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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 자본주의(Raubtierkapitalismus)'

VIS VITALIS 2020. 5. 13. 23:55

천민 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 영어: pariah capitalism, 독일어: pariakapitalismus)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독일어: M. Weber)가 처음으로 사용한 전근대 사회에 ...

pariah 미국식 [pəˈraɪə]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

야수 자본주의(Raubtierkapitalismus)


Raubtier
중성 육식 짐승;맹수


Varianten des Kapitalismus in der Diskussion[Bearbeiten | Quelltext bearbeiten]

Karl Marx verwendet selbst kaum den Begriff Kapitalismus.[101] In der marxistischen Tradition fand er indessen nicht nur eine breite Rezeption, sondern erfuhr auch eine Auffächerung in Varianten wie Organisierter KapitalismusNeo- und SpätkapitalismusFinanz- und Konkurrenzkapitalismus oder auch Monopol- und Staatsmonopolistischer Kapitalismus. In den jüngeren Diskussionen der Wirtschaftswissenschaft und der Soziologie wurden weitere neue Komposita geprägt, die zum Teil große Resonanz in der Öffentlichkeit erfahren haben, wie etwa Rheinischer KapitalismusKasino-KapitalismusFinanzmarkt-Kapitalismus und Turbokapitalismus sowie die politischen Schlagwörter wie 

Killerkapitalismus

Raubtierkapitalismus oder 

Heuschreckenkapitalismus.

Zudem wurden realsozialistische Wirtschaftssysteme innerhalb der Linken kritisch auch als

 Staatskapitalismus beschrieben.[102]

Heuschrecke
 
발음듣기 (Heuschrecken)
[여성] [동물] 직시류(直翅類)(여치메뚜기버마재비귀뚜라미 따위)



das wilde Tier Kapitalismus


lower tier kapitalismus

야수 野獸
ein wildes Tier, -(e)s, -e; Bestie (f. 여성) -n

Tier
1.동물 동물 2.짐승 같은 인간 3.사람



3.6

김누리 교수

어제밤 스치듯 지나가는 TV 프로그램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머물러 끝까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그의 책을 주문했다.

사이다는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일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다.

읽던 책을 잠시 접어두고 이 책부터 읽으리라

3.10

독일의 비판 교육은 비판적 사유 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삼기 때문에 학생에 대한 평가 방식도 우리와는 상이합니다. 우리처럼 사지선다, 오지선다 하는 선다형' 문제는 전혀 없고, 단순한 지식을 묻은 '단답형' 문제도 거의 없습니다. 이런 식의 평가 방식 자체가 반교육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선다형 문제는 모르고도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적이라기보다는 사기에가깝다고 봅니다. 단순한 지식을 묻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주입식 교육에 상응하는 평가 방식이고, 주입식 교육은 파시스트 교육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지배적인 지식은 지배하는 자의 지식'이라고 보기 때문에 지식 그 자체보다는 특정 지식이 지배적인 지식이 된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독일 아이들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그러니까 글자를 깨우치기 시작할 무렵부터 자기 생각을 글로 쓰는 교육을 받습니다. 국어 교과서를 예로 들었지만 정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지요. 문학작품을 쓴 작가가 어떤 시대에,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의도로 그런 작품을 썼는지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 즉 맥락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이에 대해 자신의 비판적 견해를 표명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1장,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69쪽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입니다. 파시즘이 사라질 때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새기고 가는 것이 바로 파시즘이라는 것이지요. 참으로 무서운 통찰입니다. 저는 이 말이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 정곡을 찌른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시절 내내 군사 파시즘과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86세대가 부지불식간에 파시즘을 내면화한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안의 파시즘, 아주 일상적인 파시즘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꼰대론은 86세대의 내면에 형성된 이런 역설적 요소와 밀접한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독일의 68세대와 비교하면서 곧장 한국의 86세대를 비난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두 세대가 처한 정치적, 사회적 환경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86세대가야만적인 폭력이 지배하던 군사독재 시대를 살아내면서 독일의68세대처럼 이상적인 세계를 꿈꿀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에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2장 대한민국의 거대한 구멍, 86세대의 성취와 한계, 100~101쪽

독일의 비판 교육은 비판적 사유 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삼기 때문에 학생에 대한 평가 방식도 우리와는 상이합니다. 우리처럼 사지선다, 오지선다 하는 선다형 문제는 전혀 없고, 단순한 지식을 묻은 '단답형 문제도 거의 없습니다. 이런 식의 평가 방식 자체가 반교육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선다형 문제는 모르고도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적이라기보다는 사기에 가깝다고 봅니다. 단순한 지식을 묻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주입식 교육에 상응하는 평가 방식이고, 주입식 교육은 파시스트 교육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지배적인 지식은 지배하는 자의 지식'이라고 보기 때문에 지식 그 자체보다는 특정 지식이 지배적인 지식이 된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제1장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69쪽

한국사회의 폐쇄성과 성에 대한 이중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의 민주주의가 사회와 가정에서 왜 다른가.

독일 아이들이 소비할 때 죄책감을 느끼는 반면 우리 아이들은 대다수가 성(性)과 관련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은 나쁜 것, 비도덕적인 것으로 악마화하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은폐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성에 대해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 독일의 성교육은 우리의 이러한 성교육과 전혀 다릅니다. 성의 영역도 68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지요. 68혁명은 일종의 '성 혁명'이었으니까요. 독일은 성과 관련해서 죄책감을 갖는 아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독일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성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교육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성과 관련해서 절대 윤리적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성을 윤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아이들이 죄의식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은 윤리와 아무 상관 없는 영역이라고 봅니다. 성이라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고 인권과 관련된 중 요하고 예민한 영역이므로, 성과 관련하여 충분한 책임 의식을 갖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그렇다고 성을 악마화해서 아이들의 내면에 죄의식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성폭력이나 성희롱, 성추행 등 성범죄에 대해서는 우리보보다 훨씬 더 엄한 처벌이 내려집니다. 그리고 성교육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성을 신비화하거나 은폐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독일에서는 성교육을 가장 중요한 정치교육으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독일의 교육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 최대의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습니다. 왜 한국에서는 이렇게 민주주의가 취약할까 고민하던 시기에 아도르노의 에세이에서 본 이 말은 저에게 개안의 충격을 주었지요.

이 말이 옳다면 약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는 얘기지요. 민주주의를 하려면 구성원 하나하나가 강한 자아를 가진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니까요. 저는 이 말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가 왜 취약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과연 얼마나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을까요?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112~113쪽

내 안의 노예 감독관

지금 한국은 끔찍한 '자기착취' 사회입니다. 이것을 인식하는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옛날에는 주인이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면서 노예를 착취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렇게 물리적폭력으로 착취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착취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최소한 그것이 주된 착취 방식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노예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착취하도록 만듭니다. 비유하자면, 옛날에는 노예 감독관이 밖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착취했다면, 지금은 노예 감독관을 내 안에 심어놓고 스스로 알아서 착취하게 합니다. 그것이 자기착취입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자기착취가가장 심한 나라입니다. 자기착취가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끝없이 자행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126 ~ 127쪽

사회적, 정치적 민주주의가 가정의 민주주의로부터...

박노해의 시가 떠오릅니다.

이불을 꿰매면서

박노해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은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박노해 <노동의 새벽>

독일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야수 자본주의(Raubtierkapitalismus)'라는 말을 흔히 사용합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유롭게 놓아두면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가 된다는 의미이지요. 특히 이는1970년대 총리를 지냈던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가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야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회에서 인간을 잡아먹는 것을막아내는 것이 정치의 책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6쪽

https://blog.naver.com/shinsson/221839578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