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악막작 제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教" 《法句經》卷2〈22 述佛品〉:「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是諸佛教。 」(CBETA 2020.Q1, T04, no. 210, p. 567b1-2) 《十住毘婆沙論》卷10〈22 四十不共法中難一切智人品〉:「問曰。此人於佛多生惡心。是故不應聽為弟子。答曰。若不聽為弟子亦有惡心。是故聽為弟子無咎。汝說先未作罪時何以不制戒。今當答。佛先結戒。說八聖道正見正思惟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說是至涅槃道故。已說一切諸戒。復次佛說三學。善學戒善學心善學慧。當知已說一切諸戒。復次佛告諸比丘。一切惡決定不應作。是不名先結戒耶。復次佛說十善道。離殺盜婬兩舌惡罵妄言綺語貪嫉瞋恚邪見。不名先結戒耶。佛先十二年中說一偈為布薩法。所謂一切惡莫作。一切善當行。自淨其志意。是則諸佛教。是故當知先已結戒。」(CBETA 2020.Q1, T26, no. 1521, p. 77a27-b11)
《十住毘婆沙論》卷13〈27 略行品〉:「問曰。汝欲廣說菩薩所行法。初地義尚多。諸學者恐轉增廣則懈怠心生不能讀誦。是故汝今應為不能多讀誦者。略解菩薩所行諸法。答曰。菩薩所有法 是法皆應行一切惡應捨 是則名略說如上來諸品所說。能生能增長諸地法。如上諸品中說。若於餘處說者。皆應令生菩薩過惡事皆應遠離。是名略說菩薩所應行。如法句中說。諸惡莫作諸善奉行自淨其意是諸佛教。有一法攝佛道。菩薩應行。云何為一。所謂於善法中一心不放逸。如佛告阿難。我不放逸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CBETA 2020.Q1, T26, no. 1521, p. 92a15-28)
the summum bonum
여성의 미모에 등수를 정하여 1등을 진, 2등을 선, 3등을 미라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2등에 해당하는 선이라는 말과 관련하여 몇 마디 적고자 합니다. 저는 20대 후반에 우연히 서점에 들렀던 것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불교신자가 된 뒤 4, 5개월 동안 도서관에서 2, 3 시간 독서를 한 뒤에는 전혀 불교와는 관계없는 사람처럼 몇 십년을 살았기에 최근 몇년 전까지도 불교와 선악은 무관한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진선미 중 1등에 해당하는 진리 문제이지 윤리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이라는 식으로 암기한 지식이 불교는 그와 무관하다는 생각을 낳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법구경에 나오고 십주비바사론에도 나오는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며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불교 (제악막작 제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教。)라는 말도 낯설고 조과 선사가 백낙청에게 같은 내용을 말하는 장면에서도 밋밋하게 여겨졌습니다. 불교에서 제기한 고의 질문이 연기로 대답되었다고 생각한 저에게는 불교는 고 무상 무아...이런 맥락에 있는 말들과 관련있지 선악과는 크게 관련없다고 봤던 것이지요. 그러니 천태 성악설이라는 말에도 그 내용을 떠나 의아해 했던 것입니다. 니체의 책 중 선악의 피안이 있는데 불교를 그 책 제목처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불교 한문 경전을 검색해보면 선악이라는 말이 엄청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 해 들어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선을 행하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은 사춘기라 그런지 아님 다른 이유 때문인지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내 언성은 높아지고 행동은 과격해지게 됩니다. 탐진치 중 진노瞋怒의 독을 묻히게 됩니다. 아이가 여덟살 또는 그 후 몇 년까지 손한차례 들기는 커녕 임마라는 소리 한 번 낸 적 없기에 내 행동은 모순 속에 한참이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아이가 잘해서 내가 잘해준 것이고 지금 아이가 성장하였을 때는 아이가 내게 못해주니 내가 못해주는 것이다."
위와 같은 생각이 드니 "내가 착해서 아이한테 잘해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악해서 아이가 못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 정도 수준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 상대방이 잘해서 내가 잘해주는 것은 착함이 아니다. 상대방이 내게 못하는데도 내가 그 상대방에게 잘해주는 것 그것이 착함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전혀 아이에게 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 착하지 않았으니 사춘기인 아이에게 원래 착하지 않은 그것이 표현된 것입니다. 제가 오십여년동안 착함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잘하는 것이 착한 줄 알았던 것입니다. 아이가 웃어주니 아이를 귀여워해주는 부모의 행동을 착함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함이 아닙니다. 아이가 나에게 못할 때, 내 말을 듣지 않고, 삐딱선을 탈 때에도 잘해주는 것이 착함입니다. 내가 이것을 이후 실천하게 될지는 의문이지만 착함에 대해 내가 새롭게 알게된 이 지식을 실천할 수 있을 때까지 고이 간직할 셈입니다.
나에게 못된 짓을 하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이 착함이고 선입니다. 그냥 잘해주는 것이 착함이 아닙니다. 나의 화를 돋구는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이 화를 안내는 것입니다. 화를 돋구지 않으니까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무슨 화를 안냄이겠습니까. 착함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늦게 알게된 어리석음이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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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입니다.
왜 이런 인식이 개인적으로 새로웠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봅니다. 아마도 어릴 때 부터 학교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학년 교과서에서 힘들게 무엇을 들고 가거나 리어커를 끌고 가는 사람 특히 노인을 도와주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착함을 표현했던 것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착함 또는 선함은 배고픈 사람이나 적선을 구하는 내게 해롭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늘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함은 거기까지만이었고 그 이상의 상상은 멈춰있었습니다. 그러니 착함의 범위, 상대방의 정도, 악과의 관계 등에는 지체가 있게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는 마틴 루터 킹, 말콤 엑스, 마하트마 간디, 찬드라 보스, 프란츠 파농같은 사람들을 막바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종교적 언어를 매개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는 인종차별이나 식민지 상태와 같은 현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 개인적으로는 역사적 장벽 너머의 초경험적인 형태의 착함 같은 것이라 낯설었습니다. 루터 킹의 경우 감동적이고 그 인격의 고매함과 연설의 훌륭함에 감탄하지만 착함의 대상과 관련하여서는 여전히 착한 백인들을 결국은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워싱턴으로의 행진 역시 악을 대상으로 선을 행한 것이 아니라 선한 대상을 향해 있었던 것입니다. 간디의 경우에도 이런 목적이 있었던 것일까요? 물론 두 사람 모두 현실적 폭력에 대한 비폭력을 말한 것이니 악을 염두에 둔 것은 맞을 것입니다. 장기적 낙관주의는 선한 결론에 대한 희망같은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람시의 표현,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로 말해도 될 것입니다. 착함의 영역 그 정도에 대한 구체적인 사유는 모두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지나치기 도식적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선은 무거운 짐들고 가는 이의 짐을 나눠들어주는 것, 악은 선과 무관하게 법이 처벌하는 것으로 죄와 벌을 다루는 형법이 알아 처리하는 것 그 정도로요. 그래서 착함의 범위와 선의 어느 선을 넘어선 것이 악인가 하는 문제에 둔감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덕과 법의 분리라고 쓰여진 현수막이 걸리자 막바로 우리 사유가 급정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저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논쟁으로 지력을 허비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단이 있다는 맹자의 추상적 논거를 선의 뿌리로 여기고 그 예시된 것을 반복하며 구체적으로 무엇이 선인가에 대해서는 멈춰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 경험이 최소한 저에게 있어서는 신선하였다고 되짚어봅니다. 해월 최시형의 물타아(勿打兒: 아이를 때리지 마라)라는 말이 평소 받아들였던 것 이상으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물론 그 한계도 처음으로 보게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한 명 더, 발터 벤야민의 책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보았던 "차악의 선택"이라는 말, 정치적 선택과 관계된 것이지만 선은 없다는 주장에도 눈길이 다시 갑니다. [출처] [비유.4] 내게 맡기신 한 므나 (눅 19:11-27, 2018.12.02) _ 사귐의교회 주일예배|작성자 Worthless Serv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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