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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현고(釋玄高)

VIS VITALIS 2016. 10. 3. 19:03

8) 석현고(釋玄高)

釋玄高八

현고의 성은 위()씨이고, 본명은 영육(靈育)이다. 풍익(馮翊)의 만년현(萬年縣) 사람이다. 어머니 구()씨는 본래 외도를 믿었다. 위씨 가문에 시집와서 처음 딸 하나를 낳았다. 곧 현고의 큰 누님이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곧 부처님을 믿었다. 어머니를 위하여 기원하면서, 가문에 다른 견해가 없이 불법을 받들 수 있기를 소원하였다.

어머니는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3(401)에 꿈속에서, 인도 승려가 꽃을 뿌려 방에 가득한 것을 보고 깨어났다. 곧 임신하여 홍시 4(402) 28일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다. 집안에 문득 기이한 향기가 감돌았다. 더욱이 광명이 벽을 비추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마침내 멎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날 때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영육(靈育)이라 이름 지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존중하여 다시 세고(世高)라 일컬었다.

釋玄高姓魏本名靈育馮翊萬年人也母寇氏本信外道始適魏氏首孕一女卽高之長姊生便信佛乃爲母祈願願門無異見得奉大法母以僞秦弘始三年夢見梵僧散華滿室覺便懷胎至四年二月八日生男家內忽有異香及光明照壁迄旦乃息母以兒生瑞兆因名靈育時人重之復稱世高

나이 열두 살 때 부모님 곁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허락을 받지 못했다. 어느 날 어떤 서생(書生)이 현고의 집에 잠시 와서 잠자고는 말하였다.

중상산(中常山)에 들어가 숨어살고자 한다.”

부모는 곧 현고를 그에게 맡겼다. 이 날 저녁 마을사람들이 함께 이들을 전송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와서, 현고의 안부를 물었다. 부모가 말하였다.

어제 다들 같이 전송해 놓고, 지금 와서 다시 찾는가

마을 사람들이 말하였다.

간 것을 전혀 알지 못하거늘, 어찌 이미 전송했다는 말인가

부모는 비로소 어제 맞이하고 보낸 사람이 신이한 분임을 깨달았다. 현고는 처음 산에 이르자 곧 출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산승(山僧)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하였다.

부모가 허락하지 않으면, 불법을 깨달을[得度] 수 없다.”

이에 현고는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에게 입도(入道)를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2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앞서 세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이미 세속에 등을 돌리고 세상과 어긋나자, 이름을 현고라고 고쳤다. 총명하고 민첩한 데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는 지라, 배움에 생각을 더하지 않았다.

年十二辭親入山久之未許異日有一書生寓高家宿云欲入中常山隱父母卽以高憑之是夕咸見村人共相祖送明旦村人盡來候高父母云昨已相送今復覓耶村人云都不知行豈容已送父母方悟昨之迎送乃神人也高初到山便欲出家山僧未許父母不聽法不得度高於是蹔還家啓求入道經涉兩旬方卒先志旣背俗乖世改名玄高聰敏生知學不加思

열다섯 살이 되자 이미 산승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이후로는 오로지 선정과 계율에 정진하였다. 관중에 부타발타(浮馱跋陀) 선사(禪師)가 석양사(石羊寺)에 있으면서, 불법을 널리 편다는 소문을 들었다. 현고가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긴 지 열흘 사이에, 선법에 미묘하게 뛰어났다. 부타발타가 감탄하였다.

훌륭하구나불자여. 너의 깊은 깨달음이 이와 같구나.”

이에 얼굴을 낮추고 겸손히 양보하여 스승의 예를 받지 않았다. 현고는 곧 지팡이를 짚고, 서진(西秦)으로 갔다. 맥적산(麥積山)에 은둔하여 살았다. 이 산에는 백여 명의 학인이 있었다. 그의 교리의 가르침을 숭배하고, 그에게서 선의 도를 품수 받았다.

至年十五已爲山僧說法受戒已後專精禪律聞關中有浮馱跋陁禪師在石羊寺弘法高往師之旬日之中妙通禪法跋陁歎曰善哉佛子乃能深悟如此於是卑顏推遜不受師禮高乃杖策西秦隱居麥(/)山學百餘人崇其義訓稟其禪道

당시 장안에 사문 석담홍(釋曇弘)이 있었다. ()나라의 고승으로서 이 산에 은거하면서, 현고와 서로 만나 같은 선의 일을 닦으며 우의 좋게 지냈다. 당시 걸불치반(乞佛熾槃)은 농서(隴西)를 점령하였다. 서쪽으로는 양()나라와 접하였다. 외국 선사 담무비(曇無毘)가 그 나라로 들어왔다. 문도를 거느리고 무리를 이루어 선의 도를 가르쳤다. 삼매를 바르게 닦아, 이미 깊고도 미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농우(隴右)의 승려들 가운데 그에게 품수 받아 계승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에 현고는 곧 자기가 대중을 거느리고, 담무비로부터 법을 전수받고자 하였다. 그런데 열흘이 안 되어, 담무비가 도리어 그러한 뜻을 현고에게 아뢰었다.

時有長安沙門釋曇弘秦地高僧隱在此山與高相會以同業友善時乞佛熾槃跨有隴西西接涼土有外國禪師曇無毘來入其國領徒立衆訓以禪道然三昧正受旣深且妙隴右之僧稟承蓋寡高乃欲以己率衆卽從毘受法旬日之中毘乃反啓其志

당시 하남(河南)에 두 사람의 승려가 있었다. 비록 형상은 사문이었으나, 권세가 거짓 재상[僞相]과 짝하여 감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계율과 어긋나서 자못 학승들을 꺼려하였다. 담무비가 이미 서쪽 사이국(舍夷國)으로 돌아갔다. 두 승려는 곧 하남 왕세자 사마만(司馬曼)에게 현고를 헐뜯는 말을 꾸며 말하였다.

대중을 모아 축적하여 모으니, 장차 나라의 재앙이 될 것입니다.”

사마만은 그 헐뜯는 말을 믿고 곧 해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현고를 하북(河北)의 임양(林楊) 당산(堂山)으로 내쫓았다. 그 산의 나이든 늙은이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뭇 신선들이 이곳을 집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時河南有二僧雖形爲沙門而㩲侔僞相恣情乖律頗忌學僧曇無毘旣西返舍夷二僧乃向河南王世子曼讒搆玄高云蓄聚徒衆將爲國災曼信讒便欲加害其父不許乃擯高往河北林陽堂山山古老相傳云是群仙所宅

이때 현고의 제자들 3백 명이 산의 집에 가서 살았다. 마음이 태연자약하고, 선정과 지혜가 더욱 새로워졌다. 충정과 정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감응하여, 신령한 이적이 많았다. 경쇠는 치지 않아도 울리며, 향기도 저절로 풍겨났다. 또한 아라한과 신선들도 이따금 찾아와 노닐었다. 맹수도 길들인 듯 복종하며, 벌레와 독물의 피해도 없었다.

현고의 학도 가운데는 6(六根)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사람이 백여 명이었다. 현소(玄紹)는 진주(秦州) 농서(隴西) 사람이다. 배움은 모든 선()을 궁구하였다. 신통력이 자유자재하였다. 손가락에서 물이 나와, 그것으로 현고가 씻고 양치질하도록 바쳤다. 그 물의 향기롭고 청정함이 보통 물보다 두 배나 달랐다. 또 늘 세간의 것이 아닌 향과 꽃을 얻어서 삼보에 바쳤다. 신령하고 기이함이 현소와 같은 이가 열한 명이었다. 현소는 후에 당술산(堂術山)에 들어가, 매미가 허물을 벗듯 세상을 떠났다.

高徒衆三百往居山舍神情自若禪慧彌新忠誠冥感多有靈異磬旣不擊而鳴香亦自然有氣應眞仙士往往來遊猛獸馴伏蝗毒除害高學徒之中遊刃六門者百有餘人有玄紹者秦州隴西人學究諸禪神力自在手指出水供高洗漱其水香淨倍異於常每得非世華香以獻三寶靈異如紹者又十一人紹後入堂術山蟬蛻而逝

예전에 장안의 담홍(曇弘) 법사가 좌천되었다. 민촉(岷蜀泗川省)에 유배당하자, 도가 성도(成都)를 흠뻑 적셨다. 하남왕(河南王)이 그의 높은 명성에 기대고자 사신을 보내어 맞아들였다. 담홍은 이미 현고가 쫓겨났다는 말을 들었다. 맹세코 그의 청백함을 알리고자 하였다. 곧 산골짜기에 놓인 구름다리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명을 따랐다. 그리하여 하남에 도달하여 손님과 주인의 예를 마치고는, 곧 왕에게 말하였다.

왕께서는 이미 깊이 비추어보고 멀리 아시는 터에, 어찌하여 헐뜯는 말을 믿고 어진 이를 버리셨습니까빈도가 수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한마디를 아뢰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왕과 태자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고 뉘우쳤다. 곧 사신을 보내 현고를 찾아갔다. 자세를 낮추어 공손하게 사과하고, 현고에게 고을로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현고는 이미 널리 중생들을 구제할 마음을 품었다. 그런 까닭에 분한 생각을 잊고 명에 따라 하남으로 가기로 하였다. 처음 산을 나오려 하였다. 그러자 산중의 초목들이 꺾이고 부러지며, 바위가 무너져 길을 막았다. 현고는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나는 맹세코 도를 넓히려는 뜻을 가졌다. 그렇거늘 어찌 한 곳에만 매일 수 있겠는가

곧 바람이 멎고 길이 열렸다. 차츰차츰 나아가 나라에 이르렀다. 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길 가까이에서 기다리다가 영접하였다. 안팎이 공경하고 받들어, 그를 높여 나라의 스승으로 삼았다.

昔長安曇弘法師遷流岷蜀道洽成都河南王藉其高名遣使迎接弘旣聞高被擯誓欲申其淸白乃不顧棧道之難冒險從命旣達河南賓主儀畢便謂王曰旣深鑑遠識何以信讒棄賢貧道所以不遠數千里正欲獻此一白王及太子然愧悔卽遣使詣高卑辭遜謝請高還邑高旣廣濟爲懷忘忿赴命始欲出山山中草木槯折崩石塞路高呪願曰吾誓志弘道豈得滯方乃風息路開漸還到國王及臣民近道候迎內外敬奉崇爲國師

그는 하남에서 교화를 마치자, ()나라로 나아가 노닐었다. 저거몽손(沮渠蒙遜)이 깊이 공경하여 섬겼다. 영준한 손님들의 집회에서 현고의 뛰어난 해설을 펼치게 하였다.

당시 서해의 번승인(樊僧印)도 현고에게서 수학하였다. 뜻이 좁고 도량이 편벽하여, 적게 얻은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였다. 문득 자신이 이미 아라한의 경지를 터득하였음을 알았다. 그리고는 선의 관문을 완전히 다하였다고 일컬었다.

이에 현고는 비밀히 신통력으로써 선정에 든 승인(僧印)으로 하여금, 두루 시방 끝없는 세계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법문이 같지 않은 것을 보게 하였다. 승인은 한 철 하안거 내내 그가 본 바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영영 다할 수가 없었다. 비로소 선정의 물에는 바닥이 없음을 알았다. 크게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河南化畢進遊涼土沮渠蒙遜深相敬事集會英賓發高勝解時西海有樊僧印亦從高受學志狹量褊得少爲足便謂已得羅漢頓盡禪門高乃密以神力令印於定中備見十方無極世界諸佛所說法門不同印於一夏尋其所見永不能盡方知定水無底大生愧懼

당시 북위(北魏)의 오랑캐 척발도(拓跋燾)가 평성(平城)을 점거하였다. 그 군대가 양()나라 경계를 침범하였다. 척발도의 외삼촌인 양평왕 두초(杜超)가 현고에게 같이, 거짓 나라의 서울로 돌아가자고 청하였다. 평성에 도달하자, 현고는 크게 선에 의한 교화를 펼쳤다.

위태자(僞太子)인 척발황(拓跋晃)은 현고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는 한때 거짓 무고를 받아, 그의 부친으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이에 현고에게 말하였다.

공연히 무고를 겪는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까

현고는 금광명재(金光明齋)를 마련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7일 동안 간절히 참회하였다.

時魏虜拓跋燾僭據平城軍侵涼境燾舅陽平王社請高同還僞都旣達平城大流禪化僞太子拓跋晃事高爲師晃一時被讒爲父所疑乃告高曰空羅抂苦何由得脫高令作金光明齋七日懇懺

곧 척발도의 꿈에 그의 조부와 부친이 나타났다. 모두 검을 손에 잡고 매서운 위엄으로 물었다.

너는 무슨 까닭으로 헐뜯는 말을 믿고 태자를 멋대로 의심하느냐

척발도는 놀라 꿈에서 깨어나, 크게 뭇 신하들을 모아 자신의 꿈을 알렸다. 그러자 신하들이 모두 말하였다.

태자에게 허물이 없음은 참으로 황제의 영령들이 내려와 꾸짖은 것과 같습니다.”

척발도는 다시는 태자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현고의 정성스런 감응에 힘입은 것이다.

燾乃夢見其祖及父皆執劍烈威汝何故信讒言抂疑太子燾驚覺大集群臣告以所夢諸臣咸言太子無過實如皇靈降誥燾於太子無復疑焉蓋高誠感之力也

척발도는 이로 인하여 글을 내렸다.

짐은 조종의 거듭 빛나는 계통을 이어, 큰 기반을 열어 널리 만대에 융성하게 하고자 생각하였다. 그러나 무공(武功)에는 비록 밝으나, 문교(文敎)에는 아직 유창하지 못하다. 그러니 이것은 태평한 정치를 높이는 조건이 아니다. 지금 국내는 편안하고 백성들은 부유하며 창성하니, 마땅히 제도를 정해서 만세의 법으로 삼아야 한다.

무릇 음양에는 가고 옴이 있고, 사계절도 돌아가는 순서가 있다. 그러니 아들에게 물려주고 현인에게 맡기는 것이, 국가의 안전에 서로 부합되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피로한 몸을 쉬게 하여, 장구한 계책을 굳히는 것이 고금의 바뀌지 않는 훌륭한 방법이다. 짐과 여러 공신들은 오랫동안 부지런히 노력해 왔다. 이제는 벼슬길에서 은퇴하여 집으로 물러나, 얼굴을 화락하게 하고 작위를 높이며, 정신을 수양하여 수명을 기르면서 도를 논하여 꾀를 진술할 뿐, 다시 담당관리로서의 고통스럽고 힘든 직무를 친히 맡을 필요는 없다.

그리하여 황태자로 하여금 천하의 정사를 대신 다스리고 문무백관을 모두 통솔하게 한다. 다시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여서 여러 자리를 갖추고, 사람을 가려 뽑아 임무를 수여하여 쫓아낼 사람은 쫓아내고 들일 사람은 들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후생이 두렵다[後生可畏]’고 하셨다. 미래가 지금만 같지 못할지 어떻게 알겠느냐

이에 조정의 관료와 백성들은 태자에게 모두 신()이라 칭하였다. 태자에게 올리는 글은 황제에게 올리는 표()와 같이 하였다. 다만 흰 종이를 사용해서 구별하였다.

燾因下書曰朕承祖宗重光之緖思闡洪基恢隆萬代武功雖昭而文教未暢非所以崇太平之治也今者域內安逸百姓富昌宜定制度爲萬世之法夫陰陽有往復四時有代序授子任賢安全相付所以休息疲勞式固長久古今不易之令典也朕諸功臣勤勞日久當致仕歸第雍容高爵頤神養壽論道陳謨而已不須復親有司苦劇之職其令 皇太子副理萬機摠統百揆更擧良賢以備列職擇人授任而黜陟之故孔子曰後生可畏焉知來者之不如今於是朝士庶民皆稱臣於太子上書如表以白紙爲別

당시 최호(崔皓)와 구천사(寇天師)가 이전부터 척발도에게서 총애를 얻었다. 척발황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는 날이면, 그들의 위세의 칼자루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거짓으로 무고하였다.

태자가 전에 사실은 모반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만 현고의 도술과 인연을 맺은 까닭에, 돌아가신 황제폐하를 꿈에 내려오게 하였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여론과 일의 자취가 차차 그 윤곽이 드러납니다. 만약 죽여서 제거하지 않으면, 큰 해가 될 것입니다.”

척발도는 마침내 이를 받아들여 발끈하여 크게 노하였다. 곧 칙명으로 현고를 수감하게 하였다. 현고는 이에 앞서 어느 날 비밀히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불법이 아마도 쇠할 것이다. 나와 혜숭(慧崇)이 맨 먼저 그 화를 당할 것이다.”

이때 이 말을 듣고 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時崔皓寇天師先得寵於燾恐晃纂承之日奪其威柄乃譖云太子前事實有謀心但結高公道術故令先帝降夢如此物論事迹稍形若不誅除必爲巨害燾遂納之勃然大怒卽勅收高高先時嘗密語弟子云佛法應衰吾與崇公首當其禍乎于時聞者莫不慨然

혜숭(慧崇)

당시 양주(凉州) 사문 석혜숭(釋慧崇)은 위위(僞魏北魏)의 상서(尙書)인 한만덕(韓萬德)의 문사(門師)이다. 이미 현고 다음으로 덕이 높았다. 그도 역시 의심과 저지를 받았다.

북위의 태평(太平) 5(444) 9월에 현고와 혜숭은 함께 감옥에 유폐되었다가 그 달 15일에 화를 입어, 평성의 동쪽 한 귀퉁이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43세이다. 이 해는 전송(前宋)의 원가(元嘉) 21(444)이다.

그 날 저녁이 되도록 문도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 이 날 밤 3()에 문득 광명이 나타났다. 현고가 앞서 머물던 곳의 탑 주위를 세 바퀴 돌고, 다시 선을 닦던 굴 속으로 들어갔다.

이어 광명 속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미 갔다.”

제자들은 비로소 이미 돌아가셨음을 알고, 끊어지는 아픔으로 슬피 통곡하였다. 이윽고 시신을 성 남쪽 넓은 들에서 맞이하여 목욕시켰다. 아울러 혜숭의 시신도 따로 다른 곳에 수습하였다. 이에 온 도읍의 도인과 속인들이 놀라서 안타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時有涼州沙門釋慧崇是僞魏尚書韓萬德之門師旣德次於高亦被疑阻至僞太平五年九月高與崇公俱被幽縶其月十五日就禍卒於平城之東隅春秋四十有三是歲宋元嘉二十一年也當爾之夕門人莫知是夜三更忽見光繞高先所住處塔三帀還入禪窟中因聞光中有聲云吾已逝矣諸弟子方知已化哀號痛絕旣而迎屍於城南曠野沐浴遷殯兼營理崇公別在異處一都道俗無不嗟駭

제자 현창(玄暢)은 당시 운중(雲中)에 있었다. 북위의 도읍에서 6백 리 떨어진 곳이다. 아침에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나 변을 알려주었다. 이어 6백 리를 달릴 수 있는 말을 공급해 주었다. 이에 채찍을 휘두르며 돌아왔다. 해가 저물 무렵에 서울에 이르렀다. 스승이 이미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비통하여 숨이 막혔다. 이어 동학들과 함께 울면서 말하였다.

불법은 이제 멸하였다. 자못 부흥되겠는가만일 다시 부흥될 수 있다면, 스승님[和上]께서 일어나 앉으시기를 청해보자. 스승님의 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 반드시 이를 비추어보실 것이다.”

말이 끝나자 현고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빛에 기뻐하는 기색이 돌았다. 온몸에서 땀이 나왔다. 그 땀은 매우 향기로웠다.

弟子玄暢時在雲中去魏都六百里旦忽見一人告云以變仍給六百里馬於是揚鞭而返晩閒至都見師已亡悲慟斷絕因與同學共泣曰法今旣滅頗復興不如脫更興請和上起坐和上德匪常人必當照之矣言畢高兩眼稍開光色還悅體通汗出其汗香甚

잠시 후 그는 일어나 앉아서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불법의 교화는 인연을 따라 성하거나 쇠한다. 인연의 성쇠는 자취가 남으나, 진리는 깊고도 고요하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너희들이 머지않아 다시 나와 같이 되리라는 것이다. 오직 현창(玄暢)만이 남쪽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죽은 후에 불법은 곧 다시 일어날 것이니, 잘 스스로 마음을 닦아 중도에 후회함이 없게 하라.”

말을 끝마치자 곧 누워 숨이 끊어졌다. 이튿날 관을 옮겨 화장하려 하였으나, 나라의 제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무덤을 만들어 곧 묻었다. 도인과 속인들은 슬프고 애통하여, 소리 내어 울면서 가슴 에며 바라보았다.

須臾起坐謂弟子曰大法應化隨緣盛衰盛衰在迹理恒湛然但念汝等不久復應如我耳唯有玄暢當得南度汝等死後法當更興善自修心無令中悔言已便臥而絕也明日遷柩欲闍維之國制不許於是營墳卽窆道俗悲哀號泣望斷

사문 법달(法達)은 위국(僞國)의 승정(僧正)으로 있으면서 현고를 흠모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미처 수업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갑자기 현고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로 인해 울면서 말하였다.

성인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젠 다시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여러 날이 되도록 음식을 먹지 않고, 항상 현고의 이름을 불렀다.

현고 상인은 성인이시라 자유자재하실 터인데, 왜 한 번도 나타나시지 않습니까

그 소리에 응하여 현고가 허공을 날아서 그곳에 이르는 것이 보였다. 법달은 이마를 대어 예를 올리며, 애절하게 구호하여 보호해 주기를 원하였다. 이때 현고가 말하였다.

그대는 업보가 무거워 구해주기 어려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지금 이후라도 대승의 경전에 의지하여 간절하게 참회하면, 업보를 가볍게 받을 수 있으리라.”

법달이 말하였다.

만약 고통스런 업보를 받게 된다면, 어여삐 여기시어 구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有沙門法達爲僞國僧正欽高日久未獲受業忽聞怛化因而哭曰聖人去世當復何依累日不食常呼高上聖人自在何能不一現應聲見高飛空而至達頂禮求哀願見救護高曰君業重難救當可如何自今以後依方等苦悔當得輕受達曰脫得苦報願見矜救

현고가 말하였다.

일체 중생을 잊지 않아야 하거늘, 어찌 홀로 그대에게만 그러겠는가

법달이 다시 말하였다.

법사와 혜숭은 모두 어디에 태어나셨습니까

현고가 말하였다.

나는 악한 세상에 태어나 중생들을 구하여 보호하기를 원하여, 이미 염부제주에 환생하였다. 혜숭은 늘상 안양정토를 기원하여 이미 마음의 소원을 이루었다.”

다시 법달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만, 법사께서는 이미 어느 경지에 도달하셨는지요

현고가 말하였다.

나의 모든 제자들이 저절로 그것을 아느니라.”

말을 마치자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법달이 몰래 현고의 제자들을 방문하였다. 그러자 모두가 말하였다.

그 분은 정각을 이루기 직전의 보살[得忍菩薩]입니다.”

高曰不忘一切寧獨在君達又曰法師與崇公竝生何處高曰吾願生惡世救護衆生卽已還生閻浮崇公常祈安養已果心矣達又問不審法師已階何地高曰我諸弟子自有知者言訖奄然不見達密訪高諸弟子咸云是得忍菩薩

담요(曇曜)

북위(北魏)의 태평(太平) 7(446)에 이르자, 척발도는 과연 불법을 훼멸하였다. 모두가 현고의 말과 같았다. 당시 하서국(河西國)의 저거무건(沮渠茂虔) 치하에 사문 담요가 있었다. 역시 선 수행의 일로 칭송을 받았다. 위태부(僞太傅) 장담(張潭)이 그에게 엎드려 스승의 예로 모셨다.

至僞太平七年拓跋燾果毀滅佛法悉如高言時河西國沮渠茂虔時有沙門曇曜亦以禪業見稱僞太傅張潭伏膺師禮

고승전11(ABC, K1074 v32, p.871a01-p.873a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