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보리심 개념의 역사적 전개 ································································38
1.보리심의 정의 ·····························································································39
2.bodhicitta의 기원과 번역어 ·····································································41
3.보리심 개념의 유래 ···················································································46
1)초기불교와 보리심 ················································································46
2)아비달마불교와 보리심 ······································································51
3)『마하바스투』와 보리심 ····································································54
4)자성청정심과 보리심 ············································································56
4.경론에 나타나는 보리심 ···········································································58
1)대승 문헌에 나타나는 보리심 ····························································59
2)밀교 문헌에 나타나는 보리심 ············································
박 사 학 위 논 문
『입보리행론』의 보리심론 연구
李 泳 錫
지도교수 李 芝 洙
⓵ 대승불교 이전에는 보리심이라는 용어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
지만,그 용어를 대신하면서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들은 있었다.⓶ 보리심
이라는 개념과 용어는 초기대승시대에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발심을 중시
하면서 표면에 등장한다.⓷ 샨띠데바를 중심으로 한 중기대승시대에 이
르러 보리심을 주제로 한 독립된 논서들이 저술되기 시작했으며,비로소
보리심을 서원(원보리심)과 실천(행보리심)의 측면에서 구별하기 시작한
다.⓸ 후기대승시대에는 자신의 마음이 곧 깨달음이라고 하는 사상이 강
조되어,보리심이 단순히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에 한정되지 않고 ‘깨달음
을 자성(svabhāva)으로 하는 마음’으로 이해되기 시작하며,나아가 승의와
세속의 보리심과 같은 다양한 보리심의 분류가 등장한다.⓹ 끝으로 후기
밀교시대가 되면,반야로서의 공성과 방편으로서의 자비가 보리심이라는
절대적 실재 속에서 결합되어 반야와 방편의 雙運이 보리심으로 이해되기
에 이른다.
보리심은 불교의 경론에서 반복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전문 용어
(technicalterm)가운데 하나이지만,동시에 그 의미와 중요성이 경론들
마다 다양하게 서술되는 일종의 ‘불확실성’을 지닌 용어라 할 수 있다.일
반적으로 보리심의 기원적 의미는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 혹은 결심”,
“깨달음을 향한 생각” 등으로 간주한다.이러한 해석은 여성형 명사
‘bodhi’와 중성형 명사 ‘citta’의 결합으로 형성된 복합어인 중성형 명사
bodhicitta를 기계적으로 번역한 결과이다.여기서 말하는 bodhi란 원래
√budh(자각하다)에 근거한 말로서 “자각 ·완전한 지식 ·지혜 ·깨달음”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74) 또한 citta는 √cit(인식하다)를 어원으로 하
는 말로서 “생각 ·주의 ·마음 ·의지 ·소망”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
다.75)
하지만 베다와 우파니샤드와 같은 고대 인도철학의 문헌에 전혀 등장하
지 않는 보리심이란 용어를 명쾌하게 규정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작업
이 아니다.타가미(田上)의 진단처럼 이 용어는 ‘그 자체의 語義’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言外의 의미’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76)언외의 의미
란 타인을 향한 이타적인 의미를 용어 속에 포함시켜 “깨달음을 구해 세
상 사람들을 구제하려는 마음 혹은 결심”,즉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동
시에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해되기도 하는 것이다.게다가 보리심이란 용
어의 정의에는 다양한 층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비록 보리심을 단순
히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혹은 “깨달음을 구해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려
는 마음 혹은 결심”으로 정의한다 하더라도,그 정의 속에는 몇 가지 다
른 성격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고메즈(Gómez)는 이 용어가 지닌 다양
74)Apte(1986),p.1169& Monier-Williams(1988),p.734.
75)Apte(1986),p.707& Monier-Williams(1988),p.395.
76)田上太秀(1981),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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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층들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우선 보리심은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열망하
는 마음의 상태 혹은 깨달음을 지향하는 의지가 보리심이다.또한 보리심
은 ‘경건한 약속’,즉 서원을 가리킨다.특별한 의례 행위를 통해 언어로
표현된 서원이 보리심이다.그리고 보리심은 행위의 배후에서 ‘동기를 제
공하는 생각’,즉 원동력으로,행위의 본질적인 정신 상태이다.이 세 가지
가 수단으로서 이해되는 것인 반면,보리심은 ‘깨달음 그 자체’를 가리키
기도 한다.보살도의 일련의 과정에서 서원이나 수행의 완성단계가 보리
심이기 때문에,보리심은 수단이라기보다는 목적으로도 이해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리심은 선천적으로 ‘내재된 깨달음’이다.다시 말해 모든 결
심의 근본적인 원천이자 기초이다.이것이 선천적으로 내재하고 있기 때
문에 깨달음을 향한 의지와 결심이 가능한 것이다.77)
고메즈의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지만,보리심이란 용어가 지닌 다의적
다층적 면을 지적한 것으로는 충분한 것으로 이해된다.한편,앞서 「선행
연구」에서 간단히 언급한 왕축(Wangchuk)이 제시한 다섯 가지 보리심
유형도 보리심 개념이 지닌 복잡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그에 따
르면,윤리-영적(ethico-spiritual)보리심은 타인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자
비심에 의해 생기하는 보리심이다.인식론적(gnoseological)보리심은 명
상에 의해 생긴 지식에 의해 생기하는 보리심이다.존재론적(ontological)
보리심은 공성 ·법성 ·실제 등과 같이 승의적 실재로서의 보리심이다.
심리-생리학적(psycho-physiological)보리심은 성적인 결합에 의해 생기
하는 황홀한 기쁨과 연관된 보리심이다.기호학적(semeiological)보리심
은 위의 네 가지 보리심이 상징과 기호로 표시되는 보리심이다.78)
이와 같이 보리심이 다양한 의미와 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얄
(Dayal)은 이 용어를 “깨달음에 대한 생각”(theThoughtofbodhi)79)으로
번역했고,스즈끼(Suzuki)는 “지적 마음”(Intelligence-heart)80)으로,아네
77)Gómez(2004),p.54.
78)Wangchuk(2007),pp.195∼233.
79)Dayal(1978),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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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키(Anesaki)는 형이상학적 관점을 부각시켜 “지고의 깨달음 속에 그 자
체로 내재하는 마음의 본질”81)로,그리고 BCA를 영어로 번역한 크로스비
와 스킬톤(CrosbyandSkilton)은 “깨달은 마음”82)으로 정의한다.이처럼
보리심이라는 용어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나타난 바를 참고로 한다면,크게 두 가지 의미로 정의하는 것이
적절하리라고 생각한다.즉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또는 ‘깨달음 자체인
마음’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정의는 뒤에서 살펴볼 瑜伽部 밀교의 학승 붓다구히야
(Buddhaguhya)의 두 가지 보리심,즉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과 ‘깨달음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에 상응한다.이 두 가지 보리심을 bodhi-citta라고 하
는 복합어와 연관시켜 어의 해석을 해보면,전자(깨달음을 구하는 마음)는
깨달음(bodhi)과 마음(citta)을 별개로 생각한 격한정복합어(tatpuruṣa)적
색채가 강한 것에 반해,후자(깨달음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 또는 깨달음
자체인 마음)에는 깨달음과 마음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동격한정복합어
(karmadhāraya)적으로 해석된다. 한편, bodhi-citta는 소유복합어
(bahuvrīhi)로 해석해서 붓다들이 지닌 마음,즉 여래장 사상의 뉘앙스로
해석할 여지도 남아 있다.
2.bodhicitta의 기원과 번역어83)
다의적 정의와 다층적 성격을 지닌 bodhicitta라는 용어는 漢譯 佛典에
나타난 번역어를 통해서도 그 성격이 드러난다.원어 bodhicitta가 한역
80)Suzuki(1970),p.277.
81)Anesaki(1958),p.450.
82)Crosby& Skilton(1996),p.3.
83)이 절에서는 원어 ‘bodhicitta’와 번역어 ‘菩提心’을 구별하여 표기한다.왜냐하면,‘보리
심’은 ‘bodhicitta’의 다양한 번역어 중의 하나로 시기적으로 뒤늦게 정착된 것이기 때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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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서는 번역자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었기 때문이다.그런데
bodhicitta의 한역 번역어와 관련하여 같은 해 발표된 두 편의 논문이 눈
길을 끈다.두 논문은 모두 bodhicitta에 대한 다양한 번역어를 문헌적 근
거와 함께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면서 보리심이란 번역어가 4세기의 역경가
인 鳩摩羅什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는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우선 오카야마(丘山)는 그의 「菩提心 漢譯考:中國譯經史硏究序說」84)
에서 보리심이란 번역어는 구마라집의 譯經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가설을
세운다.그리고 이 가설을 논증하기 위하여 구마라집 이전에 사용되었던
bodhicitta의 번역어에 대하여 後漢의 安世高가 사용한 번역어에 대한 검
토로부터 시작한다.구마라집 이전의 역경가로서는 安世高,支婁迦讖,支
謙,竺法護가 중시되지만,오카야마는 총 25명의 역경가들을 조사하여
bodhicitta의 번역어로 覺意 ·道意 ·道志 ·道心 ·菩薩心 ·菩薩意 ·菩
薩之心 ·大道心 ·道之意 등이 사용되었음을 문헌적으로 실증한다.그러
면서 구마라집의 경우에 보리심을 기조로 하면서 道意 ·道心과 같은 格
義的 번역을 중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적절히 병행하여 사용했
다고 그는 평가한다.
다른 하나는 타가미(田上)의 「Bodhicittaの譯語と用語例」이다.85) 그는
구마라집보다 후대의 역경가인 玄獎과 義淨을 포함하여 총 15명을 선택하
여 검토한다.그는 우선 많은 역경가들이 선호하여 사용한 bodhicitta의
번역어로서 보리심 ·대보리심을 들고,특정의 역경가에게만 현저하게 나
타나는 번역어로서 道意 · 道心을 든다.게다가 그는 發意와 發心도
bodhicitta의 번역어로서 사용되었다고 밝히면서 보리심이라는 번역어는
구마라집때부터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고 조심스레 말한다.
특히 타가미는 초기 대승 경전 가운데 산스끄리뜨 원전이 남아있는 몇
가지를 선택하여 보리심이라는 번역어의 원어가 bodhicitta인지에 대해서
도 검토한다. 우선 『대보적경가섭품』(Kāśyapaparivarta)의 경우,
84)丘山新(1978b),pp.1∼22.
85)田上太秀(1978),pp.143∼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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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hicitta가 어느 정도 정착한 용어로 기술되어 있는 반면,지루가참의
한역에서는 보리심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보살심 혹은 보살도로 되
어 있다고 말한다.『금강경』(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에서
는 bodhicitta대신에 ‘bodhisattvayana’(보살승)로 기술되어 있고,뒤이어
‘samprasthāna’가 첨가되어 ‘bodhisattvayana-samprasthāna’(보살승에 굳
게 나아감)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그런데 이것이 구마라집의 한역에
서는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으로 의역되어 있는 것이다.하지만 타가미
는 비록 bodhicitta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있지는 않지만,그 정신만은 계
승되어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야말로 ‘보리심을 생기한 자’라고 구마
라집이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타가미는 『입법계품』(Gaņḍavyūha-sūtra)의 경우에는
‘bodhicitta-utpāda’라는 정형구가 기술되어 있고,한역으로는 ‘발보리심’으
로 되어 있다고 밝힌다.그리고 『십지경』(Daśabhūmika)에는 bodhicitta
라는 용어가 독립한 술어로서 다수 기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bodhicitta-utpāda’라는 표현 대신 ‘cittotpāda’라는 표현이 나타난다고 그
는 말한다. 계속해서 타가미는 『8천송반야경』(Aṣṭa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의 경우에는 bodhicitta라는 용어가 보살의 다섯 가지 마
음 가운데 하나로서 열거되어 있기 때문에 보살이 지니는 중요한 마음 가
운데 하나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특히 그는 이 경전 중에
‘prathamacitta’(최초의 마음)라는 표현과 ‘prathamaṃ bodhicittaḥ’(최초의
보리심)라는 표현이 보이는 것에 주목하여 『8천송반야경』의 작자가
‘prathamacitta’에 ‘bodhi’를 삽입하여 표현하였다가 이후에 prathama가 탈
락하여 bodhicitta라는 용어가 독립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물론 타가
미는 prathamacitta가 서원사상을 중시한 『마하바스투』(Mahāvastu)에
등장하기 때문에 이것으로부터 대승불교도들이 차용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런데 오카야마와 타가미의 두 논문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들이 존재
한다.그 중 하나는 ‘bodhicitta’와 ‘anuttara-samyaksambodhi-citta’(阿耨
多羅三藐三菩提心 혹은 無上正等覺心)의 관계를 둘러싼 이견이다.오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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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는 bodhicitta가 ‘anuttara-samyaksambodhi-citta’의 단축형이라고 간주
한다.86) 그는 ‘보리심’과 ‘발보리심’이라는 번역어에 상응하는 산스끄리뜨
원어는 일반적으로 ‘bodhicitta’와 ‘bodhicittotpāda’라고들 간주하지만,초기
대승경전에는 이러한 표현이 극히 희박하다고 말한다.그 대신 자주 나타
나는 표현은 ‘anuttarāyāṃ samyaksaṃbodhaucittam utpādaṃ’(마음을 무
상정등각에 대해서 일으킴)이며 따라서 ‘bodhicitta’와 ‘bodhicittotpāda’는
이 표현에서 파생한 단축형이라고 주장한다.그는 ‘bodhi’와 ‘citta’에는 명
확한 격관계가 존재하고,이것을 단순히 ‘보리심을 일으킨다’혹은 ‘보리심
을 일깨운다’는 식으로 번역하는 것은 오해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고 말
한다. 스즈끼87)와 모치즈키 신쿄(望用信亨)88)도 bodhicitta가
‘anuttara-samyaksambodhi-citta’의 단축형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다얄
역시 anuttarā와 samyak은 통상적으로 bodhi앞에 붙는 형용사에 불과하
다고 말해 단축형임을 암시한다.89) 특히 스즈끼는 bodhicitta와
‘anuttara-samyaksambodhi-citta’의 역사적 연관성이 후대에 잊혀져
bodhicitta만이 독립적인 전문술어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90)
반면, 타가미는 위에서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bodhicitta는
‘anuttara-samyaksambodhi-citta’의 단축형이 아니고,prathamacitta로부
터 변화된 신조어라고 주장한다.91) 만약 bodhicitta가 ‘anuttarasamyaksambodhi-citta’의
단축형이라면,이 긴 숙어 형태의 합성어가 경
전 가운데 나타나야 하지만,실제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
한다.이 긴 표현 대신에 경전 가운데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본생보살의
정형적 구도심을 표현한 ‘anuttarāyāṃ samyaksaṃbodhau cittam
utpādayati’혹은 ‘anuttarāyaisamyaksaṃbodhayecittam utpādayati’라는
문장이고,이 문장이 bodhicitta라는 단어로 단축된 것으로 보기는 무리가
86)丘山新(1978b),p.1& p.17.
87)Suzuki(1953),p.171.
88)望用信亨 編(1958),p.4666.
89)Dayal(1978),pp.18∼19.
90)Suzuki(1953),p.174.
91)田上太秀(1978),pp.15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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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주장한다.그는 bodhicitta라는 용어가 어떤 경과를 거쳐서 형성되
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고 마무리하는데,그의 이런 주장
은 몇 년 뒤 발표한 다른 논문의 서두에서92)또다시 강조된다.
그런데 ‘bodhicitta’와 ‘anuttara-samyaksambodhi-citta’의 관계로부터 자
연스럽게 도출되는 또 하나의 이견이 여기서 드러난다.일반적으로 한역
경전에서는 ‘anuttarāyāṃ samyaksaṃbodhau cittam utpādayati’를 ‘발아
뇩다라삼먁삼보리심’으로 번역하여 ‘무상정등각심을 발한다’의 의미로 해
석한다.그러나 산스끄리뜨 원어가 의미하는 바는 ‘마음을 무상정등각에
대하여 일으킨다’혹은 ‘마음이 무상정등각에 대하여 생기한다’이지 ‘보리
심을 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따라서 원어대로 읽는다면,‘cittam’을 주격
이나 목적격으로도,‘utpādayati’를 자동사나 타동사로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타가미는 산스크리뜨 원문의 격관계에 관계없이 한역에서는 모
두 ‘心’을 목적격으로,‘發’을 타동사로 번역한 것에 주목하여 보리심을 여
래장이나 불성처럼 ‘깨달음의 본체’(覺體)와 같이 발견되는 것으로 이해한
다.93) 이것은 bodhicitta가 ‘anuttara-samyaksambodhi-citta’의 축약형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반면에 오카야마는
‘cittam’을 주격으로,‘utpādayati’를 자동사로 해석하는 것이 원문의 본래
의 취지라고 말한다.94) 왜냐하면 ‘cittam’을 목적격으로 볼 경우,
‘bodhicitta’인 실체적인 존재가 상정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초기대승의
사상에서 어떠한 실체적인 존재,특히 실체적인 心을 인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그는 덧붙인다. 이것은 bodhicitta가 ‘anuttarasamyaksambodhi-citta’의
축약형일 뿐 독립된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가
능한 것이다.이 점과 관련해서는 5장 「보리심의 생기-생기의 의미」 부
분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92)田上太秀(1981),p.127.
93)田上太秀(1990),pp.299∼305.
94)丘山新(1978b),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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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보리심 개념의 유래
보리심과 관련해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보리심이라는 용어가 초기불교
의 빨리 문헌과 아비달마불교의 논서(유부 7논)에서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보리심이란 용어가 불제자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구도
심 또는 불교의 핵심으로 간주되기 때문에,당연히 초기불교 문헌 속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실제로는 그 어느 곳에도 기술되어 있지 않
다.특히 보리심에 상당하는 빨리어는 초기경전뿐만 아니라 사전에도 나
와 있지도 않다.뿐만 아니라,부파불교의 논서에서도 보리심과 유사한 용
어는 있지만,보리심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그렇다면 보리심이라
는 용어는 언제 어디에서 처음 사용되었는가? 타가미(田上)가 주장하는
바처럼 보리심이라는 용어는 대승불교의 고유한 개념인가?초기불교에서
부터 아비달마불교에 이르기까지 보리심이라는 용어의 원류를 추적한 타
가미의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자.95)
1)초기불교와 보리심
조쉬(Joshi)가 확인한 바와 같이 보리심이라는 용어는 빨리 문헌에 나타
나지 않지만,96)이 용어가 의미하는 내용과 사고는 초기불교의 문헌에서
발견된다.지혜와 자비로써 일체 유정을 구제하고자 하는 보살의 결심,즉
보리심 개념은 초기불교 문헌에 기술되어 있는 고따마 붓다의 과거세 이
야기,특히 붓다가 되고자 하는 그의 결심과 노력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그것을 본보기로 삼았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과
95)田上太秀(1990),pp.25∼118.
96)Joshi(1971),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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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에 보살이었던 고따마 붓다의 최초의 결심과 관련하여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 확증할 수는 없지만,97) 자따까
(Jātaka)와 아바다나(Avadāna),그리고 阿含과 니까야(Nikāya)를 비롯한
여러 초기불교 문헌들은 고따마가 과거세에서 어떠한 선행을 하고 공덕을
쌓았기에 현재세에서 붓다로 태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제공한다.예를 들어 『중아함경』의 「未曾有法品」에 다음과 같은 구절
이 기술되어 있다.
“세존께서 가섭 붓다 재세시에 처음으로 불도를 닦고자 원을 세우시고 범행을 행
하셨다.”98)
아나라요(Anālayo)의 지적처럼,『중아함경』의 「미증유법품」에 상당
하는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의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
던 것의 경」(Accariyabbhūta-sutta)에는 위 구절에 상응하는 구절이 존
재하지 않아 후대의 개편 혹은 삽입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99)보리
심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내용과 사고가 과거세 붓다의 결심과 노력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상기시키기에는 충분한 것으로 이해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축(Wangchuk)은 과거세에 이루어진 고따마 붓다의 이러한
결심을 ‘보리심’또는 ‘원시 보리심’(proto-bodhicitta)이라고 부르기를 주저
한다.100)왜냐하면 이 결심은 일반 수행자들이 발심한 것이 아닐 뿐만 아
니라,수행자들은 아직까지 그러한 사고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으로 그는
이해한다.그 대신 그는 보리심 개념의 유래와 관련하여 고따마 붓다의
입멸에 따른 상실을 보상받기 위한 심리적인 필요에 의해 佛子 스스로
97)Dayal(1978),pp.292∼293& Wangchuk(2007),pp.92∼93.왕축은 다음과 같이 말한
다.“역사적 붓다가 언제 어떻게 최초로 붓다가 되고자 결심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문헌과 전통 안에서 다양한 시기와 장소로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다시 말해,붓
다관의 변천이 그의 최초의 결심을 바라보는 시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성문
승에서부터 금강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불교 체계 안에서 붓다를 인식하는 다양한 방
법들이 붓다의 최초의 결심을 한 방향으로 묘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98)世尊迦葉佛時 始願佛道 行梵行.未曾有法品(TD 1),p.469c.
99)Anālayo(2010),p.85;전재성(2009),pp.1351∼1358참조.
100)Wangchuk(2007),p.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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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되고자 하는 결심’(theresolvetobecomeaBuddha)을 일으키고,
이 결심이 시간이 지나면서 보리심 개념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는 가설
을 세운다.101) 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초기불교의 문헌에 나타
나는 이 결심의 이론적 토대를 일곱 가지로 정리해서 제시한다.왕축이
제시한 일곱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고따마 붓다는 진리의 발견자이자 선포자일뿐이고,붓다들이 출현
하든지 출현하지 않든지 간에 영원한 진리의 법은 상주하기 때문에 이 법
을 자신들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불자 스스로 붓다가 되고 보살이
될 수 있다는 사고에 이르게 된다.둘째,빨리 문헌에 나타나는 다수의 붓
다들과 보살들이라는 개념은 범부도 붓다가 되고 보살이 될 수 있다는 사
고에 이르게 된다.셋째,빨리 문헌에 기술되어있는 과거불과 연관된 서원
과 수기는 보리심 개념이 이론적으로 또는 의례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근
본 원리이다.넷째,고따마 붓다가 전생에 자비심에 의해 발한 최초의 서
원은 보리심 개념의 모범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다섯째,비록 초기불
교에 나타나는 평정(upekṣā)과 연민(karuņā)사이에 부조화가 존재하지만,
빨리 문헌에는 자신과 타인의 해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자신만의 해
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보다 더 존중된다.여섯째,빨리 문헌에 기술되어
있는 붓다의 이타적인 행위는 붓다를 성문과 독각이 아닌 붓다가 되게 하
는 요인으로 기능한다.일곱째,초기 불교에 나타나는 지계(śīla)의 정신은
보리심이 지닌 황금률 정신으로 이어진다.102)
이러한 이론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보리심 개념이 발전하게 되고,이
용어가 의미하는 내용과 사고가 초기불교 문헌에서 발견된다.그래서 화
이트(White)는 보리심이란 용어가 임시로 고안된 몇 가지 명칭으로 변장
해서 초기불교 문헌들에서 암시되고 있다고 주장한다.103)하지만 그는 그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반면,나나야까라(Nanayakkara)와 타가미
(田上)는 초기불교의 문헌에서 보리심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는 않지만,
101)Wangchuk(2007),pp.74∼77.
102)Wangchuk(2007),pp.77∼89.
103)White(2005),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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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심이라는 용어를 대신하면서 그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이 있다는 것을
다양한 문헌적 고증을 통하여 설명한다.104)
특히 타가미는 우선 한역 아함경 가운데 빨리 원전에 상응하는 내용을
지닌 곳에 나타나는 보리심이라는 용어로부터 출발한다.왜냐하면 한역
아함경에는 보리심이라는 용어가 나타나지만,그것에 상응하는 빨리 원전
에는 bodhicitta라는 원어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예를 들면,『잡아함
경』에 “若聖弟子 於如來 發菩提心 所得淨信心 是名信根”105)이라는 구절
이 있지만,이것에 상응하는 빨리 원어는 Saṃyutta-nikāya의 “Yo so
bhante ariyasāvako Tathāgate ekantagato abhippasanno, na so
TathāgatevāTathāgatasāsanevākaṅkheyyavāvicikiccheyyavā”106)
이다.특히 “ekantagatoabhippasanno”(한 마음으로 믿는다면)이라는 부분
을 發菩提心으로 표현했다.역자인 求那跋陀羅(Guņabhadra,AD 393-468)
가 ekantagatoabhippasanno을 왜 보리심이라는 용어로 번역했는지 정확
히는 알 수 없지만,번역 당시 이미 보리심이란 용어가 어느 정도 정착되
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타가미는 추정한
다.107)
또 하나의 예로 타가미는 『佛爲首迦長者說業報差別經』에 나타난 표현
을 든다.이 경전에는 10惡業의 하나로서 “六者退菩提心 毁佛形像”이라는
표현이 있으며,그것에 반대되는 10善業으로서 “六者發菩提心 造佛形像
奉施寶蓋”이라는 표현이 있다.108) 이 경전에는 두 가지 종류의 異譯本이
존재하는데,하나의 이역본인 『分別善惡報應經』109)에는 발보리심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만,다른 이역본인 『佛說鸚鵡經』110)에는 보리심이라는
104)Nanayakkara(1961),pp.184∼185& 田上太秀(1990),pp.27∼62.
105)“만약 거룩한 제자가 여래가 되고자 보리심을 일으킨다면,그 때 얻게 되는 청정한
신심은 信根이라고 불린다.”TD 2,p.184a.
106)SN.48-50(vol.5,p.225).“세존이시여,만약 거룩한 제자가 여래를 결정코(한 마음
으로)믿는다면,그가 여래나 여래의 가르침에 주저하거나 의심할 수 없습니다.”(전재
성,2001,p.452)
107)田上太秀(1990),pp.27∼28.
108)TD 1,p.892b.
109)TD 1,p.897a.
110)TD 1,p.88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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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위의 세 가지 한역 아함경의 빨리 원전이 현존
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경전의 내용을 빨리
원전 가운데에서 찾아보면,Majjhima-nikāya의 135經인 『小業分別經』
(Cūla-karma-vibhaṅga-sutta)에 해당한다.하지만 이 경전에는 bodhicitta
라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따라서 타가미는 비록 한역 아함경에 보리
심이라는 용어가 있을 지라도 그것이 원전에 bodhicitta가 존재한다는 것
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며,한역 번역자들이 아함경 중에 대승사상이 이미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승불교의 용어인 보리심을 차용했을 것으
로 생각한다.111)
한편,타가미는 대승불교의 보리심이라는 용어에 해당하는 초기불교에
서의 구도심으로 ‘정등각심’을 예로 든다.초기불교의 제자들 역시 正等覺
(saṃbodhi)을 구하며 수행을 했기 때문에 그 정등각을 구하는 마음,즉
정등각심(saṃbodhicitta)이 보리심이라는 용어를 대신하는 초기불교에서
의 구도심일 가능성이 있다.하지만 그는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단
정한다.왜냐하면 초기 경전 가운데 정등각심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오히려 전무하기 때문이다.만약 정등각심이라는 표현
이 있다고 하더라도,그것은 석가모니 붓다와 동등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초기불교에서는 그와 같은 사상과 용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112)
정등각심이라는 용어를 제외하고 다음으로 고려해볼 수 있는 것으로 타
가미는 abhiññā-citta(證知心)와 añña-citta(了知心)를 든다.Abhiññā-citta
의 경우,abhiññā는 證知 또는 神通으로 번역되며 선정을 수행하여 얻는
무애자재한 초인적인 작용을 가리킨다.이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
을 단계적으로 기술한 語群 속에 있는 용어로서 비록 높은 경지에 위치한
마음 작용이기는 하지만 최고의 깨달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다만 최고
의 깨달음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에서 얻는 지혜라는 한계를 지니는 것이
111)田上太秀(1990),pp.30∼31.
112)田上太秀(1990),pp.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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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더군다나 abhiññā를 구하는 마음인 abhiññā-citta는 초기경전의 오래
된 문헌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데다가 확실한 술어로서 수행자들 사이에
서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보리심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으로 타가미는 이해한다.113)
반면,añña-citta의 경우는 그 가능성이 매우 짙다.왜냐하면 añña는 초
기경전 속에서 아라한과의 지혜,궁극의 지혜,최고의 깨달음이라는 의미
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고114),따라서 añña-citta는 당연히 최고의 깨달음
을 구하는 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또한 añña-citta가 몇몇 학자들에
의해 보리심으로 이해되기도 했기 때문이다.115) 타가미는 이를 바탕으로
아라한의 깨달음인 añña와 붓다의 깨달음인 정등각(sammāsaṃbodhi)이
自內證에 있어서 같은 깨달음이며,다만 언어 표현에 의해서 또는 종성에
의해서 또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 의해서 차별되고 구별될 뿐이라고
주장한다.따라서 그는 초기불교의 문헌에서 대승불교의 보리심에 해당하
는 용어로 añña-citta를 거론해도 좋다고 말한다.116)하지만 붓다의 제자
들은 스승인 붓다만이 도달한 정등각에 자신들도 똑같이 도달할 수 있다
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대승과 같은 보리심을 상상할 수는 없었던 것이
다.결국 용어만을 놓고 볼 때,보리심이라는 용어는 대승불교의 고유한
용어라는 타가미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셈이다.
2)아비달마불교와 보리심
113)田上太秀(1990),pp.39-42.
114) 田上太秀(1990), pp. 46-53.
115)水野弘元(1986)의 『南傳大藏經索引』 aññacitta항에 보리심이라는 역어가 채록되어
있다.또한 雲井昭善(1961)의 『巴和小辭典』에 aññacitta가 보리심으로 번역되어 있다.
게다가 宇井伯壽(1924,p.232)는 aññā를 ‘완전한 열반,즉 깨달음을 완성하려는 생각’
이라고 했으며,Jayatilleke(1963,p.432)역시 aññā를 궁극의 해탈지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용어라고 했다.
116)田上太秀(1990),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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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보리심이라는 용어가 불교의 다양한 영적 운동의 전개 속에서
언제부터 등장하고,어떤 의미(기능)로 사용되었는가?최근 티벳에서 발견
된 『아비달마디빠』(Abhidharmadīpa)에는 4장(adhyāya) 4절(pāda)에서
보살론을 전개하면서 보리심이라는 용어를 두 차례에 걸쳐 간단히 언급한
다.117) 하지만 이는 부파불교 문헌 가운데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왜냐하면 대부분의 아비달마 문헌들은 심지어 보살 사상에 대해서
도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118)
『아비달마디빠』를 제외하고는 초기불교의 경전들을 분석하고 종합한
아비달마 논서에서 bodhicitta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타가미는
『시설론』을 비롯한 몇몇 아비달마 문헌을 분석하여 보리심이라는 용어
의 기원을 추적한다.그는 유부의 7논 가운데 『시설론』에 나오는 ‘大菩
提心’이라는 표현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한다.119)이 논서에는 석가모니 보
살 외에 복수의 보살들이 등장하고 있고 유부 7논 가운데 가장 발달한 보
살론을 전개시키고 있는데120),대보리심을 일으키지 않고는 올바른 신앙
생활이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묻는다.무슨 인연으로 보살은 모든 중생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대보리심을 일으
키지 않고서도 능히 바른 믿음으로 출가할 수 있는가?답하기를,보살은 오랜 세월
동안 모든 중생을 아들과 동일하게 보아 선업을 부지런히 닦았으므로 그것이 자라
고 성숙하여 뛰어나고 묘한 과보가 바로 눈앞에서 온전히 성취되어 나타난 사람이
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121)
117)Jaini(1959),p.186,192.“이 불퇴전의 보리심의 생기로부터 비로소 보살이라고 불리
게 된다.”etasmādavivartyādbodhicittotpādātprabhṛtibodhisattvovaktavya.
118)Jaini(1959),p.15.
119)田上太秀(1990),pp.65∼69.
120)따라서 『시설론』의 성립연대와 관련해서,유부 7논 가운데 가장 늦은 것으로,즉
『대비바사론』과 동시대,혹은 그 이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한다.平川彰(1975),p.
101.
121)又問 何因菩薩於一切衆生中 最上最勝 有不發大菩提心 而能正信出家者邪 答菩薩長時
觀諸衆生 等同一子 勤修善業 長養成熟勝妙果報 現前克成 法爾如是.시설론(TD 26),p.
5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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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가미는 대보리심을 三種菩提,즉 성문의 깨달음(보리),연각의 깨달음,
붓다의 깨달음 가운데 붓다의 깨달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즉
붓다의 깨달음이 다른 두 가지 깨달음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지적
하기 위해 붓다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대보리심’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한다. 아마도 『시설론』의 산스끄리뜨 원전에는 대보리심이
mahābodhicitta로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원전이 존재하지 않
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고,이 논서의 티벳역에 의지해서 파악해 볼
수밖에 없다.그런데 티벳역에는 대보리심에 해당하는 부분이 sras(息子)
로 되어 있다.타가미는 이것을 sems(心)의 오역으로 본다.122) 그렇다면
『시설론』의 티벳역에는 대보리심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心(sems)으로
되어 있을 뿐이고,그 어디에도 byaṅchubmchog tosems(대보리심)나
byaṅ chubkyisems(보리심)이라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따라서
그는 『시설론』의 산스끄리뜨 원전에는 보리심이라는 용어가 없었다고
말한다.
유부 7논의 하나인 『發智論』에는 보리심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지
만,그 대신 世第一法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논술되어 있다.세제일법은 성
문과 연각,그리고 보살의 三乘에 공통하는 것으로,초기불교의 如實知見
에 상당하는 개념이다.이 마음은 범부와 성자를 구별하는 마음으로 성자
의 경계에 들어가기 직전에 생기하는 마음이며 출세간을 희구하는 마음이
다.하지만 보리심과는 달리 이 마음은 자기완성에 몰두하는 마음 작용일
뿐,생사윤회에 빠진 유정을 구제하고자 하는 이타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
다.123)한편,『발지론』의 주석서인 『大毘婆沙論』에는 보리심이라는 용
어가 初發菩提心이라는 표현으로 몇 차례 나온다.그렇지만 여기서 보이
는 보리심은 대승불교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무상정등보리를 구하는
보리심과는 다르다.왜냐하면 『대비바사론』의 보리심은 언제나 세제일
법과 연관되어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즉 그것은 이타의 정신이 결여된
122)田上太秀(1990),p.69.
123)田上太秀(1990),pp.7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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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대승의 보리심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124) 『대비바사론』은
한역으로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초발보리심의 산스끄리뜨 원어를 정확
히 알 수는 없지만,대승불교의 문헌과 동시대인 카니쉬카(Kaniṣka,2세
기)왕 이후에서 나가르주나(3세기)이전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125) 대승불교도들로부터 보리심이란 용어를 차용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는 없다.
3)『마하바스투』와 보리심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불교 경전 및 부파불교의 유부 7논에는
보리심이라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고,보리심이라는 용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산스끄리뜨 원어가 bodhicitta인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가 없다.그렇
다면 대승불교의 십지사상과 보살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그 자체 안에 서원사상을 중시하여 대승적 색채가 짙은
『마하바스투』(Mahāvastu)에는 보리심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나올까?
실제로 『마하바스투』에는 단어로서의 bodhicitta가 2번 등장하는데,모
두 게송 중에 나타난다.그 한 예는 다음과 같다.
“어느 경우에도 선정을 멈추지 않고,어느 경우에도 보리심을 버리지 않는다.佛塔
에 덮개를 봉헌한 후 애정을 지니고 항상 환희심으로 불타오른다.”126)
게송으로 보리심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왜냐하면
게송은 전승자들이 기억하기 쉽도록 저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
124)田上太秀(1973),pp.29∼42.
125)정승석(1994),p.74.
126)“nadhyāna-hānirbhavatekadācitnabodhicittaṃ jahatekadācit,maitrāvihārīsada
hṛṣṭacittodaditvacchatram jina-cetiyeṣu.”Senart(1977),vol.2,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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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우연히 생긴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그렇다면,왜 그리고 어떻게
『마하바스투』의 작자는 보리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까? 타가미는
bodhicitta가 prathamacitta(초심)라는 표현 다음에 나오는 것에 주목해서,
어쩌면 보리심이라는 단어의 원형이 prathamacitta였을 것으로 추정한
다.127) Prathamacitta는 『마하바스투』에서 단어로서는 1번128),그리고
문장 가운데 분리된 형으로 2번129)나타난다.이 세 가지 예는 十地를 기
술하는 중에 나타나는데,제1지 ·제3지 ·제4지에 각각 표현되어 있다.
즉 제1지에서도,제3지에서도,그리고 제4지에서도 처음으로 깨달음을 향
한 마음이 생기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결국 최초의 발심은 제1지에
한정되지 않고,사람에 따라서 혹은 근기에 따라서 빨리 생기할 수도 있
고 늦게 생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게다가 prathamacitta를 일으키는 사
람은 단수형의 보살은 물론 복수형이 보살들에 의한 것이고,그들이 서원
을 세워 이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사슴의 무리가 큰 바위에 숨는 것처럼
과거의 모든 죄업이 소멸된다고 기술되어 있다.이와 같은 prathamacitta
의 위력을 『마하바스투』의 작자가 보리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의도
적으로 게송에 표현한 것으로 타가미는 이해한다.130)
그렇다고 해서 불교문헌 가운데 『마하바스투』에서 보리심이라는 용어
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왜냐하면 『마하바스투』
는 대단히 오래된 요소를 포함하면서,4∼5세기경의 기술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131)다시 말해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편저자가
현존의 모습으로 성립시켰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어쩌면 대승문헌으로
부터 영향을 받아 보리심이라는 단어를 차용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132)
127)田上太秀(1990),pp.115∼117.
128)Senart(1977),vol.1,p.104.
129)prathamaṃ cittam utpādayati.(Senart(1977),vol.1,p.182);prathamaṃ cittam
utpādayanti.(Senart(1977),vol.1,p.110).
130)타가미는 『8천송반야경』에 나오는 prathamacitta와 prathama-bodhicitta의 용례로
부터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우기도 한다.즉 『마하바스투』에 정착한 pathamacitta를
『8천송반야경』의 작자가 bodhi를 삽입하여 표현했고,그 후 prathama가 탈락하여
bodhicitta라는 독립한 단어가 되었다는 것이다.田上太秀(1990),pp.132∼133.
131)정승석(1994),p.102.
132)이와 관련하여 平岡聰(1999,pp.864∼859)은 『마하바스투』에 기술되어 있는 授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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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자성청정심과 보리심
보리심 개념의 유래와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보리
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그 용어가 의미하는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불교에는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미즈다니(水谷)는 그것을 心性
本淨,곧 自性淸淨心(prakṛti-śuddha-citta)이라고 본다.133) 대승불교는 心
性은 본래 청정하다고 설하고,본래 청정이라는 점에서 일체의 유정은 붓
다와 같다고 생각한다.이 심성본정(자성청정심)의 자각에 근거하여 비로
소 붓다의 깨달음을 구하고 그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상
이 나타난 것이다.
미즈다니는 일찍이 자성청정심이 여래장 사상의 형성과 어떠한 연관이
있었는지를 佛道 실천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보리심의 내용을 검토하
면서 연구한 적이 있다.134)그는 이 연구의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다.즉 “대승보살의 자각은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으로부터 발생하고,그
보리심의 전제가 자성청정심이다.보리심과 자성청정심을 心性說로서 결
합시키면서 佛道의 이론적 근거를 명확히 한 것이 바로 여래장설이다
.”135) 이러한 결론을 도출한 근거를 미즈다니는 그의 연구에서 설명하고
있는데,다음과 같다.즉 『여래장경』과 『보성론』에 설해진 여래장은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심성설로부터 직접 발전한 것으로 여래장설의 형
성 배후에는 심성본정설이 그 기반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그리
고 여래장이란 다름 아닌 자성청정심을 말하는 것이며,그 배후를 보다
근본적으로 고찰한 결과 자성청정심이 곧 보리심이라는 것이다.특히
의 내용이 편저자에 의해 소품계 반야경에 나와 있는 授記의 정형구로부터 차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본다.따라서 그는 『마하바스투』가 대승경전에 선행해서 그
발생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마하바스투』 → 대승경전’이라는 방향 대신에
‘대승경전 → 『마하바수트라』’는 역방향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133)水谷幸正(1984),p.261.
134)水谷幸正(1984),pp.255∼276.
135)水谷幸正(1984),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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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법계무차별론』136)에서 주제로서 설해진 보리심은 내용적으로는 자
성청정심인 여래장을 보리심이라는 용어를 빌려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히라가와(平川)역시 보리심이 번뇌와의 관계에서 파악될
때,자성청정심 혹은 심성본정이라고 불린다고 말한다.137)
반야경전 가운데 자성청정심과 보리심을 함께 다루고 있는 것이 있
고,138) 다수의 초기대승경전이 심성본정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부터 알 수 있듯이,심성본정과 보리심은 서로 어울려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왜냐하면 대승불교에서 심성본정설은 단순히 마음의
본성이 청정하다는 것을 진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성불의 가능성과
보리심 생기의 근거와 같은 문제의 사상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이로
인해 『대승법계무차별론』과 같은 여래장계 문헌에서는 보리심과 자성청
정심인 여래장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기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
미즈다니의 연구에서처럼 보리심과 자성청정심을 동일한 것으로 보더라
도,심성본정설의 배후가 보리심설인지,아니면 보리심설의 배후가 심성본
정설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그렇지만 사상사적으로
볼 경우,심정본정설이 앞서고 보리심설이 나중에 전개된 것으로 이해된
다.왜냐하면 몇몇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된 바와 같이139),심정본정설은
대승경전 이전의 Aṅguttara-nikāya140)와 『사리불아비담론』141) 등에 설
136)『대승법계무차별론』에 설해진 보리심과 여래장의 관계에 대해서는 渡辺新治(1985b,
pp.29∼42)& 田上太秀(1990,pp.400∼416)참조.
137)平川彰(1968),p.201.
138)대표적인 것이 『8천송반야경』의 서두 부분에 나타난다.즉,“다시 또한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에서 행하고 반야 바라밀을 닦는 보살마하살은 배우면서도 그 깨달음을 구
하는 마음(보리심)에 의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그렇게 배워야 합니다.왜냐하면,그 마
음은 마음이 아니어서,마음은 본래 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김형준(2003),pp.2∼3.
139)平川彰(1968),pp.204∼211에서 히라가와는 반야경 이전의 심성본정설과 관련하여
여러 경전들을 인용하고 있다.심성본정설의 계보와 관련한 연구들은 平川彰(1968),p.
205,no.1 참조.
140)심성본정설의 최초의 典據로서 활용되는 Aṅguttara-nikāya의 경문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이 마음은 빛나는 것(pabhassara)이다.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
염된다.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한다.그래서 배
우지 못한 일반사람에게는 마음의 수행이 없다고 나는 말한다.수행승들이여,이 마음
은 빛나는 것이다.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에서 벗어난다.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그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그래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에게 마음의 수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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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져 있고,대승교도 이전의 분별론자와 대중부 등이 이미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히라가와와 미즈다니는 범부 보살이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로서의 자각을 지니게 되는 것은 자성청정심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한
다.물론 그들에게는 이 자성청정심은 보리심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심정본정을 가리킨다.
4.경론에 나타나는 보리심
대승불교와 밀교의 문헌에 나타난 보리심 개념은 동일하지 않다.밀교
의 보리심은 대승불교보다 더욱 복잡하고 확장된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
다.그렇다고 해서 대승불교의 보리심 개념이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라
는 오직 한 가지 의미로만 통일되게 이해되어 온 것은 결코 아니다.왜냐
하면 대승불교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하나의 단일한 현상이 아니라,다양
성을 전제로 하는 정신적이며 실천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다.다양한 운동
의 전개 가운데 보리심 개념이 등장한다.따라서 보리심은 인간들의 다양
한 정신적인 요청과 종교적 열망에 대한 다양한 응답 속에 자리하고 있
다.만약 우리가 보리심이라는 용어를 대승불교 안에서 하나의 통일된 현
상을 지칭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윌리엄스(Williams)가 지적하는 것처럼
‘본질론자의 오류’(essentialistfallacy)142)에 빠지게 될 지도 모른다.
일찍이 나나야까라(Nanayakkara)와 조쉬(Joshi),그리고 타가미(田上)는
고 나는 말한다.”(전재성,2007,pp.132∼133)AN.VI.1-2(vol.1,p.10).
141)Aṅguttara-nikāya의 경문과 내용적으로 일치하는 『사리불아비담론』의 경문은 다음
과 같다.心性淸淨 爲客塵染 凡夫未聞故 不能如實知見 亦無修心 聖人聞故 如實知見 亦
有修心 心性淸淨 離客塵垢 凡夫未聞故 不能如實知見 亦無修心 聖人聞故 能如實知見 亦
有修心.TD 28,p.697b.
142)Williams(2009),p.2.이 오류는 우리가 하나의 이름 혹은 이름 붙인 표현을 받아들
이고,그것이 틀림없이 하나의 통일된 현상을 말하고 있다고 추정할 때 발생한다고 윌
리엄스는 말한다.즉 언어를 통해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또 정의하는 것은 있지도
않은 공통적 특성을 가정함으로써 출발부터 논리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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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여러 가지 산스크리트 문헌들을 조사하면서 보리심이라는 용어가
지닌 다양한 의미,특히 대승불교와 밀교로 양분되어 드러나는 보리심의
서로 다른 두 가지 모습을 밝힌바 있다.143)특히 조쉬에 따르면,대승불교
의 경론에서는 대개 보리심을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행하는 강한 결
심”,다시 말해,바른 깨달음(samyak-sambodhi)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각
혹은 의지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해한다.즉 대승불교에 있어 보리심은 어
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삶의 양식(awayoflife)또는 행
동 양식(awayofproceeding)에 다름 아닌 것이다.반면,밀교에 나타나
는 보리심에 대해서 그는 깨달음과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 혹은 길로
서의 보리심이 아니라,至高의 실재로서 ‘열반 그 자체’혹은 ‘불성’이라고
설명한다.인간과 세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
적 실재가 바로 보리심이라는 것이다.
한편,브라사드(Brassard)는 종교언어가 지닌 세 가지 측면144)을 설명하
는데,그에 따르면 대승불교는 보리심이라는 용어의 기능적(functional)·
윤리적(ethical)측면을,밀교는 형이상학적(metaphysical)측면을 강조한
것이 된다.그렇다고 이러한 다의성과 불확실성을 보리심이라는 용어가
지닌 결함이라고 평가 할 수는 없다.왜냐하면 보리심이라는 용어는 대승
불교 사상이 전개되어온 역사의 물결 속에서 언제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대승경전과 논서에 나타나는 보리심의
개념을 여기서 모두 다 제시할 수는 없지만,나나야까라와 조쉬의 보리심
에 대한 짧은 글에서 열거된 몇 가지 대승 문헌들의 목록을 참조해서 보
리심 개념의 역사적 전개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1)대승 문헌에 나타나는 보리심
143)Nanayakkara(1961),pp.184∼189& Joshi(1971),pp.70∼79& 田上太秀(1990).
144)Brassard(2000),pp.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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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쉬는 가장 먼저 샨띠데바의 Śs와 BCA 7장 게송46에 인용되어 있는
『金剛幢經』(Vajradhvaja-sūtra)을 예로 든다.이 경전에는 보리심이란
술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그는 “나는 모든 유정이 짊어진 [고통의]짐을
책임져야만 한다.그것은 나의 욕망 때문이 아니고,모든 유정을 구제하고
자 하는 나의 결심(서원)이다.나는 모든 유정을 해탈로 이끌 것이다.”145)
라는 보살의 결심을 자비(karuņā)로부터 흘러나오는 보리심의 목소리로
이해한다.146)이러한 자비심에 의한 보리심의 목소리는 반야계 경전류 가
운데에서 가장 최초의 것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진 『8천송반야경』에 그
대로 이어져,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보살은 크게 마음 아파하며 저
일체 유정을 그 위대한 사랑과 그 위대한 연민으로 덮고는,‘나는 이 일체
유정의 구제자가 되리라.이들 일체 유정을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
겠노라’고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니라.”147)
『8천송반야경』에는 경전의 첫 부분에 반야바라밀행을 서술한 뒤 곧이
어 보리심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게다가 ‘마음은 마음이 아니다.그 마
음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서술이 이어진다.148)
하리바드라(Haribhadra)는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보리심은 깨달음을 구
하는 마음이다.서원과 약진의 성질을 지닌 마음을 말한다.”149)라고 말한
다.나아가서 보리심의 내용으로서 “보리심은 공성과 자비의 胎(또는 태
아)이다.”150)라고 덧붙인다. 『8천송반야경』에는 보살이 大士
145)avaśyaṁ nirvāhayitavyomayāsarva-sattvānāṁ bhāraḥ|naiṣamamakāmakāraḥ
|sarva-sattvottāraṇa-praṇidhānaṁ mama |mayā sarva-sattvāḥ parimocayitavyāḥ.
Vaidya(1961a),p.148(ℓ.18∼19).
146)Joshi(1971),p.71.
147)김형준(2003),p.377.
148)김형준(2003),pp.2∼3참조.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bodhicitta의 한역이 『소품반야
경』에서는 ‘菩薩心’으로,『불모출생반야경』에서는 그냥 ‘心’으로 되어 있다.아마도
최초기의 번역에서는 보리심이라는 용어가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았던 것으
로 보인다.
149)bodhy-arthaṃ cittaṃ bodhicittaṃ praņidhi-prasthān ’ātmakaṃ cittam itiyāvat.
(AbhisamayālaṅkārālokāPrajñāpāramitāvyākhyā,p.82)田上太秀(1990),p.281에서 재
인용.
150) śūnyatā-karuņā-garbhaṃ bodhicittaṃ. (Abhisamayālaṅkārālokā
Prajñāpāramitāvyākhyā,p.16)田上太秀(1990),p.281에서 재인용.Garbha를 胎로 해
석할지 태아로 해석할 지에 대해서는 6장의 「śūnyatā-karuņā-abhinna」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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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āsattva)인 이유를 서술하면서 ‘다섯 가지 마음’151)을 열거하는데,그
가운데 보리심이 첫 번째로 나타난다.한편,『2만5천송반야경』과 『10만
송반야경』에서도 보살이 대사라고 불리는 이유를 ‘다섯 가지 마음’을 지
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그 내용은 『8천송반야경』과 다르다.
『2만5천송반야경』과 『10만송반야경』에서는 이 다섯 가지 마음을 보리
심의 異名으로 간주하여,이 다섯 마음을 지니지 않고는 보리심이 생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152)
『2만5천송반야경』의 주석서인 『현관장엄론』(Abhisamayālaṃkāra)은
8가지 現觀(abhisamaya)153)을 제시하여 반야경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고
있으며,8가지 현관 속에 세부적으로 70가지 義(주제)를 열거하는데,그
첫 주제로 다음 게송과 같이 ‘발심’(cittotpāda,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의
정의가 등장한다.“발심은 다른 이들을 위하여 완전한 깨달음(정등각)을
희구하는 것이다.”154) 이 게송에 연이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뒤따른다.
“깨달음을 성취하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
는 발심은 이타를 위하여 정등각을 원하는 것을 특성(相)으로 하고,願
(praņidhāna)과 실행(prasthāna)이라는 두 가지 자성을 가진다.”155) 이처
럼 발심이 70가지 주제의 첫 주제로 등장하기 때문에 티벳의 많은 학자들
151)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bodhi-citta, 보리심) · 일체지성을 구하는 마음
(sarvajñātā-citta,一切智性心)·번뇌 없는 마음(anāsrava-citta無漏心)·뛰어난 마음
(asama-citta,不等心)·비할 바 없는 마음(asamasama-citta,不等等心).김형준(2003),
p.16& Vaidya(1960b),p.10(ℓ.5∼6).
152) 보리심의 다른 이름인 ‘다섯 가지 마음’은 金剛喩心(vajropama-citta), 廣大心
(udāra-citta), 不動心(akampya-citta), 利益安樂心(hita-sukha-citta), 欲法喜法樂法心
(dharmarāga-dharmarata-dharmāramata-citta)이다.‘금강유심’은 유정을 버리지 않는
정신에 입각하여 유정의 고통을 자신이 대신 받으며,또한 불생불명의 실제를 아는 것
이고,‘광대심’은 三毒을 버리고 성문연각등과 유사한 마음을 생기하지 않는 것이며,
‘부동심’은 일체는 공성임을 알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이익안락심’은 모든
유정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는 마음이며,‘욕법희법낙법심’은 법에 대한 애정과 기쁨의
마음이다.田上太秀(1990),pp.282∼289참조.
153)道(mārga)와 동의어로 사용되는 현관의 의미에 대해서는 眞野龍海(1972),pp.36∼42
참조.8가지 현관(一切相智性 ·道智性 ·一切智性 ·一切相現等覺 ·頂現觀 ·漸現觀 ·
一刹那現等覺 ·法身現等覺)과 70가지 주제의 목록은 眞野龍海(1972),pp.75∼79참조.
154) 眞野龍海(1972),p.102; cittotpādaḥ parārthāya samyak-sambodhi-kāmatā(18ab,
Stcherbatsky& Obermiller,1992,p.2).
155)眞野龍海(1972),pp.102∼103& Obermiller(1936),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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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발심을 대승불교로 들어가는 입구로 파악하기도 한다.156)발심의 정의
에 이어 『현관장엄론』은 22가지 비유를 들어 발심을 설명하고,발심에
수반하는 덕목과 그 이유를 차례로 열거하는데,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57)
1)땅 ·樂欲 ·일체의 白法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에.2)황금 ·意樂 ·정등각에
이를 때까지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3)달 ·增上意樂 ·일체의 선법이 증대하기
때문에.4)불 ·加行 ·세 가지 一切智에 장애가 되는 장작을 태우기 때문에.5)
창고 ·보시 ·모든 유정을 만족시키기 때문에.6)보배산 ·지계 ·덕이라는 보석
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에.7)바다 ·인욕 ·원하지 않는 것이 발생하더라도 흔
들리지 않기 때문에.8)금강 ·정진 ·견고하여 파괴되지 않기 때문에.9)산 ·선
정 ·소연의 산란에 의해서도 동요되지 않기 때문에.10)약 ·반야 ·번뇌장과 소
지장의 모든 병을 적멸하기 때문에.11)친구 ·선교방편 ·어떤 경우에도 유정의
이익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12)여의주 ·願 ·원하는 그대로 결과를 성취하기 때
문에.13)태양 ·力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성숙시키기 때문에.14)법의 묘음 ·
智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교화하는 법을 설하기 때문에.15)왕 ·신통 ·부동
의 위력으로 이타를 원만케 하기 때문에.16)곳간 ·복덕과 지혜 ·복덕과 지혜의
많은 자량을 저장하고 있기 때문에.17)大道 ·보리분법 ·모든 성자의 수레가 지
나가기 때문에.18)수레 ·자비 ·윤회와 열반의 어느 것도 추락하지 않고 쉽게
나아가기 때문에.19)샘 ·다라니와 변재 ·이미 들은 법이나 아직 듣지 않은 법
을 지녀 다함이 없기 때문에.20)목소리 ·법회 ·해탈을 바라는 존재에게 좋은
말이기 때문에.21)강 ·一乘道 ·이타행에 차별이 없기 때문에.22)구름 ·법신
·천궁에 머물기 때문에.
『유가사지론』(Yogācārabhūmi)의 『보살지』(Bodhisattvabhūmi)에는
비록 보리심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않지만,보리심의 대명사처럼 사용되
는 초발심(prathamacittotpāda)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보리심에 대해서 서
술하고 있다.『보살지』에는 초발심의 自性,行相,所緣,功德,그리고 最
勝의 다섯 가지가 상세하게 논술되어 있다.158) 우선 자성과 관련해서 모
든 바른 서원 가운데 최초로 일어나며,모든 서원을 포함하는 것이 초발
156)Sparham(1987),p.143.
157)眞野龍海(1972),pp.104∼105.
158)田上太秀(1990),pp.373∼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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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데,이것이 보리심의 ‘자성’이다.그리고 자리와 이타라는 두 가지 목
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보리심의 ‘행상’이다.초발심은 ‘깨달
음’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유정의 이익’을 대상으로 하는 두 가지이지만,
깨달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성문 연각의 깨달음과는
다르다.왜냐하면 보살의 발심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
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즉 스스로의 깨달음과 중생의 구제를 동시에
‘소연’으로 하는 것이 초발심이다.159)이 초발심으로부터 모든 善根공덕이
생기며,따라서 이보다 뛰어난 발심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이 외에
도 『보살지』에는 ‘種姓과 초발심의 관계’를 비롯해서 4緣 ·4因 ·4力과
같은 ‘발심의 因緣’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160)
『보살지』를 기초로 저작된 『대승장엄경론』(Mahāyānasūtrālaṃkāra)
은 4장 「발심품」(cittotpāda-adhikāra)과 9장 「보리품」(bodhiadhikāra)에서
보리심에 대해 다루고 있다.우선 「발심품」 게송2에서는
발심의 종류를 4가지로 구분한다.즉 신해에 의한 것,청정한 增上意樂에
의한 것,이숙에 의한 것,그리고 장애를 떠난 것이다.이 4종류의 발심은
159) 유가사지론 에 기술된 자리와 이타의 문제는 안성두(2006,pp.159∼174)와 김성철
(2009,pp.241∼251)에 의해 상세하게 연구되었다.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즉 유
가사지론 은 보살이 성문보다 뛰어난 이유로서 자리와 이타를 동시에 행하는 점을 든
다. 보살지」 서두에 보살이 성문보다 네 가지 측면에서 뛰어나다고 말하고,그 두 번
째인 바른 실천(pratipatti,行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성문과 독각은 자신
을 위해 바르게 실천하는 자이다.보살은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많은 생명
과 많은 생명의 행복을 위해,세간 사람들을 연민하기 위해,천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
복을 위해서도 바르게 실천하는 자이다.”(TD 30,p.479a,“言行勝者 謂諸菩薩亦能自利
亦能利他 利益安樂無量衆生 哀愍世間令諸天人獲得勝義利益安樂 聲聞獨覺唯行自利”)이
처럼 보살지 는 자리와 이타를 구분하면서도,보살이라면 원칙적으로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택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게다가 보살지 의 自利利他品 은 자리와
이타를 열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는데,첫째가 순수한 자리 및 순수한 이타,둘째가 이
타와 결합한 자리 및 자리와 결합한 이타이다.그래서 전자는 끊어져야 할 것이고 후
자는 익혀야 할 것이라고 한다.그리고 남은 여덟 가지 관점에서는 자리와 이타를 구
별하지 않고,自利즉利他 혹은 利他즉自利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다시 말해,자리와
이타를 긴밀히 통합시키고 있는 것이다(김성철,2009).하지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상
황에서 수행자에게 매 순간 자리와 이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대승
의 보살로서 일반적 경우에 이타성이 우선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이러한
이타의 우선성에도 어느 정도 제한이 있을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이를 위해 보살지
는 43종의 잘못된 행위를 열거하면서,어떤 경우에는 그 행위가 죄가 되고 어떤 경우
에는 죄가 되지 않는지를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안성두,2006).
160)田上太秀(1990),pp.37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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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地와 연관되는데,신해인 것은 신해행지에서,청정한 증상의락인 것은 7
가지 지에서,이숙인 것은 제8지에서,그리고 장애가 없는 것은 佛地에서
생기하는 발심이다.이 4가지 발심은 두 종류로도 구분되는데,신해에 의
한 발심은 ‘受世俗(samādāna-sāṃketika)발심’에,나머지 3가지 발심은
지혜에 의한 ‘第一義(pāramārthika)발심’에 해당한다.161) 「보리품」에서
는 붓다(佛)를 붓다이게끔 하면서 중생으로부터 붓다를 구분시켜주는 붓
다의 본성,즉 佛性 또는 佛體(buddhatva)의 의미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즉 중생의 본성이 무명이라면 붓다를 중생과 구별 짓는 붓다의 본성은 무
명을 파괴하는 깨달음(bodhi)이다.이 깨달음은 번뇌와 所知의 장애를 소
멸시킴으로써 모든 장애가 청정해진 一切種智(sarvākāra-jñāna)를 가리키
는데,이 깨달음에 대한 찬탄과 권고로 「보리품」을 마무리하면서,『대
승장엄경론』은 보리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이상과 같이 비견
할 수 없는 淸白法과 결합되기 때문에,또 불성은 이익과 안락의 원인이
기 때문에,최고의 善과 안락의 다함없는 광산(무진장,akṣarakara)이기
때문에,善慧(śubha-mati)를 가진 자는 보리심에 도달할 수 있다.”162)
바수반두(Vasubandhu)의 저작으로 알려진 단편의 『발보리심경론』
(Bodhicittotpada-sūtra-śāstra)163)에서는 보리심의 생성을 모든 종류의
진주와 소원을 성취시켜주는 여의주(cintāmaņi)가 생산되는 바다에 비유
한다.모든 신들과 인간,성문,독각,보살과 모든 도덕적 행위,그리고 명
상과 지혜 역시 보리심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마치 대지가 선하던 악
하던 관계없이 모든 중생들에게 거주지를 제공하는 것처럼,보리심도 모
든 유정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다. 보리심의 생성에는 자심
161)宇井伯壽(1981),pp.598∼599.
162)이지수(1998),p.61∼62.
163)총 12장으로 구성된 『발보리심경론』은 보리심의 생기와 6바라밀 수행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데,이것은 BCA의 구성과 유사한 점이 많다.『발보리심경론』의 구성은 다
음과 같다.권청(adhyeṣotpāda)·보리심 생기(bodhicittotpāda)·서원(praņidhāna)·보
시 바라밀(dāna-pāramitā) · 지계 바라밀(śīla-pāramitā) · 인욕 바라밀
(kṣānti-pāramitā)·정진 바라밀(vīrya-pāramitā)·선정 바라밀(dhyāna-pāramitā)·
반야 바라밀(prajñā-pāramitā) · 眞如法門(tathatā-dharma-mukha) · 공성의 특성
(śūnyā-lakśaņa)·공덕의 섭수(puņya-parigraha).Crosby& Skilton(2009)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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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trī)와 비심(karuņā)이 요청되는데,유정의 세계가 끝이 없는 것처럼
보리심의 공덕과 배양은 끝이 없다.보리심은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
서 연마되어야 할 뿐 아니라,다른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164)이러한 보리심을 생성하기 위하여 『발보리심경론』은 보리심
생기의 4가지 원인들을 제시하는데,첫째가 붓다에 대한 명상이고,둘째가
신체의 더러움에 대한 명상(부정관)이며,셋째는 유정에 대한 연민이요,
마지막이 무상정등각을 구하는 마음이다.165)
『화엄경』 중에서 보리심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는 『입법계
품』과 『십지경』의 두 가지가 대표적이다.특히 보리심의 공덕과 관련
하여 『입법계품』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여래가 보리심으로
부터 출생한다고 말하고 있으며,『십지경』에서는 무량한 유정을 이롭게
하는 선근이 보리심으로부터 생긴다고 말한다.이 두 가지 공덕 가운데
전자는 자리의 측면을,후자는 이타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
되어,『화엄경』 이후의 보리심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
다.166) 또한 『화엄경』에는 보리심의 본성(自性)과 작용(行相)의 측면에
서 보리심을 지칭하는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입법계품』에는
본성의 측면에서 보리심을 지칭하는 두 가지 그룹이 있는데,그 하나는
11가지의 異名이 서술되어 있는 부분이고167),다른 하나는 10가지로 서술
되어 있는 부분이다.168) 『십지경』에는 작용의 측면에서 보리심을 지칭
하는 7가지 이명이 나타난다.169) 게다가 『입법계품』에는 여러 가지 비
164)Nanayakkara(1961,p.185∼186),Joshi(1971,pp.71∼72),Crosby & Skilton(2009)
참조.
165)Crosby& Skilton(2009)참조.
166)田上太秀(1970),pp.87∼88.
167)大悲心(mahākaruņā-citta)·大慈心(mahāmaitrī-citta)·安樂心(sukha-citta)·饒益
心(hita-citta)·哀愍心(dayā-citta)·無執着心(asaṅga-citta)·方廣心(vipula-citta)·
無邊心(ananta-citta) · 無垢心(vimala-citta) · 淸淨心(viśuddha-citta) · 智心
(jñāna-citta)등이 그것이다.田上太秀(1970),p.89.
168)대비심 ·일체의 붓다를 공양하는 마음 ·일체의 佛法을 구하는 마음 ·크게 進趣하
는 마음 ·대자심 ·일체의 세간을 버리지 않는 마음 ·不虛幻心 ·말한 것을 실행하는
마음 ·일체의 붓다를 속이지 않는 마음 ·일체의 지혜를 구하고자 서원하는 마음 등
이다.田上太秀(1970),p.90.
169) 동등하지 않는 마음(atula-citta) · 뛰어난 마음(śreṣṭha-citta) · 숭고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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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를 들어 보리심을 설명하는데,『현관장엄론』에 나타나는 22가지 비유
를 훨씬 뛰어넘어 그 수가 무려 118가지이다.170) 『십지경』에는 보리심
을 大地에 비유해서 보리심의 대지로부터 흘러나오는 선근의 물이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 지혜의 바다로 들어간다고 말한다.또한 보살의 수행 단
계인 十地 각각에서 새로운 보리심의 생기를 서원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
가야 함을 기술하여 이 마음의 有無가 수행의 승패에 중요한 의의를 지니
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171)
조쉬는 보리심에 대한 철학적이며 승의적인 개념이
Nairātmyaparipṛccha-sutra에 잘 드러난다고 밝힌다.172) 이 짧은 경전은
보리심의 특성(lakṣana)에 대한 26개의 짧은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게송12에서 보리심은 “무자성이고 대상이 없으며 전적으로 공이고 의지처
가 없으며 일체의 희론을 뛰어넘는 것”173)으로 묘사된다.또한 “보리심은
단단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으며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붙
잡을 수도 없고”174) “길지도 짧지도 않고,둥글지도 뾰족하지도 않으며,
얇지도 두껍지도 않다.”175)왜냐하면 “보리심은 희지도 붉지도 않고,검거
나 노랗지도 않으며,색깔도 형태도 없기”176)때문이다.따라서 “보리심은
외도와의 논쟁의 한계를 뛰어넘어 반야바라밀의 본성을 지니는 것”177)이
(udāra-citta)·신비한 마음(vara-citta)·보배로운 마음(ratna-citta)·우수한 마음
(udgha-citta)·깨달음의 원인(buddhiya-hetu)등이다.田上太秀,1970,pp.90∼91 &
1990,pp.296∼298.
170)산스끄리뜨 원문에서는 118상이 기술되어 있지만,60권본에서는 117상이,80권본에서
는 116상이,40권본에서는 122상이 기술되어 있다.즉 원문에는 없지만 새로운 한역문
을 삽입한 것도 있고,역으로 원문에는 있지만,한역문에는 빠져있는 등 가지각색이다.
산스끄리뜨 원문과 각 한역의 비교는 田上太秀(1990),pp.149∼165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171)田上太秀,1970,pp.97∼98& 1990,pp.148∼149.
172)Joshi(1971),p.72.
173) niḥsvabhāvaṃ nirālambaṃ sarvaśūnyaṃ nirālayam| prapañca-samatikrāntaṃ
bodhicittasyalakṣaṇam ||12||Vaidya(1961b),p.175.
174)nakāṭhinyaṁ nacamṛdutvaṁ nacoṣṇaṁ naivaśītalam|nasaṁsparśaṁ naca
grāhyaṁ bodhicittasyalakṣaṇam ||13||Vaidya(1961b),p.175.
175)na dīrghaṁ nāpivā hrasvaṁ na piṇḍaṁ na trikoṇakam|na kṛśaṁ nāpina
sthūlaṁ bodhicittasyalakṣaṇam ||14||Vaidya(1961b),p.176.
176)na śveta nāpiraktaṁ ca na kṛṣṇaṁ na ca pītakam|avarṇaṁ ca nirākāraṁ
bodhicittasyalakṣaṇam ||15||Vaidya(1961b),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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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눈에 보이지 않으며 적정이다.그리
고 본성상 순수하고 실체를 지니고 있지 않다.”178)
샨띠데바의 BCA보다 조금 뒤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까마라쉴라
(Kamalaśila)의 『수습차제』(Bhavanākrama)「초편」에는 『대일경』의
3句를 상기시키는 3가지 수습항목, 즉 자비와 보리심, 그리고 실행
(pratipatti)에 대해 기술한다.179)이 셋은 대승불교의 본질적 요소로서 서
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자비는 모든 것의 토대이고,이 자비로부터 보
리심이 생기하며,보리심만으로도 크나큰 공덕이 되지만,보리심이 실행을
수반할 때,그 공덕은 더 없이 크게 되는 것이다.이 3가지 수습항목을 설
명하면서 까마라쉴라는 보리심을 원심(praņidhi-citta)과 행심
(prasthāna-citta)이라는 2가지로 정의한다.180) 원심은 ‘나는 모든 유정의
이익을 위하여 붓다가 될 것이다.’라는 결심 그 자체를,행심은 서원을 발
한 후에 보리심을 수행하는 것이다.181) 게다가 그는 『수습차제』 「중
편」에서 보리심을 두 가지 진리설과 연결시켜 세속과 승의라는 2가지 보
리심이 있다고 말한다.
2)밀교 문헌에 나타나는 보리심
대승불교의 보리심 개념은 밀교 문헌들에서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며 등
장한다.일반적으로 밀교에서 보리심은 깨달음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나아가서 금강살타(vajra-sattva)와 동일시되어 인생
177)bhāvanā-samatikrāntaṁ tīrthikānāmagocaram|prajñāpāramitārūpaṁ bodhicittasya
lakṣaṇam ||17||Vaidya(1961b),p.176.
178) anaupamyamanābhāsaṁ adṛśaṁ śāntam eva ca| prakṛti śuddham adravyaṁ
bodhicittasyalakṣaṇam ||18|| Vaidya(1961b),p.176.
179)Tucci(1986),p.157.
180)tac ca bodhicittaṃ dvividhaṃ praņidhi-cittaṃ prasthāna-cittaṃ.Tucci(1986),p.
192.
181)Tucci(1986),pp.15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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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궁극적 목표 혹은 승의적 실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되어 대승불교
에 비해 그 의미가 격상된다.182)조쉬는 이러한 현상을 ‘점진적 변화’183)라
고 부르며,위에서 살펴본 Nairātmyaparipṛccha-sutra에서 이러한 변화의
단초가 어렴풋이 보인다고 말한다.또한 나마이(生井)는 보리심이 단순히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에서 ‘깨달음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으로 전개되는
것을 사상사적으로 필연의 귀결이라고 평가한다.184)
그런데 이러한 변화와 격상을 보리심 개념이 사상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평가하기를 주저하는 학자들도 있다.왜냐하면 그들은 밀교가 대승불교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사상이라기보다는 중관과 유식,그리고 여래장
의 사상적 입장을 기저에 두고 그것을 구체적인 사물,즉 종교의례나 만
다라와 같은 도형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마쯔나가(松長)는 밀교의 성격을 단적으
로 ‘대승사상의 儀軌化’185)라 지칭하고,스즈키(Suzuki)는 ‘순수한 대승불
교의 퇴화’186)라고 간주하기도 한다.특히 다스굽타(Dasgupta)는 불교 딴
뜨라(밀교)가 대승불교의 사상을 채용함에 있어서 동일화와 체계화에서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일종의 秘敎的인 신학이나 교의로 변용시켰을
뿐이라고 말한다.187)다시 말해 밀교 경전에 산재해 있는 철학적 기술들
은 밀교의 독자적인 철학체계라기보다는 대승불교 교의의 단순한 차용일
뿐이라는 것이다.그래서 그들은 밀교의 교의와 수행의 중심에 있는 보리
심 사상 역시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밀교의 보리심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도 중기밀교 경전을
대표하는 『大日經』의 「住心品」에 서술되어 있는 3句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88)여래는 어떻게 해서 一切智를 얻었는가에 대한 물음,
182)Dasgupta(1991),p.89.
183)Joshi(1971),p.75.
184)生井衡(1970),p.25.
185)松長有慶(1971),pp.19∼32.
186)Suzuki(1953),p.175.
187)Dasgupta(1991),p.49.
188)『대일경』의 보리심 사상에 대해서는 田上太秀(1990,pp.443∼448),勝又後敎(1999,
pp.200∼205),津田眞一(1999,pp.361∼363),松長有慶(2003,pp.165∼171),김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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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일체지라는 지혜는 무엇을 因으로 하고,根으로 하고,究竟으로 하는가
라는 물음189)에 대해 여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보리심을 원인(因)으
로,자비를 근본(根)으로,방편을 목적(究竟)으로 한다.”190)여기서 원인은
종자에,근본은 뿌리에,구경은 열매에 비유된다.즉 보리심이라는 종자가
싹이 트고,그 뿌리에 있는 자비심에 의해 양육되어,마침내 열매에 비유
되는 여러 가지 방편이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인 것이
다.이러한 모든 기능을 지닌 것이 바로 일체지이다.
「주심품」에서는 계속해서 깨달음(菩提)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비
밀주여,깨달음이란 무엇인가.[그것은]스스로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아
는 것이니,비밀주여,그것이 바로 무상정등각이다.”191)그렇다면,그 보리
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대일경』은 “깨달음과 일체지는 자신의 마
음속에서 구해야 하나니,비밀주여,왜냐하면 마음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
이다.”192)라고 말한다.즉 본래 청정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깨달음이며 일체지이기 때문에,「주심품」의 3구로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내용은 ‘구하는 대상’(所取)인 깨달음이 ‘구하는 주체’(能取)인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된다.따라서 보리심이란 원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지만,‘깨달음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이기도 하는 셈이다.『대일
경』을 주석한 붓다구히야(Buddhaguhya)는 『대일경광석』에서 이러한
두 종류의 보리심,즉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byaṅchubkyiphyirsems)
과 ‘깨달음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byaṅchubkyiranbshingyisems)에
대해 설명하기도 한다.193) 『대일경』 「주심품」에서 설해진 보리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대일경』에 부속한 의궤류에 다음과 같이 정형화된
(2007)참조.
189)世尊如是智慧 以何爲因 云何爲根 云何究竟.대일경(TD 18),p.1b.
190)菩提心爲因 悲爲根本 方便爲究竟.대일경(TD 18),p.1bc.이 3구는 다른 문헌에 인
용되는 경우 변함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지만,까마라쉴라의 『수습차제』에서 근,인,
구경의 순으로 되어 있다.tadetatsarvajñānamūkaruņamūlāṃ bodhicittahetukamāup
yaparyavasānam iti.Tucci(1986),p.196.
191)袐密主云何菩提 謂如實知自心 袐密主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대일경(TD 18),p.1c.
192)自心尋求菩提及一切智 何以故本性淸淨故.대일경(TD 18),p.1c.
193)본 논문 5장 「다양한 보리심 분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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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써 정리되어 있다.
“보리심은 일체의 존재(법)에서 벗어나,온 ·처 ·계 및 소취와 능취를 버리고,법
무아평등성에 의해서 자신의 마음(自心)은 원래 생기하지 않는 것이며,공성을 자
성으로 한다.”194)
이처럼 공성을 본성으로 하는 무자성인 자기 자신의 마음,즉 보리심이
『대일경』 「세간성취품」과 「설본존삼매품」에서는 月輪 혹은 종자라
고 하는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것으로 상징화되어 기술된다.또한 그 상
징성은 요가의 관법을 통해서 수행자에게 체득이 가능하도록 의궤로서 구
성되어 있다.그래서 마쯔나가(松長)는 밀교에서는 대승불교의 사상을 철
학적으로 전개시키지 않고 의궤의 형태를 취하고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받
아들여졌다고 밝히고,이것을 ‘대승사상의 의궤화’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다.
『대일경』이 3구를 중심으로 보리심 사상을 전개하는데 비해,그것보
다 조금 뒤에 저술된 『보리심론』은 ‘3가지 문’(3門)을 중심으로 전개한
다.195)『보리심론』은 보리심을 大毘盧遮那佛身을 구하는 마음으로 정의
하는데,196)대비로자나불신을 성취하고자 보리심을 발한 후에 순차적으로
194)菩提心離一切物 謂蘊界處能執所執捨故 法無有我 自心平等 本來不生如大空自性.대일
경(TD 18),p.16b.sarva-bhāva-vigataṃ skandha-dhātv-āyatana–grāhya-grāhakavarjitaṃ|dharma-nairātmya-samatayāsvacittam
ādy-anutpannaṃ śunyatā-bhāvaṃ.
Bagchi(1965),p.8(ℓ.18∼19).『대일경』 의궤류에는 산스끄리뜨 원전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보리심구의 원어는 『비밀집회딴뜨라』를 통해 알 수 있다.이 구는 일반
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즉 ‘일체의 존재에서 벗어나는 것’은 외도에 의해 영원
불멸한 실체로서 간주되는 아뜨만(ātman)·뿌드갈라(pudgala)등의 법을 떠나 인무아
의 입장에 들어가는 것이고,‘온 ·처 ·계 및 능취 소취를 버리는 것’은 온처계 등의
구성요소가 실재한다고 하는 생각을 떠나 법무아에 들어가는 것이며,‘법무아평등성’이
란 일체의 법이 마음의 현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가행파에 의한 해석에 들어가는 것
이고,그 현현한 마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설명으로 ‘자심은 불생이고 공성을 본성으
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즉 마음의 현현으로서 환과 같은 세계는 인정되지만,승의로
서는 그 마음 역시 무자성공이라는 중관의 입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195)『보리심론』의 보리심 사상에 대해서는 田上太秀(1990,pp.453∼461),勝又後敎
(1999,pp.205∼210),혜정(2000)참조.
196)“만약 요가 중에 보살들의 몸을 성취하고 싶다고 염원한다면,이것이 발보리심이라
불린다.”若願成瑜伽中諸菩薩身者 亦名發菩提心.보리심론(TD 32),p.57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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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해야하는 것이 바로 行願 ·勝義 ·三摩地라는 3가지 문이다.행원이
란 일체 유정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고 그들을 자기 자신의 신체처럼 돌보
는 것으로 자비심을 닦는 것이다.197) 승의란 일체법이 무자성이며 공인
것을 보는 것으로 반야심을 닦는 것이다.198) 행원과 승의를 바르게 수습
한다면,삼마지를 통해 모든 붓다의 본성에 통달할 수 있다.삼마지는 月
輪觀과 阿字觀을 중심으로 수습하고 三密行과 五相成身觀에 의해서 우주
와 합일되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다.이럴 경우 모든 붓다들의 법신을
깨닫고 法界體性智를 깨달을 수 있어,마침내 대비로자나불의 자성신 ·
수용신 ·변화신 ·등류신을 얻을 수가 있다199)고 『보리심론』은 기술한
다.
無上瑜伽密敎의 대표적인 聖典인 『비밀집회딴뜨라』
(Guhyasamāja-tantra)200)의 2장은 「보리심장」이라고 하여,보리심에 대
한 고찰이 주제로 되어 있다.여기서는 금강계를 구성하는 다섯 붓다 각
각이 보리심에 대한 자신들의 정의를 피력한다. 먼저 비로자나
(Vairocana)가 다음과 같이 보리심에 대해 말하는데,이것은 『대일경』
의 의궤류에 나타난 보리심의 정형구를 그대로 인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일체의 존재에서 벗어나 온 ·처 ·계,소취와 능취를 버리고 법무아평등
성에 의해서 자심은 불생이며,공성을 본성으로 한다.”이어지는 나머지
붓다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존재하는 것은 불생이고 법도 없고 법성도 없다.허공과 같이 무아인 이 깨달음의
실상은 견고하다.”라고 공경하올 아촉(Akṣobhya)금강여래는 말한다.201)
197)“나는 오로지 유정계를 이익케 하고 안락케 하고자 한다.시방계의 유정을 자기 자신
의 일처럼 생각하고 보살핀다.”我當利益安樂無餘有情界 觀十方含識猶如己身.보리심론
(TD 32),p.572c.
198)勝義者 觀一切法無自性.보리심론(TD 32),p.573a.
199)三摩地者 能達諸佛自性 悟諸佛法身 證法界體性智 成大毘盧遮那佛 自性身 受用身 變
化身 等流身.보리심론(TD 32),p.574c.
200)『비밀집회딴뜨라』의 보리심 사상에 대해서는 Nanayakkara(1961,pp.186∼187),
Joshi(1971,p.75),松長有慶(2003,pp.177∼184),정성준(2008,pp.61∼70)참조.
201)anutapannā ime bhāvā dharmā na ca dharmatā|ākāśam iva nairātmyam idaṃ
bodhi-nayaṃ dṛḍhaṃ∥ityāḥbhagavānakṣobhya-vajrastathāgataḥ.Bagchi(19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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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모든 법은 존재하지 않고,법의 상을 떠나 법무아에서 생겨난다.이 깨달음
의 실상은 견고하다.”라고 공경하올 보생(Ratnaketu)금강여래는 말한다.202)
“모든 법은 불생이기 때문에 존재도 없고 수습도 없다.허공의 句와 상응하기 때문
에 존재는 사라진다.”라고 공경하올 무량수(Amitāyus)금강여래는 말한다.203)
“모든 법은 본성으로서 청정광명이고,완전한 청정이어서 허공과 같은 것이다.깨
달음도 아니고 현관도 아닌 이 깨달음의 실상은 견고하다.”라고 공경하올 불공성취
(Amoghasiddhi)금강여래는 말한다.204)
다섯 붓다는 모두 보리심을 찬양하고 있는데,그 어느 정의나 『대일
경』에 설해져 있는 보리심에 관한 이해의 선,즉 일체법이 무자성이며
공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그런데 『續딴뜨라』라고 일컫어지는
『비밀집회딴뜨라』 18장에는 보리심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한 가지 특
이할 만한 진술이 있다.
“시작도 끝도 없고,고요하고 존재와 비존재를 떠난 主尊으로써,공성과 자비가 불
가분하게 연결된 것(空悲不二)이 보리심이라고 알려진다.”205)
이것은 새로운 진술인데,공성을 승의의 보리심,대비를 세속의 보리심
으로 보면,이러한 보리심의 정의는 『속딴뜨라』가 저술되기까지의 다양
한 보리심 사상을 일단 정리하고,새롭게 정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제지간인 Anaṅgavajra의 Prajñopāya-viniścaya-siddhi와 Indrabhūti
의 jñāna-siddhi에도 보리심에 관한 설명이 있다.먼저 Anaṅgavajra는 보
9(ℓ.1∼3).
202)abhāvaḥsarva-dharmāstedharma-lakṣaņa-varjitāḥ|dharma-nairātmya-sambhūtā
idaṃ bodhi-nayaṃ dṛḍhaṃ∥ityāḥ bhagavān ratnaketu-vajras tathagataḥ.
Bagchi(1965),p.9(ℓ.6∼8).
203)anutpanneṣu dharmeṣu na bhāvo na ca bhāvanā|ākāśa-pada-yogena itibhāvaḥ
prahīyate∥ ityāḥ bhagavān amitayur-vajras tathagataḥ.Bagchi(1965),p.9(ℓ.11∼
13).
204)prakṛti-prabhāsvarā dharmāḥ suviśuddhā nabhaḥ samā|na bodhirnābhisamaya
idaṃ bodhi-nayaṃ dṛḍhaṃ∥ ityāḥ bhagavān amoghasiddhi-vajras tathagataḥ.
Bagchi(1965),p.9(ℓ.16∼18).
205) anādi-nidhanaṃ śāntaṃ bhāvābhāva-kṣayaṃ vibhuṃ| śūnyatā-karuņābhinnaṃ
bodhicittam itismṛtam.Bagchi(1965),p.124(ℓ.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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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심을 반야와 방편이 不二의 상태에 있는 지고의 존재로 파악한다.반야
와 방편은 물과 우유의 혼합과 같이 아무런 구별이 없어져 반야방편
(Prajñopāya)이 되고,이것이 우주의 창조원리이자 모든 것이 이로부터
전개된다는 것이다.이 반야방편은 영원한 행복을 주기 때문에 大樂
(mahāsukha,최상의 至福)이라 불리고,완전한 吉祥이기 때문에 普賢
(Samantabhadra)으로 알려진다.206)Prajñopāya-viniścaya-siddhi중의 한
장은 궁극적인 진실에 대한 명상을 다루고 있는데,거기서는 반야와 방편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진실이란 함께 융합되어 있는 반야이기
도 하고 방편이기도 하다.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현상을 지멸한 것이므로
반야이고,그것은 또 여의보주처럼 중생의 이익을 위해 어떠한 것이라도
성취하므로 자비이다.”207)그의 제자 Indrabhūti역시 이 반야방편이 보리
심이고,또 일체의 불성을 지닌 金剛과 동일하다고 말한다.208)
반야와 방편의 不二의 상태인 보리심은 밀교문헌에서 여러 가지 비유적
표현에 의해서 다양하게 기술되는데,반야는 여성으로,방편은 남성으로
불린다.209) 이러한 비유는 『헤바즈라딴뜨라』(Hevajra-tantra)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러,반야와 방편이 무드라(mudrā)와 요가행자(yogin)라는 비
유적 표현으로 나타난다.무드라는 요가의 성취법에 채용된 위대한 여성
을 가리키며,보리심은 바로 여성인 무드라와 남성인 요가행자의 완전한
합일에서 생긴다.또한 무드라는 공성을,요가행자는 자비를 의미하기 때
문에,여성인 공성과 남성인 자비의 합일이 곧 보리심인 것이다.210)게다
206)Bhattacharyya(1929,p.xv)& Joshi(1971,p.75)참조.
207)Dasgupta(1991),p.92;다스굽타는 반야와 방편의 본성에 관한 논술이 많은 딴뜨라
들 속에서 나타난다고 밝히고,『善說綱要』(Subhāṣita-saṃgraha)와 『時論딴뜨라』
(Śrī-kāla-cakra-tantra)의 게송들을 소개한다(Dasgupta,1991,p.184,no.46).
208)“보리심이 바로 일체의 불성을 지닌 금강이다.왜냐하면 자아는 궁극적 실재와의 합
일에 의해 일체의 불성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bodhicittaṃ idaṃ vajraṃ
sarva-buddhatvam ātmanaḥ|tasmātsārvātmya-yogena sarva-buddhatvam āpnute.
jñānasiddhi15-47(Bhattacharyya,1929,p.86);Joshi(1971),p.76참조.
209)Dasgupta(1991,pp.97∼99)에 다양한 밀교 문헌들이 소개되어 있다.특히 『헤바즈
라딴뜨라』에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반야는 여성이고 방편은 남성이다.그런 다
음 이 두 가지는 절대적인 것(vivṛti)과 상대적인 것(saṃvṛti)으로 구분되어 두 가지 요
소가 된다.” yoṣit tāvad bhavet prajñā upāyaḥ puruṣaḥ smṛtaḥ|paścād anayor
dvaividhyaṃ vivṛti-saṃvṛti-bhedataḥ.Hevajra-tantra8-27(Snellgrove,1959,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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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헤바즈라딴뜨라』에는 다양한 여성 원리와 남성 원리의 화합에 대해
서도 기술되어 있는데,연꽃과 금강 ·모음과 자음 ·赤과 白 ·오른쪽과
왼쪽의 脈管 등의 합일로부터 보리심이 생기고 그것이 최상의 지복이라고
말한다.또한 종교적인 법열의 극치가 남녀 합체의 성적쾌락에 비유되어,
그것이 보리심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에서 특별히 중요시된 보리심은 후기대승의 시대에
이르면 종래의 ‘깨달음을 구하기 위한 마음’으로서의 보리심 외에 ‘깨달음
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이라는 의미의 보리심이 나타나게 되고,나아가서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그리고 반야와 방편의 합일이라는 의미의 새
로운 보리심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210)Dasgupta(1991),p.91;다스굽타는 여성 원리인 반야와 공성,남성 원리인 방편과 자
비의 합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헤바즈라딴뜨라』의 주석을 인용한다.“일체중생
과 자기의 동일성을 느끼는 마음이 자비이며,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므로 방편이다.또 그것은 요가행자이기도 하다.왜냐하면 그것은 요가행자의 근
본원리이기 때문이다.무드라는 반야이다.왜냐하면 그녀는 일체법의 不生이라는 의미
에서 공성이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그녀는 중생의 불생을 의미한다.왜냐하면 자기
로부터도 남으로부터도,또 그 둘이 결합한 것으로부터도,나아가서 그 둘이 결합한 것
이외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생겨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Dasgupta(1991),
p.183,no.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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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보리심의 전제이자 결론인
공성(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