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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없어도 슬기는 있다.

VIS VITALIS 2017. 3. 25. 20:56

일점혈육에 대한 우리의 집착.

사물에서 인간에서 우리는 혈연을, 족보적 연대기를 찾는다.

근원이니 본질이니 신이니...

하나로 수렴된다는 그 편한 사고가 자신의 편함을 낳기 때문에

이런 기도는 역사적으로 보편화된 버릇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마음에 안드는 그러기에 그런 사람에게는 그릇된 것으로

확실시되는 버릇이다.

방계만 찾아질 뿐, 직계는 유추될 뿐이다. 방계가 직계인데 지나치게 자신감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때로 자기자신을 질투한다.특히 가장 뛰어난 자신의 직관에 사약을 내리곤 한다.

자신에게서 찾아낸 금을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은 인간을 괴물로 정의할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증거이다.

우주는 피가 흘러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피 대신 이치니 도리니 섭리니 원리니 하는 말을 집어 넣어 해결해서도 안된다.

항목은 애초 부재하였고 변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차원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애초 방정식도 아니다.

물론 명제도 아니다. 우리는 아무리 발전해도 고작 인간의 수준이고 그것은 우리의 하품이고 우리의 슬픔이고 우리의 놀이이다. 너머의 너머가 여기라는 말은 여기의 너머에 아무 것이 없다는 말과 같다. 너머의 존재이유는 다리를 건너지 않아야되는 다리와 같아 저기가 여기로 되는 순간 그 다리는 사라진다. 이상한 다리. 너머가 저 곳이 되고 저 곳의 너머가 여기가 되니 너머의 너머가 여기가 되는 것이다. 이 약간 어색한 논리는 이 곳의 주변이나 밑을 너무 이상화하지 않는데 도움이 된다. 문제는 구원 또는 구제의 부정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뭐 이 쓰레기같은 이 곳에서 뭐 어쩌라고? 하는.


이 곳을 부수는데 다른 까닭이 없다는 것은 자유이기도 하다. 삶만이 남기 때문이다. 온전히 현실만을 살필 여력이 더 생겨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도 잘 살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곡두의 누리! 이 곳에서 슬기가 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붓다여! 이 곳에서 백만 겁 너머의 여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