説佛一切行 眞實波羅蜜
超出諸世間 無上調御士
遠離煩惱垢 清淨如虚空
圓滿智慧日 除滅煩惱闇
普照一切法 安樂諸群生
如來無量劫 時乃出興世
譬如優曇華 難見難値遇
普爲諸群萌 苦行無量劫
隨順諸世間 其心無染著
時諸菩薩衆 既聞普賢教
敬心聽如來 自在眞實義
普賢眞佛子 究竟一切行
常爲佛所歎 言必不虚妄
普賢功徳華 不染三界法
勸發大衆聽 無盡智慧海
諸佛微妙智 清淨如虚空
明了一切行 其心無所著
一念悉了達 三世一切法
善知衆生根 隨其所應化
衆生心煩惱 諸業善不善
所樂皆悉知 而爲説正法
或見如來坐 充滿十方界
衆生罪所障 雖近而不見
或見初發心 遠離諸放逸
無量無數劫 修習菩薩行
或聞諸最勝 妙音演説法
罪垢衆生等 不聞佛名號
或見大菩薩 充滿三千界
究竟普賢行 如來爲説法
或見盧舍那 無量無數劫
嚴淨此世界 得成最正覺
或見賢首佛 普賢大菩薩
斯等悉充滿 蓮華妙徳刹
或見阿彌陀 觀世音菩薩
灌頂授記者 充滿諸法界
或見阿閦佛 香象大菩薩
斯等悉充滿 妙樂嚴淨刹
或見月慧佛 金幢大菩薩
斯等悉充滿 明淨鏡妙刹
或見日藏佛 智灌大菩薩
斯等悉充滿 清淨光明刹
或見十方界 諸佛放光明
爲衆轉法輪 除滅愚癡暗
或見一毛孔 不可説佛刹
諸佛莊嚴身 佛子衆圍遶
爲轉正法輪 度脱諸群生」
或於一毛孔 普見諸佛子
無數億劫中 修習菩薩行
或於一一塵 悉見無量刹
或淨或垢穢 諸行業所起
或見盧舍那 於彼轉法輪
顯現自在力 方便入涅槃
觀察衆生類 一切業煩惱
顯現自在力 化之令解脱
如是諸法王 十方世界中
顯現自在力 我今説少分
或見釋迦文 初成等正覺
饒益諸群生 一切莫能測
或見爲菩薩 供養一切佛
或住童子地 顯現自在力
或見行施戒 忍辱勤精進
深入諸禪定 住慧方便地
或見究竟住 一切種智地
三昧陀羅尼 出生諸通明
或見無量劫 修習菩薩行
逮得不退轉 甘露灌頂記
或見爲梵身 帝釋四天王
刹利婆羅門 示現此等身
或見從兜率 命終降神生
或見住宮殿 捨欲而出家
或見坐道場 降魔成正覺
轉淨妙法輪 涅槃後起塔
或見無量壽 最勝天人尊
爲授灌頂記 成無上導師
或見十力尊 教化已周訖
般涅槃已來 無量無數劫
或見論師月 現處梵王宮
亦現大自在 魔王宮殿中
或見兜率宮 諸天衆圍遶
爲彼説正法 悉令大歡喜
或見處夜摩 帝釋四天王
諸龍夜叉王 八部宮殿中
錠光如來所 供養得*授記
如是等方便 教化諸群生
光明身壽命 淨慧及眷屬
教化威儀聲 皆悉不可數
見佛同衆生 或身如須彌
或現跏趺坐 充滿於世界
或見光一尋 或百千由旬
或現照法界 或照一切刹
或現壽百歳 百千萬億歳
無量那由他 不可思議劫
無礙清淨慧 一念知三世
悉從因縁起 而實無自性
一刹成正覺 普現諸世界
能現一世界 而作無量刹
示現無量刹 而爲一世界」
安住無上道 具足無畏力
無礙智慧轉 十二行法輪
知苦習盡道 十二支縁起
四辯無礙智 演説一切法
無我無我所 亦無有自性
無生亦無滅 無來亦無去
皆悉如虚空 而不壞諸業
如來爲衆生 方便分別説
轉此法輪時 震動一切刹
大海金剛山 無有恐怖者
如來一音説 各隨所應解
滅諸煩惱垢 令住薩婆若
如來一音説 或聞施戒忍
精進禪智慧 慈悲及喜捨
四念四正勤 如意諸根力
覺道止觀念 神通諸法門
如來一音説 八部人非人
梵釋四天王 隨類音聲解
若多貪恚癡 憍慢慳嫉結
八萬四千垢 各聞對治法
未修淨業者 聞説十善道
已修施戒者 聞説般涅槃
染著於生死 懈怠諸群生
聞説解脱門 除滅生死苦
少欲知足者 樂處於閑靜
如是等衆生 聞説二乘音
或修廣大心 具諸功徳藏
親近諸佛者 聞説大乘聲
或有一世界 聞説一乘音
或二三四五 乃至無量乘
智慧行有異 解脱無差別
猶如虚空性 無有若干相
如來微妙音 其性亦如是
隨所應化者 所聞各不同
佛以過去行 得一微妙音
無心於彼此 而能應一切
佛口放妙光 八萬四千數
普照諸世界 除滅衆煩惱
具足智功徳 三種順衆生
離世如虚空 常現於世間
雖復隨世現 生老病死苦
或復現住壽 其性如虚空
如來分別知 一切衆生類
諸根及性欲 令住薩婆若
諸佛尊導師 示入於大衆
隨其所應化 善現威儀法
爲諸聲聞現 出家威儀法
常樂修寂滅 無餘涅槃證
婆羅門衆中 示現羸老身
縈髮而苦行 語論無窮盡
服氣或斷食 五熱以炙身
如是現苦行 降伏諸異學
或持異道戒 善算多方術
星暦地動相 種種衆生相
深入諸禪定 三昧及解脱
種種現嬉戲 令得薩婆若
示現樂衣服 種種莊嚴身
勇健善兵法 降伏刹利故
現知治正法 時節諸義利
軟語攝衆生 降伏大臣故
或詣四天王 八部鬼神所
方便爲説法 皆令大歡喜
或現爲帝釋 安住善法堂
諸天衆圍遶 爲彼演説法
夜摩或兜率 化樂化自在
梵王至淨居 爲彼演説法
如是現無數 種種威儀法
無量方便力 度脱諸群生
譬如工幻師 能現種種事
佛爲化衆生 示現種種身
如月遊虚空 覩者謂増損
影現諸河池 映蔽熒火光
如來淨智月 示現有増損
處於直心水 映蔽二乘光
譬如深大海 珍寶不可盡
於中悉顯現 衆生形類像
甚深因縁海 功徳寶無盡
清淨法身中 無像而不現
譬如明淨月 照除世間闇
如來淨智日 悉除三世闇
如龍興慶雲 普雨於一切
身心不降雨 除熱得清涼
如來亦如是 興起大悲雲
普雨甘露法 滅除三毒火
此法亦不從 如來身心出
如來淨法身 三界無倫匹
超出諸世間 非有亦非無
其實無所依 不去而遍至
譬如夢所見 亦如空中畫
非色非無色 非相非無相
非有亦非無 其性如虚空
如海摩尼寶 能出種種寶
衆生諸光明 而光無所有
導師亦如是 雖有而非有
不於一處中 積集功徳寶
大仙現虚空 如自性實際
涅槃離欲滅 皆悉是一性
衆生心微塵 海水渧可數
虚空亦可量 佛徳説無盡
聞此法歡喜 信心無疑者
速成無上道 與諸如來等
大方廣佛華嚴經卷第六十
於揚州司空(관직명) 謝石(중국(中國) 동진(東晉)의 정치가(政治家). 사안(謝安)의 아우. 383년,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이 되어, 전진의 부견(符堅)의 대군을 조카인 사현(謝玄)과 함께 비수(淝水)에서 무찔렀음. 후(後)에 상서령(尙書令)ㆍ남강군공(南康郡公)에 봉(封)해짐. 생몰(生沒)은 자세(仔細)하지 않음. 62세로 죽음)
所立道場寺。請天竺禪師佛度跋陀羅。手
執梵文譯梵爲晋沙門釋法業親從筆受。
時呉郡内史孟顗右衞將軍褚叔度爲檀
越。至元熙二年六月十日出訖
사공
司空
유형 관직명
관직명.
삼공(三公)의 하나.
서한 때는 대사공으로 명칭을 바꾸어 대사도 · 대사마와 더불어 삼공이라 불렸다.
동한 시기에 사공으로 바뀌고
관리에 대한 감찰과 법의 집행, 중요 문서나 도서 등을 관장했다.
제1품으로 부서를 설치하였고, 속관은 태위나 사도와 같았다.
삼국시대에도 사공은 역시 삼공이고 제1품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허함(虛銜)이었다.
속관으로는 군사좨주(軍師祭酒) · 군사(軍師) · 사마(司馬) · 종사중랑(從事中郞) 등이 있었다.(8회)
화엄경의 편집은 호탄(Khotan)에서 이루어졌는가
(본 논문은 2007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KRF-2007-361-AM0046)
석길암/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uayen@naver.com
차례
I. 문제의 소재
Ⅱ. 호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지역 편집설의 검토
요약문
『화엄경』의 편집 장소에 대한 다수설의 견해는 호탄(Khotan, 于闐)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를 지목한다. 그런데 논자는 이전의 논문에서 1) 『화엄경』이 편집된 불교사회는 불탑신앙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지역이었으며, 2) 대승경전에 대하여 ‘비불설(非佛說)’이라는 비난이 행해지던 곳이었고, 3) 동시에 대승경전에 대하여 ‘비불설(非佛說)’이라는 비난이 일어날 만큼 대승경전의 출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곳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곧 『화엄경』이 편집된 불교사회는 대승불전을 공공연히 비난할 수 있을 만큼 아비달마불교의 확실한 우위가 확보되어 있던 곳이며, 더불어 불탑신앙이 크게 유행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화엄경』의 분석을 통해 제시한 바 있다.
이 같은 결론에 따라 본 논문에서는 『화엄경』 특히 『육십화엄』의 산스크리트본의 편집 장소로 호탄을 지목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을 시도해보았다. 고찰을 통해 제시한 논자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호탄을 편집지로 지목하게 한 대본 『육십화엄』 산스크리트본의 출처로서의 호탄에 대한 문제이다. 「경기(經記)」와 「역대삼보기」 소재의 굴다삼장의 전언은 대본 『육십화엄』의 초기 유통에 대한 확증으로는 언급될 수 있지만, 편집의 증거로 제시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둘째, 「보살주처품」의 제국주처를 검토해보면, 대본 『육십화엄』 편집자의 지리적 시야의 중심이 호탄이라고 보기 힘들며, 오히려 서북인도 지역을 편집자가 가졌던 지리적 시야의 중심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셋째, 지분경은 물론 대본 『화엄경』의 편집과정에서 증보된 부분에도 성문 ․ 연각으로 표현된 부파불교를 의식한 대응들이 적지 않게 보이기 때문에, 대본 『화엄경』의 편집지는 적어도 4세기 중반 무렵까지도 부파불교가 우세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넷째, 호탄의 불교 유적 중에는 대본 『화엄경』을 반영한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는데, 대본 『화엄경』 편집과 그리 동떨어지지 않은 시기의 것이다. 그리고 굴다삼장의 전언은 호탄과 그 주변 지역의 『화엄경』 신앙이 아주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경권신앙의 등장시기를 고려할 때, 호탄에서 편집이 이루어 졌다기보다는 호탄이 편집된 대본 『화엄경』을 전해받았다고 보는 편이 좀더 적절해 보인다.
다섯째, 이전의 논문에서 언급한 사항이지만 『화엄경』 역시 불탑신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불탑신앙이 강성했던 지역을 역시 편집지의 조건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할 때, 논자는 대본 ?육십화엄?의 산스크리트본 편집지로 호탄과 그 주변보다는 오히려 서북인도 지역을 고려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I. 문제의 소재
논자는 이전의 논문 「화엄경의 편집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고찰」(인도철학 40, 2014년 4월)에서 『화엄경』 편집의 기본적인 구상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의도와 구상이 어떤 사회적 배경과 어떤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탐색을 시도한 적이 있다. 이전의 논문에서 논자는 『화엄경』의 편집 장소에 대해서는 다카사키 지키도의 ‘화엄의 대경이 서북인도에서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다만 호탄에서 부분적으로 재편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수용하는 선에서 논의를 전개하였었다. 『화엄경』 편집의 사회적 ․ 사상적 배경을 해명하는 것이 우선적인 관심사였고, 또 그러한 문제를 해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편집 장소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쉽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다카사키 지키도의 견해는 『화엄경』의 편집 장소에 대한 다수설의 견해는 아니다. 오히려 중아아시아, 특히 호탄(Khotan, 于闐)을 염두에 두고 중앙아시아를 지목하는 것이 다수설 곧 일반적인 견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논자는 이전의 논문에서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해서, 『화엄경』의 편집 시기는 기존의 설과 거의 동일한 4세기 초∼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고, “『화엄경』이 편집된 불교사회는 불탑신앙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던 곳으로 생각된다. 또한 대승경전에 대하여 ‘비불설(非佛說)’이라는 비난이 행해지던 곳이었던 동시에, 대승경전에 대하여 ‘비불설(非佛說)’이라는 비난이 일어날 만큼 대승경전의 출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곳이라고 생각된다. 곧 화엄경이 편집되던 곳의 불교사회는 적어도 대승불교의 우위를 말할 수 없는, 오히려 대승불전을 공공연히 비난할 수 있는 아비달마불교의 확실한 우위가 확보되어 있던 곳이었다고 생각된다. 곧 아비달마불교가 흥성하고, 더불어 불탑신앙이 크게 유행했던 지역이 『화엄경』이 편집된 불교사회였다고 추정”1)된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논자의 의견은 적어도 편집 장소라는 측면에서는 호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편집을 주장하는 일반설과는 부응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호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화엄경』? 편집설’을 검토하고자 한다.
1) 석길암, 「화엄경의 편집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고찰」, 「인도철학」40(인도철학회, 2014.), p.130
Ⅱ. 호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지역 편집설의 검토
여기에서는 호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편집설의 대강을 살펴본 다음 그것이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 설은 구노 호류(久野芳隆)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보이며,2) 1942년에 간행된 다카미네 료슈(高峯了州)의 「華嚴思想史」에서 이 설을 계승하고 있다.3) 모찌즈키 신코(望月信亨) 역시 1946년에 간행한 「佛敎經典成立史論」의 「西域地方における經典の編纂」에서 『화엄경』 60권본(이하 『육십화엄』)이 우전국에서 편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4) 이상의 설들은 한역(漢譯)의 대본 『화엄경』(『육십화엄』과 『팔십화엄』)이 모두 호탄(Khotan)으로부터 중국에 전래되었다는 점,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동북방의 청량산(清涼山)과 진단국토(眞旦國土)의 나라연산(那羅延山)과 변이국(邊夷國, 우전국)의 우두산(牛頭山)이 경전 편집자의 시야에 들어와 있는 점 등을 주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단 「
입법계품」의 성립은 남인도로 추정하고 있다.
2) 久野芳隆, 「華嚴經の成立問題-特に入法界品に就いて」, 「宗敎硏究」 新7-2, 1930(정엄, 「화엄학 연구 자료집」, 「일본의 인도철학 ․ 불교학 연구」, 아세아문화사, 1996, p.604에서 재인용)
3) 高峯了州, 「華嚴思想史」, 百華苑, 1942, pp.6-15. 다카미네는 구노의 설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4) 望月信亨, 「佛敎經典成立史論」, 1946, pp.44-54.
나카무라 하지메(中村 元)는 여기에 추가하여 호탄 기원의 자모 Ysa(醝, 闍, 也娑, 夷娑)가 「입법계품」에 등장하고, 이 자모가 호탄에서 기원하여 서북인도의 화폐나 비명에서만 보이기 때문에 「입법계품」의 성립지는 서북인도 혹은 중앙아시아이며, 「보살주처품」에 등장하는 지명을 고려할 때 광본(廣本)은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5)
5) 中村元, 「華嚴經の思想史的意義」, 川田熊太郞 監修․ 中村 元 編, 「華嚴思想」, 法藏館, 1960,
pp.90-93.(석원욱 역, 「화엄사상론」, 운주사, 1988, pp.96-97).
다카사키 지키도(高崎直道)는 화엄대경의 성립 장소에 대해서 이들 앞선 연구들을 종합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추가하고 있다. 『화엄경』의 십지설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북인도 마투라 지방을 근거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설출세부(說出世部)와 교섭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 「입법계품」의 경우에 무대를 남인도로 하면서도 남인도에 대한 지리적 묘사는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북서인도 지방을 의심하게 한다는 점, 대승경전 일반에 통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국왕이 절대 권력을 가진 지배자로 묘사되어 부처의 절대성이 그것에 비유되는 것이나 보살을 여래의 집안에 태어난 장자(長子)로서 왕자에 비유하는 것 등은 쿠샨왕조의 위세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결론으로서 화엄의 대경이 서북인도에서 성립되었을 가능성과 함께 호탄에서의 부분적인 재편집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6) 다카사키의 주장은 『화엄경』 편집지에 대한 이전의 주장과 달리 서북인도 편집설을 주장하는 것이고, 호탄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재편집지로서의 가능성만 제안한 것
이다.
6) 高崎直道, 「華嚴思想の展開」, ?講座 大乘佛敎 3: 華嚴思想?, 春秋社, 1983, pp.14-16.(정순일 역, 「강좌 대승불교3-화엄사상」, 경서원, 1988, pp.30-32.)
기무라 기요타카(木村淸孝)는 『화엄경』에 등장하는 지명과 등장인물, 언어학적 특징과 여러 논서의 주석과 인용을 검토한 후, 『화엄경』의 편집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곧 편집 시기에 대해서는 『육십화엄』과 동일하거나 혹은 유사한 구상과 체계를 가진 『화엄경』의 성립 연대는 아주 먼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며, 현재로서는 서기 400년 전후에 성립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또 편집 장소에 대해서는 「입법계품」에 해당하는 「간다뷰하」의 원형이 성립된 것은 남인도가 틀림없지만, 이것을 편입하는 형태로 『화엄경』의 편찬이 행해진 것은 여러 가지 상황 증거로 볼 때 서역의 호탄이거나 그 주변이라고 추정하고 있다.7)
7) 木村淸孝, ?中國華嚴思想史?, 平樂寺書店, 1992(정병삼 외 옮김, 「중국화엄사상사」, 민족사, 2005, pp.26-38.)
이상 『화엄경』의 편집지 및 편집 시기에 대한 기존의 견해들을 살펴보았는데, 대본 『화엄경』의 편집지에 대해서는 서북인도를 지목하는 다카사키 지키도의 견해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호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지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호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편집설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역(漢譯)된 『화엄경』 대본들의 출처가 호탄이다. 둘째, 「개황삼보록(開皇三寶錄)」 곧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의 굴다(堀多) 삼장전에8) 전하는 차구반국(遮拘槃國, 현장의 「大唐西域記」에는 斫句迦國)에 화엄과 반야, 대집등의 대승경전 12부 10만 게의 경전을 안치하고 있었다는 기사9)는 호탄과 그 주변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대승 경전들이 편집되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셋째, 「입법계품」에 나타나는 호탄 지역 기원의 자모 및 「보살주처품」에 등장하는 지명으로 보아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동시에 시야에 두고 있는 장소를 지목할 수 있다.
8) 「歷代三寶紀」, T.49, p.103a.
9) 이 기사는 「화엄경전기」 「은현(隱現)」편(T.51, p.153b.)에도 인용되어 있다.
이상의 근거들은 『화엄경』의 호탄 혹은 그 주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편집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첫째와 둘째의 기사는, 엄밀히 말하면 한역(漢譯) 『화엄경』의 출처가 호탄과 그 주변 지역이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또 그 지역에 대승 경전이 대량 유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화엄경』의 편집이 그 지역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련 기사들의 내용은 호탄및 그 주변 지역이 『화엄경』의 유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은 보여주지만, 편집의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도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의 근거 역시, 『화엄경』이 편집되었던 시기로 추정되는 4세기 초에서 4세기 말에 이르는 동안에 인도와 중국 및 중앙아시아를 시야에 두고 있는 지역이 중앙아시아만이 아니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서북인도 지역 역시 이 시기에는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시야에 두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점들을 염두에 두고 호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편집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Ⅲ. 간다라 ․ 호탄과 화엄대경의 편집
1. 한역(漢譯) 『화엄경』의 출처로부터
기록으로든 실물로든,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대본의 『화엄경』으로 가장 이른 것은 『육십화엄』이다. 『육십화엄』의 번역 후기에는 지법령이 호탄에 이르러 그 범본을 얻었으며, 돌아와서 불타발타라에 의뢰하여 번역하게 된 경위가 「화엄경기(華嚴經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華嚴經의 胡本은 모두 十萬偈이다. 옛날 도인 支法領이 우전에 가서 이것중의 3만 6천 게를 얻었다. 晉나라 義熙 14年(418) 歲次 鶉火 3月 10日일에 楊州의 司空 謝石이 세운 道場寺에서 천축 선사 佛馱跋陀羅를 청하였다. 손에 梵文을 잡고 범어를 진어(晉語)로 번역하였으며, 沙門 釋法業이 직접 따라서 필수하였다. 이때 吳郡의 內史孟顗, 右衛將軍 禇叔度가 檀越이 되었다. 元熙 2年(420) 6月 10日에 번역을 마쳤다. 모든 호본을 다시 교정하여 大宋 永初 2年(421) 辛丑에 12月 28日에 교정을 마쳤다.10)
10) 「出三藏記集」卷9, T.55, p.61a.
이 「경기(經記)」는 『육십화엄』의 후기(後記)에 의거하여 그대로 게재한 것이다. 이것에 의하면 지법령이 가져온 범본 곧 『육십화엄』의 최종적인 출처는 호탄이 된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호탄을 대경의 최종적인 편집지로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대경 편집본 4종 가운데 티벳역 곧 『장역화엄』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자은화엄』을 제외한 신구의 대경 『화엄경』이 모두 호탄을 출처(出處)로 한다는 점에서, 편집지로서 호탄 혹은 그 주변 중앙아시아 지역의 가능성을 그대로 수긍하는 편이 오히려 쉽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가능성을 높여주는 자료로 선행 연구들에서 흔히 제시되는 기록이 지법령이 『육십화엄』 범본을 호탄에서 입수했던 당시에 호탄을 방문하여 승려가 수만 인에 다수가 대승을 배운다고 전한 법현(法顯)의 기록11)과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 권12의 「석승취(釋僧就)」전이다. 석승취는 『대집경』을 새로이 합본한 인물인데, 그 전기 중에 굴다(堀多) 삼장이 말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11) 「高僧法顯傳」卷1, T.51, p.857b. 「眾僧乃數萬人, 多大乘學」
범본(梵本)에 의하면 이 『대집경』은 모두 10만여 개의 게송인데, 만일 모두 갖추어서 번역하였다면 3백여 권이 될 것이다. 지금 번역된 것을 보고 굴다(崛多) 삼장이 구두로 매번 설명하여 말하였다.
“우전국의 동남쪽으로 2천여 리에 차구가국(遮拘迦國)이 있는데, 그 나라 왕은 불법을 독실하게 믿고 대승을 존중하였다. 여러 나라의 이름 난 스님들이 그 나라에 들어오면 모두 시험하였는데, 소승이면 바로 보내어 머물지 못하게 하고, 대승이면 머물기를 청하고 공양했다. 그 왕궁에는 『마하반야경』 『대집경』 『화엄경』 등의 3부의 대경을 소장하고 있는데, 모두 10만여 게송이다. 왕이 몸소 수지하였고 직접 열쇠를 보관하고 있다. 독송할 때는 열고 향과 꽃을 올려 공양한다. 또한 도량 안을 갖가지로 장엄하는데, 뭇 보배를 구비하고 온갖 꽃을 장식하며, 제철이거나 제철이 아닌 과일을 갖추어 여러 어린 왕자들을 불러 들여 예배하게 하였다.”
그 국토에 대해 또한 말하였다.
“그 나라 동남쪽 20여 리에는 대단히 험준한 산이 있는데, 그 안에 『대집경』 『화엄경』 『방등경』 『보적경』 『능가경』 『방광사리불다라니경』 『화취다라니경』 『도살라장경(都薩羅藏經)』 『마하반야경』 『팔부반야경』 『대운경』 등 12부 경전을 안치했는데, 모두 10만 게송이다. 국법(國法)으로 서로 전수해서 지키고 감시하였다.”12)
12) 「歷代三寶紀」卷12, T.49, p.103a. 「新合大集經六十卷. 右一部六十卷, 招提寺沙門釋僧就, 開皇六年新合. 就少出家, 專寶坊學. 依如梵本此大集經凡十萬偈, 若具足翻可三百卷. 見今譯經崛多三藏口每說云, “于闐東南二千餘里, 有遮拘迦國. 彼王純信敬重大乘, 諸國名僧入其境者並皆試練, 若小乘學即遣不留, 摩訶衍人請停供養. 王宮自有摩訶般若大集華嚴三部大經, 並十萬偈. 王躬受持, 親執鍵鑰. 轉讀則開香花供養. 又道場內種種莊嚴, 眾寶備具, 兼懸諸雜花, 時非時果, 誘諸小王令入禮拜.” 彼土又稱, “此國東南二十餘里, 有山甚嶮. 其內安置大集․ 華嚴․ 方等․ 寶積․楞伽․ 方廣舍利弗陀羅尼․ 華聚陀羅尼․ 都薩羅藏․ 摩訶般若․ 八部般若․ 大雲經等, 凡十二部皆十萬偈. 國法相傳防護守視
여기서 말하는 차구가국(遮拘迦國)은 현장의 「서역기(西域記)」에는 작구가국(斫句迦國)으로 추정된다.13) 이 내용은 「역대삼보기」의 기록을 신뢰한다고 하더라도 6세기 말의 상황을 전하는 것이고, 5세기 초 혹은 그 이전의 상황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내용을 고려할 때,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화엄경』 범본이 대경에 상당하는 것인가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화엄경』 범본의 출처로 호탄이 아닌 그보다 서쪽에 위치한 차구가 지역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역시 대경의 편집지로 호탄 혹은 그 주변 지역을 곧바로 지목하는 것에 좀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된다. 굴다 삼장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마하반야경』 『대집경』 『화엄경』 등의 3부의 대경 10만여 게’를 수지하고 독송하고 공양하고 있는 것이지, 편집의 가능성을 언급할 만한 기록은 아니기 때문이다.
13) 梵語로는 cakoka이다. 「위서(魏書)」와 「북사(北史)」에는 주거(朱居) ․ 주거반(朱居半) ․ 주구파(朱駒波)로, 「송운행기(宋雲行紀)」에는 주구파(朱俱波), 「역대삼보기」에는 차구가(遮拘迦) ․ 차거가(遮居迦)로,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에는 차구반국(遮拘槃國)으로 나타난다. 지금의 엽성(葉城) 곧 합이갈리극(哈爾噶里克, Karghalik)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석승취」전에 나오는 차구가국(遮拘迦國)은 ‘우전의 동남쪽 2천여 리’(于闐東南二千餘里)에 있는 나라로 나오는데,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나오는 작구가국(斫句迦國)은 우전 곧 호탄과 카슈가르의 사이에 존재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우전의 서쪽에 위치한 나라가 되어 지리 정보에 오차가 존재한다. 그런데 「석승취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구절에 “兼云有三滅定羅漢, 在彼山窟寂禪冥衛, 半月一月, 或有僧往山為羅漢淨髮.”(T.49, p.103a)이라고 지역의 전설을 전하고 있는데, 「大唐西域記?「斫句迦國」조에도 “印度果人, 多運神通, 輕舉遠遊, 棲止於此. 諸阿羅漢寂滅者眾, 以故多有窣堵波也. 今猶現有三阿羅漢居巖穴中, 入滅心定, 形若羸人, 鬚髮恒長, 故諸沙門時往為剃. 而此國中大乘經典部數尤多, 佛法至處, 莫斯為盛也. 十萬頌為部者, 凡有十數.”(T.51, p.943a)이라고 하여, 멸진정에 든 3인의 아라한에 대한 동일한 전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10만 송에 이르는 대승경전 10여 부라는 언급 역시 「석승취전」과 동일한 정보에 해당한다. 또 『大方等大集經』 「月藏分」의 「建立塔寺品」에 부처님이 현재세와 미래세에 머무는 처소를 언급하는 중에 “…迦沙國二十八佛現, 遮拘迦國二十佛現, 簁提國四十五佛現, 沙勒國九十八佛現, 于填國百八十佛現, 龜茲國九十九佛現, ….”(T.13,p.379ab) 등이라 하여, 迦沙國․ 遮拘迦國․ 簁提國․ 沙勒國․ 于填國․ 龜茲國 등의 지명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차례로 언급된다. 이 가은 내용들로 볼 때, 「석승취전」의 遮拘迦國과 「대당서역기」의 斫句迦國은 동일한 지명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大唐西域記」에는 이미 이 지역의 사원이 대부분 무너졌다는 사실과 함께 대승경전이 아주 많다고 전하고 있다.
다음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화엄경에 등장하는 지명과 관련한 문제이다. 「보살주처품」14)에는 계빈(罽賓)과 건타라국(乾陀羅國)이 각각 다른 국토로 등장한다.15) 이것은 계빈과 건타라가 각기 다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보살주처품」에는 ‘진단국토(眞旦國土)’라는 언급이 있어 중국을 시야에 두고 있었던 시기와 지역을 화엄경 편집과 관련하여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굴다 삼장이 차구가국의 사정을 전하게 된 계기가 된 『大方等大集經』의 「日藏分」「護塔品」16)에서 용왕에게 부촉하고 있는 21곳의 성인 주처 중 12처가 「보살주처품」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모찌즈키 신코에 의해 지적되어 있다.17) 그리고 이 점 역시 인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 지역까지 시야에 두고 있는 편집지, 더 좁게는 호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지목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14) 「보살주처품」은 존재하지 않는 범본의 경우는 차치하고, 한역 관련 기사들만을 근거로 추정할 때 『지분경』이 번역된 적이 없기 때문에 지분경의 별도 유통 가능성을 현재로서는 고려하기 힘들다. 따라서 『육십화엄』 범본 대본의 편집시기에 추가로 삽입된 부분이거나, 범본 대본과 거의 동시대 동일 장소에서 출현하자마자 대본의 편집에 포함되었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육십화엄』 범본과 「보살주처품」의 성립시기 및 장소를 거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15) T9, T09, p.590b. ?六十華嚴?보다 조금 앞서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에는 계빈국(罽賓國)과 건타위국(乾陁衛國)이 병기되고 있다.
16) T.13, pp.293b-297c.
17) 望月信亨, 같은 책, pp.48-49. 모찌즈키는 『大方等大集經』의 「日藏分」「護塔品」 역시 호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편집된 것으로 간주한다. 지리적 시야가 비슷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논자 역시 이 같은 관점에 동의하며 동일한 점에 근거하여 『육십화엄』의 편집지를 호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로 상정할 수 없는 경우 같은 이유로 『大方等大集經』의 「日藏分」「護塔品」 편집지 역시 호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로 상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곧장 중앙아시아를 지목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3세기 중반, 서북인도에서 카니쉬카왕 이후에 즉위하였던 제왕들이 발행한 화폐의 명문에는 왕의 칭호로 중국의 ‘천자(天子)’를 의미하는 ‘devaputra’, 페르시아의 ‘Shāh’를 의미하는 ‘Sāhi’, 로마의 ‘Caesar’에서 유래하는 ‘Kaȉsara’등이 보이며, 이들 칭호가 문화교류의 증거라는 지적이 있다.18) 즉 이것은 이미 3세기 초중반의 서북인도 지역에서도 직간접적으로 중국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곧 서역만을 염두에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서북인도와 중앙아시아 및 중국은 물론 인도 각지의 주처를 설정한다고 할 때, 그 모든 지명을 아우를 수 있는 지역을 편집지로 설정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편집지를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 보살의 주처를 설정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인데, 「보살주처품」의 지명에 대해 법장(法藏)은 「탐현기」에서 팔방에 배정한 팔방주처(팔방 중에 청량산이 포함되어 있다)와, 해중(海中)에 배정한 사해주처 2개소, 제국주처(諸國住處) 13개소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 중 제국주처에 대해 『대집경』과 「대당서역기」를 활용하여 13개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9)
18) 塚本啓祥 저, 이정수 역, 「법화경의 성립과 배경」, 운주사, 2010, p.68
19) 法藏, ?探玄記?, T.35, p.391a-c.
중인도의 비사리(毘舍離, vaiśāli)와 ‘파련불(巴連弗, pataliputra), ‘마투라(摩偸羅, mathura), 구진나(俱陳那, 『팔십화엄』에는 俱珍那)의 4개소,
남인도의 ‘청정피안국(淸淨彼岸國)’, ‘난제발단나(難提拔檀那)’의 ‘제라부하(梯羅浮訶)’와 ‘암부리마국(菴浮梨摩國)’, ‘풍지(風地, 『팔십화엄』에는 摩蘭陀國)’의 ‘무애용왕(無碍龍王所)’의 4개소,
북인도 ‘감보국(甘菩國, kaṁbhoja, 劍蒲, 인더스강 서부 아프가니스탄 지방) 1개소
서북인도에 해당하는 ‘계빈(罽賓, 迦濕彌羅, kaśmīra), ‘건타라국(乾陀羅國, gandhāra)’ 2개소
‘진단(眞旦, 震旦, 支那)’의 ‘나라연산(那羅延山, nārāyaṇa)’ 1개소
‘변이국(邊夷國, 호탄)의 우두산(牛頭山) 1개소
팔방주처와 사해주처는 구체적인 지명이 아니라 상상징적인 지명이기 때문에 고유 지명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다면 제국주처 13개소가 문제가 되는데, 중인도와 남인도의 경우는 불교의 초기 전파 이래 많은 성지가 형성되었던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불전을 통해 해당 지역의 지리정보가축적되어 있었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때, 그 숫자의 많음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을 의미하는 진단의 나라연산의 경우는 구체저인 지명 정보라고 보기에는 곤란하다. 이것은 편집자 혹은 편집자들이 중국의 지리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알고 있지 못함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반면 ‘변이국(邊夷國, 호탄)의 우두산(牛頭山)에 대해서는 현재의 우각산(牛角山)으로 산의 특징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편집자가 중국에 대한 지리정보는 빈약하지만 호탄 지역의 지리정보는 좀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북인도와 서북인도에 대해서는 3개소의 구체적인 정보를 전하고 있다. 만약 편집자의 지리적 위치가 중앙아시아라고 한다면, 오히려 중앙아시아 지역 의 보살주처가 더 늘어나거나 아니면 중국 쪽 보살주처의 설정이 좀더 구체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볼 때, 「보살주처품」의 제국주처 13개소에 대한 언급은 호탄 혹은 그 주변에서의 대본 『화엄경』 편집 가능성을 높여주는 정보라기보다는 서북인도의 편집 가능성을 더 높여주는 정보이자, 당시 서북인도의 불교인들이 생각하던 불교세계의 범주가 확장되어 가는 양상을 보여주는 정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법계품」에 해당하는 40권본이 계속 증광되어 인도내에도 유통된 것과 달리 『화엄경』 대경의 유통이 중앙아시아 이동(以東) 지역에서만 확인된다는 점20)은, 여전히 『화엄경』의 편집 장소로 호탄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더 염두에 두게 하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20) 이 경우에도 『장역화엄』의 존재가 고려되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장역화엄』의 출처가 불분명하다. 때문에 대본 『화엄경』이 반드시 중앙아시아 以東으로만 전파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고려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대승불전이 서북인도를 기점으로 以東으로 전파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2. 『화엄경』에 보이는 성문 ․ 연각의 이승과 대승의 대립으로부터
「법현전(法顯傳)」 등 5세기 초중반의 호탄불교 상황을 전하는 기록들에 의하면, 이때의 호탄은 거의 대승불교화 되어 있었던 듯하다. 몇몇 기록들에 의해서 서역 국가 중에서도 호탄만은 일찍부터 대승불교가 성행했던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한지연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호탄 역시 초기에는 부파불교가 주류를 형성했던 곳이었고, 점차적으로 대승불교화가 진행되었던 곳으로 파악된다. 한지연은 3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호탄의 불교 상황은 소승불교가 더 우세한 형국이었던 것으로 파악하며, 호탄에서 대승불교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는 시기를 3세기 말엽으로 추정하고 있다.21) 한편 「법현전」의 기록은 5세기 초의 호탄이 대승불교가 완연할 정도로 우세한 지역임을 보여준다. 이 두 기록에 근거할 때, 호탄은 4세기 초∼4세기 중반 무렵에는 점차 대승 우위의 흐름으로 옮겨가고 있었을 것이다.
21) 한지연, 「西域佛敎交流史」, 은정불교문화진흥원, 2011년, pp.135-145. 한지연은 호탄에 처음에는 주로 소승불교가 유행하다가 3세기 말엽부터 본격적으로 대승불교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한지연이 근거로
삼은 것은 「高僧傳」 「義解」편의 朱士行 관련 기사이다. 朱士行은 감로 5년(260)에 雍州를 출발하여 于闐에 도착하여 梵書 정본 90章을 구해 낙양으로 보냈으며, 이에 소승의 무리들이 ‘한나라 땅의 사문이 바라문의 책으로 정전을 미혹해 어지럽힌다.’다고 비난하였다고, 「고승전」 「주사행전」은 전한다. 곧 260년대의 호탄 불교가 소승 우위의 상황임을 전하는 것이된다. 그런데 朱士行 관련 기록에 대해 쥐르허(E. Zürcher)는 291년 『2만5천송 반야경』 곧 『放光般若經』을 번역한 無羅叉가 于闐 출신인 점, 태강 7년(286) 于闐 출신의 祇多羅가 『放光光讚般若經』을 축법호에게 전한 기록, 5세기 초 支法領이 『화엄경』을 于闐에서 가져온 점과 法顯의 기록 등을 근거로 朱士行이 우전에 도착했을 무렵 이미 우전은 중앙아시아 대승불교의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주사행의 기록과 관련하여 당시에 于闐에 소승이 우세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은 유사한 전설들을 고려할 때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한다.(E. Zürcher 저, 최연식 역, 「불교의 중국정복」, 씨아이알, 2010, p.102) 주사행의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여 260년대의 우전이 소승불교가 우세한 지역이었다고 보더라도, 이 기록 자체가 대승불전이 소승불교도들이 우려를 표할만큼 于闐 지역에 공공연히 유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4세기 전후에는 이미 여러 한역 대승불전의 출처였던 사실로 볼 때, 『화엄경』 대본의 편집 시기로 추정되는 4세기초~4세기 중엽의 于闐은 이미 대승불교화의 경향이 완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사실은 호탄을 『화엄경』 대본의 편집지로 간주하는데 곤란한 요인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화엄대경은 방대한 지류(支流)의 지분경들을 집대성한 것이고, 그러한 집대성을 위해서는 다양한 흐름의 대승 경전들에 대한 인지와 이해가 필요하고, 하나의 관점으로 관통되는 지분경을 선별해낼 수 있는 정보와 안목은 필연적일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호탄 편집의 가능성의 부정적 ․ 긍정적 요소에 대해 다음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3세기 말에 호탄에서 본격적으로 대승불교가 발전하기 시작했다면, 4세기 중엽에는 최종적인 편집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엄경』의 편집지로 호탄을 지목하는 것은 조금은 무리가 아닐까 한다. 『화엄경』의 편집이 호탄과 그 주변에서 이루어졌다면, 다양한 지분경들은 물론 대승 경전들의 지분경들에 대한 정보가 호탄의 불교인들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었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이 점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현재에는 확인하기 힘들다. 적어도 지분경들의 번역 및 유통과 관련된 기록에서는 호탄보다는 월지국의 인물들의 참여가 더 많이 보인다.
둘째, 그렇다고 하더라도 화엄대경이 편집체제를 일시에 갖추었던 것이 아니고, 점차적으로 편집이 증대되는 과정을 거쳤다고 본다면, 여전히 최종적인 그리고 부분적인 재편집이 호탄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22)
22) 여기에서 말하는 부분적인 재편집의 가능성은 「보살주처품」에 나타나는 지명을 고려했을 경우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중국의 지명 혹은 중앙아시아의 지명을 염두에 두고 재편집 되었을 가능성은 꼭히 중앙아시아 지역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서북 인도 지역 역시 이 지역들의 지명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제국주처의 설정에 나타나는 구체성으로 보자면 지리적 시야의 중심은 서북인도의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탄 혹은 서북 인도를 『화엄경』의 편집지로 추정할 때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화엄경』 내의 성문 ․ 대승 간의 대립의식이 그것이다. 「입법계품」의 여러 성문들이 기원림법회에 동참하고 있으면서도 여래의 경계를 보지 못하였다는 구절23)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23) ?六十華嚴? 「入法界品」, T9, p. 679bc.
a-1) 「불자들이여, 이 경도 그와 같아서, 어떤 중생의 손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여래 법왕의 참 아들로, 모든 여래 종성의 집에 태어나, 여래의 상과 모든 선근을 심은 자만이 예외입니다. 만일 그런 부처의 참 아들이 없다면 이 경은 곧 없어질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일체의 성문이나 연각은 이 경을 듣지 못하거늘 하물며 수지하고 독송하고 서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로지 보살마하살만이 스스로 경권을 외워 지니고 서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佛子! 此經如是不入一切眾生之手, 唯除如來法王真子, 從諸如來種姓家生, 種如來相諸善根者. 若無此等佛之真子, 斯經則滅. 何以故? 一切聲聞緣覺不聞此經, 何況受持書寫解說? 無有是處. 唯除菩薩摩訶薩能自誦持書寫經卷.)」(「寶王如來性起品」, T09, p.630a)
a-2) 「如是色像一一如來祕藏, 經典之要一一不斷三寶, 法若沒盡, 便無見者. 所以者何? 一切聲聞及緣覺乘不能堪任, 逮是經典亦不聞音, 何況受持諷誦讀者? 唯歸大人諸菩薩乎, 書在經卷, 靖著屋宇.」(?佛說如來興顯經?, T10, p.613b)
b-1)「보살마하살은 어리석음을 떠나 일체지를 알고 보살도에 머물러 대승을 타고는 일체지에 머물며, 마음의 힘으로 성문이나 연각으로 나타나 보이되 그 위의를 고치지 않습니다. 보살은 ‘나는 끝내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는 증득하지 않을 것이나, 만약 증득한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니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고 무외에 편히 머물면서, 일체의 교법을 다 보이고 끝까지 평등한 대승을 원만히 갖추니 이것이 아홉째의 무외입니다. (菩薩摩訶薩, 捨離愚癡, 知一切智, 住菩薩道, 乘於大乘, 住一切智, 心力示現聲聞緣覺, 不改威儀. 菩薩作如是念, ‘我終不證聲聞辟支佛道, 我若受證, 無有是處, 乃至不見微畏之相.’ 不見微畏相故, 安住無畏, 悉能示現一切諸乘, 具足究竟平等大乘, 是為第九無畏.)」([離世間品], T09, p.650b)
b-2) 「菩薩不捨一切智心, 善住道義, 欽樂大乘. 以諸通慧所建之力, 為諸聲聞及緣覺乘現不可及威儀禮節, 不興此念將無誤墮聲聞緣覺. 以大勇猛現一切乘, 所度無極, 唯樂大乘, 所行具足, 是九無畏.」(?度世品經?, T10, p.635c)
c) 「불자여,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그 몸과 입과 뜻의 업으로 모든 훌륭하고 묘한 공덕을 얻는다는 것이니, 모든 하늘이나 마군이나 범천 ․ 사문 ․ 바라문 ․ 사람 ․ 사람 아닌 것들과 또 성문이나 연각들로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佛子! 是為菩薩身口意業, 能得一切勝妙功德, 諸天․ 魔․ 梵․ 沙門․ 婆羅門․ 人及非人․ 聲聞․ 緣覺, 所不能動.)」(「淨行品」, T09, p.432c)
d) 「성문 ․ 연각의 법을 구하기 때문에 회향함이 아닙니다. 다만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살바야를 완전히 이루며 걸림없는 지혜를 끝까지 얻기 위해 회향하는 것입니다(不求住聲聞緣覺乘故迴向. 但欲調伏一切眾生, 滿足薩婆若究竟無礙智故迴向)」(「金剛幢菩薩十迴向品」, T09, p.535c)
e) 「모든 부처님은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몸 ․ 입 ․ 뜻의 업을 따르며 닦고 배워서 성문 ․ 연각의 마음은 아주 떠나서, 오로지 무상보리를 구하여 닦은 바 공덕을 모두 일체종지에 회향합니다(一切諸佛於諸佛所, 隨順修學身口意業, 永離聲聞緣覺之心, 一向專求無上菩提, 所修功德皆悉迴向一切種智.)」(「佛不思議法品」, T09, p.592c)
f) 「불자여, 모든 부처님에게는 열 가지 불사(佛事)가 있는데, 그것은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하여, 어떤 하늘과 사람도 헤아릴 수 없고 삼세의 어떤 성문과 연각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佛子! 一切諸佛, 有
十種佛事, 無量無邊不可思議, 一切天人, 不能稱量, 三世一切聲聞緣覺所不能說.)」(「佛不思議法品」, T09, p.595b)
위 인용문 중에서 a)와 b)는 지분경에서 이승과 보살장을 구분하여 언급하는 부분들이 『육십화엄』에 그대로 계승된 부분에 해당한다. c)는 「정행품」의 마지막 부분으로 보살이 얻는 공덕을 성문이나 연각은 얻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한 부분인데, 「정행품」을 포함하고 있는 지겸 번역의 『보살본업경』의 「원행품」에는 보이지 않는 구절이다. d)∼f)는 지분경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품들에서 확인되는 이승과 보살을 대비시키는 부분들을 몇 곳 인용한 것이다.
이상의 인용문들에서 『화엄경』은 지분경으로서 별도로 유통될 때에도 그리고 대경으로 편집될 때도 성문 ․ 연각의 이승과 보살장으로서의 보살승 혹은 불승을 대비시키는 의식이 전편에 걸쳐서 잠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인 논조로 말하자면, 성문 ․ 연각의 이승은 『화엄경』의 가르침을 수지할 자격이 없는 자라는 입장이 강렬하게 설해지는 것이다.
이 같은 입장은 이전의 논문에서 『화엄경』 편집의 특징적인 형태 중의 하나로 설명했던 동명동호(同名同號)의 불보살에 의한 가피와 수기 그리고 증명이라는 구조의 확장과도 연관시켜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논자의 설명대로 일종의 ‘동일한 서원에 기반한 공동체’의 전승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화엄경』에서 청중을 부르는 명칭 ‘불자(佛子)’는 이 성문 ․ 연각의 이승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별도의 집단의식을 보여주는 것이자 『화엄경』에 의해 테두리 지어지는 ‘동일한 서원에 기반한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결속강화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화엄경』은 지분경이 유통되던 시점에도 그리고 대경으로 편집되던 시점에도 여전히 경에서 성문 ․ 연각으로 부르는 집단에 대한 대응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화엄경』은 지분경으로 유통되던 시점에도 그리고 대경으로 편집되던 시점에도 경이 성문 ․ 연각으로 부르는 집단이 존재하는 불교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분경이 유통되던 시점인 2세기부터 대경이 편집 하한 시기인 4세기 말까지의 시기에 『화엄경』을 비롯한 다양한 대승경전이 활발하게 유통되었으면서 동시에 성문 ․ 연각으로 불리어졌을 부파불교 집단이 존재했던 곳을 주목할 필요가 생긴다.
우선 호탄의 경우를 고려해보자. 앞서 언급한 한지연의 견해에 따른다면, 호탄 지역은 3세기 말을 기점으로 대승불교가 급격하게 발전한 지역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화엄경』이 호탄에서 편집되었다면, 적어도 편집시기에 해당하는 4세기 초∼말 무렵의 시기에 『화엄경』의 편집자들이 경이 성문 ․ 연각으로 부르는 집단을 의식할 필요성은 그리 강하지 않았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지분경은 물론이고, 대본 『화엄경』 편집과정에서 부가되어 나타나는 품들에도 성문 ․ 연각으로 불리는 부파불교 집단에 대한 대응의식이 존재한다. 이 점을 호탄의 대승불교 성장 시기와 비교했을 때, 호탄에서의 편집 가능성은 좀더 약해진다고 생각된다. 반면 서북 인도 지역에서는 이 시기에도 대승 경전이 지속적으로 출현하였던 것은 물론 여전히 부파불교의 우세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4) 따라서 경 안에 보이는 성문 ․ 연각의 이승과 보살장의 대립이라는 배경에서 볼 때, 『화엄경』의 편집 장소로 호탄 지역을 고려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24) 이 점과 관련하여 大竹晋이 최근 발표한 「華嚴經の世界像―特に聲聞乘との關係をめぐって」(シリ―ズ大乘佛敎 第四卷 ?智慧/世界/ことぼ?, 春秋社, 2013)에서는 『화엄경』과 여러 부파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십무진장품」에 설해지는 色界二十二天說의 계통을 검토하고, 대본 『불화엄경』의 복수의 부분이 본래는 법장부의 영향 아래에 있는 인물에 의해 만들어졌고, 후대에 개변되어지면서 법장부의 영향이 희미해졌을 것이라고 한다.(p.220) 둘째 설일체유부는 雙神變을 佛과 聲聞에 공통되는 신변이며, 그 중 Buddhāvataṃsaka를 佛에 특유한 신변으로 규정한다고 추정한다. 그런 연후 설일체유부와 대본 ?불화엄경?의 ‘佛華嚴’은 공통적으로 佛의 대집단을 의미하고, 다만 사바세계에 대응하는 것이냐 아니면 삼천대천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냐에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pp.222-224) 셋째, 대본 『불화엄경이 석가모니불을 비로자나라고 부르는 것은 대중부의 Mahāvastu에서 보살시대의 석가모니를 ‘Vairocano bodhisattvaḥ’라고 부른 성문승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p.227) 大竹 氏의 지적, 특히 첫 번째의 지적은 대본 『화엄경』의 성립 과정에 여러 부파들의 영향이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의 지적은 설일체유부의 쌍신변이 대본 『화엄경』의 ‘불화엄’의 조직 양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정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양자의 ‘佛의 大集團’이 동등한 구조를 가진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힘들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 논문의 뒤에서 설명한다. 어쨌든 부파 영향을 받았다는 점과 『화엄경』 내의 성문 ․ 연각과 보살장 간의 대립의식의 존재는 당연히 대본 『화엄경』의 성립과정 주변에 다양한 부파의 존재를 상정하게 한다는 점에서 편집 장소를 추정하는데 유용한 정보일 것이다.
*大竹晋 氏의 이 논문은 전혀 그 내용을 모르고 있었는데, 같은 연구소에 있는 이케다 마사노리(池
田 將則) 선생이 논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3. 화엄경변상의 등장으로 본 편집과 유통의 문제
이상 대본 『화엄경』의 편집지에 대한 나름의 정리를 시도해보았는데, 초기 유통과 관련된 현존 기록이 모두 호탄 혹은 그 주변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중앙아시아 이서(以西) 지역의 유통 흔적이 없다는 점에서는 호탄과 그 주변이 편집 장소로서 유력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지분경은 물론 대본 『화엄경』의 편집과정에서도 성문 ․ 연각 이승과 보살장 간의 대립의식이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부파로부터의 영향이 대본 『화엄경』의 편집 과정에도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호탄과 그 주변이 3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급격히 대승화된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이 지역의 편집 가능성을 낮추어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서는 대본 『화엄경』의 초기 유통과 확산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화엄경 변상의 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보면서, 편집지의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하기로 한다.
이전의 논문 결론부에서 논자는 대경 편집자들의 편집 의도의 하나로 여래 출현과 보살도로 이어지는 『화엄경』 전편(前篇)의 구조에 대해 “『육십화엄』은 『도사경』의 서분을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과 「노사나불품(盧舍那佛品)」으로 확장하고, 다시 보살도의 수행을 여래출현의 과덕으로 재구조화하는 양상을 취하는 것이다. 동시에 「십지품」 서분과 유통분의 구조를 보살도 법회에 확장함으로써, 여래출현의 의미를 보살의 인행에까지 확장하여 과덕(果德)의 구체화라는 형태로 설명하려는 의도를 달성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동명동호(同名同號)의 다불(多佛)과 다보살(多菩薩)에 의한 가피와 수기 및 증명이라고 하는 『십지경』에 특유한 사유의 확장 역시 포함”25)하여 편집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경우 그것이 도상적으로는 어떤 형식으로 표현될 것인가를 고려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보살도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품들의 서분과 유통분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서분의 경우는 동일한 명호를 가진 다불(多佛)의 출현이라는 양상이 공통되고, 유통분의 경우는 동일한 명호를 가진 보살들의 출현이라는 양상이 공통으로 나타난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지금 막 정각을 성취한 불이 위치하는 형태이다. 곧 지금 막 정각을 성취한 불(佛)과 일체의 시방세계에서 래현(來現)해온 동명동호의 다불(多佛) 혹은 다보살(多菩薩)이 함께 출현하는 형태이다. 이때 동명동호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양식이 문제될 것이다. 호탄에서 출토된 불교조상중에는 이 ‘동명동호’라는 대경 편집의 정신을 표현한 듯한 형태의 유물들이 보인다.
호탄의 라왁사원지에서 출토된 불상 중에는 중앙에 거대한 불입상(佛立像)이 있고, 그 불입상의 광배(光背)에 동일한 수인을 맺은 것으로 보이는 작은 입상(立像)의 화불(化佛)을 빽빽이 배치한 사례가 있고, 비슷하게 광배나 두광(頭光)에 작은 불상들을 가득 채우는 형식의 도상들이 라왁 사원지뿐만 아니라 단단윌릭, 악테렉, 발라와스트 등지에서도 보인다는 점, 그리고 이들 도상형식이 화엄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은 이미 일찍부터 제시되어 있다.26) 임영애는 이 양식의 기원을 간다라 탁티 바히(Takht-i-Bahi)등지에서 출토된 사위성 신변상의 도상을 차용한 것이라고 지적한다.27)
26) 이 점을 언급하는 논문으로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文明大, 「호탄(于闐) 불상의 조성배경과 그 성격」, 東國大學校 편, 「실크로드의 문화5-西域南路」, 1993. 林玲愛, 「호탄(Khotan, 于闐)의 佛敎彫刻」, 東國大學校 편, 「실크로드의 문화5-西域南路」, 1993. 林玲愛, 「호탄(Khotan, 于闐) 라왁(Rawak) 寺院趾 塑佛像의 硏究」, 「미술사학연구」198, 1993. 한지연의 「서역불교 교류사」(은정불교문화진흥원, 2011) p.113에서도 동일한 도상을 언급하면서 화엄사상의 유행에 따라 다불화현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27) 林玲愛, 「호탄(Khotan, 于闐)의 佛敎彫刻」, 1993, p.235.
미술사에 밝지 못하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논자가 보기에 양자 사이에 양식의 유사성은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배경사상의 유사성을 말하기는 힘들다고 생각된다. 물론 임영애 역시 그 배경사상의 동일성을 말하지 않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논자가 보기에 두 도상 간의 가장 큰 차이는 간다라 사위성 신변도에 등장하는 화불의 수인은 각기 다르고, 라왁사원지 광배에 표현된 화불들의 수인은 동일하다는 점이다. 라왁사원지의 광배에 표현된 도상양식은 논자가 앞서 언급한 동명동호의 다불 혹은 다보살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변으로 제시된 방식인 것처럼도 보인다. 이 점은 단단윌릭에서 출토된 광배 단편에 도상화된 화불의 수인이 단편이지만 동일하게 나타나는 점 역시 주목된다. 이러한 생각을 보완하는 사례로 7세기 말에 중국 화엄종의 대성자로 불리는 법장(法藏)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낙양 용문석굴의 뇌고대 남동이 있다. 『화엄경』의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뇌고대 남동의 셀 수 없는 화불들 역시 돋을새김으로 동일한 수인을 취하는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논자의 불교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좁아서 다양한 출토유물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일한 수인을 가진 다수의 화불을 광배에 표현하는 양식이 더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대부분의 천불도가 모두 동일한 수인을 가진 형태로 묘사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수인을 가진 다불화현의 표현방식을 화엄에 특화된 방식으로 생각해도 좋다고 생각된다.28) 그렇다면 호탄에서 어떠한 이유로 『화엄경』이 특별한 주목을 받았고 또 그것이 새로운 도상양식의 창안으로 이어졌으며, 호탄의 『화엄경』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호탄을 방문한 중국불교의 구법자(求法者)들의 『화엄경』에 대한 관심을 촉발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29)
28) 화엄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상일 경우에만 ‘동일한 수인의 다불화현’이라는 표현양식이 나타난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 외의 일반적인 다불화현 혹은 다불의 표현방식은 대부분 수인과 자세 그리고 상호에서도 각각 다르게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경전에 있어서도 다불화현의 부처에 동일성을 요청하는 내용을 가진 경전은 화엄 및 화엄의 지분경인 『십지경』뿐이다. 『십지경』 특유의 양식이 대본 편집과정에서 확장 반복되면서 강조되어진 것은 이미 앞선 논문(각주25 참조)에서 지적한 바 있다.
29) 다만 그것이 명확히 『화엄경』적인 양식이라는 것을 전제할 경우에 그러하다. 동일한 수인을 가진 다수의 화불을 광배에 배치하는 것 자체는 『화엄경』에 특유한 동명동호의 다불화현을 상징화하는데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다만 주지하는 것과 같이 『화엄경』 각 법회의 기본적인 묘사는 주불이 좌정하여 삼매에 들어간 상태인데, 라왁사원지 塑佛像의 경우는 그 광배의 본존이 立像이라는 점에서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또 한 가지 『화엄경
』의 양식이 아닐 가능성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광배에 배치된 화불이 제작 기법상의 편의에 의해, 동일한 거푸집을 활용하여 찍어내는 과정에서 수인이 동일화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배치의 특성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인은 동일해도 손의 위치가 화불들 간에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점, 부분적으로 전신을 갖춘 화불도 존재하는 점 등에서 단순히 제작 기법상의 편의에 의해서 동일화되었다고 말하기에도 곤란한 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므로, 고려의 여지가 남는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화엄경』에 대한 호탄 지역의 이와 같은 지대한 관심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그것이 『화엄경』의 편집지가 호탄이라는 유력한 증거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호탄이 『화엄경』의 유통의 중심지이고, 『화엄경』을 도상화해낸 지역이라는 점 자체가 호탄을 『화엄경』의 편집지로 지목하는데 주저하게 하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것을 반드시 경전을 신행 또는 수행의 대상으로 구현한 형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에 결부시켜 볼 수 있는 기록 중의 하나가 바로 대본 『화엄경』의 초기 유통 출처인 차구가국에 관한 굴다 삼장의 전언 일부를 다시 떠올려 보자.
"그 왕궁에는 『마하반야경』 『대집경』 『화엄경』 등의 3부의 대경을 소장하고 있는데, 모두 10만여 게송이다. 왕이 몸소 수지하였고 직접 열쇠를 보관하고 있다. 독송할 때는 열고 향과 꽃을 올려 공양한다. 또한 도량 안을 갖가지로 장엄하는데, 뭇 보배를 구비하고 온갖 꽃을 장식하며, 제철이거나 제철이 아닌 과일을 갖추어 여러 어린 왕자들을 불러들여 예배하게 하였다."
전형적인 대승불교의 경권 신앙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수지와 독송 그리고 공양과 예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굴다 삼장의 전언과 호탄 라왁사원지를 비롯한 주변의 『화엄경』의 화불을 표현한 양식들은 대본 『화엄경』이 이 지역에서 경권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참고로 말해두면 이들 불상들 중 일부는 대본 『화엄경』의 편집 시기와 거의 근접하는 것이다. 논자의 생각을 말한다면, 편집 다시 말해서 대본 『화엄경』이 출현하자마자 바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물론 대본 출현 이전에 ‘동명동호’의 다불화현이라는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는 지분경으로서 『십지경』의 유통이 미친 영향을 고려할 수는 있겠지만, 상징구조는 반복과 강조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는 대본 출현을 기다려야 한다고 보는 것이 좀더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호탄과 그 주변에서 대본 『화엄경』이 편집되었다면, 편집지에서 편집되자마자 바로 신앙의 대상으로 수지, 독송, 예배, 공양되는 것은 물론 그것에 의거하여 상징화까지 동시에 이루어지는 형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편집지에서 곧바로 신앙의 대상으로 수용된다는 것은, 논자의 생각으로는 그리 납득이 가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미 지분경들을 알고 있던 호탄과 그 주변 지역에서 그것의 완본 형태로서 전해진 대본 『화엄경』을 전해받았을 때, 곧바로 신앙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좀더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고려할 것이 있다. 한지연의 추론인데,30) “불교가 동전(東傳)할 수록 대승불교의 성격이 강해지고, 오히려 중국에서 대승경전을 구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져감에 따라 그 전파방향이 역으로 작용하여 중국에서 수요되는 분량이 많은 대승경전에 비로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다. 한지연의 이 추정은 카시미르 불교의 성격변화에 대한 일련의 검토 과정에서 추론된 것이지만, 이 추론을 조금 확장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곧 『화엄경』의 지분경(支分經) 이른바 별행경들이 중국에 유통되면서 그에 대한 좀더 많은 정보에 대한 열망이 존재했고, 그것이 화엄대경의 편집을 촉발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마지막에 추가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살주처품」의 경우는 그러한 열망에 대한 반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것은 중국의 「고승전」에서는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사례에 해당한다. 아직 미비된 혹은 이미 번역된 경전으로부터 완전한 정보를 파악하기 곤란할 때, 구법의 열망은 더욱 커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30) 한지연, 같은 책, p.127.
이와 동일한 사태를 우리는 호탄 불교인들의 경우에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알려진 기록과 자료에 의하면, 호탄과 그 주변은 3세기 중후반을 기점으로 대승불교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한 지역에 해당하고, 현재 알려진 대부분의 『화엄경』 지분경들은 이 호탄을 경유지로 삼고 있다. 곧 3세기 말∼4세기 초 사이에 호탄 지역은 대부분의 『화엄경』 지분경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대본 『화엄경』에 대한 요구를 낳았을 수 있다. 물론 그 요구가 호탄에서의 대본 『화엄경』 편집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중국의 불교인들이 지분경이나 경전의 부족한 부분을 느꼈을 때 했던 행동이 대부분 ‘인도로의 구법’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호탄의 불교인들 역시 그러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화엄경』의 지분경들을 많이 접했던 만큼, 좀더 완성된 형태의 『화엄경』을 얻고자 했던 열망은 더 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대본 『화엄경』의 초기 유통의 중심지로 호탄과 그 주변이 부각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31)
31) 다만 이 경우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논자가 지금 언급하고 있는 생각은 대본 『육십화엄』의 산스크리트본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팔십화엄』이나 『자은화엄』 그리고 『장역화엄』은 모두 이 『육십화엄』의 원본과 같은 계통의 확장판 혹은 재구성판에 해당한다고 생각되고, 따라서 대본 『육십화엄』을 제외한 이후의 『팔십화엄』 『자은화엄』, 『장역화엄』의 원본들이 호탄에서 증광되었을 가능성까지 부정하기는 힘들다고 생각된다.
Ⅳ. 결 론
이상에서 대본 『화엄경』 특히 『육십화엄』의 산스크리트본의 편집 장소로 호탄을 지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자 나름의 고찰을 시도해보았다. 여기에서는 본론의 언급을 간단히 요약해서 제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호탄을 편집지로 지목하게 한 대본 『육십화엄』 산스크리트본의 출처로서의 호탄에 대한 문제이다. 「경기(經記)」와 「역대삼보기」 소재의 굴다삼장의 전언은 대본 『육십화엄』의 초기 유통에 대한 확증으로는 언급될 수 있지만, 편집의 증거로 제시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둘째, 「보살주처품」의 제국주처를 검토해보면, 대본 『육십화엄』 편집자의 지리적 시야의 중심이 호탄이라고 보기 힘들며, 오히려 서북인도 지역을 편집자가 가졌던 지리적 시야의 중심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편집지 역시 호탄 지역이 아닌 서북인도 지역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셋째, 지분경은 물론 대본 『화엄경』의 편집과정에서 증보된 부분에도 성문․연각으로 표현된 부파불교를 의식한 대응들이 적지 않게 보이기 때문에, 대본 『화엄경』의 편집지는 적어도 4세기 중반 무렵까지도 부파불교가 우세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 대본이 편집되었다고 추정되는 시기의 호탄은 대승불교가 우세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4세기의 한 세기 동안 대승불교 경전이 계속해서 출현하거나 편집되는 지역이면서, 부파불교가 여전히 우세했던 지역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한 지역으로 대표적인 곳이 바로 서북인도 지역이다.
[출처] 화엄경의 편집은 호탄에서 이루어졌는가|작성자 임기영인문학
장쑤성(江苏省,강소성) 난징(南京,남경) 2 ; 푸쯔먀오(夫子庙,부자묘) - 남송(南宋)의 멸망과 중국의 삼별초(三別抄), 문천상(文天祥). 제3막 2장 행복의 얼굴
2014. 9. 20.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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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3 2
난징(南京, 남경)은 총칭(重庆, 중경), 우한(武汉, 무한)과 더불어 '중국의 3 대 부뚜막'이라 불리고, 한 여름 난징(南京)의 참새는 전선에 앉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선에 앉아 있으면 바로 참새구이가 되어 떨어지기 때문이다.(설렁~)
그만큼 난징(南京)의 여름은 살인적인 더위라는 예기이다.
하지만, 이제 9월에 접어들어, 햇빛도 살짝살짝 구름 사이를 숨으면서, 기온도 적당하고, 쾌적하다. 여러번 난징(南京)에 왔지만, 2,000 년 고도답게 잘 가꿔진 플라타너스의 터널이 매우 인상적이고 깨끗하다.
잔위안(瞻园, 첨원)을 나와 푸쯔먀오(夫子庙, 부자묘)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자묘(夫子庙)라는 이름은 공자(孔子)를 존경하는 의미로 '공부자(孔夫子)'라 불린데에 유래하고, 공자(孔子)를 모시는 문묘(文庙, =文廟)와 동의어이다.
. . .
잔위안(瞻园, 첨원) 정문에서 걸어 채 5 분도 안되 푸쯔먀오(夫子庙, 부자묘) 입구에 도착했다. 1980 년 경 푸쯔먀오(夫子庙, 부자묘)를 재건하면서, 주변의 건축물도 모두 명청(明淸)시대의 전통 가옥식으로 정비하여, 지금은 난징(南京, 남경)에서 가장 활기 넘치고, 운치 있는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지나는 사람들의 밝은 모습에 무언가 중국의 힘을 느끼기 충분하다.
본래 이곳은 학궁(學宮; 중국에서 學堂과 동의로 쓰임.)이 먼저 건립 되었는데, 잘 알다시피 옛날 학당이란 오늘날 대학이고, 배우는 것은 공자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학당에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 필히 존재한다. 또한, 사당 앞에는 필히 연못이 조성되는데, 이를 판츠(泮池, 반지)라 한다. 이곳의 판츠(泮池, 반지)는 친화이허(秦淮河, 진회하)를 자연 그대로 이용한 것이 특색이다.
설명서에는 판츠(泮池, 반지)는 과거 시험을 보고 붓을 씻었던 곳이라 소개하는데, 학궁(學宮)에서 매일 학생들이 먹을 갈고, 글을 썼을 터인데, 어찌 과거만 보고 붓을 씻었겠는가? 학당에서 공부를 마치거나 과거를 본 후, 여기서 붓을 씻고 가방 쌌다고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 듯하다. 어쨌던 지금은 붓 씻는 사람은 없고, 유람선을 바라보며 스트레스 씻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판츠(泮池, 반지) 남쪽에는 휘황찬란한 두 마리의 용(龍)으로 장식된 벽이 있다. 이런 벽을 조벽(照壁)이라고 한다. 1575 년 명(明) 만력제(萬曆帝) 때 만든 것으로 길이가 110 m로 중국에서 가장 길다. 다시 뒤돌아 북쪽을 버라보면, 통로가 세 개로 구성된 방(坊)이 보인다. 영성문(欞星門)으로, 가운데 문은 황제 전용이라 누구도 드나들 수 없었고, 좌우는 친왕(親王)이나 군왕(郡王)이 사용했다.
푸쯔먀오(夫子庙, 부자묘)를 들어서면, 대성전(大成殿) 중앙단 위에 공자(孔子) 동상이 보이고, 단 아래는 12 명 공자(孔子)의 제자 동상이 도열해 있다. 이러한 문묘(文庙)는 중국의 각 도시마다 있으나, 이중, 푸쯔먀오(夫子庙, 부자묘)는 베이징(北京) 쿵먀오(孔庙, 공묘), 지린(吉林, 길림) 원먀오(文庙, 문묘), 취푸(曲阜, 곡부) 쿵먀오(孔庙,공묘)와 함께 중국4대문묘(四大文庙)라 평가 받고 있다.
사찰에 부처님을 모신 대웅보전이 있듯, 문묘(文庙)의 핵심 전각은 공자(孔子) 위패가 모신 대성전(大成殿)이다. 푸쯔먀오(夫子庙,부자묘)의 대성전(大成殿)은 명청(明淸) 때는 5 칸의 건축이었으나, 중일전쟁 때 파괴되어 재건되면서 3 칸으로 축소되었다. 문묘(文庙)란 용어는 원(元)나라 이후 사용하였고, 당(唐)나라 때는 공자(孔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추봉(追封)되어 문선왕묘(文宣王庙)라 하였다.
푸쯔먀오(夫子庙)가 만들어진 계기는 337 년 동진(東晉)의 3 대 황제, 성제(成帝) 사마연(司马衍)이 인재를 육성을 위해 친화이허(秦淮河, 진회하) 남쪽에 학궁(学宫)을 세웠고, 1034 년 북송(宋) 인종(仁宗) 때 확장하고 이전하면서, 강 북쪽인 지금의 자리에 건축되었다. 또한, 학궁(学宫) 앞에 사당을 건립하여,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푸쯔먀오(夫子庙, 부자묘)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남송(南宋) 때는 건강부학(健康府學), 원(元)나라 때는 집경로학(集庆路学), 명(明)나라 초기는 국자학(国子学), 후에 북경(北京)으로 천도 후에는 응천부학(应天府学), 청(淸)나라 때는 상원현(上元縣)과 강녕현(康寧縣)의 교육을 담당하는 장부학(將府學)으로 불리다가, 청(淸)나라 말기에 '동남제일학(东南第一学)'이란 편액을 하사 받았으나,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기능을 상실하였다.
학궁(学宫)은 과거에는 명덕당(明德堂), 존경각(尊經閣), 청운루(青雲樓), 숭성사(崇聖祠)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명덕당(明德堂)과 존경각(尊經閣)만 남아있다. 유생들이 모여 강의를 듣는 곳을 보통 명륜당(明倫堂)이라 부르지만, 이곳은 명덕당(明德堂)이라 한다. 이는 남송(南宋)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이 편액을 썼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그만큼 문천상(文天祥)은 중국에서 존경 받는 인물이다. 현대 들어와서 명덕당(明德堂) 앞 양쪽에 고루(鼓樓)와 종루(鐘樓)을 마주 보게 건립하였고, 명덕당(明德堂) 안에선 공자님의 강의 대신, 중국 전통 악기 공연을 하고 있다. 피곤함도 달랠 겸 잠시 앉아 공연을 관람하며 문천상(文天祥)이 썼다는 명덕당(明德堂)의 편액을 바라보며 그를 생각해 보았다.
문천상(文天祥, 1236 ~1282)의 자는 송서(宋瑞), 이선(履善), 호는 문산(文山), 여릉(廬陵; 현 江西省 吉水縣) 출생이다. 20 세 때 진사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한 수재였고, 1259 년 지방관으로 재직 중에, 몽골군이 남하하여 천도(遷都)한다는 설이 유력하게 떠돌자, 천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그날로 면직되었다가 나중에 복직하여 감주(贛州, 현 江西省)의 주관(州官)으로 재직하였다.
재직 중, 원(元)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수도(首都)인 임안(臨安; 현재 杭州)이 위험하다는 급보를 받고, 즉시 가산(家産)을 정리하고, 이를 군비로 충당하여 군사 1 만 명을 모집하였고, 이들을 이끌고 임안(臨安)으로 향하여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宋)나라는 더 이상 가망 없다 판단하고 항복을 결정하였다. 조정은 문천상(文天祥)을 사신으로 임명하고 원(元)나라와 강화 협상을 맡기었다.
당시 송(宋)은 6 대 도종(度宗 趙禥, 1240 ~1274)이 병사하여, 4살의 공제(恭帝, 1271 ~1323) 황제가 되고, 태황후가 섭정하였다. 문천상(文天祥)은 당당하게 원(元)나라와 협상에 임하지만, 원(元)나라는 문천상(文天祥)과 협상이 여의치 않자 그를 억류시키고, 1276 년 임안(臨安)을 함락하였고, 문천상(文天祥)을 포로로 잡아 대도(大都, 현 北京)로 호송하였으나, 문천상(文天祥)은 호송 도중 탈주하였다.
공제(恭帝)는 도종(度宗)의 넷째 아들로, 같은 황후 소생인 둘째가 일찍 병사하여 황위를 이었으나, 2 년 만에 나라가 멸망하며 원(元)나라의 포로로 대도(大都)로 호송되어, 영국공(瀛國公)을 호칭을 받고 살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송(宋)나라 황실 가족, 대신들도 포로로 대도(大都)로 압송되었으나, 일부의 송(宋)나라의 충신들은 그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장세걸(張世傑), 육수부(陸秀夫) 등은 임안(臨安)이 함락되기 직전, 도종(度宗)의 셋째 아들인 8 살 익왕((益王, 1269 ~1278)과 일곱째 아들 위왕(衛王, 1272 ~1279)을 안고 도망쳐, 익왕((益王)을 단종(端宗)으로 옹립하였다. 탈주한 문천상(文天祥)도 소식을 듣고 합류하였으나, 원군(元軍)에 쫓겨 단종(端宗)은 배가 전복되어 죽었다. 이들은 다시 위왕(衛王)을 소제(少帝)로 옹립하고 항쟁을 지속하였다.
이들은 남쪽으로 내려가며 고려의 삼별초(三別抄)처럼 항쟁하였고, 광둥(廣東) 애산(厓山, 현 新會市)이란 작은 섬에 요새와 행궁(行宮)을 구축하고 결사항전을 계속하였다. 이들과 같이 나라를 되찾겠다는 충신이 있는가 하면, 이미 끝났다고 재빨리 변절한 자도 있기 마련이다. 원(元)나라는 취약한 수전(水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복건(福建)의 호족 포수경(蒲壽庚)을 포섭하였다.
포수경(蒲壽庚)은 복건(福建) 천주(泉州)에서 무역 사무를 관리하는 제거시박(提擧市舶)이란 벼슬을 하였던 자로 숙련된 선원과 선박을 가지고 해상무역으로 부자가 된 남해(南海) 호족(豪族)이었다. 포수경(蒲壽庚)은 천주(泉州)로 피난 온 단종(端宗)을 돕지 않고, 원(元)나라에 항복하여 복건행성중서승(福建行省中書丞)에 임명되며, 애산(厓山) 공격에 참여하였다.
원(元)나라의 대대적 공격에 문천상(文天祥)은 광둥성(廣東省) 오파령(五坡玲)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고, "중국의 삼별초(三別抄)"도 애산(崖山)에서 강하게 버티다, 1279 년 애산해전(崖山海战)에서 전멸하였다. 육수부(陸秀夫, https://blog.naver.com/kjschina/221320426549)는 해전 중에도 배에서 어린 소제(少帝)에게 대학(大學)을 가르치다가, 패배하였음을 알고 소제(少帝)를 안고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푸쯔먀오(夫子庙, 부자묘)를 나와 동쪽으로 친화이허(秦淮河, 진회하) 변 도로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또 하나의 고풍스런 건축물이 눈에 띈다. 남송(南宋) 때 세워진 옛 과거 시험장, 장난궁위안(江南贡院, 강남공원)이다. 3 층의 높은 건물인 밍위안러우(明远楼, 명원루)는 응시자들이 부정행위를하는지 감시하던 시설이었다.
여기서 시험 본 유생 중, 장원(壯元) 급제한 사람이 청대(淸代)에만 58 명이나 된다고 하니, 과거시험 역사상 장원 급제한 인물의 반 이상이 여기에서 배출되었다 할 수 있다. 문천상(文天祥)을 비롯한 우리가 아는 많은 명청(明淸)시대의 중국 위인들이 여기에 앉아 시험을 치렀거나, 밍위안러우(明远楼, 명원루) 위에 앉아 소시적 감회에 젖어 후배들을 내려보며 감시 감독하였을 것이다.
유생이 앉아 시험을 보던 장소에 지금은 흑색 돌을 깔고, 물을 얇게 기술적으로 흘려 거울처럼 반영이 되게 하였다. 이름하여 '정지(静池)'. 즉, '마음이 깨끗해지는 연못.' 아니 마음이 어찌 자동(自動)으로 깨끗해 지겠는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연못'으로 해석함이 맞을 것이다. 정지(静池)는 지하 4 층의 건물의 옥상으로 지하에는 중국의 과거제도에 관해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중국의 과거제도는 587 년 수(隋)나라 때 처음 시행되었다. 이전 한(漢)나라부터 시행하여 오던 제도는 '향거리선제(郷挙里選製)'라 하여 지방관과 지방의 유력자가 우수한 관내의 인물을 추천하는 형식으로 관료를 채용하였으나, 중국을 재통일한 수문제(隋文帝)는 지역별로 할거하는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공정한 시험으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도입하였고, 당(唐)나라도 이를 계승하였다.
* 당시 과거 공부하는 선비들이 한 칸에 한 사람 앉아 책을 읽고 공부하였던 장소.
시험은 주현(州縣)에서 실시하는 향시(鄕試)와 도성에서 실시하는 공거(貢擧)로 2 단계로 실시되었고,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의 과목을 두었다. 송(宋)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은 지방 권력과 귀족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황제가 직접 인재를 선발하는 전시(殿試)를 만들어 왕권을 강화하였고, 이후 과거제도가 보편화되었으나, 관직에 비해 진사가 너무 많아지게 되는 폐단이 생겼다.
때문에 송(宋)나라의 개혁가, 왕안석(王安石)은 진사과(進士科)만 남기고 다른 과목울 폐지하였고, 이때부터 진사(進士)는 과목의 이름이 아니라, 등제한 사람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조광윤(趙匡胤)이 송(宋)나라를 건국은 한 것은 960 년, 우리나라에서 이보다 2 년 앞선 958 년, 고려 광종(光宗, 925 ~975)이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최초로 실시하였다.
광종(光宗) 역시 차별 없이 공정하게 인재 선발하기 위해 과거를 시행하였으나, 그보다 큰 목적은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청(明淸) 시기의 과거는 향시(鄕試), 회시(會試, = 貢擧), 전시(殿試)의 3단계로 구분되었고, 수석합격자를 장원(壯元), 차석자를 방안(榜眼), 삼석자를 탐화(探花)라 하고, 나머지는 '진사급제(進士及第)'라는 학위를 수여하였다.
명(明)나라부터는 국가에서 세운 학교에서 인재를 양성한 후, 과거 시험을 보게 하는 방식으로 제도가 바뀌자, 학교 입학 시험은 과거시험의 예비고사 성격이 되었다. 그러나, 20 세에 급제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이고, 대부분 30 대 후반까지 20 년 동안 공부만 하여야 했다. 그러니, 차별없이 인재 채용한다는 과거제도이지만, 집안의 경제적 뒷받침이 없으면 시험을 준비할 수 없다.
친화이허(秦淮河, 진회하) 옆 전시장 한쪽에는 못생긴(?) 괴물 모양의 '괴성야(魁星爷; https://blog.naver.com/kjschina/221167773065)'를 모신 전각이 있다. 괴성야(魁星爷)는 과거 준비생들에게 최고 인기 신(神)이었고, 문방사우의 로고는 물론, 오늘날 엿과 찹쌀떡을 대신하는 역할까지 담당 하였다. 오늘날 같은 것은 이뿐만 아니다.
당연 일부 수험생은 오늘날 처럼 속옷에, 또는 종이쪽지로 컨닝 페이퍼를 만들었다. 사회가 어지러울 때는 대리 시험이란 부조리도 행해지고, 시험관과 공모하여 암암리 문제를 빼내는 폐해도 있었다. 이런 과거제도는 청말(淸末) 신교육제도가 시행되고, 더 이상 유학 경전을 통달한 인재가 필요치 않음으로써, 1904 년 마지막 시행되고 폐지되었다. 우리나라는 이보다 앞선 1894 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푸쯔먀오(夫子庙, 부자묘)의 남쪽에 주췌차오(朱雀桥, 주작교)를 건너면, 우이샹(烏衣巷,오의항)이란 골목이 있다. 옛 삼국시기 동오(東吳) 때 금위군(禁卫军)의 오의영(乌衣营)이 있던 자리로, 병사들이 입던 오의(烏衣)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說)도 있고, 남조(南朝) 동진(東晉) 때,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아이들이 검은 옷을 즐겨 입어 유래되었다는 설(說)도 있다.
이들 고관대작(高官大爵)은 주로 왕도(王導)와 사안(謝安)으로 대표되는 왕(王)씨와 사(謝)씨이다. 골목 안에는 이들의 기념관이 조성되어, 이들 가문에 관한 내력과 각종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입구 옆, 어디서 많이 본듯한, 힘 넘치는 필체의 시비(詩碑)가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쓴 유우석(劉禹錫)의 시(詩), '오의항(烏衣巷)'이다. '오의항(烏衣巷)'의 역사를 잘 말해주는 시(詩)이니 읽어 보자.
朱雀桥边野草花, (주작교변야초화) 주작교(朱雀橋) 변에는 들풀만 가득하고,
乌衣巷口夕阳斜。 (오의항구석양사) 오의항(乌衣巷) 입구엔 석양이 비스듬히 비치네.
旧时王谢堂前燕, (구시왕사당전연) 그 옛날 왕씨와 사씨 집을 오가던 제비가,
飞入寻常百姓家。 (비입심상백성가) 지금은 평범한 백성의 집에 날아 든다.
왕도(王導)와 사안(謝安)은 모두 동진(東晉)의 명재상으로 칭송 높은 자들이다. 왕도(王導, 276 ~339)의 자는 무홍(茂弘), 낭야(琅邪) 왕씨(王氏)의 중심 인물로 삼국시대를 통일한 위(魏)나라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서진(西晉)이 316 년 북방 민족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왕도(王導)는 다른 사대부들과 연합하여 사마예(司馬睿)를 옹립하고 동진(東晋)을 건국하였다.
왕도(王導)는 동진(東晉)이 건립된 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의동삼사(儀同三司), 시중(侍中), 사공(司空), 상서(尚書), 영중서감(領中書監) 등을 역임하고, 사촌인 왕돈(王敦 266 ~324)이 반란을 일으키자,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명제(明帝)와 성제(成帝)를 보필하여 강남(江南)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왕도(王導)의 자손들은 3 대에 걸쳐 재상(宰相)을 지냈다. 또한, 왕도(王導)는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에 조예가 깊었는데, 유명한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03 ~361)도 그와 같은 집안 출신이다. 왕희지(王羲之)는 회계(會稽, 현 折江省 绍兴)에 포석정과 같은 물길을 만들놓고 친구들을 초대하여 시를 읊으며 은거하였다는데, 이곳도 축소판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https://blog.naver.com/kjschina/80195768010)
그곳이 란팅(兰亭, 난정)이다. 란팅(兰亭, 난정)에서 왕희지(王羲之)와 풍류를 즐기며 은둔한 자 중의 하나가 사안(謝安)이다. 사안(謝安, 320 ~385)은 자는 안석(安石). 왕희지(王羲之)와 은둔 생활을 하다, 40 세가 넘어 정계 진출하여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 312 ~373)의 휘하에서 사마(司馬)로 활약하였고,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어서는, 제위(帝位)를 찬탈하려는 환온(桓溫)을 저지했다.
383 년 재상(宰相)일 때,
화북을 통일한 전진(前秦)의 부견(苻堅, 338 ~385)이 100 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자,
사안(謝安)은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이 되어
아우 사석(謝石),
형의 아들 사현(謝玄)과 함께 비수(底水)에서 부견(苻堅)을 격파하며 대승을 거두고, 여세를 몰아
사석(謝石)으로 하여금 낙양(洛陽)과 청주(靑州), 연주(兗州) 등을 수복하게 하여
황하(黃河) 이남의 땅을 되찾았다.
이 전쟁이 비수대전(淝水大戰)이다. 이 패배로 전진(前秦)은 멸망하였고, 화북지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후, 589 년 수(隋)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남조(南朝)와 북조(北朝)로 나누어 고착한 남북조시기(南北朝時期)가 되었다. 왕(王)과 사(謝)씨 가문의 친인척으로 가득했던 우이샹(烏衣巷, 오의항)은 지금 몇 십 m의 좁은 골목으로 축소되었고, 골목 한 쪽에 우물이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동진(東晋)의 우이샹(烏衣巷, 오의항)의 영화는 전란을 겪고 세월이 흘러, 당(唐)나라 때 이미 쇠락하였다. 당(唐)나라 재상(宰相)을 지내고, 백거이(白居易)와 쌍벽을 이루던 시인(詩人) 유우석(劉禹錫)이 이곳을 찾아 읊은 시(詩)가 앞의 '오의항(烏衣巷)'이다. 다시 읽으면 흥미롭게 이해될 것이다. 세월이 더 흘러, 명(明)나라 때의 친화이허(秦淮河, 진회하) 주변은 10 리가 넘는 상업거리로 변하였다.
상업거리에 유흥과 환락이 빠질 수 있겠는가? 휘황찬란한 기방도 없을 수 없다. 학궁(學宮)에서 공부하는 선비, 과거시험을 보러 온 선비, 주변 한량들, 모두 이 거리를 배회하며, 술 한잔하며 스트레스를 풀었으리라. 그 명성은 명말청초(明末淸初) 때까지 이어져, 이곳의 8 명의 유명한 기녀가 바로 '진회팔염(秦淮八艶)'이고, 그 중 한 명이 이향군(李香君)이다.
진회팔염(秦淮八艶)은 마상란(马湘兰, 1548 ~1604), 유여시(柳如是, 1618 ~1664; https://blog.naver.com/kjschina/220856068190), 고횡파(顾横波, 1619 ~1664), 변옥경(卞玉京, 1623 ~1665), 진원원(陳圓圓, 1623 ~1695; https://blog.naver.com/kjschina/220300335377), 동소완(董小宛, 1624 ~1651), 구백문(寇白门, 1624 ~ ? ), 이향군(李香君,1624 ~1653)을 말한다. 이들은 상당한 식견을 갖추고, 끝까지 정절을 지켰거나, 무너지는 나라를 위해 용기 있는 행동한 여장부로 유명하다.
이향군(李香君)이 살았던 리샹쥔구쥐(李香君故居, 이향군고거)에는 이들에 관해 전시하고 있다. 이향군(李香君)은 이향(李香)이라고도 하며, 호는 향선추(香扇坠)이다. 본래 쑤저우(苏州, 소주)에서 동림당(東林黨)으로 활동한 오씨(吴氏) 성을 가진 무관(武官)의 막내로 태어났으나, 간신 위충현(魏忠賢)에 의해 동림당(東林黨)이 몰락하며 집안도 같이 몰락하여, 8 살 때부터 타지를 전전하게 되었다.
* 좌측부터 마상란(马湘兰), 유여시(柳如是), 고횡파(顾横波), 변옥경(卞玉京).
그러다 이정려(李贞丽)의 양녀가 되면서, 이씨(李氏)로 바꾸어 기생이 되었고, 양어머니인 이정려(李贞丽)에게 음율, 시사, 악기 가르침을 받고, 노래를 달콤하게 잘하여 뭇 선비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16 세된 이향군(李香君)은 가난한 선비, 후방역(侯方域)을 보고 사랑에 빠졌는데, 후방역(侯方域)은 이향군(李香君)의 머리를 올려주며 부채를 사랑의 징표로 주었다.
* 좌측부터 이향군(李香君), 진원원(陳圓圓), 동소완(董小宛), 구백문(寇白门),
후방역(侯方域)과 행복한 생활을 보낸 것도 잠시. 후방역(侯方域)이 모함에 빠져 도망갔으나, 이향군(李香君)은 일편단심으로 그를 기다렸다. 그 사이 고관 한명이 첩 자리를 강요하자 이향군(李香君)은 머리를 벽에 부딪치며 자신의 의지를 보였는데, 이때 이향군(李香君)의 피가 후방역(侯方域)이 준 부채에 튀었다. 뒤에 이야기를 들은 후방역(侯方域)의 친구가 핏자국을 이용하여 복숭아꽃을 그려 주었다.
이 부채가 '도화선(桃花扇)'이고, 1699 년에 청(淸)나라 최고의 극작가, 공상임(孔尚任, 1648 ~1718)이 이를 주제로 극을 만들어, 이향군(李香君)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도화선(桃花扇)이 사랑이야기 같지만, 명(明)나라 멸망을 애도하며 쓴 작품으로 왕조 교체기에 지식인의 정치적 갈등을 표현하고, 주인공 이향군(李香君)은 올바른 애국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그렸다.
다른 '진회팔염(秦淮八艶)'에 대한 이야기는 또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나라 멸망 이야기가 너무 길었던 것 같다. 어쨌건, 원(元)나라의 쿠빌라이 칸은 문천상(文天祥)을 높이 평가하여 회유하려 노력했으나, 문천상(文天祥)으로부터 "충신은 두 주군을 섬기지 않는다."는 대답만 되풀이하여 들었고, 문천상(文天祥)은 3년간 옥살이 하다 46 세의 나이에 처형되었다.
그도 사람인데 어찌 편한 삶을 한번쯤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는 옥중 습기 찬 바닥에 누워 창살을 통해 하늘을 쳐다보며, 옛 성현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약해지는 마음을 물리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였고, 유명한 우국충정(憂國忠情)의 시(詩), '정기가(正氣歌)'를 남겼다.
정지(静池)에 나를 비추어 보며, '정기가(正氣歌)'의 마지막 구절을 되뇌어 본다.
顧此耿耿在, (고차경경재) 이 몸 돌아보니 맑은 기운 있어서 일 뿐,
仰視浮雲白。 (앙시부운백) 고개 들어 올려보니 구름은 희기만 하여라.
悠悠我心悲, (유유아심비) 아득하고도 아득하여 내 마음 슬프나,
蒼天曷有極。 (창천갈유극) 푸른 하늘 어찌 끝이 있겠는가?
哲人日已遠, (철인일기원) 훌륭한 이들 떠난지 이미 오래 건만,
典刑在夙昔。 (전형재숙석) 남겨진 모범은 여전하구나.
風檐展書讀, (풍첨전서독) 바람 부는 처마 밑에서 책을 펼쳐 읽노라니,
古道照顏色。 (길도조안색 옛 성현의 도리가 나의 얼굴 비추네.
하늘을 올려보니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