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에서 줄기차게 제기되어온 물음인 본질/현상의 물음은 있는
현상 가운데서 그것의 본질에 대한 질문 “… 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실 이 물음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잘 알고 있던 사
실과 동떨어져 낯설어지게 된다. 서양 철학은 이러한 무엇인가의 물음에
정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 철학은 본질(Essentia)과 실존
(Existentia)를 나누고 본질에 중점을 두거나 실존에 중점을 두는 경향으
로 철학이 발전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
질에 앞선다.”고 말한 것이나, 키에르케고르가 “주체성이 진리이다.”라고
말한 것은 본질에 대한 물음을 폐기하고 구체적 경험의 사실에서 사유를
출발하려고 한 시도이고, 니체가 가치전복(Umwertung)을 시도한 것도 이
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본질 쪽 보다는 실존 쪽에 무게 중심을 둔 것뿐이다. 이렇게 나뉘어 이해
되어 온 역사의 시원에는 이 양자가 분리되지 않은 공속성 관계가 있었
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기본 입장이다.
있음이 가상(Schein)이고, 가상이 있음으로 이해되어
왔던 관점이 소피스트와 플라톤에 의해서 변화를 겪게 된다고 하이데거
는 말한다
ιδὲα(이데아)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있음을 φὺσις(피지스)로 이해한 그리스적
있음(存在/Sein)해석의 근거 아래, 그리고 단지 이와 같은 것으로부터, 어떻게 숨
겨져 있지 않음(Unverborgenheit)이라는 의미에서의 진리(眞理/Wahrheit), 그리
고 열려 펼쳐져 스스로를 나타내보임(aufgehenden Sichzeigen)의 한 특정한 양상
이라는 의미에서의 가상(假像/Schein)이 필연적으로 함께 있음(Sein)에 속해 있는
것인지를 똑바로 이해하는 것이다.25) ) 형이상학 입문, 181쪽
) 오늘날 우리들이 학문 분과에 붙이는 -logy 또는 -logie나 대화를 뜻하는 Dia-log나 독백을
뜻하는 Mono-log나 모두 그리스어의 ‘말하기’,‘이야기하기’라는 뜻의 λὸγος에서 유래한 것
이다. 형이상학 입문, 203-204쪽 참조. 하이데거는 또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하는 로
고스도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의 재해석이라고 본다. 하지만 근원적인 의미인 ‘모음
(sammeln)’이 아니고, 단지 말(씀) 또는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 그 자체로 이해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이유를 하이데거는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Septuatinta, 70인역) 탓이라
고 본다. 여기서 그리스어의 로고스가 ‘말씀’으로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십계명은 그리스어
로 οὶ δὲκα λὸγοι(오이 데카 로고이) 곧 Deka-log를 뜻한다. 형이상학 입문, 220쪽.
일반 해석자들은 파
르메니데스가 그의 단편 교훈시에서 변화하지 않는 불변의 존재를 말했
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대조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는 판타 레이(πὰ ντα ρ̀εὶ, 모든 것은 흐른다)라는 말을 했고, 있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됨(Werden) 가운데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 혹은 사유(思惟)라고 하면 있음과는 연관 없이 그저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 떠오른 어떤 것을 분석하면서 종합하는 것, 혹은 대상
을 파악하는 것 등등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생각들 안에는 이미 있음이
포함되어 있고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나누어 생각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사유의 훈련을 위한 과목이라
고 말하는 논리학도 이러한 관점에서 진행이 된다. 논리학과 존재론이 분
리되어 진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리를 문제 삼으면서 분리되기 이전의
철학적 사유의 흔적을 하이데거는 일차적으로는 그리스어 본래적 의미
차원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특히 파르
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철학에서 그 원형을 찾고 있다. 하이데
거는 오늘날 우리들이 논리학(Logik, logic)이라고 부르는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로고스(λὸγος)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로고스라는
말은 서술함, 말함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26) 그런데 이러한 단어가 플라
톤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학교제도로부터 논리학이라는 학문 분과로 자
리하게 되었다고 하이데거는 보고 있다.
, 그리스 본래적 의미
에서 있음이란 언제나 나타나 보임과 동일하다고 하이데거는 말하고 있
다. 나타나 보이는 것은 언제나 변화와 소실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20) W.K.C. 거드리, 희랍철학입문 ―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박종현 옮김, 종로서
적, 1992, 32-33쪽.
21) 형이상학 입문, 162쪽.
M. 하이데거의 있음(존재) 이해 199
러므로 어떤 것이 드러나서 있다는 것은 언제나 없어질 가능성, 곧 비존
재의 가능성 가운데 있는 것이다. 존재는 곧 비(非)존재를 언제나 그 자체
안에 담고 있다. 그러므로 무(無, Nichts)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언
제나 존재와 더불어 공속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존재와 무를 이렇게
동전의 앞뒷면처럼 이해하는 틀을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에서
발견한다.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가 단편들에서 있음의 길, 없음의 길
그리고 가상의 길을 제시한 바 있다고 해석한다. 이 세 가지 길은 서로
다른 대립의 길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 가운데 있으면서도 언제나 떼
어서 생각할 수 없는 공속성의 관계에 있음을 하이데거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이해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된다고 한다. 투
쟁과 대립으로서의 일치를 드러남/감춤의 분리할 수 없음을 강조한 헤라
클레이토스에게서도 앞의 파르메니데스와 동일한 존재이해를 읽고 있다.
여기서 있음과 됨 그리고 있음과 가상은 분리할 수 없는 공속성의 관계
가운데 있다.
하이데거는 그리스 철학이 있음과 가상을 구별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불변의 것, 객관적인 것을 추구하는 정신이 그리스적 사유에
200 서 동 은
서 유래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이러한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 그리스 언어와 사유 안에는 이미 있음과 가상(또는 현상)이 분리될
수 없이 하나로 나타난 바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음은
피지스(φὺσις)로 열어 보임이며, 그리스어에서 φυ-(퓌)와 φα(파-)는 같은
것을 의미하며, φὺειν(피에인)은 φαινεσθαι(파이네스타이) 곧 번쩍 빛나다
또는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다 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인
들에게 있어 있음(Sein)이란 현상(Erscheinen)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스스로-안에-서-있다는-것(das Insichstehen)은 다른
아무것도 아닌, 저기-서-있음(Da-stehen), 빛-안에-서-있음(Im-Licht-stehen)을
말하는 것이다. 있음(Sein)은 나타나 보임(Erscheinen)처럼 존재한다(Sein west
als Erscheinen).22)
하이데거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그전에 잘못 이해되어진 개념들을
어원적으로 분석해 들어간다. 우리가 플라톤의 인식론에서 배운바 대로
그리스어의 독사(doxa)는 자주 억견, 속견 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것을
최고의 인식인 에피스테메(episteme)보다 낮은 단계의 인식, 가상적인 것
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독사(doxa)는 상상되어진 것, 주관적인 것, 가상적
인 것으로 간주되었다.23) 하이데거는 그러나 이 독사(δὸξα)개념에서 다른
의미를 읽어낸다.24)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영예 혹은 영광을 뜻하는 단어 곧 있음 그자체가 지닐 수 있는 최고
의 양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영예와 영광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얻어지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이 말
의 본뜻은 있음 그 자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