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더 바란다"는 뜻을 잘모른다.
아이가 건강하고 충분히 똑똑한데도 "더 열심히 공부해야한다"고 말한다.
아주 맹목적인 생각이고 발언인데도 채찍을 든 노예감독관처럼 "더 열심히 일 해"라고 말한다.
버릇같은 말이고 그렇게 보이도록 외관을 꾸미라는 말이다.
사실은 그렇게 발언하는 이들이 노예이다.
그들은 그 발언과 행동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딱딱해져간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라는 말에는 어떤 선망같은 것들이 내재해 있다.
그 발언하는 사람들이 공부에 한이 맺혔을 가능성도 많다. 삶이 공부라는 말을 알면서도 국영수가 무기라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도 그것을 강요할 자유는 없다. 귀가 아프도록 아이가 듣게할 자유는 없다. 그런 공부는 사실 무의미에 가깝다. 존경할만한 인물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한 개체로서의 자존감과도 별 관계가 없다. 공부에서의 경쟁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충분한 장점에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무례함이 있다는 것이다. 부모는 무례하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자랑할만한 품성을 지닌 것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면 그 자체로 경탄할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을 자로 재고 권력과 자본에 굴종하는 태도를 몸에 밴 채 아이에게 그 질서를 강요하는 것은 죄에 가깝다.
그것은 그들만의 욕망désir, pranidhi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