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석현고(釋玄高)
釋玄高八
현고의 성은 위(魏)씨이고, 본명은 영육(靈育)이다. 풍익(馮翊)의 만년현(萬年縣) 사람이다. 어머니 구(寇)씨는 본래 외도를 믿었다. 위씨 가문에 시집와서 처음 딸 하나를 낳았다. 곧 현고의 큰 누님이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곧 부처님을 믿었다. 어머니를 위하여 기원하면서, 가문에 다른 견해가 없이 불법을 받들 수 있기를 소원하였다.
어머니는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3년(401)에 꿈속에서, 인도 승려가 꽃을 뿌려 방에 가득한 것을 보고 깨어났다. 곧 임신하여 홍시 4년(402) 2월 8일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다. 집안에 문득 기이한 향기가 감돌았다. 더욱이 광명이 벽을 비추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마침내 멎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날 때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영육(靈育)이라 이름 지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존중하여 다시 세고(世高)라 일컬었다.
釋玄高,姓魏,本名靈育,馮翊萬年人也。母寇氏,本信外道。始適魏氏,首孕一女,卽高之長姊。生便信佛,乃爲母祈願,願門無異見,得奉大法。母以僞秦弘始三年,夢見梵僧散華滿室,覺便懷胎,至四年二月八日生男。家內忽有異香,及光明照壁,迄旦乃息。母以兒生瑞兆,因名靈育。時人重之,復稱世高。
나이 열두 살 때 부모님 곁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허락을 받지 못했다. 어느 날 어떤 서생(書生)이 현고의 집에 잠시 와서 잠자고는 말하였다.
“중상산(中常山)에 들어가 숨어살고자 한다.”
부모는 곧 현고를 그에게 맡겼다. 이 날 저녁 마을사람들이 함께 이들을 전송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와서, 현고의 안부를 물었다. 부모가 말하였다.
“어제 다들 같이 전송해 놓고, 지금 와서 다시 찾는가?”
마을 사람들이 말하였다.
“간 것을 전혀 알지 못하거늘, 어찌 이미 전송했다는 말인가?”
부모는 비로소 어제 맞이하고 보낸 사람이 신이한 분임을 깨달았다. 현고는 처음 산에 이르자 곧 출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산승(山僧)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하였다.
“부모가 허락하지 않으면, 불법을 깨달을[得度] 수 없다.”
이에 현고는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에게 입도(入道)를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2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앞서 세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이미 세속에 등을 돌리고 세상과 어긋나자, 이름을 현고라고 고쳤다. 총명하고 민첩한 데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는 지라, 배움에 생각을 더하지 않았다.
年十二辭親入山,久之未許。異日有一書生寓高家宿,云欲入中常山隱,父母卽以高憑之。是夕咸見村人共相祖送,明旦村人盡來候高。父母云:“昨已相送,今復覓耶?”村人云:“都不知行,豈容已送?”父母方悟昨之迎送乃神人也。高初到山,便欲出家,山僧未許,云:“父母不聽,法不得度。”高於是蹔還家,啓求入道,經涉兩旬,方卒先志。旣背俗乖世,改名玄高。聰敏生知,學不加思。
열다섯 살이 되자 이미 산승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이후로는 오로지 선정과 계율에 정진하였다. 관중에 부타발타(浮馱跋陀) 선사(禪師)가 석양사(石羊寺)에 있으면서, 불법을 널리 편다는 소문을 들었다. 현고가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긴 지 열흘 사이에, 선법에 미묘하게 뛰어났다. 부타발타가 감탄하였다.
“훌륭하구나! 불자여. 너의 깊은 깨달음이 이와 같구나.”
이에 얼굴을 낮추고 겸손히 양보하여 스승의 예를 받지 않았다. 현고는 곧 지팡이를 짚고, 서진(西秦)으로 갔다. 맥적산(麥積山)에 은둔하여 살았다. 이 산에는 백여 명의 학인이 있었다. 그의 교리의 가르침을 숭배하고, 그에게서 선의 도를 품수 받았다.
至年十五,已爲山僧說法。受戒已後,專精禪律。聞關中有浮馱跋陁禪師,在石羊寺弘法,高往師之。旬日之中,妙通禪法。跋陁歎曰:“善哉!佛子,乃能深悟如此。”於是卑顏推遜,不受師禮。高乃杖策西秦,隱居麥(艹/積)山。山學百餘人,崇其義訓,稟其禪道。
당시 장안에 사문 석담홍(釋曇弘)이 있었다. 진(秦)나라의 고승으로서 이 산에 은거하면서, 현고와 서로 만나 같은 선의 일을 닦으며 우의 좋게 지냈다. 당시 걸불치반(乞佛熾槃)은 농서(隴西)를 점령하였다. 서쪽으로는 양(凉)나라와 접하였다. 외국 선사 담무비(曇無毘)가 그 나라로 들어왔다. 문도를 거느리고 무리를 이루어 선의 도를 가르쳤다. 삼매를 바르게 닦아, 이미 깊고도 미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농우(隴右)의 승려들 가운데 그에게 품수 받아 계승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에 현고는 곧 자기가 대중을 거느리고, 담무비로부터 법을 전수받고자 하였다. 그런데 열흘이 안 되어, 담무비가 도리어 그러한 뜻을 현고에게 아뢰었다.
時有長安沙門釋曇弘,秦地高僧,隱在此山,與高相會,以同業友善。時乞佛熾槃跨有隴西,西接涼土。有外國禪師曇無毘,來入其國,領徒立衆,訓以禪道。然三昧正受,旣深且妙,隴右之僧稟承蓋寡。高乃欲以己率衆,卽從毘受法。旬日之中,毘乃反啓其志。
당시 하남(河南)에 두 사람의 승려가 있었다. 비록 형상은 사문이었으나, 권세가 거짓 재상[僞相]과 짝하여 감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계율과 어긋나서 자못 학승들을 꺼려하였다. 담무비가 이미 서쪽 사이국(舍夷國)으로 돌아갔다. 두 승려는 곧 하남 왕세자 사마만(司馬曼)에게 현고를 헐뜯는 말을 꾸며 말하였다.
“대중을 모아 축적하여 모으니, 장차 나라의 재앙이 될 것입니다.”
사마만은 그 헐뜯는 말을 믿고 곧 해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현고를 하북(河北)의 임양(林楊) 당산(堂山)으로 내쫓았다. 그 산의 나이든 늙은이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뭇 신선들이 이곳을 집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時河南有二僧,雖形爲沙門,而㩲侔僞相。恣情乖律,頗忌學僧,曇無毘旣西返舍夷。二僧乃向河南王世子曼,讒搆玄高,云蓄聚徒衆,將爲國災。曼信讒便欲加害,其父不許,乃擯高往河北林陽堂山。山古老相傳,云是群仙所宅。
이때 현고의 제자들 3백 명이 산의 집에 가서 살았다. 마음이 태연자약하고, 선정과 지혜가 더욱 새로워졌다. 충정과 정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감응하여, 신령한 이적이 많았다. 경쇠는 치지 않아도 울리며, 향기도 저절로 풍겨났다. 또한 아라한과 신선들도 이따금 찾아와 노닐었다. 맹수도 길들인 듯 복종하며, 벌레와 독물의 피해도 없었다.
현고의 학도 가운데는 6문(門:六根)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사람이 백여 명이었다. 현소(玄紹)는 진주(秦州) 농서(隴西) 사람이다. 배움은 모든 선(禪)을 궁구하였다. 신통력이 자유자재하였다. 손가락에서 물이 나와, 그것으로 현고가 씻고 양치질하도록 바쳤다. 그 물의 향기롭고 청정함이 보통 물보다 두 배나 달랐다. 또 늘 세간의 것이 아닌 향과 꽃을 얻어서 삼보에 바쳤다. 신령하고 기이함이 현소와 같은 이가 열한 명이었다. 현소는 후에 당술산(堂術山)에 들어가, 매미가 허물을 벗듯 세상을 떠났다.
高徒衆三百,往居山舍。神情自若,禪慧彌新,忠誠冥感,多有靈異。磬旣不擊而鳴,香亦自然有氣。應眞仙士,往往來遊。猛獸馴伏,蝗毒除害。高學徒之中,遊刃六門者,百有餘人。有玄紹者,秦州隴西人。學究諸禪,神力自在。手指出水,供高洗漱,其水香淨,倍異於常。每得非世華香,以獻三寶。靈異如紹者,又十一人。紹後入堂術山,蟬蛻而逝。
예전에 장안의 담홍(曇弘) 법사가 좌천되었다. 민촉(岷蜀:泗川省)에 유배당하자, 도가 성도(成都)를 흠뻑 적셨다. 하남왕(河南王)이 그의 높은 명성에 기대고자 사신을 보내어 맞아들였다. 담홍은 이미 현고가 쫓겨났다는 말을 들었다. 맹세코 그의 청백함을 알리고자 하였다. 곧 산골짜기에 놓인 구름다리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명을 따랐다. 그리하여 하남에 도달하여 손님과 주인의 예를 마치고는, 곧 왕에게 말하였다.
“왕께서는 이미 깊이 비추어보고 멀리 아시는 터에, 어찌하여 헐뜯는 말을 믿고 어진 이를 버리셨습니까? 빈도가 수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한마디를 아뢰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왕과 태자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고 뉘우쳤다. 곧 사신을 보내 현고를 찾아갔다. 자세를 낮추어 공손하게 사과하고, 현고에게 고을로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현고는 이미 널리 중생들을 구제할 마음을 품었다. 그런 까닭에 분한 생각을 잊고 명에 따라 하남으로 가기로 하였다. 처음 산을 나오려 하였다. 그러자 산중의 초목들이 꺾이고 부러지며, 바위가 무너져 길을 막았다. 현고는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나는 맹세코 도를 넓히려는 뜻을 가졌다. 그렇거늘 어찌 한 곳에만 매일 수 있겠는가?”
곧 바람이 멎고 길이 열렸다. 차츰차츰 나아가 나라에 이르렀다. 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길 가까이에서 기다리다가 영접하였다. 안팎이 공경하고 받들어, 그를 높여 나라의 스승으로 삼았다.
昔長安曇弘法師,遷流岷蜀,道洽成都。河南王藉其高名,遣使迎接。弘旣聞高被擯,誓欲申其淸白,乃不顧棧道之難,冒險從命。旣達河南,賓主儀畢,便謂王曰:“旣深鑑遠識,何以信讒棄賢?貧道所以不遠數千里,正欲獻此一白。”王及太子然愧悔,卽遣使詣高,卑辭遜謝,請高還邑。高旣廣濟爲懷,忘忿赴命。始欲出山,山中草木槯折,崩石塞路。高呪願曰:“吾誓志弘道,豈得滯方?”乃風息路開,漸還到國。王及臣民,近道候迎。內外敬奉,崇爲國師。
그는 하남에서 교화를 마치자, 양(凉)나라로 나아가 노닐었다. 저거몽손(沮渠蒙遜)이 깊이 공경하여 섬겼다. 영준한 손님들의 집회에서 현고의 뛰어난 해설을 펼치게 하였다.
당시 서해의 번승인(樊僧印)도 현고에게서 수학하였다. 뜻이 좁고 도량이 편벽하여, 적게 얻은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였다. 문득 자신이 이미 아라한의 경지를 터득하였음을 알았다. 그리고는 선의 관문을 완전히 다하였다고 일컬었다.
이에 현고는 비밀히 신통력으로써 선정에 든 승인(僧印)으로 하여금, 두루 시방 끝없는 세계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법문이 같지 않은 것을 보게 하였다. 승인은 한 철 하안거 내내 그가 본 바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영영 다할 수가 없었다. 비로소 선정의 물에는 바닥이 없음을 알았다. 크게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河南化畢,進遊涼土。沮渠蒙遜深相敬事,集會英賓,發高勝解。時西海有樊僧印,亦從高受學。志狹量褊,得少爲足,便謂已得羅漢,頓盡禪門。高乃密以神力,令印於定中,備見十方無極世界,諸佛所說法門不同。印於一夏,尋其所見,永不能盡,方知定水無底,大生愧懼。
당시 북위(北魏)의 오랑캐 척발도(拓跋燾)가 평성(平城)을 점거하였다. 그 군대가 양(凉)나라 경계를 침범하였다. 척발도의 외삼촌인 양평왕 두초(杜超)가 현고에게 같이, 거짓 나라의 서울로 돌아가자고 청하였다. 평성에 도달하자, 현고는 크게 선에 의한 교화를 펼쳤다.
위태자(僞太子)인 척발황(拓跋晃)은 현고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는 한때 거짓 무고를 받아, 그의 부친으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이에 현고에게 말하였다.
“공연히 무고를 겪는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까?”
현고는 금광명재(金光明齋)를 마련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7일 동안 간절히 참회하였다.
時魏虜拓跋燾僭據平城,軍侵涼境,燾舅陽平王社,請高同還僞都。旣達平城,大流禪化。僞太子拓跋晃事高爲師,晃一時被讒,爲父所疑,乃告高曰:“空羅抂苦,何由得脫?”高令作金光明齋,七日懇懺。
곧 척발도의 꿈에 그의 조부와 부친이 나타났다. 모두 검을 손에 잡고 매서운 위엄으로 물었다.
“너는 무슨 까닭으로 헐뜯는 말을 믿고 태자를 멋대로 의심하느냐?”
척발도는 놀라 꿈에서 깨어나, 크게 뭇 신하들을 모아 자신의 꿈을 알렸다. 그러자 신하들이 모두 말하였다.
“태자에게 허물이 없음은 참으로 황제의 영령들이 내려와 꾸짖은 것과 같습니다.”
척발도는 다시는 태자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현고의 정성스런 감응에 힘입은 것이다.
燾乃夢見其祖及父,皆執劍烈威,問:“汝何故信讒言,抂疑太子?”燾驚覺,大集群臣,告以所夢。諸臣咸言:“太子無過,實如皇靈降誥。”燾於太子無復疑焉,蓋高誠感之力也。
척발도는 이로 인하여 글을 내렸다.
“짐은 조종의 거듭 빛나는 계통을 이어, 큰 기반을 열어 널리 만대에 융성하게 하고자 생각하였다. 그러나 무공(武功)에는 비록 밝으나, 문교(文敎)에는 아직 유창하지 못하다. 그러니 이것은 태평한 정치를 높이는 조건이 아니다. 지금 국내는 편안하고 백성들은 부유하며 창성하니, 마땅히 제도를 정해서 만세의 법으로 삼아야 한다.
무릇 음양에는 가고 옴이 있고, 사계절도 돌아가는 순서가 있다. 그러니 아들에게 물려주고 현인에게 맡기는 것이, 국가의 안전에 서로 부합되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피로한 몸을 쉬게 하여, 장구한 계책을 굳히는 것이 고금의 바뀌지 않는 훌륭한 방법이다. 짐과 여러 공신들은 오랫동안 부지런히 노력해 왔다. 이제는 벼슬길에서 은퇴하여 집으로 물러나, 얼굴을 화락하게 하고 작위를 높이며, 정신을 수양하여 수명을 기르면서 도를 논하여 꾀를 진술할 뿐, 다시 담당관리로서의 고통스럽고 힘든 직무를 친히 맡을 필요는 없다.
그리하여 황태자로 하여금 천하의 정사를 대신 다스리고 문무백관을 모두 통솔하게 한다. 다시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여서 여러 자리를 갖추고, 사람을 가려 뽑아 임무를 수여하여 쫓아낼 사람은 쫓아내고 들일 사람은 들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후생이 두렵다[後生可畏]’고 하셨다. 미래가 지금만 같지 못할지 어떻게 알겠느냐?”
이에 조정의 관료와 백성들은 태자에게 모두 신(臣)이라 칭하였다. 태자에게 올리는 글은 황제에게 올리는 표(表)와 같이 하였다. 다만 흰 종이를 사용해서 구별하였다.
燾因下書曰:“朕承祖宗重光之緖,思闡洪基,恢隆萬代。武功雖昭,而文教未暢,非所以崇太平之治也。今者域內安逸,百姓富昌,宜定制度,爲萬世之法。夫陰陽有往復,四時有代序。授子任賢,安全相付,所以休息疲勞,式固長久,古今不易之令典也。朕諸功臣,勤勞日久。當致仕歸第,雍容高爵,頤神養壽,論道陳謨而已。不須復親有司苦劇之職。其令 皇太子副理萬機,摠統百揆,更擧良賢,以備列職。擇人授任,而黜陟之。故孔子曰,後生可畏焉。知來者之不如今。”於是朝士庶民皆稱臣於太子。上書如表,以白紙爲別。
당시 최호(崔皓)와 구천사(寇天師)가 이전부터 척발도에게서 총애를 얻었다. 척발황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는 날이면, 그들의 위세의 칼자루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거짓으로 무고하였다.
“태자가 전에 사실은 모반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만 현고의 도술과 인연을 맺은 까닭에, 돌아가신 황제폐하를 꿈에 내려오게 하였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여론과 일의 자취가 차차 그 윤곽이 드러납니다. 만약 죽여서 제거하지 않으면, 큰 해가 될 것입니다.”
척발도는 마침내 이를 받아들여 발끈하여 크게 노하였다. 곧 칙명으로 현고를 수감하게 하였다. 현고는 이에 앞서 어느 날 비밀히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불법이 아마도 쇠할 것이다. 나와 혜숭(慧崇)이 맨 먼저 그 화를 당할 것이다.”
이때 이 말을 듣고 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時崔皓、寇天師先得寵於燾,恐晃纂承之日,奪其威柄,乃譖云:“太子前事,實有謀心。但結高公道術,故令先帝降夢。如此物論,事迹稍形,若不誅除,必爲巨害。”燾遂納之,勃然大怒,卽勅收高。高先時嘗密語弟子云:“佛法應衰,吾與崇公,首當其禍乎!”于時聞者莫不慨然。
∙혜숭(慧崇)
당시 양주(凉州) 사문 석혜숭(釋慧崇)은 위위(僞魏:北魏)의 상서(尙書)인 한만덕(韓萬德)의 문사(門師)이다. 이미 현고 다음으로 덕이 높았다. 그도 역시 의심과 저지를 받았다.
북위의 태평(太平) 5년(444) 9월에 현고와 혜숭은 함께 감옥에 유폐되었다가 그 달 15일에 화를 입어, 평성의 동쪽 한 귀퉁이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43세이다. 이 해는 전송(前宋)의 원가(元嘉) 21년(444)이다.
그 날 저녁이 되도록 문도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 이 날 밤 3경(更)에 문득 광명이 나타났다. 현고가 앞서 머물던 곳의 탑 주위를 세 바퀴 돌고, 다시 선을 닦던 굴 속으로 들어갔다.
이어 광명 속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미 갔다.”
제자들은 비로소 이미 돌아가셨음을 알고, 끊어지는 아픔으로 슬피 통곡하였다. 이윽고 시신을 성 남쪽 넓은 들에서 맞이하여 목욕시켰다. 아울러 혜숭의 시신도 따로 다른 곳에 수습하였다. 이에 온 도읍의 도인과 속인들이 놀라서 안타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時有涼州沙門釋慧崇,是僞魏尚書韓萬德之門師。旣德次於高,亦被疑阻。至僞太平五年九月,高與崇公俱被幽縶。其月十五日就禍,卒於平城之東隅,春秋四十有三。是歲宋元嘉二十一年也。當爾之夕,門人莫知。是夜三更,忽見光繞高先所住處塔三帀,還入禪窟中。因聞光中有聲云:“吾已逝矣。”諸弟子方知已化,哀號痛絕。旣而迎屍於城南曠野,沐浴遷殯。兼營理崇公,別在異處。一都道俗,無不嗟駭。
제자 현창(玄暢)은 당시 운중(雲中)에 있었다. 북위의 도읍에서 6백 리 떨어진 곳이다. 아침에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나 변을 알려주었다. 이어 6백 리를 달릴 수 있는 말을 공급해 주었다. 이에 채찍을 휘두르며 돌아왔다. 해가 저물 무렵에 서울에 이르렀다. 스승이 이미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비통하여 숨이 막혔다. 이어 동학들과 함께 울면서 말하였다.
“불법은 이제 멸하였다. 자못 부흥되겠는가? 만일 다시 부흥될 수 있다면, 스승님[和上]께서 일어나 앉으시기를 청해보자. 스승님의 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 반드시 이를 비추어보실 것이다.”
말이 끝나자 현고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빛에 기뻐하는 기색이 돌았다. 온몸에서 땀이 나왔다. 그 땀은 매우 향기로웠다.
弟子玄暢時在雲中,去魏都六百里,旦忽見一人告云以變,仍給六百里馬。於是揚鞭而返,晩閒至都,見師已亡,悲慟斷絕。因與同學共泣曰:“法今旣滅,頗復興不?如脫更興,請和上起坐。和上德匪常人,必當照之矣。”言畢,高兩眼稍開,光色還悅。體通汗出,其汗香甚。
잠시 후 그는 일어나 앉아서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불법의 교화는 인연을 따라 성하거나 쇠한다. 인연의 성쇠는 자취가 남으나, 진리는 깊고도 고요하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너희들이 머지않아 다시 나와 같이 되리라는 것이다. 오직 현창(玄暢)만이 남쪽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죽은 후에 불법은 곧 다시 일어날 것이니, 잘 스스로 마음을 닦아 중도에 후회함이 없게 하라.”
말을 끝마치자 곧 누워 숨이 끊어졌다. 이튿날 관을 옮겨 화장하려 하였으나, 나라의 제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무덤을 만들어 곧 묻었다. 도인과 속인들은 슬프고 애통하여, 소리 내어 울면서 가슴 에며 바라보았다.
須臾起坐,謂弟子曰:“大法應化,隨緣盛衰。盛衰在迹,理恒湛然。但念汝等不久復應如我耳,唯有玄暢當得南度。汝等死後,法當更興。善自修心,無令中悔。”言已便臥而絕也。明日遷柩,欲闍維之,國制不許,於是營墳卽窆。道俗悲哀,號泣望斷。
사문 법달(法達)은 위국(僞國)의 승정(僧正)으로 있으면서 현고를 흠모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미처 수업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갑자기 현고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로 인해 울면서 말하였다.
“성인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젠 다시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여러 날이 되도록 음식을 먹지 않고, 항상 현고의 이름을 불렀다.
“현고 상인은 성인이시라 자유자재하실 터인데, 왜 한 번도 나타나시지 않습니까?”
그 소리에 응하여 현고가 허공을 날아서 그곳에 이르는 것이 보였다. 법달은 이마를 대어 예를 올리며, 애절하게 구호하여 보호해 주기를 원하였다. 이때 현고가 말하였다.
“그대는 업보가 무거워 구해주기 어려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지금 이후라도 대승의 경전에 의지하여 간절하게 참회하면, 업보를 가볍게 받을 수 있으리라.”
법달이 말하였다.
“만약 고통스런 업보를 받게 된다면, 어여삐 여기시어 구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有沙門法達,爲僞國僧正,欽高日久,未獲受業。忽聞怛化,因而哭曰:“聖人去世,當復何依?”累日不食,常呼:“高上聖人自在,何能不一現?”應聲見高飛空而至,達頂禮求哀,願見救護。高曰:“君業重難救,當可如何?自今以後,依方等苦悔,當得輕受。”達曰:“脫得苦報,願見矜救。”
현고가 말하였다.
“일체 중생을 잊지 않아야 하거늘, 어찌 홀로 그대에게만 그러겠는가?”
법달이 다시 말하였다.
“법사와 혜숭은 모두 어디에 태어나셨습니까?”
현고가 말하였다.
“나는 악한 세상에 태어나 중생들을 구하여 보호하기를 원하여, 이미 염부제주에 환생하였다. 혜숭은 늘상 안양정토를 기원하여 이미 마음의 소원을 이루었다.”
다시 법달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만, 법사께서는 이미 어느 경지에 도달하셨는지요?”
현고가 말하였다.
“나의 모든 제자들이 저절로 그것을 아느니라.”
말을 마치자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법달이 몰래 현고의 제자들을 방문하였다. 그러자 모두가 말하였다.
“그 분은 정각을 이루기 직전의 보살[得忍菩薩]입니다.”
高曰:“不忘一切,寧獨在君?”達又曰:“法師與崇公,竝生何處?”高曰:“吾願生惡世,救護衆生,卽已還生閻浮。崇公常祈安養,已果心矣。”達又問:“不審法師已階何地?”高曰:“我諸弟子自有知者。”言訖奄然不見。達密訪高諸弟子,咸云是得忍菩薩。
∙담요(曇曜)
북위(北魏)의 태평(太平) 7년(446)에 이르자, 척발도는 과연 불법을 훼멸하였다. 모두가 현고의 말과 같았다. 당시 하서국(河西國)의 저거무건(沮渠茂虔) 치하에 사문 담요가 있었다. 역시 선 수행의 일로 칭송을 받았다. 위태부(僞太傅) 장담(張潭)이 그에게 엎드려 스승의 예로 모셨다.
至僞太平七年,拓跋燾果毀滅佛法,悉如高言。時河西國沮渠茂虔。時有沙門曇曜,亦以禪業見稱,僞太傅張潭伏膺師禮。
『고승전』 11권(ABC, K1074 v32, p.871a01-p.873a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