 |
인식하는 국제관계의 성격 |
국제사회는 일군의 국가들이 특정한 공동이익과 가치를 가지고,공동의 규칙들과 제도들로써 행동을 제한할 때 존재한다.따라서 국제사회는 국제체제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
국제체제란 두 개 이상의 국가들 사이에 충분한 정도의 접촉이 존재하고 있고 서로가 서로의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각각을 전체의 일부로 여길 때 존재한다. |
II .불의 국제사회론
* 국제질서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불은 질서라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봄.즉 질서는 특정한 목적과 관련해서만 말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목적을 위한 질서는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질서가 아닐 수 있다.
* 불은 어떤 사회이든 사회 그 자체가 유지되고 다른 목적들을 추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적인-일차적인 목적들이 존재한다고 가정2)하고 이러한 목적들이 달성되어 질서가 형성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첫�,그러한 기본적 목표들에 대한 공동이익의 인식이 존재.
둘�,그러한 기본적 목표들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행동의 유형을 처방해주는 규칙들의 존재.
셋�, 그러한 규칙들을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는 제도들의 존재해야 한다.
* 불의 국제사회론의 핵심은 국제관계에도 이러한 사회적인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고 국제질서가 형성되고 유지되고 있다는 것임.
* 국제질서: 국가들의 사회,또는 국제사회의 기본적인 또는 일차적인 목적들을 유지시켜주는 행위유형임
국제사회의 목표 |
폭력의 제한,약속의 준수,재산권의 안정,국제체계 및 사회 자체의 보존,개별국가의 독립과 대외주권의 유지,평화의 유지 | |
질서형성-유지되기 위한 조건이 충족되는 방법 |
근대국가 |
월등한 폭력을 소유한 중앙정부가... |
원시적 무국가 |
질서는 사회의 기본적 목표들에 대한 합의의 존재와,실제생활로부터 자연히 발생․발전하는 규칙들,그리고 도덕적․초자연적 재해 또는 개인이나 집단의 자력구제 등에 의한 규칙들의 집행을 통해서 유지 | |
국제사회 |
중앙정부도 없고 문화적 동질성도 없고 종교적․초자연적 신념의 공유도 없음 | |
국제사회에서 질서형성․유지되는 방법 |
㉠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목표에 대한 공통이익의 의식의 존재 ㉡ 규칙들의 발전 ㉢ 국제사회의 제도들:국가가 가장 중요한 제도->자력구제를 통하여 분권적으로 시행(세력균형,국제법,외교,전쟁,강대국체계) |
* 불은 그로티우스적인 입장3):근대국제체계는 일종의 사회 즉 무정부적 사회.
* 국제사회는 30년 전쟁부터..-->유럽으로부터 전세계로 파급:불은 부정적인 평가(사회적 요소들의 쇠퇴+ 초국가적인 요소들의 강조 때문임)-->“오늘날의 국제사회는 쇠퇴하고 있다.”-->대안으로서 신중세적 질서의 출현에 대해 논함
다국적 기업
1. 서론
1) 다국적기업과 국제정치
다국적기업의 국제정치에 있어서의 공과에 대한 논란은 많다. 국제정치의 새로운 주체로서 등장한 다국적기업이 과연 국제정치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신식민주의이론이 주장하듯이 국가간 분쟁을 야기시키며 더 나아가 3세계의 저발전을 심화시키며 중심국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첨병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2) 다국적기업의 정의
㉠ 용어:다국적기업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쓴 사람은 뉴딜정책기에서 TVA 장관을 지낸 D.리리엔솔이지만 이를 새로운 중요 경제현상으로 제시하고 미국의 거대기업이 여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경영관리기구를 가질 필요성을 강조한 미국의 경제잡지 <비지니스위크(1963년 4.20호)가 최초이다.
㉡ 정의: 두 개 이상의 국가에서 직접투자 혹은 간접투자의 방법으로 모든 형태의 사업에 종사하는 기업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2. 다국적기업의 분류
다국적기업을 본국․외국과의 긴밀도를 기준으로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국제기업(international corporation):본국과만 긴밀한 관계
2) 탈국가기업(transnational corporation):본국과 외국 2국과 긴밀한 관계
3) 초국가기업(supranational corporation):
3. 다국적기업이 국제정치에 미치는 영향
본국과 다국적기업간의 갈등은 1950년대 말부터..1960년대부터 주된 행위자로서 등장.
1) 국제기업의 단계에서 ㉠ 자유주의자: 다국적기업이 본국의 이익이나 정책을 대변
㉡ 맑시스트: 본국이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정책수행->짐 바브웨의 경우
2) 탈국가기업의 단계에서 ㉠ 자유주의자: 외국정부가 다국적기업을 이용할 수 있다.
㉡ 맑시스트: 다국적기업이 외국정부를 좌지우지
결론적으로 초기의 단계에서는 다국적기업과 본국과의 이해관계는 일치 그러나 탈냉전, 교통통신의 발달 등으로 mobility가 증가하여 다국적기업의 활동이 활발해짐
3) 다국적기업이 국제정치에 미치는 영향㉠ 긍정설:자본,기술,민주주의 등의 전파
㉡ 부정설: 신식민주의, 종속이론 등
4. 결론
혹자는 다국적기업이 미국의 패권하에 제공된 자유무역질서하에서 등장, 발전하였다고한다.4) 현실주의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경우 이와같이 다국적기업도 국가의 이익의 연장선에서 해석하여 제3세계를 착취한다고 볼 수 있으나 긍정적인 면도 간과하면 안된다고 봄
淸日戰爭이 동북아에 미친 영향
下關조약에서 청은 요동반도, 대만, 팽호도를 일본에 할양하기로하고 2억량의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약속+조선의 독립국임을 확인, 또한 일본에게 威海衛의 보장점령과 통상조약의 개정을 약속
그러나 삼국간섭에 의해서 일본은 청으로부터 할양받기로 되어있는 요동반도를 청국에게 반환하고, 오직 대만과 팽호도만이 일본에 인도됨.
===>㉠ 일본의 대외적 지위향상5) ㉡ 일본의 군사력에 반한 영국이 동맹을 생각 ㉢ 일본이 중국대신에 동양의 주된 세력으로 부상 ㉣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그들의 북방정책, 즉 대륙에의 발판을 만듬6) ㉤ 일본의 금본위제 채택(중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기초로) 등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도시화 대외무역 중진 ㉥ 중국의 변법자강운동을 자극 ㉦ 삼국간섭으로 중국과 일본 모두 불리해짐7)-->요동반도와 만주는 러시아의 세력권이 되버림-->러일전쟁의 씨앗 ㉧ 러시아는 한반도에도 영향력을 행사, 일본은 조선에 대해 소극적인 정책(그러나 경제적인 침략은 심화)
프리드리히 대왕
1. 18세기의 특징
18세기가 시작된 이후 국가이성은 전시대와는 상당히 다른 위치를 차지하게된다.이신론의 출현과 인간이성에 대한 높아진 신뢰는 미신과 폭정으로부터 해방되어 현세적인 행복과 복지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관념을 창조해내었다.그것은 이 시대의 사회가 종교전쟁과 내란의 단계를 벗어나 법과 평화에 대한 국가의 보호를 향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관념이었다.그러나 이 시대는 결코 어떠한 혁명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있지 않았다.오히려 기존의 국가권위를 여전히 존중하며 그것으로부터 원하는 개혁을 얻어내고자 했다.지나친 침략정신이 비판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게속적인 전쟁과 권력투쟁현상은 세력균형정치와 열강측의 편의정책을 통해 적절히 조정되어져야 하며 또한 조절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17세기의 유산으로서의 국가이성과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의 인간이성의 양립 또는 계몽사상이 국가이성이라는 마신에 대항하는 싸움, 이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국가이성에 현실이 허락하는 한 보편적인 인간이성을 부여하려는 사명과 능력을 가진 이였고 그의 전생애는 이 과제에 바쳐진 것이라 할 수 있다.
2. 프리드리히 대왕
18세기 초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1713-40은 관료제와 상비군을 바탕으로 프로이센의 절대왕정의 기초를 확립하였다.프리드리히2세 즉 프리드리히 대왕1740-86은 이 기반위에서 계몽전제군주로 자처하며 산업과 문화를 발전시키고 사법제도를 개혁했으며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7년 전쟁으로 슈레지엔을 획득한 왕이다.
그는 1734-35년 부왕이 중병에 걸렸을 때 31년이래 강하게 가진 정치적 꿈을 실현할 기회로 보았으나 부왕의 회복으로 좌절되자 그는 좀더 진지하게 철학적 학문적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그의 첫 번째 저서 <<유럽의 정치적 현상에 관한 고찰>>이 1737-38년의 전환기에 나왔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논박>>이 1739년에 쓰여졌다.볼테르에 의해 <<반 마키아벨리론>>이라는 형태로 바뀌어 40년에 세상에 알려진 이 책은 순수히 왕조적인 이해관계가 현실의 전국민과 국가전체의 진정한 기반을 결여하고 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기본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책이다.따라서 왕조적인 이해관계에 있는 18세기 독일 군주들에게 마키아벨리의 조언들은 무가치하다는 것이다.1768년의 두차례의<< 정치적 유언>>에도 그의 그런 시각은 드러나 있다.왕조는 국가의 이익을 위한 하나의 유익한 조직체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생각.그런 맥락에서 여러 가지로 불합리한 토착의 토지귀족 즉 융커는 배제되기보다는 당시의 군대가 그 질적인 면에서 필요로 하던 장교단의 양성소로서 합리화되어 융커는 국가 및 군대의 요직에 진출하여 농노제가 강화되고 군국주의의 길을 닦게된다.프로이센 국가를 단지 왕조적으로 통치되는 독일 연방국가의 유형을 극복하고자 한 이 모든 국가이성적 합리화의 노력들.국가 제 1의 공복(로안;군주는 국민에 명령하고 이해는 군주에 명령한다)이 되고자 하는 노력들. 그것은 그의 계몽주의적 이상과 상출될 수도 있다.그러나 국가이성의 공복인 자신이 계몽적 인간이성이라는 점에서 합리화된다.권력이해관계가 먼저가고 그 뒤를 철학적인 고려가 따라가는 식으로.그는 1734년에 나온 몽테스키외의 <<로마인의 쇠퇴와 번영>>에서 받은 자극을 이해관계론과 그런 식으로 연결시켰다.역사상의 한 정치인이 지닌<초월적인 정신> 즉 자신의 정신.그 맥락에서 <편의의 권리>가 아닌 <합법적 권리>에 의거한 권력정책은 이해될 수 있다.인도주의적인 사상을 통해 과도한 권력국가 사상을 순화하고 개혁하는 것.39년의 <<반 마키아벨리론>>에서 엄격한 군대규율을 지닌 상비군의 존재라는 시대적 차이를 통해 그의 계몽적 도덕적 사고를 더욱 옹호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역시 마키아벨리는 국가권력사상의 영원한 교사였고 대규모의 국가만이 대규모로 인류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다는 데에 서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대군주라는 특별한 의식을 프리드리히는 지니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1740년에 왕이 된다.제1차 실레지엔 전쟁1740-42년.1743년에 <<나의 시대의 역사>>가 쓰여진다.늑대들과 함께 같이 울부짖는 것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망치가 될 것인가 모루가 될 것인가.그렇게 국가이성의 가장 강력한 뿌리인 자기보존이라는 원초적인 충동은 실제적으로,협약도 파기할 수 있다는 권력정책으로 나타나게 된다. 1752년과 1768년의 <<정치적 유서>>와 75년의 <<나의 시대의 역사>>3판 서문에서는 조약의 파기에 제한을 가하지만 <불가항력>이라는 것은 결국 권력정치의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39년의 도덕적 관점에서 쓰인 <인민의 공복>에서의 인민은 47년 이후로는 <국가의 공복>으로 바뀌고 있다.프리드리히의 사고 방식과 표현방식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민>에서 <국가>로의 전환은 근대적인 사고 및 근대적인 국민국가로 향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단순한 주민으로서의 국민이 아닌 진정한 국민 즉 <국가>의 공복이란 국가이성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52년의 저작에서 허영심으로 인한 전쟁과 이해관계에 의한 전쟁을 구분할 때의 이해관계 역시 그런 맥락에서 쓰여진 것이다.그러나 1756년 1월 영국과의 웨스트민스터 조약체결은 외교혁명이라 불리우는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1756년 5월1일의 베르사이유 동맹)를 맺게하므로써 프리드리히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국가이해론이 하나의 통계학적인 도그마로 자리잡게 되자 그것은 정치 속에서 합리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비합리적인 것은 평가절하하는 위험을 나타나게 된 것이다.사물에 대한 우리 자신의 관찰방식에 지나친 긴장을 주어서는 안된다.그것이 7년 전쟁(1756-63;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 작센 대 프로이센 영국의 충돌-*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이 알려준 교훈이었다.그러나 프리드리히는68년의 글에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국가 이익을 추종하여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프리드리히에게 있어서 국가이해는 국민의 강력한 힘을 기반으로 하여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서 효율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의미했다.그는 정치적으로 분열된 민족에서 나타나게 될 국민적 정치적 단일체 투쟁에 관해서는 어떠한 관념도 갖고 있지 못했다.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자 프리드리히적 국가는시대에 뒤진 것이 되어버렸으며 경쟁에서 낙오가 되었다.프리드리히의 국가이성이 지니고 있었던 필연적인 비극적인 요소라면 모든 것을 하나의 주도적인 인물에게로 집중시켰다는 점이다.그러나 일개 시민이 아닌 한 사람의 군주로서 그 시대(고립적이나 아직은 상호야심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일단의 권력국가들의 시대)와 프로이센에서 출생했던 그가 국가이성을 수단으로 하여 국가이성의 공복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었고 그의 인도주의적 목표를 국가이성 속으로 흡수하려는 그의 진정한 바램은 불완전하게만 이룩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