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에 관한 나의 생각
공은 개인적으로 우선 무엇을 하는 것 보다 안하는 것의 중요성으로 저에게는 다가옵니다. 어쩌면 보수적인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진보의 기회를 놓쳐 퇴행하게되는 계기가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에게는 공은 우선 부재하는 것의 의미를 지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의 의미는 부재하는 것의 가치 또는 비용으로 환산할 수 있습니다. 부재할 때 겪게되는 비용은 그렇지만 굉장히 추상적입니다. 벚꽃동산의 가치는 얼마인가요? 그 부재의 비용은 무엇일까요? 부재의 비용은 시장가격과 다릅니다. 책장에 꽃혀 이사를 통해서도 살아남은 책은 중고시장의 그 책 가격이나 고물상에서 무게를 달아 팔 때의 그 가격과는 다릅니다. 그것이 부재할 때의 비용은 그리움의 양 또는 질과 같습니다. 나는 그것을 가치라고 봅니다. 그것들을 추상적으로 좋은 언어들과 동의어로 봅니다. 가령 행복같은 말들 말이죠. 그래서 나는 이런 의미에서 공의 가치를 말합니다. 존재속에 부재를 집어넣어 환산한 가치가 공의 가치입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기회비용을 좀 더 추상화한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공에 대한 이상한 이해가 아닌가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진제와 속제의 차원으로 나누어 공과 유의 관계를 논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이해하기 쉽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연기 무아의 측면에서 공을 이해하는 맥락을 놓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만.
아이가 아플 때 우리는 아이가 건강할 때의 가치를 뚜렷이 발견합니다. 존재의 가치가 부재를 통해 그 가치가 밝혀지는 한 예입니다. 그런데 건강한 아이의 가치를 우리는 아이가 건강할 때 그만한 값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들볶습니다. 혼내기도 합니다. 부재의 가치를, 공의 가치를 환각에 둘러싸여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공이 불완전하게 자리매김되었을 때 행복도 불완전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있을 때 잘할 걸"하는 것은 "행복"을 행복으로 알지못했기 때문에 뒷날하는 자탄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삶을 살면서 평판이 좋았던 사람이 갑자기 실망을 주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변절하거나 실언하거나 기회주의적이거나...교수, 정치가, 종교인 등의 나락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름을 거명하자면 반야심경의 길이 정도로 금새 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이나 짓을 하지 않았을 때의 그의 가치를 그는 잘 셈하지 못한 것입니다. 타인이 부여하는 명예를 스스로 침식하는지도 모른채 본래 지는 그런 놈이었다는 식으로 아전인수의 논리로 망가집니다. 그리고 본인은 그것을 알지못합니다. 그들은 나의 길Frank Sinatra – My Way이라는 노래를 그렇게 이해하여 부르고, 가보지 않은 길Robert Frost, " The Road Not Taken" 을 그렇게 이해하고 다시 뒤늦게 걷는지도 모릅니다. 원래 그랬는데 몰랐냐? 하면 전자일 것이고 원래는 안그랬는데 새롭게 진리를 알았다하면 후자일 것입니다.
부재의 가치와 부작위의 가치를 나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이가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또는 적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높낮이를 두는 시각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부자를 존경하지도 않고 가방끈이 긴 사람을 존경하지도 않습니다. 부재했으면 더 좋았을 행위를 통해 물질이 더 증가했다면 그것은 덜 있는 것보다 좋을 리가 없습니다.
천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 먹기 달렸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부재해야 마땅한 데 존재했던 것도 문제이고 존재해야 마땅한데 부재했던 것도 문제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한 치 앞도 모르는게 인생이라 하지 않더냐라고 피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재해야 마땅한 것이 이제 곧 등장하려고 할 때 그것은 공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는 공포의 시간입니다. 평화는 전쟁의 부재라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전쟁이 바야흐로 일어나려고 할 때 공의 가치는 투쟁의 가치로 전환되고 그것은 실천을 통해 피비린내를 풍기게 됩니다. 그러니 공의 가치는 무서운 말이기도 합니다. 시대를 잘못 만나면 목숨을 거둬갈수도 있을테니까요.
비의 지나친 부재는 가뭄입니다. 비의 지나친 존재는 홍수입니다. 자연이 무슨 지나침을 알겠느냐마는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인간적이라는 단서 안에서 윤리적으로 살펴보면 공의 가치는 중도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런 예를 드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을 공의 눈으로 볼 필요가 있고 그것을 늘 읊조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는 내가 나에게 신신당부申申當付하는 말입니다. 그럴 수 있길! 나무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