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吉)한가 흉(凶)한가를 먼저 점쳤었다. 무오 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기 전에 일찍이 친구에게 말하기를 ‘아무 해에는 반드시 사림(士林)의 화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화가 일어나자, 남쪽 고을로 귀양갔다가, 이때 마침 사면(赦免)되어 고양군(高陽郡)에서 어머니의 묘를 지켰다. 상기(喪期)가 끝나려 하자, 벽곡(辟穀)하며 말도 하지 않았다. 풍덕군(豐德郡)...
우 혹독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때 사람들이 무오 사화(戊午士禍)에는 이극돈(李克墩)이 수악(首惡)이라고 말했다. 선왕(先王)의 일 선왕은 세조를 가리킴. 김종직(金宗直)이 조의제문(弔義帝文)에 단종(端宗)을 의제(義帝)에 견주고 세조를 항우(項羽)에 비유했다고 한 일을 이름. 무오 사화(戊午士禍) 연산군 4년(1498)에 김일손 (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
8 연산군 4년에 일어난 사화(史禍), 즉 무오 사화(戊午士禍)를 말함.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 사류(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勳舊派)에 의하여 화를 입음. 갑자년의 화 갑자 사화를 말함. 1504 연산군 10년 성종(成宗)의 폐비 윤씨(尹氏), 즉 연산군의 생모가 폐비 사사된 경위 를 임사홍(任士洪)이 밀고하자, 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은 부...
마음에 분을 품고 시기를 보아 일어났는데, 무오 사화(戊午士禍)에 이 르러서는 유자광(柳子光)·성준(成俊) 등이 선비들의 죄를 얽어 만들어 깨끗한 의논을 하던 선비들의 목을 이어 살육되었으니, 이것은 귀와 눈으로 듣고 본 바입니다. 지금 원종이 말하기를, 성준(成俊) 이극돈(李克墩)의 잘못임. ‘대간이 인물 논박을 과중하게 하여 조정이 안정하지 못할...
)은 본시 음험(陰險)하여 불측한 사람이고 무오 사화(戊午士禍)도 모두 그가 꾸며낸 것이어서 조정의 사대부들이 이를 들춰내서 공박하려고 했지만, 불측한 참변이 있을까 두려 워서 감히 발론하지 못한 지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익대 공신(翊戴功臣)의 훈적(勳籍)을 삭제한다는 것은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자광이 살아있다면 군자·소인을 등용하고 물리치는 기미가...
공사(公事)를 보고서 판부(判付)하기를 ‘성종 때에 권 귀인이 양자라 칭하였다 하매, 더 가릴 길이 없으니, 그 노비는 내수사에 속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와서 대간이 그 불가함을 논하였는데 이는 대개 내수사는 임금이 둘 것이 아니요, 아랫사람과 곡직(曲直)을 가린다는 것이 또한 임금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림의 화[士林之禍] 무오 사화(戊午士禍).
수는 없지만, 그후에 간인(奸人) 유자광이 무오 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고, 폐조(廢朝)의 말년에 가서는 선류(善類)들을 모조리 섬멸하여 천기(天紀)를 무너뜨려 종사(宗社)가 거의 전복될 지경이 되었었으니, 말을 하면 통곡이 나올 지경입니다. 이는 전하께서 몸소 겪으신 일입니다. 이번 재변은 그때 기둥을 흔든 것과는 매우 다르나 이 또한 여기서 유래한 것이 ...
부득이 찬축해야겠습니다." 이극돈(李克墩) 무오 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킨 장본인.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언(求言)할 때에 또 말하는 자를 죄준다면 언로(言路)에 방해되지 않겠느냐?" 하였다. 영사 정광필이 아뢰기를, "신은 장순손의 말 을 듣지 못하였습니다만, 그가 모함하였다는 사실이 과연 적실한 것이라면 그를 중죄에 처한들 무엇이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말이 과연 당시 임금의 살벌(殺伐)하는 마음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대개 그의 사람됨이 흐리터분하게 주관이 없어 시비를 가리지 않 고서 곧 말한 것입니다." 하고, 영사 신용개가 아뢰기를, "노사신은 용렬한 사람이 아니고 재상의 도량이 있었으며, 무오 사화(戊午士禍) 때, 많은 사람이 살아나게 된 것은 노사신의 힘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만은 잘못하였습니다." 하였다.
. 그런데 우리 나라의 사기(士氣)는 처음 무오 사화(戊午士禍)에서 꺾였고 다시 갑자 사화(甲子士禍)에서 무너졌는 데, 오늘에 와서는 거의 다 남김없이 다 상실되었습니다. 근자에 있었던 요사스런 변(變)에 대해 의논을 주장한 자는 의당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를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아직도 화복을 두려워하여 서로 구차스럽게 그럭저럭 넘기기만...
무오 사화(戊午士禍)와 같 은 점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당시의 대간이 그 말을 듣고 발론하여, 양사(兩司)가 김희년을 합계(合啓)하였는데, 그 뒤에 김희년의 일이 오랜 원한에서 나온 말임을 자세히 들어 알고는 그 때문에 사피(辭避)하였었다. 직에 나아오게 되어서는 도리어 임복의 일을 논계하니, 시론(時論)이 이를 통쾌하게 여겼다.】
말씀드리고자 하니 전하께서는 들어 보소서. 무오 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면서부터 사기가 처음 꺾이기 시작, 갑자 사화(甲子士禍)에 이르러서는 모두 제거되어 한사람도 남은 선비가 없어 드디어 사기가 한번 크게 꺾이게 되었습니다. 기묘 연간에는 조광조(趙光祖)가 삼대(三代)의 정치에 뜻을 두어 《소학》의 도를 제창, 장차 예양(禮讓)의 기풍을 일으키려 했으나...
화가 중엽부터 일어났는데, 폐조(廢朝)의 무오 사화(戊午士禍)와 갑자 사화(甲子士禍)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종조(中宗朝)의 기묘 사화(己卯士禍)는 현인(賢人) 군자(君子)가 모조리 큰 죄를 당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사(邪)와 정(正)이 뒤섞이게 되었고 간사한 무리들이 득세하였는 데, 그들이 개인적으로 원한을 갚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묘의 여습(餘習)이라고 하였으므...
되었습니 다. 그때 나이 28세였습니다. 무오 사화(戊午士禍)를 당하여 윤필상이 없는 죄를 씌워 살해하였는데, 갑자 사화(甲子士禍) 때 화(禍)가 천양(泉壤)에까지 미쳤습니다. 같은 시대에 화를 입은 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현인(賢人)들은 모두 이미 역명(易名)의 은전(恩典)이 내렸는데도 이목(李穆)의 경우는 그의 후손(後孫)인 이기혁(李基赫)이 상언(上言)하여 증직(...
吏曹參判) 한평군(漢平君) 조익정(趙益貞)이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죽었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 받았고 시호(諡號)는 공숙공(恭肅公)이다. 5 대를 내려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풍안군(豐安君) 조흡(趙潝)이 인조(仁祖)를 도와 정사 공신(靖社功臣)으로 책훈(策勳)되었는데, 좌참찬(左參贊)을 추증 받았고 시호는 경목공(景穆公)이다. 3대를 내려와서는 바로 ...
사신은 논한다. 무오 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남으로부터 사관의 기록하는 것이 왕의 말 출납만을 쓸뿐이었는데, 반정 뒤로는 사람들이 불붙은 기름 속에서 살아나자 놀고 즐기는 데만 빠져 직무를 돌보지 않고 왕의 말마저도 기록하지 않다가, 여러 해를 지나고 나서야 사고(史稿)를 정리하니, 조정의 논의나 상벌 등의 일에 빠진 것이 많았다. 무오 사화(戊午史禍) 연산군 4년(1...
하사하라.’고 명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무오 사화(戊午史禍)를 겪은 뒤부터 사람이 다 죽어 없어지고 경학(經學)이 씻은 듯이 없어지더니, 반정 뒤에 학자들이 차츰 일어나게 되었다. 조광조(趙光祖)는 소시에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여 성리(性理)를 깊이 연구하고 사문(斯文)을 진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학자들이 추대하여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자랑하였다. 또 희안의 후원을 믿고 점점 정사에 간여하면서 더욱 흉독을 부리므로 당시 사람들은 간적(奸賊)의 괴수로 지목하였다. 마침내 귀양가서 죽고, 자손들도 뿔뿔이 흩어져 귀양가니, 사람들은 모두 ‘보복이 빠르다’ 하였으니, 천도를 어찌 속일 수 있으랴!. 권귀(權貴) 권세가 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무오년 1498 연산군 4년. 무오 사화(戊午史禍)를 가리킨다.
錄功)되었고, 부원군(府院君)에 이르렀다. 무오 사화(戊午史禍)는 이 사람이 일으킨 것이며, 갑 자 사화(甲子士禍) 때에 사림(士林)이 다 죽었는데도 부족하게 여겨, 송일(宋軼)의 상소에 따라 또 일망타진하려 하였으나, 김세필(金世弼)이 그 간사한 정상을 박원종(朴元宗)에게 애써 알렸으므로, 마침내 귀양가서 죽었다. 그 아들 유진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말감(末...
미 정하여졌거늘 유자광(柳子光)에게 빌붙어 무오 사화(戊午史禍)를 빚어냈다. 이는 사람들이 다 같이 아는 바인데도 쫓겨나지 않고 도리어 현양(顯揚)되어 높은 자리에 올랐으므로 식자들이 한하였다. 기묘 사화(己卯士禍)도 실은 남곤과 심정(沈貞)의 무리가 현혹(眩惑)시키는 말을 얽어내어 임금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데 연유한 것이며 마침내는 임금으로 하여금 남...
풍자한 것이라고 연산군에 고자질함으로써 , 무오 사화(戊午史禍)를 일으켰다. 결과 김종직은 부관 참시(剖棺斬屍)되고 그 제자들은 죽거나 귀양갔다. 이종익(李宗翼) 상소의 뜻은 비록 유자광이 간사한 사람이지만 조의제문 문제를 발표한 것은 세조의 두터운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의 정당한 행위임을 강조한 것이다. 굴원(屈原)은 잘못 멱라수(汨羅水)에서 죽었고, 굴원은...
그러나 그때 양성된 기개와 절의는 한 번은 무오 사화(戊午史禍)에서 두 번째로는 갑자 사화(甲子士禍)에서 손상되었습니다. 선비들은 그 궤적(軌跡)에 징험, 점차 쇠퇴해져 오늘날 유약한 것이 관습 이 되었고, 부형이나 사우(師友)의 가르침도 모두 이로움만 좇고 해로운 것은 피하려는 계책뿐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이 말한 ‘언행이 고준(高峻)하고 대담하다....
모함하여 해치려 하였습니다. 연산군 때는 무오 사화(戊午史禍)를 일으켜 사람을 도륙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 때는 성희안(成希顔)과의 인연으로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무령 부원군(武靈府院君)으로 봉해졌다가, 이듬해 대간의 탄핵으로 훈작을 모두 박탈당하고 유배를 당하였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합좌(合坐) 전 관원이 참여하는 회합. 하니, 전교하였다. "...
유림(儒林) 사이에서 이름이 있었습니다. 무오 사화(戊午史禍) 때에 폐왕(廢王)이 삭탈 관직(削奪官職)하고 부관 참시(剖棺斬屍)하였는데, 그 뒤로 자손이 쇠약하여 한 사람도 급제하지 못하고 지금도 벼슬사는 사람이 없으니 녹용(錄用)하소서." 하고, 유희춘이 아뢰기를 , "김종직은 사리에 근사한 문장으로 사문(斯文)을 진작시킨 공로도 아울러 있어서 사림(士林)이 동...
것에 대해 복구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의논드리니, 상이 결단하여 어떤 것은 그대로 감하고, 어떤 것은 복구하게 하였다. 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아뢰기를, "안동(安東) 사람 이종준(李宗準)은 무오 사화(戊午史禍) 때 죽었습니다. 그 뒤에 신원이 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추증을 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흠전(欠典)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증직하라고 하였다.
일이 흡사 그릇을 다 만들었다가 깨뜨리는 것과 같이 되었으니 정말 애석합니다." 하였다. 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아뢰기를, "안동(安東) 사람인 고(故) 교리 이종준(李宗準)은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무오 사화(戊午史禍) 때 죽었는데, 뒤에 신리(伸理)되기는 했어도 아직까지 추증(追贈)되지 않았으니, 참으로 흠전(欠典)이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증직하도록 명하였다.
사(故事)에 비유하여 풍자한 것인데, 뒤에 무오 사화(戊午史禍)의 근원이 되었음. 무오년 1498 연산군 4년.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 대각(臺閣)의 신하도 어찌 분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여러 날 동안 옆에서 듣고도 죄주기를 청하는 일이 없었으니, 신은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 "네 소는 대개 분하고 미워하는 데에서 나왔다. 본...
)를 유자광(柳子光)은 연산군(燕山君) 때 무오 사화(戊午史禍)를 일으켰던 장본인(張本人). 김종직(金宗直)의 조의 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무오 사화를 일으켜,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고 쫓겨났음. 이사(李斯)와 같은 분서(焚書)의 변이 이사(李斯)는 순경(荀卿)의 제자로, 진 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평정하자 승상(丞相)이 되었는데, 진...
보궐(補闕)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빠진 것을 별지(別紙)에 추보(追補)하는 것이니 ‘고친다[改]’는 한 글자에 관해 서는 논할 것이 못됩니다. 그런데 무오 사화(戊午史禍)와 진(秦)나라 때의 분서(焚書)를 또 무엇 때문에 성세(聖世)에 이러한 지나친 우려를 한단 말입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대제학(大提學)의 소장(疏章)에 대한 비답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