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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깊은 바다, 사명대사(四溟大師) . 엔니円耳えんに

VIS VITALIS 2020. 3. 31. 11:39


자비의 깊은 바다, 사명대사(四溟大師)


바다,

한 물결의 생이, 한 너울의 삶이 서로 출렁이는 그 바다를 건너는 그는 스님이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에서 의승(義僧)들을 지휘한 의승장이었으며 백성의 울음을 함께 했던 조선의 스님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불리는 420여 년전 전쟁은 7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한 백성의 피눈물과 만백성의 죽엄이 섞여 우는 거대한 통곡의 조선이었다.​

임진 전란 그 통곡의 불바다를 연민과 사랑으로 품어 출렁인 자비의 깊은 바다, 사람들은 그 바다를 사명대사(四溟大師)라고 불렀다.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인 그 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선봉장으로 하는 5만 왜군이 침공했다.​

이후 15만 후속 부대까지 합세한 20만 대군은 궁을 버린 선조의 피난길을 쫓아 함경도까지 진격했다.

사명대사가 왜병을 처음 맞이한 곳은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였다.

유점사에 침입한 왜구들은 사찰의 불상과 불구(佛具)들을 노략질했다.

왜장은 목숨을 희롱하며 칼 끝에 실었다.

칼날에 짓눌린 채 맞이한 죽고사는 생사의 위기를 구한 것은 더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라 진심 담긴 부처의 마음인 자비의 힘이었다.

비록 적이라도 흉악한 살생을 막아 그들을 지옥에서 구하려했던 사명대사의 진실에 왜장이 굴복한 것은 사명대사의 그 자비심이었다.

하지만 참혹한 전란은 지옥 속으로 더 깊이 조선을 끌어들였다.

선조는 피난지에서 죄기서(罪己書)를 작성했다.

전란의 고통, 그 죄인이 자신임을 시인한 반성문이었고 백성을 향한 호소문이기도 했다.


선조는 자신의 부덕함을 시인하고 나라를 위해 힘을 보태줄 것을 호소하는 죄기서 방문을 파발에 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묘향산(妙香山)을 향해 급히 파발을 놓았다.

그 이유는 묘향산의 서산대사 휴정(休靜)을 팔도 승군들을 지휘할 팔도도총섭으로 임명한다는 파발이었다.


이 파발을 받은 서산대사 휴정은 팔도에 승군 지원 격문을 돌렸다.

이에 앞서 사명대사는 이미 승병들을 결집 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의승군장의 운명이 시작되 그의 본명은 임응규(任應奎)였다.


그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속세의 이름 임응규는 어릴 적 할아버지한테 한학을 배웠다.

그리고 황희(黃喜)의 5세손인 황여헌(黃汝獻)을 스승삼아 유학 공부를 이어 나갔다.


그런 그는 문득 유학을 접고 불변의 지혜를 찾아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발했다.

신묵화상(信默和尙)을 은사로 삼아 삭발수계한 그의 법명은 유정(惟政), 법호는 사명(四溟)이었다.


15세에 출가한 사명은 18살 나던 해 봉은사(奉恩寺)에서 열린 승과 시험에 급제한다.

서산대사는 승과 시험 부활 첫 해, 그리고 사명은 4회 때 급제했던 제자였다.

그것이 사명이 불제자로 맺어진 서산과의 인연이라면 또다른 인연이었고, 하나는 유학자로 맺어진 허균(許筠)과의 인연이다.


허균은 사명대사의 비명(碑銘)을 쓴 인물로 그 내용들 대개는 허균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사명의 모습이다.

합천 해인사 홍제암 근처의 비석들 속에 허균이 비문을 바친 사명대사의 석장비가 자리해 있다.


사명대사 유정과 교산 허균, 그 둘의 관계는 불자(佛者)와 유자(儒者)의 관계를 넘어선 형제의 인연이었다.

사명집에 서문을 쓴 허균의 문장들은 사명대사의 모습을 그린 유일한 초상화의 다름 아니다.


사명은 허균과의 첫 인연처였던 봉은사 시절 유학자들과 깊은 교류를 하며 허균과 우애를 다졌다.

유학자들과 교류는 사명에게 있어 종교의 구분을 넘어 보다 큰 세계를 여는 기회였다.


18세에 승과에 합격했던 사명은 불가의 중절이 되어 30살에 봉은사 주지로 추대됐다.

하지만 그 당시 직지사 주지였던 사명은 사양했다.

그는 시 한 수에 '화려한 생활에 파묻인 나그네 옷에 먼지만 가득하다'고 고백했다.

사명은 선종 수행이 그리웠다.


봉은사 주지를 사양한 사명은 그해 서산을 찾았다.

사명의 선종 수행을 거듭 재촉한 이는 서산이었다.

유학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시문에 깊이 빠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서산대사는 선종 수행의 핵심을 추려 쓴 저서 선가귀감(禪家龜鑑)에도 유자들의 시문에 빠짐을 충고하고 있다.


사명은 서산대사 문하에 있는 동안 스승의 선가귀감 발문을 썼다.

그리고 다시 스승 서산과 하직하고 구름처럼 물처럼 길 위를 흘러다니는 운(雲)수행을 통해 선(禪) 수행에 정진했다.


길 위의 걸음 속에 그 운수행이 닿은 어느 한 자리인 옥천산 산중 암자 상동암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사명은 철저한 수행 정진을 통해 깨달은 뜻을 제자들에게 전했다.


사명의 운수행 10여 년간 사명의 곁에서 그 결음 수행을 지켜주었던 호신불(護身佛)은 현재 포항 대성사(大聖寺)에 봉안되어 있다.

420여 년을 거슬러 만나는 불상과 묵서 한 장은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 한다는 사명의 발원장이다.

거기 적힌 만력 4년은 41살 사명이 운수행을 하던 해다.


강원도 고성 건봉사(乾鳳寺)는 사명대사가 운수행 할때 지녔던 호신불을 처음 봉헌했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서 탁본 작업이 한창인 비석 조각은 건봉사 사명대사 기적비의 조각이다.


복원된 비문을 따라가면 사명대사가 건봉사가 승병군을 처음 모집한 장소라는 것과 만나게 된다.

호심불을 이곳에 봉안하고 승군을 결집시킨 사명대사의 결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 계율을 지켜야 하는 승려로서 어떻게 전장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

건봉사 기적비는 흉악한 무리로부터 백성을 구호하는 그 중생 구호를 위해 세상에 나온 부처님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사명대사의 결의를 전한다.


스승 서산대사의 격문에 눈물을 뿌리며 사명대사와 승군은 서산대사가 승군들을 집결시킨 순안으로 향했다.

이미 왜군들이 지나간 길은 핏물의 길이었다.

사명대사는 그 길 한복판에서 통곡했다.


평양성 전투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물론 일본 역시도 물러설 수 없는 전투였다.

조명 연합군과 사명의 의승병은 많은 전과를 올리며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그 위세에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결국 한양으로 퇴각했다.


사명당 기적비에 기록된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 전투에 대한 기록에는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 2,000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고 전한다.

평양성 전투 이후 중부의 수락사, 그리고 남부 의령까지 사명과 승군은 전투를 이어갔다.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승려 신분의 승군들, 불살생 계율을 지켜야 하는 승려들, 그들이 전장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밀양 표충사(表忠寺)에서는 백성의 고통을 좌시하지 않았던 사명과 승군들을 기려 불교식 다례와 유교식 제사를 함께 모신다.

표충사는 사명대사의 사당이 표충사를 옮겨와 그 이름을 다른 사찰이다.

그런 탓에 표충사는 사명대사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각판이다.


분충서난록 각판은 사명의 5대 법손 남붕(南鵬) 스님이 표충사에서 판각한 목판으로 사명대사와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의 첫 만남을 기록한 탐정기가 전해진다.


후퇴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군사를 주둔 시켰던 울산 서생포에는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쌓았던 성터가 남아 있다.

세월에 무너진 왜성에는 적진을 탐정했던 사명의 발길이 바람결 마다 살아 있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만나면서 사명은 법호를 송운으로 고쳐썼다.

서생포 회담 시기는 명과 일본이 강화회담을 하던 때였다.

종군승 닛신의 입으로 듣는 명과 일본의 강화조건은 명황제 딸을 후비로 삼고 조선 땅을 나누는 실현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거기에 조선 왕자를 보내 영주로 삼고 조선 대신들 몇 명을 인질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강화 협상의 속내를 사명을 알아냈다.

가토 기요마사는 거침없는 사명의 당당함에 감동해 그를 청했다.

너희것이 아니면 터럭 하나라도 가져 가지 말라는 사명의 호통에 가토 기요마사는 사명을 우러러 보았다.


사명의 그 일화는 일본에 전해져 조선국 송운대사로 회자됐다.

가토 기요마사의 동상이 서 있는 구마모토시 혼묘지에는 서생포 회담에 참석했던 종군승 닛신이 창건한 가토 기요마사의 원청이다.


혼묘지 본당은 가토 기요마사의 무덤위에 세워졌고 그를 기리는 예불이 400년 이상 이어졌다.

닛신은 서생포 회담 때 사명에게 법어를 청했었다.

조선국 대선사 북해송운은 그 청을 받아 일본국 대사문 진대사에게 불법을 담는 불도로 교유하자는 내용을 전한다.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전투는 멈췄다.

하지만 영남 도총섭 임무를 맡은 사명은 왜군의 재침을 대비하고 있었다.


대구 동화사에는 '비사리구시'라 불리는 나무 밥통이 남아 있는데 사명과 승군들은 이 비사리구시에 밥을 나누며 왜군의 재침에 대비했다.

동화사는 영남지역 승군 본부였다.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의 취지는 스님들의 먹물 승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남취영아문은 영남지역 승군의 본부를 말한다.


닛신은 영남 도총섭 사명에게 일본의 정보를 전해왔다.

사명은 그 일을 상소로 올렸다.

분충서난록은 그 기록을 이렇게 적고 있다.

"상소를 올렸으나 조정의 신하들은 믿지 않으니 신(臣)은 길로 마음이 아프고 절박한 심정입니다."


서생포 회담에서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 결렬을 예견했던 사명과 달리 조정의 생각은 달랐다.

조선은 일본과의 강화를 위해 황신(黃愼)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황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을 만나지 못했다.

이후 명나라 사신을 만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노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 전쟁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도요토시 히데요시는 재침 명령을 내리면서 조선 남부를 철저히 쓸어버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전라도를 철저히 살육하라는 지시 내용이 들어 있다.


1597년 정유년 1월, 그 명을 따르는 15만이 조선을 재침했다.

정유재란의 목적은 살육이었다.

경상남도 영산 지방에 붙은 영산방을 보면 관리는 찾아 죽이고 관리의 처자 무리도 죽이고 죄를 용서 받고도 돌아오지 않는 자도 죽이라는 것이었다.

정유재란은 전쟁이 아니라 처참한 살육전이었다.


왜군을 따라 온 왜승 게이넨는 8개월 똥안 전장에서 목격한 일들을 기록했다.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 매 끌고 가는데 잘 걷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지옥의 아방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여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


제목을 조선인 일기라는 게이넨의 정유재란 8개월 간의 기록 속 문장들은 조선인들의 통곡 소리로 가득하다.

조선의 땅은 조선의 쌀과 함께 썩고 바람은 조선의 울음과 함께 흐느껴 울며 풀들은 조선의 피로 자랐다.


임진, 정유전란은 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의 하나였다.

사망자만 대략 50~80만으로 보고 있는데 당시 조선 인구는 약1천 만명으로 그렇게 보면 조선 인구의 약 7%가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를 한국 전쟁과 비교해 볼때 3년 동안 현대전을 치른 이후 약 250만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임진왜란이 재래전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 수 있다.


임진정유 7년 전쟁의 처참함은 당시 인구 80만명에 이르는 엄청난 사망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적의 신체 일부를 전과로 인정하는 잔인함 때문이었다.

사살한 적의 코로 전투 성과를 보상하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은 조선을 참혹한 전란 속으로 몰아 넣었다.


군과 민을 가리지 않는 살인의 전투, 그렇게 베어 낸 코는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보내 숫자를 확인하는 영수증을 받았다.

전라도 김제에서 베어 낸 코 3,369개 라는 영수증이 지금도 전해지는데, 하지만 그것은 한 부대에서 행해진 전과에 불과하다.


일본 쿄토에는 코를 묻었다는 비총(鼻塚)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분명 조선인 코를 묻었지만 코가 아닌 귀를 묻어 이총(耳塚)이 되어 있다.

그 비총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도요쿠니 신사가 굽어보고 있다.


정유재란은 도요토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바로 알려지지 않았다.

반대 세력과 조선에 그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뱃속을 소금으로 채운 그는 의자에서 절여졌다.

정유재란 때 포로로 끌려 온 강항(姜沆)은 비총에 바치는 제문으로 그를 단죄했다.


종전 5년 만에 쓰시마 도주 쇼 요시토시는 거듭 화친을 요청해 왔다.

하지만 조정 대신 누구도 사신행을 거부했다.

유일한 해결책, 거기에 사명(四溟)이 있었다.


학자와 군신들이 바다를 건너는 사명의 무사를 기원하며 건네 온 수많은 전별시(餞別詩)가 있었는데, 그 중에 무명시(無名詩)도 있었다.

나라의 명을 받아 원수의 땅으로 향하는 마음, 사명은 그 심사를 시로 읊었다.


"몸 굽히는 것은 내 뜻이 아니건만

어찌하여 머리 숙여

원수의 집에 들어가는가"


공식정인 사신이 아니었던 사명은 그러나 조선 조정은 사명의 외교 능력을 믿고 있었다.

사명은 임진왜란 때 일본과 회담한 조선 최초의 스님이었다.

일본 대마도 세이잔지에 여장을 푼 사명은 쇼 요시토시에게 교역을 허락하고 국법을 어기지 말라는 계유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사명은 스스로의 근심을 달리하고 있었다.

죽장 집고 맞받는 해풍같은 근심, 사명은 그 심사를 또 시 속에 담았다.

"청컨대 동해수를 저울로 달아

나의 깊은 근심과 견주어 보구려"


쓰시마 도주에게 조정의 뜻을 전한 것으로 사명은 임무를 마쳤다.

하지만 일본 땅을 밟은 또다른 목적은 강제로 끌려온 조선 포로들의 귀국이었다.

조선 포로의 재환, 사명은 그 목적을 위해 스스로 원수의 집에 들어온 것이다.


뱃길을 이용해 한 달 여만에 교토에 도착한 사명 일행은 혼포지本法寺 ほんぽうじ에 머물렀다.

사명 일행의 숙소 혼포지는 닛신이 주선한 것이었다.

사명 일행은 교토를 떠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사명은 팔월 한 여름에 조선을 떠나 왔다.

그리고 그 여정은 어느 새 12월 섣달 그믐을 맞고 있었다.


쿄토에 도착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면담을 위한 기다림은 길어지고 있었다.

사명은 초조하고 답답한 날들을 견뎠다.

그리고 내려 놓을 수 없는 태산 같은 사명을 짊어진 채 일본 불교계의 영향력 있는 승려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선고승으로 존경받았던 사명의 자취는 이곳 코쇼우지에도 남아 있다.

코쇼우지 興聖寺こうしょうじ興正寺(こうしょうじ)창건 주 엔虚応円耳 こおう-えんに엔지는 사명의 명성을 듣고 혼포지에 머물고 있던 사명을 찾아와 불법을 청했었다.

그리고 사명의 법문에 감동해 제자되기를 청했다.

사명은 그런 엔円耳에게 법고와 자(字)를 내렸다.


사명이 엔円耳에게 친필로 내린 자(字)는 허응(虛應), 법고는 무염(無染)이었다.

모든 중생을 뜨거운 지옥불에서 구제한다는 관음보살의 서원이 담겨진 유묵이었다.

화상은 이후 달마(達磨)를 종주로 하는 임제종(臨濟宗)으로 개종하여 이곳 코쇼우지興聖寺こうしょうじ를 창건했다.

 

코쇼우지興聖寺こうしょうじ는 송운松雲 사명과 엔円耳와의 깊은 인연 탓에 사명의 짙은 채취가 배여있다. 때문에 사명대사의 자취를 쫓아 코쇼우지를 방문한 성파 스님과 법기 스님은 사명대사의 묵적과 마주해 감회가 남다르다.

400여 년전 인연,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은 코쇼우지興聖寺こうしょうじ에서 사명대사를 만난다. 복잡한 세상사에 10년이나 늦게 만난 제자, 그 인연에 거칠 것 없이 바다를 건너온 갈매기, 사명은 선종의 한 뿌리를 그렇게 일본에 내렸다.

코쇼우지興聖寺こうしょうじ에는 사제지간을 맺은 엔 円耳와 송운松雲 사명의 귀한 자취가 남아 있다.

두루마리 문서로 보관되어 있는 이 묵적은 엔 円耳가 묻고 사명대사가 답한 직문직서를 십개 항목으로 기록한 자순불법록(諮詢佛法錄)이다.

"부처는 무엇인가?"

가 물었다.

사명이 답하기를 "마음이다."

가 사명의 법문을 듣고 기록한 법문 '자순불법록'은 비록 사명대사의 법문을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글로써나마 사명대사의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사명대사는 법문을 통해 일본 승려와 사제 인연을 맺고 시문을 통해 일본 고승들과 깊은 교류를 이어갔다.

400년 전 선종으로 개종한 코쇼우지는 엔와 사명이 맺은 동쪽 끝의 불법 인연은 달마를 종주로 삼은 코쇼우지 선가의 수행으로 이어져 매년 10월이면 달마법회를 열고 있다.

쇼코쿠지相國寺 相国寺(しょうこくじ)는 임제종 총 본산의 거대 사찰이다.

1605년 2월 말, 사명대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기 전 이곳에서 열린 녹원원 법회에 참석한다.

사명을 법회에 초대한 사람은 쇼코쿠지 주지인 사이쇼 죠타이였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 자문을 맡고 있었다.

호코지는 쇼코쿠지 본찰과 담장을 이은 또다른 절이다.

이곳에서 열린 녹원원 법회는 사명대사를 초청한 대규모 시회였다.

사명은 선시를 통해 그들에게 자비 정신을 일깨웠다.
종교적인 양심에 호소한 사명에게 일본 고승들은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사이쇼 죠타이가 배석한 가운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만남은 조선 조정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명의 조선 포로 귀환은 일본 절대 권력을 상대한 강력한 요구였다.

왕명 없이도 신념으로 이루고자 했던 조선 포로 귀환은 이루어졌고, 사명은 동해 바닷물보다 더 무거운 근심을 내려놓았다.

사명은 1605년 3월 27일, 일본을 떠났다.

그 해 5월, 사명은 1,390여 명의 조선인 포로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것은 스승 서산대사의 유훈이었고 자신의 신념대로 행한 자비 보살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걸음을 재촉한 곳은 서산대사가 1년 전 입적한 후 세운 영탑과 마주했다.

스승의 입적 소식에 묘향산으로 향한 사명은 도중에 어명을 받고 바다를 건너야 했다.

산중 수행을 재촉하던, 옛 조사들의 선기를 이어야 한다던 노승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던 그 스승의 말을 걸음에 얹으며 병든 노구를 이끌고 해인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 외교 고문 사이쇼 죠타이에게 포로 송환을 재촉하는 편지를 썼다.

사명이 바다를 건넌 지 2년 후 조정에서는 그 명칭을 회답 겸 세환사로 한 공식 사절단이 일본에 파견됐다.

그것은 사명이 열어놓은 문이었고 회답 겸 세환사와 함께 조선인 포로 1,400명이 귀환했다.

한 평생 형제우의를 쌓았던 허균은 비문에 사명의 마지막 모습을 먹물에 묻여 기록했다.

그날은 1610년 10월 12일이었다.

법랍 55, 세수는 67살이었다.

해인사 골짜기의 이름 없는 한 기의 무덤에서 사명대사의 실체없는 모습을 맞이한다.

사명대사의 시호는 자통홍제(慈通弘濟)다.

세상을 구한 것이 자(慈)요, 선교를 아우름이 통(通), 널리 중생을 구제한 것이 홍제(弘濟)다.

하지만 이 시호를 왕이 내린 시호가 아니다.

그래서 백성이 지어 한 떨기 시호의 꽃을 바쳤다.

허균은 비문을 짓기 전 사명의 시호를 지었다.

사사로이 지은 사호로서 왕이 내린 시호가 아닌 백성이 바친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가 그것이다.

어리석은 생각에 구름과 솔에 누웠다는 사해 송운 노스님 사명은 스스로 송운이라 호를 삼으니 푸르른 솔과 흰 구름이 대사와 더불었다.

그리고 스스로 사명이라 지으니 스님은 세상의 큰 바다였다.

전란의 고비에서 백성을 구하고 지옥불 속에서 한 송이 연꽃을 피운 67살, 그 한 생을 넘어 깊고 깊은 자비의 푸른 바다를 건너는 저 노승은 누구인가?


写真・図版



松雲(しょううん)大師・惟政(いせい)(ユジョン、1544~1610)


虚応円耳(読み)こおう えんに

虚応円耳 こおう-えんに

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の解説

1559-1619 織豊-江戸時代前期の僧。

永禄(えいろく)2年生まれ。京都の人。京都の日蓮宗妙満寺の日重にまなび,京都に大応寺をひらく。臨済(りんざい)宗に転じ,慶長8年興聖寺を創建。元和(げんな)元年上野(こうずけ)(群馬県)長楽寺の天海から葉上(ようじょう)流の天台密教をつたえられた。元和5年4月19日死去。61歳。俗姓は斎藤。別号に無染。著作に「心経円耳註」な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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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서림 엣센스 일한사전






엔니가 부처의 가르침에 대해 사명대사의 의견을 묻는 글 <자순불법록(諮詢佛法錄)>은 고쇼지를 창건한 엔니가 선종의 기본 개념과 임제종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10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정리한 글이다. 엔니는 자신이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사명대사에게 이 글을 보이고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그는 다행히 만리길을 가지 않고 이곳에 앉아서 자신이 속한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사명대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며 기쁨과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다.

출처 : 제주불교신문(http://www.jejubulgyo.com)


[좌] 일본 엔니로젠(円耳了然) 스님에게 준 글과 도호 사명대사는 엔니로젠에게 허응이라는 도호를 지어주고 두 글자를 크게 썼다. 엔니를 사명대사에게 소개한 난젠지(南禪寺)장로 센소겐소(1537-1611)는 조선과 일본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마도의 외교승이었다. 엔니와 겐소는 같은 임제종 승려였기 때문에 엔니는 겐소의 소개로 자연스럽게 사명대사와 교류할 수 있었다. [우] 고려말 문신 유숙의 시 <벽란도>의 운율을 채운한 싯귀 고려말 문신 유숙(柳淑,1324-1368)의 시 <벽란도>의 운율(詩韻)을 빌어 임진왜란부터 강화회담 참가까지 10여년 간의 감회를 적은 것으로 소임을 미치면 미련없이 산중선방의 수행자 신분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뚜렷하다





本法寺(ほんぽうじ)は、京都府京都市上京区にある、日蓮宗の本山(由緒寺院)。山号は叡昌山。塔頭が三院ある(尊陽院、教行院、教蔵院)。

概要[編集]

法華行者として、強い信念をもつ日親は、1439年(永享11年)足利義教の屋敷へ赴き、庭中へ直訴し諌暁を図る。足利義教に「世の中が乱れているのは法華経を信仰していないから」と説いたのである。驚いた幕府は諌暁を禁止する。それでも日親は諦めることなく、身命を賭けた諌暁書「立正治国論」を著したため怒りに触れ、寺を焼かれ投獄される。1441年(嘉吉元年)赤松満祐の謀反で足利義教が暗殺されたことで日親は赦免される。赦免後、獄中で知り合った本阿弥清信帰依を受け、後に本阿弥家の菩提寺となる。1463年(寛正3年)地蔵ヶ原にて、焼いた鍋を頭に被せる酷刑を受け、後に「鍋かぶり日親」と称されている。桃山時代の絵師長谷川等伯は本法寺10世・日通と交友があり、塔頭教行院を宿としていた。このため、当寺には等伯の作品やゆかりの品が多数伝来している。現住は96世瀬川日照貫首(柏市妙照寺より晋山)。親師法縁縁頭寺。

歴史[編集]

本法寺は寺伝によれば、1436年(永享8年)日親本阿弥清信の帰依を得て創建[1]。当初は東洞院綾小路(現・京都市下京区)にあった[2]。前述のとおり、日親は1440年(永享12年)足利義教の怒りを買い投獄されたが、翌年赦免された。日親は1463年(寛正3年)にも投獄され、寺は破却されたが、翌1464年(寛正4年)赦免され、寺は三条万里小路(さんじょうまでのこうじ、現在の中京区三条柳馬場)に再建された[3]。1536年(天文5年)本法寺は洛中の他の法華系寺院とともに天文法華の乱で焼失し、堺に避難した。1542年(天文11年)後奈良天皇は、法華宗帰洛の綸旨を下し、本法寺は一条堀川に再建された。1587年(天正15年)豊臣秀吉の命により、現在の地に移転している。1788年(天明8年)天明の大火により焼失したが、その後再建された。

伽藍[編集]

  • 仁王門
  • 本堂 - 1797年(寛政9年) 本阿弥光悦筆の扁額がある。
  • 多宝塔 - 寛政年間建立
  • 開山堂
  • 鐘楼
  • 経蔵 - 1588年(天正16年)
  • 庫裏
  • 書院
  • 摩利支尊天堂
  • 塔頭 - 元は34院あったとされる。幕末頃の文久3年(1863年)時点では蓮光院、興徳院、真蔵院明治時代初期に綴喜郡へ移転し現在まで存続)、本養院、十乗院、興造院、執行院、大雲院、興雲院、玉樹院、寿量院、法昌院、玉昌院、信教院、教学院等の17院が確認できる。

庭園[編集]

文化財[編集]

重要文化財[編集]

  • 長谷川等伯関係資料
    • 絹本著色日堯像(長谷川信春(等伯)筆)
    • 絹本著色日通像(長谷川等伯筆)
    • 紙本墨画妙法尼像(長谷川等伯筆)
    • 紙本著色仏涅槃図(長谷川等伯筆)
    • 等伯画説(日通筆)
    • 附:日通書状
    • 附:法華論要文(日蓮筆)
    • 附:本尊曼荼羅(日親筆)
  • 絹本著色日親像 伝狩野正信筆 - 2017年度指定[4][5]
  • 紙本金地著色唐獅子図 四曲屏風一隻[6][7]
  • 金銅宝塔 応安三年(1370年)銘
  • 紙本墨画文殊寒山拾得像[8] 3幅(文殊:啓牧筆、寒山拾得:啓孫筆)
  • 絹本著色蓮花図(伝・銭舜挙筆)
  • 絹本著色群介図
  • 紫紙金字法華経(開結共)10巻
    • 附:花唐草文螺鈿経箱
    • 附:正月十三日本阿弥光悦寄進状
  • 法華題目抄(本阿弥光悦筆)
  • 如説修行抄(本阿弥光悦筆)

典拠:2000年までに指定の国宝・重要文化財については、『国宝・重要文化財大全 別巻』(所有者別総合目録・名称総索引・統計資料)(毎日新聞社、2000)による。

名勝(国指定)[編集]

  • 本法寺庭園

京都府指定有形文化財[編集]

  • 本堂
  • 開山堂
  • 多宝塔
  • 仁王門
  • 鐘楼
  • 経蔵
  • 庫裏
  • 書院
  • 大玄関
  • 唐門
  • 宝蔵
  • 石橋
  • 棟札十三枚

京都市指定有形文化財[編集]

  • 紙本金地著色唐獅子図四曲屏風(狩野山楽筆)※2019年度に国の重要文化財に指定見込み。
  • 絹本著色日親上人像(狩野正信筆)
  • 紙本墨画十六羅漢図(狩野元信筆)

旧末寺[編集]

日蓮宗は昭和16年に本末を解体したため、現在では、旧本山、旧末寺と呼びならわしている。

  • 叡昌山尊陽院(京都市上京区本法寺前町)塔頭
  • 叡昌山教行院(京都市上京区本法寺前町)塔頭
  • 妙光山教蔵院(京都市上京区本法寺前町)塔頭
  • 福昌山本教寺(京都市伏見区東大手町)
  • 大虚山光悦寺(京都市北区鷹峰光悦町)
  • 鳥辺山本寿寺(京都市東山区五条橋東)
  • 真整山真蔵院(京都府綴喜郡井手町大字多賀小字西北河原)旧塔頭
  • 一翁山妙感寺(犬山市大字犬山字山寺)
  • 龍運山妙海寺(犬山市大字犬山字東古券)
    • 妙海寺末:一雨山久昌寺(各務原市前渡西町)
  • 本覚山正法寺(大阪市中央区中寺)
    • 正法寺末:妙見山知足寺(茨木市宿久庄)
  • 宝樹山宗林寺(大阪市天王寺区上本町)
  • 昌林山一乗寺(高槻市梶原)
    • 一乗寺末:昌験山報恩寺(加西市玉丘町)
  • 昌信山経王寺(高槻市塚原)
  • 大法山広宣寺(高槻市氷室町)
  • 遥宝山本成寺(堺市堺区寺地町東)
  • 広宣山妙本寺(大阪府三島郡島本町広瀬)
  • 法光山本泉寺(神戸市灘区王子町)
  • 真如山久遠成寺(加東市掎鹿谷)
  • 護法山浄光寺(加東市永福)
  • 常親山安立寺(台東区谷中)
  • 石岡山妙福寺(台東区谷中)
  • 遠寿山本延寺(七尾市小島町)
  • 頂滝山妙高寺(越前市本町)
  • 長照山妙典寺(井原市井原町)
  • 広昌山常国寺(福山市熊野町甲)
    • 常国寺末:寿福山顕政寺(福山市鞆町後地)
    • 常国寺末:四大山法縁寺(福山市熊野町乙)
    • 常国寺末:薬王山寿量寺(福山市熊野町)
    • 常国寺末:桃林山通安寺(福山市西桜町)
    • 常国寺末:城本山本照寺(尾道市御調町市)
    • 常国寺末:立本山常行寺(観音寺市八幡町)
  • 見塔山蓮瑞寺(福山市大門町野々浜)
  • 妙栄山寿徳寺(三原市西町)
  • 広布山本覚寺(広島市中区十日市町)
    • 本覚寺末:広栄山本覚院(廿日市市林が原)
    • 本覚寺末:広昌山法華寺(大竹市玖波)
  • 松原山法華寺(萩市恵美須町)
  • 月芳山松岳寺(徳島市伊賀町)
  • 妙立山大法寺(松山市本町)
  • 寿福山長久寺(松山市御幸)
    • 長久寺末:大乗山正念寺(松山市神田町)
      • 正念寺末:一乗山正法寺(愛媛県上浮穴郡久万高原町久万)
  • 小倉山光明照院(大洲市大洲)
  • 普妙山法眼寺(大洲市新谷乙)
  • 妙光山法眼院(八幡浜市保内町須川)
  • 久成山本妙寺(西条市国安)
    • 本妙寺末:松栄山妙本寺(西条市河原津)
  • 顕本山上行寺(伊予市灘町)
  • 武運山長久寺(大洲市長浜甲)
  • 常賢山萬福寺(高知県安芸郡東洋町甲浦)
  • 龍王山啓運寺(北九州市門司区柳町)
  • 海宝山妙乗寺(北九州市小倉北区大門)
    • 妙乗寺末:法照山普門寺(行橋市中央)
    • 妙乗寺末:三應山霜田寺(長崎県壱岐市郷ノ浦町渡良東触)
  • 啓運山妙法寺(福岡市中央区唐人町)
  • 松林山妙典寺(福岡市博多区中呉服町)
    • 妙典寺末:発星山妙円寺(福津市西福間)
  • 起雲山本興寺(福岡市博多区中呉服町)
    • 本興寺末:徳永山宝寳寺(福岡市西区徳永)
  • 松隣山本長寺(福岡市博多区中呉服町)
  • 西昌山本岳寺(福岡市博多区上呉服町)
  • 修昌山法性寺(福岡市博多区千代)
    • 法性寺末:龍祥山法華寺(福岡県糟屋郡須恵町旅石)
  • 弘行山宗玖寺(福岡市東区馬出)
  • 石岡山妙福寺(佐賀市嘉瀬町大字荻野)
    • 妙福寺末:天拝山妙圓寺(小城市三日月町金田)
    • 妙福寺末:竹原山妙覚寺(佐賀市伊勢町)
    • 妙福寺末:昌永山龍光寺(佐賀市久保田町徳万)
  • 瑞相山本光寺(大分市上野丘)
  • 昌光山妙瑞寺(大分市大字下宗方)
  • 一乗山親蓮寺(大分市木上)

人物[編集]

  • 日親(開山)
  • 日祇(二世)
  • 日澄(三世)
  • 日淳(四世)
  • 日敬(五世)
  • 日憲(六世)
  • 日便(七世)
  • 日尭(八世)
  • 日円(九世)
  • 日通(十世)
  • 日因(十一世)
  • 富田日雄
  • 晴妙院日行(88世、大塚泰詮

交通アクセス[編集]

京都市営地下鉄烏丸線鞍馬口駅から徒歩15分。

脚注[編集]

  1. ^ 『日本歴史地名大系 京都市の地名』は創建の正確な年次は不明とする。また、日親と本阿弥清信は獄中で知り合ったとする資料もあり、この場合、両者が知り合うのは日親が投獄された1440年以降ということになる。
  2. ^ 創建時の寺地については資料によって「東洞院綾小路」とも「四条高倉」とも表記されるが、いずれもほぼ同じ場所を指し、現在の京都市下京区、地下鉄四条駅東方にあたる。
  3. ^ 『日本歴史地名大系 京都市の地名』による。寺のサイトでは三条万里小路に再建された年を長禄4年(1460年)としている。
  4. ^ 平成29年9月15日文部科学省告示第117号
  5. ^ 国宝・重要文化財の指定について(文化庁サイト)
  6. ^ 令和元年7月23日文部科学省告示第26号
  7. ^ 「文化審議会答申〜国宝・重要文化財(美術工芸品)の指定及び登録有形文化財(美術工芸品)の登録について〜」(文化庁サイト、2019年3月18日発表)
  8. ^ 重要文化財指定名称は「紙本墨画中文殊左右寒山拾得像」。これは三幅対の中央が文殊図、左右が寒山図と拾得図であるという意味である。

参考文献[編集]

  • 『日本歴史地名大系 京都市の地名』、平凡社、1979
  • 竹村俊則『昭和京都名所図会 5 洛中』、駸々堂出版、1984










興聖寺(こうしょうじ)は京都府宇治市にある曹洞宗の寺院。

日本曹洞宗最初の寺院である。道元が興聖宝林寺を建立したことに始まる[1]。断絶のあと、慶安元年(1648年)永井尚政によって再興された[2]

山号は仏徳山(ぶっとくさん)。本尊釈迦三尊

参道は「琴坂」と称し、紅葉の名所として人気を博している。「春岸の山吹」「興聖の晩鐘」は宇治十二景に含まれている。

歴史[編集]

道元から安貞元年(1227年)に帰国、しばらく建仁寺に身を寄せた後、同寺を去って深草(現在の京都市伏見区深草)の安養院に閑居した。寛喜元年(1229年)頃のこととされる。安養院はかつて深草にあった藤原氏ゆかりの大寺院極楽寺の跡で、現在の京都市伏見区深草宝塔寺山町付近にあったと推定されている。天福元年(1233年)、道元は深草に興聖寺を開創する。『永平広録』によれば嘉禎2年(1236年)に開堂式が行われ、観音導利院興聖宝林禅寺と号した。なお、その前年の嘉禎元年(1235年)の「宇治観音導利院僧堂建立勧進之疏」(『建撕記』所収)によると、当時の興聖寺には仏堂はあったが法堂と僧堂はまだなく、道元は僧堂建立のための勧進を呼びかけていた。建築史家の太田博太郎は、この時点(嘉禎元年)からわずか1年足らずの嘉禎2年に伽藍が完成していたとは考えられないとしている[3]

興聖寺は、比叡山延暦寺の弾圧を受け、寛元元年(1243年)、道元が越前に下向して以降荒廃し、住持4代で廃絶した。その後慶安2年(1649年)、淀城主の永井尚政万安英種を招聘して5世住持とし、朝日茶園のあった現在地に復興したのが今ある興聖寺である[4]

当寺に伝わる古文書は『興聖寺文書』として刊行されている[5][6][7]

境内[編集]

興聖寺石造相輪
  • 本堂
  • 開山堂(現天竺殿)
  • 禅堂
  • 方丈
  • 鐘楼
  • 監寺寮
  • 石造相輪

参道[編集]

興聖寺の本堂に通じる参道は、紅葉と桜で有名な寺院であるが[8]、紅葉の新芽が燃えゆる4月末から5月初旬も、四季折々の景観を醸し出している。

宇治川右岸に面した総門より本堂に通じるまでの200m程の緩やかな勾配参道は、「琴坂」[9]と呼ばれている。

琴坂の参道沿いに流れる湧き水は、本堂脇の貯水槽に一旦貯められた朝日山の山水が流れており、その水の流れがあたかも琴の音色に聞こえ、長い参道が琴の形状に似ていることから、今日まで琴坂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10]

文化財[編集]

  • 手習観音

所在地[編集]

京都府宇治市宇治山田27

交通アクセス[編集]

脚注[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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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宇治をめぐる人々』p.66
  2. ^ 『京都府の地名』239p
  3. ^ (横山、1950)、pp.252 - 255; (太田、1951)、p.133
  4. ^ 『京都の禅寺散歩』、pp.267 - 268
  5. ^ http://iss.ndl.go.jp/books/R100000002-I000001474552-00
  6. ^ http://iss.ndl.go.jp/books/R100000002-I000001440892-00
  7. ^ http://iss.ndl.go.jp/books/R100000002-I000001530187-00
  8. ^ 道元禅師初開の道場 仏徳山 興聖宝林禅寺”. 曹洞宗近畿管区教化センター. 2017年6月18日閲覧。
  9. ^ 『京都の禅寺散歩』、p.269
  10. ^ 京都の寺社505を歩く<下>P346

参考文献[編集]

  • 竹貫元勝『京都の禅寺散歩』、雄山閣、1994
  • 太田博太郎「禅宗建築はいつ伝来したか」『日本建築学会論文集』42、1951、pp.128 - 139(CiNiiからダウンロード可)
  • 横山秀哉「山城興聖寺と曹洞宗伽藍の様式に就て」『日本建築学会研究報告』6、1950、pp.252 - 255(CiNiiからダウンロード可)
  • 『日本歴史地名大系 京都府の地名』、平凡社、1981
  • 山折哲雄・槙野修『京都の寺社505を歩く』<下>PHP研究所 2010
  • 『宇治文庫6 宇治をめぐる人々』宇治市歴史資料館 平成7年

外部リンク[編集]






























相国寺(しょうこくじ)は、京都市上京区にある臨済宗相国寺派大本山の寺院。山号は萬年山(まんねんざん)。

足利将軍家伏見宮家および桂宮家ゆかりの禅寺であり、京都五山の第二位に列せられている。相国寺は五山文学の中心地であり、画僧周文雪舟は相国寺の出身である。また、京都観光名所として著名な鹿苑寺(金閣寺)、慈照寺(銀閣寺)は、相国寺の山外塔頭(さんがいたっちゅう)である。

歴史[編集]

永徳2年(1382年)、室町幕府3代将軍・足利義満は、花の御所の隣接地に一大禅宗伽藍を建立することを発願。竣工したのは10年後の明徳3年(1392年)であった。

義満は、禅の師であった春屋妙葩開山となることを要請したが、妙葩はこれを固辞。妙葩の師夢窓疎石を開山とするなら、自分は喜んで2世住職になると返したため、疎石が開山となった。尤も、2世住職・妙葩も相国寺伽藍の完成を見ずに嘉慶2年(1388年)に没している。3世住職にはもう1人の禅の師である義堂周信の推挙によって空谷明応が任じられた[注釈 1]。空谷明応は3度住持を務め、伽藍完成から2年後の応永元年(1394年)の火災で伽藍の大半が焼失した際も義満に乞われて住職に復帰して再建にあたっている。

火災はその後も多々起こり、応永32年(1425年)にも再度全焼している。応仁元年(1467年)には相国寺が応仁の乱の細川方の陣地となったあおりで焼失(相国寺の戦い)。天文20年(1551年)にも細川晴元三好長慶の争いに巻き込まれて焼失(相国寺の戦い)、ここまでで都合4回焼失している。天正12年(1584年)、相国寺の中興の祖とされる西笑承兌が住職となり、復興を進めた。現存する法堂はこの時期に建立されたものである。その後も元和6年(1620年)に火災があり、天明8年(1788年)の「天明の大火」で法堂以外のほとんどの堂宇を焼失した。現存の伽藍の大部分は19世紀はじめの文化年間の再建である。

また、義満によって応永6年(1399年)に建てられた七重大塔も、応永10年(1403年)に落雷で焼失したが、七重大塔は全高(尖塔高)109.1m(360。比較資料:1 E2 m)を誇り、史上最も高かった日本様式の仏塔である。大正3年(1914年)の日立鉱山の煙突(高さ155.7m)竣工までのおよそ515年間、高さ歴代日本一の構築物の記録は破られなかった。七重大塔は北山山荘(後の鹿苑寺)内に塔を移して再建された(北山大塔)が義満没後の応永23年(1416年)に再び落雷で焼失、その後、足利義持の意向で相国寺の元の場所にて再建された3代目の塔も文明2年(1470年)にまたもや落雷で焼失している[1][2]

薩摩藩戦死者墓

伽藍[編集]

庫裏
宣明

境内は京都御所の真北に位置し、同志社大学に隣接している。最盛期には東は寺町通り、西は大宮通り、南は一条通り、北は上御霊神社との境までが相国寺の寺域であった。応仁の乱による焼失後、三門と仏殿は再建されることなく、近世以降は法堂が仏殿(本尊を安置する堂)を兼ねている。

  • 法堂重要文化財) :「無畏堂」とも言い、慶長10年(1605年)、豊臣秀頼寄進によって再建された。日本にある法堂建築としては最古のものである。天井にあるの絵は狩野光信の手になる。特定の場所で手を打つと反響するため、「鳴き龍」と呼ばれる。
  • 開山塔(開山堂) :開山・夢窓疎石の像を祀るで、桃園天皇皇后である恭礼門院の女院御所内の御殿を文化4年(1807年)に下賜されたもの。
  • 方丈 :文化4年(1807年)の再建。
  • 庫裏 :文化4年(1807年)の再建。
  • 承天閣美術館 :相国寺と関連寺院(鹿苑寺など)の文化財を収蔵展示する施設で、昭和59年(1984年)に開館した。
  • 宣明(浴室) :応永7年(1400年)頃の創建。現在のものは慶長4年(1596年)の再建。蒸気浴をしながら柄杓で湯をかけて入浴を行ったとされる。(右の画像参照)
  • 鐘楼
  • 勅使門
  • 総門
  • 相国寺本山墓地:足利義政、藤原定家、伊藤若冲、長州藩士の墓がある。

塔頭寺院[編集]

かつては臨済宗の事実上の最高機関として五山以下の諸寺を統括する役所鹿苑院があった。足利義満が鹿苑院の院主である絶海中津僧録に任命して以来、その院主が僧録を兼務し鹿苑僧録として権勢を振るうことになった。明治時代初期の廃仏毀釈の嵐に見舞われて廃絶。

山内塔頭[編集]

  • 大光明寺
  • 林光院 - 足利義嗣の菩提を弔うため、夢窓疎石を勧請開山として創建。元は二条西ノ京にあった紀貫之邸宅跡にあったが、移転を繰り返した後、豊臣秀吉の命により山内に移った。明治時代には荒廃しは医院となっていたが、大正8年(1919年)橋本獨山によって再興。建物は仁正寺藩藩邸を買い取り移築。南庭の鶯宿梅には、平安時代村上天皇の代に清涼殿の梅が枯れたので紀内侍(紀貫之娘)宅の梅を移植したが、「勅なればいともかしこし鶯の 宿はととはばいかがこたえん」という別れを惜しむ娘の和歌短冊が添えられ、これに心打たれた天皇は梅を返したという逸話が残る(『大鏡[注釈 2])。大正4(1915)年に境外墓所に「甲子役戊辰役薩藩戦死者墓」が建てられた。この墓は甲子役すなわち禁門の変(元治元(1864)年と戊辰戦争(特に鳥羽伏見の戦い)に関わって亡くなった方を弔ったものである[3]
  • 般若林
  • 玉龍院
  • 普広院
  • 慈雲院
  • 慈照院
  • 豊光寺 - 西笑承兌が豊臣秀吉追善のため創建。天明の大火で焼失し、廃絶の危機にあったが、明治15年(1882年荻野独園が、慧林院とその子院霊香軒の客殿を移築し再興。
  • 長得院
  • 養源院
  • 光源院
  • 瑞春院 - 水上勉が幼い時に暮らし、小説『雁の寺』のモデルになった。
  • 大通院

山外塔頭[編集]

かつての山内塔頭[編集]

文化財[編集]

無学祖元墨蹟 与長楽寺一翁偈語

承天閣美術館収蔵品については、同美術館の項を参照。以下には相国寺伝来品のみを掲げる。

国宝[編集]

重要文化財[編集]

  • 本堂(法堂)附 玄関廊
  • 紙本墨画猿猴竹林図 長谷川等伯筆 六曲屏風一双
  • 絹本著色十六羅漢像 陸信忠筆 16幅
  • 絹本著色鳴鶴図 文正筆 2幅
  • 絹本墨画淡彩 鳳凰図 林良筆
  • 紙本墨画 山水図 絶海中津の賛あり
  • 子元祖元高峰顕日問答語
  • 十牛頌(伝・絶海中津筆)10幅
  • 明主勅書 永楽五年五月二十五日とあり(1407年)
  • 異国通船朱印状 13通
  • 普広院指図

京都市指定文化財[編集]

  • 名勝
    • 相国寺裏方丈庭園 - 1985年(昭和60年)6月1日指定。

アクセス[編集]

鉄道
バス
  • 京都市営バス59・201・203系統「同志社前」下車2分。
自動車道

脚注[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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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釈[編集]

  1. ^ 義満が春屋妙葩と義堂周信に寺院建立の意思を表明した際には自らが修行するための小規模な堂宇の建立を考えていたが、義堂は円覚寺や天龍寺に並ぶ寺院を建てるべきだと述べたと伝えられる(『空華日用工夫略集』永徳2年9月29日・10月3日条)。その経緯から義満は春屋妙葩の後任に義堂周信を考えていたが、彼が南禅寺の住職との兼務は難しいと答えたため、代わりに彼の推挙する空谷明応を住職にしたという[1]
  2. ^ 鶯宿梅の逸話については、菅原利晃「貫之の娘「鶯宿梅」歌説話小考 歌徳と教訓をめぐって (PDF) 」 『札幌国語研究』8号、道教育大学国語国文学会、2003年、 35-57頁。でまとめられている。

出典[編集]

  1. a b 桃崎・山田, 原田正俊「相国寺の創建と足利義満の仏寺法会」
  2. ^ 桃崎・山田, 冨島義幸「相国寺七重塔とその伽藍」.
  3. ^ 「幕末動乱の京都と相国寺」笹部昌利 相国寺教化活動委員会 2010年,p96

参考文献[編集]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












江戸時代、朝鮮国王が江戸幕府に派遣し、日本と朝鮮の交流を重ねた朝鮮通信使の基礎を築いた朝鮮人僧・松雲(しょううん)大師・惟政(いせい)(ユジョン、1544~1610)。その墨跡を所蔵する臨済宗興聖寺(こうしょうじ)派本山の興聖寺(京都市上京区)は19日、韓国の寺院に松雲大師の墨跡の複製を贈ると発表した。

 松雲大師は文禄・慶長の役(1592~98)で僧兵団を指揮して日本軍と戦い、1605年に京都・伏見城で徳川家康と会談して、国交回復や朝鮮通信使派遣の道を開いた。

 興聖寺によれば、同寺を開いた僧・虚応円耳(きいんえんに)は京都滞在中に松雲大師を訪ね、仏教について問答をした。大師は円耳の優秀さに驚き、「虚応」という字(あざな)と「無染」という号を贈った。こうした縁で興聖寺は大師の墨跡5点を所蔵しているが、韓国には大師の墨跡はほとんど残っていないという。

 昨年11月、大師をまつる韓国…



한재순(문화관광해설사)
나라를 위한 대승적 구도자의 길
일본에 한국불교 위상 높이고
숭유억불 조선에서 법맥 잇게 한
묵향의 간절함을 가슴에 담다

 


사명대사 존영 (동국대 소장) 1604년 일본의 도쿠가와 바쿠후는 조선에 국교 재개를 요청했다. 조정은 일단 사절단을 보내기로 했다. 사명대사는 전쟁 책임자를 조선에 보내고, 전쟁 피해를 보상하며, 전쟁 재발 방지를 약속하라고 일본에 요구했다. 도쿠가와는 자신은 전쟁을 반대한 인물이라며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사명대사가 전쟁 중에 잡혀간 3000여 명의 조선 백성을 이끌고 귀국해 협상 내용을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10월 15일부터 11월 17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본 교토 고쇼지[興聖寺] 소장 사명대사 유묵遺墨>을 특별히 공개하는 전시회를 관람했다.  
사명대사(1544-1610)는 조선 중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禪僧)이며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僧軍)을 이끈 승병장이다. 


사명대사가 승려 엔니에게 준 글과 시

이번에 전시된 사명대사 유묵은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후 강화와 포로 송환 협상을 위해 일본에 갔을 때 교토에 머물며 고쇼지의 승려 엔니 료젠(円耳了然·1559~1619)에게 남긴 것이다. 엔니는 금강산에서 도를 닦은 큰 승려가 왔다는 말에 선종의 가르침에 대한 10개 질문과 답변을 정리한 ‘자순불법록(諮詢佛法錄)’을 교토 혼포지에 머물고 있던 사명대사에게 보여주고 자신이 잘 해석하고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이후 서로 친해지자 엔니는 사명대사에게 ‘도호(道號)를 써달라’고 했고, 이에 사명대사는 ‘허응(虛應)’과 ‘무염(無染)’이라는 자와 호를 지어주었다, 사명대사는 엔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허응과 무염으로 지어 관세음보살이 두루 중생의 소리를 듣고 살핀다는 뜻을 담았으니 잘 새겨서 마음에 간직하라”고 당부했다. 엔니는 사명대사와 인연으로 일본불교계에서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좌] 최치원의 싯구 畵角聲中朝暮浪(나팔 소리 들리고 아침저녁으로 물결 일렁이는데) 靑山影裏古今人(청산의 그림자 속을 지나간 이 예나 지금 몇이나 될까). 속세를 떠난듯한 초연함을 노래한 것으로 고쇼지가 운주 자화사처럼 탈속적이라는 뜻을 담아 싯구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우] 중국 선승 대혜종고의 글씨를 본 소감을 적은 글 유묵 중에는 대혜선사(1089~1163)의 전서(篆書) 글씨를 보고 감상을 적은 글이다. 즉 중생을 구하라는 스승 서산대사(1520~1604)가 남긴 뜻에 따라 일본에 왔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행(使行) 목적이 포로송환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특별히 이 유묵의 중요성은 중국불교 6조 혜능의 법통이‘임제종’을 창종한 임제 의현-대혜종고를 거쳐 조선불교의 사명대사로 이어지며, 자신이 대혜 종고선사의 37대 직계 후손으로 임제선의 법통을 이었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승려 엔니에게 지어 준 도호>와 <자순불법록> 등 7건 7점이다. 특히 이 유품들이 주는 의미는 조선과 일본의 평화를 이끌어 백성을 구하고자 한 마음과 구도자로서 승려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 한 숭고한 뜻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좌] 일본 엔니로젠(円耳了然) 스님에게 준 글과 도호 사명대사는 엔니로젠에게 허응이라는 도호를 지어주고 두 글자를 크게 썼다. 엔니를 사명대사에게 소개한 난젠지(南禪寺)장로 센소겐소(1537-1611)는 조선과 일본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마도의 외교승이었다. 엔니와 겐소는 같은 임제종 승려였기 때문에 엔니는 겐소의 소개로 자연스럽게 사명대사와 교류할 수 있었다. [우] 고려말 문신 유숙의 시 <벽란도>의 운율을 채운한 싯귀 고려말 문신 유숙(柳淑,1324-1368)의 시 <벽란도>의 운율(詩韻)을 빌어 임진왜란부터 강화회담 참가까지 10여년 간의 감회를 적은 것으로 소임을 미치면 미련없이 산중선방의 수행자 신분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뚜렷하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 1000여명을 이끌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후 사명대사는 스승인 서산대사의 부장이 되어 군량과 제반 병기를 마련, 손질하고 왜적을 무찔렀다. 마침내 선조는 “승장 유정에게 당상관의 상급을 내리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때 실록을 쓴 사관은 “전란을 당해 날래고 건장한 장수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는데 엄청난 전공이 도리어 죽을 날이 머지않은 늙은 승려에게서 나왔다”며 “이것이 어찌 무사들만의 수치이겠는가”라고 감탄했다.


엔니가 부처의 가르침에 대해 사명대사의 의견을 묻는 글 <자순불법록(諮詢佛法錄)>은 고쇼지를 창건한 엔니가 선종의 기본 개념과 임제종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10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정리한 글이다. 엔니는 자신이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사명대사에게 이 글을 보이고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그는 다행히 만리길을 가지 않고 이곳에 앉아서 자신이 속한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사명대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며 기쁨과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다.

대사는 그후 4차에 걸쳐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펼쳤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선조의 특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인들은 사명대사를 보자 “저 스님이 설보(說寶)화상”이라고 환영하며 존경했다.
‘설보화상’이란 지난날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 진영에서 가토를 보고 “네 머리가 보배다”라 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사명대사는 협상끝에 일본에 잡혀 갔던 3천여 명의 조선인을 데리고 돌아온다. 


사명대사의 유묵

나라를 위하고, 끌려간 조선인들의 애민적 행보에 사명대사가 남긴 임진란 때의 업적을 되새기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한국불교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불교의 위상을 드높여 법맥을 잇게 한 것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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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제주불교신문(http://www.jejubulgyo.com)








京都、興聖寺所蔵の書を公開 
国立中央博物館で15日から1カ月間展示

四溟大師が「碧瀾渡」を次韻してしたためた書。国立中央博物館提供//ハンギョレ新聞社

 16世紀末の壬辰倭乱(日本でいう「文禄の役」)で僧兵を起こし、丁酉倭乱(「慶長の役」)後には講和および捕虜送還交渉の代表として日本に渡って活躍した四溟(サミョン)大師・惟政(ユジョン、1544~1610)。彼が京都の興聖寺に残した直筆の書5点が韓国国内で初公開される。

 国立中央博物館は、四溟大師が丁酉倭乱後の1604~05年、日本の首都京都に講和交渉代表として滞在した際に興聖寺に残した遺墨(生前に書いた書や描いた絵)を寺の協力で借り受け、15日から来月17日まで常設展示室中近世館朝鮮1室で展示すると14日発表した。

 今回の展示は、戦後の朝鮮と日本の間に平和の礎を築いた大使の意思を称え、博物館と仏教界が協力して行われるものという。今回の展示では興聖寺が所蔵する四溟大師の書5点と、興聖寺を創建した僧侶円耳了然(1559~1619)の書1点、東国大学博物館が所蔵する19世紀頃の四溟大師の肖像画まで7点の資料を公開。遺墨の中では高麗時代の文官柳淑(ユ・スク)が書いた詩『碧瀾渡』を次韻してしたためた作品が目を引く。この書で惟政は、乱れた世で過ごした時期が10年になったので、日本での任務を終えて禅僧に戻るという意思をほのめかしている。新羅の大学者であり文章家である崔致遠(チェ・チウォン)の詩の一節「ラッパの音響き朝夕に波漂う/青山の影を通う者昔も今も幾人あらんや」(畵角聲中朝暮浪/靑山影裏古今人)を書いた遺墨もあり、興聖寺所蔵の中国南宋の僧侶「大慧宗杲」の書を見て感想をしたためた書、興聖寺を創建した円耳了然に虚応という道号を与えた際の書や了然に送った手紙もある。

 四溟大師は壬辰倭乱当時、僧侶たちを集めて義兵を起こしただけでなく、戦後京都に外交使節として派遣され、幕府の実力者徳川家康と講和を結んで朝鮮人捕虜3千人あまりを連れ帰るなど、戦乱収拾にも大きな功績を残した。

ノ・ヒョンソク記者 (お問い合わせ japan@hani.co.kr )




興正寺(こうしょうじ)は、京都府京都市下京区にある浄土真宗寺院山号は円頓山(えんとんざん)。西本願寺の南隣に位置する。

かつて西本願寺の脇門跡であったが、明治9年(1876年)に真宗興正派として独立した際に、同派の本山となる。住職は門主の華園家。本山だけあって大伽藍であるが、壮大な西本願寺の南に隣接しているため、一見西本願寺の伽藍の一部と見まがう。また西本願寺の御影堂があまりに大きいため、興正寺の伽藍が比較的小さく感じられるが、実際には堂々とした規模である。

歴史[編集]

承元元年(1205年専修念仏は禁止され、浄土真宗の宗祖である親鸞越後に配流されたが、建暦元年(1211年)に赦免された。

寺伝によると、親鸞は赦免された翌年の建暦2年(1212年)に京都に帰り、山城国山科郷に一宇を創建し「興正寺」と名づけたとし、その後、親鸞はこの寺を弟子の真仏上人(第2世)にまかせ、阿弥陀仏の本願をひろめるため関東行化に旅立ったとされる。順徳天皇から聖徳太子にまつわる「興隆正法」の勅願を賜り、これより寺号を「興正寺」とし真宗念仏宣布の根本法城としたという。しかし、真仏は親鸞が関東教化に遊行した際に下野国(現在の栃木県)に建てた専修寺を任されているなど、親鸞が山科に興正寺を建てたとするには根拠に乏しく、一般的には越後より直接関東方面へ旅立ったとする説が有力である。

興正寺の寺伝では、第7世了源によって事実上創建されたとみなされるが、実際には、京都の五条西洞院にあった親鸞の住坊を元亨元年(1321年)頃に、了源が移転するなどして寺院として開いたのではないかと言われている。了源は元々大仏家の家臣に仕えていた中間の出身で関東の荒木門徒に属していたとされ、前述の親鸞の京都帰還説も同門徒が主張していた説とみられることから、彼が京都帰還後の親鸞が西洞院の住房にいたと考え、山科の地に同房を移転・復興させたとする考えを持っていたとする見方もある[1]

嘉暦3年(1328年)前後、了源は、教化活動の拠点を旧仏教の盛んな京都に移すべく寺基を洛東の汁谷(渋谷)(しるたに・しぶたに、現在の京都国立博物館の辺り)に移し、光明本尊・絵系図・交名帳を用いて西日本一帯の布教活動に力を入れた。この頃「阿弥陀佛光寺」の勅号を後醍醐天皇より賜る。この寺号は、後醍醐天皇が東南の方向から一筋の光が差し込むという夢を見たという場所に、興正寺の盗まれた阿弥陀如来の木像が出てきたという霊験に由来し、これを縁に山科より洛東渋谷に寺基を移したとも言われる。

一説には「興正寺」は聖徳太子が作ったとされていた「廟窟偈」の一節から了源が本願寺3世覚如の許しを得て命名したものの、了源が覚如から義絶された息子の存覚を庇護したことで覚如と決別した際に本願寺から与えられた体裁を取っていた「興正寺」の寺号が使えなくなったために、光明本尊にちなんだ「佛光寺」の名を存覚の許しを得る形で命名したとされている(後年、本願寺に復帰した佛光寺の人々が興正寺の名称を復活させたのも、この名称が本願寺から与えられたものであったからとされる)[1]

その後、佛光寺は益々隆盛となったが、それとともに天台宗延暦寺の弾圧が強まった。第13世光教の時には応仁の乱に巻込まれ諸堂を焼失。さらに文明13年(1481年)には、14世を継ぐべき経豪(後の蓮教)が本願寺蓮如に帰依し、山科西野に再び「興正寺」として創建、有力末寺と共に当時山科にあった本願寺に帰参した。当時あった48坊のうち42坊が本願寺に帰属した。残された佛光寺は経豪(蓮教)の弟の経誉が継ぐが、寺勢は急激に衰え、代わって本願寺が台頭するところとなる。

蓮教は蓮如と力をあわせて念仏弘通に奔走したが、天文元年(1532年)8月、山科本願寺と共に兵火にかかって興正寺は焼失。

永禄12年(1569年)、興正寺に本願寺顕如の次男顕尊が入寺し、石山本願寺の脇門跡に任ぜられる。天正13年(1585年)第15世蓮秀は幸いにつつがなきをえた真影を供奉して、天台宗の寺があった大阪天満の地に、広大な堂舎を配した天満本願寺と共に真宗興正寺として法燈をかかげた。

天正19年(1591年)第17世顕尊の時に、豊臣秀吉による都市計画の一環で、本願寺と共に寺基を再び洛中の七条堀川に移す。この寺地には時宗市屋派本寺の金光寺があった。

このように蓮教以来、興正寺は本願寺と行を共にしていたが、明治9年(1876年)、第27世本寂(華園摂信)は興隆正法の実を挙げるべく、真宗興正派として独立した。ただし本願寺派に残留した興正寺末寺も少なくなかった。本堂は起工から128年の年数をかけ、日光東照宮の本廟・知恩院三門とともに、日本三建築の一つと称せられた壮大華麗な大伽藍であったが、明治35年(1902年)11月、不慮の火災により、本堂その他ほとんどを灰燼に帰する不幸が起る。第28世本常(華園沢称)は直ちに再建の工を起こし、明治45年(1912年)、現在の両堂大伽藍が同寺地に完成した。

伽藍[編集]

  • 阿弥陀堂 - 大正4年(1915年)再建[2]
  • 御影堂 - 明治45年(1912年)再建[2]
  • 経蔵 - 嘉永元年(1848年)建立[2][3]
  • 表対面所[2]
  • 興正会館[2][3]
  • 三門[2]
  • 阿弥陀門[2]
  • 宗務所[2]
  • 鐘楼 - 安永3年(1774年)建立[3]
  • 婦人会館

歴代門主[編集]

第二十七世までは『真宗法脈史』による。

脚注[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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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 b 熊野恒陽「了源上人の教化と興正寺の建立」(大阪真宗史研究会 編『真宗教団の構造と地域社会』(清文堂出版、2005年)P41-71)
  2. a b c d e f g h 興正寺境内のご案内
  3. a b c 真宗教団連合 > 加盟宗派 > 真宗興正派 興正寺

参考文献[編集]

  • 熊野恒陽『了源上人 その史実と伝承』白馬社〈『興正寺史話』 1〉、2005年、ISBN 978-4-938651-52-7
  • 中島慈応『真宗法脈史』法文館、1911年。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









了然(りょうねん、正保3年(1646年)- 正徳元年9月18日1711年10月29日))は、江戸時代前期から中期にかけての黄檗宗尼僧武田信玄の曾孫葛山長爾の娘。名は総。字は了然。諱は元総。京都の出身。

初め後水尾天皇の中宮東福門院に出仕したのち、松田晩翠と結婚し二男三女を生んだ。しかし、1672年寛文12年)松田の家を出て、中宮東福門院の孫にあたる好君に使えた。好君の没後、京都宝鏡寺理忠女王(後水尾天皇の皇女)に師事して剃髪した。江戸にくだり黄檗宗禅僧白翁道泰に入門を願ったが、美貌のため許されず、自ら顔面を焼いて入門を許された。1693年元禄6年)武蔵国上落合村(現在東京都新宿区)に泰雲寺を創建し、白翁を勧請開山にむかえ、自らは2世を称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