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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인 에카쿠白隠慧鶴(はくいん えかく、1686 - 1769)의 척수음성 隻手音声 한손바닥의 손뼉소리

VIS VITALIS 2021. 1. 26. 04:18

하쿠인 에카쿠白隠慧鶴(はくいん えかく、1686 - 1769)

 

 

일본의 임제종을 중흥한 고승이다.

1685년 스루가국[駿河國:지금의 시즈오카] 하라주쿠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포교 연극을 보고 출가를 결심한 뒤 15세에 송음사 단령 조전의 문하로 출가하여 혜학(慧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대성사의 식도로부터 경전과 어록을 배웠으며,

19세에 선총사라는 절에서 암두 선사에 관한 글을 읽고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이 때부터 선수행을 그만두고 서운사의 마옹을 찾아가 서예와 시를 익혔다.

24세 때 종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정수암에 머물던 도경 혜단에게 선수행을 배우다가 어느 할머니에게 빗자루로 맞고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한다.

 

수행자들의 귀감이 되는 《야선한화》와 《원라천부》를 집필하였고

척수음성(隻手音聲)이라는 화두를 창시하기도 하였다.

하쿠인[白隱]이라는 법호는 묘심사에 승적을 등록할 때 스스로 지은 것이다.

백법(白法), 곧 불법이 은몰(隱沒)한다는 뜻으로 말세사상을 상징하는 말이다.

 

50세부터 약 30년간은 대중포교에 노력하여 귀족이나 무사·농민들에게 맞는 법어·선화(禪畵)·민요 등을 만들었다.

이러한 대중포교 활동은 일본 선종의 대중화는 물론,

특히 화두를 중시하는 임제종의 중흥에 큰 역할을 하였다.

신기독묘선사(神機獨妙禪師)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저서로는

《벽생초》 《보감이조》 《형총독예》 《괴안국어》 《한림이보》 《한산시천제기문》 《가명인연법어》 《야선한화》 《원라천부》 《좌선화찬》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쿠인 에카쿠 [Hakuin Ekaku, 白隠慧鶴(백은혜학)] (두산백과)

[출처] 하쿠인 에카쿠 [Hakuin Ekaku, 白隠慧鶴(백은혜학)|작성자 왕달

 

 

 

白隠慧鶴(はくいん えかく、1686年1月19日貞享2年12月25日) - 1769年1月18日明和5年12月11日))は、臨済宗中興の祖と称される江戸中期禅僧である。は神機独妙禅師、正宗国師。

目次

生涯[編集]

 

円窓内自画像 永青文庫蔵。明和元年(1764年)白隠80歳の自画像

駿河国原宿(現・静岡県沼津市原)にあった長沢家の三男として生まれた白隠は、15歳で出家して諸国を行脚して修行を重ね、24歳の時に鐘の音を聞いて見性体験するも増長して、信濃長野県飯山正受老人(道鏡慧端)にあなぐら禅坊主と厳しく指弾され、その指導を受けて修行を続け、老婆に箒で叩き回されて次の階梯の悟りを得る。のちに禅修行のやり過ぎで禅病となるも、白幽子という仙人より「内観の秘法」を授かって回復した[1]。その白幽子の机上には只『中庸』『老子』『金剛般若経』のみが置かれていたという。更に修行を進め、42歳の時にコオロギの声を聴いて仏法の悟りを完成した。

この経験から禅を行うと起こる禅病を治す治療法を考案し、多くの若い修行僧を救った。「内観の秘法」は気功でいう気海丹田式の功法に相当するものであり、またこれは天台小止観と同じとも言っている。他にも「軟酥の法[1]」を教授している。

また他の宗門を兼ねて修道すべきではないと戒めている。これは他の宗門を排除するためではなく、それぞれの宗門を修めることがそれぞれに成道することに繋がると捉えているからである。

浄土門は浄土門として認め、真正念仏の人という話もしている。また妙法蓮華の話もしている。

地元に帰って布教を続け、曹洞宗黄檗宗と比較して衰退していた臨済宗を復興させ、「駿河には過ぎたるものが二つあり、富士のお山に原の白隠」とまで謳われた。

現在も、臨済宗十四派は全て白隠を中興としているため、彼の著した「坐禅和讃」を坐禅の折に読誦する。

現在、墓は原の松蔭寺にあって、県指定史跡となり、彼の描いた禅画も多数保存されている。

略歴[編集]

思想[編集]

彼は初めて悟りの後の修行(悟後の修行)の重要性を説き、生涯に三六回の悟りを開いたと自称した。その飽くなき求道精神は「大悟十八度、小悟数知らず」という言葉に表象され、現代に伝わっている。また、これまでの語録を再編して公案を洗練させ、体系化した。中でも自ら考案した「隻手音声」と最初の見性体験をした「趙州無字」の問いを、公案の最初の入り口に置き、以後の修行者に必ず参究するようにさせた。

また、菩提心(四弘誓願)の大切さを説いた。菩提心の無き修行者は「魔道に落ちる」と、自身の著作に綴っている。彼は生涯において、この四弘誓願を貫き通し、民衆の教化および弟子を育てた。

禅画と墨蹟[編集]

白隠はまた、広く民衆への布教に務め、その過程で禅の教えを表した絵を数多く描いたことでも知られる。その総数は定かではないが、1万点かそれ以上とも言われる[3]。絵はおそらく独学と思われるが、製作年がわかる最も早い作である「達磨図」(個人蔵、享保4年(1719年))ではすでに巧みな画技を見せている。しかし、技巧を拒否するような白隠独自の表現が、縦220cm以上にも及ぶ大作「達磨図」(豊橋市正宗寺、寛延4年(1751年))あたりから見え始める。

代表作の一つ「大燈国師像」(永青文庫蔵)では、両手のデッサンは狂い、両足の位置もおかしく、身を包む衣や笠は平板で稚拙な線の寄せ集めで、紙面には下書きや描き直しの跡が残る。しかし、これらの写実性を欠く描写が厳しく恐ろしい顔貌表現と併置されることで、現実の肉体を超越した精神の限りない気高さを表象している。このような拙によって巧を超え、醜を転じて聖となす、殆ど絵画の反則技とも言える技法は、後の曾我蕭白などに強い感銘を与えたと想像できる[4]。これに近い評は白隠の墨蹟にも存在する。書家の石川九楊は、「書法の失調」を捉え、「書でなくなることによって書である」という逆説によって成り立っている書ならざる書と評している[5]

白隠の書画の代表的コレクターに、細川護立山本発次郎がおり、前者のコレクション永青文庫に収められ、後者は大阪市立近代美術館建設準備室寄贈されている。

主な弟子門下たち[編集]

  • 東嶺円慈(1721-1792) 誰もが認める白隠の一番弟子。三島龍沢寺を開創。
  • 遂翁元盧(1717-1789) 東嶺と双璧の白隠の弟子。白隠から松蔭寺を受け継いだ。お酒を好んだと言われる。
  • 峨山慈棹(1727-1797) 多くの弟子を育て、白隠禅の法系を現在まで伝えた。隠山惟琰卓洲胡僊も峨山の弟子である。
  • 斯経慧梁(1722-1789) 専門僧堂として妙心寺派の円福僧堂を京都の八幡に開単した。
  • 快岩古徹 古月禅材のもとで大休と修行し、後に縁あって白隠のもとで大悟した。山梨県長光寺に住した。
  • 大休慧昉(1715-1774) 白隠のもとで大悟し、東福寺派の岡山宝福寺に住した。
  • 霊源慧桃(1721-1785) 白隠禅師のもとで長く修行し、天龍寺僧堂へ出世した。
  • 天倪慧謙(1723-1794) 東福寺派僧堂の常栄寺の第十世。白隠十哲の一人。
  • 提洲禅恕(1720-1780) 伯耆(鳥取県)の人。白隠の著作で禅語の語録『荊叢毒蘂』の編集に当たった。
  • 良哉元明(1706-1786) 白隠が初めて印可を出した弟子。初め日向大光寺古月禅材に参じて悟りを開いた後、駿河に行き松蔭寺の白隠慧鶴に師事した。
  • 葦津慧隆(1720-1769) 出雲(島根県)の人。永徳寺に住した。白隠下の二畸哲の一人。池大雅の参禅を受けた。
  • 円桂祖耗(1715-1774) 大休慧昉快岩古徹とともに白隠の侍者をした。松江天倫寺住職。
  • 環渓祖提(生没年不詳) 遠江の勝光寺に住す。
  • 梁山義存(1717-1786) 遠江浜松の寿量院に住す。環渓祖提の法弟である。
  • 悟庵禅聡(1685-1767) 遠江の広厳寺の住職。
  • 長沙恵法(1710-1781) 遠江の瑞応寺(方向寺派)に住寺した。
  • 滄海宜運(1722-1794) 日向の報恩寺(妙心寺派・現廃寺)に住した。
  • 大同曇慧(1730-1780) 豊後の月桂寺に住した。
  • 層巓方邃(1722-1782) 信州飯田の瑞泉山龍翔寺(妙心寺派)の六世。
  • 頑極禅虎(?-1794) 播磨の横峰山大梵寺(妙心寺派)の住した。
  • 格宗浄超(1711-1790) 黄檗宗の格宗は白隠に参禅後、萬福寺の住持に出世。
  • 恵昌尼(?-1764) 夫と死別後、尼となって白隠禅師に参禅し見性した。

以下は居士の弟子

  • 山梨了徹居士(1707-1763) 駿河庵原の大財産家で酒造業を営む豪族である。沢水法語の言葉を聞いて発心して大悟する。
  • 阪自洞居士(生没年不詳) 沼津の人で、18歳で白隠に参禅し、十日で『隻手の音声』の公案を透過した。
  • 古郡兼通居士(1695-1746) 小田原城主稲葉丹後守の家臣で、はじめ日蓮信者であった
  • 阿察婆(1714-1789) お察ばあさんは、白隠の親戚の娘である。
  • 政女
  • 茶店婆
  • 原駅の婆

[6][7]

主要な著作

漢文で書かれた禅の専門書

  • 『槐安国語』(かいあんこくご) 五巻
  • 『荊叢毒蘂』(けいそうどくずい) 九巻
  • 『寒山詩闡提記聞』(かんざんしせんだいきもん) 三巻
  • 『息耕録開筵普説』(そくこうろくかいえんふせつ)
  • 『宝鑑照』(ほうかんいしょう)
  • 『毒語心経』(どくごしんきょう)
  • 『寒林宝』(かんりんたいほう)

끼칠 이

부수貝 (조개패, 7획) 획수12획

  • 1

    끼치다

  • 2

    남기다

  • 3

    전하다(傳--)

漢文口調の文語体のもの

  • 『夜船閑話』(やせんかんな) 二巻[8]
  • 『遠羅天釜』(おらてがま) 五篇
  • 『壁生草』(いつまでぐさ) 二巻
  • 『八重葎』(やえむぐら) 二巻
  • 『藪柑子』(やぶこうじ)
  • 『辺鄙以知吾』(へびいちご)
  • 『於仁安佐美』(おにあざみ)

仮名文字や、歌物語風の法話・小唄

  • 坐禅和讃』(ざぜんわさん)
  • 『子守唄』
  • 『おたふ女郎粉引歌』
  • 『大道ちょぼくれ』
  • 『草取歌』
  • 『御代の腹鼓』(みよのはらつづみ)
  • 『謎謎』

侍者による随聞録[編集]

  • 永田春雄編『碧巖集秘抄』成功雜誌社、1916年

脚注[編集]

  1. ^ a b 高橋紳吾『超能力と霊能者』1997年、岩波書店、58-62頁。
  2. ^ 秋月龍珉『白隠禅師』河出書房新社、2013年
  3. ^ ユーモラスで深いメッセージが込められた、白隠の書画に注目! 「白隠展 HAKUIN 禅画に込められたメッセージ」 - OZmall 2012年12月23日
  4. ^ 佐藤康宏「江戸美術の畸人たち」、『美術史論叢』東京大学大学院人文社会系研究科・文学部美術史研究室、24号、2008年 22-23頁。
  5. ^ 石川九楊 「書ならざる書 白隠「巌頭和尚語」」『日本書史』 名古屋大学出版会、2001年、495-501頁。ISBN 4-8158-0405-2
  6. ^ 『臨済宗黄檗宗 宗学概論』臨済禅師1150年白隠禅師250年遠諱記念刊行 臨済宗黄檗宗連合各派合議所発行 禅文化研究所制作 2016年4月
  7. ^ 能仁晃道編『白隠門下逸話選』禅文化研究所、2000年。
  8. ^ 訳注は、鎌田茂雄『日本の禅語録 第19巻 白隠』(講談社、1977年、新装版1994年)。他に遠羅天釜・薮柑子を収録

参考文献[編集]

  • 秋月龍珉『白隠禅師』河出書房新社、2013年。
  • 佐藤康宏「江戸美術の畸人たち」、『美術史論叢』東京大学大学院人文社会系研究科・文学部美術史研究室、24号、2008年。
  • 石川九楊『日本書史』名古屋大学出版会、2001年。
  • 直木公彦『白隠禅師――健康法と逸話』日本教文社、1975年。

関連文献[編集]

  • 大森曹玄 『書と禅』 1975年 新装版第二版 春秋社 p.149白隠と盤珪 p.161白隠および古月下の人々(一) p.173白隠および古月下の人々(二)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

11. 암두 전할(巖頭前奯)선사

/ 828~887

 

스님의 법명은 전할(全奯)이다. 덕산 선감(德山宣鑑)스님의 법제자로 천주(泉州)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가씨(柯氏)다.

어느 날 덕산스님을 찾아뵈었는데 문지방을 넘어서면서 물었다.

“이것이 범인입니까 성인입니까?”

덕산스님이 악! 하자 스님은 절을 올렸다. 한 스님이 이 이야기를 동산(洞山 : 807~869)스님에게 전하니, “만일 전할스님이 아니었다면 알아듣기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스님은 이 말을 전해듣고 말하였다.

“동산노인이 좋고 나쁜 것도 모르고 내 이름을 잘못 들먹였다. 나는 당시 한쪽 손은 위로, 한쪽 손은 아래로 내렸었다.”

 

하루는 설봉, 흠산(欽山)스님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데 그릇에 물이 담겨 있는 것을 보고서 흠산스님은 “물이 맑으니 달이 나타나는구나” 하였고, 설봉스님은 “물이 맑으니 달이 나타나지 않는구나” 하였다. 스님은 물그릇을 걷어차고 나가버렸다.

 

스님이 설봉스님과 함께 덕산스님의 회하를 떠나려 할 때 덕산스님이 물었다.

“어디로 가려는가?”

“잠시 스님의 회하를 떠나려 합니다.”

“그대는 뒷날 무엇을 하려는가?”

“스님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가?”

“스님께서는 듣지 못하셨습니까? ‘지혜가 스승과 같으면 그 덕은 스승의 반으로 줄어드니, 지혜가 스승보다 더 나아가 비로소 법을 전수받을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렇지 그렇지! 잘 간직하게.”

 

스님은 악주(鄂州) 암두산에 있다가 폐불사태(廢佛沙汰)를 만나 동정호가에서 뱃사공이 되었다. 양 언덕에 판자 하나씩 걸어놓고 강을 건너려는 사람이 그 판자를 한 번 치면 “누구냐”고 묻고, “저쪽으로 건너가려 하오”라고 대답하면 스님은 춤추듯 노를 저어 손님을 맞이하였다. 하루는 한 노파가 어린아이를 안고서 물었다.

“키를 들어올리고 춤추듯 노젓는 일이야 물을 것 없고, 이 노파의 손에 안긴 어린아이는 어디에서 왔는가?”

스님은 노로 뱃머리를 쳤다. 이에 노파는 말하였다.

“이 노파가 일곱 아이를 낳았는데 여섯은 좋은 도반[知音]을 만나지 못하였소. 그리고 이 아이마저 만나지 못하는구려.”

그리고는 아이를 물속에 던져버렸다.

스님이 뒤에 동정호가의 와룡산(臥龍山)에 암자를 마련하자 수많은 문도가 모여들었다.

한 스님이 물었다.

“스승 없이도 몸을 벗어나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 소리를 내기 전에 해묵은 솜옷이 썩었느니라.”

 

상당하여 말하였다.

“내 이제껏 「열반경」을 탐구해 온 지 7, 8년 되는데, 그 가운데 한두 마디는 납승의 설법과 비슷한 곳이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하였다.

“그만두자, 그만둬.”

이때 한 스님이 앞으로 나와 절을 올리고 청하였다.

“스님께서는 대중을 위하여 설법해 주십시오.”

스님은 마침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가르침[敎意]은 ∴자의 세 점과 같다. ‘첫번째는 동쪽에 한 점을 찍으니 모든 보살의 눈에다 찍어서 개안케 한 것이며, 두번째는 서쪽에 한 점을 찍으니, 모든 보살의 명근(命根)에 점 찍은 것이며, 세번째는 위에다가 한 점을 찍으니, 모든 보살의 정수리를 열어 줌이다’ 하니, 이는 「열반경」의 첫마디 법문이다. ‘이 가르침은 마치 마혜수라(摩醯首羅)의 얼굴에 있는 한 쪽 눈과 같다’ 하니 이는 두번째 마디 법문이다. ‘이 가르침은 독을 바른 북[塗毒鼓]과 같아서 한 번 치면 멀리든 가까이든 들은 모든 이가 목숨을 잃는다’ 하니 이는 셋째 마디 법문이다.”

이때 소엄(小嚴)상좌가 물었다.

“무엇이 독을 바른 북입니까?”

스님은 두 손으로 무릎을 어루만지고 몸을 굽히면서 “한신(韓信 : 漢초기 명신)이 조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였는데 소엄상좌는 대꾸하지 못하였다.

 

나산(羅山)스님이 석상(石霜 : 807~888)스님을 찾아뵙고 물었다.

“가거나 머물거나 마음이 편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모든 것을 물리쳐야 한다.”

나산스님은 그 말에 만족하지 않고 마침내 스님을 찾아뵙고 똑같이 물었다.

“가든 머물든 상관하여 무엇하려는가?”

그러자 나산스님은 마침내 그 말에 승복하였다.

어느 날 다시 물었다.

“스님께서는 30년 전 동산에 계실 때 동산스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다.”

“스님께서는 덕산의 법을 이었으면서도 덕산스님으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다.”

“스님께서 덕산스님을 인정하지 않는 일이야 묻지 않겠지만 동산스님 같은 분은 무엇이 부족하다 하겠습니까?”

스님은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말하였다.

“동산스님은 부처는 좋은 부처이지만 광채가 안 난다.”

나산스님은 절을 올렸다.

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서경(西京)에서 왔습니다.”

“황소(黃巢)가 지나간 뒤 칼이나 주웠는가?”

“주웠습니다.”

스님은 그에게 다가서서 목을 쭈욱 빼고는 “윽!” 하고 소리치자 그가 “스님의 머리가 떨어졌습니다” 하니 스님은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그 스님이 뒤에 설봉스님을 찾아가자 설봉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암두스님 회중에서 왔습니다.”

“암두가 무슨 말을 하던고?”

그가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설봉스님은 30대를 쳐서 내쫓아버렸다.

 

한 스님이 물었다.

“도란 무엇입니까?”

“떨어진 짚신짝을 호숫가에 던져버려라.”

 

한 스님이 물었다.

“오래된 배에 돛대를 올리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작은 고기가 큰 고기를 삼킨다.”

“돛대를 올린 뒤에는 어떻습니까?”

“뒷 뜰의 당나귀가 풀을 뜯는다.”

서암(瑞巖)스님이 물었다.

“본래 항상한 이치란 무엇입니까?”

“움직임이다.”

“움직일 때는 어떻습니까?”

“본래 항상한 이치가 아니다.”

서암스님이 생각에 잠기자 스님이 말하였다.

“수긍하면 근진(根塵)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긍하지 않으면 영원히 생사에 빠지게 된다.”

서암스님은 이 말끝에 활짝 깨쳤다. 그 뒤로 스님께서는 누구든 “부처가 무엇이냐” “법이 무엇이냐” “선이 무엇이냐” “도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의레껏 “허- ” 하는 한숨소리만을 낼 뿐이었다.

 

하루는 대중에게 “이 늙은이가 떠날 때에는 크게 한번 소리지르고 떠나리라”는 말을 남겼다. 어느 날 도적무리가 들이닥쳐 내놓을 것이 없느냐고 다그치다가 마침내 스님을 칼로 찔렀다. 스님은 태연자약하게 한번 크게 소리친 뒤 세상을 떠났는데 그 소리가 수십리 밖까지도 들렸다 한다. 당나라 광계 3년(光啓 3 : 887) 4월 8일이었다.

 

찬하노라.

 

지혜가 스승보다도 나은 줄을

그 누가 믿겠는가

 

‘할’소리 들으나 그 뜻을 알기 어렵고

허- 하는 소리에는 전혀 자취 없어라

 

고개를 가로젓기 30여 년에

동산스님에게 광이 안난다 하고

한번 두번 울리는 도독고 소리에

한신이 조정에 임하였음을 듣는다

 

동정 호반에 춤추듯 노를 젓다가

냄새나는 노파 끌어들여 어린아이 던져버리고

오산의 주막에서 폭설로 길이 막혀

마귀같은 중놈이라 꾸짖어도 깊은 잠에 떨어졌네*

 

소리가 있기 전에 해묵은 솜옷이 썩어졌다 하여

주도면밀하게 기연을 놀리고

뒤뜰에 당나귀가 풀을 뜯는다 하니

이게 무슨 종지인가

 

칼을 주운 뒤에 칼날 위에다

이 스님 머리를 잘못 붙였고

종 치기 전에 바리때 들고 돌아와

은밀히 스승에게 그 뜻을 전하였네

 

대도의 실마리가 무엇이냐 물으면

화급히 짚신짝을 휙 던져버리고

도반과 어울려 이야기 주고받다가

아깝게도 물그릇을 걷어차버렸네

 

가거나 머물거나 편치 않을 때 없다고

나산 스님에게 일러주었고

근진을 벗지 못하면 본래 항상한 이치가 아니라 하여

서암스님을 인정하였네

 

평생을 말끔이 벗어나

생사를 숲속의 놀이로 보고

마지막에 지으신 일할대성은

수십리 밖에까지 들렸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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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봉 진각 선사 : 뒤편의 12. 설봉진각선사 참조

[출처] 11. 암두 전할(巖頭前奯)선사 / 828~887|작성자 바람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