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괄(南宮适, 남궁시, ? ~ ?)은 노나라 사람으로,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성은 남궁(南宮), 휘는 괄(适)이다. 또 다른 이름은 남궁경숙(南宮敬叔)인데, 오늘날에 통용되는 실제 이름이다. 남궁괄(南宮适)은 성은 남궁씨인데, 맹손씨 가문 사람, 즉 노나라 맹손씨 가문 맹희자(孟僖子) 아들로, 맹의자(孟懿子)의 형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남용(南容)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남궁괄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남용의 본명은 남궁도(南容韜)로, 자가 자용(子容)이었으므로, 남용(南容)으로 불렸다. 남궁경숙도 공자의 제자였다.
좌전(左傳), 소공(昭公) 7년(기원전 535년)에 따르면, 맹희자(孟僖子)가 죽을 때 두 아들 맹의자(孟懿子)와 남궁경숙에게 공자에게 예의를 배우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맹의자(孟懿子)는 이름이 하기(何忌)인데, 일설에는 맹의자(孟懿子)가 남궁괄이고, 남궁경숙(南宮敬叔)은 그의 형이라고도 한다.
남궁괄(南宮括)은 주문왕의 친구로 희성이며, 주나라 개국 공신이다. 노나라 남궁괄과 한국 발음은 같지만, 중국어 병음은 다르며, 본명 남궁경숙(南宮敬叔)과는 전혀 다르다. 그의 후손으로 남궁장만(南宮長萬)이라는 인물도 있었는데, 송나라에서 장수을 지내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되었으며, 그 아들은 위나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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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宮括 (B.C. ~)
성은 南宮(남궁), 이름은 括(괄. 史記), 适(괄, 論語). 자는 子容(자용). 노나라 사람.
孟僖子의 아들로 仲孫閱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史記 孔子世家에,
○〈孔子世家〉曰, “南容從夫子往周見老子, 老子曰, ‘聰明深察而近于死者, 好譏議人者也. 博辯宏遠而危其身者, 好發人之惡者也.’ 遂三復〈白圭〉.”
○사기 공자세가에 이르길, “남용이 공자를 따라 주나라에 가 노자를 만나니, 노자가 말하길,
“사람이 총명하여 사리를 깊이 살피고 있어도 죽게 되는 경우가 가까이 닥치는 것은 남을 비방하기를 좋아하는 자이고, 박학하고 변론이 능하며 넓은 식견을 지녔어도 그 몸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남의 나쁜 점을 들춰내는 자이다.”라 하고는, 드디어 〈백규〉의 시를 세 번 반복하였다.
(史記 孔子世家에는, 南容이 南宮敬叔으로 되었으며, 遂三復〈白圭〉의 구절은 없으며, 南宮縚는 論語의 南容, 南宮适, 史記의 南宮敬叔, 孔子家語의 南宮縚는 모두 같은 사람이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
南宮括 字子容. 問孔子曰, “羿善射, 奡盪舟, 俱不得其死然, 禹稷躬稼而有天下?” 孔子弗答. 容出,
孔子曰, “君子哉若人! 上德哉若人!” “國有道, 不廢, 國無道, 免於刑戮.” 三復 “白珪之玷” 以其兄之子妻之.
남궁괄의 자는 자용이다. 어느날 자용이 공자에게 묻기를, “예는 활을 잘 쏘고, 오는 땅에서도 배를 움직일 수 있었지만, 모두 자연스럽게 죽지 못했고, 하나라의 우임금과 주나라의 후직은 몸소 밭을 갈며 고생을 했어도 천하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고 물으니, 공자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용이 나간 다음에 공자는 말하기를, “자용은 군자로구나, 자용은 높은 덕을 가졌구나, 도가 있는 나라에서는 크게 쓰일 것이고, 도가 지켜지지 않는 나라에서도 형벌을 받아 죽는 꼴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자용은 시경을 읽다가
‘흰 구슬의 흠은 갈아서 없앨 수 있지만, 입으로 뱉은 말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라는 구절을 세 번 반복해 읽었다. 이것을 보고 공자는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春秋左氏傳 昭公七年 九月篇에, (남궁경숙과 남궁괄이 동일 인물이라는 설)
孟僖子, 及其將死也, 召其大夫曰, “禮人之幹也. 無禮, 無以立. 吾聞, 將有達者, 曰孔丘. 聖人之後也, 而滅於宋. 其祖弗父何以有宋, 而授厲公, 及正考父, 佐戴武宣, 三命,玆益恭. 故 其鼎 銘云, 一命而僂, 再命而傴, 三命而俯, 循牆而走, 亦莫余敢侮. 饘於是, 鬻於是, 以糊余口.” 其共也如是.
臧孫紇有言, 曰, “聖人有明德者, 若不當世, 其後必有達人. 今其將在孔丘乎. 我若獲沒, 必屬說與何忌於夫子, 使事之而學禮焉, 以定其位.” 故 孟懿子與南宮敬叔, 師事仲尼.
仲尼曰, “能補過者, 君子也. 詩曰, ‘君子是則是效. 孟僖子可則效已矣.”
맹희자가 죽어갈 마당에 그의 가신들을 불러놓고 말하였다. “예의는 인간의 근본이다. 사람이 예의가 없으면 , 놓여진 지위를 지키어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내 들었거니와, 앞으로 모든 일에 통달한 어진 이가 있게 될 것인데, 그는 공구란 분이다.그분은 옛 성인의 후손인데 가문은 송나라에서 망했다. 그 분의 조상인 불보하는 송나라 군주가 될 입장인데도 군주를 여공에게 넘겨주었고, 그 증손인 정고보에 이르러, 송나라의 대공․무공․선공의 세 군주를 보좌하여, 상경이었으나 날로 더욱 공경스러운 태도를 취했었다. 그래서 솥을 만들어 경계하는 말을 새기기를
‘대부가 되어서는 고개를 수그리고, 하경이 되어서는 등을 구부리며, 상경이 되어서는 몸을 구부려, 집에 갈 때에 집의 담 옆으로 빨리 빨리 걸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감히 무시함이 없으리라. 나는 이 솥에 된죽을 끓이어 먹고, 묽은 죽을 끓이어 내 입에 풀칠을 하여 살리라.’했었다. 그 분의 공경스러움은 이와 같았다.
장손흘이 한 말이 있는데, “성인의 밝은 덕이 있는 것이어서, 그이의 세대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그이의 후손에 반드시 모든 일에 통달하는 어진 사람이 나게 될 것이다.’했다.
이제 앞으로 공구가 세상에 어진 사람으로 존재할 것이다. 내가 만약 이대로 죽게 된다면, 필히 열과 하기를 그분에게 배우게하여, 그들의 지위를 확보케 하라.”
이 유언이 있었기에 맹희자와 남궁경숙이 중니를 스승으로 삼았다.
공자께서는 맹희자를 다음과 같이 평해 말하기를, “잘못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군자다. 시에 이르길, ‘군자는 모범 삼고 본받을 바다.’라고 했다. 맹희자야말로 모범 삼고 본받을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