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술된 가장 오래된 '논어주소'는 '논어집주'와 함께 대표적인 논어 주석서로 일컬어지지만 국내에서는 서명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중국 위나라 하안(193~249)의 '논어집해'에 송나라 형병(932~1010)이 소를 단 '논어주소'를 번역한 책이 없다시피 한 현실이다.
사단법인 전통문화연구회가 펴낸 '역주 논어주소1'은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한 원로 한학자 정태현(76)씨와 신진 연구자 이성민, 강민정씨가 협동으로 연구번역 및 윤문한 결과물이다.
【서울=뉴시스】오제일 기자 = 논어(論語) 이인(里仁)편 '子曰 朝聞道 夕死可意(자왈 조문도 석사가의)'는 여러 의미로 읽힌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논어집주(論語集註)'의 해석과 '아침에 세상에 도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논어주소(論語注疏)'의 해석 등이다.
미묘한 차이지만 두 해석은 다르다. 집주에서는 도를 사물의 당연한 이치로 보고 그 이치를 터득하면 그날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해석한 반면, 주소에서는 세상에 도가 실현됐다는 말을 들으면 바로 죽어도 좋다는 한탄의 말로 봤다.
우리에게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주희(1130~1200)의 해석이 익숙하다. 조선조 건국과 함께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주자학만을 관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반면, 논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술된 가장 오래된 '논어주소'는 '논어집주'와 함께 대표적인 논어 주석서로 일컬어지지만 국내에서는 서명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중국 위나라 하안(193~249)의 '논어집해'에 송나라 형병(932~1010)이 소를 단 '논어주소'를 번역한 책이 없다시피 한 현실이다.
사단법인 전통문화연구회가 펴낸 '역주 논어주소1'은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한 원로 한학자 정태현(76)씨와 신진 연구자 이성민, 강민정씨가 협동으로 연구번역 및 윤문한 결과물이다.
원문이나 주석을 축자역으로 원전을 충실하게 독해하기 위해 애썼다. 원문의 경문과 주에는 우리나라 전통적 방식의 현토를 했고, 소에는 간략한 표점을 했다. 상세한 역주를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전통문화연구회가 진행하고 있는 '십삼경주소' 번역사업의 첫 결실이기도 하다. '십삼경주소'는 중국 유가(儒家)의 13 경전 고주(古注)에 다시 주석을 붙인 책이다. '시경' '서경' '주역' '주례' '의례' '예기'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춘추좌씨전' '논어' '이아' 효경' '맹자' 등을 일컫는다.
번역사업은 십삼경의 경문을 비롯해 주와 소까지 역주하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번역되지 않은 십삼경주소를 130여책으로 10년 안에 완역한다는 계획이다.
전통문화연구회는 "동양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십삼경주소를 역주하고 이를 통해 우리 문화와 전통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복원함으로써, 그간 편협했던 학술풍토를 넘어 다양성과 객관성이 확보될 것"이라고 전했다. 475쪽, 2만6000원, 전통문화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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邢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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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邢昺
- 宋朝
- 汉人
- 曹州济阴(今山东菏泽市曹县西北)
- 932年
- 1010年
- 撰《论语注疏》
- 《论语注疏》《尔雅义疏》《孝经正义》
目录
邢昺 編輯
邢昺(bǐng,932-1010),北宋經學家,字叔明。曹州濟陰(今山東菏澤市曹縣西北)人。擢九經及第,官禮部尚書。所撰《論語注疏》,討論心性命理,爲後來理學家所采納。所撰《爾雅注疏》及《孝經正義》,均收入《十三經注疏》。
中文名 邢昺 國 籍 宋朝 民 族 漢人 出生地 曹州濟陰(今山東菏澤市曹縣西北) 出生日期 932年 逝世日期 1010年 主要成就 撰《論語注疏》 代表作品 《論語注疏》《爾雅義疏》《孝經正義》
目錄
1 個人生平
2 相關事件
3 軼事典故
4 史籍記載
5 曆史評價
個人生平編輯
邢昺,字叔明,曹州濟陰人。太平興國初,舉《五經》,廷試日,召升殿講《師》、《比》二卦,又問以群經發題,太宗嘉其精博,擢《九經》及第,授大理評事、知泰州鹽城監,賜錢二十萬。昺以是監處楚、泰間,泰僻左而楚會要,鹽食爲急,請改隸楚州,從之。明年,召爲國子監丞,專講學之任。遷尚書博士,出知儀州,就轉國子博士。代還,賜緋,選爲諸王府侍講。雍熙中,遷水部員外郎,改司勳。端拱初,賜金紫,累遷金部郎中。
真宗即位,改司勳郎中,俄知審刑院,以昺儒者不達刑章,命劉元吉同領其事。是冬,昺上表自陳夙侍講諷,遷右諫議大夫。鹹平初,改國子祭酒。二年,始置翰林侍講學士,以昺爲之。受詔與杜鎬、舒雅、李慕清、崔偓佺等校定《周禮》、《儀禮》、《公羊》《穀梁》《春秋傳》、《孝經》、《論語》、《爾雅義疏》,及成,並加階勳。俄爲淮南、兩浙巡撫使。初置講讀之職,即於便坐令昺講《左氏春秋》,侍讀預焉。五年講畢,宴近臣於崇政殿,賜昺襲衣、金帶加器幣,仍遷工部侍郎,兼國子祭酒、學士如故。知審官院陳恕丁內艱,以昺權知院事。
相關事件編輯
景德二年,上言:“亡兄素嘗舉進士,願沾贈典。”特贈大理評事。是夏,上幸國子監閱庫書,問昺經版幾何,昺曰:“國初不及四千,今十餘萬,經、傳、正義皆具。臣少從師業儒時,經具有疏者百無一二,蓋力不能傳寫。今板本大備,士庶家皆有之,斯乃儒者逢辰之幸也。”上喜曰:“國家雖尚儒術,非四方無事何以及此。”上又訪以學館故事,有未振舉者,昺不能有所建明。先是,印書所裁餘紙,鬻以供監中雜用,昺請歸之三司,以裨國用。自是監學公費不給,講官亦厭其寥落。上方興起道術,又令昺與張雍、杜鎬、孫?#93;舉經術該博、德行端良者,以廣學員。三年,加刑部侍郎。
昺居近職,常多召對,一日從容與上語及宮邸舊僚,歎其淪喪殆盡,唯昺獨存。翌日賜白金千兩,且詔其妻至宮庭,賜以冠帔。四年,昺以羸老艱於趨步上前,自陳曹州(今山東菏澤市)故鄉,願給假一年歸視田裏,俟明年郊祀還朝。上命坐慰勞之,因謂曰:“便可權本州,何須假耶?”昺又言楊礪、夏侯嶠同爲府僚,二臣沒皆贈尚書。上憫之,翌日謂宰相曰:“此可見其志矣。”即超拜工部尚書,知曹州職如故。
入辭日,賜襲衣、金帶。是日,特開龍圖閣,召近臣宴崇和殿,上作五、七言詩二首賜之,預宴者皆賦。昺視壁間《尚書》、《禮記圖》,指《中庸篇》曰,凡爲天下國家有九經,因陳其大義,上嘉納之。及行,又令近臣祖送,設會於宜春苑。大中祥符初,上東封泰山,昺表曹州民請車駕經由本州,仍令濟陰令王範部送父老詣闕,優詔答之。俄召還。車駕進發,命判留司禦史台。禮畢,進位禮部尚書。
軼事典故編輯
上勤政憫農,每雨雪不時,憂形於色,以昺素習田事,多委曲訪之。初,田家察陰晴豐凶,皆有狀候,老農之相傳者率有驗,昺多采其說爲對。又言:“民之災患大者有四:一曰疫,二曰旱,三曰水,四曰畜災。歲必有其一,但或輕或重耳。四事之害,旱暵爲甚,蓋田無畎澮,悉不可救,所損必盡。傳曰:‘天災流行,國家代有。’此之謂也。”
三年,被病請告,詔太醫診視。六月,上親臨問疾,賜名藥一奩、白金器千兩、繒采千匹。國朝故事,非宗戚將相,無省疾臨喪之禮,特有加於昺與郭贄者,以恩舊故也。未幾,有旨命中書召其子太常博士知東明縣仲寶、國子博士知信陽軍若思還侍疾。逾月卒,年七十九,贈左仆射,三子並進秩。
史籍記載編輯
初,雍熙中,昺撰《禮選》二十卷獻之,太宗探其帙,得《文王世子篇》,觀之甚悅,因問衛紹欽曰:“昺爲諸王講說,曾及此乎?”紹欽曰:“諸王常時訪昺經義,昺每至發明君臣父子之道,必重複陳之。”太宗益喜。上嘗因內閣暴書,覽而稱善,召昺同觀,作《禮選贊》賜之。昺言:“家無遺稿,願得副本。”上許之。繕錄未畢而昺卒,亟詔寫二本,一本賜其家,一本俾置塚中。
昺在東宮及內庭,侍上講《孝經》、《禮記》、《論語》、《書》、《易》、《詩》、《左氏傳》,據傳疏敷引之外,多引時事爲喻,深被嘉獎。上嘗問:“管仲、召忽皆事公子糾,小白之入,召忽死之,管仲乃歸齊相桓公。豈非召忽以忠死,而管仲不能固其節,爲臣之道當若是乎?又鄭注《禮記·世子篇》雲:‘文王以勤憂損壽,武王以安樂延年。’朕以爲本經旨意必不然也。且夏禹焦勞,有玄圭之賜,而享國永年。若文王能憂人之心,不自暇逸,縱無感應,豈至虧損壽命耶?”各隨其事理以對。
曆史評價編輯
先是,鹹平中,王欽若知貢舉,有告其受舉人賄賂者,下禦史台鞫得狀,欽若自訴,詔昺與邊肅、毋賓古、閻承翰就太常寺覆推。昺力辨欽若,而洪湛抵罪,欽若以是德之。昺之厚被寵顧,欽若與有功焉。
仲寶貪猥不才,舉止率易,士大夫多鄙笑之。欽若在中書,用爲三司判官,後至祠部郎中,坐贓黜官,卒。若思終於駕部郎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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