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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거僧佉. 샹키야학파. 衛世師、尼揵陀若提子

VIS VITALIS 2020. 3. 21. 18:55

상캬학파

sāṃkhya- ]

육파철학(六派哲學)의 하나. 산스크리트어 sāṃkhya를, 원리를 하나하나 열거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수론(數論)이라 번역하고, 승거()라고 음사함. 카필라(kapila, 기원전 4-기원전 3세기)가 창시한 이 학파는 신아(puruṣa)와 자성(prakti)의 두 원리를 상정하는데, 전자는 순수 정신이고 후자는 물질의 근원임. 자성(自性)은 희(喜)를 본질로 하는 삿트바(sattva)와 우()를 본질로 하는 라자스(rajas)와 암()을 본질로 하는 타마스(tamas)의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세 요소는 서로 평형을 이루어 정지 상태에 있지만 신아(神我)의 영향을 받으면 평형 상태가 깨어져 자성()은 전개를 시작함.
이 때 자성에서 최초로 사유 기능이 생기는데, 이것을 각(buddhi) 또는 대(mahat)라고 함. 각(覺)이 다시 전개하여 아만(我慢)이 생기고, 아만이 또 전개하여 오지근(五知根)·오작근(五作根)·심근(心根)·오유(五唯)가 생기고, 오유에서 오대(五大)가 생겨 이 현상 세계가 성립된다고 함. 이 원리를 이십오제(二十五諦)라고 하며,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음.

상캬학파의 이십오제

상캬학파의 이십오제

[네이버 지식백과]상캬학파 [sāṃkhya-] (시공 불교사전, 2003. 7. 30., 곽철환)

《究竟一乘寶性論》卷3〈5 一切眾生有如來藏品〉:「偈言:謗法故、闡提故。遠離求有者,亦有二種。何等為二?一者無求道方便、二者有求道方便。無求道方便者,亦有二種。何等為二?一者多種外道種種邪計,謂僧佉衛世師尼揵陀若提子等,無求道方便。二者於佛法中同外道行,雖信佛法而顛倒取。彼何者是?謂犢子等見身中有我等,不信第一義諦、不信真如法空,佛說彼人無異外道。復有計空為有,以我相憍慢故。何以故?以如來為說空解脫門令得覺知,而彼人計唯空無實。為彼人故,《寶積經》中佛告迦葉:寧見計我如須彌山,而不用見憍慢眾生計空為有。迦葉!一切邪見解空得離。若見空為有,彼不可化令離世間故。偈言:及著我故:及外道故。有方便求道者,亦有二種。何等為二?一者聲聞,偈言:怖畏世間苦故、聲聞故。二者辟支佛,偈言:捨離諸眾生故及自覺故。不求彼二者,所謂第一利根眾生諸菩薩摩訶薩。何以故?以諸菩薩不求彼有如一闡提故,又亦不同無方便求道種種外道等故,又亦不同有方便求道聲聞辟支佛等故。何以故?以諸菩薩見世間涅槃道平等故。以不住涅槃心故、以世間法不能染故,而修行世間行,堅固慈悲涅槃心故,以善住根本清淨法中故。又彼求有眾生一闡提人,及佛法中同闡提位,名為邪定聚眾生。又遠離求有眾生中,墮無方便求道眾生,名為不定聚眾生。又遠離求有眾生中,求離世間方便求道聲聞辟支佛,及不求彼二平等道智菩薩摩訶薩,名為正定聚眾生。又除求於無障礙道大乘眾生,餘有四種眾生。何等為四?一者闡提、二者外道、三者聲聞、四者辟支佛。彼四眾生有四種障故、不能證故、不能會故,不能見如來之性。何等為四?一者謗大乘法一闡提障。此障對治,謂諸菩薩摩訶薩信大乘故。偈言:信法故。二者橫計身中有我諸外道障。此障對治,謂諸菩薩摩訶薩修行般若波羅蜜故。偈言:及般若故。三者怖畏世間諸苦聲聞人障。此障對治,謂諸菩薩摩訶薩修行虛空藏首楞嚴等諸三昧故。偈言:三昧故。四者背捨利益一切眾生捨大悲心辟支佛障。此障對治,謂諸菩薩摩訶薩修行大悲,為利益眾生故。偈言:大悲故。是名四種障,障四種眾生。為對治彼四種障故,諸菩薩摩訶薩信修行大乘等四種對治法,得無上清淨法身,到第一彼岸。何以故?依此四種清淨法界修習善法,此是諸佛隨順法子於佛家生。是故偈言:大乘信為子,  般若以為母,

禪胎大悲乳,  諸佛如實子。

」(CBETA 2019.Q4, T31, no. 1611, pp. 828c16-829b7)


바이셰시카학파

vaiśeṣika- ]

육파철학(六派哲學)의 하나. 산스크리트어 vaiśeṣika를 승론()이라 번역하고, 폐세사가()·비세사()·위세사()라고 음사함. 카나다(kaṇāda, 기원전 2-기원전 1세기)가 창시한 학파로, 모든 현상은 실(實)·덕(德)·업(業)·동(同)·이(異)·화합(和合)의 육구의(六句義)에 의해 생성·소멸되며,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여섯 가지 원리를 이해하고 요가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함. 구의(句義)는 원리·범주를 뜻하며, 실()은 사물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지()·수()·화()·풍(공(空) 등의 실체, 덕()은 실체의 성질, 업()은 실체의 운동, 동()은 사물에 서로 공통점을 있게 하는 원리, 이()는 모든 사물에 차이점을 있게 하는 원리, 화합()은 실()·덕()·업()·동()·이()를 융합시키는 원리를 뜻함.

동의어

폐세사가(吠世師迦), 승론(勝論), 위세사(衛世師), 훈호자 , 비세사(毘世師)

[네이버 지식백과] 바이셰시카학파 [vaiśeṣika-] (시공 불교사전, 2003. 7. 30., 곽철환)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

 

 1, K-617(17-626). T-1656(32-493). (시대(A.D. 558-569) 번역. [진제(眞諦). [] Rājaparikathāratnamāla. [] rgyal po la gtam bya rin po che'i pheng ba.

 

  한 논사가 보행왕(寶行王)에게 불교의 요체를 설하여수행에 힘쓰는 동시에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교화하는 내용이다.

이 불전은 제안락해탈품(安樂解脫品), 잡품(雜品), 보리자량품(菩提資糧品), 정교왕품(正敎王品), 출가정행품(出家正行品)의 다섯 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안락해탈품 인도의 관습대로 먼저 귀경문(歸敬文)이 있으며 10(), 10(등을 기술하여 수행의 대요를 담고 있다나아가 대승 불교의 세계관을 제시하고유무(有無)의 2()과 아유(我有), 아소(我所)의 2사견(邪見)을 논파하고, 3()의 실유(實有)의 문제를 다루어서 진보의 사상을 드러낸다승거(僧倨, Sāṁkhya), 위세사(衛世師, Vaiśeṣika), 니건자(Nirgrantha putra), 유아론(有我論), 자성론(自性論), 구의론(句義論등의 세계관을 비판하고불교의 업론과 인과론을 선양하고 불교적 해탈을 고양한다.

 

 제잡품 여러 가지 선행을 나열하여 그 공덕의 심대함을 설하고여러 가지 악행을 파괴하여 10계를 지킬 것을 권한다특히 사음계(邪淫戒)를 경계하여 여성의 추악한 모습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제 2품의 내용은 제3품의 전반부와 이어진다.

 

 제보리자량품 전륜성왕전륜법왕대인(大人상호(相好)와 80수호(隨好)의 거의 전부를 열거하고그 하나하나가 어떤 공덕에 의해 성취되었는지를 설명한다3품의 후반부에서는 탐(貪 ), (), ()와 그 밖의 학행을 멈추고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선업을 쌓으라고 권한다또한 왕으로서 경()을 짓고불상과 지제(支提즉 탑과 사묘(寺廟등을 건립하여 장엄하고도로와 여사(旅舍)를 증수하며약품과 의식을 구족하는 등이 모두 상천(上天)과 성불의 인연이 될 수 있음을 설한다.

 

 제정교왕품 논사는 선업과 악업을 세밀하게 나누어사람으로서 또 왕으로서 걸어야 할 길을 간절하게 가르친다그 안에는 불교도가 보살로서 일반적으로 닦아야 할 덕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제출가정행품 : 57추류혹(麤類惑)을 하나하나 열거해서 설명한다또 보살 10(사상을 설하고 있다보살 10지 사상은 분명히 대승의 것으로서 인왕경(仁王經), 화엄경(華嚴經)에 기술되어 있는 10지와 완전히 동일하다논사는 그 안에서 각각의 지(地 ), 그 지에서 닦아야 할 바라밀거주하는 천상세계를 설하고 있다논사는 마지막으로 스스로 성불할 것을 발원하면서 논을 마친다.

 

 이 안에는 대승적 용어와 법수(法數)가 많이 나온다그것은 32(), 보살 10(地 ), 6바라밀, 57추류혹(麤類惑), 3(), 4무량(無量), 10(), 4(등이다.

 

 이 논서의 대승 사상은 4~5세기의 것으로 보이므로 본서 역시 그 무렵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승론사(勝論師) 위세사(衛世師)



방편심론(方便心論)

길가야(吉迦夜) 한역, 김철수 번역

1. 명조론품(明造論品)

만일 이 논을 이해할 수 있다면

곧 모든 논법(論法)에 통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깊고 그윽한 뜻을

이제 널리 설하리라.

[문] 논을 지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무릇 논을 짓는다는 것은 성냄ㆍ원한ㆍ교만ㆍ방자함ㆍ거만함을 많이 일으키는 일이 되고, 스스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부드럽고 온화한 뜻이 적고, 다른 이의 악함은 드러내지만 자신의 착함은 스스로 칭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뭇 허물을 지혜로운 자는 꾸짖는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모든 어진 성인들은 한량없는 방편으로 쟁론하는 것을 끊기를 독약이 든 그릇을 버리듯이 한다. 또한 논을 짓는 것은 내실은 조화롭고 유연한 것 같지만 외관은 많은 허물이 있다. 이런 까닭에 만일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려면 마땅히 이런 쟁론의 법을 버려야 한다.

[답] 그렇지 않다. 지금 이 논을 짓는 것은 논쟁에 이기려 하거나 이익이나 명성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착하고 악한 모든 상(相)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이 논을 짓는 것이다. 세상에 논이 없다면 미혹한 자가 많아지고, 세간의 삿된 지식과 번지르르한 말솜씨에 모두가 미혹되어서 착하지 못한 업을 일으키고, 악도에 윤회하여 진실한 이익을 잃게 한다.

만약 논에 통달한 자라면 곧 스스로 선(善)ㆍ악(惡)ㆍ공(空)의 모습을 분별하나니 온갖 마(魔)나 외도, 삿된 견해를 지닌 사람들이 능히 어지럽히거나 부수지 못하고 장애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바른 논을 짓는 것이다. 또한 정법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하기 위함이니, 마치 암바라 열매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위에 널리 가시나무를 심어 숲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열매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지금 내가 논을 짓는 것 또한 이와 같이 정법을 보호하기 위함이지, 명성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대가 앞에서 쟁론이 쓸데없다고 말한 것은 옳지 못하다. 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논을 지어야 한다.

[문] 그대는 앞에서 이 논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모든 논법에 통달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양상을 설명하여라.

[답] 이 논에서는 여덟 가지의 뜻이 있다고 분별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의취에 통달하여 이해한다면 곧 능히 다른 모든 논법으로 확대된다. 마치 벼와 보리를 심고서 물을 대어 주면 곧 묘가 잘 자라서 번성하지만 피를 뽑아주지 않으면 좋은 곡식이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일 어떤 사람이 비록 이 여덟 가지를 듣더라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곧 모든 논법에 대해 전부 의혹을 일으킬 것이다. 만일 이 여덟 가지 뜻을 밝게 이해한다면 결정적으로 모든 논법에 통달하게 될 것이다.

[문] 그대는 이 논을 이해하면 결정적으로 논법을 다 이해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모든 외도들도 논법이 있지 않는가?

[답] 있다. 위세사(衛世師)에게는 6제(諦)가 있으니, 이른바 타라표(陀羅驃)ㆍ구나(求那)ㆍ총제(總諦)ㆍ별제(別諦)ㆍ작제(作諦)ㆍ부작제(不作諦)이다.

이와 같은 것을 모두 논법(論法)이라고 이름하는데 비록 능히 통달하기는 하더라도 아직 모든 나머지 경론을 환히 분별하지 못한다. 이 같은 여덟 가지 심묘한 논법을 내가 이제 간략하게 설명하겠으니, 모든 논의의 문을 열기 위함이고 희론(戱論)을 끊기 위함이 다. 첫째는 비유(譬喩)이고, 둘째는 수소집(隨所執)이고, 셋째는 어선(語善)이고, 넷째는 언실(言失)이고, 다섯째는 지인(知因)이고, 여섯째는 응시어(應時語)이고, 일곱째는 사인비인(似因非因)이고, 여덟째는 수어난(隨語難)이다.

비유(譬喩)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구족유(具足喩)이고, 둘째는 소분유(少分喩)이다.

수소집(隨所執)이란 구경의(究竟義)이다.

어선(語善)이란 말은 뜻에 수순한다는 것이다.

언실(言失)이란 말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지인(知因)이란 두 가지 인(因)을 능히 아는 것이니,

첫째는 생인(生因)이고, 둘째는 요인(了因)이다.

응시어(應時語)란 먼저 계(界)와 입(入)을 말하고 뒤에는 5음(陰)을 말하면 이것을 불응시(不應時)라고 한다. 만일 말의 차례[言語次第]에 잘 통달했다면 이것을 곧 응시어라고 한다.

사인(似因)이란 마치 아지랑이[焰]가 물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물이 아닌데 이것을 논하는 자가 말을 꾸며서 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사인이라고 이름한다.

수어난(隨語難)이란 마치 새 옷[新衣]이라고 말할 때에 곧 힐난하여 말하기를 옷은 때[時]가 아닌데 어떻게 새 것[新]이라고 이름하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수어난이라고 이름한다.

내가 이러한 여덟 가지 뜻을 간략히 설명하였으니 이제는 차례로 그 모습을 자세하게 밝히겠다.

[문] 그대는 앞에서 비유[喩]를 말하였는데 지금 세운 비유는 어떤 방편으로 짓는 것인가?

[답] 만일 비유를 접하는 경우라면 범부와 성인이 똑같이 이해한 연후에 가히 설해야 한다.

마치 “이 마음의 움직임은 빠르게 부는 바람과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모든 범부들도 바람이 움직이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곧 마음이 가볍고 성급하게 움직이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만일 알지 못한다면 비유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문] 어찌하여 그냥 바른 뜻만을 말하지 않고 비유로써 말하는가?

[답] 무릇 비유를 말하는 것은 바른 뜻을 밝히기 위함이다.

[문] 그대는 앞에서는 범부와 성현이 똑같이 이해한 연후에야 비로소 비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무엇을 똑같다[同]고 하고 무엇을 다르다[異]고 하는가?

[답] 마치 앞에서 든 바람의 비유가 똑같은 것이고, 성현은 열반을 얻지만 범부는 열반을 얻지 못하니 이것을 다르다고 이름한 것이다.

[문] 이미 비유의 모습을 말하였다. 그런데 무엇이 집상(執相)인가?

[답] 그 집착하는 바를 따라서 널리 인연을 인용하고, 뜻을 견고하게 세우는 것을 집(執)의 모습이라고 한다.

[문] 집법(執法)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답]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체동(一切同), 둘째는 일체이(一切異), 셋째는 초동후이(初同後異), 넷째는 초이후동(初異後同)이다.

[문] 그대는 이제 이 네 가지를 설명해야 한다.

[답] 무릇 뜻을 주장하고자 하면 마땅히 네 가지 지견(知見)에 의지해야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직접 지각[現見], 둘째는 추리지[比知], 셋째는 비유지[以喩知], 넷째는 수경서(隨經書)이다.

일체동(一切同)이란 말하는 자가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다”고 말하면 묻는 자 또한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일체동이라고 한다.

일체이(一切異)란 말하는 자가 다르다고 말하면 묻는 자가 곧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구이(俱異)라고 한다.

초동후이(初同後異)란 마치 말하는 자가 “직접 지각하는 법[現法]은 모두가 있으며 신(神)은 직접 지각할 수는 없지만 이 또한 있다”고 말하면, 묻는 자가 “어떤 때는 직접 지각의 법은 있다고 이름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신(神)을 직접 지각할 수 없다면 어떻게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만일 추리지로 말하여 신이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직접 지각한 뒤에야 곧 추리할 수 있는 법인데 신은 직접 지각하는 법[現法]이 아니거늘 어떻게 추리할 수 있겠는가? 만일 또다시 비유로써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유사한 법[相似法]이 있은 연후에야 비유를 얻을 수 있거늘 신과 같은 부류를 무엇으로써 비유할 수 있겠는가? 만일 경서(經書)에 따라서 신이 있다고 증명한다면 이 일도 있을 수 없다. 경서의 뜻 또한 이해하기 어려워서 어떤 때는 있다고 말하고, 어떤 때는 없다고 말하나니 무엇을 취하여 믿겠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초동후이라고 이름한다.

초이후동(初異後同)이란 마치 말하는 자가 “‘아’도 없고 ‘아소’도 없다”고 말하면 묻는 자도 “‘아(我)’도 있고 ‘인(人)’도 있다”라고 말한다. 이 두 논자가 모두 열반을 믿는 경우이다.

이것을 초이후동이라고 이름한다.

또다시 집법수의(執法隨義)에는 한량없이 많은 상(相)이 있으니 마치 12인연(因緣)ㆍ고습멸도(苦習滅道)ㆍ37품(品)ㆍ4사문과(沙門果)와 같은 이러한 법들은 부처님의 바른 뜻이라고 이름한다. 이른 아침에 예경하고, 살생하여 제사를 지내며, 온갖 향을 태우고, 모든 기름 등불을 바치는 이러한 네 가지를 이름하여 사화외도(事火外道)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63자(字)와 4구(句)의 뜻은 음성외도(音聲外道)이다. 약(藥)을 밝히는 데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약의 이름이고, 둘째는 약의 덕이고, 셋째는 약의 맛이고, 넷째는 약의 세력이고, 다섯째는 화합이고, 여섯째는 성숙이니 이것을 의법(醫法)이라고 이름한다. 6제(諦) 등과 같은 것은 위세사(衛世師)이다. 명초(冥初, puruṣa)는 하나이나 자아는 여럿이라고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승가(僧伽)4)이다. 여덟 가지 극미[入微]가 있으니 이른바 4대(大)ㆍ공(空)ㆍ의(意)ㆍ명(明)ㆍ무명(無明)이다. 8자재(自在)는 첫째로 능소(能小), 둘째로 위대(爲大), 셋째로 경거(輕擧), 넷째로 원도(遠到), 다섯째로 수소욕(隨所欲), 여섯째로 분신(分身), 일곱째로 존승(尊勝), 여덟째로 은몰(隱沒)이다. 이것을 유가외도(踰伽外道)라고 한다.

명(命)과 무명(無命), 죄(罪)와 복(福), 루(漏)와 무루(無漏), 계구족(戒具足)과 박(縛)과 해(解), 5지(智)인 문지(聞智), 사지(思智), 자각지(自覺智), 혜지(慧智), 의지(義智)와 6장(障)인 불견장(不見障), 고수장(苦受障), 우치장(愚癡障), 명진장(命盡障), 성장(性障), 명장(名障)과 4탁(濁)인 진(瞋), 만(慢), 탐(貪), 첨(諂) 등이 있으니 이 모두를 니건타법(尼乾陀法)이라고 이름한다.

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체의 모든 법은 전부 유(有)인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것은 하나이다. 또 일체법은 모두가 구나(求那)가 있으므로 또한 하나라고 이름하며, 또 일체법은 명(冥)으로부터 처음에 생하였다. 근본이 하나이므로 이것은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또 머리와 발 등 몸을 이루는 것은 몸과 하나이다. 또 의지하는 것은 허공이므로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은 계일외도(計一外道)라고 이름한다.

또 말하기를 “일체법은 다르다[異]. 왜냐하면 마치 머리와 발 등은 몸과 다른 것과 같다. 또 여러 모습은 차별되나니 마치 소가 말이 아닌 까닭에 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을 계이외도(計異外道)라고 이름한다. 만일 ‘일체법은 있기 때문에 같다[一]’라고 한다면, 유법(有法)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각(有覺)이고 둘째는 무각(無覺)이다. 어떤 것이 같은가? 인(因)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법은 모두 이미 논파되었다.

논자들이 말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고습멸도(苦習滅道)ㆍ12인연ㆍ유무(有無) 등의 법이 같다거나 다르다”고 한다면 이 모두 정인(正因)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같다고 말한다면 괴로움의 경계에 떨어질 것이고, 다르다고 말한다면 즐거움의 경계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말하기를 “같다거나 다른 것은 반드시 두 가지 경계에 떨어지니 부처님 법의 뜻이 아니다”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열반의 성품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 무엇으로써 이것을 아는가? 무릇 일체법은 지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다. 열반은 지각이 없는데 어떻게 즐겁다고 말하겠는가”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즐거움은 있다. 왜냐하면 즐거움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낙수락(樂受樂), 둘째는 무뇌해(無惱害), 셋째는 무희구(無希求)이다. 열반 속에는 구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열반은 즐겁다는 이름을 얻게 된다”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묻기를 “나는 앞서 열반은 항상함을 이미 알았다. 지금 모든 행(行)과 더불어 다른 것인가?”라고 한다.

[답] 그대가 만일 앞에서 열반이 항상함을 알았다면 무엇을 일러서 제행(諸行)이 같다고 하는가? 제행의 성품은 유전하며 무너지고 부서지지만 열반의 체(體)는 항상하고 즐거움이다. 어떤 지혜로운 자가 행과 같다고 말하겠는가?

또다시 어떤 이가 묻기를, “신아(神我)의 성품은 비록 형색(形色)은 있더라도 아직 항상함과 무상함이 분별되지 못하였다”라고 하면 답하기를, “만일 일체법이 상대함과 장애[對碍]가 있다면 모두가 무상하다. 마치 장애가 있어서 파괴되는 것과 같다. ‘아’가 만일 이와 같다면 또한 반드시 무상할 것이다. 그런데 ‘아’가 형체가 있다고 경전에서 말하지 않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다. 마치 모래와 자갈을 취하여 이것을 진귀한 보배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 너 또한 이와 같아서 말에 거짓이 많다”라고 말한다.

[문] 그대는 무엇 때문에 ‘아’는 형체가 없다고 하는가?

[답] 나는 앞서 병에는 형상과 장애가 있기 때문에 부서지거나 무너질 수 있다고 이미 말하였다. ‘아’가 만일 이와 같다면 또한 마땅히 마멸될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아’는 형체가 없다고 설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 것인가?

또다시 부정집상(不定執相)이 있으니, 어떤 이가 묻기를 “사물로써 소리를 내면 항상한가, 무상한가?”라고 한다. 답하기를, “나누어져서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 무상하니 소리 또한 나누어져서 이루어지는데 어찌 홀로 항상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문] 무엇을 소리 내는 물건[聲物]이라고 하는가?

[답] 만일 아직 분별하지 못하였다면 어찌하여 묻는가?

[문] ‘아’와 몸과 목숨이 미래세에 홀로 괴로움과 즐거움을 누리는가, 몸과 함께 받는가?

[답] 이 몸이 멸하고 난 뒤에 ‘아’는 다른 몸을 받는다.

[문] 무엇이 미래세에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은 ‘아’인가?

[답] 그대는 앞에서 ‘아’라고 말하더니 어찌하여 다시 ‘아’가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가?

이것은 도리가 아니다.

[문] 이미 집의(執義)를 모두 말하였다. 무엇을 어선(語善)의 모습이라고 이름하는가?

[답]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으며, 문장의 문구를 잘 이해하고 상(相)에 응하여 법을 설하며, 말한 비유가 위배되지 않아 능히 경시하거나 질책할 수 없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써 어선이라고 이름한다.

[문]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답] 어떤 사람이 식(識)을 헤아려서 “이것을 ‘아’라고 한다. 제행(諸行)이 공하고 무아이기 때문이다. 일체행이 다 식에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한다면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행은 바로 식의 원인이며 원인이 무아이기 때문이니 식이 어떻게 ‘아’이겠는가?

[답] 일체의 모든 법이 전부 무상하나 소리는 일체가 아니므로 항상하다.

[문] 그대는 일체라고 말하면서 소리는 무슨 까닭에 일체가 아닌가? 이것은 바른 인을 설한 것이 아니다. 또 일체법은 조작하는 자가 있으므로 모두 무상하다.

마치 불을 붙이는 것 등과 같이 소리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무상하다. 이것을 곧 불상위상이라고 이름한다.

[문] 무엇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고 하는가?

[답] 나는 이제 먼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상에 대해서 말하겠다. 줄어드는 것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인감(因減), 둘째는 언감(言減), 셋째는 유감(喩減)이다. 만일 “6식(識)은 무상하다. 마치 병과 같다”고 말하면서 인연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인감이다. 만일 “이 몸은 무아이다. 여러 조건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소리 또한 무아이니 조건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유감이다. 만일 “4대(大)가 무상하다. 마치 병이 만들어진 것과 같다”고 한다면 이것은 언감이다. 위의 말들과 어긋난 것을 구족(具足)이라고 이름한다. 또 구족이란 만일 어떤 사람이 ‘아’를 말한다면 마땅히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대가 말한 ‘아’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만일 무상하다면 곧 제행(諸行)과 같나니 이것은 곧 단멸될 것이다. 만일 항상하다면 이것은 곧 열반인데 다시 무엇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을 곧 구족의 모습이라고 이름한다.

[문] 무엇을 늘어난다고 말하는가?

[답] 늘어남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증(因增), 둘째는 유증(喩增), 셋째는 언증(言增)이다. 만일 “소리의 법은 무상하다. 화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병이 조작되어서 곧 무상한 것과 같다. 또 소리는 바로 허공의 구나(求那)이고, 허공은 상대하거나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며 소리는 바로 색법인데 어떻게 서로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하면 이것을 인증이라고 이름한다. 만일 “5근(根)은 무상하다. 마치 부르는 소리의 메아리처럼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이다. 소리 또한 이와 같다. 무엇으로써 이것을 알 수 있는가? 입술과 입 등으로부터 이것이 나오기 때문이다”라고 하면 이것을 유증이라고 이름한다. 만일 “미세한 먼지는 가늘고 작으며, 허공은 두루하고 크나니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을 곧 항상하다고 이름한다.

소리는 이와 같지 않으므로 무상하다고 말한다”고 하면 이것을 유증이라고 한다. 또한 설하기를 “소리는 무상하다. 뭇 조건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항상하다고 한다면 이 일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인(因)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형상에서 나온 것[從形出]이고, 둘째는 근으로 파악되는 것[爲根了]이다. 어떻게 항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동이법은 모두가 무상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면 이것을 언증(言證)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문] 어떤 말로 세간 사람들을 능히 믿고 받아 지니게 할 것인가?

[답] 만일 어리석은 자를 위해서라면 깊은 뜻을 분별해야 한다. 이른바 모든 법은 다 공적하다. 무아(無我)이고 무인(無人)이니 마치 환(幻)과 같고 화(化)와 같아 진실함이 없다. 이와 같은 깊은 뜻을 지혜로운 자는 곧 이해한다. 범부가 만일 이와 같은 말을 듣는다면 미혹되고 무너지나니 이것은 곧 응시어(應時語)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만일 모든 법에는 업(業)이 있고 과보[報]가 있으며 나아가 묶임[縛]과 풀림[解]과 작자(作者)와 수자(受者)가 있다고 말한다면 지혜가 얕은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곧 믿고 받아들인다. 마치 부싯돌이 화합하면 곧 불을 낼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일 설해진 것이 앞에서 응한다면 중생은 모두가 믿고 즐긴다. 이와 같은 것을 수시이어(隨時而語)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언증(言證)이라고 하는가?

[답] 비록 많이 설해진 것이라도 능히 잘 기억하고 생각하면서 만일 모든 깊은 뜻을 펼쳐서 그 모양을 이해하면 세운 바가 견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하고 즐겁게 한다. 모든 법은 전부 공하고 무주(無主)이나니 직접지각하는 만물은 뭇 조건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언증이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언실(言失)이라고 하는가?

[답] 위의 내용과 상위한 것을 언실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두 가지 말도 실(失)이라고 이름한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뜻은 다르지 않은데 거듭 분별하는 것이고, 둘째는 말이 다르지 않은데 거듭 분별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하나의 뜻을 거듭 분별하는 것인가? 마치 교시가(礬尸迦)를 천제석(天帝釋)이나 부란타나(富蘭陀那)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뜻은 하나인데 이름이 다르면서 거듭 분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름과 뜻이 같은 것이란 마치 인다라(因陀羅)를 인다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이름과 뜻이 다르지 않은데 거듭 분별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다시 무릇 언설하는 바가 다만 글월만이 수식되어 있을 뿐 뜻이 없으면 모두 실(失)이라고 이름한다. 또 비록 뜻과 이치가 있더라도 차례가 없으면 이것 또한 언실(言失)이라고 이름한다.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마치 어떤 사람이 찬탄하기를,

천제석의 여인을

금색이라고 이름하면서

손과 발이 뛰어나다고 한다.

다시 석제환인에게 설하면서

아수라의 세 가지 성(城)을

무너뜨리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차례가 없는 말이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인(因)을 아는 것이라고 하는가?

[답] 인을 아는 것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직접 지각이고, 둘째는 추리지[比知]이고, 셋째는 비유지[喩知]이고, 넷째는 수경서(隨經書)이다. 이 네 가지 앎 중에서 직접 지각이 으뜸이다.

[문] 어떤 인연으로 인해 직접 지각이 으뜸이라고 하는가?

[답] 뒤의 세 가지 앎은 직접 지각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으뜸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치 불에 연기가 있음을 보면 나중에 연기를 보고서 곧 불이 있다고 아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직접 지각이 가장 훌륭하다. 또 아지랑이를 보고서 물의 비유를 얻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먼저 직접 지각한 연후에 비유를 얻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중에 직접 지각하여야 비로소 진실을 알 수 있다.

[문] 세 가지 일이 직접 지각으로 말미암아서 알게 된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이제 이직접 지각은 어떤 것이 가장 진실한가?

[답] 5근(根)으로 알게 되는 것은 때때로 허위가 있을 수 있으며 오직 지혜로서 모든 법을 바로 관하여야 하나니 이것을 가장 으뜸이라고 한다. 또한 더운 날의 아지랑이, 선화륜(旋火輪), 건달바성(乾闥婆城)을 보는 것은 직접 지각이라고 이름하기는 해도 진실한 것이 아니다. 또한 모습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 보는 것이다. 마치 밤에 나뭇등걸을 보고서 사람이라고 의심하는 것과 같고, 손가락으로 눈을 문지른 뒤에 곧 두 개의 달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일 공지(空智)를 얻으면 이것을 진실한 봄[見]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문] 이미 직접 지각의 모습을 알았다. 그렇다면 추리지의 모습[比相]은 무엇인가?

[답]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지만 지금 다시 설명하겠다. 추리지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비(前比)이고, 둘째는 후비(後比)이며, 셋째는 동비(同比)이다. 전비란, 마치 어린아이에게 여섯 손가락이 있고 머리에는 종기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후에 장대해진 모습을 보고서 제바달(提婆達)을 듣고 곧 본래의 여섯 손가락의 아이였음을 기억해 내며 바로 지금 본 바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전비라고 이름한다. 후비란 마치 바닷물을 마시고서 짠 맛을 알게 된 뒤에 물이란 똑같이 짜다고 아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후비라고 한다. 동비란 마치 이 사람이 나아가서 저곳에 이르며, 하늘에 해와 달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을 비록 그 움직임을 보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나아감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동비라고 이름한다.

[문] 문견(聞見)이란 어떤 것인가?

[답] 진실한 나이 많은 장로[耆舊長宿]나 제불보살을 보고 모든 현성들로부터 경법을 듣고 받아서 지견을 능히 일으키면 이것을 문견이라고 한다.

비유하면 훌륭한 의사가 약의 처방을 잘 알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일러주는 것을 선문(善聞)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 모든 현성들이 일체법을 증득하고서 큰 지혜가 있으면 그들로부터 듣는 것을 선문이라고 이름한다.

[문] 비유지의 모습[喩相]이란 어떤 것인가?

[답] 만일 일체법이 모두 공하며 적멸한 것이 환(幻)과 같고 화(化)와 같으며, 상(想)은 마치 아지랑이와 같으며, 행(行)은 파초와 같고, 탐욕의 상은 종기와 같고 독과 같다고 하는 것을 비유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를 인(因)이라고 하며 능히 통달하는 것을 인을 안다[知因]고 이름한다.

[문] 어떤 것을 사인(似因)이라고 하는가?

[답] 무릇 사인이란 논법 중에서 가장 큰 허물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깨달아 알아서 빨리 버리고 여의어야 한다. 이 같은 사인을 내가 이제 설명하리니 사인은 모습에 따라 한량없는 뜻이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여덟 가지 뿐이다. 첫째는 제멋대로 말을 함에 따라서 생기는 허물이고, 둘째는 동이(同異)에 대해서 생기는 허물이며, 셋째는 사인(似因)을 의심하는 것이고, 넷째는 때가 지난 말[過時語]이며, 다섯째는 유동(類同)이고, 여섯째는 설동(說同)이며, 일곱째는 언이(言異)이고, 여덟째는 상위(相違)이다.

[문] 이 여덟 가지 법을 널리 분별해야 할 것이다.

[답] 나바(那婆, nava)에는 네 가지 이름이 있다. 첫째는 새 것[新]이고, 둘째는 아홉[九]이고, 셋째는 너의 소유가 아님이라는 것이고, 넷째는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입은 것은 바로 나바옷이다”라고 하자 힐난하여 말하기를 “지금 그대가 입은 것은 그저 하나의 옷인데 어찌하여 아홉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면 답하기를 “나는 나바, 즉 새 옷을 입었다고 말했지 아홉을 말하지 않았다”라고 하면 힐난하여 말하기를 “어떤 것을 새것이라고 이름하는가?”라고 한다. 다시 답하기를 “새로운 털로 만들었기 때문에 새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문]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털이 있는데 무엇을 새로운 털이라고 이름하는가?

[답] 나는 앞서 이미 새것이라는 이름을 말했다. 나바는 숫자가 아니다. 힐난하여 묻기를 “지금 이 옷이 너의 것임을 알고 있는데 어찌하여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라고 묻는다. 답하기를 “나는 새 옷을 말했지 이 물건이 너의 소유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하자, 힐난하여 말하기를 “지금 눈앞에 그대가 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어찌하여 옷을 입고 있지 않다고 하는가?”라고 한다. 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새 옷이라고 말하였지 입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이것을 사인(似因)이라고 이름하며 또한 제멋대로 말을 함에 따라서 생기는 허물이라고 한다.

또한 다시 제멋대로 말을 함에 따라서 생기는 허물이란, 비유하면 마치 ‘산이 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실제로는 초목이 타는 것인데 어찌하여 산이 탄다고 하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제멋대로 말을 함에 따라서 생기는 허물이라고 한다. 나아가 모든 법이 전부 다 이와 같다. 또다시 제멋대로 말을 함에 따라서 생기는 허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고, 둘째는 동이(同異)에서 생기는 허물이다. 마치 유위제법(有爲諸法)은 모두 공하고 적멸한 것이 마치 허공과 같다고 말할 때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둘은 전부 공하고 없는 것이다. 무성(無性)의 법은 곧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것을 동이로부터 생기는 허물이라고 한다.

[문] 어찌하여 생긴다고 이름하는가?

[답] 있기 때문에 생긴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마치 진흙에 병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병이 생겨날 수 있는 것과 같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일 진흙에 병의 성품이 있다면 진흙은 곧 병이며, 마땅히 도공과 물레의 화합을 빌려서 병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진흙이 있기 때문에 병이 생긴다고 한다면 물 또한 있으니까 마땅히 병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물이 있는데 병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진흙에서만 병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동이심언생과(同異尋言生過)라고 이름한다.

[문] 사인(似因)에서 의심이 생겨나는 내용은 어떤 것인가?

[답] 어떤 나무의 그루터기가 사람과 비슷하기 때문에 만일 밤에 이것을 보면 곧 ‘이것은 그루터기인가, 사람인가’ 하고 생각한다. 이것을 사인에서 의심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을 때가 지난 사인[過時似因]이라고 하는가?

[답] 마치 ‘소리가 항상하다. 베다 경전에서 소리가 나온 것이므로 항상하다’고 이름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지금 아직 소리가 항상한 인연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곧 베다가 항상하다고 말하는가?”라고 하면, 답하기를, “마치 허공이 형색이 없기 때문에 항상한 것처럼 소리 또한 형체가 없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다. 말은 뒤에 설하였더라도 뜻은 역시 성취된다”라고 말한다. 또다시 힐난하여 말하기를 “이 말은 시간을 지난 것이다[過時]. 마치 집이 모두 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물로 집을 구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대가 바로 이와 같다”라고 한다. 이것을 때가 지난 것이라고 이름한다.

[문] 유동(類同)은 어떤 것인가?

[답] ‘아’와 몸이 다르기 때문에 ‘아’는 곧 항상하다. 마치 병이 허공과 다르기 때문에 병은 무상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유동이라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일 ‘아’가 몸과 다르므로 항상하다고 한다면 병 또한 몸과 다르므로 병도 마땅히 항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병이 몸과 다른 데도 무상하다고 한다면 ‘아’가 비록 몸과 다르다고 해도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는가?”라고 한다. 이것을 동류(同類)라고 한다.

[문] 설동(說同)이란 어떤 것인가?

[답] 마치 “허공은 항상하니, 촉감이 없기 때문이다. 의식 또한 이와 같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설동이라고 한다.

[문] 무엇을 언이(言異)라고 하는가?

[답] 마치 “5진(塵)은 무상하니 근(根)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4대(大)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무상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거북의 털과 소금의 향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의식(意識)으로 얻어지는 바인데 어찌 무상한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언이라고 한다.

[문] 상위(相違)란 어떤 것인가?

[답] 상위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비유의 상위이고, 둘째는 이치의 상위이다. 마치 말하기를 “‘아’는 항상하다. 형애가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소[牛]와 같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비유의 상위라고 한다. 이치의 상위란 마치 “바라문은 왕의 일을 통치하고 도살이나 사냥 등을 가르치고 크샤트리야[刹利] 계급은 좌선과 염정(念定)을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이치의 상위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2법을 어리석은 자는 이해하지 못하여 진실하다고 말하나니 이것을 상위라고 이름한다.

[문] 어떤 것을 불상위라고 이름하는가?

[답] 위의 두 법과 다른 것을 불상위라고 이름하나니 이것을 사인(似因)이라고 이름한다.

2. 명부처품(明負處品)

논자들이 말하기를 “앞에서 여덟 가지 논법을 이미 말하였다. 또다시 논쟁에 지는[負] 법이 많이 있으니 이제 널리 설하고자 한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을 어법(語法)이라고 하는가?

[답] 어떤 사람은 “4대(大)는 거짓 이름이다. 왜냐하면 색 등의 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4대는 실재로 있다. 무엇으로써 이것을 알 수 있는가? 견고함은 지(地)의 성품이고 내지 움직임은 풍(風)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실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서로 상위하는 것으로 다시 다툼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마치 어떤 이가 “지(地)는 몸의 인연을 이루며 나머지 4대 중의 3대도 또한 그러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지(地) 등은 또한 능히 일체의 사물을 이룬다. 어찌하여 오직 몸만을 이룬다고 말하는가?”고 한다. 이것을 틀린 말[非語]이라고 하며, 또한 이와 같지 않은 것을 옳은 말[是語]이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논쟁에 진다[負]라고 하는가?

[답] 마치 “소리는 항상하다. 형색이 없기 때문이다. 허공과 같다”라고 말한다면 힐난하여 말하기를 “소리가 비록 형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근(根)으로 지각되고, 대(對)가 있고 애(碍)가 있다. 마치 만들어진 병과 같다. 그런데 허공의 성품은 이러한 만들어진 법이 아니다. 어떻게 비유될 수 있는가?”라고 하나니 이것을 논쟁에 지는 뜻[負義]이라고 이름한다.

주장하여 말하기를, “병은 바로 형체가 있어서 무상한 것이 될 수 있다. 소리는 형체가 없는 법인데 어떻게 비유가 될 수 있는가?”라고 하면 힐난하여 말하기를, “소리가 비록 병과 다르지만 근(根)으로 지각되고, 귀로 듣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상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어떤 뜻을 논쟁에 지지 않는 것[不墮負處]이라고 하는가?

[답] 제행(諸行)은 식(識)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까닭에 무상하며 열반은 만들어지지 않는 까닭에 항상하다. 이와 같은 말의 구절은 참되고 올바르다. 이것을 논쟁에 지지 않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문] 무엇을 가히 힐난할 만한 것[可難]이라고 하는가?

[답] 만일 말이 뒤바뀌고 인(因)을 내세운 것이 올바르지 않으며 인용한 비유가 같지 않으면 이것은 곧 힐난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상[想]은 능히 번뇌[結]를 끊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묻는 이가 ‘어떻게 상이 곧 번뇌를 끊는다고 하는가?’라고 묻는다. 이는 먼저 지(智)가 상(想)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지 않고 곧바로 상(想)을 말하였기 때문에 이 말은 전도된 것이다. 그러므로 곧 힐난할 만하다.

[문] 어떤 인연으로 거듭 이 말을 하는가?

[답] 사람들로 하여금 주장 없는 이치[無執義]를 세우면 반드시 논쟁에 지고 말 것임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또한 마땅히 물어야 할 것은 묻지 않고, 답해야 할 것은 답하지 않으며, 법의 요체를 세 번 설하여도 다른 이로 하여금 알게 하지 못하며, 스스로도 세 번 법을 설하여도 분별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 모두를 논쟁에 지는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와 함께 논할 때에 상대편의 뜻에 결점이 있고 의미가 빠져 있지만 깨달아 알지 못하여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이 뜻은 잘못되었다.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곧 논쟁에 지는 것이다.

또 다른 이의 올바른 뜻에 허물을 일으키는 것도 역시 논쟁에 지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가 설법을 하는데 대중들이 모두 이해하였지만 홀로 깨닫지 못한다면 이 또한 논쟁에 지는 것이다. 물음 또한 그러하나니, 이와 같이 논쟁에 지는 것은 바로 의논(議論)의 커다란 가시가 되어 깊은 허물과 상처를 입히는 것이니, 마땅히 깨달아 알아서 속히 멀리 여의어야만 할 것이다.

[문] 물음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답]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설동(說同)이고, 둘째는 의동(義同)이고, 셋째는 인동(因同)이다. 만일 모든 논하는 이들이 이 세 가지로써 문답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틀리고 잘못되었다고 한다. 이 세 가지 답 중에서 만일 하나라도 결여되었을 때에는 곧 구족하지 못한 것이 된다. 만일 말하기를 “나는 이러한 세 가지 물음에 자세하게 통달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면, 내가 이해한 바를 따라서 곧 마땅히 서로 물어야 할 것이며 이것 또한 허물이 없다.

설동(說同)이란 마치 어떤 이가 ‘무아(無我)’라고 말한다면 다시 이 말에 의지해서 뒤에 비로소 질문을 하는 것이니, 이것을 어동(語同)이라고 한다.

의동(義同)이란 다만 그 뜻을 취하는 것이니 이것을 의동이라고 한다.

인동(因同)이란 다른 이의 뜻이 인하여 일어난 바를 아는 것이니 이것을 인동이라고 한다. 만약 능히 이와 같으면 이것을 논쟁에 지지 않는다고 이름한다. 만일 경질(輕疾)하여 듣는 자가 깨닫지 못한다면 또한 논쟁에 지는 것이다.

[문] 오직 이것만 있고 다시 나머지 것은 없는가?

[답] 있다. 이른바 어소(語少)ㆍ어다(語多)ㆍ무의어(無義語)ㆍ비시어(非時語)ㆍ의중(義重)ㆍ사본종(捨本宗) 등 이 모두가 논쟁에 지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것으로써 앞의 사람에게 말한다면 이 또한 논쟁에 지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을 본래의 주장에 어긋나는 것[違本宗]이라고 하는가?

[답] 마치 어떤 이가 말하기를, “식(識)은 항상한 법이다. 왜냐하면 식의 체(體)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식체의 생함[生]이고, 둘째는 식체의 쓰임[用]이다.

병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병체(甁體)의 생함이고, 둘째는 병체의 쓰임이다. 그런데 식이 생할 때에는 곧 쓰임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항상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병의 체가 생하고 난 뒤에 비로소 쓰임이 있으니 그러므로 무상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일 생겨남으로써 곧 쓰임이 있는 것을 항상하다고 한다면 등불이 생할 때에 곧 쓰임이 있으니 이 또한 마땅히 항상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답하여 말하기를, “등불은 눈으로 보고 소리는 귀로 듣는다. 어떻게 비유가 되는가?”라고 하니 이것은 본래의 주장에 어긋나는 것[捨本宗]이며 논쟁에 지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또다시 어떤 이가 말하기를 “신(神)은 항상하다. 무엇으로써 이것을 알 수 있는가 하면 근(根)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치 허공과 같아서 근으로써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항상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미진도 근으로써 지각할 수 없지만 무상하다”라고 한다. 답하여 말하기를 “신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하다. 미진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앞에서는 지각할 수 없다고 말하고서 지금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본래의 주장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한다. 답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내가 틀렸다고 말한다. 그대가 나의 말에 어긋나니 그대야말로 틀린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은 상(相)은 그 이치가 있는 것인데도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그대의 말 자체가 앞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에 틀린 것을 말했을 뿐이다. 또한 그대가 앞에서 한 말은 크게 분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는 의심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틀린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의심으로써 틀린 것이 되었다. 또한 논쟁에 진 것이다”라고 한다.

3. 변정론품(辯正論品)

논자가 말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중생(衆生)은 있고 내지 또한 수자(壽者)와 명자(命者)도 있다. 무엇으로써 알 수 있는가? 근으로써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무여열반은 근으로 지각할 수 없기 때문에 없는 것과 같다.

중생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신(神)은 항상하는 법이다. 왜냐하면 아라한과(阿羅漢果)와 같이 오직 당시에만 있을 뿐이고, 전후에는 없기 때문에 없는 것임을 안다. 마치 제2의 머리, 제3의 손 등도 본래는 없는데 지금 있기 때문에 앞에는 없는 것이었음을 안다. 있은 뒤에 또한 멸하기 때문에 뒤에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신은 이와 같지 않으므로 이로써 항상한 것이다”라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마치 나무뿌리와 지하의 물이 보이지 않아서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라한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은 없는 법이 아니다. 그대는 스스로 증명되지 못하였다”라고 한다. 주장하여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물은 땅으로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아라한은 아무런 장애가 없는데도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로써 없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제2의 머리, 제3의 손도 가히 볼 수 없기 때문에 아라한이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일은 옳지 못하다. 비록 제2의 머리가 없더라도 제1의 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라한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곧 모두 없는 것이니 어떻게 비유가 될 수 있는가? 또 그대는 지각할 수 없음으로써 열반이 없다고 했는데 이 또한 그렇지 않다. 마치 대해의 물은 몇 방울인지 알지 못한다고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물방울의 숫자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바다는 있는 것이다. 열반 또한 그러하다. 비록 지각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실재로 이것 자체는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없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인연을 설한다. 만일 능히 설하지 못한다면 그대의 뜻은 저절로 무너진다. 이것은 곧 법다운 논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만일 지각할 수 없음으로써 열반이 없음을 증명한다면 다른 이가 곧 의심을 일으킬 것이다. 마치 밤에 나무를 보고서 마음으로 그루터기인지, 사람인지 의심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이 나무는 사람의 인으로 결정된 것도 아니고, 그루터기의 인으로 결정된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만일 지각할 수 없는 것이 열반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면 마땅히 의심을 내서는 안 된다. 또 모든 업보는 훼멸할 수 없기 때문에 열반은 있다. 비유하면 마치 큰 불이 산과 숲을 태우면 불은 그 멸인(滅因)이 된다. 지금 이 업보는 어떤 멸인이어서 멸함을 얻겠는가? 만일 열반을 얻으면 곧 흩어지고 무너질 것이다”고 한다.

주장하여 말하기를, “실제로 멸인이 있다.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역시 열반이 있으니 다만 어리석음의 장애로 말미암기 때문에 보지 못할 뿐이다. 또한 그대가 지금 만일 모든 업에 멸인이 있는지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대의 뜻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만일 멸인이 없어서 설하지 않는다면 또한 장애가 없을 것인데 무엇하러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러한 것 등의 조건으로써 업은 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곧 법다운 논이다”고 한다. 주장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바다의 물이 있기 때문에 열반이 있음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면 어찌 다시 능히 제2의 머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만일 설령 제2의 머리가 있을 수 없다면 열반이 어떻게 홀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의 바닷물의 비유는 능히 주장되어질 수 없다. 열반은 있는데 어떻게 능히 제2의 머리가 있음이 성립하겠는가?”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뜻은 만일 열반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없음은 있는 것인가?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인가? 만일 없는 것을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열반이 없음을 깨달아 알 수 있겠는가? 만일 이 없음이 있다면 어떻게 전혀 있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만일 없는 열반의 법이 비록 있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없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것은 없음이 있는 것인데, 무슨 까닭에 열반이 있지 않다고 하는가? 마땅히 인연을 설해야 한다. 만약 능히 말하지 못한다면 열반은 결정코 실제로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 또한 법다운 논이라고 한다”고 한다.

묻기를, “신(神)은 항상한가, 무상한가?”라고 하자, 주장하여 말하기를, “신은 조작된 것이 아니므로 항상하다. 병 등은 지어진 법이기 때문에 이것은 무상하다”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일 지어진 것이 아님으로써 신이 항상한 것을 증명한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무엇으로써 알 수 있는가? 사람들이 의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일 만들어지지 않은 신이 항상하다면 마땅히 항상한가, 무상한가라고 하는 의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 의심을 내는 까닭에 허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주장하여 말하기를, “이 허물은 오직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논자들 모두에게 이런 허물이 있다. 마치 소리는 항상하나니 형색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몸이 있나니 숙명지(宿命知)로써 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입의(立義)도 앞에서와 같이 의심을 일으키므로 전부 이러한 허물이 있는 것이다”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비유는 의심을 해결한다. 그대가 인용한 비유는 나에게 의심을 일으키게 하였으므로 이것은 비유로써 성립하지 못한다. 비유가 성립하지 못한다면 뜻은 곧 저절로 무너진다. 곧 논쟁에 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곧 말하기를 모든 것이 허물이 있으니 오직 나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스스로의 허물이지 나머지 사람들의 허물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신들려서 스스로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서 모두 다 도둑이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 자신도 도둑인 것과 같다. 그대 또한 이와 같아서 논쟁에서 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그대가 만일 스스로 증명하고자 한다면 먼저 이치가 옳아야 한다. 반드시 다시 설하고자 한다면 곧 많은 허물에 빠질 것이다. 그대의 첫째 주장은 둘째에서 이미 논파하였고, 셋째 이치는 내가 다시 비난하였고, 제5의 것으로써 허물을 멈추고자 한다면 처음 또는 그대의 나중 이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곧 중복되는 것이다. 만일 거듭 허물이 있다면 곧 논쟁에 지게 될 것이다.

[문] 설령 제6의 사람도 곧 물을 수 있겠는가?

[답] 제5의 사람이 이미 허물을 이루었는데 무엇 하러 다시 제6의 사람이 물을 수 있겠는가? 만일 반드시 이것을 설한다면 앞에서와 같은 허물일 것이니 물음에 이미 허물이기 때문에 답은 마땅히 침묵해야만 한다. 또한 제6의 사람이 과실이 있어도 제5의 사람은 이것을 힐난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제5로 말미암기 때문에 제6의 사람이 곧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이미 스스로 허물이 있으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를 탓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순서를 바른 법의 논이라고 한다.

4. 상응품(相應品)

[문] 그대는 이미 법다운 바른 논을 분별하였다. 무엇을 상응의(相應義)라고 이름하는가?

[답] 물음과 답이 상응하는 것에 스무 가지가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스무 가지의 뜻으로써 바른 이치를 내는 것을 도울 수 있다면 이 사람은 곧 진실한 논을 이해하였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논의의 법에 통달하였다고 이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스무 가지는 간략하게 말하면 곧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다름[異]이고, 둘째는 같음[同]이다. 같음으로써 뜻을 드러내는 것을 같음(同)이라고 하고, 다름으로써 뜻을 드러내는 것을 다름(異)이라고 한다. 무릇 뜻이 되는 것은 반드시 이 두 가지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이 둘은 스무 가지 법에 통한다. 어떤 것을 같음이라고 이름하는가? 마치 어떤 이가 말하기를 “번뇌가 다하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허공의 성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을 같음이라고 이름한다. 어떤 것을 다름이라고 하는가? 마치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열반은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다”고 하자 곧 모든 행은 지어졌으므로 무상하다고 아는 것이다. 이것을 다름이라고 한다.

[문] 이 같음과 다름의 뜻은 어떻게 힐난하는가?

[답] 같음을 힐난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말을 해야 한다.

“색은 눈으로 보고 소리는 귀로 듣는다. 어떻게 같다고 말하는가? 만일 색이 소리와 다르면 색 자체는 무상하고 소리는 마땅히 항상해야 한다.”

만약 다름을 힐난하고자 한다면 “색은 근으로써 지각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아’는 근으로 지각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하다. 병과 ‘아’는 모두 존재[有]가 있다. 만약 같다고 한다면 병은 이미 무상하니까 ‘아’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만약 병의 존재와 ‘아’의 존재가 다르다고 한다면 ‘아’는 항상하지만 병은 무상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언제나 존재함이 이미 같으므로 ‘아’도 응당 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힐난은 스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증다(增多), 둘째는 손감(損減), 셋째는 동이(同異), 넷째는 문다답소(問多答少), 다섯째는 답다문소(答多問少), 여섯째는 인동(因同), 일곱째는 과동(果同), 여덟째는 변동(遍同), 아홉째는 불변동(不遍同), 열째는 시동(時同), 열한째는 부도(不到), 열두째는 명도(名到), 열셋째는 상위(相違), 열넷째는 불위(不違), 열다섯째는 의(疑), 열여섯째는 불의(不疑), 열일곱째는 유파(喩破), 열여덟째는 문동(聞同), 열아홉째는 문이(聞異), 스무째는 불생(不生)이다. 이것을 스무 가지의 문답법(問答法)이라고 한다.

[문] 이 스무 가지의 법을 분별하여 말하여라.

[답] 증다(增多)란 것은 마치 “‘아(我)’는 항상하다. 근(根)으로 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허공도 지각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하다. 일체가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면 모두가 항상하지만 ‘아’는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닌데 어찌 항상 할 수 없겠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허공은 앎이 없기 때문에 항상하다. ‘아’는 앎이 있는데 어떻게 항상하다고 말하겠는가? 만일 허공에 앎이 있다면 이것은 도리가 아니다. 만일 ‘아’가

앎이 없다면 허공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앎이 있는 것은 반드시 무상하다”라고 한다. 이것을 증다라고 이름한다.

손감(損減)이란 만일 허공에 앎이 없지만 ‘아’에게는 앎이 있다면 어떻게 허공으로써 ‘아’를 비유하겠는가? 이것을 손감이라고 이름한다.

동이(同異)란 마치 ‘아’의 항상함을 허공의 비유를 인용하여 주장하는데, 허공과 ‘아’가 같다면[一] 하나의 법이 될 것인데 어떻게 허공으로써 ‘아’를 비유할 수 있겠는가? 만약 다르다면 서로 비유가 될 수 없다. 이것을 동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그대가 “‘아’는 항상하다.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이 지각되는 것이 아니어서 항상한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근이 지각할 수 없는 것이 반드시 모두 항상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증명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이름하여 문다답소(問多答少)라고 한다.

또한 그대는 ‘아’의 항상함을 주장하면서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근으로 지각되지 않는 법에는 무릇 두 가지가 있으니 미진(微塵)은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닌데 이것은 무상한 것이고, 허공은 지각되지 않는데 이것은 항상한 법이다.

그대는 어떻게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이름하여 다섯 번째인 문소답다(問少答多)라고 한다.

또한 그대는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님을 원인으로 하여 ‘아’가 항상함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허공과 ‘아’는 다른데 어떻게 함께 지각되지 않는 것을 원인으로 하겠는가? 이것을 인동(因同)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5대(大)로 이루어진 것은 모두 다 무상하다. 허공과 ‘아’도 또한 5대로 이루어졌다. 어떻게 항상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이름하여 과동(果同)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그대는 허공이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허공은 온갖 곳에 두루해 있는데 온갖 곳에 있는 사물이 어떻게 지각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이름하여 변동(遍同)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미진은 두루하지 않지만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무상한 법이다.

‘아’는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불변동(不遍同)이다.

또한 그대는 ‘아’의 항상함을 주장하여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것은 현재인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만일 과거라고 말한다면 과거는 이미 멸해 버렸으며, 미래라고 말한다면 미래는 아직 있지 않으며, 현재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인(因)이 될 수 없나니, 마치 두 개의 뿔이 나란히 생겨나는 것과 같아서 곧 서로의 인이 될 수 없다. 이것을 시인(時因)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대는 ‘아’의 항상함을 주장하면서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도달하는 것[到]으로 인(因)이 되는가, 도달하지 않은 것[不到]이 되는가? 만일 도달하지 않을 때에는 곧 인을 이루지 못하나니 불이 도달하지 않았을 때 곧 태우지 못하는 것과 같고, 칼이 도달하지 않았을 때에 곧 자를 수 없는 것과 같다. 자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인이 된다고 하겠는가? 이것을 부도(不到)라고 이름한다. 또한 만일 도달하여 원인이 되는 것이라면 도달하자마자 원인의 뜻이 없어진다. 이것을 이름하여 도(到)라고 한다.

또한 그대는 일체가 무상하지만 ‘아’는 일체가 아닌 까닭에 항상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아’는 곧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해야 할 것이다. 마치 헝겊이 조금일 때는 타지만, 많을 때는 타지 않는 까닭에 타지 않는다[不燒]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상위(相違)라고 이름한다.

또한 그대는 ‘아’가 근으로 지각되지 않아 허공과 같으니, 허공은 지각되는 것이 아니며 ‘아’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말하였다. 만일 ‘아’가 지각된다면 허공 또한 마땅히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 허공과 ‘아’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불상위(不相違)라고 한다.

또한 ‘아’는 존재[有]와 같은 까닭에 일정하게 항상하지 않으며, ‘항상한가, 항상하지 않은가’라고 의심을 일으켜도 좋다고 인정한다. 이것을 의(疑)라고 한다.

또한 그대가 근에 지각되지 않는 ‘아’가 있다고 말하면 의심이 들 수 있다. 어떤 장애가 있으므로 지각할 수 없는가? 인연을 말해 보라. 만약 인연이 없다면 ‘아’의 뜻은 저절로 무너진다. 이를 불의(不疑)라고 말한다.

또한 그대는 말하기를 ‘아는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닌 까닭에 항상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나무의 뿌리나 땅 밑의 물 또한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지만 무상하다.

어떻게 아가 항상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유파(喩破)라고 이름한다.

또한 그대는 “경(經)에서 설하기를 ‘아’는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함을 안다”고 말하였다. 경 속에는 또한 ‘아’와 ‘아’소가 없다고 설하였다. 니건(尼乾, Jaina)의 법 속에서도 ‘아’가 항상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아’가 항상하다고 정해졌으면 모든 경에서 같다고 해야지, 다르다고 하지 않았어야 한다. 이것을 문동(聞同)이라고 한다.

또한 만일 그대가 하나의 경을 믿어서 ‘아’가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또 마땅히 다른 경에서 ‘아’가 무상하다고 한 것을 믿어야 한다. 만일 두 가지를 믿는다면 하나의 ‘아’가 곧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문이(聞異)라고 한다. 또한 그대는 인(因)이 있어서 ‘아’가 있음[有]을 안다고 한다면 사라수의 씨앗[娑羅樹子]이 이미 있기 때문에 마땅히 다라(多羅)나무를 낳아야 할 것이다.

만일 없기 때문에 없음을 안다면 다라나무의 씨앗 속에는 나무의 형상이 없으므로 나무를 낳을 수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있으면서도 낳지 못하고, 없으면서도 낳지 못한다면 ‘아’도 또한 그와 같다. 만일 반드시 있다고 한다면 근(根)이 지각하지 못함을 인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만일 ‘아’가 반드시 없으면 근이 지각하지 못함을 가지고 존재하게 할 수 없다. 이것을 이름하여 불생(不生)이라고 한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소리는 항상하다고 주장하더라도 또한 위의 스무 가지 법의 동이(同異)로써 이것을 논파한다.

[문] 이 스무 가지는 곧 인연이 있어서 스스로 해설하는가?

[답] 스스로 있다. 마땅히 물어서 말하기를, “‘아’가 있음으로써 말미암아 그대는 ‘아’를 논파한다. 만일 무아라면 그대는 무엇을 논파하겠는가? 논파하는 주체[能破]가 있음으로써 논파되는 대상[所破]이 있다”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이치로서는 실로 무아이다. 그대가 멋대로 집착해서 있다고 하는 까닭에 나는 그대를 비난하는 것이다. 그대가 ‘논파되는 대상이 있음으로써 ‘아’가 있다’고 한다면 논파하는 주체가 있음으로써 무아임을 알 것이다. 만일 말하기를, 그대가 ‘아’의 뜻에 집착함으로써 무아를 밝힌다고 한다면, 이 일은 그렇지 않다. 그대의 뜻을 이용하지 않았다. 지금 그대가 스스로 내가 집착한 것을 채택할 뿐이다”고 한다. 주장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어떻게 내가 그대의 뜻에 집착함을 아는가? 마땅히 인연을 설해야 한다”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내가 앞에서 그대의 뜻에 집착함이 아니라 그대가 다른 주장에 집착한다고 말하였다. 무슨 까닭에 지금 ‘어떤 것이 내가 그대의 뜻에 집착함을 아는가’라고 다시 묻는가? 그대의 말은 자신에게 틀리며 곧 논쟁에 지는 것이다. 또한 그대는 처음에 근이 지각하지 못하는 까닭에 실로 ‘아’가 있음을 안다고 하고, 후에 뭇 법으로써 증명하였지만 인(因)을 내세우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주장하는 이치도 그릇되어 또한 논쟁에 지고 말았다. 그대의 뜻이 이미 무너졌다. 내가 만일 다시 설하여도 처음을 벗어나지 못하며, 말을 받음에도 허물이 많다.

무릇 문답에 있어서 답은 기껏 다섯 가지를 넘지 못한다. 이 이상을 넘어서는 것은 모두 허물이라고 이름한다. 만일 지혜가 있어서 깊이 이치를 사유하면 널리 비유를 설하여 능히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논한 내용도 이 법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논자가 말하기를, 이미 위와 같이 모든 논법의 요체를 설하였다. 이 논의 요체는 모든 논의 근본이다. 논으로 말미암는 까닭에 널리 문답을 일으키고 지혜를 자라게 한다. 만일 종자가 좋은 땅을 만나면 뿌리와 줄기가 무성해지지만, 나쁜 밭에 뿌려지면 열매가 생기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 법 또한 그러하다. 만일 지혜가 있어서 능히 잘 사량할 때에는 곧 널리 모든 논을 일으키지만, 만일 지혜가 적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이 논을 익히더라도 능히 통달할 수 없고, 곧 진선지견(眞善知見)이라고 이름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실지(實智)를 낳아서 선악을 분별하려는 모든 이들은 마땅히 이 정법론을 부지런히 닦고 익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