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ly Chan is now relatively well known — whether in its traditional version, as it was transmitted in the so-called Histories of the Transmission of the Lamp (Ch. chuandeng lu, J. dentōroku 伝灯録), or in its revised version, as reconstructed on the basis of Dunhuang documents. Both versions, while radically different, offer a hagiographic image of early Chan. Historians have tried to sort out hagiographic embellishments from historical facts, and in so doing they have sometimes adopted a kind of historicism, well represented in the works of Hu Shi 胡適, Ui Hakuju 宇井伯寿, Sekiguchi Shindai 関口真大, and my own mentor, Yanagida Seizan 柳田聖山.1 T
-Early Chan and ‘Nonduality’: The Cultural Impact of Chan Antinomianism . Bernard Faure*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교수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선학계의 석학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선생이 향연 83세로 지난 11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올초에 건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던 야나기다 선생께 나중에 다시 찾아뵙고 그 동안 공부한 것을 말씀드리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열반에 들어 어디서 뵐 수 있을지 마음이 황량해진다. 선의 철학화를 내세운 교토학파(京都學派)의 영향권에 있었으면서도 독자적인 중국선의 해석으로 인해 야나기다류의 학풍을 세운 그의 공적은 불후의 업적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야나기다는 1922년 시가현(滋賀縣)에 있는 연주사(延壽寺)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이 사원이어서인지 어릴 때부터 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해 15세 때는 임제(臨濟)학원전문학교〔현재 하나조노(花園)대학의 전신〕에 들어가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임제종(臨濟宗)의 사찰인 영원사(永源寺)에서 스승의 지도로 참선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오오타니(大谷) 대학에서 공부한 후 하나조노 대학, 교토(京都)대학의 인문과학 연구소, 중부(中部)대학의 교수를 두루 역임하면서 중국선종에 대한 연구와 거의 모든 방면의 선적(禪籍)을 텍스트로 한 해석을 내놓았다. 해인사의 승가대학에서 강연을 하는 등 한국에도 자주 왕래하여 한국의 승려와 불교학자들과의 교류도 두텁게 쌓았다. 그 동안 수십 권에 이르는 역서, 저서와 수백편에 이르는 논문은 선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저서로 『초기선종사서(初期禪宗史書)의 연구』, 『임제(臨濟) 노트』, 『잇큐우(一休) 광운집(狂雲集)의 세계』, 『선과 일본 문화』 등은 중국선불교의 사상적 가치를 재발굴함과 더불어 일본선불교의 약동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역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야나기다는 수행과정에서 임제선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인 입장에서 교파에 소속되거나 종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의 직장이 임제종의 종립대학인 하나조노 대학인 관계로 임제종과의 깊은 관련은 부인할 수 없으나, 학문적인 세계에서만은 선의 세계가 지향하는 대자유ㆍ대해탈의 기쁨을 만끽하며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과 선 정신의 접목은 일찍이 그의 학문적 스승인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眞一, 1889~1980)의 영향이 크다.
니시다 키타로오(西田幾多郞, 1870~1945),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1870~1966), 니시다니 케이지(西谷啓治, 1900~1990), 히사마츠 신이치. 이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근대의 불교와 종교연구에 있어, 특히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선에 심취한 사상가들이다.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야나기다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1939년에 출간된 『동양적 무(無)』로 유명한 선철학자인 히사마츠는 야나기다의 학문과 정신의 스승이었다. 야나기다는 히사마츠의 ‘각(覺)’ 사상에 심취하는 한편 FAS 선(禪)운동에 참여하였다.
FAS 선운동은 히사마츠가 말하는 각의 입장에서 절대자와 자신의 동일성에 바탕한 삶 속의 깨달음을 향한 대승선 운동이었다. 이것은 원래 히사마츠에 의해 조직된 쿄토대학의 학도도량(學道道場)에서 출발하였는데 그 표어가 FAS이다. 즉 ‘형상없는 자아〔Formless self〕에 눈뜨고, 전 인류의 입장〔All mankind〕에 서서, 역사를 넘어서 역사를 창조〔Superhistorical history〕하자’는 주장이다. 이는 개인적인 종교의 세계를 넘어서 무아무불아 무가무불가(無我無不我 無家無不家)의 세계, 즉 나가 아님에 나 아님이 없고 내 집 아님에 내 집 아님이 없는 인류공생의 깃발을 내건 운동이었다. 야나기다는 이 운동의 영향으로 종파를 떠나 자유로운 연구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그는 중국선종의 연구에 있어 비판적 자료연구를 통해 선종의 텍스트가 그 시대의 요청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간파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중국의 『임제록(臨濟錄)』, 『조주록(趙州錄)』, 고려시대에 간행된 『조당집(祖堂集)』, 일본의 『정법안장(正法眼藏)』, 『광운집(狂雲集)』 등의 해석을 관통하는 야나기다 해석학의 세계를 형성하였다.
야나기다는 위앙종(仰宗)이 중국에서는 일찍이 자취를 감추게 되지만 해동(海東)에 전해져 한국인의 기질에 적합한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정착되었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언급하고 있다.
처음에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을 읽었을 때, 철저한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설에 놀랐고, 진귀조사(眞歸祖師)의 전등설(傳燈說)에 말문이 막혔는데 지금 새롭게 유래를 알고 보니 중국에서 5가(家)의 제1진(陣)이 되는 위앙종이 태어나 바로 해동에 정착하니 중국에서 그 전통이 끊어진 사정을 알겠다. 이는 조계(曹溪)의 현지(玄旨)였으며, 고려의 조계종도 동근동종(同根同種)의 선불교이다. 조계종(曹溪宗)은 규봉종밀(圭峰宗密)에 의해 선교일치를 지향하는 한편, 대혜(大惠)의 간화선를 받아들여 수도론(修道論)의 정채(精彩)를 더한다.
나옹(懶翁), 태고(太古)이후의 간화선에 독자적인 것으로 보아도 좋은가 어떤가. 평가는 스스로 내리는 것이 좋겠지만, 마침 몽산덕이(蒙山德移)의 텍스트가 널리 유포된 것은 이미 지적한대로이다. 대유령상(大庾嶺上)의 대화가 이 시기 처음으로 단경(壇經)에 들어온다. 이에 비해 해동의 선불교는 교외별전과 선교일치(禪敎一致)의 비할 데 없는 긴장감을 반복한다. 1000 년에 걸쳐 일어난 일대 드라마인 것이다.
야나기다가 일역(日譯)을 하고 쓴 「『선문보장록』의 기초적 연구」의 해제(解題)에서 언급한 것이다. 이는 한국, 중국, 일본에 걸쳐 있는 관련문헌을 철저히 검증하고 고증한 가운데 야나기다의 육성이 그대로 손으로 흘러내려 쓰여진 것이다. 이러한 언급은 바로 야나기다가 시대적인 문맥을 텍스트의 사실(史實)보다도 중시했던 학문적 자세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불교세계의 대화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또 하나의 자세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쿄토의 동쪽을 남북으로 흐르는 카모가와(鴨川)강변을 산책하던 야나기다 선생을 만날 때마다 필자를 붙들어 세워놓고 한국불교의 과거와 현재의 역동성과 창의성을 늘 힘주어 얘기하던 선사와도 같은 그의 풍모가 떠오른다. 또한 앞으로 발해의 불교사가 미개척의 영역이므로 뒷세대들이 여기에도 힘썼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내놓곤 하면서 후학들에 대한 기대, 특히 한국의 유학생들에 대해 보여주었던 따뜻한 애정을 잊을 수가 없다.
야나기다는 서양에 선을 알린 스즈키 다이세츠의 가르침에 대해 늘 고마워했다. 특히 1985년에 출간한 『선과 일본문화(禪と日本文化)』는 스즈키에 의해 2차 세계대전 중에 출간된 대표적인 저작과 공교롭게도 같은 제목을 가지게 되었다. 스즈키는 줄기차게 선불교를 매개로 한 일본적 영성(靈性)을 외쳐왔는데, 야나기다는 이 저서가 내외의 비판을 받아가면서도 한편으론 세계대전 중에 일본을 이해시키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제 본인이 그 제목을 물려받아 선의 본질과 그 위에 꽃핀 일본문화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선의 사상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부여받았다고 말하곤 했다.
일본문화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전후(戰後) 선의 정신에 바탕한 탐구를 통해 해소시킴과 동시에 인류의 보편문화로 승화시킬려는 작업은 우리 한국의 학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일본 불교사상가들의 굵직굵직한 삶의 행보는 우리에겐 다시 한번 타산지석이 되고 있다. 이 지면을 빌어 고인의 명복을 빈다.
원익선(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발해불교는
동아시아 불교의 공백
후학들의 열정 기대돼”
야나기다 교수 인터뷰
[다음의 인터뷰는 필자가 돌아가시기전에 야나기다 선생을 만나 질문하고 답변들은 것을 재구성한 것이다.]
필자 : 정년퇴직을 하시고도 쉬지 않고 저술활동을 하시고 계시는데 그 힘은 무엇입니까?
야나기다 :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고, 예전의 저작을 볼 때마다 다시 고쳐 쓰지 않 으면 안 될 것도 산더미처럼 많이 있어요. 새로운 착상이 있으면 자다가도 일어나 원고를 쓰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서 밤과 낮이 따로 없습니다.
필자 : 연구를 하시면서도 계속 선수행을 하고 계십니까?
야나기다 : 요즈음은 몸이 충실하지 못해 실제로 좌선 수행은 하지 못하고 부끄럽지만 와선을 매일 하고 있습니다. 선중에서도 좌선이야말로 선의 요체에 해당됩니다. 허리를 곧게 펴서 세우고 결가부좌의 자세로 자신을 수행자의 모습으로 가다듬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기본입니다.
필자 : 발해불교에 대한 연구는 불교사 연구에 어느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습니까.
야나기다 : 거의 미개척 분야이므로 연구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일본과의 불교교류면에서 우리가 이제까지 접하지 못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상당히 기대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불교 연구의 커다란 공백이므로 후학들의 열정을 기대합니다.
대표적인 저술
『초기선종사서(初期禪宗史書)의 연구』, 호오조오칸(法藏館), 1967.10
『선의 어록(語錄)』1ㆍ2ㆍ3, 치쿠마 서방(築摩書房), 1969.3ㆍ1971.3ㆍ1976.6
『불교강좌-임제록(臨濟錄)』, 다이조오 출판(大藏出版), 1971.11
공저『선의 어록16-신심명(信心銘), 증도가(證道歌), 십우도(十牛圖), 좌선의(坐禪儀)』, 치쿠마 서방(築摩書房), 1974.7
『일본의 선어록-무소오(夢窓)』, 코오단샤(講談社), 1977.11
『순선(純禪)의 시대-조당집(祖堂集) 이야기(ものがたり)』, 하나조노(花園)대학 선문화 (禪文化) 연구소, 1984.7
『선과 일본문화』, 코오단샤(講談社)학술문고, 1985.10
『선입문7-잇큐유(一休) 광운집(光雲集)』, 치쿠마 서방(築摩書房), 1994.5
공저『불교의 사상ㆍ무(無)의 탐구-중국선』,카도가와 서방(角川書房) , 1996.2
『달마의 어록-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호오조오칸(法藏館), 1997.2
출처 : 법보신문
柳田 聖山(やなぎだ せいざん、旧姓:横井(よこい)、1922年12月19日 - 2006年11月8日)は、日本の中国禅宗史研究者で、多くの著作がある。
目次
人物[編集]
1922年に滋賀県愛知郡稲枝村(現在の彦根市)の延寿寺(臨済宗)に生まれる[1]。義父は柳田謙十郎(西田幾多郎門下出身の哲学者)、妻は茶道家の柳田宗葩。
寺名の延寿寺は、宋朝文化を代表する五山の一つ杭州西湖の霊隠寺で、宗鏡録を書きあげた高徳、永明延寿の名にもとづく。[2]
臨済学院専門学校(現:花園大学)、大谷大学[1]、京都大学に学び、久松真一に師事してFAS禅運動に共鳴。中国禅宗史研究において批判的資料研究を進め、資料が史実ではなく、その時代の要請によって製作されたことを見抜いた。
また、博覧強記なことで知られ、不勉強な後輩を一言の下に教化し、僧侶で大正大学教授を務めた天台教学の関口眞大と共に「東の関口、西の柳田」と称された。
花園大学、京都大学[1]、中部大学の教員を歴任し、1991年には紫綬褒章、1996年には勲三等瑞宝章を受章した[3]。
柳田姓を名乗った理由[編集]
あえて柳田姓を名乗ることに、自ら納得するまでに十年のロスがあった。動機はおよそ次のよう。当初、西田哲学の忠実な祖述者だった、柳田謙十郎が長男を失うのは、1942年(昭和17年)10月1日。学徒兵として応召、内地勤務中の事故死だが、母は狂気して自らを責める。私も臨済学院で市川白弦先生と激論し、仏教者の戦争責任等を探るのだが、私を最後までつまずかせ、禅仏教にひきとどめたのは、臨済学院のもう一人の生き証人で、私の生涯の恩師久松真一先生。真一古仏に参ずること五十年、同門同参の一人柳田静江と相識り、弟君の身代わりのつもりで、あえて柳田姓を冒す。[4]
略歴[編集]
- 1922年 滋賀県稲枝村(彦根市)にて誕生[1]
- 1940年 滋賀県立彦根中学校を卒業
- 1942年 臨済学院専門学校(現在の花園大学)を卒業[1]、永源寺僧堂で修行
- 1948年 大谷大学を卒業[1]、京都大学文学部聴講生となる
- 1949年 花園大学仏教学部の助手に就任
- 1950年 講師に昇格
- 1954年 助教授に昇格、柳田姓に改姓
- 1960年 教授に昇格[1]
- 1968年 文学部長に昇格
- 1976年 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教授に就任[1]
- 1985年 人文科学研究所所長に就任
- 1986年 所長を定年退官、京都大学名誉教授、中部大学教授に就任
- 1988年 花園大学文学部教授、国際禅学研究所所長に就任[1]
- 1989年 蔵書14,000冊を花園大学禅学研究所へ寄贈、柳田文庫となる
- 1990年 峨眉山に良寛詩碑を建立
- 1992年 市民団体である環境市民の共同代表となる
- 1993年 自宅を禅学研究所へ寄贈、柴門館となる
- 1996年 所長を退任、没時まで終身研究所員
受賞・受勲歴[編集]
著作[編集]
- 日本の仏教 第9巻 臨済の家風 筑摩書房 1967
- 初期禅宗史書の研究 法藏館 1967
- 破るもの 春秋社 1970
- 臨済ノート 春秋社 1971
- 臨済録 佛典講座30 大蔵出版 1972、新装版2008
- 禅の遺偈 潮文社 1973
- 禅語録 (続世界の名著3)中央公論社 1974、新版・中公バックス 1978
- 禅の山河 日本放送出版協会〈NHKブックス〉1975
- 禅思想-その原型をあらう 中公新書 1975
- 夢窓(日本の禅語録 第7巻)講談社 1977
- 選書版「夢窓国師語録」(禅の古典4)講談社 1983
- 新装版「夢窓 語録・陞座・西山夜話・偈頌」講談社〈禅入門5〉1994
- 一休 (日本の禅語録 第12巻)講談社 1978
- 選書版「狂雲集 純蔵王のうた」(禅の古典5)講談社 1982
- 選書版「狂雲集 夢閨のうた」(禅の古典6)講談社 1982
- 新装版「一休 狂雲集」講談社〈禅入門7〉1994
- 達摩の語録 二入四行論 筑摩書房〈禅の語録1〉1979、新装版2016
- 達摩の語録 二入四行論 ちくま学芸文庫 1996
- 初期の禅史Ⅰ・Ⅱ 筑摩書房〈禅の語録2・3〉1979、新装版 2016
- 一休「狂雲集」の世界 人文書院 1980。読売文学賞
- ダルマ(人類の知的遺産 16)講談社 1981 / 講談社学術文庫(改訂版)1998
- 中世漂泊(法蔵選書8)法蔵館 1981
- 禅語の四季 淡交社〈茶道文化選書〉1982
- 純禅の時代 祖堂集ものがたり(正・続)禅文化研究所 1984-85
- 禅と日本文化 講談社学術文庫 1985
- 中国撰述経典Ⅰ 円覚経(仏教経典選13)筑摩書房 1987
- 一休・良寛(大乗仏典 中国・日本篇26)中央公論社 1987
- 「寛永版狂雲集」と「良寛道人遺稿」を収録
- 禅語余滴 禅文化研究所 1989
- 沙門良寛 自筆本「草堂詩集」を読む 人文書院 1989
- 未来からの禅 人文書院 1990
- 祖堂集(大乗仏典 中国・日本篇13)中央公論社 1990
- 花園界隈 大東出版社 1992
- 柳田聖山集 法藏館 1999-未完(全6巻予定、第5巻のみ未刊)
- 1巻 禅仏教の研究
- 2・3巻 禅文献の研究 2006
- 4巻 臨済録の研究 2017
- 6巻 初期禅宗史書の研究
- 良寛 漢詩でよむ生涯 日本放送出版協会〈NHKライブラリー〉 2000[5]
- 狂雲集 一休宗純 中央公論新社〈中公クラシックス〉2001
- 良寛道人遺稿 中公クラシックス 2002
- 臨済録 臨済義玄 中公クラシックス[6] 2004/中公文庫 2019
- 唐代の禅宗 大東出版社 2004
共編著[編集]
- 禅家語録集(日本の思想10)筑摩書房 1969、新版・日本の仏教思想 1986。唐木順三責任編集
- 仏教の思想7 無の探求 中国禅 角川書店 1969/角川文庫ソフィア(改訂版)1997。梅原猛と共著
- 禅家語録 Ⅰ・Ⅱ 筑摩書房〈世界古典文学全集36 A・B〉1972-1974、復刊2005ほか。西谷啓治と共編
- 一休骸骨-図版と訳注 禅文化研究所 1984 改訂版2015。現代訳注釈/早苗憲生解題
- 仏教入門-読書マップ 筑摩書房 1981。金岡秀友、田村芳朗との鼎談
- 思想読本-道元 法蔵館 1982。編者
- 十牛図 筑摩書房 1982/ちくま学芸文庫 1992。上田閑照と共著
- 道元(大乗仏典 中国・日本篇23)中央公論社 1995。上田閑照と共訳著
- 禅と文学(叢書禅と日本文化4)ぺりかん社 1997。編・解説
論文[編集]
資料集[編集]
- 柳田聖山先生著作目録(『花園大学研究紀要』8号、花園大学、1977年)
- 柳田聖山教授喜寿記念論集(『禅文化研究所紀要』24号、1998年)
脚注[編集]
[脚注の使い方] |
- ^ a b c d e f g h i j 上田閑照・柳田聖山『十牛図』筑摩書房〈ちくま学芸文庫〉、1992年12月、著者紹介(カバー)。ISBN 4-480-08024-4。
- ^ 当時、禅寺で子が生まれるのは、おそらくは私が最初。今ではごくあたりまえのことに、私は今もこだわり続けている。血統相続が建て前の浄土真宗とちがい、禅僧は師より弟子への法脈を大事にする。明治以後、肉食妻帯勝手とあっても、禅寺で俗縁を表に出すのは、大正期に入って後のこと。・・・『京都新聞朝刊 たどり来し道2』柳田聖山著 1996年2月2日
- ^ 「96秋の叙勲受章者 勳三等」『読売新聞』1996年11月3日朝刊
- ^ 『京都新聞朝刊 たどり来し道9』柳田聖山著 1996年2月10日
- ^ 元版はラジオ「宗教の時間」放送テキスト
- ^ 元版は責任編集『世界の名著 禅語録』中央公論社
外部リンク
杜朏 두비杜朏가 쓴 <전법보기傳法寶紀> the Chuan fa bao ji 傳法宝紀 by Du Fei 杜朏 (d. u.),
The Chronicle of Transmitting Dharma Treasure 伝法宝紀 written by Du Fei 杜朏
- (초승달 비)
- a.초승달
- b.동틀 때의 어스레한 모양
- c.초승달이 처음 나타나는 모양
- d.모여 쌓이는 모양
- e.(달빛이)희미하다(稀微--: 분명하지 못하고 어렴풋하다)
- 2.(초승달 불)
- a.초승달
- b.동틀 때의 어스레한 모양
- c.초승달이 처음 나타나는 모양
- d.모여 쌓이는 모양
- e.(달빛이)희미하다(稀微--: 분명하지 못하고 어렴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