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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넨 法然

VIS VITALIS 2016. 12. 13.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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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넨

法然
출생일1133년
사망일1212년
국적일본
대표작《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 〈칠개조제계(七箇條制誡)〉
호넨
호넨

호넨은 정토종을 개창하고, 독립된 불교 일파로 성장시킨 승려이다.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12세기, 그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염불을 외는 것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을 설파하면서 일반 서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아미타불을 믿는 것만으로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그의 관념은 서민 사회와 멀어져 있던 종래 귀족 불교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런 한편 호넨은 다른 부처를 공경하는 일이나 다른 수행법도 존중하라는 관용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올바르게 생활하기만 한다면 불교의 생활 계율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믿어도 된다고 여겼다.

호넨은 1133년 미마사카국의 구메군(오카야마 현)에서 우루마 도키쿠니(漆間時國)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세이시마루(勢至丸)이며, 법명은 겐쿠(源空)이다. 그의 아버지는 미마사카국의 영주로, 군권과 경찰권을 담당하는 압령사(押領使)였다. 호넨은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이 주지로 있는 바다이지(菩提寺)에 들어가 승려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열다섯 살 때 천태종의 본산인 히에이 산으로 출가해 수계(授戒)를 받았다.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호넨은 승려 간의 권력 암투를 목도하고, 귀족 계급과 결탁하여 정신적·물질적으로 타락한 천태종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히에이 산을 떠난 호넨은 오랜 시간 교토, 나라 등지로 떠돌아다니면서 도(道)를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도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호넨이 훗날 "눈이 멀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고 표현할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 1175년 무렵 호넨은 겐신(源信)의 《왕생요집(往生要集)》과 당나라 선도(善導)의 《관무량수경소(觀無量壽經疏)》를 접하고 구원에 있어 중요한 것은 수행법이 아니라 아미타불을 진심으로 부르는 것, 즉 염불을 외는 것임을 깨달았다. 정토 신앙에 매료된 것이다.

정토교는 중국 남북조 내란기의 담란(曇鸞), 당나라 초기의 도작(道綽), 선도(道綽) 등에 의해 주창되었다. 불교를 성도(聖道)와 정토(淨土) 둘로 나누어 말법의 세상에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 정토문)을 믿고 부처의 공덕을 생각함으로써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교의를 가지고 있다. 아미타불은 마음을 다해 성실하게 부르면 누구든 구원해 준다는 자비 깊은 부처이다.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외는 것만으로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개념은 지치고 무지한 서민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중국에서 정토종은 수십 년간 수차례 왕조가 바뀌던 혼란기에 지친 민중 사이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호넨은 정토 사상을 몸소 실천하듯 죽을 때까지 은둔하며 염불자로 살았다. 명망이 높아진 뒤에도 그 어떤 관작도 거부하고 서민에게 전수염불을 설파했고, 기성 교파들의 무고를 받아 유배를 떠난 후에도 묵묵히 자신의 가르침을 펴나갔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1175년 호넨은 교토의 히가시야마 요시미즈(吉水)에 암자를 짓고 법문을 시작했다. "귀천승속(貴賤僧俗)에 관계없이 아미타불을 외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염불은 인간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본원'에 있는 선택된 길이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설교는 다른 종파의 승려들까지 감복시켰다. 그의 이름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고, 셋쇼 구조 가네자네(九条兼実)가 그에게 법문을 배우고 토론까지 함께했다. 또한 당대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교토의 오하라(大原), 도다이지 등도 그에게 설법을 청해 왔다. 1181년경에는 도다이지의 대권진(大進職) 직에 추천받았지만, 기존의 신념대로 사양하고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다.

1198년 호넨은 구조 가네자네의 간청으로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을 편찬했다. 일본 정토종의 대표적 저술로 꼽히는 이 책에는 호넨의 교리적 근거가 밝혀져 있다. 여기에서 호넨은 선도의 정토 사상을 토대로 아미타불에 귀의해야 하는 근거를 제시했다. 그는 그동안 불교에서 가르쳤던 개념, 즉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명상과 계율을 통해 탐욕과 망상을 일으키는 '차안(此岸, 생자필멸의 고통이 있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 '피안(彼岸, 사바세계 너머에 있는 깨달음의 세계)'으로 가 궁극적인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설법을 부정했다. 오히려 탐욕과 죄악은 자기 성찰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악을 인정하고 마음을 다해 성실하게 염불을 외워야만 극락왕생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서 정토교(敎)는 정토종(宗)으로 확립되었다.

기존의 불교계와 불교 이론에 염증을 느낀 승려들을 비롯해 젊은 승려들이 속속 그의 문하로 들어왔다. 그중에는 후일 그의 가르침을 발전시켜 정토진종을 개창하는 신란도 있었다. 간단하고 명확한 호넨의 가르침은 무사 계급의 대두(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 겐페이 전쟁,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등)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시대에 고통을 겪던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사상은 민중은 물론, 귀족, 지방 호족 계층에까지 광범위하게 스며들었고, 훗날 고시라카와 법황이나 조정 요인들까지 귀의하게 만들었다.

호넨의 종파가 급속도로 확대되자 기존의 종파들과 부딪히게 되었다. 1204년경 엔랴쿠지의 신도들은 호넨과 제자들이 불손한 의도로 민중들을 꾀고 있다고 조정에 고발했다. 이에 호넨은 〈칠개조제계(七箇條制誡)〉를 지어 제자들에게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신앙을 믿으라고 훈계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조정에 결백을 호소했다. 그러나 1205년 고후쿠지는 호넨의 사상이 불교 종파 사이의 동심합력(同心合力)에 저해된다면서 정토종을 금지해야 한다고 조정에 강하게 호소했다.

고후쿠지
고후쿠지

669년에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세운 절로, 후지와라씨가 집권하는 동안 크게 번영했다. 불교의 중심지로 여겨졌으며, 때로 그 영향력이 황실을 넘어서기도 했다.

고후쿠지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고토바 상황은 호넨에게 문하에 사람을 모으는 일을 금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까지는 정토종 전파나 염불이 금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고토바 상황이 총애하는 궁녀 두 사람이 상황이 구마노로 참배 간 틈을 타 궁을 몰래 빠져나와 염불종 법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들은 지나치게 감명받은 나머지 궁에 염불승들을 들여 설법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비구니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삭발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고후쿠지는 이 일을 알리고 호넨의 제자들이 궁녀들과 밀통했다고 무고했다. 고토바 상황은 크게 진노했다. 결국 1207년 호넨은 도사국으로, 제자 신란(親鸞)은 에치고국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과 직접 관련된 염불승 두 사람은 처형되었고, 다른 제자 다섯 명도 함께 유배형에 처해졌다.

호넨의 유배지는 이듬해 시코쿠로 옮겨졌다. 그리고 승려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법명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고령의 나이였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넨은 '후지이 모토히코(藤井元彦)'라고 이름을 고치고 포교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1211년 호넨은 사면되어 교토로 돌아갔다. 그가 교토로 입성했을 때 민중은 그를 잊지 않고 환대했다고 한다.

호넨은 교토로 돌아간 이듬해 8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죽기 며칠 전 부처가 타고 나타난다는 자줏빛 구름이 그가 지내던 히가시야마 오타니(東山大谷)를 뒤덮었고, 임종 순간까지 호넨은 입으로 염불을 외웠다고 한다. 이후 그의 가르침은 제자 신란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 1175년 : 정토종의 개조 호넨이 교토의 히가시야마 요시미즈에 암자를 짓고 법문을 시작하다.
· 1198년 : 일본 정토종의 기초 교리를 이론화한 《선택본원염불집》을 편찬하다.
· 1207년 : 전수염불이 금지되고 호넨과 신란이 유배되는 조겐의 법난이 일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