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쉐시까(Vaiśeṣika) 학파와의 논쟁을 통해 본 경량부 세친(Vasubandhu)의 정신(manas)
황순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
I. 서론
크릿쳐(Robert Kritzer)를 포함하는 유식학 전공자들은 ?구사론?을 작성할 당시 세친(Vasubandhu)이 이미 ?유가사지론?(Yogācārabhūmi)을 숙지한 상태에서 유식(vijñaptimātra)의 주장들을 경량부(Sautrāntikas)의 이름으로 ?구사론?에서 전개한 것이 아닌가하는 지적들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1). 이들의 주장은 학계에서 이미 상당히 많은 학자들로부터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 외연을 계속해서 확대해나가고 있다. 크릿쳐는 최근 런던에서 있었던 제14차 세계불교학회에서도 ?아비다르마디빠?(Abhidharmadīpa)를 중심으로 비유사(Dārṣṭāntika)와 경량부(Sautrāntikas)의 관계를 다루면서 자신의 주장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들의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구사론?이 작성될 당시의 세친(Vasubandhu)을 포함한 경량부(Sautrāntikas)를 가면 쓴 유식논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위기가 또한 있다. 좀 더 전통적인 입장에 있는 이들은 세친이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에서 경량부로 그리고 경량부에서 유식(Vijñaptimātra)으로 발전해 나간 것으로 보려고 한다. 비록 상속의 특별한 변화(saṃtatiparināmaviśeṣa, 相續轉變差別)의 경우에서와 같이 크릿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 이러한 주장의 요점이다.
사실상 세친이 ?유가사지론?(Yogācārabhūmi)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고 해서 그를 유식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경량부가 독자적인 율장(Vinaya)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이들을 독립된 부파로 보기 보다는 기존의 부파 내부에서 교리적인 해석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그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비록 교리적 해석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생활방식이 동일하다면 한곳에 모여서 생활할 수 있지만, 아무리 교리적 해석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생활방식이 다르다면 한곳에 모여서 생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동일한 대학에서 각각의 전공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생활하듯이, 아마도 세친 당시에 동일한 율장(Vinaya)에 의거하여 함께 생활하지만 교리적 입장이 달랐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현장이 대당서역기에서 소승(hīnayāna)과 대승(mahāyāna)을 동시에 공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2)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따라서 세친은 이러한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유가사지론?(Yogācārabhūmi) 등을 접하게 되었고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는 볼 수 있지만, 아직까지 많은 부분에서 세친이 유식과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그를 유식의 논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논자의 입장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구사론에서 나타나는 정신(manas)에 대한 세친의 입장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음(citta) 정신(manas) 그리고 의식(vijñāna)은 유식학에서 제8식인 알라야식(ālayavijñāna), 제7식인 정신(manas), 그리고 제6식인 정신적 의식(manovijñāna)의 개념으로 각각 발전하면서 유식의 심층심리구조를 이루는 기본적인 틀로 발전하였다. 이제까지 유식학의 연구가 제8식인 알라야식(ālayavijñāna)에 집중되면서 제7식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정신(manas)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경시되어왔다. 하지만 힌두철학에서 manas는 내적기관으로서 인식의 주체인 자아(ātman)와 시각기관 청각기관 등 우리들의 인식기관을 연결해주고 즐거움 괴로움과 같은 심리현상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초기부파불교에서도 그러한 의미를 차용해서 사용해 왔다. 제8식인 알라야식(ālayavijñāna)가 전혀 새로운 개념인 반면에, 정신(manas)는 기존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따라서 정신(manas)에 대한 세친(Vasubandhu)의 해석은 그가 과연 유식으로 기울었는가 아직까지 부파불교의 틀 속에 머물러 있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구사론?의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는 마음(citta) 정신(manas) 그리고 의식(vijñāna)에 대한 언급들과 「파아품」에서 정신(manas)의 해석을 놓고 나타나는 와이쉐시까학파(Vaiśeṣika)와의 논쟁을 중심으로 세친(Vasubandhu)의 인식이론을 살펴보고, 여기에 어떤 유식학적인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는가를 검토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II. 마음(citta), 정신(manas), 그리고 의식(vijñāna)
마음(citta), 정신(manas) 그리고 의식(vijñāna)은 몇몇 초기불교 문헌들에서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3). 불교에 있어서 의식이란 항상 어떤 지향성을 지닌 것으로 무엇에 대한 의식으로 설명되며, 지향성을 결여한 순수의식과 같은 것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의식 상태로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세친은 ?구사론?(Abhidharmakośabhāṣya)에서 마음(citta), 정신(manas) 그리고 의식(vijñāna)이 동일한 것을 지시한다는 계송4)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마음(citta, 心)은 모음으로(cinoti) 마음(citta)이라 하고, 생각함으로(manute) 정신(manas)이라 하며, 그 대상을 앎으로(ālambanaṃ vijānāti) 의식(vijñāna)이라 한다.5)
마음(citta), 정신(manas) 그리고 의식(vijñāna)에 대한 이설명은 각각 제8식인 알라야식(ālayavijñāna), 제7식인 정신(manas), 그리고 제6식인 정신적 의식(manovijñāna)의 개념으로 발전된다. 즉, 과거의 행위의 결과를 낳는 힘들을 모음으로 알라야식(ālayavijñāna)이고, 주체와 객체를 분별함으로 정신(manas)이며, 대상을 앎으로 의식이라 한다고 유식에서 설명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마음(citta)을 ‘모으다’라는 어근 √ci(to collect)에서 파생된 명사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설명은 부파불교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테라바다 전통에서 가장 오래된 아비담마인 담마상가니(Dhammasaṅgaṇi)의 주석서인 앗타살리니(Atthasālinī)는 '대상을 생각함으로 마음이라 한다'(ālambanaṃ cintetīti cittam)라고 주석하고 있다6). 즉 마음(citta)을 ‘생각하다’라는 어근 √cint(to think)에서 파생된 명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경량부에서 체용하고 있었던 종자설(bīja)의 영향으로 마음(citta)의 의미에 미세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한편 설일체유부(Sarvāstivādins)의 아비달마 교학에 의하면, 이 정신(manas)이란 것은 의식(vijñana)과 별개로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7). 끊임없이 순간적으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에서 현재의 의식이 있기 ‘바로 직전 순간의’(samanantarapratyaya, 等無間緣) 의식을 정신(manas)이란 명칭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8).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불교의 여러 학파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야쇼미뜨라(Yaśomitra)는 유식학파(Yogācārins)가 이 정신(manas)을 기존의 여섯의식(六識)과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며, 스리랑카(Tāmraparṇīya)의 테라바다(Theravāda)는 정신(manas)을 정신의식(manovijñāna)의 의지처로서 심장 (hṛdyavastu)이라고 잘못 상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9)
그렇다면 왜 현재의 의식이 생기기 직전의 의식을 정신(manas)이라고 이름 짓게 되었을까? 불교의 18계 분류에서 각각의 물질적인 외부대상에 대해서 이들에 상응하는 시각기관, 청각기관, 후각기관, 미각기관 그리고 촉각기관이란 물질적인 내부기관들이 있는 반면, 정신적인 대상(dharma)에에 대해서 정신적인 내부기관으로서 단순히 의식(vijñāna)이라고만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인도에서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관념들을 지배하는 기관으로 받아들여졌던 정신(manas)이란 용어를 빌려 쓰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구사론?(Abhidharmakośabhāṣya)에서는 다섯가지 물질적인 의식들이 각각의 의지처로서 물직적인 내부기관을 가지는 것에 대해 정신적인 의식 또한 그 의지처를 상정해야 하는데 전 찰라의 의식이 그러한 역할을 함으로 이를 정신(manas)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10) 즉 초기인도불교에서 정신(manas)은 독립적인 실체라기 보다는 전찰라의 의식(vijñāna)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한 것이 된다.
III. 와이쉐시까(Vaiśeṣika) 학파에서 내적기관(manas)
자아(ātman)과 내적기관(manas)의 관계에 대한 힌두철학의 초기적인 언급을 우리는 ?브리하드아란야까 우빠니샤드?(Bṛharḍranyaka Upaniṣad)의 창조론에 대한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11)
그 [최초의 인간(Puruṣa)]은 이 신체의 손톱 끝까지 들어와 있다. 마치 면도칼집 속의 면도칼, 전갈 굴 속의 전갈처럼 들어 있다. 사람들은 그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숨술 때에는 호흡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말할 때는 언어로, 볼 때는 시각으로, 들을 때는 청각으로, 생각할 때는 정신(manas)으로 [불린다]. 이들은 그의 여러 가지 작용들의 이름에 불과하다. 이로부터 그를 [작용들] 각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를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완전하지 않음으로 따라서 그는 각각의 [작용들]로서 있기 때문이다. 오직 자아(ātman)로서만 받아들여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 자아라는 것은 그 모든 것의 자취이다. 왜냐하면 그 [자아]를 통해서 이 모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양치기]가 발자국을 통해서 [잃어버린 양을] 찾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와 같이 [자아]를 아는 사람은 명성과 영광을 얻는다.
여기에서 자아(ātman)는 우리 신체의 손톱 끝까지 들어와 있는 몸의 전체에 편재하는 것으로서 설명되고 있으며, 정신(manas)은 자아의 각각 완전하지 않은(akṛtsna)작용들 중에서 생각하는 작용에 대한 명칭으로 설명되고 있다. ?브리하드아란야까 우빠니샤드?의 이러한 언급은 후대 힌두철학 각 학파의 자아(ātman)와 정신(manas)에 대한 이해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거의 대부분의 학파에서 자아(ātman)는 우리 신체의 모든 부분에 편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정신 또는 내적기관(manas)은 이를 통해서 우리의 사유가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와이쉐시까(Vaiśeṣika) 학파에서 자아(ātman)는 인식의 의지처(jñāna-adhikaraṇa)이고 인식은 자아의 특별한 속성(guṇa)으로서 설명된다. 자아는 영원한 실체(nitya-dravya)로서 전생의 행위에 따른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윤회하는 주체가 된다. 우리가 특정 대상에 대해 욕망 또는 혐오를 느끼고 취하려 하거나 피하려 하거나 하면서 행동하는 것, 과거의 즐거움 또는 괴로움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른 시간에 다른 대상들을 경험하는 단일한 주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으로부터 자아(ātman)의 존재가 증명된다고 한다.12)
한편 정신(manas)은 와이쉐시까 학파에서 내적기관으로 설명된다. 내적기관(manas)은 즐거움 또는 괴로움과 같은 내적 현상에 대한 인식의 도구(antaḥ-karaṇa)이고 외적 감각기관의 지각에 대한 보조자로서 원자의 크기에 영구하고 운동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설명된다.13)
와이쉐시까(Vaiśeṣika) 학파에 의하면, 인식은 먼저 자아(ātman)와 내적기관(manas)이 접촉하고 다시 내적기관(manas)과 감각기관(indriya)이 접촉함을 통해서 일어난다. 자아(ātman) 감각기관(indriya) 대상(artha)이 접촉했을 때도 인식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원자크기의 내적기관(manas)이 어디에 접촉하고 있는가에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은 동시적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다르게 일어나게 되는데, 원자적인 속성의 내적기관(manas)이 한 번에 단 하나의 감각기관과 접촉(sayoga)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니야야 와이쉐시까 학파는 인식의 이러한 측면을 순차적(krama)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설명하는데, 밧뜨(Govardhan P. Bhatt)는 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4)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을 보는 동안에 동시적으로 내 귀에는 소리가 들리고 내가 입고 있는 옷의 촉감이 느껴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글을 보는 순간에 귀에 들리는 소리나 옷의 촉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는 각각의 순간에 내가 대상을 의식하는 것에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니야야학파의 사람들(Naiyāyika)은 이것을 내적기관(manas)의 존재와 그 크기가 원자만한 하다는 것의 증명15)으로 언급한다.
동일한 순간에 우리 몸의 시각기관 청각기관 촉각기관 등 감각기관들이 동시에 각 영역의 외부대상들과 접촉하고 있음에도 그러한 대상들에 대한 인식이 동시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순차적(krama)으로 일어나는 것으로부터 감각기관과 인식의 주체인 자아(ātman) 사이에 원자 크기의 내적기관(manas)이 양쪽으로 접촉(saṃyoga)16)하고 있음으로 가능하다 설명이다.
앞에서 언급된 밧뜨의 예에서 시각기관 청각기관 촉각기관 모두가 각각 대상과 접촉하고 있지만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을 보는 순간에 내적기관(manas)이 시각기관과 자아(ātman) 사이에서 양쪽으로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시각적인 의식만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 소리를 듣는 순간에는 청각기관과 자아 사이에서 그리고 옷을 촉감을 느낄 때에는 촉각기관과 자아 사이에 내적기관이 위치하여 양쪽과 접촉함을 통해 일정한 의식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한편 세친은 ‘마음은 실로 순차적(krama)으로 연결 된다’17)는 언급을 통해 인식이 동시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순차적(krama)으로 일어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자아와 감각기관을 연결해 주는 내적기관(manas)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구사론?(Abhidharmakośabhāṣya) 1장에 나타나는 비택멸(apratisaṃkhyānirdha)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설일체유부(Sarvāstivādins)와 경량부(Sautrāntikas)가 한 찰나에 오직 한 가지 의식만이 생겨날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의식이 동시적이 아니라 순차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점을 인할 수 있다18). 그렇다면 세친은 ?구사론?(Abhidharmakośabhāṣya) 「파아품」에서 이러한 와이쉐시까(Vaiśeṣika) 학파의 내적기관(manas)을 어떻게 논박하고 있을까?
IV. 내적기관(manas)에 대한 세친의 비판
세친은 「파아품」으로 알려진 ?구사론?(Abhidharmakośabhāṣya)의 마지막 장의 뒷부분에서 Tīrthika로 언급된 外道와의 정신기관(manas)에 대한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19). Tīrthika는 강둑, 연안 등의 의미를 지닌 tīra의 파생명사로 ‘[다른] 가르침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불교 이외의 다른 가르침을 통해서 윤회의 강을 건너가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상키야, 요가, 니야야, 와이세시까 학파 및 문법학파(Vaiyākarana) 등이 해당될 수 있는데, 주어진 부분에 있어서 상대가 와이세시까(Vaiśeṣika) 학파라는 야쇼미뜨라(Yaśomitra)의 견해20)에 대해 거의 이견이 없다21).
와이세시까(Vaiśeṣika) 학파의 정신기관(manas)에 대한 견해는 대체적으로 니야냐(Nyāya) 학파와 동일하다. 이들은 우리의 의식이 일정하게 순차적으로(krama-niyama)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의 불교에 대한 반박은 「파아품」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22)
만일 의식이 자아(ātman)가 아니라 [전찰나의] 의식으로부터 생겨난다면, 어떻게 해서 [전찰나의] 그 [의식과] 항상 동일하게 생겨나지 않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마치 뿌리 줄기 잎 등의 경우와 같이 일정하게 순차적으로 [일어나지 않는가]?
이것이 어떤 사람들의 문제제기일까 하는 점에 대해서 위의 경우와 달리 많은 논란이 있는데, 현장과 그 제자들 및 라발레뿌셍과 차르바스키는 이 대론자를 상키야(Sāṃkhyā)학파로 보는 반면, 야쇼미뜨라(Yaśomitra)와 듀링거는 와이세시까(Vaiśeṣika) 학파로 보고 있다23). 한편으로 뿌리 줄기 잎 등이란 예를 통해서 상키야의 전변(pariṇama)이 이야기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순차적(krama)이란 용어로부터 니야냐 와이세시까 학파의 인식작용이 이야기 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계속되는 manas, 즉 정신 또는 내적기관을 둘러싼 논쟁이 의식의 순차적인(krama) 특성과 관련되어 진행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사람들은 와이세시까 학파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비록 정신(manas)이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12처와 18계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정신은 아래의 도표에서 보이듯이 엄격하게 말해서 명칭(prajñaptisat)에 불과하다.
아주 더운 날 에어컨을 보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에어컨이란 시각적 의식이 외적대상으로서 에어컨과 내적기관으로서 눈을 조건으로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각적 의식은 아직까지 언어적이고 정신적 의식이 아니다. 바로 다음 순간에 내적대상으로서 에어컨이란 언어적 정신적 개념과 이 전순간의 시각적 의식을 조건으로 에어컨이란 정신적 언어적 의식이 생겨나게 된다. 이 경우에 전순간의 시각적 의식이 눈과 같은 내적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정신적 언어적 의식의 의지처가 됨으로 정신(manas)이란 명칭이 부여되는 것이다.
세친은 의식의 순차성(krama)을 내적기관(manas)의 역할을 통해서 설명하는 와이세시까 학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공격하고 한다:24)
[와이세시까(Vaiśeṣika): 의식이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내적기관(manas)과 [자아(ātman)]의 특별한 접촉(saṃyoga)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 한다.
[세친(Vasubandhu)]: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대상과 기관의 접촉 이외에] 다른 접촉은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가지 접촉이 분리되어 있음으로부터 또한 ‘이전에 만나지 않은 것이 만나는 것을 접촉(saṃyoga)이라 한다’는 특성에 대한 [와이세시까]의 해석으로부터 자아(ātman)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따라서 내적기관(manas)의 움직임으로부터 자아(ātman)도 움직여야 하거나 또는 파괴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와이세시까(Vaiśeṣika): 내적기관(manas)과 자아(ātman)의 일]부분과의 접촉이다.
[세친(Vasubandhu)]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바로 그 [자아(ātman)]에 있어서 그것이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세친은 먼저 앞에서 언급한 와이세시까 학파의 인식흐름에 대한 도표에서 외부대상과 감각기관의 접촉 이외에 접촉1, 접촉2로 표시한 두 가지 접촉(saṃyoga)이 증명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자아(ātman)와 내적기관(manas)의 접촉 그리고 내적기관과 감각기관의 접촉이란 두 가지 분리된 접촉이 우리의 신체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세친의 첫 번째 반박은 자아(ātman)가 우리 신체 전체에 편제해 있다는 힌두사상의 관념이 그들의 접촉(saṃyoga)에 대한 정의와 위배됨을 지적하는 것이다. 자아(ātman)가 이미 우리의 신체에 편재해 있고 감각기관 및 내적기관이 우리 신체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자아, 감각기관 그리고 내적기관은 항상 접촉하고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는 ‘이전에 만나지 않은 것이 만나는 것을 접촉(saṃyoga)이라 한다’는 와이세시까의 접촉에 대한 정의에 위배됨으로 접촉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된다. 만일 와이세시까의 정의에 입각한 접촉(saṃyoga)이 가능하려면, 자아(ātman)은 부분을 가지는 것 또는 한정되어서 분리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하는데 이는 자아가 우리의 신체 전체에 편제한다는 힌두철학의 기본적인 자아(ātman) 관념에 위배된다.
세친의 두 번째 반박은 내적기관(manas)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시각의식과 청각의식이 순차적으로 생겨난다고 했을 때, 내적기관(manas)은 전 찰나에 시각기관과 접촉했다가 다음 찰나에 청각기관과 접촉하기 위해 이동해야만 한다. 내적기관(manas)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움직임으로 자아(ātman) 또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해야 앞의 도표에서 접촉1로 설명된 내적기관과 자아의 접촉이 가능해 질 것이다. 이때 신체에 편재해 있는 자아(ātman)가 신체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만일 움직였다면 동일한 것이 다른 두 지점에 동시에 있을 수 없음으로 한쪽은 파괴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내적기관(manas)이 자아(ātman)의 일부분과 접촉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자아(ātman)는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힌두철학의 기본적인 자아(ātman) 관념에 위배된다.
세친의 입장에서는 찰나찰나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마음(citta)을 통해서 이러한 의식의 순차적인 성격이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내적기관과 접촉 등을 통해서 복잡하게 설명하는 와이세시까 (Vaiśeṣika) 학파를 ‘마치 약의 작용으로 [병이] 낳을 수 있음에도 의사가 거짓으로 “phuḥ! svāha!”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과 같다’고 비판한다. 세친의 이러한 비판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세친이 아직까지 마음(citta), 정신(manas), 그리고 의식(vijñāna)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정신을 전찰라의 의식에 붙여진 명칭(prajñapti)으로 보는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본다.
V. 미맘사밧따 학파에서 내적기관(manas)의 변화
세친의 앞에서 살펴본 내적기관(manas)과 두가지 접촉(saṃyoga)의 문제에 대한 논박이 니야야(Nyāya) 와이세시까(Vaiśeṣika) 학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직접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니야야 수뜨라 또는 와이세시까 수뜨라에 나오는 이러한 설명을 수정한다는 것은 니야야(Nyāya) 와이세시까(Vaiśeṣika) 학파의 존립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야야(Nyāya) 와이세시까(Vaiśeṣika) 학파의 인식론을 대체적으로 계승한 미맘사(Mīmāmsa)학파에서 내적기관(manas)에 대한 해석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미맘사에서 좀 더 전통적인 성향을 지닌 쁘라바까라(Prabhākara) 학파는 앞에서 보았던 니야야(Nyāya) 와이세시까(Vaiśeṣika) 학파와 같이 내적기관(manas)이 원자크기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반면, 좀더 진보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밧따(Bhaṭṭa) 학파는 내적기관이 신체 전체에 편재해 있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The Philosophical Traditions of India에서 라주(P.T. Raju)는 내적기관으로 알려진 manas가 미맘사(Mīmāmsa)학파에서 좀 더 전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쁘라바까라(Prabhākara)의해 원자(atom)만한 크기의 것으로 설명된 반면; 좀 더 진보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꾸마릴라(Kumārila)에 의해 신체전체에 편재해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고 한다25). 비록 쁘라바까라가 내적기관(manas)의 증명에 있어서 니야야(Nyāya) 와이세시까(Vaiśeṣika) 학파와 조금은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적기관이 한편으로 감각기관(indriya), 다른 한편으로 자아(ātman)와의 접촉(saṃyoga)함을 통해서 우리의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26).
꾸마릴라가 내적기관(manas)을 신체 전체에 편재해 있는 것으로 본다고 하는 라주의 설명에는 문제가 있다. 사실상 꾸마릴라의 ?슬로까와르띠까?(Ślokavārtika)에서는 이 문제가 직접적으로 거론되고 있지 않으며, 밧뜨(Govardhan P. Bhatt)의 표현을 따르자면 ‘니야냐(Nyāya)의 견해에 대해 논박하지 않았음으로 사실상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27). 니야야 및 쁘라바까라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내적기관(manas)이 신체 전체에 편재해 있음을 이론적으로 확립한 사람은 후대 미맘사(Mīmāmsa)학파에서 꾸마릴라(Kumārila)의 견해를 따르는 밧따(Bhaṭṭa)학파의 찟아난다(Cidānanda)에 의해서이다28). 다시 말해서 내적기관(manas)을 신체전체에 편재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꾸마릴라의 견해가 아니라 후대 미맘사 밧따학파의 견해인 것이다.
쁘라바까라(Prabhākara) 학파에 의하면 의식은 순간적이고 자아(ātman)와 같은 궁극적인 실제의 구체적인 특성이다. 이러한 특성은 오직 다른 실제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그 실체가 바로 내적기관(manas)이다. 이때 내적기관(manas)은 편재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움직임이 없이 그러한 접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분자 크기일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분자 크기는 항상 물질적인 원인의 결과이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내적기관(manas)이라는 것은 오직 원자크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쁘라바까라(Prabhākara) 학파의 결론이다29).
찟아난다(Cidānanda)는 의식의 순차성(krama)을 통한 니야야(Nyāya) 와이세시까(Vaiśeṣika)의 내적기관 증명에 대해서 그러한 순차성(krama)은 원자크기의 내적기관이 감각기관과 자아 사이에서 접촉함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아(ātman) 자체가 기본적으로 순차적으로 의식을 생성시키기 때문이라며 논파한다.30)
위의 쁘라바까라(Prabhākara) 학파의 경우 순간적이고 자아와 같은 궁극적인 실제의 특성이 오직 접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아가 편제함으로 결코 움직임이 없다면 의식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의 신체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지만, 신체의 움직임이 없는 수면상태에서도 의식이 일어난다는 것으로부터 이들의 주장을 논파한다.31)
찟아난다(Cidānanda)는 내적기관(manas)이 자아와 같이 감촉할 수 없는 것이고, 물질적인 원인의 결과가 아니며, 접촉의 기체라는 점으로부터 이를 자아와 동일하게 신체에 편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32) 여기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동일하게 신체에 편제하는 자아와 내적기관의 접촉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접촉(saṃyoga)이란 둘 중에서 하나 또는 둘 모두가 움직일 때만 가능한데 양자 모두가 신체에 편제함으로 움직임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찟아난다(Cidānanda)는 움직임이 없는 실제가 신체에 편제해 있다면 그들은 이미 접촉한 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움직임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33) 이러한 미맘사 밧따(Bhaṭṭa)학파의 견해에 따르면 의식이 일어나는 것에 있어서 내적기관(manas)의 역할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자아(ātman)의 역할은 점점 더 늘어나서 사실상 내적기관이 점차적으로 거의 쓸모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듯하다34).
VI. 결어
미맘사 밧따(Bhaṭṭa)학파는 긴긴 과정을 거쳐서 내적기관을 원자크기로서 감각기관과 자아와의 접촉을 통해 의식이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한다는 전통적인 설명을 버리고, 내적기관을 자아와 동일하게 신체 전체에 편제하는 것으로 보고 그 역할을 점점 축소하게 된다. 물론 그 배경에는 신체 전체에 편재하는 자아(ātman)에 대한 힌두적 관념 하에서 내적기관(manas)의 두가지 접촉(saṃyoga)은 불가능하다는 세친의 지적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반박이 세친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는지 힌두 사상가들에 의해서 제기되기 시작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와이세시까(Vaiśeṣika)에서 내적기관으로 이해되었던 정신(manas)에 대한 세친의 견해가 아직까지 마음(citta), 정신(manas), 그리고 의식(vijñāna)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정신을 전찰라의 의식에 붙여진 명칭(prajñapti)으로 보는 설일체유부(Sarvāstivādins)와 경량부(Sautrāntikas)의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음은 확인할 수 있다.
사실상 유식에서 제7식으로서 manas는 주관과 객관을 분별하고 양자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니야야(Nyāya) 와이세시까(Vaiśeṣika)의 내적기관(manas)과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내적기관으로서 manas의 존재성에 대한 세친의 단호한 비판적 태도는 그가 아직까지 좀 더 보수적인 부파불교의 영역 안에 있음을 반증하는 하나의 증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주제어
정신(mentality), 내적기관(internal organ), 세친(Vasubandhu), 경량부(Sautrāntikas), 와이세시까(Vaiśeṣika), 미맘사(Mīmāmsa), 구사론(Abhidharmakośabhāṣya), 인식론(congnition).
On Sautrāntika Vasubandhu's Idea of Mentality (Manas) in His Debate with the Vaiśeṣika school.
Hwang, Soon-il (Dongguk Univ.)
There has been a dispute on the character of Vasubandhu when he was writing the Abhiharmakośabhāṣya. Such scholars as Robert Kritzer insisted that he was already influenced by the Yogācārins. There are scholars who regard Vasubandhu working under the name of the Sautrāntikas not as a hīnayāna but as a mahāyāna scholar. Although he can be understood in this say from the some aspects of his writing, there are indications to show he still is in the field of the traditional Buddhist Institution. In this paper I will deal with this problem though his interpretation of mentality (manas), especially in the argument against the Vaiśeṣika school.
As you may well aware, there is no difference in their reference in the mind (citta), mentality (manas), and consciousness (vijñāna) within the Northern Buddhist schools, such as the Sarvāstivādins and the Sautrāntikas. However, they become the 8th ālayavijñāna, the 7th manas and the 6th manovijñāna respectively in the depth psychology of the Vijñaptimātra-Yogācārins. While the 8th ālayavijñāna was a fresh concept introduced, the 7th consciousness, manas, was the modification of the existing concept. Thus, how Vasubandhu understood manas could be a kind of yardstick to decide his character during the time of the Abhidharmakośabhāṣya.
The second chapter deals with the general understanding of he mind (citta), mentality (manas), and consciousness (vijñāna) from the scattered passages of the Abhidharmakośabhāṣya. The third chapter studies the Vaiśeṣika understanding of manas. For them it is the inner faculty to link between faculties and self (ātman) and is the size of an atom. The forth chapter deals with the refutation of the Vaiśeṣika manas seen in the ninth chapter of the Abhidharmakośabhāṣya. In the fifth chapter, I will discuss the later development of the inner faculty (manas) within one of the Hindu philosophical schools, the Mīmāmsa. In the Bhaṭṭa school of the Mīmāmsa, the working of manas between faculties and self (ātman) was reduced to almost no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