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척慘慽: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
慘
참혹할 참,우울해질 조
1. 참혹하다(慘酷--)
2. 혹독하다(酷毒--)
3. 비참하다(悲慘--)
4. 무자비하다(無慈悲--)
5. 아프다
6. 손상하다(損傷--)
7. 상하게 하다
8. 해치다(害--)
9. 쇠약해지다(衰弱---)
10. 수척해지다(瘦瘠---)...
[부수]忄(심방변)[총획]14획[난이도]고등용, 읽기 3급, 쓰기 2급
慽
근심할 척
1. 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2. 서러워하다
3. 슬퍼하다
4. 근심
[부수]忄(심방변)[총획]14획[난이도]읽기 특급II
(1건)
전체고사성어숙어
慘慽之變참척지변단어장 추가
자손(子孫)이 부모나 조부모(祖父母)보다 일찍 죽는 변고(變故)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참척(慘慽)이라고 표현한다. 참혹한 슬픔이라는 뜻이다. 대척(大慽)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큰 슬픔이란 뜻이다. 성호 이익(李瀷ㆍ1681~1763년)은 외아들 맹휴(孟休)가 영조 27년(1751년) 만 서른넷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상심한 나머지 건강을 해쳤다. 이때 이익의 나이 만 일흔이었음에도 그토록 슬픔이 컸다. 그래서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썼던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에게, “선생께서 또 대척(大慽)을 만나셔서 병환이 더 심해지셨는데 말씀하시지 않는 가운데서도 가슴 속에 쌓인 근심과 염려는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 위로했다.
그런데 자식의 죽음에 대해서 참척보다 더 자주 사용하는 용어는 상명(喪明)이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버이의 고통을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고 한다. 밝음(明)을 잃었다(喪)는 뜻인데, 자식이 보낸 슬픔이 너무 커서 시력까지 상실했다는 뜻이다. 상명은 단순한 형용사가 아니고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에게 실제로 벌어졌던 실화이다. 공자 문하의 뛰어난 제자 열 명을 뜻하는 말이 공문십철(孔門十哲)인데, 그중 자하는 문학(文學)에 뛰어난 제자였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에 이 실화가 나온다. 자하가 자식의 상을 당한 후 너무 슬퍼하다가, 그 시력을 잃었다(喪其明). 증자(曾子)가 조문하러 가서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친구가 시력을 잃으면 곡한다고 한다”라면서 곡을 했다. 자하 역시 따라서 곡을 하면서, “하늘이여! 나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울었다. 그러자 증자가 화를 내면서 자하에게 “네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라면서 세 가지 죄를 열거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네가 사는 서하(西河) 사람들이 너를 부자(夫子ㆍ공자)로 생각하게 했으니 첫 번째 죄이고, 네 부모가 죽었을 때 이렇게 슬퍼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고, 네가 자식을 잃고 그 눈을 잃었으니 이것이 너의 세 번째 죄이다”라는 꾸짖음이었다. 그러자 자하가 “내 허물이로다. 내 허물이로다. 내가 그대들과 떠나서 홀로 산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잘못을 인정했다는 고사다. 증자라고 어찌 자하의 슬픔이 와 닿지 않았겠는가마는 슬픔 때문에 눈까지 멀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준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한강(寒岡) 정구(鄭逑ㆍ1543~1620년)는 일찍 죽은 박진휘(朴震輝)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부친을 이렇게 위로했다. “크고 작은 고향 많이 돌아본 후생이라/그대 부음 듣고 너무 슬펐네/어머니 뒤를 따라 저승으로 돌아가니/눈 먼 부친 아픔 위로할 말 없네(多少鄕閭閱後生/自聞君訃最傷情/萱堂隨引歸長夜/春府無辭慰喪明)”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409042062432345
노애는 조 태후와의 불륜이 드러나자 최후의 발악을 하여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정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를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정이 곧 창문군과 창평군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반격에 나서게 되니, 수도 내에서 교전까지 벌인 끝에 노애는 패하여 달아났다. 승리한 정은 조 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은 아이들, 즉 이부 동생들을 자루에 넣고 때려서 죽였으며, 달아난 노애를 붙잡아서 사지를 찢는 거열형에 처한 뒤 그 삼족을 멸하였다. 이후 자신의 어머니인 조 태후를 싫어하게 되어 그녀를 유폐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의 간청으로 조 태후를 다시 함양의 왕궁으로 불러와 모셨다.[22]
한편 정은 실권자인 여불위도 노애와 조 태후의 스캔들을 들어 처벌하려 하였으나, 여불위를 따르는 신하들과 식객들이 많았기 때문에 벼슬을 빼앗고 낙양으로 유배보내는 정도로 그쳤다. 그리하여 한때 왕과 견줄 만한 세력을 지녔던 여불위의 권세는 무참히 꺾여버렸고 실의에 빠진 여불위는 곧 자살하였다. 결국 정은 노애와 조 태후 그리고 여불위까지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짓눌러 나이 22세에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비로소 친정 체제를 굳히게 된다.
동북 변경인 요동까지 도망간 연나라 왕 연희는 아들 연단의 목을 잘라서 바치면서까지 용서를 빌었으나, 정은 거부하고 집요하게 추격해서 왕분이 연나라 왕을 사로잡아 서주 창건때부터 이어져 온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쳐서 왕분이 제나라 왕 전건의 항복을 받아내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재위 27년인 39살에, 정복을 시작한지 약 10년 만에 정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https://namu.wiki/w/%EC%8B%9C%ED%99%A9%EC%A0%9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