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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고, 꽃이 피니까 봄이 온다

VIS VITALIS 2017. 5. 19. 07:55
법정스님, 길상사 정기법회 법문“행복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있습니다”

 

 

법정스님이 새 봄을 맞아 불자들을 찾아왔다. 지난 16일 성북동 길상사(주지 덕조스님) 극락전에서 열린 봄 정기법회에서 스님은 “속도와 효율성만 쫓다가는 영혼을 잃고 불행해진다”며 “행복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강조했다. 이날 법회에는 1200여명의 신도들이 함께했다. 법문내용을 요약했다.


무엇에 쫓기듯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영혼이 미쳐

따라올 수 없도록

살아서는 안 됩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사물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가꿔야 합니다


온 천지간에 꽃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다보면 새삼스럽게 삶에 대한 고마움을 느낍니다. 무엇에 쫓기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꽃이 피는지 마는지, 새 잎이 돋아나는지 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시간에 쫓겨 다닐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럽의 한 탐험가가 밀림을 뚫고 목적지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짐을 운반해줄 세 사람의 원주민을 고용했는데, 그들은 사흘 동안 쉬지 않고 앞으로 나가기만 합니다. 그런데 사흘 째 되는 날, 짐꾼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더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탐험가는 원주민을 재촉하지만 그들은 꼼작도 하지 않습니다. 탐험가가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여태 잘 오다가 갑자기 멈춰 가지 않는 이유가 뭐요?” 원주민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곳까지 제대로 쉬지 않고 너무 빨리 왔어요. 이제 우리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 이곳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속도와 효율성만 내세우다가 영혼을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삽니다. 그런데 카드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낳아 길러준 어머니를 살해하는 일이 어디에서나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정감을 잃고 쫓겨 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마음의 안정을 얻어야 합니다. 마음이 안정돼야 사람의 도리를 생각할 수 있고, 주위의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온갖 생각을 다 내려놓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그래야 그 안에서 행복의 싹이 틉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 다음에 이뤄야할 목표가 아닙니다. 살아온 날을 되돌아보세요. 행복을 누렸던 그 때는 한 순간이었어요.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이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있어요. 지금이 바로 그 시절입니다. 다른 때가 우리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어떤 특정한 기회에, 특정한 시간에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은 요구하거나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물이에요. 추구하거나 요구하게 되면 행복은 우리를 비껴갑니다. 지금 찬란한 봄날에 이 순간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이 안에 행복은 깃들어있습니다. 나무들만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도 저마다 마음껏 기량을 드러낸다면, 그 때 그곳에서 향기로운 삶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습니다. 

정리=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222호/ 4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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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과 만난 사람들] 벽파 홍기은 거사매화는 반만 필 때 운치가 있고, 벚꽃은 활짝 피어야
  • 글=법정스님 자취를 더듬는 변택주
  • 승인 2011.06.1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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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매화는 반만 필 때 운치가 있고, 벚꽃은 활짝 피어나야 여한이 없다

봄볕이 완연하고 벚꽃잎이 눈발처럼 날리는 4월 중순 은평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신춘은평휘호전시장에서 법정스님 길상사 법회 때마다 10년 넘도록 스님을 외호했던 벽파碧坡 홍기은 거사(71)를 만났다. “처음모실 때는 굉장히 깐깐하셨어요. 부처님오신날 극락전 앞에 처마 좌우에 큰 연등을 걸잖아요. 그 연등에다가 ‘법정 대화상’이란 꼬리표를 달아놓은 적이 있었어요. 스님께서 보시고는 ‘저거 왜 달았어?’ 그러세요. ‘모르겠습니다.’고 말씀드리니 ‘떼어요.’ 이러시는 거라. 난처해서 ‘스님들이 붙이신 걸 제가 어찌 뗍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손수 떼어버리셨어요.” 세상에 큰 스님 작은 스님이 어디있냐시던 어른이니 마음이 편치 않으셨으리라. 풀 먹인 모시적삼처럼 손을 스치면 베일 것처럼 자신에게 엄격한 어른이셨다.

웃어, 웃어! 동네어르신처럼 
부드럽고 도타운 어른스님

“처음에는 주차장에서 행지실로 모시고 갈 때 그냥 별 말씀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시거나 ‘여기는 벌써 꽃이 피네?’ 하면서 한 두 마디 겨우 입을 떼던 어른이 날이 가고 해가 바뀌면서 그 날카롭던 성격이 많이 누그러지셨어요. 시간이 갈수록 얘기도 하고, 웃기도 하시면서 살가워지셨어요. 2008년도인가? 행지실 문 앞에 있으니까 외호하던 사람들 몇몇이 함께 들어오라고 부르셨어요. 나보고 당신 왼쪽에 앉으라고 하시면서 사진을 찍자고 하시는 거야. 몸이 편찮으셔서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오셨지만, 내색을 안 하셨어요. 뭐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까. 우리도 감히 어떠신가 여쭤볼 수도 없고 그러던 차에 부르셔서…, 어렵고 조심스런 어른이 사진을 찍을 때 ‘웃어, 웃어!’ 그러시면서 부드러운 동네 어르신처럼 말씀하시더라고.” 스님은 늘 상대 처지를 헤아리셨다. 이런 걸 불편해 하는구나. 이러면 좋아하는구나 싶으면 바로 당신을 맞추셨다.

늦어도 강원도로 떠난 뜻은
절에 주지가 둘이면 안 돼

“어지간하면 길상사를 빨리 떠나시려고 하셨어요. 빠를 때는 점심공양 끝나고 바로 가시기도 하고, 언젠가? 사월초파일 길상음악회를 하던 날. 늦게 끝났어요. 그 바람에 밤 열한 시 넘어서가셨어요. 그런 날은 주무시고 가실 만도 한데 그냥 가시더라고요. 그래서 ‘아휴 늦어서 너무 피곤하실 텐데 운전이라도 제가 해드릴까요?’하고 말씀드렸더니 ‘안 돼!’ 그러시더라고. 밤 열한 시가 넘어서 가셨는데 몇 시나 돼서 도착하시겠어요? 연세도 있으신데. 그 모습을 뵈면서 참 너무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길상사를 빨리 떠나시려고 하는 까닭을 급한 성정 때문이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작 까닭을 알고 보니 깊은 생각 끝에 나온 결단이었다. “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이해가 가더군요. ‘한 절에는 주지가 둘이 있으면 안돼요. 아니 할 말로 나 보러오지, 주지 보러오겠어요?’ 그러시면서 그러면 주지가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고. 당신이 있으면 질서가 서지 않는다는 말씀이셨어요. ‘마음은 닦는 게 아니라 쓰는 것’이라던 당신 말씀처럼 마음씀이 남다르셨지요.” 결국 법정스님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어쩔 수 없이 길상사에서 하루를 묵으셨다.

“강원도에서 손수 차를 몰고 오시니 얼마나 힘이 드시겠어요. 남이 모는 차를 타도 힘이 드실 연치에. 어떤 때는 청향당에 모셔서 한두 시간 쉬게 해드렸어요. 행지실에는 손님이 자꾸 찾아오니까. 차를 몰고 먼 길 가실 생각을 하면 손님이 찾아왔다고 차마 말씀드리기 어렵더군요. 그래서 스님께서 잠깐 바깥나들이를 나가셨다고 둘러대곤 했어요. 그렇게 쉬고 나시면 한결 몸이 가뿐하신가 봐요.” 나이 들어가는 스님을 곁에서 뫼시면서 느끼던 안타까움이 깊이 배어나는 벽파거사 눈매가 그윽하다.

“한 번은 행지실 올라가시다가 길섶에 핀 야트막한 꽃을 보고 ‘벽파거사 이게 무슨 꽃인지 알아?’ 물으셔요. 조그맣고 땅바닥에 붙어있어서 ‘잘 모르겠습니다.’고 말씀드리니, ‘볼품없지? 가까이 들여다봐야 보이니까. 가장 순수하면서 끈질긴 들꽃이라고…’ 그러셨어요. 뭔가 이름도 알려주셨는데 기억이 나진 않아요. 그 다음부터는 길섶에 핀, 작아서 눈에 띄지도 않던 꽃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참 곱더라고.”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싯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보면 스크린 도어에 가끔 시를 하나씩 써놨잖아요. 어느 날 ‘들꽃’이라는 시가 번쩍 눈에 띄었어요. 제목이 들꽃이라, 어른스님한테 자주 들었던 얘기가 있었으니까. 문효치란 시인이 쓴 시인데 간단해요. ‘누가 보거나 말거나 피네. / 누가 보거나 말거나 지네. / 한마디 말없이 피네. 지내.’ 아무튼 참 이 시인이 대단하다 생각했어.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 살뿐이라는 말이잖아요. 진리에요. 불법佛法을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야! 나한테 이런 시를 만나는 행운이 찾아오다니 그것도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서…’ 필기도구가 없어 가, 핸드폰카메라로 찍어가지고 집에 와서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정리해 함께 서예공부를 하는 사람들한테 프린트해서 돌렸어요. 인생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다보니 모두 감탄을 하는 기라. ‘아! 좋다고.’ 그런데 체육관에 같이 다니는 젊은 사람들한테 주니까 반응이 별로야. 삶이 무르익어야 비로소 와 닿는 이야기를 철부지들이 어찌 알겠나 싶더구먼.” 피카소는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그리기까지 50년이나 걸렸다.

“스님은 우리 나무나 꽃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봄이 되니까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고, 꽃이 피니까 봄이 온다.’고 하셨던 말씀이 떠오르네요. 스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다 법문이고 시에요. ‘매화는 반만 피었을 때 운치가 있고, 벚꽃은 남김없이 활짝 피어나야 여한이 없다. 복사꽃은 멀리서 봐야 제대로 누릴 수 있고, 배꽃은 가까이서 볼 때 그 맑음과 뚜렷함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걸 어떻게 아셨느냐 말이에요. 스님 말고도 오천만 국민이 다 봤는데, 몰랐잖아요. 스님 눈엔 어떻게 그런 게 다 보이시는지 참.” 무엇하나 허투로 보는 법이 없으셨던 법정스님은 늘 알아차림 가운데 계셨다.

법정스님과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할머니, 어머니가 모두 독실한 불교신자였어요. 그러니 모태신앙이라고 봐도 될 거야. 자연히 우리 집 사람도 따라다녔어요. 고부가 완전히 불교에 홀딱 빠졌어요. 그렇지만 나는 분위기만 젖어있었지 절에 잘 다니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집사람이 어느 날 <무소유>를 비롯한 스님 책을 몇 권 가져다 줬어요. ‘보니까 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길상사엘 가게 됐어요. 어느 날인가 법당에서 나오니까 집사람이 거사림 입회신청을 떡 해놓은 거라. 그 뒤로 일요일엔 어지간한 일은 미루고는 길상사로 가는 일을 1순위로 삼았어요. 거사림 회원이 되고 처음 돌아온 사월초파일 날 거사림 회장이 나보고 어른스님 외호를 맡아달라고 해서 스님과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오시는 시간부터 가실 때까지, 행지실에서 면회객들도 통제를 하고, 나중에는 아예 종무소에서 주차장 키도 나한테 맡겨놓고 그랬어요.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행사 때 김수환 추기경님이 오시면 안내해 드리고, 원불교 교무님이나 수녀님들이 오시면 또 그 카고, 그러다보니까 어른스님 둘레 분들은 대강 알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3박4일 여름 선 수련회를 두 번 동참했어요.” 처음 수련회 때 ‘벽파碧坡’라는 법명을 받았다. ‘푸른 언덕’, 법정스님 출가에 앞서 쓰던 호가 ‘청산靑山’이었던 걸 떠올려보면, 각별하다. 그 각별한 푸름 때문일까? 벽파거사가 늘푸른 군인들을 위해 군포교에 나선 지 12년이 넘는다. “우리 막내가 공군 출신 아니요? 그 애가 군에 있을 때 일요일이면 어디 갈 때가 없으니까 군법당엘 가서 천수경하고 반야심경을 다 외운 거라. 군법회가 군인들을 오리지널 불자들을 만들더구먼. 막내 때문에 군포교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어요. ‘우리가 군법당 다니는 일은 진짜 잘 하는 일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벽파거사는 지금도 둘째 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국군벽제병원에 있는 군법당, 자견사自見寺를 찾는다.

법정스님을 만난 행운아
스님! 그리워서 그립니다

입적하신 날이 3월11일 목요일 벽파거사가 서예공부를 하고 있는데 거사 한 분이 어른스님이 삼성병원에서 길상사로 출발하신다고 전화가 왔다. 단걸음에 길상사로 달려갔다. 그 때가 오전12시 반. “2시 다 되서 길상사 범종이 울렸어요. 한없이 울었죠. 다비식 끝날 때까지 집엘 들어가지 못했어요. 며칠 전에 TV를 보는데 장사익씨 노래 ‘봄날은 간다.’가 나오데요. 그 노래를 들으면서 또 어른스님 생각도 나서 눈물을 흘렸어요. 이거 어떻게 좀 깨어나야 하는데, 스님 생각만 하면 눈물 바람을 해요. 스님이 내가 이렇게 집착하는 거 좋아하지 않으실 낀데. 스님이 ‘벽파 너무 집착하지 마. 나, 별나라 어린왕자하고 같이 잘 있는데 너무 그러지 마라.’시면서 보고 계실 것 같아요.” 부처님열반도를 보면 제자들은 물론 사천왕들도 이젠 외호할 부처님이 안 계시다는 슬픔에 땅을 치고 통곡한다. 보고 싶고 그리워서 그린 게 그림이고, 그림 솜씨가 없는 사람이 궁리 끝에 만든 부호가 글씨라는데 떠난 분을 그리워함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벽파거사는 제8회 신춘은평휘호대회에서 일반부 한글부문 대상을 탔다. 서예공부 3년 만에 이룬 쾌거로 가르친 선생을 비롯해 둘레 분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다는데…. “저하고 같이 서예를 시작한 사람들은 모두 한문서예를 했어요. 그런데 저만 유독 한글서예를 했어요. 스님 글 ‘미리 쓰는 유서’를 보면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고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어른스님을 떠올리면서 한글서예를 했어요. 스님은 말씀도 참 쉽게 하세요. 아름다운 우리말 표현, 우리 식구는 ‘텅 빈 충만’ 이 말에 반했대요. 어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느냐. 너무 말이 멋지다 이거야. 텅 빈 건데 ‘충만’이라니. 그래서 내가 ‘이 사람아 그게 공空이다 공.’이라고 했어요. 참 대단하시지 않아요? 스님이 한글을 아름답게 빛내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셨어요. 세종대왕께서도 반가우셨을 거야.” ‘만남은 눈뜸이다. 친구는 내 부름에 대한 응답.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사회적 메아리를 뜻한다.’처럼 스님께서 풀어내신 주옥같은 표현들이 셀 수 없다.

“우리 집 보살이 가끔 ‘당신은 법정스님을 만난 게 참 행운이에요.’ 그래요. 그러면 내가 ‘아암. 행운아지 당신 때문에 다 그리됐으니 당신이 내 생애 최고 행운이자 선물이지. 당신이 스님과 엮어주지 않았으면 내가 무슨 복에 스님을 뵈었겠어?’ 그러지요.” 은근히 당신 복밭을 자랑하는 팔불출 벽파 거사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해진다.

“법정스님쯤 되시면 대단히, 우리하고 다른 큰 뭔가가 있지 않겠나? 여기는데 격 없이 소탈하고 누구한테든지 편안하게 대하시곤 했어요. 뭐랄까? 아주 평범한 농부처럼 꾸밈이 없으세요. 이 시대 큰 어른이셨지요. 꼭 어떤 뭘 배우지 않더라도. 스님이 세상에 계시는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고 울림이었잖아요. 현장스님 말마따나 한국사람으로 태어나서, 티벳스님처럼 사시다가 인도스님처럼 가셨어요. 스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죠.” 법정스님 입적 뒤에 더 열심히 길상사에 나가고 맑고 향기롭게 회원 만남의 날에도 빠지지 않는다는 벽파거사. “스님께서 길상사를 10년 동안 받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치시다가 ‘그럼 맑고 향기롭게 활동을 하지 않을 작정이냐?’는 맑고 향기롭게 회원들 얘기를 받아들여 길상사가 생겨났잖아요.” 법정어른스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깊어, 우짜든지 ‘맑고 향기롭게’와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스님 뜻을 잘 받들어 맑고 향기롭게 거듭나는데 힘을 보태는 게 당신 몫이라고 여긴다는 벽파거사, “새는 머리나 날개로만 날지 않고 온몸으로 난다.”며 말씀을 거둔다. 이 말씀 끝에 조계종군종특별교구장을 지내셨던 일면스님 말씀이 떠올랐다. “느그는 주불主佛해라! 난 후불탱화할 테니.”

글=법정스님 자취를 더듬는 변택주  einew@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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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행복은 ‘이 다음’이 아닌 지금 순간에” 


법정스님, 길상사 봄 정기법회 법문 


법정스님이 새 봄을 맞아 불자들을 찾아왔다. 스님은 지난 16일 성북동 길상사(주지 덕조스님) 극락전에서 열린 봄 정기법회에서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순간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법회에는 1200여명의 신도들이 함께했다. 법문내용을 정리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는지 못 지냈는지 스스로 살펴봐야 합니다. 날씨가 이렇게 화창하면 사람의 마음도 화창해집니다. 우리 몸 자체가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대 자연의 상태에 따라서 사람의 몸도 공감합니다. 온 천지간에 꽃입니다. 봄기운이 사방에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이런 때 마음이 여린 사람은 꽃멀미를 앓아요.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서 봄을 이룹니다. 꽃이 없는 봄을 상상해보십시오. 꽃이 없는 봄이 온다면 어두울 수밖에 없어요. 환경학자들은 미래에 이 다음 세기에 가서는 봄에 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지금처럼 지구와 환경훼손이 지속되면 봄이 와도 꽃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꽃을 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좋아합니다. 만약 꽃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꽃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우리들 마음에 꽃다운 요소가 깃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심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습니다. 새삼스럽게 삶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기 때문에 꽃의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에 쫓기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꽃이 피는지 마는지, 새 잎이 돋아나는지 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에 쫓겨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주적인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시간에 쫓겨 다닙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그어놓은 금과 같은 것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존재합니다. 특히 공동생활에서는 그런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멋대로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공동체의 화합을 깨뜨립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분명 필요하고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심리적인 시간은 그 성질이 달라요. 


불안과 두려움은 이 심리적인 시간에 의해서 부추김을 받는 거예요. 혼자 가만히 있는데, 불안해하다가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리적인 시간을 감당하지 못해서 입니다. 사람은 심리적인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타의적이에요. 외부에 의해서 정해져있습니다. 심리적인 시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있습니다. 시계가 시간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흔히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 ‘세월이 약이겠지’라고 하는데, 그 말에 속지 마십시오. 시간 자체는 무슨 일을 해결해줄 수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망각이 있을 뿐이에요. 모진 맘을 먹었어도 세월이 지나가면 풀어집니다. 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기 아프리카를 탐험한 유럽인들이 겪은 경험담입니다. 수피우화에도 실려 있습니다. 한 탐험가가 밀림을 뚫고 목적지로 향해 가고 있었는데, 짐을 운반해줄 세 사람의 원주민을 고용했어요. 짐도 많았고 길 안내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흘 동안 충분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밀림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 나가기만 합니다. 


사흘 째 되는 날, 짐꾼들은 자리에 주저앉아서 더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탐험가가 원주민에게 화를 내면서 예정된 시간에 목적지까지 꼭 도착해야 한다고 재촉을 해요. 짐꾼들은 꼼작도 하지 않습니다. 윽박지르고 달래도 보는데 짐꾼들은 도대체 요지부동이에요. 탐험가가 한 사람을 붙잡고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여태 잘 오다가 주저앉아다시 길을 가려하지 않는 이유가 뭐요.” 원주민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곳까지 제대로 쉬지 않고 너무 빨리 왔어요. 이제 우리 영혼이 여기까지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이곳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쫓기듯이 사흘 동안 계속 왔기 때문에 영혼이 분리된 거예요. 그래서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 이곳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탐험가의 재촉에 쫓기듯 길을 헤쳐 오느라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왔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현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속도와 효율성만 내세우다가 영혼을 상실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속도는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거나 몹시 서두를 때, 재촉당할 때 스트레스를 받아요. 너무 빨리 움직이면 안정을 잃습니다. 


그런 경험 다들 해보셨죠. 제한속도 시속 100km로 달려야 되는 구간을 시속 150km로 달리면 연료만 많이 소모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정한 정서를 이루게 되요. 자기도 모르게 들뜨고 흥분되고 피곤이 가중돼요. 스트레스가 쌓이는 겁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사고를 일으키지 않습니까. 속도라는게 그런 거예요. 속도와 효율성은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요소입니다.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실수를 저지르는 일은 적지 않습니다. 특히 신문사나 방송국 같이 마감시간이 있는 곳이 대표적입니다. 마감시간이라는 것이 아주 비인간적인겁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차분히 생각하면서 일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감성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차분히 생각하면서 행동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계속 쫓기다보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리고 맙니다. 원주민의 표현대로 무슨 일에나 영혼이 따르지 않으면 불행해집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삽니다. 불행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세상인데, 카드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낳아 길러준 어머니를 살해하는 막된 이 세상에서, 삶의 기준을 어디다 두고 살아야하는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안정감을 잃고 제정신을 잃고 바삐 쫓기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온전하게 살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마음의 안정을 얻어야 합니다. 마음이 안정돼야 사람의 도리를 생각할 수 있고, 주위의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온갖 생각을 다 내려놓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복잡한 생각,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부려놓고 그냥 무심히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세요. 그래야 그 안에서 행복의 싹이 틉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 다음에 이뤄야할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늘 “이 다음에 시골에 내려가 집이나 한 채 짓고 조용히 살면서 행복을 찾겠다”고 설계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이 다음에 이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것을 되돌아보세요. 행복을 누렸던 그 때는 한 순간이었어요.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으면서, 지금 이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있어요. 지금이 바로 그 시절입니다. 다른 때가 우리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늘 그렇게 생각해야 돼요. 이 다음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어떤 특정한 기회에, 특정한 시간에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흔히들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을 행복이라고 알고 있어요. 자동차를 갖고 싶은 사람은 자동차, 5월 선거 때 한 자리 하고 싶은 마음, 자기 짝을 갖고 싶은 사람, 이런 욕망을 이루면 행복이라고 하고 욕망을 이루지 못하면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것을 막상 갖고 나면 머지않아 시들해집니다. 그렇게 소중하던 물건이 시들해지고 쳐다보지도 않게 돼요. 


그것은 모두 덧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늘 변할 수 있는 덧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삶의 부수적인 것이지 본질일 수 없습니다. 부수적인 것은 상황에 따라 늘 변해요. 자동차, 가구, 권력 등 삶의 부수적인 것이지 본질이 아니에요. 부수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가치를 부여하지만 부수적인 것은 그렇게 가치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요구하거나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물이에요. 추구하거나 요구하게 되면 행복은 우리를 비껴갑니다. 지금 찬란한 봄날에 이 순간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이 안에 행복은 깃들어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무엇에 쫓기듯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영혼이 미쳐 따라올 수없도록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안정된 마음, 차분한 마음으로 사물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가꿔야 합니다. 나무들만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도 저마다 마음껏 기량을 드러낸다면, 그 때 그곳에서 향기로운 삶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 잠재력을 묻어두지 말고 마음껏 발휘해서 세상과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행복은 미래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 현재에 있다는 사실을 거듭 명심하길 바랍니다. 


눈부신 봄날 활짝 문을 연 꽃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구체적으로 들으면서 오늘 하루 이 자리에서 마음껏 행복을 누리십시오. 



[불교신문 2006.4.17] http://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