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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섦

VIS VITALIS 2016. 7. 25. 12:20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낯선 곳에 있다.

아니 낯선 곳이라기 보다 낯선 풍경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버스를 탔고 꾸벅거렸고 깨어났을 때 버스는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교회와 아파트와 주유소와 가로등 불빛들이 만드는

풍경이 보이는 그 순간에 나는 눈을 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언덕을 오른 다음에 나는 내려야한다. 그런데 이 언덕에 이런 

근사한 풍경이 있는지 나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예전에 이 순간 이 위치에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덕은 하나 밖에 없는데 낯 선 풍경이니 다음에 내가 내려야하는가에

대해 확신이 안선다. 그 풍경을 지나서야 아 이번에 내려야하는구나를 알게된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필름의 한 장면이 한 장으로 인화되어 내게 제시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새로울 수 밖에 없다. 정보의 무시는 뇌의 정상적인 활동의 일부분일테니까 말이다.

무시는 정보활동의 필수불가결한 일부이고 발견은 무시의 뒷면에 불과하다. 무시의 집단적인 형태가

사회일 수 있고 또 보통학교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과부하는 무시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다. 그러나 무시는 무시로 두는 것이 옳다. 무시와의 싸움은 보통의 교육강화로는 해결될 수 없다. 생략에 대한 의식적인 투쟁은 의식의 과부하로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수면보충이 백배 더 효과적일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낯섬, 그에 따라 보게 되는 새로움 이런 일들은 반복될 것이다. 이 되풀이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보게된다. 속고있다는 것을.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생리적 기능 속에서 포함되는 이데올로기적 함의이다. 이데올로기의 작동이 마술처럼 눈속임일 수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생략 또는 무시와 닮아 있는데 문제는 그 이데올로기는 생리적이라기 보다 경제적 이익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식을 조작하는 것 곧 인식의 생략을 지배하는 것 그것이 이데올로기이다. 그 이데올로기는 낯선 풍경을 통해 눈에 띄게 될 것이다.

그럼 그 다음에는? 자연적인 사회제도라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 글쎄, 그 보다는 단순히 풍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생존이 걸린 문제이니 발견이 고발이 되고 투쟁이 되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곧 지배계급과의 피곤하고도 불리한 싸움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