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阿含經》卷2:「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告諸比丘:「色非是我。若色是我者,不應於色病、苦生,亦不應於色欲令如是、不令如是。以色無我故,於色有病、有苦生,亦得於色欲令如是、不令如是。受、想、行、識亦復如是。比丘!於意云何?色為是常、為無常耶?」
比丘白佛:「無常。世尊!」
「比丘!若無常者,是苦不?」
比丘白佛:「是苦。世尊!」
「若無常、苦,是變易法,多聞聖弟子於中寧見有我、異我、相在不?」
比丘白佛:「不也,世尊!」
「受、想、行、識亦復如是。是故,比丘!諸所有色,若過去、若未來、若現在,若內、若外,若麁、若細,若好、若醜,若遠、若近,彼一切非我、不異我、不相在,如是觀察;受、想、行、識亦復如是。
「比丘!多聞聖弟子於此五受陰非我、非我所,如實觀察。如實觀察已,於諸世間都無所取,無所取故無所著,無所著故自覺涅槃:『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
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2](三四)
如是我聞:
一時,佛住[3]波羅[4]㮈國仙人住處[5]鹿野苑中。
爾時,世尊告餘五比丘:「色非有我。若色有我者,於色不應病、苦生,亦不得於色欲令如是、不令如是。以色無我故,於色有病、有苦生,亦得於色欲令如是、不令如是;受、想、行、識亦復如是。比丘!於意云何?色為是常、為無常耶?」
比丘白佛:「無常。世尊!」
「比丘!若無常者,是苦耶?」
比丘白佛:「是苦。世尊!」
「比丘!若無常、苦,是變易法,多聞聖弟子寧於中見是我、異我、相在不?」
比丘白佛:「不也,世尊!」
「受、想、行、識亦復如是。是故,比丘!諸所有色,若過去、若未來、若現在,若內、若外,若麁、若細,若好、若醜,若遠、若近,彼一切非我、非我所,如實觀察。受、想、行、識亦復如是。
「比丘!多聞聖弟子於此五受陰見非我、非我所。如是觀察,於諸世間都無所取,無所取故無所著,無所著故自覺涅槃:『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
佛說此經已,餘五比丘不起諸漏,心得解脫。
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CBETA, T02, no. 99, p. 7, b22-p. 8, a4)
[2]S. 22. 59. Pañca.。[3]Bārāṇasī.。[4]㮈=柰【宋】【元】【明】。[5]鹿野苑Migadāya.。
《中阿含經》卷7〈舍梨子相應品 3〉:「謂不多聞愚癡凡夫而作此念:『是我,是我所,我是彼所。』多聞聖弟子不作此念:『是我,是我所,我是彼所。』」(CBETA, T01, no. 26, p. 464, c14-17)
《中阿含經》卷11〈王相應品 6〉:「比丘!於意云何?色為有常,為無常耶?」
答曰:「無常也。世尊!」
復問曰:「若無常者,是苦,非苦耶?」
答曰:「苦、變易也。世尊!」
復問曰:「若無常、苦、變易法者,是多聞聖弟子頗受是我,是我所,我是彼所耶?」
答曰:「不也。世尊!」
復問曰:「比丘!於意云何?覺、想、行、識為有常,為無常耶?」
答曰:「無常也。世尊!」
復問曰:「若無常者,是苦,非苦耶?」
答曰:「苦、變易也。世尊!」
復問曰:「若無常、苦、變易法者,是多聞聖弟子頗受是我,是我所,我是彼所耶?」
答曰:「不也。世尊!」」(CBETA, T01, no. 26, p. 496, c29-p. 497, a10)
《增壹阿含經》卷14〈高幢品 24〉:「「當於爾時,我作轉輪聖王,時八萬四千神象朝朝來至,門外多有傷害,不可稱計。我於爾時,便作是念:『此八萬四千神象朝朝來至,門外多有傷害,不可稱計。我今意中欲使分為二分,四萬二千朝朝來賀。』[26]爾時,比丘!我作是念:『昔作何福?[27]復作何德?今得此威力,乃至於是。』復作是念:『由三事因緣故,使我獲此福祐。云何為三?所謂惠施、慈仁、自守。』比丘當觀,爾時諸行永滅無餘,爾時遊於欲意無有厭足。所謂厭足,於賢聖戒律乃為厭足。云何,比丘!此色有常耶?無常耶?」
比丘對曰:「無常也。世尊!」
「若復無常,為變易法,汝可得生此心,此是我許,我是彼所乎?」
對曰:「不也。世尊!」
「痛、想、行、識是常[1]也?[2]是無常耶?」
比丘對曰:「無常也。世尊!」
「設使無常,為變易法,汝可得生此心,此是我許,我是[3]彼所。」
對曰:「不也。世尊!」
「是故,比丘!諸所有色,過去、當來、今現在者。若大、若小。若好、若醜,若遠、若近,此色亦非我所,我亦非彼所,此是智者之所[4]學也。諸所有痛,過去、當來、今現在,若遠、若近,此痛亦非我所,我亦非彼所。如是智者之所覺知。比丘當作是觀,若聲聞之人,厭患於眼,厭患於色,厭患眼識,若緣眼生苦樂,亦復厭患。亦厭[5]患於耳,[6]厭於聲,厭於耳識,若依耳識生苦樂者,亦復厭患。鼻、舌、[7]身、意、法亦復厭患,若依意生苦樂者,亦復厭患。已厭患,便解脫;已解脫,便得解脫之智:生死已盡,梵行已立,所作已辦,更不復受有,如實知之。」」(CBETA, T02, no. 125, p. 617, c21-p. 618, a21)
[26]爾時比丘我=比丘我爾時【聖】。[27]〔復作何〕-【聖】。[1]也=耶【宋】【元】【明】。[2]〔是〕-【宋】【元】【明】。[3]此=彼【聖】【麗-CB】【CB】。[4]學=覺【宋】【元】【明】。[5]〔患〕-【宋】【元】【明】。[6]〔厭於聲〕-【聖】。[7]〔身〕-【聖】。
「比丘!於意云何?色為有常,為無常耶?」
“比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物質[色]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는가?”
答曰:「無常也。世尊!」
“世尊이시여, 영원하지 않습니다.”
復問曰:「若無常者,是苦,非苦耶?」
“만약 영원하지 않다면,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答曰:「苦、變易也。世尊!」
“世尊이시여, 괴로운 것, 변하기 쉬운 것입니다.”
復問曰:「若無常、苦、變易法者,是多聞聖弟子頗受是我,是我所,我是彼所耶?」
“만약 영원하지 않고, 괴로운 것이며, 변하기 쉬운 것이라면, 들은 것이 많은 성스러운 弟子가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남의 것’이다.’라고 느끼겠는가?”
答曰:「不也。世尊!」
“世尊이시여, 아닙니다.”
復問曰:「比丘!於意云何?覺、想、行、識為有常,為無常耶?」
“比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느낌, 생각, 행, 識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는가?”
答曰:「無常也。世尊!」
“世尊이시여, 영원하지 않습니다.”
復問曰:「若無常者,是苦,非苦耶?」
“만약 영원하지 않다면, ‘괴로운 것’인가, ‘괴롭지 않은 것’인가?”
答曰:「苦、變易也。世尊!」
“世尊이시여, 괴로운 것, 변하기 쉬운 것 것입니다.”
復問曰:「若無常、苦、變易法者,是多聞聖弟子頗受是我,是我所,我是彼所耶?」
“만약 영원하지 않고, 괴로운 것이며, 변하기 쉬운 것이라면, 들은 것이 많은 성스러운 弟子가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남의 것’이다.’라고 느끼겠는가?”
答曰:「不也。世尊!」
“世尊이시여, 아닙니다.”
「是故,比丘!汝應如是學。若有色,或過去、或未來、或現在,或內、或外,或麤、或細,或好、或惡,或近、或遠,彼一切非我,非我所,我非彼所,當以慧觀知如真。若有覺、想、行、識,或過去、或未來、或現在,或內、或外,或麤、或細,或好、或惡,或近、或遠,彼一切非我,非我所,我非彼所,當以慧觀知如真。比丘!若多聞聖弟子如是觀者,彼便厭色,厭覺、想、行、識,厭已便無欲,無欲已便解脫,解脫已便知解脫,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辦,不更受有,知如真。
“比丘여, 그러므로 너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익혀야 한다. 어떤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바깥의 것이건, 거친 것이건, 미세한 것이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가까운 것이건, 먼 것이건, 그 모든 것은 ‘내’가 아니며, ‘내 것’이 아니며, ‘남의 것’도 아니라고. 마땅히 지혜로써 이렇게 사실대로 알아야 한다. ...(느낌과 생각과 행(심리작용)과 의식에 대해서도 반복) ... 比丘여, 만약 들은 것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가 이렇게 관찰한다면, 그는 물질을 싫어하게 되고, 느낌을 싫어하게 되고, 생각을 싫어하게 되고, 행을 싫어하게 되고, 의식을 싫어하게 된다. 싫어한 뒤에는 (그것들에 대한) 욕심이 없어지고, 욕심이 없어지면 (그것들로부터) 해탈한다. 해탈한 뒤에는 해탈했다고 알게 되고, 태어남은 끝났고, 梵行이 섰고, 행할 바를 다했고, 다시는 ‘有’를 받지 않음을 사실대로 안다.”
於是,彼比丘聞佛所說,善受善持,即從坐起,稽首佛足,繞三匝而去
그러자 그 比丘들이 佛陀의 말씀을 듣고서 잘 받아들이고 잘 지니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佛陀의 발에 절을 하고 주위를 세 번 돈 뒤에 떠났다.
다음도 역시 中阿含經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阿難!我本為汝說五熟解脫想,無常想、無常苦想、苦無我想、不淨惡露想、一切世間不可樂想。阿難!此五熟解脫想,汝當為諸年少比丘說以教彼,若為諸年少比丘說教此五熟解脫想者,彼便得安隱,得力得樂,身心不煩熱,終身行梵行.
아난아! 내 본래 너를 위해 ‘해탈을 성숙시키는 다섯 가지 생각’을 설명했었다. 즉 ‘무상’하다는 생각, 無常한 것은 괴로운 것이라는 생각, 괴로운 것은 ‘내’가 없다는 생각(하지만 보다 정확한 번역은, 괴로운 것은 ‘내’가 아니라는 생각), (우리의 신체는) 깨끗하지 못하고 나쁜 것이 드러난다는 생각, 일체의 세상은 즐거워할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아난아! 이 해탈을 성숙시키는 다섯 가지 생각을 너는 마땅히 나이어린 比丘들을 위해 가르쳐라. 만약 나이어린 比丘들이 이것을 배운다면 그들은 문득 안온을 얻고, 힘을 얻고, 행복을 얻어서, 몸과 마음이 번뇌로 괴로워하지 않게 되어서 죽을 때까지 梵行(수행생활)을 실천할 것이다.
爾時,世尊告諸比丘:「色非是我。若色是我者,不應於色病、苦生,亦不應於色欲令如是、不令如是。以色無我故,於色有病、有苦生,亦得於色欲令如是、不令如是。受、想、行、識亦復如是。比丘!於意云何?色為是常、為無常耶?」
그때 世尊께서 比丘들에게 말씀하셨다.
“몸은 ‘내’가 아니다. 만약 몸이 나라면 몸에 병이 생겨서는 안 되고, 괴로움이 생겨서는 안 되고, 몸에 대해 이렇게 되어라 했을 때 이렇게 되지 않아선 안 된다. 그런데 몸은 내가 아니므로 몸에 병이 있고 괴로움이 생기고, 몸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라 해도 이렇게 되지 않는 것이다. 느낌, 생각, 行, 의식도 마찬가지니라.
(* 여기서는 어떤 것이 진정한 ‘나’라면 그것엔 병이 생겨선 안 되고 괴로움이 생겨선 안 되고, 자기 의지대로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는 몸이나 마음은 그렇게 되지 않으므로 그것들이 ‘나’거나 ‘내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라는 내용입니다.)
比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는가?”
比丘白佛:「無常。世尊!」
比丘가 佛陀께 대답했다. “世尊이시여, 영원하지 않습니다.”
「比丘!若無常者,是苦不?」
“比丘여, 만약 영원하지 않다면 괴로운 것이 아닌가?”
比丘白佛:「是苦。世尊!」
比丘가 佛陀께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若無常、苦,是變易法,多聞聖弟子於中寧見有我、異我、相在不?」
“만약 영원하지 않고, 괴로운 것이라면, 변하기 마련인 것이다. 들은 것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가 그런 것에 대해 어찌 ‘내가 있다’거나 ‘나와 다르다’거나 ‘서로 있다’고 보겠는가?”
(* 여기서는 몸과 마음은 영원하지도 않고 영원하지 않은 것은 괴로운(stressful) 것, 불만족스러운 것인데 그것이 어찌 나일 수 있냐는 겁니다. 여기서 ‘나와 다르다’는 빠알리 원문엔 ‘내 것’으로 나오고 ‘서로 있다.’는 ‘나의 자아’로 나옵니다. 이는 古代의 번역자의 誤譯으로 보입니다. )
比丘白佛:「不也,世尊!」
比丘가 佛陀께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受、想、行、識亦復如是。是故,比丘!諸所有色,若過去、若未來、若現在,若內、若外,若麁、若細,若好、若醜,若遠、若近,彼一切非我、不異我、不相在,如是觀察;受、想、行、識亦復如是。
“느낌, 생각, 行, 의식도 마찬가지다. 比丘여, 그러므로 어떤 물질[몸]이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든, 바깥의 것이든, 거친 것이건, 미세한 것이건, 보기 좋은 것이건, 못생긴 것이건, 먼 곳에 있는 것이건,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건, 그 모든 것은 내가 아니며, 나와 다른 것이 아니며, 서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렇게 관찰하라. 느낌, 생각, 행, 의식도 마찬가지다.
(* 여기서는 상상하거나 想定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형태의 몸이나 마음도 역시 내가 아니고, 내 것이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比丘!多聞聖弟子於此五受陰非我、非我所,如實觀察。如實觀察已,於諸世間都無所取,無所取故無所著,無所著故自覺涅槃:『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
比丘여, 들은 것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는, 이러한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에 대해 내가 아니며 내 것이 아니라고 사실대로 관찰한다. 사실대로 관찰하면 모든 세상에 대해 전혀 잡는 것이 없게 되고, 잡는 것이 없게 되면 붙는 것이 없게 되고, 붙는 것이 없으면 열반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나의 태어남은 끝났다. 梵行은 섰다. 해야 할 바를 다했다. 더 이상의 後有는 받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알게 된다.”
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佛陀께서 이 經을 말씀하시자 比丘들은 말씀을 듣고서 환희하며 실천하니라.
京兆興善寺惟寬禪師의 일화( “景德傳燈錄”).
有僧問。道在何處。師曰。只在目前。曰我何不見。師曰。汝有我故所以不見。曰我有我故即不見。和尚見否。師曰。有汝有我展轉不見。曰無我無汝還見否。師曰。無汝無我阿誰求見。
어떤 스님이 물었다. “道는 어디에 있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만 눈 앞에 있다.”
“(그런데) 저는 어째서 보지 못합니까?”
“자네는 ‘나’가 있기에 보지 못한다.”
“저는 ‘나’가 있어서 보지 못한다면, 스님께선 보십니까?”
“‘너’가 있고, ‘나’가 있다면 더욱 더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도 없고, ‘너’도 없다면 (道를) 볼 수 있습니까?”
“‘너’도 없고, ‘나’도 없다면 도대체 누가 보기를 원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