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금강반야바라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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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박구원 |
토론이 가능한 교육
인도 동부의 도시 콜카타로부터 약 서너 시간 북상하면 ‘산티니케탄’이라는 한 시골마을이 나온다. 그곳에 ‘비슈바 바라티 대학’이 있다. 현재는 국립대학이지만,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상(문학상)을 수상한 라비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가 사재를 털어서 세운 대학이다.
이 비슈바 바라티 대학에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다 함께 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의 교육이다. 이 과정을 파타 바반(Patha Bhavana)이라 부르는데, 야외의 나무 밑에서 수업을 한다. 초등 1년부터 고등 1년까지 10년 동안을 이렇게 한다. 여기저기 망고나무가 서 있는데, 그 나무밑에 가면 작은 흑판을 놓을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빨간 벽돌을 땅에 박아서 교실 경계를 표시해 둔다. 아이들은 집에서 학교로 올 때 저마다 포대 같은 것을 하나씩 들고온다. 그리고 그것을 깔고 앉는다.
이러한 파타 바반의 교육은 이미 우리나라에도 교육방송(EBS)을 통해서 소개된 일이 있다. 타고르는 그 스스로 학교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경험을 반성하면서,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자유, 자유롭게…. 무엇을 위한 자유일까? 물론, 진리를 향한 자유이다.
이 파타 바반의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199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1933~)이다. 그는 이 파타 바반의 교육에 대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자유로운 토론식 수업은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그의 책 〈토론하기 좋아하는 인도인〉(우리나라에서는 〈살아있는 인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은 논쟁과 토론의 문화가 민주주의를 지탱한다고 말하는 책이다.
토론이 가능하려면
민주주의 진정한 꽃인 토론문화를 우리 사회에 꽃피우려면, 무엇보다도 어릴 적부터 그렇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문화 속에서 길러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교육이다. 우리 교실은 어떤가?
우리의 교실에서 주입식 교육은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대학입시를 위한 주입식 교육을 초등학교부터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대학은 어떤가? 대학원 수업은 어떤가? 다른 학문은 놓아두고, 철학 관련 학과의 대학원 수업은 어떤 것일까?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하기를 배워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철학 관련 학과의 대학원 수업은 충분히 주입식 교육을 탈피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럼 왜 토론식 수업은 안 되는 것일까? 토론을 하려면, 교사ㆍ교수가 스스로의 권좌(權座)에서 내려와야 한다. 권력을 내려 놓아야 한다. 수업의 진행에 대해서는 교사ㆍ교수로서 기획하고 진행하지만, 그 수업에서 행해지는 지식의 산출과 관련한 내용에 대해서는 우월권이나 진리성을 독점적으로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입식 교육이 되고 만다. 물론, 그렇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필요한 부분이기 하다. 그렇지만 그것만이라 생각한다면, 법고(法古)는 되어도 창신(創新)은 불가능하다.
“이 진리는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고 할 때, 이 진리(法)는 ‘진리를 논의하는 자리’라고 번역해도 좋을 듯하다. 거기에 무슨 높고 낮음이 있다는 말인가. ‘누가’가 정말 중요한가? 아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 ‘말’의 내용이 옳으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 말하는 자가 박사인지 아닌지, 교수인지, 아닌지, 제도권인지 아닌지 등 이런 세속적 구분은 전혀 의미가 없다. 적어도 이 진리를 말하는 자리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순간 그는 권력의 자리로 들어가게 된다. 그가 갖고 있는 권력이 무엇이든, 그 권력을 방패로 삼게 된다. 무서운 일이 아닌가. 참으로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는 자라면, 거듭 거듭 경계하고, 또 성찰할 일이다.
김호성 교수(동국대 불교학부) webmaster@hyunb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