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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佛說)비불설(非佛說)

VIS VITALIS 2016. 10. 11. 11:21

[문] 세존께서 지난날에 말씀하셨다. 
내가 멸도한 후에 다가올 미래세에는 많은 중생들이 쟁론을 일으켜, 이것은 불설(佛說)이니 이것은 비불설(非佛說)이니 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법인(法印)으로 그것을 인증(印證)하도록 하신 것이다. 만약 그 뜻이 수다라(修多羅)에 들어가고 비니(毘尼)를 수순하며 법상(法相)에 위배되지 않으면 이를 불설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입대승론 상권


 

견의보살(堅意菩薩) 지음

도태(道泰) 등 한역

김철수 번역


 

1. 의품(義品)

1.  품(  品)1)

[본래 제1품의 품명은 빠져 있음]
지금 대승의 뜻을 풀이해 들어가고자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대승의 뜻을 말하려고 하는가?
[답] 내가 중생들의 고통의 원인[苦因]을 막아주려 하기 때문이니, 지금 그대는 마땅히 잘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악지식을 가까이하여 악에 의해 잘못 이끌리게 되면 치우치게 자기 자신의 법에 집착하거나 전적으로 잘못된 견해에 집착하니 뒤바뀐 생각을 하므로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의 지혜를 따르지 않으며, 성스러운 말씀을 비방한다. 성스러운 말씀을 비방하는 사람은 정법(正法)을 무너뜨리며, 정법을 무너뜨리는 사람은 큰 죄의 과보를 받게
되나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법을 비방한 죄는 오역죄(五逆罪)보다 중하여 악도(惡道)가 길고도 멀며 오랜 동안 고통의 과보를 받는다.”

[중략]​

 

​[문] 부처님께서는 삼승(三乘)을 또한 마하연이라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답] 그렇다. 이 대승 가운데서는 또한 삼승을 설하고 있으니, 이를 삼장(三藏)이라 한다. 예를 들면 『보살장경』에서 부처님께서 아사세왕에게 고하신 것과 같다.
“족성자여, 장(藏)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성문장(聲聞藏)․벽지불장(辟支佛藏)․보살장(菩薩藏)을 말한다.

족성자야, 성문승이기 때문에 삼장이라 하지 않고, 또한 벽지불승이기 때문에 삼장이라 하지 않으며, 오로지 모든 보살이 대승을 배우는 까닭에 삼장이란 명칭을 얻는다. 왜냐하면 무릇 설법자가 삼승을 구족해야만 삼장이라 이름하니, 보살은 법을 설하여 삼승(三乘)을 구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삼장이라 한다’고 설한다.

족성자여, 세 가지 종류의 학인(學人)이 있으니 성문학․벽지불학․보살학이다. 성문승자는 벽지불승을 수학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벽지불승자는 보살승을 수학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역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족성자여, 오직 모든 보살만이 비록 성문승이나 벽지불승을 수학하더라도 성문도(聲聞道)나 벽지불도(辟支佛道)를 취(取)하여 증득하지 않고, 보살승을 수학하여 보살이 행하는 법을 깊이 깨달아 알아서 항상 즐거이 수순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보살승자를 삼장이라 하며 성문승이나 벽지불승의 경우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다른 경 가운데 구체적으로 분별하여 설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다만 간략히 설명할 따름이다. 그대가 생각을 두고 있는 것은 삼장이라 말할 수 없다. 그대는 지금 단지 『증일아함』․『중아함』․『장아함』․『잡아함』의 백천(百千) 등의 게(偈)를 일장(一藏)으로 여기고 비니(毘尼)․아비담의 이백천(二百千)의 게를 이장(二藏)이라 여기며, 이들을 완전히 갖추어 닦아 익히는 것을 삼장(三藏)이라 여긴다.

만일 이와 같이 말한다면 삼장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머지 모든 경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이러한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아함․비니․아비담 등이 또한 삼장이라면 『잡장(雜藏)』․『사두라경(舍頭羅經)』․『태경(胎經)』․『간왕본생(諫王本生)』․『벽지불인연(辟支佛因緣) 등 이와 같은 팔만사천법장이나 존자 아난이 부처님으로부터 받아 지닌 이와 같은 일체의 경전들이 다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과실이 있게 된다.

만약에 이러한 과실을 없게 하려면 일체가 다 부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설해진 것이 모두 장(藏)이라면 이는 곧 백천여 가지의 장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대가 규정한 삼장이라는 말은 저절로 무너진다.

 또한 아난은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지 20년 후에 바야흐로 승중(僧衆) 속에서 스스로 말씀하셨다.

​“내 나이가 매우 늙어 모름지기 사람들에게 법을 공급하여 전해야 하는데 어느 누가 내가 법을 공급하면 그것을 섬길 수 있는지 마땅히 스스로 감당할 수 있으면 말해 보아라.”

그때 대중들 거의 모두가 아난이 부처님의 법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난은 곧 함께 범행을 닦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여래에게는 팔만사천의 법무더기가 있어서 제가 지금 다 능히 받아 지닐 수 있으나, 이전의 20년 동안에는 두 사람의 비구만이 받아 지닐 수 있었으니, 저는 그것에 관해서는 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만 하나니, 아난이 받아 지닌 것을 다문(多聞)이라 할 수 없다. 부처님께 법을 설하시는 동안에도 아난은 실제로 법을 받아 지니는 일을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중아함』에서는 제석환인이 울다라(鬱多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존자시여, 내가 타심지(他心智)를 얻어 염부제의 일체 중생을 관찰해보니 어느 누구도 불법을 받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존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연이 있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아난이 일체의 불법을 다 받아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성문 제자나 아난은 불법을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러 대승경에서도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다.

예를 들면 『수능엄경』에서 부처님께서 정월장천자(淨月藏天子)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다.
아난이 받아 지닌 것은 양이 적어 ‘받아 지닌 것이 한량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법 가운데 백천억분의 일도 말하지 못하였다. 아난은 내가 설한 법 가운데 백천억분의 일도 지니지 못한다. 선남자여, 내가 하루 낮과 밤 동안에 시방세계의 범석(梵釋)․사천왕․천룡․야차․건달바와 그리고 모든 보살이 다 모여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지혜를 밝히는 수다라의 게송․장구와 중생이 행해야 하는 모든 바라밀을 설하였고, 성문․벽지불승을 설하여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찬탄하였으며, 모든 바라밀을 만족하게 하였고, 나아가 모든 천자들을 위하여 자세하게 법을 펴기를 하루 낮과 밤 동안에 설하였다.

 

설령 염부제를 가득 채울 만큼의 미진수와 같은 다문(多聞)의 지혜가 모두 아난과 같더라도 저 하루의 낮과 밤에 비하면 백천억분의 일만큼도 갖출 수 없으며, 나아가 다시 시방의 미진수 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의 다문이 모두 아난과 같다 하더라도 내가 하루 낮과 밤 동안에 설한 법을 받아 지닐 수 없음은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곳곳의 경전 가운데서 또한 아난이 부처님의 법을 감당하여 맡을 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아난이 일체의 부처님 법을 다 받아 지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 여래․세존께서는 아난에게 다문 가운데 제일이라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답] 부처님께서 성문 대중들 가운데서 짐짓 아난을 제일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보살이라고 일컫지는 않으셨다. 또한 그대들은 아난이 지닌 것도 다 듣지 못하는데, 하물며 대승이 갖추고 있는 깊은 뜻에 있어서랴.

그대의 생각이 만약 성문승을 보살승이라고 여긴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인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문승의 인(因)이 대승의 인과 다르지 않다면 과도 응당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타나는 과(果)가 다르기 때문에 인(因) 역시 다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문을 배우는 사람은 단지 번뇌의 장애만을 끊고 무상행(無常行)을 관(觀)하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법을 들어야 하지만, 보살은 미세한 모든 번뇌의 습기를 끊고 나아가 일체법이 결국은 공(空)임을 관하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연지(自然智)․무사지(舞師智)를 얻어 듣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성문승은 대승과 같을 수 없다.

[중략]

 


[문] 세존께서 지난날에 말씀하셨다. 
내가 멸도한 후에 다가올 미래세에는 많은 중생들이 쟁론을 일으켜, 이것은 불설(佛說)이니 이것은 비불설(非佛說)이니 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법인(法印)으로 그것을 인증(印證)하도록 하신 것이다. 만약 그 뜻이 수다라(修多羅)에 들어가고 비니(毘尼)를 수순하며 법상(法相)에 위배되지 않으면 이를 불설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답] 부처님께서 또한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성문승은 이것을 내가 설한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며 나아가 보살의 대승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다름이 없고[不異] 평등한 하나의 양상[一相]이기 때문에 법인에 의해 인증할 수 있다. 그대가 말한 ‘들어간다[入]’는 것은 이 뜻이 수다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니 문자에 의해 들어간다는 말인데, 만약에 문자에 의해 들어간다면 이러한 처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이부경(十二部經)은 일체 문장이나 게(偈) 그리고 장구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

[중략]​

[문] 당신은 이미 다른 사람이 대승을 비방하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마하연행에 들어가는가?
[답] 보살이 우선 종성(種性)을 갖추고 선행(善行)을 수순하면 깨달아 이해함이 광대해지고 내적인 마음이 광대해지며 계(界)의 영역이 광대해지고 종성이 광대해진다. 종성이 이미 구족되면 그 마음이 조화되어 부드럽고 점차적으로 번뇌를 여의며 탐진치가 적어지고 모든 선(善)을 닦기를 좋아하고 부지런히 힘써 보살의 대승법을 외워 익힌다. 이와 같은 중생은 육근(六根)이 광대하여 커다란 원(願)을 발현할 수 있으므로 불도를 구하려고 한다.

그 종성의 양상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하근하성(下根下性)은 도에 대해 뜻을 일으키는 것이 하(下)이고 원(願) 역시 하이다. 중근중성(中根中性)은 도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중이고 원 역시 중이다. 상근상성(上根上性)은 도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상이고 원 역시 상이다.

따라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 근성(根性)에 수순하시어 자애로운 마음으로 분별하여 가르치신다.

[문] 만약에 모든 중생들이 각기 별도의 근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그 근성에 따라 법을 설해야 하는가?
[답] 상근기의 중생을 위해서는 보살의 심오하고 오묘한 법장(法藏)을 설한다. 
그 근성이 보살행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살장을 설하는 것이다. 

[문] 보살장(菩薩藏)이란 어떤 지(地)에 머무르는 것인가? 
[답] 열 가지 종류의 행(行)이 있으며 해탈지(解脫地)에 이른다. 보살장을 청문(聽聞)할 수 있을 때에는 열 가지 종류의 법행(法行)을 얻을 수 있고, 해탈행을 떠나 곧바로 보살의 행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보살의 해탈행을 닦는 것이니, 많든 적든 다 닦아 익힌다. 둘째는 보살이 지니고 있는 법이 많든 적든 모두 베껴 쓰는 것이다. 셋째는 보살장의 법이 많든 적든 다 공양하는 것이다. 넷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다 펼쳐 읽는 것이다. 다섯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다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섯째는 보살의 법이 말든 적든 다 받아 지니는 것이다. 일곱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모두 익혀 외워 점차적으로 이로움에 통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다 분별하여 펼쳐 설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모두 사육하여 그 의미를 잘 알아내는 것이다. 열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혼자 있는 처소에서 사유하고 닦아 지혜를 쌓아 늘리는 것이다. 이상을 보살의 십행(十行)이라 한다. 여덟 번째 것은 보살의 문혜(聞慧)라 하고, 아홉 번째 것은 보살의 사혜(思慧)라 하며, 열 번째 것은 보살의 수혜(修慧)라고 한다.


[문] 보살이 이러한 문․사․수를 이미 얻었다면 어떤 행으로 들어가게 되는가? 
[답] 이미 지(地)를 얻었으면 해탈문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차례에 의해 문․사․수가 생하면 법계를 볼 수 있다. 자신의 지(地)에 대해 얻는 바가 있으면 세 가지 해탈문을 닦는다. 
[중략]

 

[문] 당신이 말한 바와 같이 만약에 마하연이 삼보의 종성이라면 모두 보살과 성문을 옹호하여야 하는데, 지금 여기서는 어찌하여 대승을 비방하는 자를 막아 저지하지 않는 것인가? 이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악도로 취향해 가지 않도록 하고, 불법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답] 업보는 결코 끊어 없앨 수 없다. 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결정적으로 증장하는 것이요, 둘째는 결정적으로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보살이나 성문 현성이 멸하여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악업을 지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니 구제받거나 그치게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구가리(瞿迦離)는 『마하연경(摩訶衍經)』이 악마가 설한 것이라고 비방하였는데, 이 비구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구할 자가 없을 것이다.  

 [이하 생략]

 

출처: 동국대학교 한굴대장경 http://abc.dongguk.edu/ebti/c2/sub2_pop.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