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와 공에 관하여
불교학술원 소식지 뒤쪽에 실려, 읽는 이들에게 청량감을 주어야 할 터인데 이런 저런 주제를 끄적거리다가 핵심적일지는 몰라도 아주 무거운 개념 또는 주제를 쓰게 되었습니다. 연기와 공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어 굳이 이런 곳에서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접하게 된 지식이 비록 알 사람은 다 아는 종류의 것일지라도 혹시라도 처음 보는 이들이 있다면 공유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연기
연기는 무엇일까요?
세친이 짓고 현장이 옮긴 『아미달마구사론』1)에서는 연기를 뜻하는 범어 Pratītyasamutpāda를 음역한 뒤 각 구절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계界는 어근, 조助는 접두사를 뜻한다는 권 오민 번역2)을 참조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此中縁起是何句義。
여기에서 연기라는 어구의 뜻은 무엇인가?
鉢剌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由先助力, 界義轉變。故行由至, 轉變成‘縁’。
“발랄저[鉢剌底 prati]”는 “이르다[至]”는 뜻이다. “의저[醫底 itya]”의 어근[界, √i]은 “가다[行]”는 뜻이다. 앞의 접두사[助,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界, √i]의 뜻이 바뀐다. 그러므로 “가다”가 “이르다”에 의하여 (“가다”라는 의미가) 바뀌어 “연縁(=조건으로 하여)”이 된다.
參是‘和合’義。嗢是‘上升’義。鉢地界是‘有’義。‘有’藉‘合’·‘升’, 轉變成‘起’。
“삼[參 sam]”은 “화합和合”의 뜻이다. “올[嗢 ut]”은 “상승上升”의 뜻이다. “발지[鉢地 pāda]”의 어근[界, √pad]은 “있다[有]”는 뜻이다. “있다[有]”는 “화합和合”과 “상승上升”에 의하여 (“있다”라는 의미가) 바뀌어 “기(起: 일어남)”가 된다.
由此有法, ‘至’於‘縁’已, ‘和合’‘升’‘起’。是‘縁起’義。
이러한 유법(有法)으로 말미암아 ‘연縁’에 대하여 ‘이르고’ 나서 ‘화합하고’ ‘위로 [升=上升]’ 일어남[起]이 ‘연기’의 뜻이다.
위는 연기緣起3)로 번역된 범어에 대한 어원분석(etymology)입니다. 연緣에서는 “가다”라는, 기起에서는 “있다”라는 뜻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다”와 “있다”가 결합하고 변용하여 연기라는 의미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는 “있음being”과 “됨becoming”이라는 뜻을 포괄하는 존재(有 bhava)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발랄저[鉢剌底 prati]를 “갖가지[種種]”라는 뜻으로 보기도 합니다. 용어 정의와 관련해서는 범본 『구사론』보다 현장의 한역 『구사론』이 좀 더 자세하다고 합니다.
“연기”라는 용어는 현재 번역 없이 쓰이고 있으나 “조건적 생기”, “조건 속에서의 생기”, “조건적 발생” 등으로 옮긴 것들이 보입니다. 영어로는 “dependent origination”, “dependent arising”, “conditioned genesis”, “dependent co-arising”, “interdependent arising” 등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연기라는 용어에 관한 짤막한 소개입니다. 다음으로는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잡아함경 권12(288)를 인용해 “연기가 무엇인가?”에 대해 간단히 더 보고자 합니다.
“늙음이 있는가?”
“있다.”
“죽음이 있는가?”
“있다.”
“늙음과 죽음이 스스로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이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아니면 그 둘 어느 것도 짓지 않으니 원인이 없이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스스로 짓지도 않고 다른 것이 짓지도 않는다. [...]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4)
위는 사리불舍利弗이 묻고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가 대답하는 대화를 조금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 스스로 짓는 것은 자작自作, 다른 것이 짓는 것은 타작他作입니다. 늙음은 (1) 자작도 아니고, (2) 타작도 아니고, (3) 자작이면서 동시에 타작인 것도 아니고, (4) 자작도 타작도 아니어서 원인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라는 사구부정四句否定이 여기에 쓰이고 있습니다. 영원불변하며 자기충족적인 실체를 배제하고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연기에 있어서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라는 정의는 무척 중요해 보입니다. 이 사구부정에 이어 답처럼 제시된 것이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명색에 이어 식까지 10지 연기5)가 제시되고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 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있게 됩니다.
공
용수의 『중론』을 보면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공空이 하나의 논리 또는 도식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6)B.K 마티랄Matilal에 따르면 수학자들이 말하는 영에 영향을 받아서 용수가 철학적으로 공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7)연기와 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맥락에 따라 층위를 달리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잡아함경』 권10(262)에는 “여래께서는 양 극단을 떠나시어 중도를 설하셨다. 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如來離於二邊。説於中道。所謂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 모든 행들이 다 공이다. 모두 다 고요하여 얻을 수 없다. 於一切行皆空。皆悉寂不可得。”라고 나옵니다. 현장이 번역한 『해심밀경』에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은 무엇인가? 모든 법이 조건으로 생겨난다는 자성을 말한다. 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말하자면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내지 순전한 큰 고통의 무더기를 불러일으킨다. 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縁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縁行。乃至招集純大苦蘊。”8)위 두 경전에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이 똑같이 언급되지만 맥락은 다릅니다. 『해심밀경』에서는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을 나열한 뒤 의타기성을 설명하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3성(三性)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를 해석하는 것도 후대에 볼 수 있습니다. 청변은 의타기성의 오온도 공이라고 보는데 반해 호법은 의타기성의 오온은 공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3성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연기의 변용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법장(643-712)이 『탐현기』에서 60화엄의 광명각품을 풀이하는 가운데 “의타기성의 첫째는 환유幻有이고 둘째는 성공性空이다. 依他中, 一是幻有, 二是性空。”9)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이론적으로 발전된 연기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힘이 있는 공空과 힘이 없는 공10)을 나누어 얘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가 오히려 마음에 더 와 닿습니다.
似酒皆空。술처럼 모두 공하네
問甚禪宗。선의 종지를 깊이 묻나니
今日珍重。오늘 편히 쉬시게
明月清風。달은 밝네 바람은 맑네
송나라 오경吳瓊이라는 분이 임종 전 술을 드신 뒤 읊은 시입니다.11)이 시를 읊은 뒤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염불한 뒤 아미타부처님이 마중하러 오셨다고 외치시고는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3. 나오며
부처님은 출가 전 늙음과 죽음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것이 출가의 동기였으며 깨달음의 나무[道樹] 아래 일어났던 일은 늙음과 죽음의 해소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늙음은 자작도 타작도 아닙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에는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늙음에 대한 불교적 인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고은 시인이 “나 혼자는 내가 아니다.” (<정릉에서>)라고 한 것이나 정현종 시인이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라고 표현한 것도 연기적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인 나, 홀로인 남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연기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이웃”이 적합할 것입니다.
1) 『아비달마구사론 阿毘達磨俱舍論』 권9 〈분별세품分別世品 3〉 (CBETA, T29, no. 1558, p. 50, b14-18)
2) 권오민, 『아비달마구사론 2』, 446쪽.
3) 『구사론』에는 연기를 찰나Kṣaṇika, 연박Sāṃbaṃdhika, 분위Āvasthika, 원속Prākarṣika 이 네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세 번째 분위가 전통적인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에 의한 12연기의 이해입니다. 《阿毘達磨俱舍論》卷9 〈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剎那。二者連縛。三者分位。四者遠續。」(T29,48 c8-10)
4) 『雜阿含經』 卷12(二八八)(CBETA, T02, no. 99, p. 81, a9-c3) ; S. 12. 67. Naḷakalāpiya.
尊者舍利弗問尊者摩訶拘絺羅:「云何?尊者摩訶拘絺羅,有老不?」 答言:「有。」 尊者舍利弗復問: 「有死不?」 答言:「有。」 復問:「云何?老死自作耶?為他作耶?為自他作耶?為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尊者舍利弗!老死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亦非非自他作無因作,然彼生緣故有老死。」
5)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잡아함경 권10(262)이나 현장이 번역한 연기경縁起經에는 12지 연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12지 연기형식에 관하여」(『불교학리뷰』 3권(2008))를 보시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6) 남수영 옮김, 나카무라 하지메 지음, 『용수의 중관사상』(226쪽)을 보면 용수 이전에도 대승불교에서는 공을 설하고 있었는데 이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용수가 『중론』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구마라집鳩滅什 번역 『중론中論』. T30.33b: “衆因縁生法 我説即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未曾有一法 不從因縁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7) 불교의 공성空性에 관한 논의가 인도 수학에 영향을 미쳐 영이 나왔다는 견해 또한 있습니다.
8) 『解深密經』 (No. 0676 玄奘譯 ) T16.693a
9) 『華嚴經探玄記』 (No. 1733 法藏述 ) T35.175b
10) 『華嚴一乘教義分齊章』 卷 第四. T45.499
11) 악인왕생惡人往生을 말할 때 출가하였다가 환속한 뒤 도축 일로 생계를 꾸려간 오경吳瓊이라는 분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용서증광정토문龍舒增廣淨土文』 권5, 『왕생집往生集』 권2에 나옵니다.
연기와 공에 관하여
불교학술원 소식지 뒤쪽에 실려, 읽는 이들에게 청량감을 주어야 할 터인데 이런 저런 주제를 끄적거리다가 핵심적일지는 몰라도 아주 무거운 개념 또는 주제를 쓰게 되었습니다. 연기와 공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어 굳이 이런 곳에서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접하게 된 지식이 비록 알 사람은 다 아는 종류의 것일지라도 혹시라도 처음 보는 이들이 있다면 공유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연기
연기는 무엇일까요?
세친이 짓고 현장이 옮긴 『아미달마구사론』1)에서는 연기를 뜻하는 범어Pratītyasamutpāda를 음역한 뒤 각 구절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계界는 어근, 조助는 접두사를 뜻한다는 권 오민 번역2)을 참조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此中縁起是何句義。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ḥ?
여기에서 연기라는 어구의 뜻은 무엇인가?
鉢剌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
pratiḥ prāptyarthaḥ, etiḥ gatyarthaḥ|
由先助力, 界義轉變。故行由至, 轉變成‘縁’。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ḥpratītyeti|
"발랄저[鉢剌底 prati]”는 “이르다[至]”는 뜻이다. “의저[醫底 iti]”의 어근[界, √i]은 “가다[行]”는 뜻이다. 앞의 접두사[助3),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界, √i]의 뜻이 바뀐다. 그러므로 “가다”가 “이르다”에 의하여 (“가다”라는 의미가) “연縁(=조건으로 하여)”으로 바뀐다.
參是‘和合’義。嗢是‘上升’義。鉢地界是‘有’義。‘有’藉‘合’·‘升’, 轉變成‘起’。
yadi sattārthaḥ,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ḥ|
“삼[參 sam]”은 “화합和合”의 뜻이다. “올[嗢 ut]”은 “상승上升”의 뜻이다.“발지[鉢地 pāda]”의 어근[界, √pad]은 “있다[有]”는 뜻이다. “있다[有]”는 “화합和合”과 “상승上升”에 의하여 (“있다”라는 의미가) “기(起: 일어남)”로 바뀐다.
由此有法, ‘至’於‘縁’已, ‘和合’‘升’‘起’。是‘縁起’義。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ḥ|
이러한 유법(有法)으로 말미암아 ‘연縁’에 대하여 ‘이르고’ 나서 ‘화합하고’ ‘위로 [升=上升]’ 일어남[起]이 ‘연기’의 뜻이다.
위는 연기緣起4)로 번역된 범어에 대한 어원분석(etymology)입니다. 연緣에서는 “가다”라는, 기起에서는 “있다”라는 뜻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가다”와 “있다”가 결합하고 변용하여 연기라는 의미를 이룬다는 것입니다.이는 “있음being”과 “됨becoming”이라는 뜻을 포괄하는 존재(有 bhava)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연기의 용어 분석과 관련해서는 현장의 한역 『구사론』이 범본 『구사론』보다 좀 더 자세합니다.
“연기”라는 용어는 현재 번역 없이 쓰이고 있으나 “조건적 생기”, “조건 속에서의 생기”, “조건적 발생” 등으로 옮긴 것들이 보입니다. 영어로는 “dependent origination”, “dependent arising”, “conditioned genesis”, “dependent co-arising”, “interdependent arising” 등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연기라는 용어에 관한 짤막한 소개입니다.
다음으로는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잡아함경』 권12(288)와 권14(343)를 보고자 합니다.
“늙음이 있는가?”
“있다.”
“죽음이 있는가?”
“있다.”
“늙음과 죽음이 스스로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이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아니면 그 둘 어느 것도 짓지 않으니 원인이 없이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스스로 짓지도 않고 다른 것이 짓지도 않는다. [...] 삶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5)
위는 사리불舍利弗이 묻고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가 대답하는 대화를 조금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 스스로 짓는 것은 자작自作, 다른 것이 짓는 것은 타작他作입니다. 늙음은 (1) ‘자작’도 아니고, (2) ‘타작’도 아니고, (3) ‘자작이면서 또한 타작인 것’도 아니고, (4)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니 원인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라는 사구부정四句否定이 여기에 쓰이고 있습니다. 연기에 있어서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라는 정의는 무척 중요해 보입니다. 이 사구부정에 이어 답처럼 제시된 것이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명색에 이어 식까지 10지 연기6)가 제시되고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 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있게 됩니다.
자작과 타작과 관련해서는 『잡아함경』 권14(343)7)도 주목됩니다. 고락苦樂이 자작인지 타작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無記]라고 나옵니다. 부미浮彌존자나 사리불舍利弗존자가 그렇게 말한 것을 아난阿難존자가 전하자 부처님이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 자작이나 타작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사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고락과 관련된 것이고12지 연기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만 “고락은 연기로부터 생긴다.苦樂從緣起生”라고 하여 연기緣起로서 대답하고 있는 점은 같습니다.
공
용수의 『중론』을 보면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공空이 하나의 논리 또는 도식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8)B.K 마티랄Matilal에 따르면 수학자들이 말하는 영에 영향을 받아서 용수가 철학적으로 공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9)연기와 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맥락에 따라 층위를 달리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잡아함경』 권10(262)에는 “여래께서는 양 극단을 떠나시어 중도를 설하셨다. 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如來離於二邊。説於中道。所謂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 모든 행들이 다 공이다. 모두 다 고요하여 얻을 수 없다. 於一切行皆空。皆悉寂不可得。”10)라고 나옵니다.
현장이 번역한 『해심밀경』에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은 무엇인가? 모든 법이 조건으로 생겨난다는 자성을 말한다. 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말하자면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내지 순일純一하고 거대한 고통의 무더기를 불러일으킨다. 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縁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縁行。乃至招集純大苦蘊。”11)
위 두 경전에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이 똑같이 언급되지만 맥락은 다릅니다. 『해심밀경』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나열한 뒤 의타기성을 설명하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3성(三性)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를 해석하는 것도 후대에 볼 수 있습니다. 청변은 의타기성의 오온도 공이라고 보는데 반해 호법은 의타기성의 오온은 공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3성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연기의 변용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장(643-712)이 『탐현기』에서 60화엄의 광명각품光明覺品을 풀이하는 가운데 “의타기성의 첫째는 환유幻有이고 둘째는 성공性空이다. 依他中, 一是幻有,二是性空。”12)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이론적으로 발전된 연기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지엄의 『수현기』나 『오십요문답』을 이어받아 힘이 있는 공空과 힘이 없는 공13)을 말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가 오히려 마음에 더 와 닿습니다.
似酒皆空。술과 같이 모두 공하여
問甚禪宗。선의 종지를 곰곰이 물어 보네
今日珍重。오늘 다들 잘 계시게
明月清風。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하구나
송나라 오경吳瓊이라는 분이 임종 전 술을 드신 뒤 읊은 시입니다.14)이 시를 읊은 뒤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염불한 뒤 아미타부처님이 마중하러 오셨다[佛來]라고 외치시고는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출가 전 늙음과 죽음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것이 출가의 동기였으며 깨달음의 나무[道樹] 아래 일어났던 일은 늙음과 죽음의 해소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늙음은 자작도 타작도 아닙니다. 아예 자작이니 타작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에는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늙음에 대한 불교적 인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고은 시인이 “나 혼자는 내가 아니다.” (<정릉에서>)라고 한 것이나 정현종 시인이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비스듬히>) 라고 표현한 것도 연기적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인 나, 홀로인 남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연기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이웃”이 적합할 것입니다.
1) 『아비달마구사론 阿毘達磨俱舍論』 권9 〈분별세품分別世品 3〉 (CBETA, T29, no. 1558, p. 50, b14-18).범어는 張雪杉 편집본(http://www.mldc.cn/sanskritweb/resour/etext/abhk3.html)을 참조하였습니다.
《阿毘達磨俱舍論》卷9〈分別世品3〉:「經說。云何緣已生法。謂無明行至生老死。或應不許二在未來。是則壞前所立三際。有說。緣起是無為法。以契經言如來出世若不出世。如是緣起法性常住。由如是意理則可然。若由別意理則不然。云何如是意。云何為別意而說可然及不可然。謂若意說。如來出世若不出世。行等常緣無明等起非緣餘法。或復無緣故言常住。如是意說。理則可然。若謂意說有別法體名為緣起湛然常住。此別意說理則不然。所以者何。生起俱是有為相故。非別常法為無常相可應正理。又起必應依起者立。此常住法彼無明等何相關預而說此法依彼而立為彼緣起。又名緣起而謂[4]目常。如是句義無相應理。此中[5]緣起是何句義。鉢[6]剌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緣。參是和合義。嗢是上[7]升義。鉢地界是有義。有藉合[*]升轉變成起。由此有法至於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如是句義理不應然所以者何。依一作者有二作用。於前作用應有已言。如有一人浴已方食。無少行法有在起前。先至於緣後時方起。非無作者可有作用。」(CBETA, T29, no. 1558, p. 50, a28-b22) [4]目=相【明】。[5]Pratityasamutpāda.。[6]刺=剌【宋】【元】【明】【宮】【CB】*。[7]升=昇【宋】【元】【明】【宮】*。[*7-1]升=昇【宋】【元】【明】【宮】*。[*7-2]升=昇【宋】【元】【明】【宮】*。
張雪杉 편집본(http://www.mldc.cn/sanskritweb/resour/etext/abhk3.html):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ḥ?
【真】本言至行集生。此句有何義。
【玄】此中緣起是何句義。
pratiḥ prāptyarthaḥ, etiḥ gatyarthaḥ|
【真】若合此句所顯義。謂諸行法至因及緣。由聚集未有成有。是義至行集生所顯。
【玄】鉢刺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ḥ pratītyeti|
【真】
【玄】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緣。
yadi sattārthaḥ,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ḥ|
【真】
【玄】參是和合義。嗢是上升義。鉢地界是有義。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ḥ|
【真】
【玄】有藉合升轉變成起。由此有法至於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
2) 권오민, 『아비달마구사론 2』, 446쪽. “여기서 ‘연기(緣起)’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뜻의 말인가? 발랄저(鉢剌底, prati)는 바로 ‘이르다[至, prāti]’의 뜻이고, 의지(醫地, iti)의 어근[界, 즉 √i]은 ‘간다[行, gati]’는 뜻인데, 앞의 접두사(즉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의 뜻이 전변하였다. 그래서 ‘간다’가 ‘이르다’는 뜻에 의해 ‘연하여’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삼(參, sam)은 바로 화합의 뜻이고, 올(嗢, ut)은 상승의 뜻이며 발지(鉢地, pādi)의 어근(즉 √pād)은 존재(有, sattvā)의 뜻이다. 즉 존재가 화합과 상승의 뜻과 결합하여 ‘일어나다[起]’는 뜻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어떤 존재가 연에 이르러 화합 상승하여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
3) 『구사론기俱舍論記』 권9 해당 부분(CBETA, T41, no. 1821, p. 169, c17-p. 170, a6)에서는 “由先助力”을 “由先鉢剌底助力”(T41.169c23)으로 풀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助’는 접두사나 조사이기보다 단순히 “돕다”는 뜻에 가까워 보입니다. “由先鉢剌底助力”이 “앞의 발랄저의 조력으로”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助에 대해 이외 별다른 지식이 없는 상태인지라 여기에서는 접두사로 보는 견해를 따릅니다. 『구사론기俱舍論記』에는 “底(丁履反)”이라 하여 底를 ‘지’로 읽으라고 나옵니다.
《俱舍論記》卷9〈分別世品3〉:「此中緣起是何句義者。大眾部問。
鉢[刺>剌]底至是緣起義者。經部答。或說一切有部答。依聲明論有字緣.字界。其字界。若有字緣來助。即有種種義起鉢剌底是至義是字緣。醫底界是行義是字界。界是體義。此醫底界由先鉢[刺>剌]底助力。醫底界義轉變成緣。若助訖成緣應言鉢[刺>剌]底(丁履反)帝[8]夜(叐何反)此翻名緣。所以然者。諸緣勢力起果名行。未至之時未成緣義。若緣力至果。或諸緣相至。方得名緣。故造字家於行界上加至助緣行成緣義。參是和合義。嗢是上[9]升義。此二是字緣。鉢地界是有義是字界。鉢地有界藉前參唱合升字緣助力轉變成起。若助訖成起。應言參牟播陀。此翻名起。所以然者。明諸有法要與緣合便得上升。故名為起。故造字家於有界上加合升緣。有成起義。故總結言由此有行法至於四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
如是句義至彼應先說故者。聲論師難至緣已起。故言如是句義理不應然。此即總非。所以者何。依一作者實體有二作用前後別起。可得說言於前作用應有已言。彼聲論計諸法有體有用。體即[1]逕留多位名為作者。用即隨位不同名為作用。一切作用必依作者。彼計作用。同勝論師業句義離體別有指事。別顯如有一人名為作者。起二作用。先澡浴已後時方食。於前作用可說已言。若有少行法有在起前。可得說言先至於緣後時方起。既無行法有在起前 先至緣已後時方起。如何得說至緣已起 言起前者。現在名起。前謂未來。依法行世未來名前 或起前者。在起前故。即[2]先已至於緣名為起前。皆表未來。非無作者法體可有作用。以彼作用必依體故。故說頌破言。至緣[3]之行。若在起先。未來法體而非有故。不應道理。若行至緣與起俱時。便壞己[4]於彼應先說至緣[5]後方說起不應說俱。聲論.經部。俱說過.未無體故。以非有故破彼經部。若以此頌破說一切有部。聲論即以己宗義破。」(CBETA, T41, no. 1821, p. 169, c17-p. 170, a28) [8]夜+(夭何反)【甲】。[9]升=昇【甲】下同。[1]〔逕〕-【甲】。[2]先=失【甲】。[3]之=已【甲】。[4]〔於〕-【甲】。[5]後方說起=方說起起【甲】。
4) 『구사론』에는 연기를 찰나Kṣaṇika, 연박Sāṃbaṃdhika, 분위Āvasthika, 원속Prākarṣika 이 네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세 번째 분위가 전통적인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에 의한 12연기의 이해입니다. 『阿毘達磨俱舍論』卷9 〈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剎那。二者連縛。三者分位。四者遠續。」(T29,48c8-10)
《阿毘達磨俱舍論》卷9〈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12]剎那。二者[13]連縛。三者[14]分位。四者[15]遠續。云何剎那。謂剎那頃由貪行殺具十二支。癡謂無明。思即是行。於諸境事了別名識。識俱三蘊總稱名色。住名色根說為六處。六處對餘和合有觸。領觸名受。貪即是愛。與此相應諸纏名取。所起身語二業名有。如是諸法起即名生。熟變名老滅壞名死。復有說者。剎那連縛如品類足。俱遍有為。[16]十二支位所有五蘊皆分位攝。即此懸遠相續無始說名遠續。」(CBETA, T29, no. 1558, p. 48, c8-18) [12]Kṣaṇika.。[13]Sāṃbaṃdhika.。[14]Āvasthika.。[15]Prākarṣika.。[16]十二=二十【宮】。
5) 『雜阿含經』 卷12(二八八)(CBETA, T02, no. 99, p. 81, a9-c3) ; S. 12. 67. Naḷakalāpiya.
尊者舍利弗問尊者摩訶拘絺羅:「云何?尊者摩訶拘絺羅,有老不?」 答言:「有。」 尊者舍利弗復問: 「有死不?」 答言:「有。」 復問:「云何?老死自作耶?為他作耶?為自他作耶?為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尊者舍利弗!老死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亦非非自他作無因作,然彼生緣故有老死。」
6)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잡아함경 권10(262)이나 현장이 번역한 연기경縁起經에는 12지 연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12지 연기형식에 관하여」(『불교학리뷰』 3권(2008))를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7) 『雜阿含經』 卷14(三四三)(T2,93b25-94b1) ; S. 12. 25. Bhūmija.
《雜阿含經》卷14:「雜阿含經卷第十四
宋天竺三藏求那跋陀羅譯
[6](三四三)
如是我聞:
一時,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爾時,尊者浮彌比丘住耆闍崛山。
時,有眾多外道出家詣尊者浮彌所,共相問訊慶慰,共相問訊慶慰已,退坐一面,語尊者浮彌言:「欲有所問,寧有閑暇見答[7]與不?」
尊者浮彌語諸外道出家:「隨汝所問,當為汝說。」
時,諸外道出家問尊者浮彌:「苦樂自作耶?」
尊者浮彌答言:「諸外道出家說苦樂自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他作耶?」
答言:「苦樂他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自他作耶?」
答言:「苦樂自他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苦樂非自非他無因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諸外道出家復問:「云何?尊者浮彌苦樂自作耶?說言無記。苦樂他作耶?說言無記。苦樂自他作耶?說言無記。苦樂非自非他無因作耶?說言無記。今沙門瞿曇說苦樂云何生?」
尊者浮彌答言:「諸外道出家!世尊說苦樂從緣起生。」
時,諸外道出家聞尊者浮彌所說,心不歡喜,呵責而去。
爾時,尊者舍利弗去尊者浮彌不遠,坐一樹下。
爾時,尊者浮彌知諸外道出家去已,往詣尊者舍利弗所,到已,與舍利弗面相慶慰。慶慰已,以彼諸外道出家所問事,具白尊者舍利弗:「我作此答,得不謗毀世尊!如說說、不如法說、不為是隨順法行法,得無為餘因法論者來難詰呵責不?」
尊者舍利弗言:「尊者浮彌!汝之所說,實如佛說,不謗如來,如說說、如法說、法行法說,不為餘因論義者來難詰呵責。所以者何?世尊說苦樂從緣起生故。尊者浮彌!彼諸沙門、婆羅門所問苦樂自作者,彼亦從因起生;言不從緣起生者,無有是處。苦樂他作、自他作、[亦>非]自非他無[緣>因]作說者,彼亦從緣起生;若言不從緣生者,無有是處。尊者浮彌!彼沙門、婆羅門所說苦樂自作者,亦緣觸生;若言不從觸生者,無有是處。苦樂他作、自他作、非自非他無因作者,彼亦緣觸生,若言不緣觸生者,無有是處。」
爾時,尊者阿難去舍利弗不遠,坐一樹下,聞尊者舍利弗與尊者浮彌所論說事。聞已,從座起,往詣佛所,稽首佛足,退住一面。以尊者浮彌與尊者舍利弗共論說一一具白世尊。
佛告阿難:「善哉!善哉!阿難!尊者舍利弗有來問者,能隨時答。善哉!舍利弗!有應時智故,有來問者,能隨時答。若我聲聞,有隨時問者,應隨時答,如舍利弗所說。
「阿難!我昔時住王舍城山中仙人住處,有諸外道出家以如是義、如是句、如是味來問於我,我為斯等以如是義、如是句、如是味而為記說,如尊者舍利弗所說。
「阿難!若諸沙門、婆羅門苦樂自作,我即往彼問言:『汝實作是說苦樂自作耶?』彼答我言:『如是。』我即問言:『汝能堅執持此義,言是真實,餘則愚者,我所不許。所以者何?我說苦樂所起異於此。』彼若問我:『云何瞿曇所說,苦樂所起異者?』我當答言:『從其緣起而生苦樂。如是說[1]苦他作、自他作、非自非他無因作者,我亦往彼所說如上。』」
阿難白佛:「如世尊所說義,我已解知,有生故有老死,非緣餘;有生故有老死,乃至無明故有行,非緣餘;有無明故有行,無明滅則行滅,乃至生滅則老、病、死、憂、悲、惱、苦滅,如是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尊者阿難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CBETA, T02, no. 99, p. 93, b22-p. 94, b1)
[6]S. 12. 25. Bhūmija.(浮彌)。[7]與=以【元】【明】*。[1]苦+(樂)【宋】【元】【明】。
『잡아함경』 권12(302)에는 아지라가섭이 부처님에게 (고락이 아닌) 고苦와 관련하여 자작과 타작을 물었을 때 부처님이 무기 無記 avyākṛtam하였다고 나옵니다. 『雜阿含經』卷12 (三〇二) ; S. 12. 17. Acela.《雜阿含經》卷12:「[1](三〇二)
如是我聞:
一時,佛住王舍城耆闍崛山。
爾時,世尊晨朝著衣持鉢,出耆闍崛山,入王舍城乞食。
時,有[2]阿支羅迦葉為營小事,出王舍城,向耆闍崛山,遙見世尊。見已,詣佛所,白佛言:「瞿曇!欲有所問,寧有閑暇見答[3]與不?」
佛告迦葉:「今非論時,我今入城乞食,來還則是其時,當為汝說。」
第二亦如是說,第三復問:「瞿曇!何為我作留難?瞿曇!云何有異?我今欲有所問,為我解說。」
佛告阿支羅迦葉:「隨汝所問。」
阿支羅迦葉白佛言:「云何?瞿曇!苦自作耶?」
佛告迦葉:「苦自作者,此是無記。」
迦葉復問:「云何?瞿曇!苦他作耶?」
佛告迦葉:「苦他作者,此亦無記。」
迦葉復問:「苦自他作耶?」
佛告迦葉:「苦自他作,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瞿曇!苦非自非他無因作耶?」
佛告迦葉:「苦非自非[4]他,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無因作者?瞿曇!所問苦自作耶?」答言:「無記。」「他作耶?自他作耶?非自非他無因作耶?」答言:「無記。」「今無此苦耶?」
佛告迦葉:「非無此苦,然有此苦。」
迦葉白佛言:「善哉!瞿曇!說有此苦,為我說法,令我知苦見苦。」
佛告迦葉:「若受即自受者,我應說苦自作,[5]若他受他即受者,是則他作,若受自受他受,復與苦者。如是者自他作,我亦不說,若不因自他,無因而生苦者,我亦不說。離此諸邊,說其中道,如來說法,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謂緣無明行,乃至純大苦聚集,無明滅則行滅,乃至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阿支羅迦葉遠塵離垢,得法眼淨。
時,阿支羅迦葉見法、得法、知法、入法,度諸狐疑,不由他知、不因他度,於正法、律心得無畏,合掌白佛言:「世尊!我今已度,我從今日,歸依佛、歸依法、歸依僧,盡壽作優婆塞,證知我。」
阿支羅迦葉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
時,阿支羅迦葉辭世尊去不久,為護犢牸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
爾時,世尊入城乞食。時,有眾多比丘亦入王舍城乞食,聞有傳說:「阿支羅迦葉從世尊聞法,辭去不久,為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諸比丘乞食已,還出,舉衣鉢,洗足,詣世尊所,稽首禮足,退坐一面,白佛言:「世尊!我今晨朝眾多比丘入城乞食,聞阿支羅迦葉從世尊聞法、律,辭去不久,為護犢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世尊!彼生何趣?何處受生?彼何所得?」
佛告諸比丘:「彼已見法、知法、次法、不受於法,已般涅槃,汝等當往供養其身。」
爾時,世尊為阿支羅迦葉[6]受第一記。」(CBETA, T02, no. 99, p. 86, a4-b23) [1]S. 12. 17. Acela.。[2]阿…葉Acela-Kassapa.。[3]與=以【元】【明】。[4]他+(無因作者)【明】。[5]若=苦【宋】【元】【明】。[6]受=授【明】*。
8) 남수영 옮김, 나카무라 하지메 지음, 『용수의 중관사상』(226쪽)을 보면 용수 이전에도 대승불교에서는 공을 설하고 있었는데 이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용수가 『중론』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 『중론中論』. T30.33b: “衆因縁生法 我説即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未曾有一法 不從因縁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中論》卷1〈觀因緣品1〉:「
[16]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CBETA, T30, no. 1564, p. 1, b14-17)
[16][ Aniro ham >Anirodham ] anutpādam anucchedam aśāśvataṃ, Anekārtham anānārtham anāgamam anirgamam Yaḥ [ pratītyasamu pādam > pratītyasamutpādam ] [ prapañco paśamam > prapañcopaśamam ] śivaṃ, Deśayāmāsa [ sambuddhast ṃvande > sambuddhas taṃ vande ] vadatāṃ varaṃ.(不生. Anutpāda, 不滅. Anirodha, 不常. [ Asas ata > Aśāśvata ], 不斷. [ Anucc eda > Anuccheda ], 不一. Anekārtha, 不異. [ Anānāstha > Anānārtha ], 不來. Anāgama, 不出. Anirgama, 因緣. Pratītyasamutpāda, 戲論. [ Prapoñca > Prapañca ], 諸說中=諸說法者中. Vadatāṃ).。
《中論》卷1〈觀因緣品1〉:「
[2]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CBETA, T30, no. 1564, p. 2, b6-7)
[2]第一偈. Na svato nāpi parato na dvābhyaṃ nāpy ahetutaḥ, Utpannā jātu vidyante bhāvāḥ kvacana ke cana.(自=從自. Svataḥ, 他=從他, Parataḥ, 共=從自他共. Dvābhāṃ, 無因. Ahetu).。
9) 불교의 공성空性에 관한 논의가 인도 수학에 영향을 미쳐 영이 나왔다는 견해 또한 있습니다.
10) 『雜阿含經』卷10(二六二)(CBETA, T02, no. 99, p. 67, a4-16) ; S. 22. 90. Channa.
11) 『解深密經』 (No. 0676 玄奘譯 ) T16.693a 《解深密經》卷2〈一切法相品4〉:「「謂諸法相略有三種,何等為三?一者、遍計所執相;二者、依他起相;三者、圓成實相。云何諸法遍計所執相?謂一切法[4]名假安立自性差別,乃至為令隨起言說。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緣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緣行,乃至招集純大苦蘊。云何諸法圓成實相?謂一切法平等真如。於此真如,諸菩薩眾勇猛精進為因緣故,如理作意,無倒思惟為因緣故,乃能通達。於此通達,漸漸修[5]集,乃至無上正等菩提方證圓滿。」(CBETA, T16, no. 676, p. 693, a15-25)[4]名假=假名【宮】。[5]集=習【宋】【元】【明】【宮】。
12) 『華嚴經探玄記』 (No. 1733 法藏述 ) T35.175b 《華嚴經探玄記》卷4〈如來光明覺品5〉:「一切有無法了達。非有無者有三門。一約三性。二約三無性。三約雙融。初中復二。初別後總。別中三性各有二義。所執中一是情有二是理無。依他中一是幻有二是性空。圓成中一離相二是體實。此上三一一各融不二為一性故。總者所執是無。圓成是有。依他是俱。以真妄該攝[5]二相盡故無二也。二約三無性者初無相觀境中。所執有無皆虛故。又無有有無故俱離也。依他無生性中。無幻有有性空不二故俱離也。圓成無性中。無二性有真理亦不二故俱絕也。三約雙融者。三有三無。圓融無礙二相絕故俱離也。」(CBETA, T35, no. 1733, p. 175, a27-b10) [5]二=三【甲】。
13) 『華嚴一乘教義分齊章』卷4:「一, 空有力不待緣。二, 空有力待緣。三, 空無力待緣。四, 有有力不待緣。五, 有有力待緣。六, 有無力待緣。」(CBETA, T45, no. 1866, p. 502, a3-5) ;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卷3〈十地品22〉:「有力不待外緣所以有力不待緣」(CBETA, T35, no. 1732, p. 66, a23-24), 『華嚴五十要問答』卷2:「一, 空有力不待緣。」(CBETA, T45, no. 1869, p. 531, b10)
14) 악인왕생惡人往生을 말할 때 출가하였다가 환속한 뒤 도축 일로 생계를 꾸려간 오경吳瓊이라는 분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용서증광정토문龍舒增廣淨土文』 권5, 『왕생집往生集』 권2에 나옵니다.그 외 『정토신종淨土晨鐘』, 『정토전서淨土全書』,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여래향如來香』 그리고 성총(性聰)의 『정토보서淨土寶書』에도 인용되어 나옵니다.
《龍舒增廣淨土文》卷5:「宋臨安府仁和吳瓊
吳瓊先為僧後還俗。前後兩娶生二子。屠沽無所不為。常與人作厨子。每殺鷄鴨等物命。以手持起叫云。阿彌陀佛子好脫此身去。遂殺之。連稱佛數聲。每切肉時。一面切一面念阿彌陀佛。常念佛不輟。教村中人念經修懺。及勸人念阿彌陀佛。後眼上生瘤。如鷄子大。乃憂怖造一草菴。分散其妻子。晝夜念佛修懺。紹興二十三年秋。告村中人云。瓊來日戌時去也。人皆笑之。將用椀鉢鍋子盡與人。次日晚報諸道友行婆云。瓊去時將至。盡來與瓊高聲念佛相助。將布衫當酒飲了。即寫頌云。似酒皆空。問甚禪宗。今日珍重。明月清風。端坐合掌念佛。叫一聲佛來即化去。」(CBETA, T47, no. 1970, p. 269, a1-14)
연기와 공에 관하여
불교학술원 소식지 뒤쪽에 실려, 읽는 이들에게 청량감을 주어야 할 터인데 이런 저런 주제를 끄적거리다가 핵심적일지는 몰라도 아주 무거운 개념 또는 주제를 쓰게 되었습니다. 연기와 공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어 굳이 이런 곳에서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접하게 된 지식이 비록 알 사람은 다 아는 종류의 것일지라도 혹시라도 처음 보는 이들이 있다면 공유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연기
연기는 무엇일까요?
세친이 짓고 현장이 옮긴 『아미달마구사론』1)에서는 연기를 뜻하는 범어Pratītyasamutpāda를 음역한 뒤 각 구절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계界는 어근, 조助는 접두사를 뜻한다는 권 오민 번역2)을 참조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此中縁起是何句義。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ḥ?
여기에서 연기라는 어구의 뜻은 무엇인가?
鉢剌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
pratiḥ prāptyarthaḥ, etiḥ gatyarthaḥ|
由先助力, 界義轉變。故行由至, 轉變成‘縁’。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ḥpratītyeti|
“발랄저[鉢剌底 prati]”는 “이르다[至]”는 뜻이다. “의저[醫底 iti]”의 어근[界, √i]은 “가다[行]”는 뜻이다. 앞의 접두사[助3),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界, √i]의 뜻이 바뀐다. 그러므로 “가다”가 “이르다”에 의하여 (“가다”라는 의미가) “연縁(=조건으로 하여)”으로 바뀐다.
參是‘和合’義。嗢是‘上升’義。鉢地界是‘有’義。‘有’藉‘合’·‘升’, 轉變成‘起’。
yadi sattārthaḥ,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ḥ|
“삼[參 sam]”은 “화합和合”의 뜻이다. “올[嗢 ut]”은 “상승上升”의 뜻이다.“발지[鉢地 pāda]”의 어근[界, √pad]은 “있다[有]”는 뜻이다. “있다[有]”는 “화합和合”과 “상승上升”에 의하여 (“있다”라는 의미가) “기(起: 일어남)”로 바뀐다.
由此有法, ‘至’於‘縁’已, ‘和合’‘升’‘起’。是‘縁起’義。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ḥ|
이러한 유법(有法)으로 말미암아 ‘연縁’에 대하여 ‘이르고’ 나서 ‘화합하고’ ‘위로 [升=上升]’ 일어남[起]이 ‘연기’의 뜻이다.
위는 연기緣起4)로 번역된 범어에 대한 어원분석(etymology)입니다. 연緣에서는 “가다”라는, 기起에서는 “있다”라는 뜻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가다”와 “있다”가 결합하고 변용하여 연기라는 의미를 이룬다는 것입니다.이는 “있음being”과 “됨becoming”이라는 뜻을 포괄하는 존재(有 bhava)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연기의 용어 분석과 관련해서는 현장의 한역 『구사론』이 범본 『구사론』보다 좀 더 자세합니다.
“연기”라는 용어는 현재 번역 없이 쓰이고 있으나 “조건적 생기”, “조건 속에서의 생기”, “조건적 발생” 등으로 옮긴 것들이 보입니다. 영어로는 “dependent origination”, “dependent arising”, “conditioned genesis”, “dependent co-arising”, “interdependent arising” 등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연기라는 용어에 관한 짤막한 소개입니다.
다음으로는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잡아함경』 권12(288)와 권14(343)를 보고자 합니다.
“늙음이 있는가?”
“있다.”
“죽음이 있는가?”
“있다.”
“늙음과 죽음이 스스로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이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아니면 그 둘 어느 것도 짓지 않으니 원인이 없이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스스로 짓지도 않고 다른 것이 짓지도 않는다. [...] 삶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5)
위는 사리불舍利弗이 묻고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가 대답하는 대화를 조금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 스스로 짓는 것은 자작自作, 다른 것이 짓는 것은 타작他作입니다. 늙음은 (1) ‘자작’도 아니고, (2) ‘타작’도 아니고, (3) ‘자작이면서 또한 타작인 것’도 아니고, (4)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니 원인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라는 사구부정四句否定이 여기에 쓰이고 있습니다. 연기에 있어서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라는 정의는 무척 중요해 보입니다. 이 사구부정에 이어 답처럼 제시된 것이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명색에 이어 식까지 10지 연기6)가 제시되고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 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있게 됩니다.
자작과 타작과 관련해서는 『잡아함경』 권14(343)7)도 주목됩니다. 고락苦樂이 자작인지 타작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無記]라고 나옵니다. 부미浮彌존자나 사리불舍利弗존자가 그렇게 말한 것을 아난阿難존자가 전하자 부처님이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 자작이나 타작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사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고락과 관련된 것이고12지 연기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만 “고락은 연기로부터 생긴다.苦樂從緣起生”라고 하여 연기緣起로서 대답하고 있는 점은 같습니다.
공
용수의 『중론』을 보면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공空이 하나의 논리 또는 도식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8)B.K 마티랄Matilal에 따르면 수학자들이 말하는 영에 영향을 받아서 용수가 철학적으로 공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9)연기와 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맥락에 따라 층위를 달리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잡아함경』 권10(262)에는 “여래께서는 양 극단을 떠나시어 중도를 설하셨다. 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如來離於二邊。説於中道。所謂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 모든 행들이 다 공이다. 모두 다 고요하여 얻을 수 없다. 於一切行皆空。皆悉寂不可得。”10)라고 나옵니다. 현장이 번역한 『해심밀경』에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은 무엇인가? 모든 법이 조건으로 생겨난다는 자성을 말한다. 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말하자면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내지 순일純一하고 거대한 고통의 무더기를 불러일으킨다. 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縁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縁行。乃至招集純大苦蘊。”11)위 두 경전에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이 똑같이 언급되지만 맥락은 다릅니다. 『해심밀경』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나열한 뒤 의타기성을 설명하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3성(三性)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를 해석하는 것도 후대에 볼 수 있습니다. 청변은 의타기성의 오온도 공이라고 보는데 반해 호법은 의타기성의 오온은 공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3성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연기의 변용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장(643-712)이 『탐현기』에서 60화엄의 광명각품光明覺品을 풀이하는 가운데 “의타기성의 첫째는 환유幻有이고 둘째는 성공性空이다. 依他中, 一是幻有,二是性空。”12)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이론적으로 발전된 연기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지엄의 『수현기』나 『오십요문답』을 이어받아 힘이 있는 공空과 힘이 없는 공13)을 말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가 오히려 마음에 더 와 닿습니다.
似酒皆空。술과 같이 모두 공하여
問甚禪宗。선의 종지를 곰곰이 물어 보네
今日珍重。오늘 다들 잘 계시게
明月清風。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하구나
송나라 오경吳瓊이라는 분이 임종 전 술을 드신 뒤 읊은 시입니다.14)이 시를 읊은 뒤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염불한 뒤 아미타부처님이 마중하러 오셨다[佛來]라고 외치시고는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출가 전 늙음과 죽음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것이 출가의 동기였으며 깨달음의 나무[道樹] 아래 일어났던 일은 늙음과 죽음의 해소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늙음은 자작도 타작도 아닙니다. 아예 자작이니 타작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에는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늙음에 대한 불교적 인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고은 시인이 “나 혼자는 내가 아니다.” (<정릉에서>)라고 한 것이나 정현종 시인이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비스듬히>) 라고 표현한 것도 연기적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인 나, 홀로인 남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연기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이웃”이 적합할 것입니다.
1) 『아비달마구사론 阿毘達磨俱舍論』 권9 〈분별세품分別世品 3〉 (CBETA, T29, no. 1558, p. 50, b14-18).범어는 張雪杉 편집본(http://www.mldc.cn/sanskritweb/resour/etext/abhk3.html)을 참조하였습니다.
《阿毘達磨俱舍論》卷9〈分別世品3〉:「經說。云何緣已生法。謂無明行至生老死。或應不許二在未來。是則壞前所立三際。有說。緣起是無為法。以契經言如來出世若不出世。如是緣起法性常住。由如是意理則可然。若由別意理則不然。云何如是意。云何為別意而說可然及不可然。謂若意說。如來出世若不出世。行等常緣無明等起非緣餘法。或復無緣故言常住。如是意說。理則可然。若謂意說有別法體名為緣起湛然常住。此別意說理則不然。所以者何。生起俱是有為相故。非別常法為無常相可應正理。又起必應依起者立。此常住法彼無明等何相關預而說此法依彼而立為彼緣起。又名緣起而謂[4]目常。如是句義無相應理。此中[5]緣起是何句義。鉢[6]剌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緣。參是和合義。嗢是上[7]升義。鉢地界是有義。有藉合[*]升轉變成起。由此有法至於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如是句義理不應然所以者何。依一作者有二作用。於前作用應有已言。如有一人浴已方食。無少行法有在起前。先至於緣後時方起。非無作者可有作用。」(CBETA, T29, no. 1558, p. 50, a28-b22) [4]目=相【明】。[5]Pratityasamutpāda.。[6]刺=剌【宋】【元】【明】【宮】【CB】*。[7]升=昇【宋】【元】【明】【宮】*。[*7-1]升=昇【宋】【元】【明】【宮】*。[*7-2]升=昇【宋】【元】【明】【宮】*。
張雪杉 편집본(http://www.mldc.cn/sanskritweb/resour/etext/abhk3.html):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ḥ?
【真】本言至行集生。此句有何義。
【玄】此中緣起是何句義。
pratiḥ prāptyarthaḥ, etiḥ gatyarthaḥ|
【真】若合此句所顯義。謂諸行法至因及緣。由聚集未有成有。是義至行集生所顯。
【玄】鉢刺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ḥ pratītyeti|
【真】
【玄】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緣。
yadi sattārthaḥ,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ḥ|
【真】
【玄】參是和合義。嗢是上升義。鉢地界是有義。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ḥ|
【真】
【玄】有藉合升轉變成起。由此有法至於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
2) 권오민, 『아비달마구사론 2』, 446쪽. “여기서 ‘연기(緣起)’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뜻의 말인가? 발랄저(鉢剌底, prati)는 바로 ‘이르다[至, prāti]’의 뜻이고, 의지(醫地, iti)의 어근[界, 즉 √i]은 ‘간다[行, gati]’는 뜻인데, 앞의 접두사(즉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의 뜻이 전변하였다. 그래서 ‘간다’가 ‘이르다’는 뜻에 의해 ‘연하여’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삼(參, sam)은 바로 화합의 뜻이고, 올(嗢, ut)은 상승의 뜻이며 발지(鉢地, pādi)의 어근(즉 √pād)은 존재(有, sattvā)의 뜻이다. 즉 존재가 화합과 상승의 뜻과 결합하여 ‘일어나다[起]’는 뜻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어떤 존재가 연에 이르러 화합 상승하여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
3) 『구사론기俱舍論記』 권9 해당 부분(CBETA, T41, no. 1821, p. 169, c17-p. 170, a6)에서는 “由先助力”을 “由先鉢剌底助力”(T41.169c23)으로 풀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助’는 접두사나 조사이기보다 단순히 “돕다”는 뜻에 가까워 보입니다. “由先鉢剌底助力”이 “앞의 발랄저의 조력으로”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助에 대해 이외 별다른 지식이 없는 상태인지라 여기에서는 접두사로 보는 견해를 따릅니다. 『구사론기俱舍論記』에는 “底(丁履反)”이라 하여 底를 ‘지’로 읽으라고 나옵니다.
《俱舍論記》卷9〈分別世品3〉:「此中緣起是何句義者。大眾部問。
鉢[刺>剌]底至是緣起義者。經部答。或說一切有部答。依聲明論有字緣.字界。其字界。若有字緣來助。即有種種義起鉢剌底是至義是字緣。醫底界是行義是字界。界是體義。此醫底界由先鉢[刺>剌]底助力。醫底界義轉變成緣。若助訖成緣應言鉢[刺>剌]底(丁履反)帝[8]夜(叐何反)此翻名緣。所以然者。諸緣勢力起果名行。未至之時未成緣義。若緣力至果。或諸緣相至。方得名緣。故造字家於行界上加至助緣行成緣義。參是和合義。嗢是上[9]升義。此二是字緣。鉢地界是有義是字界。鉢地有界藉前參唱合升字緣助力轉變成起。若助訖成起。應言參牟播陀。此翻名起。所以然者。明諸有法要與緣合便得上升。故名為起。故造字家於有界上加合升緣。有成起義。故總結言由此有行法至於四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
如是句義至彼應先說故者。聲論師難至緣已起。故言如是句義理不應然。此即總非。所以者何。依一作者實體有二作用前後別起。可得說言於前作用應有已言。彼聲論計諸法有體有用。體即[1]逕留多位名為作者。用即隨位不同名為作用。一切作用必依作者。彼計作用。同勝論師業句義離體別有指事。別顯如有一人名為作者。起二作用。先澡浴已後時方食。於前作用可說已言。若有少行法有在起前。可得說言先至於緣後時方起。既無行法有在起前 先至緣已後時方起。如何得說至緣已起 言起前者。現在名起。前謂未來。依法行世未來名前 或起前者。在起前故。即[2]先已至於緣名為起前。皆表未來。非無作者法體可有作用。以彼作用必依體故。故說頌破言。至緣[3]之行。若在起先。未來法體而非有故。不應道理。若行至緣與起俱時。便壞己[4]於彼應先說至緣[5]後方說起不應說俱。聲論.經部。俱說過.未無體故。以非有故破彼經部。若以此頌破說一切有部。聲論即以己宗義破。」(CBETA, T41, no. 1821, p. 169, c17-p. 170, a28) [8]夜+(夭何反)【甲】。[9]升=昇【甲】下同。[1]〔逕〕-【甲】。[2]先=失【甲】。[3]之=已【甲】。[4]〔於〕-【甲】。[5]後方說起=方說起起【甲】。
4) 『구사론』에는 연기를 찰나Kṣaṇika, 연박Sāṃbaṃdhika, 분위Āvasthika, 원속Prākarṣika 이 네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세 번째 분위가 전통적인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에 의한 12연기의 이해입니다. 『阿毘達磨俱舍論』卷9 〈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剎那。二者連縛。三者分位。四者遠續。」(T29,48c8-10)
《阿毘達磨俱舍論》卷9〈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12]剎那。二者[13]連縛。三者[14]分位。四者[15]遠續。云何剎那。謂剎那頃由貪行殺具十二支。癡謂無明。思即是行。於諸境事了別名識。識俱三蘊總稱名色。住名色根說為六處。六處對餘和合有觸。領觸名受。貪即是愛。與此相應諸纏名取。所起身語二業名有。如是諸法起即名生。熟變名老滅壞名死。復有說者。剎那連縛如品類足。俱遍有為。[16]十二支位所有五蘊皆分位攝。即此懸遠相續無始說名遠續。」(CBETA, T29, no. 1558, p. 48, c8-18) [12]Kṣaṇika.。[13]Sāṃbaṃdhika.。[14]Āvasthika.。[15]Prākarṣika.。[16]十二=二十【宮】。
5) 『雜阿含經』 卷12(二八八)(CBETA, T02, no. 99, p. 81, a9-c3) ; S. 12. 67. Naḷakalāpiya.
尊者舍利弗問尊者摩訶拘絺羅:「云何?尊者摩訶拘絺羅,有老不?」 答言:「有。」 尊者舍利弗復問: 「有死不?」 答言:「有。」 復問:「云何?老死自作耶?為他作耶?為自他作耶?為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尊者舍利弗!老死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亦非非自他作無因作,然彼生緣故有老死。」
6)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잡아함경 권10(262)이나 현장이 번역한 연기경縁起經에는 12지 연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12지 연기형식에 관하여」(『불교학리뷰』 3권(2008))를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7) 『雜阿含經』 卷14(三四三)(T2,93b25-94b1) ; S. 12. 25. Bhūmija.
《雜阿含經》卷14:「雜阿含經卷第十四
宋天竺三藏求那跋陀羅譯
[6](三四三)
如是我聞:
一時,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爾時,尊者浮彌比丘住耆闍崛山。
時,有眾多外道出家詣尊者浮彌所,共相問訊慶慰,共相問訊慶慰已,退坐一面,語尊者浮彌言:「欲有所問,寧有閑暇見答[7]與不?」
尊者浮彌語諸外道出家:「隨汝所問,當為汝說。」
時,諸外道出家問尊者浮彌:「苦樂自作耶?」
尊者浮彌答言:「諸外道出家說苦樂自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他作耶?」
答言:「苦樂他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自他作耶?」
答言:「苦樂自他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苦樂非自非他無因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諸外道出家復問:「云何?尊者浮彌苦樂自作耶?說言無記。苦樂他作耶?說言無記。苦樂自他作耶?說言無記。苦樂非自非他無因作耶?說言無記。今沙門瞿曇說苦樂云何生?」
尊者浮彌答言:「諸外道出家!世尊說苦樂從緣起生。」
時,諸外道出家聞尊者浮彌所說,心不歡喜,呵責而去。
爾時,尊者舍利弗去尊者浮彌不遠,坐一樹下。
爾時,尊者浮彌知諸外道出家去已,往詣尊者舍利弗所,到已,與舍利弗面相慶慰。慶慰已,以彼諸外道出家所問事,具白尊者舍利弗:「我作此答,得不謗毀世尊!如說說、不如法說、不為是隨順法行法,得無為餘因法論者來難詰呵責不?」
尊者舍利弗言:「尊者浮彌!汝之所說,實如佛說,不謗如來,如說說、如法說、法行法說,不為餘因論義者來難詰呵責。所以者何?世尊說苦樂從緣起生故。尊者浮彌!彼諸沙門、婆羅門所問苦樂自作者,彼亦從因起生;言不從緣起生者,無有是處。苦樂他作、自他作、[亦>非]自非他無[緣>因]作說者,彼亦從緣起生;若言不從緣生者,無有是處。尊者浮彌!彼沙門、婆羅門所說苦樂自作者,亦緣觸生;若言不從觸生者,無有是處。苦樂他作、自他作、非自非他無因作者,彼亦緣觸生,若言不緣觸生者,無有是處。」
爾時,尊者阿難去舍利弗不遠,坐一樹下,聞尊者舍利弗與尊者浮彌所論說事。聞已,從座起,往詣佛所,稽首佛足,退住一面。以尊者浮彌與尊者舍利弗共論說一一具白世尊。
佛告阿難:「善哉!善哉!阿難!尊者舍利弗有來問者,能隨時答。善哉!舍利弗!有應時智故,有來問者,能隨時答。若我聲聞,有隨時問者,應隨時答,如舍利弗所說。
「阿難!我昔時住王舍城山中仙人住處,有諸外道出家以如是義、如是句、如是味來問於我,我為斯等以如是義、如是句、如是味而為記說,如尊者舍利弗所說。
「阿難!若諸沙門、婆羅門苦樂自作,我即往彼問言:『汝實作是說苦樂自作耶?』彼答我言:『如是。』我即問言:『汝能堅執持此義,言是真實,餘則愚者,我所不許。所以者何?我說苦樂所起異於此。』彼若問我:『云何瞿曇所說,苦樂所起異者?』我當答言:『從其緣起而生苦樂。如是說[1]苦他作、自他作、非自非他無因作者,我亦往彼所說如上。』」
阿難白佛:「如世尊所說義,我已解知,有生故有老死,非緣餘;有生故有老死,乃至無明故有行,非緣餘;有無明故有行,無明滅則行滅,乃至生滅則老、病、死、憂、悲、惱、苦滅,如是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尊者阿難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CBETA, T02, no. 99, p. 93, b22-p. 94, b1)
[6]S. 12. 25. Bhūmija.(浮彌)。[7]與=以【元】【明】*。[1]苦+(樂)【宋】【元】【明】。
『잡아함경』 권12(302)에는 아지라가섭이 부처님에게 (고락이 아닌) 고苦와 관련하여 자작과 타작을 물었을 때 부처님이 무기 無記 avyākṛtam하였다고 나옵니다. 『雜阿含經』卷12 (三〇二) ; S. 12. 17. Acela.《雜阿含經》卷12:「[1](三〇二)
如是我聞:
一時,佛住王舍城耆闍崛山。
爾時,世尊晨朝著衣持鉢,出耆闍崛山,入王舍城乞食。
時,有[2]阿支羅迦葉為營小事,出王舍城,向耆闍崛山,遙見世尊。見已,詣佛所,白佛言:「瞿曇!欲有所問,寧有閑暇見答[3]與不?」
佛告迦葉:「今非論時,我今入城乞食,來還則是其時,當為汝說。」
第二亦如是說,第三復問:「瞿曇!何為我作留難?瞿曇!云何有異?我今欲有所問,為我解說。」
佛告阿支羅迦葉:「隨汝所問。」
阿支羅迦葉白佛言:「云何?瞿曇!苦自作耶?」
佛告迦葉:「苦自作者,此是無記。」
迦葉復問:「云何?瞿曇!苦他作耶?」
佛告迦葉:「苦他作者,此亦無記。」
迦葉復問:「苦自他作耶?」
佛告迦葉:「苦自他作,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瞿曇!苦非自非他無因作耶?」
佛告迦葉:「苦非自非[4]他,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無因作者?瞿曇!所問苦自作耶?」答言:「無記。」「他作耶?自他作耶?非自非他無因作耶?」答言:「無記。」「今無此苦耶?」
佛告迦葉:「非無此苦,然有此苦。」
迦葉白佛言:「善哉!瞿曇!說有此苦,為我說法,令我知苦見苦。」
佛告迦葉:「若受即自受者,我應說苦自作,[5]若他受他即受者,是則他作,若受自受他受,復與苦者。如是者自他作,我亦不說,若不因自他,無因而生苦者,我亦不說。離此諸邊,說其中道,如來說法,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謂緣無明行,乃至純大苦聚集,無明滅則行滅,乃至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阿支羅迦葉遠塵離垢,得法眼淨。
時,阿支羅迦葉見法、得法、知法、入法,度諸狐疑,不由他知、不因他度,於正法、律心得無畏,合掌白佛言:「世尊!我今已度,我從今日,歸依佛、歸依法、歸依僧,盡壽作優婆塞,證知我。」
阿支羅迦葉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
時,阿支羅迦葉辭世尊去不久,為護犢牸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
爾時,世尊入城乞食。時,有眾多比丘亦入王舍城乞食,聞有傳說:「阿支羅迦葉從世尊聞法,辭去不久,為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諸比丘乞食已,還出,舉衣鉢,洗足,詣世尊所,稽首禮足,退坐一面,白佛言:「世尊!我今晨朝眾多比丘入城乞食,聞阿支羅迦葉從世尊聞法、律,辭去不久,為護犢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世尊!彼生何趣?何處受生?彼何所得?」
佛告諸比丘:「彼已見法、知法、次法、不受於法,已般涅槃,汝等當往供養其身。」
爾時,世尊為阿支羅迦葉[6]受第一記。」(CBETA, T02, no. 99, p. 86, a4-b23) [1]S. 12. 17. Acela.。[2]阿…葉Acela-Kassapa.。[3]與=以【元】【明】。[4]他+(無因作者)【明】。[5]若=苦【宋】【元】【明】。[6]受=授【明】*。
8) 남수영 옮김, 나카무라 하지메 지음, 『용수의 중관사상』(226쪽)을 보면 용수 이전에도 대승불교에서는 공을 설하고 있었는데 이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용수가 『중론』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 『중론中論』. T30.33b: “衆因縁生法 我説即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未曾有一法 不從因縁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中論》卷1〈觀因緣品1〉:「
[16]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CBETA, T30, no. 1564, p. 1, b14-17)
[16][ Aniro ham >Anirodham ] anutpādam anucchedam aśāśvataṃ, Anekārtham anānārtham anāgamam anirgamam Yaḥ [ pratītyasamu pādam > pratītyasamutpādam ] [ prapañco paśamam > prapañcopaśamam ] śivaṃ, Deśayāmāsa [ sambuddhast ṃvande > sambuddhas taṃ vande ] vadatāṃ varaṃ.(不生. Anutpāda, 不滅. Anirodha, 不常. [ Asas ata > Aśāśvata ], 不斷. [ Anucc eda > Anuccheda ], 不一. Anekārtha, 不異. [ Anānāstha > Anānārtha ], 不來. Anāgama, 不出. Anirgama, 因緣. Pratītyasamutpāda, 戲論. [ Prapoñca > Prapañca ], 諸說中=諸說法者中. Vadatāṃ).。
《中論》卷1〈觀因緣品1〉:「
[2]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CBETA, T30, no. 1564, p. 2, b6-7)
[2]第一偈. Na svato nāpi parato na dvābhyaṃ nāpy ahetutaḥ, Utpannā jātu vidyante bhāvāḥ kvacana ke cana.(自=從自. Svataḥ, 他=從他, Parataḥ, 共=從自他共. Dvābhāṃ, 無因. Ahetu).。
9) 불교의 공성空性에 관한 논의가 인도 수학에 영향을 미쳐 영이 나왔다는 견해 또한 있습니다.
10) 『雜阿含經』卷10(二六二)(CBETA, T02, no. 99, p. 67, a4-16) ; S. 22. 90. Channa.
11) 『解深密經』 (No. 0676 玄奘譯 ) T16.693a 《解深密經》卷2〈一切法相品4〉:「「謂諸法相略有三種,何等為三?一者、遍計所執相;二者、依他起相;三者、圓成實相。云何諸法遍計所執相?謂一切法[4]名假安立自性差別,乃至為令隨起言說。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緣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緣行,乃至招集純大苦蘊。云何諸法圓成實相?謂一切法平等真如。於此真如,諸菩薩眾勇猛精進為因緣故,如理作意,無倒思惟為因緣故,乃能通達。於此通達,漸漸修[5]集,乃至無上正等菩提方證圓滿。」(CBETA, T16, no. 676, p. 693, a15-25)[4]名假=假名【宮】。[5]集=習【宋】【元】【明】【宮】。
12) 『華嚴經探玄記』 (No. 1733 法藏述 ) T35.175b 《華嚴經探玄記》卷4〈如來光明覺品5〉:「一切有無法了達。非有無者有三門。一約三性。二約三無性。三約雙融。初中復二。初別後總。別中三性各有二義。所執中一是情有二是理無。依他中一是幻有二是性空。圓成中一離相二是體實。此上三一一各融不二為一性故。總者所執是無。圓成是有。依他是俱。以真妄該攝[5]二相盡故無二也。二約三無性者初無相觀境中。所執有無皆虛故。又無有有無故俱離也。依他無生性中。無幻有有性空不二故俱離也。圓成無性中。無二性有真理亦不二故俱絕也。三約雙融者。三有三無。圓融無礙二相絕故俱離也。」(CBETA, T35, no. 1733, p. 175, a27-b10) [5]二=三【甲】。
13) 『華嚴一乘教義分齊章』卷4:「一, 空有力不待緣。二, 空有力待緣。三, 空無力待緣。四, 有有力不待緣。五, 有有力待緣。六, 有無力待緣。」(CBETA, T45, no. 1866, p. 502, a3-5) ;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卷3〈十地品22〉:「有力不待外緣所以有力不待緣」(CBETA, T35, no. 1732, p. 66, a23-24), 『華嚴五十要問答』卷2:「一, 空有力不待緣。」(CBETA, T45, no. 1869, p. 531, b10)
14) 악인왕생惡人往生을 말할 때 출가하였다가 환속한 뒤 도축 일로 생계를 꾸려간 오경吳瓊이라는 분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용서증광정토문龍舒增廣淨土文』 권5, 『왕생집往生集』 권2에 나옵니다.그 외 『정토신종淨土晨鐘』, 『정토전서淨土全書』,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여래향如來香』 그리고 성총(性聰)의 『정토보서淨土寶書』에도 인용되어 나옵니다.
《龍舒增廣淨土文》卷5:「宋臨安府仁和吳瓊
吳瓊先為僧後還俗。前後兩娶生二子。屠沽無所不為。常與人作厨子。每殺鷄鴨等物命。以手持起叫云。阿彌陀佛子好脫此身去。遂殺之。連稱佛數聲。每切肉時。一面切一面念阿彌陀佛。常念佛不輟。教村中人念經修懺。及勸人念阿彌陀佛。後眼上生瘤。如鷄子大。乃憂怖造一草菴。分散其妻子。晝夜念佛修懺。紹興二十三年秋。告村中人云。瓊來日戌時去也。人皆笑之。將用椀鉢鍋子盡與人。次日晚報諸道友行婆云。瓊去時將至。盡來與瓊高聲念佛相助。將布衫當酒飲了。即寫頌云。似酒皆空。問甚禪宗。今日珍重。明月清風。端坐合掌念佛。叫一聲佛來即化去。」(CBETA, T47, no. 1970, p. 269, a1-14)
연기와 공에 관하여
1. 들어가며
불교학술원 소식지 뒤쪽에 실려, 읽는 이들에게 청량감을 주어야 할 터인데 이런 저런 주제를 끄적거리다가 핵심적일지는 몰라도 아주 무거운 개념 또는 주제를 쓰게 되었습니다. 연기와 공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어 굳이 이런 곳에서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접하게 된 지식이 비록 알 사람은 다 아는 종류의 것일지라도 혹시라도 처음 보는 이들이 있다면 공유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2. 연기
연기는 무엇일까요?
세친이 짓고 현장이 옮긴 『아미달마구사론』1)에서는 연기를 뜻하는 범어Pratītyasamutpāda를 음역한 뒤 각 구절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계界는 어근, 조助는 접두사를 뜻한다는 권 오민 번역2)을 참조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此中縁起是何句義。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ḥ?
여기에서 연기라는 어구의 뜻은 무엇인가?
鉢剌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
pratiḥ prāptyarthaḥ, etiḥ gatyarthaḥ|
由先助力, 界義轉變。故行由至, 轉變成‘縁’。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ḥpratītyeti|
“발랄저[鉢剌底 prati]”는 “이르다[至]”는 뜻이다. “의저[醫底 iti]”의 어근[界, √i]은 “가다[行]”는 뜻이다. 앞의 접두사[助3),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界, √i]의 뜻이 바뀐다. 그러므로 “가다”가 “이르다”에 의하여 (“가다”라는 의미가) “연縁(=조건으로 하여)”으로 바뀐다.
參是‘和合’義。嗢是‘上升’義。鉢地界是‘有’義。‘有’藉‘合’·‘升’, 轉變成‘起’。
yadi sattārthaḥ,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ḥ|
“삼[參 sam]”은 “화합和合”의 뜻이다. “올[嗢 ut]”은 “상승上升”의 뜻이다.“발지[鉢地 pāda]”의 어근[界, √pad]은 “있다[有]”는 뜻이다. “있다[有]”는 “화합和合”과 “상승上升”에 의하여 (“있다”라는 의미가) “기(起: 일어남)”로 바뀐다.
由此有法, ‘至’於‘縁’已, ‘和合’‘升’‘起’。是‘縁起’義。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ḥ|
이러한 유법(有法)으로 말미암아 ‘연縁’에 대하여 ‘이르고’ 나서 ‘화합하고’ ‘위로 [升=上升]’ 일어남[起]이 ‘연기’의 뜻이다.
위는 연기緣起4)로 번역된 범어에 대한 어원분석(etymology)입니다. 연緣에서는 “가다”라는, 기起에서는 “있다”라는 뜻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가다”와 “있다”가 결합하고 변용하여 연기라는 의미를 이룬다는 것입니다.이는 “있음being”과 “됨becoming”이라는 뜻을 포괄하는 존재(有 bhava)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연기의 용어 분석과 관련해서는 현장의 한역 『구사론』이 범본 『구사론』보다 좀 더 자세합니다.
“연기”라는 용어는 현재 번역 없이 쓰이고 있으나 “조건적 생기”, “조건 속에서의 생기”, “조건적 발생” 등으로 옮긴 것들이 보입니다. 영어로는 “dependent origination”, “dependent arising”, “conditioned genesis”, “dependent co-arising”, “interdependent arising” 등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연기라는 용어에 관한 짤막한 소개입니다.
다음으로는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잡아함경』 권12(288)와 권14(343)를 보고자 합니다.
“늙음이 있는가?”
“있다.”
“죽음이 있는가?”
“있다.”
“늙음과 죽음이 스스로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이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아니면 그 둘 어느 것도 짓지 않으니 원인이 없이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스스로 짓지도 않고 다른 것이 짓지도 않는다. [...] 삶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5)
위는 사리불舍利弗이 묻고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가 대답하는 대화를 조금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 스스로 짓는 것은 자작自作, 다른 것이 짓는 것은 타작他作입니다. 늙음은 (1) ‘자작’도 아니고, (2) ‘타작’도 아니고, (3) ‘자작이면서 또한 타작인 것’도 아니고, (4)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니 원인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라는 사구부정四句否定이 여기에 쓰이고 있습니다. 연기에 있어서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라는 정의는 무척 중요해 보입니다. 이 사구부정에 이어 답처럼 제시된 것이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명색에 이어 식까지 10지 연기6)가 제시되고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 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있게 됩니다.
자작과 타작과 관련해서는 『잡아함경』 권14(343)7)도 주목됩니다. 고락苦樂이 자작인지 타작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無記]라고 나옵니다. 부미浮彌존자나 사리불舍利弗존자가 그렇게 말한 것을 아난阿難존자가 전하자 부처님이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 자작이나 타작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사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고락과 관련된 것이고12지 연기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만 “고락은 연기로부터 생긴다.苦樂從緣起生”라고 하여 연기緣起로서 대답하고 있는 점은 같습니다.
3. 공
용수의 『중론』을 보면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공空이 하나의 논리 또는 도식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8)B.K 마티랄Matilal에 따르면 수학자들이 말하는 영에 영향을 받아서 용수가 철학적으로 공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9)연기와 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맥락에 따라 층위를 달리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잡아함경』 권10(262)에는 “여래께서는 양 극단을 떠나시어 중도를 설하셨다. 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如來離於二邊。説於中道。所謂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 모든 행들이 다 공이다. 모두 다 고요하여 얻을 수 없다. 於一切行皆空。皆悉寂不可得。”10)라고 나옵니다. 현장이 번역한 『해심밀경』에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은 무엇인가? 모든 법이 조건으로 생겨난다는 자성을 말한다. 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말하자면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내지 순일純一하고 거대한 고통의 무더기를 불러일으킨다. 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縁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縁行。乃至招集純大苦蘊。”11)위 두 경전에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이 똑같이 언급되지만 맥락은 다릅니다. 『해심밀경』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나열한 뒤 의타기성을 설명하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3성(三性)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를 해석하는 것도 후대에 볼 수 있습니다. 청변은 의타기성의 오온도 공이라고 보는데 반해 호법은 의타기성의 오온은 공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3성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연기의 변용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장(643-712)이 『탐현기』에서 60화엄의 광명각품光明覺品을 풀이하는 가운데 “의타기성의 첫째는 환유幻有이고 둘째는 성공性空이다. 依他中, 一是幻有,二是性空。”12)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이론적으로 발전된 연기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지엄의 『수현기』나 『오십요문답』을 이어받아 힘이 있는 공空과 힘이 없는 공13)을 말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가 오히려 마음에 더 와 닿습니다.
似酒皆空。술과 같이 모두 공하여
問甚禪宗。선의 종지를 곰곰이 물어 보네
今日珍重。오늘 다들 잘 계시게
明月清風。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하구나
송나라 오경吳瓊이라는 분이 임종 전 술을 드신 뒤 읊은 시입니다.14)이 시를 읊은 뒤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염불한 뒤 아미타부처님이 마중하러 오셨다[佛來]라고 외치시고는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4. 나오며
부처님은 출가 전 늙음과 죽음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것이 출가의 동기였으며 깨달음의 나무[道樹] 아래 일어났던 일은 늙음과 죽음의 해소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늙음은 자작도 타작도 아닙니다. 아예 자작이니 타작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에는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늙음에 대한 불교적 인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고은 시인이 “나 혼자는 내가 아니다.” (<정릉에서>)라고 한 것이나 정현종 시인이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비스듬히>) 라고 표현한 것도 연기적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인 나, 홀로인 남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연기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이웃”이 적합할 것입니다.
연기와 공에 관하여
1. 들어가며
불교학술원 소식지 뒤쪽에 실려, 읽는 이들에게 청량감을 주어야 할 터인데 이런 저런 주제를 끄적거리다가 핵심적일지는 몰라도 아주 무거운 개념 또는 주제를 쓰게 되었습니다. 연기와 공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어 굳이 이런 곳에서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접하게 된 지식이 비록 알 사람은 다 아는 종류의 것일지라도 혹시라도 처음 보는 이들이 있다면 공유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2. 연기
연기는 무엇일까요?
세친이 짓고 현장이 옮긴 『아미달마구사론』1) 에서는 연기를 뜻하는 범어 Pratītyasamutpāda를 음역한 뒤 각 구절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계界는 어근, 조助는 접두사를 뜻한다는 권 오민 번역2) 을 참조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此中縁起是何句義。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ḥ?
여기에서 연기라는 어구의 뜻은 무엇인가?
鉢剌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
pratiḥ prāptyarthaḥ, etiḥ gatyarthaḥ|
由先助力, 界義轉變。故行由至, 轉變成‘縁’。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ḥ pratītyeti|
“발랄저[鉢剌底 prati]”는 “이르다[至]”는 뜻이다. “의저[醫底 iti]”의 어근[界, √i]은 “가다[行]”는 뜻이다. 앞의 접두사[助3) ,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界, √i]의 뜻이 바뀐다. 그러므로 “가다”가 “이르다”에 의하여 (“가다”라는 의미가) “연縁(=조건으로 하여)”으로 바뀐다.
參是‘和合’義。嗢是‘上升’義。鉢地界是‘有’義。‘有’藉‘合’·‘升’, 轉變成‘起’。
yadi sattārthaḥ,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ḥ|
“삼[參 sam]”은 “화합和合”의 뜻이다. “올[嗢 ut]”은 “상승上升”의 뜻이다. “발지[鉢地 pāda]”의 어근[界, √pad]은 “있다[有]”는 뜻이다. “있다[有]”는 “화합和合”과 “상승上升”에 의하여 (“있다”라는 의미가) “기(起: 일어남)”로 바뀐다.
由此有法, ‘至’於‘縁’已, ‘和合’‘升’‘起’。是‘縁起’義。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ḥ|
이러한 유법(有法)으로 말미암아 ‘연縁’에 대하여 ‘이르고’ 나서 ‘화합하고’ ‘위로 [升=上升]’ 일어남[起]이 ‘연기’의 뜻이다.
위는 연기緣起4) 로 번역된 범어에 대한 어원분석(etymology)입니다. 연緣에서는 “가다”라는, 기起에서는 “있다”라는 뜻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다”와 “있다”가 결합하고 변용하여 연기라는 의미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는 “있음being”과 “됨becoming”이라는 뜻을 포괄하는 존재(有 bhava)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연기의 용어 분석과 관련해서는 현장의 한역 『구사론』이 범본 『구사론』보다 좀 더 자세합니다.
“연기”라는 용어는 현재 번역 없이 쓰이고 있으나 “조건적 생기”, “조건 속에서의 생기”, “조건적 발생” 등으로 옮긴 것들이 보입니다. 영어로는 “dependent origination”, “dependent arising”, “conditioned genesis”, “dependent co-arising”, “interdependent arising” 등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연기라는 용어에 관한 짤막한 소개입니다.
다음으로는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잡아함경』 권12(288)와 권14(343)를 보고자 합니다.
“늙음이 있는가?”
“있다.”
“죽음이 있는가?”
“있다.”
“늙음과 죽음이 스스로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이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아니면 그 둘 어느 것도 짓지 않으니 원인이 없이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스스로 짓지도 않고 다른 것이 짓지도 않는다. [...] 삶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5)
위는 사리불舍利弗이 묻고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가 대답하는 대화를 조금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 스스로 짓는 것은 자작自作, 다른 것이 짓는 것은 타작他作입니다. 늙음은 (1) ‘자작’도 아니고, (2) ‘타작’도 아니고, (3) ‘자작이면서 또한 타작인 것’도 아니고, (4)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니 원인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라는 사구부정四句否定이 여기에 쓰이고 있습니다. 연기에 있어서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라는 정의는 무척 중요해 보입니다. 이 사구부정에 이어 답처럼 제시된 것이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명색에 이어 식까지 10지 연기6) 가 제시되고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 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있게 됩니다.
자작과 타작과 관련해서는 『잡아함경』 권14(343)7) 도 주목됩니다. 고락苦樂이 자작인지 타작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無記]라고 나옵니다. 부미浮彌존자나 사리불舍利弗존자가 그렇게 말한 것을 아난阿難존자가 전하자 부처님이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 자작이나 타작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사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고락과 관련된 것이고 12지 연기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만 “고락은 연기로부터 생긴다.苦樂從緣起生”라고 하여 연기緣起로서 대답하고 있는 점은 같습니다.
3. 공
용수의 『중론』을 보면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공空이 하나의 논리 또는 도식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8) B.K 마티랄Matilal에 따르면 수학자들이 말하는 영에 영향을 받아서 용수가 철학적으로 공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9) 연기와 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맥락에 따라 층위를 달리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잡아함경』 권10(262)에는 “여래께서는 양 극단을 떠나시어 중도를 설하셨다. 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如來離於二邊。説於中道。所謂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 모든 행들이 다 공이다. 모두 다 고요하여 얻을 수 없다. 於一切行皆空。皆悉寂不可得。”10) 라고 나옵니다. 현장이 번역한 『해심밀경』에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은 무엇인가? 모든 법이 조건으로 생겨난다는 자성을 말한다. 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말하자면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내지 순일純一하고 거대한 고통의 무더기를 불러일으킨다. 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縁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縁行。乃至招集純大苦蘊。”11) 위 두 경전에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이 똑같이 언급되지만 맥락은 다릅니다. 『해심밀경』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나열한 뒤 의타기성을 설명하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3성(三性)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를 해석하는 것도 후대에 볼 수 있습니다. 청변은 의타기성의 오온도 공이라고 보는데 반해 호법은 의타기성의 오온은 공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3성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연기의 변용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장(643-712)이 『탐현기』에서 60화엄의 광명각품光明覺品을 풀이하는 가운데 “의타기성의 첫째는 환유幻有이고 둘째는 성공性空이다. 依他中, 一是幻有, 二是性空。”12)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이론적으로 발전된 연기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지엄의 『수현기』나 『오십요문답』을 이어받아 힘이 있는 공空과 힘이 없는 공13) 을 말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가 오히려 마음에 더 와 닿습니다.
似酒皆空。술과 같이 모두 공하여
問甚禪宗。선의 종지를 곰곰이 물어 보네
今日珍重。오늘 다들 잘 계시게
明月清風。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하구나
송나라 오경吳瓊이라는 분이 임종 전 술을 드신 뒤 읊은 시입니다.14) 이 시를 읊은 뒤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염불한 뒤 아미타부처님이 마중하러 오셨다[佛來]라고 외치시고는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4. 나오며
부처님은 출가 전 늙음과 죽음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것이 출가의 동기였으며 깨달음의 나무[道樹] 아래 일어났던 일은 늙음과 죽음의 해소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늙음은 자작도 타작도 아닙니다. 아예 자작이니 타작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에는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늙음에 대한 불교적 인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고은 시인이 “나 혼자는 내가 아니다.” (<정릉에서>)라고 한 것이나 정현종 시인이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비스듬히>) 라고 표현한 것도 연기적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인 나, 홀로인 남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연기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이웃”이 적합할 것입니다.
1) 『아비달마구사론 阿毘達磨俱舍論』 권9 〈분별세품分別世品 3〉 (CBETA, T29, no. 1558, p. 50, b14-18). 범어는 張雪杉 편집본(http://www.mldc.cn/sanskritweb/resour/etext/abhk3.html)을 참조하였습니다.
《阿毘達磨俱舍論》卷9〈分別世品3〉:「經說。云何緣已生法。謂無明行至生老死。或應不許二在未來。是則壞前所立三際。有說。緣起是無為法。以契經言如來出世若不出世。如是緣起法性常住。由如是意理則可然。若由別意理則不然。云何如是意。云何為別意而說可然及不可然。謂若意說。如來出世若不出世。行等常緣無明等起非緣餘法。或復無緣故言常住。如是意說。理則可然。若謂意說有別法體名為緣起湛然常住。此別意說理則不然。所以者何。生起俱是有為相故。非別常法為無常相可應正理。又起必應依起者立。此常住法彼無明等何相關預而說此法依彼而立為彼緣起。又名緣起而謂[4]目常。如是句義無相應理。此中[5]緣起是何句義。鉢[6]剌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緣。參是和合義。嗢是上[7]升義。鉢地界是有義。有藉合[*]升轉變成起。由此有法至於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如是句義理不應然所以者何。依一作者有二作用。於前作用應有已言。如有一人浴已方食。無少行法有在起前。先至於緣後時方起。非無作者可有作用。」(CBETA, T29, no. 1558, p. 50, a28-b22) [4]目=相【明】。[5]Pratityasamutpāda.。[6]刺=剌【宋】【元】【明】【宮】【CB】*。[7]升=昇【宋】【元】【明】【宮】*。[*7-1]升=昇【宋】【元】【明】【宮】*。[*7-2]升=昇【宋】【元】【明】【宮】*。
張雪杉 편집본(http://www.mldc.cn/sanskritweb/resour/etext/abhk3.html):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ḥ?
【真】本言至行集生。此句有何義。
【玄】此中緣起是何句義。
pratiḥ prāptyarthaḥ, etiḥ gatyarthaḥ|
【真】若合此句所顯義。謂諸行法至因及緣。由聚集未有成有。是義至行集生所顯。
【玄】鉢刺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ḥ pratītyeti|
【真】
【玄】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緣。
yadi sattārthaḥ,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ḥ|
【真】
【玄】參是和合義。嗢是上升義。鉢地界是有義。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ḥ|
【真】
【玄】有藉合升轉變成起。由此有法至於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
2) 권오민, 『아비달마구사론 2』, 446쪽. “여기서 ‘연기(緣起)’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뜻의 말인가? 발랄저(鉢剌底, prati)는 바로 ‘이르다[至, prāti]’의 뜻이고, 의지(醫地, iti)의 어근[界, 즉 √i]은 ‘간다[行, gati]’는 뜻인데, 앞의 접두사(즉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의 뜻이 전변하였다. 그래서 ‘간다’가 ‘이르다’는 뜻에 의해 ‘연하여’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삼(參, sam)은 바로 화합의 뜻이고, 올(嗢, ut)은 상승의 뜻이며 발지(鉢地, pādi)의 어근(즉 √pād)은 존재(有, sattvā)의 뜻이다. 즉 존재가 화합과 상승의 뜻과 결합하여 ‘일어나다[起]’는 뜻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어떤 존재가 연에 이르러 화합 상승하여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
3) 『구사론기俱舍論記』 권9 해당 부분(CBETA, T41, no. 1821, p. 169, c17-p. 170, a6)에서는 “由先助力”을 “由先鉢剌底助力”(T41.169c23)으로 풀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助’는 접두사나 조사이기보다 단순히 “돕다”는 뜻에 가까워 보입니다. “由先鉢剌底助力”이 “앞의 발랄저의 조력으로”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助에 대해 이외 별다른 지식이 없는 상태인지라 여기에서는 접두사로 보는 견해를 따릅니다. 『구사론기俱舍論記』에는 “底(丁履反)”이라 하여 底를 ‘지’로 읽으라고 나옵니다.
《俱舍論記》卷9〈分別世品3〉:「此中緣起是何句義者。大眾部問。
鉢[刺>剌]底至是緣起義者。經部答。或說一切有部答。依聲明論有字緣.字界。其字界。若有字緣來助。即有種種義起鉢剌底是至義是字緣。醫底界是行義是字界。界是體義。此醫底界由先鉢[刺>剌]底助力。醫底界義轉變成緣。若助訖成緣應言鉢[刺>剌]底(丁履反)帝[8]夜(叐何反)此翻名緣。所以然者。諸緣勢力起果名行。未至之時未成緣義。若緣力至果。或諸緣相至。方得名緣。故造字家於行界上加至助緣行成緣義。參是和合義。嗢是上[9]升義。此二是字緣。鉢地界是有義是字界。鉢地有界藉前參唱合升字緣助力轉變成起。若助訖成起。應言參牟播陀。此翻名起。所以然者。明諸有法要與緣合便得上升。故名為起。故造字家於有界上加合升緣。有成起義。故總結言由此有行法至於四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
如是句義至彼應先說故者。聲論師難至緣已起。故言如是句義理不應然。此即總非。所以者何。依一作者實體有二作用前後別起。可得說言於前作用應有已言。彼聲論計諸法有體有用。體即[1]逕留多位名為作者。用即隨位不同名為作用。一切作用必依作者。彼計作用。同勝論師業句義離體別有指事。別顯如有一人名為作者。起二作用。先澡浴已後時方食。於前作用可說已言。若有少行法有在起前。可得說言先至於緣後時方起。既無行法有在起前 先至緣已後時方起。如何得說至緣已起 言起前者。現在名起。前謂未來。依法行世未來名前 或起前者。在起前故。即[2]先已至於緣名為起前。皆表未來。非無作者法體可有作用。以彼作用必依體故。故說頌破言。至緣[3]之行。若在起先。未來法體而非有故。不應道理。若行至緣與起俱時。便壞己[4]於彼應先說至緣[5]後方說起不應說俱。聲論.經部。俱說過.未無體故。以非有故破彼經部。若以此頌破說一切有部。聲論即以己宗義破。」(CBETA, T41, no. 1821, p. 169, c17-p. 170, a28) [8]夜+(夭何反)【甲】。[9]升=昇【甲】下同。[1]〔逕〕-【甲】。[2]先=失【甲】。[3]之=已【甲】。[4]〔於〕-【甲】。[5]後方說起=方說起起【甲】。
4) 『구사론』에는 연기를 찰나Kṣaṇika, 연박Sāṃbaṃdhika, 분위Āvasthika, 원속Prākarṣika 이 네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세 번째 분위가 전통적인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에 의한 12연기의 이해입니다. 『阿毘達磨俱舍論』卷9 〈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剎那。二者連縛。三者分位。四者遠續。」(T29,48c8-10)
《阿毘達磨俱舍論》卷9〈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12]剎那。二者[13]連縛。三者[14]分位。四者[15]遠續。云何剎那。謂剎那頃由貪行殺具十二支。癡謂無明。思即是行。於諸境事了別名識。識俱三蘊總稱名色。住名色根說為六處。六處對餘和合有觸。領觸名受。貪即是愛。與此相應諸纏名取。所起身語二業名有。如是諸法起即名生。熟變名老滅壞名死。復有說者。剎那連縛如品類足。俱遍有為。[16]十二支位所有五蘊皆分位攝。即此懸遠相續無始說名遠續。」(CBETA, T29, no. 1558, p. 48, c8-18) [12]Kṣaṇika.。[13]Sāṃbaṃdhika.。[14]Āvasthika.。[15]Prākarṣika.。[16]十二=二十【宮】。
5) 『雜阿含經』 卷12(二八八)(CBETA, T02, no. 99, p. 81, a9-c3) ; S. 12. 67. Naḷakalāpiya.
尊者舍利弗問尊者摩訶拘絺羅:「云何?尊者摩訶拘絺羅,有老不?」 答言:「有。」 尊者舍利弗復問: 「有死不?」 答言:「有。」 復問:「云何?老死自作耶?為他作耶?為自他作耶?為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尊者舍利弗!老死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亦非非自他作無因作,然彼生緣故有老死。」
6)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잡아함경 권10(262)이나 현장이 번역한 연기경縁起經에는 12지 연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12지 연기형식에 관하여」(『불교학리뷰』 3권(2008))를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7) 『雜阿含經』 卷14(三四三)(T2,93b25-94b1) ; S. 12. 25. Bhūmija.
《雜阿含經》卷14:「雜阿含經卷第十四
宋天竺三藏求那跋陀羅譯
[6](三四三)
如是我聞:
一時,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爾時,尊者浮彌比丘住耆闍崛山。
時,有眾多外道出家詣尊者浮彌所,共相問訊慶慰,共相問訊慶慰已,退坐一面,語尊者浮彌言:「欲有所問,寧有閑暇見答[7]與不?」
尊者浮彌語諸外道出家:「隨汝所問,當為汝說。」
時,諸外道出家問尊者浮彌:「苦樂自作耶?」
尊者浮彌答言:「諸外道出家說苦樂自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他作耶?」
答言:「苦樂他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自他作耶?」
答言:「苦樂自他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苦樂非自非他無因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諸外道出家復問:「云何?尊者浮彌苦樂自作耶?說言無記。苦樂他作耶?說言無記。苦樂自他作耶?說言無記。苦樂非自非他無因作耶?說言無記。今沙門瞿曇說苦樂云何生?」
尊者浮彌答言:「諸外道出家!世尊說苦樂從緣起生。」
時,諸外道出家聞尊者浮彌所說,心不歡喜,呵責而去。
爾時,尊者舍利弗去尊者浮彌不遠,坐一樹下。
爾時,尊者浮彌知諸外道出家去已,往詣尊者舍利弗所,到已,與舍利弗面相慶慰。慶慰已,以彼諸外道出家所問事,具白尊者舍利弗:「我作此答,得不謗毀世尊!如說說、不如法說、不為是隨順法行法,得無為餘因法論者來難詰呵責不?」
尊者舍利弗言:「尊者浮彌!汝之所說,實如佛說,不謗如來,如說說、如法說、法行法說,不為餘因論義者來難詰呵責。所以者何?世尊說苦樂從緣起生故。尊者浮彌!彼諸沙門、婆羅門所問苦樂自作者,彼亦從因起生;言不從緣起生者,無有是處。苦樂他作、自他作、[亦>非]自非他無[緣>因]作說者,彼亦從緣起生;若言不從緣生者,無有是處。尊者浮彌!彼沙門、婆羅門所說苦樂自作者,亦緣觸生;若言不從觸生者,無有是處。苦樂他作、自他作、非自非他無因作者,彼亦緣觸生,若言不緣觸生者,無有是處。」
爾時,尊者阿難去舍利弗不遠,坐一樹下,聞尊者舍利弗與尊者浮彌所論說事。聞已,從座起,往詣佛所,稽首佛足,退住一面。以尊者浮彌與尊者舍利弗共論說一一具白世尊。
佛告阿難:「善哉!善哉!阿難!尊者舍利弗有來問者,能隨時答。善哉!舍利弗!有應時智故,有來問者,能隨時答。若我聲聞,有隨時問者,應隨時答,如舍利弗所說。
「阿難!我昔時住王舍城山中仙人住處,有諸外道出家以如是義、如是句、如是味來問於我,我為斯等以如是義、如是句、如是味而為記說,如尊者舍利弗所說。
「阿難!若諸沙門、婆羅門苦樂自作,我即往彼問言:『汝實作是說苦樂自作耶?』彼答我言:『如是。』我即問言:『汝能堅執持此義,言是真實,餘則愚者,我所不許。所以者何?我說苦樂所起異於此。』彼若問我:『云何瞿曇所說,苦樂所起異者?』我當答言:『從其緣起而生苦樂。如是說[1]苦他作、自他作、非自非他無因作者,我亦往彼所說如上。』」
阿難白佛:「如世尊所說義,我已解知,有生故有老死,非緣餘;有生故有老死,乃至無明故有行,非緣餘;有無明故有行,無明滅則行滅,乃至生滅則老、病、死、憂、悲、惱、苦滅,如是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尊者阿難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CBETA, T02, no. 99, p. 93, b22-p. 94, b1)
[6]S. 12. 25. Bhūmija.(浮彌)。[7]與=以【元】【明】*。[1]苦+(樂)【宋】【元】【明】。
『잡아함경』 권12(302)에는 아지라가섭이 부처님에게 (고락이 아닌) 고苦와 관련하여 자작과 타작을 물었을 때 부처님이 무기 無記 avyākṛtam하였다고 나옵니다. 『雜阿含經』卷12 (三〇二) ; S. 12. 17. Acela. 《雜阿含經》卷12:「[1](三〇二)
如是我聞:
一時,佛住王舍城耆闍崛山。
爾時,世尊晨朝著衣持鉢,出耆闍崛山,入王舍城乞食。
時,有[2]阿支羅迦葉為營小事,出王舍城,向耆闍崛山,遙見世尊。見已,詣佛所,白佛言:「瞿曇!欲有所問,寧有閑暇見答[3]與不?」
佛告迦葉:「今非論時,我今入城乞食,來還則是其時,當為汝說。」
第二亦如是說,第三復問:「瞿曇!何為我作留難?瞿曇!云何有異?我今欲有所問,為我解說。」
佛告阿支羅迦葉:「隨汝所問。」
阿支羅迦葉白佛言:「云何?瞿曇!苦自作耶?」
佛告迦葉:「苦自作者,此是無記。」
迦葉復問:「云何?瞿曇!苦他作耶?」
佛告迦葉:「苦他作者,此亦無記。」
迦葉復問:「苦自他作耶?」
佛告迦葉:「苦自他作,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瞿曇!苦非自非他無因作耶?」
佛告迦葉:「苦非自非[4]他,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無因作者?瞿曇!所問苦自作耶?」答言:「無記。」「他作耶?自他作耶?非自非他無因作耶?」答言:「無記。」「今無此苦耶?」
佛告迦葉:「非無此苦,然有此苦。」
迦葉白佛言:「善哉!瞿曇!說有此苦,為我說法,令我知苦見苦。」
佛告迦葉:「若受即自受者,我應說苦自作,[5]若他受他即受者,是則他作,若受自受他受,復與苦者。如是者自他作,我亦不說,若不因自他,無因而生苦者,我亦不說。離此諸邊,說其中道,如來說法,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謂緣無明行,乃至純大苦聚集,無明滅則行滅,乃至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阿支羅迦葉遠塵離垢,得法眼淨。
時,阿支羅迦葉見法、得法、知法、入法,度諸狐疑,不由他知、不因他度,於正法、律心得無畏,合掌白佛言:「世尊!我今已度,我從今日,歸依佛、歸依法、歸依僧,盡壽作優婆塞,證知我。」
阿支羅迦葉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
時,阿支羅迦葉辭世尊去不久,為護犢牸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
爾時,世尊入城乞食。時,有眾多比丘亦入王舍城乞食,聞有傳說:「阿支羅迦葉從世尊聞法,辭去不久,為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諸比丘乞食已,還出,舉衣鉢,洗足,詣世尊所,稽首禮足,退坐一面,白佛言:「世尊!我今晨朝眾多比丘入城乞食,聞阿支羅迦葉從世尊聞法、律,辭去不久,為護犢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世尊!彼生何趣?何處受生?彼何所得?」
佛告諸比丘:「彼已見法、知法、次法、不受於法,已般涅槃,汝等當往供養其身。」
爾時,世尊為阿支羅迦葉[6]受第一記。」(CBETA, T02, no. 99, p. 86, a4-b23) [1]S. 12. 17. Acela.。[2]阿…葉Acela-Kassapa.。[3]與=以【元】【明】。[4]他+(無因作者)【明】。[5]若=苦【宋】【元】【明】。[6]受=授【明】*。
8) 남수영 옮김, 나카무라 하지메 지음, 『용수의 중관사상』(226쪽)을 보면 용수 이전에도 대승불교에서는 공을 설하고 있었는데 이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용수가 『중론』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 『중론中論』. T30.33b: “衆因縁生法 我説即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未曾有一法 不從因縁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中論》卷1〈觀因緣品1〉:「
[16]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CBETA, T30, no. 1564, p. 1, b14-17)
[16][ Aniro ham >Anirodham ] anutpādam anucchedam aśāśvataṃ, Anekārtham anānārtham anāgamam anirgamam Yaḥ [ pratītyasamu pādam > pratītyasamutpādam ] [ prapañco paśamam > prapañcopaśamam ] śivaṃ, Deśayāmāsa [ sambuddhast ṃvande > sambuddhas taṃ vande ] vadatāṃ varaṃ.(不生. Anutpāda, 不滅. Anirodha, 不常. [ Asas ata > Aśāśvata ], 不斷. [ Anucc eda > Anuccheda ], 不一. Anekārtha, 不異. [ Anānāstha > Anānārtha ], 不來. Anāgama, 不出. Anirgama, 因緣. Pratītyasamutpāda, 戲論. [ Prapoñca > Prapañca ], 諸說中=諸說法者中. Vadatāṃ).。
《中論》卷1〈觀因緣品1〉:「
[2]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CBETA, T30, no. 1564, p. 2, b6-7)
[2]第一偈. Na svato nāpi parato na dvābhyaṃ nāpy ahetutaḥ, Utpannā jātu vidyante bhāvāḥ kvacana ke cana.(自=從自. Svataḥ, 他=從他, Parataḥ, 共=從自他共. Dvābhāṃ, 無因. Ahetu).。
9) 불교의 공성空性에 관한 논의가 인도 수학에 영향을 미쳐 영이 나왔다는 견해 또한 있습니다.
10) 『雜阿含經』卷10(二六二)(CBETA, T02, no. 99, p. 67, a4-16) ; S. 22. 90. Channa.
11) 『解深密經』 (No. 0676 玄奘譯 ) T16.693a 《解深密經》卷2〈一切法相品4〉:「「謂諸法相略有三種,何等為三?一者、遍計所執相;二者、依他起相;三者、圓成實相。云何諸法遍計所執相?謂一切法[4]名假安立自性差別,乃至為令隨起言說。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緣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緣行,乃至招集純大苦蘊。云何諸法圓成實相?謂一切法平等真如。於此真如,諸菩薩眾勇猛精進為因緣故,如理作意,無倒思惟為因緣故,乃能通達。於此通達,漸漸修[5]集,乃至無上正等菩提方證圓滿。」(CBETA, T16, no. 676, p. 693, a15-25)[4]名假=假名【宮】。[5]集=習【宋】【元】【明】【宮】。
12) 『華嚴經探玄記』 (No. 1733 法藏述 ) T35.175b 《華嚴經探玄記》卷4〈如來光明覺品5〉:「一切有無法了達。非有無者有三門。一約三性。二約三無性。三約雙融。初中復二。初別後總。別中三性各有二義。所執中一是情有二是理無。依他中一是幻有二是性空。圓成中一離相二是體實。此上三一一各融不二為一性故。總者所執是無。圓成是有。依他是俱。以真妄該攝[5]二相盡故無二也。二約三無性者初無相觀境中。所執有無皆虛故。又無有有無故俱離也。依他無生性中。無幻有有性空不二故俱離也。圓成無性中。無二性有真理亦不二故俱絕也。三約雙融者。三有三無。圓融無礙二相絕故俱離也。」(CBETA, T35, no. 1733, p. 175, a27-b10) [5]二=三【甲】。
13) 『華嚴一乘教義分齊章』卷4:「一, 空有力不待緣。二, 空有力待緣。三, 空無力待緣。四, 有有力不待緣。五, 有有力待緣。六, 有無力待緣。」(CBETA, T45, no. 1866, p. 502, a3-5) ;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卷3〈十地品22〉:「有力不待外緣所以有力不待緣」(CBETA, T35, no. 1732, p. 66, a23-24), 『華嚴五十要問答』卷2:「一, 空有力不待緣。」(CBETA, T45, no. 1869, p. 531, b10)
14) 악인왕생惡人往生을 말할 때 출가하였다가 환속한 뒤 도축 일로 생계를 꾸려간 오경吳瓊이라는 분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용서증광정토문龍舒增廣淨土文』 권5, 『왕생집往生集』 권2에 나옵니다. 그 외 『정토신종淨土晨鐘』, 『정토전서淨土全書』,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여래향如來香』 그리고 성총(性聰)의 『정토보서淨土寶書』에도 인용되어 나옵니다.
《龍舒增廣淨土文》卷5:「宋臨安府仁和吳瓊
吳瓊先為僧後還俗。前後兩娶生二子。屠沽無所不為。常與人作厨子。每殺鷄鴨等物命。以手持起叫云。阿彌陀佛子好脫此身去。遂殺之。連稱佛數聲。每切肉時。一面切一面念阿彌陀佛。常念佛不輟。教村中人念經修懺。及勸人念阿彌陀佛。後眼上生瘤。如鷄子大。乃憂怖造一草菴。分散其妻子。晝夜念佛修懺。紹興二十三年秋。告村中人云。瓊來日戌時去也。人皆笑之。將用椀鉢鍋子盡與人。次日晚報諸道友行婆云。瓊去時將至。盡來與瓊高聲念佛相助。將布衫當酒飲了。即寫頌云。似酒皆空。問甚禪宗。今日珍重。明月清風。端坐合掌念佛。叫一聲佛來即化去。」(CBETA, T47, no. 1970, p. 269, a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