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ttara mimamsa sutra
purva mimamsa sutra
the Śrī Bhāṣya (henceforth
ŚrīBh) commentary on the Brahma Sūtra (henceforth UMS)
인도철학사 강의안 13
- 미망사와 베단따 -
1. 미망사와 베단따의 전통
『베타(Veda)』를 반성적으로 탐구하는 두 학파가 있다. 『베다』의 제사 행위를 학문적 탐구의 대상으로 하는 뿌르와미망사(Pūrva-mīmāṃsā)와 브라흐만에 대한 철학적 지식을 연구하는 우따라미망사(uttara-mīmāṃsā)가 그것이다. 전자의 뿌르와미망사를 일컬어 단순히 미망사(mīmāṃsā)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후자의 우따라미망사는 『베다』의 끝 부분에 해당하는 『우빠니샤드(Upaniṣad)』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데, 이를 그냥 베단따(Vedānta)로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미망사와 베단따라는 이름은 그대로 학파의 명칭이 된다. 이들 두 학파는 『베다』에 대한 충실한 연구와 해석을 주요 관심사로 하였기 때문에, 육파철학 내부의 다른 학파들에 비해서도 더 정통적이다. 특히 미망사의 제식에 관한 탐구는 행위편(行爲篇, karma-kāṇda)으로 일컬어지는 『베다』의 본집(saṁhitā)과 『브라흐마나(Brāhmaṇa)』 문헌을 근거로 하며, 베단따의 철학적 사색은 지식편(知識篇, jñāna-kāṇda)으로 일컬어지는 『우빠니샤드』에 의존해 있다.
미망사의 창시자는 기원전 2세기 경의 인물로 추정되는 자이미니(Jaimini)이며, 근본 경전은 서력기원 1세기 무렵에 저술된 것으로 간주되는 『미망사수뜨라(mīmāṃsā-sūtra)』이다. 이 문헌에 대해서는 5세기 경의 샤바라스바민(Śabarasvāmin)과 7세기 경의 쁘라브하까라미슈라(Prabhākara Miśra)와 8세기 경의 꾸마릴라브핫따(Kumārila Bhaṭṭa) 등이 주석을 하였다. 특히 꾸마릴라브핫따는 샤바라스바야민의 주석에 대한 三部의 해설서를 저술하였으며, 대승불교의 공사상(空思想)을 신랄하게 공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베단따 철학은 『우빠니샤드』 철학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빠니샤드』의 가르침을 간략하게 체계화한 문헌으로서 『베단따수뜨라(Vedānta-sūtra)』 혹은 『브라흐마수뜨라(Brahmasūtra)』로 부르는 소의경전을 지닌다. 이 경전은 서력기원 1세기 경의 바다라야나(Bādarāyaṇa)가 쓴 것으로 전해져 왔지만, 현재의 형태로 완성된 것은 4-5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이 경전에 대한 가장 유명한 주석서로는 A.D. 8세기 경에 상까라(Śaṅkara)가 쓴 『브라흐마수뜨라브하샤(Brahmasūtra-Bhāṣya)』가 있다.
2. 미망사의 언어관
미망사에서는 우주의 창조와 질서, 그리고 인간의 내세와 현세의 운명, 길흉화복 등이 모두 제사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에 관한 규범과 방법, 절차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 곧 『베다』이므로 『베다』는 영원불변한 말씀으로 간주하였다. 미망사의 철학적 관심사는 『베다』가 명하는 행위의 의미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베다』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발달시켰는데, 그것의 결과로서 문법학(grammar)․운률학(metrics)․어원학(etymology)․음성학(phonetics)․논쟁술(eristic) 등이 집대성되었다.
미망사의 관심사는 제사의 대상인 신이 아니라 제사의 행위 자체였다. 그들은 『브라흐마나』 문헌의 제식주의적 사고를 이어받아 제사의 행위는 신의 존재여부와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그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미망사의 철학은 행위의 결과를 보증하는 최고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결과로 나아갔다. 따라서 미상사에서는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한다.
미망사에서는 『베다』 자체가 영원한 권위를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언어에 관한 독특한 이론들을 전개하였다. 『베다』란 언어(śabda)로 이루어진 까닭에 언어에 의한 인식은 곧 『베다』의 의미에 대한 인식으로 통하였다. 언어와 대상의 관계(saṁbandha)는 인간의 약정이나 자재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래부터 주어진 영원한 관계(anutpattika-saṁbandha)이다.
생성되고 소멸하는 말소리(dhavani)는 그 배후의 지각되지 않는 참다운 언어를 드러내는 수단이다. 참다운 언어는 즉 샵다(śabda)는 영원불변(nitya)하고 모든 곳에 편재하는(sarvagata) 존재이다. 즉 샵다(śabda)는 이데아에 비교할 수 있고 말소리(dhavani)는 그것의 모사에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여러 사람이 각각 다른 톤과 음색으로 ‘아’를 발음하더라도 그들 모두는 동일한 ‘아’로 인식될 수 있다.
생성되고 소멸하는 말소리(dhavani)는 그 배후의 지각되지 않는 참다운 언어를 드러내는 수단이다. 참다운 언어는 즉 샵다(śabda)는 영원불변(nitya)하고 모든 곳에 편재하는(sarvagata) 존재이다. 즉 샵다(śabda)는 이데아에 비교할 수 있고 말소리(dhavani)는 그것의 모사에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여러 사람이 각각 다른 톤과 음색으로 ‘아’를 발음하더라도 그들 모두는 동일한 ‘아’로 인식될 수 있다.
샵다(śabda)가 영원하듯이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artha)도 또한 영원하다. 이때 샵다(śabda)가 지시하는 대상(artha)은 생멸․변화하는 개체(vyakti)가 아니라 개체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보편성(ākṛti)이다. 이때의 보편성(ākṛti)은 와이세시까의 보편(sāmānya)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미망사에 있어서는 샵다(śabda)는 곧 『베다』이고, 아르타(artha)는 탐구의 주제로서 『베다』의 다르마(法, dharma)를 가리킨다. 『베다』는 신의 창작물도 아니고 인간의 창작물도 아니다. 원인을 가진 모든 것은 소멸하지만 『베다』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하는 영원한 것이다. 또한 『베다』가 대상으로 하는 다르마는 초감각적이므로 감각을 바탕으로 하는 인식방법에 의해 검증될 수도 없고 또한 반증될 수도 없다.
『베다』의 말이 일으키는 인식은 ‘이것이 그러하다(evaṁ ayaṁ arthaḥ)’라는 직접적인 인식이며, 사람이나 타 인식수단에 의존하지 않는(anapekṣa) 자립적 진리(svataḥ-prāmāṇya)이다. 따라서 공통성의 관찰(sāmānyato-dṛṣṭa) 따위에 의해 『베다』의 말에도 오류가 있다고 추리하는 것은 근거를 지니지 못한다. 『베다』의 말에 의한 인식은 초감각적인 다르마에 대한 것이므로 추리보다 우선적 권리를 갖는다.
3. 미망사의 형이상학
미망사는 와이세시까의 형이상학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와이세시까의 범주론이 미망사에서도 대체로 통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와이세시까에서는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결합 문제라든가 원자와 영혼과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창조신 이유와라(Īśvara)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미망사는 그런 존재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미망사에 따르면 영혼은 오직 자신의 업의 공과에 따라 육체를 차지하게 된다.
특히 꾸마릴라의 창조설 비판은 유명하다. 그는 먼저 물질의 창조 이전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신이 몸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창조의 욕망도 낼 수 없으며, 몸이 있었다면 그의 창조적 행위 이전에 이미 물질이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한편 창조의 동기도 알 수 없다. 신이 어떤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세계를 창조했다고 보기란 힘들다. 세계의 많은 고통과 죄악을 볼 때 신이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은 용서하지 못할 일이다. 한편 신이 단순히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 세계를 창조했다면 그것은 신 스스로가 완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쓸데없이 바쁜 일에 애쓰기만 한 셈이다.
미망사는 최고신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무신론을 주장하지만 업보를 누리게 되는 자아 혹은 영혼의 불멸성은 인정하였다. 육체의 요소들은 知性이 없기 때문에 그들만의 결합은 결코 지성을 산출하지 못한다. 우리가 ‘나의 몸’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내’가 ‘몸’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기억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도 어떤 정신적인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 혹은 자아란 존재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미망사 학파는 본래 제사의 행위와 이에 따른 결과를 궁극적인 관심사로 한 철학이다. 따라서 올바른 제사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천상의 지복을 이상으로 하는 소박한 형이상학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타학파의 영향을 받아 자아의 해탈, 즉 육체와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최고의 삶의 이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탈을 자아가 좋고 나쁜 행위와 육체를 떠나 순수하게 존재하는 상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자아의 상태에서는 아무런 인식이나 경험도 있을 수 없다. 희열도 느껴지지 않는다. 고통과 즐거움을 떠나서 오로지 자아 본래의 상태에 들어갈 뿐이다.
미망사의 실천론은 『바가바드기타』의 카르마요가(Karma-Yoga)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사심 없는(niṣkāma) 행위의 요가(Karma-yoga)의 실천을 중요시하였다. 즉 해탈에 이르는 방법을 ‘자아를 아는 지식’과 ‘의무적인 행위’를 이해심 없이 순수하게 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미망사는 『베다』의 명령과 제사 그리고 사회적 의무와 해탈에 대한 욕구를 동시에 충족하였다.
4. 베단따 철학의 개요
베단따에서는 궁극적이고 유일한 실재인 브라흐만(Brahman)과 아뜨만(Ātman)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에 따르면 모든 현상적인 것은 신기루나 꿈과 같이 거짓으로 나타난 것(幻, māya)이다. 참다운 실재로서의 브라흐만은 어떠한 속성도 갖지 않고 감각이나 개념적 사고로도 파악할 수 없다.
궁극적인 실재는 시간이나 공간, 인과성에 속하는 어떠한 개념이나 범주도 넘어선다. 언어로는 규정할 수 없는 까닭에 인간의 의식에서는 無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브라흐만 자체는 결코 無가 아니며 오히려 존재의 충만(sat)이자 순수의식(cit)이며, 영적 희열(ānanda)이다.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윤회의 속박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을 기본구조로 하는 베단따는 절대자의 해석에 관한 입장의 차이로 여러 분파로 나뉜다. 이들 분파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A.D. 8세기 경에 상까라(Śaṅkara)가 주창한 아드바이따(Advaita, 不二論)와 A.D. 11세기 경에 라마누자(Rāmānuja)가 내세운 비시스따드바이따(Viśiṣṭādvaita, 制限不二論)가 있다. 전자가 비인격적인 절대자로서의 브라흐만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브라흐만을 인격적인 유일신인 이슈와라(Īśvara)로 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상까라(Śaṅkara)의 불이론은 심오한 사변과 종교적 깊이에 있어서 힌두 철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라마누자(Rāmānuja)는 당시 대중 가운데 성행하던 비쉬누(Viṣnu, =Bhāvagad) 신앙에 대해 신학적 바탕을 마련해 주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상까라의 무신론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브라흐만을 유신론적으로 해석하였다. 이들 두 사상은 중세 이후 오늘날에까지 인도의 종교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인도 힌두교도의 80%는 이 베단따의 추정자들이다.
5. 상까라의 아드바이따베단따(Advaita-Vedānta)
실재에 대한 상까라(Śaṅkara)의 이론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破棄(sublation, subration)이다. 파기란 판단의 오류를 수정하고 정정하는 심적 과정이다. 이것은 이전에 경험한 것을 상충되는 새로운 경험에 비추어 그릇된 것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격하시킬 때 사용된다. 상까라에 있어서 파기의 가능성은 존재론적 위상의 기준이 된다.
파기란 正(these)․反(antithese)․合(synthese)으로 구성되는 변증법(dialectic)에서의 止揚과 유사하다. 그런데 이것은 기존의 모순을 고차적으로 통일하여 새로운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문제시되는 상황을 해소함으로써 이전의 근원적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는 논리이다. 파기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파기의 결과로서 생겨난 그것에 대해 보다 낮은 정도의 실재성과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파기의 가능성에 근거하여 상까라는 실재(reality)와 현상(appearance) 그리고 비실재(unreality)를 구분하였다.
상까라에 따르면 실재의 경험은 모든 구분을 초월한 것이며 자아와 피자아 사이의 동일성의 경험이다. 따라서 실재의 경험은 다른 모든 것을 파기시킬 수 있지만, 그 자체는 다른 어떤 경험에 의해서도 파기되지 않는다. 파기란 경험자와 피경험자의 구분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적 존재는 원리적으로 파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는 다시 3가지 존재자가 있다. ㉠ 참존재자, ㉡ 존재자, ㉢ 환영적 존재자가 그것이다.
㉠ 참존재자는 오직 실재에 의해서만 파기될 수 있다. 예컨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이원성은 다양성과 복수성의 영역 내에서 어떠한 경험에 의해서도 파기될 수 없다. 이것의 파기는 오로지 모든 구분을 초월하는 실재의 경험뿐이다.
㉡ 존재자는 상식적, 논리적, 과학적, 사회적 관행 등을 영역으로 한다. 존재자는 실재와 참존재자 모두에 의해 파기 가능하다. 이들은 합의된 규칙과 틀에 근거한 약정적 지식을 특성으로 한다. 이들은 또한 상반되는 고차적 지식에 의해 파기 가능하다.
㉢ 환영적 존재자는 모든 종류의 경험에 의해 파기될 수 있다. 이것은 착각과 꿈 따위의 모든 그릇된 지각을 포함한다.
이상과 같이 실재란 어떤 다른 경험에 의해서 파기될 수 없는 것이고, 현상이란 다른 경험들에 의해 파기될 수 있는 일상적인 경험 내용이다. 반면에 비실재란 파기될 수도 안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서 객관적 대응자를 가질 수 없는 까닭이다.
한편 상까라(Śaṅkara) 철학에서 파기의 개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마야(幻, māya)이다. 마야란 파기가 가능한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려는 지속적인 성벽이다. 즉 현상을 실재로 보려는 경향을 말한다. 파기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구분을 각성하지 못함으로써 인간이라는 현상을 실재라고 그릇되게 믿는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마야는 실재의 창조력으로서, 이것에 의해 다양성과 다수성의 세계가 발생한다. 따라서 실재의 창조적 힘으로서의 마야를 ‘실재의 우주적 유희(līla)’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상은 비실재와 달리 실재에 근거하는 까닭에 비실재와 구분되어야 한다.
한편 마야와 교환이 가능한 개념으로서 무지(avidya)가 있다. 무지란 실재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논리적․시간적 관점에서 마야와 공존한다. 그러나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무지가 마야보다 선행한다. 무지가 실재의 인식으로 정복되면 더 이상 마야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은 어떤 다른 경험에 의해서도 파기될 수 없는 유일한 실재이며, 변화하는 외적 현상계의 밑바닥에 놓인 존재이다. 더불어 아뜨만은 내부적인 현상계의 밑바닥에 놓인 불변의 실재로서 이들 둘은 동일하다. 삿-찟-아난다(sat-cit-ānanda)는 이러한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사라질 때 경험하는 초월적인 환희의 상태이다.
아드바이따 베단따(Advaita Vedānata)라는 이름은 아뜨만과 브라흐만 사이의 구분을 거부하는 맥락에서이다. 또한 양자는 파기 가능한 모든 개념적 영역을 벗어나 있으며 그것의 속성에 대해 적극적인 언급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일원적(monistic)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며 不二라는 용어를 쓸 수밖에 없다.
상까라는 인간의 속박과 고통이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이러한 무지는 실재에 대한 인식 즉 梵我一如의 인식을 통해 극복된다. 따라서 실재에 대한 인식은 곧 치유적 인식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태어남과 죽음은 현상계에 제한된 마야와 무지의 산물이다. 무지가 극복될 때 인간은 태어남과 죽음에 관계없는 삶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해탈이란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성취되는 梵我一如의 지고한 의식상태이다.
6. 라마누자의 한정불이론적 베단따(Viśiṣṭādvaita Vedānta)
라마누자(Rāmānuja)는 상까라의 불이론이 인간의 종교적 열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문제 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인간과 신 사이의 동일성과 차별성을 동시에 보전시켜 주는 방식으로 베단따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몰입하였다. 그에 따르면 브라흐만은 현상계의 밑바당에 놓인 基體(ādhāra)이자 통제자(niyāmaka)이며 주인(śeṣa)이다.
라마누자는 사람의 영혼이 신체와 다르지만 신체를 통제하고 지도하듯이, 브라흐만은 우주와 다르지만 그것을 통제하고 지도한다. 그에게서 신과 세계의 관계는 마음과 몸의 관계(śarīri-śarira-samvandha)로 규정되었다. 한편 그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관자(ādhāra)와 피주관자(ādheya), 주인(śeṣin)과 종(śeṣa), 실체(viśeṣya)와 속성(viśeṣaṇa), 본질(prakārī)과 양태(prakāra), 전체(aṁśī)와 부분(aṁśsa)으로 설명하였다.
현상세계는 독립된 실재는 아니지만 브라흐만이 관여되어 있으므로 이것 역시 실재이어야 한다. 개아와 사물들은 궁극적으로 실재의 부분으로서 실재이지만 그것에 의존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즉 전체의 부분으로서 구분이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체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라마누자의 생각을 제한적 불이론(viśiṣṭādvaita)이라고 한다.
라마누자에 따르면 자아는 궁극적 실재의 경험 가운데 구분된 채로 존재한다. 따라서 실재의 경험이란 자아와 비아의 구분이 말살되는 경험이 아니라 자아가 실재의 단일성을 의식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상까라는 무종자삼매(無種子三昧, nirbījasamādhi)를 인정하지만 라마누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학습과 반성의 결과 그 자신이 신체나 어떤 다른 물질적 신체와 동일한 것이 아니고, 우주의 창조주이자 유지자, 파괴자인 신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더불어 구제가 의무와 제식의 수행 혹은 지적인 이해만으로 달성될 수 없고 신의 자유롭고 자애로운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인간은 신에 대한 봉사에 자신을 완전히 바쳐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신성한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생기며, 그것을 통해 무지와 이기심과 까르마를 파괴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해탈된 자아는 그 개체성과 의식을 보존하면서 신의 무한한 영광 속에서 최고의 희열을 영원히 누리게 된다.
* 참고문헌
권오민 지음, 『인도철학과 불교』, 서울: 민족사, 2004.
길희성 지음, 『인도철학사』 서울: 민음사, 1989.
이지수 옮김, 『인도철학』, 서울: 민족사, 1991.
이거룡 옮김, 『인도철학사』 4권, 서울: 한길사, 1999.
『베다』의 제사 행위를 학문적 탐구의 대상으로 하는 뿌르와미망사(Pūrva-mīmāṃsā)와 브라흐만에 대한 철학적 지식을 연구하는 우따라미망사(uttara-mīmāṃsā)가 그것이다. 전자의 뿌르와미망사를 일컬어 단순히 미망사(mīmāṃsā)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후자의 우따라미망사는 『베다』의 끝 부분에 해당하는 『우빠니샤드(Upaniṣad)』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데, 이를 그냥 베단따(Vedānta)로 부르기도 한다.
인도철학사 강의안 13
- 미망사와 베단따 -
1. 미망사와 베단따의 전통
『베타(Veda)』를 반성적으로 탐구하는 두 학파가 있다. 『베다』의 제사 행위를 학문적 탐구의 대상으로 하는 뿌르와미망사(Pūrva-mīmāṃsā)와 브라흐만에 대한 철학적 지식을 연구하는 우따라미망사(uttara-mīmāṃsā)가 그것이다. 전자의 뿌르와미망사를 일컬어 단순히 미망사(mīmāṃsā)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후자의 우따라미망사는 『베다』의 끝 부분에 해당하는 『우빠니샤드(Upaniṣad)』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데, 이를 그냥 베단따(Vedānta)로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미망사와 베단따라는 이름은 그대로 학파의 명칭이 된다. 이들 두 학파는 『베다』에 대한 충실한 연구와 해석을 주요 관심사로 하였기 때문에, 육파철학 내부의 다른 학파들에 비해서도 더 정통적이다. 특히 미망사의 제식에 관한 탐구는 행위편(行爲篇, karma-kāṇda)으로 일컬어지는 『베다』의 본집(saṁhitā)과 『브라흐마나(Brāhmaṇa)』 문헌을 근거로 하며, 베단따의 철학적 사색은 지식편(知識篇, jñāna-kāṇda)으로 일컬어지는 『우빠니샤드』에 의존해 있다.
미망사의 창시자는 기원전 2세기 경의 인물로 추정되는 자이미니(Jaimini)이며, 근본 경전은 서력기원 1세기 무렵에 저술된 것으로 간주되는 『미망사수뜨라(mīmāṃsā-sūtra)』이다. 이 문헌에 대해서는 5세기 경의 샤바라스바민(Śabarasvāmin)과 7세기 경의 쁘라브하까라미슈라(Prabhākara Miśra)와 8세기 경의 꾸마릴라브핫따(Kumārila Bhaṭṭa) 등이 주석을 하였다. 특히 꾸마릴라브핫따는 샤바라스바야민의 주석에 대한 三部의 해설서를 저술하였으며, 대승불교의 공사상(空思想)을 신랄하게 공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베단따 철학은 『우빠니샤드』 철학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빠니샤드』의 가르침을 간략하게 체계화한 문헌으로서 『베단따수뜨라(Vedānta-sūtra)』 혹은 『브라흐마수뜨라(Brahmasūtra)』로 부르는 소의경전을 지닌다. 이 경전은 서력기원 1세기 경의 바다라야나(Bādarāyaṇa)가 쓴 것으로 전해져 왔지만, 현재의 형태로 완성된 것은 4-5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이 경전에 대한 가장 유명한 주석서로는 A.D. 8세기 경에 상까라(Śaṅkara)가 쓴 『브라흐마수뜨라브하샤(Brahmasūtra-Bāṣya)』가 있다.
2. 미망사의 언어관
미망사에서는 우주의 창조와 질서, 그리고 인간의 내세와 현세의 운명, 길흉화복 등이 모두 제사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에 관한 규범과 방법, 절차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 곧 『베다』이므로 『베다』는 영원불변한 말씀으로 간주하였다. 미망사의 철학적 관심사는 『베다』가 명하는 행위의 의미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베다』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발달시켰는데, 그것의 결과로서 문법학(grammar)․운률학(metrics)․어원학(etymology)․음성학(phonetics)․논쟁술(eristic) 등이 집대성되었다.
미망사의 관심사는 제사의 대상인 신이 아니라 제사의 행위 자체였다. 그들은 『브라흐마나』 문헌의 제식주의적 사고를 이어받아 제사의 행위는 신의 존재여부와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그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미망사의 철학은 행위의 결과를 보증하는 최고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결과로 나아갔다. 따라서 미상사에서는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한다.
미망사에서는 『베다』 자체가 영원한 권위를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언어에 관한 독특한 이론들을 전개하였다. 『베다』란 언어(śabda)로 이루어진 까닭에 언어에 의한 인식은 곧 『베다』의 의미에 대한 인식으로 통하였다. 언어와 대상의 관계(saṁbandha)는 인간의 약정이나 자재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래부터 주어진 영원한 관계(anutpattika-saṁbandha)이다.
생성되고 소멸하는 말소리(dhavani)는 그 배후의 지각되지 않는 참다운 언어를 드러내는 수단이다. 참다운 언어는 즉 샵다(śabda)는 영원불변(nitya)하고 모든 곳에 편재하는(sarvagata) 존재이다. 즉 샵다(śabda)는 이데아에 비교할 수 있고 말소리(dhavani)는 그것의 모사에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여러 사람이 각각 다른 톤과 음색으로 ‘아’를 발음하더라도 그들 모두는 동일한 ‘아’로 인식될 수 있다.
샵다(śabda)가 영원하듯이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artha)도 또한 영원하다. 이때 샵다(śabda)가 지시하는 대상(artha)은 생멸․변화하는 개체(vyakti)가 아니라 개체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보편성(ākṛti)이다. 이때의 보편성(ākṛti)은 와이세시까의 보편(sāmānya)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미망사에 있어서는 샵다(śabda)는 곧 『베다』이고, 아르타(artha)는 탐구의 주제로서 『베다』의 다르마(法, dharma)를 가리킨다. 『베다』는 신의 창작물도 아니고 인간의 창작물도 아니다. 원인을 가진 모든 것은 소멸하지만 『베다』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하는 영원한 것이다. 또한 『베다』가 대상으로 하는 다르마는 초감각적이므로 감각을 바탕으로 하는 인식방법에 의해 검증될 수도 없고 또한 반증될 수도 없다.
『베다』의 말이 일으키는 인식은 ‘이것이 그러하다(evaṁ ayaṁ arthaḥ)’라는 직접적인 인식이며, 사람이나 타 인식수단에 의존하지 않는(anapekṣa) 자립적 진리(svataḥ-prāmāṇya)이다. 따라서 공통성의 관찰(sāmānyato-dṛṣṭa) 따위에 의해 『베다』의 말에도 오류가 있다고 추리하는 것은 근거를 지니지 못한다. 『베다』의 말에 의한 인식은 초감각적인 다르마에 대한 것이므로 추리보다 우선적 권리를 갖는다.
3. 미망사의 형이상학
미망사는 와이세시까의 형이상학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와이세시까의 범주론이 미망사에서도 대체로 통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와이세시까에서는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결합 문제라든가 원자와 영혼과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창조신 이유와라(Īśvara)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미망사는 그런 존재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미망사에 따르면 영혼은 오직 자신의 업의 공과에 따라 육체를 차지하게 된다.
특히 꾸마릴라의 창조설 비판은 유명하다. 그는 먼저 물질의 창조 이전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신이 몸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창조의 욕망도 낼 수 없으며, 몸이 있었다면 그의 창조적 행위 이전에 이미 물질이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한편 창조의 동기도 알 수 없다. 신이 어떤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세계를 창조했다고 보기란 힘들다. 세계의 많은 고통과 죄악을 볼 때 신이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은 용서하지 못할 일이다. 한편 신이 단순히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 세계를 창조했다면 그것은 신 스스로가 완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쓸데없이 바쁜 일에 애쓰기만 한 셈이다.
미망사는 최고신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무신론을 주장하지만 업보를 누리게 되는 자아 혹은 영혼의 불멸성은 인정하였다. 육체의 요소들은 知性이 없기 때문에 그들만의 결합은 결코 지성을 산출하지 못한다. 우리가 ‘나의 몸’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내’가 ‘몸’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기억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도 어떤 정신적인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 혹은 자아란 존재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미망사 학파는 본래 제사의 행위와 이에 따른 결과를 궁극적인 관심사로 한 철학이다. 따라서 올바른 제사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천상의 지복을 이상으로 하는 소박한 형이상학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타학파의 영향을 받아 자아의 해탈, 즉 육체와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최고의 삶의 이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탈을 자아가 좋고 나쁜 행위와 육체를 떠나 순수하게 존재하는 상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자아의 상태에서는 아무런 인식이나 경험도 있을 수 없다. 희열도 느껴지지 않는다. 고통과 즐거움을 떠나서 오로지 자아 본래의 상태에 들어갈 뿐이다.
미망사의 실천론은 『바가바드기타』의 카르마요가(Karma-Yoga)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사심 없는(niṣkāma) 행위의 요가(Karma-yoga)의 실천을 중요시하였다. 즉 해탈에 이르는 방법을 ‘자아를 아는 지식’과 ‘의무적인 행위’를 이해심 없이 순수하게 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미망사는 『베다』의 명령과 제사 그리고 사회적 의무와 해탈에 대한 욕구를 동시에 충족하였다.
4. 베단따 철학의 개요
베단따에서는 궁극적이고 유일한 실재인 브라흐만(Brahman)과 아뜨만(Ātman)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에 따르면 모든 현상적인 것은 신기루나 꿈과 같이 거짓으로 나타난 것(幻, māya)이다. 참다운 실재로서의 브라흐만은 어떠한 속성도 갖지 않고 감각이나 개념적 사고로도 파악할 수 없다.
궁극적인 실재는 시간이나 공간, 인과성에 속하는 어떠한 개념이나 범주도 넘어선다. 언어로는 규정할 수 없는 까닭에 인간의 의식에서는 無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브라흐만 자체는 결코 無가 아니며 오히려 존재의 충만(sat)이자 순수의식(cit)이며, 영적 희열(ānanda)이다.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윤회의 속박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을 기본구조로 하는 베단따는 절대자의 해석에 관한 입장의 차이로 여러 분파로 나뉜다. 이들 분파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A.D. 8세기 경에 상까라(Śaṅkara)가 주창한 아드바이따(Advaita, 不二論)와 A.D. 11세기 경에 라마누자(Rāmānuja)가 내세운 비시스따드바이따(Viśiṣṭādvaita, 制限不二論)가 있다. 전자가 비인격적인 절대자로서의 브라흐만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브라흐만을 인격적인 유일신인 이슈와라(Īśvara)로 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상까라(Śaṅkara)의 불이론은 심오한 사변과 종교적 깊이에 있어서 힌두 철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라마누자(Rāmānuja)는 당시 대중 가운데 성행하던 비쉬누(Viṣnu, =Bhāvagad) 신앙에 대해 신학적 바탕을 마련해 주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상까라의 무신론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브라흐만을 유신론적으로 해석하였다. 이들 두 사상은 중세 이후 오늘날에까지 인도의 종교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인도 힌두교도의 80%는 이 베단따의 추정자들이다.
5. 상까라의 아드바이따베단따(Advaita-Vedānta)
실재에 대한 상까라(Śaṅkara)의 이론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破棄(sublation, subration)이다. 파기란 판단의 오류를 수정하고 정정하는 심적 과정이다. 이것은 이전에 경험한 것을 상충되는 새로운 경험에 비추어 그릇된 것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격하시킬 때 사용된다. 상까라에 있어서 파기의 가능성은 존재론적 위상의 기준이 된다.
파기란 正(these)․反(antithese)․合(synthese)으로 구성되는 변증법(dialectic)에서의 止揚과 유사하다. 그런데 이것은 기존의 모순을 고차적으로 통일하여 새로운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문제시되는 상황을 해소함으로써 이전의 근원적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는 논리이다. 파기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파기의 결과로서 생겨난 그것에 대해 보다 낮은 정도의 실재성과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파기의 가능성에 근거하여 상까라는 실재(reality)와 현상(appearance) 그리고 비실재(unreality)를 구분하였다.
상까라에 따르면 실재의 경험은 모든 구분을 초월한 것이며 자아와 피자아 사이의 동일성의 경험이다. 따라서 실재의 경험은 다른 모든 것을 파기시킬 수 있지만, 그 자체는 다른 어떤 경험에 의해서도 파기되지 않는다. 파기란 경험자와 피경험자의 구분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적 존재는 원리적으로 파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는 다시 3가지 존재자가 있다. ㉠ 참존재자, ㉡ 존재자, ㉢ 환영적 존재자가 그것이다.
㉠ 참존재자는 오직 실재에 의해서만 파기될 수 있다. 예컨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이원성은 다양성과 복수성의 영역 내에서 어떠한 경험에 의해서도 파기될 수 없다. 이것의 파기는 오로지 모든 구분을 초월하는 실재의 경험뿐이다.
㉡ 존재자는 상식적, 논리적, 과학적, 사회적 관행 등을 영역으로 한다. 존재자는 실재와 참존재자 모두에 의해 파기 가능하다. 이들은 합의된 규칙과 틀에 근거한 약정적 지식을 특성으로 한다. 이들은 또한 상반되는 고차적 지식에 의해 파기 가능하다.
㉢ 환영적 존재자는 모든 종류의 경험에 의해 파기될 수 있다. 이것은 착각과 꿈 따위의 모든 그릇된 지각을 포함한다.
이상과 같이 실재란 어떤 다른 경험에 의해서 파기될 수 없는 것이고, 현상이란 다른 경험들에 의해 파기될 수 있는 일상적인 경험 내용이다. 반면에 비실재란 파기될 수도 안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서 객관적 대응자를 가질 수 없는 까닭이다.
한편 상까라(Śaṅkara) 철학에서 파기의 개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마야(幻, māya)이다. 마야란 파기가 가능한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려는 지속적인 성벽이다. 즉 현상을 실재로 보려는 경향을 말한다. 파기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구분을 각성하지 못함으로써 인간이라는 현상을 실재라고 그릇되게 믿는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마야는 실재의 창조력으로서, 이것에 의해 다양성과 다수성의 세계가 발생한다. 따라서 실재의 창조적 힘으로서의 마야를 ‘실재의 우주적 유희(līla)’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상은 비실재와 달리 실재에 근거하는 까닭에 비실재와 구분되어야 한다.
한편 마야와 교환이 가능한 개념으로서 무지(avidya)가 있다. 무지란 실재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논리적․시간적 관점에서 마야와 공존한다. 그러나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무지가 마야보다 선행한다. 무지가 실재의 인식으로 정복되면 더 이상 마야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은 어떤 다른 경험에 의해서도 파기될 수 없는 유일한 실재이며, 변화하는 외적 현상계의 밑바닥에 놓인 존재이다. 더불어 아뜨만은 내부적인 현상계의 밑바닥에 놓인 불변의 실재로서 이들 둘은 동일하다. 삿-찟-아난다(sat-cit-ānanda)는 이러한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사라질 때 경험하는 초월적인 환희의 상태이다.
아드바이따 베단따(Advaita Vedānata)라는 이름은 아뜨만과 브라흐만 사이의 구분을 거부하는 맥락에서이다. 또한 양자는 파기 가능한 모든 개념적 영역을 벗어나 있으며 그것의 속성에 대해 적극적인 언급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일원적(monistic)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며 不二라는 용어를 쓸 수밖에 없다.
상까라는 인간의 속박과 고통이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이러한 무지는 실재에 대한 인식 즉 梵我一如의 인식을 통해 극복된다. 따라서 실재에 대한 인식은 곧 치유적 인식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태어남과 죽음은 현상계에 제한된 마야와 무지의 산물이다. 무지가 극복될 때 인간은 태어남과 죽음에 관계없는 삶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해탈이란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성취되는 梵我一如의 지고한 의식상태이다.
6. 라마누자의 한정불이론적 베단따(Viśiṣṭādvaita Vedānta)
라마누자(Rāmānuja)는 상까라의 불이론이 인간의 종교적 열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문제 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인간과 신 사이의 동일성과 차별성을 동시에 보전시켜 주는 방식으로 베단따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몰입하였다. 그에 따르면 브라흐만은 현상계의 밑바당에 놓인 基體(ādhāra)이자 통제자(niyāmaka)이며 주인(śeṣa)이다.
라마누자는 사람의 영혼이 신체와 다르지만 신체를 통제하고 지도하듯이, 브라흐만은 우주와 다르지만 그것을 통제하고 지도한다. 그에게서 신과 세계의 관계는 마음과 몸의 관계(śarīri-śarira-samvandha)로 규정되었다. 한편 그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관자(ādhāra)와 피주관자(ādheya), 주인(śeṣin)과 종(śeṣa), 실체(viśeṣya)와 속성(viśeṣaṇa), 본질(prakārī)과 양태(prakāra), 전체(aṁśī)와 부분(aṁśsa)으로 설명하였다.
현상세계는 독립된 실재는 아니지만 브라흐만이 관여되어 있으므로 이것 역시 실재이어야 한다. 개아와 사물들은 궁극적으로 실재의 부분으로서 실재이지만 그것에 의존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즉 전체의 부분으로서 구분이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체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라마누자의 생각을 제한적 불이론(viśiṣṭādvaita)이라고 한다.
라마누자에 따르면 자아는 궁극적 실재의 경험 가운데 구분된 채로 존재한다. 따라서 실재의 경험이란 자아와 비아의 구분이 말살되는 경험이 아니라 자아가 실재의 단일성을 의식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상까라는 무종자삼매(無種子三昧, nirbījasamādhi)를 인정하지만 라마누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학습과 반성의 결과 그 자신이 신체나 어떤 다른 물질적 신체와 동일한 것이 아니고, 우주의 창조주이자 유지자, 파괴자인 신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더불어 구제가 의무와 제식의 수행 혹은 지적인 이해만으로 달성될 수 없고 신의 자유롭고 자애로운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인간은 신에 대한 봉사에 자신을 완전히 바쳐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신성한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생기며, 그것을 통해 무지와 이기심과 까르마를 파괴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해탈된 자아는 그 개체성과 의식을 보존하면서 신의 무한한 영광 속에서 최고의 희열을 영원히 누리게 된다.
* 참고문헌
권오민 지음, 『인도철학과 불교』, 서울: 민족사, 2004.
길희성 지음, 『인도철학사』 서울: 민음사, 1989.
이지수 옮김, 『인도철학』, 서울: 민족사, 1991.
이거룡 옮김, 『인도철학사』 4권, 서울: 한길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