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1871년 |
---|---|
사망 | 1911년 |
본명 | 고토쿠 덴지로(幸徳傳次郞) |
국적 | 일본 |
대표작 |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 《사회주의 신수(社會主義 神髓)》 |
"제국주의여, 유행하는 그대들 세력은 20세기의 천지를 적광(寂光)의 정토(淨土)로 만들려고 하는가 아니면 무간지옥으로 떨어뜨리려고 하는가." 제국주의를 향해 치닫는 세계와 일본의 정세를 우려하며 애국심과 군국주의에 도전장을 던진 사상가 고토쿠 슈스이. 그는 일본을 비롯해 조선, 중국의 지식인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한 동아시아 운동의 선구자이자 일본 아나키즘의 아버지이다. 메이지 시대의 정치·사상계를 뒤흔든 그는 1910년 천황 암살 미수 사건, 즉 대역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일본 사상계에서 언급이 금기시되었고, 이로 인해 초기 사회주의자로서 그가 미친 영향력이나 사상의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고토쿠 슈스이는 1871년 고치 현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학교와 한학교를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고, 17세 때 상경하여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의 서생이 되면서 자유민권 사상에 눈을 떴다. 자유민권 운동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근대 국가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에 반발한 지식인 사이에 광범위하게 일어난 움직임으로, 국회 개설, 감세, 지역 자치, 정당 결성 등을 골자로 한 정치적 자유 보장과 민권 보호를 추구한다. 슈스이와 조민은 스승과 제자 사이를 넘어 깊은 신뢰로 뭉친 사상적 동지였다. 고토쿠 슈스이의 본명은 고토쿠 덴지로(幸徳傳次郞)로, '슈스이(秋水)'라는 호는 스승인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의 호인 '슈스이(秋水)'에서 따온 것이다.
1893년, 〈자유신문〉에 입사하면서 저널리스트의 길에 들어선 슈스이는 <중앙신문>, <만조보(萬朝報)> 등을 거쳐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사회 문제와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에 사회주의가 수용된 시점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부터이다. 산업 노동자의 수가 급증하면서 노동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1897년 그는 〈중앙신문〉의 동료 기자 이시카와 야스지로의 소개로 사회문제연구회에 들어갔고, 그해 10월 사회주의연구회(후에 사회주의협회로 개명)를 출범시켰다.
1901년 슈스이는 〈만조보萬朝報〉에 '나는 사회주의자다'라는 선언이 담긴 일련의 논설을 기고하고, 이를 토대로 그해 4월 대표작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각주1) 》를 펴냈다. 이 책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제국주의를 비판서로 사회주의자, 반전주의자의 입장에서 집필된 것이다. 그는 제국주의에 대해 '애국심을 날줄로, 군국주의를 씨줄로 한 정책'이라고 규정하고, 근대 국가주의적 애국주의의 폐해를 비판했다.
1901년 5월, 고토쿠幸德秋水는 가타야마 센(片山潜), 아베 이소오(安部磯雄),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尚江) 등과 함께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이틀 만에 치안금지법에 걸려 해산되었다.
이후 반제국주의, 반전,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고토쿠는 1903년 〈만조보萬朝報〉가 러일 전쟁을 옹호하는 논조를 띠자
동료 기자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우치무라 간조와 함께 사직하고
〈평민(平民)신문〉을 설립했다(여기에서 평민은 프롤레타리아의 번역어로 사용된 것이다). 의화단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한 이후 일본은 러시아에 지속적으로 철병을 요구했다. 그러나 1902년 10월 일부 병력을 철수시킨 러시아는 이후 2차 철병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에서는 전쟁을 해서라도 러시아의 철병을 이루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고토쿠는 〈만조보萬朝報>에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와 같은 논지에서
전쟁은 일본의 국익에 아무 도움이 안 되며,
외교 수단으로서 전쟁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의 비전론(非戰論)을 기고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들끓고 있는 주전론을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처음에는 반전론을 주장했던 〈만조보萬朝報〉조차 여론에 밀려
그해 말 주전론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1903년, 고토쿠는
메이지 시대 사회주의 대표 저작으로 꼽히는 《사회주의 신수(社會主義 神髓)각주2) 》를 펴냈고,
한편으로는 〈평민신문〉을 통해 '세계 정치는 자본가, 시장경제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전쟁 역시 같은 논리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며 반전 활동을 계속했다.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이후 고토쿠는 국내 여론이 지나치게 선동적으로 흐르자 이를 우려해 전쟁이 일본 경제와 서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데 노력했다.
전쟁은 열강의 이해관계 충돌로 인한 것이며, 일본뿐만 아니라 열강의 외교와 정책 자체는 결국 시장경제의 이해관계에 따른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남성의 징병과 여성의 공장 차출 등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국익'이라는 논리로 합리화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전시라는 상황을 빌려 언론과 사상, 개인의 자유를 빼앗는 현실을 환기시킨 것이다.
그리고 일본 최초로 〈공산당 선언〉을 번역해 〈평민신문〉에 게재했다.
〈평민신문〉은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을 받으며 거듭 발매 금지 처분을 받은 끝에 1905년 1월 폐간되었다.
사카이堺利彦와 슈스이幸徳 秋水는 금고형을 선고받았고, 사회주의협회도 활동 금지 처분을 받았다.
5개월의 금고형을 받은 슈스이幸德秋水는 출옥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평민신문〉 활동을 하면서 겪은 사회의 부조리함과 미국에서 체험한 노동 운동, 국내외 다양한 사상가와 교류하면서 현실 세계에서 사회주의의 한계를 깨닫게 된 그는 아나키스트로 변모했다. 그는 아나키즘이 허무주의나 국가 전복을 위한 폭력 사상과는 완전히 다르며, 민중의 자각 아래 이루어지는 사회적 혁명의 토대가 되는 사상이라고 여겼다. 종래의 혁명은 소수의 정치가 혹은 소수의 민중이라는 특정 계급의 정권 쟁탈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적 혁명은 인민의 이름으로 다른 계급을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평민 전체가 혁명의 목적을 인지하는 상태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규정했다. 훗날 조선의 아나키즘이 무장혁명론 혹은 허무주의적 경향을 띠게 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1906년, 고토쿠는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은 아나키스트이며 사회주의에 입각한 의회 정치의 실효성에 의문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소련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빵의 쟁취(The Conguest of Bread)》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한다.
그러던 중 1907년 미국에서 일본사회혁명당이 조직되고, 기관지인 〈혁명〉이 발행되었다. 그런데 기사 일부에 '천황은 정복자이자 인민의 착취자이며, 인민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라는 내용이 실린 것이 문제가 되어,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에 대한 탄압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1910년 5월,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다섯 명의 아나키스트가 체포되었고, 얼마 후 반정부주의자라는 이유로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 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고토쿠는 주모자로 지목받고 체포되어 1911년 1월 24일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반체제 운동으로 여겨져 급격히 위축되었다. 종전 후인 1963년에야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이 청구되었다. 학자들은 정부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를 탄압하기 위해 날조된 사건이라는 데 이견이 없는데,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아나키즘이 공존할 수 없는 사상임을 상징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1901년 :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를 출간하여 제국주의를 비판하다.
· 1906년 : 자신이 아나키스트임을 천명했으나 이듬해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 들이 대거 체포되다.
· 1911년 : 천황 암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교수형을 당하다.
고토쿠 슈스이
출생 | 1871. 11. 4, 일본 고치 현[高知縣] 나카무라[中村] |
---|---|
사망 | 1911. 1. 24, 도쿄 |
국적 | 일본 |
요약
일본의 사회주의 지도자.
급진적인 정치활동을 주창하였으며 그가 처형당하자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일시적으로 둔화되었다.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10대 중반부터 자유민권운동(自由民權運動)에 관심을 가진 그는 이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의 집에서 일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1893년에 나카에의 소개로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가 주재하는 〈자유신문 自由新聞〉의 기자가 되었으나 곧 퇴사한 뒤 좀더 진보적인 만조보〈萬朝報〉 기자로 입사하여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와 알게 되었다.
고토쿠는 청일전쟁(1894~95) 이후 급속히 발전한 일본 자본주의의 각종 사회 문제를 접하면서 차츰 사회주의 사상을 품게 되었다.
1897년에는 사회문제연구회에 가입했고
가타야마 센[片山潛]의 권유로 사회주의 연구회에 입회했다.
사회주의연구회는 1900년에 실천적 성격을 강화한 사회주의협회로 개편되었고
마침내 이듬해에는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1905년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저작을 보고
무정부주의와 생디칼리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출옥 후 요양차 건너간 미국에서 급진적 노동운동 단체인
세계산업노동조합(IWW)의 지도자들과 접하면서
아나코 생디칼리슴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귀국한 뒤부터
당시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가타야마 등의 의회정책주의를 비판하고
급진적인 직접행동론을 제기함으로써 운동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급진파에 의해 계획되고 있던 덴노 암살계획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1910년에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대역사건이다(→ 대역사건).
이 사건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당국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의도적으로 확대해석되었으며, 결국 고토쿠 등 12명이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이후 10년 가까이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그의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평가가 결여되어 있고 지사적(志士的) 엘리트 의식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특징은 다이쇼기[大正期]에 오스키 사카에[大杉榮]로 계승된다.
저작으로는
〈20세기의 괴물제국주의〉(1901)·
〈사회주의신수 社會主義神髓〉(1903) 등이 유명하다.
幸徳 秋水(こうとく しゅうすい、1871年11月5日(明治4年9月23日) - 1911年(明治44年)1月24日)は、明治時代のジャーナリスト、思想家、社会主義者、無政府主義者である。
本名は、幸徳 傳次郎(こうとく でんじろう)。秋水の名は、師事していた中江兆民から与えられたもの。大逆事件(幸徳事件)で処刑された12名の1人。

다음 마지막으로 내게 인상적인 것은, 아니 나카무라中村를 말하면 꼭 말해야 할 것은 코도쿠 슈스이(幸德 秋水, 1871-1911)가 바로 이 나카무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코도쿠 슈스이는 일본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어떤 사건의 중심인물이라 할까, 희생자라고 해야 한다. 그는 1911년 1월 24일, 이른바 '대역(大逆)사건'의 주모자로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일본의 우경화라고 할까, 침략주의화에는 브레이크가 없게 되었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의 승리에 환호할 때, 슈스이는 러일전쟁에 반대하였고, 제국주의 침략에 경종을 울렸다.
대역이라는 것은 천황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암살하려는 음모는 없었고, 그것을 빌미로 해서 공안정국을 만들고 평소에 전쟁이나 일본의 침략주의 정책에 날카로운 비판을 퍼붓든 지식인이나 언론인을 대거 정리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동종의 스님 한 분도 희생이 되었는데(아마 도시마로 선생의 책, "일본인은 왜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가"에 나옴) 슈스이 역시 비판적 지식인이고 비판적 언론인이었기 때문이다.
고치 시내에는 "고치현립문학관"이 있다. 거기에는 슈스이의 문필활동에 대한 자료나 생애에 관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팠던 것은 그가 '대역사건'에 얽혀들기 얼마 전에 아내와 이혼한 일이었다.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위해서 울어줄 아내라도 있었을 것을 ---. (물론 그녀도 전남편의 불행을 울었을 것이긴 하지만 ---) 그런 생각을 했다. 이치무라 선생과 나는 슈스이의 묘를 찾아서 합장하고 명복을 빌었다.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서 시대를 밝히고자 했던 선각자였으나, 희생이 되었다. 그리고 더욱 슬픈 것은, 지금 일본은 다시 슈스이를 죽였던 그러한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슈스이의 묘 앞에는 "會報 秋水"라는 타블로이드 판의 4쪽짜리 신문이 있었다. "고토쿠 슈스이를 현창하는 모임" 발행이고, 14호였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고치현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슈스이를 현창하는 여러가지 사업이나 연구회 같은 것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신문에 따르면, '대역사건'에 희생된 사람 중 고치현 출신자는 네 분이나 더 있었다 한다. 坂本淸馬, 岡 林寅松, 小松丑吉, 奧宮健之. 모든 분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