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乘義章》卷3
次就妄中以辨依持。第七妄識。諸虛偽本。說為能持。前六事識。依妄而起。說為能依。能持如水。能依如波。水在波生。水盡波滅。所況如是。故楞伽云。如水大流盡波浪則不[7]生。如是意識滅。種種識不生。[8]彼名妄識。以為意識。六種事識為種種識。良以妄識為六本故。妄想意滅。令彼種種六識不生。妄中本末依持如是。
次唯就真以辨依持。真有體用。本淨真心。說之為體。隨緣隱顯。說以為用。用必依體。名之為依。體能持用。說以為持。能持如水。能依如波。繩蛇等喻類亦同爾。真妄相對依持如是(此一門竟)。
次就真妄共相識中。本末相對以辨依持。真與癡合共為本識。依本共起阿陀那識。依本共起六種生識。於此分中。本識為本。餘二為末。末生依本。名之為依。本能持末。流注不斷。說之為持。能持如水。能依如波。問曰。末中阿陀那識共起六識。得有相依持義不。釋言。不得。於此分中。六識親從本識而起。本識變為。體是本識故。望本識說依說持。非阿陀那變為六識。六識體非阿陀那識。故望陀那不說依持。如人夢中見聞覺知從睡心生。不從夢中執我心起。若就緣由。說依說持。亦得無傷。是義云何。由阿陀那執我心故。熏於本識。不見法如。不證涅槃。變起六識及六根塵。離之則無。故[9]經說云。以著我故。世間受身。離我則無[10]行。從是義得說依持。依持如是(此二門竟)。」(CBETA, T44, no. 1851, p. 533, a22-b19)
[7]原本傍註曰生經作起。[8]楞伽經。[9]十地經論第八。[10]行=復ヵ【原】,=即ヵ【原】。
다음으로 망에 입각하여 의‧지依持를 살피고자 한다. 제7망식은 여러 허위의 근본이므로 능지持라 한다. 앞의 여섯 가지 사식은 망에 의존하여 일어나므로 능의依라 한다. 능지는 물과 같다. 능의는 물결과 같다. 물이 있어 물결이 생긴다. 물이 다하면 물결이 사라진다. 비유로는 이와 같다. 그러므로 능가경에서 “물의 큰 흐름이 다하면 물결도 곧 생기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의식이 사라지면 갖가지 식[種種識]도 생기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그것(능가경)은 망식을 의식이라고, 여섯 가지 사식을 갖가지 식이라고 이름하고 있다. 망식은 여섯 가지 사식의 근본이므로 망식이 사라지면 저 갖가지 6식도 생겨나지 않게 된다. 망에 있어 본本과 말末이 지持가 되고 의依가 되는 것은 이와 같다.
다음으로 오로지 진에 입각하여 의‧지依持를 살피고자 한다.
진에는 체가 있고 용이 있다. 본정진심(근본이 청정한 진심)이 체이고 수연은현(조건에 따라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함)이 용이다. 용은 체에 반드시 의존하니[依] 의依라고 한다. 체는 용을 유지(維持)할 수 있으니[能持] 지持라고 한다. 능지는 물과 같다. 능의는 물결과 같다. 끈과 뱀 등의 비유는 유형적으로 또한 같다. 진과 망(=진 가운데 체와 용)이 서로 짝이 되어 지持가 되고 의依가 되는 것은 이와 같다.(일문一門을 마친다.)
다음으로 진망공상식真妄共相識에 입각하여 본과 말이 서로 짝이 되어 의‧지依持하는 것을 살피고자 한다. 진과 치癡가 합해져 함께 본식이다. 본에 의존하여 함께 아다나식을 일으킨다. 본에 의존하여 함께 여섯 가지로 일어나는 식[六種生識]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본식이 본이고 나머지 둘(아다나식이나 6식)은 말이다. 말末의 발생이 본에 의존한다. 그것을 의依라 한다. 본은 말을 유지(維持)할 수 있고[能持]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지持라 한다. 능지는 물과 같다. 능의는 물결과 같다. 묻는다. 말에 속하는 아다나식과 (말에 속하는) (아다나식과) 함께 일어나는 6식은 서로 의‧지依持하는 뜻을 가질 수 있는가? 풀이하여 말한다. 가질 수 없다. 여기에서는 6식이 직접적으로[親] 본식으로부터 일어난다. 본식이 (6식으로) 변화한다[變為]. (여기서 6식의) 체는 본식이기 때문이다. 본식에 맞춰[望] 의依를 말하고 지持를 말한 것이지 아다나식이 6식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6식의 체는 아다나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다나식에 맞춰[望] 의‧지依持를 말하지 않는다. 마치 사람이 꿈속 견문각지見聞覺知는 수면 중인 마음[睡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지 꿈속 나를 집착하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다나식과 6식의 관계에 대해) 연유(緣由)에 입각하여 의를 말하고 지를 말하는 것이라면 무방하다. 무슨 뜻인가? 아다나식은 나에 집착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본식을 훈습하지만 진리의 여실함[法如]을 보지 못하고 열반을 깨닫지[證] 못한다. 변화하여 6신‧6근‧6진을 일으키지만 그것(=我)을 떠나면 곧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나에 집착하기 때문은 세간에서 몸을 받는다. 나를 떠나면 행할 것도 없다.”라고 한 것이다. 이런 뜻으로 의‧지依持를 말할 수 있다. 의‧지依持는 이와 같다.(이문二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