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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외는 아무것도 아닌 시인 -나의 시, 나의 삶: 조정권

VIS VITALIS 2016. 5. 18. 20:59

산정묘지1

조 정 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시집 『산정묘지』(민음사, 1996년)에서




 

시인 이외는 아무것도 아닌 시인

-나의 시, 나의 삶

조정권

 

 

오늘 제가 여러 선생님들을 모시고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시인에 대해서, 시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존재이었는가에 대한 얘기입니다. 물론 변변찮은 텍스트로서 제 시를 몇 개 가지고 나왔고 제 얘기도 곁들이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보다도 지금 우리 시인들이 전 시대 시인들의 본질적인 측면을 더 중요하게 바라봐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하는 관점에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사실 저는 시를 쓰기 시작하던 시절에, 어떻게 보면 한국 시인들의 시에서 큰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 시가 거의 백 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와 있지만, 많은 선배 선생님들의 어떤 시에서보다는 외국 시인들의 시인됨됨과 시에서 영양을 많이 섭취했습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서의 전공과가 국문학이 아니었고 영문학이었기 때문에 그런 면도 있었겠지만 외국 시인들 중에서도 특히 독일 시인들과 영시, 唐詩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점이 제 또래의 동년배 시인들과 다른 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에게는 마음속에 師表가 되는 어떤 모델시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저는 미리 배포해드린 텍스트 첫머리에 횔덜린 시인의 반평생이란 짤막한 시 한편을 올려놓았습니다.

횔덜린은 1770년에 독일의 중서부 지방이자 예전에는 뷔르텐베르크 공국의 땅이었던 디르팅겐에서 태어나서 1843년에 사망을 했어요. 횔덜린은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철학자 헤겔하고 같이 신학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시를 썼어요. 그런데 이 횔덜린 시인이 살던 당대에는 괴테와 쉴러라고 하는 막강한 거장이 문명을 날리고 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문학권력이란 얘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은 이 당시 독일 문단의 막강한 대부는 괴테와 쉴러였어요. 그 괴테와 쉴러의 그늘에 가려져 가지고 이 횔덜린이라는 시인은 73세로 죽을 때까지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했어요. 기껏해야 엔솔로지에 젊었을 때 몇 편을 발표한 것 외에는 전혀 무명시인이었어요. 그러니까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채 산 채로 시들어버린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무명시인으로서 삶을 마감했지요. 그런데 이 시인이 죽고난 후, 1905년도이니까 50년이 훨씬 지났죠? 사후 반세기가 넘은 후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횔덜린의 시 원고들을 딜타이라고 하는 文學史家가 추려 가지고 연구논문도 쓰고 작품집을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발간당시는 1차대전의 와중이라 작품이 보급이 안 됐지만, 1919년부터 판매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2차대전을 겪고 난 다음에 특히 하이데거에 의해서 평가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횔덜린이란 시인은 사후 100년 만에 평가를, ‘괴테보다도 더 독일적인 시인이라는 그런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미뤄볼 때 시인이라고 하는 존재는 당대의 시간과 싸우는 존재이기 보다는 당대의 시간을 뛰어넘는 시간과 싸우는, 싸워서 이긴 존재로서 전율처럼 다가옵니다.

횔덜린아란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제가 문단에 나온 1970년대 초반입니다. 저의 모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시다가 전북대학교 독문과로 가신 전광진 선생님이 현대시학에 근 2년 동안 이 횔덜린의 시세계를 연재하고 계셨어요. 그때 이 횔덜린 시인을 알게 되었고 이 시인의 삶에 대해서 전기에 감전 당하듯이 전율을 받았습니다.

횔덜린은 34살 되던 젊은 나이에 정신착란증세로 일생을 유폐되어 살았습니다. 그래서 34살 이후부터 73세까지, 40년에 해당하는 기간은 산 것이 아니라 의지와 달리 시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절망적이고 암울한 삶을 살았지요. 그리고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의 목수 짐머라는 사람이 그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40년 동안 그냥 보살폈어요. 누구보다도 절망을 했고, 거장들의 그늘에 가려서 절망하고, 또 시집 한 권도 내지도 못하고 시 발표도 못하고, 평생 그런 어두운 삶을 살다가 간 시인을 40년간 보살핀 목수에게도 머리가 수그러들지만 횔덜린의 삶 앞에서는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이런 시인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 독일 문단뿐만 아니고 세계 문단에서도 제가 볼 때는 가장 시인다운, 가장 시인됨의 상징으로서 기억될 시인입니다. 동시에 누구보다도 시대적인 어떤 박해, 문학세력에 의한 따돌림, 그 속에서 미칠 수밖에 없었던 시인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 시인의 대표시 빵과 포도주가 있습니다만, 헤르만 헤세는 빵과 포도주에 나오는 첫 번째 시를 어렸을 때 읽고 문학을 하게 됩니다. 저는 횔덜린이 정신병으로 40년 간 유폐돼서 살던 독일 튀빙겐의 목수 짐머의 집을 1992년 겨울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슈트트가르트에서 1시간 20분 정도 거린데 옥탑방 5층 꼭대기 한 평반 정도 되는 그런 곳에서 살았더군요. 좁은 공간이지만 창은 사방으로 뚫려 있어 집 앞을 흐르는 네카강이 보이고 아마 강을 내려다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엇습니다. 정신이 좀 멀쩡했을 때 시인은 이런 구절들을 시 곳곳에 많이 남겼어요. 이 구절은 기록하실 분들은 기록하세요.

 

위안받아라.

이 삶은 고통 받을 가치가 있도다.

 

위안받아라 / (우리들의) 이 삶은 고통받을 만한 가치가 있도다.’ 이 시 구절은 목사가 된 노이퍼라는 친구한테 준 구절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상의 아들인 나,

사랑하고 고통 받도록 태어났도다.

 

그러니까 횔덜린의 어떤 시인됨, 시인 의식, 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나도 고통을 받고 있지만 나 이외의 많은 분들, 많은 인간들은 오히려 고통으로부터 위안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내 고통보다는 남의 고통을 더 생각하는, 위로받고 위안 받으라는 메시아적인 의식도 가지고 있었고요. 목수 짐머의 집에서 정신병자로서, 또는 식객으로서 40년 동안을 살았다곤 하지만 산 게 아니겠죠. 그냥 숯처럼 안으로 연소해서 재가 되어 버린 거죠. 저는 횔덜린 같은 시인은 지상에서 산 게 아니고 차라리 연소해버린 시인이었다라고 봅니다. 그 정신착란 증세가 있는 중간중간에도 가끔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는 시들을 길게 쓰질 못하고 한 두세 줄 정도 일종의 잠언 비슷하게 남긴 구절들이 있는데 이런 것도 있어요.


(2005년 9월 24일 토지문화관 강연 녹취)

[출처] 조정권|작성자 stupa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