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경경(法鏡經) 서문法鏡經序https://kabc.dongguk.edu/content/view?dataId=ABC_IT_K0032_T_001&rt=R
마음은 모든 법의 근원이요 선악의 근본이니, 같은 곳에서 나왔으되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화(禍)와 복(福)으로 나뉘어 흐른다. 또한 마음은 몸을 수레 삼고, 집[家]을 나라로 삼아서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면서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데 게으르거나 쉼이 없다. 집으로 인해 생겨나는 욕심은 만족시키기 어려워 바다가 모든 지류를 삼키고 불이 장작을 태우는 것과 같으며1), 여섯 가지 삿된 마음의 잔혹함은 가시나무 그물2)이 물고기를 해치는 것보다 더 심하다. 여인네들은 아첨하는 등의 세 가지로 사람을 홀리니[鬽], 거짓말[僞]3)을 잘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적다[寡]4). 이런 이유로 집이 화(禍)를 당하게 된다. 삿되고 더러운 것을 높이고, 맑고 참된 것을 천시하며, 소인배와 가까이하고, 성현을 비방하며, 송사를 일으키고, 구친(九親)을 잃는 것은, 집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夫心者,衆法之原、臧否之根,同出異名,禍福分流。以身爲車,以家爲國,周旋十方,稟無倦息。家欲難足,由海呑流、火之獲薪,六邪之殘,已甚於蒺蔾田之賊魚矣。女人佞等三鬽,其善爲而信寘,斯家之爲禍也。尊邪穢、賤淸眞、連叢瑣、謗聖賢、興獄訟、喪九親,家之所由矣。
이 때문에 높은 경지의 사람은 그 더러움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사나움[厲]5)을 무서워하니[懼],6) 그것은 이와 같이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그리하여 묵묵히 은둔할 것을 생각하니, 명철(明哲)한 이가 무도(無道)한 세상을 피하는 것과 같다. 머리칼이 용모를 해치고 법복을 기워 입더라도, 고요히 사당에 머물면서 마음을 단련하여 더러움을 물리치며 도심을 가슴에 품고 덕(德)을 베풀며 눈과 귀가 먼 자들을 인도하려 한다. 혹은 자연 속에 은거하여 돌을 베고 잠을 자며 흐르는 물에 양치질을 하더라도 마음을 오로지 하여 때를 씻어내면, 신(神)과 도(道)가 둘 다 갖춰져서 뜻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모두 다스려지니, 이것이 바로 무명(無名)7)이 밝게 교화되는 작용이다. 중생들과 현성(賢聖)들이 청정한 상태에서 나란히 서 있게 되니, 이 도를 가리켜 대명(大明)이라 하며, 이 때문에 법경(法鏡)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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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함과 착하지 못함.臧착할 장. 오장 장.
是以上士,恥其穢、濁其廣,爲之懾懾如也;嘿思遁邁,由明哲之避無道矣。鬄髮毀容、法服彌爲、靖處廟堂、練情攘穢、懷道宣德、開導聾瞽,或有隱處山澤、枕石漱流、專心滌垢,神與道俱、志寂齊平,無名明化用也。群生賢聖競于淸淨,稱斯道曰大明,故曰法鏡。기도위(騎都尉) 벼슬을 하는 안현(安玄)8)과 임회(臨淮) 출신 엄불조[嚴浮調]9) 이 두 현자는 어릴 때부터 성스러운 사업에 크게 뜻을 두고 도리를 깊이 궁구하며, 신묘한 경지를 탐구하여10) 깊이 통달하였다. 그리고 세상이 눈멀고 미혹되어 크고 좋은 것[大雅]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여서, 사력을 다해 이 경(經)의 바른 내용을 번역하여 전해주었다. 기도위 안현이 경의 내용을 말하면 엄불조가 붓으로 받아 적었는데, 말은 옛 법도에 맞았으며[稽古]11) 뜻도 또한12) 미묘하였다.騎都尉安玄、臨淮嚴浮調,斯二賢者年在束齔,弘志聖業,鉤深致遠,窮神達幽,愍世矇惑,不睹大雅,竭思釋傳,斯經景摸。都尉口陳,嚴調筆受,言旣稽古,義文微妙。그러나 전쟁이 그치지 않는 시대였기에 뜻있는 사람들도 감히 틈을 내지 못하였다.13) 이에 하늘의 도는 찢겨지고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적어졌다. 이 경전을 보고 듣는다면14) 험난한 도탄에서 구제될 수 있을 것이나,15) 바른 의미가 막혀서16) 통하지 못하기에 한가로운 틈을 타서 온 힘을 다해 뜻을 풀이해 보았다.17) 그러나 스승께서 돌아가시고 세월이 지나서 다시 질의할 수가 없어, 마음으로는 고민이 되고 입으로는 표현을 못하여 붓을 멈출 수밖에 없었기에 막막하기만 하였으며, 먼 옛날의 성현을 추모하니 눈물과 콧물이 흐르도록 슬펐다. 지금 의심이 나는 것[闕疑]18)을 기록해두니, 후대에 명철한 사람이 나타나 그 내용을 통달하고 완벽한 뜻을 전하여, 삼보(三寶)를 드러내길 바라노라.然時干戈未戢,志士莫敢或遑,天道陵遲,內學者寡,會睹其景化,可以緣塗炭之尤嶮,然義擁而不達,因閑竭愚,爲之法義。喪師歷載,莫由重質,心憤口悱,亭筆愴如,追遠慕聖,涕泗幷流。今記識闕疑,俟後明哲,庶有暢成,以顯三寶矣。
법경경(法鏡經)法鏡經
후한(後漢) 안식국(安息國) 안현(安玄) 한역
변각성 번역後漢安息國騎都尉安玄譯
이와 같이 들었다.聞如是:언젠가 부처님[衆祐]19)께서 문물국(聞物國)20) 승씨(勝氏)21)의 숲, 급고독취(給孤獨聚) 장자22)의 동산에서 노닐면서 대중인 비구[除饉] 1,250명과 함께하셨고, 5백 명의 보살[開士]들과 함께하셨는데, 자씨(慈氏:미륵)․경수(敬首)․시기(始棄)․규음(闚音)이 보살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때에 수백의 대중들이 에워싸 꽉 들어찼는데,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경을 연설하셨다.一時,衆祐遊於聞物國勝氏之樹給孤獨聚園,與大衆除饉千二百五十人俱,及五百開士,慈氏、敬首、始棄、闚音,開士之上首者也。彼時若干百衆圍累側塞衆祐而爲說經。그때에 문물성(聞物城)에 이가(理家)라는 이가 있었으니, 이름이 심(甚)이었는데, 5백 대중과 함께 문물성으로부터 나와서 승씨의 숲, 급고독취 장자의 동산에 이르러 부처님 처소를 방문하여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곧 자리에 나아가 앉았다.
또 이가(理家)인 애우(愛遇)․내우(迺遇)․선수(善授)․대위(大威)․급고독취(給孤獨聚)․용위(龍威)․체사(諦思)와 함께 있었는데, 이 5백 무리들과 함께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모두 부처님 앞에 있는 자리로 나와 앉았다.
그 여러 이가(理家)들은 모두 큰 도를 구하려고 하였으며, 모두 그 무리들과 더불어 함께 덕의 근본을 이루어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道)를 결정함이 있었지만, 유독 급고독취만은 그렇지 못하였다.爾時,聞物城中有理家名甚,與五百衆從聞物城中出,往到勝樹給孤獨聚園,詣衆祐所,到以首禮衆祐足,便就座而坐。及理家有字愛遇、有字迺遇、有字善授、有字大威、有字給孤獨聚、有字龍威、有字諦思,斯一切五百衆等共往詣佛所,到以首禮衆祐足,皆於衆祐前就座而坐。其諸理家,一切以發求大道,皆與其衆共造德本,有決於無上正眞道,惟給孤獨聚不耳。이에 심(甚)인 이가(理家)가 대중들을 살펴보니, 이가들이 모여 좌정(坐定)하고 있으므로 자리에서 물러나 일어서서 의복을 정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길게 무릎 꿇고 합장하여 아뢰었다.
“벌써부터 묻고 싶은 긴요한 것이 있었지만, 부처님께서 어찌 한가한 겨를이 있으셔서 제가 묻는 바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於是甚理家以見大衆理家集會坐定,避坐而起,整衣服,稽首長跪,叉手白言:“已欲有所問,要者衆祐豈有閑暇敷演己所問?”부처님께서 심(甚)인 이가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는 항상 이가를 위하여 한가한 겨를이 있어서 묻는 바를 대답해 줄 수 있으니, 이가여, 그대는 곧 물을지어다. 그대가 구하여 찾는 여래의 마땅한 의(儀)와 바르고 참된 도(道)를 나는 마땅히 묻는 대로 연설하여 그대의 뜻을 충족시켜 주리라.”衆祐報甚理家言:“如來常爲理家有閑暇敷演所問,理家汝便問,恣汝所求索於如來、應儀、正眞道,吾當相爲敷演所問,趣得汝意。”심(甚)인 이가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시여, 만일 족성(族姓)의 남녀(男女)가 뜻을 일으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고, 큰 도를 좋아하고 기뻐하며, 큰 도를 일으켜 행하며, 큰 도(道)에 이르고자 하며, 큰 도에 나가려고 하며, 큰 도를 알고자 하며, 일체 중생에게 명령하려 하며, 중생을 안위(安慰)하며, 중생을 구호(救護)하여 그 맹서를 말하되, ‘아직 건너지 못한 이를 나는 마땅히 건네줄 것이며, 벗어나지 못한 이를 나는 마땅히 벗어나게 할 것이며, 안온(安穩)하지 못한 이를 나는 마땅히 위안(慰安)할 것이며, 열반[滅度]에 들지 못한 이를 나는 마땅히 열반하게 하리라’라고 하여 일체 중생의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고 중생을 구호하기 위한 까닭에 스스로 이 큰 서원(誓願)을 세웠다면, 나고 죽음이 약간 많이 나쁜 것임을 알아서 뜻은 한결같고 게으르지 아니하여 나고 죽는 무수한 겁(劫)에도 뜻이 게으르지 아니할 것입니다.甚理家問佛言:“於是,要者衆祐!若族姓男女,發意求無上正眞道、好喜大道、發行大道、欲致大道、欲下大道、欲知大道,請命一切衆生、安慰衆生、救護衆生,其誓曰:‘未度者吾當度之;未脫者吾當脫之;不安隱者當慰安之;未滅度者吾當滅度之。’爲受一切衆生重任,欲救護衆生故,而自誓發斯弘大之誓,知生死若干多惡惡,意如不倦,生死無數劫,意而不邂。부처님이시여, 혹 어떤 보살은 집을 버리고 도를 닦아서 도품(道品)의 법을 이루며, 혹은 집에 있는 자도 있으니, 훌륭하신 부처님이시여,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며, 또한 은혜를 베푸소서.
이 큰 도는 3보(寶)를 일으키는 것이며, 또한 일체의 민첩한 전적(典籍)들을 오래 머무르도록 하는 것인 까닭에 여래께서는 바라건대 보살로서 집에 있는 자가 덕을 배우는 법을 말씀하여 주옵소서.彼,要者衆祐!或有開士去家爲道,以致道品之法,或有居家者。善哉要者衆祐!愍傷衆生,亦加惠此大道者以興隆三寶,亦使一切敏典籍久在故,如來願說開士居家者學德之法。부처님이시여, 무엇을 일러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여래의 가르침을 받들어 범하지도 않고 손상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합니까? 그가 본래 원하는 것은 이른바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이며, 또한 현세에는 죄 없는 행이 있고, 후세에는 뛰어난 도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저 부처님이시여, 보살이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자는 미워하고 사랑함을 버리고 수염과 털을 깎고 법의(法衣)를 입으며, 집에 있을 때는 믿음을 갖고 집을 떠나서는 도를 닦으며, 그의 가르침을 보이며, 법식(法式)과 정식(正式)․덕식(德式)을 갖추어 나타내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보살의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자와 아울러 집에 있는 자는 닦는 것이 어떠하옵니까?”何謂,要者衆祐!開士居家而承用如來教誨者,以不虧亦不損其本所願,所謂無上正眞道也;亦現世有無罪之行,後世往殊勝之道;亦被要者衆祐!開士去家爲道者,捐棄憎愛、除鬄鬚髮、被服法衣,在家有信、離家爲道,示其教誨,法式、正式、德式具現之。要者衆祐!開士去家爲道者及居家者,修之云何?”이에 부처님께서 심(甚)인 이가을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이가여. 이제 그대가 비로소 알았으므로 여래에게 집에 있거나 집을 버린 보살이 행할 바를 묻는구나.
그러므로 이가는 우선 내가 말하는 바를 듣고 부지런히 힘써 잘 생각할지니, 보살로서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덕(德)과 선(善)의 행(行)을 닦고 배우느니라.”於是衆祐歎甚理家曰:“善哉善哉,理家!今汝迺知問如來居、家去家開士之所施行。是以理家!且聽我所說,勉進善思念之,開士居家爲道者修學德善之行。”심(甚)인 이가이 가르침을 받아서 듣고 있었다.甚理家受教而聽。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가(理家)여, 보살로서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마땅히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歸依)하며, 스스로 법(法)에 귀의하며, 스스로 스님들께 귀의할 것이니, 저가 스스로 덕의 근본에 귀의함으로써 변하여 위없는 참되고 바른 도(道)가 되느니라.衆祐言:“於是,理家!開士居家爲道者,當以自歸於佛、自歸於法、自歸於衆。彼以自歸之德本,變爲無上正眞道。이가여, 스스로 부처님과 법과 스님들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마땅히 부처님의 몸을 성취하여 서른두 가지 대사(大士)의 모습으로써 스스로 장엄하며, 또한 그 모든 덕의 근본으로써 서른두 가지 대사의 모습을 이룰 것이며, 저 모든 덕의 근본을 이룸으로써 곧 정진하여 행할 것이니,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理家!自歸於佛、法、衆者云何?我當以成就佛身三十二大士之相以自嚴飾,亦以其諸德本而致三十二大士之相,以致彼諸德本,便而精進行之。開士居家者自歸於佛,爲如是也。스스로 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법을 공경하며, 법을 구하며, 법을 원하며, 법의 즐거움을 좋아하며, 법을 높이며, 법에 의지하며, 법을 두호하며, 법을 삼가며, 법답게 머무르며, 법의 술(術)을 따르는 것이니, 법전(法典)을 위함이며, 법력(法力)을 위함이며, 법재(法財)를 구하기 위함이며, 법으로 고요히 다스리기 위함이며, 법의 일을 짓기 위함이니라.
나도 또한 마땅히 천상과 인간에 이 법을 펼 것이니,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법에 귀의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自歸於法者云何?謂爲恭敬法、求法欲法,樂法之樂,法隆法依、法護法愼,如法住,隨法術,爲法典,爲法力、爲求法財,爲法靜治,爲造法事,我亦當天上世間分布是法。開士居家者自歸於法爲如是也。스님들에게 스스로 귀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혹은 구항(溝港:須陀洹)을 보거나, 혹은 빈래(頻來:斯陀含)를 보거나, 혹은 불환(不還:阿那含)을 보거나, 혹은 응의(應儀:阿羅漢)를 보거나, 혹은 범인(凡人)이 제자의 도를 구하는 것을 보거든, 그를 공경하여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며, 스승으로 높이고 예로써 대접할 것이니라.
만일 저 바른 법과 바른 술(術)을 받들어 섬김으로써 이 뜻을 이룬다면, 또한 나도 마땅히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얻었으므로 경(經)을 풀이해 주어 제자의 덕을 성취하게 하겠지만, 그를 공경하면서도 또한 그를 부러워하지는 않나니,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스님에게 귀의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自歸於衆者云何?若開士居家或見溝港、或見頻來、或見不還、或見應儀、或見凡人求弟子道者,爲恭敬彼,承事供養,師之尊之,以禮待之。若以承事彼正法正術者而以得是志,亦我當得無上正眞道。以講授經,成就弟子之德,而爲恭敬彼,不亦而羡彼。開士居家者自歸於衆,爲如是也。또한 이가여, 보살은 네 가지 법(法)을 닦음으로써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함이 되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도의 뜻[道意]을 끝내 여의지 않음이요, 둘째는 받은 것을 끝내 범하지 않음이요, 셋째는 큰 자비를 끝내 끊지 않음이요, 넷째는 다른 도[異道]를 끝내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이 되느니라.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又復理家!開士以修治四法爲自歸於佛。何謂四?一曰、道意者終而不離,二曰、所受者終而不犯,三曰、大悲哀者終而不斷,四曰、異道者終而不爲也。是爲四法。開士居家者自歸於佛,爲如是也。또한 이가여, 네 가지 법을 닦음이 스스로 법에 귀의함이 되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모든 법문 말하는 이들을 받들어 섬기고 따라다님이요, 둘째는 들은 바의 법을 공경함이요, 셋째는 이미 들은 법의 본말(本末)을 생각함이요, 넷째는 그 들은 바의 법과 같이 그 능력에 따라 사람을 위하여 분별하고 해설함이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이 되느니라.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법에 귀의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又復理家,修治四法爲自歸於法。何謂四?一曰、諸法言之士,以承事追隨之;二曰、所聞法以恭敬之;三曰、已聞法本末思惟之;四曰、如其所聞法,隨其能爲人分別說之。是爲四。法開士居家者自歸於法,爲如是也。또한 이가여, 네 가지 법을 닦는 것이 스스로 스님들에게 귀의함이 되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제자(弟子)의 도가 나지 못한 것을 나게 하려고 뜻으로써 일체의 민첩함을 기쁘게 함이요, 둘째는 또한 물건을 저축하고 법을 저축하여 교화함이요, 셋째는 법이 있는 스님들을 의지하여 믿고 제자인 스님들을 의지하여 믿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제자의 덕을 구하매 그 덕으로써 헤아리지 아니함이니, 이것이 네 가지 법이 되느니라.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스님들에게 귀의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又復理家!修治四法爲自歸於衆。何謂四?一曰、末下要生弟子之道,而意以喜一切敏;二曰、亦以爲積聚物,以法積聚而化之;三曰、以有依恃有決之衆,而不依恃弟子之衆;四曰、求索弟子之德,不以其德度而度也。是爲四法。開士居家者自歸於衆,爲如是也。또한 이가여,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이는 여래를 봄으로써 부처님을 생각하나니, 이것이 바로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요, 이미 법을 들으면 곧 법을 생각하나니, 이것이 바로 스스로 법에 귀의하는 것이요, 만일 이미 여래와 거룩한 스님들을 보았다면 그 도의 뜻을 생각하나니, 이것이 바로 스스로 스님들에게 귀의하는 것이니라.又復理家!在家修道,以見如來則行思念佛,是爲自歸於佛;已聞法則已思念法,是爲自歸於法;若已見如來聖衆,猶思念其道意者,是爲自歸於衆。또한 이가여,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이는 부처님을 만나려고 하여 보시(布施)하나니,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함이 되며, 만일 정법(正法)을 옹호하려고 보시한다면, 이것이 바로 스스로 법에 귀의함이 되며, 만일 그 보시한 것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기 위함이라면, 스스로 스님들에게 귀의함이 되느니라.又復理家!在家修道,發求遭遇佛而以布施,爲自歸於佛;若以擁護正法而已布施,是爲自歸於法;若已其布施,爲致無上正眞道,爲自歸於僧。또한 이가여,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이가 만일 어진 이의 행을 닦고 범부의 행(行)을 행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바로 어진 이의 행이니라.
법으로써 재물을 구하고 그릇된 법으로 구하지 아니하며, 바르게 하고 삿되게 아니하면 또한 바른 생활[正命]이 되느니라.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아니하고, 법으로써 이루며, 재물이 많아도 덧없다는 생각을 하여 그 재보(財寶)를 수용하나니, 그러므로 항상 흥성해지는 한편 보시하고 공양하느니라.
부모와 지식(知識)과 신하와 형제와 친척을 위하고 공경하며, 하인과 손님과 시자(侍者)를 보살피고 거두어 주며 또한 교화하여 이 뛰어난 법으로써 중대한 책임을 받는다면, 이를 일러 중생의 중대한 책임이라 하느니라.
정진하여 게으르지 아니하나, 만일 중대한 책임을 받지 아니한다면, 받지 아니함으로 해서 이는 제자로서 제각기 부처님의 지혜인 양 하는 일이라고 하느니라.又復理家,在家修道者!若修賢夫之行,行不以凡夫之行,彼是賢夫之行也。而以法求財不以非法,以正不以邪,亦而爲正命。不以嬈固人,以法致之。財多行非常想,以受其寶,是以恒隆。施而供養父母知識、臣下昆弟、親屬,爲以敬之,奴客侍者瞻視調均,亦以教化。斯殊法亦以受重任,是謂衆生重任也。精進而不懈,不受之重任,而以不受之,謂是弟子各佛智之事。중생을 성취하는 데에 게으르지 아니하여 몸의 안락만을 생각하지 않고, 중생의 안락을 이루어 주기 위하며, 이익[利]과 손해[衰]와 헐뜯음[毁]과 기림[譽]과 칭찬함[稱]과 나무람[譏]과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에 치우쳐 움직이지 아니하고, 세간 법을 초월하여 재물을 넉넉하게 가짐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또 세 가지 길[三道]에서 이로울 것도 없고 칭찬할 것도 없고 기리는 소리도 없느니라.成就衆生而不倦,不慕身之樂,爲致衆生樂。利衰毀譽、稱譏苦樂不以傾動,以殊越世閒法,富有財不喜悅;又於三道,無利無稱、無譽聲、無賞。마음에 무엇을 즐기는 것이 없고, 행할 바를 깊이 생각하여 삼매를 기뻐하며, 그릇된 느낌으로 보고 아는 것은 반드시 살펴서 바르게 행함이 있고, 칭찬과 기림의 두 가지에 쏠리지 않고 벗어나서 그 맹서한 일을 얻느니라.所行爲熟慮,受正爲喜悅,邪受見知要意而有正行。稱譽之兩,以除解已,得其所誓,以憂人事,不自忽其事。다른 사람의 일을 걱정해 주고 자기의 일도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며,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나 끝내 그 보답을 바라지 아니하고, 은혜를 약간 베풀면서 은혜를 알고 갚을 줄을 알며, 다시 은덕을 행하여 가난한 자에겐 재물을 주고, 두려워하는 자는 편안하게 하며, 근심하는 자는 그 근심을 풀어 주며, 힘이 없는 자를 용서해 주며, 강한 자는 교만을 덜어내어 지나친 교만과 잘난 체하는 것을 버리게 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학식이 많은 이를 받들어 섬기며, 잘 아는 이에게 능히 묻고, 정직한 것으로 보여 주어 헛되이 꾸미지 아니하며, 뭇 사람에게 방편의 법이 있거든 덕을 행하여 그것을 구하느니라.有恩在人訖,終不望其報,作恩施若干,知恩知反復,爲造行恩德。貧者爲施財,諸恐畏者爲安隱之,憂慼者寬解其憂,無力者忍嘿之,諸豪强者損憍慢,以棄殊過慢尤慢。以恭敬尊長,承事多聞者,能問明知者。所現以直不虛飾衆人,而有方便行,德而可求哉!많이 듣기 위하여 싫증내지 않고 만족함이 없으며, 바른 수행과 노력으로 성인과 서로 만나면 성인을 따르고 존경하며, 많이 들은 이를 섬기고 아는 자에게는 물으며, 나타난 그대로를 스승으로 삼지 않고, 비밀스러운 뭇 경전들을 그 들은 바대로 나타내기 위하여 그 뜻을 밝히며, 일체의 애욕과 오락은 덧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몸을 아까워하지 아니하여 스스로 그 수명을 보기를 아침의 이슬방울과 같이 여기며, 갖고 있는 재산도 허깨비나 구름같이 생각하며, 가족이나 아는 사람이나 손님들을 원수같이 생각하며, 처자와 남녀는 쓸데없는 지옥같이 생각하며,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일체의 괴로움이라 생각하며, 토지와 가옥과 만물과 하는 일도 항상 병으로 여기느니라.爲多聞不厭無足,正修懃力,固與聖人相遭。追隨聖人而尊敬之,多聞者爲事之,知者爲問之,所以現直。不師秘衆經,如其所聞爲現之,所聞而曉其義。一切欲之嬉樂爲計非常,不慕惜身,以自觀其壽如朝露之渧,計財產所有如幻雲也。家屬人客計爲怨,妻子男女計爲無擇之地獄,以其所有者計爲一切苦,田地舍宅萬物所業者,常以計爲疵也。구하는 바의 덕은 무너지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집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지식(知識)과 신하와 형제와 친속은 지옥의 주인이라 생각하고, 하루 종일 밤낮으로 다름과 같음을 생각하여 실답지 않은 몸으로써 실다움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며, 실답지 않은 수명으로 실다운 수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며, 실답지 않은 재물로 실다움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느니라.所求致之德,爲不敗壞想;家居者爲危想;知識臣下昆弟親屬者,爲地獄主者想;終日夜者,爲之同想。以不實之身,爲以受實想;以不實之壽,爲受實想;以不實之財,爲受實之想彼。저가 만일 뭇 일들을 예절로써 하여 다른 사람을 공경하고 섬긴다면, 이는 실답지 않은 몸으로 실다움을 받는 것이요, 만일 옛적에 많은 덕의 근본을 헐지 아니하고 또한 다시 늘어나게 한다면, 이는 실답지 않은 수명을 실답게 여기는 것이요, 만일 간탐을 억제하고 은혜를 베풀고 덕을 베풀면, 이는 실답지 않은 재물을 실답게 여기는 것이니, 이는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어진 이의 행이 되므로 이와 같이하면 죄가 없을 것이요, 여래의 말씀이요, 법의 말씀이 되리라. 또한 그 본래의 서원(誓願)을 훼손하지 아니하니, 이를 일러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이며, 현세에 죄 없는 행이요, 후세에도 또한 뛰어난 도에 떨어진다고 하느니라.若以禮節衆事敬事人者,是以不實之身,爲受實也。若昔衆德之本而不毀,又復增殊者,是以不實之命,以爲受實也。是若以制慳而布恩施德者,是以不實之財,爲以受實也。是爲開士居家修道者爲賢夫之行,爲事如是,而無罪也;爲如來言說、爲法說也;亦不毀而不損其本誓,是謂無上正眞之道也。迺現世有無罪之行,後世亦墮殊勝之道也。또한 이가여, 보살로서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마땅히 스스로 계율을 받들어 지닐 것이니, 이를 일러 5계(戒)를 받들어 지닌다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살생(殺生)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꿈틀거리는 무리들에게까지 칼과 막대기를 가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방해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지 않으며, 자기에게 있는 재물에 만족함을 알고, 다른 이의 재물은 생각하지 아니하며, 작은 풀포기나 실낱이라도 주지 않으면 끝내 취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음욕의 삿된 행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자기의 아내에게 만족할 줄 알고, 다른 이의 부녀는 눈으로 보기 좋아하지 않으며, 뜻에 항상 자기를 근심으로 여기고 음욕을 괴로운 것으로 생각하니, 만일 음욕의 생각이 일어나면 스스로 자기의 아내에 대해 추악하고 고달픈 것으로 관찰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으로 음욕의 일을 수고롭게 여기며, 두려워서 괴로워하지 않음이 없고, 그리워하는 것을 덧없다고 여기느니라.
청정하고 즐거운 생각이 뜻에 사무쳐서 이에 이와 같이 나는 마땅히 스스로 닦을 것이며, 만일 음욕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하물며 자주자주 있겠는가?又復理家!開士居家修道者,當以自奉持戒事,謂是奉持五戒事也。是以爲不好殺生,不加刀杖蠕動之類,不以嬈固人;是以不好盜竊人物,自有財而知足,他人財不以思,至於幾微草穢之屬,不與終而不取;是以爲不好欲之邪行,自有妻而知足,他婦女不喜眼視也。意常以自患已,思念欲都爲苦。如使生欲念,自於其妻,則以觀惡露,以恐怖之念,勞爲欲之事,以無畏不苦,以慕戀不常,淨樂想達志,迺如是我當以自修。若以思想欲,我以不爲之,何況數數有?그러므로 허망한 말을 좋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진실한 말과 정성스러운 말로써 본성을 속이지 않으며, 마음을 무너뜨리지 않아서 정성이 있는 듯하여 그 보고 듣는 대로 말하며, 삼가 경법(經法)을 두호하여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는 까닭에 허망한 말을 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취하지 않고 미혹되지 않고 서두르지 않아야 하며, 벌주지 않는 것으로써 온순하게 교화하여 뜻을 강하게 함으로써 바르게 알아야 하느니라.是以爲不當好妄言,以諦言誠言;以不僞詐性;以不敗心如有誠,如其所見聞而說之;愼護經法,不用軀命,故以不妄言。是以不當好飮酒,以不醉不迷惑不急疾,以無罰而順化,强志以正知。만일 다시 보시의 뜻을 일으킬 수 있다면 가진 것 일체를 나는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니, 먹을 것을 요구하면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요구하면 마실 것을 주며, 수레를 요구하면 수레를 주고, 의복을 요구하면 의복을 줄 것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에게 술을 주겠다는 뜻을 세웠으니, 이와 같이 보시바라밀은 끝이 없느니라. 이러한 일을 할 때에 만일 어떤 사람이 구하는 것이 있다면 곧 줄 것이니, 때에 나는 술로써 보시하여 그로 하여금 교화를 받게 하리라.
만일 스스로 아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다면, 미혹되지 않으리니, 어째서 그러한가? 무릇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그가 원하는 바를 만족하게 하여 보시바라밀이 끝이 없기에 오로지함이 이와 같으니,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술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느니라.如使復興布施意可,所有一切吾當與人,求食與食、求飮與飮、求車與車、求衣與衣,是以與人酒以建志,如是布施度無極。爲是時若有人所索,則而爲與。時我能以酒施,令從彼化志,如以自知爲行不迷惑。所以然者何?夫開士者爲衆生周滿其所願,布施度無極,一已如是。開士居家者以酒施人,而爲不獲罪。그러므로 이가(理家)여, 보살은 그 닦고 배운 덕의 근본으로써 변화하여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삼으니, 만일 잘 수행하려면 이 5계를 삼가 두호할 것이니라.
또 마땅히 이와 다른 자도 있나니, 뭇 사람을 서로 헐뜯는 것이 마땅치 않으므로 다투는 자들을 화합시키며, 거친 말을 아니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며, 항상 먼저 다른 사람과 말할 적에도 또한 꾸미는 말로써 하지 않고 옳은 말만 하고 법에 맞는 말을 하며 때에 맞는 말을 하며 사실대로 말을 하며, 또한 어리석은 그물에 들지 않으므로 편안함으로써 중생들에게 베풀며, 뜻이 어지럽지 아니하여 항상 인욕의 힘으로써 스스로 장엄하며, 바른 견해를 갖고 삿된 견해를 버리며, 모든 부처님들께 머리를 조아려 귀의하고 다른 천신(天神)을 위하지 않느니라.是以理家!開士以其所修學之德本,變爲無上正眞道,若以善修,愼護斯五戒矣。又當有殊者,不當以相讒衆人,紛諍者而以和恊之,以爲不麤言,以柔軟之言,恒先與人言,亦不以綺語,爲義說、爲法說、爲時說、爲如事說;亦不有癡網,而以安隱加施衆生;意爲不敗亂,恒以忍辱力而自嚴。以爲用正見,去離邪見猶爲稽首諸佛衆祐,不爲他天神也。또한 이가여,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가 혹 마을이나 고을이나 국도(國都)에 있다면 마땅히 그곳에서 경(經)과 법(法)을 옹호할지니라. 경과 법을 옹호하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믿지 않는 자는 믿음으로 교화하며, 간탐하는 자는 보시로써 교화하며, 계(戒)를 싫어하는 자는 계로써 교화하며, 뜻이 어지러운 자는 인욕하는 일로써 교화하며, 게으른 자는 정진으로써 교화하며, 뜻을 잃은 자는 사유(思惟)로써 교화하며, 지견이 삿된 자는 지혜로써 교화하며, 가난한 자는 부유하게 하며, 병든 자들은 약으로써 보시하며, 고독한 자에겐 권속이 되어 주며, 돌아갈 곳이 없는 자에겐 돌아갈 곳이 되어 주며, 의지할 곳이 없는 자에겐 의지할 곳이 되어 주니, 저 일체의 국토와 마을을 위하여 경과 법을 옹호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又復理家!居家修道者,或在墟聚郡縣國邑下,當於彼擁護經法,擁護經者爲之奈何?夫不信者以信教化之;慳貪者以施教化之;惡戒者以戒教化之;亂意者以忍事教化之;懈怠者以精進教化之;失志者以思惟教化之;邪知以智事教化之;貧財者以富之;諸病者以藥施之;孤獨者以爲家屬;無歸者以爲歸;無依者以爲依,爲彼一切國邑壤者,擁護經法爲若此。이가여, 혹 저 보살이 하나로부터 둘에 이르고 셋에 이르며 백에 이르기까지 인민을 교화하여 모두 모든 덕의 법을 닦게 하고, 저 보살은 곧 자비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중생에게 베풀어 그 일체의 맹세를 굳게 하나니, 그 맹세하는 말에 이르되, ‘이 교화하기 어려운 인민에 이르기까지 성취해 주지 못한다면, 나는 끝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취하지 않으리라. 왜 그런가 하면, 지금 나는 이를 위한 까닭에 스스로의 서원을 맹세하였으니, 나는 정직한 자를 위해서가 아니요, 아첨하지 않는 자를 위해서가 아니요, 거짓말하고 속이지 않는 자를 위해서가 아니요, 계(戒)를 지키는 자를 위해서가 아니요, 덕이 있음을 경계하는 자를 위해서가 아니요, 모든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서원으로써 스스로 맹세한 것이며, 다만 이 사람들에게 경과 법을 알려 주며, 경으로써 교화하려고 나는 이것을 썼기 때문에 서원으로써 스스로 맹세한 것이다. 나는 마땅히 그 정진의 행을 항상 굳게 할 것이며, 그리고 내가 하는 방편은 헛된 수고로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본 사람이면 좋아하고 믿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느니라.理家!或彼開士至一至二至三至於百,教誨人民,皆使修衆德之法。彼開士便以悲哀加於衆生,以强其一切繁誓之。誓其辭曰:‘至於斯難化之人民未得成就者,吾終不取無上正眞道。’所以者何?今我以爲斯故,以誓自誓也。吾不爲質直者、不以不佞諂者、不以不爲詐者、不以守者、不以誡有德者。諸此人故,以誓而自誓也,但爲欲使斯人以聞經法者,以經化余。用此故,以誓而自誓也。我當恒以强其精進行所,我方便爲不唐苦也。若人有見者,莫不以好信。만일 이가여, 보살이 살고 있는 집에 와 머무르면서도 일체의 인민들이 다른 나쁜 길에 떨어짐을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는 보살의 허물이 될 것이니라.若理家至於開士所在家居,止其不嗟,一切之人民墮殊異之惡道者,彼爲開士之咎。이가여, 비유컨대 동리와 고을과 성읍과 국도(國都)에 용한 의원이 왔는데, 가령 저 어떤 사람이 그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었다면 뭇 사람들이 모두 저 의원의 허물로 여기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이가여, 보살의 처소에 와 있으면서도 일체의 사람들이 모두 다른 나쁜 길에 떨어짐을 슬퍼하지 않는다면, 여래․응공․정진각(正眞覺)께서는 저 보살의 허물로 여기느니라.理家!譬如鄕亭鄹邑郡縣國下,至於有良醫者,假使彼若有一人不以其壽命而終者,衆人皆爲咎彼醫。如是理家!至於開士所居,止不嗟一切之人皆墮殊異之惡道者,如來、應儀、正眞覺者爲咎彼開士也。이가여, 그러므로 집에 있는 보살은 스스로 맹세하기를 이와 같이하나니, 설령 내가 가는 곳의 나라와 마을에 어리석은 자가 있더라도 서로 섬겨서 한 사람이라도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과 같으니라.理家!是故居家開士爲自誓如此也。設使我所往國邑下癡者相事,如不使一人有墮惡道者也。또한 이가여,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마땅히 집이 나쁜 것을 알아야 하나니, 집에 있는 것은 일체의 뭇 착한 뿌리들을 해치느니라. 집에는 생사에서 벗어나는 길이 없으며, 청정한 법을 해치나니,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는 것이니라.又復理家!居家修道者當曉家之惡。在于家者,爲害一切衆善之本,以家猶無出要,以害淸淨之法,是故謂爲家也。居家者謂爲居于一切衆勞,爲居衆惡之念,爲居衆惡之行,不化不自守,愚凡人者爲共居,與不諦人集會,是故謂爲家也。집에 있는 것을 일체의 뭇 수고로움에 있는 것이라고 하며, 뭇 악한 생각에 있는 것이며, 뭇 악한 행에 있는 것이며, 교화할 수 없고 스스로 지킬 수 없어서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과 함께 있는 곳이요, 자세히 살피지 못하는 사람과 더불어 모여 있는 곳이니,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는 것이니라.家者爲是名也,已在于彼,莫不作不軌之事者。以在于彼,則不恭敬,自於父母息心逝心尊長衆聖者,是故謂爲家也。縣官牢獄,考掠搒笞罵詈數勉,至于死焉皆爲由彼,是故謂爲家也。집이란 바로 이름이 되나니, 이미 그곳에 있다면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곳에 있음으로써 자기의 부모와 마음을 쉬고 마음을 수양한 높은 이와 뭇 성인들을 공경하지 않으므로 그런 까닭에 집이라 이르느니라.
고을의 관리에게 끌려가 감옥에 갇히고, 고문 당하여 매를 얻어맞으며, 꾸짖으며 자주 권면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도 모두 이를 말미암아서이니,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는 것이니라.以在于彼爲入惡道,以在彼爲墮諸欲、爲墮瞋恚、爲在諸畏、爲在愚癡,是謂爲家也。以不愼護彼戒事,遠離爲定事,以不修慧之事、不得度之事、以不生度知見之事、是故謂爲家也。집에 있음으로써 나쁜 길에 들어가게도 되며, 집에 있음으로써 모든 애욕에 떨어지게 되며, 성냄에 떨어지게 되며, 모든 두려움이 있게 되며, 어리석음이 있게 되나니,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저 계(戒)를 삼가 두호하지 아니하여 선정을 멀리 떠나며, 지혜를 닦지 않으며, 바라밀을 얻지 못하며, 바라밀의 지견(知見)이 나지 않나니,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는 것이니라.以在于彼,卽有父母愛、兄弟愛姊妹愛、婦愛子愛、舍宅愛財產愛、兒客愛、所有愛、不厭財求之愛、是故謂爲家也。斯居家者難滿哉!譬若大海衆流歸之。斯居家者不知厭哉!譬若火以得薪。斯居家者多念無住息哉!譬若風以爲無住止,猶爲沈沒哉。집에 있으면, 곧 부모의 사랑, 형제의 사랑, 자매(姉妹)의 사랑, 부인의 사랑, 자식의 사랑, 집에 대한 애착, 재산에 대한 애착, 자손에 대한 애착, 갖은 것에 대한 애착, 싫증내지 않고 재물을 구하는 애착이 있나니,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집에 있는 자는 만족하기 어렵나니, 비유컨대 큰 바다로 모든 강물이 돌아가는 것과 같으니라. 집에 있는 자는 싫증낼 줄 모르니, 비유컨대 불이 섶을 얻은 것과 같으니라. 집에 있는 자는 생각이 많아서 쉴 수 없나니, 비유컨대 바람이 머물러 그치지 않아서 마침내 침몰함과 같으니라.若美飮食爲糅毒,所有一切苦哉!譬若仇怨,爲似知識,誤人之行哉!非聖經之所施行,爲造變爭哉!更相因緣恒不和。爲多疵哉!以行善惡之行,因緣之所在,恒爲人所嫌疑。非人有哉!以爲所有顚倒故。猶不善哉!雖善有㩲詐,猶見其性行。또 맛있는 음식에 독약이 섞인 것과 같아서 있는 것 모두가 괴로움이니, 비유컨대 원수와 같고 사이비 지식(知識)과 같아서 사람의 행동을 그르치며, 성인이 베푼 바의 행이 아니어서 변하여 싸움이 되며, 번갈아 서로 인연이 되어 항상 불화하여 병통이 많으며, 선과 악의 행을 행하여서 인연이 있는 곳마다 항상 사람들이 싫어하고 의심하는 바가 되며, 그릇된 사람에게 있으니 가진 것이 뒤바뀐 까닭에 오히려 착하지 않으며, 비록 착하다 해도 권모(權謀)와 사기(詐欺)가 있어서 오히려 그 성품과 행동을 보건대 흡사 광대의 몸 같으니 빠르게 바뀌고 변하기 때문이다.似如倡體哉!以速轉變故。似若幻師哉!初至者人爲聚會,其行爲不誠。似若夢哉!一切成敗終始故。似若朝露哉!以速離故。似若蜜渧哉!以爲少味故。似若蒺蔾網哉!色聲香味細滑以爲所害故。似若鍼孔虫哉!以非善念爲食故。譬若違命者哉!爲轉相欺故。恒懷恐怖哉!爲意以亂故。爲多共哉!以縣官盜賊怨家弊惡王者爲害也。斯居家者,少味樂哉!以爲多惡失。理家!開士居家者爲曉家之惡若此。흡사 요술쟁이 같으니 처음 이르는 사람끼리 모였기에 그 행동이 성실하지 못하며, 흡사 꿈과 같으니 일체를 이루거나 패하는 것으로 처음과 끝이 되기 때문이며, 흡사 아침 이슬과 같나니 빨리 여의기 때문이며, 흡사 꿀방울과 같나니 조금 맛보기 때문이며, 흡사 가시 그물과 같나니 빛깔․소리․냄새․맛의 부드러움에 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며, 흡사 바늘구멍의 벌레와 같나니 착하지 않은 생각으로 먹을 것을 삼기 때문이며, 비유하자면 명령을 어기는 것과 같나니 번갈아 서로 속이기 때문이며, 항상 두려움을 품고 있으니 뜻이 어지럽기 때문이며, 많은 이들과 함께 있으니 고을의 관리와 도적과 원수와 나쁜 왕에게 해를 당하느니라. 이렇게 집에 있는 자는 재미와 낙은 적고 죄악과 과실이 많으니라.
이가여, 보살로서 집에 있는 자는 집의 나쁜 점이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느니라.又復理家!居家修道者以布施爲寶施,若已施爲我有,若在家非我有;若已施是爲寶,若在家是爲非寶;若已施爲富財,若在家爲無財;若已施爲勞解,其在家爲勞增;若已施爲不我,若在家已爲我;若已施爲不有,若在家以爲有;若以施爲無盡,若在家爲非常;若已施不復護,若在家爲斯護;若已施爲賢夫行,若在家爲凡夫之意;若已施爲依度道,若在家爲依邪部;若已施爲佛所稱,若在家爲愚人所稱。또한 이가여,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보시(布施)로써 보시(寶施)를 삼으니,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나의 소유가 된 것이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나의 소유가 아니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이는 보배가 된 것이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이는 보배가 아니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부유한 재물이 된 것이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재물이 없는 것이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수고로움이 풀린 것이지만 그것이 집에 있다면 수고로움을 더할 것이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나가 없음이 되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이미 나가 된 것이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있지 않음이 되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있음이 되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다함 없음이 되겠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항상 그렇지 않은 것이 되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덮어 두호하지 않는 것이요 만일 집에 있다면 두호함이 되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어진 이의 행(行)이 되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범부의 뜻이 되며, 만일 이미 보시 하였다면 바라밀의 도에 의지함이 되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삿된 부류에 의지한 것이 되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부처님께서 칭찬하실 바가 될 것이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 되리라.理家!開士居家修道者以布施爲寶若此。是以見人來有所求索者,爲生三想。何謂三?善友想、依度道想、勉生富財想,爲生是三想。이가여, 보살로서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보시(布施)를 보배로 여김이 이와 같으니, 그러므로 사람이 와서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세 가지 생각을 하느니라. 무엇이 셋인가 하면, 첫째는 착한 벗으로 생각함이요, 둘째는 바라밀의 도에 의지하는 생각이요, 셋째는 부지런히 풍부한 재물을 생산한다는 생각이니, 이러한 세 가지 생각을 내느니라.爲復造三想。何謂三?尊如來教誡想、降伏邪想、以不望福德想。所以者何?若此開士,若諸來有所索者,貪婬、瞋恚、愚癡則以爲薄,薄者爲之奈何?若所有物,一切不惜而以布施,斯爲貪婬薄;若於彼來求物者,以慈哀加之,斯爲瞋恚薄;若以布施變爲此一切敏,謂爲愚癡薄。다시 세 가지 생각을 지으니, 무엇이 셋인가 하면, 높으신 여래의 가르침과 훈계를 생각하고, 삿된 것을 항복시킴을 생각하며, 복덕(福德)을 바라지 않는 생각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만일 이 보살에게 누군가 와서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탐욕․성냄․어리석음이 곧 희박해질 것이요, 희박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만일 물건을 갖고 있다면 일체를 아까워하지 않고 보시하리니, 이것이 탐음(貪婬)이 희박해지는 것이니라.
만일 누가 와서 물건을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자애로운 마음으로 보태주리니, 이것이 성냄이 희박해지는 것이니라.
만일 보시함으로써 변하여 이 일체를 민첩하게 한다면, 어리석음이 희박해지는 것이니라.又復理家!已見來求物者,不久爲成六度無極之行。又成彼者云何?若有來人從人索物,能不愛惜者,是爲布施度無極;若意在道而布施者,是爲以戒度無極;若不恚怒之,是爲忍度無極;假令猶自思念,何用爲食?自强其意,不釋其行,是爲精進度無極;若欲施、若已施,而不鬱毒、無有悔者,是爲思惟度無極;若已施不望其福德者,是爲以慧度無極。理家!開士以布施爲成六度無極行若此。또한 이가(異家)여, 와서 물건을 요구하는 자를 보았다면, 오래지 않아 6도(度)의 다함없는 행을 이루게 되리니, 그것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만일 사람이 와서 물건을 요구하는 것이 있으매 능히 아까워하지 않는다면 이는 보시바라밀이 다함이 없는 것이요, 만일 뜻이 도에 있어서 보시한다면 이는 계(戒)바라밀이 다함이 없는 것이요, 만일 성내지 않는다면 이는 인욕(忍辱)바라밀이 다함이 없는 것이요, 가령 스스로 생각하되 ‘무엇으로 먹을 것을 삼으리오?’하여 스스로 그 뜻을 굳게 하고 그 행하는 것을 놓아 버리지 아니하면 이는 정진바라밀이 다함이 없는 것이요, 만일 보시하려고 하거나 만일 이미 보시하였더라도 침울하지 않으며 후회가 없으면 이는 선정바라밀이 다함이 없는 것이요, 만일 이미 보시하였더라도 복덕을 바라지 않는다면 이는 지혜바라밀이 다함이 없는 것이니라. 이가여, 보살이 보시로써 6도의 다함이 없는 행을 이루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又復理家!居在家者是以爲去離順隨忿亂,以親別離法。若以得產、得財米穀、得男女,不以爲喜悅;若一切敗亡,不以下意爲愁慼;已觀如是萬物如幻,爲不住止想也。斯幻之行以致是,是以父母、妻子、奴婢、兒、客,是非我之有,我亦不是有,亦我是不有,我不應是有,以不我是有。今我爲彼故,而爲作罪惡,但現世是,有非是爲後世。是昔之有,非是我當護。又夫我之有,彼我當以護。何謂我之有?또한 이가여, 집에 있는 자는 그러므로 떠나고 여의어서 화냄과 어지러움을 따르니, 이별하는 법을 관찰하여 만일 재산을 얻거나 재물이나 미곡(米穀)을 얻거나 남녀를 얻더라도 기쁨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만일 일체가 무너져 없어진다 해도 생각에 두어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이미 ‘이와 같이 만물(萬物)은 허깨비와 같다’고 관찰하였으므로 생각을 머물러 두지 않을 것이니라. 이는 허깨비 같은 행(行)이기에 이렇게 된 것이니, 그러므로 부모․처자․노비(奴婢)․자손도 나의 소유가 아니니라.
내가 또한 이것을 소유한 것이 아니요 또한 내가 있는 것도 아니며, 내가 마땅히 소유한 것이 아니므로 내게 있는 것이 아니나, 이제 내가 그것을 위하여 죄악을 지었으니, 다만 현세에만 있을 뿐이요 후세에까지 있는 것이 아니며, 괴로움만 있으므로 내가 마땅히 두호할 것이 아니로다. 또 나의 소유라면 저것이 나를 마땅히 두호하리니, 어찌 나의 소유라 하리오?謂是布施教化,恬淡自守道之根原,亦藏隱之德本,是爲我有也。至於我所住,是則爲追我,彼亦不用軀命、不爲男女妻子故,爲造惡行也。是以居在家,自有婦者,當造三想。何謂三?非常想、不久想、別離想,是三想當爲造想。말하자면 보시로 교화하여 고요하고 청정하게 도의 근원을 스스로 지키며, 또한 덕의 근본을 간직하고 숨겨야 하니 이것이 바로 나의 소유며, 내가 있는 곳에까지 이르나니, 이것만이 곧 나를 따라오는 것이 되며, 그것은 몸과 목숨을 따르지 않으므로 남녀와 처자를 위하여 나쁜 행을 짓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집에 있으면서 자기에게 부인이 있는 자는 마땅히 세 가지 생각을 할 것이니,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느냐 하면, 항상 있지 않다는 생각과 오래가지 않는다는 생각과 이별한다는 생각이니, 바로 이 세 가지 생각을 마땅히 해야 하느니라.當復造三想。何謂三?若在喜樂爲求後世在苦、若在飮食爲求在殃罪、若在樂者爲求在苦,當爲造是三想。當復造三想。何謂三?重累想、費耗想、俗所有想,當爲造是三想。마땅히 다시 세 가지 생각을 해야만 하니,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느냐 하면, 만일 기쁘고 즐거운 곳에 있더라도 후세에 괴로움에 있을 것을 구하는 것인가 함이요, 만일 음식을 먹고 있더라도 재앙과 죄악이 있을 것을 구하는 것인가 함이요, 만일 안락함에 있더라도 괴로움에 있을 것을 구하는 것인가 함이니, 마땅히 이 세 가지 생각을 해야 하느니라.
마땅히 다시 세 가지 생각을 해야만 하니,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느냐 하면, 겹으로 얽매여 있다는 생각과 써버린다는 생각과 세속적인 소유라는 생각이니, 마땅히 이 세 가지 생각을 해야 하느니라.當復造三想。何謂三?爲入地獄想、入畜生想、入神鬼想,當爲造是三想。當復造三想。何謂三?魑魅想、臼注想、色像想,爲造是三想。當復造三想。何謂三?不我想、無主想、假借喩想,當爲造是三想。마땅히 다시 세 가지 생각을 해야만 하니,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느냐 하면, 지옥에 들어간다는 생각과 축생(畜生)에 들어간다는 생각과 귀신에 들어간다는 생각이니, 마땅히 이 세 가지 생각을 해야 하느니라.
마땅히 다시 세 가지 생각을 해야만 하니,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느냐 하면, 도깨비라는 생각과 구주(臼注)라는 생각과 색상(色像)이라는 생각이니, 이 세 가지 생각을 해야 하느니라.
마땅히 다시 세 가지 생각을 해야만 하니,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느냐 하면, 나가 아니라는 생각과 주인이 없다는 생각과 빌려서 비유[假借喩]한다는 생각이니, 마땅히 이 세 가지 생각을 해야 하느니라.理家!思念若此衆事想開士居家者,當自觀身其妻若此也。是以不當愛其子,設使無生子愛,不加於天下人。이가여,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일들인 생각을 할 것이니, 보살로서 집에 있는 이는 마땅히 자기의 아내를 관찰하기를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그 자식도 애착하지 않아야 할 것이지만, 설령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천하의 사람들에게까지 두어서는 아니 되느니라.是以當以三數諫,自諫其意。何等爲三?等意者爲道,不以邪意也;正行者爲道,不以邪行;不多行者爲道,多行者非矣。그러므로 마땅히 세 번씩 자기의 뜻을 간할 것이니, 무엇이 세 번이 되느냐 하면, 평등한 뜻으로 도를 삼고 삿된 뜻으로 하지 않는 것이요, 바른 수행으로 도를 삼고 삿된 수행으로 하지 않는 것이요, 많이 행하지 않는 것으로 도를 삼으니, 많이 행하는 것은 도가 아니니라.是以三數諫,自數諫其意,自造其子怨仇想,是我怨仇非我友。所以者何?我以由彼違失慈哀佛之教誡,使我甚益生彼愛。人自磋切其意,如愛在其子,以愛加衆生;若其自愛身,以慈哀加衆生。是以當觀其本末斯所從來異,我所從來亦異。衆生先世亦曾爲我子,吾亦曾爲衆生子,是生死之愆,無可適莫者。所以者何?所往來道輒有離行,轉復爲仇怨。그러므로 세 번씩 간(諫)하고 자주 그 뜻을 간하여 스스로 그 ‘아들은 원수’라는 생각을 하되, 이는 나의 원수요 나의 벗이 아니라고 해야 하니, 왜 그런가 하면, 나는 저로 말미암아 자비하신 부처님의 교훈을 어기며 잃어버리고, 나로 하여금 지나치게 저를 애착하는 마음을 내게 하며, 또 스스로 그 뜻을 갈아 끊어지게 하기 때문이니라.
그 아들을 사랑하듯이 중생에게 사랑을 베풀며, 그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자애(慈哀)로움을 중생에게 베풀지니, 그러므로 마땅히 그 본말(本末)을 관찰하건대 이것이 온 곳도 다르고 내가 온 곳도 또한 다르나, 중생은 전생에 또한 일찍이 나의 아들이었고, 나도 또한 일찍이 중생의 아들이었으므로 이 생사의 허물을 이러쿵저러쿵할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왕래하는 길에는 문득 떠나감이 있고, 돌아와 다시 원수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니라.我今當自修,都使我無友,亦我無怨仇。所以然者何?以造有知識,爲復欲多作,以造有怨仇,都以欲爲惡。一切衆生彼非我,汝意不可以可不可之意可,以悉通衆經。所以者何?正行者得正道,邪行者得邪道。今我不有邪行,於衆生有正意行,乃可得一切敏故。理家!開士居家者都物無可戀、無可慕、無可適、無可愛、無可可,爲若此也。나는 이제 마땅히 스스로 닦아 나에겐 전혀 벗도 없고 또한 원수도 없게 하리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업을 지음으로써 아는 사람[知識]이 있게 되고, 또한 많이 짓고자 해서 지음으로써 원수가 있게 되나니, 모두 애욕으로써 악(惡)을 지은 것이니라.
일체의 중생 그것은 나가 아닌데, 너의 뜻은 불가(不可)한 것을 가(可)하다고 여기니, 불가(不可)한 뜻을 가(可)하다고 하므로 여러 경전을 모두 다 통달해야 하느니라. 왜 그런가 하면, 바르게 수행하는 자는 바른 도를 얻으며, 삿되게 수행하는 자는 삿된 도를 얻는데, 지금 나에게 삿된 수행은 있지 않고 중생에게도 바른 뜻과 수행만 있으므로 이에 일체의 민첩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니라.
이가여, 집에 있는 보살로서 모든 물건에 그리워함이 없으며, 사모함이 없으며, 맞음이 없으며, 사랑함이 없으며, 불가(不可)함도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又復理家!居家者設使人來有所索,假使爲不欲與彼物,猶當以自諫數其意;假令我不以是物施者,我會當與此物離也;若欲不欲,至於死時,是物亦當捐棄我,我亦當捐棄是。其施寶而終,我而施是物,死時意除止。또한 이가여, 집에 있는 자는 설령 사람이 와서 요구하는 바가 있더라도 만약 그 물건을 주고 싶지 않다면 오히려 마땅히 스스로 그 뜻을 간하기를 자주하되, ‘가령 내가 이 물건을 보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언젠가는 마땅히 물건과 이별하게 되리라. 만일 죽을 때에 이르지 아니하여도 이 물건은 또한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요, 나도 또한 이를 버릴 것이니, 그 보배를 베풀어 주고 마치려면 나는 이 물건을 보시해야만 죽을 때에 뜻에 여한이 없으리라’라고 하느니라.設使思惟若此,而不能施彼物者,是以四辭謝辭謝來索物者。何謂四?我以無力、衆德未成就;我在大道爲初始,布施意而不自由;我有受見,在於我余之行,且相假原,賢者勿相逼迫;我所施行能奉行之,如其所受,爾迺能滿卿所願及天下人。辭謝彼來索物者,爲若此也。설령 생각을 이와 같이 하여도 저 물건을 보시할 수 없으면, 이에 네 가지 말로써 사절하여 와서 물건을 요구하는 자에게 사양하고 사절할 것이니라.
무엇을 네 가지라 하느냐 하면, ‘나는 힘이 없어 뭇 덕을 아직 성취하지 못했다’라고 하는 것이요, ‘나는 큰 도에 있어서 처음 시작하였기에 보시하는 뜻이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하는 것이요, ‘나는 받으려는 소견이 있고 나라는 행(行)이 있으니, 우선 어진 이에게 가서 할 일이요 나에게 핍박하지 말라’라고 하는 것이요, ‘나의 보시하는 바의 행을 잘 받들어 행하여 그 받은 바대로 한다면, 이에 그대가 원하는 바를 만족하게 하리라’라고 하는 것이니, 그리하여 천하(天下)의 사람 중에도 저가 와서 물건을 요구하면 사양하고 사절하기를 이와 같이 할지니라.又復理家!居家修道者,假使爲離師者之教誨,時世無佛、無見經者、不與聖衆相遭遇,是以當稽首十方諸佛,亦彼前世求道所行,志願之弘,願者其一切成就佛法之德,以思念之以代其喜。於是晝三亦夜三,以論三品經事。一切前世所施行惡,以自首誨,改往修來,爲求哀於一切佛,以法故愍傷之;亦以無央數無極之法愍傷之。또한 이가여, 집에서 도를 닦는 자로서 가령 스승의 가르침을 만날 수 없고, 그 당시에는 세상에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며, 경전을 볼 수 없고, 성스러운 대중과 서로 만나지 못한다면, 그러므로 마땅히 시방의 여러 부처님께 머리를 조아려야 하며, 또한 저 전생에 도를 구하여 행하던 바와 뜻과 원이 커서 그 서원이 일체 불법의 덕을 성취하겠다고 한 것임을 생각하고, 그 기쁨을 대신하여 이에 낮에 세 번 밤에 세 번 삼품경(三品經)의 일을 논하여서 일체의 전생에서 저질렀던 죄악을 자수하고 뉘우쳐 과거를 고치고 미래를 닦으며, 일체의 부처님께서 슬퍼해 주심을 구하기 위하여 법과 옛일로써 가엾이 여기고 불쌍히 여기며, 또한 끝없는 수의 다함없는 법으로써 가엾이 여기고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니라.又復理家!居家修道者,當以曉息心之儀式,是以若見除饉、殊越、息心之儀式,當爲敬其法衣,彼爲衆祐、如來、應儀、正眞、佛戒定慧所行之法服也。以無惡爲離一切惡,彼是衆聖仙者之表式也。是以又當爲敬彼也,亦當加愍傷於彼除饉,斯非賢爲此不軌行。또한 이가여,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마땅히 사문[息心]의 의식을 알아야 하니, 그러므로 만일 비구[除饉]의 특수한 사문의 의식을 보면 마땅히 그 법의(法衣)를 공경할 것이니, 그는 부처님․여래․응공․정진각(正眞覺)의 계(戒)․정(定)․혜(慧)를 행하는 법복(法服)이며, 악(惡)이 없음으로써 일체의 악을 떠나니, 그는 뭇 성인과 선인(仙人)의 표식(表式)인지라, 그러므로 또한 마땅히 그를 공경할 것이니라.
또한 마땅히 저 비구에게 가엾이 여기고 불쌍히 여김을 더해야 하니, 이는 어진 이의 일삼음이 아니요, 법도에 맞지 않는 행(行)이니라.至於被服,斯名:靜者、調者、神通者、如來者,表識而爲不調淨之行。又如來復曰:‘未學者不當忽易,非此彼遇勞過也,以從斯勞爲有失;若此彼亦見佛憲教之要,如所謂事次應有之;若此捐棄是勞,觀其本末爲護第一德,必爲在正以知乎將斷勞之智。’입는 의복에 이르기까지 이에 고요한 것․조복한 것․신통한 것이라 이름 하니, 여래는 그것으로 표지하여 논쟁을 조정하였느니라.”
여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배우지 못한 자를 마땅히 업신여기지 아니할 것이니, 그들을 그렇게 대하면 허물이 생기며, 이 허물을 따르면 과실이 있게 되리라. 배우지 못한 이도 또한 부처님의 법과 가르침의 요체를 보리니, 그것은 이른바 사실 있을 수 있는 일이니라.
이와 같이 이 허물을 버리고 그 본말(本末)을 관찰하는 것이 제1의 덕이 되나니, 반드시 올바름으로 허물을 곧 끊을 줄 아는 지혜가 되어야 하느니라.如衆祐所謂:‘又士不可以相忽蔑,是非時。如來有是知非我有,是以不瞋、不怒、不恚爲加彼。若以入廟者,以住廟門外,以五體而稽首,迺卻入廟,彼是空廟之居、彼是慈哀喜護廟之居、彼是正住在正次者之居,爲彼得斯,使我得廟居,爲若此。以遠去官位家者,爲彼得斯。我以齋戒罪迺禁制,制以若此。’爲與去家之意,未曾有開士在家爲得道者,皆去家,入山澤,以往山澤爲得道,以譏家居者。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보살은 서로 소홀히 여기고 멸시하지 말아야 하니, 이는 때[時]가 여래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성내지 않고 화내지 않음으로 그들을 대할 것이며, 만일 탑묘(塔廟)에 들어가는 자는 탑묘의 문 밖에 머물러서 온몸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이에 탑묘에 들어갈 것이니, 그것은 빈 탑묘이지만, 그곳은 바로 자비롭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보호하는 이의 묘탑이 있는 곳이며, 그곳은 바로 정법(正法)에 머물러 있는 이가 있을 곳이니, 그곳은 이러하기에 나로 하여금 탑묘에 있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기에 관직과 지위와 집을 멀리 떠난 자는 이것을 얻게 될 것이니라.
나는 죄업을 깨끗하게 하려고 이에 이와 같이 금제(禁制)를 제정하였으니, 집을 떠날 뜻이 있는 이를 위해서이니라. 보살로서 집에 있으면서 도를 얻은 자는 일찍이 있지 아니하였으며, 모두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서 도를 얻었나니, 그러므로 집에 있는 자를 나무라는 것이니라.夫去家,智者所稱譽,如江河沙,我一日之祠禮,一切彼布施以去家之意爲殊勝。所以者何?以施下劣故,何況布施不信無反復,盜賊弊惡、王者及大臣?非彼布施以爲實、以得足,以我有戒聞之行。집을 버린 슬기로운 이를 칭찬하고 기리니 그 수가 강의 모래와 같이 많으며, 일체 것을 보시하여 나에게 하루 동안 공양하는 것보다 집을 버리는 것이 더 뛰어나니, 왜 그런가 하면 보시는 낮은 것이기 때문이며, 더군다나 믿음이 없고 갚을 줄도 모르는 도적과 나쁜 사람들과 왕자(王者)와 대신(大臣)에게 보시함에랴.
그것은 보시가 아니라 참으로 얻을 것이 있다고 여겨서이니, 나에게 계행과 명망이 족하다고 여기는 것뿐이리라.是以入廟者,當以觀視一切除饉之衆所施行,何等除饉爲多聞?何爲明經者?何爲奉律者?何爲奉使者?何爲開士奉藏者?何爲山澤者?何爲行受供者?何爲思惟者?何爲道行者?何爲開士道者?何爲佐助者?何爲主事者?以觀視彼一切除饉之衆所施行。如其所施行行,以隨效爲之爲行,不當轉相嫉。若於虛聚言有及廟;若於廟言及虛聚,是以當愼守言行,不當以廟中言說於虛聚,亦不當以虛聚言說於廟也。그러므로 탑묘에 들어가는 자는 마땅히 일체 비구들이 베푸는 바의 행을 살펴볼 것이니, 어떤 것이 비구의 지식이 많은 것이며, 어떤 것이 경전에 밝은 것이며, 어떤 것이 계율을 받드는 것이며, 어떤 것이 사명[使]을 받드는 것이며, 어떤 것이 보살이 법장을 받드는 것이며, 어떤 것이 산과 늪이며, 어떤 것이 공양을 받을 만한 행이며, 어떤 것이 사유(思惟)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도를 행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보살의 도이며, 어떤 것이 돕는 것이며, 어떤 것이 일을 맡은 것이냐를 살필지니라.
이렇게 저 일체 비구 대중들이 베푸는 바의 행을 살펴보고, 그 베푸는 바의 행처럼 행하여서 따라 본받아 행하려고 할지니, 번갈아 서로 질투함은 마땅하지 않느니라.
만일 마을에서 말하여도 탑묘에 미치는 수가 있고, 만일 탑묘에서 말하여도 마을에까지 미치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말과 행동을 조심하여 탑묘에서는 마을을 말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마을에서는 탑묘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라.是以承事多聞者,以爲修治聞,奉事明經者,爲解經之決事。承事奉律者,爲解度殃罪之事。承事開士奉奧藏者,爲明六度無極方便之事。그러므로 지식이 많은 이를 받들어 섬겨서 듣는 것을 닦으며, 경전에 밝은이를 받들어 섬겨서 경전에서 해결한 일을 알아야 하며, 계율을 지니는 이를 받들어 섬겨서 죄에서 벗어나는 일을 알아야 하며, 보살이 심오한 법장(法藏)을 받드는 것을 받들어 섬겨서 6도(度)의 끝없음과 방편의 일을 밝혀야 하느니라.若有除饉者,爲乏應器、或乏法衣者,當以給施之,莫使生嫉於人也。所以者何?夫人以嫉妒爲結,是以當力護凡人不應儀者。所以者何?凡人者爲有失,應儀者爲無失。만일 어떤 비구에게 발우가 없거나 혹은 법의(法衣)가 없으면 마땅히 공급하여 보시해서 사람들에 대해 질투함을 내게 하지 말지니, 왜냐하면 사람은 질투로써 원결을 맺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힘을 다하여 범인(凡人)이 응공(應供)하지 않는 이들도 보호해야만 하니, 왜냐하면 범인에게는 과실이 있고 응공인 자는 과실이 없기 때문이니라.若有除饉者,未下正道,或積聚法衣、或積聚應器。是以彼除饉,用無上正眞道開導之。所以者何?其事有應,是以積聚物爲致道,積若息心有不和者,當和解之;若正法欲衰微者,自危殆其身命,以營護正法;若見除饉疾苦者,以血肉使其病者得除愈。만일 어떤 비구가 아직 바른 도에 들지 못하여 혹은 법의(法衣)를 쌓아두거나 혹은 발우를 쌓아두니, 그러므로 저 비구를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로써 인도할 것이니라. 왜냐하면 그 일에는 마땅함이 있나니, 그러므로 물건을 쌓아두어 도를 이루기 위함이라면 쌓아둘 것이니라.
만일 사문이 화합하지 못한 자가 있거든 마땅히 화해할 것이요, 만일 정법(正法)이 쇠퇴하려 하거든 스스로 그 생명이 위태롭더라도 정법을 보호할 것이며, 만일 아파서 괴로워하는 비구를 보거든 피와 살을 주어서라도 그 병자로 하여금 치유될 수 있게 할지니라.理家!若居家開士,若不布施,不以禁止人;若以施,終不悔恨;若有衆德本,以是意爲端首。理家!若此諸事、諸類、諸應,開士居家修道者,爲若此也。”이가여, 만약 집에 있는 보살로서 만일 보시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금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만일 보시한다면 끝내 후회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만일 뭇 덕의 근본이 있으면 이 뜻으로써 머리를 단정히 할지니라.
이가여, 이와 같은 모든 일과 모든 종류와 모든 마땅함을, 보살로서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이는 이와 같이 해야 하느니라.”又衆祐當說此居家開士所施行教誨法憲時,有千人皆發意求無上正眞道;復有天與人二千人,遠塵離垢諸法,法眼生。또 부처님께서 집에 있는 보살로서 행해야 할 법을 말씀하실 때에 1천의 사람들이 모두 뜻을 발하여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였으며, 다시 천상과 인간의 2천 사람들이 티끌을 멀리하고 때[垢]를 떠나서 법의 눈이 청정해졌다.於是甚理家白衆祐言:“要者衆祐!如來以敷演居家開士者家善惡之地;亦布施、持戒、忍辱、精進、思惟、智慧,於是大道當所施行。要者衆祐!去家修道開士者之所施行,願復幾微現之爲善。要者衆祐!開士去家者,爲之奈何?其所施行亦云何?”이에 심(甚)인 이가(理家)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께서 집에 있는 보살에게 집의 좋고 나쁨과 또한 보시함과 계행을 지님과 인욕과 정진(精進)과 사유(思惟)와 지혜를 펼쳐 말씀하셨으니, 이에 큰 도가 마땅히 행하여질 것이옵니다.
부처님이시여,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보살로서 행하여야 할 바를 원컨대 다시 조금이라도 말씀해 주시면 좋겠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보살이 집을 버리는 것은 어떠하며, 그 행하여야 할 바는 또한 무엇입니까?”衆祐告甚理家曰:“善哉理家!今汝迺以問如來,開士去家修道者之所施行?善哉理家!當爲汝說開士去家之事,其所施行,汝勉進善思念之。”甚理家受教,從衆祐而聽。부처님께서 심(甚)인 이가(理家)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이가여. 지금 그대는 여래에게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보살이 행할 바를 묻는구나. 훌륭하구나, 이가여. 내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보살이 집을 버리는 일과 그 행할 바를 말하리니, 그대는 힘써 정진하며 잘 생각할지어다.”
심(甚)인 이가(理家)는 가르침을 받아 부처님으로부터 들었다.衆祐曰:“理家!開士去家修道者,若頭燒然,譬若鎧爲精進以求智。去家者其初始爲若此,次修治爲聖典。又何謂去家者之聖典?所謂趣得一衣爲足,亦以善之;一食一牀,病瘦一醫藥爲足,亦以善之,是爲聖典。何以故謂之爲聖典?以爲修治彼一切道品法,是故謂之爲聖典。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가(理家)여, 보살로서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이는 머리에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마치 투구와 같은 정진으로 지혜를 구할 것이니, 집을 버리는 자는 그 처음에는 이와 같이 할 것이며, 다음으로는 성전(聖典)을 닦을 지니라.
또 어떤 것을 집을 버리는 자의 성전이라 말하는가? 이른바 한 벌 의복을 얻으면 만족하게 여기고 또한 훌륭하게 여기며, 한 끼의 밥과 하나의 평상과, 병들고 수척함에 한 번의 의약(醫藥)일지라도 만족하게 여기고 또한 훌륭하게 여기니, 이것이 바로 성전이니라.
무슨 까닭에 성전이라고 하는가? 저 일체의 도품(道品)을 닦는 법이기에 그러므로 성전이라고 하느니라.又開士去家修道者,爲有十知足之德,身以服法衣。何等爲十?以爲羞慚故,身服法衣;以避風暑故,身服法衣;以辟蚊蝱蟆子故,身服法衣;欲以見息心形狀故,身服法衣;亦是法衣之神爲十方之神故,身以服法衣;以患離婬樂,是以不樂婬之樂;以樂安得淨,是以除斷衆勞之樂;不以肥舳,爲是道行;行在聖道重任,我亦以自修;如以一時有法衣,如被服法衣故。以是十德自觀,至于壽終,閑居靜處,以不行丐。또 보살로서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자는 열 가지 만족함을 아는 덕이 있어서 몸에 법의(法衣)를 입나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에 몸에 법의를 입는 것이요, 바람과 더위를 피하려고 몸에 법의를 입는 것이요, 모기와 등에를 피하려고 몸에 법의를 입는 것이요, 사문의 형상을 보이려고 몸에 법의를 입는 것이요, 또한 이 법의(法衣)의 신(神)은 시방의 신(神)이기 때문에 몸에 법의를 입는 것이요, 음탕한 즐거움[謠樂]을 싫어하고 떠나기에 그러므로 음탕한 즐거움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요, 청정함을 좋아하기에 그러므로 뭇 괴로움인 낙(樂)을 끊는 것이요, 살찌고 기름지지 않은 것으로 도행(道行)을 삼음이요, 거룩한 도의 중대한 책임을 행하려고 나도 또한 스스로 닦는 것이요, 어느 한때 법의가 있었다면 법의를 입은 것과 같기 때문이니, 이 열 가지 덕으로써 스스로 관찰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한가하게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빌러 다니지 아니하느니라.何等爲十?我自以我業而爲命,不以非異業;若有人來施我者,以先修治三寶,後乃而受其施;我若欲從人乞丐,若不欲施人者,以非哀加彼己也;我當自食所修行之食,以爲不違如來之言誨、以得成知足重任之本、以降憍慢、以得成無見頂之德本;我亦見布施,亦如以自教;若往行乞丐,我亦不得有所適莫於男女,以我等意於天下人、以得成一切敏智之重任。무엇이 열 가지인가? 나는 스스로 나의 업(業)으로써 생활하고 다르지 않은 업으로써 하지 않는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보시하거든 먼저 3보(寶)께 바친 후에 그 보시를 받는 것이요, 내가 만약 다른 사람에게 받고자 하거나 만약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비애(悲哀)를 저에게 보태는 것이요, 나는 마땅히 수행한 바의 음식을 먹어 여래의 말씀과 가르침을 어기지 않는 것이요, 만족함을 알아 중대한 책임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요, 교만을 항복 받는 것이요, 볼 수 없는 정수리[無見頂]의 덕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요, 나도 또한 보시함을 보고 그와 같이 스스로 가르치는 것이요, 만일 가서 걸식한다면 나는 또한 갈 곳을 정해 두지 않고 남녀를 가리지 않을 것이며, 나의 평등한 뜻으로 천하 사람들이 일체의 민첩한 지혜를 이루는 중대한 책임을 얻게 하는 것이다.是,理家!十德,去家開士者以自觀,至于壽終,閑居靜處,以不行丐。若有人來請者所住處,其人志意信喜道者,我不宜當彼往;設使往食,若能以自益亦能益人者,可往受施。我教開士可彼索。是爲十德,以自觀可以處於樹下坐宿止。이것이 바로 이가(理家)의 열 가지 덕이니라. 집을 버린 보살은 스스로 관찰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고요한 곳에 한가하게 있으면서 빌러 다니지 않으니, 만일 어떤 사람이 와서 청하되, 가려고하는 곳에서 그 사람이 도를 믿고 좋아하거든, 나는 마땅히 그곳에 가지 아니하며, 설령 가서 먹는다 하더라도 자기도 이롭고 또 남까지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그곳에 가서 보시를 받을 것이니라.
나는 보살에게 구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치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 덕이 되느니라. 스스로 관찰하여 나무 아래에 있으면서 앉고 자고 쉴 것이니라.何等爲十?以其自由爲往彼;以不名有;彼牀臥以不閉門;於山澤以去離愛爲彼居;以少欲少事爲成德;捐棄軀命以不自惜;樂獨靜以遠離戀聚會;以行修身不食;以定意爲安靜一意;閑處思惟爲無益。是,理家!十德以自觀,開士去家者爲可處於樹下居止。무엇이 열 가지인가? 그가 자유로이 저곳에 가는 것이요, 저 평상과 누울 것이 있다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요, 문을 닫지 않는 것이요, 산과 늪에서 사랑을 버리고 떠나 그곳을 거처로 삼는 것이요, 욕심이 적고 일이 적은 것으로써 덕을 이룸으로 삼는 것이요, 몸과 목숨을 버리되 스스로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요, 홀로 고요한 것을 좋아하여 그리움이 모여 쌓임을 멀리 떠나는 것이요, 수행으로 몸을 닦아 먹지 않는 것이요, 뜻을 정함으로써 한 가지 뜻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요, 한가한 곳에서 사유함도 이익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가의 열 가지 덕이니라. 이로써 스스로 관찰하여 집을 버린 보살이 나무 아래에 거처하면서 머물 수 있는 것이니라.又復理家!或彼開士去家修道遊於山澤者,若欲修治經,若用誦利經,故爲入廟。若居廟者,意向以山澤爲居,是猶爲彼山澤居也。求法之行者,爲一切物不我想,一切諸法爲他人有想。又開士去家修道者若遊在山澤,當自省察,我今何以遊此山澤中?또한 이가여, 혹 저 보살이 집을 버리고 도를 닦거나 산과 늪에서 노니는 자가 만일 경전을 닦고자 하며, 만일 이로운 경전을 외우고자 하거든 탑묘에 들어갈 것이니라. 만일 탑묘에 있으면 뜻이 산에 있고 싶어지나니, 이것이 오히려 저 산과 늪에 사는 것이 되느니라.
법을 구하는 수행자는 일체의 물건을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일체의 모든 법을 다른 사람의 소유라고 생각할 것이니라.
또 보살로서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자가 만약 산과 늪에서 노닐고 있다면, 마땅히 스스로 살피되, ‘나는 지금 어찌하여 이 산과 늪 가운데서 노닐고 있는가?’라고 할 것이니라.不但以山澤居,謂之息心也。所以者何?此間多有不化、不守、不度、不應、不修行者,皆遊山澤,所謂:禽獸、衆鳥、獼猴、㹢玃、惡人賊盜,皆遊於山澤,亦不謂彼爲息心也。至於我所求山澤居者,當以成我,彼所求爲是息心求。이다만 산과 늪에 사는 것만으로는 사문이라 이르지 못할 것이니, 왜 그런가 하면, 이 사이에는 교화되지 않은 자와 지키지 않은 자와 제도하지 못한 자와 응하지 않는 자와 수행하지 않은 자들도 많이 있어서 모두 산과 늪에 노닐고 있으며, 이른바 새․짐승․뭇 새들과 원숭이와 큰 원숭이와 나쁜 사람과 도적들도 모두 산과 늪에서 노닐고 있으나 또한 그들을 사문이라고 하지 않느니라.
내가 산과 늪에 살고 싶어하는 것은 마땅히 내가 구하는 그것을 이루려는 것이니, 이 사문을 구하기 위해서이니라.亦又何故開士息心?所謂志以爲不亂,爲以得是持周滿達事故;以聞爲無足;以得辯辭;以慈心不虧大哀;以不離專由于五通,興隆六度無極,卻一切敏之,意不擇捨,爲行㩲謀之慧;以法施合聚人民,成就人民四合聚之事,爲不擇捨六可思念之;以聞精進不虧損,爲擇法本末正度之道因緣,智亦不入正道之事,爲護正法之事;以信罪福爲正見思慮所務;以虧斷爲正思,隨所喜爲說法、爲正言,隨行盡之,備足爲正業、瘕疵之續;以除斷爲正命;以道臻到爲正方便;以不忘忽爲正志,一切敏智之臻到爲正定。또 무슨 까닭으로 보살 사문이라 하느냐 하면, 이른바 뜻이 어지럽지 아니하여 이것을 얻어 지니고 두루 만족하여 일에 통달한 까닭에 듣는 것에 만족함이 없어서 변재를 얻고, 자비한 마음을 가져서 결함이 없으며, 크게 슬피 여기는 마음을 여의지 아니하고, 오로지 5통(通)으로 말미암아 6도(度)를 일으키매 다함이 없느니라.
일체를 공경하여 뜻으로 가려서 버리지 아니하고, 방편의 지혜를 행하여서 법의 보시로써 인민들을 모으며, 인민들이 사방에서 모여드는 일을 성취하되 가려서 버리지 아니하고 또한 은혜로 여겨 생각하며, 정진하는 것을 들으면 훼손하지 아니하고, 법의 본말(本末)과 바르게 제도하는 도의 인연을 가려서 지혜가 또한 바른 도에 들지 못했을지라도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일로 삼느니라.
죄와 복을 믿는 것으로 바른 견해[正見]를 삼으며, 힘쓸 바를 생각하는 것을 끊는 것으로써 바른 생각[正思]으로 삼으며, 기뻐하는 바에 따라 법을 설하는 것으로써 바른 말[正言]을 삼으며, 행함을 따라 다하여서 두루 만족시켜 주는 것을 바른 업[正業]으로 삼으며, 흠결이 지속됨을 끓어 없애는 것으로 바른 생활[正命]을 삼으며, 도로써 나아가는 것을 바른 방편[正方便]으로 삼으며, 잊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 것으로써 바른 뜻[正志]을 삼으며, 일체의 민첩한 지혜에 이르는 것을 바른 정[正定]으로 삼느니라.若以空爲不想之行喜;若以得不顧爲斷俗,所有依其義不以文,依其法不以人,依其智不以識。本文演義歸,不以末敍義,斯理家謂爲開士去家者息心求也。만일 공(空)을 얻으면 생각하지 않는 행의 기쁨으로 삼고, 만일 원(願)하지 않음을 얻으면 세속을 끓는 것으로 삼으니, 가진 바를 그 뜻에 의지하고 글에 의하지 않으며, 그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으며, 그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하지 않으며, 본문(本文)의 연의(演義)에 귀의하고 말단의 서의(叙義)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이가(理家)를 일러 집을 버린 보살이 사문을 구하는 것이라 하느니라.又去家修道者,不當以多從事,若此思惟其本末故,當爲一切衆生不與之從事,明哲不但與一人不從事也。又有四,是去家開士者之從事也,如來之所教。또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자는 많은 일에 많이 종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니라. 만약 이렇게 그 본말(本末)을 사유한 까닭에 마땅히 일체 중생과 더불어 종사(從事)하지 않는다면, 명철(明哲)한 이는 다만 한 사람과 더불어 종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네 가지가 있나니, 이것이 집을 버린 보살이 종사할 것으로서 여래가 가르치는 바이니라.何謂四?一曰、與講經者從事;二曰、與就人者從事;三曰、與供養如來者從事;四曰、與發一切敏意不亂者從事,離彼不當以多從事。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느냐 하면, 첫째는 경을 강하는 이와 함께 종사하는 것이요, 둘째는 성취한 사람과 함께 종사하는 것이요, 셋째는 여래께 공양하는 이와 함께 종사하는 것이요, 넷째는 일체의 민첩한 뜻을 발하여 산란하지 않은 이와 함께 종사하는 것이니, 그러한 이를 제외하고는 많이 종사함이 마땅하지 않느니라.又開士遊於山澤者當自揆察,我爲何故來至於此?彼是思惟,我以恐畏來至此。何謂恐畏?此群聚,恐畏與人從事婬、怒、癡、憍慢、自恣,恐畏惡友,恐畏嫉慳,恐畏色聲香味細滑,恐畏功稱恭敬利,恐畏不見言見、不聞言聞、不知言知、不解言解,恐畏息心垢,恐畏更相嫉妒,恐畏生死五道往來所墮,恐畏欲界、色界、無色界,恐畏陰耶、死耶、勞耶、天子耶,恐畏惡道地獄、畜生、鬼神,恐畏倉卒一切是衆惡之念;我來到此不可以此居在於家。若在群聚之中,行不應道之行,不得免彼衆恐之事。또 보살로서 산과 늪에 노니는 자는 마땅히 스스로 살피되, ‘나는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 왔느냐?’라 하고, 그는 이렇게 사유하되, ‘나는 두려워하므로 여기에 왔노라’라고 하니,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이 무리들이 모인 것을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음탕하고 성내며 어리석고 교만하며 스스로 방종하는 것에 종사함을 두려워하며, 나쁜 벗을 두려워하며, 질투와 간탐을 두려워하며, 색․소리․냄새․맛․매끄러움을 두려워하며, 공로․칭찬․공경․이로움을 두려워하며,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 말하고 듣지 않은 것을 들었다 말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사문의 때[垢]를 두려워하며, 번갈아 서로 질투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나고 죽어 5도(道)를 오고가며 타락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두려워하며, 음(陰)이며 죽음이며 수고로움이며 천자(天子)임을 두려워하며, 악도(惡道)인 지옥․축생․귀신을 두려워하며, 갑자기 닥치는 일체의 시비와 악한 생각들을 두려워하므로 나는 여기에 온 것이요 집에 있을 수 없으니, 만일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있다면 마땅하지 않은 도행(道行)을 행하여서 저 뭇 두려운 일들을 면할 수 없으리라.亦彼昔開士得免度衆畏者,彼一切已居山澤之力勢,得臻到無畏,是謂自然。是故我以恐畏,欲越度衆畏,爲居山澤矣。又一切是畏皆由身之生,以慕戀身以修身;以是身以愛身;以盛身以思身;以見身以處身;以想身以護身之所生也。또한 저 옛날 보살이 이 여러 가지 두려움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모두 산과 늪에 있었던 힘으로 두려움이 없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니, 이를 일러 자연(自然)이라고 하며, 그러므로 나는 두려워함을 벗어나기 위하여 산과 늪에 있는 것이로다.
또 일체의 두려움이란 모두 몸이 살아 있음으로 말미암나니, 몸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며, 몸을 가꾸며, 몸을 옳다고 여기며, 몸을 사랑하며, 몸을 치장하며, 몸을 생각하며, 몸을 돌보며, 몸을 두며, 몸을 생각하며, 몸을 보호함으로 해서 생긴 것이니라.假使由於山澤居,爲以有由身之意,慕戀身修身,是身愛身、思身、見身、處身、想身、有身、護身之意者,我空爲居山澤耳。又居山澤者爲無身想;居山澤者無異想;居山澤者不見論議,不修自見身,無在顚倒,無有無爲想,何況有勞想?가령 산과 늪의 거처에서 노닐면서도 몸으로 말미암은 뜻을 두어서 몸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며, 몸을 가꾸며, 몸을 옳다고 여기며, 몸을 사랑하며, 몸을 생각하며, 몸을 돌보며, 몸을 두며, 몸을 생각하며, 몸을 보호하려는 뜻을 둔다면, 나는 헛되이 산과 늪에 있는 것이리라.
또 산과 늪에 있는 자는 몸에 대한 생각이 없어야 하며, 산과 늪에 있는 자는 다른 생각이 없어야 하며, 산과 늪에 있는 자는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아야 하며, 자신을 돌보는 데에 떨어지지 않아야 하며, 뒤바뀜이 없어야 하며, 일삼음이 없다는 생각도 두지 않아야 하거든, 어찌 하물며 복잡한 생각을 하리오.居山澤者名曰:一切諸法寂然哉!諸法無所著哉!諸樂亦無所著哉!諸想以不愛哉!色聲香味細滑不與錯忤哉諸定不以怙哉!意以自整不亂哉!以下諸重擔之畏哉!以度夫汪洋之澤哉!夫聖之典以造哉!姦惡之屬悉知足哉!爲重任少欲哉!以智慧知足哉!爲知足哉!爲知足哉!爲重任少欲哉!爲應哉!本末行以解哉!爲一切獄斷所修事訖哉!以爲永解除。산과 늪에 있는 이를 이름하여 ‘일체의 모든 법이 고요하다’고 하며, ‘모든 법에 집착하는 바가 없다’고 하며, ‘모든 낙(樂)에도 또한 집착하는 바가 없다’고 하며, ‘모든 생각으로 애착하지 않는다’고 하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부드러움에도 뒤섞여 얽히지 않는다’고 하며, ‘모든 정(定)에도 자부하지 않는다’고 하며, ‘뜻을 스스로 정돈하여 산란하지 않다’고 하며, ‘모든 무거운 짐의 두려움을 놓아 버렸다’고 하며, ‘크고 넘실거리는 늪을 건넜다’고 하며, ‘위대한 성인의 경전에 나아갔다’고 하며, ‘간악(姦惡)한 무리들을 모두 만족할 줄 알게 한다’고 하며, ‘중대한 책임을 위하여 욕심을 줄인다’고 하며, ‘지혜로써 만족함을 안다’고 하며, ‘만족함을 알고, 만족할 줄 알아 중대한 책임을 위해 욕심을 줄이므로 공양을 받을 만하다’라고 하며, ‘본말(本末)의 행(行)을 이해한다’고 하며, ‘일체의 감옥을 끊기 위하여 닦을 바의 일을 마쳤다’고 하니, 영원히 벗어나 버렸기 때문이니라.理家!譬如山澤中有樹木草穢之屬,都無可畏、都無可恐,如是理家!開士遊於山澤者,執志當如草木牆石之喩,身以受行之,彼誰畏者?彼以恐怖思惟身本末,我都無身,非人、非命、非丈夫、非類、非女、非先、無先、無造者、無教造者、無與者、無興起者。이가여, 비유컨대 산과 늪 가운데 나무나 풀 따위의 지저분한 것들만 있어 전혀 두려울 것이 없고 전혀 무서울 것도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이가여, 보살로서 산과 늪에 노니는 자는 뜻 가지기를 마땅히 풀과 나무와 담장이나 돌과 같이하여 몸소 느끼고 행해야 하나니, 저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그는 두려워함으로써 몸의 본말을 생각하니, ‘나는 도무지 몸이 없다. 사람도 아니며, 목숨[命]도 아니요, 장부(丈夫)도 아니며, 무리[類]도 아니요, 여자도 사내도 아니며, 짓는 자도 없고, 짓게 하는 자도 없으며, 함께하는 자도 없고, 함께 일어나는 자도 없다’고 하느니라.諸是之畏,但以不成之想有是畏耳!今我宜不造不成之想有是畏耳!今我不宜造不成之想,當如樹木草穢之屬,亦爲若此無響,以解一切彼法以具行之。以響斷山澤居,去離婬塵。無諸響山澤居,非我非有物者。모든 이러한 두려움은 다만 진실하지 않은 생각으로써 이러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니, 이제 나는 마땅히 진실하지 않은 생각으로 있게 된 이 두려움을 짓지 않을 뿐이며, 이제 나는 진실하지 않은 생각을 짓는 것이 옳지 않으므로 마땅히 나무와 풀, 잡초 따위와 같이하리라.
또한 이와 같이하여 울림[響]이 없이 일체를 벗어나서 저 법을 갖추어 행하며, 울림을 끊고서 산과 늪에 살면서 음행의 티끌을 버리고 떠나니, 모든 울림이 없이 산과 늪에 있으므로 나도 아니요 물질이 있는 것도 아니니라.又遊於山澤者以復思惟,是通達道品之法者,以居山澤。居山澤者爲合聚十二精;居山澤者解諸諦;居山澤者知諸陰,以滑制諸情,以禽諸進入,不忘忽道之意;諸佛所讚,衆聖所稱譽,欲度世者所事也。또 산과 늪에 노니는 자는 다시 사유(思惟)하되, ‘이 도품(道品)의 법을 통달한 이는 산과 늪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산과 늪에 있는 자는 열두 가지 정(精)을 합쳐 모으기 위함이며, 산과 늪에 있는 자는 모든 진리를 이해하며, 산과 늪에 있는 자는 모든 음(陰)을 알아서 모든 정욕(情欲)을 제어하며, 모든 파고듦[進入]을 억제하며, 도의 뜻을 잊지 않느니라. 이는 모든 부처님들께서 찬탄하시는 바이며, 뭇 성인들이 칭찬하고 기리는 바이니, 세상을 벗어나려고 하는 자가 할 일이니라.居山澤者以解一切敏智之方術也。又遊於山澤者,以爲不久周滿六度無極之行。得彼者云何?산과 늪에 있는 자는 일체의 민첩한 지혜의 방술(方術)을 이해하며, 또 산과 늪에서 노니는 자는 오래지 않아 6도(度)의 다함없는 행을 두루 만족하게 되리니, 그것을 얻은 자는 어떠한가?遊於山澤者若不自惜其軀命者,是爲布施度無極;若以依精之德,爲成三愼者,是爲戒度無極;若意不亂,亦可是一切敏不異道者,是爲忍辱度無極行;至於未得忍終而不起者,是爲精進度無極;若以得一心不以從致敏哉,但以隆德本,是爲一心度無極;若見如山澤道亦爲若此,以分別衆事者,是爲以智慧度無極,開士以道得。산과 늪에서 노니는 자가 만일 자신의 몸과 목숨을 스스로 아끼지 않는다면 이는 보시(布施)바라밀의 다함없음이요, 만일 정진(精進)하는 덕에 의지하여 세 가지 삼감[愼]을 이룬다면 이는 계(戒)바라밀의 다함없음이요, 만일 뜻이 어지럽지 않고 또한 일체에 민첩하여 도와 다르지 않다면 이는 인욕(忍辱)바라밀의 다함없는 행이요, 아직 법인(法忍)을 얻지 못하여 끝내 일어나지 않으면 이는 정진(精進)바라밀의 다함없음이요, 만일 한결같은 마음을 얻은 것으로써 민첩함을 따르지 아니하고 다만 덕의 근본을 높인다면 이는 일심(一心)바라밀의 다함없음이요, 만일 몸이 산과 늪 같고 도(道)도 또한 이와 같아서 뭇 일들을 분별한다면, 이는 지혜바라밀의 다함없음이니, 보살이 도로써 얻은 것이니라.又復理家!修治四法,我以教開士居山澤,何謂四?或有開士,多聞明於法決者,若以其聞行在本末,法可居於山澤;又開士以得五通,欲以成就天龍鬼神者,可居於山澤;或有開士勞盛者,彼以不從事勞卽爲薄,可居於山澤;亦欲抑制勞,以自勸勵,是以皆由聞。夫遊彼者,以得周滿一切淸淨法,迺後以下墟聚郡縣國邑,下爲衆人講授法、修治法。若此也,理家!我教開士居山澤也。또한 이가(理家)여, 네 가지 법을 닦았으면 나는 그 보살에게 산과 늪에 있으라고 가르치니, 무엇을 네 가지라 하는가? 혹 어떤 보살이 들은 것이 많아 법을 결정하는 데 밝으며, 만일 그 학문과 수행으로써 본말(本末)의 법을 살핀다면 산과 늪에 있을 수 있으며, 또 보살로서 5통(通)을 얻고서 하늘과 용과 귀신을 성취해 주고자 하는 자는 산과 늪에 있을 수 있으며, 혹 어떤 보살이 번뇌가 치성하더라도 저가 번뇌를 따라가지 않아서 번뇌가 곧 희박해지면 산과 늪에 있을 수 있으며, 또한 번뇌를 억제하여 스스로 격려하고 힘쓰고자 한다면 이로써 모두 그의 명성을 듣게 되리니, 그곳에서 노니는 자는 일체의 청정한 법을 두루 만족하게 얻어 후에 마을과 고을과 국도(國都)에 내려와서 뭇 사람들을 위하여 법을 설명해 줄 것이니라. 닦은 법이 이와 같으니, 이가여, 나는 그런 보살이면 산과 늪에 있으라고 가르치리라.又去家修道者遊於山澤,以修治經、誦習經故入衆者,以執恭敬亦謙遜。夫師友講授者、倀中少年者,爲以尊之,不以懈怠;自所修,以不廢人所修,亦不以求承事恭敬。若此當以觀察如來、應儀、正眞佛者,爲諸梵釋天人衆生所供養;爲天上天下尊者福田,彼尚不求人承事也,自作事不欲煩人,何況餘者?未以學、甫欲學,反欲人承事耶!또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자는 산과 늪에 노닐면서 경을 닦을 것이니, 경을 외우고 익히기 위한 까닭이니라.
대중 속에 들어가는 자는 공경하며 또 겸손해야 하니, 스승과 벗이 경을 설명해 주면 어른이건 소년이건 모두 존경해야 하며, 스스로 닦을 바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닦는 것도 막지 않아야 하며, 또한 받들어 섬겨 공경하기를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이니라.
이와 같이 관찰할 것이니, 여래․응공․정진(正眞) 부처님께서는 모든 범천과 제석(帝釋)과 하늘과 인간의 중생들에게 공양을 받으셔서 천상(天上) 천하(天下)에 거룩한 복전(福田)이 되지만, 저 부처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받들어 섬기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며, 스스로 하시는 일로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려 하지 않으시거늘, 하물며 그 밖의 것이겠는가?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고자 하거든, 어찌 도리어 다른 사람이 받들어 섬기기를 바라겠는가?又我當爲天下人養者,我當以供養人,都不我從人求供養。所以者何?以供養重者,理家!除饉者,不得法之助供養故,爲助我不以法故。夫欲以爲法助人者,以爲若此。以是供養故,爲助我不以法故,彼以自懷已正信,以爲有供養,彼卽與世物雜爲,不是大祐人者。是以若欲往詣佛、師友者,所以身意行有決,乃可往慕。또 나는 마땅히 천하 사람들을 위하여 공양할 자가 되리니, 나는 마땅히 사람들을 공양할 것이로되, 도무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공양 받음을 구하지 않으리니, 왜 그런가 하면 공양하는 것이 더 중하기 때문이니라.
이가여, 비구가 법으로 공양하는 것을 도움을 얻지 못한 까닭에 나만 돕게 되니, 법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대저 법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자는 이와 같이 해야 하니, 이야말로 공양이기 때문이요, 나만 돕게 됨은 법으로써 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는 스스로 바른 믿음이 없으면서 공양을 받은 것이니, 그는 곧 세속 물욕과 섞인 것이요, 사람을 크게 돕는 자가 아니니라. 그러므로 만일 스승과 벗에게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몸과 뜻과 행함에 결단성이 있어야만 이에 가서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니라.我教者師友以異之行無過,以不訶問諷起誦習,爲教誨之積聚。是以欲諷起經,爲不用軀命,慕樂法隨順師意,以求法利,不爲求一切恭敬稱譽之利。若以從師受幾微四句之頌,以諷誦之;若以在布施、持戒、忍辱、精進、思惟、智慧,而以彼供養師者,如其所修,四句頌之字數,爲劫之數,以供養彼師者,尚未爲卒師之敬,亦以質直不虛飾不佞諂一切行之供養,豈復謂法之敬?나를 가르치는 스승과 벗은 다른 것을 행하더라도 허물이 없으면 꾸짖지 않나니, 묻고 외우며 익히는 것이 가르침의 쌓임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경을 외우고자 한다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법을 사모하고 좋아하며, 스승의 뜻을 따름으로써 법의 이로움을 구할 것이요, 일체의 존경과 칭찬하고 기림의 이로움을 구하려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라.
만약 스승으로부터 보잘것없는 4구(句)의 게송을 받았을지라도 외울 것이며, 만일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에 있다면 그것으로써 스승에게 공양할 것이니, 그 닦는 바 4구 게송의 글자 수와 같은 수의 겁(劫) 동안 저 스승에게 공양하더라도 오히려 끝내 스승에게 공양함이 되지 못하느니라.
또한 바탕이 정직하여 헛되이 꾸미지 않고 아첨하지 않는 일체의 행(行)으로써 공양한다 하여도, 어찌 법을 공경한다고 말하겠는가?又理家!若斯意念生,以有德之意、有佛亦法之意、有自患離婬之意、有寂靜之意。若以修治四句之頌,遵而行之,如其劫數,彼以供養其師者,尚未爲卒法之敬。또 이가(理家)여, 만약 이러한 생각을 내어서 덕의 뜻이 있고, 부처님도 또한 법의 뜻이 있으며, 스스로 근심하여 음욕을 여읠 뜻이 있으며, 고요함에 뜻이 있다면, 만약 4구의 게송을 닦고 준수하여 행하여서 그 겁의 수와 같은 시간 동안 저가 그 스승을 공양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끝내 법을 공경함은 되지 못하느니라.理家!當以知此之事。若此也,法之福德如無數,獲智亦無量。是故開士欲以擇上法,猶以無數爲敬正法。若彼思惟,若此以聞淨戒事。이가(理家)여, 마땅히 이 일이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나니, 법의 복덕은 숫자로 헤아릴 수 없으며, 지혜를 얻음도 또한 한량없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최상 법을 선택하려면 오히려 수없이 바른 법을 공경해야 하며, 그와 같이 사유(思惟)하며, 이와 같이 청정한 계행을 들어야 하느니라.何謂是淨戒事?去家開士者有四淨戒事。一曰、造聖之典;二曰、慕樂精進德;三曰、不與家居去家者從事;四曰、不諛諂山澤居。是爲去家開士者四淨戒事也。무엇을 청정한 계행이라 하는가? 집을 버린 보살에게는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나니, 첫째는 성인의 경전에 조예가 있음이요, 둘째는 정진의 덕을 사모하고 좋아함이요, 셋째는 집에 있는 이와 함께 종사하지 않음이요, 넷째는 아첨하지 않고 산과 늪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집을 버린 보살의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니라.復有四淨戒事。何謂四?以守愼身身無罣㝵;以守愼言言無罣㝵;以守愼心心無罣㝵;去離邪疑造一切敏意。是爲去家開士者四淨戒事。다시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몸을 지키고 조심하여 몸에 걸림이 없음이요, 말을 지키고 조심하여 말에 걸림이 없음이요, 마음을 지키고 조심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음이요, 삿된 의심을 버리고 일체의 민첩한 뜻에 나아감이니, 이것이 바로 집을 버린 보살의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니라.復有四淨戒事。何等爲四?一曰、以自識知;二曰、以不自貢高;三曰、以不形相人;四曰、以不謗毀人。是爲去家開士者四淨戒事也。다시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스스로 아는 것이요, 둘째는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모양으로 사람을 보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사람을 훼방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집을 버린 보살의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니라.復有四淨戒事。何謂四?一曰、已可諸陰爲幻法;二曰、以可諸情爲法情;三曰、以可諸入爲虛聚;四曰、不隨方俗之儀式。是爲理家去家開士者四淨戒事。다시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모든 음(陰)을 허깨비 같은 법으로 여김이요, 둘째는 모든 정(情)을 법의 정으로 여김이요, 셋째는 모든 입(入)을 공(空)의 모임으로 여김이요, 넷째는 방속(方俗)의 의식을 따르지 아니함이니, 이것이 바로 이가(理家)로서 집을 버린 보살의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니라.復有四淨戒事。何等四?一曰、以不自計我;二曰、遠離是我有;三曰、斷絕常在除;四曰、以下因緣法。是爲去家開士者四淨戒事。다시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스스로 나를 계교하지 아니함이요, 둘째는 내가 있다는 것을 멀리 떠남이요, 셋째는 없다는 소견[斷見]과 있다는 소견[常見]을 끊어 없애는 것이요, 넷째는 인연법을 버림이니, 이것이 바로 집을 버린 보살의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니라.復有四淨戒事。何謂四?一曰、以解空;二曰、以無想不怖,三曰、以大悲衆人;四曰、以爲可非身。是爲去家開士者四淨戒事。다시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공(空)을 이해함이요, 둘째는 생각이 없어서 두려워하지 않음이요, 셋째는 뭇 사람들을 크게 불쌍히 여김이요, 넷째는 몸이 아니라고 여김이니, 이것이 바로 집을 버린 보살의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니라.
그는 항상 청정한 선정(禪定)을 듣기에 이와 같이 관찰하나니, 무엇을 청정한 선정[定]이라 하는가? 일체의 법을 통달하여 딴 일을 하거나 뜻이 흐르지 아니하며, 결단한 뜻이 있고, 전일한 뜻이 있으며, 착오되지 않은 뜻과 가지 않는 뜻과 달리지 않는 뜻과 자신을 위하여 머물러 있는 뜻과 정욕에 어울려 종사하지 않은 뜻으로 허깨비 같은 법을 관찰하되, ‘내가 만일 허깨비 같은 법이라면 정(精)도 또한 그러하리라’라고 하여 다시 행함이 없어서 곧바로 존재할 수 없게 되니, 이미 저 바른 선정[定]으로 옮겨갔기에 이를 바른 선정이라 하느니라.彼以爲常聞淨定以故,以若此觀之。何謂此淨定?以通一切法,不爲餘事意行,爲有決意、爲一端意、爲不錯忤意、爲以不住意、爲不馳意、爲自身住止意,不與情欲從事意、爲以觀幻之法,我若幻法情亦然,以無復行,便無可存,已履彼正,是謂正定。만약 법에 있어서 법과 같이 한다면, 이와 같음을 또한 선정이라 하리라.
이와 같음을 관찰하기 위하여 그는 항상 청정한 지혜를 듣나니, 무엇을 청정한 지혜라고 하는가? 모든 법을 선택하는 지혜이니, 그것을 일러 지혜라 하느니라. 느끼지 않는 상(相)은 지어감이 없고, 짓지 않는 상(相)은 존재함이 없으며, 함이 없는 상(相)은 내달리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이가(理家)여, 법을 이와 같이 관찰한다면 이를 일러 집을 버린 보살이 행하는 바라 하리라.”若法在如法,若此亦謂定,爲觀若此。彼常聞淨惠。何謂斯惠者?諸法之擇智,謂彼爲惠也。不受之相無相行,不造之相無存矣,無爲之相不馳騁矣。是以理家!以觀法若此者,是謂去家開士之所施行也。”이 경을 말씀하실 때에 5백의 사람들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수기함을 얻었다.
또 심(甚)인 이가(理家)와 그의 무리들은 같은 소리로 말하였다.
“전에 없던 일이옵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의 좋은 말씀이 이러하옵니다. 또한 집의 악덕(惡德)이 중대한 것과, 또 집을 버리는 것이 좋은 덕임을 거룩하신 부처님께서 이미 밝히셨나이다. 저 집에 있는 사람은 악덕이 많고, 집을 버리는 것은 무수한 덕의 선함이 있나니, 어찌 부처님으로부터 집을 버리는 계(戒)를 받아 비구의 행에 나아가지 아니하오리까?”又以說是經時,有五百人造起無上正眞之道意。又甚理家及其等,同出聲言:“未曾有,要者衆祐!至於如來之善言迺如是!亦家之惡德重任之行;亦去家諸德善斯。尊者衆祐!已爲明彼居家人多惡德,至於去家無數之德善已,寧可得從衆祐,受去家之誡,就除饉之行?”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집을 버리는 것은 이가(理家)가 감당하기 어려우니, 순후한 덕의 근본을 연구하고 가르침을 받들어 지닐지니라.”衆祐報言:“去家者,理家難堪,能究暢淳德,善奉持教誨。”이가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집을 버리는 것은 비록 감당하기 어려우나, 여래께서는 오히려 마땅히 저희들에게 집을 버리고 도를 닦게 하셔야 합니다.”理家復白佛言:“衆祐!去家者雖難堪任,如來猶當可己等去家爲道也。”부처님께서는 곧 자씨(慈氏)보살과 아울러 일체행정(一切行淨)보살로 하여금 저 이가들의 청(請)을 들어 보도록 하셨다.
자씨보살은 2백 명의 이가를 뽑아 집을 버리고 도를 닦게 하였고, 일체행정보살은 3백 명의 이가를 뽑아 집을 버리고 도를 닦게 하였다.衆祐便使慈氏開士及一切行淨開士聽,擧彼理家等。慈氏開士擧二百理家,一切行淨開士擧三百理家,去家修道。그때에 현자(賢者) 아난이 심(甚)인 이가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나라와 집에 있는 것이 집을 버리는 거룩한 도보다 좋다고 여겼습니까?”爾時賢者阿難謂甚理家言:“卿何見居國居家,有能樂於法去家之聖道者?”심(甚)인 이가가 아난에게 말하였다.
“저는 몸의 안락함을 탐하거나 사모한 것이 아니라 중생의 낙(樂)을 이루고자 한 까닭에 집에 있었을 뿐입니다. 또 여래께서 스스로 저에게 밝히시기를, ‘그는 받은 바가 견고하므로 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甚理家報阿難曰:“我不以爲貪慕身樂、欲致衆生樂,故我以居家耳!又如來者自明我,彼以所受堅固而居家。”그때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이미 심(甚)인 이가를 보았느냐?”彼時衆祐告阿難言:“阿難!汝已見甚理家?”“그러하옵니다, 부처님이시여. 심(甚)인 이가를 보았습니다.”“如是衆祐!見甚理家。”“아난아, 이 현겁(賢劫) 가운데 성취한 바의 사람이 집을 버린 보살보다 많으니, 백 겁(劫) 동안에만 그런 것이 아니니라. 왜 그런가 하면, 아난이여, 또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보살은 천 사람 중에도 덕이 능히 이와 같지 못하지만, 이 이가는 이런 덕이 있느니라.”“阿難!於是賢劫中,以所成就人多於去家開士者,以百劫中不若此。所以者何?阿難!又去家修道開士者,千人之中不能有德乃爾,此理家者而有是德。”그때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이 경(經)을 마땅히 무어라 이름하며, 또한 마땅히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爾時阿難白佛言:“要者衆祐!當何名斯經法?亦當以何奉持之?”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대 아난이여, 이 경의 법을 ‘집에 있거나 집을 버리는 변화에 받들어 지니는 것’이라 이름하며, 또는 ‘안으로 성덕(性德)의 변화에 받들어 지니는 것’이라 이름하며, 또는 ‘심(甚)이 물은 바를 받들어 지니는 것’이라 이름하라.
이 경의 법을 듣는 자는, 아난이여, 법이 두루 원만하고 정진(精進)이 자못 강할 것이니, 일체의 위의(威儀)에서 정진하여 도를 행하는 자일지라도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아난이여, 만일 정진(精進)을 일으키고자 하는 자나, 만일 부지런히 힘쓰게 하려고 하는 자나, 하나의 공덕을 세우고자 하는 자나, 사람에게 뭇 덕을 세우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이 경의 법을 듣고 받아 행할지니라.
내가 그대 아난에게 부촉하노라. 이 경의 법을 자주 펼쳐서 뭇 사람들에게 보일지니, 왜 그런가 하면, 뭇 덕과 법의 올바른 행이기 때문이니라. 아난이여, 이 경의 법은 바로 응공(應供)이니라.”衆祐言:“是故汝阿難!斯經法名爲『居家去家之變』,奉持之;亦名爲『內性德之變』,奉持之;亦名爲『甚所問』,奉持之。及以聞此經法者,阿難!爲周滿法精進殊彊,於一切威儀下精進行道者,不若此也。是故阿難!若欲以興精進者、若欲勸勵者、欲立一功德者、欲造立人衆德者,由當以斯經法以聞之、以受之、以行之。我以囑累汝阿難,此經法數用布見衆人。所以者何?衆德法之正行也。阿難!斯經法者正應也。”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아난이 기뻐하였으며, 아울러 심(甚)인 이가와 하늘과 사람과, 또한 아수라 왕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 나니 모두 사유(思惟)하였다.衆祐以說是,阿難歡喜,及甚理家、天與人,亦質諒王,衆祐說已,皆思惟也。
法鏡經
戊戌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원문의 ‘由’는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猶’로 번역하였다.
2)원문의 ‘田’는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網’으로 번역하였다.
3)원문의 ‘爲’는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僞’로 번역하였다.
4)원문의 ‘寘’은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寡’로 번역하였다.
5)원문의 ‘廣’은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厲’로 번역하였다.
6)원문의 ‘濁’은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懼’로 번역하였다.
7)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는 무지의 상태이다.
8)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안식국(安息國) 사람으로, 후한의 영제(靈帝) 말년에 낙양으로 와서 기도위(騎都尉)가 되었다. 광화(光和) 4년(181)에 엄불조(嚴佛調)와 함께 『법경경(法鏡經)』을 번역하였으며, 『아함구해십이인연경(阿含口解十二因緣經)』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9)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한(漢) 나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출가(出家)한 스님이다. 안현이 천축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범문(梵文)을 읽어가며 중국어로 번역하면 엄불조는 받아 적는 방식으로 공동 번역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엄불조는 번역문 의리(義理)에 매우 밝았고 간결한 문자를 사용하여 불경사상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을 명확하게 표현하여 번역하였다. 엄불조의 저술로는 『사미십혜장구(沙彌十慧章句)』가 있는데 이는 중국 최초의 불교저작(佛敎著作)이다.
10)『주역(周易)』「계사전 하(繫辭傳下)」의, “신묘함을 탐구하고 변화를 아는 것은 덕의 최상이다〔窮神知化 德之盛也〕”라고 한 데서 나온 것이다.
11)옛일을 고증하여 현실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으로, 학문 연구에 매진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환영(桓榮)이 광무제(光武帝)로부터 태자소부(太子少傅)의 임명을 받자, 가르치던 유생들을 모아 놓고는 “오늘날 이런 은총을 받게 된 것은 모두가 계고의 힘이니, 어찌 분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今日所蒙 稽古之力也 可不勉乎]”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12)원문의 ‘文’은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又’로 번역하였다.
13)『시경(詩經)』「소남(召南)」≺은기뢰(殷其雷)≻에 “쿵쿵 울리는 천둥소리는, 남산의 양지쪽에 있거늘, 어찌하여 이 사람은 이곳을 떠나, 감히 겨를을 내지 못한단 말인가. 미덥고 후한 군자는 돌아올진저, 돌아올진저[殷其雷, 在南山之陽. 何斯違斯, 莫敢或遑? 振振君子, 歸哉歸哉].”라는 말이 있다.
14)원문의 ‘會’는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聞’으로 번역하였다.
15)원문의 ‘緣’는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拯’으로 번역하였다.
16)원문의 ‘擁’는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壅’으로 번역하였다.
17)원문의 ‘法’은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본에는 ‘注’로 번역하였다.
18)의문스러운 것을 당분간 보류하여 둔다는 뜻이다.
19)범어 Bhagavat를 번역한 것으로 중덕조성(衆德助成)ㆍ중복조성(衆福助成)의 뜻이다. 현장(玄奘) 이후의 신역에서는 세존(世尊)이라 번역하였으나, 이전의 구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다.
20)범어로는 S´ravasti로 성(城)의 이름이었으나 나라 이름이 되었다. 사위국(舍衛國)이라 음역하며, 풍덕(豊德)ㆍ호도(好道) 등으로 번역한다.
21)부처님께 숲을 공양한 기타 태자이다.
22)기타 태자의 숲을 사들여 부처님께 공양한 사위성의 장자이다.
거사gṛha-pati여, 또한 재가보살gṛhī bodhisattvaḥ이 네 가지 법을 갖춘다면 [그는] 법에 귀의한 자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1) 설법사 dharma-kathika, dharm-bhāṇaka인 사람pudgala들에게 의존하고 친근하여 공경하고 경의를 표한 후에 법을 듣는 것dharma-śravaṇa
(2) 법을 들은 후에 규범대로 개별적으로 생각하는 것dharma-śravaṇa
(3) 들은 대로의 법과 이해한 대로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제시하여 올바르고 명확하게 하는 것prakāśana
(4) 그 법시dharma-dāna로부터 발생한 선근kuśala-mula을 무상정등각으로 회향하는 것pariṇāmanā이다.(하카마야 노리아키의 티벳본 번역. 불교교단사론 한글번역본 485쪽)
안현安玄 역 ?법경경?:
又復 理家 修治四法 為自歸於法 何謂四 一曰 諸法言之士 以承事追隨之 二曰 所聞法 以恭敬之 三曰 已聞法本 末思惟之 四曰 如其所聞法 隨其 能為人 分別說之 是為四法 開士居家者 自歸於法 為如是也
축법호 역 ?욱가라월문보살행경?:
復次 長者 居家菩薩 有四法行 歸命法 何等為四 一者 與正士法人 相隨相習 稽首敬從 受其教勅 二者 一心聽法 三者 如所聞法 為人講說 四者 以是所施功德 願求無上正真之道 是 為四居家菩薩 為歸命法
강승개 역 「욱가장자회」(?대보적경? 권82):
長者 在家菩薩 成就四法 歸依於法 何等四 (1)於法師人 親近依附 聽聞法 (2)已善思念之 (3)如所聞法 為人演說 (4)以此說法功德 迴向無上正真之道 長者 是名 在家菩薩 成就四法 歸依於法
거사gṛha-pati여, 또한 재가보살gṛhī bodhisattvaḥ이 네 가지 법을 갖춘다면 [그는] 법에 귀의한 자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1) 설법사 dharma-kathika, dharm-bhāṇaka인 사람pudgala들에게 의존하고 친근하여 공경하고 경의를 표한 후에 법을 듣는 것dharma-śravaṇa
(2) 법을 들은 후에 규범대로 개별적으로 생각하는 것dharma-śravaṇa
(3) 들은 대로의 법과 이해한 대로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제시하여 올바르고 명확하게 하는 것prakāśana
(4) 그 법시dharma-dāna로부터 발생한 선근kuśala-mula을 무상정등각으로 회향하는 것pariṇāmanā이다.
안현 역 ?법경경?:축법호 역 ?욱가라월문보살행경?: 강승개 역 「욱가장자회」(대보적경 권19)
안현安玄 역 ?법경경?:
又復理家,修治四法為自歸於法。何謂四?一曰、諸法言之士,以承事追隨之;二曰、所聞法以恭敬之;三曰、已聞法本末思惟之;四曰、如其所聞法,隨其能為人分別說之。是為四法。開士居家者自歸於法,為如是也。
축법호 역 ?욱가라월문보살행경?:
《郁迦羅越問菩薩行經》〈1 上士品〉:「「復次,長者!居家菩薩有四法行歸命法。何等為四?一者、與正士法人相隨相習,稽首敬從,受其教勅;二者、一心聽法;三者、如所聞法為人講說;四者、以是所施功德願求無上正真之道;是為四居家菩薩為歸命法。」(CBETA 2022.Q1, T12, no. 323, p. 23c17-21)
?대보적경? 강승개 역 「욱가장자회」(대보적경 권82):
長者!在家菩薩成就四法,歸依於法。何等四?於法師人親近依附,聽聞法已善思念之,[3]如所聞法為人演說,以此說法功德迴向無上正真之道。長者!是名在家菩薩成就四法歸依於法。
法鏡經
全一卷(或二卷)。
東漢 安玄 譯,
嚴佛調 筆受。
收於大正藏第十二冊。
本經 與
大寶積經 卷十九 康僧鎧 所譯 之 郁伽長者會,及
竺法護 所譯 之 郁迦羅越問菩薩行經,皆為同本異譯經。
然本經係古譯本,
將釋尊譯作眾祐,
舍衛國譯作聞物國,
長者譯作理家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