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혜(三惠) 보고 듣고서 얻는 지혜인 문혜(聞慧), 고찰하여 얻는 지혜인 사혜(思慧), 고찰을 마치고 입정(入定)한 뒤에 수득(修得)하는 지혜인 수혜(修慧)를 가리킨다.『석화엄교분기원통초』 5권(ABC, K1510 v47, p.207a01)
석화엄교분기원통초 제5권
균여 지음
김두진 번역
9) 모든 가르침의 소전차별(所詮差別) ③
【記】 제6 단혹분제(斷惑分齊)는 어떤 사람은 “소승에 의거하거나 삼승에 의거한다면, 두 가지 뜻을 가진다”고 하였다. 첫째는 약위멸혹상(約位滅惑相; 지위를 잡아서 미혹을 멸하는 상)이고, 둘째는 기혹현위상(寄惑顯位相; 미혹에 의탁해서 지위를 드러내는 상)이다. 앞의 뜻은 만약 시교에 의거하면 삼승이 미혹을 끊는 차별을 갖추고 있으니, 이는 시교가 삼승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장(障)1)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소위 번뇌(煩惱)와 소지(所知)이다.
먼저는 이승의 번뇌장2)을 끊음을 변별한 것이니,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장(障)의 명수(名數)3)이고, 둘째는 미혹을 끊어서 과를 얻음[斷惑得果]이다. 앞의 것에 번뇌가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분별(分別)과 구생(俱生)4)이다. 총체적으로 열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탐(貪), 둘째는 진(瞋), 셋째는 무명(無明), 넷째는 만(慢), 다섯째는 의(疑), 여섯째는 신견(身見), 일곱째는 변견(邊見), 여덟째는 사견(邪見), 아홉째는 견취(見取), 열 번째는 계금취(戒禁取)이다. 이 가운데 네 가지는 오직 분별기(分別起)5)로서 의ㆍ사견ㆍ견취ㆍ계금취가 그것이다. 나머지 여섯 가지는 두 가지 종류에 다 통한다.
오식(五識)6)은 처음 세 가지 번뇌를 일으킬 수 있고 또한 분별과 구생에도 통하며, 의식에서 사사(邪師)7) 등 삼인을 사용하여 이끌기 때문에 분별이 일어남이 있을 수 있다. 의식은 열 가지로서 그 가운데 네 가지는 분별(分別)이고, 여섯 가지는 앞의 두 가지에 통한다. 말나는 오직 네 가지 번뇌가 있는데 구생이다. 여섯 가지 구생번뇌 중에서 진(瞋)과 변견(邊見)을 제외한 것이니, 진은 선하지 않지만 이 식은 유뷰무기(有覆無記)8) 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종류로서 상속하는 것이 제팔식(第八識)을 반연함으로써 찰나찰나 아(我)를 집착하기 때문에 변견(邊見)9)은 없게 된다. 또한 뒤의 삼견[後三見]과 의(疑)는 삼인(三因)을 빙자해서 생기는데, 이 식(識)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항상 서로 이어져 계속되기[相續] 때문에 제육(第六)에서 인발한 것이 아니고 오식(五識)과도 같지 않다. 이 때문에 오직 네 가지 뿐이다. 제팔식(第八識)은 총체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오직 이숙(異熟)의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10)이기 때문이다. 이 분별과 구생은 모두 삼계11)에 통한다. 진은 욕계에만 속하니, 위의 두 계의 번뇌는 모두 유부무기성이기 때문이다. 분별기(分別起)는 욕계(欲界)의 사제(四諦)에 각각 십사(十使)12)가 있어서 곧 40가지가 된다. 위의 두 계(界)에서 진(瞋)을 없애면, 제(諦)에는 따로 각각 아홉 가지가 있어서 72가지가 된다. 이를 욕계와 아우르면 합이 112가지이다. 구생(俱生)은 욕계에선 여섯 가지를 갖추고, 위의 두 계(界)에선 진(瞋)을 제거하면 각각 다섯이 있으니, 합하며 열여섯 가지가 된다. 앞의 분별과 통괄하면 모두 128가지가 된다.
【문】 앞의 우법소승(愚法小乘) 가운데서는 십사(十使)가 사제(四諦)를 미혹함을 통틀지 못했는데, 어떤 이유에서 여기서는 통틀었다고 것인가?
【답】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삼승(三乘) 중에서 번뇌(煩惱)의 공력(功力)이 점점 넓어지기 때문에 일체를 장애[障]하는 것이며, 둘째, 미혹 등의 뜻이 일체 경계에 통하기 때문이다.
【釋】 제육 단혹분제(斷惑分齊)’13)는 앞에서 이미 소의신(所依身)을 밝힌 뒤에 이러한 신(身)에 의지하여 수행함으로써 장애를 끊음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에 다음에 온 곳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표장문(標章門)이고,14) 둘째로 ‘앞의 뜻’15) 이하는 장(章)에 의지하여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만약 소승에 의거한다면’16)이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다.
【문】 어째서 소승에는 표(標)는 있는데 해석함[釋]은 없는가?
【답】 소승의 단혹(斷惑)과 대승 가운데 이승(二乘)은 같음[同]과 같지 않음[不同]이 있다. 대승 가운데 이승의 단혹(斷惑)을 밝힐 때, 같음의 뜻[同義]은 자연히 드러난다. 같지 않음의 뜻[不同]은 문답17) 중에서 나타내기 때문에 따로 밝히지 않는다.
‘만약 삼승에 의거한다면’18)은 다음과 같다.
【문】 앞의 종성장(種性障)19)에서는 합(合) 속의 삼교(三敎)를 삼승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어떤 이유로 이 장(章)은 시종이교(始終二敎)를 합하여 삼승이라고 하고, 돈교(頓敎)20)를 따로 세운 것인가?
【답】 이 장에선 이미 ‘위(位)를 잡아서 미혹[惑]을 단절하는’21) 것과 ‘미혹에 의탁해서 위(位)를 드러낸다’22)는 것을 밝혔지만, 돈교 중에는 이 상(相)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장(章)에 의지해서 개별적으로 해석함’ 중에서는 시종(始終)의 이교가 곧 이단(二段)이 된다. 시교 중에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는 삼승의 단혹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로 ‘또한 이것의’23) 아래에서는 미혹을 끊은 상[斷惑相]과 미혹의 체성[惑體性]을 변별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는 승수(乘數)와 장수(障數)를 표방한 것이고, 둘째로 ‘먼저 이승(二乘)을 변별한다’24) 아래에서는 삼승단혹(三乘斷惑)을 따로 해석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첫째로는 능단(能斷)의 승수(乘數)를 표방하고, 둘째로는 소단(所斷)의 장수(障數)를 드러낸다.
처음의 것 중에서는 다음과 같다;
【문】 어떤 이유로 앞에서는 시종이교(始終二敎)를 통틀어 들면서 삼승이라고 하고, 지금은 초교(初敎)만을 잡아서 삼승의 단혹 등을 구족(具足)한다고 말하는가?
【답】 비록 시종이교를 합하여 삼승이라고 하더라도 시교 중에서 삼승(三乘)을 구족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두 교[二敎]를 서로 대응한다면, 또한 종교(終敎)25)가 일승(一乘)임을 얻는다.
둘째의 소단(所斷)의 장수(障數) 중에서는 다음과 같다;
【문】 번뇌와 소지, 그리고 인집(人執)26)과 법집(法執)27)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답】 원측[測師]의 『유식소(唯識疏)』 초권(初卷)에서 말한다.28)
“문: 두 가지 집착[二執]과 장애[障]는 어떻게 차별되는가?
답: 안혜종(安惠宗)은 총상(總相)으로 말한 것이라서 두 가지 집착과 장애에 넓음과 좁음이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 종(宗)은 일체유루심(一切有漏心)을 모두 집착이라 이름하니, 곧 두 가지 장애[二障]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약 별상(別相)이라면’이란 것은 번뇌장(煩惱障)의 체(體)가 앞의 칠식(七識)에 통하고 제팔(第八)만을 제외한 것이니, 항상 상(相)이 계속 전전(轉展)하면서도 행상(行相)29)은 미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식(七識) 중에서는 육식과 칠식에서 일어난 아견(我見)을 아집(我執)의 체라고 하고, 그와 상응한 심(心)과 심소(心所)의 법은 하나의 경계[一境]에 반연하기 때문에 서로 쫓아서 집(執)이라고 설한다. 독두(獨頭)30)와 탐(貪) 등은 아(我)을 계교하지 않기 때문에 번뇌장이라 하더라도 아집은 아니다.
소지장(所知障)의 체(體)도 칠식(七識)에 통하지만 오직 제칠(第七)만을 제외한다. 논(論)31)에서 오직 저 사혹(四惑)32)만이 상응하고 삼위(三位)에는 없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능히 장애를 계교하는 체가 곧 법집의 체와 넒음과 좁음이 없으니, 이 모든 법에 체용이 있는 것은 모두 집이기 때문이다. 만약 호법종(護法宗)이라면, 집은 오직 혜성이 맹렬하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법(對法)33)의 제팔(第八)34)에 ‘만약 이것이 집(執)이라면 반드시 혜(惠)이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장애는 혜(惠)가 아닌 것을 통틀은 것이다. 소지(所知) 등을 덮는 것을 장(障)이라고 설했기 때문에 이 상대를 말미암아서 문득 이구(二句)를 이루는 것이니, 소위 만약 집(執)이라면 반드시 장(障)이라서 스스로 유(有)인 것은 장(障)이지 집(執)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혜(惠)를 없앤 나머지 심법(心法)35)의 미혹함[惑]이라서 다시 혜(惠)가 있는 것은 장(障)이지 집(執)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오식신(五識身)이 혜(惠)에 상응함과 같다.”
그 소문(疏文)에서 상세히 볼 수 있다.
별석(別釋) 중에 나아가면, 첫째로는 이승(二乘)의 단혹(斷惑)을 해석하고, 둘째로 ‘직진(直進)’36)의 아래에는 보살(菩薩)의 단장(斷障)을 해석한다. 앞의 것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정확히 밝힌 것이고, 둘째로 ‘그러므로 위의’37) 아래에서는 우법(愚法)과 다름을 나타낸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번뇌장을 끊고, 둘째로 ‘그 소지장’38) 아래에서는 소지장(所知障)을 기준으로 하여 단(斷)과 부단(不斷)을 말한다. 앞의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장문(章文)39)을 표방하고, 둘째로 ‘앞의 것 가운데’40)의 아래에서는 문(門)에 의거하여 따로 해석한 것이다. 이 가운데 장(障)의 명수(名數)를 해석한 것과 미혹을 끊어서 과를 얻는[斷惑得果] 것을 이단(二段)이라고 한다. 장(障)의 명수 중에는 두 겹[重]이 있으니, 첫째는 간략함으로서 오직 분별(分別)과 구생(俱生)뿐이며, 둘째는 열어서 십사(十使)가 되고, 셋째로는 넓힌 것으로서 백이십팔(百二十八)이 되니, 곧 삼단(三段)이 된다.
【문】 처음의 중(重)에서 분별과 구생이 그 이름을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답】 『유식론』의 제일(第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구생아집(俱生我執)은 무시(無始) 이래로 허망(虛妄)하게 훈습하는 내인력(內因力)41)이기 때문에, 항상 몸[身]과 함께 한다. 그리하여 사교(邪敎)와 사분별(邪分別)을 기다리지 않고서 저절로 전전하기 때문에 구생(俱生)이라고 부른다. 또한 분별아집(分別我執)은 현재의 외연력(外緣力)42)을 말미암기 때문에, 몸[身]과 함께 하지는 않는다. 사교와 사분별을 기다린 뒤에 바야흐로 일어나기 때문에 분별(分別)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기를, 사사(邪師)는 외도(外道)의 사사(邪師)이고, 사교(邪敎)는 외도(外道)에서 설한 전적(典籍)이다. 사사유(邪思惟)43)는 사교에 의거하여 사유(思惟)하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견(邪見)ㆍ견취(見取)44)ㆍ계금취(戒禁取)45)와 의(疑)46) 등은 사사(邪師) 등의 삼인(三因)에 의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분별이라고 한다.
둘째로 열어서 십사(十使)가 되는 것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십사를 배열한 것이고, 둘째로 ‘그 가운데 네 가지[四種]’47)의 아래에서는 분별(分別)과 구생(俱生)을 잡아서 다름[異]을 판별하였다. 셋째로 ‘오식(五識)을 일으킨다’48)의 아래에서는 식(識)을 잡아서 논한 것이다.
첫째 가운데 ‘총괄하여 열 가지[十種]가 있다’49)는 것은 아래의 분별과 구생에 나아감을 상대하여 그 별이(別異)를 나타내기 때문에 ‘총(總)’이라고 말한 것이다.
【문】 이 십사(十使)는 오로지 번뇌장이 되는가? 아니면 두 장애[二障]에 통하는가?
【답】 성스러운 가르침이 일정하지 않으니, 『유가(瑜伽)』50)와 『잡집(雜集)』51)에서는 오직 번뇌장이라고 하였으며, 지금은 이 뜻을 따르기 때문에 ‘번뇌장에 열 가지가 있다’52)고 한 것이다. 『유식론』과 『불지론(佛地論)』53)에서는 두 장애[二障]에 통한다고 하니, 이를테면 『유식론』54)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번뇌장이란 소위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실아(實我)인 살가야견(薩伽耶見)55)으로서 상수(上首)를 삼은 백이십팔근본번뇌(百二十八根本煩惱)와 그 부류의 온갖 수번뇌(隨煩惱)이다. 이것들은 모두 유정(有情)의 신심(身心)을 어지럽히고 괴롭게 해서 열반을 능히 장애하므로 번뇌장이라고 부른다.
소지장(所知障)은 소위 변계소집의 실법(實法)인 살가야견으로서 상수를 삼은 견(見)과 의(疑)와 무명(無明)과 애(愛)와 에(恚)와 만(慢) 등이다. 소지(所知)의 경계와 무전도성(無顚倒性)을 덮어서 보리(菩提)를 능히 장애하므로 소지장이라고 한다.”
풀어서 말하면, 백이십팔 근본번뇌를 모두 번뇌장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십사(十使)는 번뇌장에 통하게 된다. 소지장 가운데 견(見)은 오견(五見)이요, 애(愛)는 소위 탐이며, 에는 곧 진(瞋)이고, 의(疑)와 무명(無明)과 만(慢)은 이름과 같기 때문에 십사는 또한 소지장에 통하게 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지엄56)은 “번뇌와 소지의 두 장애[二障]를 분별하여 번뇌는 오직 번뇌일 뿐이며, 수번뇌(隨煩惱)도 또한 그렇다”고 말하였는가?
【답】 아래에서57) 또한 이르기를, “만약 상성문(相成門)을 잡는다면 두 장애에 통하게 된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불지론』과 『유식론』에서 두 장애[二障]에 통한다고 한 것은 상성문을 잡았기 때문에 서로 다르지[相違] 않은 것이다.
십사(十使)는 열고 합함[開合]이 같지 않으니, 이를테면 『유식론』58)에서는 오견(五見)을 합(合)하여 하나로 삼기 때문에 오직 여섯 가지가 있을 뿐이지만, 그러나 『유가(瑜伽)』59)와 『잡집(雜集)』60)은 오견을 열기[開] 때문에 십사가 된다. 그 본말(本末)을 논한다면 십사는 부정(不定)의 네 가지와 수번뇌(隨煩惱)의 스무 가지에 대하여 근본이 되고, 십사 안에 나아가서는 앞의 다섯[五]이 본(本)이 되고 오견(五見)이 말(末)이 된다.
십사를 해석한 것은 원측(測師) 스님의 『유식소(唯識疏)』와 같으니, 신견(身見)61)은 몸[身]을 나[我]라고 집착하기 때문이요, 변견(邊見)은 유무(有無)와 단상(斷常)을 계교한 것으로서 이를테면 유(有)에 집착해서 무(無)를 폐하고 무에 집착해서 유를 폐하여 한 쪽에 집착하기 때문에 변견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견(邪見)은 인과(因果)를 배척해서 없애기 때문이며, 견취(見取)는 자견(自見)으로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요, 계금취(戒禁取)는 계가 아닌 것으로써 계(戒)를 삼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우계(牛戒)ㆍ구계(狗戒) 등을 실계(實戒)라고 여기는 등이다.
둘째로 ‘분별과 구생을 잡아서 다름[異]을 변별한 것’ 중62)에서 네 가지는 오직 분별일 뿐이고, 여섯 가지는 두 가지에 통하기 때문에 분별(分別)에는 열 가지가 있으며, 구생에는 여섯 가지 있으므로 합하여 열 여섯 가지를 이룬다.
셋째로 ‘식(識)을 잡아서 분별한 것’ 중63)에 오식(五識)에는 세 가지가 있고, 의식(意識)에는 열 가지가 있으며, 말나(末那)에는 네 가지가 있기 때문에 합하면 열 일곱 가지가 된다. 만약 분별과 구생을 나눈다면, 의식의 분별이 일어남에는 열 가지가 있고 구생에 여섯 가지가 있다. 오식의 세 가지 가운데 각각 분별과 구생이 있기 때문에 여섯 가지가 된다. 말나에 오직 네 가지가 있으니 구생을 합하면 스물 여섯 가지가 된다.
‘의식(意識)을 사용하는 가운데 삼인(三因)에 이끌림을 말미암기 때문에’64)라는 것은 오식(五識)을 이루어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오식은 오직 오경(五境)에 대한 것일 뿐 스스로는 분별이 없지만, 그러나 삼인을 갖춘 의식은 오식을 똑같이 반연하기 때문에 오식 가운데 또한 분별을 일으킴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의식은 열 가지를 갖추었다’65)라는 것은 의식이 곧 강분별식(强分別識)이므로 열 가지를 모두 일으키는 것이다. ‘진(嗔)은 오직 불선(不善)일 뿐이다. 이 식(識)은 유부무기(有覆無記)이기 때문이다’66)라는 것은 말나(末那)가 염오식(染汚識)67)으로서 성도(聖道)를 뒤덮어 장애하기 때문에 유부(有覆)라 하며, 따로 선악을 기억함이 없기 때문에 무기(無記)라고 이름하니, 그러므로 식은 곧 유부무기이고 진(嗔)은 곧 불선(不善)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우이일류(又以一類)’68)라고 한 것에서, 변견(邊見)은 유(有)에 집착해서 무(無)를 폐하고 무에 집착해서 유를 폐하여 오직 한 쪽만을 볼 뿐이요, 말나는 오직 제팔(第八)을 나[我]라고 여김을 반연할 뿐이기 때문에 변견은 없는 것이다.
【문】 오직 안을 반연하고 밖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곧 이는 변견(邊見)인데, 어째서 변견이 없다고 하는가?
【답】 두 변[二邊] 가운데 그 하나를 보기 때문에 변견이 된다. 말나(末那)는 오직 안을 반연하기 때문에 변견이 없는 것이다. ‘우이후삼견(又以後三見)’69) 등은 말나가 삼인(三因)에 의거하지 않기 때문에 분별을 일으킴이 없는 것이다.
‘우유항상속(又由恒相續)’70) 등은 반드시 집착[執]을 조복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의문을 가지고 말하기를, “오식(五識)은 비록 분별하지 않더라도 삼인(三因)을 의식을 갖추어서 똑같이 반연하기 때문에 또한 분별을 일으킴이 있다고 하였으며, 그렇다면 말나가 비록 의식을 분별하지 않더라도 똑같이 반연하기 때문에 또한 분별을 일으킴이 있는 것이다”고 하였으며, 그러므로 지금 답하기를, “말나는 항상 상속하여 반연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제육(第六)71)에 이끌린 바가 아니므로 오식과는 같지 않다”72)고 하였다.
‘제팔식(第八識)에는’73)이라고 한 것은, 원효[曉師]74)가 말하기를, “제팔식 중에서는 장(障)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를테면 제팔은 백정무기식(白淨無記識)이기 때문에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 장주는 “만약 시교(始敎)를 잡는다면 뇌야(賴耶) 중에서 장(障)은 일어나지 않고, 종교(終敎)를 잡는다면 뇌야 중에서도 또한 장(障)은 일어난다”고 하였다.
세 번째로 ‘넓게는 백스물여덟 가지가 된다’고 한 것은 경문에 나타나서 알 수 있다. ‘어떤 이유로 앞의 우법소승(愚法小乘)’75) 등은 소승 가운데 구십팔사(九十八使)의 뜻을 가지고서 이 물음을 제기한 것이니, 이를테면 원효의 『이장장(二障章)』76)에 이르기를, “셋째로 구십팔사문(九十八使門)을 밝힌 것에서 견도소단(見道所斷)77)에는 여든여덟 가지가 있고, 수도소단(修道所斷)78)에는 열 가지가 있으니, 총괄해서 구십팔사(九十八使)가 된다. 여든여덟 가지라는 것은 이른바 욕계(欲界)의 고(苦)의 아래에 열 가지가 있고, 도(道)의 아래에 여덟 가지가 있는 것이다.
소위 ‘두 가지 견[二見]을 없앤 나머지 이제(二諦)’ 아래는 각각 일곱 가지[七種]가 있으니, 말하자면 두 가지 견을 제거하고, 계취(戒取)를 없애며, 위의 두 세계 가운데 각각 진에(嗔恚)를 제거한 것이다. 나머지는 욕계와 같으며, 수단(修斷)에는 열 가지가 있는데 앞의 설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욕계의 고제(苦諦)는 열 가지를 갖추고, 도제(道諦) 가운데는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의 두 가지 견[二見]을 없애기 때문에 오직 여덟 가지가 있을 뿐이요, 집(集)과 멸(滅) 이제(二諦) 중에는 두 가지 견 및 계취(戒取)를 없애기 때문에 오직 일곱 가지가 있을 뿐이니, 합하면 서른두 가지가 되고, 위의 계 가운데서 진(嗔)을 없애면 나머지는 욕계와 동일하여 각각 스물 여덟 가지가 있으니 합하면 쉰 여섯 가지가 있으며, 욕계를 통틀면 서른 두 가지이기 때문에 합치면 팔십 팔 가지가 된다.
구생(俱生)의 여섯 가지 가운데서 두 가지 견[二見]을 없앤다면 욕계에 네 가지가 있고, 위의 두 계에서는 진을 없애면 각각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합하면 열 가지가 되며, 견단(見斷)의 여든 여덟 가지까지 통틀기 때문에 합하면 구십팔사(九十八使)가 있으니, 그러므로 구십팔사문 가운데 신(身)ㆍ변(邊)의 두 가지 견은 오직 고제를 미혹하고, 계취(戒取)는 고제(苦諦)ㆍ도제(道諦)를 미혹한다. 이 때문에 『잡심송(雜心頌)』에 이르기를,79) “고(苦)의 아래에서는 일체를 갖추고, 집(集)ㆍ멸(滅)은 세 가지 견[三見]을 여의며, 도(道)는 두 가지 견[二見]을 제거하고, 위의 계에서는 에(恚)를 행하지 않으니, 어떤 이유로 지금 대승(大乘) 가운데서 십사(十四)는 사제(四諦)를 통틀어 미혹하는가?”라고 하였으니, 묻는 뜻은 이와 같다.
대답 가운데 ‘일이삼승(一以三乘)’80) 등이라고 한 것에서 소승번뇌(小乘煩惱)는 오직 인공(人空)81)을 장애하기 때문에 공력(功力)은 넓지[寬] 않은 것이요, 삼승번뇌(三乘煩惱)는 두루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을 장애하기 때문에 넓은 것이다.
‘또한 미혹을 말미암는 등은 그 뜻이 일체 경계를 통틀기 때문에’82)라고 한 것에서 어떤 사람은 “앞의 해석은 능히 장애하는 공능[能障功能]을 잡은 것이고, 뒤의 해석은 미혹된 바의 경계[所迷境]를 잡았다”고 말하였으나, 지금의 해석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앞의 해석은 대승(大乘)이 소승(小乘)과 다르기 때문에 번뇌가 넓어서 일체를 널리 장애하는 것이고, 뒤의 해석은 대승과 소승을 묻지 않고 십사번뇌(十使煩惱)가 모두 무명(無明)을 전도(顚倒)의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전도의 근본인 무명은 사제(四諦)를 통틀어서 미혹하기 때문에 말(末)이 본(本)을 쫓아서 일체의 경계를 통틀어 미혹하게 되지만, 그러나 소승은 행(行)에 대하여 미혹을 설하기 때문에 오직 아흔 여덟 가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원효가 이르기를,83) “십번뇌(十煩惱)는 총괄해서 세 가지로 나누니, 이른바 전도의 근본과 전도의 체(體), 전도의 등류(等流)이다. 전도의 근본은 말하자면 무명이며, 전도의 체는 말하자면 살가야견(薩迦耶見)과 변견(邊見)의 일분(一分)과 견취(見取)와 계취(戒取), 그리고 탐(貪)이며, 전도의 등류(等流)는 앞의 것을 제외한 나머지이다.84)
전도의 근본인 무명에 또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소위 상응(相應) 및 독행(獨行)이다.85) 독행무명(獨行無明)은 소위 탐(貪) 등의 모든 번뇌가 얽힘을 말하는데, 다만 고(苦) 등 모든 제(諦)의 경계 속에서 이치대로 뜻을 짓는 힘을 말미암지86) 않기 때문에 덮고 가로막고 어둡고 어리석은[覆障暗昧] 심법(心法)을 간별해서 실답게 알지 못하니, 이를 이름하여 독행무명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에서 만약 바르지 않은 작의(作意)를 말미암아서 고제(苦諦)를 추구(推求)한다면, 덮고 가로막고 어둡고 어리석음[覆障暗昧]을 실답게 알 수 없다. 이 무명(無明)에 의거하여 받은 것[受者]을 헤아린다면, 이 아견(我見)을 쫓아서 나머지 미혹[餘惑]을 일으킴을 갖추는 것이니, 이와 같은 열 가지는 모두 고제를 미혹한다. 만약 집제(集諦)를 추구한다면 역시 실답게 알 수 없으니, 이것에 의거하여 근본을 삼아서 작자(作者)를 헤아린다면, 이러한 열 가지가 모두 집제를 미혹한다.
이 두 가지는 바로 인연이 의지한 곳을 미혹했기 때문에 멸도(滅道)의 두려움을 낳지는 않는다. 또한 이치대로 뜻을 짓지 않음을 말미암아서 멸제(滅諦)를 추구한다면 실답게 알 수 없으니, 이 무명(無明)에 의거하여 청정한 자아를 헤아린다면, 이것이 우선이 되어서 나머지 미혹을 갖추어 일으키고, 이와 같은 열 가지는 모두 멸제를 미혹한다.
도제(道諦)를 추구하는 것도 실답게 알 수 없으니, 이 무명에 의거해서 아는 자와 보는 자를 헤아린다면, 이들 열 가지는 곧 도제를 미혹한다.
이 두 가지의 무명(無明)이 일으킨 번뇌는 도리어 멸도에서 두려운 생각을 낳으니, 그 근본대로 제의 이치[諦理]를 추구하지 않고 곧바로 오온(五蘊)을 반연해서 아(我) 등을 헤아리게 되는데, 이와 같이 일체가 모두 고제를 미혹한다. 이 뜻을 말미암기 때문에 사제(四諦)의 아래에는 각각 열 가지의 번뇌의 미혹된 집착이 있으니, 『유가(瑜伽)』87)에서 설한 바와 같다”고 하였다. 지금은 뒤의 해석이 합당하다.
【記】 두 번째 단혹득과(斷惑得果)는 우선 분별을 끊는 것인데, 세 사람이 있다. 첫째로 만약 묶인 것으로부터 진견도(眞見道)88)에 들어가면, 찰나에 갑자기 삼계(三界)에서의 사제(四諦)의 분별번뇌(分別煩惱)를 끊고 떠나서 예류과(預流果)89)를 얻는다. 둘째로 만약 배리욕인(倍離欲人)이라면, 진도(眞道)에 들어감과 아울러 배리욕(倍離欲)90)을 끊어서 일래과(一來果)91)를 얻는다. 배리욕이라는 것은 소위 범부일 때에 욕계의 수혹(修惑) 아홉 품 가운데 앞의 여섯 품을 조복하여 끊기 때문에 배리욕이라고 하는데, 견도(見道)92)에 들어 갈 때 앞에서 조복한 바를 영원히 끊기 때문에 그 과를 얻게 된다.
셋째로 만약 이리욕인(已離欲人)이라면, 진견도에 들어감과 아울러 아홉 품을 끊고서 불환과(不還果)93)를 얻으니, 『유가(瑜伽)』에서 “견도과(見道果)에 들어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그 응하는 바를 쫓아서 삼과(三果)를 증득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음으로 구생(俱生)을 끊는 것인데, 제육식(第六識)의 구생(俱生)은 구지(九地)에 각각 아홉 품이 있다.
또한 수도(修道)에 나아가는 사람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점차적으로 출리(出離)하는 것으로서 욕계의 아홉 품 가운데 앞의 여섯 품을 모두 끊고서 일래과(一來果)를 얻고, 아홉 품을 모두 끊고서 불환과(不還果)를 얻으며, 위의 두 경계[二界]를 모두 끊고서 아라한과(阿羅漢果)94)를 얻는다. 둘째로 단박에 출리(頓出離)하는 것으로서 초과(初果)를 얻고 나면 단박에 삼계를 끊고 점차 아홉 품을 없애자 곧 아라한과를 얻어서 다시 나머지 과(果)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욕계의 아홉 품의 수혹(修惑)과 위 두 가지 계(界)와 합쳐서 세 가지 아홉 품의 각각 처음의 한 품을 일시에 단박에 끊기 때문에 단박에 삼계를 끊는다고 하고, 내리 아래의 아홉 품은 하나하나 따로 끊기 때문에 점차로 없앤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점차로 끊음[漸斷]이 있는가 묻는다면, 삼계법(三界法)을 단박에 반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러므로 『대법론(對法論)』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단박에 출리하는 것은 소위 제(諦)의 현관(現觀)에 들어가고 나서 지(止)95)에 의거하여 아직 정발출세도(定發出世道)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단박에 삼계의 일체번뇌(一切煩惱)를 끊는데, 그러나 품품(品品)마다 따로 끊으면 오직 이과(二果)만을 세울 뿐이니 이른바 예류과(預流果) 및 아라한과이다.”
또한 넓게 『지단경(指端經)』 등을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서 설한 대로이다. 그 말나의 번뇌행상(煩惱行相)이 미세하여 앞의 점단(漸斷)과 돈단(頓斷)의 두 사람이 모두 비상지(非想地)의 미혹과 더불어 일시에 단박에 끊는다.
그래서 『유가』에 이르기를, “말나에 상응하는 임운(任運)의 번뇌는 오직 비상처(非想處)와 더불어 끊기 때문에 일시에 단박에 끊는 것이니, 나머지 미혹을 점차로 끊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문】 어떤 이유로 앞의 우법이승(愚法二乘)에는 단박에 출리(出離)함이 없었는데 이 속에서는 있는 것인가?
【답】 앞의 열등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이는 우법이승이 이러한 뛰어난 지(智)가 없음을 초과하는 것이다. 저 교(敎)의 열등함을 드러내서 방편으로 점차 인도하여 저 수승한 지혜의 욕망을 일으킴으로서 소승을 버리고 대승을 쫓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설을 만든 것이다. 그것은 말나의 미혹을 멸하는 일이 소승에는 없다는 것을 논하고 있으니, 오직 이에 준하여 알아라. 이는 이른바 이승(二乘)이 번뇌장을 끊음이라고 한다.
【釋】 ‘둘째로 단득과(斷得果)’96)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분별을 끊고 뒤에는 구생(俱生)을 끊는다.
처음의 것에 대한 문답이다.
【문】 배리욕인(倍離欲人)과 이리욕인(已離欲人)은 함께 구생을 끊고, 일래과[一來]와 불환과(不還果)를 얻는데, 어째서 ‘먼저 분별을 끊음에 세 사람이 있다’97)고 말하는가?
【답】 만약 대승을 잡는다면, 견도(見道)로 분별을 끊고 수도(修道)로 구생을 단절한다. 그리고 겸하여 수혹(修惑)98)을 단절하기 때문에 일래과 등을 얻을 뿐이다.
이 가운데 처음의 한 사람은 방편위(方便位)에서 견소단(見所斷)99)을 조복하고, 진견도(眞見道)에 들어가 앞에서 조복한 바를 끊어서 예류과(預流果)를 얻는다. 두 번째 사람은 방편위 가운데 견소단 및 수혹 중 앞의 여섯 품을 조복하기 때문이다. 앞의 여섯 품을 끊는 것은 미처 끊지 못한 것의 갑절이기 때문에 ‘배리욕(倍離欲)’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 사람은 방편위 가운데 견소단 및 수혹의 아홉 품 등을 조복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곧 차제인(次第人)이고, 뒤의 두 가지는 곧 과초(果超)이지 행초(行超)는 아니다.
이 가운데 사구(四句)가 있다. 혹 행과(行果)100)와 더불어 불초(不超)도 있으니, 차제인(次第人)과 같다. 말하자면 이 사람은 방편위 가운데 견소단(見所斷)을 조복하고 진견도(眞見道)에 들어가서 앞에서 조복한 바를 끊어 예류과(預流果)를 얻고, 일래향(一來向)101)에 서서 욕계 수혹(修惑) 가운데 앞의 여섯 품을 끊고서 일래과를 얻으며, 불환향102)에 서서 뒤의 세 품을 단절하고 불환과(不還果)를 얻고, 나한향(羅漢向)에 서서 위의 두 계(界)의 수혹(修惑) 아홉 품을 끊고서 아라한과[羅漢果]를 얻으니, 그러므로 이는 곧 아래의 ‘점차적으로 출리(出離)하는103) 사람’이다.
혹 행과(行果)와 아울러 초(超)도 있으니, 말하자면 이 사람은 방편위 가운데 견소단 및 욕계 아홉 품의 수혹(修惑)을 조복하고, 또한 위 두 계(界)의 사선(四禪) 및 사공(四空)104) 중에서 처음의 삼공(三空)의 장애를 조복하고, 진견도에 들어가서 앞에서 조복한 바를 끊고서 불환과를 얻게 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비상결(非想結)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사과(第四果)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앞의 두 과(果)를 초월하여 제삼과(第三果)를 얻기 때문에 과초(果超)라고 말하고, 비로소 위 두 계(界)의 수혹을 끊어서 아라한을 향하는 일을 짓기 때문에 행초(行超)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 사람은 이리욕인(已離欲人)에 속한다.
혹 행초(行超)와 과불초(果不超)도 있으니, 말하자면 이 사람[人]은 방편위(方便位) 가운데 견소단(見所斷)을 조복하고, 또한 수혹(修惑)의 아홉 품 중에 앞의 다섯 품을 조복하고, 진견도에 들어가서 앞에서 조복한 바를 단절하여 예류과를 얻게 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제육품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래과를 얻지 못해서 과불초(果不超)라 이름한다. 그러나 앞의 다섯 품을 단절하여 일래향사(一來向事)를 짓기 때문에 행초(行超)라고 말한다.
혹은 과초(果超)와 행불초(行不超)도 있으니, 배리욕인(倍離欲人) 및 이리욕인(已離欲人) 등과 같다. 말하자면 배리욕인은 진견도(眞見道)에 들어가서 견소단(見所斷)과 수혹(修惑)의 앞 여섯 품을 단절하기 때문에 일래과를 얻으니, 그러므로 초과(初果)를 초월하여 제이과(第二果)를 얻기 때문에 과초라고 말한다. 그러나 견소단을 단절하여 이미 초과행(初果行)을 짓기 때문에 행불초라 한다. 이리욕인은 진견도에 들어갈 때 견소단을 끊고 또한 수혹의 아홉 품을 끊어서 불환과를 얻으니, 그러므로 앞의 두 과를 초월하기 때문에 과초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앞의 이과행(二果行)을 지었기 때문에 행불초라 한다.
둘째로 구생(俱生)을 끊는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육식구생(六識俱生)을 단절하는 것이고,105) 둘째 ‘말나(末那)’106)의 아래는 말나구생(末那俱生)을 단절하는 것이다.
‘점차적으로 출리(出離)’107)는 앞의 제일구(第一句)에서 밝힌 것과 같고, ‘단박에 출리(出離)’108)는 곧 이향이과인(二向二果人)이다. 말하자면 견도에 들어가서 초과를 얻은 뒤 단박에 삼계를 끊고 바로 나한을 얻기 때문이다. 또한 일향일과인(一向一果人)이 있으니, 이는 곧 대독각(大獨覺)이다. 이 사람은 견도에 들어갈 때 단박에 삼계의 견수번뇌(見修煩惱)109)를 끊고서 처음의 삼과(三果)를 초월하여 나한과를 얻기 때문에 일향일과라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점단(漸斷)이 있는가’110)라고 한 것에서, 어떤 사람은 “단박에 출리하는 가운데 ‘점차 아홉 품을 없애서’111)라는 말로 인하여 물은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지금의 해석에서는 앞의 점차적인 출리로 인하여 물은 것이니, 말하자면 이미 ‘삼계(三界)의 법(法)을 단박에 반연할 수 없다’112)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단박에 출리한다면’이란 것은 단박에 두 계(界)를 반연하기 때문에 그렇다.
‘제(諦)의 현관(現觀)’113)이라는 것에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십육심(十六心) 가운데 제십육심(第十六心)이다”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제십오심(第十五心)이다”라고 하였다.
‘앞의 우법이승(愚法二乘)에는 단박에 출리함이 없다’114)고 한 것은, 앞 문장에서는 우법이승을 변별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앞에서 ‘만약 소승에 의거한다면’, 혹은 ‘만약 삼승에 의거한다면’이라고 표방하였기 때문이다. ‘그 말나(末那)에서 준하여 알라’115)까지는 말나멸혹(末那滅惑)은 소승에 없다는 것과 ‘단박에 출리함이 없다’는 해석에 준하라는 것이다.
【記】 그 소지장(所知障)은 적멸에 취향(趣向)하는 자가 무여(無餘)에 들어갈 때 일시에 모두 끊어지지만, 이것은 오직 비택멸(非擇滅)이다. 그 나머지 일체는 단(斷)과 부단(不斷)이 있으니, 혜해탈인(慧解脫人)116)은 부단(不斷)이고 구해탈인(俱解脫人)117)은 부분적으로 소단(所斷)이 있다. 팔해탈장(八解脫障)118)의 불염무지(不染無知)는 팔승해(八勝解)를 닦아야만 대치(對治)되기 때문이니, 『유가(瑜伽)』에서 “또한 모든 해탈은 소지장의 해탈을 말미암아 드러나는데, 성문과 연각 등은 소지장에서 마음으로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시교(始敎)는 우법(愚法)을 이끌어서 점차 대승을 향하게 하기 때문에 이 교를 안립한 것이니, 저것보다 깊고 뛰어나기 때문에 소지장 또한 나누어 끊음[分斷]을 허락한다. 그러나 위의 소단(所斷)은 우법과 같지 않으니 그것은 오직 번뇌의 얻음을 끊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곧 그렇지 않고 종자(種子)를 끊었기 때문이다.
【釋】 ‘제2 소지장을 끊음’[斷所知障] 중에서 ‘오직 비택멸(非擇滅)이다’119)라고 한 것은 무여(無餘)에 들어갈 때 신(身)과 지(智)가 함께 멸하여서 영원히 끊어 다하기 때문에 ‘멸(滅)’이라고 말했을 뿐이지 지(智)가 멸하기 때문은 아니다.
‘혜해탈(惠解脫)에서 부분적으로 소단(所斷)이 있다’120)에 이르기까지는 오직 혜(惠)가 해탈할 뿐이고 심(心)은 해탈하지 않기 때문에 혜해탈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심혜(心惠)가 모두 해탈하기 때문에 구해탈(俱解脫)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팔해탈장(八解脫障)의 불염무지(不染無知)’121) 등에서는 비록 부분적으로 끊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법집(法執)을 단절함은 아니고, 오직 정장(定障)의 불염무지를 끊을 뿐이다. ‘또한 『유가(瑜伽)』에서 ’모든 해탈은 소지장(所知障)의 해탈을 말미암아 드러나는데’122)라고 한 것에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른 뜻[別義]를 인용하여 이루었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해석은 논(論)을 인용하여 앞의 해석에 더하여 나타낸 것이지 다른 의미는 아니다.
‘소지장에서 마음으로 해탈을 얻는다’123)고 한 것은 단지 혜해탈(惠解脫)만은 아니고 마음도 또한 해탈하기 때문에 구해탈(俱解脫)이니, 그러므로 앞의 ‘구해탈인(俱解脫人)은 소지(所知)를 나누어 끊는다’124)라 한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둘째로 우법(愚法)과 다름을 나타낸 것 가운데 ‘그러므로 위의 소단(所斷)은 우법과 동일하지 않다’125)고 한 것에서, 어떤 사람은 “오직 소지(所知)를 나누어 끊음을 잡았을 뿐이다”라고 말하였지만, 지금 해석에서는 위에서 밝힌 이승단혹(二乘斷惑)이 곧 우법(愚法)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오직 번뇌(煩惱)의 얻음을 끊음으로써’126)라고 한 것은, 대승 가운데에서 뇌야(賴耶)가 모든 법의 의지처가 됨을 밝히기 때문에 뇌야식 중에서 번뇌의 종자[煩惱種]를 세우고, 소승 중에서 뇌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삼세득(三世得)을 세워서 모든 법의 의지처로 삼으니, 그러므로 소승은 번뇌의 얻음을 끊고 대승은 뇌야의 종자[賴耶種]를 단절하는 것이다.
삼세득에서 법전득(法前得)은127) 곧 과거장(過去藏)이니 소를 끄는 사람[牽牛人]과 같고, 법구득(法俱得)128)은 곧 현재장(現在藏)이니 소를 타고 가는 사람[乘牛人]과 같으며, 법후득(法後得)129)은 곧 미래장(未來藏)130)이니 소를 몰고 가는 사람[驅牛人]과 같다. 미래장 가운데 여러 법을 세움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삼세득을 세운 것이다.
【記】 직진(直進) 보살의 미혹을 끊음은 두 장애를 모두 끊는 것이다. 또한 번뇌장 가운데 이승(二乘)이 계(界)를 잡아서 품을 나눈 것과는 같지 않으나, 다만 두 장애에서 분별하여 일어나는 것은 지전(地前)131)에서 현행(現行)132)을 조복하고, 초지(初地)133)의 진견도(眞見道) 때에 한 찰나에 단박에 그 종자[種]를 끊는다. 구생 가운데 번뇌장은 초지 다음부터 자재하게 능히 끊지만 남겨두기 때문에 끊지 않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인가?
【답】 윤생섭화(潤生攝化)하기 때문이고,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소지장을 끊기 위함 때문이고, 그리고 대보리(大菩提)를 얻기 위함 때문이다.
그래서 『섭론』에서는 “미혹을 남겨둠으로부터 미혹이 다하기까지 부처의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한다”라고 한 것이다. 풀어서 말하기를, ‘미혹을 다함은 곧 소지장이 다한 것이니, 바로 번뇌장을 남겨둠을 말미암아서 승행(勝行)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위(位)에 이르러서 불과(佛果)를 증득한다’고 하였다. 또한 『양섭론(梁攝論)』에서 이미 이르기를 “종자(種子)에 남겨둔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번뇌장의 종자가 금강위(金剛位)에 이르게 됨을 알아야 한다.
소지장의 행상(行相)134)이 미세하기 때문에 바로 보살도(菩薩道)를 장애하니, 그러므로 지지(地地)마다 나누어 끊다가 반드시 불지(佛地)에 이르러서 총체적으로 다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서 곧 두 장애와 수혹(修惑)이 함께 불지(佛地)에 이른다고 설한 것이니, 그러므로 『대법론(對法論)』에 이르기를, “또한 여러 보살이 십지(十地)의 수도위(修道位) 가운데서 오직 소지장의 대치도(對治道)만을 닦을 뿐이지 번뇌장을 끊지는 않는다. 보리(菩提)를 얻을 때 단박에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고서 단박에 나한과 여래를 이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말나구생(末那俱生)은 행상(行相)이 미세하기 때문에 또한 앞에서 불지(佛地)에 이르러 다하는 것과 같다.
【釋】 직진(直進)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승에 대하여 다름을 변별한 것이고,135) 둘째, ‘단지 두 장애에서’136)의 아래는 복(伏)137)과 단(斷)의 분제(分齊)138)를 밝혔다. 앞의 것 가운데 ‘두 장애를 모두 단절한다’139)함은 이승은 오직 번뇌장을 끊을 뿐이고 소지장은 끊지 않으니, 설사 나누어 끊는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단절하지는 못한다.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두 장애를 영원히 끊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번뇌장 가운데 이승(二乘)이 계(界)를 잡아서 품(品)을 나는 것과는 동일하지 않다’140)고 한 것은 의심을 떨쳐버린 것이다. 의심하여 말하기를, “번뇌를 끊음의 뜻은 이승과 동일한가?”라고 하였는데 대답의 뜻은 경전의 글과 같다.
【문】 이 교의 두 장애가 식(識)에 상응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답】 이 교의 뜻에서는 진여(眞如)는 응연(凝然)해서 모든 법을 짓지 않기 때문에 생멸뇌야(生滅賴耶)를 건립하여 모든 법의 의지처로 삼는다. 그러므로 뇌야식(賴耶識)은 곧 백정무기(白淨無記)이기 때문에 장애는 모두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육칠식(六七識) 중에 두 장애를 건립하더라도 단지 이 장애의 종자는 본식(本識)141)에 있으니, 그 육ㆍ칠식이 일으킨 바의 장애는 십지(十地) 중에서 점점 조복하여 끊고 불지(佛地)142)에 이르러서 일체가 끊어져 다하여 불과(佛果)를 얻는 것이다. 그 때 또한 ‘식(識)을 돌이켜 지(智)를 이룬다’ 하고, 또한 ‘청정한 팔식(八識)을 드러낸다’고 하니, 이 때문에 저 교(敎) 중에서 삼성(三性)의 유무(有無)를 논한다면 변계(遍計)는 곧 없고 의타와 원성[依圓]은 있는 것이다. 만약 관행(觀行)의 순서를 잡는 것이라면, 염분의타(染分依他)는 곧 소견(所遣)이고, 정분의타(淨分依他)는 소견이 아니다.
【문】 어째서 소지장이 육칠식(六七識)에 통함을 알 수 있는가?
【답】 『유식』143)의 제구(第九)에 이르기를, “소지장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을 실법(實法)이라 집착하고 살가야견(薩迦耶見)을 상수(上首)로 삼아서 견(見)과 의(疑)ㆍ무명(無明)ㆍ애(愛)ㆍ에(恚)ㆍ만(慢) 등이 소지경(所知境)과 무전도성(無顚倒性)을 덮어서 능히 보리를 장애하는 것을 소지장이라고 한다. 이 소지장은 결정코 이숙식(異熟識)과 함께 하지 않으니, 미미하고 열등하기 때문이고, 무명(無明)과 혜(惠)의 수(數)에 더불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법공지품(法空智品)이 더불어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칠전식(七轉識) 안에서는 그 응함에 따라서 적기도 하고 많기도 하니, 번뇌의 설명과 같다”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면, ‘이 논의 문장에 의거하면 소지장도 또한 육칠식(六七識)에 통한다’는 것이다.
지엄[儼公]의 『문답』 초권(初卷)144)에 이르기를, “말나식(末那識)은 삼승교(三乘敎)에 의거하면, 그 식(識)이 사혹(四惑)145)을 일으키더라도 법집(法執)은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면 이 지엄 스님의 뜻은 말나 가운데서는 법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안혜보살(安惠菩薩)146)은 말나식에서 법집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고, 호법보살(護法菩薩)147)은 말나식에서 법집이 함께 일어난다고 했는데, 지엄은 안혜의 설을 쫓았기 때문에 말나에서 법집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고, 법장[藏師]은 호법의 뜻을 좇았기 때문에 말나에서 법집이 함께 일어난다고 하였다”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장주(章主:法藏)는 말나 중에서 법집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설은 경문에 합치된다.
둘째로 복단분제(伏斷分齊)를 밝힌 것 가운데서 첫째는 분별(分別)의 일어남 끊은 것이고, 둘째, ‘그 구생(俱生)’148)의 아래는 구생을 끊는 것인데, 이 중에 첫째는 올바로 밝힌 것이고, 둘째로 ‘묻기를’149) 아래는 묻고 대답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육식구생(六識俱生)을 끊는 것이고, 둘째로 ‘그 말나’150)의 아래는 말나구생(末那俱生)을 끊는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번뇌장(煩惱障)을 끊는 것이고, 둘째로 ‘그 소지(所知)’151)의 아래는 소지장(所知障)을 끊는 것이고, 셋째로 ‘그것으로 말미암아’152) 아래는 결론지은 것이다.
처음 가운데 ‘윤생(潤生)’153)이라는 것은 업(業)을 윤택하게 하여 생(生)을 받는 것이고, ‘섭화(攝化)’154)라는 것은 중생을 융섭하고 만물[物]을 교화하는 것이다.
‘미혹으로 말미암아서’에서 ‘미혹이 다한다’에 이르기까지155)는 이 경문이 바로 지전(地前)에 종자를 남겨두는 뜻이기 때문에 곧 종교(終敎)에 합치되지만, 미혹을 남겨두는 뜻을 똑같이 하기 때문에 시교(始敎)에서 인용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156) 등에서 어떤 사람은 “오직 『섭론(攝論)』을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러므로’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지금의 해석에서는 상하에서 밝힌 바의 뜻을 통틀어 말미암았으므로 ‘그러므로’라고 말한 것이다.
셋째로 결론지은 것 중에서 ‘『대법론(對法論)』157)’ 등은 앞의 소의신(所依身)158)이 번뇌의 변(邊)을 끊는 걸 잡아서 나한(羅漢)을 분출(分出)한 뜻을 인용한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는 두 장애를 합해서 취하여 불지(佛地)에 이른 뜻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두 곳[二處]이 같지 않다.
‘오직 소지장의 대치도(對治道)를 닦는다’159)고 한 것에서 번뇌장이기 때문에 원(願)을 도와 승행(勝行)을 일으키도록 남겨두어서 대치를 닦지 않지만, 그러나 불지에 이르러서 소지(所知)를 끊을 때는 번뇌도 또한 끊어지기 때문에 “보리를 얻을 때 단박에 번뇌 및 소지장 등을 끊는다”160)고 말한 것이다.
【記】 【문】 두 장애의 수혹(修惑)은 여러 식과 상응하여 지상(地上)에서 현행(現行)하는데, 어째서 같음과 다름[同異]이 있는가?
【답】 번뇌장 안에서 제육식(第六識)의 미혹이 이미 모두 다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남겨두는 것이니, 그러므로 현행이나 종자나 모두 지(智)로써 제어하여 승행(勝行)을 이룸으로써 지나친 우환을 일으키지 않는다. 마치 독사를 주력(呪力)으로 제어해서 죽게 하지 않고도 지나친 우환을 일으킴이 없이 나머지 용(用)을 이루는 것과 같으니, 보살이 선교(善巧)로 미혹을 남겨두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섭론』에 이르기를 “마치 독사가 주술에 해를 입은 것과 같다”등으로 말한 것이니, 그러니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번뇌장에서 현행이기도 하고 종자이기도 해서 모두 자재(自在)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제칠식(第七識)의 번뇌는 그 성품이 생을 윤택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며, 행상(行相)이 미세하기[細] 때문에 칠지(七地)까지 어느 땐가 잠시 나타나는데, 관(觀)과 지(智)에 틈이 있기 때문이다. 소지장은 모두 뒤의 지(地)에서 일어나고 미혹은 앞의 지(地)에서 일어나는데, 현행이든 종자이든 지지(地地)마다 나누어 끊기[分斷]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왜 어떤 곳에서는 칠지 이전에 유루심(有漏心) 등을 일으킨다고 설하는가?
【답】 만약 제육식(第六識) 중 번뇌장을 잡아서 유루(有漏)로 삼는다면, 그것은 이미 미혹을 남겨두기 때문에 곧 사유루(似有漏)이다. 만약 소지장을 잡아서 유루라고 한다면, 곧 실유루(實有漏)이다. 이 두 가지는 십지(十地)에 모두 통하는 것이다.
만약 말나번뇌(末那煩惱)가 실유루라면 칠지(七地)에 이르기까지는 유무(有無)가 정해지지 않아서 어느 땐가 잠시 유루심(有漏心)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머지의 뜻은 준하여 알라.
또한 이 교 가운데 미혹을 멸하고 지(智)를 일으키는 분제(分齊)는 미혹의 종자가 멸상(滅相)에 있을 때가 지(智)는 곧 생상(生相)에 있어서 동시에 서로 상반되니[相返], 마치 솟구치면 가라앉고 가라앉으면 솟는 것과 같다. 자세히는 『대법론(對法論)』에서 설한 바와 같다.
또한 이 장법(障法)은 식(識)의 무성(無性)에 의지하기 때문에 곧 공(空)하여 분별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장(障)의 뜻이다. 마치 『유마경』에 이르기를, “오수음(五受陰)에 통달하면 공(空)하여 일으킬 바가 없으니, 바로 고(苦)의 뜻이다”라 한 것과 같다. 지금 여기서의 장(障)의 뜻도 또한 그에 준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釋】 문답161) 가운데 처음 문답의 의미는, 앞에서는 다만 두 장애의 수혹(修惑)이 모두 불지(佛地)에 이른다고 말하였으나, 끝에서는 지상(地上)의 여러 식(識)과 상응하여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함을 밝혔으니, 이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묻고 대답한 것이다.
대답한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번뇌장을 변별하였고, 둘째는 소지장을 변별하였다. 앞의 것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육식번뇌(六識煩惱)를 변별하였고, 둘째로 말나번뇌(末那煩惱)를 변별하였다. 앞의 것 중에 ‘번뇌장 안에’162)라고 한 것은 육칠식(六七識)의 번뇌를 통틀어 든 것이다. ‘제육식의 혹(惑)’163)은 제육(第六)을 간별하여 취한 것이며, 이 가운데 다섯 가지가 있으니, 곧 법설(法說), 유황(喩況)ㆍ법합(法合)ㆍ인증(引證)ㆍ결성(結成)이다.
만약 인명입량(因明立量)에 의거한다면, 종(宗)에서 이르기를, “육식번뇌(六識煩惱)는 지나친 우환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고, 인(因)에서 이르기를, “남겨두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비유에서 이르기를, “독이 있는 주술에 피해를 입음과 같다”고 하였고, 합해서 이르기를, “주술로 독에 해를 입는 것이 지나친 우환을 일으키지 않음과 같다”고 하였으니, 육식(六識)도 또한 이와 같다.
인증(引證) 가운데 논하기를,164) “온갖 미혹을 이미 없애고 조복하니, 독이 있는 주술[毒呪]에 해를 입음과 같다. 미혹을 말미암아 미혹을 다함에 이르기까지 부처[佛]의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한다”고 하였다. 앞에서는165) 아래의 반을 인용하였고, 지금은 위의 반을 인용하였다.
결론지음[結成] 가운데 고법상(古法相)은 다분히 종자를 남겨둠을 밝혔고, 신법상(新法相)은 다분히 현행을 남겨둠을 밝혔다. 지금은 두 법상을 회통하니, 현행을 남겨두든 혹은 종자를 남겨두든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모두 자재(自在)로 얻는다”166)고 말한 것이다.
말나번뇌를 밝힌 것 가운데 ‘칠지까지는 어느 땐가 잠시 나타난다’167)고 한 것에서, 의식(意識) 가운데 인공(人空)의 무루지(無漏智)를 일으킬 때 의식이집(意識二執)과 말나인집(末那人執)이 모두 일어나지 않음을 구하나, 칠지까지는 인공(人空)의 관(觀)과 지(智)에 틈과 끊어짐이 있기 때문에 어느 땐가 잠시 일어나게 된다. 팔지(八地) 이상은 인공의 관과 지가 항상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음을 구한다.
둘째로 소지장 가운데 ‘현행히기도 하고 종자이기도 하다’168)라고 한 것은, 곧 구생번뇌(俱生煩惱)가 십지 중에서 그 현행을 조복하고, 금강위(金剛位)에 이르러서 영구히 그 종자를 단절하여도 소지장은 지지(地地) 중에서 각각 종자와 현행을 끊기 때문이다.
번뇌장 중에서 따로 육식 및 제칠식의 미혹을 변별하였으나 소지(所知)는 그렇지 않으니, 그러므로 소지를 아는 것은 오직 제육(第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두 번째 문답169) 중에서 물음의 뜻 가운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제육식 가운데 두 장애의 수혹(修惑) 및 말나번뇌가 불지(佛地)에서 다한다면, 십지(十地)는 모두 유루(有漏)인데, 어째서 성교(聖敎)에서는 오직 칠지 이후에 유루심(有漏心)을 일으킨다 하고 팔지 이상은 유루라고 말하지 않는가?”라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십지 중에서는 비록 번뇌에 머물더라도 지나친 우환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성교에서는 칠지 이후에 유루심을 일으킨다 하는가?”라고 하였으나, 처음의 의미가 경문에 합치된다.
‘어느 곳에서 설하였다’170) 등은 유식론의 제구(第九)에 이르기를, “혜학(惠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행무분별혜(加行無分別惠), 둘째는 근본무분별혜(根本無分別惠), 셋째는 후득무분별혜(後得無分別惠)이다. 이와 같이 삼혜(三惠)171)는 처음의 이위(二位) 중의 종자라면 세 가지를 갖추었지만, 현행이라면 오직 가행(加行)뿐이다. 통달위(通達位)172)에서 현행이라면 두 가지이고 종자라면 세 가지이다. 견도위(見道位) 중에서는 가행(加行)이 없기 때문에 수습위(修習位)173)에서 칠지 이전은 종자이기도 하고 현행이기도 하므로 모두 세 가지에 통한다. 팔지 다음부터는 현행이라면 두 가지이고 종자라면 세 가지이니, 무공용도(無功用道)는 가행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구경위(究竟位)174) 가운데서 현행과 종자는 모두 두 가지이니, 가행의 현행과 종자를 모두 이미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칠지 이후는 가행이 있기 때문에 유루심(有漏心)이고, 팔지 이상은 가행이 없기 때문에 무루(無漏)인데, 그 문장을 거론하여 물은 것이다.
대답의 의미는 이렇다; 말나번뇌는 칠지 이후에 어느 땐가 잠시 유루심을 일으키고, 팔지 이상은 유루를 일으키지 않으니, 그러므로 유식론은 이를 잡아서 변별한 것이다. 육식 가운데 번뇌는 사유루(似有漏)이고 소지장(所知障)은 실유루(實有漏)이니, 이 두 가지는 십지에 통한다.
‘나머지 뜻은 알 수 있다’175)고 한 것은, 초교(初敎) 가운데 문을 논한 것[論門]은 넓고 많으나 지금은 요약하여 밝혔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둘째로 단혹상(斷惑相) 및 혹체성(惑體性)을 밝힌 것 중에서,176) 우선은 단상(斷相)을 밝혔고, 그 다음 ‘또 이 장(障)’177)의 아래에서는 체성(體性)을 밝힌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미혹의 종자가 멸상(滅相)에 있을 때 지(智)는 곧 생상(生相)에 있다’178)고 한 것은, 유식론 제구에 이르기를 “진견도(眞見道)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저 이장(二障)의 종자는 반드시 성취되지 않으니, 마치 밝음과 어두움이 반드시 함께 생기지 않는 것과 같다. 양끝을 저울질해서 숙이고 들 때처럼 모든 상(相)이 법에 위배됨은 이(理)가 반드시 그러하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좇아서 말한 것이다.
‘축(築)은 곧 곤(坤)과 같다’179)고 한 것은, 축(築)은 장(障)을 비유하고 곤(坤)은 지(智)를 비유한 것이다. ‘『대법론(對法論)』’180) 등은 그 논(論)이 혹(惑)과 지(智)를 동시에 서로 뒤집은[相翻]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둘째로 혹체(惑體)를 밝힌 것 가운데 ‘무성즉공(無性卽空)’181)이란 것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시교의 종[始敎終]에 해당된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해석에서는 바로 이 종(宗)이니, 말하자면 심식장(心識章)182)에서 ‘훈(熏) 등이 곧 공(空)이다’라고 한 것이 초교(初敎)의 종(宗)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記】 만약 종교(終敎)에 의지한다면, 여러 성문은 번뇌장을 오히려 능히 끊지 못하고 다만 능히 꺾어서 굴복시킬 뿐이니, 어찌 소지장을 능히 끊겠는가? 그러므로 『미륵소문경론(彌勒所問經論)』에서 이르기를, “일체의 성문인과 벽지불인(辟支佛人)은 여실히 사무량(四無量)을 닦을 수 없고, 구경(究竟)에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없으니, 다만 일체 번뇌를 꺾어서 굴복시킬 뿐이다”라고 하였으며, 『능가경』의 문장 또한 위의 설과 같다.
【문】 이 설은 어떤 이유로 앞의 가르침과 같지 않은가?
【답】 그것은 이승(二乘)을 이끌기 위한 것이라서 아직 깊이 설(說)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아래의 설로 나아가서 번뇌장도 저 이승(二乘)과 똑같이 불지(佛智)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지(地)가 다한다고 설한 것이다. 또한 아래의 것도 위와 똑같이 역시 이승은 혹장(惑障)183)을 모두 끊고 소지장을 나누어 끊는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제 여기서는 실(實)에 나아가면 우법이승(愚法二乘)은 넓고 큰 마음이 없기 때문에 구경(究竟)에 번뇌장을 끊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는 삼승(三乘) 가운데 성문(聲聞)을 집았지만, 여기서는 우법(愚法)을 잡았기 때문에 같지 않다고 할 수 있다.
【釋】 종교(終敎)184) 가운데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단혹분제(斷惑分齊)를 밝힌 것이고, 둘째로 ‘또 이 교’의 아래에서는 단혹상(斷惑相) 및 혹체성(惑體性)을 밝힌 것이며, 셋째로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의 아래에서는 같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승(二乘)을 잡았고, 둘째는 보살을 잡은 것이다. 앞의 것 중에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올바로 변별한 것이고, 둘째는 인용해서 증명한 것이며, 셋째는 묻고 대답한 것이다.
이 가운데 물음의 의미는, ‘앞의 시교이승(始敎二乘)이 또한 소지[所知]를 끊는데, 어째서 이 교가 번뇌장을 오히려 능히 끊지 못하는가’ 라는 것이다.
대답 가운데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앞의 해석은 행심(行心)을 잡아서 해석한 것이고, 뒤의 해석은 사람[人]을 잡아서 해석한 것이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해석에서는 앞의 것이 시교(始敎)와 종교(終敎)를 잡아서 차이를 변별하였고, 뒤의 것은 우법(愚法)과 불우법(不愚法)으로써 차이를 변별하였다.
【문】 만약 앞의 해석을 집는다면 우법도 또한 소지장을 끊는가?
【답】 그렇지 않다. 앞에서 말하기를,185)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시교는 우법을 인용하여 점점 대승으로 향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교를 안립(安立)하였으며, 저것보다 깊고 뛰어나기 때문에 소지장도 또한 나누어 끊음을 허락한 것이다”고 하였는데, 풀어서 말하면 ‘이미 저것보다 깊고 뛰어나기 때문에 소지장도 또한 나누어 끊음을 허락한다’고 하였으니, 우법은 능히 끊을 수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종교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만약 종교에 의지한다면, 우법이승(愚法二乘)은 번뇌장을 다만 능히 꺾어서 굴복시킬 뿐이고, 만약 시교에 의지한다면 이승인(二乘人)이 완전히 번뇌를 끊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동일하지는 않은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나아가’186)라고 한 것은 보살로서 이승(二乘)에 나아가기 때문이며, ‘아래에서 위로 나아가서’187)라고 한 것은 이승으로서 보살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뒤의 해석 가운데 앞에서 ‘이승도 또한 소지장을 끊는다’188)고 말한 것은 삼승(三乘) 중의 성문(聲聞)을 잡은 것이고, 지금 ‘번뇌장은 오히려 능히 끊지 못한다’189)고 말한 것은 우법(愚法)을 잡은 것이니, 그러므로 이 해석은 두 가지 성문을 구별케 한 것이다.
【문】 앞에서 삼승 중의 성문을 잡았다고 한 것은 시교(始敎)에 해당하는 것인가?
【답】 이 해석의 의미는 시종(始終)의 두 교(敎)를 합하여 하나의 대승교[一大乘敎]로 삼은 것이지, 두 가지 교로 나뉘게 한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두 교를 합할 때에는 도리어 종교(終敎)의 뜻에 해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권(上卷)190)에서 “문; 어째서 우법이승(愚法二乘)은 인용한 것 가운데 있어도 알 수 있는가? 답; 저 우법으로써 대승종교(大乘終敎) 이후를 잡는다면 나란히 삼계191)를 벗어난다고 이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는 뒤의 해석에 해당된다.
【記】 보살인(菩薩人)은 두 장애 중에서 구생(俱生)과 분별(分別)을 나누지 않고 다만 정사(正使)192)와 습기(習氣)가 있으므로 지전(地前)에서 사(使)의 현행(使現)을 조복하고, 초지(初地)에서 사(使)의 종자를 끊으며, 지상(地上)에서 습기를 없애고, 불지(佛地)에서는 마침내 청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저 지전(地前) 삼현위(三賢位)193) 중에서는 처음에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지 않는 가운데 번뇌장(煩惱障)을 자재롭게 능히 끊을 수 있지만, 남겨두어서 일부러 끊지 않으니 소지장 등을 제거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양섭론』에 이르기를, “십해(十解) 후에 출세정심(出世淨心)을 얻는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십해심(十解心) 이상을 성인(聖人)이라 부르는데,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인왕경(仁王經)』에 이르기를, “지전(地前)에서 인공(人空)을 얻지만 증득을 취하지는 않는다”고 하였으며, 또 『기신론』에 이르기를, “소분견(少分見)의 법신(法身)을 얻어서 팔상(八相)194)을 짓는다”는 것이 모두 이 뜻이다. 이 보살이 오직 지장(智障)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유식(唯識)과 진여(眞如) 등의 관(觀)을 닦아서 그 장애를 조복하여 끊지만, 그러나 번뇌장에 대해서는 단지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대치를 닦지 않고, 또한 일부러 남겨두어서 승행(勝行)을 이루는 것을 돕는다. 초지(初地) 이상에서 소지장의 일분추(一分麤)를 끊기 때문에 번뇌장을 더 이상 남겨두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두 장애에 대해서는 견수(見修)195)를 나누지 않고, 초지에 이르렀을 때 정사(正使)를 함께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륵소문경(彌勒所問經)』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 가령 성문인(聲聞人)은 우선 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하는 번뇌를 끊은 다음에 점차 수도번뇌(修道煩惱)를 끊는데, 어떤 이유로 보살은 성문과 같지 않은가?
답: 보살인(菩薩人)은 무량세(無量世) 이래로 여러 중생을 위하여 이익이 되는 일을 만들어 준 뒤에 나중에 진여감로법계(眞如甘露法界)를 보되, 저 일체 중생의 몸도 실제로는 내가 구하는 곳과 다르지 않다고 관(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견도(見道)와 수도(修道) 속의 일체 번뇌가 능히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利益衆生行]을 막기 때문에 견도 중에서 일체를 모두 끊는다.”
이 경문으로써 증거가 되는 것이다.
【釋】 보살에 나아감 속에서, 첫째는 간략히 나타낸 것이고[略標], 둘째로 ‘저 지전(地前)’196)의 아래에서는 폭넓게 해석한 것이다[廣釋].
앞의 것 가운데, 첫째는 능단인(能斷人)이고, 둘째, ‘이장(二障)에서’197)의 아래에서는 시교를 간별하였고, 셋째, ‘다만 있다’198)의 아래에서는 이 교의(敎義)를 올바로 나타내었다. 이 가운데 ‘지전(地前)에서는 사(使)의 현행을 조복하고, 초지(初地)에서는 사(使)의 종자를 끊는다’199)고 한 것은 곧 실제의 행[實行]이지 임시로 의탁한[假寄] 것은 아니다.
【문】 장주(章主:法藏)는 초지(初地)에 대한 소(疏)200)에서 이르기를, “만약 종교(終敎)를 잡으면 초지에서 또한 삼계의 분단(分段)과 혹(惑)ㆍ업(業)ㆍ고(苦)를 버리고, 지상(地上)에서는 오직 소지장(所知障)과 반역보(反易報)를 끊는다. 번뇌장은 지전(地前)에서 점차 조복하고, 지상에서 완전히 끊는다. 소지장은 지전에서도 또한 배워서 조복하고, 초지에서 일분(一分)을 끊는다. 나머지는 여러 지(地)에서 각각 일분(一分)을 끊고, 불지(佛地)에서 다한다”고 하였고, 이지(二地)에 대한 소201)에서 이르기를, “만약 종교에 의지한다면 『양론(梁論)』 등과 같으니, 번뇌의 종자는 초지에서 영원히 다하여 오직 습기만이 있다. 소지장의 일분[一分麤]는 또한 초지에서 다하고, 나머지 분(分)과 습기는 모든 지(地) 가운데에서 각각 개별적으로 올바로 끊어진다”고 하였는데, 저 두 곳의 문장과 여기의 문장은 어떻게 회통되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종교 속에 나아가면 시(始)가 있고 종(終)이 있지만, 지금 이 장(章)의 경문은 시(始)를 잡았고, 저 두 곳의 문장은 종(終)을 잡았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금은 실행(實行)을 잡은 것이고, 저 두 곳의 문장은 곧 임시로 의탁한[假寄] 것이니, 이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처음의 뜻은 어째서 그러한가?
【답】 ‘두 장애 가운데 사(使)와 습(習)을 나누고, 지전(地前)에서는 사(使)의 현행을 조복하고, 초지(初地)에서는 사(使)의 종자를 끊으며, 지상(地上)에서는 습기(習氣)를 없앤다’202)고 한 것은 시(始)를 잡아서 말한 것이고,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십분(十分)으로 나뉘는데, 십지(十地) 중에서 각각 일분(一分)을 끊는다’203)고 한 것은 종(終)을 잡아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초지의 소(疏)에서 ‘각각 일분을 끊는다’고 말하고, 이지(二地)의 소에서 ‘각각 개별적으로 올바로 끊는다’고 말한 것은 곧 근본무명이 십분(十分)으로 나뉘고 지지(地地) 중에서 각각 일분을 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문】 뒤의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초지의 소(䟽)와 이지(二地)의 소에서 모두 ‘번뇌장은 초지에서 영원히 다한다’고 말한 것은 곧 지전(地前)에서 번뇌장을 끊고 지상에서 바야흐로 소지장을 끊는 뜻이기 때문이니, 이것은 곧 십팔기문(十八寄門)의 제일문204)에 해당된다.
지금의 해석에서 두 곳의 문장은 다분히 이 장(章)과 같아서 서로 어긋남이 없다. 왜냐하면 이지(二地)의 소(疏)205)에서 ‘번뇌장은 초지에서 영원히 다한다’고 말한 것이 번뇌장의 종자를 초지에서 단박에 끊기 때문이다. ‘오직 저 습기[習]만이 있다’고 말한 것은 번뇌장의 습기를 초지 가운데에서 능히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지장의 일분추(一分麤)는 또한 초지에서 다한다’고 말한 것은 소지장의 종자가 초지에서 영원히 다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분(分)과 습(習)’이라고 말한 것에서 ‘나머지 분(分)’은 곧 소지장의 습기이고, ‘습(習)’이라는 것은 앞의 ‘오직 저 습기만이 있다’고 한 것을 다시 들었기 때문이니 바로 번뇌장의 습기이다. 두 장애의 습기는 뒤의 모든 지(地) 가운데서 점점 끊어져 없어지기 때문에 ‘모든 지 가운데서 각각 개별적으로 올바로 끊는다’고 말한 것이다. 초지의 소(疏)206)에서 ‘번뇌장은 지전(地前)에서 점차 조복하고 지상(地上)에서 모두 끊어 다한다’라고 말한 것에서, ‘지상’이라는 말은 십지(十地)를 총체적으로 잡은 것이지 오직 초지(初地)만은 아니다. 이른바 정사(正使)의 종자는 초지에서 영원히 다하고 오직 습기만이 있어서 뒤의 모든 지(地) 가운데 하나하나 끊어서 없애는 것이니, 그러므로 정사의 습기(習氣)는 십지(十地)에서 모두 다하기 때문에 ‘지상에서 끊어 다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소지장은 지전에서 배워 조복하고, 초지에서 일분(一分)을 끊어서’라고 말한 것은 지전에서 현행을 조복하고 초지에서 종자를 끊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모든 지에서 각각 일분(一分)을 끊고, 불지(佛地)에서 바야흐로 다한다’고 말한 것은 그 습기가 곧 뒤의 모든 지에서 점점 끊어 없어져서 불지에서 바야흐로 다하기 때문이니, 저것과 이것이 서로 어긋남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저 두 곳의 문장은 또한 실행(實行)이 되는가?
【답】 바로 실행이면서도 임시로 의탁함[假寄]를 겸하고 있다. 왜냐하면 두 장애 중에 사(使)와 습(習)을 나누어서 초지에서 종자를 끊고, 이지(二地) 이상에서 습기를 없애기 때문에 바로 실행이 된다. 그러나 ‘각각 일분(一分)을 끊는다’207)라고 함과 또 ‘각각 개별적으로 올바로 끊는다’208)고 함이 곧 지지(地地) 가운데 각각 일분을 끊는다는 뜻이니, 이는 곧 이십이무명(二十二無明) 및 십일무명(十一無明)으로서 십지(十地)에 의탁하여 각각 개별적으로 끊는 뜻이기 때문에 임시로 의탁함[假寄]이 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실행 가운데서는 이십이무명 및 십일장(十一障)을 십지에 의탁해서 개별적으로 끊는다는 뜻은 없는 것인가?
【답】 실행을 잡는다면, 곧 하나 하나의 지(地) 가운데서 이십이무명 및 십일장을 통틀어 끊는다.
【문】 만약 그렇다면 별교(別敎) 가운데 ‘일단일체단(一斷一切斷)’209)의 뜻과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별교 중에는 밝음과 어둠[明昧]이 없다. 삼승 가운데 비록 이십이무명과 십일장을 통틀어 끊는다 하더라도 명매는 차별되기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이다.
【문】 삼승십지(三乘十地)에서 하나 하나를210) 통틀어 끊음은 그 상(相)이 어떠한가?
【답】 십지 중에서 십도(十度)를 닦아 익히니, 초지(初地) 중에서는 단도(檀度)에 치우쳐 뛰어나되 나머지 도(度)는 겸하여 닦으면서 지(地)를 따라 증상(增上)하며, 이지(二地) 중에서는 계도(戒度)에 치우쳐 뛰어나되 나머지 도(度)는 겸하여 닦으면서 지(地)를 따라서 증상한다. 이 때문에 만약 치우쳐 뛰어남을 잡는다면, 모든 지(地) 가운데서 각각 하나의 도[一度]를 닦으며, 만약 겸수(兼修)를 든다면 하나 하나의 지 가운데서 십도(十度)를 통틀어 닦는다. 장(障)을 끊음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만약 바른 것[正者]을 잡는다면 모든 지(地) 중에서 각각 일장(一障)을 끊으며, 만약 겸하여 끊음을 잡는다면 하나 하나의 지(地) 중에서 십장(十障)을 통틀어 끊으니, 그러므로 비록 하나 하나의 지(地)에서 모든 장(障)을 통틀어 끊더라도 밝음과 어둠[明昧]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 의지하여 상대하는 것[寄對] 가운데 제팔문(第八門)211)에 이르기를, “사장(四障)에 의탁해서 사위(四位)를 나타내는데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정사(正使)를 잡아서 지전(地前)에서 사위(四位)ㆍ사행(四行)ㆍ사인(四因)ㆍ사보(四報) 등등을 의탁해 나타내는 것이요, 둘째로 사장(四障)의 습기로서 지상(地上)에서 사위(四位)ㆍ사정(四定)ㆍ사덕(四德)ㆍ사보(四報) 등을 의탁해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실행(實行)의 뜻과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정사로서 지전(地前)에 의지하고, 습기(習氣)로서 지상(地上)에 의지한다는 뜻은 실행(實行)과 같다. 그러나 사장(四障)에 의지해서 사위(四位)의 뜻을 나타냄은 곧 임시로 의탁함[假寄]이다. 이른바 실행을 잡으면, 하나 하나의 지(地) 가운데서 사장(四障)을 통틀어 끊기 때문에 그러하다. 왜냐하면 법상[法常師]의 『섭론소(攝論疏)』212) 중에, “만약 실(實)을 잡는다면, 하나 하나의 위(位)에서 네 가지 생사(生死)를 쌍으로 다스려서 사덕(四德)을 가지런히 나타낸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문】 십지(十地)에서 끊은 바의 장(障)은 근본무명(根本無明)이 되는가, 지말(枝末)이 되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후자의 것과 같다. 이른바 근본무명은 미세하기 때문에 불지(佛地)에서 바야흐로 다하니, 이 때문에 십지에서 끊은 것은 바로 지말이다. 왜냐하면 『승만경』213)에 이르기를, “근본무명은 부처의 보리지(菩提智)만이 능히 끊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근본과 지말에 통하니, 왜냐하면 『기신론(起信論)』214)에 이르기를, “하나의 법계[一法界]를 요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신상응지(信相應地)에서부터 관찰하여 배워서 끊고, 정심지(正心地)에 들어가서 분(分)에 따라 여의게 되며, 나아가 여래지(如來地)에서 능히 궁극적으로 여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의 법계를 요달하지 못한다는 뜻은 바로 근본무명이요, 신상응지(信相應地)는 바로 지전위(地前位)이며, 정심지에 들어간다는 것은 초지(初地)이니, 그러므로 십지(十地)에서 끊는 것도 또한 근본무명에 통하게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 장주(章主)의 『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에서 말했다.
“넷째로 ‘무병(無病)’은 표(標)이니, 말하자면 두 장애[二障]와 습기(習氣)로 병든 바가 다하였기 때문이다. 『보성론(寶性論)』215)에서 이르기를, ‘청량(淸凉)하기 때문에 병들지 않으니, 번뇌와 습기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다섯째로 ‘무고의(無苦依)’는 비롯함이 없는 때[無始時]의 근본무명주지(根本無明住地)와 습기로서 온갖 고통의 의지할 바를 삼았으나, 이제 모두 영원히 다하기 때문에 ‘무고의’라고 하는 것이다. 묻기를, ‘이것과 앞의 소지장(所知障)과는 어떻게 구별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삼장(三藏)에 두 가지 해석이 있으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곧 주지무명(住地無明)이요 저것은 기시무명(起時無明)이니, 『승만(勝鬘)』에서 설한 바와 같다216)고 하였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소지장 가운데 미세한 부분[細分]을 본(本)으로 삼아 바로 저것의 의지할 바217)가 되니, 세밀함[細]에 의지하여 거칢[麤]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번뇌에는 어째서 거칠고 세밀함[麤細]이 없는가? 풀어서 말하면 번뇌추세(煩惱麤細)와 추소지(麤所知)는 모두 능의(能依)218)이니, 오직 미세한 것만이 저 둘의 의지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해석은 어떻게 다른가?
【답】 ‘무고의’를 풀어서 이르길, “비롯함이 없는 때의 근본무명(根本無明)과 습기(習氣)로서 모든 고통의 의지할 바로 삼는다”219)고 하였으니, 이미 근본무명 및 습기가 고통의 의지하는 바가 됨을 통틀어 들었기 때문에 앞의 해석은 근본무명이 고통의 의지하는 바가 됨을 잡았고, 뒤의 해석은 습기가 고통의 의지하는 바가 됨을 잡은 것이다. 그러므로 앞 해석의 뜻은, 곧 ‘무병(無病)’ 가운데 두 장애[二障]는 기시무명(起時無明)이고 ‘무고의(無苦依)’는 근본무명이라는 것이며, 뒤의 해석의 뜻은, ‘무병’은 번뇌추세와 추소지를 잡은 것이고 ‘무고의’는 단지 소지장의 미세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문】 앞의 해석 가운데 주지무명(住地無明)과 뒤의 해석 가운데 소지장의 세분[所知障細分]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일체(一體)라서 다름이 없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두 가지 해석이 있는가?
【답】 두 장애를 논함에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로 근본무명은 지애(智碍)220)이고, 육염(六染)은 번뇌애(煩惱碍)221)이니, 번뇌 가운데 집상응염(執相應染)은 인집(人執)이기 때문에 번뇌장이 되고, 나머지 오염(五染)은 법집(法執)이기 때문에 소지장(所知障)이 된다. 만약 이 뜻을 잡는다면, 근본무명은 두 장애의 융섭[二障攝]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의 해석은 이 뜻을 잡은 것이다. 둘째로 집상응염은 인집이기 때문에 번뇌장이 되고, 나머지 오염과 근본무명은 함께 소지장이 된다. 만약 이 뜻을 잡는다면, 근본무명은 곧 소지의 세분[所知細分]이니 뒤의 해석은 이 뜻을 잡은 것이다.
【문】 근본무명과 육염(六染)을 끊는 지위의 분제(分齊)는 무엇인가?
【답】 육염 중에서 집상응염(執相應染)은 지전(地前)에서 끊으며,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은 초지(初地)에서 끊으며,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은 칠지(七地)에서 끊으며,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은 팔지에서 끊으며,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은 구지에서 끊으며,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은 십지 및 불지(佛地)에서 끊는다. 근본무명(根本無明)은 지전에서 관찰하여 배워서 끊고, 초지에서 분(分)에 따라 벗어남을 얻으며, 불지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나니,222) 그러므로 십지에서도 또한 근본무명을 끊음을 마땅히 알라.
【문】 무명(無明)은 근본이기 때문에 상위(上位)에서 끊고, 염심(染心)은 지말(枝末)이기 때문에 하위(下位)에서 끊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 것인가?
【답】 생겨서 일어날[生起] 때는 본말이 있더라도 다스려 끊을 때에는 전후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장주의 『기신소』에 이르기를,223) “이제 무명과 염심에 전후가 있다고 설하지만, 그러나 다스려 없앰은 일시(一時)에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니, 이 문장으로서 충분히 증명된다.
【문】 근본무명에는 분(分)의 다름이 있지 않은데, 어떤 이유로 상위에서 끊고 하위에서도 또한 끊는가?
【답】 원효[曉公]의 『이장장(二障章)』에 이르기를, “위에서 ‘통상(通相)의 무명주지(無明住地)224)는 또한 이승의 분(分)에 따라 끊는 바가 되니, 이와 같은 무명주지를 알지 못한다면 거칠고 세밀함은 있게 되나, 가볍고 무거움은 없게 된다’고 설하였으니, 만약 거칠고 세밀함이 있기 때문에 단(斷)과 부단(不斷)이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팔식(八識)과 통하여 상응(相應)한다 할 수 있고, 만약 한결같이 마음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거칠고 세밀함과 가볍고 무거움의 다름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승(二乘)에 단(斷)과 부단(不斷)이 있겠는가? 만약 아견(我見) 등의 혹(惑)을 똑같이 미혹하게 했다면, 이치에 미혹한 바이기 때문에 비록 거침[麤]이 아니라 하더라도 똑같이 끊어진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말나와 상응하는 무명이다. 견혹(見惑)과 더불어 똑같이 미혹한다면, 무아(無我)의 이치를 미혹하였기 때문에 견도(見道)에서 응당 함께 끊어져야 한다. 만약 이 미세함으로 인해 함께 끊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극히 세밀한 것인데 어째서 함께 끊어지는가? 대답하면, 무명주지는 그 상(相)이 미세하고 비밀스럽고 거칠고 세밀하고 가볍고 무거워서 일정하게 설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일체의 종(種)이 모두 설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공력(功力)이 증강(增强)되어서 모든 미혹을 두루 일으킨다면, 오직 거칠 뿐이지 세밀함은 아니라고 설할 수 있으나, 만약 행상(行相)이 아직 나뉘지 않아서 마음이 상응하지 않음에 나아간다면, 오직 세밀함뿐이고 거침은 아니라고 설할 수 있다. 장애하는 바를 논한다면, 위를 장애하고 아래를 장애하니 무거움[重]도 있고 가벼움[輕]도 있다고 설할 수 있다. 곧바로 자상(自相)에 대해서 하나도 더 미세함을 늘리지 않았다면, 응당 가벼움도 아니고 무거움도 아니라고 설할 수 있다. 그 위에 무거움이 없고 그 아래에 가벼움이 없다고 해서 또한 오직 중품(中品)에 있다고 설할 수는 없다. 단지 가벼움이 아닌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하지(下智)는 능히 없애고, 무거움이 아닌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상지(上智)도 또한 끊으며, 가벼움과 무거움이 아니기 때문에 중지(中智)도 멸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문장을 자세히 본다면 미혹은 없는 것이다.
【문】 만약 근본무명을 하지(下智)도 또한 끊는다면, 어떤 이유로 『승만경』225)에서는 ‘부처[佛]의 보리지(菩提智)라야 능히 끊을 수 있다’고 말하였는가?
【답】 무명의 세분(細分)은 불지(佛地)에서 바야흐로 다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 하위(下位)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광의의 해석에 나아가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전(地前)에서 사(使)를 조복함’226)을 해석하여 뜻을 나타낸 것이고, 둘째로 ‘초지(初地)에’227) 아래에서는 ‘초지에 사(使)의 종자를 끊는다’228)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뒤의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229) 아래에서는 ‘지상(地上)에서 습기(習氣)를 없앤다’230)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지장(智障)을 제거하기 위해’231)라고 한 것은, 앞의 시교(始敎)에서 이르기를 , “중생을 윤택하게 해서 거두어 교화하기 때문이고,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소지장을 끊기 위하기 때문이고, 대보리(大菩提)를 얻기 위하기 때문이다”232)라고 하였으니, 지금은 지장(智障)을 없앤 뜻을 들어서 나머지 세 가지를 똑같이 취한다.
『양론』의 두 문장은 모두 제3권에 있다.
【문】 지금 이 문장 중에서는 『양론』 등의 여러 곳에서 문장을 인용하였고,233) ‘미혹에 의탁하여 지위를 나타냄[寄惑現位]234)의 첫 번째 문장 중에서도 또한 이 문장을 인용하였는데, 두 곳에서 인용한 뜻은 어떻게 다른가?
【답】 여기에서 인용한 의미는 출세정심(出世淨心)을 얻고 또한 성인위(聖人位)를 얻기 때문이며, 번뇌장을 자재(自在)로 능히 끊어서 지장(智障)을 없애기 위함 때문이니, 그러므로 남겨둔다는 뜻을 인용한 것이다. 전자에서는 번뇌를 끊는 뜻을 취하여 변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뜻을 남겨둔 것이다.
『인왕경(仁王經)』에 ‘지전(地前)에서 인공(人空)을 얻더라도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235)고 한 것은 그 경에서 이르기를,236) “또한 다음에 성종성(性種性)237)은 십혜관(十惠觀)을 행하고, 나아가 호공관(護空觀)을 닦고, 또한 항상 백만바라밀(百萬波羅蜜)을 행해서 생각 생각마다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면 ‘호공관을 닦는’ 것은 인공을 얻는다는 뜻이고, ‘항상 백만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경전에 이르기를,238) “또한 다음에 도종성(道種性)239)은 견고한 인(忍) 가운데 머물고, 나아가 항상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가고, 마음 마음마다 적멸한 채로 삼계(三界)에서 생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면, 마음 마음마다 적멸하다는 것은 인공을 얻었다는 뜻이며, ‘삼계에서 생을 받는다’는 것은 곧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기신론』에’240)라고 한 것은 인공문(人空門)에 의지하여 법신(法身)을 보기 때문에 번뇌장을 자재(自在)하게 능히 끊는 것이다.
둘째로 ‘초지(初地)에서 사(使)의 종자를 끊는다’241)를 해석한 것 가운데, 첫째는 육식(六識) 중에서 이장(二障)의 종자를 잡은 것이며, 둘째로 ‘말나’242)의 아래에서는 말나번뇌(末那煩惱)를 잡은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먼저는 올바로 밝힌[正明] 것이고, 그 다음은 인용하여 증명한[引證]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초지(初地) 이상에서 지장(智障)243)의 일분추(一分麤)를 끊는다’244)고 한 것을 어떤 이는 ‘십지(十地) 가운데서 각각 지장(智障)의 일분(一分)을 끊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지금의 해석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초지 중에서 일분의 추품[一分麤品]을 끊고, 이지(二地) 이상에서 습기(習氣)를 없앤다.
【문】 다만 ‘초지 이상’이라고 말하였고, ‘오직 초지’라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일분(一分)을 끊는다’고 한 것이 오직 초지만을 가리킨다고 하는가?
【답】 여기에서 의미하는 말은 초지에서 지장(智障)의 일분을 끊기 때문에 초지 이상에서는 번뇌장을 더 이상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이다.245) 「초문(抄文)」에서 “곧바로 십지(十地)에 진입해서 처음에 거침[麤]을 끊고 나중에 세밀함[細]을 끊는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그 뜻이다.
‘인용하여 증명함’ 중에서 이 문장을 인용한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것을 결론짓는 것이니, 이른바 ‘견도(見道) 중에서 견수(見修)를 나누지 않고 일체를 함께 끊는다’는 것은 이 문장의 증거가 된다. 둘째로는 뒤의 것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른바 이 문장으로 증거를 삼으니, 마땅히 알라, ‘말나번뇌(末那煩惱)는 또한 초지(初地)에서 거침을 단절하니246), 말하자면 수도번뇌(修道煩惱)는 이미 견도 중에서 일체를 다 끊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記】 말나번뇌 또한 초지(初地)에서 거친 것을 끊고 나중에 남은 습기를 없앤다. 이 때문에 무성(無性)의 『섭론(攝論)』에 이르기를, “염오말나(染汚末那)를 굴려서 평등성지(平等性智)247)를 얻으니, 처음에 관(觀)을 나타낼 때 우선 이미 증득(證得)하고 수도위(修道位) 중에 다시 굴려서 청정해진다”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면, 굴려서 청정해지는 것은 습기를 없애는 것이다. 정사(正使)로써 먼저 끊기 때문에 나중에는 단지 굴려서 청정해진다고 말할 뿐이지 끊는다[斷]고는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이 진견도(眞見道)248)에 들어갈 때 잠시 잠복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 올바로 끊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굴려서 다시 청정해진다고 말할 수 없으니, 총체적으로 아직 끊지 못한 것을 어떻게 굴려서 청정해졌다고 이름하겠는가? 만약 시교(始敎)에 의지한다면 그와 같은 설을 용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교(敎)는 지상(地上)에서 단지 습기를 없애기 때문에 『보성론』에서 이르기를, “깨끗하지 않음[不淨]은 일체 범부가 번뇌장이 있기 때문이고, 더러움이 있음[有垢]은 여러 성문ㆍ벽지불 등에 지장(智障)이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허물이 있음[有點]은 여러 보살마하살 등이 두 종류의 습기(習氣)의 장애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그 논석(論釋)에서 “초지 이상을 마하살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므로 단지 습기의 장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습기는 정사(正使)의 종자를 끊고서부터 틈도 없이 바야흐로 습기가 있게 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아직 끊지 못함 이전에는 미미하고 희박한 번뇌가 없기 때문이며, 종자[種]를 끊으면 틈도 없이 바야흐로 미미하고 희박한 번뇌가 있기 때문에 논설에서는 “틈도 없이 습기를 일으킨다”고 한 것이다.
【문】 어째서 지상(地上)에서 번뇌를 다하게 해도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
【답】 지력(智力)이 뛰어나기 때문이요, 지장(智障)의 정사(正使) 또한 끊어서 없애기 때문이다.
시교(始敎)나 소승(小乘)의 돈출리인(頓出利人)같은 이는 욕계(欲界)의 미혹의 여섯 품을 끊어서 다하였을 때 위의 두 계(界)의 여섯 품도 똑같이 모두 끊어서 다하기 때문에 오히려 일래과(一來果)도 얻지 않는데, 하물며 보살(菩薩)의 도력(道力)이 뛰어남에 있어서랴. 또한 이미 지장(智障)의 사(使)를 끊었기 때문에 지전(地前)과 시교(始敎)에서 그 잘못[失]을 용인하나 이 가운데에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 교(敎) 중에서 올바로 미혹[惑]을 끊을 때 지(智)가 일어나고 미혹이 멸하니, 초(初)도 아니고 중간과 뒤도 아니라, 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멸하는가? 허공이 본래 청정한 것처럼 이와 같이 멸(滅)한다. 자세히는 『십지론』의 설과 같다.
또한 이 교 가운데 번뇌 등의 법은 모두 진여가 인연을 좇아서 짓는 것이니, 그러므로 진여(眞如)와 다르지 않으니, 이것이 번뇌의 뜻이며, 『기신론』의 설과 같다. 또 경전에 이르기를, “일체 법이 곧 여여하다[如如]”라고 하였으니, 번뇌도 이에 준한다. 그러므로 앞의 여러 교(敎)와 더불어 시설(施設)이 같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 둘째로 말나번뇌를 끊는 것 가운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의(自意)를 표방하였고, 둘째는 인용해서 증명하였고[引證], 셋째로 뒤의 ‘약언(若言)’249)의 아래는 외도의 계교를 차단한 것이다.
‘인용해서 증명함’에 대해서다;
【문】 『공목장』 제삼 번뇌행사행조림장(煩惱行使行稠林章)의 시교 중에서 이 문장을 인용하였는데, 어찌하여 지금 여기 종교에서 인용하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논에 이르기를,250) ‘수(數)의 순서[次第]와 같고, 혹은 상응(相應)하는 바를 따른다’고 하였는데, 풀어서 말하면, ‘수의 순서와 같다’는 것은 순서와 같이 사식(四識)을 굴려서 사지(四智)를 이룬다는 뜻으로서 이는 시교에 해당되며, ‘상응하는 바를 따른다’고 한 것은 곧 종교에 해당된다. 『공목』은 앞의 뜻을 잡은 것이고, 이 장(章)은 뒤의 뜻을 잡은 것이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인용한 논의 문장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로 시교를 잡는 것이니, 진견도(眞見道)에 들어가면 잠시 잠복해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염오말나(染汚末那)를 굴린다”251)고 말하였고, 뒤의 여러 지(地) 중에서 점점 조복하기 때문에 “굴려서 다시 청정해진다”252)라고 말한 것이다. 둘째로 종교를 잡는 것이니, 초지(初地)에서 거친 것을 끊기 때문에 “염오말나를 굴린다”고 말하였고, 뒤에 남은 습기[殘習]를 없애기 때문에, “굴려서 다시 청정해진다”라고 말하였으니, 그러므로 두 곳[處]은 각각 한 가지 뜻[義]을 좇아서 인용한 것이다.
셋째로 ‘지상(地上)에서 습기를 없앤다’를 해석한 것에 대해서다;
【문】 앞의 단락에서 이미 ‘굴려서 다시 청정해진다는 것은 습기를 없애는 것이다’253)라고 말하였다면, 앞 단락에서 이미 습기를 없앤 뜻을 나타내었는데 어째서 이 가운데에서 바야흐로 습기[習]를 없앤 뜻을 나타내는가?
【답】 앞 단락의 뜻은 『섭론』의 문장을 인용하여 말나번뇌(末那煩惱)가 초지에서 정사(正使)를 끊은 뜻을 증명하였으니, 이는 논의 ‘굴려서 청정해짐’의 뜻을 해석하였을 뿐이지 ‘지상에서 습기를 없앤다’고 한 뜻을 올바로 해석한 것은 아니다. 또한 앞에서 ‘굴려서 청정해진다는 것은 습기를 없앤다는 것’이라고 한 것에서 ‘오직 말나번뇌의 습기를 잡았을 뿐이다’에서부터 ‘이 때문에’254)의 아래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육, 칠 두 식의 번뇌습기 및 소지장(所知障) 습기를 끊는 뜻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는 앞의 초지에서 정사(正使)를 끊은 뜻으로 인하여 지상(地上)에서 습기를 없앤다는 뜻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의(自意)를 표방하고, 둘째는 인용해서 증명하고, 셋째는 인용한 문장을 해석하고, 넷째는 묻고 대답하는 것이다.
셋째의 인용한 문장을 해석하는 가운데, ‘미박(微薄)’255)은 습기가 미세하고 가볍기 때문에 ‘미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넷째의 문답 중에서, 대답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올바르게 답하고, 둘째로 ‘여시교(如始敎)’256)의 아래는 열등함을 들어서 뛰어남을 설명하였고, 셋째로 ‘약지전(若地前)’257)의 아래는 결론을 맺은 것이다.
열등함을 들어서 뛰어남을 나타낸 것 가운데 ‘시교소승(始敎小乘)’은 우법(愚法)을 간별함[簡]이다. 저 ‘돈출리(頓出離)’ 등은 만약 오직 욕계(欲界)의 수혹(修惑) 아홉 품 중에 앞의 여섯 품을 끊을 때 위 두 계(界)의 앞의 여섯 품을 끊지 않는다면 일래과(一來果)를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욕계의 여섯 품을 끊을 때 위의 두 계(界)도 끊기 때문에 일래과를 얻지 못하니, 이것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보살임에랴. 둘째로 끊음의 상[斷相] 및 미혹의 체[惑體]를 나타낸 것 가운데, 첫째는 끊는 상을 밝힌 것이고, 둘째로 ‘우차(又此)’258)의 아래에서는 미혹의 체를 나타낸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초(初)도 아니고, 중(中)도 후(後)도 아니다’259)라고 한 것은 『십지론』260)의 문장이다.
【문】 법장은 상반(相反)과 상속(相續)261)의 두 문을 잡아서 이 논의 문장을 해석하였는데,262) 이상(異相)263)은 무엇인가?
【답】 혹(惑)과 지(智)를 동시에 세워서 논함이 상반이고, 오직 지(智) 가운데서만 논을 세운 것이 상속의 문장이다.
【문】 ‘초(初)도 아니고 중(中)도 후(後)도 아니다’라고 한 것과 ‘전중후(前中後)를 취한다’고 한 것은 어떻게 다른가?
【답】 앞의 구는 곧 본유(本有)264)이고, 뒤의 구는 수생(修生)265)이기 때문에 다르다. 이 때문에 청량(淸凉)이 말하기를,266) “‘초(初)도 아니고 중(中)도 후(後)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인연무성(因緣無性)을 말한 것이니, 곧 단(斷)의 부단(不斷)이다. ‘전중후’는 연상(緣相)을 파괴하지는 않은 것이니, 곧 부단의 단이다”라고 한 것이니, 따라서 본유(本有)는 수생의 뜻이다.
‘경에 이르기를, 모든 법은 곧 여여하다’267)고 한 것은 『유마경』268)이다.
【記】 둘째로 미혹에 의지하여 지위를 드러냄을 밝히면, 여러 성교설(聖敎說)269)에는 대략 열여덟 문[十八門]이 있다.
첫째로 두 장애[障]에 의탁해서 두 위[位]를 드러내는 것이니, 이른바 혹(惑)과 지(智) 두 장애를 나누어서 비위(比位)와 증위(證位)의 두 지위를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양섭론』에 이르기를, “지전(地前)에서 점차 번뇌장을 없애고 지상(地上)에서 점차 지장(智障)을 없앤다”고 하였으며, 또한 이르기를, “십해(十解) 이후에 출세정심(出世淨心)을 얻는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지전(地前)에서 비록 인무아(人無我)를 얻더라도 법무아(法無我)가 아직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무아 또한 청정하지 않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인아집(人我執)은 앞의 십해(十解) 가운데 이미 없어졌고, 지금은 오직 법아집(法我執)을 멸한다”고 하였다. 또한 『인왕경』에 이르기를, “습종성(習種性)270)에서는 이미 생공위(生空位)271)에 드니, 성인(聖人)의 성품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본업경(本業經)』과 『기신론』 또한 이 설과 같다.
둘째로 피(皮) 등 세 가지 미혹[三惑]에 의탁해서 삼승기(三僧祇)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섭론』에 이르기를, “처음 승기(僧祇)에서는 피번뇌(皮煩惱)를 끊고, 두 번째 승기(僧祇)에서는 육번뇌(肉煩惱)를 끊으며, 세 번째 승기(僧祇)에서는 심번뇌(心煩惱)를 끊는다”고 하였다.
셋째로 이 세 가지 미혹으로 지지(地地)마다 세 가지 마음272)이 같지 않음을 의탁해서 드러낸 것이니, 마치 『양섭론』의 삼십삼승기 가운데서, “지지(地地) 가운데 입심(入心)하여 피(皮)를 없애고, 주심(住心)하여 육(肉)을 없애며, 출심(出心)하여 심(心)을 없앤다”고 설한 것과 같다.
넷째로 두 장애의 거칠고 미세함[麤細]으로 삼위(三位)를 드러내는 것이다. 『지지론(地持論)』에서 이르기를, “이장(二障)은 삼처(三處)에 통하니, 지전(地前)과 지상(地上), 그리고 불지(佛地)이다”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로 염심(染心)273)의 거칠고 세밀함으로써 삼위(三位)에 의탁하여 삼신(三身)을 드러내는 것이니, 마치 『금광명경』에서 “모든 조복의 도(道)에 의탁하여 기사심(起事心)을 다하면 화신(化身)을 나타낼 수 있고, 법단(法斷)의 도(道)에 의탁하여 근본심(根本心)을 다하면 응신(應身)을 나타낼 수 있고, 승발(勝拔)의 도(道)에 의탁하여 근본심을 다하면 법신(法身)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였으니, 어떤 사람이 풀어서 말하기를, “조복의 도는 지전(地前)이고 기사심은 바로 제육식이며, 법단의 도는 지상(地上)이고 근본심에 의지함은 말나(末那)인데, 뇌야식(賴耶識)라는 본심(本心)에 의지해 인연하기 때문이며, 승발의 도는 바로 금강위(金剛位)이고 근본심은 바로 뇌야식이다”라고 하였다.
여섯째로 삼장(三障)274)에 의탁해서 바로 삼신(三身)을 드러내는 것이니, 그러므로 저 경에서 이르기를, “번뇌장의 청정으로 능히 응신(應身)을 드러내고, 업장의 청정으로 능히 화신(化身)을 드러내며, 지장(智障)의 청정으로 능히 법신(法身)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일곱째로 삼무성(三無性)275)을 미혹하여 일으킨 바의 번뇌로 삼신(三身)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범부(凡夫)는 삼상(三相) 때문에 묶임이 있고 막힘이 있어서 삼신을 멀리 떠나므로 삼신에 이르지 못한다. 어떤 것이 삼상(三相)인가? 첫째는 사유분별상(思惟分別相)이고, 둘째는 의타기상(依他起相)이며, 셋째는 성취상(成就相)이다. 이와 같이 삼상이 능히 이해하지 못하고, 능히 멸하지 못하고, 능히 청정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삼신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곧 삼상이 능히 이해되고, 능히 멸하고, 능히 청정해진다면, 여러 부처가 삼신에 이른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능해(能解)는 소집성(所執性)이니 마땅히 알아서 이해하기 때문이며, 능멸은 염분의타기성(染分依他起性)이니 마땅히 끊고 없애기 때문이며, 능정(能淨)은 진여(眞如)를 얽매고 있는 것을 닦아서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釋】 ‘둘째로 혹(惑)에 의탁하여 지위를 나타낸다’276)고 한 것에서, 앞은 시교(始敎)를 잡으면 두 장애로 분별되니, 지전(地前)에서 현행[現]을 조복하고, 초지(初地)의 견도(見道)에서 저 종자를 단박에 끊는다. 구생(俱生) 가운데 번뇌장은 초지 이후에 자재롭게 능히 끊을 수 있으나 남겨두기 때문에 끊지 못한다.277) 한편 종교(終敎)278)를 잡으면 보살인(菩薩人)은 두 장애[二障] 가운데 구생기(俱生起)279) 및 분별기(分別起)280)를 나누지 않으니, 다만 정사(正使)와 습기만이 있다. 지전에서 사(使)의 현행을 조복하고, 초지에서 사(使)의 종자를 끊고, 지상(地上)에서 습기를 없애고, 불지(佛地)에서 궁극적으로 청정해진다.281) 이미 이교(二敎)에서 종지를 세운 것이 이와 같음을 알았지만, 나머지 성교(聖敎)와 이것과는 서로 어긋나는데 어떻게 회통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열여덟 문으로 여러 교를 회통하고자 하기 때문에 차례대로 온 것이다. 이 가운데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수를 표시한 것이고[標數], 둘째는 따로 해석한 것이고[別釋], 셋째로 ‘이상제문(已上諸門)’282)의 아래는 결론지은 것이다.
따로 해석함 가운데 이 열여덟 문은 각각을 잡아서 변별한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혹장(惑障)283)이 두 장애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초문(初門)이 있는 것이고, 제이와 제삼과 제사문은 피(皮) 등의 삼혹(三惑)284)을 잡은 뜻이 같기 때문에 한 곳[一處]에서 변별한 것이고, 제오문과 제육문과 제칠문은 삼신(三身)을 나타낸 뜻이 같기 때문에 한 곳에서 변별한 것이다. 제팔과 제구의 두 문은 정사와 습기로 나눈 뜻이 같기 때문이고, 제십과 제십일의 두 문은 색심번뇌(色心煩惱)를 잡은 뜻이 같기 때문이고, 제십이와 제십삼의 두 문은 견(見)과 수(修)로 나눈 뜻이 같기 때문이고, 제십사문은 앞의 제십삼문 가운데 견도소단(見道所斷)의 분별혹(分別惑)이니, 빌린 바의 삼연(三緣)285)에서 삼현(三賢)286)을 의탁하여 나타내기[寄現] 때문에 다음으로 변별한 것이다. 제십오와 제십육의 두 문은 앞의 제십삼문 가운데 수도소단(修道所斷),287) 구생번뇌(俱生煩惱)가 십지 중에서 나누어 끊어지기 때문에 다음으로 변별한 것이다. 제십칠과 제십팔의 두 문은 무명(無明)을 끊는 뜻이 같기 때문에 한 곳에서 변별한 것이다.
만약 위(位)를 잡아서 변별하면, 앞의 여덟 문은 통틀어 비증(比證)288)을 잡은 것이고, 다음의 다섯 문은 오직 증위(證位)를 잡은 것이며, 다음의 제십사문은 오직 비위(比位)를 잡은 것이고, 뒤의 네 문은 또한 증위를 잡은 것이다.
【문】 문마다 여럿으로 나누면 세 단락이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뜻을 표한 것이고, 둘째는 인용해서 증명한 것이고, 셋째로는 인용한 문장을 해석한 것이다. 혹은 오직 두 가지만이 있으면 인용한 문장을 해석함이 없으며, 혹은 오직 하나만 있으면 뒤의 두 단락이 없다. 제십사문과 제십오문 등과 같은 것이다.
제삼문의 ‘삼십삼승기’289)는 십지 중에서 각각 입(入)과 주(住)와 출(出)을 나누기 때문에 삼십이 되고, 삼현(三賢)이 셋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말하자면 그 논290)에서 이르기를, “다음으로 삼십삼승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방편지(方便地) 중에 삼아승기가 있고, 십지(十地) 중에서 지지(地地)에 각각 삼아승기가 있으니, 말하자면 입(入)과 주(住)와 출(出)이다”라고 하였으니, 저것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제사문(第四門) 가운데 ‘이장삼처(二障三處)를 지나친다[過]’291)고 한 것은, 말하자면 그 논 중에292) 두 장애를 나누어서 피(皮)ㆍ부(膚)ㆍ골(骨)의 삼장(三障)으로 삼고는 삼위(三位)에서 끊기 때문이다.
제오문(第五門)에 대한 것이다;
【문】 염심의 거칠고 세밀함을 삼위에 의지하여 삼신(三身)을 나타낸다’293)고 한 것에서, 삼신은 곧 불과(佛果)294)인데, 어떤 이유로 이 문(門)은 또한 비증(比證)에 통하는가?
【답】 나타낼 바가 비록 불과이더라도 이미 ‘조복의 도(道)는 곧 지전(地前)이요, 법단(法斷)의 도(道)는 곧 지상(地上)’295)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니, 능견심(能見心)을 잡으면 곧 비증이 되므로 어긋남이 없다.
‘유인(有人)’296)은 원효이니, 원효가 『금광명경소』297)를 지었기 때문이다.
【문】 장주(章主)의 『기신론』298)에서 이렇게 말했다.
“『금광명경』에 ‘모든 조복의 도(道)에 의탁하여 기사심(起事心)을 없애고, 법단(法斷)의 도에 의탁하여 근본심을 없애며, 승발(勝拔)의 도에 의탁하여 근본심을 다한다’고 한 것과 같으니, ‘조복의 도’라고 한 것은 곧 삼현위(三賢位)이며, ‘기사심을 없앤다’는 것은 이 논 중에 추분별집착상(麤分別執着相)을 버리는 것이 바로 이상(異相)을 멸하는 것임과 같다. ‘법단의 도’는 법신위(法身位)에 있으며, ‘의근본심멸(依根本心滅)’은, 논 중에서 추념상(麤念相)을 버림이 바로 주상(住相)을 멸하는 것임과 같다. ‘승발의 도’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이며, ‘근본심이 다한다’고 한 것은 논 중에서 미세념(微細念)을 떠남이 바로 생상(生相)을 멸하는 것임과 같다.”
그렇다면 이 논에서는 말나식(末那識)은 없고, 기사(起事)의 삼심(三心)으로서 생주이(生住異)의 삼상(三相)에 짝하고, 이 장 가운데 삼식(三識)299)에 짝하는데, 어째서 회통한다고 하는가?
【답】 이 경(經)은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삼식(三識)에 짝할 수도 있고, 생주이(生住異)의 삼상(三相)에 짝할 수도 있다. 마땅한 바를 따랐으므로 훼손됨이 없다.
제육문(第六門)에 대한 것이다;
【문】 ‘경에 번뇌장의 청정이 능히 응신(應身)을 나타낸다’300)고 말한 것은 번뇌장이 곧 열반을 장애하고 소지장이 곧 보리를 막기 때문에 번뇌장의 청정이 법신(法身)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답】 만약 상반됨[相反]을 든다면, 힐난한 바와 같다. 이제 삼장(三障)의 거침과 세밀함을 잡는다면, 업장은 가장 거칠기 때문에 그것을 청정히 하면 화신(化身)을 나타낸다. 번뇌는 그 다음으로 거칠기 때문에 청정히 하면 응신(應身)을 나타낸다. 지장(智障)은 가장 미세하기 때문에 청정히 하면 법신(法身)을 나타낸다.
【記】 여덟째로 사장(四障)301)에 의탁해서 사위(四位)를 나타내는 것이니, 여기에는 두 가지 뜻[義]이 있다.
첫째로 정사(正使)302)를 잡아서 지전(地前)의 사위(四位)ㆍ사행(四行)ㆍ사인(四因)ㆍ사보(四報)를 나타내는 것인데,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로 천제불신장(闡提不信障)의 사(使)를 멸하고 나서 십신(十信)의 지위를 뒤집어 나타내어 신(信)과 낙(樂)의 대승행(大乘行)을 이루니, 정덕인(淨德因) 및 철륜왕보(鐵輪王報)가 된다. 둘째로 외도집아장(外道執我障)에 의탁해서 십해(十解)의 지위를 뒤집어 나타내어 반야행을 이루니, 아덕인(我德因) 및 동륜왕보(銅輪王報)가 된다. 셋째로 성문외고장(聲聞畏苦障)을 십행(十行)의 지위에 의탁해 나타냄으로서 파허공정기삼매행(破虛空定器三昧行)을 이루니, 낙덕인(樂德因) 및 은륜왕보(銀輪王報)가 된다. 넷째로 독각사대비장(獨覺捨大悲障)을 십회향(十廻向)의 지위에 의탁해 나타냄으로서 대비행(大悲行)을 이루니, 상덕인(常德因) 및 금륜왕보(金輪王報)가 된다.
또한 앞의 사장(四障)을 뒤집어서 네 가지 행[四行]을 얻은 것이 곧 불자의 네 가지 뜻[佛子四義]이 된다. 첫째로 초장(初障)을 뒤집어서 신과 낙의 대승종자(大乘種子)를 이루어 인(因)이 되니, 마치 아버지와 같다. 둘째로 반야가 연(緣)이 되니, 마치 어머니와 같다. 셋째로 파허공정(破虛空定)을 드러내고 소승의 집착을 여의어서 법신을 견고하게 하니, 마치 태(胎)와도 같다. 넷째로 대비(大悲)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니, 마치 유모(乳母)와 같다. 이 네 가지 연[四緣]을 갖추었기 때문에 지전(地前)으로부터 초지(初地) 이상의 여러 불가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불자(佛子)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한 위의 네 종류는 마치 수레바퀴와 같이 화합하여 능히 움직이고[能運] 능히 굴러서[能轉] 해탈처(解脫處)에 이르니, 성왕륜(聖王輪)이 사사(四事)를 갖추는 것과 같다. 이른바 바퀴통[轂]ㆍ살[輞]ㆍ테[輻]ㆍ굴대[軸]이니, 그 순서대로 네 가지 뜻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둘째로 사장(四障)의 습기로써 지상(地上)의 사위(四位)ㆍ사정(四定)303)ㆍ사덕(四德)304)ㆍ사보(四報)에 의탁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첫째, 초지와 이지, 삼지에서 천제불신습(闡提不信習)을 멸하는 것이니, 곧 이 일위(一位)가 세간과 서로 같음을 나타낸다. 또한 대승광명삼매(大乘光明三昧)를 얻어서 정덕(淨德)을 이루고 인연생사변역보(因緣生死變易報)를 없앤다. 둘째, 사지와 오지, 육지에서 외도아집습(外道我執習)을 멸하는 것이니, 곧 이 일위가 이승(二乘)과 서로 같음을 나타낸다. 집복덕왕삼매(集福德王三昧)를 얻어 아덕(我德)을 이루어서 방편생사(方便生死)를 없앤다. 셋째, 칠지와 팔지, 구지에서 성문외고습(聲聞畏苦習)을 없애는 것이니, 곧 이 일위(一位)가 대승과 서로 같음을 나타낸다. 현호삼매(賢護三昧)를 얻어 낙덕(樂德)을 이루어서 유유생사(有有生死)를 없앤다. 넷째로 십지(十地)로부터 불지 이후에 이르기까지 독각사대비습(獨覺捨大悲習)을 없애는 것이니, 이 일위가 인과가 원만함을 나타낸다.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를 얻어 상덕(常德)을 이루어서 생사(生死)305)가 있지 않다. 네 가지 덕[四德]이 원만하기 때문에 생사가 영원히 다하니, 그러므로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의 뜻은 넓게는 『무상의경(無上依經)』ㆍ『본업경』ㆍ『불성론』ㆍ『보성론』ㆍ『양섭론』 등의 설과 같다.
또한 이 네 가지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두 장애에 통하고, 뒤의 두 가지는 오직 지장(智障:所知障)일 뿐이다. 정사(正使)는 지전(地前)에서 없어지고, 습기는 지상(地上)에 깨끗해지니, 이 문장 또한 이를 증명한다.
아홉째, 십지 중에서 상(相)을 나누기 때문에 삼지종심(三地終心) 이래로 두 장애의 수혹(修惑)을 끊어서 정사(正使)가 모두 다하고, 사지(四地) 이후에는 다만 미미한 습기[微習]가 있을 뿐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의 삼지(三地)의 상은 세간과 같고, 사지 이후는 바로 출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지경』 제삼지의 말문(末文)에 이르기를, “일체 욕망의 속박이 굴러서 다시 미세하게 엷어지며, 일체의 색(色)의 속박이 굴러서 다시 미세하게 엷어지며, 일체의 유(有)의 속박이 굴러서 다시 미세하게 엷어지고, 일체 무명(無明)의 속박이 굴러서 다시 미세하게 엷어지며, 모든 견(見)의 속박이란 것들은 앞에서 이미 제거되어 끊어졌다”고 하였다. 『지론석(智論釋)』에 이르기를, “일체 욕망의 속박이 굴러서 미세하게 엷어진다는 등의 것은 일체의 수도(修道)에서 욕(欲)ㆍ색(色)과 무색(無色)과 소유(所有)의 번뇌와 그 인(因)과 동시에 무명(無明)의 습기를 끊어 모두 다 미세하게 엷어져서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모든 견(見)의 속박이란 것은 초지(初地)의 견도(見道)에서 이미 끊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그 인(因)’이라는 것은 번뇌장의 종자이고, 무명습기(無明習氣)는 소지장의 종자이다. 두 장애의 종자는 동시에 멀리 여의기 때문에 ‘동시에[同]’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두 장애의 수혹(修惑)의 정사(正使) 종자는 이 지(地)에서 모두 다한다. 이상은 다분히 종교(終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釋】 제팔문(第八門)에 대해서다.
【문】 ‘첫째로는 정사(正使)를 잡아서 지전(地前)의 사위(四位)ㆍ사행(四行)ㆍ사인(四因)ㆍ사보(四報)를 의탁하여 나타내었다’고 한 것 등은 장주의 명난소(明難疏)306) 중에서는 시교(始敎)에서 인용한 것인데, 어떤 이유로 지금의 문장은 종교(終敎)의 임시로 의탁함[假寄] 중에서 인용하는 것인가?
【답】 만약 십신(十信)에서 위(位)를 이루는 뜻을 근거로 한다면, 곧 시교에 해당된다. 만약 정사(正使)를 지전에서 끊고, 습기가 지상(地上)에서 끊어진다는 뜻을 잡는다면, 곧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책(嘖)과 답(答)을 세움이 있으니, 답 가운데 ‘천제불신장(闡提不信障)’307)이란 천제가 대승도(大乘道)를 믿지 않고 십신(十信)은 이와 반대이기 때문에 대승행(大乘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외도아집장(外道我執障)’308)이란 십해위(十解位) 가운데 반야행(般若行)을 이루어서 인공무아리(人空無我理)를 이해하기 때문에 저 집착[執]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위아덕인(爲我德因)’309)이란 무아(無我)로 말미암기 때문에 진아(眞我)의 덕(德)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문외고장(聲聞畏苦障)’310)이란 이 사람이 생사(生死)의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파허공기삼매행(破虛空器三昧行)’311)이란 성문인(聲聞人)은 곧 생사의 허망함이 저 허공과 같기 때문에 두려워할 만한 것이나 열반은 진실하기 때문에 즐거워할 만하다는 것이니, 이제 허공과 같은 견(見)을 깨뜨리기 때문에 ‘파허공(破虛空)’이라고 말한 것이다. ‘독각사대비장(獨覺捨大悲障)’312)이란 십회향(十廻向) 가운데 대비행(大悲行)을 이루기 때문에 저 장(障)을 뒤집는 것이다.
【문】 ‘대승광명삼매(大乘光明三昧)를 얻는다’313)고 한 것은 십지에서 총체적으로 정(定)을 회통한 것인데314), 어떤 이유로 초지와 이지, 삼지의 정이 된다고 하는가?
【답】 『양섭론(梁攝論)』315)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논(論)에서 ‘대승광삼마지(大乘光三摩地)’라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대승에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성(性), 둘째는 수(隨), 셋째는 득(得)이다. 성은 곧 삼무성(三無性)이요, 수는 곧 복덕지혜행(福德智惠行)이 융섭한 바의 십지(十地)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수순함에 성품이 없는 것이며, 득은 얻은 바 사덕과(四德果)이다. 정(定)은 위의 세 가지를 반연하여 경(境)으로 삼기 때문에 대승이라고 부른다. 이 정(定)에 의지하여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고, 무분별지로 말미암아 진여(眞如)와 부처가 다름이 없음을 비추기 때문에 광(光)이라고 부른다. 또한 열 다섯 가지의 광(光)의 공덕이 있으니, 곧 외광(外光)보다 뛰어나기 때문이요, 또한 이 정(定)은 능히 일천제(一闡提)의 습기와 무명의 어둠을 깨뜨리니, 곧 어둠[暗]을 대치하기 때문에 광(光)이라고 부른다.”
‘정(定)은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고, 열 다섯 종류의 광(光)의 공덕(功德)은 외광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광이라고 부른다’고 한 것은 십지에 통하니, 이는 십지에서 총체적으로 정(定)의 뜻을 회통한 것이다. ‘이 정은 능히 일천제의 습기를 파괴한다’고 한 것은 초지와 이지, 삼지에 국한되므로 이 가운데 초지와 이지, 삼지에서 대승광명삼매(大乘光明三昧)를 얻은 뜻에 해당된다.
또한 수(隨)의 뜻 가운데 복덕행(福德行)을 갖추니, 복행(福行)의 뜻을 잡으면 사지와 오지, 육지 가운데 집복덕왕삼매(集福德王三昧)를 얻으며, 덕행(德行)의 뜻을 잡으면, 칠지와 팔지, 구지 중에서 현호삼매(賢護三昧)를 얻는다. 한편 복덕을 갖춘 뜻을 잡으면, 제십지 중에서 수능엄삼매를 얻으니,316) 이와 같이 각각 한쪽 끝을 좇아서 십지 가운데 나누어 의탁할 뿐이다.
‘인연생사반역보(因緣生死反易報)’317)에 대해서다;
【문】 『양섭론』318)에서는 “초지와 이지, 삼지는 곧 방편생사(方便生死)요, 사지와 오지, 육지는 곧 인연생사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어떤 이유로 여기에서는 이것을 반대로 하는가?
【답】 법상공(法常公)의 『섭론소(攝論疏)』319)에서 말했다.
“첫째로 방편생사는 곧 무명(無明)을 반연으로 삼아서 생사(生死)에 감응하니, 그것은 직접적인 인[親因]이 아니기 때문에 방편이라고 부른다. 둘째로 인연생사320)는 곧 무류업(無流業)을 인(因)으로 삼아서 생사에 감응하니, 이것은 직접적인 인연을 말미암기 때문에 인연생사라고 부른다. 셋째로 유유(有有)는 앞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유(有)를 낳는 과(果)에 감응하는 것이니, 이런 과(果)가 있기 때문에 유유라고 부른다. 넷째로 무유(無有)는 곧 노사지(老死支)가 물러나고 그 보(報)가 다한 후에는 실로 유과(有果)321)가 있지 않으므로 무유라고 말한다. 만약 이름을 얻은 것을 논한다면, 방편은 소원함으로부터 이름을 얻고, 인연은 친한 것으로부터 명칭을 받으며, 유유는 과(果)로부터 목차를 세우고, 무유는 대치하여 드러난 칭호를 다한다. 이 일유(一有)가 다시 유(有)가 없기 때문에 초지에서 삼지(三地)에 이르기까지는 또한 사정(四定)ㆍ사공(四空) 및 시계(施戒) 등을 얻으나 아직 반야는 얻지 못하며, 세간과 서로 같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무명상(無明相)이 늘어나고 무루업(無漏業) 등의 상(相)은 숨는다. 그러므로 숨음으로 늘어남을 쫓아서 총체적으로 판별하면, 삼지는 모두 방편생사가 되고, 사지와 오지, 육지는 도품관지(道品觀智) 내지 인연관지(因緣觀智)를 얻는다. 현전(現前)의 무명상(無明相)은 숨고 무루업은 늘어나니, 숨음으로써 늘어남을 쫓아 판별하면 사지와 오지, 육지는 인연생사가 되고, 칠지에서 십지에 이르기까지는 주심(住心) 이래로 보행(報行)이 한껏 익고, 무루오분법신(無漏五分法身)은 더욱 밝고 깨끗함[明淨]을 늘린다. 인연상(因緣相)이 숨었다면, 인(因)으로써 과(果)를 쫓아 판별하여 유유생사(有有生死)가 된다. 십지종심(十地終心)에 생사가 있음은 시간이 짧기 때문이고, 불지(佛地)에 생사가 없음은 시간이 길기 때문이니, 유(有)로써 무(無)를 쫓아 판별하여 무유생사(無有生死)라고 한다.”
풀어서 말하면, ‘초지와 이지, 삼지는 방편생사이고, 사지와 오지, 육지는 인연생사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초지와 이지, 삼지는 인연생사다’이라고 한 것은 『불성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방편생사는 무명주지(無明住地)322)에서 능히 새롭게 무루업(無漏業)을 만드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무명이 행(行)을 만듦과 같다. 혹은 번뇌로 인해서 방편으로 같은 종류의 과[同類果]를 낳으니, 이를 이름하여 인연(因緣)이라고 하는데 무명(無明)이 불선행(不善行)을 낳는 것과 같다. 만약 같은 종류가 아닌 과[不同類果]를 낳는다면 다만 방편이라고만 부르니, 무명이 선행(善行)ㆍ부동행(不動行)을 낳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제 무명주지에서 새롭게 무루업행(無漏業行)을 낳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혹은 동류를 만들고 혹은 부동류를 만든다. 복행(福行)을 낳음을 이름하여 동류라고 하니, 똑같이 속(俗)을 반연하기 때문이며, 지혜행(智惠行)을 낳음을 부동류라고 부르니, 지(智)는 곧 참된 지혜[眞慧]이기 때문인데, 이를 방편생사(方便生死)라고 부른다.”
풀어서 말하면, 그 논의 문장으로써 지금의 문장을 회통[會]하면, 무명주지에서 새롭게 무루업을 만든다. 초지와 이지, 삼지는 상(相)이 세간과 같기 때문에 동류(同類)의 복행(福行)을 낳는 뜻이 증가하므로 인연생사(因緣生死)라고 부른다. 사지와 오지, 육지는 이 상이 이승(二乘)과 동일하기 때문에 부동류(不同類)의 지혜행(智惠行)을 만드는 뜻이 증가하므로 방편생사가 된다.
‘또한 네 가지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두 장애에 통하고, 뒤의 두 가지는 오직 지장(智障)이다’323)라고 한 것은 법상사(法常師)가 이십이무명(二十二無明)을 풀어서 말하기를, ‘육지(六地) 이상의 소단(所斷)이 곧 지장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뜻이다.
【記】 열 번째로 또한 십지(十地)에서 상(相)을 나누는 가운데 세간ㆍ삼승(三乘)ㆍ보살(菩薩) 등 삼위(三位)의 다름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러므로 『인왕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앞의 삼지에서는 삼계 가운데 색번뇌(色煩惱)를 끊고, 사지와 오지, 육지에서는 삼계 가운데 심번뇌(心煩惱)를 끊으며, 칠지와 팔지, 구지에서는 삼계 가운데 색습번뇌(色習煩惱)를 끊으며, 십지와 불지에서는 삼계 가운데 심습번뇌를 끊는다.”
풀어서 말하면, 삼지의 종위(終位)에서 상계(上界)의 정(定)을 얻고 궁극적으로 사공정(四空定)324)에 이르러서 하지(下地)의 색(色)을 여의기 때문에 색(色)의 미혹을 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지(四地) 이후에 이승(二乘)의 무루출세간위(無漏出世間位)를 얻어 세간의 색심(色心)325)이 모두 다하기 때문이다. 칠지 이후는 보살위이니, 앞보다 점차 미세해지기 때문에 색(色)과 심(心)의 습기(習氣)를 멸함에 의탁해서 그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열한 번째로 이 보살위 가운데 자재(自在)와 미자재(未自在) 등 두 위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함 때문이다. 칠지까지는 삼계의 색심번뇌(色心煩惱)와 그 과보를 멸함에 의탁하며, 팔지 이후에는 색심이습(色心二習)과 무명(無明)을 멸함에 의탁한다. 그러므로 『본업경』에 이르기를, “칠지까지는 삼계의 색ㆍ심 두 가지 습(習)과 그 과보를 멸하고, 멸하고 나서는 나머지를 남기지 않으며, 팔지에서는 색(色)의 습기와 무명(無明)이 다하고, 구지에서는 심(心)의 습기와 무명(無明)이 이미 멸하여 없어지고, 십지에서는 두 가지 습기와 무명(無明)이 다 없어진다”고 하였다.
열두 번째로 삼무성론(三無性論)에 의거하여 두 성(性)을 멸함에 의탁해서 견(見)과 수(修) 두 위(位)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논에 이르기를, “견도(見道)로 말미암기 때문에 분별성(分別性)은 곧 없어지니, 이 때문에 ‘얻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요, 수도(修道)로 말미암기 때문에 의타성(依他性)이 곧 없어지니, 그러므로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釋】 제십문 가운데 ‘또한 십지에서 지상(地相)을 구별한다’326)고 한 것은 앞의 제구문에 이르기를, “십지 중에서 상(相)을 구별하기 때문이다”327)라고 하였으니, 이 문(門)도 또한 지상을 구별하기 때문에 ‘또한’이라고 말한 것이다. 앞에서는 오직 세간 및 출세간을 구별하였고, 지금은 세간과 이승 및 보살을 구별하였다.
【記】 열세 번째로 『잡집론(雜集論)』에 의거하여 분별과 구생(俱生) 두 가지 번뇌로써 견(見)과 수(修) 두 위[二位]의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떻게 단지 위(位)에 의탁한 것이지 실제로 끊은 것이 아님을 아는가. 분별 아견(我見)이라면 세 가지를 빌려 생기니, 이른바 사사(邪師)ㆍ사교(邪敎)ㆍ사사유(邪思惟)이다. 헛되이 즉온(卽蘊)과 이온(離蘊)328) 등의 아(我)를 헤아리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는 비록 범위(凡位)에 있더라도 정사(正使)ㆍ정교(正敎)ㆍ정사유(正思惟)에 의거하기 때문에 다만 즉온(卽蘊) 등의 집착을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무아성(無我性)을 즐기기를 원하니, 이 사람이 어찌 끊고 나서 견도(見道)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만약 비록 현행(現行)이 없다 하더라도 종자가 있기 때문에 견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미 현행(現行)이 없으니 곧 자량(資糧)과 가행(加行)에 들어가야 마땅하지만, 그러나 그 뜻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견도무아(見道無我)의 이치[理]를 나타내기 위해서 저 멋대로 계교하여 전도된 거친 미혹에 의탁하여 반대로 그것을 나타낸 것이며, 또한 운(運)에 맡겨 일어나는 번뇌는 미세하여 끊기 어렵기 때문에 뒤집어서 수위(修位)의 점증차별(漸增差別)을 나타낸 것이다.
실의(實義)라면 단지 하나의 번뇌에 거칢이 있고 세밀함이 있어서 견위(見位)에서는 거칢을 끊고 수위(修位)에서는 세밀함을 끊는다. 말나번뇌(末那煩惱) 같은 것은 두 위(位)를 통틀어 그것을 끊으니, 『무상론(無相論)』에서 “제이집식(第二執識)과 상응법(相應法)은 나한위(羅漢位)에 이르러 궁극적으로 모두 멸한다. 견제(見諦) 안의 번뇌식(煩惱識)과 심법(心法)329)의 경우는 출세도(出世道)의 십육심(十六心)을 얻을 때에 끝내 끊어져 멸한다. 나머지 없어지지 않은 것은 다만 사유(思惟)에 속하니, 이를 제이식(第二識)이라고 부른다”고 한 것과 같다. 무성의 『섭론(攝論)』 역시 이 설과 같아서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열 네 번째로 분별혹(分別惑)이 빌린 바의 삼연(三緣)에 의탁해서 지전(地前) 삼현위(三賢位)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십해(十解) 등이 사사(邪師)를 제거하는 등이니, 차례대로 마땅히 알아라. 이는 직진(直進)을 기준으로 설한 것이다.
또 사사(邪師)와 사교(邪敎)가 일으킨 바는 자량위(資糧位)330)에 의탁해서 조복하니 행상(行相)이 거칠기 때문이며, 사사유(邪思惟)가 일으킨 바는 가행위(加行位)331)에 의탁해서 조복하니 행상이 세밀하기 때문이다. 이는 회심이승(廻心二乘)을 잡아서 설한 것이다.
열 다섯 번째로 구생(俱生) 안에서 육식과 칠식의 미혹(惑)은 칠지까지는 현행(現行)에 의탁해 있고, 팔지 이후부터는 영원히 조복하여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관(觀)에 들어감에 유간(有間)332)과 무간(無間)333)의 위(位)가 다름을 의탁해서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설(說)을 만든 것이다.
열 여섯 번째로 또한 육식번뇌(六識煩惱)로써 사지(四地)까지 의탁해 도달하고, 말나번뇌(末那煩惱)로써 칠지(七地)까지 의탁해 도달하며, 팔지(八地) 다음부터는 오직 소지장(所知障)만이 있다. 이는 또한 세간(世間)과 이승과 보살의 위(位)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설을 만든 것이다.
열 일곱 번째로 십지(十地)에서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의 차별을 드러내기 위함 때문에 십일무명(十一無明)으로 돌이켜 의탁하여서 나타낸 것이다.
열 여덟 번째로 지지(地地)의 진속(眞俗) 두 가지 지(智)를 드러내기 위함 때문에 이십이무명(二十二無明)으로 의탁하여 나타낸 것이다. 마치 『심밀경(深密經)』에서 “이 스물 두 가지의 우치품(愚癡品)과 열 한 가지의 거칠고 무거움[麤重]으로 말미암아 여러 지(地)를 안립(安立)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미 안립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의탁해 드러남[寄顯]’을 아는 것이다. 이 모든 뜻은 넓게는 『유가(瑜伽)』ㆍ『대법(對法)』ㆍ『유식(唯識)』ㆍ『섭론(攝論)』 등의 설과 같다. 이상은 다분히 시교(始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釋】 제십삼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논(論)을 인용하여 자의(自意)를 표시한 것이며, 둘째로 ‘어째서인가?’334)의 아래는 실(實)이 아닌 이유를 따져 물어서 해석한 것이며, 셋째로 ‘여실(如實)’335)의 아래는 실제[實]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문】 나머지 문을 예로 든다면, 우선 자의(自意)를 표하고 난 뒤에 인용해서 증명하는데, 지금은 왜 곧바로 논의 문장으로 자의를 표하는가?
【답】 논의 문장은 넓고 많아서 모두 인용하면 얽매일까 염려해서 뜻으로 인용하고자 하기 때문에 곧바로 논에 나아가 자의를 표한 것이다.
【문】 ‘분별과 구생(俱生)으로서 견(見)과 수(修)의 두 위[二位]에 의탁해서 나타낸다’336)고 한 것은 곧 시교(始敎)의 실행(實行)의 뜻인데, 어째서 임시로 의탁함[假寄]이라고 하는가?
【답】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시교의 실행(實行) 가운데 이장분별기(二障分別起)는 지전(地前)에서 현행을 조복하고, 초지(初地)에서 종자[種]를 끊는다. 구생 중에 번뇌장은 초지(初地) 다음부터 자재로이 능히 끊을 수 있으나 남겨두기 때문에 끊지 않는 것이다.337) 이제 이 의탁한 문(門)을 크게 견(見)과 수(修)로 나누면, 분별번뇌(分別煩惱)는 견도(見道)에서 모두 끊고 구생번뇌(俱生煩惱)는 수도(修道)에서 모두 끊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다.
지금의 해석에서 제십삼문은 시교 가운데의 실행(實行)과 동일하니,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임시로 의탁함[假寄]이라고 하는가? 이 문(門)의 뜻은 곧 시교와 종교 두 교가 합쳐져 하나의 대승교[一大乘敎]가 되더라도 종교(終敎)로 실(實)을 삼고 시교는 임시로 의탁함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치우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단지 지위에 의탁한 것일 뿐 실(實)이 아니다.”
나머지 문도 모두 ‘임시로 의탁함’이지만, 그러나 이 문에서 초교(初敎)의 실행(實行)이 임시로 의탁한 위(位)임을 치우쳐 나타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즉온(卽蘊)과 이온(離蘊)’338) 등은 오온(五蘊)에 즉하여 아(我)를 헤아리기 때문이고, 오온을 떠나 아(我)를 헤아리기 때문이다.
‘여실의(如實意)’는 단지 하나의 번뇌에 거칢이 있고 세밀함이 있는339) 등이다. 『법계품초(法界品抄)』340)에 이르기를, “십지로 곧장 나아가는 가운데 처음에는 거칢을 끊고, 나중에는 세밀함을 끊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실의’는 종교임을 마땅히 알라.
‘말나번뇌(末那煩惱)와 같은 것이 두 위[二位]를 통틀어서 끊는다’341)고 한 것은, 우선 육식번뇌(六識煩惱)를 기준으로 하여 견도(見道)342)에서 거칢을 끊고 수도(修道)343)에서 세밀함을 끊음을 판별한 것이다. 이제 말나번뇌를 기준으로 하여 견도에서 거칢을 끊고 수도에서 세밀함을 끊는다는 뜻으로 판별하여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그러므로 앞에서 ‘말나번뇌는 초지(初地)에서 거칢을 끊고 나중에 남은 습기를 없앤다’344)고 말한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제이집식(第二執識)’345)은 말나이니, 뇌야(賴耶)를 상대했기 때문에 제이가 된다. 이 가운데 우선 이승이 말나를 없앤 뜻을 나타내고, 다음으로 ‘만약 견제(見諦)’346)의 아래에서는 보살의 말나번뇌가 견도에서 거칢을 끊고 수도에서 세밀함을 끊는 뜻을 밝힌 것이다.
【문】 ‘십육심(十六心)’347)은 소승위(小乘位)인데, 어째서 보살단(菩薩斷)의 뜻이라고 말하는가?
【답】 이승위지(二乘位地)의 말을 빌려서 보살단혹(菩薩斷惑)의 뜻을 나타내었을 뿐이다.
‘이 위의 모든 뜻’348)이라 한 것은 뒤의 구문(九門)에 근거한 것이니, 이 구문 가운데 성교(聖敎)를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지목한 것이다.
【記】 이상 여러 문(門)은 모두 아함문(阿含門)이다. 미혹에 의탁하여 오히려 위상차별(位相差別)을 나타내었으니, 어째서인가? 십지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고, 중생(衆生)으로 하여금 십지 가운데서 오만한 집착[慢執]을 버리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위상(位相)은 깊고 깊어서 완전히 알기가 지극히 어려우므로 미혹에 의탁하여 위(位)를 드러냄으로서 청정한 믿음[淨信]을 일으키려고 하기 때문이니, 나머지 뜻은 이에 준거해서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만약 돈교(頓敎)에 의지한다면, 일체번뇌(一切煩惱)는 본래 스스로 여의어 있어서 끊는다[斷], 끊지 못한다[不斷]고 말할 수 없으니, 『법계체성경(法界體性經)』에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떻게 여러 선남자에게 보리심을 발하도록 하는가?’라고 하시니, 문수가 대답하기를, ‘저는 아견심(我見心)을 내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아견이 없으면 곧 보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 것과 같다. 이 문장이 증거가 되니, 준거하여 알라.
【釋】 셋째로 결론지음 중에서 ‘십지를 보호하기[護] 위해서’349)라 한 것에서 ‘보호’는 허물[過]을 막아서 보호하기[防護] 때문이다.
【문】 열 여덟 가지 문 가운데 또한 지전(地前)이 있는데, 어째서 ‘십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가?
【답】 비록 지전이 있더라도 십지를 종지[宗]로 삼기 때문이다.
【문】 『십지장(十地章)』350)에 이르기를, “이와 같은 등의 법의 차별상은 십지를 보호하기 때문이니, 방편문(方便門)을 따라서 갖가지 설을 지음으로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십지 중에서 증상만(增上慢)을 여의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그것은 화엄(花嚴)의 외상(外相)의 십지를 잡은 것이고, 이것은 지효(地爻)의 십지를 잡은 것이니, 그러므로 같지 않다.
‘나머지의 뜻은 이에 견주어 생각하라’351)고 한 것은, 열 여덟 가지 문 중에 인용되지 않은 성교(聖敎)는 그것에 준하면 통한다는 것이다.
【記】 만약 원교(圓敎)에 의거한다면, 일체의 번뇌는 그 체성(體性)을 말할 수 없지만, 다만 용(用)을 잡는다면 매우 깊고 광대한 것이니, 소장법(所障法)의 일즉일체(一卽一切)이고 주체와 짝[主伴]을 모두 만족하기 때문이며 저 능장혹(能障惑)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사(使)와 습(習)과 종(種)과 현(現)을 나누지 않았으니, 다만 법계의 하나를 얻으면 일체를 얻는[一得一切得]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번뇌 또한 일단(一斷)이 일체단(一切斷)이다. 이 때문에 「보현품(普賢品)」에서 일장(一障)이 일체장(一切障)임을 밝혔고, 「소상품(小相品)」에서는 일단이 일체단임을 밝혔는데, 이것이 그 뜻이다.
또한 이 단혹분제(斷惑分齊)는 상하 경문에 의거하면 네 종류가 있다. 첫째로 증득352)을 잡은 것으로서 이른바 십지 가운데서 끊는 것이며, 둘째로 위(位)를 잡은 것으로서 이른바 십주(十住) 다음에 끊는 것이며, 셋째로 행(行)을 잡은 것으로서 이른바 십신종심(十信終心)에서 끊는 것이며, 넷째로 실(實)을 잡은 것으로서 이른바 끊을 것이 없는 것이다. 이는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니, 넓게는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한 앞의 삼승(三乘) 등 여러 문(門)에서 혹(惑)을 끊는 것은 만약 일장이 일체장이고 일단이 일체단이라면 곧 이 비리(非理)에 들어가며, 만약 문의 전후를 쫓은 것이 삼승이라면 이는 별교(別敎)를 잡아서 말한 것이며, 만약 섭방편(攝方便)을 잡는다면, 앞의 여러 교(敎)가 밝힌 바가 모두 이 속에 들어가니, 이는 이것이 방편이면서 아울러 소류(所流)의 소목(所目)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뜻은 이에 준한다. 단혹문(斷惑門)을 마친다.
【釋】 원교(圓敎)에 나아가서는 우선 별교(別敎)를 밝히고, 다음으로 ‘약약(若約)’353)의 아래는 동교(同敎)를 밝힌 것이다. 앞의 것 중에서 먼저는 올바로 밝힌 것이고, 다음으로 ‘또한 이’354)의 아래는 단혹위(斷惑位)를 나타내었다.
앞의 것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로 체(體)가 없어도 용(用)이 있음을 밝혔고, 둘째로 ‘소장(所障)으로’355)의 아래는 일장이 일체장임을 변별한 것이고, 셋째로 ‘시고불분(是故不分)’356)의 아래는 일단이 일체단임을 변별한 것이고, 넷째로는 인용해서 증명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일체번뇌는 그 체성을 설할 수 없다’357)고 한 것에 대해서는 『도신장(道身章)』에서 의상화상이 이렇게 말했다.
“혹(惑)은 용(用)만 있고 체(體)358)는 없으나, 지(智)359)는 체와 용을 갖춘다. 체가 없다면 어떻게 용을 얻을 수 있는가? 체는 무주실상(無住實相)이고 용을 미혹한 것이 혹(惑)이 되니, 용에 미혹됨을 쉬었을 뿐이요 끊을 만한 체가 없는 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체는 무주실상(無住實相)이기 때문에 ‘설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용을 미혹함이 혹이 되기 때문에 “단지 용을 잡으면 더욱 깊다”360) 등으로 말한 것이다. 마치 허공의 구름과 같다는데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로 체가 없다는 것은 곧 공의 뜻이고, 둘째로 용이 있다는 것은 덮어 가린다는 뜻이다. 혹(惑) 중에서도 또한 그렇다.
‘소장법의 일즉일체로써’361)라고 한 것은 소장(所障)을 들어 능장(能障)을 나타낸 것이다. ‘사(使)와 습(習)과 현(現)과 종(種)을 나누지 않는다’362)는 것은 삼승(三乘)을 간별한 것이다.
‘단지 법계(法界)의 일득일체득(一得一切得)과 같다’363)고 한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계와 같다’는 것은 능례(能例)를 든 것이고, ‘하나를 얻으면 일체를 얻는다’ 이하는 소례(所例)를 든 것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계(法界)의 하나를 얻으면 일체를 얻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능례를 든 것이고, ‘그러므로’ 이하는 소례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말하자면 ‘법계의 하나를 얻으면 일체를 얻는다’의 뜻을 들어서 ‘하나를 끊으면 일체를 끊는다’는 뜻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보현품」에서 일장일체장을 밝혔다’364)는 것은 그 품365)에서 “하나의 진심(瞋心)을 일으키면 수많은 장애의 법문을 받는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소상품(小相品)」에서 일단일체단을 밝혔다’366)고 한 것은, 그 품367)에서 “이 모든 번뇌를 다 없애 버린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문】 「소상품」의 지(智)로써 「보현품」의 장(障)을 끊는가?
【답】 많은 설이 있지만, 지금은 「소상품」의 지로써 「보현품」의 장을 끊는다고 풀이한 것이다. 말하자면 「보현품」은 소치(所治)를 들었고, 「소상품」은 능치(能治)를 들었기 때문이다.
【문】 「소상품」에 팔만 사천 가지 번뇌가 바로 소치요, 「보현품」에 있는 육십 가지 보문행덕(普門行德)이 바로 능치이니, 그렇다면 각각 능치와 소치를 갖추었는데, 어째서 억지로 「소상품」의 지로 「보현품」의 장을 끊는 것인가?
【답】 「소상품」에 소치가 없지 않고 「보현품」에 능치가 없지 않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상품」 가운데 팔만 사천 가지 번뇌의 일장일체장의 뜻은 「보현품」에서 비로소 나타나고, 「보현품」 가운데 육십 가지 보문(普門)의 일단일체단의 뜻은 「소상품」에서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엄경』 중에 일장일체장의 궤칙(軌則)은 모두 「보현품」의 문장에 의탁한 것이고, 일단일체단의 궤칙은 모두 「소상품」의 문장에 의거한 것이니, 일단일체단은 「소상품」의 지(智) 아님이 없고, 일장일체장은 곧 「보현품」의 장(障) 아님이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문】 만약 「소상품」의 지로써 「보현품」의 장을 끊는다면, 수생(修生)의 지(智)로써 본유(本有)368)의 장(障)을 끊는가?
【답】 수생(修生)과 본유(本有)는 덕(德)을 잡아서 논한 것이지, 능장(能障)에 다시 수생과 본유가 있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본유와 수생을 장애하는 미혹은 수생지(修生智)로써 모두 끊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황금이 비록 진흙 가운데 있더라도 그 금의 체는 본래 청정(淸淨)하니, 만약 거푸집과 공이의 공(功)을 빌려서 이물질을 제거해 버린다면 밝고 밝은 빛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본래 청정한 금의 체를 나타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본유(本有)의 덕(德)은 비록 물듦[染] 속에 있더라도 성덕(性德)369)은 본래 청정하다. 만약 수생(修生)의 지(智)를 얻어서 일단일체단일 때라면, 비단 수생만덕(修生萬德)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본래성덕의 체[本來性德體]를 나타낸다. 마치 청정한 하늘 가운데 구름과 먼지가 두루 덮더라도 햇빛이 나올 때는 구름을 깨고 하늘이 나타남과 같으니, 햇빛과 하늘은 비록 다르지만, 능히 가리우는 구름은 원래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두운 구름이 만약 깨진다면, 바로 밝은 햇빛을 열 뿐만 아니라 청정한 하늘빛을 나타내서 법(法)과 합치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도신장』에 이르기를, “어떤 문장에서는 ‘일단일체단’이라 하고, 어떤 문장에서는 ‘실제로 끊을 바가 없다’고 말하는데, 저것이 옳다면 이것이 그른 것이요, 이것이 옳다면 저것이 그른 것이니, 어떻게 회통(會通)하는가? 덕(德)으로써 말하면 처음부터 막힘이 없고, 미혹으로써 조망하면 다함이 없는 덕을 덮어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다함이 없는 덕’은 수생(修生)만이 아니고 또한 본유(本有)의 덕과도 통한다. 수생의 지(智)가 일어나 다함이 없는 덕을 덮어 버리는 장애를 끊는다면, 또한 본유의 지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 지엄이 ‘「십지회종(十地會宗)」’370)에서 이르기를, “첫째로는 소치(所治)이니, 이른바 정사(正使)ㆍ번뇌ㆍ업(業)ㆍ보(報) 및 성삼장(性三障)의 상심종자(上心種子)를 말한다. 둘째로 능치(能治)이니, 이른바 정무분별지(正無分別智) 및 보현성기지(普賢性起智)를 말한다”고 하였는데, 이 능치ㆍ소치는 그 뜻이 어떠한가?
【답】 ‘정사ㆍ번뇌ㆍ업ㆍ보’는 「십지품」의 소치이고, ‘성삼장의 상심종자’는 「보현품」의 소치이고, ‘정무분별지’는 「십지품」의 능치이고, ‘보현성기지’는 「보현품」의 능치이다.
【문】 수생과 본유는 동교(同敎)와 별교(別敎) 중에 무엇에 해당되는가?
【답】 ‘십지(十地)’의 능치와 소치는 곧 수생(修生)이고 또한 동교이고, ‘보현성기(普賢性起)’의 능치와 소치는 곧 본유(本有)이고 또한 별교이다. 왜냐하면 저 소(疏)의 ‘「십지품종(十地品宗)」’371)에 이르기를, “네 가지 뜻은 위(位)를 잡으면, 오직 수생을 취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십지’의 능치와 소치는 오직 수생이고 또한 동교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미 그러하기 때문에 보현품의 능치와 소치는 본유(本有)이다.
【문】 또한 ‘품종(品宗)’372)에 이르기를, “불설(不說)로써 설(說)을 삼는다고 한 뜻은 보현덕위(普賢德位)373)를 증득한 것이고, 설(說)로써 설을 삼는다고 한 것은 삼승(三乘)의 근본이다”라고 하였으니, ‘불설로써 설을 삼는다’는 등은 별교의 뜻일 수 있는데 어째서 동교라고 말하는가?
【답】 ‘불설로써 설을 삼는다’는 것은 본분(本分)에서 청분(請分)의 문장을 잡아서 말한 것이며, ‘설로써 설을 삼는다’는 것은 설분(說分)의 문장을 잡아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장주의 「십지설분설(十地說分說)」의 뜻 가운데 이르기를,374)“셋째로 설한 것의 의미는 앞의 본분의 청분(請分) 속에서 이미 지체(地體)를 설하여 저 높은 근기로 하여금 현지(玄旨)를 깨달아 이해하게 하였고, 지금은 지상(地相)을 변별하여 중하류(中下流)로 하여금 상(相)을 쫓아 열어서 이해하게 한 것이니, 그러므로 설을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지엄의 ‘불설로써 설을 삼는다’고 한 것과 같으니, 회종(會宗) 가운데 대부분 설분을 쫓아서 변별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동교이다.
【문】 수생은 동교, 본유는 별교라 함은 오직 단일한 본유(本有)와 단일한 수생(修生)을 잡아서 논한 것인가? 네 구를 통틀어 잡아서 나누어 논한 것인가?
【답】 수생 및 수생본유(修生本有) 두 구를 합하여 수생이라고 하고, 본유 및 본유수생(本有修生) 두 구를 합하여 본유라고 한다. 왜냐하면 제육지(第六地)의 석의문(釋義門)375)에서 본유(本有) 등 네 구를 밝히는 끝에 말하기를, “만약 경전을 상대하여 문장을 나누면, 이 열 번의 연생[十番緣生]에는 오직 두 문이 있을 뿐이니, 첫째는 수생이요, 둘째는 수생본유이다. 나머지 둘은 「성기품(性起品)」에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문】 이 네 구 가운데 단(斷)과 무단(無斷)을 논한 의미는 무엇인가?
【답】 본유 및 수생본유를 잡으면 소단(所斷)이 없고, 수생 및 본유수생을 잡으면 소단이 있다. 말하자면 이(理)를 잡으면 소단은 없어지고, 지(智)를 잡으면 일단일체단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석의문(釋義門)376)에 이르기를, “본유라는 것은 연기(緣起)의 근본 실체[本實]라서 체(體)가 정(情)을 여의면 법계가 나타난다고 하지만, 그러나 삼세(三世)는 부동(不動)하기 때문에 성기(性起)377)에서 이르기를, ‘중생심(衆生心) 가운데 작은 티끌의 경권[微塵經卷]이 있고 보리대수(菩提大樹)가 있어서 중생과 성인이 함께 증득하니, 사람의 증득에는 전후가 같지 않으나 그 나무는 다르게 구별되어 나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본유를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연생문(緣生文)378)에, “십이인연(十二因緣)은 가장 으뜸의 뜻[第一義]이다”라고 하였으니, 본유수생을 말한다. 그러나 「제정품(諸淨品)」에서 본래는 다른 성품[異性]이 없으나, 이제 여러 연(緣)이 새로운 선(善)을 발생함을 잡아서 저 모든 연(緣)에 근거함을 잡는다면, 곧 망법(妄法)이 발한 바의 진지(眞智)가 보현(普賢)에 합해지면서 성체(性體)도 본래 분별됨이 없고 수지(修智) 또한 분별됨이 없으므로 지(智)는 이(理)에 순응하고 모든 연(緣)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수생이 곧 본유의 동일한 성(性)으로부터 발(發)함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성기품」379)에 이르기를, “보리심(菩提心)이라고 이름하니 성기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 본유수생이 이미 새로 발함의 뜻이라면 옛 것은 아닌데, 어째서 본성을 따른다고 하는가?
【답】 이는 다만 새로 생긴다는 뜻이기 때문에 수생이라고 설한 것이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本)의 뜻과 친근하기 때문에 성(性)을 쫓아서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지금의 곡식[穀]은 겁초(劫初)와 다르지 않으나, 본래의 곡식에 순응하면 가깝고380) 지금의 연(緣)을 대하면 소원하기 때문에 새로 얻었다고 설하지 않는 것과 같다.
셋째로 수생은 신(信) 등의 선근(善根)이 먼저 앞에 나타나지는 않으나, 이제 정교(淨敎)를 대해서 연에 의지하여 발(發)하기 때문에 신생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넷째로 수생본유는 여래장성(如來藏性)381)이 여러 티끌에 숨어 있다면, 범부(凡夫)는 그 처소를 미혹해서 깨닫지 못하니, 만약 미혹한 때를 대하면 유(有)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상론(無相論)』382)에 이르기를, “만약 있다면 마땅히 볼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어서 비로소 법신(法身)을 나타내고,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함[淨]을 이루는 것이다. 처음에는 힘이 없어서 저 무법(無法)과 같더라도, 지금 용(用)을 이룸은 본래 처음에 없었던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설할 수 없어서 본유라 이름하는 것이고 수정(修淨)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문】 만약 처음에 나타남을 수기(修起)라고 한다면 수생(修生)이라고 이름해야 할 텐데 어째서 ‘현(現)’이라고 설하는가?
【답】 다만 현(現)이 될 뿐이니, 수생문(修生門) 가운데서 뜻이 본유(本有)를 이루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미혹한 마음[迷心]에 있어서 체용(體用)을 설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비로소 법신(法身)이 있다고 설하기 때문에 저 새롭게 태어남과는 가깝고 먼저 있던 것과는 소원함[疏]을 아는 것이다. 곧 논(論)383)에 ‘이불리무상(離不離無常)’이라고 말한 것과 같으니, 이미 ‘무상(無常)’이라고 말하였다면 본유로부터 올 수 없다.
이상의 네 가지 뜻은 이 연생(緣生)에서 이(理)와 실(實)이 통틀어 있으니, 풀어서 말하면, 본유 및 수생본유는 이미 이(理)384)를 잡았기 때문에 소단(所斷)이 없고, 수생 및 본유수생은 지(智)385)를 잡았기 때문에 단(斷)을 설한 것이다.
【문】 장주의 『부사의품소(不思議品䟽)』386) 가운데 네 구는 지엄의 네 구와 어떻게 다른가?
【답】 다르다. 장주는 본유 및 본유수생을 잡으면 소단이 없고, 수생 및 수생본유를 잡으면 단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말하자면 여래장성(如來藏性)의 본래구경(本來究竟)은 오직 본유(本有)이고, 여래장(如來藏)이 옛날에 숨었다가 지금 나타난 것은 본유수생이라고 하였다. 이 두 구(句)는 일종의 이체(理體)이기 때문에 끊을 바가 없다고 한 것이다. 무분별지(無分別智)의 본래 없다가 지금 있는 것은 오직 수생(修生)이고, 이 무분별지 안에서 진성(眞性)과 동일한 것은 수생본유이니, 이 두 구는 일종의 지(智)이기 때문에 단(斷)의 뜻을 논한 것이다.
【문】 장주가 지엄의 뜻을 따른 것이 있는가?
【답】 있다. 말하자면 『기신별기(起信別記)』387)에 이르기를, “또한 본각(本覺)388)으로 시각(始覺)을 이루므로 다시 다른 법이 없으나, 이 뜻을 쫓기 때문에 총괄하여 본유(本有)라고 이름한다. 또한 시각으로 본각과 계합함을 비로소 본각이라고 이름하니, 만약 시각을 여의면 일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뜻을 쫓기 때문에 총괄하여 수생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본각으로 시각을 취함을 본유수생이라고 이름하고, 또 시각에 대하여 본각을 설하므로 수생본유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본유 및 수생본유를 잡으면 소단(所斷)이 없고, 수생 및 본유수생을 잡으면 단(斷)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문】 「소상품」은 수생이고, 「보현품」은 본유이다. 그러나 각각 본유와 수생이 있기 때문에 단(斷)과 부단(不斷)을 논한다면, 이는 곧 각각 자품(自品)에 해당되고 능소(能所)의 치(治)를 갖추는데, 어떤 이유로 반드시 「소상품」의 지(智)로써 「보현품」의 혹(惑)을 끊는 것인가?
【답】 비록 두 품 중에 각각 본유와 수생을 갖추었기 때문에 단과 무단(無斷)의 뜻을 논한다 하더라도, 능치지(能治智)의 일단일체단의 뜻을 밝힘은 「소상품」389)이고, 소치장(所治障)의 일장일체장의 뜻을 밝힘은 「보현품」390)이기 때문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 단혹위(斷惑位)를 나타낸 것 중에서 먼저 네 구의 단(斷)을 나타내고,391) 뒤의 ‘또한 앞의’392) 아래에서는 단지 네 구만이 아님을 나타내었다.
앞의 것에 대해서다.
【문】 이 네 구의 단(斷)은 동교(同敎)인가, 별교(別敎)인가?
【답】 어떤 사람은 동교라고 하는데, 지금의 해석에서는 원융(圓融)과 항포(行布)393)를 갖춘 별교(別敎)의 단(斷)이다. 이른바 ‘이 단혹분제(斷惑分齊)’394) 등은 위의 원교(圓敎)에서 논한 일단일체단의 뜻을 거듭 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밝힌 단혹위(斷惑位)를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네 구로써 그것을 나타낸 것이지, 단지 동교라고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네 구를 동교라고 말한다면, 위에서 밝힌 일단일체단의 뜻도 또한 동교인가? 전자가 그렇지 않은데 후자가 어떻게 그렇겠는가? 그러므로 「소상품소(小相品疏)」395)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번뇌를 모두 다 없앤다’고 하는 것은 현(現)과 종(種)과 사(使)와 습(習)을 나누지 않고 모두 없애는 것이지, 따로 없애는 것은 아니다. 어떤 위(位)에서 없어지는가는 다섯 위를 통틀기 때문이고, 어떻게 멸하는가는 허공(虛空)과 같기 때문이고 본래 다하기 때문이다.”
풀어서 말하면, 전자에 준거해서 후자를 해석하는 것에서 ‘사와 습과 현과 종을 나누지 않고 모두 없애는 것이지, 따로 없애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은 이 문장의 ‘사와 습과 현과 종을 나누지 않고 다만 법계(法界) 내지 일단일체단’396)과 같다는 등에 해당된다. ‘어떤 위(位)에서 없어지는가는 다섯 위[五位]를 통틀기 때문이다’는 이 문(門)의 앞 세 구에 해당된다. ‘허공과 같기 때문이고 본래 다하기 때문이다’는 이 문장의 제사구에 해당된다. 만약 네 구를 동교라고 말한다면, 그 문장의 단혹(斷惑)397)도 또한 동교인가? 저것이 이미 별교이므로 이것도 또한 그렇다.
【문】 『도신장』에서398) 말했다.
“상원사(常元師)가 ‘동교 중에서는 증득을 잡으면 초지(初地)에서 미혹을 끊고, 위(位)를 잡으면 십해(十解)에서 미혹을 끊으며, 행실(行實)을 잡으면 십신(十信)에서 미혹을 끊고, 법실(法實)을 잡으면 끊을 바가 없으니, 또한 별교(別敎)399)의 일단일체단은 동일한 미혹인가, 서로 다른 미혹인가?’라고 하였다.”
이 문장을 기준으로 한다면, 네 구는 동교의 뜻인데 어째서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답】 이 문장의 뜻에서 동교가 바로 삼승에 의탁한 것임은 아래의 사교(四敎)이기 때문에 동교가 되는 것이지, 나타낸 바의 네 구를 동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삼승(三乘) 중에서는 증험을 잡으면, 초지에서 미혹을 끊기 때문에 일승(一乘)도 그것에 의탁해서 초지에서 일단일체단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삼승 중에서 위(位)를 잡으면, 십해에서 미혹을 끊기 때문에 일승도 그것에 의탁해서 십해에서 일단일체단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삼승 중에서는 행(行)을 잡으면 십신에서 미혹을 끊기 때문에 일승도 그것에 의탁해서 십신종심(十信終心)에서 일단일체단임을 나타낸다. 삼승 중에서는 끊을 바가 없음의 뜻이 있기 때문에 일승도 그것에 의탁해서 제사구의 뜻이 있게 되니, 그러므로 저 삼승의 네 구의 뜻에 의탁해서 일승 네 구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동교는 삼승에 의지한 바의 네 구의 뜻이 되고, 이 가운데 네 구는 나타낸 바의 별교에 해당된다. 따라서 초지(初地)ㆍ해위(解位)ㆍ십신(十信)의 삼위(三位) 가운데 일단일체단의 뜻을 잡아서 ‘또한 별교의 일단일체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지엄의 『명난소(明難䟽)』400)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래에서 해(解)를 낳아 장(障)을 끊어 없애는데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신(信)의 낳음을 잡으면, 초지(初地)에서 사(使)의 종자를 끊는다. 둘째로 위(位)를 잡으면, 해위(解位)에서 사(使)와 습(習)의 종자 모두를 끊는다. 셋째로 행(行)을 잡으면, 십신만심(十信滿心)에서 사와 습의 종자를 모두 끊는다. 넷째로 실(實)을 잡으면, 본래 반드시 끊을 필요가 없고 자체로 깨끗한 것이다. 또한 단혹상(斷惑相)은 어떤가? 초(初)도 아니고, 중(中)ㆍ후(後)도 아니니, 전중후(前中後)를 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끊는가? 허공과 같으니, 이것은 삼승공학(三乘共學)의 뜻이다.”
이를 풀어서 말하면, 이 명난(明難)의 네 구의 뜻도 또한 별교인가?
【답】 그렇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이 장(章)의 네 구도 같은가?
【답】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같다고 한 것은 두 곳이 별교이기 때문이고, 다르다고 한 것은 이 장의 네 구가 모두 원융(圓融)ㆍ항포(行布)의 별교의 뜻에 통하기 때문이다. 『명난소』의 뜻의 첫째 구는 단지 항포이고, 뒤의 세 구는 이와 동일하기 때문에 약간은 같지 않음이 있다.
【문】 어떤 이유로 명난의 네 구 가운데 첫째 구는 오직 항포이고, 뒤의 세 구는 원융ㆍ항포의 별교(別敎)에 통하는가?
【답】 명난의 네 구는 아래의 십신(十信)ㆍ삼현(三賢)401)ㆍ십지(十地) 가운데 다스릴 바를 나타내니, 이른바 『명난소』402)에서 이르기를, “둘째로 다스릴 바를 내는 것이니, 일진(一瞋)의 장애는 백법명문(百法明門)의 장애이다”라고 하였다. 십주(十住)403)에 이르기를, “둘째로 다스릴 바를 밝힌 것이니, 앞의 백 가지 장애를 응당 위(位)에서 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십행(十行)에 이르기를,404) “둘째로 다스릴 바이니, 일승(一乘)은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회향(廻向)405)에 이르기를, “둘째로 다스릴 바를 변별한 것이니, 일승은 앞에서처럼 준거하라”고 하였다. 십신과 삼현은 사(使)와 습(習)을 나누지 않고 통틀어 많은 장애를 끊기 때문에 제이구와 제삼구에서 표한 바이니, 바로 원융ㆍ항포의 별교의 뜻에 통하는 것이다. 십지(十地)406)에 이르기를, “첫째로 다스릴 바를 밝힌 것이니, 말하자면 정사(正使)ㆍ번뇌ㆍ업ㆍ보 및 성삼장(性三障)의 상심종자(上心種子)이다”라고 하였으니, 정사ㆍ번뇌ㆍ업ㆍ보는 십지에서 끊을 바이고, 성삼장 등은 보현성을 일으켜 끊을 바이다. 정사라는 것은 초지(初地) 중에서 정사의 종자가 영원히 끊어지기 때문이며, 번뇌라는 것은 이십이무명(二十二無明) 및 십일장(十一障)이며, 업이란 것은 이십이업(二十二業)이며, 보(報)란 것은 네 가지 변역보[四種變易報]이다. 이는 정사와 습기를 나누기 때문에 항포동교(行布同敎)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처음 구에서 이 뜻을 표하여 이르기를, “신(信)을 낳음을 잡으면407) 초지에서 사(使)의 종자를 끊기 때문에 바로 항포동교이다”라고 하였다.
【문】 어떤 이유로 평등한 인과(因果)의 소치(所治)가 성삼장이 되는가?
【답】 고사(古辭)에 이르기를,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소치가 사장(事障)이 되고, 보현성기지(普賢性起智)의 소치가 성삼장이 된다”고 하였다.
【문】 어떤 것이 사장(事障)이고, 어떤 것이 성장(性障)인가?
【답】 물듦[染]을 깨끗함[淨]이라 미혹하고, 깨끗함을 물듦이라고 미혹하는 것을 사장이라고 이름하고, 소위 물듦과 깨끗함의 자성에 각별히 집착하는 것을 성장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물든 것은 버릴 만하다고 여기고 깨끗한 것은 취할 만하다고 여겨서 마침내 물듦을 끊고 깨끗함을 나타내는 것을 무분별지의 단장(斷障)이라고 이름한다. 물듦은 덕(德)이기 때문에 물듦의 근본은 끊을 것이 없고, 깨끗함은 다시 나타낼 것이 없다는 것은 ‘보현성기지(普賢性起智)’의 단장이 된다. 옛날에 이르기를, “두 지(智)의 단장은 마치 불을 들어서 어둠을 찾는 것과 같아서 밝음은 있고 어두움은 없다는 것은 무분별지의 단장이요, 불을 들어서 어둠을 찾음에 어두움이 곧 밝음이라 다시 비출 것이 없다는 것은 성기지의 단장이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본래 끊을 것이 없는 것을 어째서 성삼장의 소치가 된다 하는가?
【답】 이미 수생지(修生智)를 써서 어둠을 끊고 밝음을 얻은 날에는 앞에서 끊은 어둠이 본래 바로 밝음[明]이기 때문에 다시 새로 끊거나 새로 얻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어둠을 끊어 밝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소치(所治)라 이름하며, 이 어둠을 끊어 밝음을 얻으려는 마음이 된다고 하는 것을 잡는 것을 성삼장이라고 이름한다. 마치 십신위(十信位)에서부터 시각지(始覺智)를 일으켜서 삼현과 십지를 거쳐 십지종심(十地終心)에 이르러 생상(生相)의 꿈을 없애서 시각(始覺)408)이 원만하게 나타나나, 반대로 시각을 돌아보면 곧 본각(本覺)과 같으므로 시각상(始覺想)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생지로써 어둠을 깨뜨리고 밝음[明]을 얻으니, 이미 밝음을 얻은 날에는 앞에서 깨뜨린 어둠은 본래 바로 밝음임을 알게 된다. 어둠은 본래 움직이지 않았고 밝음은 새로 얻은 것이 없으니, 이른바 어둠을 없애서 밝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뜻이 단장이 된다.
【문】 삼현소치(三賢所治)는 원융(圓融)ㆍ항포(行布)에 통한 별교(別敎)를 잡았는데, 어떤 이유로 십지(十地)는 그렇지 않은가?
【답】 경문의 상(相)을 좇았기 때문에 그렇다. 말하자면 삼현에서 설한 바는 보현덕(普賢德)이 나타나면 삼승상(三乘相)은 숨는다는 것이나, 십지 중에서는 이와 반대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엄의 「회향품소(廻向品䟽)」409) 에 이르기를, “초지(初地) 이상은 경문에서는 본래 삼승에 통함이 없으니, 교의(敎義)를 세움에 문장의 모습[文相]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반드시 헤아려 가려낼 필요는 없다[料簡]”고 하였는데, 이것이 그 뜻이다.
【문】 명난410)의 네 구(四句) 마지막에, ‘이것이 삼승공학(三乘共學)의 뜻’이라고 하였는데, 무엇을 인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답】 ‘초(初)도 아니고 중(中)도 후(後)도 아니니, 전중후(前中後)를 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끊는가? 허공과 같다’411)고 한 것은 삼승에서 논한 바이므로 ‘삼승공학’이라고 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초도 아니고, 중도 후도 아니니, 전중후를 취하기 때문에 허공과 같다’는 것은 오직 항포동교(行布同敎)인가?
【답】 원융과 항포에 통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삼승공학’이라고 말하는가?
【답】 ‘초도 아니고 중도 아니다’라 말한 것이 비록 별교(別敎)를 장애하지 않더라도, 또한 ‘삼승공학’에 통하기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본실별교(本實別敎)도 또한 ‘삼승공학’이 되는가?
【문】 그렇지 않다. 본실 가운데 위위(位位)마다 불과(佛果)의 뜻을 융섭하는 것이 삼승에는 없기 때문에 ‘공학’은 아니다. ‘초도 아니고 중도 후도 아니니, 허공과 같다’고 한 것에서 이와 같이 끊는 뜻 또한 삼승에서 밝혔기 때문에 ‘공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도신장』412)에 이르기를, “어떤 문장에서는 ‘일단일체단(一斷一切斷)’이라 하고, 또 어떤 문장에서는 ‘실제로는 끊을 바가 없다’고 말한다”고 하였는데, 어떤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는가?
【답】 이 장(章)의 문장이다. 말하자면 ‘어떤 문장에서 일단일체단이라고 하였다’는 것은 처음 제삼구이고, ‘어떤 문장에서는 실제로는 끊을 바가 없다’는 것은 제사구이다.413)
【문】 앞의 제삼구 중에서는 ‘일단일체단’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어떤 이유로 ‘어떤 문장에서는 일단일체단이라고 말한다’고 한 것이 앞의 제삼구가 되는가?
【답】 ‘첫째로 증득을 기준으로 하면 이른바 십지를 끊는 것이다. 둘째로 위(位)를 기준으로 하면, 십주(十住) 이후 끊는 것이다’414)라는 것은 앞의 ‘일단일체단’의 위(位)를 판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앞 삼승의 여러 문(門)의 단혹(斷惑)’은 삼승이 맡긴 바의 위(位)를 좇는 것이요, ‘일단일체단’과 같은 것은 일승단위(一乘斷位)이기 때문에 네 구만은 아니다. 또한 열여덟 문에 의탁해서 대함을 잡는 것 중에서 초문(初門)은 지위에 비례해서 번뇌를 끊고 지위를 증득해서 소지(所知)를 끊는다는 것415)은, 곧 문(門)의 전후를 따르는’416)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는 삼승단위(三乘斷位)이다. ‘일단일체단’417)과 같은 것은 별교일승(別敎一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 「보현품(普賢品)」418)을 설함에 “진장(瞋障)의 경문(經文) 앞머리에서 아래쪽으로 살펴보면 진수문(進修門) 가운데 오,륙, 칠419) 의 삼인(三印)이다” 라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답】 옛 설이 비록 많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해석을 보면, 오자인(五字印) 중에서는 『오교장(五敎章)』의 명수(名數)420)를 통틀어 변별하고, 육자인(六字印) 중에서는 실제돈(實際頓)의 별교단장(別敎斷障)의 뜻을 변별하고, 칠자인(七字印) 중에서는 궁실(窮實)의 뜻을 변별하였으니, 왜냐하면 오자인 중에서 이미 ‘여러 교의 장(障)을 변별하였다’421)고 하였기 때문이고, 육자인 중의 이미 ‘앞에서 진장(瞋障)을 밝혀서’ 등은 첫머리를 들어 말함으로서 보현의 광대한 해행법(解行法)을 유형별로 나타내고자422) 하기 때문이고, 칠자인 중에서는 법이 아님을 변별해서 빠진 뜻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문】 어째서 오자인 중에서도 또한 일승장(一乘障)을 변별함을 알 수 있는가?
【답】 저 오자인에서 이르기를, “이상의 여러 미혹은 일혹일체혹(一惑一切惑)이고 일단일체단(一斷一切斷)이다. 이것은 일승교(一乘敎)에 속하니, 아래에 설한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별교장의 뜻이다.
둘째로 동교(同敎)에 대한 것이다;
【문】 어떤 이유로 앞의 두 문423)에는 섭방편(攝方便)이 있고 다음의 두 문 중에는 섭방편이 없으며, 이 문(門)과 이승회심(二乘廻心)에는 또한 섭방편이 있는가?424)
【답】 가운데 두 단락은 생략하여 없으니, 전후의 장(章)에 의거하여 준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장 중에서는 또한 말의 편리함을 따랐기 때문에 아울러 논하였다. 이를테면 앞에서 이미 “또한 앞 삼승 등의 여러 문에서 미혹을 끊으니, 만약 일장일체장이라면 일단일체단이라서 이 교(敎)에 들어온다. 문장의 전후를 따르면 이는 삼승이니, 이것은 별교(別敎)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425)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인해서 말하면, 섭방편을 잡는 것426)은 문의 앞뒤를 따른 삼승 또한 일승섭(一乘攝)에 들어가게 된다. ‘이승회심(二乘廻心)’의 장(章) 중에서는 소승 하나, 종교 하나, 시교 하나, 돈교 하나, 섭방편 하나, 별교 하나로써 여섯 가지 설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아울러 ‘섭방편(攝方便)’을 논한 것이다.
‘나머지 뜻은 그것에 준한다’427)는 것은 나머지 교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준하여 통하라는 것이다.
【記】 제칠(第七) 이승회심에는 여섯 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 일체의 이승(二乘)에는 모두 회심(廻心)428)이 없으니, 또다시 나머지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승 가운데서 설한 것과 같다.
둘째로 일체의 이승이 모두 회심이니, 모두 불성력(佛性力)이 있어서 내훈인(內薰因)429)이 되기 때문이며, 여래대비력(如來大悲力)이 외연(外緣)430)이 되어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근본무명이 오히려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소승열반이 구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회심하여 대보리를 향하지 않음이 없다. 이는 종교(終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문】 『유가(瑜伽)』나 『현양론(顯揚論)』에서 ‘모든 식(識)이 성숙함이나 성숙하지 않음 중 네 구 안에서 성문과 독각으로써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에 들어간 이는 아뢰야식(阿賴耶識)과 여러 전식(轉識)이 모두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미 본식(本識)과 전식이 모두 멸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뒤에 내는 마음[後生心]은 무엇으로써 인(因)을 삼는가? 인(因)이 없는데도 과(果)가 생긴다면 이치[理]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답】 그 논은 시교문(始敎門)에 의거하여 소승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세운 바의 뇌야(賴耶)가 행상(行相)을 거칠게 드러낼 뿐 진(眞)을 따라 일어나지 않으므로 멸함이 있다고 설하였다.
또한 소승을 따르기 위하여 또한 저 열반이 구경 아닌 것이 아니다라고 인정하였으므로 들어가고 나면 다시 일으키지 않는다고 설한 것이다.
지금 종교(終敎)를 잡아서 실(實)을 좇아 설하면, 이미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여래장(如來藏)을 훈습하여 뇌야식(賴耶識)을 이루었으니, 저 이승인(二乘人)은 이 두 법에서 이미 모두 끊어 증득하지 못하였는데, 무엇을 인(因)해 아뢰야식을 멸할 수 있겠는가? 또한 저것에 대해 끊어 증득함이 없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얻는 바 열반이 어찌 구경이 되겠는가? 화성유(化城喩)431)와 똑같아서 마땅히 과실이 있어야 한다. 또한 위의 네 가지 인[四因]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마음을 낼 수 있다.
【釋】 ‘제칠(第七) 이승회심(二乘廻心)’432)이라고 한 것은 앞의 여러 문(門) 가운데 대승과 소승을 통틀어 잡아서 말한 것이다. 지금은 소승의 행(行)을 익히고 나서 반드시 대승으로 향하기 때문에 다음에 온 것이다. 이 가운데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수(數)를 든 것이고, 둘째는 따로 해석한 것이며, 셋째는 묻고 답한 것이다.
따로 해석하는 것 가운데 ‘일체의 이승에는 모두 회심이 없다’433)고 하였는데, 그러나 『도신장』에서는 “소승성(小乘性)이 정해지기 이전에는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였다.
【문】 어떤 이유로 지금은 ‘모두 회심이 없다’고 하는가?
【답】 『도신장』은 스스로 불성(佛性)을 종지로 삼아서 잡은 것이고, 지금은 대승으로 돌이켜 들어간 뜻을 잡았기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이다.
‘둘째로 혹은 일체가 모두 회심(廻心)한다’434)고 한 것에 대해서다.
【문】 우선은 소승을 밝히고 다음으로 시교(始敎)를 밝힌다면 순서에 합당할 터인데, 어떤 이유로 소승 다음에 종교(終敎)를 밝히는가?
【답】 우선 구수(句數)의 순서를 잡아서 이와 같이 세운 것이다. 말하자면 소승의 일체가 회향하지 않는 뜻에 대비하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종교의 일체가 아울러 회향하는 뜻을 밝힌 것이다. 또한 시교가 회향하거나 회향하지 않는 뜻에 대비하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돈교(頓敎)가 회향하지 않거나 회향하지 않음이 없는 뜻을 밝힌 것이니, 다만 마땅함을 좇아서 세웠을 뿐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로 교의(敎意)를 밝힌 것이고, 둘째로 ‘묻기를’435) 이하는 물음과 대답이다.
앞의 것 가운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표방한 것이고[總標], 둘째로 ‘이실유(以悉有)’436)의 아래는 인연을 변별한 것이고, 셋째로 ‘이 때문에’437)의 아래는 결론이다.
인연을 변별한 것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내인(內因)이고, 둘째는 외연(外緣)이고, 셋째로는 무명미진(無明未盡)이고, 넷째로는 열반불구경(涅槃不究竟)이다.
【문】 답 중에는 두 겹[二重]이 있다. 처음에는 어긋나 있는 문장을 회통하고, 그 다음으로는 회심(廻心)하는 시기의 분제(分齊)를 변별하였다. 앞의 것 중에 “『현양론(現揚論)』438) 등이란 것은 제십칠권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문: 만약 아뢰야식을 성취한다면 또한 전식(轉識)을 성취하는가? 설령 전식을 성취하더라도 또한 아뢰야식을 성취하는가?
답: 이것은 마땅히 네 구로 지을 수 있으니, 말하자면 혹 아뢰야식을 성취한다고 해도 전식이 아니니, 이를테면 그것은 무심수면(無心睡眠)ㆍ무심민절(無心悶絶)해서 무상정(無相定)에 들어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는 자이다. 혹 전식을 성취한다고 해도 아뢰야는 아니니, 말하자면 그것은 유심위(有心位)439)에 머무른 아라한ㆍ독각ㆍ불퇴전(不退轉)의 보살 및 여래이다. 혹은 모두 성취함이 있으니, 말하자면 나머지 유심위에 머무는 자이다. 혹은 모두 성취하지 않음이 있으니, 이를테면 아라한ㆍ독각ㆍ불퇴전의 보살과 여래가 멸진정(滅盡定)에 들어서 마치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에 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유가(瑜伽)』440)도 이 설과 같다.
이제 제사(第四)의 모두 성취하지 않는 구(句)를 인용하여 묻기를, “본식과 전식이 모두 멸하여 남은 것이 없게 된다면, 무엇을 인(因)으로 삼아 마음을 내어서 수도(修道)하는가?”라고 한다면, 대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가』ㆍ『현양(現揚)』의 문장을 회통한 것이고, 둘째로 ‘우유상(又由上)’441)의 아래는 ‘무엇으로 인을 삼는가?’의 물음에 대답한 것이다.
【記】 【문】 마음을 내어 회향할 때, 분제(分齊)는 어떠한가?
【답】 근기가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가는 데에 더디고 빠름이 있다. 더딘 것은 겁(劫)을 지나야 비로소 일어나기 때문에 『능가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삼매(三昧)의 즐거움을 즐기고 집착해서 무루계(無漏界)에 안주하는 바람에 구경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또한 다시 물러나지도 않아서 모든 삼매신(三昧身)을 얻어 겁에 이르기까지도 깨닫지 못한다. 비유하면 마치 취한 사람이 술이 깬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것처럼 법을 깨닫는 것 또한 그렇게 해서 부처의 위없는 몸을 얻게 된다.”
풀어서 말하면, 이 문장은 단지 총상으로 설한 것[總相說]이다. 만약 차별을 설한다면, 예리하고 둔함에 따라 각각 따로 시간을 거쳐서 모두 아뇩보리심위(阿耨菩提心位)에 이르는 것이니, 마치 『열반경』에서 “수다원인(須陀洹人) 또한 다시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팔만겁을 지나야 곧 아뇩보리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고, 또한 이르기를, “독각(獨覺)이 십천겁을 거쳐야 아뇩보리심에 이르게 된다”고 한 것과 같다.
풀어서 말하면, 이는 가장 둔한 수다원인은 칠생(七生)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열반에 들어 마음과 마음의 법[心心法]을 멸하고, 비로소 멸정(滅定)에 들어 다시 팔만 겁을 거쳐야 마음을 낼 수 있어서 부처의 교화를 받아 곧 보리심을 발하게 된다고 밝힌 것이다.
만약 한 몸에서 제이과(第二果)를 얻어 이생(二生)을 받고 나서야 열반에 든다면 육만 겁을 지나서야 능히 발심(發心)하게 된다. 만약 한 몸에서 제삼과(第三果)를 얻어 욕계로 돌아오지 않고 바로 열반에 든다면 사만 겁을 지나서야 발심하게 된다. 만약 한 몸에서 아라한을 얻어 곧 현재에 멸정(滅定)에 든다면 이만 겁을 지나서야 곧 발심하게 된다. 만약 독각의 근기[機]가 예리하면 일만 겁을 지나서야 발심하게 된다. 이 다섯 사람이 발심할 때 바로 십신(十信)의 보살위(菩薩位)에 들어가는데, 이를 바야흐로 아뇩보리심을 발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 다른 뜻이 있다. 곧 앞의 다섯 사람은 범부의 지위로부터 소승의 과(果)를 얻어서 열반에 들었는데, 나중에 회심을 일으켜 십신행(十信行)을 닦고 신(信)이 마음에 가득하고 나서 능히 십주(十住)에 들어간다. 그리고 초발심주위(初發心住位) 이후로는 근기의 예리하고 둔함을 따라서 각각 그 겁(劫)을 거치는데, 반드시 한결같이 열반 속에 있으면서 그러한 겁을 거치지는 않는다.
마치 직왕인(直往人)이 이미 일만 겁을 거쳐서 수행이 만족하면 능히 발심을 감당하는 것처럼, 저 독각인도 근기가 가장 예리하기 때문에 직왕인과 비슷하게 일만 겁을 거친다. 나머지 네 가지 둔한 근기는 또한 차별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다르다. 이상은 더딤을 밝힌 것이다.
지극히 빠른 것에 대해서는 법화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멸도(滅度)한 뒤 다시 어떤 제자가 이 경을 듣지도 못하고, 보살이 행할 바를 알지도 못하고, 깨우치지도 못하였으나, 스스로 얻은 공덕으로 멸도의 상(想)을 낸다면 마땅히 열반에 들어가리라. 내가 다른 나라에서 성불하여서 다시 다른 이름을 가질 터이지만, 이 사람이 비록 멸도의 상(想)을 내서 열반에 들더라도 그 땅에서 부처의 지혜를 구하면 이 경전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불승(佛乘) 만으로 멸도를 얻을 수 있을 뿐 다시 다른 승(乘)은 없으나442), 모든 여래의 방편 설법은 제외한다.”
이상은 모두 종교(終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釋】 뒤의 문답에서 대답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총체적으로 답한 것이고, 둘째로 ‘지자(遲者)’443)의 아래는 따로 대답한 것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는 『능가경』을 인용하여 총설(總說)을 나타내었고, 둘째로 ‘만약 차별하여’444)의 아래는 별설(別說)을 나타내었다.
앞의 것에 대해서다.
【문】 『기신소(起信疏)』445)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예리하고 둔함, 느리고 빠름은 여러 성교(聖敎)에 대략 일곱 위(位)가 있으니, 말하자면 팔만ㆍ육만ㆍ사만ㆍ이만ㆍ일만 등의 겁인데, 순서와 같이 사과(四果) 및 독각인에 짝한다. 이 다섯 가지는 『열반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제육위(第六位)는 『능가』에서 ‘삼매주(三昧酒)에 취하여 겁에 이르러도 깨지 못하니, 취기가 없어진 뒤에야 깨닫고서 부처의 위없는 몸을 얻는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는 또한 앞의 만 겁을 거치지 않는 것보다 예리한 것이다. 제칠위(第七位)는 『법화경』에 이르기를, ‘오직 불승(佛乘)으로써 멸도를 얻는다’고 설한 것과 같다. 풀어서 말하면, 이는 가장 예리한 근기라서 또한 분단(分段)을 버리고 열반에 이미 들어가고 나면, 불토(佛土)에서 변역신(變易身)을 받고 부처의 교화를 받아서 대승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소(疏)는 『능가경』의 문장으로 제육위(第六位)를 삼아서 『열반』의 오위(五位)와는 다른데, 어떤 이유로 지금은 장(章)이 총상(總相)이 되는가?
【답】 경의 문장은 단지 “겁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할 뿐이고, 겁수(劫數)를 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말 가운데는 팔만 내지 일만을 포함하게 되니, 그러므로 “이 문장은 단지 총상을 설한 것이다”446)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이미 “겁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했을 뿐이고 만 겁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령 일겁을 지나더라도 또한 겁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므로 『기신소』 중에서는 이 뜻을 잡아서 ‘앞보다 예리하다’고 말한 것이다.
‘수다원인(須陀洹人)도 또한 정해지지 않았다’447)고 한 것은, 만약 스스로의 종지를 잡으면 비록 성(性)이 정해졌다고 할 수 있으나, 이 교의(敎義)에서는 정해진 성(性)이 없기 때문이다.
【문】 수다원인 등이 모두 나한과를 얻은 뒤에야 무여(無餘)에 들어간다면, 어째서 수다원인 등이라고 하는가?
【답】 『도신장』에 이르기를, “이미 나한(羅漢)에 이른 뒤 바야흐로 무여삼매(無餘三昧)에 들어간다면, 어째서 초과, 이과, 삼과라고 말하는가? 실제로는 모두 나한이나 처음을 좇아서 이름을 삼았을 뿐이다. 이를테면 처음 소승의 마음을 발하여서 현재의 몸에서 초과를 얻는다. 제이생(第二生) 뒤에 제이(第二) 이상을 얻는 것은 초과성(初果性)이 되니, 만약 현재의 몸에서 제이과에 이른 자는 제이과성이 되고, 만약 제삼과를 얻은 자는 제삼과성이 되며, 만약 현재의 몸에서 제사과를 얻음에 이른 자는 나한성(羅漢性)이라고 이름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함께 제사과를 얻은 뒤에 무여멸(無餘滅)에 들어가서 그러한 겁을 거치기 때문에 몸을 나타내 과(果)를 얻은 뜻을 기준으로 하여 초과, 이과, 삼과라고 이름했을 뿐이다.
‘이 다섯 사람이 아뇩보리심을 발함에 이르러’448)는, 무여 중에서 약간의 겁을 거쳐 십신(十信)에 회향하여 들어갈 때를 곧 발심이라고 이름한다.
【記】 셋째로 혹 일체의 이승은 또한 회향하거나 회향하지 않으니, 말하자면 종성을 결정한[決定種性]449)자는 적멸에 나아가 회향하지 않고, 종성이 결정되지 않은[不定種性]450)자는 대승으로 회향하는 것이다. 『유가(瑜伽)』의 성문결택(聲聞決擇) 가운데 설한 것과 같으니, 이는 시교(始敎)를 잡아서 이승설(二乘說)을 인용하였다.
넷째로 회향이 아니면서[非廻] 회향하지 않음이 아닌[非不廻] 것이니, 상을 여의기[離相] 때문이다.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 등의 설과 같으니, 이는 종교, 돈교(頓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다섯째로 앞의 네 가지 설을 합한 것이니, 이는 대법방편(大法方便)451)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승섭방편(一乘攝方便)을 잡아서 설한 것이다.
여섯째로 앞의 다섯 가지를 모두 없앤 것이니,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로 일체의 이승은 모두 회향할 바가 없으니, 일승으로써 조망하면 모두 공(空)이라서 회향할 수 없는 것이다. 경전 중에서 귀멀고 눈멀었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둘째로 일체의 이승 등은 모두 이미 회향해 마쳐서 다시 회향하지 않는 것이다. 경전 가운데 “보현안(普賢眼)으로써 일체중생을 보니, 모두 이미 구경(究竟)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는 모두 일승별교(一乘別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문】 만약 일승섭방편 중의 회심(廻心)이 삼승 중의 회심과 같다면, 얻은 바 법문(法門)의 분제(分齊)는 어떠한가?
【답】 만약 삼승 중의 회심이라면, 곧 십신에 들어간 후에는 보리심과 대비(大悲) 등의 법문을 순행(順行)해서 차례대로 가는 것이다. 만약 일승 중이라면 아래 문장과 같으니, “사리불(舍利弗)과 인다라혜(因陀羅慧)비구 등 육천 인은 문수사리 곁에서 회심하여 곧 십대법문(十大法門)과 십안십이(十眼十耳) 등의 경계를 얻었다.” 뜻은 마땅히 해행신(解行身)이어서 오위법(五位法)에 두루 미치며, 나머지 뜻은 다른 곳에서 설한 것과 같다.
【釋】 ‘넷째로 회향이 아니면서 회향하지 않음도 아니다’452)는 『문수반야경』인데, 거기서 이르기를, “이와 같이 설법한다. 어떤 중생도 과거에 열반을 얻었거나 지금 얻거나 앞으로 얻을 중생은 없으니, 어떤 이유 때문인가? 어떠한 결정된 중생상(衆生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준하여 알아라.
‘여섯째는 혹 모두 앞의 다섯 가지를 없앤다. 이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체이승(一切二乘)이’로부터 ‘돌이킬 만한 것이 없다’453)에 이르기까지는 이승행심(二乘行心)으로써 보현행심(普賢行心)에 견준 것이니, 반딧불로 해와 달에 견준 것과 같기 때문이다.
‘보현안(普賢眼)으로 모두 구경(究竟)이다’454)는 보현안으로써 이승(二乘)을 조망하면 본래 구경(究竟)이라서 다시 회향함이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해석 가운데 결언대덕(決言大德)이 말하기를, “이 두 도리는 오직 돈교(頓敎)와 별교(別敎) 중에서 논했을 뿐이니, 이승회심(二乘廻心)의 뜻을 논한다면 궁실(窮實)이기 때문이다. 시문(始門)과 종문(終門)의 두 회심[二廻心]의 뜻도 또한 궁실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해석하면, 이 두 가지 해석은 모두 돈교ㆍ원교ㆍ별교를 잡아서 논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이승은 이미 회향할 것이 없는데, 어떤 이유로 이승회심(二乘廻心)의 장(章)을 세워 회심의 뜻을 변별하였는가?
【답】 비록 행심(行心)을 기준으로 하면 나눌 것이 없다 하더라도 보법(普法)에 들어갈 때가 있기 때문에 또한 회심의 뜻이 있다. 비록 보현안(普賢眼)으로 본래 구경임을455) 본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말해서는 실제로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요, 집착하는 마음을 돌이켜 진입(進入)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또한 회심의 뜻을 변별한 것이다.
【문】 장주(章主:法藏)의 『입법계품소(入法界品疏) 』456)에서 대성문(大聲聞)을 해석하길, “대(大)는 제사과(第四果)이고 또한 부동성(不動性)이며, 여러 성문 중에서 가장 존귀하고 크기 때문이니, 사리불 등과 같다. 또한 이들은 나란히 대승으로 회향한 성문이니, 그러므로 대(大)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불지론(佛地論)』에 이르기를,457) “실제의 뜻은 부정종성(不定種性)의 성문이 소승의 과(果)를 얻고 나서 대보리(大菩提)로 향하기 때문에 ‘대’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면, 이것은 아직 원교일승보현법(圓敎一乘普賢法)에 들어가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아래의 문장에서는 “귀머거리와 장님과 같다”고 한 것이다.
또한 이를 해석하면, 모두 대보살인데 성문을 지어 나타내 보인 것이니, 신역(新譯) 화엄458)의 부사의경계분(不思議境界分)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 법의 깊고 뛰어남을 나타냈기 때문에 귀머거리와 장님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이 세 가지 해석은 어떻게 다른가?
【답】 첫째 것은 소승(小乘)을 잡아서 해석하였고, 둘째 것은 삼승을 잡았으며, 셋째 것은 일승을 잡아서 해석하였다.
【문】 일승을 잡아서 해석한 것 가운데 ‘이들 등은 모두 대보살이다’459)라고 한 것은 이 중에서 ‘보현안(普賢眼)으로써 일체 중생을 보니, 모두 이미 구경이다’460) 한 것에 해당되고, ‘이 법의 깊고 뛰어남을 나타냈기 때문에 귀머거리와 장님 같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461)라고 한 것은 이 가운데 ‘곧 공(空)이라 회향할 만한 것이 없다’462)는 뜻에 해당되는가?
【답】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한다.
【문】 실제로는 보살인데 성문을 나타낸 것이니, 그러므로 귀멀고 눈멀었을 때가 곧 대보살이다. 그런데 어째서 성문을 나타낸 자는 곧 공(空)하여 회향할 것이 없는 것인가?
【답】 따로 상속(相續)하는 성문과 보살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이승을 논한 것이다. 실제로는 보살이지만 또한 곧 이것이 귀멀고 눈먼 이승과 같기 때문에 비록 실제의 보살이 귀멀고 눈멂을 드러내 보일 때라도 곧 공하여 회향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귀머거리와 장님 같음을 나타내 보인다”463)고 말하고, 지금 여기서도 또한 “경 가운데 귀머거리와 같고 장님과 같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464)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이와 같이 준거하라.
지금의 해석에서는 ‘이들 대보살이 성문을 지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465)라고 한 것은 비록 실제로는 보살이라고 하더라도 법의 깊고 뛰어난 자취를 나타내고자 해서 성문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곧 성문일 때가 구경(究竟)의 대보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승을 잡아서 해석하면, 여기에서 ‘보현안으로 일체중생을 보면, 이미 모두 구경이다’466)라고 한 뜻에 해당된다. 삼승을 잡아서 해석하고, 소승을 잡아서 해석하면, 여기에서 ‘공(空)하여 회향할 것이 없다’467)라고 한 뜻에 해당된다.
【문】 어떤 이유로 한 종류인 귀머거리와 장님과 같은 이승(二乘) 가운데 많은 뜻이 있는가?
【답】 둘째의 해석 가운데 “비로소 원교일승보현법(圓敎一乘普賢法)에 들어간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래 문장에서 “귀머거리와 장님과 같다”468)고 하였기 때문에 귀머거리와 장님의 뜻이 나타난 것이다. 앞의 해석은 이미 소승을 잡았기 때문에 귀멀고 눈먼 뜻이 또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두 해석은 여기의 처음 해석한 뜻에 해당된다. 셋째의 해석 중에서 이미 “모두 대보살인데 성문(聲聞)을 지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469)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뒤의 해석한 뜻에 해당된다.
【문】 실제로는 보살인데 자취는 성문과 유사한 이승과 공(空)해서 회향할 것이 없는 이승은 어떻게 다른가?
【답】 비록 한 종류의 이승이라고 하더라도 보현안(普賢眼)으로 보면 실제로는 대보살인데, 법의 깊고 뛰어남을 나타내기 때문에 귀머거리와 장님같이 보인 것이다. 행심(行心)을 잡아서 보면 실제로 성문인데, 나눌 것이 없기 때문에 공(空)하여 회향할 것이 없는 것이다.
『도신장』에 이르기를, “중생업(衆生業)이 일어남은 보현이 돌이켜 이룬 것이 아님이 없기 때문에 보현이 없으면 자재(自在)함을 얻을 수 없다. 보현이 돌이켜 이룬 것은 중생업의 일어남 아님이 없기 때문에 보현이 아니면 고통이나 고통을 지어서 중생을 괴롭게 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중생업이 일어나는 것이 보현이 아닌 때가 없다면 오직 이는 보현일 뿐이고, 보현을 돌이켜 이루는 것이 중생업이 일어남 아닌 때가 없다면 보현은 바로 중생이다. 이 가운데 도리(道理)도 마땅히 그러함을 알라.
【문】 회심(廻心)으로 보법(普法)에 들어갈 때, 그 이름을 바꾸지 않고 들어가는가, 아니면 이승의 이름을 바꾸어 보살의 명칭을 얻은 뒤에 들어가는가?
【답】 옛날에 두 뜻과 세 가지 시설(施設)이 있었다. 두 뜻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동교(同敎)를 잡으면 자승(自乘)을 따라 들어감이 있고, 별교(別敎)를 잡으면 이승의 이름을 바꾼 뒤에 비로소 들어간다”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동교를 잡거나 별교를 잡거나 모두 바뀐 뒤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세 가지 시설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엄과 의상은 동교를 잡으면 자승(自乘)을 따라서 들어갈 수 있고, 별교를 잡으면 바꾼 뒤에 비로소 들어간다고 하였다. 장주는 만약 동교를 잡든 별교를 잡든 모두 바꾸어야 비로소 들어간다고 하였다”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스승은 모두 동교를 잡으면 자승(自乘)을 따라서 들어갈 수 있고, 별교를 잡으면 모두 바꾸고 난 뒤에 비로소 들어간다고 하였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스승은 만약 동교를 잡든 별교를 잡든 모두 바뀐 뒤에 들어간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셋째 설이 옳다. 왜냐하면 ‘전위(轉爲)의 문장’470)에 이르기를, “나머지 대승경에서 어떤 성문중(聲聞衆)은 소피기(所被機)471)가 되고 또한 이승(二乘)을 이끌어 대승에 들어가게 하는데, 유독 이 경만은 중생에 성문의 근기[聲聞機]가 없고 경문에 소승을 회향하는 설명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문】 전위(轉爲)는 단지 별교를 잡아서 말한 것일 뿐이다. 만약 동교를 잡으면 자승(自乘)을 따라서 화엄에 들어갈 수 있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 것인가?
【답】 만약 그렇다면, 논란하는 자가 동교를 잡는다고 해서 이 경전 속의 중생에 성문의 근기가 있고 문장에 소승을 회향한 설명이 있는 것인가? 이미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설사 동교를 잡는다 하여도 바꾼 뒤에 비로소 들어가는 것이다.
【문】 이승에 나아감 속에 예리함과 둔함이 있다. 이 때문에 만약 예리한 사람이라면, 저 삼승 등의 법이 본래 별교일승(別敎一乘)과 다름이 없다는 해(解)를 일으켜서 자승(自乘)을 따라 이 경의 문상(門相)에 들어갈 수 있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답】 비록 예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바꾼 뒤에 비로소 들어간다. 왜 그런가? 『법계품소(法界品疏) 』472)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문: 단지 듣고도 믿지 않을 수 있다. 마치 『문수행경(文殊行經)』 중에 오백 성문이 믿어 받들지 않은 것과 같은데,473) 어떤 이유로 여기에서는 총체적으로 듣고 보지 않는 것인가?
답: 그것은 바로 삼승이 근기를 따라 설한 것이기 때문에 또한 들을 수 있지만, 지금 이 일승은 법이 높음을 따라 나온 것이기 때문에 능히 듣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듣는 것도 오히려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해(解)를 일으켜서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문】 『도신장』에 이르기를, “이승을 전전(展轉)의 소위(所爲)로 삼는다는 것은 화엄별교(花嚴別敎)에 의거한 것인데, 만약 노지동교(露地同敎)474) 및 화엄동교(花嚴同敎)에 들어가면 이승이 각각 자승(自乘)을 따라서 두 동교에 회향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문장을 기준으로 하면 자승을 따라서 화엄동교에 들어갈 수 있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답】 비록 이승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승이 아니기 때문에 어긋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도신장』에 또한 이르기를, “이 근기의 사람은 실제로는 보살인데 앞의 이승을 따라서 왔기 때문에 이승의 이름을 덧붙인 것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문】 화엄별교와 화엄동교, 노지동교는 어떻게 다른가?
【답】 별교는 돈원일승(頓圓一乘)에 통하고, 화엄동교는 실제돈(實際頓) 중에서 항포(行布)이고, 노지동교는 대백우거(大白牛車)475)이다.
【문】 화엄별교는 오직 원융(圓融)일 뿐인가, 아니면 원융과 항포에 통하는가?
【답】 통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왜 화엄동교는 항포인가?
【답】 만약 원융과 항포를 통틀은 별교를 잡는다면, 이승의 이름을 버리고 보살의 칭호를 얻은 뒤에 비로소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승의 전전(輾轉) 소위(所爲)가 된다고 한 것은 화엄별교에 의거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만약 항포를 열어서 동교를 삼는다면, 이 또한 실제의 보살이 들어가는 바이나, 아직 영원히 이승의 이름을 버린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앞의 이승을 따라서 왔기 때문에 이승의 이름을 덧붙였을 뿐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 뜻을 잡아서 “만약 노지동교와 화엄동교에 들어간다면 이승이 각각 자승(自乘)을 따라서 두 동교에 회향해 들어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문】 ‘이승의 이름을 덧붙인다’고 한 것은 어떤 위(位)에서 덧붙이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십신(十信)의 앞 구심(九心)에서 더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삼승 중에는 신만(信滿)의 감임위(堪任位)에 이르러야 보살종성(菩薩種性)이 비로소 결정되지, 앞의 구심 중에서는 종성(種性)이 아직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승(二乘)이 앞의 구심에 의지하여 일승으로 회향해 들어가는 것을 곧 자승을 따라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감임위(堪任位)에 이르러야 회향해 들어가는 것이라면, 바야흐로 제삼 보살승을 얻어야 회향해 들어간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종교(終敎)의 지전(地前)에서 덧붙인 것이다. 말하자면 지전에 의지하여 일승으로 회향해 들어가는 자는 이승의 습기[習]가 있기 때문에 ‘자승을 따라서 들어온다’고 하였으며, 지상(地上)에 의지하여 일승으로 회향해 들어가는 자는 직진보살(直進菩薩)과 근성(根性)이 동등하기 때문에 바야흐로 ‘보살승(菩薩乘)을 따라서 들어간다’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이 장(章)476)에서 ‘만약 저 지혜가 늘어난 자[智增上者]가 소승(小乘)의 습기가 있어서 모든 번뇌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영원히 조복한다고 말한다면, 또 만약 지전에서 아직 진여를 증험하지 않았다면, 본습(本習)을 잡아서 이런 부류가 있음을 용납할 수 있으니, 이는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지 이상은 행해(行解)477)가 완전히 익어서 동일하게 증득하고, 동일하게 행하고, 동일하게 닦고, 동일하게 끊으니, 어떻게 이런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노지동교(露地同敎) 속에서 덧붙인 것이다. 말하자면 이승인(二乘人)은 소류해(所流解)를 일으켜 노지동교에 의거하며, 뒤에 화엄동교(花嚴同敎)에 들어가는 자는 실제로는 보살인데 앞의 이승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이승의 이름을 덧붙였을 뿐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화엄동교 중에서도 또한 이승의 이름을 더하는가?
【답】 그렇다. 말하자면 『도신장』에 이르기를, “이러한 근기의 사람은 바로 보살이기 때문에 이승상(二乘相)이 없을 뿐이나, 진실을 말한다면 이승으로부터 이 근기가 익은 곳에 이르고, 보살로부터 이 근기가 익은 곳에 이른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말한다면, ‘실제로 보살이더라도 앞의 이승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이승의 이름을 덧붙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기(機)가 익은 곳’은 화엄동교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 ‘두 동교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로 서로 이어지는 것[一相續]인가?
【답】 그렇다. 말하자면 만약 노지동교에 들어간다면 곧 화엄동교에 들어가는 것이요, 만약 화엄동교에 들어간다면 반드시 노지동교를 따르기 때문이다.
【문】 노지동교에 의지한 사람은 화엄동교에 들어갈 때 유해(流解)로 들어가는가, 아니면 다시 목해(目解)를 일으켜서 들어가는가?
【답】 앞과 같다. 말하자면 이승인(二乘人)이 소류해(所流解)를 일으켜 노지동교에 들어가더라도 이 해(解)를 버리지 않으며, 화엄동교에 들어가서는 마치 외문(外門)으로부터 들어온 사람이 반드시 중문(中門)을 바라보고 서게 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노지동교에 들어간 사람은 반드시 화엄동교를 조망하기 때문에 그렇다.
【문】 화엄동교에 선 사람은 별교에 들어갈 때, 어떤 해(解)를 일으키는가?
【답】 목해(目解)를 일으켜서 들어간다.
【문】 요컨대 목해로써 별교에 들어간다면, 노지동교에 선 사람은 어떤 이유로 또한 목해를 일으켜 바로 별교에 들어갈 수 없는가?
【답】 이것도 또한 앞과 같다. 만약 법화동교(法花同敎)에는 들어가고 화엄동교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화엄동교에 의지하고 다시 목해를 일으켜서 별교에 들어간다.
【문】 화엄동교에 의지하여 목해를 일으킨 사람은 십근(十根) 중에서 어떤 근(根)에 속하는가?
【답】 제팔근(第八根)에 속한다. 말하자면 제팔근은 그 삼승 가운데 서더라도 목해를 일으키는데, 화엄동교 중에 목해를 일으킨 사람도 그와 더불어 해(解)가 동일하기 때문에 또한 제팔에 속한다. 제칠근 중에서는 비록 삼승법(三乘法)을 말하더라도 근(根)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동교일승에 진입함을 감당할 수 있는데, 소승 중에서 소류해(所流解)를 일으켜 동교에 들어간 자도 또한 제칠에 속해서 마찬가지이다.
셋째 문답 중에 ‘일승섭방편(一乘攝方便) 중의 회심(廻心)’478)은 종문(終門)에 해당되고, ‘삼승 중의 회심’479)은 시문(始門)에 해당된다.
【문】 종문(終門)의 회심소립위(廻心所立位)는 곧 숙돈(熟頓)이요, 섭방편(攝方便)은 소승에 통하는데, 어째서 같다고 말하는가?
【답】 종문(終門)의 위(位)를 세운 것이 비록 숙돈이라도 뜻은 초교(初敎)에 통하고, 섭방편은 비록 사교(四敎)에 통하더라도 소승은 반드시 삼승교(三乘敎)에 의지하여 바야흐로 일승교(一乘敎)에 들어가기 때문에 구별하지 않은 것이다.
【문】 섭방편은 오직 사교만은 아닌데, 어떤 이유로 문수 곁에서 회심(廻心)하여 곧 십대법문(十大法門) 등을 얻는가?480)
【답】 위(位)를 세움을 잡아서 섭방편(攝方便)을 삼은 것이지, ▣입(▣入)을 섭방편으로 삼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이승 가운데 회심은 오직 위를 세움을 잡아서 삼승의 소입(所入)으로 삼은 것이지 삼승은 아닌 것인가?
【답】 삼승 가운데 회심은 위(位)를 세우는 것과 들어가는 바를 통틀어 잡아서 삼승이라고 이름한 것이기 때문에 예로 들지 않은 것이다.
‘나머지는 다른 설과 같다’481)는 지엄의 「회심장(廻心章)」482)을 가리킨다.
【記】 여덟째로 불과의상(佛果義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상(常)과 무상(無常)의 뜻을 밝히고, 둘째로 상호(相好)의 차별을 밝혔다.
앞의 것 가운데 만약 소승(小乘)의 불과(佛果)라면 오직 무상(無常)이니, 본성(本性)의 공덕을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성론(佛性論)』에 이르기를, “소승은 성덕(性德)의 불성(佛性)이 없고 단지 닦은 덕[修德]만이 있다”고 한 것과 같다. 만약 삼승시교(三乘始敎)라면 법신(法身)은 곧 상(常)이니 자성(自性)이기 때문이며, 또한 무상이니 여의기도 여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행으로 생긴 공덕(功德)은 무상이니, 인연을 좇아서 나오기 때문이요 유위(有爲)의 누(漏)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常)이니, 간단(間斷)이 없기 때문이요 상속(相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장엄론(莊嚴論)』에 이르기를, “자성이 틈도 없이[無間] 상속하여 세 부처가 함께 상주(常住)한다”고 하였다.
【釋】 여덟째로 ‘불과의상(佛果義相)’483)은 우선 심식(心識)에서부터 단혹(斷惑)에 이르기까지 오승(五乘)의 수행궤칙(修行軌則)을 통틀어 변별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승회심(二乘廻心)의 뜻을 말하는데, 아직 이와 같은 점오(漸悟)와 돈오(頓悟)로 얻은 불과[所得佛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온 것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는 장문(章門)을 열고, 둘째로는 따로 해석한 것이다. 그 가운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상(常)ㆍ무상(無常)484)인데, 그 가운데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로 소승 가운데 ‘무성득불성(無性得佛性)485)’ 등이라는 것은 『불성론』486)이 소승론(小乘論)은 아니더라도 소승사(小乘事)를 나타내기 때문에 인용하였을 따름이다.
둘째로 시교(始敎) 가운데 ‘또한 무상이니, 여의기도 하고 여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487)라는 것에 대해서 『양론(梁論)』의 제십사에서는 “존귀하게 진여(眞如)를 성취하고, 여러 지(地)를 닦아서 벗어나 여읜다”고 하였다. 나아가 “존귀하게 진여를 성취한다”고 한 것을 논하였는데, 이를 풀어서 말하기를 “이 구(句)는 법신(法身)의 자성(自性)을 밝힌 것이다. ‘진여를 성취하면’ 허물없이 청정하니, 만약 도전(道前)488)이나 도중(道中)에 있다면 결루(結累)가 아직 다하지 않았으므로 성취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다. 도후(道後)는 구루(垢累)가 이미 다하였기 때문에 성취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도전(道前)ㆍ도중(道中)은 결루(結累)가 아직 다하지 않았으므로 이름하여 불리(不離)라 하고, 도후(道後)는 결루가 이미 다하였으므로 이름하여 이(離)라고 한 것이다.
‘유위무루(有爲無漏)’489) 등은 정분의타(淨分依他)이니, 번뇌를 떠나기 때문에 무루(無漏)라 하고, 종자를 따라서 생기기 때문에 유위(有爲)라고 이름한다.
‘간단이 없기 때문에’490)는 곧 보신(報身)이며, ‘상속하여 일으키기 때문에’491)는 화신(化身)이다.
【記】 만약 종교(終敎)에 의지한다면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로는 따로 밝히고, 둘째로 총체적으로 설한다[總說].
따로 밝힘[別明] 중에서 수행으로 생긴 공덕(功德)은 무상(無常)이니, 그것이 수행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또한 상(常)이니, 하나를 얻은 뒤에 진여(眞如)와 같아지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인가? 본래 진류(眞流)를 따르기 때문이요, 무명(無明)이 이미 다하여 진체(眞體)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양섭론』에 이르기를, “이 법신(法身)으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며, 이 법신(法身)을 다시 증득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보성론(寶性論)』과 『기신론』 등에 이 뜻을 크게 세웠으니, 그와 같이 마땅히 알아라. 또한 『지론(智論)』에 이르기를, “살바야(薩婆若)는 삼세(三世)와 합쳐지지 않으니, 어떤 이유에서인가? 과거세 등은 곧 허망하고 생멸하지만, 살바야는 실법이라서 생멸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살바야는 중국말로 일체지(一切智)이니, 불지(佛地)의 원융한 지혜[圓智]가 진여와 같기 때문에 생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섭론(攝論)』에 이르기를, “마치 허공처럼 두루 일체의 색제(色際)를 채우면서도 생기고 머물고 멸하는 변이(變異) 등이 없는 것처럼, 여래지(如來智) 또한 마찬가지라서 일체의 알아야 할 바에 두루하면서도 뒤바뀜이나 변이 등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다만 간단이 없기 때문에 상(常)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진여의 변이하지 않는 상(常)과도 같다. 법신(法身)은 상(常)이니, 인연을 따를 때 자성(自性)이 불변하기 때문이며, 또한 무상(無常)이니, 물듦의 연(緣)을 좇아서 근기[機]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모든 공덕이 이미 모두 진(眞)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用)을 일으키는 것이 오직 진(眞)의 지음일 뿐이다.
그러므로『기신론』 중에서 보신과 화신을 해석하여 오직 진여(眞如)의 용대(用大)의 섭수에 속하게 하였다. 또한 논에 이르기를, “중생의 마음이 청정하면 법신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하였고, 또한 이르기를, “또한 본각(本覺)이 물듦[染]을 따라서 분별하여 두 가지 상(相)을 낳는데, 저 본각과 더불어 서로 여의지 않으니, 이른바 첫째는 지정상(智淨相)492)이고 둘째는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493)이다”라고 하였으며, 나아가 자세히 설하고 있다.
총체적으로 설하면, 이 법신(法身)이 수연(隨緣)494)의 뜻을 말미암기 때문에 공덕차별(功德差別)이 이루어지며, 불변(不變)의 뜻을 말미암기 때문에 공덕은 진여(眞如)에 즉하지 않음이 없으니, 온 체(體)가 연을 따르는 것과 온전한 상(相)이 변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뜻이 녹아들어서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과(佛果)는 곧 상(常)이자 무상(無常)이고, 네 구를 구족하면서도 네 구가 아니니, 뜻에 따라서 마땅히 알라.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이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非一非異]고 설하는가?
【답】 만약 시교(始敎) 중에서라면, 진여(眞如)가 두루하기 때문에, 또 지(智)가 진여를 증득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이며[非異],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는 같지 않기 때문에 하나이지는 않다[非一].
만약 종교(終敎) 중에서라면, 공덕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로 연기(緣起)가 현전하는 뜻이니, 삼아승지겁의 공덕이 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자성이 없는[無自性] 뜻이니, 진여를 떠나서는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앞의 뜻과 법신의 수연(隨緣), 뒤의 뜻과 법신의 불변은 곧 다름이 없는 문[非異門]이니, 온 체(體)가 온전히 거두기 때문이다.
또한 앞의 뜻과 불변, 뒤의 뜻과 수연은 곧 하나의 문은 아니니, 뜻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다르지 않음[非異]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하나가 아님을 밝힌 것이니,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만약 돈교(頓敎)에 의지한다면, 상(相)이 다하여 생각을 여의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실성신(實性身)이어서 평등하고 평등하므로 공덕의 차별[功德差別]이 있다고 설할 수 없고, 또한 상(常)과 무상(無常)도 설할 수 없다.
만약 말에 의탁하여 나타낸다면, 경전에 이르기를, “나의 지금 이 몸이 곧 법신이다”라고 한 것이나, 또 경전에 이르기를, “일체 모든 불신(佛身)은 오직 하나의 법신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준거하라.
【釋】 셋째로 종교 가운데 ‘또한 저 논에 이르기를, 〈중생의 마음이 깨끗하면 법신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하였다’495)고 한 것은 그 뜻이 『기신론』의 문장에서 인용한 것이니, 이는 보신과 화신을 법신의 모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상(常)에 즉(卽)하고 무상(無常)에 즉하는’496) 등과 ‘네 구를 구족한다’는 것에서는 혹은 오직 무상일 뿐이니 수연(隨緣)이기 때문이요, 공덕차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며, 혹은 상(常)일 뿐이니 불변이기 때문이고, 공덕은 진여에 즉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상이면서 또한 무상이니 두 뜻이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며, 혹은 전부 아니니 모양을 빼앗기[形奪] 때문이다.
‘혹 네 구가 아니다’497)라는 것에서는 혹은 무상이 아니니 곧 불변하기 때문이요, 공덕이 진여에 즉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상(常)이 아니니 곧 수연이기 때문이요, 공덕차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며, 혹은 무상이 아니니 모양을 빼앗기 때문이며, 혹은 전부 아님이 아니니 덕을 갖추기 때문이다. 만약 모두……(결락)……의거한다면, 수해응로 생긴 공덕(功德)에는…… (결락)…… 혹 네 구로 된 것과 네 구가 아닌 것이 있으니, 법신도 또한 그렇다. 말하자면 만약 수행으로 생긴 공덕을 잡으면 오직 무상이니, 그것이 수행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며, 혹은 오직 상(常)이니, 하나를 얻은 이후에 진여와 같아지기 때문이다. 혹은 전부[俱]이다. ……(결락)…… 혹은 전부가 아니니,498) 모양을 빼앗기 때문이다.
‘네 구가 아니다’라는 것은 알 수 있으니, 만약 법신을 잡는다면, 혹은 오직 상(常)이니, 인연을 따르고 지(持) ……(결락)…… 자성(自性)…… (결락)…… 이기 때문이다. 혹은 무상(無常)이니, 인연을 따라 기틀(機)에 이르기 때문이다. 나머지 구는 알 수 있다.
‘만약 시교 중에서 진여가 두루하기 때문에, 또 지(智)가 진여를 증득하기 때문에’499)라고 한 것은 진여가 일체법에 두루 미치고 지(智)가 진여와 같기 때문에 경계와 지혜가 한 곳에 처하니,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非異]’500)고 말한 것이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가 같지 않기 때문에’501)는 마치 밤나무 목판과 소나무 목판이 비록 한 곳에 처하더라도 같지 않은 것과 같다.
【記】 만약 원교(圓敎)에 의지한다면, ‘불과(佛果)는 상(常)이다’라는 뜻에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 용(用)을 잡으면 불과는 이미 삼세간(三世間) 등 일체법에 통하니, 그러므로 상(常) 등의 네 구를 갖추는 것이다.
둘째로 덕을 잡으면 불과는 네 가지 뜻을 갖추니, 이른바 첫째는 수생(修生), 둘째는 본유(本有), 셋째는 본유수생(本有修生), 넷째는 수생본유(修生本有) 등이다. 원융하고 무애하여 한없는 덕을 갖추니, 이 때문에 또한 상(常) 등 네 구에도 통한다. 위의 두 구의 뜻은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셋째로 체(體)를 잡아도 또한 네 구에 통한다. 이른바 이 경전 가운데서는 불가설(不可說)로 드러내기[顯] 때문이니, 이것은 상(常)이다. 아함(阿含)과 서로 응하기 때문이니, 이는 무상(無常)이다. 두 가지 뜻은 무애하기 때문이니, 이는 상이기도 하고 무상이기도 한 것이다. 연기제(緣起際)를 따르니, 이는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 것이다. 위의 세 가지 뜻에서 만약 체(體)라면 곧 모두 체이고, 나아가 용(用)이라면 모두 용이니, 체(體)로써 무애(無碍)를 융섭하기 때문에 모두 상(常) 등 무애가 있으니 생각해 보라.
【釋】 다섯째 원교(圓敎) 가운데 ‘용(用)을 잡아서...나아가상(常) 등 네 구를 갖추고 있다’502)고 한 것은, 삼승(三乘)이 법(法)과 보(報)와 화(化)를 기준으로 하여 밝힌 것이고, 지금 여기서는 체(體)와 덕(德)과 용(用)을 잡아서 변별한 것이다. 그러므로 체는 덕(德)과 용(用)의 온전한 체이고, 덕ㆍ용도 또한 그렇기 때문에 ‘만약 체라면 모두 체이고, 용이라면 모두 용이다’503)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삼승 가운데 삼신(三身)이 완전히 구별되어서 같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만약 네 구를 짓는다면, 삼세간(三世間)을 통틀기 때문에 상(常)이고, 기틀[機]이 있다면 응하고 기틀이 없다면 응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無常)이고, 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둘 다 함께이고, 형상을 빼앗기 때문에 둘 다 아니다.
‘덕을 기준으로 하면……또한 상 등의 네 구에 통한다’504)는 본유(本有)이기 때문에 상(常)이고, 수행으로 생긴 것[修生]이기 때문에 무상이다. 수생의 본유(本有)이고 본유의 수생이기 때문에 전부이고, 두 구가 형상을 빼앗기 때문에 모두 아닌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중에 네 가지 뜻[四義]은 준하면 알 수 있다’505)는 용을 잡은 것과 덕을 잡은 것 중에서 오직 ‘넷’이라고 말할 뿐 따로 짓지는 않기 때문이다.
‘불설(不說)로써 드러내기 때문에 상(常)이 된다’506)고 한 것은, 만약 갖추어 말한다면, 과해(果海)507) 자체는 마땅히 설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불설로써 드러내기 때문에 설이 곧 불설이니, 이것이 상이 된다. 이미 불설로써 드러내게 되면 교(敎)와 상응하기 때문에 “아함(阿含)과 상응하므로 무상(無常)이다”508)라고 말한 것이다.
【記】 둘째로 상호차별(相好差別)을 밝힌 것은 만약 소승(小乘)에 의거한다면 서른두 가지 상[三十二相]과 여든 가지 훌륭함[八十種好]이 있으니, 이것이 실법(實法)이다. 만약 삼승에서라면 혹시 서른두 가지 상과 여든 가지 훌륭함을 설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화신(化身)의 모습[相]이니, 곧 즉공(卽空)이 바로 상(相)의 뜻이다. 『금강반야경』ㆍ『대법론(對法論)』 등에서 설한 것과 같은데, 이것은 시교(始敎)를 잡아서 소승(小乘)을 인용하여 설한 것이다. 혹은 보신(報身)을 잡아서 팔만 사천 상(相)을 설하니, 모두 실덕(實德)이다. 이것은 직진(直進)과 종교(終敎) 등을 잡아서 설한 것이다.
【문】 어떤 이유로 『지론(智論)』 등에서는 이 화신(化身)에서 금장(金鏘)과 마맥(馬麥) 등 과거의 업이 초래한 것을 분별하고 서른두 가지 상 또한 각각의 인(因)을 내세웠는가?
【답】 이승(二乘)을 이끌기 위해 하위를 인(因)으로 삼아서 설한 것이니, 업과(業果)가 없어지지 않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성도(聖道)가 미혹은 끊어도 보(報)를 멸함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치 나한이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금장(金鏘) 등도 또한 그런 것이다. 소승은 실(實)로 삼고, 시교는 곧 공하다고 설하니 방편(方便)이기 때문인데, 『대승방편경(大乘方便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 상호(相好)가 인(因)을 내는 데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로 또한 이것이 방편(方便)으로써 이승을 이끌기 위하여 곧 이 몸에서 뛰어난 인과[勝因果]를 보이는 것이니, 실제의 보신(報身)은 그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들 역시 실제 보신의 모습이니, 화신을 드리우는 가운데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인(因)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문】 어떤 이유로 『섭론』 중에서 서른두 가지 상을 설하여서 법신공덕(法身功德)의 섭수에 포함시키는가?
【답】 이것에 또한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로 이승을 회향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점차 진실법신(眞實法身)을 설한 것이니, 그들이 믿기 어려울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공덕(功德)을 법신(法身)이라고 설하여 쉽게 믿어서 받아들이도록 하니, 견(見)을 관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들이 공덕으로 법신을 삼기 때문에 그 속에 섭수함이 있는 것이다. 이상은 모두 시교(始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또한 서른두 가지 상 등은 곧 생겨남도 없고 성품도 없기[無生無性] 때문에 또한 진여법신(眞如法身)이니, 이는 종교(終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만약 일승에 의거한다면, 열 개의 연화장세계해(蓮華藏世界海)에 미진수의 상[微塵數相]이 있어서 저 두 가지 상(相)이 모두 법계(法界)에 두루 미치고 업(業)의 용(用)도 마찬가지다. 십(十)을 설한 것은 다함이 없음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니, 「상해품(相海品)」의 설과 같다.
또한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가운데서는 삼승종(三乘宗)을 잡아서 부처의 상호(相好)를 나누어서 삼단(三段)으로 삼았는데, 이 때문에 그 경전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간략한 가운데 더 간략하게 하면, 나는 지금 이 때에 모인 대중과 정반왕(淨飯王)을 위해 상호(相好)를 간단히 설하리라. 부처님께서 인간 세상에 태어나실 때, 사람과 똑같은 일과 사람과 똑같은 상을 보이셨기 때문에 서른두 가지 상을 설하며, 여러 천(天)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여든 가지 상호의 훌륭함을 설하며, 모든 보살을 위해서 팔만 사천 가지의 여러 미묘한 상호를 설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실제 상호는 내가 처음 마가타국(摩伽陀國)의 적멸도량(寂滅道場)에서 도를 이루어 보현(普賢)ㆍ현수(賢首) 등 여러 대보살을 위해서 설한 것이니, 『잡화경』에서 이미 자세히 분별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이 가운데 서른두 가지 상 등은 간략히 한 것을 다시 간략히 한 것에 해당되며, 인천(人天)의 이승(二乘) 등을 위한 것은 곧 처음에 해당된다. 팔만 사천 등의 뜻은 단지 간략히 한 것에 해당되며, 삼승보살(三乘菩薩) 등을 위한 것이 그에 버금간다. 부처님의 실제 상호가 『잡화경』의 설과 같다고 한 것은 그 뜻이 널리 설한 바에 해당되니, 곧 『화엄경』의 「상해품(相海品)」의 설을 가리킨다. 이는 일승별교(一乘別敎)의 상(相)이니 곧 종(終)에 해당된다. 『잡화』는 곧 화엄이기 때문이니, 나머지 뜻도 알 수 있을 것이다.
【釋】 둘째로 상호(相好)를 밝히는509) 중에 다섯 가지가 있다. 두 번째 시교(始敎) 중에서 ‘어떤 이유로 『지론(智論)』등에’510)라고 하였는데, 이 물음의 의미는 ‘화신(化身)이 곧 보신이라 체(體) 위에서 변화하여 용(用)을 일으키기 때문에 인(因)을 좇아서 생기는 것이 아닌데, 어떤 이유로 화신 중에서 인(因)을 내는가’라는 것이다.
‘금장(金鏘)’511)512)은 『혜상보살경(惠上菩薩經)』513)에서 이렇게 설하였다.
“사위성(舍衛城) 안에 스무 사람이 있는데, 다시 스무 사람과 더불어 함께 원수가 되었을 때 마흔 명이 각각 상해(傷害)를 입고서 방편을 찾고 구하다가 부처님의 위신을 받아서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 이르러 마흔 명이 교화를 받았다. 일찍이 첨장(鑯鏘)이 있어는데 자연스럽게 나와 부처님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들어가고자 장(鏘)이 부처님 앞에 있었다. 목련(目連)이 부처님께 고하였다.
‘지금 첨장을 뽑아 다른 세계에 두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정진력(精進力)으로 첨장을 빼앗고자 삼천대천세계514)를 진동하더라도 장(鏘)을 터럭만큼도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는 부처님께서 범천(梵天)에 가시니 장도 문득 따랐고, 사위성(舍衛城)에 돌아오시니 장도 또한 그 앞에 있었다. 여래께서 장(鏘)을 취하여 발로 위를 밟고 걸으시니, 목련이 부처님께 고하였다.
‘여래께서는 어떤 죄가 있어서 장의 재앙을 얻으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상주(商主)가 되어서 오백 명의 장사꾼을 이끌었는데, 하나가 악심(惡心)을 품어서 나는 곧 그를 해쳐 버렸다. 이것이 그 나머지의 재앙이다.’
마흔 명이 이를 듣고서 말했다.
‘법왕(法王)515)도 오히려 그렇거늘 하물며 우리임에랴. 마땅히 죄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반성하여 평등혜(平等惠)에 들어갔다.”
‘마맥(馬麥)’516)은 『본기경(本起經)』517)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기달(阿耆達)이라고 부르는 바라문왕(婆羅門王)이 있었는데, 부처님을 보고서 마음으로 공경하며 부처님에게 고백하였다.
‘원하건대 부처님과 스님들, 나에게 세 달간의 하안거를 살피게 하소서.’ 부처님과 오백 명의 비구는 일시(一時)에 요청을 받아들여서 그 나라로 갔다. 때에 천마(天魔)가 있어서 왕의 마음을 미혹(迷惑)하자, 오욕(五欲)을 그칠 줄 모르고 탐하느라고 미혹되어서 공양을 잊었다. 비구는 걸식(乞食)할 때 극도의 고통을 받아도 얻기 어려웠는데, 어떤 목마사(牧馬使)가 부처님 마음의 깨끗함을 믿어서 여러 비구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승려가 굶주림이 심한 줄은 알지만 먹을 것이 모두 다하였고, 있는 것은 마맥(馬麥)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맥(麥)을 자재로이 마땅히 받으리라.’
아난이 맥을 가지고 오니 옆의 어떤 여인이 떡을 만들었다. 아난이 부처님에 대한 공경의 정이 깊어서 흐르는 물과 떡을 드리고, 부처님께서 그것을 드시는 것을 보자 슬픔으로 목이 메었다. 부처님께서 그 뜻을 알고서 말씀하셨다.
‘그대도 씹어 볼 텐가?’
아난이 그것을 받아서 먹으니, 좋은 맛이 보통이 아니었다. 사실은 여러 천(天)이 맛을 더한 것이었으므로 기쁨이 한이 없어서 슬픔으로 목이 메인 것이 곧 없어졌다.”
또한 경전518)에서 말했다.
“과거구원세(過去久遠世) 때 부처님의 이름이 비바섭(毘婆葉)519)이었는데, 반두마발성(盤頭摩跋城)에 있었다. 인제기리(因堤耆利)라고 부르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사위(四圍) 및 여러 산술(算術)과 여러 계(戒)에 널리 통달하여 오백 명의 동자를 가르쳤다. 당시 왕이 모임을 베풀어서 부처님을 청하여 음식과 깨끗한 쌀[精米]을 공양하였다. 그 무리에는 미륵이라고 불리는 한 명의 비구가 있었는데 병으로 올 수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병든 사람을 위해 먹을 것을 청하자, 범지(梵志)가 질투하여 말하였다.
‘대머리 사문은 마땅히 마맥을 먹어야지 이와 같이 단맛의 공양을 먹어서는 안 된다.’
사리불(舍利弗)이여, 그 때의 바라문이 곧 나이다.”
이것이 마맥을 먹게 된 인연이다.
‘서른두 가지 상도 또한 각각 인(因)을 낸다’520)고 한 것은 여러 성교(聖敎) 가운데 서른두 가지 상의 인연을 변별한 것이 있으니, 유가 및 『지론』 등과 같기 때문이다. 대답 가운데 ‘곧 이 몸[身]에서 승인과(勝因果)를 보인다’521)고 한 것은 소승인(小乘人)은 보불(報佛)522)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화신(化身)에서 승인과를 보임으로서 그를 이끌려고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저 공덕법(功德法)으로 법신(法身)을 삼는다’523)고 한 것은, 소승 가운데 오분공덕(五分功德)524)이 법신이 되기 때문에 그를 이끌고자 해서 수행으로 생긴 공덕[修生功德]으로 법신을 삼은 것이다.
다섯째, 원교(圓敎) 가운데 ‘마가다국적멸도량(摩伽陀國寂滅道場)’525)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다.
【문】 ‘십연화장세계미진수상(十蓮花藏世界微塵數相)’526)은 바로 「상해품(相海品)」에서 설한 바이니, 그러므로527) 진경(晋經)을 기준으로 하면 타화천궁(他化天宮)528)에서 설한 것이다. 신역(新譯)을 기준으로 하면, 중회보광(重會普光)에서 설한 바인데, 어째서 적멸도량이라고 말했는가?
【답】 총체적인 처소[摠處]를 잡았기 때문에 그렇다.
【記】 아홉째로 섭화분제(攝化分齊)를 밝힌 것이다. 만약 소승 가운데 의거한다면, 오직 이 사바(娑婆)의 잡되고 더러운 곳만이 바로 부처의 보토(報土)529)요, 이 가운데 염부제(閻浮提)가 바로 보불(報佛)이 의지하는 바이다. 나머지 백억 등은 곧 화경(化境)530)의 분제(分齊)이다. 만약 삼승(三乘) 가운데 의지한다면, 법성토(法性土)531) 및 자수용토(自受用土)532)인데, 지금 여기서는 설하지 않는다. 석가불(釋迦佛)의 다른 것을 따라 수용하는 실보정토(實報淨土)533)는 혹은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534)에 있다고 설하니, 화신(化身)이 백억 염부제에 충만하였다. 이것이 바로 소화(所化)의 분제인데, 『범망경(梵網經)』 및 『대법론』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는 시교(始敎)를 잡아서 설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이승을 가르치기 위해 석가신(釋迦身)으로 실보(實報)를 삼았는데, 지금은 그것을 뒤집어서 변화한 바를 드러냈기 때문에 그 천(天)에서 따로 실보를 세운 것이다.
또한 이승은 계(界) 밖에 실정토(實淨土)가 있음을 믿지 않을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계 안의 최고로 뛰어난 곳에 의탁하여 설한 것이니, 그 화신이 백억에 충만하다는 등도 또한 그 설을 따른 것이다.
혹은 석가불(釋迦佛)의 보토(報土)가 삼계 밖에 있다고 설하는 경우도 있는데, 『열반경』에 이르기를, “서쪽으로 삼십이 항하사불토(恒河沙佛土)를 가면 무승(無勝)이라 불리는 세계가 있으니, 이것이 석가불의 실보정토(實報淨土)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는 종교(終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니, 하위의 설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사바가 오직 화(化)임을 드러내기 위함 때문이다. 그러므로 색계의 정상에 있는 몸[色頂之身] 또한 실보가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혹은 화경(化境)이 단지 백억만은 아님을 설하니, 『대지론(大智論)』 가운데, “삼천대천세계로 일수(一數)를 삼아서 수(數)가 항하사에 이르면, 하나의 세계성(世界性)이 된다. 또한 이것을 헤아려서 항하사에 이르면, 하나의 세계해(世界海)가 된다. 이것을 헤아려서 또 무량항하사(無量恒河沙)에 이르면, 하나의 세계종(世界種)이 된다. 이것을 헤아려서 또한 무량시방항하사(無量十方恒河沙)에 이르면, 하나의 불세계(佛世界)가 교화할 바의 분제가 된다”고 한 것과 같다. 이는 또한 종교(終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니, 섭화(攝化)로써 점점 앞보다 넓히기 때문이다.
또한 오직 수미산세계(須彌山世界)만을 잡아서 설하였으니, 이 계(界)에 거주하기 때문이고, 아직 수형(樹形) 등의 세계를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승은 아니다.
혹은 석가(釋迦)의 보토(報土)가 영축산에 있다고 설하니, 『법화(法華)』에 이르기를, “나는 항상 영산(靈山)에 있다”고 한 것과 같다. 법화론주(法華論主)는 보신(報身)의 보리(菩提)라고 해석하였으니, 마땅히 알라, 이것은 일승동교(一乘同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법화 중에 또한 일승을 나타내기 때문이요, 그 처(處)에서 교(敎)를 따르면 더러움이 청정함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법화(法華)를 말한 곳이 곧 실(實)이 된다. 마치 보리수 아래에서 화엄(華嚴)을 말한 곳이 연화장십불경계(蓮華藏十佛境界)가 된 것처럼 법화 역시 그러한 것이다. 점차 이와 같아지기 때문에 동교(同敎)이지만, 그러나 아직 그 처소를 곧바로 십화장(十華藏) 및 인다라(因陀羅)로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교(別敎)는 아니다.
혹은 이 석가신이 실보(實報)의 수용신(受用身)이라고 설하니, 『불지경(佛地經)』의 처음에서 “석가불이 스물한 종류의 실보공덕(實報功德)을 갖추었다”고 설한 것과 같은데, 그 논에서 수용신(受用身)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것 또한 동교를 잡아서 설한 것인데, 어째서 그러한가? 석가불이 만약 삼승 중에서라면 단지 화신이고, 만약 별교일승(別敎一乘)에서라면 구경십불신(究竟十佛身)이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방편은 저 삼승을 권하여 석가신이 단지 화신(化身)만이 아님을 드러낸 것이니, 그들이 믿어서 받아 지니기 어려울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 경전 중에서는 불과(佛果)의 깊은 공덕의 처소를 설함을 잡아서 불신(佛身)이 교(敎)를 따르면 권(權)이 실(實)로 돌아감을 밝혀 보신이 된다고 설하였다. 곧 방편으로 화엄일승법(華嚴一乘法)을 설할 때 이 석가신 또한 저 교(敎)를 따라서 구경십불법계신(究竟十佛法界身)임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이것은 동교(同敎攝)에 포함되는 것이다.
혹은 석가신이 법신이라고 설하니, 경에 이르기를, “나의 지금 이 몸이 곧 법신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는 돈교(頓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니, 상(相)이 다하고 생각을 여의기 때문이다.
만약 별교일승이라면 석가모니의 몸은 비단 삼신(三身)일 뿐만 아니고 또한 십신(十身)으로써 다함이 없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십불경계(十佛境界)가 의거하는 바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국토해(國土海)로서 원융자재(圓融自在)하여 마땅히 설할 수가 없다. 만약 법에 의탁하여 드러내 보인다면[顯示], 제이회(第二會)의 처음에 설(說)한 것과 같다. 둘째는 세계해(世界海)로서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로 연화장장엄세계해로서 주(主)와 반(伴)을 모두 갖추어서 인다라 등에 통하니, 이는 십불(十佛) 등의 경계에 해당한다. 두 번 째는 삼천계(三千界) 밖에 열 겹[十重]의 세계해가 있으니, 첫째는 세계성(世界性), 둘째는 세계해(世界海), 셋째는 세계륜(世界輪), 넷째는 세계원만(世界圓滿), 다섯째는 세계분별(世界分別), 여섯째는 세계선(世界旋), 일곱째는 세계전(世界轉), 여덟째는 세계연화(世界蓮華), 아홉째는 세계수미(世界須彌), 열째는 세계상(世界相)이다. 이들은 만 명의 아들 이상의 윤왕경계[萬子已上輪王境界]에 해당된다. 셋째로 무량이류세계(無量離類世界)로서 모두 법계에 두루하니, 마치 한 무리의 수미루산세계(須彌樓山世界)의 수량변반(數量邊畔)과 같아서 허공을 다하고 법계에 두루 미친다. 또한 마치 한 무리의 수형세계(樹形世界) 내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형상 등도 다 이와 같으니, 모두 법계에 두루하면서 서로 장애하지 않는다.
이상의 삼위(三位)는 모두 하나의 노사나불이 십신으로 섭화하는 곳[一盧舍那十身攝化之處]이니, 이 삼위는 본말(本末)이 원융하여 서로 거두어 장애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하나의 세계[一世界]를 따르면서도 곧 거칠고 세밀함을 잡으면 이 세 가지가 있기 때문이니, 마땅히 알라, 삼승과 완전히 별개라서 같지 않다.
【釋】 ‘제구 섭화분제(攝化分齊)’535)라고 한 것은 앞의 ‘소승 중 사바’536)등이니, 소승 중에는 시방정토가 없기 때문이다. ‘법성토(法性土)에서 불설(不說)’에 이르기까지는537) 스스로 머무는 곳이지 섭화토(攝化土)는 아니니, 지금은 오직 섭화만을 변별하기 때문에 그렇다.
‘『범망경』과 같다’538)고 한 것에 대해서다.
【문】 그 경전 가운데 1천 마혜수라(摩醯首羅)에 1천 석가(釋迦)가 있어서 백억 석가를 화(化)하기 때문에 천 백억 석가가 있다고 하였으니, 시교 중에서는 이 천 백억 석가를 세운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시교 중에서는 하나의 마혜수라천불(摩醯首羅天佛)을 실보(實報)로 삼고 이 부처가 놓은 백억 석가를 화(化)로 삼았을 뿐 천 백억 석가를 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을 보면, 시교 중에서는 천 마혜수라천 가운데 천 석가를 실보로 삼고, 이 천 석가가 놓은 천백억 석가를 화로 삼으니, 왜냐하면 『문답(問答)』539) 초권에 이르기를, “삼승시교(三乘始敎)에 의하면, 하나의 삼천소유화불(三千所有化佛) 등이 모두 화불(化佛)이요, 어머니 마야(摩耶)와 권속(眷屬)도 또한 실제[實]는 아니니, 여러 삼천계(三千界)의 처소에도 또한 따로 부처[佛]가 있다. 화(化)의 뜻은 앞과 같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풀어서 말하면, 하나의 삼천계에 있는 화불(化佛) 등은 하나의 마혜천불이 놓은 백억 화불이다. ‘여러 삼천계의 처소에 또한 다른 불이 있다. 화(化)의 뜻은 앞과 같다’는 것은, 나머지 백억 화불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 만약 그렇다면, 종교(終敎)는 어떤가?
【답】 만약 종교를 잡으면, 연화대(蓮花臺) 본원(本源)의 사나(舍那)540)는 실보불(實報佛)이고, 천 석가 및 백천억 석가는 곧 화불이니, 법에 의탁하여 나타내 보인 것이다.
‘제2회의 처음과 같다’541)고 한 것은 「명호품(名號品)」542) 가운데 여러 종류의 몸의 이름으로 국토와 바다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계를 따르면서 거칠고 세밀함을 잡는다’543)는 것은 대보살은 곧 사바를 상대하여 화장(花藏)544)을 보나, 중생은 화장을 상대하여도 사바를 보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계를 따라서 계(界)에 감응한 사람은 보는 것이 계가 되고 바다[海]에 감응한 사람은 보는 것이 바다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記】 열 번째로 불신(佛身)의 열고 합하는데[開合]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는 의(義)이고, 둘째로는 수(數)이다. 의(義) 중에서 첫째로 법신(法身)을 잡으면 혹은 진여의 경계[眞境界]만을 법신으로 삼는데, 『불지론』의 오종법(五種法)이 대각지(大覺地)를 융섭하고, 청정법계(淸淨法界)가 법신을 융섭하고, 사지(四智)가 나머지 몸을 융섭하는 것과 같다. 이는 시교(始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혹은 묘지(妙智)만을 법신으로 삼으니, 본각지(本覺智)이기 때문이요, 지(智)를 닦아서 본각과 동일하기 때문이니, 마치 『섭론』에서 무구무가애지(無垢無罣碍智)를 법신으로 삼고, 『금광명경(金光明經)』 중에서 사지(四智)가 삼신(三身)을 융섭하니, 경지(鏡智)545)가 법신을 융섭하기 때문이다.
혹은 경계와 지(智)를 합하여 법신으로 삼으니, 경계와 지(智)가 서로 같기 때문이다. 『양섭론』에 이르기를, “오직 여여(如如)546)와 여여지(如如智)만이 독존(獨存)하니, 이름하여 법신이라 한다”고 한 것과 같다. 이상의 두 구는 종교(終敎)를 기준으로 설한 것이다.
혹은 경(境)과 지(智)가 모두 없어짐을 법신으로 삼으니, 경에 이르기를 “여래의 법신은 심(心)도 아니고 경(境)도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는 돈교(頓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혹은 앞의 네 구를 합하는 것일 때가 있는데, 덕(德)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혹은 앞의 다섯을 모두 끊는 것일 때가 있는데, 원융무애하기 때문이다. 이 두 구는 「성기품(性起品)」의 설과 같으니, 이는 일승을 잡아서 분별한 것이다.
다음에는 따로 석가신을 잡아서 밝힌 것인데, 이 석가신은 혹은 화신일 뿐 법신도 보신도 아니니, 시교(始敎)의 설과 같다. 혹은 보신일 뿐 법신도 화신도 아니라고 하는데, 동교일승(同敎一乘) 및 소승의 설과 같지만 다만 깊고 얕음이 다를 뿐이다. 혹은 법신일 뿐 보신도 화신도 아니라고 하는데, 돈교의 설과 같다. 혹은 법신이면서 보신이기도 하고 화신이기도 하는데, 총괄하여 삼승 등의 설과 같다. 혹은 법신도 아니고 보신도 화신도 아니라고 하는데, 이는 별교일승(別敎一乘)과 같으니 곧 십불(十佛)이기 때문이다.
‘수(數)의 개합(開合)’은 혹은 하나의 부처를 세웠으니, 말하자면 일실성불(一實性佛)이다. 이는 돈교를 기준으로 하였다. 혹은 두 부처를 세웠으니, 여기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로 생신(生身)과 화신(化身)인데, 소승을 기준으로 설한 것이다. 둘째로 생신과 법신인데, 타수용(他受用)547)과 화신을 합하여 생신이라 부르고, 자수용신(自受用身)548)과 법신을 합하여 법신이라고 부르니, 『불지론』의 설과 같다. 이는 시교(始敎)를 기준으로 설하였다. 셋째로 자성법신과 응화법신인데, 『본업경』의 설과 같다. 이는 종교(終敎)를 기준으로 설하였다. 혹은 삼신불(三身佛)을 세웠는데, 항상 설하는 것과 같다. 이는 시교와 종교의 두 설에 통한다. 혹은 네 부처[四佛]를 세웠는데,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로 삼신 가운데 수용신 안에서 자타의 두 몸을 나누기 때문에 네 가지가 된다. 『불지론』의 설과 같으니, 이는 시교를 잡은 것이다. 두 번 째로 삼신 밖에 따로 자성신(自性身)을 세웠으니, 법신이 항사공덕법(恒沙功德法)임을 밝히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양섭론』에 이르기를, “자성신과 법신이 의지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세 번째로 보신 안에서 복지(福智)가 둘로 나뉘기 때문에 네 가지가 되는 것이니, 『능가경』에 이르기를, “첫째는 응화불(應化佛), 둘째는 공덕불(功德佛), 셋째는 지혜불(智慧佛), 넷째는 여여불(如如佛)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종교를 기준으로 설한 것이다. 혹은 십불을 세워서 다함이 없음[無盡]을 드러내었는데, 「이세간품(離世間品)」의 설과 같으니, 이는 일승원교(一乘圓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釋】 ‘열 번째, 십불신을 열고 합하는 것이니549), 『금광명경』 중에서 사지(四智)로 삼신을 융섭한다’550)고 한 것은, 그 경전에는 문장이 나타나지 않으나 뜻으로 인용한 것이다. 즉 그 경전551)에 이르기를, “승발도(勝拔道)에 의지하여 근본심(根本心)을 다하면 곧 법신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근본심은 아뢰야식이니, 이 식을 바꾸어서 대원경지(大圓鏡智)552)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합하여 앞의 사(四)를 갖추니, 덕을 갖추었기 때문에’553)라고 한 것에서는 다른 곳에 준하면 곧 마땅히 섭방편(攝方便)이 되지만, 그러나 아래에서 이르기를, “이 두 구는 「성기품」에서 설한 것과 같다”554)고 하였기 때문에 모두 별교일승의 뜻이지 섭방편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기품」의 소(疏)555)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해석에 많은 뜻이 있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실(理實)로 불지(佛地)에도 정팔식(淨八識)이 있으나 단지 지(智)라고만 말하는 것은 억지로 취하여 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실(理實)의 불지(佛地)는 오직 대지(大智)이니, 팔식 및 나머지 심법을 설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불지대지(佛地大智)는 안은 진성(眞性)과 같으니, 비추어 고요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불지대지는 곧 이(理)ㆍ지(智)ㆍ왕(王)ㆍ수(數)로서 혹은 열고 혹은 합하니, 앞의 세 가지 설과 서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요, 장애함이 없어서 십지(十智)를 갖추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합하여 앞의 사를 갖춘다’는 것은 그 문장의 ‘세 가지 설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과 동일하고, ‘앞의 다섯 가지를 모두 끊는다’556)고 한 것은 그 문장의 ‘장애함이 없다’고 한 것과 동일하며, ‘생신(生身)과 화신(化身)이다’557)라고 한 것은 비담(毗曇)의 설이다.釋華嚴教分記圓通鈔卷第五高麗國歸法寺主圓通首座 均如 說第六斷惑分齊者,前明所依身已欲現依。如是身修行斷障故,次來也。此中二。先摽章門,後初義者。下依章別,釋初中若依小乘者。問:何故小乘有摽無釋耶?答:小乘斷惑與大乘中,二乘有同不同,明大乘、二乘,斷惑之時,同義自現其不同者,於問答中,現之故,不別明。若依三乘者,問前種性章合中三教,名爲三乘。何故此章始終二教,合爲三乘,別立頓教耶?答:此章旣明,約位斷惑,寄惑現位,其頓教中,此相隱故,二依章別,釋中始終二教。卽爲二叚始教中,亦二先,弁三乘斷惑後。又此下弁斷惑相,及惑體性,初中亦二先摽乘數障數後,先弁二乘,下別釋三乘斷惑。初中先摽,能斷乘數,後現所斷障數初中。問:何故前通擧始終二教,爲三乘,今唯約初教,云具足三乘斷惑等耶?答:雖始終二教,合爲三乘,而始教中,具足三乘故也。是故二教相對,則亦得終教,是一乘也,二所斷障數中。問:煩惱所知與人執法執,云何別耶?答:則師准識。疏初卷云:問:二執與障,有何差別耶?答:安惠宗摠相,而言二執,與障無有寬挾。所以者何?彼宗一切有漏心等,皆名爲執,卽名二障。若別相者,煩惱障體,通前七識,唯除第八,恒相續轉,行相微細故。然七識中,第六、七識所起,我見爲我,執體與彼相應,心、心所法緣一境故,相從說執。獨頭貪等,非計我故,雖煩惱障,而非我執,所知障體。亦通七識,唯除第七。論唯說彼四惑相應三位無故,能計障體,卽與法執體無寬俠,以此諸法有體用者,皆是執故。若護法宗執,唯是惠性猛利故。故對法第八。云若是執者,必是惠故,障通非惠覆所知等,說爲障故,由斯相對,便成二句,謂若是執其必是障,自有是障,而非是執,謂卽除惠餘心法。惑復有惠是障,而非是執,如五識身相應惠等,彼疏文細可見也。就別釋中,先釋二乘斷惑,後直進下,釋菩薩斷障,初、中亦二先正明,後然上下,現異愚法。初中亦二先斷煩惱障,後其所知障,下約所知障弁斷不斷。初中亦二先摽章門,後初中下依門別釋。此中釋障,名數及斷惑得果爲二叚也。障名數中,有二重:一略唯分別俱生,二開爲十使,三廣爲一百二十八。卽爲三叚。問:初重分別俱生,得名所由,云何答?唯識論第一云:俱生我執,無始時來,虛妄熏習內因力故,恒與身俱,不待邪教及邪分別,任運而轉故,名俱生。乃至分別我執,亦由現在外緣力故,非與身俱。要待邪教及邪分別然後,方起故,名分別。解云:邪師者,外道邪師;邪教者,外道所說典藉;邪思惟者,依彼邪教思惟,決了故也。是故邪見見取、戒禁取,及疑等依彼邪師等三因,而起故,爲分別也。第二開爲十使中,三先列十使,二於中四種下,約分別俱生,弁異三五識,得起下約識論也。初中摠有十種者,對下就分別俱生,現其別異故,云摠也。問:此十使爲唯煩惱障耶,爲通二障耶?答:聖教不定。瑜伽雜集中,唯煩惱障,今從此義故,云煩惱障有十等。唯識論、佛地論中,通二障也。謂唯識論云:煩惱障者,謂執遍計所執實我、薩迦耶見,而爲上首百二十八根本煩惱及彼等流諸隨煩惱。此皆擾惱有情身心能障涅槃,名煩惱障、所知障者,謂執遍計所執實法、薩迦耶見,而爲上首。見、疑、無明、愛恚、慢等覆所知境,無顚倒性能障菩提,名所知障。解云:百二十八根本煩惱,皆名煩惱障故,十使通於煩惱障也。其所知障中,見者,五見愛者謂貪恚者是嗔疑無明慢則如名故十使亦通所知障也。問:若爾何故儼公云,煩惱所知二障分別者,乃至煩惱唯煩惱、隨煩惱,亦然耶?答:下亦云若約相成門通二障也。是故佛地論、唯識論通二障者,約相成門故,不相違也。其十使開合不同,謂唯識論合五見爲一故,唯有六瑜伽、雜集等,開五見故,爲十使也。論其本末者,此十使對不定四隨煩惱,二十爲根本,就十使內,前五爲本五見爲末也。釋其十使如測師唯識疏也。身見者,執身爲我故,邊見者,計有無斷常也。謂執有廢無執,無廢有執,其一邊故,云邊見也。邪見者,撥無因果故,見取者,以自見爲。是故戒禁取者,以非戒爲戒故,謂牛戒、狗戒等,爲實戒等也。二約分別俱生弁異中,四唯分別六通二故,分別有十,俱生有云,合成十六也。三約識分別中,五識有三,意識有十,末那有四故,合有十七。若分分別俱生,則意識分別起有十,俱生有六。五識三中,各有分別俱生故,有六。末那唯四俱生,合有二十六也。由用意識中,三因引故者,成其五識有分別起也。謂五識唯對五境自無分別,然具三因之意識同緣五識故,五識之中,亦有分別起也。意識具十者,其意識,是强分別識故,具起十也。嗔唯不善,此識有覆無記故者,末那是染污識,覆障聖道故,爲有覆。無其別記,善惡之義故,名無記。是故此識是有覆無記,嗔是不善故無也。又以一類等者,邊見者,執有廢無執無廢有唯見一邊,其末那者,唯緣第八爲我故,無邊見也。問:唯緣內非緣外故,卽是邊見,何故無邊見耶?荅:二邊之中,見其一故,爲邊見。末那唯緣內故,無邊見也。又以後三見等者,末那不依三因故,無分別起也。又由恒相續等者,決伏執也。謂疑云:五識雖不分別,具三因之意識同緣故,有分別起,是則末那。雖不分別意識同緣故,亦有分別起故,今答云由末那恒相續緣故,非第六所引故,不同五識也。其第八識等者,曉師八第八識中,不起障也。謂第八是白淨無記識故,不起煩惱也。此章主則若約始教賴耶之中,障不起也。若約終教於賴耶中,亦起障也。第三廣爲一百二十八,文現可知。問:何故前愚法小乘等者,持小乘中,九十八使之義,起此問也?謂曉師二障章云:三明九十八使門者,見道所斷有八十八,修道所斷有十摠九十八使也。八十八者,謂於欲界苦下,有十道下,有八,謂除二見,餘二諦下,各有七種,謂除二見,及除戒取上二界中,各除嗔恚餘如欲界修斷有十。不異前說。已上解云:欲界苦諦具十道諦中除身邊二見故,唯有八,集滅二諦中,除二見及戒取故,唯有七合三十二上界中,除嗔餘同欲界,各有二十八,合五十六通。於欲界三十二故,合有八十八俱生六中,除二見。欲界有四。上二界除嗔,各有三故,合爲十。通於見斷八十八故,合有九十八使也。是故九十八使門中,身邊二見,唯迷苦諦,戒取迷苦、道諦故,雜心頌云:苦下具一切集滅,離三見道,除於二見,上界不行恚,何故今大乘中,十四通迷四諦耶?問意如是,荅中一以三乘等者,小乘煩惱唯障人空故,功力不寬,三乘煩惱通障人法二空故,寬也。又由迷等義,通一切境故者,一云:初釋約能障功能,後釋約所迷境也。今釋不爾初釋大乘,異小乘故,煩惱寬廣障一切也。後釋莫問大乘、小乘,十使煩惱,皆以無明,爲倒本,倒本無明,通迷四諦故,末隨於本,通迷一切境也。然小乘對行說迷故,唯九十八也。是故曉師云:此十煩惱摠有三分:謂倒本、倒體及倒等流。言倒本者,謂無明倒體者,謂薩迦耶見、邊見,一分見取、戒取及貪。言倒等流者,除前之餘等倒本無明,亦有二種:謂相應及獨行。獨行無明者,謂無貪等諸煩惱纏,但於苦等諸諦境中,由不如理作意力故, 不如實知簡擇覆障暗昧心法。如是名爲獨行無明。此中若由不正作意推求苦諦不如實知覆障暗昧。依此無明,計受者等,隨是我見具起餘惑。如是十種,皆迷苦諦,若推求集諦不如實知,依此爲本計作者等。如是十種,皆迷集諦,此二直迷因緣依處故,非生彼滅道怖畏。又若由不如理作意,推求滅諦不如實知,依此無明計淸淨我以此爲先具起餘惑如是十種悉迷滅諦惟求道諦不如實知。依此無明,卽計知者,見者,此等十種是迷道諦。此二無明所起煩惱還於滅道,生怖畏想,如其本不推求諦理,直緣五蘊而計我等,如是一切,皆迷苦諦由是義故於四諦下各有十種煩惱迷執如瑜伽說已上合今後釋也。第二斷得果中,二先斷分別,後斷俱生。初中問:倍離欲人已離欲人兼斷俱生得一來、不還果,何云先斷分別,有三人耶?荅:若約大對,則見道斷分別,修道斷俱生然兼斷修惑故,得一來果等耳。此中初一人於方便位,伏見所斷入眞見道斷,前所伏得預流果第二人方便位中,伏見所斷及修惑中,前六品等故也。斷前六品倍於末斷故,云倍離欲第三人方便位中,伏見所斷,及修惑九品等故也。第一是次第人,後二是果超非行超也。此中有四句,或有行果,竝不超如次第人,謂此人方便位中,伏見所斷入眞見道斷,前所伏得預流果。立一來向,斷欲界修惑中,前六品得一來果,立不還向,斷後三品得不還果,立羅漢向,斷上二界修惑九品得羅漢果故,此是下漸出離人也。或有行果竝超,謂此人方便位中,伏見所斷及欲界九品修,惑亦伏上二界四禪及四空中初三空之障入眞見道斷,前所伏得不還果,未斷非想結故,不得第四果也。是故超前二果得第三果故,云果超始斷上二界,修惑作羅漢向之事故,云行超,此人屬已離欲人也。或有行超果不超,謂此人方便位中,伏見所斷,亦伏修惑九品中,前五品入眞見道斷,前所伏,得預流果,木斷第六品故,不得一來果故,名果不超,然斷前五品作一來向之事故,云行超也。或有果超行,不超如倍,離欲人及已離欲人等也。謂倍離欲人入眞見道斷、見所斷修惑前六品故,得一來果。是故超於初果,得第二果故,云果超然斷見所斷已作初果之行故,云行不超也。已離欲人入眞見道時,斷見所斷,亦斷修惑九品,得不還果。是故超前二果故,云果超已作初二果行故,云行不超也。二斷俱生中二。先斷六識俱生,後其末那下斷末那俱生也。漸出離者,如前第一句弁也。頓出離者,此則二向、二果人也。謂入見道,得初果已頓斷三界,卽得羅漢故,亦有一向、一果人。此則大獨覺也。此人入見道時,頓斷三界,見修煩惱,越初三果,得羅漢果故,云一向、一果也。若爾何故,有漸斷者,一云:因其頓出離中,漸除凡品之辭問也。今釋因前,漸出離問也。謂旣云於三界法不能頓緣故,若頓出離者,頓緣二界故爾也,諦現觀者,一云:十六心中,第十六心也。一云:第十五心也。前愚法二乘無頓出離者,前文無弁愚法,二乘然前摽云:若依小乘,若依三乘故也。其末那至准知者,末那滅惑,小乘無者准彼無頓出離之釋也第二斷所知障中唯是非擇滅者,入無餘時身智俱滅,灰斷永盡故,云滅耳。不是智滅故也。惠解脫至分有所斷者,唯惠解脫心不解脫故,名惠解脫心惠俱解脫故,名俱解脫也。八解脫障不染無知等者,雖云分有所斷非是斷於法執,唯斷定障,不染無知也。如瑜伽說,又諸解脫由所知障解脫等者,一云:引成別義,今釋引論,增現前釋非是別意也。謂於所知障心得解脫者,非但惠解脫心,亦解脫故,俱解脫也。是故與前俱解脫人分斷所知有何異哉?二現異愚法中,然上所斷不同愚法者,一云:唯約分斷所知也。今釋上來所弁,二乘斷惑,不同愚法也。以彼唯斷煩惱得等者,大乘之中,弁賴耶爲諸法依故,賴耶識中,立煩惱種,小乘中,不知賴耶故,立三世得爲諸法依。是故小乘斷煩惱,得大乘,斷賴耶種也。三世得者,法前得是過去藏,如牽牛人法俱得,是現在藏如乘牛人法后得,是末來藏,如驅牛人由未來藏中,立諸法故,立三世得也。就直進中,有二。先對二乘弁異,後但於一障下彰伏斷分齊。初中二障俱斷者,二乘唯斷煩惱障,不斷所知障,設有分斷不能永斷菩薩,不爾二障永斷故,不同也。又煩惱障中,不同二乘,約界分品者,遣疑也。疑六:斷煩惱義與二乘同耶?荅:意如文問此教二障,於識相應,其義云何?荅:此教之義眞如凝然不作諸法故,建立生滅賴耶爲諸法依然賴耶識,是白淨無記故,障不俱起六、七識中,建立二障,但此障種在於本識,彼六、七識所起之障,於十地中,漸漸伏斷,至於佛地,一切斷盡得佛果也。爾時亦云:迴識成智,亦云現淸淨八識。是故於彼教中,論三性有無者,遍計是無依圓,是有若約觀行次第者,染分依他,是所遣淨分,依他非所遣也。問:何知所知障,亦通六、七識耶?荅:唯識第九云所知障者,執遍計所執實法薩迦耶見,而爲上首見疑無明、愛、恚、慢等覆所知境無顚倒性,能障菩提,名所知障。此所知障決定不與異熟識,俱彼微劣故,不與無明惠數相應故,法空智品與俱起故,七轉識內隨其所應,或小或多,如煩惱說。解云:依此論文所知障,亦通六、七識也。儼公問荅初卷云:其末那識依三乘教,有其識起四,惑不起法執。解云:此儼師義於末那中,不起法執也。一云:安惠菩薩於末那識,不起法執,護法菩薩於末那識,法執俱起,儼師隨安惠義故,於末那法執不起,藏師隨護法義故,於末那法執俱起也。一云:章主於末那中,法執不起,此說合文也。二彰伏斷分齊中,先斷分別起後,其俱生下斷俱生。此中先正明二問下問答。初中亦二。先斷六識俱生,後其末那下斷末那俱生。前中三初斷煩惱障,次其所知下斷所知障,後由是下結成。初中潤生者,潤業受生攝化者,攝生化物也。由惑至惑盡者,此文是地前留種義故,卽合終教,令留惑義同故,於始教引耳。是故當知等者#一云:唯因攝論故云。是故今釋通因上下所弁之義云,是故也。三結成中,對法論等者,前所依身,約斷煩惱之邊分,出羅漢義引也。今合取二障,至佛地義引故,二處不同也。唯修所知障對治道等者,其煩惱障故,留助願而起勝行,不修對治然,至佛地,斷所知時,煩惱亦斷故,云得菩提時,頓斷煩惱及所知障等也。問:答中初問答意者,前但云二障修惑俱,至佛地,而末弁地上諸識相應,或現不現欲現。此意故,問答也。答中二先弁煩惱障,後弁所知障。前中亦二先弁六識煩惱,後弁末那煩惱前中,其煩惱障內者,通擧六、七識煩惱也。第六識惑者,簡取第六也。此中有五法說喩,況法合引證結成也?若依因明立量者,宗云:六識煩惱不起過患。因云故留故。喩云如毒呪所害。合云如呪所害毒不起過患,六識亦如是也。引證中論云:諸惑已滅伏,如毒呪所害,由惑至惑,盡證佛一切智前引下半今引上半也。結成中,古法相多,弁留種,新法相多,弁留現今會二法相。或留現或留種,不相違故,云皆得自在也。弁末那煩惱中,七地以還有時暫現等者,於意識中,起人空無漏智時,意、識二執末那,人執皆永不起,然七地,以還人空觀智有間斷故,有時暫起八地以上,人空觀智恒相續故,求不起也。二所知障中,或現或種等者,其俱生煩惱於十地中,伏其現行,至金剛位,永斷其種其所知障,於地地中,各斷種現故也。煩惱障中,別弁六識及第七識惑所知不爾故,知所知唯於第六起也。第二問答中。問意中一云:第六識中,二障修惑及末那煩惱佛地方盡者,十地皆是有漏。何故聖教唯云七地,以還起有漏心,不言八地已上,是有漏耶?一云:十地中,雖留煩惱不起過患者,何故聖教七地,以還起有漏心耶?然初意合文也。有處說等者,唯識論第九云:惠學有三:一加行無分別惠,二根本無分別惠,三後得無分別惠。乃至如是三惠,初二位中,種具有三,現唯加行於通達位,現二種三見道位中,無加行故,於修習位七地已前,若種若現,俱通三種,八地已去現二種,三無功用道,違加行故,究竟位中,現種俱二加行,現種俱已捨故。解云:七地以還有加行故,是有漏心八地已上無加行故,是無漏也。擧彼文問也。答意者,末那煩惱七地,以還有時,暫起有漏之心,八地已上,不起有漏故,唯識論約此弁也。六識中,煩惱,是似有漏其所知障,是實有漏。此二通於十地也。餘義可知者,初教之中論門廣多,今略弁故爾也。二彰斷惑相,及惑體性中,先弁斷相,後又此障下明體性也。初中惑種在滅相時,智卽生相等者,唯識論第九云:眞見道現在前時,彼二障種必不成就。猶如明暗必不俱生。如稱兩頭低昂時等諸相違法理必應然已上從此云也如築卽坤等者,築喩障坤喩智也。對法論等者,彼論明惑智同時相翻之義故也二弁惑體中無性卽空者一云當於始教之終今釋卽此宗也謂心識章熏等卽空者卽當初教宗故也終教中,三先弁斷惑分齊,次又此教下明斷惑相及惑體性後。是故當知下現不同也。初中二先約二乘,後約菩薩初中有三。先正弁次引證後問答。此中問意前始教二乘,亦斷所知。何故此教於煩惱障,尚不能斷耶?答:中有二釋。一云:初釋約行心,後釋約人也。今釋初約始終教,弁異後,以愚法不愚法弁異。問:若約初釋愚法,亦斷所知障耶?答:不爾。前云當知此始教爲引愚法漸向大故,安立此教深勝於彼故所知障亦許分斷已上解云旣云深勝於彼故所知障亦許分斷當知愚法不能斷也。問:若爾與終教何別?耶?答:若依終教,愚法二乘於煩惱障,但能折伏,若依始教許二乘人全斷煩惱故,不同也。以上就下者,以菩薩就二乘故以下,就上者以二乘同菩薩故也。後釋中,前云:二乘亦斷所知障者,約三乘中聲聞。今云煩惱障,尚不能斷者,約愚法也。是故此釋令別二聲聞也。問:前約三乘中,聲聞者,當始教耶?答:此釋意者,合始終二教爲一大乘教,非謂令別二教也。是故合二教時,還當終教義也。是故上卷云:問:所以得知愚法二乘,在所引中耶?答:以彼愚法約大乘終教已去,竝不名出三界故等者,當此後釋也。就菩薩中,先略摽後。然彼地前,下廣釋初中。先能斷人,次於二障,下簡始教,三但有下,正現此教義。此中地前伏,使現初地,斷使種等者,是實行非假寄也。問:章主初地疏云:若約終教初地,亦捨三界分叚,及惑業苦地上,唯斷彼所知障及反易報。其煩惱障地前,漸伏地上斷盡其所知障。地前亦學伏初地斷一分。餘在諸地,名斷一分佛地,方盡二地。疏云:若依終教,如梁論等其煩惱種初地永盡,唯有彼習其所知障一分麤者亦初地盡餘分及習於諸地中各別正斷已上彼二處文與此文,云何會耶?答:一云:就終教中,有始有終。今此章文約始彼二處文約終也。一云:今約實行,彼二處文,是假寄故,不同也。問:初意云何?答:於二障中,分其使習地,前伏使現初地,斷使種地上,除習氣者,此約始弁於根本無明,分爲十分於十地中,各斷一分者,此約終弁故也。何者初地?疏云:各斷一分二地。疏云:各別正斷者,卽根本無明分爲十分,於地地中,各斷一分之義故也。問:後義云何?答:初地疏及二地疏竝云:煩惱障初地求盡者,是地前斷煩惱障地上,方斷所知之義故,此卽當於十八寄門,第一門也今釋二處文多同此章無相違也何者二地疏云其煩惱障初地永盡者,煩惱障種初地頓斷故,言唯有彼習者,煩惱障習氣於初地中,不能除故言。其所知障一分麤者,亦初地盡者,所知障種初地永盡故,言餘分及習者。餘分則所知障習氣及習者牒前,唯有彼習故,卽是煩惱障習。此二障習後諸地中,漸漸斷除故,云於諸地中,各別正斷也。初地,疏云:其煩惱障地前,漸伏地上斷盡者,地上之言摠約十地非唯初地。謂正使種子初地永盡,唯有習氣後,諸地中,一、一斷除。是故正使、習氣十地摠盡故,云地上斷盡也。言其所知障地前,學伏初地,斷一分者,地前伏現。初地斷種故,言餘在諸地,各斷一分佛地方盡者,其習氣,則於後諸地,漸漸斷除佛地方盡故,當知彼此無相違也。問:若爾彼二處文,亦爲實行耶?答:正是實行,亦魚假寄也。何者二障之中,分其使習。初地斷種二地已上,除習氣故,正是實行也。然各斷一分,夂各別正斷者,是地地中,各斷一分之義。此則以二十二無明及十一無明寄於十地。各別斷義故,是假寄也。問:若爾於實行中,無以二十二無明及十一障寄於十地別斷義耶?答:約實行,則一、一地中,通斷二十二無明及十一障也。問:若爾與別教中,一斷一切斷義云何別耶?答:別教之中,無有明昧三乘之中,雖通斷二十二無明十一障然明昧差別故不同也問三乘十地一通斷其相云何?答:於十地中,修習十度。初地中,檀度偏勝、餘度兼修,隨地增上二地中,戒度偏勝、餘度兼修,隨地增上。是故若約偏勝於諸地中,各修一度,若擧兼修一一地中,通修十度斷障,亦爾。若約正者,於諸地中,各斷一障。若約兼斷一一地中,通斷十障。是故當知雖一、一地通斷諸障,而有明昧也。問:寄對之中,第八門云寄四障以現四位。此有二義:一約正使寄現地前,四位、四行、四因、四報云云。第二以四障習,寄現地上四位、四定、四德、四報等者,與實行義何別耶?答:以正使寄地前,以習氣寄地上義,與實行同然,寄四障,以現四位義,是假寄也。謂約實行,則一、一地中,通斷四障故,爾也。何者法常師攝?論疏中,若約實一、一位雙治四生死齊現四德已上故知爾也問十地所斷之障爲根本無明耶,爲枝末耶?答:一云:如後,謂根本無明,以微細故,佛地方盡。是故十地所斷,是枝末也。何者勝鬘經云:根本無明佛菩提智之所能斷已上故也今釋通根本枝末也何者起信論云不了一法界者從信相應地觀察學斷入正心地,隨分得離,乃至如來地,能究竟離故。解云:不了一法界義,是根本無明信相應地者,是地前位入淨心地者,是初地也。是故當知十地所斷,亦通根本無明也。問:章主法界無差別,論疏云:四無病者標也。謂二障及習氣所病盡故,寶性論云:淸涼故,不病,無煩惱習故,五無苦依者,以無始時,根本無明住地及習氣爲衆苦所依,今皆永盡故,云無苦依。問:此與前所知障,何別耶?答:三藏兩釋一云:此是住地無明,彼是起時,無明如勝鬘說也。一云:此是所知障中,細分爲本,是彼所依,以依細起麤故。若爾煩惱豈無麤細?釋云:煩惱麤細與麤所知,俱是能依,唯此微細,是彼二所依已上此二釋何別答釋無苦依云以無始時根本無明及習氣爲衆苦所依已上旣通擧根本無明及習氣爲苦依故,初釋約根本無明爲苦依,後釋約習氣爲苦依也。是故初釋義者,無病中,二障是起時,無明無苦依者,是根本無明也。後釋義者,無病者,約煩惱麤細及麤所知無苦依者,只是所知障之細分也。問:初釋中,住地無明及後釋中所知障之細分何別耶?答:一體無異也。問:若爾何故有二釋耶?荅:論其二障有二門:一者根本無明者,智㝵六染者煩惱㝵就煩惱中,執相應染,是人執故,爲煩惱障餘五染。是法執故,爲所知障。若約此義根本無明非二障根故,初釋約此義二者,執相應染是人執故,爲煩惱障餘五染及根本無明,竝爲所知障。若約此義根本無明,是所知之細分後釋約此義也。問:根本無明及六染斷位分齊云何?答:六染中,執相應,染地前斷也。不斷相應,染初地斷也。分別智相應,染七地斷也。現色不相應,染八地斷也。能見心不相應染,九地斷也。根本業不相應,染十地及佛地斷也。根本無明者,地前觀察,學斷初地,隨分得離佛地,究竟離也。是故當知十地,亦斷根本無明也。問:無明是根本故,是上位斷染心,是枝末故,是下位斷何不爾耶?答:雖生起之時,有本末治斷之時,無前後故爾也。是故章主。起信疏云:今無明與染心說有前後然治滅竝一時也已上此文足爲訂也問:根本無明無有分異,何故上位斷下位,亦斷耶?荅:曉公二障章云:上說通相無明住地,亦爲二乘隨分所斷未知。如是無明住地爲有麤細,爲無輕重,若有麤細故,有斷不斷者,卽應通與八識相應。若是一向心不相應故,無麤細輕重異者,云何二乘有斷不斷?若使同迷我見等惑,所迷理故,雖非是麤而同斷者,是則末那相應無明同與見惑迷無我理故,於見道,亦應共斷。若此細故,不共斷者,彼最極細何得同斷荅?無明住地,其相微密、麤細、輕重不可定說故,一切種皆可得說。何者若就功力增强,遍生諸惑,卽應可說,唯麤非細。若就行相末分非心相應,卽應可說,唯細非麤論其所障。障上障下,則可得說有重有輕,直當自相一無增微,則應可說非輕非重其上無重其下無輕,亦不可說唯在中品但由非輕故下智能除由非重故上智亦斷非輕重故中智得滅 已上細覽此文卽無惑矣問若根本無明下智,亦斷何故勝鬘經云佛菩提智之所能斷耶?荅:無明細分佛地方盡故,云爾也,非謂下位不斷也。就廣釋中三初釋地前伏使現義次初地 已上下釋初地斷使種義后。是故當知下釋地上除習氣義也。初中爲除智障等者,前始教云潤生提化故,不墮二乘地故,爲斷所知障故爲得大菩提故 已上今擧除智障之義等取餘三也梁論二文竝第三卷也。問:今此文中,引梁論等數處文寄惑現位第一文中,亦引此文二處所引,其義何別耶?荅:此中引意得出世淨心,亦得聖人位故,於煩惱障自在,能斷爲除智障故。故留之義引也。波處取斷煩惱義,不弁故,留義也。仁王經云;地前得人空,而不取證等者,彼經云:復次,性種性行十惠觀,乃至修護空觀,亦常行百萬波羅蜜,念念不去心已上解云修護空觀者是得人空之義也常行百萬波羅蜜者,是不取訂義也。又經云:復次道種性住堅固忍中,乃至常入第一義諦心,心寂滅,而受生三界。解云:心心寂滅者,得人空義,而受生三界者,卽不取訂義也。又起信論等者,依人空門,見法身故,於煩惱障自在能斷也。二釋初地斷使種中,先約六識中,二障種二,其末那下約末那煩惱初中先正明后引訂初中初地已上斷於智障一分麤者一云:於十地中,各斷智障之一分也。今釋不爾初地中,斷一分麤品二地已上,除習氣也。問:但云初地已上等不言,唯是初地,何云斷一分者,唯是初地耶?荅:此中意云初地斷其智障一分故,初地已上其煩惱障不復更留也。如抄文云:直進十地,初斷麤後斷細者,是其義也。引訂中,引此文意有二:一者結前,謂見道中,不分見、修一切俱斷者,此文爲證也。二者起後,謂以此文爲證,當知其末那煩惱,亦初地斷麤也。謂旣云修道煩惱於見道中,一切俱斷故也。二斷末那煩惱中,三先摽自意,次引證,後若言下遮外計也。引證中,問:孔目章第三煩惱行使行稠林章始教中,引此文。何故今此於終教中引耶?荅:一云:彼論云如數次第,或隨所相應等。解云:如數次第者,如次第轉其四識,成於四智之義。此當始教隨所相應者,卽當終教孔目。約初義此章,約後義,今釋此所引論文有二義:一約始教,入眞見道,暫伏不起故云轉染污末那,後諸地中,漸漸伏故,云轉復淸淨也。二約終教初地,斷麤故,云轉染污末那,後除殘習故,云轉復淸淨。是故二處各從一義引也。三釋地上除習氣中。問:前叚旣云轉淨者,除習氣也。則前叚已現除習氣義,何故此中方現除習義耶?荅:前叚義者,引攝論文訂,其末那煩惱初地,斷正使義,仍釋彼論,轉淨義耳,非謂正釋地上,除習氣義也。又前轉淨者,除習氣者,唯約末那煩惱習氣,至於是故下通現斷於六、七、二識煩惱習氣及所知障習氣之義故也。是故者,因前初地斷正使義,成其地上除習氣義故也。此中四。先標自意,二引訂,三釋所引文,四問荅三釋所引文中,微薄則,習氣微細輕薄故,云微薄也四問荅中荅中有三先正荅二如始教下擧劣況勝三若地前下結成也。擧劣現勝中,始教小乘者,簡愚法也。彼頓出離等者,若唯斷欲界修惑九品中,前六品時,不斷上二界前六品者,可得一來果,然斷欲界六品時,卽斷上二界六品故,不得一來果,此尚猶然,況菩薩也。第二現斷相及惑體中、光明斷相。後又此下現惑體也。初中非初非中後等者,十地論文也。問:藏公約相反相續二門,釋此論文異相、云何?荅:惑智同時,立論者,是相反也。唯智中,立論者,相續文也。問:非初非中後,與前中後取,何別?荅:初句卽本有,後句卽修生故別也。故淸涼云:非初非中後,弁因緣無性是斷之不斷前中後卽不壞緣相是不斷之斷已上故是本有修生義也。經云:一切法,卽如者,維摩經也。第二明寄惑現位者,前約始教,則二障分別地。前伏現初地見道,頓斷彼種,其俱生中,煩惱障初地,以去自在,能斷留故,不斷等約終教,則其菩薩人於二障中,不分俱生及分別起,但有正使、習氣,地前伏使現初地,斷使種地上,除習氣。佛地究竟淨旣知二教立宗。如是其餘聖教,與此相違,云何會耶?今以十八門,欲會諸教故,次來也。此中三。先標數二,別釋三已上諸門,下結成也。別釋中,此十八門約類類弁也。謂一切惑障不出二障故,有初門第二、三、四門約皮等三惑義同故,一處弁也。第五、六、七門,則現三身義同故,一處弁也。八、凡二門分正使、習氣義同故,第十、第十一二門約色心煩惱義同故,十二、十三二門分見修義同故,第十四門以前,第十三門中,見道所斷分別之惑,所借三緣寄現三賢故次弁也。十五、十六二門,以前第十三門中,修道所斷,俱生煩惱於十地中,分斷故,次弁也。十七、十八二門斷無明義同故,一處弁也。若約位弁者,初八門通約比證,次五門唯約證位,次第十四門唯約比位,後四門,亦約訂位也。門門多分,有三叚。先標自義,次引訂,後釋引文。或唯有二無釋引文,或唯有一無後二叚如第十四、第十五等也。第三門三十三僧祇者,於十地中,各分入住出故,爲三十三賢,爲三故爾也。謂彼論云:復次,云何三十三僧祇,乃至方便地中,有三阿僧祇,乃至於十地中,地地各有三阿僧祇謂入住出已上尋彼可知第四門中二障三處過者,謂彼論中,以二障分爲皮膚、骨三障,於三位斷故也。第五門中問染心麤細,寄於三位,以現三身者,三身是佛果。何故此門,亦通比證耶?荅:所現雖是佛果,旣云伏道,是地前法斷道,是地上故,約能見心,是比訂故,無違也。有人者,曉公也。謂曉公造金光明經疏故也。問章主起信疏云:如金光明經云:依諸伏道起事心滅,依法斷道,依根本心滅,依勝拔道根本心盡。言伏道者,謂三賢位,起事心滅者,猶此論中,捨麤分別執着相,是異相滅也。法斷道者,在法身位,依根本心滅者,猶此論中,捨麤念相,是住相滅也。勝拔道者,金剛喩定根本心盡者,猶此論中,離微細念,是生相滅也已上然卽彼論無末那識以起事等三心配生住異三相。 此章中,配三識,云何會耶?荅:彼經含多義故,配於三識,亦得配生、住、異三相,亦得隨宜無傷也。第六門中,問:經云:煩惱障淸淨,能現應身等者,煩惱障,則障於涅槃所知障,則障於菩提故,可言煩惱障淸淨故,現於法身何不爾耶?荅:若擧相反,如所難也。今約三障麤細業障最麤故,淨之則現化身,煩惱次麤故,淨之則現應身。智障最細故淨之則現法身也第八門中問一約正使寄現地前四位、四行、四因、四報等者,章主明難疏中,引於始教,何故今文終教假寄中引耶?荅:若據十信成位義,則是當始教,若約正使地前,斷習氣,地上斷之義,則是終教故也。此中有立嘖荅。 荅中闡提不信障,者闡提不信大乘之道十信,反此故,現大乘行也。外道我執障者,十解位中,成般若行解,人空無我理故,翻彼執也。爲我德因者,由無我故,眞我德現也。聲聞畏苦障,者此人畏生死苦故也。破虛空器三昧行,者聲聞人則生死虛妄,如彼虛空故,可畏涅槃,眞實故。可樂今破彼,如虛空之見故,云破虛空也。獨覺捨大悲障者,十迴向中,成大悲行故,翻彼障也。問:得大乘光明三昧等者是十地會摠定何故爲初二三地之定耶荅:梁攝論云:論曰:大乘光三摩提。釋曰:大乘有三義:一性,二隨,三得性。則三無性隨,則福德智惠行所攝十地、十波羅蜜隨順無性得,則所得四德果。此定緣此三爲境故,名大乘依止。此定得無分別智,由無分別智,照眞如及佛不異故,名光又有十五種光功德,勝於外光故。又此定能破一闡提習氣無明暗是暗對治故名光已上 此定得無分別智,乃至十五種光功德,勝於外光故,名光者。通於十地,是十地會,摠定義也。此定能破一闡提習氣者,局初二、三地。是故當於此中,初二、三地得大乘光明三昧義也。又隨義中,具福德行,約福行義,於四、五、六地中,得集福德王三昧,約德行義,於七、八、九地中,得賢護三昧,約具福德義,於第十地中,得首楞嚴三昧。如是各從一邊於十地中,分寄之耳,因緣生死反易報者。問:梁攝論云:初二三地是方便生死四五六地是因緣生死何故此中反此耶荅:法常公攝論疏云:一方便生死,卽以無明爲緣,感生死非是親因故,稱方便二因緣。生死卽以無流業爲因,感生死,由是親因故,名因緣。生死三有,有由前因緣,感生有果,有此果故,名有。有四無有,則老死攴謝其報盡後,實無有有果故,曰無有。若論得名方便,從疏得,名因緣,從親受稱有,有從果立目無有對治,彰號以盡此一有,更無有故,從初地至三地。且得四定、四空及施戒等,未得般若,由相同世間故,無明相增無漏業等,相隱故,以隱從增摠判三地爲方便,生死四、五六地,得道品觀智,乃至因緣觀智現前無明相隱,無漏業增以隱,從增判四、五、六地爲因緣生死七地,至十地住心已來,報行淳熟無漏。五分法身轉增明淨因緣相隱,則以因從果,判爲有,有生死十地,終心有生死時,短,佛地無生死時長故,以有從無判爲無有生死。解云:初二、三地,是方使生死四、五、六地。是因緣生死者,是其義也。初二、三地,是因緣生死者。佛性論云:方便生死者,是無明住地,能生新無漏業,比如無明生行,或因煩惱方便生同類果,名爲因緣。如無明生不善行,若生不同類果,但名方便。如無明生善行,不動行故,今無明住地,生新無漏業行亦爾或生同類或不同類生福行名爲同類以同緣俗故,生智惠行,名不同類,以智。是眞惠故,是名方便生死。解云:以彼論文會今文者,無明住地生新無漏業。初二、三地,是相同世間故,生同類。福行義增故,名因緣生死四、五、六地。是相同二乘故,生不同類。智惠行義增故,爲方便生死也又此四中初二通二障後二唯智障者法常師釋二、十二無明云:六地以上之所斷,竝是智障,是其義也。第十門中,又於十地別地相者,前第九門云:於十地中,爲別相故,此門亦別地相故云,又也前唯別世間,及出世,今別世間二乘及菩薩也。第十三門有三:一引論標自意,二何以下徵釋非實所以,三如實下現實意也。問:例餘門則先標自意,然後引證,何故今此直以論文摽自意耶?荅:論文廣多,具引恐繁欲以義引故,直將論趣摽自意也。問:以分別俱生寄現見、修二位者,應是始教實行之義,何故爲假寄耶?荅:一云:始教實行中,二障分別起地前,伏現初地斷種,其俱生中,煩惱障,則初地以去自在,能斷留故,不斷等也。今此寄門大分見、修分別,煩惱見道,皆斷俱生煩惱,修道皆斷故,不同也。今釋此第十三門,與始教中,實行同也。問:若爾何云假寄耶?荅:此門義者,始、終二教合爲一,大乘教以終教爲實,始教爲假寄故爾也。是故偏於此中,云何以得知但是寄位非實 已上餘門皆是假寄然於此門偏現初教實行,是假寄位故,爾云也。卽蘊離蘊等者,卽於五蘊,計我故,離於五蘊,計我故也。如實意者,但一煩惱有麤有細等者,法界品抄云:直進十地中,初斷麤後斷細之義也。是故當知如實義者,是終教也。如末那煩惱通二位斷者,先約六識煩惱,弁見道斷麤,修道斷細。今約末那煩惱弁見道斷麤修道斷細之義,亦爾是故前言其末那煩惱初地斷鹿後,除殘習者,是其義也。第二執識者,末那也。對賴耶故,爲第二也。此中先現二乘,滅末那義後,若見諦下明菩薩末那煩惱見道斷麤,修道斷細之義也。問:十六心者,是小乘位,何言菩薩斷義耶?荅:借二乘位地之辭,以現菩薩斷惑之義耳。此上諸義等者,據後九門也。此九門中,有不引聖教故指彼也三結成中爲護十地等者護者防護過故問十八門中亦有地前何言爲護十地耶荅雖有地前,而十地爲宗故也。問:十地章云:如此等法差別相者,爲護十地故,隨方便門,作種種說,令諸衆生,於十地中,離增上慢已上與此何別耶荅彼約花嚴外相十地此約地爻十地故,不同也。餘義准思者,十八門中,所不引聖教准之通矣。就圓教中,先明別教,後若約下明同教也。初中先正明,後又此下現斷惑位。初中有四。初明無體有用,二以所障下弁一障一切,障三。是故不分下弁一斷一切斷,四引證也。初中一切煩惱不可說,其體性者,道身章相和尚云:惑者,但用無體智具體用問無體何得有用荅體是無住實相迷用爲惑迷用息耳,無體可斷。解云:體是無住實相故,云不可說,迷用爲惑故,云但約其用,甚深等也。具猶空雲有二義:一無體,卽空義;二有用覆弊義。惑中亦爾以所障法一卽一切等者,擧其所障現能障也。不分使習現種等者,簡三乘也。但如法界一得一切得者,一云:如法界者,擧能例也。一得一切得已下擧所例也。一云:如法界一得一切得者,擧能例。是故已下現所例也。謂擧法界一得一切得義,成一斷一切斷義也。普賢品明一障一切障者,彼品云:起一嗔心,受百千障㝵法門故,小相品明一斷一切斷者,彼品云:此諸煩惱,皆悉除滅故也。問:以小相品智,斷普賢品障耶?答:雖有多說,今釋以小相品智斷普賢品障也。謂普賢品擧所治小相品擧能治故也。問:小相品有八萬四千煩惱,此是所治普賢品有六十種普門得德,此卽能治是則各具能治所治。何故强以小相品智斷普賢品障耶?荅:小相品非無所治普賢品非無能治,然小相品中,八萬四千煩惱一障一切障之義,於普賢品方現也。普賢品六十普門一斷一切斷之義,於小相品方現故也。是故花嚴經中,一障一切障之軌皆托普賢品文一斷一切斷之軌皆依小相品文故,一斷一切斷,則無非小相品智一障一切障,則無非普賢品障故爾也。問:若小相品智斷普賢品障者,以修生智斷本有障耶?荅:修生本有約德,而論非謂能障復有修生本有。是故障本有修生之惑,以修生智通斷也。比如黃金雖在泥中,而其金體本來淸淨,若借鉗鎚之功,去其鑛穢,卽非但現於赫赫之光,亦現本來淸淨金體。如是本有之德,雖在染中,而其性德本來淸淨,若得修生之智一斷一切斷之時,非但現於修生萬德,亦現本來性德之體。又如淸淨空中,雲塵徧覆日光出時,破雲現空日光與空雖異能翳之雲,元不別也。是故昏雲若破非直開朗日之光,亦乃現淨空之色法合可知。是故道身章云:有文云一斷一切斷。有文云實無所斷,彼是則此非此是,則彼非云何會通?荅:以德言之從始無障以惑望之覆無盡德已上無盡德者非但修生,亦通本有德也。修生智起斷復無盡德之障,則亦現本有智故爾也。問:儼公十地會宗云:一所治,謂正使、煩惱業報及性三障上心種子二能治,謂正無分別智及普賢性起智已上此能治所治其義云何荅正使煩惱業報者十地品所治也。性三障上心種子者,普賢品所治也。正無分別智者,十地品能治普賢性起智者,普賢品能治也。問:修生本有於同別教云何當耶荅十地能治所治是修生亦同教也。普賢性起能治、所治,是本有,亦別教也。何者彼疏十地品宗云四義准上唯取修生爲異耳已上故知十地能治、所治,唯是修生,亦同教也。此旣爾故,普賢品能治、所治,是本有也。問:又品宗云:以不說爲說義,卽證普賢德位,以說爲說三乘宗已上不說爲說等者可是別教義何云同教耶?荅:不說爲說者,是約本分,請分文云也。以說爲說者,是約說分六云也。是故章三十地說分說意中云:三說意者,前本請分中已說地體,令彼上機悟解玄旨,今弁地相令中下之流隨相開解故明說已上此意與儼公不說爲說等同。然會宗中,多從說分弁故,是同教也。問:修生同教本有別教者唯約單本有單修生論耶通約四句而分論耶?荅:修生及修生本有二句,合爲修生本有,及本有修生二句合爲本有。何者第六地釋義門,明本有等四句竟云若對經分文。此十番緣生,唯有二門:一修生,二修生本有餘二在性起品已上故爾也問此四句中論斷無斷義云何?荅:約本有及修生本有,則無所斷,約修生及本有修生,則有所斷也。謂約理卽無所斷,約智則一斷一切斷故,爾也。何者釋義門云:言本有者,緣起本實體,離情,謂法界現。然三世不動故,性起云衆生心中,有微塵經卷,有菩提大樹,衆聖共證人證前後不同,其樹不分別異故,知本有。又此緣生文十二因緣,卽第一義言本有修生者,然諸淨品本無異性。今約諸緣發生新善據。彼諸緣乃是妄法所發眞智,乃合普賢性體本無分別。修智亦無分別故,智順理不順諸緣故,知修生卽從本有同性,而發故,性起品云:名菩提心爲性起故。問:本有修生。旣是新發義,非是舊,云何乃說從其本性?荅:此只爲是新生之義說,是修生與本義親故,從性起。如今穀不別,劫初順本穀,親對今緣疏故,不說新得三修生者,信等善根先未現前,今對淨教賴緣。始發故,說新生云云。四修生本有者,其如來藏性隱在諸塵凡夫卽迷處而不覺。若對迷時,不名爲有故,無相論云:若有應見云云,今得無分別智始現法身,出纏成淨,先無有力同。彼無法今時成用異,本先無故,不可說,名爲本有說,爲修淨。問:若說始現爲修起者,名曰修生,云何說現?荅:只爲是現修生門中,義成本有,先在迷心,不說體用。今時始說有彼法身故,知與彼新生,是親先有義疏。如論云,離不離無常,旣言無常不可從,本有上來四義於此緣生,理實通有解云本有及修生本有則旣約理故是無所斷修生及本有修生,則約智故,說斷也。問:章主不思議品疏中,四句與儼師四句何別?荅:別也。此章主則約本有及本有修生,則無所斷約修生,及修生本有,則說有斷也。謂如來藏性本來究竟者,單本有。此如來藏古隱今現者,本有修生。此二句則一種理體故,云無所斷也。無分別智本,無今有者,單修生此無分別智之內,同眞性者,修生本有。此二句則一種智故,論斷義也。問:此章主亦有隨儼師義耶?荅:有也。謂起信別記云:又以本覺成始,更無異法。從此義故,摠名本有。又以始覺契本,方名本覺。若離始覺一切不成。從此義故,摠名修生。又以本取始名本有修生。又以對始覺說本名修生本有已上此則約本有及修生本有則無所斷約修生及本有修生,則說有斷也。問:小相品修生普賢品本有然,亦各有本有修生故,論斷不斷者,是則各當自品具能所治。何故要以小相品智,斷普賢品惑耶?荅:雖二品中,各具本有修生故,論斷、無斷義,然明能治智之一斷、一切斷義者,是小相品明所治障之一障、一切障義者,是普賢品故,不違也。第二現斷惑位中,先現四句斷後,又前下現非但四句。初中問:此四句斷爲同教耶,爲別教耶?荅:一云同教也。今釋是具圓融行布之別教斷也。謂此斷惑分齊等者,牒上圓教所論一斷、一切斷義故云此也。是故欲現上所明斷惑之位故,以四句現之非謂只是同教也。若言四句,是同教者,其上所明一斷、一切斷義,亦同教耶?彼旣不爾,此云何然?是故小相品疏云?此諸煩惱,皆悉除滅者不分現種使習,普滅非別滅。何位滅者。通五位故,云何滅者?如虛空故,本來盡故。解云:准彼釋。此者不分使習現種普滅非別滅者,當於此文不分使習現種,但如法界,乃至一斷、一切斷等也。何位滅者?通五位故者,當於此門初三句也。如虛空故,本來盡故者,當於此文第四句也。若言四句,是同教者,彼文斷惑,亦同教耶?彼旣別教,此亦爾也。問:道身章云:常元師問同教中,約證初地斷惑,約位十解斷惑約行實十信斷惑約法實無所斷又別教一斷一切斷爲一惑耶爲異惑耶已上約此文則四句是同教義何不爾耶?荅:此文義者,同教是所寄三乘,是下四教故,爲同教也,非謂所現四句,是同教也。謂三乘中,約證初地斷惑故一乘寄彼,現初地一斷、一切斷也。於三乘中,約位十解斷惑故,一乘寄彼現十解一斷、一切斷也。於三乘中,約行十信斷惑故,一乘寄彼現十信,終心一斷、一切斷也。於三乘中,有無所斷義故,一乘寄彼有第四句義。是故寄彼三乘四句之義,現此一乘四句義也。故同教者,是所寄三乘四句之義。此中四句當於所現別教也。故約初地解位十信三位之中,一斷、一切斷之義,而云又別教一斷、一切斷也。問:儼師明難疏云:此下生解斷障無有四義:一約生信,卽初地斷使種;二約位,卽解位使習種俱斷;三約行,則十信滿心使習種俱斷;四約實,卽本來不須斷,自體淨也。又問:斷惑相云何?荅:非初非中後,前中後取故,云何斷?如虛空。此是三乘共學義已上解云此明難四句之義亦是別教耶荅爾地。問:若爾與此章四句同耶?荅:有同,有異也。言有同者,二處是別教故,言有異者,此章四句,竝是通圓融行布之別教義也明難疏義初句但是行布後三句與此同故小有不同也。問:何故明難四句中,初句唯是行布後三句,是通圓融行布之別教耶?荅:明難四句標下十信、三賢十地中,所治也。謂明難疏云:二出所治一嗔障百法明門之障十住云二明所治是前百障應位斷故十行云二所治一乘如前解迴向云二弁所治一乘如前准已上十信三賢不分使習通斷百障故第二第三句所摽是通圓融行布之別教義也十地云明所治謂正使煩惱業報及性三障上心種子已上正使煩惱業報者卽十地所斷性三障等者,卽普賢性起所斷也。正使者,初地中,正使種子永斷故。煩惱者,二十二無明及十一障也。業者,二十二業也。報者,四種變易報也。此則分正使、習氣故,卽當於行布同教。是故初句摽此義,云約生信,則初地斷使種故,是行布同教也。問:何故平等因果所治爲性三障耶?荅:古辭云:無分別智所治爲事障,普賢性起智所治爲性三障。問:何者事障,何者性障耶?荅:迷染爲淨,迷淨爲染,名爲事障,謂染淨自性各別之執,名爲性障。是以以染爲可捨,以淨爲可取,遂斷染現淨者,名無分別智之斷障也。染則德故,染本無斷淨。無更現者,爲普賢性起智之斷障也。古云:兩智斷障,猶如擧火覓暗,明在暗無者,無分別智之斷障。擧火覓暗,暗卽是明,更無所照者,性起智之斷障。問:若爾本無所斷,何云性三障爲所治耶?荅:旣用修生智斷暗,得明之曰前所斷暗本,卽是明更無新,斷新得。是故謂斷暗得明之心,名爲所治,是以約謂爲斷暗得明之心,名爲性三障也。猶如從十信位,起始覺智,經三賢十地,至十地,終心除生相夢,始覺圓現反願始覺,卽同本覺、始覺想泯。如是以修生智破暗得明,旣得明之日知前所破暗本,卽是明暗本不動,明無新得,謂除暗得明之心不生之義爲斷障也。問:何故三賢所治,約通圓融、行布之別教十地不爾耶?答:隨經文相故爾也。謂三賢所說普賢德現三乘相,隱於十地中,反此故也。是故儼師迴向品疏云初地以上經本無通三乘立其教義文相多同故不須料簡者,是此義也。問:明難四句終云此是三乘共學義者,因何作此言耶荅非初非中後前中後取故云何斷如虛空者,是三乘所論故,云三乘共學也。問:若爾非初非中後前中後取故,如虛空者,唯是行布同教耶?荅:通於圓融、行布也。問:若爾何言三乘共學耶?荅:非初非中等言雖不㝵別教,亦通三乘共學故也。問:若爾本實別教,亦爲三乘共學耶。荅:不爾也。本實之中位,位攝佛果義三乘所無故,非共學非初非中後,如虛空。如是斷義,亦是三乘所明故,云共學也。問:道申章云問有文云一斷、一切斷有文,云實無所斷已上有文者是何文耶荅此章文也謂有文云一斷一切斷者,是初三句。有文云:實無所斷者,卽第四句也。問:初三句中,不言一斷、一切斷,何故?有文云:一斷、一切斷者,是初三句耶?荅:一約證,謂十地斷二約位十住,以去斷等者,弁前一斷、一切斷之位故,云爾也。又前三乘諸門斷惑等者,隨其三乘所托之位,若一斷、一切斷者,卽是一乘斷位故,非但四句也。謂且約十八門寄對之中,初門比位斷煩惱證位斷所知者,隨門前後故,是三乘斷位,若一斷、一切斷者,卽是別教一乘義故爾也。問:普賢品說嗔障經文之首按向下逬修門中,▼(冂*五)、▼(冂*六)、▼(冂*七)三印,其意云何?荅:古說雖多,今釋五字印中,通弁五教障之名數六字印中,弁實際頓別教斷障之義,七字印中,弁窮實義也。何者五字印中,旣云諸教,弁障故,六字印中,旣云初明嗔障等者擧首爲言欲類現普賢廣大解行法。故七字印中,弁其非法具缺義故也。問:何知五字印中,亦弁一乘障耶?荅:彼五字印云以上諸惑一惑一切惑一斷一切斷此屬一乘教如下說已上者,卽是別教障義也。二同教中問:何故初二門有攝方便,次二門中,無攝方便。此門及二乘迴心,又有攝方便耶?荅:中二叚略無者,准前後章可准知故也,此章中,且隨語便故艹艹論也謂前旣云又前三乘等諸門斷惑若一障一切障,一斷、一切斷,卽入此教。若隨門前後,是三乘等,此擧別教言已上因此而言若約攝方便者隨門前後三乘亦入一乘攝也。二乘迴心章中,以小乘一終教、一始教、一頓教、一攝方便、一別教、一欲成六種說故,幷論攝方便也。餘義准之者,不引餘教准之通矣。第七二乘迴心者,前諸門中,通約大小乘,弁今則習其小行,必向大乘故,次來也。此中有三:一擧數,二別釋,三問荅也。別釋中,一切二乘,皆無迴心等者,道身云小乘性定已前,皆有佛性。何故今云皆無迴心耶?荅:道身章約自宗佛性,今約迴入大乘義故,不同也。二或一切,皆迴心等者,問:初明小乘,次明始教可當,次第,何故小乘之次,明終教耶?荅:且約句數次第,如是立也。謂對小乘一切無迴之義故,次明終教一切竝迴之義也。又對始教,亦迴亦不迴之義故,次明頓教無迴、無不迴之義,但隨宜立耳。此中二先。正明教意,二問下問荅。初中三。初摠摽,二以悉有下弁因緣三。是故下結也。弁因緣中四:一內因,二外緣,三無明未盡,四涅槃不究竟也。問:荅中有二。重初會違文,後弁迴心時分齊也。初中現揚論等者,彼第十七卷云:若成就阿賴耶識,亦成就轉識耶,設成就轉識,亦成就阿賴耶識耶?荅:此應作四句,謂或成就阿賴耶識,非轉識,謂無心睡眠、無心悶絕入無相定,入滅盡定。生無想天者,或有成就轉識非阿賴耶,謂住有心位,阿羅漢、獨覺不退轉菩薩及與如來。或有俱成就,謂所餘住有心位者,或有俱不成就,謂阿羅漢、獨覺、不退轉菩薩與如來入滅盡定若處無餘依涅槃界已上瑜伽同此說今引第四俱不成就句。問:云本識轉識,皆滅無餘,以何爲因生心修道耶?荅:中有二。先會瑜伽現揚文,二又由上下荅上,以何爲因之問也。後問荅,荅中有二。先摠荅二遲者,下別荅。此中有二。先引楞伽經,現其摠說二。若差別下現其別說,初中問:起信疏云:然此利鈍遲疾,諸聖教略有七位。謂八萬、六萬、四萬、二萬、一萬等劫如次,以配四果及獨覺人。此五如彼涅槃經說第六位。如楞伽云,三昧酒所醉,乃至劫不覺醉消,然後覺得佛無上身。此亦利於前不經萬劫。第七位如法花經說。 云云乃至唯以佛乘而得滅度解云此最利根亦捨分叚入涅槃已則於佛土受變易身受佛教化入於大乘已上 疏以楞伽經文爲第六位,異於涅槃五位。何故今章爲摠相耶?荅:彼經文但言乃至劫不覺不限劫數故,於此辭中含於八萬乃至一萬故云此文但摠相說。又旣唯云乃至劫不覺不言萬劫故,設經一劫,亦爲乃至劫不覺故,起信疏中,約此義云利於前也。須陁洹人亦復不定等者,若約自宗,雖云性定,然此教義無定性故,問:須陁洹人等,竝得羅漢果,後入無餘,何云湏陁洹人等耶?荅:道身章云:問:旣到羅漢,然後方入無餘三昧,何言初二、三果手?荅:實俱羅漢而後初爲名耳。所謂始發小心,現身得初果,第二生後得第二以上者,爲初果性,若現身至第二果者,爲第二果性,若得第三果者,爲第三果性。若現身中,至得第四果者,名羅漢性耳。已上是故竝得第四果然後入無餘滅經爾許劫然約現身得果之義名初二三果耳此五人至發阿耨菩提心者於無餘中經若于劫,迴入十信之時,卽名發心也。四非迴非不迴文殊般若經者彼云如是說法無有衆生已得涅槃今得當得何以故無有決定衆生相故云云等准知之六或俱絕前五此有二種一一切二乘。至無可迴者,以二乘行,心方普賢行,心如以螢光方日月故,以普賢眼至皆以究竟者,以普賢眼,望於二乘,本來究竟,更無復迴。此二釋中,決言大德云:此二道理唯頓別教中論耳。論二乘迴心之義,是窮實故,始門終門二迴心義,亦窮實也。今釋此二,釋竝約頓园別教論也。問:若爾二乘旣無可迴何故立其二乘迴心章,弁迴心義耶?荅:雖約行心無分,而有入普法之時故。亦有迴心之義雖以普賢眼見本來究竟,以彼而言實不知故有迴執心進入之義故亦弁迴心義也問章主入法界品疏釋大聲聞云大者弟四果故又是不動性故諸聲聞中最尊大故如鶖子等又此等竝是迴向大乘之聲聞故云大佛地論云如實義者,不定種性聲聞得小果已,趣大菩提故,名爲大。解云:以其未入园教一乘普賢法故是故下文云如盲聾也又釋此等,竝是在菩薩示現作聲聞,如新譯花嚴不思議境界分中說以現此法深勝故如聾盲也已上此三釋何別荅初則約小乘釋次則約三乘第三約一乘釋也。問:約一乘釋中,此等竝是大菩薩者,當於此中,以普賢眼見,一切衆生皆已究竟也。現此法深勝故,示現如聾盲者當於此中卽空無可迴義耶荅一云爾也問實是菩薩現聲聞故卽聾盲時是大菩薩何故現聲聞者卽空無可迴耶荅非約別相續聲聞菩薩論唯一種二乘卽實菩薩亦卽是。如聾盲之二乘故。雖實菩薩示現聾盲時,卽空無可迴也是故彼處云示現如聾盲今此亦云如經中如聾如盲者是已上故如是准也今釋此等大菩薩示現作聲聞者雖實菩薩欲現法深勝迹現聲聞故卽聲聞時究竟大菩薩也是故約一乘釋當於此中以普賢眼見一切衆生皆已究竟之義也約三乘釋,約小乘釋,卽當於此中,卽空無可迴之義也。問:何故一種,如聾如盲之二乘中,有多義耶?荅:第二釋中,云以其才入园教一乘普賢法故是故下文云如聾如盲故聾盲之義現也初釋則旣約小乘故,聾盲之義,亦現也。是故初二釋當於此中,初釋義也。第三釋中,旣云竝是大菩薩示現,作聲聞故,當於此中後釋義也。問:實是菩薩迹,似聲聞之二乘與卽空無可迴之二乘,何別耶?荅:蜼一種二乘以普賢眼見之則,實是大菩薩現法深勝故,示如聾盲。約行心見之則實,是聲聞,卽無分故卽空無可迴也道身章云衆生業起無非普賢迴成故無普賢不自在,得普賢迴成,無非衆生業起故,非普賢無苦作苦故,惱衆生矣。解云:衆生業起,無非普賢時,唯是普賢也。普賢迴成無非衆生業起時,普賢實是衆生,此中道理當知亦爾也問迴心入於普法之時不轉其名入耶轉二乘名得菩薩稱然後入耶?荅:古有二義、三施設也。言二義者一云:約同教則有從自乘入也約別教則轉二乘名而後方入也一云若約同教,若約別教,竝轉後入也。言三施設者。一云:儼師相德約同教,則可從自乘入也。約別教者,轉後方入也。章主則若約同教,若約別教竝,轉方入也一。云:三師竝約同教,則可從自乘入,約別教,則竝轉而後方入也一云三師若約同教若約別教竝轉而後入也。今釋第三說爲正也。何者轉爲文云:餘大乘經有聲聞衆,爲所被機,亦引二乘,令其入大唯獨此經,衆無聲聞之機文無迴小之說已上故爾也問轉爲者此但約別教言耳若約同教則可從自乘入於花嚴,何不爾耶?荅:若爾難者,約同教,則此經之中,衆有聲聞之機文,有迴小之說耶?旣不爾故,設約同教轉後,方入也問就二乘中有利鈍故若利人則起彼三乘等法本來不異別教一乘之解,可從自乘,卽入此經門相,何不爾耶?荅:蜼是利人轉後方入也。何者法界品疏云:問:只可聞而不信,如文殊行經中,五百聲聞不信受等,何故此中摠不聞見?荅:彼是三乘逐機說故亦令得聞今此一乘逐法高出故不能聞已上聞尚不得況起解而入耶?故不爾也。問:道身云以二乘,爲展轉所爲者,據花嚴別教,若入露地,同教及花同問教可有二乘,各從自乘迴入二同教已上約此文則可從自乘入於花嚴同教何不爾耶荅雖云二乘非實二乘故,不違也。何者道身,亦云此機人實菩薩從前二乘來故加二乘名已上故爾也問花嚴別教花嚴同教露地同教,云何別耶?荅:別教者通頓园一乘也。花嚴同教者實際頓中行布也。露地同教者大白牛車也。問:花嚴別教唯园融耶通园融行布耶?荅:通也。問:若爾何故花嚴同教,是行布耶?荅:若約通融布之別教,則捨二乘,名得菩薩,稱然後方入故。是故云以二乘爲展轉所爲者,據花嚴別教也,若開行布爲同教,則此亦雖實菩薩所入,而未永捨二乘,名之人所可入處。故云從前二乘來故,加二乘名耳。約此義云若入露地同教及花嚴同教可有二乘各從自乘迴入二同教也問加二乘名者何位中加耶荅一云:十信前九心中加也。何者三乘中,至信滿堪任位菩薩種性,方得決定前九心中,種性未決定。是故二乘依前九心,迴入一者,可云從自乘入也。若至堪任位,迴入者,方云得第三菩薩乘迴入故也。一云:終教地前加也。謂依地前迴入,一者有二乘習故,云從自乘入也。依地上迴入,一者與直進菩薩根性等故,方名從菩薩乘入也。何者此章云:若言彼智增上者,有小乘習怖諸煩惱故。永伏者,若於地前未訂眞如,可約本習,容有此類,以未純熟故,初地以上行解純就同訂、同行、同修、同斷,如何得有?如是差別已上故爾也令釋露地同教中加也謂二乘之人起所流解依露地同教後,入花嚴同教,者實是菩薩而從前二乘來故,加二乘名耳。問:若爾花嚴同教,中亦加二乘名耶?荅:爾也。謂道身云此機人,卽菩薩故,無二乘相耳,而實言有。從二乘,至此機熟處有。從菩薩至此機熟處,因此而云實是菩薩從前二乘來故,加二乘名耳已上機熟處者是花嚴同教故爾也問入二同教者一相續耶?荅:爾也。謂若入露地同教,則入花嚴同教,若入花嚴同教者,必從露地同教故也。問:依露地同教之人入花嚴同教時,以流解入耶,更起目解而入耶?荅:如初謂二乘之人起所流解,入露地同教,而不捨此解,入花嚴同教。猶如入於外門之人必望中門,而立。如是入於露地,同教之人必望花嚴同教故,爾也。問:立花嚴同教之人入別教時起何解耶荅起目解入也問要以目解入別教者立露地同教之人何故不能亦起目解直入別教耶荅此亦如前。若八法花同教不入花嚴同教者,無有是處。是故要依花嚴同教,更起目解入別教也。問:依花嚴同教起目解人於十根中,屬何根耶?荅:屬第八根,謂第八根,則雖立中三乘,起目解也。而花嚴同教中,起目解之人與彼解同故,亦屬第八。如第七根中,雖云三乘法根不定故,堪可進入同教一乘,而小乘中,起所流解入同教者,亦屬第七,此亦爾也。三問荅中,一乘攝方便中,迴心者,當於終門三乘中,迴心者,當於始門也。問:終門迴心所立之位,卽是熟頓攝方便者,通於小乘,何言同耶?荅:終門立位,雖是熟頓義,通初教攝方便者,雖通四教小乘,要依三乘教方入一乘故不別也。問:攝方便者,唯下四教,何故於文殊邊迴心卽得十大法門等耶荅約其立位爲攝方便非謂、入爲攝方便也問若爾三乘中迴心者唯約立位爲三乘所人非是三乘耶荅三乘中迴心者通約立位及其所入名爲三乘故不例也。餘如別說者,指儼師迴心章也。第八佛果義相,者前從心識,至斷惑,通弁五乘,修行軌,則次余二乘迴心之義未知。如是漸悟、頓悟所得佛果故,次來也。此中二先開章門,後別釋於中,二先常、無常中,五初小乘中,無性得佛性等者,佛性論非小乘論,現小乘之事故,引之耳。二始教中,亦無常以離不離故等者,梁論第十四云:尊成就眞如,修諸地,出離乃至論口尊,成就眞如。釋曰:此句明法身自性成就。眞如是無垢淸淨,若在道、前道中,結累未盡,未得名,成就道。後垢累已盡故,名成就等。解云:道前道中,結累未盡,名爲不離,道後結累已盡,名爲離也。有爲無流等者,淨分依他離染故,云無漏從種生故,名有爲也。以無間斷故者,報身也。相續起故者,化身也。三終教中,又彼論云:衆生心淨法身影現等者,義,引起信論文以報、化爲法身影故也。卽常卽無常等具足四句者,或唯無常,是隨緣故,功德差別得成故。或唯常是不變故,功德無不卽眞如故。或亦常亦無常二義無㝵故,或俱非以形奪故,或非四句者,或非無常,是不變故,功德無不卽眞如故。或非常,是隨緣故,功德差別、故。、、、常非無常以形奪故或非俱非以具德故若准摠、前、、、、修生功德亦有四句非四句法身亦爾也謂若約修、功德、、唯無常以修生故或唯常一得以後同眞如故或俱二義無、、或俱爾以形奪故非四句可知若約法身或唯常以隨緣時一、自性故或無常以隨緣赴機故餘句可知若始教中以眞如遍故,智訂眞故者,眞如遍一切法智同眞如故,境智一處,是故云非異也。有爲、無爲不同故者,其猶栗木板,松木板。雖同處,而不同故也。五园教中,約用及至具有常等四句者,三乘約法報化,而明今此約體德用,而弁然體,則德用全體,德用亦爾故,云若體則俱體,乃至用則俱用等。是知與三乘中,三身全、別不同也。若作四句,通三世間故,常有機,則應無機,則不應故,無常具德故,俱形奪故,不俱也。約德乃至亦通常等四句者,本有故,常修生故,無常,以修生之本有,本有之修生故,俱以二句形奪故,俱非也。上二、四義准之,可見者,約用約德之中,唯言有四,不別作故也。以不說爲現故,是常者。若具言者,果海自體當不可說,而以不說爲現故,說卽不說,是爲常也。旣以不說爲現與教相應故,云與阿含相應故,無常也。二明相好中,五二始教中何故智論等者此問意者以化身是報身體上變化起用故不從因生何故化身中出因耶金鏘者惠上菩薩經說:舍衛城中,有二十人復與二十人共爲怨敵時,四十人各爲傷害,伺求方便,承佛威神,尋詣佛所。爲化四十人,嘗有鑯鏘自然來出,欲入佛右足大指鏘在佛前。目連白佛:今拔鑯鏘,着異世界。佛言:以精進力,欲拔鑯鏘者,三千大千世界爲振動不能搖鏘如毛髮許佛往梵天鏘輒隨之還舍衛城,鏘亦在前。如來取鏘,以足蹈上。目連白:佛如來何罪,而獲鏘殃?佛言:昔爲啇主領五百價人,一懷惡心:吾卽害之。是其餘殃四十人聞是謂言:法王尚爾,況於吾等當不受罪乎?悔過自首入平等惠已上言馬麥者本起經云有婆羅門王名阿者達見佛心敬白佛願佛及僧顧我三月夏坐佛與五百比丘一時受請往至其國時,有天魔迷惑。王心耽荒五欲,迷忘供養。比丘乞食極苦難得,有牧馬使信佛,心淨告諸比丘言:知僧飢極而食,皆盡正有馬麥。佛言:此麥自在,應受阿難持麥。傍有一女作餠阿難敬佛情深行水授餠見佛食之悲哽交懷。佛知其意汝能噉否?阿難受而食之滋味非常,實是諸天以味加之欣悅無量悲哽卽除又經云過去久遠世時佛名毘婆葉在盤頭摩跋城有婆羅門名因提耆利慱達四圍及諸筭術、諸戒教五百童子。時王設會請佛供饒精羙。衆有一比丘,名曰彌勒。病不能行食竟。爲病人請食。梵志與嫉云:禿頭沙門!正應食,馬麥不應食。如是甘味之供,舍利弗時波羅門者我身是也已上此是食馬麥之因緣也三十二相亦各出因等者,諸聖教中,有弁三十二相因緣。如瑜伽及智論等故也。荅中卽於此身示勝因果者,小乘之人不見報佛故,於此化身,示勝因果,欲引彼故也。二彼以功德法爲法身者,小乘中,五分功德爲法身故。爲欲引彼,以修生功德爲法身也。五园教中,摩伽陁國寂滅道場等者、問:十蓮花藏世界微塵數相者,是相海品所說故,約晉經,則他化天宮所說也。約新譯者,重會普光所說也。何云寂滅道場耶?荅:約摠處故爾也。第九攝化分齊者,初小乘中,娑婆等者,於小乘中,無十萬淨土故也。法性土至不說者,此卽自住處非攝化土。今唯弁攝化等故爾也。如梵網經等者,問:彼經中,千摩醯首羅有千釋迦化百億釋迦故,有千百億釋迦於始教中,立此千百億釋迦耶?荅:一云:始教中,一摩醯首羅天,佛爲實報,此佛所放百億釋迦爲化,不說千百億釋迦也。今釋於始教中,千摩醯首羅天中,千釋迦爲實報。此千釋迦所放千百億釋迦爲化也。何者問荅初卷云:依三乘始教,於一三千所有化佛等,竝化佛母摩耶、眷屬等,卽亦非實諸三千界處,亦有別佛化義同前。解云:一三千界所有化佛等,一摩醯天佛所放百億化佛諸三千界處。亦有。別佛化義同前者,是餘百億化佛故爾也。問:若爾終教云何?荅:若約終教蓮花臺本源舍那,是實報佛千釋迦及百千億釋迦竝爲化佛也。寄法現示如第二會初者,名號品中,以種種身名等,寄現玉海故也。隨一世界,卽約麤細等者,大菩薩,則對娑婆而見花藏,衆生對花藏,而見娑婆故,隨一世界感界人見爲界感海人見爲海故云爾也第十佛身開合金光明經中,四智攝三身等者,彼經無現文,而以義引也。彼經云:依勝拔道根本心盡,卽現法身解云根本心者阿賴耶識轉此識現大园鏡智故也。合具前四以備德故,者,准餘處,則應爲攝方便,然下云:此二句如性起品說故,竝是別教一乘之義非攝方便也。故性起品疏云:釋有多義。一云:理實佛地有淨八識,但云智者取强說等云云一云理實佛地唯是大智不說八識及餘心法等云云一云佛地大智內同眞性以照卽寂故云云一云:佛地大智,卽理卽智,卽王卽數。或開或合,以前三說不相離故,無障無㝵具十智故。解云:合具前四者,同於彼文,三說不相,離俱絕前五者同於彼文,無障無㝵也。生身、化身等者,毘曇說也。釋華嚴教分記圓通鈔卷第五
균여 지음
김두진 번역
9) 모든 가르침의 소전차별(所詮差別) ③
【記】 제6 단혹분제(斷惑分齊)는 어떤 사람은 “소승에 의거하거나 삼승에 의거한다면, 두 가지 뜻을 가진다”고 하였다. 첫째는 약위멸혹상(約位滅惑相; 지위를 잡아서 미혹을 멸하는 상)이고, 둘째는 기혹현위상(寄惑顯位相; 미혹에 의탁해서 지위를 드러내는 상)이다. 앞의 뜻은 만약 시교에 의거하면 삼승이 미혹을 끊는 차별을 갖추고 있으니, 이는 시교가 삼승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장(障)1)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소위 번뇌(煩惱)와 소지(所知)이다.
먼저는 이승의 번뇌장2)을 끊음을 변별한 것이니,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장(障)의 명수(名數)3)이고, 둘째는 미혹을 끊어서 과를 얻음[斷惑得果]이다. 앞의 것에 번뇌가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분별(分別)과 구생(俱生)4)이다. 총체적으로 열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탐(貪), 둘째는 진(瞋), 셋째는 무명(無明), 넷째는 만(慢), 다섯째는 의(疑), 여섯째는 신견(身見), 일곱째는 변견(邊見), 여덟째는 사견(邪見), 아홉째는 견취(見取), 열 번째는 계금취(戒禁取)이다. 이 가운데 네 가지는 오직 분별기(分別起)5)로서 의ㆍ사견ㆍ견취ㆍ계금취가 그것이다. 나머지 여섯 가지는 두 가지 종류에 다 통한다.
오식(五識)6)은 처음 세 가지 번뇌를 일으킬 수 있고 또한 분별과 구생에도 통하며, 의식에서 사사(邪師)7) 등 삼인을 사용하여 이끌기 때문에 분별이 일어남이 있을 수 있다. 의식은 열 가지로서 그 가운데 네 가지는 분별(分別)이고, 여섯 가지는 앞의 두 가지에 통한다. 말나는 오직 네 가지 번뇌가 있는데 구생이다. 여섯 가지 구생번뇌 중에서 진(瞋)과 변견(邊見)을 제외한 것이니, 진은 선하지 않지만 이 식은 유뷰무기(有覆無記)8) 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종류로서 상속하는 것이 제팔식(第八識)을 반연함으로써 찰나찰나 아(我)를 집착하기 때문에 변견(邊見)9)은 없게 된다. 또한 뒤의 삼견[後三見]과 의(疑)는 삼인(三因)을 빙자해서 생기는데, 이 식(識)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항상 서로 이어져 계속되기[相續] 때문에 제육(第六)에서 인발한 것이 아니고 오식(五識)과도 같지 않다. 이 때문에 오직 네 가지 뿐이다. 제팔식(第八識)은 총체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오직 이숙(異熟)의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10)이기 때문이다. 이 분별과 구생은 모두 삼계11)에 통한다. 진은 욕계에만 속하니, 위의 두 계의 번뇌는 모두 유부무기성이기 때문이다. 분별기(分別起)는 욕계(欲界)의 사제(四諦)에 각각 십사(十使)12)가 있어서 곧 40가지가 된다. 위의 두 계(界)에서 진(瞋)을 없애면, 제(諦)에는 따로 각각 아홉 가지가 있어서 72가지가 된다. 이를 욕계와 아우르면 합이 112가지이다. 구생(俱生)은 욕계에선 여섯 가지를 갖추고, 위의 두 계(界)에선 진(瞋)을 제거하면 각각 다섯이 있으니, 합하며 열여섯 가지가 된다. 앞의 분별과 통괄하면 모두 128가지가 된다.
【문】 앞의 우법소승(愚法小乘) 가운데서는 십사(十使)가 사제(四諦)를 미혹함을 통틀지 못했는데, 어떤 이유에서 여기서는 통틀었다고 것인가?
【답】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삼승(三乘) 중에서 번뇌(煩惱)의 공력(功力)이 점점 넓어지기 때문에 일체를 장애[障]하는 것이며, 둘째, 미혹 등의 뜻이 일체 경계에 통하기 때문이다.
【釋】 제육 단혹분제(斷惑分齊)’13)는 앞에서 이미 소의신(所依身)을 밝힌 뒤에 이러한 신(身)에 의지하여 수행함으로써 장애를 끊음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에 다음에 온 곳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표장문(標章門)이고,14) 둘째로 ‘앞의 뜻’15) 이하는 장(章)에 의지하여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만약 소승에 의거한다면’16)이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다.
【문】 어째서 소승에는 표(標)는 있는데 해석함[釋]은 없는가?
【답】 소승의 단혹(斷惑)과 대승 가운데 이승(二乘)은 같음[同]과 같지 않음[不同]이 있다. 대승 가운데 이승의 단혹(斷惑)을 밝힐 때, 같음의 뜻[同義]은 자연히 드러난다. 같지 않음의 뜻[不同]은 문답17) 중에서 나타내기 때문에 따로 밝히지 않는다.
‘만약 삼승에 의거한다면’18)은 다음과 같다.
【문】 앞의 종성장(種性障)19)에서는 합(合) 속의 삼교(三敎)를 삼승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어떤 이유로 이 장(章)은 시종이교(始終二敎)를 합하여 삼승이라고 하고, 돈교(頓敎)20)를 따로 세운 것인가?
【답】 이 장에선 이미 ‘위(位)를 잡아서 미혹[惑]을 단절하는’21) 것과 ‘미혹에 의탁해서 위(位)를 드러낸다’22)는 것을 밝혔지만, 돈교 중에는 이 상(相)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장(章)에 의지해서 개별적으로 해석함’ 중에서는 시종(始終)의 이교가 곧 이단(二段)이 된다. 시교 중에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는 삼승의 단혹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로 ‘또한 이것의’23) 아래에서는 미혹을 끊은 상[斷惑相]과 미혹의 체성[惑體性]을 변별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는 승수(乘數)와 장수(障數)를 표방한 것이고, 둘째로 ‘먼저 이승(二乘)을 변별한다’24) 아래에서는 삼승단혹(三乘斷惑)을 따로 해석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첫째로는 능단(能斷)의 승수(乘數)를 표방하고, 둘째로는 소단(所斷)의 장수(障數)를 드러낸다.
처음의 것 중에서는 다음과 같다;
【문】 어떤 이유로 앞에서는 시종이교(始終二敎)를 통틀어 들면서 삼승이라고 하고, 지금은 초교(初敎)만을 잡아서 삼승의 단혹 등을 구족(具足)한다고 말하는가?
【답】 비록 시종이교를 합하여 삼승이라고 하더라도 시교 중에서 삼승(三乘)을 구족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두 교[二敎]를 서로 대응한다면, 또한 종교(終敎)25)가 일승(一乘)임을 얻는다.
둘째의 소단(所斷)의 장수(障數) 중에서는 다음과 같다;
【문】 번뇌와 소지, 그리고 인집(人執)26)과 법집(法執)27)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답】 원측[測師]의 『유식소(唯識疏)』 초권(初卷)에서 말한다.28)
“문: 두 가지 집착[二執]과 장애[障]는 어떻게 차별되는가?
답: 안혜종(安惠宗)은 총상(總相)으로 말한 것이라서 두 가지 집착과 장애에 넓음과 좁음이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 종(宗)은 일체유루심(一切有漏心)을 모두 집착이라 이름하니, 곧 두 가지 장애[二障]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약 별상(別相)이라면’이란 것은 번뇌장(煩惱障)의 체(體)가 앞의 칠식(七識)에 통하고 제팔(第八)만을 제외한 것이니, 항상 상(相)이 계속 전전(轉展)하면서도 행상(行相)29)은 미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식(七識) 중에서는 육식과 칠식에서 일어난 아견(我見)을 아집(我執)의 체라고 하고, 그와 상응한 심(心)과 심소(心所)의 법은 하나의 경계[一境]에 반연하기 때문에 서로 쫓아서 집(執)이라고 설한다. 독두(獨頭)30)와 탐(貪) 등은 아(我)을 계교하지 않기 때문에 번뇌장이라 하더라도 아집은 아니다.
소지장(所知障)의 체(體)도 칠식(七識)에 통하지만 오직 제칠(第七)만을 제외한다. 논(論)31)에서 오직 저 사혹(四惑)32)만이 상응하고 삼위(三位)에는 없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능히 장애를 계교하는 체가 곧 법집의 체와 넒음과 좁음이 없으니, 이 모든 법에 체용이 있는 것은 모두 집이기 때문이다. 만약 호법종(護法宗)이라면, 집은 오직 혜성이 맹렬하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법(對法)33)의 제팔(第八)34)에 ‘만약 이것이 집(執)이라면 반드시 혜(惠)이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장애는 혜(惠)가 아닌 것을 통틀은 것이다. 소지(所知) 등을 덮는 것을 장(障)이라고 설했기 때문에 이 상대를 말미암아서 문득 이구(二句)를 이루는 것이니, 소위 만약 집(執)이라면 반드시 장(障)이라서 스스로 유(有)인 것은 장(障)이지 집(執)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혜(惠)를 없앤 나머지 심법(心法)35)의 미혹함[惑]이라서 다시 혜(惠)가 있는 것은 장(障)이지 집(執)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오식신(五識身)이 혜(惠)에 상응함과 같다.”
그 소문(疏文)에서 상세히 볼 수 있다.
별석(別釋) 중에 나아가면, 첫째로는 이승(二乘)의 단혹(斷惑)을 해석하고, 둘째로 ‘직진(直進)’36)의 아래에는 보살(菩薩)의 단장(斷障)을 해석한다. 앞의 것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정확히 밝힌 것이고, 둘째로 ‘그러므로 위의’37) 아래에서는 우법(愚法)과 다름을 나타낸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번뇌장을 끊고, 둘째로 ‘그 소지장’38) 아래에서는 소지장(所知障)을 기준으로 하여 단(斷)과 부단(不斷)을 말한다. 앞의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장문(章文)39)을 표방하고, 둘째로 ‘앞의 것 가운데’40)의 아래에서는 문(門)에 의거하여 따로 해석한 것이다. 이 가운데 장(障)의 명수(名數)를 해석한 것과 미혹을 끊어서 과를 얻는[斷惑得果] 것을 이단(二段)이라고 한다. 장(障)의 명수 중에는 두 겹[重]이 있으니, 첫째는 간략함으로서 오직 분별(分別)과 구생(俱生)뿐이며, 둘째는 열어서 십사(十使)가 되고, 셋째로는 넓힌 것으로서 백이십팔(百二十八)이 되니, 곧 삼단(三段)이 된다.
【문】 처음의 중(重)에서 분별과 구생이 그 이름을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답】 『유식론』의 제일(第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구생아집(俱生我執)은 무시(無始) 이래로 허망(虛妄)하게 훈습하는 내인력(內因力)41)이기 때문에, 항상 몸[身]과 함께 한다. 그리하여 사교(邪敎)와 사분별(邪分別)을 기다리지 않고서 저절로 전전하기 때문에 구생(俱生)이라고 부른다. 또한 분별아집(分別我執)은 현재의 외연력(外緣力)42)을 말미암기 때문에, 몸[身]과 함께 하지는 않는다. 사교와 사분별을 기다린 뒤에 바야흐로 일어나기 때문에 분별(分別)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기를, 사사(邪師)는 외도(外道)의 사사(邪師)이고, 사교(邪敎)는 외도(外道)에서 설한 전적(典籍)이다. 사사유(邪思惟)43)는 사교에 의거하여 사유(思惟)하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견(邪見)ㆍ견취(見取)44)ㆍ계금취(戒禁取)45)와 의(疑)46) 등은 사사(邪師) 등의 삼인(三因)에 의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분별이라고 한다.
둘째로 열어서 십사(十使)가 되는 것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십사를 배열한 것이고, 둘째로 ‘그 가운데 네 가지[四種]’47)의 아래에서는 분별(分別)과 구생(俱生)을 잡아서 다름[異]을 판별하였다. 셋째로 ‘오식(五識)을 일으킨다’48)의 아래에서는 식(識)을 잡아서 논한 것이다.
첫째 가운데 ‘총괄하여 열 가지[十種]가 있다’49)는 것은 아래의 분별과 구생에 나아감을 상대하여 그 별이(別異)를 나타내기 때문에 ‘총(總)’이라고 말한 것이다.
【문】 이 십사(十使)는 오로지 번뇌장이 되는가? 아니면 두 장애[二障]에 통하는가?
【답】 성스러운 가르침이 일정하지 않으니, 『유가(瑜伽)』50)와 『잡집(雜集)』51)에서는 오직 번뇌장이라고 하였으며, 지금은 이 뜻을 따르기 때문에 ‘번뇌장에 열 가지가 있다’52)고 한 것이다. 『유식론』과 『불지론(佛地論)』53)에서는 두 장애[二障]에 통한다고 하니, 이를테면 『유식론』54)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번뇌장이란 소위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실아(實我)인 살가야견(薩伽耶見)55)으로서 상수(上首)를 삼은 백이십팔근본번뇌(百二十八根本煩惱)와 그 부류의 온갖 수번뇌(隨煩惱)이다. 이것들은 모두 유정(有情)의 신심(身心)을 어지럽히고 괴롭게 해서 열반을 능히 장애하므로 번뇌장이라고 부른다.
소지장(所知障)은 소위 변계소집의 실법(實法)인 살가야견으로서 상수를 삼은 견(見)과 의(疑)와 무명(無明)과 애(愛)와 에(恚)와 만(慢) 등이다. 소지(所知)의 경계와 무전도성(無顚倒性)을 덮어서 보리(菩提)를 능히 장애하므로 소지장이라고 한다.”
풀어서 말하면, 백이십팔 근본번뇌를 모두 번뇌장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십사(十使)는 번뇌장에 통하게 된다. 소지장 가운데 견(見)은 오견(五見)이요, 애(愛)는 소위 탐이며, 에는 곧 진(瞋)이고, 의(疑)와 무명(無明)과 만(慢)은 이름과 같기 때문에 십사는 또한 소지장에 통하게 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지엄56)은 “번뇌와 소지의 두 장애[二障]를 분별하여 번뇌는 오직 번뇌일 뿐이며, 수번뇌(隨煩惱)도 또한 그렇다”고 말하였는가?
【답】 아래에서57) 또한 이르기를, “만약 상성문(相成門)을 잡는다면 두 장애에 통하게 된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불지론』과 『유식론』에서 두 장애[二障]에 통한다고 한 것은 상성문을 잡았기 때문에 서로 다르지[相違] 않은 것이다.
십사(十使)는 열고 합함[開合]이 같지 않으니, 이를테면 『유식론』58)에서는 오견(五見)을 합(合)하여 하나로 삼기 때문에 오직 여섯 가지가 있을 뿐이지만, 그러나 『유가(瑜伽)』59)와 『잡집(雜集)』60)은 오견을 열기[開] 때문에 십사가 된다. 그 본말(本末)을 논한다면 십사는 부정(不定)의 네 가지와 수번뇌(隨煩惱)의 스무 가지에 대하여 근본이 되고, 십사 안에 나아가서는 앞의 다섯[五]이 본(本)이 되고 오견(五見)이 말(末)이 된다.
십사를 해석한 것은 원측(測師) 스님의 『유식소(唯識疏)』와 같으니, 신견(身見)61)은 몸[身]을 나[我]라고 집착하기 때문이요, 변견(邊見)은 유무(有無)와 단상(斷常)을 계교한 것으로서 이를테면 유(有)에 집착해서 무(無)를 폐하고 무에 집착해서 유를 폐하여 한 쪽에 집착하기 때문에 변견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견(邪見)은 인과(因果)를 배척해서 없애기 때문이며, 견취(見取)는 자견(自見)으로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요, 계금취(戒禁取)는 계가 아닌 것으로써 계(戒)를 삼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우계(牛戒)ㆍ구계(狗戒) 등을 실계(實戒)라고 여기는 등이다.
둘째로 ‘분별과 구생을 잡아서 다름[異]을 변별한 것’ 중62)에서 네 가지는 오직 분별일 뿐이고, 여섯 가지는 두 가지에 통하기 때문에 분별(分別)에는 열 가지가 있으며, 구생에는 여섯 가지 있으므로 합하여 열 여섯 가지를 이룬다.
셋째로 ‘식(識)을 잡아서 분별한 것’ 중63)에 오식(五識)에는 세 가지가 있고, 의식(意識)에는 열 가지가 있으며, 말나(末那)에는 네 가지가 있기 때문에 합하면 열 일곱 가지가 된다. 만약 분별과 구생을 나눈다면, 의식의 분별이 일어남에는 열 가지가 있고 구생에 여섯 가지가 있다. 오식의 세 가지 가운데 각각 분별과 구생이 있기 때문에 여섯 가지가 된다. 말나에 오직 네 가지가 있으니 구생을 합하면 스물 여섯 가지가 된다.
‘의식(意識)을 사용하는 가운데 삼인(三因)에 이끌림을 말미암기 때문에’64)라는 것은 오식(五識)을 이루어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오식은 오직 오경(五境)에 대한 것일 뿐 스스로는 분별이 없지만, 그러나 삼인을 갖춘 의식은 오식을 똑같이 반연하기 때문에 오식 가운데 또한 분별을 일으킴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의식은 열 가지를 갖추었다’65)라는 것은 의식이 곧 강분별식(强分別識)이므로 열 가지를 모두 일으키는 것이다. ‘진(嗔)은 오직 불선(不善)일 뿐이다. 이 식(識)은 유부무기(有覆無記)이기 때문이다’66)라는 것은 말나(末那)가 염오식(染汚識)67)으로서 성도(聖道)를 뒤덮어 장애하기 때문에 유부(有覆)라 하며, 따로 선악을 기억함이 없기 때문에 무기(無記)라고 이름하니, 그러므로 식은 곧 유부무기이고 진(嗔)은 곧 불선(不善)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우이일류(又以一類)’68)라고 한 것에서, 변견(邊見)은 유(有)에 집착해서 무(無)를 폐하고 무에 집착해서 유를 폐하여 오직 한 쪽만을 볼 뿐이요, 말나는 오직 제팔(第八)을 나[我]라고 여김을 반연할 뿐이기 때문에 변견은 없는 것이다.
【문】 오직 안을 반연하고 밖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곧 이는 변견(邊見)인데, 어째서 변견이 없다고 하는가?
【답】 두 변[二邊] 가운데 그 하나를 보기 때문에 변견이 된다. 말나(末那)는 오직 안을 반연하기 때문에 변견이 없는 것이다. ‘우이후삼견(又以後三見)’69) 등은 말나가 삼인(三因)에 의거하지 않기 때문에 분별을 일으킴이 없는 것이다.
‘우유항상속(又由恒相續)’70) 등은 반드시 집착[執]을 조복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의문을 가지고 말하기를, “오식(五識)은 비록 분별하지 않더라도 삼인(三因)을 의식을 갖추어서 똑같이 반연하기 때문에 또한 분별을 일으킴이 있다고 하였으며, 그렇다면 말나가 비록 의식을 분별하지 않더라도 똑같이 반연하기 때문에 또한 분별을 일으킴이 있는 것이다”고 하였으며, 그러므로 지금 답하기를, “말나는 항상 상속하여 반연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제육(第六)71)에 이끌린 바가 아니므로 오식과는 같지 않다”72)고 하였다.
‘제팔식(第八識)에는’73)이라고 한 것은, 원효[曉師]74)가 말하기를, “제팔식 중에서는 장(障)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를테면 제팔은 백정무기식(白淨無記識)이기 때문에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 장주는 “만약 시교(始敎)를 잡는다면 뇌야(賴耶) 중에서 장(障)은 일어나지 않고, 종교(終敎)를 잡는다면 뇌야 중에서도 또한 장(障)은 일어난다”고 하였다.
세 번째로 ‘넓게는 백스물여덟 가지가 된다’고 한 것은 경문에 나타나서 알 수 있다. ‘어떤 이유로 앞의 우법소승(愚法小乘)’75) 등은 소승 가운데 구십팔사(九十八使)의 뜻을 가지고서 이 물음을 제기한 것이니, 이를테면 원효의 『이장장(二障章)』76)에 이르기를, “셋째로 구십팔사문(九十八使門)을 밝힌 것에서 견도소단(見道所斷)77)에는 여든여덟 가지가 있고, 수도소단(修道所斷)78)에는 열 가지가 있으니, 총괄해서 구십팔사(九十八使)가 된다. 여든여덟 가지라는 것은 이른바 욕계(欲界)의 고(苦)의 아래에 열 가지가 있고, 도(道)의 아래에 여덟 가지가 있는 것이다.
소위 ‘두 가지 견[二見]을 없앤 나머지 이제(二諦)’ 아래는 각각 일곱 가지[七種]가 있으니, 말하자면 두 가지 견을 제거하고, 계취(戒取)를 없애며, 위의 두 세계 가운데 각각 진에(嗔恚)를 제거한 것이다. 나머지는 욕계와 같으며, 수단(修斷)에는 열 가지가 있는데 앞의 설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욕계의 고제(苦諦)는 열 가지를 갖추고, 도제(道諦) 가운데는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의 두 가지 견[二見]을 없애기 때문에 오직 여덟 가지가 있을 뿐이요, 집(集)과 멸(滅) 이제(二諦) 중에는 두 가지 견 및 계취(戒取)를 없애기 때문에 오직 일곱 가지가 있을 뿐이니, 합하면 서른두 가지가 되고, 위의 계 가운데서 진(嗔)을 없애면 나머지는 욕계와 동일하여 각각 스물 여덟 가지가 있으니 합하면 쉰 여섯 가지가 있으며, 욕계를 통틀면 서른 두 가지이기 때문에 합치면 팔십 팔 가지가 된다.
구생(俱生)의 여섯 가지 가운데서 두 가지 견[二見]을 없앤다면 욕계에 네 가지가 있고, 위의 두 계에서는 진을 없애면 각각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합하면 열 가지가 되며, 견단(見斷)의 여든 여덟 가지까지 통틀기 때문에 합하면 구십팔사(九十八使)가 있으니, 그러므로 구십팔사문 가운데 신(身)ㆍ변(邊)의 두 가지 견은 오직 고제를 미혹하고, 계취(戒取)는 고제(苦諦)ㆍ도제(道諦)를 미혹한다. 이 때문에 『잡심송(雜心頌)』에 이르기를,79) “고(苦)의 아래에서는 일체를 갖추고, 집(集)ㆍ멸(滅)은 세 가지 견[三見]을 여의며, 도(道)는 두 가지 견[二見]을 제거하고, 위의 계에서는 에(恚)를 행하지 않으니, 어떤 이유로 지금 대승(大乘) 가운데서 십사(十四)는 사제(四諦)를 통틀어 미혹하는가?”라고 하였으니, 묻는 뜻은 이와 같다.
대답 가운데 ‘일이삼승(一以三乘)’80) 등이라고 한 것에서 소승번뇌(小乘煩惱)는 오직 인공(人空)81)을 장애하기 때문에 공력(功力)은 넓지[寬] 않은 것이요, 삼승번뇌(三乘煩惱)는 두루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을 장애하기 때문에 넓은 것이다.
‘또한 미혹을 말미암는 등은 그 뜻이 일체 경계를 통틀기 때문에’82)라고 한 것에서 어떤 사람은 “앞의 해석은 능히 장애하는 공능[能障功能]을 잡은 것이고, 뒤의 해석은 미혹된 바의 경계[所迷境]를 잡았다”고 말하였으나, 지금의 해석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앞의 해석은 대승(大乘)이 소승(小乘)과 다르기 때문에 번뇌가 넓어서 일체를 널리 장애하는 것이고, 뒤의 해석은 대승과 소승을 묻지 않고 십사번뇌(十使煩惱)가 모두 무명(無明)을 전도(顚倒)의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전도의 근본인 무명은 사제(四諦)를 통틀어서 미혹하기 때문에 말(末)이 본(本)을 쫓아서 일체의 경계를 통틀어 미혹하게 되지만, 그러나 소승은 행(行)에 대하여 미혹을 설하기 때문에 오직 아흔 여덟 가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원효가 이르기를,83) “십번뇌(十煩惱)는 총괄해서 세 가지로 나누니, 이른바 전도의 근본과 전도의 체(體), 전도의 등류(等流)이다. 전도의 근본은 말하자면 무명이며, 전도의 체는 말하자면 살가야견(薩迦耶見)과 변견(邊見)의 일분(一分)과 견취(見取)와 계취(戒取), 그리고 탐(貪)이며, 전도의 등류(等流)는 앞의 것을 제외한 나머지이다.84)
전도의 근본인 무명에 또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소위 상응(相應) 및 독행(獨行)이다.85) 독행무명(獨行無明)은 소위 탐(貪) 등의 모든 번뇌가 얽힘을 말하는데, 다만 고(苦) 등 모든 제(諦)의 경계 속에서 이치대로 뜻을 짓는 힘을 말미암지86) 않기 때문에 덮고 가로막고 어둡고 어리석은[覆障暗昧] 심법(心法)을 간별해서 실답게 알지 못하니, 이를 이름하여 독행무명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에서 만약 바르지 않은 작의(作意)를 말미암아서 고제(苦諦)를 추구(推求)한다면, 덮고 가로막고 어둡고 어리석음[覆障暗昧]을 실답게 알 수 없다. 이 무명(無明)에 의거하여 받은 것[受者]을 헤아린다면, 이 아견(我見)을 쫓아서 나머지 미혹[餘惑]을 일으킴을 갖추는 것이니, 이와 같은 열 가지는 모두 고제를 미혹한다. 만약 집제(集諦)를 추구한다면 역시 실답게 알 수 없으니, 이것에 의거하여 근본을 삼아서 작자(作者)를 헤아린다면, 이러한 열 가지가 모두 집제를 미혹한다.
이 두 가지는 바로 인연이 의지한 곳을 미혹했기 때문에 멸도(滅道)의 두려움을 낳지는 않는다. 또한 이치대로 뜻을 짓지 않음을 말미암아서 멸제(滅諦)를 추구한다면 실답게 알 수 없으니, 이 무명(無明)에 의거하여 청정한 자아를 헤아린다면, 이것이 우선이 되어서 나머지 미혹을 갖추어 일으키고, 이와 같은 열 가지는 모두 멸제를 미혹한다.
도제(道諦)를 추구하는 것도 실답게 알 수 없으니, 이 무명에 의거해서 아는 자와 보는 자를 헤아린다면, 이들 열 가지는 곧 도제를 미혹한다.
이 두 가지의 무명(無明)이 일으킨 번뇌는 도리어 멸도에서 두려운 생각을 낳으니, 그 근본대로 제의 이치[諦理]를 추구하지 않고 곧바로 오온(五蘊)을 반연해서 아(我) 등을 헤아리게 되는데, 이와 같이 일체가 모두 고제를 미혹한다. 이 뜻을 말미암기 때문에 사제(四諦)의 아래에는 각각 열 가지의 번뇌의 미혹된 집착이 있으니, 『유가(瑜伽)』87)에서 설한 바와 같다”고 하였다. 지금은 뒤의 해석이 합당하다.
【記】 두 번째 단혹득과(斷惑得果)는 우선 분별을 끊는 것인데, 세 사람이 있다. 첫째로 만약 묶인 것으로부터 진견도(眞見道)88)에 들어가면, 찰나에 갑자기 삼계(三界)에서의 사제(四諦)의 분별번뇌(分別煩惱)를 끊고 떠나서 예류과(預流果)89)를 얻는다. 둘째로 만약 배리욕인(倍離欲人)이라면, 진도(眞道)에 들어감과 아울러 배리욕(倍離欲)90)을 끊어서 일래과(一來果)91)를 얻는다. 배리욕이라는 것은 소위 범부일 때에 욕계의 수혹(修惑) 아홉 품 가운데 앞의 여섯 품을 조복하여 끊기 때문에 배리욕이라고 하는데, 견도(見道)92)에 들어 갈 때 앞에서 조복한 바를 영원히 끊기 때문에 그 과를 얻게 된다.
셋째로 만약 이리욕인(已離欲人)이라면, 진견도에 들어감과 아울러 아홉 품을 끊고서 불환과(不還果)93)를 얻으니, 『유가(瑜伽)』에서 “견도과(見道果)에 들어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그 응하는 바를 쫓아서 삼과(三果)를 증득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음으로 구생(俱生)을 끊는 것인데, 제육식(第六識)의 구생(俱生)은 구지(九地)에 각각 아홉 품이 있다.
또한 수도(修道)에 나아가는 사람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점차적으로 출리(出離)하는 것으로서 욕계의 아홉 품 가운데 앞의 여섯 품을 모두 끊고서 일래과(一來果)를 얻고, 아홉 품을 모두 끊고서 불환과(不還果)를 얻으며, 위의 두 경계[二界]를 모두 끊고서 아라한과(阿羅漢果)94)를 얻는다. 둘째로 단박에 출리(頓出離)하는 것으로서 초과(初果)를 얻고 나면 단박에 삼계를 끊고 점차 아홉 품을 없애자 곧 아라한과를 얻어서 다시 나머지 과(果)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욕계의 아홉 품의 수혹(修惑)과 위 두 가지 계(界)와 합쳐서 세 가지 아홉 품의 각각 처음의 한 품을 일시에 단박에 끊기 때문에 단박에 삼계를 끊는다고 하고, 내리 아래의 아홉 품은 하나하나 따로 끊기 때문에 점차로 없앤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점차로 끊음[漸斷]이 있는가 묻는다면, 삼계법(三界法)을 단박에 반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러므로 『대법론(對法論)』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단박에 출리하는 것은 소위 제(諦)의 현관(現觀)에 들어가고 나서 지(止)95)에 의거하여 아직 정발출세도(定發出世道)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단박에 삼계의 일체번뇌(一切煩惱)를 끊는데, 그러나 품품(品品)마다 따로 끊으면 오직 이과(二果)만을 세울 뿐이니 이른바 예류과(預流果) 및 아라한과이다.”
또한 넓게 『지단경(指端經)』 등을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서 설한 대로이다. 그 말나의 번뇌행상(煩惱行相)이 미세하여 앞의 점단(漸斷)과 돈단(頓斷)의 두 사람이 모두 비상지(非想地)의 미혹과 더불어 일시에 단박에 끊는다.
그래서 『유가』에 이르기를, “말나에 상응하는 임운(任運)의 번뇌는 오직 비상처(非想處)와 더불어 끊기 때문에 일시에 단박에 끊는 것이니, 나머지 미혹을 점차로 끊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문】 어떤 이유로 앞의 우법이승(愚法二乘)에는 단박에 출리(出離)함이 없었는데 이 속에서는 있는 것인가?
【답】 앞의 열등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이는 우법이승이 이러한 뛰어난 지(智)가 없음을 초과하는 것이다. 저 교(敎)의 열등함을 드러내서 방편으로 점차 인도하여 저 수승한 지혜의 욕망을 일으킴으로서 소승을 버리고 대승을 쫓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설을 만든 것이다. 그것은 말나의 미혹을 멸하는 일이 소승에는 없다는 것을 논하고 있으니, 오직 이에 준하여 알아라. 이는 이른바 이승(二乘)이 번뇌장을 끊음이라고 한다.
【釋】 ‘둘째로 단득과(斷得果)’96)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분별을 끊고 뒤에는 구생(俱生)을 끊는다.
처음의 것에 대한 문답이다.
【문】 배리욕인(倍離欲人)과 이리욕인(已離欲人)은 함께 구생을 끊고, 일래과[一來]와 불환과(不還果)를 얻는데, 어째서 ‘먼저 분별을 끊음에 세 사람이 있다’97)고 말하는가?
【답】 만약 대승을 잡는다면, 견도(見道)로 분별을 끊고 수도(修道)로 구생을 단절한다. 그리고 겸하여 수혹(修惑)98)을 단절하기 때문에 일래과 등을 얻을 뿐이다.
이 가운데 처음의 한 사람은 방편위(方便位)에서 견소단(見所斷)99)을 조복하고, 진견도(眞見道)에 들어가 앞에서 조복한 바를 끊어서 예류과(預流果)를 얻는다. 두 번째 사람은 방편위 가운데 견소단 및 수혹 중 앞의 여섯 품을 조복하기 때문이다. 앞의 여섯 품을 끊는 것은 미처 끊지 못한 것의 갑절이기 때문에 ‘배리욕(倍離欲)’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 사람은 방편위 가운데 견소단 및 수혹의 아홉 품 등을 조복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곧 차제인(次第人)이고, 뒤의 두 가지는 곧 과초(果超)이지 행초(行超)는 아니다.
이 가운데 사구(四句)가 있다. 혹 행과(行果)100)와 더불어 불초(不超)도 있으니, 차제인(次第人)과 같다. 말하자면 이 사람은 방편위 가운데 견소단(見所斷)을 조복하고 진견도(眞見道)에 들어가서 앞에서 조복한 바를 끊어 예류과(預流果)를 얻고, 일래향(一來向)101)에 서서 욕계 수혹(修惑) 가운데 앞의 여섯 품을 끊고서 일래과를 얻으며, 불환향102)에 서서 뒤의 세 품을 단절하고 불환과(不還果)를 얻고, 나한향(羅漢向)에 서서 위의 두 계(界)의 수혹(修惑) 아홉 품을 끊고서 아라한과[羅漢果]를 얻으니, 그러므로 이는 곧 아래의 ‘점차적으로 출리(出離)하는103) 사람’이다.
혹 행과(行果)와 아울러 초(超)도 있으니, 말하자면 이 사람은 방편위 가운데 견소단 및 욕계 아홉 품의 수혹(修惑)을 조복하고, 또한 위 두 계(界)의 사선(四禪) 및 사공(四空)104) 중에서 처음의 삼공(三空)의 장애를 조복하고, 진견도에 들어가서 앞에서 조복한 바를 끊고서 불환과를 얻게 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비상결(非想結)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사과(第四果)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앞의 두 과(果)를 초월하여 제삼과(第三果)를 얻기 때문에 과초(果超)라고 말하고, 비로소 위 두 계(界)의 수혹을 끊어서 아라한을 향하는 일을 짓기 때문에 행초(行超)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 사람은 이리욕인(已離欲人)에 속한다.
혹 행초(行超)와 과불초(果不超)도 있으니, 말하자면 이 사람[人]은 방편위(方便位) 가운데 견소단(見所斷)을 조복하고, 또한 수혹(修惑)의 아홉 품 중에 앞의 다섯 품을 조복하고, 진견도에 들어가서 앞에서 조복한 바를 단절하여 예류과를 얻게 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제육품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래과를 얻지 못해서 과불초(果不超)라 이름한다. 그러나 앞의 다섯 품을 단절하여 일래향사(一來向事)를 짓기 때문에 행초(行超)라고 말한다.
혹은 과초(果超)와 행불초(行不超)도 있으니, 배리욕인(倍離欲人) 및 이리욕인(已離欲人) 등과 같다. 말하자면 배리욕인은 진견도(眞見道)에 들어가서 견소단(見所斷)과 수혹(修惑)의 앞 여섯 품을 단절하기 때문에 일래과를 얻으니, 그러므로 초과(初果)를 초월하여 제이과(第二果)를 얻기 때문에 과초라고 말한다. 그러나 견소단을 단절하여 이미 초과행(初果行)을 짓기 때문에 행불초라 한다. 이리욕인은 진견도에 들어갈 때 견소단을 끊고 또한 수혹의 아홉 품을 끊어서 불환과를 얻으니, 그러므로 앞의 두 과를 초월하기 때문에 과초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앞의 이과행(二果行)을 지었기 때문에 행불초라 한다.
둘째로 구생(俱生)을 끊는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육식구생(六識俱生)을 단절하는 것이고,105) 둘째 ‘말나(末那)’106)의 아래는 말나구생(末那俱生)을 단절하는 것이다.
‘점차적으로 출리(出離)’107)는 앞의 제일구(第一句)에서 밝힌 것과 같고, ‘단박에 출리(出離)’108)는 곧 이향이과인(二向二果人)이다. 말하자면 견도에 들어가서 초과를 얻은 뒤 단박에 삼계를 끊고 바로 나한을 얻기 때문이다. 또한 일향일과인(一向一果人)이 있으니, 이는 곧 대독각(大獨覺)이다. 이 사람은 견도에 들어갈 때 단박에 삼계의 견수번뇌(見修煩惱)109)를 끊고서 처음의 삼과(三果)를 초월하여 나한과를 얻기 때문에 일향일과라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점단(漸斷)이 있는가’110)라고 한 것에서, 어떤 사람은 “단박에 출리하는 가운데 ‘점차 아홉 품을 없애서’111)라는 말로 인하여 물은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지금의 해석에서는 앞의 점차적인 출리로 인하여 물은 것이니, 말하자면 이미 ‘삼계(三界)의 법(法)을 단박에 반연할 수 없다’112)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단박에 출리한다면’이란 것은 단박에 두 계(界)를 반연하기 때문에 그렇다.
‘제(諦)의 현관(現觀)’113)이라는 것에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십육심(十六心) 가운데 제십육심(第十六心)이다”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제십오심(第十五心)이다”라고 하였다.
‘앞의 우법이승(愚法二乘)에는 단박에 출리함이 없다’114)고 한 것은, 앞 문장에서는 우법이승을 변별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앞에서 ‘만약 소승에 의거한다면’, 혹은 ‘만약 삼승에 의거한다면’이라고 표방하였기 때문이다. ‘그 말나(末那)에서 준하여 알라’115)까지는 말나멸혹(末那滅惑)은 소승에 없다는 것과 ‘단박에 출리함이 없다’는 해석에 준하라는 것이다.
【記】 그 소지장(所知障)은 적멸에 취향(趣向)하는 자가 무여(無餘)에 들어갈 때 일시에 모두 끊어지지만, 이것은 오직 비택멸(非擇滅)이다. 그 나머지 일체는 단(斷)과 부단(不斷)이 있으니, 혜해탈인(慧解脫人)116)은 부단(不斷)이고 구해탈인(俱解脫人)117)은 부분적으로 소단(所斷)이 있다. 팔해탈장(八解脫障)118)의 불염무지(不染無知)는 팔승해(八勝解)를 닦아야만 대치(對治)되기 때문이니, 『유가(瑜伽)』에서 “또한 모든 해탈은 소지장의 해탈을 말미암아 드러나는데, 성문과 연각 등은 소지장에서 마음으로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시교(始敎)는 우법(愚法)을 이끌어서 점차 대승을 향하게 하기 때문에 이 교를 안립한 것이니, 저것보다 깊고 뛰어나기 때문에 소지장 또한 나누어 끊음[分斷]을 허락한다. 그러나 위의 소단(所斷)은 우법과 같지 않으니 그것은 오직 번뇌의 얻음을 끊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곧 그렇지 않고 종자(種子)를 끊었기 때문이다.
【釋】 ‘제2 소지장을 끊음’[斷所知障] 중에서 ‘오직 비택멸(非擇滅)이다’119)라고 한 것은 무여(無餘)에 들어갈 때 신(身)과 지(智)가 함께 멸하여서 영원히 끊어 다하기 때문에 ‘멸(滅)’이라고 말했을 뿐이지 지(智)가 멸하기 때문은 아니다.
‘혜해탈(惠解脫)에서 부분적으로 소단(所斷)이 있다’120)에 이르기까지는 오직 혜(惠)가 해탈할 뿐이고 심(心)은 해탈하지 않기 때문에 혜해탈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심혜(心惠)가 모두 해탈하기 때문에 구해탈(俱解脫)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팔해탈장(八解脫障)의 불염무지(不染無知)’121) 등에서는 비록 부분적으로 끊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법집(法執)을 단절함은 아니고, 오직 정장(定障)의 불염무지를 끊을 뿐이다. ‘또한 『유가(瑜伽)』에서 ’모든 해탈은 소지장(所知障)의 해탈을 말미암아 드러나는데’122)라고 한 것에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른 뜻[別義]를 인용하여 이루었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해석은 논(論)을 인용하여 앞의 해석에 더하여 나타낸 것이지 다른 의미는 아니다.
‘소지장에서 마음으로 해탈을 얻는다’123)고 한 것은 단지 혜해탈(惠解脫)만은 아니고 마음도 또한 해탈하기 때문에 구해탈(俱解脫)이니, 그러므로 앞의 ‘구해탈인(俱解脫人)은 소지(所知)를 나누어 끊는다’124)라 한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둘째로 우법(愚法)과 다름을 나타낸 것 가운데 ‘그러므로 위의 소단(所斷)은 우법과 동일하지 않다’125)고 한 것에서, 어떤 사람은 “오직 소지(所知)를 나누어 끊음을 잡았을 뿐이다”라고 말하였지만, 지금 해석에서는 위에서 밝힌 이승단혹(二乘斷惑)이 곧 우법(愚法)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오직 번뇌(煩惱)의 얻음을 끊음으로써’126)라고 한 것은, 대승 가운데에서 뇌야(賴耶)가 모든 법의 의지처가 됨을 밝히기 때문에 뇌야식 중에서 번뇌의 종자[煩惱種]를 세우고, 소승 중에서 뇌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삼세득(三世得)을 세워서 모든 법의 의지처로 삼으니, 그러므로 소승은 번뇌의 얻음을 끊고 대승은 뇌야의 종자[賴耶種]를 단절하는 것이다.
삼세득에서 법전득(法前得)은127) 곧 과거장(過去藏)이니 소를 끄는 사람[牽牛人]과 같고, 법구득(法俱得)128)은 곧 현재장(現在藏)이니 소를 타고 가는 사람[乘牛人]과 같으며, 법후득(法後得)129)은 곧 미래장(未來藏)130)이니 소를 몰고 가는 사람[驅牛人]과 같다. 미래장 가운데 여러 법을 세움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삼세득을 세운 것이다.
【記】 직진(直進) 보살의 미혹을 끊음은 두 장애를 모두 끊는 것이다. 또한 번뇌장 가운데 이승(二乘)이 계(界)를 잡아서 품을 나눈 것과는 같지 않으나, 다만 두 장애에서 분별하여 일어나는 것은 지전(地前)131)에서 현행(現行)132)을 조복하고, 초지(初地)133)의 진견도(眞見道) 때에 한 찰나에 단박에 그 종자[種]를 끊는다. 구생 가운데 번뇌장은 초지 다음부터 자재하게 능히 끊지만 남겨두기 때문에 끊지 않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인가?
【답】 윤생섭화(潤生攝化)하기 때문이고,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소지장을 끊기 위함 때문이고, 그리고 대보리(大菩提)를 얻기 위함 때문이다.
그래서 『섭론』에서는 “미혹을 남겨둠으로부터 미혹이 다하기까지 부처의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한다”라고 한 것이다. 풀어서 말하기를, ‘미혹을 다함은 곧 소지장이 다한 것이니, 바로 번뇌장을 남겨둠을 말미암아서 승행(勝行)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위(位)에 이르러서 불과(佛果)를 증득한다’고 하였다. 또한 『양섭론(梁攝論)』에서 이미 이르기를 “종자(種子)에 남겨둔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번뇌장의 종자가 금강위(金剛位)에 이르게 됨을 알아야 한다.
소지장의 행상(行相)134)이 미세하기 때문에 바로 보살도(菩薩道)를 장애하니, 그러므로 지지(地地)마다 나누어 끊다가 반드시 불지(佛地)에 이르러서 총체적으로 다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서 곧 두 장애와 수혹(修惑)이 함께 불지(佛地)에 이른다고 설한 것이니, 그러므로 『대법론(對法論)』에 이르기를, “또한 여러 보살이 십지(十地)의 수도위(修道位) 가운데서 오직 소지장의 대치도(對治道)만을 닦을 뿐이지 번뇌장을 끊지는 않는다. 보리(菩提)를 얻을 때 단박에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고서 단박에 나한과 여래를 이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말나구생(末那俱生)은 행상(行相)이 미세하기 때문에 또한 앞에서 불지(佛地)에 이르러 다하는 것과 같다.
【釋】 직진(直進)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승에 대하여 다름을 변별한 것이고,135) 둘째, ‘단지 두 장애에서’136)의 아래는 복(伏)137)과 단(斷)의 분제(分齊)138)를 밝혔다. 앞의 것 가운데 ‘두 장애를 모두 단절한다’139)함은 이승은 오직 번뇌장을 끊을 뿐이고 소지장은 끊지 않으니, 설사 나누어 끊는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단절하지는 못한다.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두 장애를 영원히 끊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번뇌장 가운데 이승(二乘)이 계(界)를 잡아서 품(品)을 나는 것과는 동일하지 않다’140)고 한 것은 의심을 떨쳐버린 것이다. 의심하여 말하기를, “번뇌를 끊음의 뜻은 이승과 동일한가?”라고 하였는데 대답의 뜻은 경전의 글과 같다.
【문】 이 교의 두 장애가 식(識)에 상응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답】 이 교의 뜻에서는 진여(眞如)는 응연(凝然)해서 모든 법을 짓지 않기 때문에 생멸뇌야(生滅賴耶)를 건립하여 모든 법의 의지처로 삼는다. 그러므로 뇌야식(賴耶識)은 곧 백정무기(白淨無記)이기 때문에 장애는 모두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육칠식(六七識) 중에 두 장애를 건립하더라도 단지 이 장애의 종자는 본식(本識)141)에 있으니, 그 육ㆍ칠식이 일으킨 바의 장애는 십지(十地) 중에서 점점 조복하여 끊고 불지(佛地)142)에 이르러서 일체가 끊어져 다하여 불과(佛果)를 얻는 것이다. 그 때 또한 ‘식(識)을 돌이켜 지(智)를 이룬다’ 하고, 또한 ‘청정한 팔식(八識)을 드러낸다’고 하니, 이 때문에 저 교(敎) 중에서 삼성(三性)의 유무(有無)를 논한다면 변계(遍計)는 곧 없고 의타와 원성[依圓]은 있는 것이다. 만약 관행(觀行)의 순서를 잡는 것이라면, 염분의타(染分依他)는 곧 소견(所遣)이고, 정분의타(淨分依他)는 소견이 아니다.
【문】 어째서 소지장이 육칠식(六七識)에 통함을 알 수 있는가?
【답】 『유식』143)의 제구(第九)에 이르기를, “소지장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을 실법(實法)이라 집착하고 살가야견(薩迦耶見)을 상수(上首)로 삼아서 견(見)과 의(疑)ㆍ무명(無明)ㆍ애(愛)ㆍ에(恚)ㆍ만(慢) 등이 소지경(所知境)과 무전도성(無顚倒性)을 덮어서 능히 보리를 장애하는 것을 소지장이라고 한다. 이 소지장은 결정코 이숙식(異熟識)과 함께 하지 않으니, 미미하고 열등하기 때문이고, 무명(無明)과 혜(惠)의 수(數)에 더불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법공지품(法空智品)이 더불어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칠전식(七轉識) 안에서는 그 응함에 따라서 적기도 하고 많기도 하니, 번뇌의 설명과 같다”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면, ‘이 논의 문장에 의거하면 소지장도 또한 육칠식(六七識)에 통한다’는 것이다.
지엄[儼公]의 『문답』 초권(初卷)144)에 이르기를, “말나식(末那識)은 삼승교(三乘敎)에 의거하면, 그 식(識)이 사혹(四惑)145)을 일으키더라도 법집(法執)은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면 이 지엄 스님의 뜻은 말나 가운데서는 법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안혜보살(安惠菩薩)146)은 말나식에서 법집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고, 호법보살(護法菩薩)147)은 말나식에서 법집이 함께 일어난다고 했는데, 지엄은 안혜의 설을 쫓았기 때문에 말나에서 법집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고, 법장[藏師]은 호법의 뜻을 좇았기 때문에 말나에서 법집이 함께 일어난다고 하였다”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장주(章主:法藏)는 말나 중에서 법집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설은 경문에 합치된다.
둘째로 복단분제(伏斷分齊)를 밝힌 것 가운데서 첫째는 분별(分別)의 일어남 끊은 것이고, 둘째, ‘그 구생(俱生)’148)의 아래는 구생을 끊는 것인데, 이 중에 첫째는 올바로 밝힌 것이고, 둘째로 ‘묻기를’149) 아래는 묻고 대답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육식구생(六識俱生)을 끊는 것이고, 둘째로 ‘그 말나’150)의 아래는 말나구생(末那俱生)을 끊는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번뇌장(煩惱障)을 끊는 것이고, 둘째로 ‘그 소지(所知)’151)의 아래는 소지장(所知障)을 끊는 것이고, 셋째로 ‘그것으로 말미암아’152) 아래는 결론지은 것이다.
처음 가운데 ‘윤생(潤生)’153)이라는 것은 업(業)을 윤택하게 하여 생(生)을 받는 것이고, ‘섭화(攝化)’154)라는 것은 중생을 융섭하고 만물[物]을 교화하는 것이다.
‘미혹으로 말미암아서’에서 ‘미혹이 다한다’에 이르기까지155)는 이 경문이 바로 지전(地前)에 종자를 남겨두는 뜻이기 때문에 곧 종교(終敎)에 합치되지만, 미혹을 남겨두는 뜻을 똑같이 하기 때문에 시교(始敎)에서 인용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156) 등에서 어떤 사람은 “오직 『섭론(攝論)』을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러므로’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지금의 해석에서는 상하에서 밝힌 바의 뜻을 통틀어 말미암았으므로 ‘그러므로’라고 말한 것이다.
셋째로 결론지은 것 중에서 ‘『대법론(對法論)』157)’ 등은 앞의 소의신(所依身)158)이 번뇌의 변(邊)을 끊는 걸 잡아서 나한(羅漢)을 분출(分出)한 뜻을 인용한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는 두 장애를 합해서 취하여 불지(佛地)에 이른 뜻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두 곳[二處]이 같지 않다.
‘오직 소지장의 대치도(對治道)를 닦는다’159)고 한 것에서 번뇌장이기 때문에 원(願)을 도와 승행(勝行)을 일으키도록 남겨두어서 대치를 닦지 않지만, 그러나 불지에 이르러서 소지(所知)를 끊을 때는 번뇌도 또한 끊어지기 때문에 “보리를 얻을 때 단박에 번뇌 및 소지장 등을 끊는다”160)고 말한 것이다.
【記】 【문】 두 장애의 수혹(修惑)은 여러 식과 상응하여 지상(地上)에서 현행(現行)하는데, 어째서 같음과 다름[同異]이 있는가?
【답】 번뇌장 안에서 제육식(第六識)의 미혹이 이미 모두 다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남겨두는 것이니, 그러므로 현행이나 종자나 모두 지(智)로써 제어하여 승행(勝行)을 이룸으로써 지나친 우환을 일으키지 않는다. 마치 독사를 주력(呪力)으로 제어해서 죽게 하지 않고도 지나친 우환을 일으킴이 없이 나머지 용(用)을 이루는 것과 같으니, 보살이 선교(善巧)로 미혹을 남겨두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섭론』에 이르기를 “마치 독사가 주술에 해를 입은 것과 같다”등으로 말한 것이니, 그러니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번뇌장에서 현행이기도 하고 종자이기도 해서 모두 자재(自在)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제칠식(第七識)의 번뇌는 그 성품이 생을 윤택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며, 행상(行相)이 미세하기[細] 때문에 칠지(七地)까지 어느 땐가 잠시 나타나는데, 관(觀)과 지(智)에 틈이 있기 때문이다. 소지장은 모두 뒤의 지(地)에서 일어나고 미혹은 앞의 지(地)에서 일어나는데, 현행이든 종자이든 지지(地地)마다 나누어 끊기[分斷]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왜 어떤 곳에서는 칠지 이전에 유루심(有漏心) 등을 일으킨다고 설하는가?
【답】 만약 제육식(第六識) 중 번뇌장을 잡아서 유루(有漏)로 삼는다면, 그것은 이미 미혹을 남겨두기 때문에 곧 사유루(似有漏)이다. 만약 소지장을 잡아서 유루라고 한다면, 곧 실유루(實有漏)이다. 이 두 가지는 십지(十地)에 모두 통하는 것이다.
만약 말나번뇌(末那煩惱)가 실유루라면 칠지(七地)에 이르기까지는 유무(有無)가 정해지지 않아서 어느 땐가 잠시 유루심(有漏心)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머지의 뜻은 준하여 알라.
또한 이 교 가운데 미혹을 멸하고 지(智)를 일으키는 분제(分齊)는 미혹의 종자가 멸상(滅相)에 있을 때가 지(智)는 곧 생상(生相)에 있어서 동시에 서로 상반되니[相返], 마치 솟구치면 가라앉고 가라앉으면 솟는 것과 같다. 자세히는 『대법론(對法論)』에서 설한 바와 같다.
또한 이 장법(障法)은 식(識)의 무성(無性)에 의지하기 때문에 곧 공(空)하여 분별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장(障)의 뜻이다. 마치 『유마경』에 이르기를, “오수음(五受陰)에 통달하면 공(空)하여 일으킬 바가 없으니, 바로 고(苦)의 뜻이다”라 한 것과 같다. 지금 여기서의 장(障)의 뜻도 또한 그에 준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釋】 문답161) 가운데 처음 문답의 의미는, 앞에서는 다만 두 장애의 수혹(修惑)이 모두 불지(佛地)에 이른다고 말하였으나, 끝에서는 지상(地上)의 여러 식(識)과 상응하여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함을 밝혔으니, 이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묻고 대답한 것이다.
대답한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번뇌장을 변별하였고, 둘째는 소지장을 변별하였다. 앞의 것 가운데 또한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육식번뇌(六識煩惱)를 변별하였고, 둘째로 말나번뇌(末那煩惱)를 변별하였다. 앞의 것 중에 ‘번뇌장 안에’162)라고 한 것은 육칠식(六七識)의 번뇌를 통틀어 든 것이다. ‘제육식의 혹(惑)’163)은 제육(第六)을 간별하여 취한 것이며, 이 가운데 다섯 가지가 있으니, 곧 법설(法說), 유황(喩況)ㆍ법합(法合)ㆍ인증(引證)ㆍ결성(結成)이다.
만약 인명입량(因明立量)에 의거한다면, 종(宗)에서 이르기를, “육식번뇌(六識煩惱)는 지나친 우환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고, 인(因)에서 이르기를, “남겨두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비유에서 이르기를, “독이 있는 주술에 피해를 입음과 같다”고 하였고, 합해서 이르기를, “주술로 독에 해를 입는 것이 지나친 우환을 일으키지 않음과 같다”고 하였으니, 육식(六識)도 또한 이와 같다.
인증(引證) 가운데 논하기를,164) “온갖 미혹을 이미 없애고 조복하니, 독이 있는 주술[毒呪]에 해를 입음과 같다. 미혹을 말미암아 미혹을 다함에 이르기까지 부처[佛]의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한다”고 하였다. 앞에서는165) 아래의 반을 인용하였고, 지금은 위의 반을 인용하였다.
결론지음[結成] 가운데 고법상(古法相)은 다분히 종자를 남겨둠을 밝혔고, 신법상(新法相)은 다분히 현행을 남겨둠을 밝혔다. 지금은 두 법상을 회통하니, 현행을 남겨두든 혹은 종자를 남겨두든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모두 자재(自在)로 얻는다”166)고 말한 것이다.
말나번뇌를 밝힌 것 가운데 ‘칠지까지는 어느 땐가 잠시 나타난다’167)고 한 것에서, 의식(意識) 가운데 인공(人空)의 무루지(無漏智)를 일으킬 때 의식이집(意識二執)과 말나인집(末那人執)이 모두 일어나지 않음을 구하나, 칠지까지는 인공(人空)의 관(觀)과 지(智)에 틈과 끊어짐이 있기 때문에 어느 땐가 잠시 일어나게 된다. 팔지(八地) 이상은 인공의 관과 지가 항상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음을 구한다.
둘째로 소지장 가운데 ‘현행히기도 하고 종자이기도 하다’168)라고 한 것은, 곧 구생번뇌(俱生煩惱)가 십지 중에서 그 현행을 조복하고, 금강위(金剛位)에 이르러서 영구히 그 종자를 단절하여도 소지장은 지지(地地) 중에서 각각 종자와 현행을 끊기 때문이다.
번뇌장 중에서 따로 육식 및 제칠식의 미혹을 변별하였으나 소지(所知)는 그렇지 않으니, 그러므로 소지를 아는 것은 오직 제육(第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두 번째 문답169) 중에서 물음의 뜻 가운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제육식 가운데 두 장애의 수혹(修惑) 및 말나번뇌가 불지(佛地)에서 다한다면, 십지(十地)는 모두 유루(有漏)인데, 어째서 성교(聖敎)에서는 오직 칠지 이후에 유루심(有漏心)을 일으킨다 하고 팔지 이상은 유루라고 말하지 않는가?”라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십지 중에서는 비록 번뇌에 머물더라도 지나친 우환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성교에서는 칠지 이후에 유루심을 일으킨다 하는가?”라고 하였으나, 처음의 의미가 경문에 합치된다.
‘어느 곳에서 설하였다’170) 등은 유식론의 제구(第九)에 이르기를, “혜학(惠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행무분별혜(加行無分別惠), 둘째는 근본무분별혜(根本無分別惠), 셋째는 후득무분별혜(後得無分別惠)이다. 이와 같이 삼혜(三惠)171)는 처음의 이위(二位) 중의 종자라면 세 가지를 갖추었지만, 현행이라면 오직 가행(加行)뿐이다. 통달위(通達位)172)에서 현행이라면 두 가지이고 종자라면 세 가지이다. 견도위(見道位) 중에서는 가행(加行)이 없기 때문에 수습위(修習位)173)에서 칠지 이전은 종자이기도 하고 현행이기도 하므로 모두 세 가지에 통한다. 팔지 다음부터는 현행이라면 두 가지이고 종자라면 세 가지이니, 무공용도(無功用道)는 가행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구경위(究竟位)174) 가운데서 현행과 종자는 모두 두 가지이니, 가행의 현행과 종자를 모두 이미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칠지 이후는 가행이 있기 때문에 유루심(有漏心)이고, 팔지 이상은 가행이 없기 때문에 무루(無漏)인데, 그 문장을 거론하여 물은 것이다.
대답의 의미는 이렇다; 말나번뇌는 칠지 이후에 어느 땐가 잠시 유루심을 일으키고, 팔지 이상은 유루를 일으키지 않으니, 그러므로 유식론은 이를 잡아서 변별한 것이다. 육식 가운데 번뇌는 사유루(似有漏)이고 소지장(所知障)은 실유루(實有漏)이니, 이 두 가지는 십지에 통한다.
‘나머지 뜻은 알 수 있다’175)고 한 것은, 초교(初敎) 가운데 문을 논한 것[論門]은 넓고 많으나 지금은 요약하여 밝혔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둘째로 단혹상(斷惑相) 및 혹체성(惑體性)을 밝힌 것 중에서,176) 우선은 단상(斷相)을 밝혔고, 그 다음 ‘또 이 장(障)’177)의 아래에서는 체성(體性)을 밝힌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미혹의 종자가 멸상(滅相)에 있을 때 지(智)는 곧 생상(生相)에 있다’178)고 한 것은, 유식론 제구에 이르기를 “진견도(眞見道)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저 이장(二障)의 종자는 반드시 성취되지 않으니, 마치 밝음과 어두움이 반드시 함께 생기지 않는 것과 같다. 양끝을 저울질해서 숙이고 들 때처럼 모든 상(相)이 법에 위배됨은 이(理)가 반드시 그러하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좇아서 말한 것이다.
‘축(築)은 곧 곤(坤)과 같다’179)고 한 것은, 축(築)은 장(障)을 비유하고 곤(坤)은 지(智)를 비유한 것이다. ‘『대법론(對法論)』’180) 등은 그 논(論)이 혹(惑)과 지(智)를 동시에 서로 뒤집은[相翻]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둘째로 혹체(惑體)를 밝힌 것 가운데 ‘무성즉공(無性卽空)’181)이란 것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시교의 종[始敎終]에 해당된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해석에서는 바로 이 종(宗)이니, 말하자면 심식장(心識章)182)에서 ‘훈(熏) 등이 곧 공(空)이다’라고 한 것이 초교(初敎)의 종(宗)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記】 만약 종교(終敎)에 의지한다면, 여러 성문은 번뇌장을 오히려 능히 끊지 못하고 다만 능히 꺾어서 굴복시킬 뿐이니, 어찌 소지장을 능히 끊겠는가? 그러므로 『미륵소문경론(彌勒所問經論)』에서 이르기를, “일체의 성문인과 벽지불인(辟支佛人)은 여실히 사무량(四無量)을 닦을 수 없고, 구경(究竟)에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없으니, 다만 일체 번뇌를 꺾어서 굴복시킬 뿐이다”라고 하였으며, 『능가경』의 문장 또한 위의 설과 같다.
【문】 이 설은 어떤 이유로 앞의 가르침과 같지 않은가?
【답】 그것은 이승(二乘)을 이끌기 위한 것이라서 아직 깊이 설(說)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아래의 설로 나아가서 번뇌장도 저 이승(二乘)과 똑같이 불지(佛智)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지(地)가 다한다고 설한 것이다. 또한 아래의 것도 위와 똑같이 역시 이승은 혹장(惑障)183)을 모두 끊고 소지장을 나누어 끊는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제 여기서는 실(實)에 나아가면 우법이승(愚法二乘)은 넓고 큰 마음이 없기 때문에 구경(究竟)에 번뇌장을 끊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는 삼승(三乘) 가운데 성문(聲聞)을 집았지만, 여기서는 우법(愚法)을 잡았기 때문에 같지 않다고 할 수 있다.
【釋】 종교(終敎)184) 가운데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단혹분제(斷惑分齊)를 밝힌 것이고, 둘째로 ‘또 이 교’의 아래에서는 단혹상(斷惑相) 및 혹체성(惑體性)을 밝힌 것이며, 셋째로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의 아래에서는 같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승(二乘)을 잡았고, 둘째는 보살을 잡은 것이다. 앞의 것 중에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올바로 변별한 것이고, 둘째는 인용해서 증명한 것이며, 셋째는 묻고 대답한 것이다.
이 가운데 물음의 의미는, ‘앞의 시교이승(始敎二乘)이 또한 소지[所知]를 끊는데, 어째서 이 교가 번뇌장을 오히려 능히 끊지 못하는가’ 라는 것이다.
대답 가운데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앞의 해석은 행심(行心)을 잡아서 해석한 것이고, 뒤의 해석은 사람[人]을 잡아서 해석한 것이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해석에서는 앞의 것이 시교(始敎)와 종교(終敎)를 잡아서 차이를 변별하였고, 뒤의 것은 우법(愚法)과 불우법(不愚法)으로써 차이를 변별하였다.
【문】 만약 앞의 해석을 집는다면 우법도 또한 소지장을 끊는가?
【답】 그렇지 않다. 앞에서 말하기를,185)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시교는 우법을 인용하여 점점 대승으로 향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교를 안립(安立)하였으며, 저것보다 깊고 뛰어나기 때문에 소지장도 또한 나누어 끊음을 허락한 것이다”고 하였는데, 풀어서 말하면 ‘이미 저것보다 깊고 뛰어나기 때문에 소지장도 또한 나누어 끊음을 허락한다’고 하였으니, 우법은 능히 끊을 수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종교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만약 종교에 의지한다면, 우법이승(愚法二乘)은 번뇌장을 다만 능히 꺾어서 굴복시킬 뿐이고, 만약 시교에 의지한다면 이승인(二乘人)이 완전히 번뇌를 끊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동일하지는 않은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나아가’186)라고 한 것은 보살로서 이승(二乘)에 나아가기 때문이며, ‘아래에서 위로 나아가서’187)라고 한 것은 이승으로서 보살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뒤의 해석 가운데 앞에서 ‘이승도 또한 소지장을 끊는다’188)고 말한 것은 삼승(三乘) 중의 성문(聲聞)을 잡은 것이고, 지금 ‘번뇌장은 오히려 능히 끊지 못한다’189)고 말한 것은 우법(愚法)을 잡은 것이니, 그러므로 이 해석은 두 가지 성문을 구별케 한 것이다.
【문】 앞에서 삼승 중의 성문을 잡았다고 한 것은 시교(始敎)에 해당하는 것인가?
【답】 이 해석의 의미는 시종(始終)의 두 교(敎)를 합하여 하나의 대승교[一大乘敎]로 삼은 것이지, 두 가지 교로 나뉘게 한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두 교를 합할 때에는 도리어 종교(終敎)의 뜻에 해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권(上卷)190)에서 “문; 어째서 우법이승(愚法二乘)은 인용한 것 가운데 있어도 알 수 있는가? 답; 저 우법으로써 대승종교(大乘終敎) 이후를 잡는다면 나란히 삼계191)를 벗어난다고 이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는 뒤의 해석에 해당된다.
【記】 보살인(菩薩人)은 두 장애 중에서 구생(俱生)과 분별(分別)을 나누지 않고 다만 정사(正使)192)와 습기(習氣)가 있으므로 지전(地前)에서 사(使)의 현행(使現)을 조복하고, 초지(初地)에서 사(使)의 종자를 끊으며, 지상(地上)에서 습기를 없애고, 불지(佛地)에서는 마침내 청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저 지전(地前) 삼현위(三賢位)193) 중에서는 처음에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지 않는 가운데 번뇌장(煩惱障)을 자재롭게 능히 끊을 수 있지만, 남겨두어서 일부러 끊지 않으니 소지장 등을 제거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양섭론』에 이르기를, “십해(十解) 후에 출세정심(出世淨心)을 얻는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십해심(十解心) 이상을 성인(聖人)이라 부르는데,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인왕경(仁王經)』에 이르기를, “지전(地前)에서 인공(人空)을 얻지만 증득을 취하지는 않는다”고 하였으며, 또 『기신론』에 이르기를, “소분견(少分見)의 법신(法身)을 얻어서 팔상(八相)194)을 짓는다”는 것이 모두 이 뜻이다. 이 보살이 오직 지장(智障)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유식(唯識)과 진여(眞如) 등의 관(觀)을 닦아서 그 장애를 조복하여 끊지만, 그러나 번뇌장에 대해서는 단지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대치를 닦지 않고, 또한 일부러 남겨두어서 승행(勝行)을 이루는 것을 돕는다. 초지(初地) 이상에서 소지장의 일분추(一分麤)를 끊기 때문에 번뇌장을 더 이상 남겨두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두 장애에 대해서는 견수(見修)195)를 나누지 않고, 초지에 이르렀을 때 정사(正使)를 함께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륵소문경(彌勒所問經)』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 가령 성문인(聲聞人)은 우선 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하는 번뇌를 끊은 다음에 점차 수도번뇌(修道煩惱)를 끊는데, 어떤 이유로 보살은 성문과 같지 않은가?
답: 보살인(菩薩人)은 무량세(無量世) 이래로 여러 중생을 위하여 이익이 되는 일을 만들어 준 뒤에 나중에 진여감로법계(眞如甘露法界)를 보되, 저 일체 중생의 몸도 실제로는 내가 구하는 곳과 다르지 않다고 관(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견도(見道)와 수도(修道) 속의 일체 번뇌가 능히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利益衆生行]을 막기 때문에 견도 중에서 일체를 모두 끊는다.”
이 경문으로써 증거가 되는 것이다.
【釋】 보살에 나아감 속에서, 첫째는 간략히 나타낸 것이고[略標], 둘째로 ‘저 지전(地前)’196)의 아래에서는 폭넓게 해석한 것이다[廣釋].
앞의 것 가운데, 첫째는 능단인(能斷人)이고, 둘째, ‘이장(二障)에서’197)의 아래에서는 시교를 간별하였고, 셋째, ‘다만 있다’198)의 아래에서는 이 교의(敎義)를 올바로 나타내었다. 이 가운데 ‘지전(地前)에서는 사(使)의 현행을 조복하고, 초지(初地)에서는 사(使)의 종자를 끊는다’199)고 한 것은 곧 실제의 행[實行]이지 임시로 의탁한[假寄] 것은 아니다.
【문】 장주(章主:法藏)는 초지(初地)에 대한 소(疏)200)에서 이르기를, “만약 종교(終敎)를 잡으면 초지에서 또한 삼계의 분단(分段)과 혹(惑)ㆍ업(業)ㆍ고(苦)를 버리고, 지상(地上)에서는 오직 소지장(所知障)과 반역보(反易報)를 끊는다. 번뇌장은 지전(地前)에서 점차 조복하고, 지상에서 완전히 끊는다. 소지장은 지전에서도 또한 배워서 조복하고, 초지에서 일분(一分)을 끊는다. 나머지는 여러 지(地)에서 각각 일분(一分)을 끊고, 불지(佛地)에서 다한다”고 하였고, 이지(二地)에 대한 소201)에서 이르기를, “만약 종교에 의지한다면 『양론(梁論)』 등과 같으니, 번뇌의 종자는 초지에서 영원히 다하여 오직 습기만이 있다. 소지장의 일분[一分麤]는 또한 초지에서 다하고, 나머지 분(分)과 습기는 모든 지(地) 가운데에서 각각 개별적으로 올바로 끊어진다”고 하였는데, 저 두 곳의 문장과 여기의 문장은 어떻게 회통되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종교 속에 나아가면 시(始)가 있고 종(終)이 있지만, 지금 이 장(章)의 경문은 시(始)를 잡았고, 저 두 곳의 문장은 종(終)을 잡았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금은 실행(實行)을 잡은 것이고, 저 두 곳의 문장은 곧 임시로 의탁한[假寄] 것이니, 이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처음의 뜻은 어째서 그러한가?
【답】 ‘두 장애 가운데 사(使)와 습(習)을 나누고, 지전(地前)에서는 사(使)의 현행을 조복하고, 초지(初地)에서는 사(使)의 종자를 끊으며, 지상(地上)에서는 습기(習氣)를 없앤다’202)고 한 것은 시(始)를 잡아서 말한 것이고,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십분(十分)으로 나뉘는데, 십지(十地) 중에서 각각 일분(一分)을 끊는다’203)고 한 것은 종(終)을 잡아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초지의 소(疏)에서 ‘각각 일분을 끊는다’고 말하고, 이지(二地)의 소에서 ‘각각 개별적으로 올바로 끊는다’고 말한 것은 곧 근본무명이 십분(十分)으로 나뉘고 지지(地地) 중에서 각각 일분을 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문】 뒤의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초지의 소(䟽)와 이지(二地)의 소에서 모두 ‘번뇌장은 초지에서 영원히 다한다’고 말한 것은 곧 지전(地前)에서 번뇌장을 끊고 지상에서 바야흐로 소지장을 끊는 뜻이기 때문이니, 이것은 곧 십팔기문(十八寄門)의 제일문204)에 해당된다.
지금의 해석에서 두 곳의 문장은 다분히 이 장(章)과 같아서 서로 어긋남이 없다. 왜냐하면 이지(二地)의 소(疏)205)에서 ‘번뇌장은 초지에서 영원히 다한다’고 말한 것이 번뇌장의 종자를 초지에서 단박에 끊기 때문이다. ‘오직 저 습기[習]만이 있다’고 말한 것은 번뇌장의 습기를 초지 가운데에서 능히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지장의 일분추(一分麤)는 또한 초지에서 다한다’고 말한 것은 소지장의 종자가 초지에서 영원히 다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분(分)과 습(習)’이라고 말한 것에서 ‘나머지 분(分)’은 곧 소지장의 습기이고, ‘습(習)’이라는 것은 앞의 ‘오직 저 습기만이 있다’고 한 것을 다시 들었기 때문이니 바로 번뇌장의 습기이다. 두 장애의 습기는 뒤의 모든 지(地) 가운데서 점점 끊어져 없어지기 때문에 ‘모든 지 가운데서 각각 개별적으로 올바로 끊는다’고 말한 것이다. 초지의 소(疏)206)에서 ‘번뇌장은 지전(地前)에서 점차 조복하고 지상(地上)에서 모두 끊어 다한다’라고 말한 것에서, ‘지상’이라는 말은 십지(十地)를 총체적으로 잡은 것이지 오직 초지(初地)만은 아니다. 이른바 정사(正使)의 종자는 초지에서 영원히 다하고 오직 습기만이 있어서 뒤의 모든 지(地) 가운데 하나하나 끊어서 없애는 것이니, 그러므로 정사의 습기(習氣)는 십지(十地)에서 모두 다하기 때문에 ‘지상에서 끊어 다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소지장은 지전에서 배워 조복하고, 초지에서 일분(一分)을 끊어서’라고 말한 것은 지전에서 현행을 조복하고 초지에서 종자를 끊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모든 지에서 각각 일분(一分)을 끊고, 불지(佛地)에서 바야흐로 다한다’고 말한 것은 그 습기가 곧 뒤의 모든 지에서 점점 끊어 없어져서 불지에서 바야흐로 다하기 때문이니, 저것과 이것이 서로 어긋남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저 두 곳의 문장은 또한 실행(實行)이 되는가?
【답】 바로 실행이면서도 임시로 의탁함[假寄]를 겸하고 있다. 왜냐하면 두 장애 중에 사(使)와 습(習)을 나누어서 초지에서 종자를 끊고, 이지(二地) 이상에서 습기를 없애기 때문에 바로 실행이 된다. 그러나 ‘각각 일분(一分)을 끊는다’207)라고 함과 또 ‘각각 개별적으로 올바로 끊는다’208)고 함이 곧 지지(地地) 가운데 각각 일분을 끊는다는 뜻이니, 이는 곧 이십이무명(二十二無明) 및 십일무명(十一無明)으로서 십지(十地)에 의탁하여 각각 개별적으로 끊는 뜻이기 때문에 임시로 의탁함[假寄]이 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실행 가운데서는 이십이무명 및 십일장(十一障)을 십지에 의탁해서 개별적으로 끊는다는 뜻은 없는 것인가?
【답】 실행을 잡는다면, 곧 하나 하나의 지(地) 가운데서 이십이무명 및 십일장을 통틀어 끊는다.
【문】 만약 그렇다면 별교(別敎) 가운데 ‘일단일체단(一斷一切斷)’209)의 뜻과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별교 중에는 밝음과 어둠[明昧]이 없다. 삼승 가운데 비록 이십이무명과 십일장을 통틀어 끊는다 하더라도 명매는 차별되기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이다.
【문】 삼승십지(三乘十地)에서 하나 하나를210) 통틀어 끊음은 그 상(相)이 어떠한가?
【답】 십지 중에서 십도(十度)를 닦아 익히니, 초지(初地) 중에서는 단도(檀度)에 치우쳐 뛰어나되 나머지 도(度)는 겸하여 닦으면서 지(地)를 따라 증상(增上)하며, 이지(二地) 중에서는 계도(戒度)에 치우쳐 뛰어나되 나머지 도(度)는 겸하여 닦으면서 지(地)를 따라서 증상한다. 이 때문에 만약 치우쳐 뛰어남을 잡는다면, 모든 지(地) 가운데서 각각 하나의 도[一度]를 닦으며, 만약 겸수(兼修)를 든다면 하나 하나의 지 가운데서 십도(十度)를 통틀어 닦는다. 장(障)을 끊음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만약 바른 것[正者]을 잡는다면 모든 지(地) 중에서 각각 일장(一障)을 끊으며, 만약 겸하여 끊음을 잡는다면 하나 하나의 지(地) 중에서 십장(十障)을 통틀어 끊으니, 그러므로 비록 하나 하나의 지(地)에서 모든 장(障)을 통틀어 끊더라도 밝음과 어둠[明昧]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 의지하여 상대하는 것[寄對] 가운데 제팔문(第八門)211)에 이르기를, “사장(四障)에 의탁해서 사위(四位)를 나타내는데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정사(正使)를 잡아서 지전(地前)에서 사위(四位)ㆍ사행(四行)ㆍ사인(四因)ㆍ사보(四報) 등등을 의탁해 나타내는 것이요, 둘째로 사장(四障)의 습기로서 지상(地上)에서 사위(四位)ㆍ사정(四定)ㆍ사덕(四德)ㆍ사보(四報) 등을 의탁해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실행(實行)의 뜻과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정사로서 지전(地前)에 의지하고, 습기(習氣)로서 지상(地上)에 의지한다는 뜻은 실행(實行)과 같다. 그러나 사장(四障)에 의지해서 사위(四位)의 뜻을 나타냄은 곧 임시로 의탁함[假寄]이다. 이른바 실행을 잡으면, 하나 하나의 지(地) 가운데서 사장(四障)을 통틀어 끊기 때문에 그러하다. 왜냐하면 법상[法常師]의 『섭론소(攝論疏)』212) 중에, “만약 실(實)을 잡는다면, 하나 하나의 위(位)에서 네 가지 생사(生死)를 쌍으로 다스려서 사덕(四德)을 가지런히 나타낸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문】 십지(十地)에서 끊은 바의 장(障)은 근본무명(根本無明)이 되는가, 지말(枝末)이 되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후자의 것과 같다. 이른바 근본무명은 미세하기 때문에 불지(佛地)에서 바야흐로 다하니, 이 때문에 십지에서 끊은 것은 바로 지말이다. 왜냐하면 『승만경』213)에 이르기를, “근본무명은 부처의 보리지(菩提智)만이 능히 끊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근본과 지말에 통하니, 왜냐하면 『기신론(起信論)』214)에 이르기를, “하나의 법계[一法界]를 요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신상응지(信相應地)에서부터 관찰하여 배워서 끊고, 정심지(正心地)에 들어가서 분(分)에 따라 여의게 되며, 나아가 여래지(如來地)에서 능히 궁극적으로 여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의 법계를 요달하지 못한다는 뜻은 바로 근본무명이요, 신상응지(信相應地)는 바로 지전위(地前位)이며, 정심지에 들어간다는 것은 초지(初地)이니, 그러므로 십지(十地)에서 끊는 것도 또한 근본무명에 통하게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 장주(章主)의 『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에서 말했다.
“넷째로 ‘무병(無病)’은 표(標)이니, 말하자면 두 장애[二障]와 습기(習氣)로 병든 바가 다하였기 때문이다. 『보성론(寶性論)』215)에서 이르기를, ‘청량(淸凉)하기 때문에 병들지 않으니, 번뇌와 습기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다섯째로 ‘무고의(無苦依)’는 비롯함이 없는 때[無始時]의 근본무명주지(根本無明住地)와 습기로서 온갖 고통의 의지할 바를 삼았으나, 이제 모두 영원히 다하기 때문에 ‘무고의’라고 하는 것이다. 묻기를, ‘이것과 앞의 소지장(所知障)과는 어떻게 구별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삼장(三藏)에 두 가지 해석이 있으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곧 주지무명(住地無明)이요 저것은 기시무명(起時無明)이니, 『승만(勝鬘)』에서 설한 바와 같다216)고 하였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소지장 가운데 미세한 부분[細分]을 본(本)으로 삼아 바로 저것의 의지할 바217)가 되니, 세밀함[細]에 의지하여 거칢[麤]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번뇌에는 어째서 거칠고 세밀함[麤細]이 없는가? 풀어서 말하면 번뇌추세(煩惱麤細)와 추소지(麤所知)는 모두 능의(能依)218)이니, 오직 미세한 것만이 저 둘의 의지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해석은 어떻게 다른가?
【답】 ‘무고의’를 풀어서 이르길, “비롯함이 없는 때의 근본무명(根本無明)과 습기(習氣)로서 모든 고통의 의지할 바로 삼는다”219)고 하였으니, 이미 근본무명 및 습기가 고통의 의지하는 바가 됨을 통틀어 들었기 때문에 앞의 해석은 근본무명이 고통의 의지하는 바가 됨을 잡았고, 뒤의 해석은 습기가 고통의 의지하는 바가 됨을 잡은 것이다. 그러므로 앞 해석의 뜻은, 곧 ‘무병(無病)’ 가운데 두 장애[二障]는 기시무명(起時無明)이고 ‘무고의(無苦依)’는 근본무명이라는 것이며, 뒤의 해석의 뜻은, ‘무병’은 번뇌추세와 추소지를 잡은 것이고 ‘무고의’는 단지 소지장의 미세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문】 앞의 해석 가운데 주지무명(住地無明)과 뒤의 해석 가운데 소지장의 세분[所知障細分]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일체(一體)라서 다름이 없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두 가지 해석이 있는가?
【답】 두 장애를 논함에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로 근본무명은 지애(智碍)220)이고, 육염(六染)은 번뇌애(煩惱碍)221)이니, 번뇌 가운데 집상응염(執相應染)은 인집(人執)이기 때문에 번뇌장이 되고, 나머지 오염(五染)은 법집(法執)이기 때문에 소지장(所知障)이 된다. 만약 이 뜻을 잡는다면, 근본무명은 두 장애의 융섭[二障攝]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의 해석은 이 뜻을 잡은 것이다. 둘째로 집상응염은 인집이기 때문에 번뇌장이 되고, 나머지 오염과 근본무명은 함께 소지장이 된다. 만약 이 뜻을 잡는다면, 근본무명은 곧 소지의 세분[所知細分]이니 뒤의 해석은 이 뜻을 잡은 것이다.
【문】 근본무명과 육염(六染)을 끊는 지위의 분제(分齊)는 무엇인가?
【답】 육염 중에서 집상응염(執相應染)은 지전(地前)에서 끊으며,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은 초지(初地)에서 끊으며,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은 칠지(七地)에서 끊으며,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은 팔지에서 끊으며,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은 구지에서 끊으며,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은 십지 및 불지(佛地)에서 끊는다. 근본무명(根本無明)은 지전에서 관찰하여 배워서 끊고, 초지에서 분(分)에 따라 벗어남을 얻으며, 불지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나니,222) 그러므로 십지에서도 또한 근본무명을 끊음을 마땅히 알라.
【문】 무명(無明)은 근본이기 때문에 상위(上位)에서 끊고, 염심(染心)은 지말(枝末)이기 때문에 하위(下位)에서 끊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 것인가?
【답】 생겨서 일어날[生起] 때는 본말이 있더라도 다스려 끊을 때에는 전후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장주의 『기신소』에 이르기를,223) “이제 무명과 염심에 전후가 있다고 설하지만, 그러나 다스려 없앰은 일시(一時)에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니, 이 문장으로서 충분히 증명된다.
【문】 근본무명에는 분(分)의 다름이 있지 않은데, 어떤 이유로 상위에서 끊고 하위에서도 또한 끊는가?
【답】 원효[曉公]의 『이장장(二障章)』에 이르기를, “위에서 ‘통상(通相)의 무명주지(無明住地)224)는 또한 이승의 분(分)에 따라 끊는 바가 되니, 이와 같은 무명주지를 알지 못한다면 거칠고 세밀함은 있게 되나, 가볍고 무거움은 없게 된다’고 설하였으니, 만약 거칠고 세밀함이 있기 때문에 단(斷)과 부단(不斷)이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팔식(八識)과 통하여 상응(相應)한다 할 수 있고, 만약 한결같이 마음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거칠고 세밀함과 가볍고 무거움의 다름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승(二乘)에 단(斷)과 부단(不斷)이 있겠는가? 만약 아견(我見) 등의 혹(惑)을 똑같이 미혹하게 했다면, 이치에 미혹한 바이기 때문에 비록 거침[麤]이 아니라 하더라도 똑같이 끊어진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말나와 상응하는 무명이다. 견혹(見惑)과 더불어 똑같이 미혹한다면, 무아(無我)의 이치를 미혹하였기 때문에 견도(見道)에서 응당 함께 끊어져야 한다. 만약 이 미세함으로 인해 함께 끊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극히 세밀한 것인데 어째서 함께 끊어지는가? 대답하면, 무명주지는 그 상(相)이 미세하고 비밀스럽고 거칠고 세밀하고 가볍고 무거워서 일정하게 설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일체의 종(種)이 모두 설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공력(功力)이 증강(增强)되어서 모든 미혹을 두루 일으킨다면, 오직 거칠 뿐이지 세밀함은 아니라고 설할 수 있으나, 만약 행상(行相)이 아직 나뉘지 않아서 마음이 상응하지 않음에 나아간다면, 오직 세밀함뿐이고 거침은 아니라고 설할 수 있다. 장애하는 바를 논한다면, 위를 장애하고 아래를 장애하니 무거움[重]도 있고 가벼움[輕]도 있다고 설할 수 있다. 곧바로 자상(自相)에 대해서 하나도 더 미세함을 늘리지 않았다면, 응당 가벼움도 아니고 무거움도 아니라고 설할 수 있다. 그 위에 무거움이 없고 그 아래에 가벼움이 없다고 해서 또한 오직 중품(中品)에 있다고 설할 수는 없다. 단지 가벼움이 아닌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하지(下智)는 능히 없애고, 무거움이 아닌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상지(上智)도 또한 끊으며, 가벼움과 무거움이 아니기 때문에 중지(中智)도 멸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문장을 자세히 본다면 미혹은 없는 것이다.
【문】 만약 근본무명을 하지(下智)도 또한 끊는다면, 어떤 이유로 『승만경』225)에서는 ‘부처[佛]의 보리지(菩提智)라야 능히 끊을 수 있다’고 말하였는가?
【답】 무명의 세분(細分)은 불지(佛地)에서 바야흐로 다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 하위(下位)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광의의 해석에 나아가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전(地前)에서 사(使)를 조복함’226)을 해석하여 뜻을 나타낸 것이고, 둘째로 ‘초지(初地)에’227) 아래에서는 ‘초지에 사(使)의 종자를 끊는다’228)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뒤의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229) 아래에서는 ‘지상(地上)에서 습기(習氣)를 없앤다’230)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지장(智障)을 제거하기 위해’231)라고 한 것은, 앞의 시교(始敎)에서 이르기를 , “중생을 윤택하게 해서 거두어 교화하기 때문이고,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소지장을 끊기 위하기 때문이고, 대보리(大菩提)를 얻기 위하기 때문이다”232)라고 하였으니, 지금은 지장(智障)을 없앤 뜻을 들어서 나머지 세 가지를 똑같이 취한다.
『양론』의 두 문장은 모두 제3권에 있다.
【문】 지금 이 문장 중에서는 『양론』 등의 여러 곳에서 문장을 인용하였고,233) ‘미혹에 의탁하여 지위를 나타냄[寄惑現位]234)의 첫 번째 문장 중에서도 또한 이 문장을 인용하였는데, 두 곳에서 인용한 뜻은 어떻게 다른가?
【답】 여기에서 인용한 의미는 출세정심(出世淨心)을 얻고 또한 성인위(聖人位)를 얻기 때문이며, 번뇌장을 자재(自在)로 능히 끊어서 지장(智障)을 없애기 위함 때문이니, 그러므로 남겨둔다는 뜻을 인용한 것이다. 전자에서는 번뇌를 끊는 뜻을 취하여 변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뜻을 남겨둔 것이다.
『인왕경(仁王經)』에 ‘지전(地前)에서 인공(人空)을 얻더라도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235)고 한 것은 그 경에서 이르기를,236) “또한 다음에 성종성(性種性)237)은 십혜관(十惠觀)을 행하고, 나아가 호공관(護空觀)을 닦고, 또한 항상 백만바라밀(百萬波羅蜜)을 행해서 생각 생각마다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면 ‘호공관을 닦는’ 것은 인공을 얻는다는 뜻이고, ‘항상 백만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경전에 이르기를,238) “또한 다음에 도종성(道種性)239)은 견고한 인(忍) 가운데 머물고, 나아가 항상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가고, 마음 마음마다 적멸한 채로 삼계(三界)에서 생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면, 마음 마음마다 적멸하다는 것은 인공을 얻었다는 뜻이며, ‘삼계에서 생을 받는다’는 것은 곧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기신론』에’240)라고 한 것은 인공문(人空門)에 의지하여 법신(法身)을 보기 때문에 번뇌장을 자재(自在)하게 능히 끊는 것이다.
둘째로 ‘초지(初地)에서 사(使)의 종자를 끊는다’241)를 해석한 것 가운데, 첫째는 육식(六識) 중에서 이장(二障)의 종자를 잡은 것이며, 둘째로 ‘말나’242)의 아래에서는 말나번뇌(末那煩惱)를 잡은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먼저는 올바로 밝힌[正明] 것이고, 그 다음은 인용하여 증명한[引證]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초지(初地) 이상에서 지장(智障)243)의 일분추(一分麤)를 끊는다’244)고 한 것을 어떤 이는 ‘십지(十地) 가운데서 각각 지장(智障)의 일분(一分)을 끊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지금의 해석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초지 중에서 일분의 추품[一分麤品]을 끊고, 이지(二地) 이상에서 습기(習氣)를 없앤다.
【문】 다만 ‘초지 이상’이라고 말하였고, ‘오직 초지’라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일분(一分)을 끊는다’고 한 것이 오직 초지만을 가리킨다고 하는가?
【답】 여기에서 의미하는 말은 초지에서 지장(智障)의 일분을 끊기 때문에 초지 이상에서는 번뇌장을 더 이상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이다.245) 「초문(抄文)」에서 “곧바로 십지(十地)에 진입해서 처음에 거침[麤]을 끊고 나중에 세밀함[細]을 끊는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그 뜻이다.
‘인용하여 증명함’ 중에서 이 문장을 인용한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것을 결론짓는 것이니, 이른바 ‘견도(見道) 중에서 견수(見修)를 나누지 않고 일체를 함께 끊는다’는 것은 이 문장의 증거가 된다. 둘째로는 뒤의 것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른바 이 문장으로 증거를 삼으니, 마땅히 알라, ‘말나번뇌(末那煩惱)는 또한 초지(初地)에서 거침을 단절하니246), 말하자면 수도번뇌(修道煩惱)는 이미 견도 중에서 일체를 다 끊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記】 말나번뇌 또한 초지(初地)에서 거친 것을 끊고 나중에 남은 습기를 없앤다. 이 때문에 무성(無性)의 『섭론(攝論)』에 이르기를, “염오말나(染汚末那)를 굴려서 평등성지(平等性智)247)를 얻으니, 처음에 관(觀)을 나타낼 때 우선 이미 증득(證得)하고 수도위(修道位) 중에 다시 굴려서 청정해진다”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면, 굴려서 청정해지는 것은 습기를 없애는 것이다. 정사(正使)로써 먼저 끊기 때문에 나중에는 단지 굴려서 청정해진다고 말할 뿐이지 끊는다[斷]고는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이 진견도(眞見道)248)에 들어갈 때 잠시 잠복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 올바로 끊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굴려서 다시 청정해진다고 말할 수 없으니, 총체적으로 아직 끊지 못한 것을 어떻게 굴려서 청정해졌다고 이름하겠는가? 만약 시교(始敎)에 의지한다면 그와 같은 설을 용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교(敎)는 지상(地上)에서 단지 습기를 없애기 때문에 『보성론』에서 이르기를, “깨끗하지 않음[不淨]은 일체 범부가 번뇌장이 있기 때문이고, 더러움이 있음[有垢]은 여러 성문ㆍ벽지불 등에 지장(智障)이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허물이 있음[有點]은 여러 보살마하살 등이 두 종류의 습기(習氣)의 장애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그 논석(論釋)에서 “초지 이상을 마하살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므로 단지 습기의 장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습기는 정사(正使)의 종자를 끊고서부터 틈도 없이 바야흐로 습기가 있게 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아직 끊지 못함 이전에는 미미하고 희박한 번뇌가 없기 때문이며, 종자[種]를 끊으면 틈도 없이 바야흐로 미미하고 희박한 번뇌가 있기 때문에 논설에서는 “틈도 없이 습기를 일으킨다”고 한 것이다.
【문】 어째서 지상(地上)에서 번뇌를 다하게 해도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
【답】 지력(智力)이 뛰어나기 때문이요, 지장(智障)의 정사(正使) 또한 끊어서 없애기 때문이다.
시교(始敎)나 소승(小乘)의 돈출리인(頓出利人)같은 이는 욕계(欲界)의 미혹의 여섯 품을 끊어서 다하였을 때 위의 두 계(界)의 여섯 품도 똑같이 모두 끊어서 다하기 때문에 오히려 일래과(一來果)도 얻지 않는데, 하물며 보살(菩薩)의 도력(道力)이 뛰어남에 있어서랴. 또한 이미 지장(智障)의 사(使)를 끊었기 때문에 지전(地前)과 시교(始敎)에서 그 잘못[失]을 용인하나 이 가운데에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 교(敎) 중에서 올바로 미혹[惑]을 끊을 때 지(智)가 일어나고 미혹이 멸하니, 초(初)도 아니고 중간과 뒤도 아니라, 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멸하는가? 허공이 본래 청정한 것처럼 이와 같이 멸(滅)한다. 자세히는 『십지론』의 설과 같다.
또한 이 교 가운데 번뇌 등의 법은 모두 진여가 인연을 좇아서 짓는 것이니, 그러므로 진여(眞如)와 다르지 않으니, 이것이 번뇌의 뜻이며, 『기신론』의 설과 같다. 또 경전에 이르기를, “일체 법이 곧 여여하다[如如]”라고 하였으니, 번뇌도 이에 준한다. 그러므로 앞의 여러 교(敎)와 더불어 시설(施設)이 같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 둘째로 말나번뇌를 끊는 것 가운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의(自意)를 표방하였고, 둘째는 인용해서 증명하였고[引證], 셋째로 뒤의 ‘약언(若言)’249)의 아래는 외도의 계교를 차단한 것이다.
‘인용해서 증명함’에 대해서다;
【문】 『공목장』 제삼 번뇌행사행조림장(煩惱行使行稠林章)의 시교 중에서 이 문장을 인용하였는데, 어찌하여 지금 여기 종교에서 인용하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논에 이르기를,250) ‘수(數)의 순서[次第]와 같고, 혹은 상응(相應)하는 바를 따른다’고 하였는데, 풀어서 말하면, ‘수의 순서와 같다’는 것은 순서와 같이 사식(四識)을 굴려서 사지(四智)를 이룬다는 뜻으로서 이는 시교에 해당되며, ‘상응하는 바를 따른다’고 한 것은 곧 종교에 해당된다. 『공목』은 앞의 뜻을 잡은 것이고, 이 장(章)은 뒤의 뜻을 잡은 것이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인용한 논의 문장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로 시교를 잡는 것이니, 진견도(眞見道)에 들어가면 잠시 잠복해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염오말나(染汚末那)를 굴린다”251)고 말하였고, 뒤의 여러 지(地) 중에서 점점 조복하기 때문에 “굴려서 다시 청정해진다”252)라고 말한 것이다. 둘째로 종교를 잡는 것이니, 초지(初地)에서 거친 것을 끊기 때문에 “염오말나를 굴린다”고 말하였고, 뒤에 남은 습기[殘習]를 없애기 때문에, “굴려서 다시 청정해진다”라고 말하였으니, 그러므로 두 곳[處]은 각각 한 가지 뜻[義]을 좇아서 인용한 것이다.
셋째로 ‘지상(地上)에서 습기를 없앤다’를 해석한 것에 대해서다;
【문】 앞의 단락에서 이미 ‘굴려서 다시 청정해진다는 것은 습기를 없애는 것이다’253)라고 말하였다면, 앞 단락에서 이미 습기를 없앤 뜻을 나타내었는데 어째서 이 가운데에서 바야흐로 습기[習]를 없앤 뜻을 나타내는가?
【답】 앞 단락의 뜻은 『섭론』의 문장을 인용하여 말나번뇌(末那煩惱)가 초지에서 정사(正使)를 끊은 뜻을 증명하였으니, 이는 논의 ‘굴려서 청정해짐’의 뜻을 해석하였을 뿐이지 ‘지상에서 습기를 없앤다’고 한 뜻을 올바로 해석한 것은 아니다. 또한 앞에서 ‘굴려서 청정해진다는 것은 습기를 없앤다는 것’이라고 한 것에서 ‘오직 말나번뇌의 습기를 잡았을 뿐이다’에서부터 ‘이 때문에’254)의 아래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육, 칠 두 식의 번뇌습기 및 소지장(所知障) 습기를 끊는 뜻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는 앞의 초지에서 정사(正使)를 끊은 뜻으로 인하여 지상(地上)에서 습기를 없앤다는 뜻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의(自意)를 표방하고, 둘째는 인용해서 증명하고, 셋째는 인용한 문장을 해석하고, 넷째는 묻고 대답하는 것이다.
셋째의 인용한 문장을 해석하는 가운데, ‘미박(微薄)’255)은 습기가 미세하고 가볍기 때문에 ‘미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넷째의 문답 중에서, 대답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올바르게 답하고, 둘째로 ‘여시교(如始敎)’256)의 아래는 열등함을 들어서 뛰어남을 설명하였고, 셋째로 ‘약지전(若地前)’257)의 아래는 결론을 맺은 것이다.
열등함을 들어서 뛰어남을 나타낸 것 가운데 ‘시교소승(始敎小乘)’은 우법(愚法)을 간별함[簡]이다. 저 ‘돈출리(頓出離)’ 등은 만약 오직 욕계(欲界)의 수혹(修惑) 아홉 품 중에 앞의 여섯 품을 끊을 때 위 두 계(界)의 앞의 여섯 품을 끊지 않는다면 일래과(一來果)를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욕계의 여섯 품을 끊을 때 위의 두 계(界)도 끊기 때문에 일래과를 얻지 못하니, 이것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보살임에랴. 둘째로 끊음의 상[斷相] 및 미혹의 체[惑體]를 나타낸 것 가운데, 첫째는 끊는 상을 밝힌 것이고, 둘째로 ‘우차(又此)’258)의 아래에서는 미혹의 체를 나타낸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초(初)도 아니고, 중(中)도 후(後)도 아니다’259)라고 한 것은 『십지론』260)의 문장이다.
【문】 법장은 상반(相反)과 상속(相續)261)의 두 문을 잡아서 이 논의 문장을 해석하였는데,262) 이상(異相)263)은 무엇인가?
【답】 혹(惑)과 지(智)를 동시에 세워서 논함이 상반이고, 오직 지(智) 가운데서만 논을 세운 것이 상속의 문장이다.
【문】 ‘초(初)도 아니고 중(中)도 후(後)도 아니다’라고 한 것과 ‘전중후(前中後)를 취한다’고 한 것은 어떻게 다른가?
【답】 앞의 구는 곧 본유(本有)264)이고, 뒤의 구는 수생(修生)265)이기 때문에 다르다. 이 때문에 청량(淸凉)이 말하기를,266) “‘초(初)도 아니고 중(中)도 후(後)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인연무성(因緣無性)을 말한 것이니, 곧 단(斷)의 부단(不斷)이다. ‘전중후’는 연상(緣相)을 파괴하지는 않은 것이니, 곧 부단의 단이다”라고 한 것이니, 따라서 본유(本有)는 수생의 뜻이다.
‘경에 이르기를, 모든 법은 곧 여여하다’267)고 한 것은 『유마경』268)이다.
【記】 둘째로 미혹에 의지하여 지위를 드러냄을 밝히면, 여러 성교설(聖敎說)269)에는 대략 열여덟 문[十八門]이 있다.
첫째로 두 장애[障]에 의탁해서 두 위[位]를 드러내는 것이니, 이른바 혹(惑)과 지(智) 두 장애를 나누어서 비위(比位)와 증위(證位)의 두 지위를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양섭론』에 이르기를, “지전(地前)에서 점차 번뇌장을 없애고 지상(地上)에서 점차 지장(智障)을 없앤다”고 하였으며, 또한 이르기를, “십해(十解) 이후에 출세정심(出世淨心)을 얻는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지전(地前)에서 비록 인무아(人無我)를 얻더라도 법무아(法無我)가 아직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무아 또한 청정하지 않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인아집(人我執)은 앞의 십해(十解) 가운데 이미 없어졌고, 지금은 오직 법아집(法我執)을 멸한다”고 하였다. 또한 『인왕경』에 이르기를, “습종성(習種性)270)에서는 이미 생공위(生空位)271)에 드니, 성인(聖人)의 성품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본업경(本業經)』과 『기신론』 또한 이 설과 같다.
둘째로 피(皮) 등 세 가지 미혹[三惑]에 의탁해서 삼승기(三僧祇)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섭론』에 이르기를, “처음 승기(僧祇)에서는 피번뇌(皮煩惱)를 끊고, 두 번째 승기(僧祇)에서는 육번뇌(肉煩惱)를 끊으며, 세 번째 승기(僧祇)에서는 심번뇌(心煩惱)를 끊는다”고 하였다.
셋째로 이 세 가지 미혹으로 지지(地地)마다 세 가지 마음272)이 같지 않음을 의탁해서 드러낸 것이니, 마치 『양섭론』의 삼십삼승기 가운데서, “지지(地地) 가운데 입심(入心)하여 피(皮)를 없애고, 주심(住心)하여 육(肉)을 없애며, 출심(出心)하여 심(心)을 없앤다”고 설한 것과 같다.
넷째로 두 장애의 거칠고 미세함[麤細]으로 삼위(三位)를 드러내는 것이다. 『지지론(地持論)』에서 이르기를, “이장(二障)은 삼처(三處)에 통하니, 지전(地前)과 지상(地上), 그리고 불지(佛地)이다”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로 염심(染心)273)의 거칠고 세밀함으로써 삼위(三位)에 의탁하여 삼신(三身)을 드러내는 것이니, 마치 『금광명경』에서 “모든 조복의 도(道)에 의탁하여 기사심(起事心)을 다하면 화신(化身)을 나타낼 수 있고, 법단(法斷)의 도(道)에 의탁하여 근본심(根本心)을 다하면 응신(應身)을 나타낼 수 있고, 승발(勝拔)의 도(道)에 의탁하여 근본심을 다하면 법신(法身)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였으니, 어떤 사람이 풀어서 말하기를, “조복의 도는 지전(地前)이고 기사심은 바로 제육식이며, 법단의 도는 지상(地上)이고 근본심에 의지함은 말나(末那)인데, 뇌야식(賴耶識)라는 본심(本心)에 의지해 인연하기 때문이며, 승발의 도는 바로 금강위(金剛位)이고 근본심은 바로 뇌야식이다”라고 하였다.
여섯째로 삼장(三障)274)에 의탁해서 바로 삼신(三身)을 드러내는 것이니, 그러므로 저 경에서 이르기를, “번뇌장의 청정으로 능히 응신(應身)을 드러내고, 업장의 청정으로 능히 화신(化身)을 드러내며, 지장(智障)의 청정으로 능히 법신(法身)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일곱째로 삼무성(三無性)275)을 미혹하여 일으킨 바의 번뇌로 삼신(三身)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범부(凡夫)는 삼상(三相) 때문에 묶임이 있고 막힘이 있어서 삼신을 멀리 떠나므로 삼신에 이르지 못한다. 어떤 것이 삼상(三相)인가? 첫째는 사유분별상(思惟分別相)이고, 둘째는 의타기상(依他起相)이며, 셋째는 성취상(成就相)이다. 이와 같이 삼상이 능히 이해하지 못하고, 능히 멸하지 못하고, 능히 청정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삼신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곧 삼상이 능히 이해되고, 능히 멸하고, 능히 청정해진다면, 여러 부처가 삼신에 이른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능해(能解)는 소집성(所執性)이니 마땅히 알아서 이해하기 때문이며, 능멸은 염분의타기성(染分依他起性)이니 마땅히 끊고 없애기 때문이며, 능정(能淨)은 진여(眞如)를 얽매고 있는 것을 닦아서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釋】 ‘둘째로 혹(惑)에 의탁하여 지위를 나타낸다’276)고 한 것에서, 앞은 시교(始敎)를 잡으면 두 장애로 분별되니, 지전(地前)에서 현행[現]을 조복하고, 초지(初地)의 견도(見道)에서 저 종자를 단박에 끊는다. 구생(俱生) 가운데 번뇌장은 초지 이후에 자재롭게 능히 끊을 수 있으나 남겨두기 때문에 끊지 못한다.277) 한편 종교(終敎)278)를 잡으면 보살인(菩薩人)은 두 장애[二障] 가운데 구생기(俱生起)279) 및 분별기(分別起)280)를 나누지 않으니, 다만 정사(正使)와 습기만이 있다. 지전에서 사(使)의 현행을 조복하고, 초지에서 사(使)의 종자를 끊고, 지상(地上)에서 습기를 없애고, 불지(佛地)에서 궁극적으로 청정해진다.281) 이미 이교(二敎)에서 종지를 세운 것이 이와 같음을 알았지만, 나머지 성교(聖敎)와 이것과는 서로 어긋나는데 어떻게 회통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열여덟 문으로 여러 교를 회통하고자 하기 때문에 차례대로 온 것이다. 이 가운데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수를 표시한 것이고[標數], 둘째는 따로 해석한 것이고[別釋], 셋째로 ‘이상제문(已上諸門)’282)의 아래는 결론지은 것이다.
따로 해석함 가운데 이 열여덟 문은 각각을 잡아서 변별한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혹장(惑障)283)이 두 장애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초문(初門)이 있는 것이고, 제이와 제삼과 제사문은 피(皮) 등의 삼혹(三惑)284)을 잡은 뜻이 같기 때문에 한 곳[一處]에서 변별한 것이고, 제오문과 제육문과 제칠문은 삼신(三身)을 나타낸 뜻이 같기 때문에 한 곳에서 변별한 것이다. 제팔과 제구의 두 문은 정사와 습기로 나눈 뜻이 같기 때문이고, 제십과 제십일의 두 문은 색심번뇌(色心煩惱)를 잡은 뜻이 같기 때문이고, 제십이와 제십삼의 두 문은 견(見)과 수(修)로 나눈 뜻이 같기 때문이고, 제십사문은 앞의 제십삼문 가운데 견도소단(見道所斷)의 분별혹(分別惑)이니, 빌린 바의 삼연(三緣)285)에서 삼현(三賢)286)을 의탁하여 나타내기[寄現] 때문에 다음으로 변별한 것이다. 제십오와 제십육의 두 문은 앞의 제십삼문 가운데 수도소단(修道所斷),287) 구생번뇌(俱生煩惱)가 십지 중에서 나누어 끊어지기 때문에 다음으로 변별한 것이다. 제십칠과 제십팔의 두 문은 무명(無明)을 끊는 뜻이 같기 때문에 한 곳에서 변별한 것이다.
만약 위(位)를 잡아서 변별하면, 앞의 여덟 문은 통틀어 비증(比證)288)을 잡은 것이고, 다음의 다섯 문은 오직 증위(證位)를 잡은 것이며, 다음의 제십사문은 오직 비위(比位)를 잡은 것이고, 뒤의 네 문은 또한 증위를 잡은 것이다.
【문】 문마다 여럿으로 나누면 세 단락이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뜻을 표한 것이고, 둘째는 인용해서 증명한 것이고, 셋째로는 인용한 문장을 해석한 것이다. 혹은 오직 두 가지만이 있으면 인용한 문장을 해석함이 없으며, 혹은 오직 하나만 있으면 뒤의 두 단락이 없다. 제십사문과 제십오문 등과 같은 것이다.
제삼문의 ‘삼십삼승기’289)는 십지 중에서 각각 입(入)과 주(住)와 출(出)을 나누기 때문에 삼십이 되고, 삼현(三賢)이 셋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말하자면 그 논290)에서 이르기를, “다음으로 삼십삼승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방편지(方便地) 중에 삼아승기가 있고, 십지(十地) 중에서 지지(地地)에 각각 삼아승기가 있으니, 말하자면 입(入)과 주(住)와 출(出)이다”라고 하였으니, 저것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제사문(第四門) 가운데 ‘이장삼처(二障三處)를 지나친다[過]’291)고 한 것은, 말하자면 그 논 중에292) 두 장애를 나누어서 피(皮)ㆍ부(膚)ㆍ골(骨)의 삼장(三障)으로 삼고는 삼위(三位)에서 끊기 때문이다.
제오문(第五門)에 대한 것이다;
【문】 염심의 거칠고 세밀함을 삼위에 의지하여 삼신(三身)을 나타낸다’293)고 한 것에서, 삼신은 곧 불과(佛果)294)인데, 어떤 이유로 이 문(門)은 또한 비증(比證)에 통하는가?
【답】 나타낼 바가 비록 불과이더라도 이미 ‘조복의 도(道)는 곧 지전(地前)이요, 법단(法斷)의 도(道)는 곧 지상(地上)’295)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니, 능견심(能見心)을 잡으면 곧 비증이 되므로 어긋남이 없다.
‘유인(有人)’296)은 원효이니, 원효가 『금광명경소』297)를 지었기 때문이다.
【문】 장주(章主)의 『기신론』298)에서 이렇게 말했다.
“『금광명경』에 ‘모든 조복의 도(道)에 의탁하여 기사심(起事心)을 없애고, 법단(法斷)의 도에 의탁하여 근본심을 없애며, 승발(勝拔)의 도에 의탁하여 근본심을 다한다’고 한 것과 같으니, ‘조복의 도’라고 한 것은 곧 삼현위(三賢位)이며, ‘기사심을 없앤다’는 것은 이 논 중에 추분별집착상(麤分別執着相)을 버리는 것이 바로 이상(異相)을 멸하는 것임과 같다. ‘법단의 도’는 법신위(法身位)에 있으며, ‘의근본심멸(依根本心滅)’은, 논 중에서 추념상(麤念相)을 버림이 바로 주상(住相)을 멸하는 것임과 같다. ‘승발의 도’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이며, ‘근본심이 다한다’고 한 것은 논 중에서 미세념(微細念)을 떠남이 바로 생상(生相)을 멸하는 것임과 같다.”
그렇다면 이 논에서는 말나식(末那識)은 없고, 기사(起事)의 삼심(三心)으로서 생주이(生住異)의 삼상(三相)에 짝하고, 이 장 가운데 삼식(三識)299)에 짝하는데, 어째서 회통한다고 하는가?
【답】 이 경(經)은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삼식(三識)에 짝할 수도 있고, 생주이(生住異)의 삼상(三相)에 짝할 수도 있다. 마땅한 바를 따랐으므로 훼손됨이 없다.
제육문(第六門)에 대한 것이다;
【문】 ‘경에 번뇌장의 청정이 능히 응신(應身)을 나타낸다’300)고 말한 것은 번뇌장이 곧 열반을 장애하고 소지장이 곧 보리를 막기 때문에 번뇌장의 청정이 법신(法身)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답】 만약 상반됨[相反]을 든다면, 힐난한 바와 같다. 이제 삼장(三障)의 거침과 세밀함을 잡는다면, 업장은 가장 거칠기 때문에 그것을 청정히 하면 화신(化身)을 나타낸다. 번뇌는 그 다음으로 거칠기 때문에 청정히 하면 응신(應身)을 나타낸다. 지장(智障)은 가장 미세하기 때문에 청정히 하면 법신(法身)을 나타낸다.
【記】 여덟째로 사장(四障)301)에 의탁해서 사위(四位)를 나타내는 것이니, 여기에는 두 가지 뜻[義]이 있다.
첫째로 정사(正使)302)를 잡아서 지전(地前)의 사위(四位)ㆍ사행(四行)ㆍ사인(四因)ㆍ사보(四報)를 나타내는 것인데,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로 천제불신장(闡提不信障)의 사(使)를 멸하고 나서 십신(十信)의 지위를 뒤집어 나타내어 신(信)과 낙(樂)의 대승행(大乘行)을 이루니, 정덕인(淨德因) 및 철륜왕보(鐵輪王報)가 된다. 둘째로 외도집아장(外道執我障)에 의탁해서 십해(十解)의 지위를 뒤집어 나타내어 반야행을 이루니, 아덕인(我德因) 및 동륜왕보(銅輪王報)가 된다. 셋째로 성문외고장(聲聞畏苦障)을 십행(十行)의 지위에 의탁해 나타냄으로서 파허공정기삼매행(破虛空定器三昧行)을 이루니, 낙덕인(樂德因) 및 은륜왕보(銀輪王報)가 된다. 넷째로 독각사대비장(獨覺捨大悲障)을 십회향(十廻向)의 지위에 의탁해 나타냄으로서 대비행(大悲行)을 이루니, 상덕인(常德因) 및 금륜왕보(金輪王報)가 된다.
또한 앞의 사장(四障)을 뒤집어서 네 가지 행[四行]을 얻은 것이 곧 불자의 네 가지 뜻[佛子四義]이 된다. 첫째로 초장(初障)을 뒤집어서 신과 낙의 대승종자(大乘種子)를 이루어 인(因)이 되니, 마치 아버지와 같다. 둘째로 반야가 연(緣)이 되니, 마치 어머니와 같다. 셋째로 파허공정(破虛空定)을 드러내고 소승의 집착을 여의어서 법신을 견고하게 하니, 마치 태(胎)와도 같다. 넷째로 대비(大悲)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니, 마치 유모(乳母)와 같다. 이 네 가지 연[四緣]을 갖추었기 때문에 지전(地前)으로부터 초지(初地) 이상의 여러 불가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불자(佛子)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한 위의 네 종류는 마치 수레바퀴와 같이 화합하여 능히 움직이고[能運] 능히 굴러서[能轉] 해탈처(解脫處)에 이르니, 성왕륜(聖王輪)이 사사(四事)를 갖추는 것과 같다. 이른바 바퀴통[轂]ㆍ살[輞]ㆍ테[輻]ㆍ굴대[軸]이니, 그 순서대로 네 가지 뜻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둘째로 사장(四障)의 습기로써 지상(地上)의 사위(四位)ㆍ사정(四定)303)ㆍ사덕(四德)304)ㆍ사보(四報)에 의탁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첫째, 초지와 이지, 삼지에서 천제불신습(闡提不信習)을 멸하는 것이니, 곧 이 일위(一位)가 세간과 서로 같음을 나타낸다. 또한 대승광명삼매(大乘光明三昧)를 얻어서 정덕(淨德)을 이루고 인연생사변역보(因緣生死變易報)를 없앤다. 둘째, 사지와 오지, 육지에서 외도아집습(外道我執習)을 멸하는 것이니, 곧 이 일위가 이승(二乘)과 서로 같음을 나타낸다. 집복덕왕삼매(集福德王三昧)를 얻어 아덕(我德)을 이루어서 방편생사(方便生死)를 없앤다. 셋째, 칠지와 팔지, 구지에서 성문외고습(聲聞畏苦習)을 없애는 것이니, 곧 이 일위(一位)가 대승과 서로 같음을 나타낸다. 현호삼매(賢護三昧)를 얻어 낙덕(樂德)을 이루어서 유유생사(有有生死)를 없앤다. 넷째로 십지(十地)로부터 불지 이후에 이르기까지 독각사대비습(獨覺捨大悲習)을 없애는 것이니, 이 일위가 인과가 원만함을 나타낸다.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를 얻어 상덕(常德)을 이루어서 생사(生死)305)가 있지 않다. 네 가지 덕[四德]이 원만하기 때문에 생사가 영원히 다하니, 그러므로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의 뜻은 넓게는 『무상의경(無上依經)』ㆍ『본업경』ㆍ『불성론』ㆍ『보성론』ㆍ『양섭론』 등의 설과 같다.
또한 이 네 가지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두 장애에 통하고, 뒤의 두 가지는 오직 지장(智障:所知障)일 뿐이다. 정사(正使)는 지전(地前)에서 없어지고, 습기는 지상(地上)에 깨끗해지니, 이 문장 또한 이를 증명한다.
아홉째, 십지 중에서 상(相)을 나누기 때문에 삼지종심(三地終心) 이래로 두 장애의 수혹(修惑)을 끊어서 정사(正使)가 모두 다하고, 사지(四地) 이후에는 다만 미미한 습기[微習]가 있을 뿐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의 삼지(三地)의 상은 세간과 같고, 사지 이후는 바로 출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지경』 제삼지의 말문(末文)에 이르기를, “일체 욕망의 속박이 굴러서 다시 미세하게 엷어지며, 일체의 색(色)의 속박이 굴러서 다시 미세하게 엷어지며, 일체의 유(有)의 속박이 굴러서 다시 미세하게 엷어지고, 일체 무명(無明)의 속박이 굴러서 다시 미세하게 엷어지며, 모든 견(見)의 속박이란 것들은 앞에서 이미 제거되어 끊어졌다”고 하였다. 『지론석(智論釋)』에 이르기를, “일체 욕망의 속박이 굴러서 미세하게 엷어진다는 등의 것은 일체의 수도(修道)에서 욕(欲)ㆍ색(色)과 무색(無色)과 소유(所有)의 번뇌와 그 인(因)과 동시에 무명(無明)의 습기를 끊어 모두 다 미세하게 엷어져서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모든 견(見)의 속박이란 것은 초지(初地)의 견도(見道)에서 이미 끊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그 인(因)’이라는 것은 번뇌장의 종자이고, 무명습기(無明習氣)는 소지장의 종자이다. 두 장애의 종자는 동시에 멀리 여의기 때문에 ‘동시에[同]’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두 장애의 수혹(修惑)의 정사(正使) 종자는 이 지(地)에서 모두 다한다. 이상은 다분히 종교(終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釋】 제팔문(第八門)에 대해서다.
【문】 ‘첫째로는 정사(正使)를 잡아서 지전(地前)의 사위(四位)ㆍ사행(四行)ㆍ사인(四因)ㆍ사보(四報)를 의탁하여 나타내었다’고 한 것 등은 장주의 명난소(明難疏)306) 중에서는 시교(始敎)에서 인용한 것인데, 어떤 이유로 지금의 문장은 종교(終敎)의 임시로 의탁함[假寄] 중에서 인용하는 것인가?
【답】 만약 십신(十信)에서 위(位)를 이루는 뜻을 근거로 한다면, 곧 시교에 해당된다. 만약 정사(正使)를 지전에서 끊고, 습기가 지상(地上)에서 끊어진다는 뜻을 잡는다면, 곧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책(嘖)과 답(答)을 세움이 있으니, 답 가운데 ‘천제불신장(闡提不信障)’307)이란 천제가 대승도(大乘道)를 믿지 않고 십신(十信)은 이와 반대이기 때문에 대승행(大乘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외도아집장(外道我執障)’308)이란 십해위(十解位) 가운데 반야행(般若行)을 이루어서 인공무아리(人空無我理)를 이해하기 때문에 저 집착[執]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위아덕인(爲我德因)’309)이란 무아(無我)로 말미암기 때문에 진아(眞我)의 덕(德)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문외고장(聲聞畏苦障)’310)이란 이 사람이 생사(生死)의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파허공기삼매행(破虛空器三昧行)’311)이란 성문인(聲聞人)은 곧 생사의 허망함이 저 허공과 같기 때문에 두려워할 만한 것이나 열반은 진실하기 때문에 즐거워할 만하다는 것이니, 이제 허공과 같은 견(見)을 깨뜨리기 때문에 ‘파허공(破虛空)’이라고 말한 것이다. ‘독각사대비장(獨覺捨大悲障)’312)이란 십회향(十廻向) 가운데 대비행(大悲行)을 이루기 때문에 저 장(障)을 뒤집는 것이다.
【문】 ‘대승광명삼매(大乘光明三昧)를 얻는다’313)고 한 것은 십지에서 총체적으로 정(定)을 회통한 것인데314), 어떤 이유로 초지와 이지, 삼지의 정이 된다고 하는가?
【답】 『양섭론(梁攝論)』315)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논(論)에서 ‘대승광삼마지(大乘光三摩地)’라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대승에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성(性), 둘째는 수(隨), 셋째는 득(得)이다. 성은 곧 삼무성(三無性)이요, 수는 곧 복덕지혜행(福德智惠行)이 융섭한 바의 십지(十地)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수순함에 성품이 없는 것이며, 득은 얻은 바 사덕과(四德果)이다. 정(定)은 위의 세 가지를 반연하여 경(境)으로 삼기 때문에 대승이라고 부른다. 이 정(定)에 의지하여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고, 무분별지로 말미암아 진여(眞如)와 부처가 다름이 없음을 비추기 때문에 광(光)이라고 부른다. 또한 열 다섯 가지의 광(光)의 공덕이 있으니, 곧 외광(外光)보다 뛰어나기 때문이요, 또한 이 정(定)은 능히 일천제(一闡提)의 습기와 무명의 어둠을 깨뜨리니, 곧 어둠[暗]을 대치하기 때문에 광(光)이라고 부른다.”
‘정(定)은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고, 열 다섯 종류의 광(光)의 공덕(功德)은 외광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광이라고 부른다’고 한 것은 십지에 통하니, 이는 십지에서 총체적으로 정(定)의 뜻을 회통한 것이다. ‘이 정은 능히 일천제의 습기를 파괴한다’고 한 것은 초지와 이지, 삼지에 국한되므로 이 가운데 초지와 이지, 삼지에서 대승광명삼매(大乘光明三昧)를 얻은 뜻에 해당된다.
또한 수(隨)의 뜻 가운데 복덕행(福德行)을 갖추니, 복행(福行)의 뜻을 잡으면 사지와 오지, 육지 가운데 집복덕왕삼매(集福德王三昧)를 얻으며, 덕행(德行)의 뜻을 잡으면, 칠지와 팔지, 구지 중에서 현호삼매(賢護三昧)를 얻는다. 한편 복덕을 갖춘 뜻을 잡으면, 제십지 중에서 수능엄삼매를 얻으니,316) 이와 같이 각각 한쪽 끝을 좇아서 십지 가운데 나누어 의탁할 뿐이다.
‘인연생사반역보(因緣生死反易報)’317)에 대해서다;
【문】 『양섭론』318)에서는 “초지와 이지, 삼지는 곧 방편생사(方便生死)요, 사지와 오지, 육지는 곧 인연생사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어떤 이유로 여기에서는 이것을 반대로 하는가?
【답】 법상공(法常公)의 『섭론소(攝論疏)』319)에서 말했다.
“첫째로 방편생사는 곧 무명(無明)을 반연으로 삼아서 생사(生死)에 감응하니, 그것은 직접적인 인[親因]이 아니기 때문에 방편이라고 부른다. 둘째로 인연생사320)는 곧 무류업(無流業)을 인(因)으로 삼아서 생사에 감응하니, 이것은 직접적인 인연을 말미암기 때문에 인연생사라고 부른다. 셋째로 유유(有有)는 앞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유(有)를 낳는 과(果)에 감응하는 것이니, 이런 과(果)가 있기 때문에 유유라고 부른다. 넷째로 무유(無有)는 곧 노사지(老死支)가 물러나고 그 보(報)가 다한 후에는 실로 유과(有果)321)가 있지 않으므로 무유라고 말한다. 만약 이름을 얻은 것을 논한다면, 방편은 소원함으로부터 이름을 얻고, 인연은 친한 것으로부터 명칭을 받으며, 유유는 과(果)로부터 목차를 세우고, 무유는 대치하여 드러난 칭호를 다한다. 이 일유(一有)가 다시 유(有)가 없기 때문에 초지에서 삼지(三地)에 이르기까지는 또한 사정(四定)ㆍ사공(四空) 및 시계(施戒) 등을 얻으나 아직 반야는 얻지 못하며, 세간과 서로 같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무명상(無明相)이 늘어나고 무루업(無漏業) 등의 상(相)은 숨는다. 그러므로 숨음으로 늘어남을 쫓아서 총체적으로 판별하면, 삼지는 모두 방편생사가 되고, 사지와 오지, 육지는 도품관지(道品觀智) 내지 인연관지(因緣觀智)를 얻는다. 현전(現前)의 무명상(無明相)은 숨고 무루업은 늘어나니, 숨음으로써 늘어남을 쫓아 판별하면 사지와 오지, 육지는 인연생사가 되고, 칠지에서 십지에 이르기까지는 주심(住心) 이래로 보행(報行)이 한껏 익고, 무루오분법신(無漏五分法身)은 더욱 밝고 깨끗함[明淨]을 늘린다. 인연상(因緣相)이 숨었다면, 인(因)으로써 과(果)를 쫓아 판별하여 유유생사(有有生死)가 된다. 십지종심(十地終心)에 생사가 있음은 시간이 짧기 때문이고, 불지(佛地)에 생사가 없음은 시간이 길기 때문이니, 유(有)로써 무(無)를 쫓아 판별하여 무유생사(無有生死)라고 한다.”
풀어서 말하면, ‘초지와 이지, 삼지는 방편생사이고, 사지와 오지, 육지는 인연생사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초지와 이지, 삼지는 인연생사다’이라고 한 것은 『불성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방편생사는 무명주지(無明住地)322)에서 능히 새롭게 무루업(無漏業)을 만드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무명이 행(行)을 만듦과 같다. 혹은 번뇌로 인해서 방편으로 같은 종류의 과[同類果]를 낳으니, 이를 이름하여 인연(因緣)이라고 하는데 무명(無明)이 불선행(不善行)을 낳는 것과 같다. 만약 같은 종류가 아닌 과[不同類果]를 낳는다면 다만 방편이라고만 부르니, 무명이 선행(善行)ㆍ부동행(不動行)을 낳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제 무명주지에서 새롭게 무루업행(無漏業行)을 낳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혹은 동류를 만들고 혹은 부동류를 만든다. 복행(福行)을 낳음을 이름하여 동류라고 하니, 똑같이 속(俗)을 반연하기 때문이며, 지혜행(智惠行)을 낳음을 부동류라고 부르니, 지(智)는 곧 참된 지혜[眞慧]이기 때문인데, 이를 방편생사(方便生死)라고 부른다.”
풀어서 말하면, 그 논의 문장으로써 지금의 문장을 회통[會]하면, 무명주지에서 새롭게 무루업을 만든다. 초지와 이지, 삼지는 상(相)이 세간과 같기 때문에 동류(同類)의 복행(福行)을 낳는 뜻이 증가하므로 인연생사(因緣生死)라고 부른다. 사지와 오지, 육지는 이 상이 이승(二乘)과 동일하기 때문에 부동류(不同類)의 지혜행(智惠行)을 만드는 뜻이 증가하므로 방편생사가 된다.
‘또한 네 가지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두 장애에 통하고, 뒤의 두 가지는 오직 지장(智障)이다’323)라고 한 것은 법상사(法常師)가 이십이무명(二十二無明)을 풀어서 말하기를, ‘육지(六地) 이상의 소단(所斷)이 곧 지장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뜻이다.
【記】 열 번째로 또한 십지(十地)에서 상(相)을 나누는 가운데 세간ㆍ삼승(三乘)ㆍ보살(菩薩) 등 삼위(三位)의 다름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러므로 『인왕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앞의 삼지에서는 삼계 가운데 색번뇌(色煩惱)를 끊고, 사지와 오지, 육지에서는 삼계 가운데 심번뇌(心煩惱)를 끊으며, 칠지와 팔지, 구지에서는 삼계 가운데 색습번뇌(色習煩惱)를 끊으며, 십지와 불지에서는 삼계 가운데 심습번뇌를 끊는다.”
풀어서 말하면, 삼지의 종위(終位)에서 상계(上界)의 정(定)을 얻고 궁극적으로 사공정(四空定)324)에 이르러서 하지(下地)의 색(色)을 여의기 때문에 색(色)의 미혹을 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지(四地) 이후에 이승(二乘)의 무루출세간위(無漏出世間位)를 얻어 세간의 색심(色心)325)이 모두 다하기 때문이다. 칠지 이후는 보살위이니, 앞보다 점차 미세해지기 때문에 색(色)과 심(心)의 습기(習氣)를 멸함에 의탁해서 그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열한 번째로 이 보살위 가운데 자재(自在)와 미자재(未自在) 등 두 위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함 때문이다. 칠지까지는 삼계의 색심번뇌(色心煩惱)와 그 과보를 멸함에 의탁하며, 팔지 이후에는 색심이습(色心二習)과 무명(無明)을 멸함에 의탁한다. 그러므로 『본업경』에 이르기를, “칠지까지는 삼계의 색ㆍ심 두 가지 습(習)과 그 과보를 멸하고, 멸하고 나서는 나머지를 남기지 않으며, 팔지에서는 색(色)의 습기와 무명(無明)이 다하고, 구지에서는 심(心)의 습기와 무명(無明)이 이미 멸하여 없어지고, 십지에서는 두 가지 습기와 무명(無明)이 다 없어진다”고 하였다.
열두 번째로 삼무성론(三無性論)에 의거하여 두 성(性)을 멸함에 의탁해서 견(見)과 수(修) 두 위(位)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논에 이르기를, “견도(見道)로 말미암기 때문에 분별성(分別性)은 곧 없어지니, 이 때문에 ‘얻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요, 수도(修道)로 말미암기 때문에 의타성(依他性)이 곧 없어지니, 그러므로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釋】 제십문 가운데 ‘또한 십지에서 지상(地相)을 구별한다’326)고 한 것은 앞의 제구문에 이르기를, “십지 중에서 상(相)을 구별하기 때문이다”327)라고 하였으니, 이 문(門)도 또한 지상을 구별하기 때문에 ‘또한’이라고 말한 것이다. 앞에서는 오직 세간 및 출세간을 구별하였고, 지금은 세간과 이승 및 보살을 구별하였다.
【記】 열세 번째로 『잡집론(雜集論)』에 의거하여 분별과 구생(俱生) 두 가지 번뇌로써 견(見)과 수(修) 두 위[二位]의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떻게 단지 위(位)에 의탁한 것이지 실제로 끊은 것이 아님을 아는가. 분별 아견(我見)이라면 세 가지를 빌려 생기니, 이른바 사사(邪師)ㆍ사교(邪敎)ㆍ사사유(邪思惟)이다. 헛되이 즉온(卽蘊)과 이온(離蘊)328) 등의 아(我)를 헤아리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는 비록 범위(凡位)에 있더라도 정사(正使)ㆍ정교(正敎)ㆍ정사유(正思惟)에 의거하기 때문에 다만 즉온(卽蘊) 등의 집착을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무아성(無我性)을 즐기기를 원하니, 이 사람이 어찌 끊고 나서 견도(見道)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만약 비록 현행(現行)이 없다 하더라도 종자가 있기 때문에 견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미 현행(現行)이 없으니 곧 자량(資糧)과 가행(加行)에 들어가야 마땅하지만, 그러나 그 뜻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견도무아(見道無我)의 이치[理]를 나타내기 위해서 저 멋대로 계교하여 전도된 거친 미혹에 의탁하여 반대로 그것을 나타낸 것이며, 또한 운(運)에 맡겨 일어나는 번뇌는 미세하여 끊기 어렵기 때문에 뒤집어서 수위(修位)의 점증차별(漸增差別)을 나타낸 것이다.
실의(實義)라면 단지 하나의 번뇌에 거칢이 있고 세밀함이 있어서 견위(見位)에서는 거칢을 끊고 수위(修位)에서는 세밀함을 끊는다. 말나번뇌(末那煩惱) 같은 것은 두 위(位)를 통틀어 그것을 끊으니, 『무상론(無相論)』에서 “제이집식(第二執識)과 상응법(相應法)은 나한위(羅漢位)에 이르러 궁극적으로 모두 멸한다. 견제(見諦) 안의 번뇌식(煩惱識)과 심법(心法)329)의 경우는 출세도(出世道)의 십육심(十六心)을 얻을 때에 끝내 끊어져 멸한다. 나머지 없어지지 않은 것은 다만 사유(思惟)에 속하니, 이를 제이식(第二識)이라고 부른다”고 한 것과 같다. 무성의 『섭론(攝論)』 역시 이 설과 같아서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열 네 번째로 분별혹(分別惑)이 빌린 바의 삼연(三緣)에 의탁해서 지전(地前) 삼현위(三賢位)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십해(十解) 등이 사사(邪師)를 제거하는 등이니, 차례대로 마땅히 알아라. 이는 직진(直進)을 기준으로 설한 것이다.
또 사사(邪師)와 사교(邪敎)가 일으킨 바는 자량위(資糧位)330)에 의탁해서 조복하니 행상(行相)이 거칠기 때문이며, 사사유(邪思惟)가 일으킨 바는 가행위(加行位)331)에 의탁해서 조복하니 행상이 세밀하기 때문이다. 이는 회심이승(廻心二乘)을 잡아서 설한 것이다.
열 다섯 번째로 구생(俱生) 안에서 육식과 칠식의 미혹(惑)은 칠지까지는 현행(現行)에 의탁해 있고, 팔지 이후부터는 영원히 조복하여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관(觀)에 들어감에 유간(有間)332)과 무간(無間)333)의 위(位)가 다름을 의탁해서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설(說)을 만든 것이다.
열 여섯 번째로 또한 육식번뇌(六識煩惱)로써 사지(四地)까지 의탁해 도달하고, 말나번뇌(末那煩惱)로써 칠지(七地)까지 의탁해 도달하며, 팔지(八地) 다음부터는 오직 소지장(所知障)만이 있다. 이는 또한 세간(世間)과 이승과 보살의 위(位)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설을 만든 것이다.
열 일곱 번째로 십지(十地)에서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의 차별을 드러내기 위함 때문에 십일무명(十一無明)으로 돌이켜 의탁하여서 나타낸 것이다.
열 여덟 번째로 지지(地地)의 진속(眞俗) 두 가지 지(智)를 드러내기 위함 때문에 이십이무명(二十二無明)으로 의탁하여 나타낸 것이다. 마치 『심밀경(深密經)』에서 “이 스물 두 가지의 우치품(愚癡品)과 열 한 가지의 거칠고 무거움[麤重]으로 말미암아 여러 지(地)를 안립(安立)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미 안립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의탁해 드러남[寄顯]’을 아는 것이다. 이 모든 뜻은 넓게는 『유가(瑜伽)』ㆍ『대법(對法)』ㆍ『유식(唯識)』ㆍ『섭론(攝論)』 등의 설과 같다. 이상은 다분히 시교(始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釋】 제십삼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논(論)을 인용하여 자의(自意)를 표시한 것이며, 둘째로 ‘어째서인가?’334)의 아래는 실(實)이 아닌 이유를 따져 물어서 해석한 것이며, 셋째로 ‘여실(如實)’335)의 아래는 실제[實]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문】 나머지 문을 예로 든다면, 우선 자의(自意)를 표하고 난 뒤에 인용해서 증명하는데, 지금은 왜 곧바로 논의 문장으로 자의를 표하는가?
【답】 논의 문장은 넓고 많아서 모두 인용하면 얽매일까 염려해서 뜻으로 인용하고자 하기 때문에 곧바로 논에 나아가 자의를 표한 것이다.
【문】 ‘분별과 구생(俱生)으로서 견(見)과 수(修)의 두 위[二位]에 의탁해서 나타낸다’336)고 한 것은 곧 시교(始敎)의 실행(實行)의 뜻인데, 어째서 임시로 의탁함[假寄]이라고 하는가?
【답】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시교의 실행(實行) 가운데 이장분별기(二障分別起)는 지전(地前)에서 현행을 조복하고, 초지(初地)에서 종자[種]를 끊는다. 구생 중에 번뇌장은 초지(初地) 다음부터 자재로이 능히 끊을 수 있으나 남겨두기 때문에 끊지 않는 것이다.337) 이제 이 의탁한 문(門)을 크게 견(見)과 수(修)로 나누면, 분별번뇌(分別煩惱)는 견도(見道)에서 모두 끊고 구생번뇌(俱生煩惱)는 수도(修道)에서 모두 끊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다.
지금의 해석에서 제십삼문은 시교 가운데의 실행(實行)과 동일하니,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임시로 의탁함[假寄]이라고 하는가? 이 문(門)의 뜻은 곧 시교와 종교 두 교가 합쳐져 하나의 대승교[一大乘敎]가 되더라도 종교(終敎)로 실(實)을 삼고 시교는 임시로 의탁함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치우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단지 지위에 의탁한 것일 뿐 실(實)이 아니다.”
나머지 문도 모두 ‘임시로 의탁함’이지만, 그러나 이 문에서 초교(初敎)의 실행(實行)이 임시로 의탁한 위(位)임을 치우쳐 나타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즉온(卽蘊)과 이온(離蘊)’338) 등은 오온(五蘊)에 즉하여 아(我)를 헤아리기 때문이고, 오온을 떠나 아(我)를 헤아리기 때문이다.
‘여실의(如實意)’는 단지 하나의 번뇌에 거칢이 있고 세밀함이 있는339) 등이다. 『법계품초(法界品抄)』340)에 이르기를, “십지로 곧장 나아가는 가운데 처음에는 거칢을 끊고, 나중에는 세밀함을 끊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실의’는 종교임을 마땅히 알라.
‘말나번뇌(末那煩惱)와 같은 것이 두 위[二位]를 통틀어서 끊는다’341)고 한 것은, 우선 육식번뇌(六識煩惱)를 기준으로 하여 견도(見道)342)에서 거칢을 끊고 수도(修道)343)에서 세밀함을 끊음을 판별한 것이다. 이제 말나번뇌를 기준으로 하여 견도에서 거칢을 끊고 수도에서 세밀함을 끊는다는 뜻으로 판별하여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그러므로 앞에서 ‘말나번뇌는 초지(初地)에서 거칢을 끊고 나중에 남은 습기를 없앤다’344)고 말한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제이집식(第二執識)’345)은 말나이니, 뇌야(賴耶)를 상대했기 때문에 제이가 된다. 이 가운데 우선 이승이 말나를 없앤 뜻을 나타내고, 다음으로 ‘만약 견제(見諦)’346)의 아래에서는 보살의 말나번뇌가 견도에서 거칢을 끊고 수도에서 세밀함을 끊는 뜻을 밝힌 것이다.
【문】 ‘십육심(十六心)’347)은 소승위(小乘位)인데, 어째서 보살단(菩薩斷)의 뜻이라고 말하는가?
【답】 이승위지(二乘位地)의 말을 빌려서 보살단혹(菩薩斷惑)의 뜻을 나타내었을 뿐이다.
‘이 위의 모든 뜻’348)이라 한 것은 뒤의 구문(九門)에 근거한 것이니, 이 구문 가운데 성교(聖敎)를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지목한 것이다.
【記】 이상 여러 문(門)은 모두 아함문(阿含門)이다. 미혹에 의탁하여 오히려 위상차별(位相差別)을 나타내었으니, 어째서인가? 십지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고, 중생(衆生)으로 하여금 십지 가운데서 오만한 집착[慢執]을 버리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위상(位相)은 깊고 깊어서 완전히 알기가 지극히 어려우므로 미혹에 의탁하여 위(位)를 드러냄으로서 청정한 믿음[淨信]을 일으키려고 하기 때문이니, 나머지 뜻은 이에 준거해서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만약 돈교(頓敎)에 의지한다면, 일체번뇌(一切煩惱)는 본래 스스로 여의어 있어서 끊는다[斷], 끊지 못한다[不斷]고 말할 수 없으니, 『법계체성경(法界體性經)』에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떻게 여러 선남자에게 보리심을 발하도록 하는가?’라고 하시니, 문수가 대답하기를, ‘저는 아견심(我見心)을 내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아견이 없으면 곧 보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 것과 같다. 이 문장이 증거가 되니, 준거하여 알라.
【釋】 셋째로 결론지음 중에서 ‘십지를 보호하기[護] 위해서’349)라 한 것에서 ‘보호’는 허물[過]을 막아서 보호하기[防護] 때문이다.
【문】 열 여덟 가지 문 가운데 또한 지전(地前)이 있는데, 어째서 ‘십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가?
【답】 비록 지전이 있더라도 십지를 종지[宗]로 삼기 때문이다.
【문】 『십지장(十地章)』350)에 이르기를, “이와 같은 등의 법의 차별상은 십지를 보호하기 때문이니, 방편문(方便門)을 따라서 갖가지 설을 지음으로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십지 중에서 증상만(增上慢)을 여의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그것은 화엄(花嚴)의 외상(外相)의 십지를 잡은 것이고, 이것은 지효(地爻)의 십지를 잡은 것이니, 그러므로 같지 않다.
‘나머지의 뜻은 이에 견주어 생각하라’351)고 한 것은, 열 여덟 가지 문 중에 인용되지 않은 성교(聖敎)는 그것에 준하면 통한다는 것이다.
【記】 만약 원교(圓敎)에 의거한다면, 일체의 번뇌는 그 체성(體性)을 말할 수 없지만, 다만 용(用)을 잡는다면 매우 깊고 광대한 것이니, 소장법(所障法)의 일즉일체(一卽一切)이고 주체와 짝[主伴]을 모두 만족하기 때문이며 저 능장혹(能障惑)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사(使)와 습(習)과 종(種)과 현(現)을 나누지 않았으니, 다만 법계의 하나를 얻으면 일체를 얻는[一得一切得]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번뇌 또한 일단(一斷)이 일체단(一切斷)이다. 이 때문에 「보현품(普賢品)」에서 일장(一障)이 일체장(一切障)임을 밝혔고, 「소상품(小相品)」에서는 일단이 일체단임을 밝혔는데, 이것이 그 뜻이다.
또한 이 단혹분제(斷惑分齊)는 상하 경문에 의거하면 네 종류가 있다. 첫째로 증득352)을 잡은 것으로서 이른바 십지 가운데서 끊는 것이며, 둘째로 위(位)를 잡은 것으로서 이른바 십주(十住) 다음에 끊는 것이며, 셋째로 행(行)을 잡은 것으로서 이른바 십신종심(十信終心)에서 끊는 것이며, 넷째로 실(實)을 잡은 것으로서 이른바 끊을 것이 없는 것이다. 이는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니, 넓게는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한 앞의 삼승(三乘) 등 여러 문(門)에서 혹(惑)을 끊는 것은 만약 일장이 일체장이고 일단이 일체단이라면 곧 이 비리(非理)에 들어가며, 만약 문의 전후를 쫓은 것이 삼승이라면 이는 별교(別敎)를 잡아서 말한 것이며, 만약 섭방편(攝方便)을 잡는다면, 앞의 여러 교(敎)가 밝힌 바가 모두 이 속에 들어가니, 이는 이것이 방편이면서 아울러 소류(所流)의 소목(所目)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뜻은 이에 준한다. 단혹문(斷惑門)을 마친다.
【釋】 원교(圓敎)에 나아가서는 우선 별교(別敎)를 밝히고, 다음으로 ‘약약(若約)’353)의 아래는 동교(同敎)를 밝힌 것이다. 앞의 것 중에서 먼저는 올바로 밝힌 것이고, 다음으로 ‘또한 이’354)의 아래는 단혹위(斷惑位)를 나타내었다.
앞의 것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로 체(體)가 없어도 용(用)이 있음을 밝혔고, 둘째로 ‘소장(所障)으로’355)의 아래는 일장이 일체장임을 변별한 것이고, 셋째로 ‘시고불분(是故不分)’356)의 아래는 일단이 일체단임을 변별한 것이고, 넷째로는 인용해서 증명한 것이다.
앞의 것 가운데 ‘일체번뇌는 그 체성을 설할 수 없다’357)고 한 것에 대해서는 『도신장(道身章)』에서 의상화상이 이렇게 말했다.
“혹(惑)은 용(用)만 있고 체(體)358)는 없으나, 지(智)359)는 체와 용을 갖춘다. 체가 없다면 어떻게 용을 얻을 수 있는가? 체는 무주실상(無住實相)이고 용을 미혹한 것이 혹(惑)이 되니, 용에 미혹됨을 쉬었을 뿐이요 끊을 만한 체가 없는 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체는 무주실상(無住實相)이기 때문에 ‘설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용을 미혹함이 혹이 되기 때문에 “단지 용을 잡으면 더욱 깊다”360) 등으로 말한 것이다. 마치 허공의 구름과 같다는데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로 체가 없다는 것은 곧 공의 뜻이고, 둘째로 용이 있다는 것은 덮어 가린다는 뜻이다. 혹(惑) 중에서도 또한 그렇다.
‘소장법의 일즉일체로써’361)라고 한 것은 소장(所障)을 들어 능장(能障)을 나타낸 것이다. ‘사(使)와 습(習)과 현(現)과 종(種)을 나누지 않는다’362)는 것은 삼승(三乘)을 간별한 것이다.
‘단지 법계(法界)의 일득일체득(一得一切得)과 같다’363)고 한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계와 같다’는 것은 능례(能例)를 든 것이고, ‘하나를 얻으면 일체를 얻는다’ 이하는 소례(所例)를 든 것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계(法界)의 하나를 얻으면 일체를 얻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능례를 든 것이고, ‘그러므로’ 이하는 소례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말하자면 ‘법계의 하나를 얻으면 일체를 얻는다’의 뜻을 들어서 ‘하나를 끊으면 일체를 끊는다’는 뜻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보현품」에서 일장일체장을 밝혔다’364)는 것은 그 품365)에서 “하나의 진심(瞋心)을 일으키면 수많은 장애의 법문을 받는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소상품(小相品)」에서 일단일체단을 밝혔다’366)고 한 것은, 그 품367)에서 “이 모든 번뇌를 다 없애 버린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문】 「소상품」의 지(智)로써 「보현품」의 장(障)을 끊는가?
【답】 많은 설이 있지만, 지금은 「소상품」의 지로써 「보현품」의 장을 끊는다고 풀이한 것이다. 말하자면 「보현품」은 소치(所治)를 들었고, 「소상품」은 능치(能治)를 들었기 때문이다.
【문】 「소상품」에 팔만 사천 가지 번뇌가 바로 소치요, 「보현품」에 있는 육십 가지 보문행덕(普門行德)이 바로 능치이니, 그렇다면 각각 능치와 소치를 갖추었는데, 어째서 억지로 「소상품」의 지로 「보현품」의 장을 끊는 것인가?
【답】 「소상품」에 소치가 없지 않고 「보현품」에 능치가 없지 않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상품」 가운데 팔만 사천 가지 번뇌의 일장일체장의 뜻은 「보현품」에서 비로소 나타나고, 「보현품」 가운데 육십 가지 보문(普門)의 일단일체단의 뜻은 「소상품」에서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엄경』 중에 일장일체장의 궤칙(軌則)은 모두 「보현품」의 문장에 의탁한 것이고, 일단일체단의 궤칙은 모두 「소상품」의 문장에 의거한 것이니, 일단일체단은 「소상품」의 지(智) 아님이 없고, 일장일체장은 곧 「보현품」의 장(障) 아님이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문】 만약 「소상품」의 지로써 「보현품」의 장을 끊는다면, 수생(修生)의 지(智)로써 본유(本有)368)의 장(障)을 끊는가?
【답】 수생(修生)과 본유(本有)는 덕(德)을 잡아서 논한 것이지, 능장(能障)에 다시 수생과 본유가 있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본유와 수생을 장애하는 미혹은 수생지(修生智)로써 모두 끊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황금이 비록 진흙 가운데 있더라도 그 금의 체는 본래 청정(淸淨)하니, 만약 거푸집과 공이의 공(功)을 빌려서 이물질을 제거해 버린다면 밝고 밝은 빛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본래 청정한 금의 체를 나타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본유(本有)의 덕(德)은 비록 물듦[染] 속에 있더라도 성덕(性德)369)은 본래 청정하다. 만약 수생(修生)의 지(智)를 얻어서 일단일체단일 때라면, 비단 수생만덕(修生萬德)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본래성덕의 체[本來性德體]를 나타낸다. 마치 청정한 하늘 가운데 구름과 먼지가 두루 덮더라도 햇빛이 나올 때는 구름을 깨고 하늘이 나타남과 같으니, 햇빛과 하늘은 비록 다르지만, 능히 가리우는 구름은 원래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두운 구름이 만약 깨진다면, 바로 밝은 햇빛을 열 뿐만 아니라 청정한 하늘빛을 나타내서 법(法)과 합치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도신장』에 이르기를, “어떤 문장에서는 ‘일단일체단’이라 하고, 어떤 문장에서는 ‘실제로 끊을 바가 없다’고 말하는데, 저것이 옳다면 이것이 그른 것이요, 이것이 옳다면 저것이 그른 것이니, 어떻게 회통(會通)하는가? 덕(德)으로써 말하면 처음부터 막힘이 없고, 미혹으로써 조망하면 다함이 없는 덕을 덮어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다함이 없는 덕’은 수생(修生)만이 아니고 또한 본유(本有)의 덕과도 통한다. 수생의 지(智)가 일어나 다함이 없는 덕을 덮어 버리는 장애를 끊는다면, 또한 본유의 지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 지엄이 ‘「십지회종(十地會宗)」’370)에서 이르기를, “첫째로는 소치(所治)이니, 이른바 정사(正使)ㆍ번뇌ㆍ업(業)ㆍ보(報) 및 성삼장(性三障)의 상심종자(上心種子)를 말한다. 둘째로 능치(能治)이니, 이른바 정무분별지(正無分別智) 및 보현성기지(普賢性起智)를 말한다”고 하였는데, 이 능치ㆍ소치는 그 뜻이 어떠한가?
【답】 ‘정사ㆍ번뇌ㆍ업ㆍ보’는 「십지품」의 소치이고, ‘성삼장의 상심종자’는 「보현품」의 소치이고, ‘정무분별지’는 「십지품」의 능치이고, ‘보현성기지’는 「보현품」의 능치이다.
【문】 수생과 본유는 동교(同敎)와 별교(別敎) 중에 무엇에 해당되는가?
【답】 ‘십지(十地)’의 능치와 소치는 곧 수생(修生)이고 또한 동교이고, ‘보현성기(普賢性起)’의 능치와 소치는 곧 본유(本有)이고 또한 별교이다. 왜냐하면 저 소(疏)의 ‘「십지품종(十地品宗)」’371)에 이르기를, “네 가지 뜻은 위(位)를 잡으면, 오직 수생을 취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십지’의 능치와 소치는 오직 수생이고 또한 동교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미 그러하기 때문에 보현품의 능치와 소치는 본유(本有)이다.
【문】 또한 ‘품종(品宗)’372)에 이르기를, “불설(不說)로써 설(說)을 삼는다고 한 뜻은 보현덕위(普賢德位)373)를 증득한 것이고, 설(說)로써 설을 삼는다고 한 것은 삼승(三乘)의 근본이다”라고 하였으니, ‘불설로써 설을 삼는다’는 등은 별교의 뜻일 수 있는데 어째서 동교라고 말하는가?
【답】 ‘불설로써 설을 삼는다’는 것은 본분(本分)에서 청분(請分)의 문장을 잡아서 말한 것이며, ‘설로써 설을 삼는다’는 것은 설분(說分)의 문장을 잡아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장주의 「십지설분설(十地說分說)」의 뜻 가운데 이르기를,374)“셋째로 설한 것의 의미는 앞의 본분의 청분(請分) 속에서 이미 지체(地體)를 설하여 저 높은 근기로 하여금 현지(玄旨)를 깨달아 이해하게 하였고, 지금은 지상(地相)을 변별하여 중하류(中下流)로 하여금 상(相)을 쫓아 열어서 이해하게 한 것이니, 그러므로 설을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지엄의 ‘불설로써 설을 삼는다’고 한 것과 같으니, 회종(會宗) 가운데 대부분 설분을 쫓아서 변별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동교이다.
【문】 수생은 동교, 본유는 별교라 함은 오직 단일한 본유(本有)와 단일한 수생(修生)을 잡아서 논한 것인가? 네 구를 통틀어 잡아서 나누어 논한 것인가?
【답】 수생 및 수생본유(修生本有) 두 구를 합하여 수생이라고 하고, 본유 및 본유수생(本有修生) 두 구를 합하여 본유라고 한다. 왜냐하면 제육지(第六地)의 석의문(釋義門)375)에서 본유(本有) 등 네 구를 밝히는 끝에 말하기를, “만약 경전을 상대하여 문장을 나누면, 이 열 번의 연생[十番緣生]에는 오직 두 문이 있을 뿐이니, 첫째는 수생이요, 둘째는 수생본유이다. 나머지 둘은 「성기품(性起品)」에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문】 이 네 구 가운데 단(斷)과 무단(無斷)을 논한 의미는 무엇인가?
【답】 본유 및 수생본유를 잡으면 소단(所斷)이 없고, 수생 및 본유수생을 잡으면 소단이 있다. 말하자면 이(理)를 잡으면 소단은 없어지고, 지(智)를 잡으면 일단일체단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석의문(釋義門)376)에 이르기를, “본유라는 것은 연기(緣起)의 근본 실체[本實]라서 체(體)가 정(情)을 여의면 법계가 나타난다고 하지만, 그러나 삼세(三世)는 부동(不動)하기 때문에 성기(性起)377)에서 이르기를, ‘중생심(衆生心) 가운데 작은 티끌의 경권[微塵經卷]이 있고 보리대수(菩提大樹)가 있어서 중생과 성인이 함께 증득하니, 사람의 증득에는 전후가 같지 않으나 그 나무는 다르게 구별되어 나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본유를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연생문(緣生文)378)에, “십이인연(十二因緣)은 가장 으뜸의 뜻[第一義]이다”라고 하였으니, 본유수생을 말한다. 그러나 「제정품(諸淨品)」에서 본래는 다른 성품[異性]이 없으나, 이제 여러 연(緣)이 새로운 선(善)을 발생함을 잡아서 저 모든 연(緣)에 근거함을 잡는다면, 곧 망법(妄法)이 발한 바의 진지(眞智)가 보현(普賢)에 합해지면서 성체(性體)도 본래 분별됨이 없고 수지(修智) 또한 분별됨이 없으므로 지(智)는 이(理)에 순응하고 모든 연(緣)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수생이 곧 본유의 동일한 성(性)으로부터 발(發)함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성기품」379)에 이르기를, “보리심(菩提心)이라고 이름하니 성기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 본유수생이 이미 새로 발함의 뜻이라면 옛 것은 아닌데, 어째서 본성을 따른다고 하는가?
【답】 이는 다만 새로 생긴다는 뜻이기 때문에 수생이라고 설한 것이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本)의 뜻과 친근하기 때문에 성(性)을 쫓아서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지금의 곡식[穀]은 겁초(劫初)와 다르지 않으나, 본래의 곡식에 순응하면 가깝고380) 지금의 연(緣)을 대하면 소원하기 때문에 새로 얻었다고 설하지 않는 것과 같다.
셋째로 수생은 신(信) 등의 선근(善根)이 먼저 앞에 나타나지는 않으나, 이제 정교(淨敎)를 대해서 연에 의지하여 발(發)하기 때문에 신생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넷째로 수생본유는 여래장성(如來藏性)381)이 여러 티끌에 숨어 있다면, 범부(凡夫)는 그 처소를 미혹해서 깨닫지 못하니, 만약 미혹한 때를 대하면 유(有)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상론(無相論)』382)에 이르기를, “만약 있다면 마땅히 볼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어서 비로소 법신(法身)을 나타내고,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함[淨]을 이루는 것이다. 처음에는 힘이 없어서 저 무법(無法)과 같더라도, 지금 용(用)을 이룸은 본래 처음에 없었던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설할 수 없어서 본유라 이름하는 것이고 수정(修淨)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문】 만약 처음에 나타남을 수기(修起)라고 한다면 수생(修生)이라고 이름해야 할 텐데 어째서 ‘현(現)’이라고 설하는가?
【답】 다만 현(現)이 될 뿐이니, 수생문(修生門) 가운데서 뜻이 본유(本有)를 이루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미혹한 마음[迷心]에 있어서 체용(體用)을 설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비로소 법신(法身)이 있다고 설하기 때문에 저 새롭게 태어남과는 가깝고 먼저 있던 것과는 소원함[疏]을 아는 것이다. 곧 논(論)383)에 ‘이불리무상(離不離無常)’이라고 말한 것과 같으니, 이미 ‘무상(無常)’이라고 말하였다면 본유로부터 올 수 없다.
이상의 네 가지 뜻은 이 연생(緣生)에서 이(理)와 실(實)이 통틀어 있으니, 풀어서 말하면, 본유 및 수생본유는 이미 이(理)384)를 잡았기 때문에 소단(所斷)이 없고, 수생 및 본유수생은 지(智)385)를 잡았기 때문에 단(斷)을 설한 것이다.
【문】 장주의 『부사의품소(不思議品䟽)』386) 가운데 네 구는 지엄의 네 구와 어떻게 다른가?
【답】 다르다. 장주는 본유 및 본유수생을 잡으면 소단이 없고, 수생 및 수생본유를 잡으면 단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말하자면 여래장성(如來藏性)의 본래구경(本來究竟)은 오직 본유(本有)이고, 여래장(如來藏)이 옛날에 숨었다가 지금 나타난 것은 본유수생이라고 하였다. 이 두 구(句)는 일종의 이체(理體)이기 때문에 끊을 바가 없다고 한 것이다. 무분별지(無分別智)의 본래 없다가 지금 있는 것은 오직 수생(修生)이고, 이 무분별지 안에서 진성(眞性)과 동일한 것은 수생본유이니, 이 두 구는 일종의 지(智)이기 때문에 단(斷)의 뜻을 논한 것이다.
【문】 장주가 지엄의 뜻을 따른 것이 있는가?
【답】 있다. 말하자면 『기신별기(起信別記)』387)에 이르기를, “또한 본각(本覺)388)으로 시각(始覺)을 이루므로 다시 다른 법이 없으나, 이 뜻을 쫓기 때문에 총괄하여 본유(本有)라고 이름한다. 또한 시각으로 본각과 계합함을 비로소 본각이라고 이름하니, 만약 시각을 여의면 일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뜻을 쫓기 때문에 총괄하여 수생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본각으로 시각을 취함을 본유수생이라고 이름하고, 또 시각에 대하여 본각을 설하므로 수생본유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본유 및 수생본유를 잡으면 소단(所斷)이 없고, 수생 및 본유수생을 잡으면 단(斷)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문】 「소상품」은 수생이고, 「보현품」은 본유이다. 그러나 각각 본유와 수생이 있기 때문에 단(斷)과 부단(不斷)을 논한다면, 이는 곧 각각 자품(自品)에 해당되고 능소(能所)의 치(治)를 갖추는데, 어떤 이유로 반드시 「소상품」의 지(智)로써 「보현품」의 혹(惑)을 끊는 것인가?
【답】 비록 두 품 중에 각각 본유와 수생을 갖추었기 때문에 단과 무단(無斷)의 뜻을 논한다 하더라도, 능치지(能治智)의 일단일체단의 뜻을 밝힘은 「소상품」389)이고, 소치장(所治障)의 일장일체장의 뜻을 밝힘은 「보현품」390)이기 때문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 단혹위(斷惑位)를 나타낸 것 중에서 먼저 네 구의 단(斷)을 나타내고,391) 뒤의 ‘또한 앞의’392) 아래에서는 단지 네 구만이 아님을 나타내었다.
앞의 것에 대해서다.
【문】 이 네 구의 단(斷)은 동교(同敎)인가, 별교(別敎)인가?
【답】 어떤 사람은 동교라고 하는데, 지금의 해석에서는 원융(圓融)과 항포(行布)393)를 갖춘 별교(別敎)의 단(斷)이다. 이른바 ‘이 단혹분제(斷惑分齊)’394) 등은 위의 원교(圓敎)에서 논한 일단일체단의 뜻을 거듭 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밝힌 단혹위(斷惑位)를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네 구로써 그것을 나타낸 것이지, 단지 동교라고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네 구를 동교라고 말한다면, 위에서 밝힌 일단일체단의 뜻도 또한 동교인가? 전자가 그렇지 않은데 후자가 어떻게 그렇겠는가? 그러므로 「소상품소(小相品疏)」395)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번뇌를 모두 다 없앤다’고 하는 것은 현(現)과 종(種)과 사(使)와 습(習)을 나누지 않고 모두 없애는 것이지, 따로 없애는 것은 아니다. 어떤 위(位)에서 없어지는가는 다섯 위를 통틀기 때문이고, 어떻게 멸하는가는 허공(虛空)과 같기 때문이고 본래 다하기 때문이다.”
풀어서 말하면, 전자에 준거해서 후자를 해석하는 것에서 ‘사와 습과 현과 종을 나누지 않고 모두 없애는 것이지, 따로 없애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은 이 문장의 ‘사와 습과 현과 종을 나누지 않고 다만 법계(法界) 내지 일단일체단’396)과 같다는 등에 해당된다. ‘어떤 위(位)에서 없어지는가는 다섯 위[五位]를 통틀기 때문이다’는 이 문(門)의 앞 세 구에 해당된다. ‘허공과 같기 때문이고 본래 다하기 때문이다’는 이 문장의 제사구에 해당된다. 만약 네 구를 동교라고 말한다면, 그 문장의 단혹(斷惑)397)도 또한 동교인가? 저것이 이미 별교이므로 이것도 또한 그렇다.
【문】 『도신장』에서398) 말했다.
“상원사(常元師)가 ‘동교 중에서는 증득을 잡으면 초지(初地)에서 미혹을 끊고, 위(位)를 잡으면 십해(十解)에서 미혹을 끊으며, 행실(行實)을 잡으면 십신(十信)에서 미혹을 끊고, 법실(法實)을 잡으면 끊을 바가 없으니, 또한 별교(別敎)399)의 일단일체단은 동일한 미혹인가, 서로 다른 미혹인가?’라고 하였다.”
이 문장을 기준으로 한다면, 네 구는 동교의 뜻인데 어째서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답】 이 문장의 뜻에서 동교가 바로 삼승에 의탁한 것임은 아래의 사교(四敎)이기 때문에 동교가 되는 것이지, 나타낸 바의 네 구를 동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삼승(三乘) 중에서는 증험을 잡으면, 초지에서 미혹을 끊기 때문에 일승(一乘)도 그것에 의탁해서 초지에서 일단일체단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삼승 중에서 위(位)를 잡으면, 십해에서 미혹을 끊기 때문에 일승도 그것에 의탁해서 십해에서 일단일체단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삼승 중에서는 행(行)을 잡으면 십신에서 미혹을 끊기 때문에 일승도 그것에 의탁해서 십신종심(十信終心)에서 일단일체단임을 나타낸다. 삼승 중에서는 끊을 바가 없음의 뜻이 있기 때문에 일승도 그것에 의탁해서 제사구의 뜻이 있게 되니, 그러므로 저 삼승의 네 구의 뜻에 의탁해서 일승 네 구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동교는 삼승에 의지한 바의 네 구의 뜻이 되고, 이 가운데 네 구는 나타낸 바의 별교에 해당된다. 따라서 초지(初地)ㆍ해위(解位)ㆍ십신(十信)의 삼위(三位) 가운데 일단일체단의 뜻을 잡아서 ‘또한 별교의 일단일체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지엄의 『명난소(明難䟽)』400)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래에서 해(解)를 낳아 장(障)을 끊어 없애는데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신(信)의 낳음을 잡으면, 초지(初地)에서 사(使)의 종자를 끊는다. 둘째로 위(位)를 잡으면, 해위(解位)에서 사(使)와 습(習)의 종자 모두를 끊는다. 셋째로 행(行)을 잡으면, 십신만심(十信滿心)에서 사와 습의 종자를 모두 끊는다. 넷째로 실(實)을 잡으면, 본래 반드시 끊을 필요가 없고 자체로 깨끗한 것이다. 또한 단혹상(斷惑相)은 어떤가? 초(初)도 아니고, 중(中)ㆍ후(後)도 아니니, 전중후(前中後)를 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끊는가? 허공과 같으니, 이것은 삼승공학(三乘共學)의 뜻이다.”
이를 풀어서 말하면, 이 명난(明難)의 네 구의 뜻도 또한 별교인가?
【답】 그렇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이 장(章)의 네 구도 같은가?
【답】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같다고 한 것은 두 곳이 별교이기 때문이고, 다르다고 한 것은 이 장의 네 구가 모두 원융(圓融)ㆍ항포(行布)의 별교의 뜻에 통하기 때문이다. 『명난소』의 뜻의 첫째 구는 단지 항포이고, 뒤의 세 구는 이와 동일하기 때문에 약간은 같지 않음이 있다.
【문】 어떤 이유로 명난의 네 구 가운데 첫째 구는 오직 항포이고, 뒤의 세 구는 원융ㆍ항포의 별교(別敎)에 통하는가?
【답】 명난의 네 구는 아래의 십신(十信)ㆍ삼현(三賢)401)ㆍ십지(十地) 가운데 다스릴 바를 나타내니, 이른바 『명난소』402)에서 이르기를, “둘째로 다스릴 바를 내는 것이니, 일진(一瞋)의 장애는 백법명문(百法明門)의 장애이다”라고 하였다. 십주(十住)403)에 이르기를, “둘째로 다스릴 바를 밝힌 것이니, 앞의 백 가지 장애를 응당 위(位)에서 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십행(十行)에 이르기를,404) “둘째로 다스릴 바이니, 일승(一乘)은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회향(廻向)405)에 이르기를, “둘째로 다스릴 바를 변별한 것이니, 일승은 앞에서처럼 준거하라”고 하였다. 십신과 삼현은 사(使)와 습(習)을 나누지 않고 통틀어 많은 장애를 끊기 때문에 제이구와 제삼구에서 표한 바이니, 바로 원융ㆍ항포의 별교의 뜻에 통하는 것이다. 십지(十地)406)에 이르기를, “첫째로 다스릴 바를 밝힌 것이니, 말하자면 정사(正使)ㆍ번뇌ㆍ업ㆍ보 및 성삼장(性三障)의 상심종자(上心種子)이다”라고 하였으니, 정사ㆍ번뇌ㆍ업ㆍ보는 십지에서 끊을 바이고, 성삼장 등은 보현성을 일으켜 끊을 바이다. 정사라는 것은 초지(初地) 중에서 정사의 종자가 영원히 끊어지기 때문이며, 번뇌라는 것은 이십이무명(二十二無明) 및 십일장(十一障)이며, 업이란 것은 이십이업(二十二業)이며, 보(報)란 것은 네 가지 변역보[四種變易報]이다. 이는 정사와 습기를 나누기 때문에 항포동교(行布同敎)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처음 구에서 이 뜻을 표하여 이르기를, “신(信)을 낳음을 잡으면407) 초지에서 사(使)의 종자를 끊기 때문에 바로 항포동교이다”라고 하였다.
【문】 어떤 이유로 평등한 인과(因果)의 소치(所治)가 성삼장이 되는가?
【답】 고사(古辭)에 이르기를,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소치가 사장(事障)이 되고, 보현성기지(普賢性起智)의 소치가 성삼장이 된다”고 하였다.
【문】 어떤 것이 사장(事障)이고, 어떤 것이 성장(性障)인가?
【답】 물듦[染]을 깨끗함[淨]이라 미혹하고, 깨끗함을 물듦이라고 미혹하는 것을 사장이라고 이름하고, 소위 물듦과 깨끗함의 자성에 각별히 집착하는 것을 성장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물든 것은 버릴 만하다고 여기고 깨끗한 것은 취할 만하다고 여겨서 마침내 물듦을 끊고 깨끗함을 나타내는 것을 무분별지의 단장(斷障)이라고 이름한다. 물듦은 덕(德)이기 때문에 물듦의 근본은 끊을 것이 없고, 깨끗함은 다시 나타낼 것이 없다는 것은 ‘보현성기지(普賢性起智)’의 단장이 된다. 옛날에 이르기를, “두 지(智)의 단장은 마치 불을 들어서 어둠을 찾는 것과 같아서 밝음은 있고 어두움은 없다는 것은 무분별지의 단장이요, 불을 들어서 어둠을 찾음에 어두움이 곧 밝음이라 다시 비출 것이 없다는 것은 성기지의 단장이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본래 끊을 것이 없는 것을 어째서 성삼장의 소치가 된다 하는가?
【답】 이미 수생지(修生智)를 써서 어둠을 끊고 밝음을 얻은 날에는 앞에서 끊은 어둠이 본래 바로 밝음[明]이기 때문에 다시 새로 끊거나 새로 얻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어둠을 끊어 밝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소치(所治)라 이름하며, 이 어둠을 끊어 밝음을 얻으려는 마음이 된다고 하는 것을 잡는 것을 성삼장이라고 이름한다. 마치 십신위(十信位)에서부터 시각지(始覺智)를 일으켜서 삼현과 십지를 거쳐 십지종심(十地終心)에 이르러 생상(生相)의 꿈을 없애서 시각(始覺)408)이 원만하게 나타나나, 반대로 시각을 돌아보면 곧 본각(本覺)과 같으므로 시각상(始覺想)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생지로써 어둠을 깨뜨리고 밝음[明]을 얻으니, 이미 밝음을 얻은 날에는 앞에서 깨뜨린 어둠은 본래 바로 밝음임을 알게 된다. 어둠은 본래 움직이지 않았고 밝음은 새로 얻은 것이 없으니, 이른바 어둠을 없애서 밝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뜻이 단장이 된다.
【문】 삼현소치(三賢所治)는 원융(圓融)ㆍ항포(行布)에 통한 별교(別敎)를 잡았는데, 어떤 이유로 십지(十地)는 그렇지 않은가?
【답】 경문의 상(相)을 좇았기 때문에 그렇다. 말하자면 삼현에서 설한 바는 보현덕(普賢德)이 나타나면 삼승상(三乘相)은 숨는다는 것이나, 십지 중에서는 이와 반대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엄의 「회향품소(廻向品䟽)」409) 에 이르기를, “초지(初地) 이상은 경문에서는 본래 삼승에 통함이 없으니, 교의(敎義)를 세움에 문장의 모습[文相]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반드시 헤아려 가려낼 필요는 없다[料簡]”고 하였는데, 이것이 그 뜻이다.
【문】 명난410)의 네 구(四句) 마지막에, ‘이것이 삼승공학(三乘共學)의 뜻’이라고 하였는데, 무엇을 인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답】 ‘초(初)도 아니고 중(中)도 후(後)도 아니니, 전중후(前中後)를 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끊는가? 허공과 같다’411)고 한 것은 삼승에서 논한 바이므로 ‘삼승공학’이라고 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초도 아니고, 중도 후도 아니니, 전중후를 취하기 때문에 허공과 같다’는 것은 오직 항포동교(行布同敎)인가?
【답】 원융과 항포에 통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삼승공학’이라고 말하는가?
【답】 ‘초도 아니고 중도 아니다’라 말한 것이 비록 별교(別敎)를 장애하지 않더라도, 또한 ‘삼승공학’에 통하기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본실별교(本實別敎)도 또한 ‘삼승공학’이 되는가?
【문】 그렇지 않다. 본실 가운데 위위(位位)마다 불과(佛果)의 뜻을 융섭하는 것이 삼승에는 없기 때문에 ‘공학’은 아니다. ‘초도 아니고 중도 후도 아니니, 허공과 같다’고 한 것에서 이와 같이 끊는 뜻 또한 삼승에서 밝혔기 때문에 ‘공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도신장』412)에 이르기를, “어떤 문장에서는 ‘일단일체단(一斷一切斷)’이라 하고, 또 어떤 문장에서는 ‘실제로는 끊을 바가 없다’고 말한다”고 하였는데, 어떤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는가?
【답】 이 장(章)의 문장이다. 말하자면 ‘어떤 문장에서 일단일체단이라고 하였다’는 것은 처음 제삼구이고, ‘어떤 문장에서는 실제로는 끊을 바가 없다’는 것은 제사구이다.413)
【문】 앞의 제삼구 중에서는 ‘일단일체단’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어떤 이유로 ‘어떤 문장에서는 일단일체단이라고 말한다’고 한 것이 앞의 제삼구가 되는가?
【답】 ‘첫째로 증득을 기준으로 하면 이른바 십지를 끊는 것이다. 둘째로 위(位)를 기준으로 하면, 십주(十住) 이후 끊는 것이다’414)라는 것은 앞의 ‘일단일체단’의 위(位)를 판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앞 삼승의 여러 문(門)의 단혹(斷惑)’은 삼승이 맡긴 바의 위(位)를 좇는 것이요, ‘일단일체단’과 같은 것은 일승단위(一乘斷位)이기 때문에 네 구만은 아니다. 또한 열여덟 문에 의탁해서 대함을 잡는 것 중에서 초문(初門)은 지위에 비례해서 번뇌를 끊고 지위를 증득해서 소지(所知)를 끊는다는 것415)은, 곧 문(門)의 전후를 따르는’416)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는 삼승단위(三乘斷位)이다. ‘일단일체단’417)과 같은 것은 별교일승(別敎一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 「보현품(普賢品)」418)을 설함에 “진장(瞋障)의 경문(經文) 앞머리에서 아래쪽으로 살펴보면 진수문(進修門) 가운데 오,륙, 칠419) 의 삼인(三印)이다” 라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답】 옛 설이 비록 많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해석을 보면, 오자인(五字印) 중에서는 『오교장(五敎章)』의 명수(名數)420)를 통틀어 변별하고, 육자인(六字印) 중에서는 실제돈(實際頓)의 별교단장(別敎斷障)의 뜻을 변별하고, 칠자인(七字印) 중에서는 궁실(窮實)의 뜻을 변별하였으니, 왜냐하면 오자인 중에서 이미 ‘여러 교의 장(障)을 변별하였다’421)고 하였기 때문이고, 육자인 중의 이미 ‘앞에서 진장(瞋障)을 밝혀서’ 등은 첫머리를 들어 말함으로서 보현의 광대한 해행법(解行法)을 유형별로 나타내고자422) 하기 때문이고, 칠자인 중에서는 법이 아님을 변별해서 빠진 뜻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문】 어째서 오자인 중에서도 또한 일승장(一乘障)을 변별함을 알 수 있는가?
【답】 저 오자인에서 이르기를, “이상의 여러 미혹은 일혹일체혹(一惑一切惑)이고 일단일체단(一斷一切斷)이다. 이것은 일승교(一乘敎)에 속하니, 아래에 설한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별교장의 뜻이다.
둘째로 동교(同敎)에 대한 것이다;
【문】 어떤 이유로 앞의 두 문423)에는 섭방편(攝方便)이 있고 다음의 두 문 중에는 섭방편이 없으며, 이 문(門)과 이승회심(二乘廻心)에는 또한 섭방편이 있는가?424)
【답】 가운데 두 단락은 생략하여 없으니, 전후의 장(章)에 의거하여 준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장 중에서는 또한 말의 편리함을 따랐기 때문에 아울러 논하였다. 이를테면 앞에서 이미 “또한 앞 삼승 등의 여러 문에서 미혹을 끊으니, 만약 일장일체장이라면 일단일체단이라서 이 교(敎)에 들어온다. 문장의 전후를 따르면 이는 삼승이니, 이것은 별교(別敎)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425)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인해서 말하면, 섭방편을 잡는 것426)은 문의 앞뒤를 따른 삼승 또한 일승섭(一乘攝)에 들어가게 된다. ‘이승회심(二乘廻心)’의 장(章) 중에서는 소승 하나, 종교 하나, 시교 하나, 돈교 하나, 섭방편 하나, 별교 하나로써 여섯 가지 설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아울러 ‘섭방편(攝方便)’을 논한 것이다.
‘나머지 뜻은 그것에 준한다’427)는 것은 나머지 교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준하여 통하라는 것이다.
【記】 제칠(第七) 이승회심에는 여섯 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 일체의 이승(二乘)에는 모두 회심(廻心)428)이 없으니, 또다시 나머지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승 가운데서 설한 것과 같다.
둘째로 일체의 이승이 모두 회심이니, 모두 불성력(佛性力)이 있어서 내훈인(內薰因)429)이 되기 때문이며, 여래대비력(如來大悲力)이 외연(外緣)430)이 되어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근본무명이 오히려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소승열반이 구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회심하여 대보리를 향하지 않음이 없다. 이는 종교(終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문】 『유가(瑜伽)』나 『현양론(顯揚論)』에서 ‘모든 식(識)이 성숙함이나 성숙하지 않음 중 네 구 안에서 성문과 독각으로써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에 들어간 이는 아뢰야식(阿賴耶識)과 여러 전식(轉識)이 모두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미 본식(本識)과 전식이 모두 멸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뒤에 내는 마음[後生心]은 무엇으로써 인(因)을 삼는가? 인(因)이 없는데도 과(果)가 생긴다면 이치[理]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답】 그 논은 시교문(始敎門)에 의거하여 소승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세운 바의 뇌야(賴耶)가 행상(行相)을 거칠게 드러낼 뿐 진(眞)을 따라 일어나지 않으므로 멸함이 있다고 설하였다.
또한 소승을 따르기 위하여 또한 저 열반이 구경 아닌 것이 아니다라고 인정하였으므로 들어가고 나면 다시 일으키지 않는다고 설한 것이다.
지금 종교(終敎)를 잡아서 실(實)을 좇아 설하면, 이미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여래장(如來藏)을 훈습하여 뇌야식(賴耶識)을 이루었으니, 저 이승인(二乘人)은 이 두 법에서 이미 모두 끊어 증득하지 못하였는데, 무엇을 인(因)해 아뢰야식을 멸할 수 있겠는가? 또한 저것에 대해 끊어 증득함이 없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얻는 바 열반이 어찌 구경이 되겠는가? 화성유(化城喩)431)와 똑같아서 마땅히 과실이 있어야 한다. 또한 위의 네 가지 인[四因]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마음을 낼 수 있다.
【釋】 ‘제칠(第七) 이승회심(二乘廻心)’432)이라고 한 것은 앞의 여러 문(門) 가운데 대승과 소승을 통틀어 잡아서 말한 것이다. 지금은 소승의 행(行)을 익히고 나서 반드시 대승으로 향하기 때문에 다음에 온 것이다. 이 가운데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수(數)를 든 것이고, 둘째는 따로 해석한 것이며, 셋째는 묻고 답한 것이다.
따로 해석하는 것 가운데 ‘일체의 이승에는 모두 회심이 없다’433)고 하였는데, 그러나 『도신장』에서는 “소승성(小乘性)이 정해지기 이전에는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였다.
【문】 어떤 이유로 지금은 ‘모두 회심이 없다’고 하는가?
【답】 『도신장』은 스스로 불성(佛性)을 종지로 삼아서 잡은 것이고, 지금은 대승으로 돌이켜 들어간 뜻을 잡았기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이다.
‘둘째로 혹은 일체가 모두 회심(廻心)한다’434)고 한 것에 대해서다.
【문】 우선은 소승을 밝히고 다음으로 시교(始敎)를 밝힌다면 순서에 합당할 터인데, 어떤 이유로 소승 다음에 종교(終敎)를 밝히는가?
【답】 우선 구수(句數)의 순서를 잡아서 이와 같이 세운 것이다. 말하자면 소승의 일체가 회향하지 않는 뜻에 대비하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종교의 일체가 아울러 회향하는 뜻을 밝힌 것이다. 또한 시교가 회향하거나 회향하지 않는 뜻에 대비하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돈교(頓敎)가 회향하지 않거나 회향하지 않음이 없는 뜻을 밝힌 것이니, 다만 마땅함을 좇아서 세웠을 뿐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로 교의(敎意)를 밝힌 것이고, 둘째로 ‘묻기를’435) 이하는 물음과 대답이다.
앞의 것 가운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표방한 것이고[總標], 둘째로 ‘이실유(以悉有)’436)의 아래는 인연을 변별한 것이고, 셋째로 ‘이 때문에’437)의 아래는 결론이다.
인연을 변별한 것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내인(內因)이고, 둘째는 외연(外緣)이고, 셋째로는 무명미진(無明未盡)이고, 넷째로는 열반불구경(涅槃不究竟)이다.
【문】 답 중에는 두 겹[二重]이 있다. 처음에는 어긋나 있는 문장을 회통하고, 그 다음으로는 회심(廻心)하는 시기의 분제(分齊)를 변별하였다. 앞의 것 중에 “『현양론(現揚論)』438) 등이란 것은 제십칠권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문: 만약 아뢰야식을 성취한다면 또한 전식(轉識)을 성취하는가? 설령 전식을 성취하더라도 또한 아뢰야식을 성취하는가?
답: 이것은 마땅히 네 구로 지을 수 있으니, 말하자면 혹 아뢰야식을 성취한다고 해도 전식이 아니니, 이를테면 그것은 무심수면(無心睡眠)ㆍ무심민절(無心悶絶)해서 무상정(無相定)에 들어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는 자이다. 혹 전식을 성취한다고 해도 아뢰야는 아니니, 말하자면 그것은 유심위(有心位)439)에 머무른 아라한ㆍ독각ㆍ불퇴전(不退轉)의 보살 및 여래이다. 혹은 모두 성취함이 있으니, 말하자면 나머지 유심위에 머무는 자이다. 혹은 모두 성취하지 않음이 있으니, 이를테면 아라한ㆍ독각ㆍ불퇴전의 보살과 여래가 멸진정(滅盡定)에 들어서 마치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에 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유가(瑜伽)』440)도 이 설과 같다.
이제 제사(第四)의 모두 성취하지 않는 구(句)를 인용하여 묻기를, “본식과 전식이 모두 멸하여 남은 것이 없게 된다면, 무엇을 인(因)으로 삼아 마음을 내어서 수도(修道)하는가?”라고 한다면, 대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가』ㆍ『현양(現揚)』의 문장을 회통한 것이고, 둘째로 ‘우유상(又由上)’441)의 아래는 ‘무엇으로 인을 삼는가?’의 물음에 대답한 것이다.
【記】 【문】 마음을 내어 회향할 때, 분제(分齊)는 어떠한가?
【답】 근기가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가는 데에 더디고 빠름이 있다. 더딘 것은 겁(劫)을 지나야 비로소 일어나기 때문에 『능가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삼매(三昧)의 즐거움을 즐기고 집착해서 무루계(無漏界)에 안주하는 바람에 구경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또한 다시 물러나지도 않아서 모든 삼매신(三昧身)을 얻어 겁에 이르기까지도 깨닫지 못한다. 비유하면 마치 취한 사람이 술이 깬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것처럼 법을 깨닫는 것 또한 그렇게 해서 부처의 위없는 몸을 얻게 된다.”
풀어서 말하면, 이 문장은 단지 총상으로 설한 것[總相說]이다. 만약 차별을 설한다면, 예리하고 둔함에 따라 각각 따로 시간을 거쳐서 모두 아뇩보리심위(阿耨菩提心位)에 이르는 것이니, 마치 『열반경』에서 “수다원인(須陀洹人) 또한 다시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팔만겁을 지나야 곧 아뇩보리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고, 또한 이르기를, “독각(獨覺)이 십천겁을 거쳐야 아뇩보리심에 이르게 된다”고 한 것과 같다.
풀어서 말하면, 이는 가장 둔한 수다원인은 칠생(七生)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열반에 들어 마음과 마음의 법[心心法]을 멸하고, 비로소 멸정(滅定)에 들어 다시 팔만 겁을 거쳐야 마음을 낼 수 있어서 부처의 교화를 받아 곧 보리심을 발하게 된다고 밝힌 것이다.
만약 한 몸에서 제이과(第二果)를 얻어 이생(二生)을 받고 나서야 열반에 든다면 육만 겁을 지나서야 능히 발심(發心)하게 된다. 만약 한 몸에서 제삼과(第三果)를 얻어 욕계로 돌아오지 않고 바로 열반에 든다면 사만 겁을 지나서야 발심하게 된다. 만약 한 몸에서 아라한을 얻어 곧 현재에 멸정(滅定)에 든다면 이만 겁을 지나서야 곧 발심하게 된다. 만약 독각의 근기[機]가 예리하면 일만 겁을 지나서야 발심하게 된다. 이 다섯 사람이 발심할 때 바로 십신(十信)의 보살위(菩薩位)에 들어가는데, 이를 바야흐로 아뇩보리심을 발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 다른 뜻이 있다. 곧 앞의 다섯 사람은 범부의 지위로부터 소승의 과(果)를 얻어서 열반에 들었는데, 나중에 회심을 일으켜 십신행(十信行)을 닦고 신(信)이 마음에 가득하고 나서 능히 십주(十住)에 들어간다. 그리고 초발심주위(初發心住位) 이후로는 근기의 예리하고 둔함을 따라서 각각 그 겁(劫)을 거치는데, 반드시 한결같이 열반 속에 있으면서 그러한 겁을 거치지는 않는다.
마치 직왕인(直往人)이 이미 일만 겁을 거쳐서 수행이 만족하면 능히 발심을 감당하는 것처럼, 저 독각인도 근기가 가장 예리하기 때문에 직왕인과 비슷하게 일만 겁을 거친다. 나머지 네 가지 둔한 근기는 또한 차별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다르다. 이상은 더딤을 밝힌 것이다.
지극히 빠른 것에 대해서는 법화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멸도(滅度)한 뒤 다시 어떤 제자가 이 경을 듣지도 못하고, 보살이 행할 바를 알지도 못하고, 깨우치지도 못하였으나, 스스로 얻은 공덕으로 멸도의 상(想)을 낸다면 마땅히 열반에 들어가리라. 내가 다른 나라에서 성불하여서 다시 다른 이름을 가질 터이지만, 이 사람이 비록 멸도의 상(想)을 내서 열반에 들더라도 그 땅에서 부처의 지혜를 구하면 이 경전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불승(佛乘) 만으로 멸도를 얻을 수 있을 뿐 다시 다른 승(乘)은 없으나442), 모든 여래의 방편 설법은 제외한다.”
이상은 모두 종교(終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釋】 뒤의 문답에서 대답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총체적으로 답한 것이고, 둘째로 ‘지자(遲者)’443)의 아래는 따로 대답한 것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는 『능가경』을 인용하여 총설(總說)을 나타내었고, 둘째로 ‘만약 차별하여’444)의 아래는 별설(別說)을 나타내었다.
앞의 것에 대해서다.
【문】 『기신소(起信疏)』445)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예리하고 둔함, 느리고 빠름은 여러 성교(聖敎)에 대략 일곱 위(位)가 있으니, 말하자면 팔만ㆍ육만ㆍ사만ㆍ이만ㆍ일만 등의 겁인데, 순서와 같이 사과(四果) 및 독각인에 짝한다. 이 다섯 가지는 『열반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제육위(第六位)는 『능가』에서 ‘삼매주(三昧酒)에 취하여 겁에 이르러도 깨지 못하니, 취기가 없어진 뒤에야 깨닫고서 부처의 위없는 몸을 얻는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는 또한 앞의 만 겁을 거치지 않는 것보다 예리한 것이다. 제칠위(第七位)는 『법화경』에 이르기를, ‘오직 불승(佛乘)으로써 멸도를 얻는다’고 설한 것과 같다. 풀어서 말하면, 이는 가장 예리한 근기라서 또한 분단(分段)을 버리고 열반에 이미 들어가고 나면, 불토(佛土)에서 변역신(變易身)을 받고 부처의 교화를 받아서 대승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소(疏)는 『능가경』의 문장으로 제육위(第六位)를 삼아서 『열반』의 오위(五位)와는 다른데, 어떤 이유로 지금은 장(章)이 총상(總相)이 되는가?
【답】 경의 문장은 단지 “겁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할 뿐이고, 겁수(劫數)를 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말 가운데는 팔만 내지 일만을 포함하게 되니, 그러므로 “이 문장은 단지 총상을 설한 것이다”446)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이미 “겁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했을 뿐이고 만 겁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령 일겁을 지나더라도 또한 겁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므로 『기신소』 중에서는 이 뜻을 잡아서 ‘앞보다 예리하다’고 말한 것이다.
‘수다원인(須陀洹人)도 또한 정해지지 않았다’447)고 한 것은, 만약 스스로의 종지를 잡으면 비록 성(性)이 정해졌다고 할 수 있으나, 이 교의(敎義)에서는 정해진 성(性)이 없기 때문이다.
【문】 수다원인 등이 모두 나한과를 얻은 뒤에야 무여(無餘)에 들어간다면, 어째서 수다원인 등이라고 하는가?
【답】 『도신장』에 이르기를, “이미 나한(羅漢)에 이른 뒤 바야흐로 무여삼매(無餘三昧)에 들어간다면, 어째서 초과, 이과, 삼과라고 말하는가? 실제로는 모두 나한이나 처음을 좇아서 이름을 삼았을 뿐이다. 이를테면 처음 소승의 마음을 발하여서 현재의 몸에서 초과를 얻는다. 제이생(第二生) 뒤에 제이(第二) 이상을 얻는 것은 초과성(初果性)이 되니, 만약 현재의 몸에서 제이과에 이른 자는 제이과성이 되고, 만약 제삼과를 얻은 자는 제삼과성이 되며, 만약 현재의 몸에서 제사과를 얻음에 이른 자는 나한성(羅漢性)이라고 이름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함께 제사과를 얻은 뒤에 무여멸(無餘滅)에 들어가서 그러한 겁을 거치기 때문에 몸을 나타내 과(果)를 얻은 뜻을 기준으로 하여 초과, 이과, 삼과라고 이름했을 뿐이다.
‘이 다섯 사람이 아뇩보리심을 발함에 이르러’448)는, 무여 중에서 약간의 겁을 거쳐 십신(十信)에 회향하여 들어갈 때를 곧 발심이라고 이름한다.
【記】 셋째로 혹 일체의 이승은 또한 회향하거나 회향하지 않으니, 말하자면 종성을 결정한[決定種性]449)자는 적멸에 나아가 회향하지 않고, 종성이 결정되지 않은[不定種性]450)자는 대승으로 회향하는 것이다. 『유가(瑜伽)』의 성문결택(聲聞決擇) 가운데 설한 것과 같으니, 이는 시교(始敎)를 잡아서 이승설(二乘說)을 인용하였다.
넷째로 회향이 아니면서[非廻] 회향하지 않음이 아닌[非不廻] 것이니, 상을 여의기[離相] 때문이다.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 등의 설과 같으니, 이는 종교, 돈교(頓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다섯째로 앞의 네 가지 설을 합한 것이니, 이는 대법방편(大法方便)451)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승섭방편(一乘攝方便)을 잡아서 설한 것이다.
여섯째로 앞의 다섯 가지를 모두 없앤 것이니,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로 일체의 이승은 모두 회향할 바가 없으니, 일승으로써 조망하면 모두 공(空)이라서 회향할 수 없는 것이다. 경전 중에서 귀멀고 눈멀었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둘째로 일체의 이승 등은 모두 이미 회향해 마쳐서 다시 회향하지 않는 것이다. 경전 가운데 “보현안(普賢眼)으로써 일체중생을 보니, 모두 이미 구경(究竟)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는 모두 일승별교(一乘別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문】 만약 일승섭방편 중의 회심(廻心)이 삼승 중의 회심과 같다면, 얻은 바 법문(法門)의 분제(分齊)는 어떠한가?
【답】 만약 삼승 중의 회심이라면, 곧 십신에 들어간 후에는 보리심과 대비(大悲) 등의 법문을 순행(順行)해서 차례대로 가는 것이다. 만약 일승 중이라면 아래 문장과 같으니, “사리불(舍利弗)과 인다라혜(因陀羅慧)비구 등 육천 인은 문수사리 곁에서 회심하여 곧 십대법문(十大法門)과 십안십이(十眼十耳) 등의 경계를 얻었다.” 뜻은 마땅히 해행신(解行身)이어서 오위법(五位法)에 두루 미치며, 나머지 뜻은 다른 곳에서 설한 것과 같다.
【釋】 ‘넷째로 회향이 아니면서 회향하지 않음도 아니다’452)는 『문수반야경』인데, 거기서 이르기를, “이와 같이 설법한다. 어떤 중생도 과거에 열반을 얻었거나 지금 얻거나 앞으로 얻을 중생은 없으니, 어떤 이유 때문인가? 어떠한 결정된 중생상(衆生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준하여 알아라.
‘여섯째는 혹 모두 앞의 다섯 가지를 없앤다. 이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체이승(一切二乘)이’로부터 ‘돌이킬 만한 것이 없다’453)에 이르기까지는 이승행심(二乘行心)으로써 보현행심(普賢行心)에 견준 것이니, 반딧불로 해와 달에 견준 것과 같기 때문이다.
‘보현안(普賢眼)으로 모두 구경(究竟)이다’454)는 보현안으로써 이승(二乘)을 조망하면 본래 구경(究竟)이라서 다시 회향함이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해석 가운데 결언대덕(決言大德)이 말하기를, “이 두 도리는 오직 돈교(頓敎)와 별교(別敎) 중에서 논했을 뿐이니, 이승회심(二乘廻心)의 뜻을 논한다면 궁실(窮實)이기 때문이다. 시문(始門)과 종문(終門)의 두 회심[二廻心]의 뜻도 또한 궁실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해석하면, 이 두 가지 해석은 모두 돈교ㆍ원교ㆍ별교를 잡아서 논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이승은 이미 회향할 것이 없는데, 어떤 이유로 이승회심(二乘廻心)의 장(章)을 세워 회심의 뜻을 변별하였는가?
【답】 비록 행심(行心)을 기준으로 하면 나눌 것이 없다 하더라도 보법(普法)에 들어갈 때가 있기 때문에 또한 회심의 뜻이 있다. 비록 보현안(普賢眼)으로 본래 구경임을455) 본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말해서는 실제로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요, 집착하는 마음을 돌이켜 진입(進入)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또한 회심의 뜻을 변별한 것이다.
【문】 장주(章主:法藏)의 『입법계품소(入法界品疏) 』456)에서 대성문(大聲聞)을 해석하길, “대(大)는 제사과(第四果)이고 또한 부동성(不動性)이며, 여러 성문 중에서 가장 존귀하고 크기 때문이니, 사리불 등과 같다. 또한 이들은 나란히 대승으로 회향한 성문이니, 그러므로 대(大)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불지론(佛地論)』에 이르기를,457) “실제의 뜻은 부정종성(不定種性)의 성문이 소승의 과(果)를 얻고 나서 대보리(大菩提)로 향하기 때문에 ‘대’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풀어서 말하면, 이것은 아직 원교일승보현법(圓敎一乘普賢法)에 들어가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아래의 문장에서는 “귀머거리와 장님과 같다”고 한 것이다.
또한 이를 해석하면, 모두 대보살인데 성문을 지어 나타내 보인 것이니, 신역(新譯) 화엄458)의 부사의경계분(不思議境界分)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 법의 깊고 뛰어남을 나타냈기 때문에 귀머거리와 장님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이 세 가지 해석은 어떻게 다른가?
【답】 첫째 것은 소승(小乘)을 잡아서 해석하였고, 둘째 것은 삼승을 잡았으며, 셋째 것은 일승을 잡아서 해석하였다.
【문】 일승을 잡아서 해석한 것 가운데 ‘이들 등은 모두 대보살이다’459)라고 한 것은 이 중에서 ‘보현안(普賢眼)으로써 일체 중생을 보니, 모두 이미 구경이다’460) 한 것에 해당되고, ‘이 법의 깊고 뛰어남을 나타냈기 때문에 귀머거리와 장님 같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461)라고 한 것은 이 가운데 ‘곧 공(空)이라 회향할 만한 것이 없다’462)는 뜻에 해당되는가?
【답】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한다.
【문】 실제로는 보살인데 성문을 나타낸 것이니, 그러므로 귀멀고 눈멀었을 때가 곧 대보살이다. 그런데 어째서 성문을 나타낸 자는 곧 공(空)하여 회향할 것이 없는 것인가?
【답】 따로 상속(相續)하는 성문과 보살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이승을 논한 것이다. 실제로는 보살이지만 또한 곧 이것이 귀멀고 눈먼 이승과 같기 때문에 비록 실제의 보살이 귀멀고 눈멂을 드러내 보일 때라도 곧 공하여 회향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귀머거리와 장님 같음을 나타내 보인다”463)고 말하고, 지금 여기서도 또한 “경 가운데 귀머거리와 같고 장님과 같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464)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이와 같이 준거하라.
지금의 해석에서는 ‘이들 대보살이 성문을 지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465)라고 한 것은 비록 실제로는 보살이라고 하더라도 법의 깊고 뛰어난 자취를 나타내고자 해서 성문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곧 성문일 때가 구경(究竟)의 대보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승을 잡아서 해석하면, 여기에서 ‘보현안으로 일체중생을 보면, 이미 모두 구경이다’466)라고 한 뜻에 해당된다. 삼승을 잡아서 해석하고, 소승을 잡아서 해석하면, 여기에서 ‘공(空)하여 회향할 것이 없다’467)라고 한 뜻에 해당된다.
【문】 어떤 이유로 한 종류인 귀머거리와 장님과 같은 이승(二乘) 가운데 많은 뜻이 있는가?
【답】 둘째의 해석 가운데 “비로소 원교일승보현법(圓敎一乘普賢法)에 들어간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래 문장에서 “귀머거리와 장님과 같다”468)고 하였기 때문에 귀머거리와 장님의 뜻이 나타난 것이다. 앞의 해석은 이미 소승을 잡았기 때문에 귀멀고 눈먼 뜻이 또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두 해석은 여기의 처음 해석한 뜻에 해당된다. 셋째의 해석 중에서 이미 “모두 대보살인데 성문(聲聞)을 지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469)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뒤의 해석한 뜻에 해당된다.
【문】 실제로는 보살인데 자취는 성문과 유사한 이승과 공(空)해서 회향할 것이 없는 이승은 어떻게 다른가?
【답】 비록 한 종류의 이승이라고 하더라도 보현안(普賢眼)으로 보면 실제로는 대보살인데, 법의 깊고 뛰어남을 나타내기 때문에 귀머거리와 장님같이 보인 것이다. 행심(行心)을 잡아서 보면 실제로 성문인데, 나눌 것이 없기 때문에 공(空)하여 회향할 것이 없는 것이다.
『도신장』에 이르기를, “중생업(衆生業)이 일어남은 보현이 돌이켜 이룬 것이 아님이 없기 때문에 보현이 없으면 자재(自在)함을 얻을 수 없다. 보현이 돌이켜 이룬 것은 중생업의 일어남 아님이 없기 때문에 보현이 아니면 고통이나 고통을 지어서 중생을 괴롭게 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중생업이 일어나는 것이 보현이 아닌 때가 없다면 오직 이는 보현일 뿐이고, 보현을 돌이켜 이루는 것이 중생업이 일어남 아닌 때가 없다면 보현은 바로 중생이다. 이 가운데 도리(道理)도 마땅히 그러함을 알라.
【문】 회심(廻心)으로 보법(普法)에 들어갈 때, 그 이름을 바꾸지 않고 들어가는가, 아니면 이승의 이름을 바꾸어 보살의 명칭을 얻은 뒤에 들어가는가?
【답】 옛날에 두 뜻과 세 가지 시설(施設)이 있었다. 두 뜻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동교(同敎)를 잡으면 자승(自乘)을 따라 들어감이 있고, 별교(別敎)를 잡으면 이승의 이름을 바꾼 뒤에 비로소 들어간다”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동교를 잡거나 별교를 잡거나 모두 바뀐 뒤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세 가지 시설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엄과 의상은 동교를 잡으면 자승(自乘)을 따라서 들어갈 수 있고, 별교를 잡으면 바꾼 뒤에 비로소 들어간다고 하였다. 장주는 만약 동교를 잡든 별교를 잡든 모두 바꾸어야 비로소 들어간다고 하였다”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스승은 모두 동교를 잡으면 자승(自乘)을 따라서 들어갈 수 있고, 별교를 잡으면 모두 바꾸고 난 뒤에 비로소 들어간다고 하였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스승은 만약 동교를 잡든 별교를 잡든 모두 바뀐 뒤에 들어간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셋째 설이 옳다. 왜냐하면 ‘전위(轉爲)의 문장’470)에 이르기를, “나머지 대승경에서 어떤 성문중(聲聞衆)은 소피기(所被機)471)가 되고 또한 이승(二乘)을 이끌어 대승에 들어가게 하는데, 유독 이 경만은 중생에 성문의 근기[聲聞機]가 없고 경문에 소승을 회향하는 설명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문】 전위(轉爲)는 단지 별교를 잡아서 말한 것일 뿐이다. 만약 동교를 잡으면 자승(自乘)을 따라서 화엄에 들어갈 수 있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 것인가?
【답】 만약 그렇다면, 논란하는 자가 동교를 잡는다고 해서 이 경전 속의 중생에 성문의 근기가 있고 문장에 소승을 회향한 설명이 있는 것인가? 이미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설사 동교를 잡는다 하여도 바꾼 뒤에 비로소 들어가는 것이다.
【문】 이승에 나아감 속에 예리함과 둔함이 있다. 이 때문에 만약 예리한 사람이라면, 저 삼승 등의 법이 본래 별교일승(別敎一乘)과 다름이 없다는 해(解)를 일으켜서 자승(自乘)을 따라 이 경의 문상(門相)에 들어갈 수 있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답】 비록 예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바꾼 뒤에 비로소 들어간다. 왜 그런가? 『법계품소(法界品疏) 』472)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문: 단지 듣고도 믿지 않을 수 있다. 마치 『문수행경(文殊行經)』 중에 오백 성문이 믿어 받들지 않은 것과 같은데,473) 어떤 이유로 여기에서는 총체적으로 듣고 보지 않는 것인가?
답: 그것은 바로 삼승이 근기를 따라 설한 것이기 때문에 또한 들을 수 있지만, 지금 이 일승은 법이 높음을 따라 나온 것이기 때문에 능히 듣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듣는 것도 오히려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해(解)를 일으켜서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문】 『도신장』에 이르기를, “이승을 전전(展轉)의 소위(所爲)로 삼는다는 것은 화엄별교(花嚴別敎)에 의거한 것인데, 만약 노지동교(露地同敎)474) 및 화엄동교(花嚴同敎)에 들어가면 이승이 각각 자승(自乘)을 따라서 두 동교에 회향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문장을 기준으로 하면 자승을 따라서 화엄동교에 들어갈 수 있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답】 비록 이승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승이 아니기 때문에 어긋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도신장』에 또한 이르기를, “이 근기의 사람은 실제로는 보살인데 앞의 이승을 따라서 왔기 때문에 이승의 이름을 덧붙인 것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문】 화엄별교와 화엄동교, 노지동교는 어떻게 다른가?
【답】 별교는 돈원일승(頓圓一乘)에 통하고, 화엄동교는 실제돈(實際頓) 중에서 항포(行布)이고, 노지동교는 대백우거(大白牛車)475)이다.
【문】 화엄별교는 오직 원융(圓融)일 뿐인가, 아니면 원융과 항포에 통하는가?
【답】 통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왜 화엄동교는 항포인가?
【답】 만약 원융과 항포를 통틀은 별교를 잡는다면, 이승의 이름을 버리고 보살의 칭호를 얻은 뒤에 비로소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승의 전전(輾轉) 소위(所爲)가 된다고 한 것은 화엄별교에 의거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만약 항포를 열어서 동교를 삼는다면, 이 또한 실제의 보살이 들어가는 바이나, 아직 영원히 이승의 이름을 버린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앞의 이승을 따라서 왔기 때문에 이승의 이름을 덧붙였을 뿐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 뜻을 잡아서 “만약 노지동교와 화엄동교에 들어간다면 이승이 각각 자승(自乘)을 따라서 두 동교에 회향해 들어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문】 ‘이승의 이름을 덧붙인다’고 한 것은 어떤 위(位)에서 덧붙이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십신(十信)의 앞 구심(九心)에서 더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삼승 중에는 신만(信滿)의 감임위(堪任位)에 이르러야 보살종성(菩薩種性)이 비로소 결정되지, 앞의 구심 중에서는 종성(種性)이 아직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승(二乘)이 앞의 구심에 의지하여 일승으로 회향해 들어가는 것을 곧 자승을 따라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감임위(堪任位)에 이르러야 회향해 들어가는 것이라면, 바야흐로 제삼 보살승을 얻어야 회향해 들어간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종교(終敎)의 지전(地前)에서 덧붙인 것이다. 말하자면 지전에 의지하여 일승으로 회향해 들어가는 자는 이승의 습기[習]가 있기 때문에 ‘자승을 따라서 들어온다’고 하였으며, 지상(地上)에 의지하여 일승으로 회향해 들어가는 자는 직진보살(直進菩薩)과 근성(根性)이 동등하기 때문에 바야흐로 ‘보살승(菩薩乘)을 따라서 들어간다’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이 장(章)476)에서 ‘만약 저 지혜가 늘어난 자[智增上者]가 소승(小乘)의 습기가 있어서 모든 번뇌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영원히 조복한다고 말한다면, 또 만약 지전에서 아직 진여를 증험하지 않았다면, 본습(本習)을 잡아서 이런 부류가 있음을 용납할 수 있으니, 이는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지 이상은 행해(行解)477)가 완전히 익어서 동일하게 증득하고, 동일하게 행하고, 동일하게 닦고, 동일하게 끊으니, 어떻게 이런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노지동교(露地同敎) 속에서 덧붙인 것이다. 말하자면 이승인(二乘人)은 소류해(所流解)를 일으켜 노지동교에 의거하며, 뒤에 화엄동교(花嚴同敎)에 들어가는 자는 실제로는 보살인데 앞의 이승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이승의 이름을 덧붙였을 뿐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화엄동교 중에서도 또한 이승의 이름을 더하는가?
【답】 그렇다. 말하자면 『도신장』에 이르기를, “이러한 근기의 사람은 바로 보살이기 때문에 이승상(二乘相)이 없을 뿐이나, 진실을 말한다면 이승으로부터 이 근기가 익은 곳에 이르고, 보살로부터 이 근기가 익은 곳에 이른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말한다면, ‘실제로 보살이더라도 앞의 이승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이승의 이름을 덧붙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기(機)가 익은 곳’은 화엄동교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 ‘두 동교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로 서로 이어지는 것[一相續]인가?
【답】 그렇다. 말하자면 만약 노지동교에 들어간다면 곧 화엄동교에 들어가는 것이요, 만약 화엄동교에 들어간다면 반드시 노지동교를 따르기 때문이다.
【문】 노지동교에 의지한 사람은 화엄동교에 들어갈 때 유해(流解)로 들어가는가, 아니면 다시 목해(目解)를 일으켜서 들어가는가?
【답】 앞과 같다. 말하자면 이승인(二乘人)이 소류해(所流解)를 일으켜 노지동교에 들어가더라도 이 해(解)를 버리지 않으며, 화엄동교에 들어가서는 마치 외문(外門)으로부터 들어온 사람이 반드시 중문(中門)을 바라보고 서게 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노지동교에 들어간 사람은 반드시 화엄동교를 조망하기 때문에 그렇다.
【문】 화엄동교에 선 사람은 별교에 들어갈 때, 어떤 해(解)를 일으키는가?
【답】 목해(目解)를 일으켜서 들어간다.
【문】 요컨대 목해로써 별교에 들어간다면, 노지동교에 선 사람은 어떤 이유로 또한 목해를 일으켜 바로 별교에 들어갈 수 없는가?
【답】 이것도 또한 앞과 같다. 만약 법화동교(法花同敎)에는 들어가고 화엄동교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화엄동교에 의지하고 다시 목해를 일으켜서 별교에 들어간다.
【문】 화엄동교에 의지하여 목해를 일으킨 사람은 십근(十根) 중에서 어떤 근(根)에 속하는가?
【답】 제팔근(第八根)에 속한다. 말하자면 제팔근은 그 삼승 가운데 서더라도 목해를 일으키는데, 화엄동교 중에 목해를 일으킨 사람도 그와 더불어 해(解)가 동일하기 때문에 또한 제팔에 속한다. 제칠근 중에서는 비록 삼승법(三乘法)을 말하더라도 근(根)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동교일승에 진입함을 감당할 수 있는데, 소승 중에서 소류해(所流解)를 일으켜 동교에 들어간 자도 또한 제칠에 속해서 마찬가지이다.
셋째 문답 중에 ‘일승섭방편(一乘攝方便) 중의 회심(廻心)’478)은 종문(終門)에 해당되고, ‘삼승 중의 회심’479)은 시문(始門)에 해당된다.
【문】 종문(終門)의 회심소립위(廻心所立位)는 곧 숙돈(熟頓)이요, 섭방편(攝方便)은 소승에 통하는데, 어째서 같다고 말하는가?
【답】 종문(終門)의 위(位)를 세운 것이 비록 숙돈이라도 뜻은 초교(初敎)에 통하고, 섭방편은 비록 사교(四敎)에 통하더라도 소승은 반드시 삼승교(三乘敎)에 의지하여 바야흐로 일승교(一乘敎)에 들어가기 때문에 구별하지 않은 것이다.
【문】 섭방편은 오직 사교만은 아닌데, 어떤 이유로 문수 곁에서 회심(廻心)하여 곧 십대법문(十大法門) 등을 얻는가?480)
【답】 위(位)를 세움을 잡아서 섭방편(攝方便)을 삼은 것이지, ▣입(▣入)을 섭방편으로 삼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이승 가운데 회심은 오직 위를 세움을 잡아서 삼승의 소입(所入)으로 삼은 것이지 삼승은 아닌 것인가?
【답】 삼승 가운데 회심은 위(位)를 세우는 것과 들어가는 바를 통틀어 잡아서 삼승이라고 이름한 것이기 때문에 예로 들지 않은 것이다.
‘나머지는 다른 설과 같다’481)는 지엄의 「회심장(廻心章)」482)을 가리킨다.
【記】 여덟째로 불과의상(佛果義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상(常)과 무상(無常)의 뜻을 밝히고, 둘째로 상호(相好)의 차별을 밝혔다.
앞의 것 가운데 만약 소승(小乘)의 불과(佛果)라면 오직 무상(無常)이니, 본성(本性)의 공덕을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성론(佛性論)』에 이르기를, “소승은 성덕(性德)의 불성(佛性)이 없고 단지 닦은 덕[修德]만이 있다”고 한 것과 같다. 만약 삼승시교(三乘始敎)라면 법신(法身)은 곧 상(常)이니 자성(自性)이기 때문이며, 또한 무상이니 여의기도 여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행으로 생긴 공덕(功德)은 무상이니, 인연을 좇아서 나오기 때문이요 유위(有爲)의 누(漏)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常)이니, 간단(間斷)이 없기 때문이요 상속(相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장엄론(莊嚴論)』에 이르기를, “자성이 틈도 없이[無間] 상속하여 세 부처가 함께 상주(常住)한다”고 하였다.
【釋】 여덟째로 ‘불과의상(佛果義相)’483)은 우선 심식(心識)에서부터 단혹(斷惑)에 이르기까지 오승(五乘)의 수행궤칙(修行軌則)을 통틀어 변별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승회심(二乘廻心)의 뜻을 말하는데, 아직 이와 같은 점오(漸悟)와 돈오(頓悟)로 얻은 불과[所得佛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온 것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는 장문(章門)을 열고, 둘째로는 따로 해석한 것이다. 그 가운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상(常)ㆍ무상(無常)484)인데, 그 가운데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로 소승 가운데 ‘무성득불성(無性得佛性)485)’ 등이라는 것은 『불성론』486)이 소승론(小乘論)은 아니더라도 소승사(小乘事)를 나타내기 때문에 인용하였을 따름이다.
둘째로 시교(始敎) 가운데 ‘또한 무상이니, 여의기도 하고 여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487)라는 것에 대해서 『양론(梁論)』의 제십사에서는 “존귀하게 진여(眞如)를 성취하고, 여러 지(地)를 닦아서 벗어나 여읜다”고 하였다. 나아가 “존귀하게 진여를 성취한다”고 한 것을 논하였는데, 이를 풀어서 말하기를 “이 구(句)는 법신(法身)의 자성(自性)을 밝힌 것이다. ‘진여를 성취하면’ 허물없이 청정하니, 만약 도전(道前)488)이나 도중(道中)에 있다면 결루(結累)가 아직 다하지 않았으므로 성취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다. 도후(道後)는 구루(垢累)가 이미 다하였기 때문에 성취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도전(道前)ㆍ도중(道中)은 결루(結累)가 아직 다하지 않았으므로 이름하여 불리(不離)라 하고, 도후(道後)는 결루가 이미 다하였으므로 이름하여 이(離)라고 한 것이다.
‘유위무루(有爲無漏)’489) 등은 정분의타(淨分依他)이니, 번뇌를 떠나기 때문에 무루(無漏)라 하고, 종자를 따라서 생기기 때문에 유위(有爲)라고 이름한다.
‘간단이 없기 때문에’490)는 곧 보신(報身)이며, ‘상속하여 일으키기 때문에’491)는 화신(化身)이다.
【記】 만약 종교(終敎)에 의지한다면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로는 따로 밝히고, 둘째로 총체적으로 설한다[總說].
따로 밝힘[別明] 중에서 수행으로 생긴 공덕(功德)은 무상(無常)이니, 그것이 수행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또한 상(常)이니, 하나를 얻은 뒤에 진여(眞如)와 같아지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인가? 본래 진류(眞流)를 따르기 때문이요, 무명(無明)이 이미 다하여 진체(眞體)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양섭론』에 이르기를, “이 법신(法身)으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며, 이 법신(法身)을 다시 증득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보성론(寶性論)』과 『기신론』 등에 이 뜻을 크게 세웠으니, 그와 같이 마땅히 알아라. 또한 『지론(智論)』에 이르기를, “살바야(薩婆若)는 삼세(三世)와 합쳐지지 않으니, 어떤 이유에서인가? 과거세 등은 곧 허망하고 생멸하지만, 살바야는 실법이라서 생멸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살바야는 중국말로 일체지(一切智)이니, 불지(佛地)의 원융한 지혜[圓智]가 진여와 같기 때문에 생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섭론(攝論)』에 이르기를, “마치 허공처럼 두루 일체의 색제(色際)를 채우면서도 생기고 머물고 멸하는 변이(變異) 등이 없는 것처럼, 여래지(如來智) 또한 마찬가지라서 일체의 알아야 할 바에 두루하면서도 뒤바뀜이나 변이 등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다만 간단이 없기 때문에 상(常)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진여의 변이하지 않는 상(常)과도 같다. 법신(法身)은 상(常)이니, 인연을 따를 때 자성(自性)이 불변하기 때문이며, 또한 무상(無常)이니, 물듦의 연(緣)을 좇아서 근기[機]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모든 공덕이 이미 모두 진(眞)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用)을 일으키는 것이 오직 진(眞)의 지음일 뿐이다.
그러므로『기신론』 중에서 보신과 화신을 해석하여 오직 진여(眞如)의 용대(用大)의 섭수에 속하게 하였다. 또한 논에 이르기를, “중생의 마음이 청정하면 법신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하였고, 또한 이르기를, “또한 본각(本覺)이 물듦[染]을 따라서 분별하여 두 가지 상(相)을 낳는데, 저 본각과 더불어 서로 여의지 않으니, 이른바 첫째는 지정상(智淨相)492)이고 둘째는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493)이다”라고 하였으며, 나아가 자세히 설하고 있다.
총체적으로 설하면, 이 법신(法身)이 수연(隨緣)494)의 뜻을 말미암기 때문에 공덕차별(功德差別)이 이루어지며, 불변(不變)의 뜻을 말미암기 때문에 공덕은 진여(眞如)에 즉하지 않음이 없으니, 온 체(體)가 연을 따르는 것과 온전한 상(相)이 변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뜻이 녹아들어서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과(佛果)는 곧 상(常)이자 무상(無常)이고, 네 구를 구족하면서도 네 구가 아니니, 뜻에 따라서 마땅히 알라.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이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非一非異]고 설하는가?
【답】 만약 시교(始敎) 중에서라면, 진여(眞如)가 두루하기 때문에, 또 지(智)가 진여를 증득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이며[非異],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는 같지 않기 때문에 하나이지는 않다[非一].
만약 종교(終敎) 중에서라면, 공덕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로 연기(緣起)가 현전하는 뜻이니, 삼아승지겁의 공덕이 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자성이 없는[無自性] 뜻이니, 진여를 떠나서는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앞의 뜻과 법신의 수연(隨緣), 뒤의 뜻과 법신의 불변은 곧 다름이 없는 문[非異門]이니, 온 체(體)가 온전히 거두기 때문이다.
또한 앞의 뜻과 불변, 뒤의 뜻과 수연은 곧 하나의 문은 아니니, 뜻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다르지 않음[非異]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하나가 아님을 밝힌 것이니,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만약 돈교(頓敎)에 의지한다면, 상(相)이 다하여 생각을 여의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실성신(實性身)이어서 평등하고 평등하므로 공덕의 차별[功德差別]이 있다고 설할 수 없고, 또한 상(常)과 무상(無常)도 설할 수 없다.
만약 말에 의탁하여 나타낸다면, 경전에 이르기를, “나의 지금 이 몸이 곧 법신이다”라고 한 것이나, 또 경전에 이르기를, “일체 모든 불신(佛身)은 오직 하나의 법신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준거하라.
【釋】 셋째로 종교 가운데 ‘또한 저 논에 이르기를, 〈중생의 마음이 깨끗하면 법신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하였다’495)고 한 것은 그 뜻이 『기신론』의 문장에서 인용한 것이니, 이는 보신과 화신을 법신의 모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상(常)에 즉(卽)하고 무상(無常)에 즉하는’496) 등과 ‘네 구를 구족한다’는 것에서는 혹은 오직 무상일 뿐이니 수연(隨緣)이기 때문이요, 공덕차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며, 혹은 상(常)일 뿐이니 불변이기 때문이고, 공덕은 진여에 즉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상이면서 또한 무상이니 두 뜻이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며, 혹은 전부 아니니 모양을 빼앗기[形奪] 때문이다.
‘혹 네 구가 아니다’497)라는 것에서는 혹은 무상이 아니니 곧 불변하기 때문이요, 공덕이 진여에 즉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상(常)이 아니니 곧 수연이기 때문이요, 공덕차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며, 혹은 무상이 아니니 모양을 빼앗기 때문이며, 혹은 전부 아님이 아니니 덕을 갖추기 때문이다. 만약 모두……(결락)……의거한다면, 수해응로 생긴 공덕(功德)에는…… (결락)…… 혹 네 구로 된 것과 네 구가 아닌 것이 있으니, 법신도 또한 그렇다. 말하자면 만약 수행으로 생긴 공덕을 잡으면 오직 무상이니, 그것이 수행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며, 혹은 오직 상(常)이니, 하나를 얻은 이후에 진여와 같아지기 때문이다. 혹은 전부[俱]이다. ……(결락)…… 혹은 전부가 아니니,498) 모양을 빼앗기 때문이다.
‘네 구가 아니다’라는 것은 알 수 있으니, 만약 법신을 잡는다면, 혹은 오직 상(常)이니, 인연을 따르고 지(持) ……(결락)…… 자성(自性)…… (결락)…… 이기 때문이다. 혹은 무상(無常)이니, 인연을 따라 기틀(機)에 이르기 때문이다. 나머지 구는 알 수 있다.
‘만약 시교 중에서 진여가 두루하기 때문에, 또 지(智)가 진여를 증득하기 때문에’499)라고 한 것은 진여가 일체법에 두루 미치고 지(智)가 진여와 같기 때문에 경계와 지혜가 한 곳에 처하니,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非異]’500)고 말한 것이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가 같지 않기 때문에’501)는 마치 밤나무 목판과 소나무 목판이 비록 한 곳에 처하더라도 같지 않은 것과 같다.
【記】 만약 원교(圓敎)에 의지한다면, ‘불과(佛果)는 상(常)이다’라는 뜻에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 용(用)을 잡으면 불과는 이미 삼세간(三世間) 등 일체법에 통하니, 그러므로 상(常) 등의 네 구를 갖추는 것이다.
둘째로 덕을 잡으면 불과는 네 가지 뜻을 갖추니, 이른바 첫째는 수생(修生), 둘째는 본유(本有), 셋째는 본유수생(本有修生), 넷째는 수생본유(修生本有) 등이다. 원융하고 무애하여 한없는 덕을 갖추니, 이 때문에 또한 상(常) 등 네 구에도 통한다. 위의 두 구의 뜻은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셋째로 체(體)를 잡아도 또한 네 구에 통한다. 이른바 이 경전 가운데서는 불가설(不可說)로 드러내기[顯] 때문이니, 이것은 상(常)이다. 아함(阿含)과 서로 응하기 때문이니, 이는 무상(無常)이다. 두 가지 뜻은 무애하기 때문이니, 이는 상이기도 하고 무상이기도 한 것이다. 연기제(緣起際)를 따르니, 이는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 것이다. 위의 세 가지 뜻에서 만약 체(體)라면 곧 모두 체이고, 나아가 용(用)이라면 모두 용이니, 체(體)로써 무애(無碍)를 융섭하기 때문에 모두 상(常) 등 무애가 있으니 생각해 보라.
【釋】 다섯째 원교(圓敎) 가운데 ‘용(用)을 잡아서...나아가상(常) 등 네 구를 갖추고 있다’502)고 한 것은, 삼승(三乘)이 법(法)과 보(報)와 화(化)를 기준으로 하여 밝힌 것이고, 지금 여기서는 체(體)와 덕(德)과 용(用)을 잡아서 변별한 것이다. 그러므로 체는 덕(德)과 용(用)의 온전한 체이고, 덕ㆍ용도 또한 그렇기 때문에 ‘만약 체라면 모두 체이고, 용이라면 모두 용이다’503)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삼승 가운데 삼신(三身)이 완전히 구별되어서 같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만약 네 구를 짓는다면, 삼세간(三世間)을 통틀기 때문에 상(常)이고, 기틀[機]이 있다면 응하고 기틀이 없다면 응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無常)이고, 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둘 다 함께이고, 형상을 빼앗기 때문에 둘 다 아니다.
‘덕을 기준으로 하면……또한 상 등의 네 구에 통한다’504)는 본유(本有)이기 때문에 상(常)이고, 수행으로 생긴 것[修生]이기 때문에 무상이다. 수생의 본유(本有)이고 본유의 수생이기 때문에 전부이고, 두 구가 형상을 빼앗기 때문에 모두 아닌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중에 네 가지 뜻[四義]은 준하면 알 수 있다’505)는 용을 잡은 것과 덕을 잡은 것 중에서 오직 ‘넷’이라고 말할 뿐 따로 짓지는 않기 때문이다.
‘불설(不說)로써 드러내기 때문에 상(常)이 된다’506)고 한 것은, 만약 갖추어 말한다면, 과해(果海)507) 자체는 마땅히 설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불설로써 드러내기 때문에 설이 곧 불설이니, 이것이 상이 된다. 이미 불설로써 드러내게 되면 교(敎)와 상응하기 때문에 “아함(阿含)과 상응하므로 무상(無常)이다”508)라고 말한 것이다.
【記】 둘째로 상호차별(相好差別)을 밝힌 것은 만약 소승(小乘)에 의거한다면 서른두 가지 상[三十二相]과 여든 가지 훌륭함[八十種好]이 있으니, 이것이 실법(實法)이다. 만약 삼승에서라면 혹시 서른두 가지 상과 여든 가지 훌륭함을 설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화신(化身)의 모습[相]이니, 곧 즉공(卽空)이 바로 상(相)의 뜻이다. 『금강반야경』ㆍ『대법론(對法論)』 등에서 설한 것과 같은데, 이것은 시교(始敎)를 잡아서 소승(小乘)을 인용하여 설한 것이다. 혹은 보신(報身)을 잡아서 팔만 사천 상(相)을 설하니, 모두 실덕(實德)이다. 이것은 직진(直進)과 종교(終敎) 등을 잡아서 설한 것이다.
【문】 어떤 이유로 『지론(智論)』 등에서는 이 화신(化身)에서 금장(金鏘)과 마맥(馬麥) 등 과거의 업이 초래한 것을 분별하고 서른두 가지 상 또한 각각의 인(因)을 내세웠는가?
【답】 이승(二乘)을 이끌기 위해 하위를 인(因)으로 삼아서 설한 것이니, 업과(業果)가 없어지지 않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성도(聖道)가 미혹은 끊어도 보(報)를 멸함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치 나한이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금장(金鏘) 등도 또한 그런 것이다. 소승은 실(實)로 삼고, 시교는 곧 공하다고 설하니 방편(方便)이기 때문인데, 『대승방편경(大乘方便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 상호(相好)가 인(因)을 내는 데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로 또한 이것이 방편(方便)으로써 이승을 이끌기 위하여 곧 이 몸에서 뛰어난 인과[勝因果]를 보이는 것이니, 실제의 보신(報身)은 그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들 역시 실제 보신의 모습이니, 화신을 드리우는 가운데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인(因)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문】 어떤 이유로 『섭론』 중에서 서른두 가지 상을 설하여서 법신공덕(法身功德)의 섭수에 포함시키는가?
【답】 이것에 또한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로 이승을 회향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점차 진실법신(眞實法身)을 설한 것이니, 그들이 믿기 어려울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공덕(功德)을 법신(法身)이라고 설하여 쉽게 믿어서 받아들이도록 하니, 견(見)을 관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들이 공덕으로 법신을 삼기 때문에 그 속에 섭수함이 있는 것이다. 이상은 모두 시교(始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또한 서른두 가지 상 등은 곧 생겨남도 없고 성품도 없기[無生無性] 때문에 또한 진여법신(眞如法身)이니, 이는 종교(終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만약 일승에 의거한다면, 열 개의 연화장세계해(蓮華藏世界海)에 미진수의 상[微塵數相]이 있어서 저 두 가지 상(相)이 모두 법계(法界)에 두루 미치고 업(業)의 용(用)도 마찬가지다. 십(十)을 설한 것은 다함이 없음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니, 「상해품(相海品)」의 설과 같다.
또한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가운데서는 삼승종(三乘宗)을 잡아서 부처의 상호(相好)를 나누어서 삼단(三段)으로 삼았는데, 이 때문에 그 경전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간략한 가운데 더 간략하게 하면, 나는 지금 이 때에 모인 대중과 정반왕(淨飯王)을 위해 상호(相好)를 간단히 설하리라. 부처님께서 인간 세상에 태어나실 때, 사람과 똑같은 일과 사람과 똑같은 상을 보이셨기 때문에 서른두 가지 상을 설하며, 여러 천(天)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여든 가지 상호의 훌륭함을 설하며, 모든 보살을 위해서 팔만 사천 가지의 여러 미묘한 상호를 설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실제 상호는 내가 처음 마가타국(摩伽陀國)의 적멸도량(寂滅道場)에서 도를 이루어 보현(普賢)ㆍ현수(賢首) 등 여러 대보살을 위해서 설한 것이니, 『잡화경』에서 이미 자세히 분별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이 가운데 서른두 가지 상 등은 간략히 한 것을 다시 간략히 한 것에 해당되며, 인천(人天)의 이승(二乘) 등을 위한 것은 곧 처음에 해당된다. 팔만 사천 등의 뜻은 단지 간략히 한 것에 해당되며, 삼승보살(三乘菩薩) 등을 위한 것이 그에 버금간다. 부처님의 실제 상호가 『잡화경』의 설과 같다고 한 것은 그 뜻이 널리 설한 바에 해당되니, 곧 『화엄경』의 「상해품(相海品)」의 설을 가리킨다. 이는 일승별교(一乘別敎)의 상(相)이니 곧 종(終)에 해당된다. 『잡화』는 곧 화엄이기 때문이니, 나머지 뜻도 알 수 있을 것이다.
【釋】 둘째로 상호(相好)를 밝히는509) 중에 다섯 가지가 있다. 두 번째 시교(始敎) 중에서 ‘어떤 이유로 『지론(智論)』등에’510)라고 하였는데, 이 물음의 의미는 ‘화신(化身)이 곧 보신이라 체(體) 위에서 변화하여 용(用)을 일으키기 때문에 인(因)을 좇아서 생기는 것이 아닌데, 어떤 이유로 화신 중에서 인(因)을 내는가’라는 것이다.
‘금장(金鏘)’511)512)은 『혜상보살경(惠上菩薩經)』513)에서 이렇게 설하였다.
“사위성(舍衛城) 안에 스무 사람이 있는데, 다시 스무 사람과 더불어 함께 원수가 되었을 때 마흔 명이 각각 상해(傷害)를 입고서 방편을 찾고 구하다가 부처님의 위신을 받아서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 이르러 마흔 명이 교화를 받았다. 일찍이 첨장(鑯鏘)이 있어는데 자연스럽게 나와 부처님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들어가고자 장(鏘)이 부처님 앞에 있었다. 목련(目連)이 부처님께 고하였다.
‘지금 첨장을 뽑아 다른 세계에 두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정진력(精進力)으로 첨장을 빼앗고자 삼천대천세계514)를 진동하더라도 장(鏘)을 터럭만큼도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는 부처님께서 범천(梵天)에 가시니 장도 문득 따랐고, 사위성(舍衛城)에 돌아오시니 장도 또한 그 앞에 있었다. 여래께서 장(鏘)을 취하여 발로 위를 밟고 걸으시니, 목련이 부처님께 고하였다.
‘여래께서는 어떤 죄가 있어서 장의 재앙을 얻으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상주(商主)가 되어서 오백 명의 장사꾼을 이끌었는데, 하나가 악심(惡心)을 품어서 나는 곧 그를 해쳐 버렸다. 이것이 그 나머지의 재앙이다.’
마흔 명이 이를 듣고서 말했다.
‘법왕(法王)515)도 오히려 그렇거늘 하물며 우리임에랴. 마땅히 죄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반성하여 평등혜(平等惠)에 들어갔다.”
‘마맥(馬麥)’516)은 『본기경(本起經)』517)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기달(阿耆達)이라고 부르는 바라문왕(婆羅門王)이 있었는데, 부처님을 보고서 마음으로 공경하며 부처님에게 고백하였다.
‘원하건대 부처님과 스님들, 나에게 세 달간의 하안거를 살피게 하소서.’ 부처님과 오백 명의 비구는 일시(一時)에 요청을 받아들여서 그 나라로 갔다. 때에 천마(天魔)가 있어서 왕의 마음을 미혹(迷惑)하자, 오욕(五欲)을 그칠 줄 모르고 탐하느라고 미혹되어서 공양을 잊었다. 비구는 걸식(乞食)할 때 극도의 고통을 받아도 얻기 어려웠는데, 어떤 목마사(牧馬使)가 부처님 마음의 깨끗함을 믿어서 여러 비구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승려가 굶주림이 심한 줄은 알지만 먹을 것이 모두 다하였고, 있는 것은 마맥(馬麥)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맥(麥)을 자재로이 마땅히 받으리라.’
아난이 맥을 가지고 오니 옆의 어떤 여인이 떡을 만들었다. 아난이 부처님에 대한 공경의 정이 깊어서 흐르는 물과 떡을 드리고, 부처님께서 그것을 드시는 것을 보자 슬픔으로 목이 메었다. 부처님께서 그 뜻을 알고서 말씀하셨다.
‘그대도 씹어 볼 텐가?’
아난이 그것을 받아서 먹으니, 좋은 맛이 보통이 아니었다. 사실은 여러 천(天)이 맛을 더한 것이었으므로 기쁨이 한이 없어서 슬픔으로 목이 메인 것이 곧 없어졌다.”
또한 경전518)에서 말했다.
“과거구원세(過去久遠世) 때 부처님의 이름이 비바섭(毘婆葉)519)이었는데, 반두마발성(盤頭摩跋城)에 있었다. 인제기리(因堤耆利)라고 부르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사위(四圍) 및 여러 산술(算術)과 여러 계(戒)에 널리 통달하여 오백 명의 동자를 가르쳤다. 당시 왕이 모임을 베풀어서 부처님을 청하여 음식과 깨끗한 쌀[精米]을 공양하였다. 그 무리에는 미륵이라고 불리는 한 명의 비구가 있었는데 병으로 올 수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병든 사람을 위해 먹을 것을 청하자, 범지(梵志)가 질투하여 말하였다.
‘대머리 사문은 마땅히 마맥을 먹어야지 이와 같이 단맛의 공양을 먹어서는 안 된다.’
사리불(舍利弗)이여, 그 때의 바라문이 곧 나이다.”
이것이 마맥을 먹게 된 인연이다.
‘서른두 가지 상도 또한 각각 인(因)을 낸다’520)고 한 것은 여러 성교(聖敎) 가운데 서른두 가지 상의 인연을 변별한 것이 있으니, 유가 및 『지론』 등과 같기 때문이다. 대답 가운데 ‘곧 이 몸[身]에서 승인과(勝因果)를 보인다’521)고 한 것은 소승인(小乘人)은 보불(報佛)522)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화신(化身)에서 승인과를 보임으로서 그를 이끌려고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저 공덕법(功德法)으로 법신(法身)을 삼는다’523)고 한 것은, 소승 가운데 오분공덕(五分功德)524)이 법신이 되기 때문에 그를 이끌고자 해서 수행으로 생긴 공덕[修生功德]으로 법신을 삼은 것이다.
다섯째, 원교(圓敎) 가운데 ‘마가다국적멸도량(摩伽陀國寂滅道場)’525)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다.
【문】 ‘십연화장세계미진수상(十蓮花藏世界微塵數相)’526)은 바로 「상해품(相海品)」에서 설한 바이니, 그러므로527) 진경(晋經)을 기준으로 하면 타화천궁(他化天宮)528)에서 설한 것이다. 신역(新譯)을 기준으로 하면, 중회보광(重會普光)에서 설한 바인데, 어째서 적멸도량이라고 말했는가?
【답】 총체적인 처소[摠處]를 잡았기 때문에 그렇다.
【記】 아홉째로 섭화분제(攝化分齊)를 밝힌 것이다. 만약 소승 가운데 의거한다면, 오직 이 사바(娑婆)의 잡되고 더러운 곳만이 바로 부처의 보토(報土)529)요, 이 가운데 염부제(閻浮提)가 바로 보불(報佛)이 의지하는 바이다. 나머지 백억 등은 곧 화경(化境)530)의 분제(分齊)이다. 만약 삼승(三乘) 가운데 의지한다면, 법성토(法性土)531) 및 자수용토(自受用土)532)인데, 지금 여기서는 설하지 않는다. 석가불(釋迦佛)의 다른 것을 따라 수용하는 실보정토(實報淨土)533)는 혹은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534)에 있다고 설하니, 화신(化身)이 백억 염부제에 충만하였다. 이것이 바로 소화(所化)의 분제인데, 『범망경(梵網經)』 및 『대법론』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는 시교(始敎)를 잡아서 설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이승을 가르치기 위해 석가신(釋迦身)으로 실보(實報)를 삼았는데, 지금은 그것을 뒤집어서 변화한 바를 드러냈기 때문에 그 천(天)에서 따로 실보를 세운 것이다.
또한 이승은 계(界) 밖에 실정토(實淨土)가 있음을 믿지 않을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계 안의 최고로 뛰어난 곳에 의탁하여 설한 것이니, 그 화신이 백억에 충만하다는 등도 또한 그 설을 따른 것이다.
혹은 석가불(釋迦佛)의 보토(報土)가 삼계 밖에 있다고 설하는 경우도 있는데, 『열반경』에 이르기를, “서쪽으로 삼십이 항하사불토(恒河沙佛土)를 가면 무승(無勝)이라 불리는 세계가 있으니, 이것이 석가불의 실보정토(實報淨土)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는 종교(終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니, 하위의 설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사바가 오직 화(化)임을 드러내기 위함 때문이다. 그러므로 색계의 정상에 있는 몸[色頂之身] 또한 실보가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혹은 화경(化境)이 단지 백억만은 아님을 설하니, 『대지론(大智論)』 가운데, “삼천대천세계로 일수(一數)를 삼아서 수(數)가 항하사에 이르면, 하나의 세계성(世界性)이 된다. 또한 이것을 헤아려서 항하사에 이르면, 하나의 세계해(世界海)가 된다. 이것을 헤아려서 또 무량항하사(無量恒河沙)에 이르면, 하나의 세계종(世界種)이 된다. 이것을 헤아려서 또한 무량시방항하사(無量十方恒河沙)에 이르면, 하나의 불세계(佛世界)가 교화할 바의 분제가 된다”고 한 것과 같다. 이는 또한 종교(終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니, 섭화(攝化)로써 점점 앞보다 넓히기 때문이다.
또한 오직 수미산세계(須彌山世界)만을 잡아서 설하였으니, 이 계(界)에 거주하기 때문이고, 아직 수형(樹形) 등의 세계를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승은 아니다.
혹은 석가(釋迦)의 보토(報土)가 영축산에 있다고 설하니, 『법화(法華)』에 이르기를, “나는 항상 영산(靈山)에 있다”고 한 것과 같다. 법화론주(法華論主)는 보신(報身)의 보리(菩提)라고 해석하였으니, 마땅히 알라, 이것은 일승동교(一乘同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법화 중에 또한 일승을 나타내기 때문이요, 그 처(處)에서 교(敎)를 따르면 더러움이 청정함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법화(法華)를 말한 곳이 곧 실(實)이 된다. 마치 보리수 아래에서 화엄(華嚴)을 말한 곳이 연화장십불경계(蓮華藏十佛境界)가 된 것처럼 법화 역시 그러한 것이다. 점차 이와 같아지기 때문에 동교(同敎)이지만, 그러나 아직 그 처소를 곧바로 십화장(十華藏) 및 인다라(因陀羅)로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교(別敎)는 아니다.
혹은 이 석가신이 실보(實報)의 수용신(受用身)이라고 설하니, 『불지경(佛地經)』의 처음에서 “석가불이 스물한 종류의 실보공덕(實報功德)을 갖추었다”고 설한 것과 같은데, 그 논에서 수용신(受用身)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것 또한 동교를 잡아서 설한 것인데, 어째서 그러한가? 석가불이 만약 삼승 중에서라면 단지 화신이고, 만약 별교일승(別敎一乘)에서라면 구경십불신(究竟十佛身)이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방편은 저 삼승을 권하여 석가신이 단지 화신(化身)만이 아님을 드러낸 것이니, 그들이 믿어서 받아 지니기 어려울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 경전 중에서는 불과(佛果)의 깊은 공덕의 처소를 설함을 잡아서 불신(佛身)이 교(敎)를 따르면 권(權)이 실(實)로 돌아감을 밝혀 보신이 된다고 설하였다. 곧 방편으로 화엄일승법(華嚴一乘法)을 설할 때 이 석가신 또한 저 교(敎)를 따라서 구경십불법계신(究竟十佛法界身)임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이것은 동교(同敎攝)에 포함되는 것이다.
혹은 석가신이 법신이라고 설하니, 경에 이르기를, “나의 지금 이 몸이 곧 법신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는 돈교(頓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니, 상(相)이 다하고 생각을 여의기 때문이다.
만약 별교일승이라면 석가모니의 몸은 비단 삼신(三身)일 뿐만 아니고 또한 십신(十身)으로써 다함이 없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십불경계(十佛境界)가 의거하는 바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국토해(國土海)로서 원융자재(圓融自在)하여 마땅히 설할 수가 없다. 만약 법에 의탁하여 드러내 보인다면[顯示], 제이회(第二會)의 처음에 설(說)한 것과 같다. 둘째는 세계해(世界海)로서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로 연화장장엄세계해로서 주(主)와 반(伴)을 모두 갖추어서 인다라 등에 통하니, 이는 십불(十佛) 등의 경계에 해당한다. 두 번 째는 삼천계(三千界) 밖에 열 겹[十重]의 세계해가 있으니, 첫째는 세계성(世界性), 둘째는 세계해(世界海), 셋째는 세계륜(世界輪), 넷째는 세계원만(世界圓滿), 다섯째는 세계분별(世界分別), 여섯째는 세계선(世界旋), 일곱째는 세계전(世界轉), 여덟째는 세계연화(世界蓮華), 아홉째는 세계수미(世界須彌), 열째는 세계상(世界相)이다. 이들은 만 명의 아들 이상의 윤왕경계[萬子已上輪王境界]에 해당된다. 셋째로 무량이류세계(無量離類世界)로서 모두 법계에 두루하니, 마치 한 무리의 수미루산세계(須彌樓山世界)의 수량변반(數量邊畔)과 같아서 허공을 다하고 법계에 두루 미친다. 또한 마치 한 무리의 수형세계(樹形世界) 내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형상 등도 다 이와 같으니, 모두 법계에 두루하면서 서로 장애하지 않는다.
이상의 삼위(三位)는 모두 하나의 노사나불이 십신으로 섭화하는 곳[一盧舍那十身攝化之處]이니, 이 삼위는 본말(本末)이 원융하여 서로 거두어 장애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하나의 세계[一世界]를 따르면서도 곧 거칠고 세밀함을 잡으면 이 세 가지가 있기 때문이니, 마땅히 알라, 삼승과 완전히 별개라서 같지 않다.
【釋】 ‘제구 섭화분제(攝化分齊)’535)라고 한 것은 앞의 ‘소승 중 사바’536)등이니, 소승 중에는 시방정토가 없기 때문이다. ‘법성토(法性土)에서 불설(不說)’에 이르기까지는537) 스스로 머무는 곳이지 섭화토(攝化土)는 아니니, 지금은 오직 섭화만을 변별하기 때문에 그렇다.
‘『범망경』과 같다’538)고 한 것에 대해서다.
【문】 그 경전 가운데 1천 마혜수라(摩醯首羅)에 1천 석가(釋迦)가 있어서 백억 석가를 화(化)하기 때문에 천 백억 석가가 있다고 하였으니, 시교 중에서는 이 천 백억 석가를 세운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시교 중에서는 하나의 마혜수라천불(摩醯首羅天佛)을 실보(實報)로 삼고 이 부처가 놓은 백억 석가를 화(化)로 삼았을 뿐 천 백억 석가를 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을 보면, 시교 중에서는 천 마혜수라천 가운데 천 석가를 실보로 삼고, 이 천 석가가 놓은 천백억 석가를 화로 삼으니, 왜냐하면 『문답(問答)』539) 초권에 이르기를, “삼승시교(三乘始敎)에 의하면, 하나의 삼천소유화불(三千所有化佛) 등이 모두 화불(化佛)이요, 어머니 마야(摩耶)와 권속(眷屬)도 또한 실제[實]는 아니니, 여러 삼천계(三千界)의 처소에도 또한 따로 부처[佛]가 있다. 화(化)의 뜻은 앞과 같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풀어서 말하면, 하나의 삼천계에 있는 화불(化佛) 등은 하나의 마혜천불이 놓은 백억 화불이다. ‘여러 삼천계의 처소에 또한 다른 불이 있다. 화(化)의 뜻은 앞과 같다’는 것은, 나머지 백억 화불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 만약 그렇다면, 종교(終敎)는 어떤가?
【답】 만약 종교를 잡으면, 연화대(蓮花臺) 본원(本源)의 사나(舍那)540)는 실보불(實報佛)이고, 천 석가 및 백천억 석가는 곧 화불이니, 법에 의탁하여 나타내 보인 것이다.
‘제2회의 처음과 같다’541)고 한 것은 「명호품(名號品)」542) 가운데 여러 종류의 몸의 이름으로 국토와 바다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계를 따르면서 거칠고 세밀함을 잡는다’543)는 것은 대보살은 곧 사바를 상대하여 화장(花藏)544)을 보나, 중생은 화장을 상대하여도 사바를 보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계를 따라서 계(界)에 감응한 사람은 보는 것이 계가 되고 바다[海]에 감응한 사람은 보는 것이 바다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記】 열 번째로 불신(佛身)의 열고 합하는데[開合]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는 의(義)이고, 둘째로는 수(數)이다. 의(義) 중에서 첫째로 법신(法身)을 잡으면 혹은 진여의 경계[眞境界]만을 법신으로 삼는데, 『불지론』의 오종법(五種法)이 대각지(大覺地)를 융섭하고, 청정법계(淸淨法界)가 법신을 융섭하고, 사지(四智)가 나머지 몸을 융섭하는 것과 같다. 이는 시교(始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혹은 묘지(妙智)만을 법신으로 삼으니, 본각지(本覺智)이기 때문이요, 지(智)를 닦아서 본각과 동일하기 때문이니, 마치 『섭론』에서 무구무가애지(無垢無罣碍智)를 법신으로 삼고, 『금광명경(金光明經)』 중에서 사지(四智)가 삼신(三身)을 융섭하니, 경지(鏡智)545)가 법신을 융섭하기 때문이다.
혹은 경계와 지(智)를 합하여 법신으로 삼으니, 경계와 지(智)가 서로 같기 때문이다. 『양섭론』에 이르기를, “오직 여여(如如)546)와 여여지(如如智)만이 독존(獨存)하니, 이름하여 법신이라 한다”고 한 것과 같다. 이상의 두 구는 종교(終敎)를 기준으로 설한 것이다.
혹은 경(境)과 지(智)가 모두 없어짐을 법신으로 삼으니, 경에 이르기를 “여래의 법신은 심(心)도 아니고 경(境)도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는 돈교(頓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혹은 앞의 네 구를 합하는 것일 때가 있는데, 덕(德)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혹은 앞의 다섯을 모두 끊는 것일 때가 있는데, 원융무애하기 때문이다. 이 두 구는 「성기품(性起品)」의 설과 같으니, 이는 일승을 잡아서 분별한 것이다.
다음에는 따로 석가신을 잡아서 밝힌 것인데, 이 석가신은 혹은 화신일 뿐 법신도 보신도 아니니, 시교(始敎)의 설과 같다. 혹은 보신일 뿐 법신도 화신도 아니라고 하는데, 동교일승(同敎一乘) 및 소승의 설과 같지만 다만 깊고 얕음이 다를 뿐이다. 혹은 법신일 뿐 보신도 화신도 아니라고 하는데, 돈교의 설과 같다. 혹은 법신이면서 보신이기도 하고 화신이기도 하는데, 총괄하여 삼승 등의 설과 같다. 혹은 법신도 아니고 보신도 화신도 아니라고 하는데, 이는 별교일승(別敎一乘)과 같으니 곧 십불(十佛)이기 때문이다.
‘수(數)의 개합(開合)’은 혹은 하나의 부처를 세웠으니, 말하자면 일실성불(一實性佛)이다. 이는 돈교를 기준으로 하였다. 혹은 두 부처를 세웠으니, 여기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로 생신(生身)과 화신(化身)인데, 소승을 기준으로 설한 것이다. 둘째로 생신과 법신인데, 타수용(他受用)547)과 화신을 합하여 생신이라 부르고, 자수용신(自受用身)548)과 법신을 합하여 법신이라고 부르니, 『불지론』의 설과 같다. 이는 시교(始敎)를 기준으로 설하였다. 셋째로 자성법신과 응화법신인데, 『본업경』의 설과 같다. 이는 종교(終敎)를 기준으로 설하였다. 혹은 삼신불(三身佛)을 세웠는데, 항상 설하는 것과 같다. 이는 시교와 종교의 두 설에 통한다. 혹은 네 부처[四佛]를 세웠는데,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로 삼신 가운데 수용신 안에서 자타의 두 몸을 나누기 때문에 네 가지가 된다. 『불지론』의 설과 같으니, 이는 시교를 잡은 것이다. 두 번 째로 삼신 밖에 따로 자성신(自性身)을 세웠으니, 법신이 항사공덕법(恒沙功德法)임을 밝히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양섭론』에 이르기를, “자성신과 법신이 의지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세 번째로 보신 안에서 복지(福智)가 둘로 나뉘기 때문에 네 가지가 되는 것이니, 『능가경』에 이르기를, “첫째는 응화불(應化佛), 둘째는 공덕불(功德佛), 셋째는 지혜불(智慧佛), 넷째는 여여불(如如佛)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종교를 기준으로 설한 것이다. 혹은 십불을 세워서 다함이 없음[無盡]을 드러내었는데, 「이세간품(離世間品)」의 설과 같으니, 이는 일승원교(一乘圓敎)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釋】 ‘열 번째, 십불신을 열고 합하는 것이니549), 『금광명경』 중에서 사지(四智)로 삼신을 융섭한다’550)고 한 것은, 그 경전에는 문장이 나타나지 않으나 뜻으로 인용한 것이다. 즉 그 경전551)에 이르기를, “승발도(勝拔道)에 의지하여 근본심(根本心)을 다하면 곧 법신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근본심은 아뢰야식이니, 이 식을 바꾸어서 대원경지(大圓鏡智)552)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합하여 앞의 사(四)를 갖추니, 덕을 갖추었기 때문에’553)라고 한 것에서는 다른 곳에 준하면 곧 마땅히 섭방편(攝方便)이 되지만, 그러나 아래에서 이르기를, “이 두 구는 「성기품」에서 설한 것과 같다”554)고 하였기 때문에 모두 별교일승의 뜻이지 섭방편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기품」의 소(疏)555)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해석에 많은 뜻이 있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실(理實)로 불지(佛地)에도 정팔식(淨八識)이 있으나 단지 지(智)라고만 말하는 것은 억지로 취하여 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실(理實)의 불지(佛地)는 오직 대지(大智)이니, 팔식 및 나머지 심법을 설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불지대지(佛地大智)는 안은 진성(眞性)과 같으니, 비추어 고요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불지대지는 곧 이(理)ㆍ지(智)ㆍ왕(王)ㆍ수(數)로서 혹은 열고 혹은 합하니, 앞의 세 가지 설과 서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요, 장애함이 없어서 십지(十智)를 갖추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합하여 앞의 사를 갖춘다’는 것은 그 문장의 ‘세 가지 설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과 동일하고, ‘앞의 다섯 가지를 모두 끊는다’556)고 한 것은 그 문장의 ‘장애함이 없다’고 한 것과 동일하며, ‘생신(生身)과 화신(化身)이다’557)라고 한 것은 비담(毗曇)의 설이다.釋華嚴教分記圓通鈔卷第五高麗國歸法寺主圓通首座 均如 說第六斷惑分齊者,前明所依身已欲現依。如是身修行斷障故,次來也。此中二。先摽章門,後初義者。下依章別,釋初中若依小乘者。問:何故小乘有摽無釋耶?答:小乘斷惑與大乘中,二乘有同不同,明大乘、二乘,斷惑之時,同義自現其不同者,於問答中,現之故,不別明。若依三乘者,問前種性章合中三教,名爲三乘。何故此章始終二教,合爲三乘,別立頓教耶?答:此章旣明,約位斷惑,寄惑現位,其頓教中,此相隱故,二依章別,釋中始終二教。卽爲二叚始教中,亦二先,弁三乘斷惑後。又此下弁斷惑相,及惑體性,初中亦二先摽乘數障數後,先弁二乘,下別釋三乘斷惑。初中先摽,能斷乘數,後現所斷障數初中。問:何故前通擧始終二教,爲三乘,今唯約初教,云具足三乘斷惑等耶?答:雖始終二教,合爲三乘,而始教中,具足三乘故也。是故二教相對,則亦得終教,是一乘也,二所斷障數中。問:煩惱所知與人執法執,云何別耶?答:則師准識。疏初卷云:問:二執與障,有何差別耶?答:安惠宗摠相,而言二執,與障無有寬挾。所以者何?彼宗一切有漏心等,皆名爲執,卽名二障。若別相者,煩惱障體,通前七識,唯除第八,恒相續轉,行相微細故。然七識中,第六、七識所起,我見爲我,執體與彼相應,心、心所法緣一境故,相從說執。獨頭貪等,非計我故,雖煩惱障,而非我執,所知障體。亦通七識,唯除第七。論唯說彼四惑相應三位無故,能計障體,卽與法執體無寬俠,以此諸法有體用者,皆是執故。若護法宗執,唯是惠性猛利故。故對法第八。云若是執者,必是惠故,障通非惠覆所知等,說爲障故,由斯相對,便成二句,謂若是執其必是障,自有是障,而非是執,謂卽除惠餘心法。惑復有惠是障,而非是執,如五識身相應惠等,彼疏文細可見也。就別釋中,先釋二乘斷惑,後直進下,釋菩薩斷障,初、中亦二先正明,後然上下,現異愚法。初中亦二先斷煩惱障,後其所知障,下約所知障弁斷不斷。初中亦二先摽章門,後初中下依門別釋。此中釋障,名數及斷惑得果爲二叚也。障名數中,有二重:一略唯分別俱生,二開爲十使,三廣爲一百二十八。卽爲三叚。問:初重分別俱生,得名所由,云何答?唯識論第一云:俱生我執,無始時來,虛妄熏習內因力故,恒與身俱,不待邪教及邪分別,任運而轉故,名俱生。乃至分別我執,亦由現在外緣力故,非與身俱。要待邪教及邪分別然後,方起故,名分別。解云:邪師者,外道邪師;邪教者,外道所說典藉;邪思惟者,依彼邪教思惟,決了故也。是故邪見見取、戒禁取,及疑等依彼邪師等三因,而起故,爲分別也。第二開爲十使中,三先列十使,二於中四種下,約分別俱生,弁異三五識,得起下約識論也。初中摠有十種者,對下就分別俱生,現其別異故,云摠也。問:此十使爲唯煩惱障耶,爲通二障耶?答:聖教不定。瑜伽雜集中,唯煩惱障,今從此義故,云煩惱障有十等。唯識論、佛地論中,通二障也。謂唯識論云:煩惱障者,謂執遍計所執實我、薩迦耶見,而爲上首百二十八根本煩惱及彼等流諸隨煩惱。此皆擾惱有情身心能障涅槃,名煩惱障、所知障者,謂執遍計所執實法、薩迦耶見,而爲上首。見、疑、無明、愛恚、慢等覆所知境,無顚倒性能障菩提,名所知障。解云:百二十八根本煩惱,皆名煩惱障故,十使通於煩惱障也。其所知障中,見者,五見愛者謂貪恚者是嗔疑無明慢則如名故十使亦通所知障也。問:若爾何故儼公云,煩惱所知二障分別者,乃至煩惱唯煩惱、隨煩惱,亦然耶?答:下亦云若約相成門通二障也。是故佛地論、唯識論通二障者,約相成門故,不相違也。其十使開合不同,謂唯識論合五見爲一故,唯有六瑜伽、雜集等,開五見故,爲十使也。論其本末者,此十使對不定四隨煩惱,二十爲根本,就十使內,前五爲本五見爲末也。釋其十使如測師唯識疏也。身見者,執身爲我故,邊見者,計有無斷常也。謂執有廢無執,無廢有執,其一邊故,云邊見也。邪見者,撥無因果故,見取者,以自見爲。是故戒禁取者,以非戒爲戒故,謂牛戒、狗戒等,爲實戒等也。二約分別俱生弁異中,四唯分別六通二故,分別有十,俱生有云,合成十六也。三約識分別中,五識有三,意識有十,末那有四故,合有十七。若分分別俱生,則意識分別起有十,俱生有六。五識三中,各有分別俱生故,有六。末那唯四俱生,合有二十六也。由用意識中,三因引故者,成其五識有分別起也。謂五識唯對五境自無分別,然具三因之意識同緣五識故,五識之中,亦有分別起也。意識具十者,其意識,是强分別識故,具起十也。嗔唯不善,此識有覆無記故者,末那是染污識,覆障聖道故,爲有覆。無其別記,善惡之義故,名無記。是故此識是有覆無記,嗔是不善故無也。又以一類等者,邊見者,執有廢無執無廢有唯見一邊,其末那者,唯緣第八爲我故,無邊見也。問:唯緣內非緣外故,卽是邊見,何故無邊見耶?荅:二邊之中,見其一故,爲邊見。末那唯緣內故,無邊見也。又以後三見等者,末那不依三因故,無分別起也。又由恒相續等者,決伏執也。謂疑云:五識雖不分別,具三因之意識同緣故,有分別起,是則末那。雖不分別意識同緣故,亦有分別起故,今答云由末那恒相續緣故,非第六所引故,不同五識也。其第八識等者,曉師八第八識中,不起障也。謂第八是白淨無記識故,不起煩惱也。此章主則若約始教賴耶之中,障不起也。若約終教於賴耶中,亦起障也。第三廣爲一百二十八,文現可知。問:何故前愚法小乘等者,持小乘中,九十八使之義,起此問也?謂曉師二障章云:三明九十八使門者,見道所斷有八十八,修道所斷有十摠九十八使也。八十八者,謂於欲界苦下,有十道下,有八,謂除二見,餘二諦下,各有七種,謂除二見,及除戒取上二界中,各除嗔恚餘如欲界修斷有十。不異前說。已上解云:欲界苦諦具十道諦中除身邊二見故,唯有八,集滅二諦中,除二見及戒取故,唯有七合三十二上界中,除嗔餘同欲界,各有二十八,合五十六通。於欲界三十二故,合有八十八俱生六中,除二見。欲界有四。上二界除嗔,各有三故,合爲十。通於見斷八十八故,合有九十八使也。是故九十八使門中,身邊二見,唯迷苦諦,戒取迷苦、道諦故,雜心頌云:苦下具一切集滅,離三見道,除於二見,上界不行恚,何故今大乘中,十四通迷四諦耶?問意如是,荅中一以三乘等者,小乘煩惱唯障人空故,功力不寬,三乘煩惱通障人法二空故,寬也。又由迷等義,通一切境故者,一云:初釋約能障功能,後釋約所迷境也。今釋不爾初釋大乘,異小乘故,煩惱寬廣障一切也。後釋莫問大乘、小乘,十使煩惱,皆以無明,爲倒本,倒本無明,通迷四諦故,末隨於本,通迷一切境也。然小乘對行說迷故,唯九十八也。是故曉師云:此十煩惱摠有三分:謂倒本、倒體及倒等流。言倒本者,謂無明倒體者,謂薩迦耶見、邊見,一分見取、戒取及貪。言倒等流者,除前之餘等倒本無明,亦有二種:謂相應及獨行。獨行無明者,謂無貪等諸煩惱纏,但於苦等諸諦境中,由不如理作意力故, 不如實知簡擇覆障暗昧心法。如是名爲獨行無明。此中若由不正作意推求苦諦不如實知覆障暗昧。依此無明,計受者等,隨是我見具起餘惑。如是十種,皆迷苦諦,若推求集諦不如實知,依此爲本計作者等。如是十種,皆迷集諦,此二直迷因緣依處故,非生彼滅道怖畏。又若由不如理作意,推求滅諦不如實知,依此無明計淸淨我以此爲先具起餘惑如是十種悉迷滅諦惟求道諦不如實知。依此無明,卽計知者,見者,此等十種是迷道諦。此二無明所起煩惱還於滅道,生怖畏想,如其本不推求諦理,直緣五蘊而計我等,如是一切,皆迷苦諦由是義故於四諦下各有十種煩惱迷執如瑜伽說已上合今後釋也。第二斷得果中,二先斷分別,後斷俱生。初中問:倍離欲人已離欲人兼斷俱生得一來、不還果,何云先斷分別,有三人耶?荅:若約大對,則見道斷分別,修道斷俱生然兼斷修惑故,得一來果等耳。此中初一人於方便位,伏見所斷入眞見道斷,前所伏得預流果第二人方便位中,伏見所斷及修惑中,前六品等故也。斷前六品倍於末斷故,云倍離欲第三人方便位中,伏見所斷,及修惑九品等故也。第一是次第人,後二是果超非行超也。此中有四句,或有行果,竝不超如次第人,謂此人方便位中,伏見所斷入眞見道斷,前所伏得預流果。立一來向,斷欲界修惑中,前六品得一來果,立不還向,斷後三品得不還果,立羅漢向,斷上二界修惑九品得羅漢果故,此是下漸出離人也。或有行果竝超,謂此人方便位中,伏見所斷及欲界九品修,惑亦伏上二界四禪及四空中初三空之障入眞見道斷,前所伏得不還果,未斷非想結故,不得第四果也。是故超前二果得第三果故,云果超始斷上二界,修惑作羅漢向之事故,云行超,此人屬已離欲人也。或有行超果不超,謂此人方便位中,伏見所斷,亦伏修惑九品中,前五品入眞見道斷,前所伏,得預流果,木斷第六品故,不得一來果故,名果不超,然斷前五品作一來向之事故,云行超也。或有果超行,不超如倍,離欲人及已離欲人等也。謂倍離欲人入眞見道斷、見所斷修惑前六品故,得一來果。是故超於初果,得第二果故,云果超然斷見所斷已作初果之行故,云行不超也。已離欲人入眞見道時,斷見所斷,亦斷修惑九品,得不還果。是故超前二果故,云果超已作初二果行故,云行不超也。二斷俱生中二。先斷六識俱生,後其末那下斷末那俱生也。漸出離者,如前第一句弁也。頓出離者,此則二向、二果人也。謂入見道,得初果已頓斷三界,卽得羅漢故,亦有一向、一果人。此則大獨覺也。此人入見道時,頓斷三界,見修煩惱,越初三果,得羅漢果故,云一向、一果也。若爾何故,有漸斷者,一云:因其頓出離中,漸除凡品之辭問也。今釋因前,漸出離問也。謂旣云於三界法不能頓緣故,若頓出離者,頓緣二界故爾也,諦現觀者,一云:十六心中,第十六心也。一云:第十五心也。前愚法二乘無頓出離者,前文無弁愚法,二乘然前摽云:若依小乘,若依三乘故也。其末那至准知者,末那滅惑,小乘無者准彼無頓出離之釋也第二斷所知障中唯是非擇滅者,入無餘時身智俱滅,灰斷永盡故,云滅耳。不是智滅故也。惠解脫至分有所斷者,唯惠解脫心不解脫故,名惠解脫心惠俱解脫故,名俱解脫也。八解脫障不染無知等者,雖云分有所斷非是斷於法執,唯斷定障,不染無知也。如瑜伽說,又諸解脫由所知障解脫等者,一云:引成別義,今釋引論,增現前釋非是別意也。謂於所知障心得解脫者,非但惠解脫心,亦解脫故,俱解脫也。是故與前俱解脫人分斷所知有何異哉?二現異愚法中,然上所斷不同愚法者,一云:唯約分斷所知也。今釋上來所弁,二乘斷惑,不同愚法也。以彼唯斷煩惱得等者,大乘之中,弁賴耶爲諸法依故,賴耶識中,立煩惱種,小乘中,不知賴耶故,立三世得爲諸法依。是故小乘斷煩惱,得大乘,斷賴耶種也。三世得者,法前得是過去藏,如牽牛人法俱得,是現在藏如乘牛人法后得,是末來藏,如驅牛人由未來藏中,立諸法故,立三世得也。就直進中,有二。先對二乘弁異,後但於一障下彰伏斷分齊。初中二障俱斷者,二乘唯斷煩惱障,不斷所知障,設有分斷不能永斷菩薩,不爾二障永斷故,不同也。又煩惱障中,不同二乘,約界分品者,遣疑也。疑六:斷煩惱義與二乘同耶?荅:意如文問此教二障,於識相應,其義云何?荅:此教之義眞如凝然不作諸法故,建立生滅賴耶爲諸法依然賴耶識,是白淨無記故,障不俱起六、七識中,建立二障,但此障種在於本識,彼六、七識所起之障,於十地中,漸漸伏斷,至於佛地,一切斷盡得佛果也。爾時亦云:迴識成智,亦云現淸淨八識。是故於彼教中,論三性有無者,遍計是無依圓,是有若約觀行次第者,染分依他,是所遣淨分,依他非所遣也。問:何知所知障,亦通六、七識耶?荅:唯識第九云所知障者,執遍計所執實法薩迦耶見,而爲上首見疑無明、愛、恚、慢等覆所知境無顚倒性,能障菩提,名所知障。此所知障決定不與異熟識,俱彼微劣故,不與無明惠數相應故,法空智品與俱起故,七轉識內隨其所應,或小或多,如煩惱說。解云:依此論文所知障,亦通六、七識也。儼公問荅初卷云:其末那識依三乘教,有其識起四,惑不起法執。解云:此儼師義於末那中,不起法執也。一云:安惠菩薩於末那識,不起法執,護法菩薩於末那識,法執俱起,儼師隨安惠義故,於末那法執不起,藏師隨護法義故,於末那法執俱起也。一云:章主於末那中,法執不起,此說合文也。二彰伏斷分齊中,先斷分別起後,其俱生下斷俱生。此中先正明二問下問答。初中亦二。先斷六識俱生,後其末那下斷末那俱生。前中三初斷煩惱障,次其所知下斷所知障,後由是下結成。初中潤生者,潤業受生攝化者,攝生化物也。由惑至惑盡者,此文是地前留種義故,卽合終教,令留惑義同故,於始教引耳。是故當知等者#一云:唯因攝論故云。是故今釋通因上下所弁之義云,是故也。三結成中,對法論等者,前所依身,約斷煩惱之邊分,出羅漢義引也。今合取二障,至佛地義引故,二處不同也。唯修所知障對治道等者,其煩惱障故,留助願而起勝行,不修對治然,至佛地,斷所知時,煩惱亦斷故,云得菩提時,頓斷煩惱及所知障等也。問:答中初問答意者,前但云二障修惑俱,至佛地,而末弁地上諸識相應,或現不現欲現。此意故,問答也。答中二先弁煩惱障,後弁所知障。前中亦二先弁六識煩惱,後弁末那煩惱前中,其煩惱障內者,通擧六、七識煩惱也。第六識惑者,簡取第六也。此中有五法說喩,況法合引證結成也?若依因明立量者,宗云:六識煩惱不起過患。因云故留故。喩云如毒呪所害。合云如呪所害毒不起過患,六識亦如是也。引證中論云:諸惑已滅伏,如毒呪所害,由惑至惑,盡證佛一切智前引下半今引上半也。結成中,古法相多,弁留種,新法相多,弁留現今會二法相。或留現或留種,不相違故,云皆得自在也。弁末那煩惱中,七地以還有時暫現等者,於意識中,起人空無漏智時,意、識二執末那,人執皆永不起,然七地,以還人空觀智有間斷故,有時暫起八地以上,人空觀智恒相續故,求不起也。二所知障中,或現或種等者,其俱生煩惱於十地中,伏其現行,至金剛位,永斷其種其所知障,於地地中,各斷種現故也。煩惱障中,別弁六識及第七識惑所知不爾故,知所知唯於第六起也。第二問答中。問意中一云:第六識中,二障修惑及末那煩惱佛地方盡者,十地皆是有漏。何故聖教唯云七地,以還起有漏心,不言八地已上,是有漏耶?一云:十地中,雖留煩惱不起過患者,何故聖教七地,以還起有漏心耶?然初意合文也。有處說等者,唯識論第九云:惠學有三:一加行無分別惠,二根本無分別惠,三後得無分別惠。乃至如是三惠,初二位中,種具有三,現唯加行於通達位,現二種三見道位中,無加行故,於修習位七地已前,若種若現,俱通三種,八地已去現二種,三無功用道,違加行故,究竟位中,現種俱二加行,現種俱已捨故。解云:七地以還有加行故,是有漏心八地已上無加行故,是無漏也。擧彼文問也。答意者,末那煩惱七地,以還有時,暫起有漏之心,八地已上,不起有漏故,唯識論約此弁也。六識中,煩惱,是似有漏其所知障,是實有漏。此二通於十地也。餘義可知者,初教之中論門廣多,今略弁故爾也。二彰斷惑相,及惑體性中,先弁斷相,後又此障下明體性也。初中惑種在滅相時,智卽生相等者,唯識論第九云:眞見道現在前時,彼二障種必不成就。猶如明暗必不俱生。如稱兩頭低昂時等諸相違法理必應然已上從此云也如築卽坤等者,築喩障坤喩智也。對法論等者,彼論明惑智同時相翻之義故也二弁惑體中無性卽空者一云當於始教之終今釋卽此宗也謂心識章熏等卽空者卽當初教宗故也終教中,三先弁斷惑分齊,次又此教下明斷惑相及惑體性後。是故當知下現不同也。初中二先約二乘,後約菩薩初中有三。先正弁次引證後問答。此中問意前始教二乘,亦斷所知。何故此教於煩惱障,尚不能斷耶?答:中有二釋。一云:初釋約行心,後釋約人也。今釋初約始終教,弁異後,以愚法不愚法弁異。問:若約初釋愚法,亦斷所知障耶?答:不爾。前云當知此始教爲引愚法漸向大故,安立此教深勝於彼故所知障亦許分斷已上解云旣云深勝於彼故所知障亦許分斷當知愚法不能斷也。問:若爾與終教何別?耶?答:若依終教,愚法二乘於煩惱障,但能折伏,若依始教許二乘人全斷煩惱故,不同也。以上就下者,以菩薩就二乘故以下,就上者以二乘同菩薩故也。後釋中,前云:二乘亦斷所知障者,約三乘中聲聞。今云煩惱障,尚不能斷者,約愚法也。是故此釋令別二聲聞也。問:前約三乘中,聲聞者,當始教耶?答:此釋意者,合始終二教爲一大乘教,非謂令別二教也。是故合二教時,還當終教義也。是故上卷云:問:所以得知愚法二乘,在所引中耶?答:以彼愚法約大乘終教已去,竝不名出三界故等者,當此後釋也。就菩薩中,先略摽後。然彼地前,下廣釋初中。先能斷人,次於二障,下簡始教,三但有下,正現此教義。此中地前伏,使現初地,斷使種等者,是實行非假寄也。問:章主初地疏云:若約終教初地,亦捨三界分叚,及惑業苦地上,唯斷彼所知障及反易報。其煩惱障地前,漸伏地上斷盡其所知障。地前亦學伏初地斷一分。餘在諸地,名斷一分佛地,方盡二地。疏云:若依終教,如梁論等其煩惱種初地永盡,唯有彼習其所知障一分麤者亦初地盡餘分及習於諸地中各別正斷已上彼二處文與此文,云何會耶?答:一云:就終教中,有始有終。今此章文約始彼二處文約終也。一云:今約實行,彼二處文,是假寄故,不同也。問:初意云何?答:於二障中,分其使習地,前伏使現初地,斷使種地上,除習氣者,此約始弁於根本無明,分爲十分於十地中,各斷一分者,此約終弁故也。何者初地?疏云:各斷一分二地。疏云:各別正斷者,卽根本無明分爲十分,於地地中,各斷一分之義故也。問:後義云何?答:初地疏及二地疏竝云:煩惱障初地求盡者,是地前斷煩惱障地上,方斷所知之義故,此卽當於十八寄門,第一門也今釋二處文多同此章無相違也何者二地疏云其煩惱障初地永盡者,煩惱障種初地頓斷故,言唯有彼習者,煩惱障習氣於初地中,不能除故言。其所知障一分麤者,亦初地盡者,所知障種初地永盡故,言餘分及習者。餘分則所知障習氣及習者牒前,唯有彼習故,卽是煩惱障習。此二障習後諸地中,漸漸斷除故,云於諸地中,各別正斷也。初地,疏云:其煩惱障地前,漸伏地上斷盡者,地上之言摠約十地非唯初地。謂正使種子初地永盡,唯有習氣後,諸地中,一、一斷除。是故正使、習氣十地摠盡故,云地上斷盡也。言其所知障地前,學伏初地,斷一分者,地前伏現。初地斷種故,言餘在諸地,各斷一分佛地方盡者,其習氣,則於後諸地,漸漸斷除佛地方盡故,當知彼此無相違也。問:若爾彼二處文,亦爲實行耶?答:正是實行,亦魚假寄也。何者二障之中,分其使習。初地斷種二地已上,除習氣故,正是實行也。然各斷一分,夂各別正斷者,是地地中,各斷一分之義。此則以二十二無明及十一無明寄於十地。各別斷義故,是假寄也。問:若爾於實行中,無以二十二無明及十一障寄於十地別斷義耶?答:約實行,則一、一地中,通斷二十二無明及十一障也。問:若爾與別教中,一斷一切斷義云何別耶?答:別教之中,無有明昧三乘之中,雖通斷二十二無明十一障然明昧差別故不同也問三乘十地一通斷其相云何?答:於十地中,修習十度。初地中,檀度偏勝、餘度兼修,隨地增上二地中,戒度偏勝、餘度兼修,隨地增上。是故若約偏勝於諸地中,各修一度,若擧兼修一一地中,通修十度斷障,亦爾。若約正者,於諸地中,各斷一障。若約兼斷一一地中,通斷十障。是故當知雖一、一地通斷諸障,而有明昧也。問:寄對之中,第八門云寄四障以現四位。此有二義:一約正使寄現地前,四位、四行、四因、四報云云。第二以四障習,寄現地上四位、四定、四德、四報等者,與實行義何別耶?答:以正使寄地前,以習氣寄地上義,與實行同然,寄四障,以現四位義,是假寄也。謂約實行,則一、一地中,通斷四障故,爾也。何者法常師攝?論疏中,若約實一、一位雙治四生死齊現四德已上故知爾也問十地所斷之障爲根本無明耶,爲枝末耶?答:一云:如後,謂根本無明,以微細故,佛地方盡。是故十地所斷,是枝末也。何者勝鬘經云:根本無明佛菩提智之所能斷已上故也今釋通根本枝末也何者起信論云不了一法界者從信相應地觀察學斷入正心地,隨分得離,乃至如來地,能究竟離故。解云:不了一法界義,是根本無明信相應地者,是地前位入淨心地者,是初地也。是故當知十地所斷,亦通根本無明也。問:章主法界無差別,論疏云:四無病者標也。謂二障及習氣所病盡故,寶性論云:淸涼故,不病,無煩惱習故,五無苦依者,以無始時,根本無明住地及習氣爲衆苦所依,今皆永盡故,云無苦依。問:此與前所知障,何別耶?答:三藏兩釋一云:此是住地無明,彼是起時,無明如勝鬘說也。一云:此是所知障中,細分爲本,是彼所依,以依細起麤故。若爾煩惱豈無麤細?釋云:煩惱麤細與麤所知,俱是能依,唯此微細,是彼二所依已上此二釋何別答釋無苦依云以無始時根本無明及習氣爲衆苦所依已上旣通擧根本無明及習氣爲苦依故,初釋約根本無明爲苦依,後釋約習氣爲苦依也。是故初釋義者,無病中,二障是起時,無明無苦依者,是根本無明也。後釋義者,無病者,約煩惱麤細及麤所知無苦依者,只是所知障之細分也。問:初釋中,住地無明及後釋中所知障之細分何別耶?答:一體無異也。問:若爾何故有二釋耶?荅:論其二障有二門:一者根本無明者,智㝵六染者煩惱㝵就煩惱中,執相應染,是人執故,爲煩惱障餘五染。是法執故,爲所知障。若約此義根本無明非二障根故,初釋約此義二者,執相應染是人執故,爲煩惱障餘五染及根本無明,竝爲所知障。若約此義根本無明,是所知之細分後釋約此義也。問:根本無明及六染斷位分齊云何?答:六染中,執相應,染地前斷也。不斷相應,染初地斷也。分別智相應,染七地斷也。現色不相應,染八地斷也。能見心不相應染,九地斷也。根本業不相應,染十地及佛地斷也。根本無明者,地前觀察,學斷初地,隨分得離佛地,究竟離也。是故當知十地,亦斷根本無明也。問:無明是根本故,是上位斷染心,是枝末故,是下位斷何不爾耶?答:雖生起之時,有本末治斷之時,無前後故爾也。是故章主。起信疏云:今無明與染心說有前後然治滅竝一時也已上此文足爲訂也問:根本無明無有分異,何故上位斷下位,亦斷耶?荅:曉公二障章云:上說通相無明住地,亦爲二乘隨分所斷未知。如是無明住地爲有麤細,爲無輕重,若有麤細故,有斷不斷者,卽應通與八識相應。若是一向心不相應故,無麤細輕重異者,云何二乘有斷不斷?若使同迷我見等惑,所迷理故,雖非是麤而同斷者,是則末那相應無明同與見惑迷無我理故,於見道,亦應共斷。若此細故,不共斷者,彼最極細何得同斷荅?無明住地,其相微密、麤細、輕重不可定說故,一切種皆可得說。何者若就功力增强,遍生諸惑,卽應可說,唯麤非細。若就行相末分非心相應,卽應可說,唯細非麤論其所障。障上障下,則可得說有重有輕,直當自相一無增微,則應可說非輕非重其上無重其下無輕,亦不可說唯在中品但由非輕故下智能除由非重故上智亦斷非輕重故中智得滅 已上細覽此文卽無惑矣問若根本無明下智,亦斷何故勝鬘經云佛菩提智之所能斷耶?荅:無明細分佛地方盡故,云爾也,非謂下位不斷也。就廣釋中三初釋地前伏使現義次初地 已上下釋初地斷使種義后。是故當知下釋地上除習氣義也。初中爲除智障等者,前始教云潤生提化故,不墮二乘地故,爲斷所知障故爲得大菩提故 已上今擧除智障之義等取餘三也梁論二文竝第三卷也。問:今此文中,引梁論等數處文寄惑現位第一文中,亦引此文二處所引,其義何別耶?荅:此中引意得出世淨心,亦得聖人位故,於煩惱障自在,能斷爲除智障故。故留之義引也。波處取斷煩惱義,不弁故,留義也。仁王經云;地前得人空,而不取證等者,彼經云:復次,性種性行十惠觀,乃至修護空觀,亦常行百萬波羅蜜,念念不去心已上解云修護空觀者是得人空之義也常行百萬波羅蜜者,是不取訂義也。又經云:復次道種性住堅固忍中,乃至常入第一義諦心,心寂滅,而受生三界。解云:心心寂滅者,得人空義,而受生三界者,卽不取訂義也。又起信論等者,依人空門,見法身故,於煩惱障自在能斷也。二釋初地斷使種中,先約六識中,二障種二,其末那下約末那煩惱初中先正明后引訂初中初地已上斷於智障一分麤者一云:於十地中,各斷智障之一分也。今釋不爾初地中,斷一分麤品二地已上,除習氣也。問:但云初地已上等不言,唯是初地,何云斷一分者,唯是初地耶?荅:此中意云初地斷其智障一分故,初地已上其煩惱障不復更留也。如抄文云:直進十地,初斷麤後斷細者,是其義也。引訂中,引此文意有二:一者結前,謂見道中,不分見、修一切俱斷者,此文爲證也。二者起後,謂以此文爲證,當知其末那煩惱,亦初地斷麤也。謂旣云修道煩惱於見道中,一切俱斷故也。二斷末那煩惱中,三先摽自意,次引證,後若言下遮外計也。引證中,問:孔目章第三煩惱行使行稠林章始教中,引此文。何故今此於終教中引耶?荅:一云:彼論云如數次第,或隨所相應等。解云:如數次第者,如次第轉其四識,成於四智之義。此當始教隨所相應者,卽當終教孔目。約初義此章,約後義,今釋此所引論文有二義:一約始教,入眞見道,暫伏不起故云轉染污末那,後諸地中,漸漸伏故,云轉復淸淨也。二約終教初地,斷麤故,云轉染污末那,後除殘習故,云轉復淸淨。是故二處各從一義引也。三釋地上除習氣中。問:前叚旣云轉淨者,除習氣也。則前叚已現除習氣義,何故此中方現除習義耶?荅:前叚義者,引攝論文訂,其末那煩惱初地,斷正使義,仍釋彼論,轉淨義耳,非謂正釋地上,除習氣義也。又前轉淨者,除習氣者,唯約末那煩惱習氣,至於是故下通現斷於六、七、二識煩惱習氣及所知障習氣之義故也。是故者,因前初地斷正使義,成其地上除習氣義故也。此中四。先標自意,二引訂,三釋所引文,四問荅三釋所引文中,微薄則,習氣微細輕薄故,云微薄也四問荅中荅中有三先正荅二如始教下擧劣況勝三若地前下結成也。擧劣現勝中,始教小乘者,簡愚法也。彼頓出離等者,若唯斷欲界修惑九品中,前六品時,不斷上二界前六品者,可得一來果,然斷欲界六品時,卽斷上二界六品故,不得一來果,此尚猶然,況菩薩也。第二現斷相及惑體中、光明斷相。後又此下現惑體也。初中非初非中後等者,十地論文也。問:藏公約相反相續二門,釋此論文異相、云何?荅:惑智同時,立論者,是相反也。唯智中,立論者,相續文也。問:非初非中後,與前中後取,何別?荅:初句卽本有,後句卽修生故別也。故淸涼云:非初非中後,弁因緣無性是斷之不斷前中後卽不壞緣相是不斷之斷已上故是本有修生義也。經云:一切法,卽如者,維摩經也。第二明寄惑現位者,前約始教,則二障分別地。前伏現初地見道,頓斷彼種,其俱生中,煩惱障初地,以去自在,能斷留故,不斷等約終教,則其菩薩人於二障中,不分俱生及分別起,但有正使、習氣,地前伏使現初地,斷使種地上,除習氣。佛地究竟淨旣知二教立宗。如是其餘聖教,與此相違,云何會耶?今以十八門,欲會諸教故,次來也。此中三。先標數二,別釋三已上諸門,下結成也。別釋中,此十八門約類類弁也。謂一切惑障不出二障故,有初門第二、三、四門約皮等三惑義同故,一處弁也。第五、六、七門,則現三身義同故,一處弁也。八、凡二門分正使、習氣義同故,第十、第十一二門約色心煩惱義同故,十二、十三二門分見修義同故,第十四門以前,第十三門中,見道所斷分別之惑,所借三緣寄現三賢故次弁也。十五、十六二門,以前第十三門中,修道所斷,俱生煩惱於十地中,分斷故,次弁也。十七、十八二門斷無明義同故,一處弁也。若約位弁者,初八門通約比證,次五門唯約證位,次第十四門唯約比位,後四門,亦約訂位也。門門多分,有三叚。先標自義,次引訂,後釋引文。或唯有二無釋引文,或唯有一無後二叚如第十四、第十五等也。第三門三十三僧祇者,於十地中,各分入住出故,爲三十三賢,爲三故爾也。謂彼論云:復次,云何三十三僧祇,乃至方便地中,有三阿僧祇,乃至於十地中,地地各有三阿僧祇謂入住出已上尋彼可知第四門中二障三處過者,謂彼論中,以二障分爲皮膚、骨三障,於三位斷故也。第五門中問染心麤細,寄於三位,以現三身者,三身是佛果。何故此門,亦通比證耶?荅:所現雖是佛果,旣云伏道,是地前法斷道,是地上故,約能見心,是比訂故,無違也。有人者,曉公也。謂曉公造金光明經疏故也。問章主起信疏云:如金光明經云:依諸伏道起事心滅,依法斷道,依根本心滅,依勝拔道根本心盡。言伏道者,謂三賢位,起事心滅者,猶此論中,捨麤分別執着相,是異相滅也。法斷道者,在法身位,依根本心滅者,猶此論中,捨麤念相,是住相滅也。勝拔道者,金剛喩定根本心盡者,猶此論中,離微細念,是生相滅也已上然卽彼論無末那識以起事等三心配生住異三相。 此章中,配三識,云何會耶?荅:彼經含多義故,配於三識,亦得配生、住、異三相,亦得隨宜無傷也。第六門中,問:經云:煩惱障淸淨,能現應身等者,煩惱障,則障於涅槃所知障,則障於菩提故,可言煩惱障淸淨故,現於法身何不爾耶?荅:若擧相反,如所難也。今約三障麤細業障最麤故,淨之則現化身,煩惱次麤故,淨之則現應身。智障最細故淨之則現法身也第八門中問一約正使寄現地前四位、四行、四因、四報等者,章主明難疏中,引於始教,何故今文終教假寄中引耶?荅:若據十信成位義,則是當始教,若約正使地前,斷習氣,地上斷之義,則是終教故也。此中有立嘖荅。 荅中闡提不信障,者闡提不信大乘之道十信,反此故,現大乘行也。外道我執障者,十解位中,成般若行解,人空無我理故,翻彼執也。爲我德因者,由無我故,眞我德現也。聲聞畏苦障,者此人畏生死苦故也。破虛空器三昧行,者聲聞人則生死虛妄,如彼虛空故,可畏涅槃,眞實故。可樂今破彼,如虛空之見故,云破虛空也。獨覺捨大悲障者,十迴向中,成大悲行故,翻彼障也。問:得大乘光明三昧等者是十地會摠定何故爲初二三地之定耶荅:梁攝論云:論曰:大乘光三摩提。釋曰:大乘有三義:一性,二隨,三得性。則三無性隨,則福德智惠行所攝十地、十波羅蜜隨順無性得,則所得四德果。此定緣此三爲境故,名大乘依止。此定得無分別智,由無分別智,照眞如及佛不異故,名光又有十五種光功德,勝於外光故。又此定能破一闡提習氣無明暗是暗對治故名光已上 此定得無分別智,乃至十五種光功德,勝於外光故,名光者。通於十地,是十地會,摠定義也。此定能破一闡提習氣者,局初二、三地。是故當於此中,初二、三地得大乘光明三昧義也。又隨義中,具福德行,約福行義,於四、五、六地中,得集福德王三昧,約德行義,於七、八、九地中,得賢護三昧,約具福德義,於第十地中,得首楞嚴三昧。如是各從一邊於十地中,分寄之耳,因緣生死反易報者。問:梁攝論云:初二三地是方便生死四五六地是因緣生死何故此中反此耶荅:法常公攝論疏云:一方便生死,卽以無明爲緣,感生死非是親因故,稱方便二因緣。生死卽以無流業爲因,感生死,由是親因故,名因緣。生死三有,有由前因緣,感生有果,有此果故,名有。有四無有,則老死攴謝其報盡後,實無有有果故,曰無有。若論得名方便,從疏得,名因緣,從親受稱有,有從果立目無有對治,彰號以盡此一有,更無有故,從初地至三地。且得四定、四空及施戒等,未得般若,由相同世間故,無明相增無漏業等,相隱故,以隱從增摠判三地爲方便,生死四、五六地,得道品觀智,乃至因緣觀智現前無明相隱,無漏業增以隱,從增判四、五、六地爲因緣生死七地,至十地住心已來,報行淳熟無漏。五分法身轉增明淨因緣相隱,則以因從果,判爲有,有生死十地,終心有生死時,短,佛地無生死時長故,以有從無判爲無有生死。解云:初二、三地,是方使生死四、五、六地。是因緣生死者,是其義也。初二、三地,是因緣生死者。佛性論云:方便生死者,是無明住地,能生新無漏業,比如無明生行,或因煩惱方便生同類果,名爲因緣。如無明生不善行,若生不同類果,但名方便。如無明生善行,不動行故,今無明住地,生新無漏業行亦爾或生同類或不同類生福行名爲同類以同緣俗故,生智惠行,名不同類,以智。是眞惠故,是名方便生死。解云:以彼論文會今文者,無明住地生新無漏業。初二、三地,是相同世間故,生同類。福行義增故,名因緣生死四、五、六地。是相同二乘故,生不同類。智惠行義增故,爲方便生死也又此四中初二通二障後二唯智障者法常師釋二、十二無明云:六地以上之所斷,竝是智障,是其義也。第十門中,又於十地別地相者,前第九門云:於十地中,爲別相故,此門亦別地相故云,又也前唯別世間,及出世,今別世間二乘及菩薩也。第十三門有三:一引論標自意,二何以下徵釋非實所以,三如實下現實意也。問:例餘門則先標自意,然後引證,何故今此直以論文摽自意耶?荅:論文廣多,具引恐繁欲以義引故,直將論趣摽自意也。問:以分別俱生寄現見、修二位者,應是始教實行之義,何故爲假寄耶?荅:一云:始教實行中,二障分別起地前,伏現初地斷種,其俱生中,煩惱障,則初地以去自在,能斷留故,不斷等也。今此寄門大分見、修分別,煩惱見道,皆斷俱生煩惱,修道皆斷故,不同也。今釋此第十三門,與始教中,實行同也。問:若爾何云假寄耶?荅:此門義者,始、終二教合爲一,大乘教以終教爲實,始教爲假寄故爾也。是故偏於此中,云何以得知但是寄位非實 已上餘門皆是假寄然於此門偏現初教實行,是假寄位故,爾云也。卽蘊離蘊等者,卽於五蘊,計我故,離於五蘊,計我故也。如實意者,但一煩惱有麤有細等者,法界品抄云:直進十地中,初斷麤後斷細之義也。是故當知如實義者,是終教也。如末那煩惱通二位斷者,先約六識煩惱,弁見道斷麤,修道斷細。今約末那煩惱弁見道斷麤修道斷細之義,亦爾是故前言其末那煩惱初地斷鹿後,除殘習者,是其義也。第二執識者,末那也。對賴耶故,爲第二也。此中先現二乘,滅末那義後,若見諦下明菩薩末那煩惱見道斷麤,修道斷細之義也。問:十六心者,是小乘位,何言菩薩斷義耶?荅:借二乘位地之辭,以現菩薩斷惑之義耳。此上諸義等者,據後九門也。此九門中,有不引聖教故指彼也三結成中爲護十地等者護者防護過故問十八門中亦有地前何言爲護十地耶荅雖有地前,而十地爲宗故也。問:十地章云:如此等法差別相者,爲護十地故,隨方便門,作種種說,令諸衆生,於十地中,離增上慢已上與此何別耶荅彼約花嚴外相十地此約地爻十地故,不同也。餘義准思者,十八門中,所不引聖教准之通矣。就圓教中,先明別教,後若約下明同教也。初中先正明,後又此下現斷惑位。初中有四。初明無體有用,二以所障下弁一障一切,障三。是故不分下弁一斷一切斷,四引證也。初中一切煩惱不可說,其體性者,道身章相和尚云:惑者,但用無體智具體用問無體何得有用荅體是無住實相迷用爲惑迷用息耳,無體可斷。解云:體是無住實相故,云不可說,迷用爲惑故,云但約其用,甚深等也。具猶空雲有二義:一無體,卽空義;二有用覆弊義。惑中亦爾以所障法一卽一切等者,擧其所障現能障也。不分使習現種等者,簡三乘也。但如法界一得一切得者,一云:如法界者,擧能例也。一得一切得已下擧所例也。一云:如法界一得一切得者,擧能例。是故已下現所例也。謂擧法界一得一切得義,成一斷一切斷義也。普賢品明一障一切障者,彼品云:起一嗔心,受百千障㝵法門故,小相品明一斷一切斷者,彼品云:此諸煩惱,皆悉除滅故也。問:以小相品智,斷普賢品障耶?答:雖有多說,今釋以小相品智斷普賢品障也。謂普賢品擧所治小相品擧能治故也。問:小相品有八萬四千煩惱,此是所治普賢品有六十種普門得德,此卽能治是則各具能治所治。何故强以小相品智斷普賢品障耶?荅:小相品非無所治普賢品非無能治,然小相品中,八萬四千煩惱一障一切障之義,於普賢品方現也。普賢品六十普門一斷一切斷之義,於小相品方現故也。是故花嚴經中,一障一切障之軌皆托普賢品文一斷一切斷之軌皆依小相品文故,一斷一切斷,則無非小相品智一障一切障,則無非普賢品障故爾也。問:若小相品智斷普賢品障者,以修生智斷本有障耶?荅:修生本有約德,而論非謂能障復有修生本有。是故障本有修生之惑,以修生智通斷也。比如黃金雖在泥中,而其金體本來淸淨,若借鉗鎚之功,去其鑛穢,卽非但現於赫赫之光,亦現本來淸淨金體。如是本有之德,雖在染中,而其性德本來淸淨,若得修生之智一斷一切斷之時,非但現於修生萬德,亦現本來性德之體。又如淸淨空中,雲塵徧覆日光出時,破雲現空日光與空雖異能翳之雲,元不別也。是故昏雲若破非直開朗日之光,亦乃現淨空之色法合可知。是故道身章云:有文云一斷一切斷。有文云實無所斷,彼是則此非此是,則彼非云何會通?荅:以德言之從始無障以惑望之覆無盡德已上無盡德者非但修生,亦通本有德也。修生智起斷復無盡德之障,則亦現本有智故爾也。問:儼公十地會宗云:一所治,謂正使、煩惱業報及性三障上心種子二能治,謂正無分別智及普賢性起智已上此能治所治其義云何荅正使煩惱業報者十地品所治也。性三障上心種子者,普賢品所治也。正無分別智者,十地品能治普賢性起智者,普賢品能治也。問:修生本有於同別教云何當耶荅十地能治所治是修生亦同教也。普賢性起能治、所治,是本有,亦別教也。何者彼疏十地品宗云四義准上唯取修生爲異耳已上故知十地能治、所治,唯是修生,亦同教也。此旣爾故,普賢品能治、所治,是本有也。問:又品宗云:以不說爲說義,卽證普賢德位,以說爲說三乘宗已上不說爲說等者可是別教義何云同教耶?荅:不說爲說者,是約本分,請分文云也。以說爲說者,是約說分六云也。是故章三十地說分說意中云:三說意者,前本請分中已說地體,令彼上機悟解玄旨,今弁地相令中下之流隨相開解故明說已上此意與儼公不說爲說等同。然會宗中,多從說分弁故,是同教也。問:修生同教本有別教者唯約單本有單修生論耶通約四句而分論耶?荅:修生及修生本有二句,合爲修生本有,及本有修生二句合爲本有。何者第六地釋義門,明本有等四句竟云若對經分文。此十番緣生,唯有二門:一修生,二修生本有餘二在性起品已上故爾也問此四句中論斷無斷義云何?荅:約本有及修生本有,則無所斷,約修生及本有修生,則有所斷也。謂約理卽無所斷,約智則一斷一切斷故,爾也。何者釋義門云:言本有者,緣起本實體,離情,謂法界現。然三世不動故,性起云衆生心中,有微塵經卷,有菩提大樹,衆聖共證人證前後不同,其樹不分別異故,知本有。又此緣生文十二因緣,卽第一義言本有修生者,然諸淨品本無異性。今約諸緣發生新善據。彼諸緣乃是妄法所發眞智,乃合普賢性體本無分別。修智亦無分別故,智順理不順諸緣故,知修生卽從本有同性,而發故,性起品云:名菩提心爲性起故。問:本有修生。旣是新發義,非是舊,云何乃說從其本性?荅:此只爲是新生之義說,是修生與本義親故,從性起。如今穀不別,劫初順本穀,親對今緣疏故,不說新得三修生者,信等善根先未現前,今對淨教賴緣。始發故,說新生云云。四修生本有者,其如來藏性隱在諸塵凡夫卽迷處而不覺。若對迷時,不名爲有故,無相論云:若有應見云云,今得無分別智始現法身,出纏成淨,先無有力同。彼無法今時成用異,本先無故,不可說,名爲本有說,爲修淨。問:若說始現爲修起者,名曰修生,云何說現?荅:只爲是現修生門中,義成本有,先在迷心,不說體用。今時始說有彼法身故,知與彼新生,是親先有義疏。如論云,離不離無常,旣言無常不可從,本有上來四義於此緣生,理實通有解云本有及修生本有則旣約理故是無所斷修生及本有修生,則約智故,說斷也。問:章主不思議品疏中,四句與儼師四句何別?荅:別也。此章主則約本有及本有修生,則無所斷約修生,及修生本有,則說有斷也。謂如來藏性本來究竟者,單本有。此如來藏古隱今現者,本有修生。此二句則一種理體故,云無所斷也。無分別智本,無今有者,單修生此無分別智之內,同眞性者,修生本有。此二句則一種智故,論斷義也。問:此章主亦有隨儼師義耶?荅:有也。謂起信別記云:又以本覺成始,更無異法。從此義故,摠名本有。又以始覺契本,方名本覺。若離始覺一切不成。從此義故,摠名修生。又以本取始名本有修生。又以對始覺說本名修生本有已上此則約本有及修生本有則無所斷約修生及本有修生,則說有斷也。問:小相品修生普賢品本有然,亦各有本有修生故,論斷不斷者,是則各當自品具能所治。何故要以小相品智,斷普賢品惑耶?荅:雖二品中,各具本有修生故,論斷、無斷義,然明能治智之一斷、一切斷義者,是小相品明所治障之一障、一切障義者,是普賢品故,不違也。第二現斷惑位中,先現四句斷後,又前下現非但四句。初中問:此四句斷爲同教耶,爲別教耶?荅:一云同教也。今釋是具圓融行布之別教斷也。謂此斷惑分齊等者,牒上圓教所論一斷、一切斷義故云此也。是故欲現上所明斷惑之位故,以四句現之非謂只是同教也。若言四句,是同教者,其上所明一斷、一切斷義,亦同教耶?彼旣不爾,此云何然?是故小相品疏云?此諸煩惱,皆悉除滅者不分現種使習,普滅非別滅。何位滅者。通五位故,云何滅者?如虛空故,本來盡故。解云:准彼釋。此者不分使習現種普滅非別滅者,當於此文不分使習現種,但如法界,乃至一斷、一切斷等也。何位滅者?通五位故者,當於此門初三句也。如虛空故,本來盡故者,當於此文第四句也。若言四句,是同教者,彼文斷惑,亦同教耶?彼旣別教,此亦爾也。問:道身章云:常元師問同教中,約證初地斷惑,約位十解斷惑約行實十信斷惑約法實無所斷又別教一斷一切斷爲一惑耶爲異惑耶已上約此文則四句是同教義何不爾耶?荅:此文義者,同教是所寄三乘,是下四教故,爲同教也,非謂所現四句,是同教也。謂三乘中,約證初地斷惑故一乘寄彼,現初地一斷、一切斷也。於三乘中,約位十解斷惑故,一乘寄彼現十解一斷、一切斷也。於三乘中,約行十信斷惑故,一乘寄彼現十信,終心一斷、一切斷也。於三乘中,有無所斷義故,一乘寄彼有第四句義。是故寄彼三乘四句之義,現此一乘四句義也。故同教者,是所寄三乘四句之義。此中四句當於所現別教也。故約初地解位十信三位之中,一斷、一切斷之義,而云又別教一斷、一切斷也。問:儼師明難疏云:此下生解斷障無有四義:一約生信,卽初地斷使種;二約位,卽解位使習種俱斷;三約行,則十信滿心使習種俱斷;四約實,卽本來不須斷,自體淨也。又問:斷惑相云何?荅:非初非中後,前中後取故,云何斷?如虛空。此是三乘共學義已上解云此明難四句之義亦是別教耶荅爾地。問:若爾與此章四句同耶?荅:有同,有異也。言有同者,二處是別教故,言有異者,此章四句,竝是通圓融行布之別教義也明難疏義初句但是行布後三句與此同故小有不同也。問:何故明難四句中,初句唯是行布後三句,是通圓融行布之別教耶?荅:明難四句標下十信、三賢十地中,所治也。謂明難疏云:二出所治一嗔障百法明門之障十住云二明所治是前百障應位斷故十行云二所治一乘如前解迴向云二弁所治一乘如前准已上十信三賢不分使習通斷百障故第二第三句所摽是通圓融行布之別教義也十地云明所治謂正使煩惱業報及性三障上心種子已上正使煩惱業報者卽十地所斷性三障等者,卽普賢性起所斷也。正使者,初地中,正使種子永斷故。煩惱者,二十二無明及十一障也。業者,二十二業也。報者,四種變易報也。此則分正使、習氣故,卽當於行布同教。是故初句摽此義,云約生信,則初地斷使種故,是行布同教也。問:何故平等因果所治爲性三障耶?荅:古辭云:無分別智所治爲事障,普賢性起智所治爲性三障。問:何者事障,何者性障耶?荅:迷染爲淨,迷淨爲染,名爲事障,謂染淨自性各別之執,名爲性障。是以以染爲可捨,以淨爲可取,遂斷染現淨者,名無分別智之斷障也。染則德故,染本無斷淨。無更現者,爲普賢性起智之斷障也。古云:兩智斷障,猶如擧火覓暗,明在暗無者,無分別智之斷障。擧火覓暗,暗卽是明,更無所照者,性起智之斷障。問:若爾本無所斷,何云性三障爲所治耶?荅:旣用修生智斷暗,得明之曰前所斷暗本,卽是明更無新,斷新得。是故謂斷暗得明之心,名爲所治,是以約謂爲斷暗得明之心,名爲性三障也。猶如從十信位,起始覺智,經三賢十地,至十地,終心除生相夢,始覺圓現反願始覺,卽同本覺、始覺想泯。如是以修生智破暗得明,旣得明之日知前所破暗本,卽是明暗本不動,明無新得,謂除暗得明之心不生之義爲斷障也。問:何故三賢所治,約通圓融、行布之別教十地不爾耶?答:隨經文相故爾也。謂三賢所說普賢德現三乘相,隱於十地中,反此故也。是故儼師迴向品疏云初地以上經本無通三乘立其教義文相多同故不須料簡者,是此義也。問:明難四句終云此是三乘共學義者,因何作此言耶荅非初非中後前中後取故云何斷如虛空者,是三乘所論故,云三乘共學也。問:若爾非初非中後前中後取故,如虛空者,唯是行布同教耶?荅:通於圓融、行布也。問:若爾何言三乘共學耶?荅:非初非中等言雖不㝵別教,亦通三乘共學故也。問:若爾本實別教,亦爲三乘共學耶。荅:不爾也。本實之中位,位攝佛果義三乘所無故,非共學非初非中後,如虛空。如是斷義,亦是三乘所明故,云共學也。問:道申章云問有文云一斷、一切斷有文,云實無所斷已上有文者是何文耶荅此章文也謂有文云一斷一切斷者,是初三句。有文云:實無所斷者,卽第四句也。問:初三句中,不言一斷、一切斷,何故?有文云:一斷、一切斷者,是初三句耶?荅:一約證,謂十地斷二約位十住,以去斷等者,弁前一斷、一切斷之位故,云爾也。又前三乘諸門斷惑等者,隨其三乘所托之位,若一斷、一切斷者,卽是一乘斷位故,非但四句也。謂且約十八門寄對之中,初門比位斷煩惱證位斷所知者,隨門前後故,是三乘斷位,若一斷、一切斷者,卽是別教一乘義故爾也。問:普賢品說嗔障經文之首按向下逬修門中,▼(冂*五)、▼(冂*六)、▼(冂*七)三印,其意云何?荅:古說雖多,今釋五字印中,通弁五教障之名數六字印中,弁實際頓別教斷障之義,七字印中,弁窮實義也。何者五字印中,旣云諸教,弁障故,六字印中,旣云初明嗔障等者擧首爲言欲類現普賢廣大解行法。故七字印中,弁其非法具缺義故也。問:何知五字印中,亦弁一乘障耶?荅:彼五字印云以上諸惑一惑一切惑一斷一切斷此屬一乘教如下說已上者,卽是別教障義也。二同教中問:何故初二門有攝方便,次二門中,無攝方便。此門及二乘迴心,又有攝方便耶?荅:中二叚略無者,准前後章可准知故也,此章中,且隨語便故艹艹論也謂前旣云又前三乘等諸門斷惑若一障一切障,一斷、一切斷,卽入此教。若隨門前後,是三乘等,此擧別教言已上因此而言若約攝方便者隨門前後三乘亦入一乘攝也。二乘迴心章中,以小乘一終教、一始教、一頓教、一攝方便、一別教、一欲成六種說故,幷論攝方便也。餘義准之者,不引餘教准之通矣。第七二乘迴心者,前諸門中,通約大小乘,弁今則習其小行,必向大乘故,次來也。此中有三:一擧數,二別釋,三問荅也。別釋中,一切二乘,皆無迴心等者,道身云小乘性定已前,皆有佛性。何故今云皆無迴心耶?荅:道身章約自宗佛性,今約迴入大乘義故,不同也。二或一切,皆迴心等者,問:初明小乘,次明始教可當,次第,何故小乘之次,明終教耶?荅:且約句數次第,如是立也。謂對小乘一切無迴之義故,次明終教一切竝迴之義也。又對始教,亦迴亦不迴之義故,次明頓教無迴、無不迴之義,但隨宜立耳。此中二先。正明教意,二問下問荅。初中三。初摠摽,二以悉有下弁因緣三。是故下結也。弁因緣中四:一內因,二外緣,三無明未盡,四涅槃不究竟也。問:荅中有二。重初會違文,後弁迴心時分齊也。初中現揚論等者,彼第十七卷云:若成就阿賴耶識,亦成就轉識耶,設成就轉識,亦成就阿賴耶識耶?荅:此應作四句,謂或成就阿賴耶識,非轉識,謂無心睡眠、無心悶絕入無相定,入滅盡定。生無想天者,或有成就轉識非阿賴耶,謂住有心位,阿羅漢、獨覺不退轉菩薩及與如來。或有俱成就,謂所餘住有心位者,或有俱不成就,謂阿羅漢、獨覺、不退轉菩薩與如來入滅盡定若處無餘依涅槃界已上瑜伽同此說今引第四俱不成就句。問:云本識轉識,皆滅無餘,以何爲因生心修道耶?荅:中有二。先會瑜伽現揚文,二又由上下荅上,以何爲因之問也。後問荅,荅中有二。先摠荅二遲者,下別荅。此中有二。先引楞伽經,現其摠說二。若差別下現其別說,初中問:起信疏云:然此利鈍遲疾,諸聖教略有七位。謂八萬、六萬、四萬、二萬、一萬等劫如次,以配四果及獨覺人。此五如彼涅槃經說第六位。如楞伽云,三昧酒所醉,乃至劫不覺醉消,然後覺得佛無上身。此亦利於前不經萬劫。第七位如法花經說。 云云乃至唯以佛乘而得滅度解云此最利根亦捨分叚入涅槃已則於佛土受變易身受佛教化入於大乘已上 疏以楞伽經文爲第六位,異於涅槃五位。何故今章爲摠相耶?荅:彼經文但言乃至劫不覺不限劫數故,於此辭中含於八萬乃至一萬故云此文但摠相說。又旣唯云乃至劫不覺不言萬劫故,設經一劫,亦爲乃至劫不覺故,起信疏中,約此義云利於前也。須陁洹人亦復不定等者,若約自宗,雖云性定,然此教義無定性故,問:須陁洹人等,竝得羅漢果,後入無餘,何云湏陁洹人等耶?荅:道身章云:問:旣到羅漢,然後方入無餘三昧,何言初二、三果手?荅:實俱羅漢而後初爲名耳。所謂始發小心,現身得初果,第二生後得第二以上者,爲初果性,若現身至第二果者,爲第二果性,若得第三果者,爲第三果性。若現身中,至得第四果者,名羅漢性耳。已上是故竝得第四果然後入無餘滅經爾許劫然約現身得果之義名初二三果耳此五人至發阿耨菩提心者於無餘中經若于劫,迴入十信之時,卽名發心也。四非迴非不迴文殊般若經者彼云如是說法無有衆生已得涅槃今得當得何以故無有決定衆生相故云云等准知之六或俱絕前五此有二種一一切二乘。至無可迴者,以二乘行,心方普賢行,心如以螢光方日月故,以普賢眼至皆以究竟者,以普賢眼,望於二乘,本來究竟,更無復迴。此二釋中,決言大德云:此二道理唯頓別教中論耳。論二乘迴心之義,是窮實故,始門終門二迴心義,亦窮實也。今釋此二,釋竝約頓园別教論也。問:若爾二乘旣無可迴何故立其二乘迴心章,弁迴心義耶?荅:雖約行心無分,而有入普法之時故。亦有迴心之義雖以普賢眼見本來究竟,以彼而言實不知故有迴執心進入之義故亦弁迴心義也問章主入法界品疏釋大聲聞云大者弟四果故又是不動性故諸聲聞中最尊大故如鶖子等又此等竝是迴向大乘之聲聞故云大佛地論云如實義者,不定種性聲聞得小果已,趣大菩提故,名爲大。解云:以其未入园教一乘普賢法故是故下文云如盲聾也又釋此等,竝是在菩薩示現作聲聞,如新譯花嚴不思議境界分中說以現此法深勝故如聾盲也已上此三釋何別荅初則約小乘釋次則約三乘第三約一乘釋也。問:約一乘釋中,此等竝是大菩薩者,當於此中,以普賢眼見,一切衆生皆已究竟也。現此法深勝故,示現如聾盲者當於此中卽空無可迴義耶荅一云爾也問實是菩薩現聲聞故卽聾盲時是大菩薩何故現聲聞者卽空無可迴耶荅非約別相續聲聞菩薩論唯一種二乘卽實菩薩亦卽是。如聾盲之二乘故。雖實菩薩示現聾盲時,卽空無可迴也是故彼處云示現如聾盲今此亦云如經中如聾如盲者是已上故如是准也今釋此等大菩薩示現作聲聞者雖實菩薩欲現法深勝迹現聲聞故卽聲聞時究竟大菩薩也是故約一乘釋當於此中以普賢眼見一切衆生皆已究竟之義也約三乘釋,約小乘釋,卽當於此中,卽空無可迴之義也。問:何故一種,如聾如盲之二乘中,有多義耶?荅:第二釋中,云以其才入园教一乘普賢法故是故下文云如聾如盲故聾盲之義現也初釋則旣約小乘故,聾盲之義,亦現也。是故初二釋當於此中,初釋義也。第三釋中,旣云竝是大菩薩示現,作聲聞故,當於此中後釋義也。問:實是菩薩迹,似聲聞之二乘與卽空無可迴之二乘,何別耶?荅:蜼一種二乘以普賢眼見之則,實是大菩薩現法深勝故,示如聾盲。約行心見之則實,是聲聞,卽無分故卽空無可迴也道身章云衆生業起無非普賢迴成故無普賢不自在,得普賢迴成,無非衆生業起故,非普賢無苦作苦故,惱衆生矣。解云:衆生業起,無非普賢時,唯是普賢也。普賢迴成無非衆生業起時,普賢實是衆生,此中道理當知亦爾也問迴心入於普法之時不轉其名入耶轉二乘名得菩薩稱然後入耶?荅:古有二義、三施設也。言二義者一云:約同教則有從自乘入也約別教則轉二乘名而後方入也一云若約同教,若約別教,竝轉後入也。言三施設者。一云:儼師相德約同教,則可從自乘入也。約別教者,轉後方入也。章主則若約同教,若約別教竝,轉方入也一。云:三師竝約同教,則可從自乘入,約別教,則竝轉而後方入也一云三師若約同教若約別教竝轉而後入也。今釋第三說爲正也。何者轉爲文云:餘大乘經有聲聞衆,爲所被機,亦引二乘,令其入大唯獨此經,衆無聲聞之機文無迴小之說已上故爾也問轉爲者此但約別教言耳若約同教則可從自乘入於花嚴,何不爾耶?荅:若爾難者,約同教,則此經之中,衆有聲聞之機文,有迴小之說耶?旣不爾故,設約同教轉後,方入也問就二乘中有利鈍故若利人則起彼三乘等法本來不異別教一乘之解,可從自乘,卽入此經門相,何不爾耶?荅:蜼是利人轉後方入也。何者法界品疏云:問:只可聞而不信,如文殊行經中,五百聲聞不信受等,何故此中摠不聞見?荅:彼是三乘逐機說故亦令得聞今此一乘逐法高出故不能聞已上聞尚不得況起解而入耶?故不爾也。問:道身云以二乘,爲展轉所爲者,據花嚴別教,若入露地,同教及花同問教可有二乘,各從自乘迴入二同教已上約此文則可從自乘入於花嚴同教何不爾耶荅雖云二乘非實二乘故,不違也。何者道身,亦云此機人實菩薩從前二乘來故加二乘名已上故爾也問花嚴別教花嚴同教露地同教,云何別耶?荅:別教者通頓园一乘也。花嚴同教者實際頓中行布也。露地同教者大白牛車也。問:花嚴別教唯园融耶通园融行布耶?荅:通也。問:若爾何故花嚴同教,是行布耶?荅:若約通融布之別教,則捨二乘,名得菩薩,稱然後方入故。是故云以二乘爲展轉所爲者,據花嚴別教也,若開行布爲同教,則此亦雖實菩薩所入,而未永捨二乘,名之人所可入處。故云從前二乘來故,加二乘名耳。約此義云若入露地同教及花嚴同教可有二乘各從自乘迴入二同教也問加二乘名者何位中加耶荅一云:十信前九心中加也。何者三乘中,至信滿堪任位菩薩種性,方得決定前九心中,種性未決定。是故二乘依前九心,迴入一者,可云從自乘入也。若至堪任位,迴入者,方云得第三菩薩乘迴入故也。一云:終教地前加也。謂依地前迴入,一者有二乘習故,云從自乘入也。依地上迴入,一者與直進菩薩根性等故,方名從菩薩乘入也。何者此章云:若言彼智增上者,有小乘習怖諸煩惱故。永伏者,若於地前未訂眞如,可約本習,容有此類,以未純熟故,初地以上行解純就同訂、同行、同修、同斷,如何得有?如是差別已上故爾也令釋露地同教中加也謂二乘之人起所流解依露地同教後,入花嚴同教,者實是菩薩而從前二乘來故,加二乘名耳。問:若爾花嚴同教,中亦加二乘名耶?荅:爾也。謂道身云此機人,卽菩薩故,無二乘相耳,而實言有。從二乘,至此機熟處有。從菩薩至此機熟處,因此而云實是菩薩從前二乘來故,加二乘名耳已上機熟處者是花嚴同教故爾也問入二同教者一相續耶?荅:爾也。謂若入露地同教,則入花嚴同教,若入花嚴同教者,必從露地同教故也。問:依露地同教之人入花嚴同教時,以流解入耶,更起目解而入耶?荅:如初謂二乘之人起所流解,入露地同教,而不捨此解,入花嚴同教。猶如入於外門之人必望中門,而立。如是入於露地,同教之人必望花嚴同教故,爾也。問:立花嚴同教之人入別教時起何解耶荅起目解入也問要以目解入別教者立露地同教之人何故不能亦起目解直入別教耶荅此亦如前。若八法花同教不入花嚴同教者,無有是處。是故要依花嚴同教,更起目解入別教也。問:依花嚴同教起目解人於十根中,屬何根耶?荅:屬第八根,謂第八根,則雖立中三乘,起目解也。而花嚴同教中,起目解之人與彼解同故,亦屬第八。如第七根中,雖云三乘法根不定故,堪可進入同教一乘,而小乘中,起所流解入同教者,亦屬第七,此亦爾也。三問荅中,一乘攝方便中,迴心者,當於終門三乘中,迴心者,當於始門也。問:終門迴心所立之位,卽是熟頓攝方便者,通於小乘,何言同耶?荅:終門立位,雖是熟頓義,通初教攝方便者,雖通四教小乘,要依三乘教方入一乘故不別也。問:攝方便者,唯下四教,何故於文殊邊迴心卽得十大法門等耶荅約其立位爲攝方便非謂、入爲攝方便也問若爾三乘中迴心者唯約立位爲三乘所人非是三乘耶荅三乘中迴心者通約立位及其所入名爲三乘故不例也。餘如別說者,指儼師迴心章也。第八佛果義相,者前從心識,至斷惑,通弁五乘,修行軌,則次余二乘迴心之義未知。如是漸悟、頓悟所得佛果故,次來也。此中二先開章門,後別釋於中,二先常、無常中,五初小乘中,無性得佛性等者,佛性論非小乘論,現小乘之事故,引之耳。二始教中,亦無常以離不離故等者,梁論第十四云:尊成就眞如,修諸地,出離乃至論口尊,成就眞如。釋曰:此句明法身自性成就。眞如是無垢淸淨,若在道、前道中,結累未盡,未得名,成就道。後垢累已盡故,名成就等。解云:道前道中,結累未盡,名爲不離,道後結累已盡,名爲離也。有爲無流等者,淨分依他離染故,云無漏從種生故,名有爲也。以無間斷故者,報身也。相續起故者,化身也。三終教中,又彼論云:衆生心淨法身影現等者,義,引起信論文以報、化爲法身影故也。卽常卽無常等具足四句者,或唯無常,是隨緣故,功德差別得成故。或唯常是不變故,功德無不卽眞如故。或亦常亦無常二義無㝵故,或俱非以形奪故,或非四句者,或非無常,是不變故,功德無不卽眞如故。或非常,是隨緣故,功德差別、故。、、、常非無常以形奪故或非俱非以具德故若准摠、前、、、、修生功德亦有四句非四句法身亦爾也謂若約修、功德、、唯無常以修生故或唯常一得以後同眞如故或俱二義無、、或俱爾以形奪故非四句可知若約法身或唯常以隨緣時一、自性故或無常以隨緣赴機故餘句可知若始教中以眞如遍故,智訂眞故者,眞如遍一切法智同眞如故,境智一處,是故云非異也。有爲、無爲不同故者,其猶栗木板,松木板。雖同處,而不同故也。五园教中,約用及至具有常等四句者,三乘約法報化,而明今此約體德用,而弁然體,則德用全體,德用亦爾故,云若體則俱體,乃至用則俱用等。是知與三乘中,三身全、別不同也。若作四句,通三世間故,常有機,則應無機,則不應故,無常具德故,俱形奪故,不俱也。約德乃至亦通常等四句者,本有故,常修生故,無常,以修生之本有,本有之修生故,俱以二句形奪故,俱非也。上二、四義准之,可見者,約用約德之中,唯言有四,不別作故也。以不說爲現故,是常者。若具言者,果海自體當不可說,而以不說爲現故,說卽不說,是爲常也。旣以不說爲現與教相應故,云與阿含相應故,無常也。二明相好中,五二始教中何故智論等者此問意者以化身是報身體上變化起用故不從因生何故化身中出因耶金鏘者惠上菩薩經說:舍衛城中,有二十人復與二十人共爲怨敵時,四十人各爲傷害,伺求方便,承佛威神,尋詣佛所。爲化四十人,嘗有鑯鏘自然來出,欲入佛右足大指鏘在佛前。目連白佛:今拔鑯鏘,着異世界。佛言:以精進力,欲拔鑯鏘者,三千大千世界爲振動不能搖鏘如毛髮許佛往梵天鏘輒隨之還舍衛城,鏘亦在前。如來取鏘,以足蹈上。目連白:佛如來何罪,而獲鏘殃?佛言:昔爲啇主領五百價人,一懷惡心:吾卽害之。是其餘殃四十人聞是謂言:法王尚爾,況於吾等當不受罪乎?悔過自首入平等惠已上言馬麥者本起經云有婆羅門王名阿者達見佛心敬白佛願佛及僧顧我三月夏坐佛與五百比丘一時受請往至其國時,有天魔迷惑。王心耽荒五欲,迷忘供養。比丘乞食極苦難得,有牧馬使信佛,心淨告諸比丘言:知僧飢極而食,皆盡正有馬麥。佛言:此麥自在,應受阿難持麥。傍有一女作餠阿難敬佛情深行水授餠見佛食之悲哽交懷。佛知其意汝能噉否?阿難受而食之滋味非常,實是諸天以味加之欣悅無量悲哽卽除又經云過去久遠世時佛名毘婆葉在盤頭摩跋城有婆羅門名因提耆利慱達四圍及諸筭術、諸戒教五百童子。時王設會請佛供饒精羙。衆有一比丘,名曰彌勒。病不能行食竟。爲病人請食。梵志與嫉云:禿頭沙門!正應食,馬麥不應食。如是甘味之供,舍利弗時波羅門者我身是也已上此是食馬麥之因緣也三十二相亦各出因等者,諸聖教中,有弁三十二相因緣。如瑜伽及智論等故也。荅中卽於此身示勝因果者,小乘之人不見報佛故,於此化身,示勝因果,欲引彼故也。二彼以功德法爲法身者,小乘中,五分功德爲法身故。爲欲引彼,以修生功德爲法身也。五园教中,摩伽陁國寂滅道場等者、問:十蓮花藏世界微塵數相者,是相海品所說故,約晉經,則他化天宮所說也。約新譯者,重會普光所說也。何云寂滅道場耶?荅:約摠處故爾也。第九攝化分齊者,初小乘中,娑婆等者,於小乘中,無十萬淨土故也。法性土至不說者,此卽自住處非攝化土。今唯弁攝化等故爾也。如梵網經等者,問:彼經中,千摩醯首羅有千釋迦化百億釋迦故,有千百億釋迦於始教中,立此千百億釋迦耶?荅:一云:始教中,一摩醯首羅天,佛爲實報,此佛所放百億釋迦爲化,不說千百億釋迦也。今釋於始教中,千摩醯首羅天中,千釋迦爲實報。此千釋迦所放千百億釋迦爲化也。何者問荅初卷云:依三乘始教,於一三千所有化佛等,竝化佛母摩耶、眷屬等,卽亦非實諸三千界處,亦有別佛化義同前。解云:一三千界所有化佛等,一摩醯天佛所放百億化佛諸三千界處。亦有。別佛化義同前者,是餘百億化佛故爾也。問:若爾終教云何?荅:若約終教蓮花臺本源舍那,是實報佛千釋迦及百千億釋迦竝爲化佛也。寄法現示如第二會初者,名號品中,以種種身名等,寄現玉海故也。隨一世界,卽約麤細等者,大菩薩,則對娑婆而見花藏,衆生對花藏,而見娑婆故,隨一世界感界人見爲界感海人見爲海故云爾也第十佛身開合金光明經中,四智攝三身等者,彼經無現文,而以義引也。彼經云:依勝拔道根本心盡,卽現法身解云根本心者阿賴耶識轉此識現大园鏡智故也。合具前四以備德故,者,准餘處,則應爲攝方便,然下云:此二句如性起品說故,竝是別教一乘之義非攝方便也。故性起品疏云:釋有多義。一云:理實佛地有淨八識,但云智者取强說等云云一云理實佛地唯是大智不說八識及餘心法等云云一云佛地大智內同眞性以照卽寂故云云一云:佛地大智,卽理卽智,卽王卽數。或開或合,以前三說不相離故,無障無㝵具十智故。解云:合具前四者,同於彼文,三說不相,離俱絕前五者同於彼文,無障無㝵也。生身、化身等者,毘曇說也。釋華嚴教分記圓通鈔卷第五
- 1)세간(世間)ㆍ출세간(出世間)의 도(道)를 행함을 막는 번뇌를 가리킨다.
- 2)삼장(三障)의 하나. 곧 탐ㆍ진ㆍ치 등의 번뇌가 자주 일어나서 불도(佛道) 수행에 쟁애됨을 말한다.
- 3)명목의 수. 법수(法數)와 같은 말이다. 삼계(三界)ㆍ오온(五蘊)ㆍ오위(五位) 등과 같이 수(數)를 가진 법문(法門)의 수량을 말한다.
- 4)구생기(俱生起)의 준말이다. 곧 사사(邪師)ㆍ사교(邪敎)ㆍ사사유(邪思惟) 등의 바깥 연을 가자(加資)하지 않고 저절로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번뇌를 구생기의 혹(惑)이라고 한다.
- 5)번뇌가 일어나는 데 대하여 사사와 사교에 의지하거나, 사사유(邪思惟)에 의지하여 후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 6)오식신(五識身).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오경(五境)을 인식하는 다섯 가지의 심식(心識). 곧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 등이다. 오경에 대하여 따로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닿는 작용이 있다.
- 7)외도(外道)에 속한 이들을 말한다. 곧 외도사사(外道邪師)라고 한다.
- 8)성질이 선에도 악에도 속하지 않고, 또 선악의 어떤 결과도 불러올 힘이 없는 것을 무기(無記)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수행에 방해되는 것을 유부무기라고 한다. 수행에 방해되지 않은 것을 무부무기(無覆無記)라고 한다.
- 9)오견(五見)의 하나. 내 몸이 있다고 아견(我見)을 일으킨 위에 내가 죽은 뒤에도 항상 있다든가[常], 아주 없어진다든가[斷], 어느 한쪽에 치우친 견해를 말한다.
- 10)무부무기는 이무기(二無記)의 하나. 무기법(無記法) 가운데서 성도(成道)를 방해하고 심성(心性)을 가려 부정하게 하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 11)생사유전(生死流轉)이 쉴 새 없는 미계(迷界)를 셋으로 분류한 것을 가리킨다. 곧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 등이다. 이 삼계를 6도(道)ㆍ25유(有)ㆍ9지(地)로 나누기도 한다.
- 12)그 성품이 예리하고 우둔함에 의하여 항상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번뇌를 가리킨다.
- 1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所詮差別 斷惑分齊)(大正藏45, p.492 중~하)
- 1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1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1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1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1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19)『오교장』 권2, 소전차별 종성차별(所詮差別 種性差別)(大正藏45, pp.485 하~487 하)
- 20)오교(五敎)의 하나 화엄종에서 『유마경』과 같이 문자나 언어를 여의고 수행의 차례를 말하지 않고, 말이 끊어진 진여(眞如)를 가리킨 교법을 말한다.
- 2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2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2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2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25)화엄종의 교판(敎判)인 오교(五敎)의 하나. 『능가경(楞伽經)』ㆍ『승만경(勝鬘經)』ㆍ『기신론(起信論)』ㆍ『보성론(寶性論)』 등에서 말한 것으로, 시교에서 오성(五性)이 각각 다르다고 함에 대하여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한다고 말한다.
- 26)이집(二執)의 하나. 아집(我執)이라고도 한다. 오온(五蘊)이 화합하여 성립된 몸에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실아(實我)가 있다고 주장하는 집착을 말한다.
- 27)객관인 물심(物心) 현상을 실재(實在)한 것인 줄로 잘못 알고,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 28)원측(圓測)의 『성유식론소(成唯識論疏)』라고 생각되나, 현존하지 않는다. 동역전등목록(東域傳燈目錄)의 『성유식론』의 주석에 “동론소십권원측(同論疏十卷圓測)”(大正藏55, p.1157 하)라고 되어 있다.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권3의 『성유식론』에도 “소이십권혹십권원측술(疏二十卷或十卷圓測述)”(大正藏55, p.1175 중)이라고 하였다.
- 29)대승(大乘)에서는 주관의 인지(認知)하는 작용, 곧 마음에 비친 객관의 영상(影像)을 인식하는 주관의 작용을 말한다. 소승(小乘)에서는 주관의 인식 대상, 곧 객관의 사물이 주관인 마음 위에 비친 영상을 말한다.
- 30)독두무명(獨頭無明)을 가리킨다. 공 탐(貪)ㆍ진(瞋)ㆍ치(痴)ㆍ만(慢)ㆍ의(疑)ㆍ악견(惡見)의 6대혹(大惑) 가운데 치(痴)인 무명이 홀로 일어나서 다른 5대혹과 함께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31)『성유식론』 권5(大正藏31, p.24 상)
- 32)네 가지 번뇌. 곧 아치(我癡)ㆍ아견(我見)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를 가리킨다.
- 33)『대법론(對法論)』, 곧 『아비달마잡집론(阿毘達磨雜集論)』의 다른 이름.
- 34)출전(出典)을 알 수 없다.
- 35)색법(色法)과 대립된다. 곧 색법은 물질을 말하는데, 심법은 우주 만유를 색(色)과 심(心)의 둘로 분류할 때는 심왕(心王)ㆍ심소(心所)를 말하고, 오위(五位)로 분류할 때는 심왕만을 말한다.
- 3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3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3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3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4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41)훈습(熏習)은 우리의 몸과 입으로 표현되는 선악의 말이나 행동, 또는 뜻에 일어나는 선악의 생각 등이 일어나는 그대로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어떠한 인상이나 세력을 자기의 심체(心體)에 머물러 두는 작용을 말한다. 마치 향이 옷에 배어드는 것 같은 데에 비유한 것이다.
- 42)외연(外緣)은 밖으로부터 힘을 주어 사물의 성립을 돕는 기운이다. 곧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 43)불교의 진정한 도리에 어긋나는 사고(思考)를 말한다. 정사유(正思惟)에 반대된다.
- 44)삼계(三界)의 사제(四諦) 아래 일어나는 아견(我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 등 모든 견혹(見惑)을 말한다.
- 45)계금취견(戒禁取見)의 준말. 계금에 대하여 생기는 그릇된 소견. 곧 인(因)이 아닌 것을 인(因)이라고 하고, 도(道)가 아닌 것을 도(道)라고 하는 아득한 소견을 말한다.
- 46)미혹됨[迷]의 인과(因果)나 깨달음[悟]의 인과의 도리에 대하여 유예(猶豫)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정신작용을 가리킨다.
- 4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4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4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50)『유가사지론』 권8(大正藏30, p.313 상)의 이항 그 용례가 보인다.
- 51)『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2(大正藏31, p.700 상)
- 5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53)불지경론 권7(大正藏26, p.323 상~중)
- 54)『성유식론』 권9(大正藏31, p.48 하)
- 55)오견(五見)의 하나. 오온(五蘊)으로 가(假)로 화합한 것을 실(實)의 자아(自我)가 있다고 집착하며, 내 몸에 부속한 모든 물건은 일정한 소유주가 없는 것인데, 아(我)의 소유물이라고 집착하는 견해를 말한다.
- 56)오십요문답(五十要問答) 권상, 삼십육심수급심소유법의조림초석(大正藏45, p.525 하)
- 57)『오십요문답』 권상, 삼십육심수급심소유법의 조림초석(大正藏45, p.525 하)
- 58)성유식론 권8(大正藏31, p.32 상~중)
- 59)『유가사지론』 권56(大正藏30, p.621 상~중)
- 60)『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大正藏31, p.698 중)에 의한다.
- 61)오견(五見)의 하나. 곧 살가야견(薩迦耶見)을 말한다.
- 6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6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6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6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6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67)염오는 번뇌의 다른 이름. 번뇌는 그 자체가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므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선과 악, 무기(無記)의 삼성(三性)에 배대(背對)하면 염오는 악성과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에 통한다.
- 6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6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7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71)제육식(第六識)을 말하는 듯하다. 곧 의식(意識)이다. 의식은 안식(眼識)ㆍ이식(耳識) 등의 육식 가운데 여섯 번째이므로 제육식이라고 한다.
- 7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7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74)출전(出典)을 알 수 없다.
- 75)성문ㆍ연각으로, 자기의 법만을 고집하고 대승(大乘)의 깊고 묘한 이치를 모르는 것을 가리킨다. 『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76)『이장의(二障義)』(橫超慧日 편, p.32, 평락사)
- 77)삼단(三斷)의 하나. 견도(見道)하는 위(位)에서 끊는 번뇌를 말한다. 곧 견혹(見惑)이다.
- 78)삼단의 하나. 수도위(修道位)에서 끊는 법, 곧 수혹(修惑). 유식(唯識)에서는 구생기(俱生起)의 혹(惑) 열여섯 가지를 말한다.
- 79)출전(出典)을 알 수 없다.
- 8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81)아공(我空)이라고도 한다. 오온(五蘊)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몸을 마치 실아(實我)가 있는 듯이 생각하는 아집(我執)을 공(空)한 것이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이렇게 관하는 것이 인공관(人空觀)이다.
- 8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2 중~하)
- 83)『이장의』(橫超慧日 편, pp.29~31, 평락사)
- 84)『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권8(大正藏30, p.314 중)
- 85)『유가사지론』 권58(大正藏30, p.622 상). 상응무명(相應無明)과 독행무명(獨行無明)을 이무명(二無明)이라고 한다. 독행무명은 독두무명(獨頭無明)이라고도 한다. 상응무명은 구사종(俱舍宗)에서는 십수면(十睡眠)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무명을 말하고, 유식종(唯識宗)에서는 육근본번뇌(六根本煩惱)와 상응하는 동시에 일어나는 무명을 말한다. 독행무명은 탐(貪)ㆍ진(瞋)ㆍ치(痴)ㆍ만(慢)ㆍ의(疑)ㆍ악견(惡見)의 육대혹(六大惑) 가운데서 치(痴)인 무명이 홀로 일어나서 다른 오대혹(五大惑)과 함께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86)마음을 일깨워 바깥 대상을 향하여 발동하게 하는 정신 작용을 말한다.
- 87)『유가사지론』 권8(大正藏30, p.313 중~하)
- 88)보살수행의 오위(五位) 가운데 가행위(加行位)에서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제일법(世第一法)의 사선근(四善根)을 닦으며, 사심사관(四尋伺觀)ㆍ사여실지관(四如實智觀)을 하여 분별기(分別起)의 번뇌를 끊은 직후에 진지(眞智)를 내어 진여(眞如)를 보는 것이다.
- 89)성문사과(聲聞四果)의 하나. 초과(初果) 삼계(三界)의 견혹(見惑)을 끊고, 처음으로 무루도(無漏道)에 드는 지위로, 견도(見道) 십육심(十六心) 중의 제십육심이다. 이것은 수도위(修道位)의 처음으로 견도(見道)와 수도(修道)를 갖춘 최초가 된다.
- 90)욕계(欲界)의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의 구품(九品) 가운데 앞의 육품(六品)을 끊은 것을 말한다.
- 91)성문사과의 하나. 욕계(欲界)의 수혹(修惑) 구품(九品) 가운데 위의 육품(六品)을 끊은 이가 얻은 증과. 아직 나머지 삼품(三品)의 번뇌가 있으므로 그것을 끊기 위하여 인간과 천상에 각각 한 번씩 생을 받은 후에야 열반을 깨닫는다. 이렇게 천상과 인간세계를 한 번 왕래하므로 일래과라고 한다.
- 92)견제도(見諦道)라고도 한다. 온갖 지식으로 잘못 아는 소견을 여읜 자리이다. 소승에서는 삼현(三賢)ㆍ사선근(四善根)의 수행을 마치고 세제일위(世第一位)의 직후 무루(無漏)의 지혜를 일으켜 십육심(十六心)으로써 욕계와 색계ㆍ무색계의 사제(四諦)의 이치를 관찰하고, 지식으로 잘못된 소견을 여의어 처음으로 성자(聖者)라 칭하는 위(位)를 말한다. 십육심 가운데 앞의 제십오심(第十五心)은 견도(見道), 제십육심(第十肉心)은 수도(修道)에 딸린다. 대승 유식종(唯識宗)에서는 오위(五位) 중 통달위(通達位)에 해당한다. 가행위(加行位)의 맨 나중인 세제일위의 직후 무루의 지혜를 일으켜 유식의 성품인 진여의 이치에 체달하여 후천적으로 일어나는 번뇌장(煩惱障)ㆍ소지장(所知障)의 종자를 끊고, 선천적으로 갖춘 번뇌장의 활동을 아주 눌러 버리는 자리이다. 십지(十地)의 처음인 환희지(歡喜地)에 해당하며, 이 종은 십육심 전체를 견도라고 한다.
- 93)성문사과의 하나. 욕계의 구품(九品) 수혹(修惑)을 다 끊고, 남은 것이 없으므로 다시 욕계에 돌아와서 나지 않는 지위에 도달한 성자(聖者). 이 지위의 성자에 대하여 다섯 가지 구별이 있다.
- 94)소승의 교법을 수행하는 성문사과의 가장 윗자리를 말한다.
- 95)적정(寂靜)의 뜻. 사념망상(邪念妄想)이 일어남을 막고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 9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2 하~493 상)
- 9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2 하~493 상). 이 삼인(三人)의 전거(典據)는 『유가사지론』 권28(大正藏30, p.436 중)에 있는 것을 참조.
- 98)이혹(二惑)의 하나. 혹은 사혹(思惑)이라고도 한다. 세간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번뇌를 말한다.
- 99)견도소단(見道所斷). 곧 삼단(三斷)의 하나로, 견도(見道)하는 위(位)에서 끊는 번뇌. 견혹(見惑)을 말한다.
- 100)행업(行業)과 과보(果報). 수행과 그것으로 인하여 불러오는 과보, 곧 결과를 말한다.
- 101)성문사과의 하나인 일래과(一來果)를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지위를 말한다. 욕계의 수혹(修惑) 9품 가운데 위 6품의 번뇌를 끊는 자리이다.
- 102)사향(四向)의 하나. 일래과(一來果)의 성자(聖者)가 더 나아가 불환과(不還果)에 이르려고 욕계(欲界)의 제칠품(第七品)ㆍ제팔품(第八品) 수혹(修惑)을 끊은 지위. 이것이 불환과로 향하는 길이므로 불환향이라고 한다.
- 10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2 하~493 상)
- 104)존재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네 가지의 공(空). 법상공(法相空)ㆍ무법공(無法空)ㆍ자법공(自法空)ㆍ타법공(他法空)을 말한다.
- 10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2 하~493 상)
- 10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2 하~493 상)
- 10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2 하~493 상)
- 10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2 하~493 상)
- 109)견수(見修)는 견사(見思)라고도 한다. 우주의 진리가 판명되지 않은 미혹인 견혹(見惑)과 낱낱 사물에 대한 진상이 판명되지 않는 사혹(思惑)을 말한다.
- 11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2 하~493 상)
- 11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2 하~493 상)
- 11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2 하~493 상)
- 11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2 하~493 상)
- 11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2 하~493 상)
- 11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2 하~493 상)
- 116)혜해탈(慧解脫)은 아라한의 하나로 번뇌의 더러움이 없는 진지(眞智)로써 번뇌의 장애를 끊고 얻는 경계를 말한다.
- 117)구해탈(俱解脫)은 정력(定力)과 진지력(眞智力)으로 번뇌장(煩惱障)과 해탈장(解脫障)을 함께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 118)팔해탈은 8종의 관념으로, 이 관념에 의하여 오욕(五欲)의 경계를 등지고 그 탐하여 고집하는 마음을 버리므로 배사(背捨)라 하고, 또 이것으로 말미암아 삼계(三界)의 번뇌를 끊고 아라한과를 증득하므로 해탈이라고 한다.
- 11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12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12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12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12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12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12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12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127)삼종득(三種得)의 하나. 큰 소가 앞에 가면서 여러 소를 이끌어 데리고 가는 것처럼 능득(能得)이 앞에 서서 소득(所得)의 법을 이끌어 옴을 말한다. 중생들이 선악(善惡)의 모든 법을 얻은 것은 이 법전득에 의한 것이니, 선악의 법은 힘이 강하므로 법이 현재의 위에 오기 전에 이 법을 얻게 된다. 무기(無記)의 모든 법은 모두 힘이 약하므로 이 득이 없다.
- 128)삼종득의 하나. 그림자가 실체를 따르듯이 능득(能得)과 소득(所得)의 법이 함께 오는 것을 말한다. 무기(無記)의 모든 법은 대개 힘이 약해서 법전득(法前得)ㆍ법후득(法後得)이 모두 없고, 오직 법구득에 의하여 내 몸에 얻어진다.
- 129)삼종득의 하나. 송아지가 어미를 따라가는 것같이 능득(能得)이 소득법(所得法)의 뒤에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선악의 모든 법이 과거로 멸하여 간 뒤에도 그 모든 법을 내 몸에서 얻는 것은 이것이 법후득에 의하였기 때문이다.
- 130)원문에는 ‘말(末)’이라고 하였지만, ‘미(未)’라고 고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 131)보살수행의 계위(階位)인 오십이위(五十二位)에서 십지(十地) 이전의 십회향(十廻向)ㆍ십행(十行)ㆍ십주(十住)ㆍ십신(十信) 등을 말한다.
- 132)유식종(唯識宗)에서 쓰는 말이다. 우주를 개발(開發)하는 근본 마음을 말한다. 곧 우리 마음의 주재(主宰)라고 할 제팔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이 갖추고 있는 마음의 세력 또는 마음의 작용을 종자(種子)라 하고, 이 종자가 일체 만상을 개발하는 것을 현행이라고 한다. 혹은 현행법의 준말로, 종자에서 개발하여 현행하는 일체만상을 말하기도 한다.
- 133)보살의 수행하는 계단인 오십이위(五十二位) 가운데 십지위(十地位)의 첫 계단, 곧 환희지(歡喜地)이다.
- 134)대승(大乘)에서는 주관의 인지(認知)하는 작용, 곧 마음에 비친 객관의 영상(影像)을 인식하는 주관의 작용을 말한다. 소승(小乘)에서는 주관의 인식 대상, 곧 객관의 사물이 주관인 마음 위에 비친 영상을 말한다.
- 13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3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37)복은 제복(制伏). 번뇌를 제복하여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복혹(伏惑)이라고 한다.
- 138)분위차별(分位差別). 곧 차별한 범위, 또는 상당한 위치를 말한다.
- 13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4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41)제팔식(第八識). 이 식(識)이 일체 여러 법의 근본이 되므로 이렇게 말한다.
- 142)제구지(第九地)보살이 최후에 번뇌장과 소지장의 습기를 끊고 성도(成道)하는 지위를 말한다.
- 143)『성유식론(成唯識論)』(大正藏31, p.48 하)
- 144)『화엄오십요문답』 권상 「제이십오심의식의(第二十五心意識義)」(大正藏45, p.523 상). 또한 『공목장(孔目章)』 권1, 「명난품초립유식장(明難品初立唯識章)」(大正藏45, p.546 중~하)에도 있다.
- 145)네 가지 번뇌. 곧 아치(我癡)ㆍ아견(我見)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를 가리킨다.
- 146)인도 승려로 유식(唯識) 십대론자(十代論者)의 한 명이다. 세친(世親)보살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의 석론(釋論)을 짓고, 『구사(俱舍)』의 석론을 지어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을 반박하였다. 특히 인명(因明)에 능하였다.
- 147)인도 승려로 유식(唯識) 십대론자(十代論者)의 한 명이다.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교법을 크게 선양하였다. 29세 이후에는 대보리사(大菩提寺)에 있으면서 선관(禪觀)을 닦는 여가에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의 해석서를 지어서 세친(世親)의 종의(宗義)를 밝혔고, 32세에 죽었다.
- 14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4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5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5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5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5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5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5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5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5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58)『오교장』 권2, 소전차별 수행소의신(大正藏45, p.491 중)
- 15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6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6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6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6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64)진제(眞諦)역,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권14(大正藏31, p.261 상)
- 16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중)
- 16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6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6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6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7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71)보고 듣고서 얻는 지혜인 문혜(聞慧), 고찰하여 얻는 지혜인 사혜(思慧), 고찰을 마치고 입정(入定)한 뒤에 수득(修得)하는 지혜인 수혜(修慧)를 가리킨다.
- 172)오위(五位)의 하나. 무분별지(無分別智)가 생겨서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인 진여의 이치를 환하게 아는 지위를 말한다.
- 173)유식(唯識)에서 일체 만법(萬法)은 유식의 변현(變現)이라고 하는 이치를 관수(觀修)하는데 오위(五位)를 세운 중에 제사계위(第四階位)이다. 앞의 통달위(通達位)에서 공무아(空無我)의 진리를 관한 뒤에 다시 수습하여 온갖 장애를 끊는 지위로 삼학(三學)의 수도(修道)에 해당한다. 곧 초지(初地)의 주심(住心)에서 제십지(第十地)의 출심(出心)까지, 이 기간에 십바라밀(十波羅蜜)의 수행을 하면서 십중(十重)의 장애를 끊고 십종(十種)의 진여를 증득하는 지위를 말한다.
- 174)오위(五位)의 하나. 모든 번뇌를 끊어 없애고 진리를 증득하여 최종의 불과(佛果)에 도달한 지위로 청정하고 위없고 지극한 자리이다.
- 17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7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7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7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7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8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8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중)
- 182)『오교장』(五敎章) 권2, 소전차별 심식차별(所銓差別 心識差別)에 “설훈등실개즉공(說熏等悉皆卽空)”(大正藏45, p.488 하)라고 하였다.
- 183)사장(四障)의 하나. 중생이 탐ㆍ진ㆍ치 등의 미혹으로 말미암아서 심성(心性)을 더럽히고, 정도(正道)를 장애하는 것을 말한다.
- 18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중~494중)
- 18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상)
- 18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중~494중)
- 18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중~494중)
- 18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중~494중)
- 18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중~494중)
- 190)『오교장』 권1, 건립승 동교일승(建立乘 同敎一乘)(大正藏45, p.479 상)
- 191)생사유전(生死流轉)이 쉴 새 없는 미계(迷界)를 셋으로 분류한 것을 가리킨다. 곧 욕계ㆍ색계ㆍ무색계 등이다. 이 삼계를 6도(道)ㆍ25유(有)ㆍ9지(地)로 나누기도 한다.
- 192)번뇌의 주체, 번뇌의 여훈(餘熏)을 습기(習氣)라 함에 대하여 그 주체를 정(正)이라 하고, 번뇌는 중생을 몰아서 삼계(三界)에 유전(流轉)하게 하므로 사(使)라고 한다.
- 193)삼현(三賢)은 소승과 대승에 따라 구별이 있다. 곧 소승은 오정심위(五停心位)ㆍ별상념주위(別相念住位)ㆍ총상념주위(總相念住位)를 말한다. 이들은 성위(聖位)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위(方便位)이다. 대승은 보살 수행의 지위인 십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회향위(十廻向位)에 있는 보살을 말한다.
- 194)불ㆍ보살이 이 세상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려고 일생 동안에 나타내어 보이는 여덟 가지의 상(相)을 말한다.
- 195)견사(見思)라고도 한다. 우주의 진리가 판명되지 않은 미혹인 견혹(見惑)과 낱낱 사물에 대한 진상이 판명되지 않는 사혹(思惑)을 말한다.
- 19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중~494 중)
- 19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중~494 중)
- 19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중~494 중)
- 19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중~494 중)
- 200)『탐현기』 권10(大正藏35, p.301 상)
- 201)『탐현기』 권11(大正藏35, p.301 중)
- 20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중~494 중)
- 203)『탐현기』 권10(大正藏35, p.301 상)
- 20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중)
- 205)『탐현기』 권11(大正藏35, p.316 중)
- 206)『탐현기』 권10(大正藏35, p.301 상)
- 207)『탐현기』 권10(大正藏35, pp.300 하~301 상)
- 208)『탐현기』 권11(大正藏35, p.316 중)
- 20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210)원문(原文)에서 알 수 없는 글자이지만 의미는 위와 같이 ‘일(一)’이라고 생각된다.
- 21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4 하~495 상). 각기 다른 자(字)가 보인다.
- 212)법상(法常)의 『섭대승론소』에는 현존하지 않지만, 『신편제종교장총록』 권3에는 “세친석론소십육권혹팔권법상술혹운도증술대감(世親釋論疏十六卷或八卷法常述或云道證述待勘)”(大正藏55, p.1176 중)이라고 하였다. 또한 기(記)에 대해서는 『속고승전(續高僧傳)』 권15(大正藏50, pp.540 하~541 중)에 그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 213)일승장(一乘章) 권5(大正藏12, p.220 상)
- 21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大正藏32, p.577 하)
- 215)『보성론(寶性論)』(大正藏31, p.835 상)
- 216)『승만경(勝鬘經)』 일승장(一乘章) 권5(大正藏12, p.220 상)
- 217)의뢰하는 것에 대하여 의뢰할 바가 되는 것을 말한다.
- 218)의지할 바에 대하여 능히 의지하는 당체를 말한다.
- 219)『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大正藏44, p.65 중)
- 220)곧 근본무명(根本無明)을 말한다. 이것은 그 체(體)가 무지(無智)하고 혼미하여 세간의 자연업지(自然業智)를 장애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지애이다.
- 221)번뇌는 몸과 마음을 번거롭고 어지럽게 하여 진여(眞如) 평등한 이치를 증득할 근본지혜(根本智慧)를 장애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하므로 번뇌애라고 한다. 지말무명(枝末無明)의 육염심(六染心)이다.
- 222)『대승기신론』(大正藏32, p.577 하)
- 223)『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 권하본(卷下本)(大正藏44, p.268 상)
- 224)오주지(五住地)의 하나. 근본무명(根本無明)을 말한다. 무명은 모든 번뇌의 소의(所依)ㆍ소주(所住)가 되고, 또 번뇌를 내는 근본이 되므로 주지(住地)라 한다.
- 225)「일승장」 권5(大正藏12, p.220 상)
- 22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2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2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2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3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3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3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23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3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중)
- 23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36)『인왕반야바라밀경』 권하, 「수지품(受持品) 제7」(大正藏8, p.831 중)
- 237)육종성(六種性)의 하나. 십행(十行)의 보살. 이 지위의 보살은 우주 만유의 본성은 진공(眞空)이라 증득하고도 만유 여러 법을 인정하여 중생을 교화하므로 이렇게 말한다.
- 23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39)육종성의 하나. 십회향(十廻向)의 보살을 말한다. 곧 보살이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올바르게 중도관(中道觀)을 닦으므로 도(道)라고 하고, 능히 불과(佛果)를 낳으므로 종(種)이라고 한다.
- 24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4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4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43)소지장(所知障)을 말한다.
- 24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45)지엄(智儼)의 「입법계품초(入法界品抄)」를 지적하는지 알 수 없다.
- 24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47)오지(五智)의 하나. 체칠식(第七識)을 바꾸어 얻은 무루(無漏) 지혜이니, 통달위(通達位)에서 그 한 부분을 증득하고, 불과에 이르러 그 나머지 부분을 증득한다. 일체 모든 법과 자기나 다른 유정들을 반연하여 평등일여(平等一如)한 이성(理性)을 관하고 차별심을 여의어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을 일으키며, 보살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지혜를 말한다.
- 248)보살수행의 오위(五位) 가운데 가행위(加行位)에서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제일법(世第一法)의 사선근(四善根)을 닦으며, 사심사관(四尋伺觀)ㆍ사여실지관(四如實智觀)을 하여 분별기(分別起)의 번뇌를 끊은 직후에 진지(眞智)를 내어 진여(眞如)를 보는 것이다.
- 249)『오교장』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50)무성(無性) 지음, 『섭대승론석 (攝大乘論釋)』 권9, 피과지분(彼果智分) 11(大正藏31, p.438 상)
- 251)무성(無性) 지음, 『섭대승론석』 권9, 피과지분 11(大正藏31, p.438 상)
- 252)무성(無性) 지음, 섭대승론석 권9, 피과지분 11(大正藏31, p.438 상)
- 25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5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5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3 하~494 상)
- 25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상~중)
- 25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상~중)
- 25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상~중)
- 25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상~중)
- 260)『십지경론』 권2(大正藏26, p.133 상~중)
- 261)인(因)은 과(果)를 내고, 과는 또 인이 되어서 다른 과를 내어 이렇게 인과가 차례로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 262)『탐현기』 권10(大正藏5, pp.296 하~297 상)
- 263)물건이 나서부터 없어지기까지의 상태를 넷으로 나눈 사상(四相)의 하나. 물건이 변하여 달라지는 모양을 말한다.
- 264)본래부터 갖추어 있다는 뜻이다. 아무런 수양을 하지 않고도 선천적으로 본래 있는 성덕(性德)을 말한다.
- 265)수행한 공력에 의하여 생긴다.
- 266)『화엄경소』 권33, 「십지품(十地品)」(大正藏33, p.752 하)
- 26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상~중)
- 268)『유마경』 권상, 「보살품(菩薩品)」 4(大正藏14, p.542 중)
- 269)올바른 이치에 계합하는 성교(聖敎)는 성인(聖人)이 말한 가르침과 교를 말한 전적유문(典籍遺文)을 가리키는데, 그것에 나타나 있는 설을 기준으로 한다면의 뜻이다.
- 270)육종성(六種性)의 하나. 보살수행(菩薩修行)의 계위(階位) 가운데 십주위(十住位) 보살. 이 지위에서는 공관(空觀)을 닦아 견혹(見惑)ㆍ사혹(思惑)을 끊고 이것으로 증과(證果)에 이르는 종자를 삼으므로 이렇게 말한다.
- 271)생공(生空)은 인공(人空), 또는 아공(我空)이라고도 한다. 상일주재(常一主宰)의 뜻을 가진 아(我)가 있다고 하는 주관적 미집(迷執)을 없애기 위하여 공(空)하다고 말한다.
- 272)삼승의 수행하는 지위마다 입심(入心)ㆍ주심(住心)ㆍ출심(出心)의 셋으로 나눈 것을 말한다.
- 273)염오심(染汚心)의 준말. 곧 악(惡)이다. 유부무기(有覆無記)에 의하여 더럽혀진 마음으로 악심(惡心)과 유부무기심(有覆無記心)의 총칭.
- 274)성도(聖道)를 장애하여 선심(善心)을 가리워 버리는 것을 말한다. 번뇌장ㆍ업장ㆍ보장, 혹은 피번뇌장(皮煩惱障)ㆍ육번뇌장(六煩惱障)ㆍ심번뇌장(心煩惱障) 등을 말한다.
- 275)미혹함과 깨달음의 모든 법을 유(有)의 관점으로 변계(遍計)ㆍ의타(依他)ㆍ원성(圓成)으로 나눈 것에 대하여 공(空)의 관점으로 삼무성(三無性)을 세운다. 상무성(相無性)ㆍ생무성(生無性)ㆍ승의무성(勝義無性) 등이다.
- 27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중~하)
- 27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278)화엄종의 교판(敎判)인 오교(五敎) 십종(十宗)에서 오교의 제삼(第三). 곧 시교(始敎)에서 오성(五性)이 각각 다르다고 함에 대하여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한다고 주창. 또 분교(分敎)에서 진여(眞如)는 응연부동(凝然不動)하는 것이라 함에 대하여 일체 만유가 진여를 본체로 하고 연기하는 것이라고 하는 대승종극(大乘終極)의 교를 말한다.
- 279)사사(邪師)ㆍ사교(邪敎)ㆍ사사유(邪思惟) 등에 의지하지 않고 저절로 번뇌가 일어남을 말한다.
- 280)번뇌가 일어나는 데 대하여, 사사와 사교에 의지하거나, 사사유에 의지하여 후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 28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하)
- 28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하)
- 283)사장(四障)의 하나. 중생이 탐(貪)ㆍ진(瞋)ㆍ치(痴) 등의 미혹으로 말미암아서 심성(心性)를 더럽히고, 정도(正道)를 장애하는 것을 말한다.
- 284)삼장(三障)이라고도 한다.
- 285)염불하는 자만이 아미타불의 광명에 섭취되는 이유로서 삼연(三緣)을 말한다. 곧 중생이 입으로 염불을 하고, 부처님께 예배하고 생각하면 부처님은 이를 보고 듣고 알아서 부처님과 중생과의 신(身)ㆍ구(口)ㆍ의(意)에서 계동(契同)함을 친연(親緣)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항상 곁에서 모시고, 견득(見得)하는 자의 앞에 몸을 나타냄을 근연(近緣)이라고 한다. 평생 동안 칭념(稱念)하면 끝없는 옛날부터 지은 죄업을 없애고 죽을 때 성중(聖衆)과 함께 와서 맞아감을 증상연(增上緣)이라고 한다.
- 286)소승과 대승에 따라 구별이 있다. 곧 소승은 오정심위(五停心位)ㆍ별상념주위(別相念住位)ㆍ총상념주위(總相念住位)를 말한다. 이들은 성위(聖位)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위(方便位)이다. 대승은 보살 수행의 지위인 십주ㆍ십행ㆍ십회향위에 있는 보살을 말한다.
- 287)삼단(三斷)의 하나. 수도위(修道位)에서 끊을 법, 곧 수혹(修惑). 유식(唯識)에서는 구생기(俱生起)의 혹(惑) 열여섯 가지를 말한다.
- 288)비교해서 아직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을 말한다.
- 28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중~하)
- 290)진제(眞諦) 역, 『섭대승론석』 권11(大正藏31, p.231 중~하)
- 29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중~하)
- 292)진제 역, 섭대승론석 권11(大正藏31, p.231 중~하)
- 29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중~하)
- 294)수행한 인(因)으로 말미암아 도달하는 부처님의 지위를 말한다.
- 29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중~하)
- 29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중~하)
- 297)원효의 『금광명경소』는 현존하지 않지만, 『신편제종교장총록』 권1의 『금광명경』에는 “소팔권원효술(疏八卷元曉述)”(大正藏55, p.1170 중)이라고 하였다.
- 298)『대승기신론의기』 권중 본(卷中本)(大正藏44, pp.258 하~259 상)
- 299)심식(心識)의 더럽고 청정함으로 말미암아 세우는 세 가지 식을 말한다.
- 30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중~하)
- 301)중생이 닦는 행법(行法)에 장애되는 네 가지를 가리킨다. 혹장(惑障)ㆍ업장(業障)ㆍ보장(報障)ㆍ견장(見障)을 말한다. 또는 일천제(一闡提)ㆍ외도(外道)ㆍ성문(聲聞)ㆍ연각(緣覺)의 4 인(人)에 대한 네 가지 장애를 말한다. 곧 천제불신장(闡提不信障)ㆍ외도착아장(外道著我障)ㆍ성문외고장(聲聞畏苦障)ㆍ연각사심장(緣覺捨心障) 등이다.
- 302)번뇌의 주체. 번뇌의 여훈(餘熏)을 습기라 함에 대하여 그 주체를 정(正)이라 하고, 번뇌는 중생을 몰아서 삼계(三界)에 유전(流轉)케 하므로 사(使)라고 한다.
- 303)유식(唯識)에서 가행위(加行位)의 사선근(四善根)을 닦을 때 그 체(體)인 명득정(明得定)ㆍ명증정(明增定)ㆍ인순정(印順定)ㆍ무간정(無間定)을 말한다.
- 304)대승의 대열반에 갖추어 있는 네 가지 덕. 곧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말한다.
- 305)무후생사(無後生死)라고도 한다. 칠종생사(七種生死)의 하나. 등각위(等覺位)에 있는 보살. 이 보살은 최후의 일품무명(一品無明)을 깨뜨리고,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불과(佛果)에 들어가 다시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 30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4 하~495 상)
- 30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4 하~495 상)
- 30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4 하~495 상)
- 30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4 하~495 상)
- 31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4 하~495 상)
- 31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4 하~495 상)
- 31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4 하~495 상)
- 31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4 하~495 상)
- 314)『십지경론』 권1(大正藏26, p.126 상~중)
- 315)무착(無著) 조. 진제(眞諦) 역, 『섭대승론』 권하(大正藏31, p.127 상), 세친(世親) 조. 진제 역, 『섭대승론석』 권11(大正藏31, pp.234 하~235 상)
- 316)『탐현기』 권9(大正藏35, p.280 상~하)
- 31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4 하~495 상)
- 318)세친 조. 진제 역, 『섭대승론석』 권10(大正藏31, pp.225 하~227 상)
- 319)법상(法常)의 『섭대승론소』에는 현존하지 않지만, 『신편제종교장총록』 권3에는 “세친석논소십육권 혹팔권 법상술 혹운 도증술 대감(世親釋論疏十六卷 或八卷 法常述 或云 道證述 待勘)”(大正藏55, p.1176 중)이라고 하였다. 또한 기(記)에 대해서는 『속고승전』 권15(大正藏50, pp.540 하~541 중)에 그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 320)칠종생사(七種生死)의 하나. 십지(十地) 중 환희지(歡喜地) 이후의 보살이 진리를 인(因)으로 하고, 이것을 하는 무루(無漏)의 지혜를 연(緣)으로 하여 무명번뇌를 끊었으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시 생사(生死)하는 모양을 나타낸다.
- 321)유위법(有爲法)을 말한다. 생멸변화하는 유위법은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뜻이다.
- 322)오주지(五住地)의 하나. 근본무명(根本無明)을 말한다. 무명은 모든 번뇌의 소의(所依)ㆍ소주(所住)가 되고, 또 번뇌를 내는 근본이 되므로 주지(住地)라 한다.
- 32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4 하~495 상)
- 324)사무색정(四無色定). 곧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ㆍ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ㆍ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ㆍ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말한다.
- 325)물질과 정신. 곧 모든 법에서는 색심(色心), 중생에서는 심신(心身)이라고 한다.
- 32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상~중)
- 32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4 하~495 상)
- 328)오온(五蘊)이 잠시 화합한 것을 즉온이라고 하고, 화합하지 않고 떨어진 것을 이온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오온이 잠시 화합하여 존재한 이 몸을 그대로 아(我)라고 집착하는 망견(妄見)을 즉온아(卽蘊我)라고 한다.
- 329)색법(色法)과 대립된다. 곧 색법은 물질을 말하는데, 심법은 우주 만유를 색(色)과 심(心)의 둘로 분류할 때는 심왕(心王)ㆍ심소(心所)를 말하고, 오위(五位)로 분류할 때는 심왕만을 말한다.
- 330)보살수행의 차례인 오위(五位) 가운데 첫 위. 십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회향(十廻向)의 삼심위(三十位)에서 초주(初住)부터 제십회향(第十廻向)의 주심(住心)까지를 자량위라고 한다.
- 331)보살수행의 차례인 오위(五位)의 하나. 앞의 자량위에서 무상보리(無上菩提)를 구하기에 필요한 자량인 여러 가지 공덕을 이미 닦았으므로, 이 위(位)에서 견도(見道)에 들어 유식의 성(性)에 머물기 위하여 특별히 노력하는 것이므로 가행위라고 한다.
- 332)간격 또는 간잡(間雜)이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마음이 섞이어 일심(一心)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는 시간ㆍ공간에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 333)번뇌 때문에 사이가 떨어져[間隔] 있지 않으므로 무간(無間)이라고 한다.
- 33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중~하)
- 33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중~하)
- 33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중~하)
- 33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3 상)
- 33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중~하)
- 33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중~하)
- 340)『신편제종교장총록』 권1에 있는 “입법계품초일권 지엄술(入法界品抄 一卷 智儼述)”(大正藏45, p.1167 중)이라고 생각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저자(著者)를 알 수 없는 『법계도기총수록』(大正藏45, pp.716 상~767 하)에는 “입법계품초운(入法界品抄云)”이라고 하여 3회 정도 인용하고 있다.
- 34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중~하)
- 342)견제도(見諦道)라고도 한다. 온갖 지식으로 잘못 아는 소견을 여읜 자리이다.
- 343)견도위(見道位)에서 온갖 지적(知的)인 미혹을 벗어나고, 다음에 정(情)ㆍ의(意)로부터 일어나는 온갖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려는 수양을 쌓는 기간을 말한다.
- 34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상)
- 34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중~하)
- 34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중~하)
- 34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중~하)
- 34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중~하)
- 34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하)
- 350)『공목장』 권3, 「제육회십지품초명십지장(第六會十地品初明十地章)」(大正藏45, p.561 중)
- 35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5 하)
- 352)삼법(三法)의 하나. 또 신(信)을 더하여 사법(四法)의 하나라고도 한다. 신심(信心)과 수행한 공이 나타나서 진리에 계합(契合)함을 말한다.
- 35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5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5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5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5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58)만물의 일정 불변하는 본 모양. 일체 차별 현상의 근본. 곧 본체를 말한다.
- 359)모든 사상(事象)과 도리(道理)에 대하여 그 시비사정(是非邪正)을 분별 판단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 36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6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6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6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6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65)『화엄경』 권33, 불소상광명공덕품(佛小相光明功德品) 30(大正藏9, p.607 상)
- 36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67)『화엄경』 권33, 불소상광명공덕품 30(大正藏9, p.606 중)
- 368)본래부터 갖추어 있다는 뜻이다. 아무런 수양을 하지 않고도 선천적으로 본래 있는 성덕(性德)을 말한다.
- 369)만유는 다 각각 저마다 본성에 선악, 미오(迷悟) 등 여러 가지 성능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 370)『수현기(搜玄記)』 권3(大正藏35, p.48 상)
- 371)『수현기』 권3(大正藏35, p.48 상)
- 372)『수현기』 권3(大正藏35, p.48 상)
- 373)보현덕(普賢德)은 보현보살의 대자비한 행덕(行德)이란 뜻이다. 보살이 자비심으로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덕. 곧 중생을 교화하는 행덕을 가리킨다.
- 374)『탐현기』 권10(大正藏35, p.300 상)
- 375)『수현기』 권3 하(大正藏35, pp.62 하~63 상)
- 376)『수현기』 권3 하(大正藏35, pp.62 하~63 상)
- 377)『화엄경』 권35, 「보왕여래성기품(寶王如來性起品)」(大正藏9, pp.623 상~624 상)
- 378)『화엄경』 권25, 「십지품」 제6지(大正藏9, p.558 중), 『십지경론』 권8, 「십지품」(大正藏26, p.168 상)
- 379)『화엄경』 권25, 「보왕여래성기품」(大正藏9, p.626 중)을 가리키는 듯하다.
- 380)겁초(劫初) 이래의 곡(穀)이라고 말한 예는 아래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간의 견해로써 부정되는 것이 많다. 『중론(中論)』, 「관인연품(觀因緣品)」(大正藏30, p.2 상)
- 381)여래장은 미계(迷界)에 있는 진여. 곧 진여가 바뀌어 미계의 사물이 된 때는 그 본성인 여래의 덕이 번뇌망상에 덮이게 된 점으로 여래장이라고 한다.
- 382)『삼무성론(三無性論)』 권상(大正藏31, p.870 하)
- 383)『삼무성론』 권상(大正藏31, p.872 중)
- 384)경험적 인식을 초월한 상항불역(常恒不易)ㆍ보편평등(普遍平等)의 진여를 말한다.
- 385)모든 사상(事象)과 도리(道理)에 대하여 그 시비사정(是非邪正)을 분별 판단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 386)『탐현기』 권15(大正藏35, p.392 상)
- 387)『기신론의기별기』(大正藏44, p.289 상)
- 388)근본각체(根本覺體). 온갖 유정(有情)ㆍ무정(無情)에 통한 자성의 본체로써 갖추어 있는 여래장진여(如來藏眞如). 곧 우주 법계의 근본 본체인 진여의 이체(理體)를 말한다.
- 389)『화엄경』 권33, 「보현보살행품」(大正藏9, p.607 중)
- 390)『화엄경』 권32, 「불소상광명공덕품(佛小相光明功德品)」(大正藏9, p.606 상)
- 39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9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93)『화엄경』에서 수행하는 계급에 따라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 등을 세우고 이 차례대로 지나서 마지막의 이상경(理想境)인 불지(佛地)에 이른다고 보는 관찰방법을 말한다.
- 39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95)『탐현기』 권16(大正藏35, p.402 중)
- 39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397)미계(迷界)의 원인인 미혹을 끊어 없애는 것을 가리킨다.
- 398)이 『도신장』의 인용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지만, 같은 문제를 논한 부분은 『법계도기총수록』 권상(大正藏45, p.792 하)에서 보인다.
- 399)이교(二敎)의 하나. 화엄종에서 말하는 것으로, 일승교(一乘敎)는 삼승교(三乘敎)와 아주 딴판이므로 이렇게 이름한다. 『화엄경』에서 말한 사사물물(事事物物)의 원융상즉(圓融相卽)을 말한 법문은 삼승교에서는 밝히지 못하고, 부처님의 깨달은 경계를 그대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 교의(敎義)의 입각지(立脚地)는 삼승과는 훨씬 떨어지므로 『화엄경』 법문을 별교일승이라고 한다.
- 400)『수현기』 권1 하(大正藏35, p.27 하)
- 401)소승과 대승에 따라 구별이 있다. 곧 소승은 오정심위(五停心位)ㆍ별상념주위(別相念住位)ㆍ총상념주위(總相念住位)를 말한다. 이들은 성위(聖位)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위(方便位)이다. 대승은 보살 수행의 지위인 십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회향위(十廻向位)에 있는 보살을 말한다.
- 402)『수현기』 권2(大正藏35, p.27 하)
- 403)『수현기』 권2, 십주품 11(大正藏35, p.33 중~하)
- 404)『수현기』 권2(大正藏35, p.38)
- 405)『수현기』 권3(大正藏35, p.42 하)
- 406)『수현기』 권3(大正藏35, p.48 상)
- 407)『수현기』 권2(大正藏35, p.27 하)
- 408)일체 유정(有情)ㆍ비정(非情)에 통하여 그 자성 본체로서 갖추어 있는 여래장진여(如來藏眞如)에 대하여 그 본각(本覺)이 수행의 공(功)을 가자(加藉)하여 깨달아 증득한 각을 말한다.
- 409)『수현기』 권2(大正藏35, p.47 하)
- 410)『수현기』 권1(大正藏35, p.27 하)
- 411)『수현기』 권1(大正藏35, p.27 하), 『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상~중)
- 412)『법계도기총수록』 권상(大正藏45, p.729 하)
- 41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41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41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494 중)
- 41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41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418)『화엄경』 권34(大正藏9, p.607 중)
- 419)한편 ‘★★’이라고 부르는 기호에 대해서는 전거미상(典據未詳)이다. 『오십요문답』에 이 부분이 기재되어 있는 듯하다. 『오십요문답』 후권(後卷), 삼십팔장의보현품초석(三十八障義普賢品初釋)(大正藏45, p.528 중~하)
- 420)명목의 수. 법수(法數)와 같은 말이다. 삼계(三界)ㆍ오온(五蘊)ㆍ오위(五位) 등과 같이 수(數)를 가진 법문(法門)의 수량을 말한다.
- 421)『오십요문답』 후권, 삼십구일승별장의역보현품초석(三十九一乘別障義亦普賢品初釋)(大正藏45, p.528 하)
- 422)『오십요문답』 후권, 삼십구일승별장의역보현품초석(大正藏45, p.528 하)
- 423)‘초이문(初二門)’이 『오교장』 본문의 어떤 문장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이 문(門)’이 ‘이승회심(二乘廻心)’과 ‘급(及)’에 연결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음과 ‘문(門)’이 소전차별(所詮差別)의 십문(十門)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심식차별(心識差別)은 “약약동교 즉섭전제교소설심식 하이고 시차방편고(若約同敎 卽攝前諸敎所說心識 何以故 是此方便故)”라고 하였고, 종성차별(種性差別)은 “제삼약일승유이설 일섭전제교소명종성 병개구족 주반성종 이동교고 섭방편고(第三約一乘有二說 一攝前諸敎所明種性 並皆具足 主伴成宗 以同敎故 攝方便故)”라고 하였으며, 행위차별(行位差別)은 “약의원교자유이의 일섭전제교소명행위 이시차방편고(若依圓敎者有二義 一攝前諸敎所明行位 以是此方便故)”라고 하였다. 이 삼문(三門)에는 ‘섭방편(攝方便)’이 보인다. 수행시분(修行時分)과 수행소의신(修行所依身)의 원교(圓敎)를 서술한 절에서는 방편에 의거하여 전사교(前四敎)의 설을 융섭함을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초삼문(初三門)’의 잘못이다.
- 42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42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426)소전차별, 이승회심(二乘廻心)은 다음과 같이 나눈다. “제칠이승회심자 유육종설 일혹일체이승개무회심여소승중설 이혹일체이승개회심차약종교설삼혹일체이승역회역불회차약시교인이승설 사혹비회비불회차종돈교설오혹합구전사설차약일승섭방편설 육혹구절전오차병약일승별교설(第七二乘廻心者 有六種說 一或一切二乘皆無廻心如小乘中說 二或一切二乘皆廻心此約終敎說三或一切二乘亦廻亦不廻此約始敎引二乘說四或非廻非不廻此終頓敎說五或合具前四說此約一乘攝方便說 六或俱絶前五此幷約一乘別敎說)”(大正藏45, p.496 상~하)
- 42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단혹분제(大正藏45, pp.495 하~496 상)
- 428)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하여 마음을 고치는 것을 말한다. 회심향대(廻心向大)ㆍ회대입일(廻大入一)과 같은 뜻으로, 삼승의 마음을 고쳐서 일승에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 429)내훈에서 훈(熏)은 어떤 법의 세력을 다른 법에 스며 따르게[熏附] 하는 것을 말한다. 중생의 마음에 있는 본각(本覺) 자체가 안으로 무명(無明)에 작용하여 망심(妄心)을 없애고 진여 본체에 돌아가려는 작용을 뜻한다.
- 430)내인(內因)에 반대되는 것. 밖으로부터 힘을 주어 사물의 성립을 돕는 기운. 곧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 431)법화칠유(法華七喩)의 하나. 방편교의 깨달음에 비유한 것이다.
- 432)『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所詮差別 二乘廻心)(大正藏45, p.496 상)
- 433)『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상)
- 434)『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상)
- 435)『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상)
- 436)『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상)
- 437)『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상)
- 438)『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상)
- 439)심식(心識)이 일어나서 활동하는 때, 곧 유식(唯識)에서는 제육식(第六識)이 함께 일어나고, 일어나지 아니함에 따라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을 말하고, 구사(俱舍)에서는 육식(六識) 만을 세우고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느 심식이든지 작용하기 비롯한 때를 유심위(有心位)라고 한다.
- 440)『유가론』 권51(大正藏30, p.582 상)
- 441)『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상)
- 442)자종(自宗)의 교법이 아닌 교법을 말한다.
- 443)『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상~중)
- 444)『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상~중)
- 445)『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권상(大正藏44, p.244 중)
- 446)『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상~중)
- 447)『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상~중)
- 448)『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상~중)
- 449)결정(決定)은 종자육의(種子六義) 가운데 하나로서 성결정(性決定)을 말한다. 이것은 선(善)은 선한 현상이고, 악(惡)은 악한 현상을 발생하는 공능(功能)이 결정되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 450)부정성(不定性). 오성(五性)의 하나. 성문ㆍ연각ㆍ보살의 삼승(三乘) 종자를 구비한 것이어서 성문이 될는지, 연각이 될는지, 아니면 보살이 될는지 아무 데도 결정되지 않은 기류(機類)를 말한다.
- 451)대법은 대승(大乘)을 말한다.
- 452)『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하)
- 453)『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하)
- 454)『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하)
- 455)『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하)
- 456)『탐현기』 권18(大正藏35, p.442 중~하)
- 457)『불지경론』 권2(大正藏26, p.298 하)
- 458)『화엄경부사의불경계분(華嚴經不思議佛境界分)』 권1(大正藏10, p.905 중)
- 459)『탐현기』 권18(大正藏35, p.442 중~하)
- 460)『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하)
- 461)『탐현기』 권18(大正藏35, p.442 중~하)
- 462)『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하)
- 463)『탐현기』 권18(大正藏35, p.442 중~하)
- 464)『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하)
- 465)『탐현기』 권18(大正藏35, p.442 중~하)
- 466)『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하)
- 467)『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하)
- 468)『탐현기』 권18(大正藏35, p.442 중~하)
- 469)『탐현기』 권18(大正藏35, p.442 중~하)
- 470)『탐현기』 권1(大正藏35, p.117 중)
- 471)부처의 교법을 받은 사람. 곧 교화를 받을 기류(機類)를 말한다.
- 472)『탐현기』 권18(大正藏35, p.447 상)
- 473)보리류지(菩提流支) 역, 『불설문수사리순행경(佛說文殊師利巡行經)』에 “이시문수사리동자기설차법 오백비구문이회면 기회면이 후향문수사리동자설여시언 문수사리설여시법비아능해(爾時文殊師利童子旣說此法 五百比丘聞已廻面 旣廻面已 後向文殊師利童子說如是言 文殊師利說如是法非我能解)”(大正藏14, p.511 상)이라고 하였고, 또한 두나굴다(豆那掘多) 역, 불설문수시리행경(佛說文殊尸利行經)에도 “문수시리보살언 여시여시존자사리불언 문수시리 여약여시자 하고차오백비구종좌이기 훼자비방인자소설 현어불전고성창언 불수견문수시리역불수문문수시리명 시방역수 사소유문수일체주처개불수왕 창시언이출중이거(文殊尸利菩薩言 如是如是尊者舍利弗言 文殊尸利 汝若如是者 何故此五百比丘從坐而起 毁訾誹謗仁者所說 現於佛前高聲唱言 不須見文殊尸利亦不須聞文殊尸利名 是方亦須 捨所有文殊一切住處皆不須往 唱是言已出衆而去)”(大正藏14, p.513 중~하)라고 하였다.
- 474)노지(露地)는 아무 것도 덮인 것 없이 드러난 땅을 말한다.
- 475)『법화경』 「비유품」에 있는 비유. 또는 보살승(菩薩乘)을 비유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는 불승(佛乘)을 비유한 것이라고도 한다.
- 476)『오교장』 권3, 소전차별 수행소의신(所詮差別 修行所依身)(大正藏45, p.492 상)
- 477)주관인 심식(心識)이 객관인 대상에 작용하여 그 모양을 분별하고 요해(了解)하는 것을 말한다.
- 478)『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하)
- 479)『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하)
- 480)『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하)
- 481)『오교장』 권3, 소전차별 이승회심(大正藏45, p.496 하)
- 482)지엄의 『공목장』 권4, 제팔회입법계품초변회심장(第八會入法界品初辨廻心章)(大正藏45, pp.583 중~584 상)
- 48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所詮差別 佛果義湘)(大正藏45, p.496 하)
- 48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6 하)
- 48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6 하)
- 486)『불성론』 권1, 연기분(緣起分) 1(大正藏31, p.787 하)
- 48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6 하)
- 488)원문에는 ‘이(貳)’라고 하였지만,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 의하여 ‘전(前)’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 48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6 하)
- 49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6 하)
- 49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6 하)
- 492)진실한 지혜에 의하여 본래 자성(自性)이 청정한 진여법신(眞如法身)을 증득하여 나타난 모양이라는 뜻이다. 곧 중생의 망염(妄染)이 없어진 자리에 나타나는 진여의 상을 말한다.
- 493)진실한 지혜로써 증득한 진여본각(眞如本覺) 위에 갖추어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교화하고 이익되게 하는 부사의한 작용을 말한다.
- 494)물이 바람이란 연(緣)을 따라 물결이 일어남과 같이 다른 영향을 받아 동작함을 가리킨다.
- 49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상)
- 49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상)
- 49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상)
- 498)원문(原文)에는 글자를 알 수 없지만, ‘비(非)’라고 생각된다.
- 49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상)
- 50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상)
- 50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상)
- 50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
- 50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
- 50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
- 50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
- 50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
- 507)불과(佛果)의 덕이 넓고 큰 것을 바다에 비유한 말이다.
- 508)『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
- 50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
- 51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
- 511)『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
- 512)『혜상보살경』 권하(大正藏12, p.164 상)
- 513)수미산을 중심으로 사방에 사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대철위산(大鐵圍山)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을 일 세계 또는 일 사천하라고 한다. 사천하를 천 개 합한 것을 일 소천세계(小千世界), 소천세계를 천 개 합한 것을 일 중천세계(中千世界), 중천세계를 천 개 합친 것을 일 대천세계(大千世界)라고 한다. 일 대천세계에는 소천ㆍ중천ㆍ대천의 세 종류의 천이 있으므로 일대삼천세계(一大三千世界)라고 한다. 혹은 삼천대천세계라고 한다.
- 514)부처를 찬탄하는 말, 왕은 가장 수승하고 자재하다는 뜻이다. 부처는 법문(法門)의 주인이며, 중생을 교화함에 자유자재한 묘용(妙用)이 있으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 51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
- 516)『중본기경(中本起經)』 권하, 「불식마맥품(佛食馬麥品)」 13(大正藏4, pp.162 하~163 상)
- 517)『흥기행경(興起行經)』 권하, 「불설식마맥숙연경(佛說食馬麥宿緣經)」 9(大正藏4, p.172 상~하)
- 518)『중본기경(中本起經)』 권하, 「불식마맥품(佛食馬麥品)」 13(大正藏4, pp.162 하~163 상)
- 51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
- 52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하)
- 521)정진 노력하여 수행한 공으로 얻은 만덕이 원만한 부처를 말한다. 보신(報身)과 같다.
- 522)『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하)
- 523)대승ㆍ소승의 무학위(無學位). 곧 부처와 아라한이 갖추어 가진 다섯 종류의 공덕을 말한다.
- 52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하)
- 525)『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하)
- 52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과의상(大正藏45, p.497 중~하)
- 527)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다. 육욕천(六欲天)의 하나. 욕계의 가장 높은 데에 있는 하늘인데, 그 욕계천의 임금인 마왕이 있는 곳을 타화천궁이라고 한다. 이 하늘은 남이 변해 나타내는 낙사(樂事)를 자유로 자기의 쾌락으로 삼는 까닭에 타화자채천이라고 한다. 이 하늘의 남녀는 서로 마주보는 것만으로 음행을 만족하고, 아들을 낳으려는 생각만 내면 아들이 무릎 위에 나타난다고 한다.
- 528)보토(報土)는 애써서 수행한 결과로 얻은 불토(佛土). 보신(報身)이 있는 국토를 말한다. 아미타불의 정토는 법장비구 때 세운 원력과 그 소원을 실천 수행하여 얻은 국토이므로 보토라고 한다.
- 529)삼종불경(三種佛境)의 하나이다. 교화할 만한 경토(境土)라는 뜻이다. 곧 시방의 국토는 다 부처님이 교화할 만한 경계라는 뜻이다.
- 530)오토(五土)의 하나. 여래의 맑고 깨끗한 법성법신(法性法身)이 거주하는 국토(國土). 진여법성(眞如法性)으로 체(體)를 삼는다. 법성신(法性身)ㆍ법성토라고 하지만, 그 체는 본래 일진여(一眞如)로써 다만 증득하는 것으로, 법체를 법성토라고 하고, 증득하는 각상(覺相)을 법성신이라고 한다. 신(身)과 토(土)가 서로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모두 색상(色相)을 떠나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으면서 허공과 같이 곳곳마다 두루 가득찬 것을 말한다.
- 531)사국토(四國土)의 하나. 부처님의 인위수행(因位修行)에 따라 나타나는 주변무여(周遍無餘)의 정토(淨土). 스스로 그 법락을 받는 불신을 가리킨다.
- 532)이는 타수용토(他受用土)를 말한다. 타수용토는 사토(四土)의 하나로, 타수용신(他受用身)이 있는 정토(淨土)를 말한다. 초지 이상의 성자(聖者)로 하여금 대법락(大法樂)을 받고, 수승(殊勝)한 행을 닦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장엄한 이타(利他)의 국토를 말한다. 흔히 보토(報土)라 하며, 또는 이것을 화토(化土)에 붙여 해석하기도 한다.
- 533)마혜수라(摩醯首羅)는 대자재천(大自在天)으로 번역하는데, 색계의 정상에 있는 천신(天神)의 이름이다. 이 하늘을 예배하는 외도를 마혜수라 논사(論師)라고 한다.
- 534)교화를 받는 사람을 말한다.
- 535)『오교장』 권3, 소전차별 섭화분제(大正藏45, pp.497 하~498 상)
- 536)『오교장』 권3, 소전차별 섭화분제(大正藏45, pp.497 하~498 상)
- 537)『오교장』 권3, 소전차별 섭화분제(大正藏45, pp.497 하~498 상)
- 538)『오교장』 권3, 소전차별 섭화분제(大正藏45, pp.497 하~498 상)
- 539)『화엄오십요문답』 권상, 칠불모권속의후마야중석(七佛母眷屬義後摩耶中釋)(大正藏45, p.520 상~중)
- 540)범망경 권상(大正藏24, p.997 하
- 541)『오교장』 권3, 소전차별 섭화분제(大正藏45, pp.497 하~498 상)
- 542)『화엄경』 권4, 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大正藏9, p.419 상)
- 543)『오교장』 권3, 소전차별 섭화분제(大正藏45, pp.497 하~498 상)
- 544)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말한다. 석가모니불의 진신(眞身)인 비로자나불의 정토(淨土)이다.
- 545)주관인 지혜와 그 대상인 객관의 경계를 말한다.
- 546)오법(五法)의 하나. 정지(正智)에 계합하는 이체(理體), 곧 진여. 만유 제법의 이체는 동일 평등하므로 여(如)이다. 한 여에 일법계만차(一法界萬差)의 제법을 갖추어 어느 것이든지 체로 말하면 여이고, 여의 뜻이 하나만이 아니므로 여여라고 한다.
- 547)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법락(法樂)을 수용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 548)닦아 얻은 공덕 이익이나 법락(法樂)을 스스로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 549)『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신개합(大正藏45, pp.498 중~499 상)
- 550)『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신개합(大正藏45, pp.498 중~499 상)
- 551)『합부금광명경(合部金光明經)』 권1, 「삼신분별품(三身分別品)」 3(大正藏16, p.363 중)
- 552)사지(四智)의 하나. 이것은 거울에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삼라만상이 그대로 비추어 모자람이 없는 것과 같이,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대원경지라고 한다. 불과(佛果)에서 처음으로 얻는 지혜이다.
- 553)『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신개합(大正藏45, pp.498 중~499 상)
- 554)『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신개합(大正藏45, pp.498 중~499)
- 555)『탐현기』 권16(大正藏35, p.410 중~하)
- 556)『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신개합(大正藏45, pp.498 중~499 상)
- 557)『오교장』 권3, 소전차별 불신개합(大正藏45, pp.498 중~499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