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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이땨(caitya) a shrine, sanctuary, temple or prayer hall

VIS VITALIS 2021. 12. 1. 21:42

에띠엔 라모트 지음, 호진 옮김 인도불교사 153쪽

 

 

A chaitya, chaitya hall, chaitya-griha, (Sanskrit:Caitya; Pāli: Cetiya) refers to a shrine, sanctuary, temple or prayer hall in Indian religions.[1][2]

 

탑(塔)에 대한 용어의 경우, 부처님의 사리탑(舍利塔)을 가리키는 스투파(stupa)와 대승이 일어난 이후 성행하게 된 경탑(經塔)을 가리티는 짜이땨(caitya)의 두 용어

 

법화경의 성립(成立)과 한역(漢譯)

 

 

‘법화경’은 대승경전(大乘經典) 중 대표적인 경전이다.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일어난 것은 기원 전후의 시기라고 한다. 이 대승불교는 인도에서 불교가 멸하는 서기 1,200년까지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이것을 연대적으로 구분하면 초기(기원 전후로부터 서기 350년경), 중기(서기 350년경부터 650년 경 혹은 700년 경), 후기(그 이후로부터 서기 1,200년경)로 나뉘다. ‘법화경’은 ‘반야경(般若經)’, ‘유마경(維摩經)’,’화엄경(華嚴經)’ 정토계통(淨土系統)의 경전들과 함께 초기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법화경’의 원형은 기원 전후의 무렵 서북 인도에서 성립되었다고 한다. ‘법화경’ 자체에서는 그 성립 연대에 관해서 설하고 있지는 않으나 경전에 등장하는 주요한 인물, 도시에 사는 자산가(資産家)나 상인들, 그리고 사회적 배경의 내용을 검토해 볼 때 성립 연대의 상한선을 그와 같이 추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처음부터 ‘법화경’이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성립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법화경’ 성립의 단계를 몇가지로 나누고 있다. 제1 ‘서품(序品)’, 으로부터 제20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까지를 최초기로 보는 견해. 제1 부터 제9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까지를 제1기, 제10 ‘법사품(法師品)’에서 제 20까지를 제2기라고 보느 srusgork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견해는 모두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법화경’안의 제 12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을 제외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서품을 제외하는 견해도 있다. 또 제2 ‘방편품(方便品)’이 최초에 성립하였다고 보는 견해와 제7 ‘화성유품(化城喩品)’이 최초에 성립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가 경전의 내용을 토대로 해서 추정한 것이다. 예를 들면 탑(塔)에 대한 용어의 경우, 부처님의 사리탑(舍利塔)을 가리키는 스투파(stupa)와 대승이 일어난 이후 성행하게 된 경탑(經塔)을 가리티는 짜이땨(caitya)의 두 용어에서 성립 연대를 가늠하는 경우가 있고, 불도(佛道)의 다섯 가지 수행, 즉 수지(受持), 독(讀), 송(誦), 해설(解說), 서사(書寫) 가운데 다섯 가지 모두를 설하고 있는가, 혹은 서사가 빠진 네 가지 수행은 다섯 가지 수행보다 먼저라는 시대 구분을 하고 있다. 또 교설(敎說)을 듣는 상대에 따라서 성립 연대를 추정하기도 하며, 경전의 사상적 경향, 예를 들면 21품 이후의 밀교의 요소가 농후한 부분은 밀교가 대승불교의 후기에 성립한 것을 근거로 해서 아주 뒤에 첨가되었다고 추정한다.

 

이밖에도 경의 형식, 즉 게송(偈頌)과 산문을 기초로 해서 가늠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게송은 장문(長文)인 산문에 비해 오래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고, 또 그 내용이 게송과 산문으로 반복되어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성립 연대를 추정하낟. 또 전체적인 성립 연대를 한역 연대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경전 성립의 연대를 추정하는 방법이다. 여하튼 일시에 성립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 ‘법화경’의 성립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의견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성립 연대의 상한선은 기원전 1세기 내지 기원 후 40년, 하한선은 기원 후 150년 내지 220년 이후라고 한다. 이 하한선에 대해서는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한역본 ‘정법화경(正法華經)’이 286년에 번역되었으므로, 그 이전에 오늘과 같은 모습의 ‘법화경’이 성립된 것은 틀림없기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같이 ‘법화경’이 오랜 시일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법화경’의 작자가 한 사람이 아니며 여러 사람이 관여하였음을 말해 준다. 동시에 그 여러 사람이 시대를 달리하면서 성립에 관여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그 때마다 시대의 요구가 있어 그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같은 성립에 관한 요소는 작자가 어떤 집단의 의사를 반영해서 성립되었음도 시사한다. ‘법화경’성립의 배경은 앞의 성립 연대의 추정에서 본 바와 같이 대승불교의 시작으로부터 초기 융성기에 걸쳐 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의 대승불교 신봉자들, 즉 대승불교 집단을 ‘법화경’의 작자로 볼 수 있다.

 

오늘의 학자들의 정설에 의하면, 대승불교 교단은 부처님의 사리탑을 중심으로 불교를 신앙하는 재가보살집단과 이들을 지지하는 출가보살들이 모여 성립되고 발전하였다고 하며, ‘법화경’도 이들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본다.

 

‘법화경’은 서북 인도 지역에서 성립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해졌다. 오늘날까지 탐험의 결과, 중앙아시아에서 출토된 경전의 사본들에 의하면 그 지역의 경전 간행이 매우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엽에 걸쳐 인도의 불적(佛跡)을 순례한 법현(法顯)에 의하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불교가 융성한 사실을 알게 한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해진 이러한 ‘법화경’은 전후 여섯 ㅂㄴ에 걸쳐 한역되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진 것은 세가지가 있으며, 나머지는 흩어져 없어졌다. 그 여섯 가지 중 현존하는 것은, 축법호(竺法護)가 286년에 한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을 비롯하여 406년 구마라집(鳩摩羅什) 역의 ‘묘법연화경’, 601년 사나굴다, 달마급다 공역의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이 있으며, 흩어지고 없어진 것으로는, 252년 정무외(正無畏) 역의 ‘법화삼매경(法華三昧經)’ 225년 지도근(支道根) 역의 ‘방등법화경(方等法華經)’ 축법호 역의 ‘살담분타리경(薩曇芬陀利經)’의 셋이다.

 

현존하는 세 가지 ‘법화경’의 관계에 대해서 ‘첨품묘법연화경’의 서문은 축법호 역과 구마라집의 역을 검토한 결과 원전이 같지 않음을 알 수 있고, 축법호 역은 다라수(多羅樹)의 잎에다 쓴 사본을 기초로 하고 있고, 구마라집의 번역은 구자국(龜玆國)에 전하는 사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첨품묘법연화경’은 구마라집의 ‘묘법연화경’에 바탕을 두면서 인도에서 전해진 다라수 잎에 쓰인 사본에 따라 구마라집의 ‘묘법연화경’을 보충하기 위해 번역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마라집의 번역본이 결코 ‘첨품묘법연화경’에 비해 못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법화경’의 범본(梵本)을 5세기 이후하고 추정하고 있고, ‘첨품묘법연화경’의 서문에서 말하는 다라수 잎의 사본이 이 범본을 가리키지만, 오늘날 ‘법화경’이라고 하면 구마라집 역의 ‘묘법연화경’을 가리킬 만큼 그의 번역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고, 여기 우리말로 번역한 ‘법화경’도 구마라집의 한역을 옮긴 것이다. 물론 위의 세 번역이 다 불교사적인 의의가 큰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