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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와 공에 관하여

VIS VITALIS 2017. 1. 4. 19:15

연기와 공에 관하여

 


 

 불교학술원 소식지 뒤쪽에 실려읽는 이들에게 청량감을 주어야 할 터인데 이런 저런 주제를 끄적거리다가 핵심적일지는 몰라도 아주 무거운 개념 또는 주제를 쓰게 되었습니다연기와 공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어 굳이 이런 곳에서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개인적으로 접하게 된 지식이 비록 알 사람은 다 아는 종류의 것일지라도 혹시라도 처음 보는 이들이 있다면 공유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연기

 

 연기는 무엇일까요?

 

 세친이 짓고 현장이 옮긴 『아미달마구사론』1)에서는 연기를 뜻하는 범어 Pratītyasamutpāda를 음역한 뒤 각 구절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는 어근는 접두사를 뜻한다는 권 오민 번역2)을 참조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此中縁起是何句義

여기에서 연기라는 어구의 뜻은 무엇인가?

鉢剌底醫底界是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

“발랄저[鉢剌底 prati]”는 “이르다[]”는 뜻이다“의저[醫底 itya]”의 어근[i]은 “가다[]”는 뜻이다앞의 접두사[,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i]의 뜻이 바뀐다그러므로  “가다”가 “이르다”에 의하여 (“가다”라는 의미가바뀌어 “연(=조건으로 하여)”이 된다.

 

和合上升鉢地界是。‘’·‘轉變成’。

“삼[參 sam]”은 “화합和合”의 뜻이다“올[嗢 ut]”은 “상승上升”의 뜻이다“발지[鉢地 pāda]”의 어근[pad]은 “있다[]”는 뜻이다“있다[]”는 “화합和合”과 “상승上升”에 의하여 (“있다”라는 의미가바뀌어 “기(일어남)”가 된다.

由此有法和合’‘’‘’。縁起

이러한 유법(有法)으로 말미암아 ‘연’에 대하여 ‘이르고’ 나서  ‘화합하고’ ‘위로 [=上升]’ 일어남[]이 ‘연기’의 뜻이다.

 

 위는 연기緣起3)로 번역된 범어에 대한 어원분석(etymology)입니다에서는 “가다”라는에서는 “있다”라는 뜻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가다”와 “있다”가 결합하고 변용하여 연기라는 의미를 이룬다는 것입니다이는 “있음being”과 “됨becoming”이라는 뜻을 포괄하는 존재(有 bhava)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발랄저[鉢剌底 prati]를 “갖가지[種種]”라는 뜻으로 보기도 합니다용어 정의와 관련해서는 범본 『구사론』보다 현장의 한역 『구사론』이 좀 더 자세하다고 합니다.

 

  “연기”라는 용어는 현재 번역 없이 쓰이고 있으나 “조건적 생기”“조건 속에서의 생기”“조건적 발생” 등으로 옮긴 것들이 보입니다영어로는 “dependent originationdependent arisingconditioned genesisdependent co-arisinginterdependent arising” 등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연기라는 용어에 관한 짤막한 소개입니다다음으로는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잡아함경 권12(288)를 인용해 “연기가 무엇인가?”에 대해 간단히 더 보고자 합니다.

 

“늙음이 있는가?

 

“있다.

“죽음이 있는가?

“있다.

“늙음과 죽음이 스스로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아니면 다른 것이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아니면 그 둘 다인가아니면 그 둘 어느 것도 짓지 않으니 원인이 없이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스스로 짓지도 않고 다른 것이 짓지도 않는다. [...]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4)

 

 위는 사리불舍利弗이 묻고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가 대답하는 대화를 조금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스스로 짓는 것은 자작自作다른 것이 짓는 것은 타작他作입니다늙음은 (1) 자작도 아니고, (2) 타작도 아니고, (3) 자작이면서 동시에 타작인 것도 아니고, (4) 자작도 타작도 아니어서 원인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라는 사구부정四句否定이 여기에 쓰이고 있습니다영원불변하며 자기충족적인 실체를 배제하고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연기에 있어서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라는 정의는 무척 중요해 보입니다이 사구부정에 이어 답처럼 제시된 것이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가 있다.”는 것입니다명색에 이어 식까지 10지 연기5)가 제시되고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있게 됩니다.

 

 

 

 용수의 『중론』을 보면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이 하나의 논리 또는 도식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6)B.K 마티랄Matilal에 따르면 수학자들이 말하는 영에 영향을 받아서 용수가 철학적으로 공을 말했다고 합니다이 말이 사실이라면7)연기와 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맥락에 따라 층위를 달리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잡아함경』 권10(262)에는 “여래께서는 양 극단을 떠나시어 중도를 설하셨다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如來離於二邊説於中道所謂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 모든 행들이 다 공이다모두 다 고요하여 얻을 수 없다於一切行皆空皆悉寂不可得。”라고 나옵니다현장이 번역한 『해심밀경』에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은 무엇인가모든 법이 조건으로 생겨난다는 자성을 말한다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말하자면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내지 순전한 큰 고통의 무더기를 불러일으킨다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縁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縁行乃至招集純大苦蘊。”8)위 두 경전에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이 똑같이 언급되지만 맥락은 다릅니다『해심밀경』에서는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을 나열한 뒤 의타기성을 설명하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이 3(三性)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를 해석하는 것도 후대에 볼 수 있습니다청변은 의타기성의 오온도 공이라고 보는데 반해 호법은 의타기성의 오온은 공이 아니라고 봅니다그러나 3성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연기의 변용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또한 법장(643-712)이 『탐현기』에서 60화엄의 광명각품을 풀이하는 가운데 “의타기성의 첫째는 환유幻有이고 둘째는 성공性空이다依他中一是幻有二是性空。”9)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이론적으로 발전된 연기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법장은 『오교장』에서 힘이 있는 공과 힘이 없는 공10)을 나누어 얘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가 오히려 마음에 더 와 닿습니다.

 

 

似酒皆空。술처럼 모두 공하네

問甚禪宗。선의 종지를 깊이 묻나니

今日珍重。오늘 편히 쉬시게

明月清風。달은 밝네 바람은 맑네

 

 송나라 오경吳瓊이라는 분이 임종 전 술을 드신 뒤 읊은 시입니다.11)이 시를 읊은 뒤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염불한 뒤 아미타부처님이 마중하러 오셨다고 외치시고는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3. 나오며

 

 부처님은 출가 전 늙음과 죽음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던 젊은이였습니다그것이 출가의 동기였으며 깨달음의 나무[道樹아래 일어났던 일은 늙음과 죽음의 해소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늙음은 자작도 타작도 아닙니다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에는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늙음에 대한 불교적 인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고은 시인이 “나 혼자는 내가 아니다.” (<정릉에서>)라고 한 것이나 정현종 시인이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표현한 것도 연기적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우리는 홀로인 나홀로인 남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그런 측면에서 연기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이웃”이 적합할 것입니다.

 

 


1) 『아비달마구사론 阿毘達磨俱舍論』 권〈분별세품分別世品 3〉 (CBETA, T29, no. 1558, p. 50, b14-18)

2) 권오민『아비달마구사론 2, 446.

3) 『구사론』에는 연기를 찰나Kaika, 연박Sāṃbadhika, 분위Āvasthika, 원속Prākarika 이 네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세 번째 분위가 전통적인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에 의한 12연기의 이해입니다阿毘達磨俱舍論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剎那二者連縛三者分位四者遠續。」(T29,48 c8-10)

4) 『雜阿含經』 12二八八(CBETA, T02, no. 99, p. 81, a9-c3) ; S. 12. 67. Naakalāpiya.
  尊者舍利弗問尊者摩訶拘絺羅:「云何尊者摩訶拘絺羅有老不?」 答言:「。」 尊者舍利弗復問:     「有死不?」 答言:「。」 復問:「云何老死自作耶為他作耶為自他作耶為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尊者舍利弗老死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亦非非自他作無因作然彼生緣故有老死。」

5)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잡아함경 권10(262)이나 현장이 번역한 연기경縁起經에는 12지 연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이와 관련하여서는 「12지 연기형식에 관하여」(『불교학리뷰』 3(2008))를 보시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6) 남수영 옮김나카무라 하지메 지음『용수의 중관사상』(226)을 보면 용수 이전에도 대승불교에서는 공을 설하고 있었는데 이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용수가 『중론』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구마라집鳩滅什 번역 『중론中論. T30.33b: 衆因縁生法 我説即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未曾有一法 不從因縁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7) 불교의 공성空性에 관한 논의가 인도 수학에 영향을 미쳐 영이 나왔다는 견해 또한 있습니다.

8) 『解深密經』 (No. 0676 玄奘譯 ) T16.693a

9) 『華嚴經探玄記』 (No. 1733 法藏述 ) T35.175b

10) 『華嚴一乘教義分齊章』 卷 第四. T45.499

11) 악인왕생惡人往生을 말할 때 출가하였다가 환속한 뒤 도축 일로 생계를 꾸려간 오경吳瓊이라는 분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용서증광정토문龍舒增廣淨土文』 권5, 『왕생집往生集』 권2에 나옵니다.


















































연기와 공에 관하여

 

 불교학술원 소식지 뒤쪽에 실려읽는 이들에게 청량감을 주어야 할 터인데 이런 저런 주제를 끄적거리다가 핵심적일지는 몰라도 아주 무거운 개념 또는 주제를 쓰게 되었습니다연기와 공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어 굳이 이런 곳에서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개인적으로 접하게 된 지식이 비록 알 사람은 다 아는 종류의 것일지라도 혹시라도 처음 보는 이들이 있다면 공유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연기


 연기는 무엇일까요?


 세친이 짓고 현장이 옮긴 아미달마구사론1)에서는 연기를 뜻하는 범어Pratītyasamutpāda를 음역한 뒤 각 구절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는 어근는 접두사를 뜻한다는 권 오민 번역2)을 참조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此中縁起是何句義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ḥ?

여기에서 연기라는 어구의 뜻은 무엇인가?


鉢剌底是醫底界是

pratiḥ prāptyarthaḥ, etiḥ gatyarthaḥ|

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ḥpratītyeti|

"발랄저[鉢剌底 prati]”는 이르다[]”는 뜻이다. “의저[醫底 iti]”의 어근[i]은 가다[]”는 뜻이다앞의 접두사[3),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i]의 뜻이 바뀐다그러므로 가다가 이르다에 의하여 (“가다라는 의미가) “(=조건으로 하여)”으로 바뀐다.


參是和合嗢是上升鉢地界是’·‘’, 轉變成

yadi sattārthaḥ,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ḥ|

[參 sam]”은 화합和合의 뜻이다. “[嗢 ut]”은 상승上升의 뜻이다.“발지[鉢地 pāda]”의 어근[pad]은 있다[]”는 뜻이다. “있다[]”는 화합和合과 상승上升에 의하여 (“있다라는 의미가) “(일어남)”로 바뀐다.


由此有法, ‘, ‘和合’‘’‘縁起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ḥ|

이러한 유법(有法)으로 말미암아 에 대하여 이르고’ 나서 화합하고’ ‘위로 [=上升]’ 일어남[]이 연기의 뜻이다.




 위는 연기緣起4)로 번역된 범어에 대한 어원분석(etymology)입니다에서는 가다라는에서는 있다라는 뜻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가다와 있다가 결합하고 변용하여 연기라는 의미를 이룬다는 것입니다.이는 있음being”과 becoming”이라는 뜻을 포괄하는 존재(有 bhava)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연기의 용어 분석과 관련해서는 현장의 한역 구사론이 범본 구사론보다 좀 더 자세합니다.


 “연기라는 용어는 현재 번역 없이 쓰이고 있으나 조건적 생기”, “조건 속에서의 생기”, “조건적 발생” 등으로 옮긴 것들이 보입니다영어로는 “dependent origination”, “dependent arising”, “conditioned genesis”, “dependent co-arising”, “interdependent arising” 등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연기라는 용어에 관한 짤막한 소개입니다.


 다음으로는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잡아함경』 12(288)와 권14(343)를 보고자 합니다.


늙음이 있는가?”

있다.”

죽음이 있는가?”

있다.”

늙음과 죽음이 스스로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아니면 다른 것이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아니면 그 둘 다인가아니면 그 둘 어느 것도 짓지 않으니 원인이 없이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스스로 짓지도 않고 다른 것이 짓지도 않는다. [...] 삶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5)


 위는 사리불舍利弗이 묻고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가 대답하는 대화를 조금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스스로 짓는 것은 자작自作다른 것이 짓는 것은 타작他作입니다늙음은 (1) ‘자작도 아니고, (2) ‘타작도 아니고, (3) ‘자작이면서 또한 타작인 것도 아니고, (4)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니 원인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라는 사구부정四句否定이 여기에 쓰이고 있습니다연기에 있어서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라는 정의는 무척 중요해 보입니다이 사구부정에 이어 답처럼 제시된 것이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가 있다.”는 것입니다명색에 이어 식까지 10지 연기6)가 제시되고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있게 됩니다.

 

 자작과 타작과 관련해서는 잡아함경』 14(343)7)도 주목됩니다고락苦樂이 자작인지 타작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無記]라고 나옵니다부미浮彌존자나 사리불舍利弗존자가 그렇게 말한 것을 아난阿難존자가 전하자 부처님이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자작이나 타작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노사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고락과 관련된 것이고12지 연기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만 고락은 연기로부터 생긴다.苦樂從緣起生라고 하여 연기緣起로서 대답하고 있는 점은 같습니다.

 

 


 용수의 중론을 보면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이 하나의 논리 또는 도식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8)B.K 마티랄Matilal에 따르면 수학자들이 말하는 영에 영향을 받아서 용수가 철학적으로 공을 말했다고 합니다이 말이 사실이라면9)연기와 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맥락에 따라 층위를 달리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잡아함경』 10(262)에는 여래께서는 양 극단을 떠나시어 중도를 설하셨다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如來離於二邊説於中道所謂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 모든 행들이 다 공이다모두 다 고요하여 얻을 수 없다於一切行皆空皆悉寂不可得”10)라고 나옵니다


 현장이 번역한 해심밀경에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은 무엇인가모든 법이 조건으로 생겨난다는 자성을 말한다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말하자면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내지 순일純一하고 거대한 고통의 무더기를 불러일으킨다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縁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縁行乃至招集純大苦蘊”11)


 위 두 경전에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이 똑같이 언급되지만 맥락은 다릅니다해심밀경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나열한 뒤 의타기성을 설명하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3(三性)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를 해석하는 것도 후대에 볼 수 있습니다청변은 의타기성의 오온도 공이라고 보는데 반해 호법은 의타기성의 오온은 공이 아니라고 봅니다그러나 3성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연기의 변용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장(643-712)이 탐현기에서 60화엄의 광명각품光明覺品을 풀이하는 가운데 의타기성의 첫째는 환유幻有이고 둘째는 성공性空이다依他中一是幻有,二是性空”12)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이론적으로 발전된 연기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법장은 오교장에서 지엄의 수현기나 오십요문답을 이어받아 힘이 있는 공과 힘이 없는 공13)을 말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가 오히려 마음에 더 와 닿습니다.


似酒皆空술과 같이 모두 공하여

問甚禪宗선의 종지를 곰곰이 물어 보네

今日珍重오늘 다들 잘 계시게

明月清風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하구나



 송나라 오경吳瓊이라는 분이 임종 전 술을 드신 뒤 읊은 시입니다.14)이 시를 읊은 뒤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염불한 뒤 아미타부처님이 마중하러 오셨다[佛來]라고 외치시고는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출가 전 늙음과 죽음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던 젊은이였습니다그것이 출가의 동기였으며 깨달음의 나무[道樹아래 일어났던 일은 늙음과 죽음의 해소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늙음은 자작도 타작도 아닙니다아예 자작이니 타작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에는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늙음에 대한 불교적 인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고은 시인이 나 혼자는 내가 아니다.” (<정릉에서>)라고 한 것이나 정현종 시인이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비스듬히>) 라고 표현한 것도 연기적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우리는 홀로인 나홀로인 남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그런 측면에서 연기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이웃이 적합할 것입니다.






1) 『아비달마구사론 阿毘達磨俱舍論』 권〈분별세품分別世品 3〉 (CBETA, T29, no. 1558, p. 50, b14-18).범어는 張雪杉 편집본(http://www.mldc.cn/sanskritweb/resour/etext/abhk3.html)을 참조하였습니다.
阿毘達磨俱舍論9分別世品3〉:「經說云何緣已生法謂無明行至生老死或應不許二在未來是則壞前所立三際有說緣起是無為法以契經言如來出世若不出世如是緣起法性常住由如是意理則可然若由別意理則不然云何如是意云何為別意而說可然及不可然謂若意說如來出世若不出世行等常緣無明等起非緣餘法或復無緣故言常住如是意說理則可然若謂意說有別法體名為緣起湛然常住此別意說理則不然所以者何生起俱是有為相故非別常法為無常相可應正理又起必應依起者立此常住法彼無明等何相關預而說此法依彼而立為彼緣起又名緣起而謂[4]目常如是句義無相應理此中[5]緣起是何句義[6]剌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緣參是和合義嗢是上[7]升義鉢地界是有義有藉合[]升轉變成起由此有法至於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如是句義理不應然所以者何依一作者有二作用於前作用應有已言如有一人浴已方食無少行法有在起前先至於緣後時方起非無作者可有作用。」(CBETA, T29, no. 1558, p. 50, a28-b22) [4]】。[5]Pratityasamutpāda.[6]】【】【】【】【CB】*。[7]】【】【】【】*。[7-1]】【】【】【】*。[7-2]】【】【】【】*。
張雪杉 편집본(http://www.mldc.cn/sanskritweb/resour/etext/abhk3.html):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
本言至行集生此句有何義
此中緣起是何句義
pratiḥ prāptyartha, etiḥ gatyartha|
若合此句所顯義謂諸行法至因及緣由聚集未有成有是義至行集生所顯
鉢刺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ḥ pratītyeti|

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緣
yadi sattārtha,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

參是和合義嗢是上升義鉢地界是有義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

有藉合升轉變成起由此有法至於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

2) 권오민『아비달마구사론 2, 446“여기서 ‘연기(緣起)’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뜻의 말인가발랄저(鉢剌底, prati)는 바로 ‘이르다[, prāti]’의 뜻이고의지(醫地, iti)의 어근[즉 √i]은 ‘간다[, gati]’는 뜻인데앞의 접두사(즉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의 뜻이 전변하였다그래서 ‘간다’가 ‘이르다’는 뜻에 의해 ‘연하여’로 변하게 되었다그리고 삼(, sam)은 바로 화합의 뜻이고(, ut)은 상승의 뜻이며 발지(鉢地, pādi)의 어근(즉 √pād)은 존재(, sattvā)의 뜻이다즉 존재가 화합과 상승의 뜻과 결합하여 ‘일어나다[]’는 뜻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이 같은 사실에 따라 어떤 존재가 연에 이르러 화합 상승하여 일어나는 것이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      

3) 『구사론기俱舍論記』 권해당 부분(CBETA, T41, no. 1821, p. 169, c17-p. 170, a6)에서는 “由先助力”을 “由先鉢剌底助力(T41.169c23)으로 풀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는 접두사나 조사이기보다 단순히 “돕다”는 뜻에 가까워 보입니다由先鉢剌底助力”이 “앞의 발랄저의 조력으로”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조에 대해 이외 별다른 지식이 없는 상태인지라 여기에서는 접두사로 보는 견해를 따릅니다『구사론기俱舍論記』에는 “(丁履反)”이라 하여 를 ‘지’로 읽으라고 나옵니다
俱舍論記9分別世品3〉:「此中緣起是何句義者大眾部問
[>]底至是緣起義者經部答或說一切有部答依聲明論有字緣字界其字界若有字緣來助即有種種義起鉢剌底是至義是字緣醫底界是行義是字界界是體義此醫底界由先鉢[>]底助力醫底界義轉變成緣若助訖成緣應言鉢[>](丁履反)[8](叐何反)此翻名緣所以然者諸緣勢力起果名行未至之時未成緣義若緣力至果或諸緣相至方得名緣故造字家於行界上加至助緣行成緣義參是和合義嗢是上[9]升義此二是字緣鉢地界是有義是字界鉢地有界藉前參唱合升字緣助力轉變成起若助訖成起應言參牟播陀此翻名起所以然者明諸有法要與緣合便得上升故名為起故造字家於有界上加合升緣有成起義故總結言由此有行法至於四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
如是句義至彼應先說故者聲論師難至緣已起故言如是句義理不應然此即總非所以者何依一作者實體有二作用前後別起可得說言於前作用應有已言彼聲論計諸法有體有用體即[1]逕留多位名為作者用即隨位不同名為作用一切作用必依作者彼計作用同勝論師業句義離體別有指事別顯如有一人名為作者起二作用先澡浴已後時方食於前作用可說已言若有少行法有在起前可得說言先至於緣後時方起既無行法有在起前 先至緣已後時方起如何得說至緣已起 言起前者現在名起前謂未來依法行世未來名前 或起前者在起前故[2]先已至於緣名為起前皆表未來非無作者法體可有作用以彼作用必依體故故說頌破言至緣[3]之行若在起先未來法體而非有故不應道理若行至緣與起俱時便壞己[4]於彼應先說至緣[5]後方說起不應說俱聲論經部俱說過未無體故以非有故破彼經部若以此頌破說一切有部聲論即以己宗義破。」(CBETA, T41, no. 1821, p. 169, c17-p. 170, a28) [8]+(夭何反)【】。[9]下同[1]〕-【】。[2]】。[3]】。[4]〕-【】。[5]後方說起方說起起】。

4) 『구사론』에는 연기를 찰나Kaika, 연박Sāṃbadhika, 분위Āvasthika, 원속Prākarika 이 네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세 번째 분위가 전통적인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에 의한 12연기의 이해입니다阿毘達磨俱舍論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剎那二者連縛三者分位四者遠續。」(T29,48c8-10)
   《阿毘達磨俱舍論9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12]剎那二者[13]連縛三者[14]分位四者[15]遠續云何剎那謂剎那頃由貪行殺具十二支癡謂無明思即是行於諸境事了別名識識俱三蘊總稱名色住名色根說為六處六處對餘和合有觸領觸名受貪即是愛與此相應諸纏名取所起身語二業名有如是諸法起即名生熟變名老滅壞名死復有說者剎那連縛如品類足俱遍有為[16]十二支位所有五蘊皆分位攝即此懸遠相續無始說名遠續。」(CBETA, T29, no. 1558, p. 48, c8-18) [12]Kaika.[13]Sāṃbadhika.[14]Āvasthika.[15]Prākarika.[16]十二二十】。

5) 『雜阿含經』 12二八八(CBETA, T02, no. 99, p. 81, a9-c3) ; S. 12. 67. Naakalāpiya.
  尊者舍利弗問尊者摩訶拘絺羅:「云何尊者摩訶拘絺羅有老不?」 答言:「。」 尊者舍利弗復問:     「有死不?」 答言:「。」 復問:「云何老死自作耶為他作耶為自他作耶為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尊者舍利弗老死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亦非非自他作無因作然彼生緣故有老死。」

6)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잡아함경 권10(262)이나 현장이 번역한 연기경縁起經에는 12지 연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이와 관련하여서는 「12지 연기형식에 관하여」(『불교학리뷰』 3(2008))를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7) 『雜阿含經』 14三四三(T2,93b25-94b1) ; S. 12. 25. Bhūmija. 
雜阿含經14:「雜阿含經卷第十四
宋天竺三藏求那跋陀羅譯
[6]三四三
如是我聞
一時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爾時尊者浮彌比丘住耆闍崛山
有眾多外道出家詣尊者浮彌所共相問訊慶慰共相問訊慶慰已退坐一面語尊者浮彌言:「欲有所問寧有閑暇見答[7]與不?」
尊者浮彌語諸外道出家:「隨汝所問當為汝說。」
諸外道出家問尊者浮彌:「苦樂自作耶?」
尊者浮彌答言:「諸外道出家說苦樂自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他作耶?」
答言:「苦樂他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自他作耶?」
答言:「苦樂自他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苦樂非自非他無因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諸外道出家復問:「云何尊者浮彌苦樂自作耶說言無記苦樂他作耶說言無記苦樂自他作耶說言無記苦樂非自非他無因作耶說言無記今沙門瞿曇說苦樂云何生?」
尊者浮彌答言:「諸外道出家世尊說苦樂從緣起生。」
諸外道出家聞尊者浮彌所說心不歡喜呵責而去
爾時尊者舍利弗去尊者浮彌不遠坐一樹下
爾時尊者浮彌知諸外道出家去已往詣尊者舍利弗所到已與舍利弗面相慶慰慶慰已以彼諸外道出家所問事具白尊者舍利弗:「我作此答得不謗毀世尊如說說不如法說不為是隨順法行法得無為餘因法論者來難詰呵責不?」
尊者舍利弗言:「尊者浮彌汝之所說實如佛說不謗如來如說說如法說法行法說不為餘因論義者來難詰呵責所以者何世尊說苦樂從緣起生故尊者浮彌彼諸沙門婆羅門所問苦樂自作者彼亦從因起生言不從緣起生者無有是處苦樂他作自他作[>]自非他無[>]作說者彼亦從緣起生若言不從緣生者無有是處尊者浮彌彼沙門婆羅門所說苦樂自作者亦緣觸生若言不從觸生者無有是處苦樂他作自他作非自非他無因作者彼亦緣觸生若言不緣觸生者無有是處。」
爾時尊者阿難去舍利弗不遠坐一樹下聞尊者舍利弗與尊者浮彌所論說事聞已從座起往詣佛所稽首佛足退住一面以尊者浮彌與尊者舍利弗共論說一一具白世尊
佛告阿難:「善哉善哉阿難尊者舍利弗有來問者能隨時答善哉舍利弗有應時智故有來問者能隨時答若我聲聞有隨時問者應隨時答如舍利弗所說
阿難我昔時住王舍城山中仙人住處有諸外道出家以如是義如是句如是味來問於我我為斯等以如是義如是句如是味而為記說如尊者舍利弗所說
阿難若諸沙門婆羅門苦樂自作我即往彼問言:『汝實作是說苦樂自作耶?』彼答我言:『如是。』我即問言:『汝能堅執持此義言是真實餘則愚者我所不許所以者何我說苦樂所起異於此。』彼若問我:『云何瞿曇所說苦樂所起異者?』我當答言:『從其緣起而生苦樂如是說[1]苦他作自他作非自非他無因作者我亦往彼所說如上。』」
阿難白佛:「如世尊所說義我已解知有生故有老死非緣餘有生故有老死乃至無明故有行非緣餘有無明故有行無明滅則行滅乃至生滅則老苦滅如是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尊者阿難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CBETA, T02, no. 99, p. 93, b22-p. 94, b1)
[6]S. 12. 25. Bhūmija.浮彌)。[7]】【】*。[1]+()【】【】【】。
   
『잡아함경』 권12(302)에는 아지라가섭이 부처님에게 (고락이 아닌와 관련하여 자작과 타작을 물었을 때 부처님이 무기 無記 avyāktam하였다고 나옵니다雜阿含經12 () ; S. 12. 17. Acela.雜阿含經12:「[1]
如是我聞
一時佛住王舍城耆闍崛山
爾時世尊晨朝著衣持鉢出耆闍崛山入王舍城乞食
[2]阿支羅迦葉為營小事出王舍城向耆闍崛山遙見世尊見已詣佛所白佛言:「瞿曇欲有所問寧有閑暇見答[3]與不?」
佛告迦葉:「今非論時我今入城乞食來還則是其時當為汝說。」
第二亦如是說第三復問:「瞿曇何為我作留難瞿曇云何有異我今欲有所問為我解說。」
佛告阿支羅迦葉:「隨汝所問。」
阿支羅迦葉白佛言:「云何瞿曇苦自作耶?」
佛告迦葉:「苦自作者此是無記。」
迦葉復問:「云何瞿曇苦他作耶?」
佛告迦葉:「苦他作者此亦無記。」
迦葉復問:「苦自他作耶?」
佛告迦葉:「苦自他作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瞿曇苦非自非他無因作耶?」
佛告迦葉:「苦非自非[4]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無因作者瞿曇所問苦自作耶?」答言:「無記。」「他作耶自他作耶非自非他無因作耶?」答言:「無記。」「今無此苦耶?」
佛告迦葉:「非無此苦然有此苦。」
迦葉白佛言:「善哉瞿曇說有此苦為我說法令我知苦見苦。」
佛告迦葉:「若受即自受者我應說苦自作[5]若他受他即受者是則他作若受自受他受復與苦者如是者自他作我亦不說若不因自他無因而生苦者我亦不說離此諸邊說其中道如來說法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謂緣無明行乃至純大苦聚集無明滅則行滅乃至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阿支羅迦葉遠塵離垢得法眼淨
阿支羅迦葉見法得法知法入法度諸狐疑不由他知不因他度於正法律心得無畏合掌白佛言:「世尊我今已度我從今日歸依佛歸依法歸依僧盡壽作優婆塞證知我。」
阿支羅迦葉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
阿支羅迦葉辭世尊去不久為護犢牸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
爾時世尊入城乞食有眾多比丘亦入王舍城乞食聞有傳說:「阿支羅迦葉從世尊聞法辭去不久為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諸比丘乞食已還出舉衣鉢洗足詣世尊所稽首禮足退坐一面白佛言:「世尊我今晨朝眾多比丘入城乞食聞阿支羅迦葉從世尊聞法辭去不久為護犢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世尊彼生何趣何處受生彼何所得?」
佛告諸比丘:「彼已見法知法次法不受於法已般涅槃汝等當往供養其身。」
爾時世尊為阿支羅迦葉[6]受第一記。」(CBETA, T02, no. 99, p. 86, a4-b23) [1]S. 12. 17. Acela.[2]Acela-Kassapa.[3]】【】。[4]+(無因作者)【】。[5]】【】【】。[6]】*。

8) 남수영 옮김나카무라 하지메 지음『용수의 중관사상』(226)을 보면 용수 이전에도 대승불교에서는 공을 설하고 있었는데 이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용수가 『중론』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 『중론中論. T30.33b: 衆因縁生法 我説即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未曾有一法 不從因縁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中論1觀因緣品1〉:「 
[16]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CBETA, T30, no. 1564, p. 1, b14-17)
[16][ Aniro ham >Anirodham ] anutpādam anucchedam aśāśvata, Anekārtham anānārtham anāgamam anirgamam Yaḥ [ pratītyasamu pādam > pratītyasamutpādam ] [ prapañco paśamam > prapañcopaśamam ] śiva, Deśayāmāsa [ sambuddhast vande > sambuddhas taṃ vande ] vadatāṃ vara.不生. Anutpāda, 不滅. Anirodha, 不常. [ Asas ata > Aśāśvata ], 不斷. [ Anucc eda > Anuccheda ], 不一. Anekārtha, 不異. [ Anānāstha > Anānārtha ], 不來. Anāgama, 不出. Anirgama, 因緣. Pratītyasamutpāda, 戲論. [ Prapoñca > Prapañca ], 諸說中諸說法者中. Vadatāṃ).
中論1觀因緣品1〉:「 
[2]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CBETA, T30, no. 1564, p. 2, b6-7)
[2]第一偈. Na svato nāpi parato na dvābhyaṃ nāpy ahetuta, Utpannā jātu vidyante bhāvāḥ kvacana ke cana.從自. Svata從他, Parata從自他共. Dvābhāṃ無因. Ahetu.

9) 불교의 공성空性에 관한 논의가 인도 수학에 영향을 미쳐 영이 나왔다는 견해 또한 있습니다.

10) 『雜阿含經10二六二(CBETA, T02, no. 99, p. 67, a4-16) ; S. 22. 90. Channa.

11) 『解深密經』 (No. 0676 玄奘譯 ) T16.693a 解深密經2一切法相品4〉:「「謂諸法相略有三種何等為三一者遍計所執相二者依他起相三者圓成實相云何諸法遍計所執相謂一切法[4]名假安立自性差別乃至為令隨起言說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緣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緣行乃至招集純大苦蘊云何諸法圓成實相謂一切法平等真如於此真如諸菩薩眾勇猛精進為因緣故如理作意無倒思惟為因緣故乃能通達於此通達漸漸修[5]乃至無上正等菩提方證圓滿。」(CBETA, T16, no. 676, p. 693, a15-25)[4]名假假名】。[5]】【】【】【】。

12) 『華嚴經探玄記』 (No. 1733 法藏述 ) T35.175b 華嚴經探玄記4如來光明覺品5〉:「一切有無法了達非有無者有三門一約三性二約三無性三約雙融初中復二初別後總別中三性各有二義所執中一是情有二是理無依他中一是幻有二是性空圓成中一離相二是體實此上三一一各融不二為一性故總者所執是無圓成是有依他是俱以真妄該攝[5]二相盡故無二也二約三無性者初無相觀境中所執有無皆虛故又無有有無故俱離也依他無生性中無幻有有性空不二故俱離也圓成無性中無二性有真理亦不二故俱絕也三約雙融者三有三無圓融無礙二相絕故俱離也。」(CBETA, T35, no. 1733, p. 175, a27-b10) [5]】。

13) 『華嚴一乘教義分齊章4:「空有力不待緣空有力待緣空無力待緣有有力不待緣有有力待緣有無力待緣。」(CBETA, T45, no. 1866, p. 502, a3-5) ;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3十地品22〉:「有力不待外緣所以有力不待緣(CBETA, T35, no. 1732, p. 66, a23-24), 華嚴五十要問答2:「空有力不待緣。」(CBETA, T45, no. 1869, p. 531, b10)

14) 악인왕생惡人往生을 말할 때 출가하였다가 환속한 뒤 도축 일로 생계를 꾸려간 오경吳瓊이라는 분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용서증광정토문龍舒增廣淨土文』 권5, 『왕생집往生集』 권2에 나옵니다.그 외 『정토신종淨土晨鐘『정토전서淨土全書『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여래향如來香』 그리고 성총(性聰)의 『정토보서淨土寶書』에도 인용되어 나옵니다.
   《龍舒增廣淨土文5:「宋臨安府仁和吳瓊
   吳瓊先為僧後還俗前後兩娶生二子屠沽無所不為常與人作厨子每殺鷄鴨等物命以手持起叫云阿彌陀佛子好脫此身去遂殺之連稱佛數聲每切肉時一面切一面念阿彌陀佛常念佛不輟教村中人念經修懺及勸人念阿彌陀佛後眼上生瘤如鷄子大乃憂怖造一草菴分散其妻子晝夜念佛修懺紹興二十三年秋告村中人云瓊來日戌時去也人皆笑之將用椀鉢鍋子盡與人次日晚報諸道友行婆云瓊去時將至盡來與瓊高聲念佛相助將布衫當酒飲了即寫頌云似酒皆空問甚禪宗今日珍重明月清風端坐合掌念佛叫一聲佛來即化去。」(CBETA, T47, no. 1970, p. 269, a1-14)





연기와 공에 관하여

 

불교학술원 소식지 뒤쪽에 실려읽는 이들에게 청량감을 주어야 할 터인데 이런 저런 주제를 끄적거리다가 핵심적일지는 몰라도 아주 무거운 개념 또는 주제를 쓰게 되었습니다연기와 공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어 굳이 이런 곳에서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개인적으로 접하게 된 지식이 비록 알 사람은 다 아는 종류의 것일지라도 혹시라도 처음 보는 이들이 있다면 공유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연기


연기는 무엇일까요?


세친이 짓고 현장이 옮긴 아미달마구사론1)에서는 연기를 뜻하는 범어Pratītyasamutpāda를 음역한 뒤 각 구절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는 어근는 접두사를 뜻한다는 권 오민 번역2)을 참조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此中縁起是何句義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ḥ?

여기에서 연기라는 어구의 뜻은 무엇인가?

鉢剌底是醫底界是

pratiḥ prāptyarthaḥ, etiḥ gatyarthaḥ|

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ḥpratītyeti|

발랄저[鉢剌底 prati]”는 이르다[]”는 뜻이다. “의저[醫底 iti]”의 어근[i]은 가다[]”는 뜻이다앞의 접두사[3),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i]의 뜻이 바뀐다그러므로 가다가 이르다에 의하여 (“가다라는 의미가) “(=조건으로 하여)”으로 바뀐다.

參是和合嗢是上升鉢地界是’·‘’, 轉變成

yadi sattārthaḥ,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ḥ|

[參 sam]”은 화합和合의 뜻이다. “[嗢 ut]”은 상승上升의 뜻이다.“발지[鉢地 pāda]”의 어근[pad]은 있다[]”는 뜻이다. “있다[]”는 화합和合과 상승上升에 의하여 (“있다라는 의미가) “(일어남)”로 바뀐다.

由此有法, ‘, ‘和合’‘’‘縁起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ḥ|

이러한 유법(有法)으로 말미암아 에 대하여 이르고’ 나서 화합하고’ ‘위로 [=上升]’ 일어남[]이 연기의 뜻이다.

위는 연기緣起4)로 번역된 범어에 대한 어원분석(etymology)입니다에서는 가다라는에서는 있다라는 뜻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가다와 있다가 결합하고 변용하여 연기라는 의미를 이룬다는 것입니다.이는 있음being”과 becoming”이라는 뜻을 포괄하는 존재(有 bhava)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연기의 용어 분석과 관련해서는 현장의 한역 구사론이 범본 구사론보다 좀 더 자세합니다.

연기라는 용어는 현재 번역 없이 쓰이고 있으나 조건적 생기”, “조건 속에서의 생기”, “조건적 발생” 등으로 옮긴 것들이 보입니다영어로는 “dependent origination”, “dependent arising”, “conditioned genesis”, “dependent co-arising”, “interdependent arising” 등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연기라는 용어에 관한 짤막한 소개입니다.


다음으로는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잡아함경』 12(288)와 권14(343)를 보고자 합니다.


늙음이 있는가?”

있다.”

죽음이 있는가?”

있다.”

늙음과 죽음이 스스로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아니면 다른 것이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아니면 그 둘 다인가아니면 그 둘 어느 것도 짓지 않으니 원인이 없이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스스로 짓지도 않고 다른 것이 짓지도 않는다. [...] 삶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5)


위는 사리불舍利弗이 묻고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가 대답하는 대화를 조금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스스로 짓는 것은 자작自作다른 것이 짓는 것은 타작他作입니다늙음은 (1) ‘자작도 아니고, (2) ‘타작도 아니고, (3) ‘자작이면서 또한 타작인 것도 아니고, (4)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니 원인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라는 사구부정四句否定이 여기에 쓰이고 있습니다연기에 있어서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라는 정의는 무척 중요해 보입니다이 사구부정에 이어 답처럼 제시된 것이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가 있다.”는 것입니다명색에 이어 식까지 10지 연기6)가 제시되고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있게 됩니다.

 

 자작과 타작과 관련해서는 잡아함경』 14(343)7)도 주목됩니다고락苦樂이 자작인지 타작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無記]라고 나옵니다부미浮彌존자나 사리불舍利弗존자가 그렇게 말한 것을 아난阿難존자가 전하자 부처님이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자작이나 타작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노사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고락과 관련된 것이고12지 연기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만 고락은 연기로부터 생긴다.苦樂從緣起生라고 하여 연기緣起로서 대답하고 있는 점은 같습니다.

 

 


용수의 중론을 보면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이 하나의 논리 또는 도식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8)B.K 마티랄Matilal에 따르면 수학자들이 말하는 영에 영향을 받아서 용수가 철학적으로 공을 말했다고 합니다이 말이 사실이라면9)연기와 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맥락에 따라 층위를 달리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잡아함경』 10(262)에는 여래께서는 양 극단을 떠나시어 중도를 설하셨다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如來離於二邊説於中道所謂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 모든 행들이 다 공이다모두 다 고요하여 얻을 수 없다於一切行皆空皆悉寂不可得”10)라고 나옵니다현장이 번역한 해심밀경에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은 무엇인가모든 법이 조건으로 생겨난다는 자성을 말한다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말하자면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내지 순일純一하고 거대한 고통의 무더기를 불러일으킨다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縁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縁行乃至招集純大苦蘊”11)위 두 경전에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이 똑같이 언급되지만 맥락은 다릅니다해심밀경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나열한 뒤 의타기성을 설명하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이 3(三性)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를 해석하는 것도 후대에 볼 수 있습니다청변은 의타기성의 오온도 공이라고 보는데 반해 호법은 의타기성의 오온은 공이 아니라고 봅니다그러나 3성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연기의 변용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법장(643-712)이 탐현기에서 60화엄의 광명각품光明覺品을 풀이하는 가운데 의타기성의 첫째는 환유幻有이고 둘째는 성공性空이다依他中一是幻有,二是性空”12)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이론적으로 발전된 연기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법장은 오교장에서 지엄의 수현기나 오십요문답을 이어받아 힘이 있는 공과 힘이 없는 공13)을 말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가 오히려 마음에 더 와 닿습니다.


似酒皆空술과 같이 모두 공하여

問甚禪宗선의 종지를 곰곰이 물어 보네

今日珍重오늘 다들 잘 계시게

明月清風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하구나



송나라 오경吳瓊이라는 분이 임종 전 술을 드신 뒤 읊은 시입니다.14)이 시를 읊은 뒤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염불한 뒤 아미타부처님이 마중하러 오셨다[佛來]라고 외치시고는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출가 전 늙음과 죽음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던 젊은이였습니다그것이 출가의 동기였으며 깨달음의 나무[道樹아래 일어났던 일은 늙음과 죽음의 해소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늙음은 자작도 타작도 아닙니다아예 자작이니 타작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에는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늙음에 대한 불교적 인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고은 시인이 나 혼자는 내가 아니다.” (<정릉에서>)라고 한 것이나 정현종 시인이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비스듬히>) 라고 표현한 것도 연기적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우리는 홀로인 나홀로인 남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그런 측면에서 연기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이웃이 적합할 것입니다.
















1) 아비달마구사론 阿毘達磨俱舍論』 분별세품分別世品 3〉 (CBETA, T29, no. 1558, p. 50, b14-18).범어는 張雪杉 편집본(http://www.mldc.cn/sanskritweb/resour/etext/abhk3.html)을 참조하였습니다.

阿毘達磨俱舍論9分別世品3〉:「經說云何緣已生法謂無明行至生老死或應不許二在未來是則壞前所立三際有說緣起是無為法以契經言如來出世若不出世如是緣起法性常住由如是意理則可然若由別意理則不然云何如是意云何為別意而說可然及不可然謂若意說如來出世若不出世行等常緣無明等起非緣餘法或復無緣故言常住如是意說理則可然若謂意說有別法體名為緣起湛然常住此別意說理則不然所以者何生起俱是有為相故非別常法為無常相可應正理又起必應依起者立此常住法彼無明等何相關預而說此法依彼而立為彼緣起又名緣起而謂[4]目常如是句義無相應理此中[5]緣起是何句義[6]剌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緣參是和合義嗢是上[7]升義鉢地界是有義有藉合[]升轉變成起由此有法至於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如是句義理不應然所以者何依一作者有二作用於前作用應有已言如有一人浴已方食無少行法有在起前先至於緣後時方起非無作者可有作用。」(CBETA, T29, no. 1558, p. 50, a28-b22) [4]】。[5]Pratityasamutpāda.[6]】【】【】【】【CB】*。[7]】【】【】【】*。[7-1]】【】【】【】*。[7-2]】【】【】【】*。

張雪杉 편집본(http://www.mldc.cn/sanskritweb/resour/etext/abhk3.html):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ḥ?

本言至行集生此句有何義

此中緣起是何句義

pratiḥ prāptyarthaḥ, etiḥ gatyarthaḥ|

若合此句所顯義謂諸行法至因及緣由聚集未有成有是義至行集生所顯

鉢刺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ḥ pratītyeti|

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緣

yadi sattārthaḥ,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ḥ|

參是和合義嗢是上升義鉢地界是有義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ḥ|

有藉合升轉變成起由此有法至於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

2) 권오민아비달마구사론 2, 446. “여기서 연기(緣起)’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뜻의 말인가발랄저(鉢剌底, prati)는 바로 이르다[, prāti]’의 뜻이고의지(醫地, iti)의 어근[즉 i]은 간다[, gati]’는 뜻인데앞의 접두사(즉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의 뜻이 전변하였다그래서 간다가 이르다는 뜻에 의해 연하여로 변하게 되었다그리고 삼(, sam)은 바로 화합의 뜻이고(, ut)은 상승의 뜻이며 발지(鉢地, pādi)의 어근(즉 pād)은 존재(, sattvā)의 뜻이다즉 존재가 화합과 상승의 뜻과 결합하여 일어나다[]’는 뜻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이 같은 사실에 따라 어떤 존재가 연에 이르러 화합 상승하여 일어나는 것이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

3) 구사론기俱舍論記』 해당 부분(CBETA, T41, no. 1821, p. 169, c17-p. 170, a6)에서는 由先助力을 由先鉢剌底助力”(T41.169c23)으로 풀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는 접두사나 조사이기보다 단순히 돕다는 뜻에 가까워 보입니다. “由先鉢剌底助力이 앞의 발랄저의 조력으로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조에 대해 이외 별다른 지식이 없는 상태인지라 여기에서는 접두사로 보는 견해를 따릅니다구사론기俱舍論記에는 (丁履反)”이라 하여 를 로 읽으라고 나옵니다.

俱舍論記9分別世品3〉:「此中緣起是何句義者大眾部問

[>]底至是緣起義者經部答或說一切有部答依聲明論有字緣字界其字界若有字緣來助即有種種義起鉢剌底是至義是字緣醫底界是行義是字界界是體義此醫底界由先鉢[>]底助力醫底界義轉變成緣若助訖成緣應言鉢[>](丁履反)[8](叐何反)此翻名緣所以然者諸緣勢力起果名行未至之時未成緣義若緣力至果或諸緣相至方得名緣故造字家於行界上加至助緣行成緣義參是和合義嗢是上[9]升義此二是字緣鉢地界是有義是字界鉢地有界藉前參唱合升字緣助力轉變成起若助訖成起應言參牟播陀此翻名起所以然者明諸有法要與緣合便得上升故名為起故造字家於有界上加合升緣有成起義故總結言由此有行法至於四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

如是句義至彼應先說故者聲論師難至緣已起故言如是句義理不應然此即總非所以者何依一作者實體有二作用前後別起可得說言於前作用應有已言彼聲論計諸法有體有用體即[1]逕留多位名為作者用即隨位不同名為作用一切作用必依作者彼計作用同勝論師業句義離體別有指事別顯如有一人名為作者起二作用先澡浴已後時方食於前作用可說已言若有少行法有在起前可得說言先至於緣後時方起既無行法有在起前 先至緣已後時方起如何得說至緣已起 言起前者現在名起前謂未來依法行世未來名前 或起前者在起前故[2]先已至於緣名為起前皆表未來非無作者法體可有作用以彼作用必依體故故說頌破言至緣[3]之行若在起先未來法體而非有故不應道理若行至緣與起俱時便壞己[4]於彼應先說至緣[5]後方說起不應說俱聲論經部俱說過未無體故以非有故破彼經部若以此頌破說一切有部聲論即以己宗義破。」(CBETA, T41, no. 1821, p. 169, c17-p. 170, a28) [8]+(夭何反)【】。[9]下同[1]〕-【】。[2]】。[3]】。[4]〕-【】。[5]後方說起方說起起】。

4) 구사론에는 연기를 찰나Kṣaṇika, 연박Sāṃbaṃdhika, 분위Āvasthika, 원속Prākarṣika 이 네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세 번째 분위가 전통적인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에 의한 12연기의 이해입니다阿毘達磨俱舍論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剎那二者連縛三者分位四者遠續。」(T29,48c8-10)

阿毘達磨俱舍論9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12]剎那二者[13]連縛三者[14]分位四者[15]遠續云何剎那謂剎那頃由貪行殺具十二支癡謂無明思即是行於諸境事了別名識識俱三蘊總稱名色住名色根說為六處六處對餘和合有觸領觸名受貪即是愛與此相應諸纏名取所起身語二業名有如是諸法起即名生熟變名老滅壞名死復有說者剎那連縛如品類足俱遍有為[16]十二支位所有五蘊皆分位攝即此懸遠相續無始說名遠續。」(CBETA, T29, no. 1558, p. 48, c8-18) [12]Kṣaṇika.[13]Sāṃbaṃdhika.[14]Āvasthika.[15]Prākarṣika.[16]十二二十】。

5) 雜阿含經』 12二八八(CBETA, T02, no. 99, p. 81, a9-c3) ; S. 12. 67. Naḷakalāpiya.

尊者舍利弗問尊者摩訶拘絺羅:「云何尊者摩訶拘絺羅有老不?」 答言:「。」 尊者舍利弗復問: 「有死不?」 答言:「。」 復問:「云何老死自作耶為他作耶為自他作耶為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尊者舍利弗老死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亦非非自他作無因作然彼生緣故有老死。」

6)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잡아함경 권10(262)이나 현장이 번역한 연기경縁起經에는 12지 연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이와 관련하여서는 12지 연기형식에 관하여(불교학리뷰』 3(2008))를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7) 雜阿含經』 14三四三(T2,93b25-94b1) ; S. 12. 25. Bhūmija.

雜阿含經14:「雜阿含經卷第十四

宋天竺三藏求那跋陀羅譯

[6]三四三

如是我聞

一時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爾時尊者浮彌比丘住耆闍崛山

有眾多外道出家詣尊者浮彌所共相問訊慶慰共相問訊慶慰已退坐一面語尊者浮彌言:「欲有所問寧有閑暇見答[7]與不?」

尊者浮彌語諸外道出家:「隨汝所問當為汝說。」

諸外道出家問尊者浮彌:「苦樂自作耶?」

尊者浮彌答言:「諸外道出家說苦樂自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他作耶?」

答言:「苦樂他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自他作耶?」

答言:「苦樂自他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苦樂非自非他無因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諸外道出家復問:「云何尊者浮彌苦樂自作耶說言無記苦樂他作耶說言無記苦樂自他作耶說言無記苦樂非自非他無因作耶說言無記今沙門瞿曇說苦樂云何生?」

尊者浮彌答言:「諸外道出家世尊說苦樂從緣起生。」

諸外道出家聞尊者浮彌所說心不歡喜呵責而去

爾時尊者舍利弗去尊者浮彌不遠坐一樹下

爾時尊者浮彌知諸外道出家去已往詣尊者舍利弗所到已與舍利弗面相慶慰慶慰已以彼諸外道出家所問事具白尊者舍利弗:「我作此答得不謗毀世尊如說說不如法說不為是隨順法行法得無為餘因法論者來難詰呵責不?」

尊者舍利弗言:「尊者浮彌汝之所說實如佛說不謗如來如說說如法說法行法說不為餘因論義者來難詰呵責所以者何世尊說苦樂從緣起生故尊者浮彌彼諸沙門婆羅門所問苦樂自作者彼亦從因起生言不從緣起生者無有是處苦樂他作自他作[>]自非他無[>]作說者彼亦從緣起生若言不從緣生者無有是處尊者浮彌彼沙門婆羅門所說苦樂自作者亦緣觸生若言不從觸生者無有是處苦樂他作自他作非自非他無因作者彼亦緣觸生若言不緣觸生者無有是處。」

爾時尊者阿難去舍利弗不遠坐一樹下聞尊者舍利弗與尊者浮彌所論說事聞已從座起往詣佛所稽首佛足退住一面以尊者浮彌與尊者舍利弗共論說一一具白世尊

佛告阿難:「善哉善哉阿難尊者舍利弗有來問者能隨時答善哉舍利弗有應時智故有來問者能隨時答若我聲聞有隨時問者應隨時答如舍利弗所說

阿難我昔時住王舍城山中仙人住處有諸外道出家以如是義如是句如是味來問於我我為斯等以如是義如是句如是味而為記說如尊者舍利弗所說

阿難若諸沙門婆羅門苦樂自作我即往彼問言:『汝實作是說苦樂自作耶?』彼答我言:『如是。』我即問言:『汝能堅執持此義言是真實餘則愚者我所不許所以者何我說苦樂所起異於此。』彼若問我:『云何瞿曇所說苦樂所起異者?』我當答言:『從其緣起而生苦樂如是說[1]苦他作自他作非自非他無因作者我亦往彼所說如上。』」

阿難白佛:「如世尊所說義我已解知有生故有老死非緣餘有生故有老死乃至無明故有行非緣餘有無明故有行無明滅則行滅乃至生滅則老苦滅如是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尊者阿難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CBETA, T02, no. 99, p. 93, b22-p. 94, b1)

[6]S. 12. 25. Bhūmija.浮彌)。[7]】【】*。[1]+()【】【】【】。

잡아함경』 12(302)에는 아지라가섭이 부처님에게 (고락이 아닌와 관련하여 자작과 타작을 물었을 때 부처님이 무기 無記 avyākṛtam하였다고 나옵니다雜阿含經12 () ; S. 12. 17. Acela.雜阿含經12:「[1]

如是我聞

一時佛住王舍城耆闍崛山

爾時世尊晨朝著衣持鉢出耆闍崛山入王舍城乞食

[2]阿支羅迦葉為營小事出王舍城向耆闍崛山遙見世尊見已詣佛所白佛言:「瞿曇欲有所問寧有閑暇見答[3]與不?」

佛告迦葉:「今非論時我今入城乞食來還則是其時當為汝說。」

第二亦如是說第三復問:「瞿曇何為我作留難瞿曇云何有異我今欲有所問為我解說。」

佛告阿支羅迦葉:「隨汝所問。」

阿支羅迦葉白佛言:「云何瞿曇苦自作耶?」

佛告迦葉:「苦自作者此是無記。」

迦葉復問:「云何瞿曇苦他作耶?」

佛告迦葉:「苦他作者此亦無記。」

迦葉復問:「苦自他作耶?」

佛告迦葉:「苦自他作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瞿曇苦非自非他無因作耶?」

佛告迦葉:「苦非自非[4]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無因作者瞿曇所問苦自作耶?」答言:「無記。」「他作耶自他作耶非自非他無因作耶?」答言:「無記。」「今無此苦耶?」

佛告迦葉:「非無此苦然有此苦。」

迦葉白佛言:「善哉瞿曇說有此苦為我說法令我知苦見苦。」

佛告迦葉:「若受即自受者我應說苦自作[5]若他受他即受者是則他作若受自受他受復與苦者如是者自他作我亦不說若不因自他無因而生苦者我亦不說離此諸邊說其中道如來說法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謂緣無明行乃至純大苦聚集無明滅則行滅乃至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阿支羅迦葉遠塵離垢得法眼淨

阿支羅迦葉見法得法知法入法度諸狐疑不由他知不因他度於正法律心得無畏合掌白佛言:「世尊我今已度我從今日歸依佛歸依法歸依僧盡壽作優婆塞證知我。」

阿支羅迦葉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

阿支羅迦葉辭世尊去不久為護犢牸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

爾時世尊入城乞食有眾多比丘亦入王舍城乞食聞有傳說:「阿支羅迦葉從世尊聞法辭去不久為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諸比丘乞食已還出舉衣鉢洗足詣世尊所稽首禮足退坐一面白佛言:「世尊我今晨朝眾多比丘入城乞食聞阿支羅迦葉從世尊聞法辭去不久為護犢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世尊彼生何趣何處受生彼何所得?」

佛告諸比丘:「彼已見法知法次法不受於法已般涅槃汝等當往供養其身。」

爾時世尊為阿支羅迦葉[6]受第一記。」(CBETA, T02, no. 99, p. 86, a4-b23) [1]S. 12. 17. Acela.[2]Acela-Kassapa.[3]】【】。[4]+(無因作者)【】。[5]】【】【】。[6]】*。

8) 남수영 옮김나카무라 하지메 지음용수의 중관사상(226)을 보면 용수 이전에도 대승불교에서는 공을 설하고 있었는데 이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용수가 중론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 중론中論. T30.33b: “衆因縁生法 我説即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未曾有一法 不從因縁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中論1觀因緣品1〉:「 

[16]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CBETA, T30, no. 1564, p. 1, b14-17)

[16][ Aniro ham >Anirodham ] anutpādam anucchedam aśāśvataṃ, Anekārtham anānārtham anāgamam anirgamam Yaḥ [ pratītyasamu pādam > pratītyasamutpādam ] [ prapañco paśamam > prapañcopaśamam ] śivaṃ, Deśayāmāsa [ sambuddhast ṃvande > sambuddhas taṃ vande ] vadatāṃ varaṃ.不生. Anutpāda, 不滅. Anirodha, 不常. [ Asas ata > Aśāśvata ], 不斷. [ Anucc eda > Anuccheda ], 不一. Anekārtha, 不異. [ Anānāstha > Anānārtha ], 不來. Anāgama, 不出. Anirgama, 因緣. Pratītyasamutpāda, 戲論. [ Prapoñca > Prapañca ], 諸說中諸說法者中. Vadatāṃ.

中論1觀因緣品1〉:「 

[2]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CBETA, T30, no. 1564, p. 2, b6-7)

[2]第一偈. Na svato nāpi parato na dvābhyaṃ nāpy ahetutaḥ, Utpannā jātu vidyante bhāvāḥ kvacana ke cana.從自. Svataḥ, 從他, Parataḥ, 從自他共. Dvābhāṃ, 無因. Ahetu.

9) 불교의 공성空性에 관한 논의가 인도 수학에 영향을 미쳐 영이 나왔다는 견해 또한 있습니다.

10) 雜阿含經10二六二(CBETA, T02, no. 99, p. 67, a4-16) ; S. 22. 90. Channa.

11) 解深密經』 (No. 0676 玄奘譯 ) T16.693a 解深密經2一切法相品4〉:「「謂諸法相略有三種何等為三一者遍計所執相二者依他起相三者圓成實相云何諸法遍計所執相謂一切法[4]名假安立自性差別乃至為令隨起言說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緣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緣行乃至招集純大苦蘊云何諸法圓成實相謂一切法平等真如於此真如諸菩薩眾勇猛精進為因緣故如理作意無倒思惟為因緣故乃能通達於此通達漸漸修[5]乃至無上正等菩提方證圓滿。」(CBETA, T16, no. 676, p. 693, a15-25)[4]名假假名】。[5]】【】【】【】。

12) 華嚴經探玄記』 (No. 1733 法藏述 ) T35.175b 華嚴經探玄記4如來光明覺品5〉:「一切有無法了達非有無者有三門一約三性二約三無性三約雙融初中復二初別後總別中三性各有二義所執中一是情有二是理無依他中一是幻有二是性空圓成中一離相二是體實此上三一一各融不二為一性故總者所執是無圓成是有依他是俱以真妄該攝[5]二相盡故無二也二約三無性者初無相觀境中所執有無皆虛故又無有有無故俱離也依他無生性中無幻有有性空不二故俱離也圓成無性中無二性有真理亦不二故俱絕也三約雙融者三有三無圓融無礙二相絕故俱離也。」(CBETA, T35, no. 1733, p. 175, a27-b10) [5]】。

13) 華嚴一乘教義分齊章4:「空有力不待緣空有力待緣空無力待緣有有力不待緣有有力待緣有無力待緣。」(CBETA, T45, no. 1866, p. 502, a3-5) ;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3十地品22〉:「有力不待外緣所以有力不待緣(CBETA, T35, no. 1732, p. 66, a23-24), 華嚴五十要問答2:「空有力不待緣。」(CBETA, T45, no. 1869, p. 531, b10)

14) 악인왕생惡人往生을 말할 때 출가하였다가 환속한 뒤 도축 일로 생계를 꾸려간 오경吳瓊이라는 분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용서증광정토문龍舒增廣淨土文』 5, 왕생집往生集』 2에 나옵니다.그 외 정토신종淨土晨鐘정토전서淨土全書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여래향如來香』 그리고 성총(性聰)의 정토보서淨土寶書에도 인용되어 나옵니다.

龍舒增廣淨土文5:「宋臨安府仁和吳瓊

吳瓊先為僧後還俗前後兩娶生二子屠沽無所不為常與人作厨子每殺鷄鴨等物命以手持起叫云阿彌陀佛子好脫此身去遂殺之連稱佛數聲每切肉時一面切一面念阿彌陀佛常念佛不輟教村中人念經修懺及勸人念阿彌陀佛後眼上生瘤如鷄子大乃憂怖造一草菴分散其妻子晝夜念佛修懺紹興二十三年秋告村中人云瓊來日戌時去也人皆笑之將用椀鉢鍋子盡與人次日晚報諸道友行婆云瓊去時將至盡來與瓊高聲念佛相助將布衫當酒飲了即寫頌云似酒皆空問甚禪宗今日珍重明月清風端坐合掌念佛叫一聲佛來即化去。」(CBETA, T47, no. 1970, p. 269, a1-14)

 


연기와 공에 관하여

 

1. 들어가며

 

불교학술원 소식지 뒤쪽에 실려읽는 이들에게 청량감을 주어야 할 터인데 이런 저런 주제를 끄적거리다가 핵심적일지는 몰라도 아주 무거운 개념 또는 주제를 쓰게 되었습니다연기와 공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어 굳이 이런 곳에서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개인적으로 접하게 된 지식이 비록 알 사람은 다 아는 종류의 것일지라도 혹시라도 처음 보는 이들이 있다면 공유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2. 연기

 

연기는 무엇일까요?

 

 

세친이 짓고 현장이 옮긴 『아미달마구사론』1)에서는 연기를 뜻하는 범어Pratītyasamutpāda를 음역한 뒤 각 구절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는 어근는 접두사를 뜻한다는 권 오민 번역2)을 참조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此中縁起是何句義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

여기에서 연기라는 어구의 뜻은 무엇인가?

鉢剌底醫底界是

pratiḥ prāptyartha, etiḥ gatyartha|

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pratītyeti|

 

“발랄저[鉢剌底 prati]”는 “이르다[]”는 뜻이다“의저[醫底 iti]”의 어근[i]은 “가다[]”는 뜻이다앞의 접두사[3),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i]의 뜻이 바뀐다그러므로  “가다”가 “이르다”에 의하여 (“가다”라는 의미가“연(=조건으로 하여)”으로 바뀐다.

和合上升鉢地界是。‘’·‘轉變成’。

yadi sattārtha,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

“삼[參 sam]”은 “화합和合”의 뜻이다“올[嗢 ut]”은 “상승上升”의 뜻이다.“발지[鉢地 pāda]”의 어근[pad]은 “있다[]”는 뜻이다“있다[]”는 “화합和合”과 “상승上升”에 의하여 (“있다”라는 의미가“기(일어남)”로 바뀐다.

由此有法和合’‘’‘’。縁起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

이러한 유법(有法)으로 말미암아 ‘연’에 대하여 ‘이르고’ 나서  ‘화합하고’ ‘위로 [=上升]’ 일어남[]이 ‘연기’의 뜻이다.

 

위는 연기緣起4)로 번역된 범어에 대한 어원분석(etymology)입니다에서는 “가다”라는에서는 “있다”라는 뜻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가다”와 “있다”가 결합하고 변용하여 연기라는 의미를 이룬다는 것입니다.이는 “있음being”과 “됨becoming”이라는 뜻을 포괄하는 존재(有 bhava)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연기의 용어 분석과 관련해서는 현장의 한역 『구사론』이 범본 『구사론』보다 좀 더 자세합니다.

 

 

 “연기”라는 용어는 현재 번역 없이 쓰이고 있으나 “조건적 생기”“조건 속에서의 생기”“조건적 발생” 등으로 옮긴 것들이 보입니다영어로는 “dependent originationdependent arisingconditioned genesisdependent co-arisinginterdependent arising” 등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연기라는 용어에 관한 짤막한 소개입니다.

 

다음으로는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잡아함경』 권12(288)와 권14(343)를 보고자 합니다.

 

“늙음이 있는가?

“있다.

“죽음이 있는가?

“있다.

“늙음과 죽음이 스스로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아니면 다른 것이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아니면 그 둘 다인가아니면 그 둘 어느 것도 짓지 않으니 원인이 없이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스스로 짓지도 않고 다른 것이 짓지도 않는다. [...] 삶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5)

 

 

위는 사리불舍利弗이 묻고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가 대답하는 대화를 조금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스스로 짓는 것은 자작自作다른 것이 짓는 것은 타작他作입니다늙음은 (1) ‘자작’도 아니고, (2) ‘타작’도 아니고, (3) ‘자작이면서 또한 타작인 것’도 아니고, (4)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니 원인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라는 사구부정四句否定이 여기에 쓰이고 있습니다연기에 있어서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라는 정의는 무척 중요해 보입니다이 사구부정에 이어 답처럼 제시된 것이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가 있다.”는 것입니다명색에 이어 식까지 10지 연기6)가 제시되고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있게 됩니다.

 

 자작과 타작과 관련해서는 『잡아함경』 권14(343)7)도 주목됩니다고락樂이 자작인지 타작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無記]라고 나옵니다부미浮彌존자나 사리불舍利弗존자가 그렇게 말한 것을 아난阿難존자가 전하자 부처님이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자작이나 타작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노사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고락과 관련된 것이고12지 연기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만 “고락은 연기로부터 생긴다.苦樂從緣起生”라고 하여 연기緣起로서 대답하고 있는 점은 같습니다.

 

3. 

 

 

용수의 『중론』을 보면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이 하나의 논리 또는 도식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8)B.K 마티랄Matilal에 따르면 수학자들이 말하는 영에 영향을 받아서 용수가 철학적으로 공을 말했다고 합니다이 말이 사실이라면9)연기와 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맥락에 따라 층위를 달리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잡아함경』 권10(262)에는 “여래께서는 양 극단을 떠나시어 중도를 설하셨다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如來離於二邊説於中道所謂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 모든 행들이 다 공이다모두 다 고요하여 얻을 수 없다於一切行皆空皆悉寂不可得。”10)라고 나옵니다현장이 번역한 『해심밀경』에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은 무엇인가모든 법이 조건으로 생겨난다는 자성을 말한다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말하자면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내지 순일純一하고 거대한 고통의 무더기를 불러일으킨다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縁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縁行乃至招集純大苦蘊。”11)위 두 경전에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이 똑같이 언급되지만 맥락은 다릅니다『해심밀경』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나열한 뒤 의타기성을 설명하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이 3(三性)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를 해석하는 것도 후대에 볼 수 있습니다청변은 의타기성의 오온도 공이라고 보는데 반해 호법은 의타기성의 오온은 공이 아니라고 봅니다그러나 3성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연기의 변용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법장(643-712)이 『탐현기』에서 60화엄의 광명각품光明覺品을 풀이하는 가운데 “의타기성의 첫째는 환유幻有이고 둘째는 성공性空이다依他中一是幻有,二是性空。”12)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이론적으로 발전된 연기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법장은 『오교장』에서 지엄의 『수현기』나 『오십요문답』을 이어받아 힘이 있는 공과 힘이 없는 공13)을 말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가 오히려 마음에 더 와 닿습니다.

 

似酒皆空。술과 같이 모두 공하여

問甚禪宗。선의 종지를 곰곰이 물어 보네

 

今日珍重。오늘 다들 잘 계시게

明月清風。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하구나

 

송나라 오경吳瓊이라는 분이 임종 전 술을 드신 뒤 읊은 시입니다.14)이 시를 읊은 뒤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염불한 뒤 아미타부처님이 마중하러 오셨다[佛來]라고 외치시고는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4. 나오며

 

부처님은 출가 전 늙음과 죽음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던 젊은이였습니다그것이 출가의 동기였으며 깨달음의 나무[道樹아래 일어났던 일은 늙음과 죽음의 해소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늙음은 자작도 타작도 아닙니다아예 자작이니 타작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에는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늙음에 대한 불교적 인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고은 시인이 “나 혼자는 내가 아니다.” (<정릉에서>)라고 한 것이나 정현종 시인이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비스듬히>) 라고 표현한 것도 연기적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우리는 홀로인 나홀로인 남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그런 측면에서 연기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이웃”이 적합할 것입니다.




연기와 공에 관하여

1. 들어가며

불교학술원 소식지 뒤쪽에 실려, 읽는 이들에게 청량감을 주어야 할 터인데 이런 저런 주제를 끄적거리다가 핵심적일지는 몰라도 아주 무거운 개념 또는 주제를 쓰게 되었습니다. 연기와 공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어 굳이 이런 곳에서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접하게 된 지식이 비록 알 사람은 다 아는 종류의 것일지라도 혹시라도 처음 보는 이들이 있다면 공유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2. 연기

연기는 무엇일까요?

세친이 짓고 현장이 옮긴 아미달마구사론1) 에서는 연기를 뜻하는 범어 Pratītyasamutpāda를 음역한 뒤 각 구절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는 어근, 는 접두사를 뜻한다는 권 오민 번역2) 을 참조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此中縁起是何句義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ḥ?

여기에서 연기라는 어구의 뜻은 무엇인가?

鉢剌底是醫底界是

pratiḥ prāptyarthaḥ, etiḥ gatyarthaḥ|

由先助力, 界義轉變故行由至, 轉變成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ḥ pratītyeti|

발랄저[鉢剌底 prati]”이르다[]”는 뜻이다. “의저[醫底 iti]”의 어근[, i]가다[]”는 뜻이다. 앞의 접두사[3) ,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 i]의 뜻이 바뀐다. 그러므로 가다이르다에 의하여 (“가다라는 의미가) “(=조건으로 하여)”으로 바뀐다.

參是和合嗢是上升鉢地界是’·‘’, 轉變成

yadi sattārthaḥ,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ḥ|

[sam]”화합和合의 뜻이다. “[ut]”상승上升의 뜻이다. “발지[鉢地 pāda]”의 어근[, pad]있다[]”는 뜻이다. “있다[]”화합和合상승上升에 의하여 (“있다라는 의미가) “(: 일어남)”로 바뀐다.

由此有法, ‘, ‘和合’‘’‘縁起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ḥ|

이러한 유법(有法)으로 말미암아 에 대하여 이르고나서 화합하고’ ‘위로 [=上升]’ 일어남[]연기의 뜻이다.

위는 연기緣起4) 로 번역된 범어에 대한 어원분석(etymology)입니다. 에서는 가다라는, 에서는 있다라는 뜻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다있다가 결합하고 변용하여 연기라는 의미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는 있음being”becoming”이라는 뜻을 포괄하는 존재(bhava)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연기의 용어 분석과 관련해서는 현장의 한역 구사론이 범본 구사론보다 좀 더 자세합니다.

연기라는 용어는 현재 번역 없이 쓰이고 있으나 조건적 생기”, “조건 속에서의 생기”, “조건적 발생등으로 옮긴 것들이 보입니다. 영어로는 “dependent origination”, “dependent arising”, “conditioned genesis”, “dependent co-arising”, “interdependent arising” 등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연기라는 용어에 관한 짤막한 소개입니다.

다음으로는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잡아함경12(288)와 권14(343)를 보고자 합니다.

늙음이 있는가?”

있다.”

죽음이 있는가?”

있다.”

늙음과 죽음이 스스로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이 지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아니면 그 둘 어느 것도 짓지 않으니 원인이 없이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인가?”

스스로 짓지도 않고 다른 것이 짓지도 않는다. [...] 삶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5)

위는 사리불舍利弗이 묻고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가 대답하는 대화를 조금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 스스로 짓는 것은 자작自作, 다른 것이 짓는 것은 타작他作입니다. 늙음은 (1) ‘자작도 아니고, (2) ‘타작도 아니고, (3) ‘자작이면서 또한 타작인 것도 아니고, (4)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니 원인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라는 사구부정四句否定이 여기에 쓰이고 있습니다. 연기에 있어서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라는 정의는 무척 중요해 보입니다. 이 사구부정에 이어 답처럼 제시된 것이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명색에 이어 식까지 10지 연기6) 가 제시되고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 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있게 됩니다.

자작과 타작과 관련해서는 잡아함경14(343)7) 도 주목됩니다. 고락苦樂이 자작인지 타작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無記]라고 나옵니다. 부미浮彌존자나 사리불舍利弗존자가 그렇게 말한 것을 아난阿難존자가 전하자 부처님이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 자작이나 타작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사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고락과 관련된 것이고 12지 연기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만 고락은 연기로부터 생긴다.苦樂從緣起生라고 하여 연기緣起로서 대답하고 있는 점은 같습니다.

3.

용수의 중론을 보면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이 하나의 논리 또는 도식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8) B.K 마티랄Matilal에 따르면 수학자들이 말하는 영에 영향을 받아서 용수가 철학적으로 공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9) 연기와 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맥락에 따라 층위를 달리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잡아함경10(262)에는 여래께서는 양 극단을 떠나시어 중도를 설하셨다. 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如來離於二邊説於中道所謂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모든 행들이 다 공이다. 모두 다 고요하여 얻을 수 없다. 於一切行皆空皆悉寂不可得”10) 라고 나옵니다. 현장이 번역한 해심밀경에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은 무엇인가? 모든 법이 조건으로 생겨난다는 자성을 말한다. 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말하자면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내지 순일純一하고 거대한 고통의 무더기를 불러일으킨다. 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縁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縁行乃至招集純大苦蘊”11) 위 두 경전에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이 똑같이 언급되지만 맥락은 다릅니다. 해심밀경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나열한 뒤 의타기성을 설명하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3(三性)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반야심경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를 해석하는 것도 후대에 볼 수 있습니다. 청변은 의타기성의 오온도 공이라고 보는데 반해 호법은 의타기성의 오온은 공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3성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연기의 변용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장(643-712)탐현기에서 60화엄의 광명각품光明覺品을 풀이하는 가운데 의타기성의 첫째는 환유幻有이고 둘째는 성공性空이다. 依他中, 一是幻有, 二是性空”12)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이론적으로 발전된 연기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지엄의 수현기오십요문답을 이어받아 힘이 있는 공과 힘이 없는 공13) 을 말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가 오히려 마음에 더 와 닿습니다.

似酒皆空술과 같이 모두 공하여

問甚禪宗선의 종지를 곰곰이 물어 보네

今日珍重오늘 다들 잘 계시게

明月清風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하구나

송나라 오경吳瓊이라는 분이 임종 전 술을 드신 뒤 읊은 시입니다.14) 이 시를 읊은 뒤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염불한 뒤 아미타부처님이 마중하러 오셨다[佛來]라고 외치시고는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4. 나오며

부처님은 출가 전 늙음과 죽음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것이 출가의 동기였으며 깨달음의 나무[道樹] 아래 일어났던 일은 늙음과 죽음의 해소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늙음은 자작도 타작도 아닙니다. 아예 자작이니 타작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에는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늙음에 대한 불교적 인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고은 시인이 나 혼자는 내가 아니다.” (<정릉에서>)라고 한 것이나 정현종 시인이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비스듬히>) 라고 표현한 것도 연기적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인 나, 홀로인 남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연기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이웃이 적합할 것입니다.

1) 아비달마구사론 阿毘達磨俱舍論9 분별세품分別世品 3(CBETA, T29, no. 1558, p. 50, b14-18). 범어는 張雪杉 편집본(http://www.mldc.cn/sanskritweb/resour/etext/abhk3.html)을 참조하였습니다.

阿毘達磨俱舍論9分別世品3〉:「經說云何緣已生法謂無明行至生老死或應不許二在未來是則壞前所立三際有說緣起是無為法以契經言如來出世若不出世如是緣起法性常住由如是意理則可然若由別意理則不然云何如是意云何為別意而說可然及不可然謂若意說如來出世若不出世行等常緣無明等起非緣餘法或復無緣故言常住如是意說理則可然若謂意說有別法體名為緣起湛然常住此別意說理則不然所以者何生起俱是有為相故非別常法為無常相可應正理又起必應依起者立此常住法彼無明等何相關預而說此法依彼而立為彼緣起又名緣起而謂[4]目常如是句義無相應理此中[5]緣起是何句義[6]剌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緣參是和合義嗢是上[7]升義鉢地界是有義有藉合[]升轉變成起由此有法至於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如是句義理不應然所以者何依一作者有二作用於前作用應有已言如有一人浴已方食無少行法有在起前先至於緣後時方起非無作者可有作用。」(CBETA, T29, no. 1558, p. 50, a28-b22) [4]】。[5]Pratityasamutpāda.[6]】【】【】【】【CB】*。[7]】【】【】【】*。[7-1]】【】【】【】*。[7-2]】【】【】【】*。

張雪杉 편집본(http://www.mldc.cn/sanskritweb/resour/etext/abhk3.html):

atha pratītyasamutpād iti kaḥ padārthaḥ?

本言至行集生此句有何義

此中緣起是何句義

pratiḥ prāptyarthaḥ, etiḥ gatyarthaḥ|

若合此句所顯義謂諸行法至因及緣由聚集未有成有是義至行集生所顯

鉢刺底是至義醫底界是行義

upasargavaśena dhātvarthapariṇāmāt prāpyeti yo’rthaḥ so’rthaḥ pratītyeti|

由先助力界義轉變故行由至轉變成緣

yadi sattārthaḥ, samutpūrvaḥ prādurbhāvārthaḥ|

參是和合義嗢是上升義鉢地界是有義

tena pratyayaṃ prāpya samudbhavaḥ pratītyasamutpādaḥ|

有藉合升轉變成起由此有法至於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

2) 권오민, 아비달마구사론 2, 446. “여기서 연기(緣起)’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뜻의 말인가? 발랄저(鉢剌底, prati)는 바로 이르다[, prāti]’의 뜻이고, 의지(醫地, iti)의 어근[, i]간다[, gati]’는 뜻인데, 앞의 접두사(prati)의 힘에 의해 어근의 뜻이 전변하였다. 그래서 간다이르다는 뜻에 의해 연하여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삼(, sam)은 바로 화합의 뜻이고, (, ut)은 상승의 뜻이며 발지(鉢地, pādi)의 어근(pād)은 존재(, sattvā)의 뜻이다. 즉 존재가 화합과 상승의 뜻과 결합하여 일어나다[]’는 뜻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어떤 존재가 연에 이르러 화합 상승하여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

3) 구사론기俱舍論記9 해당 부분(CBETA, T41, no. 1821, p. 169, c17-p. 170, a6)에서는 由先助力由先鉢剌底助力”(T41.169c23)으로 풀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는 접두사나 조사이기보다 단순히 돕다는 뜻에 가까워 보입니다. “由先鉢剌底助力앞의 발랄저의 조력으로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에 대해 이외 별다른 지식이 없는 상태인지라 여기에서는 접두사로 보는 견해를 따릅니다. 구사론기俱舍論記에는 (丁履反)”이라 하여 로 읽으라고 나옵니다.

俱舍論記9分別世品3〉:「此中緣起是何句義者大眾部問

[>]底至是緣起義者經部答或說一切有部答依聲明論有字緣字界其字界若有字緣來助即有種種義起鉢剌底是至義是字緣醫底界是行義是字界界是體義此醫底界由先鉢[>]底助力醫底界義轉變成緣若助訖成緣應言鉢[>](丁履反)[8](叐何反)此翻名緣所以然者諸緣勢力起果名行未至之時未成緣義若緣力至果或諸緣相至方得名緣故造字家於行界上加至助緣行成緣義參是和合義嗢是上[9]升義此二是字緣鉢地界是有義是字界鉢地有界藉前參唱合升字緣助力轉變成起若助訖成起應言參牟播陀此翻名起所以然者明諸有法要與緣合便得上升故名為起故造字家於有界上加合升緣有成起義故總結言由此有行法至於四緣已和合升起是緣起義

如是句義至彼應先說故者聲論師難至緣已起故言如是句義理不應然此即總非所以者何依一作者實體有二作用前後別起可得說言於前作用應有已言彼聲論計諸法有體有用體即[1]逕留多位名為作者用即隨位不同名為作用一切作用必依作者彼計作用同勝論師業句義離體別有指事別顯如有一人名為作者起二作用先澡浴已後時方食於前作用可說已言若有少行法有在起前可得說言先至於緣後時方起既無行法有在起前 先至緣已後時方起如何得說至緣已起 言起前者現在名起前謂未來依法行世未來名前 或起前者在起前故[2]先已至於緣名為起前皆表未來非無作者法體可有作用以彼作用必依體故故說頌破言至緣[3]之行若在起先未來法體而非有故不應道理若行至緣與起俱時便壞己[4]於彼應先說至緣[5]後方說起不應說俱聲論經部俱說過未無體故以非有故破彼經部若以此頌破說一切有部聲論即以己宗義破。」(CBETA, T41, no. 1821, p. 169, c17-p. 170, a28) [8]+(夭何反)【】。[9]下同[1]〕-【】。[2]】。[3]】。[4]〕-【】。[5]後方說起方說起起】。

4) 구사론에는 연기를 찰나Kṣaṇika, 연박Sāṃbaṃdhika, 분위Āvasthika, 원속Prākarṣika 이 네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세 번째 분위가 전통적인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에 의한 12연기의 이해입니다. 阿毘達磨俱舍論9 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剎那二者連縛三者分位四者遠續。」(T29,48c8-10)

阿毘達磨俱舍論9分別世品3〉:「又諸緣起差別說四一者[12]剎那二者[13]連縛三者[14]分位四者[15]遠續云何剎那謂剎那頃由貪行殺具十二支癡謂無明思即是行於諸境事了別名識識俱三蘊總稱名色住名色根說為六處六處對餘和合有觸領觸名受貪即是愛與此相應諸纏名取所起身語二業名有如是諸法起即名生熟變名老滅壞名死復有說者剎那連縛如品類足俱遍有為[16]十二支位所有五蘊皆分位攝即此懸遠相續無始說名遠續。」(CBETA, T29, no. 1558, p. 48, c8-18) [12]Kṣaṇika.[13]Sāṃbaṃdhika.[14]Āvasthika.[15]Prākarṣika.[16]十二二十】。

5) 雜阿含經12二八八(CBETA, T02, no. 99, p. 81, a9-c3) ; S. 12. 67. Naḷakalāpiya.

尊者舍利弗問尊者摩訶拘絺羅:「云何尊者摩訶拘絺羅有老不?」 答言:「。」 尊者舍利弗復問: 「有死不?」 答言:「。」 復問:「云何老死自作耶為他作耶為自他作耶為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尊者舍利弗老死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亦非非自他作無因作然彼生緣故有老死。」

6)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잡아함경 권10(262)이나 현장이 번역한 연기경縁起經에는 12지 연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12지 연기형식에 관하여(불교학리뷰3(2008))를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7) 雜阿含經14三四三(T2,93b25-94b1) ; S. 12. 25. Bhūmija.

雜阿含經14:「雜阿含經卷第十四

宋天竺三藏求那跋陀羅譯

[6]三四三

如是我聞

一時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爾時尊者浮彌比丘住耆闍崛山

有眾多外道出家詣尊者浮彌所共相問訊慶慰共相問訊慶慰已退坐一面語尊者浮彌言:「欲有所問寧有閑暇見答[7]與不?」

尊者浮彌語諸外道出家:「隨汝所問當為汝說。」

諸外道出家問尊者浮彌:「苦樂自作耶?」

尊者浮彌答言:「諸外道出家說苦樂自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他作耶?」

答言:「苦樂他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自他作耶?」

答言:「苦樂自他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復問:「苦樂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苦樂非自非他無因作者世尊說言:『此是無記。』」

諸外道出家復問:「云何尊者浮彌苦樂自作耶說言無記苦樂他作耶說言無記苦樂自他作耶說言無記苦樂非自非他無因作耶說言無記今沙門瞿曇說苦樂云何生?」

尊者浮彌答言:「諸外道出家世尊說苦樂從緣起生。」

諸外道出家聞尊者浮彌所說心不歡喜呵責而去

爾時尊者舍利弗去尊者浮彌不遠坐一樹下

爾時尊者浮彌知諸外道出家去已往詣尊者舍利弗所到已與舍利弗面相慶慰慶慰已以彼諸外道出家所問事具白尊者舍利弗:「我作此答得不謗毀世尊如說說不如法說不為是隨順法行法得無為餘因法論者來難詰呵責不?」

尊者舍利弗言:「尊者浮彌汝之所說實如佛說不謗如來如說說如法說法行法說不為餘因論義者來難詰呵責所以者何世尊說苦樂從緣起生故尊者浮彌彼諸沙門婆羅門所問苦樂自作者彼亦從因起生言不從緣起生者無有是處苦樂他作自他作[>]自非他無[>]作說者彼亦從緣起生若言不從緣生者無有是處尊者浮彌彼沙門婆羅門所說苦樂自作者亦緣觸生若言不從觸生者無有是處苦樂他作自他作非自非他無因作者彼亦緣觸生若言不緣觸生者無有是處。」

爾時尊者阿難去舍利弗不遠坐一樹下聞尊者舍利弗與尊者浮彌所論說事聞已從座起往詣佛所稽首佛足退住一面以尊者浮彌與尊者舍利弗共論說一一具白世尊

佛告阿難:「善哉善哉阿難尊者舍利弗有來問者能隨時答善哉舍利弗有應時智故有來問者能隨時答若我聲聞有隨時問者應隨時答如舍利弗所說

阿難我昔時住王舍城山中仙人住處有諸外道出家以如是義如是句如是味來問於我我為斯等以如是義如是句如是味而為記說如尊者舍利弗所說

阿難若諸沙門婆羅門苦樂自作我即往彼問言:『汝實作是說苦樂自作耶?』彼答我言:『如是。』我即問言:『汝能堅執持此義言是真實餘則愚者我所不許所以者何我說苦樂所起異於此。』彼若問我:『云何瞿曇所說苦樂所起異者?』我當答言:『從其緣起而生苦樂如是說[1]苦他作自他作非自非他無因作者我亦往彼所說如上。』」

阿難白佛:「如世尊所說義我已解知有生故有老死非緣餘有生故有老死乃至無明故有行非緣餘有無明故有行無明滅則行滅乃至生滅則老苦滅如是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尊者阿難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CBETA, T02, no. 99, p. 93, b22-p. 94, b1)

[6]S. 12. 25. Bhūmija.浮彌)。[7]】【】*。[1]+()【】【】【】。

잡아함경12(302)에는 아지라가섭이 부처님에게 (고락이 아닌) 와 관련하여 자작과 타작을 물었을 때 부처님이 무기 無記 avyākṛtam하였다고 나옵니다. 雜阿含經12 () ; S. 12. 17. Acela. 雜阿含經12:「[1]

如是我聞

一時佛住王舍城耆闍崛山

爾時世尊晨朝著衣持鉢出耆闍崛山入王舍城乞食

[2]阿支羅迦葉為營小事出王舍城向耆闍崛山遙見世尊見已詣佛所白佛言:「瞿曇欲有所問寧有閑暇見答[3]與不?」

佛告迦葉:「今非論時我今入城乞食來還則是其時當為汝說。」

第二亦如是說第三復問:「瞿曇何為我作留難瞿曇云何有異我今欲有所問為我解說。」

佛告阿支羅迦葉:「隨汝所問。」

阿支羅迦葉白佛言:「云何瞿曇苦自作耶?」

佛告迦葉:「苦自作者此是無記。」

迦葉復問:「云何瞿曇苦他作耶?」

佛告迦葉:「苦他作者此亦無記。」

迦葉復問:「苦自他作耶?」

佛告迦葉:「苦自他作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瞿曇苦非自非他無因作耶?」

佛告迦葉:「苦非自非[4]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無因作者瞿曇所問苦自作耶?」答言:「無記。」「他作耶自他作耶非自非他無因作耶?」答言:「無記。」「今無此苦耶?」

佛告迦葉:「非無此苦然有此苦。」

迦葉白佛言:「善哉瞿曇說有此苦為我說法令我知苦見苦。」

佛告迦葉:「若受即自受者我應說苦自作[5]若他受他即受者是則他作若受自受他受復與苦者如是者自他作我亦不說若不因自他無因而生苦者我亦不說離此諸邊說其中道如來說法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謂緣無明行乃至純大苦聚集無明滅則行滅乃至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阿支羅迦葉遠塵離垢得法眼淨

阿支羅迦葉見法得法知法入法度諸狐疑不由他知不因他度於正法律心得無畏合掌白佛言:「世尊我今已度我從今日歸依佛歸依法歸依僧盡壽作優婆塞證知我。」

阿支羅迦葉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

阿支羅迦葉辭世尊去不久為護犢牸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

爾時世尊入城乞食有眾多比丘亦入王舍城乞食聞有傳說:「阿支羅迦葉從世尊聞法辭去不久為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諸比丘乞食已還出舉衣鉢洗足詣世尊所稽首禮足退坐一面白佛言:「世尊我今晨朝眾多比丘入城乞食聞阿支羅迦葉從世尊聞法辭去不久為護犢牛所觸殺於命終時諸根清淨顏色鮮白世尊彼生何趣何處受生彼何所得?」

佛告諸比丘:「彼已見法知法次法不受於法已般涅槃汝等當往供養其身。」

爾時世尊為阿支羅迦葉[6]受第一記。」(CBETA, T02, no. 99, p. 86, a4-b23) [1]S. 12. 17. Acela.[2]Acela-Kassapa.[3]】【】。[4]+(無因作者)【】。[5]】【】【】。[6]】*。

8) 남수영 옮김, 나카무라 하지메 지음, 용수의 중관사상(226)을 보면 용수 이전에도 대승불교에서는 공을 설하고 있었는데 이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용수가 중론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 중론中論. T30.33b: “衆因縁生法 我説即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未曾有一法 不從因縁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中論1觀因緣品1〉:「 

[16]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CBETA, T30, no. 1564, p. 1, b14-17)

[16][ Aniro ham >Anirodham ] anutpādam anucchedam aśāśvataṃ, Anekārtham anānārtham anāgamam anirgamam Yaḥ [ pratītyasamu pādam > pratītyasamutpādam ] [ prapañco paśamam > prapañcopaśamam ] śivaṃ, Deśayāmāsa [ sambuddhast ṃvande > sambuddhas taṃ vande ] vadatāṃ varaṃ.不生. Anutpāda, 不滅. Anirodha, 不常. [ Asas ata > Aśāśvata ], 不斷. [ Anucc eda > Anuccheda ], 不一. Anekārtha, 不異. [ Anānāstha > Anānārtha ], 不來. Anāgama, 不出. Anirgama, 因緣. Pratītyasamutpāda, 戲論. [ Prapoñca > Prapañca ], 諸說中諸說法者中. Vadatāṃ.

中論1觀因緣品1〉:「 

[2]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CBETA, T30, no. 1564, p. 2, b6-7)

[2]第一偈. Na svato nāpi parato na dvābhyaṃ nāpy ahetutaḥ, Utpannā jātu vidyante bhāvāḥ kvacana ke cana.從自. Svataḥ, 從他, Parataḥ, 從自他共. Dvābhāṃ, 無因. Ahetu.

9) 불교의 공성空性에 관한 논의가 인도 수학에 영향을 미쳐 영이 나왔다는 견해 또한 있습니다.

10) 雜阿含經10二六二(CBETA, T02, no. 99, p. 67, a4-16) ; S. 22. 90. Channa.

11) 解深密經(No. 0676 玄奘譯 ) T16.693a 解深密經2一切法相品4〉:「「謂諸法相略有三種何等為三一者遍計所執相二者依他起相三者圓成實相云何諸法遍計所執相謂一切法[4]名假安立自性差別乃至為令隨起言說云何諸法依他起相謂一切法緣生自性則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謂無明緣行乃至招集純大苦蘊云何諸法圓成實相謂一切法平等真如於此真如諸菩薩眾勇猛精進為因緣故如理作意無倒思惟為因緣故乃能通達於此通達漸漸修[5]乃至無上正等菩提方證圓滿。」(CBETA, T16, no. 676, p. 693, a15-25)[4]名假假名】。[5]】【】【】【】。

12) 華嚴經探玄記(No. 1733 法藏述 ) T35.175b 華嚴經探玄記4如來光明覺品5〉:「一切有無法了達非有無者有三門一約三性二約三無性三約雙融初中復二初別後總別中三性各有二義所執中一是情有二是理無依他中一是幻有二是性空圓成中一離相二是體實此上三一一各融不二為一性故總者所執是無圓成是有依他是俱以真妄該攝[5]二相盡故無二也二約三無性者初無相觀境中所執有無皆虛故又無有有無故俱離也依他無生性中無幻有有性空不二故俱離也圓成無性中無二性有真理亦不二故俱絕也三約雙融者三有三無圓融無礙二相絕故俱離也。」(CBETA, T35, no. 1733, p. 175, a27-b10) [5]】。

13) 華嚴一乘教義分齊章4:「, 空有力不待緣, 空有力待緣, 空無力待緣, 有有力不待緣, 有有力待緣, 有無力待緣。」(CBETA, T45, no. 1866, p. 502, a3-5) ;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3十地品22〉:「有力不待外緣所以有力不待緣(CBETA, T35, no. 1732, p. 66, a23-24), 華嚴五十要問答2:「, 空有力不待緣。」(CBETA, T45, no. 1869, p. 531, b10)

14) 악인왕생惡人往生을 말할 때 출가하였다가 환속한 뒤 도축 일로 생계를 꾸려간 오경吳瓊이라는 분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용서증광정토문龍舒增廣淨土文5, 왕생집往生集2에 나옵니다. 그 외 정토신종淨土晨鐘, 정토전서淨土全書,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여래향如來香그리고 성총(性聰)정토보서淨土寶書에도 인용되어 나옵니다.

龍舒增廣淨土文5:「宋臨安府仁和吳瓊

吳瓊先為僧後還俗前後兩娶生二子屠沽無所不為常與人作厨子每殺鷄鴨等物命以手持起叫云阿彌陀佛子好脫此身去遂殺之連稱佛數聲每切肉時一面切一面念阿彌陀佛常念佛不輟教村中人念經修懺及勸人念阿彌陀佛後眼上生瘤如鷄子大乃憂怖造一草菴分散其妻子晝夜念佛修懺紹興二十三年秋告村中人云瓊來日戌時去也人皆笑之將用椀鉢鍋子盡與人次日晚報諸道友行婆云瓊去時將至盡來與瓊高聲念佛相助將布衫當酒飲了即寫頌云似酒皆空問甚禪宗今日珍重明月清風端坐合掌念佛叫一聲佛來即化去。」(CBETA, T47, no. 1970, p. 269, a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