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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 황진영 작가

VIS VITALIS 2016. 5. 1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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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 황진영 작가 “17번 감옥수감 이육사..절정의 삶 꾸몄다”
2011-08-14 14:48:37

 
[뉴스엔 조연경 기자]

MBC 광복절 특집극 '절정'이 방영 전부터 화제다. 

이번 작품으로 독립투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선보인 '절정'의 황진영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MBC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이육사 선생님의 시 '광야'를 좋아했다. '광야'를 읽을 때마다 벅찬 느낌이 차올랐는데 이번 '절정'을 쓸 때도 그 벅찬 느낌을 담아보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절정'에서 주인공 이육사 역할은 가수에서 연기자로 어엿한 변신에 성공한 김동완이 맡는다. 김동완에 대해 황진영 작가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독립 투사의 이미지였다"고 극찬했다. 

이 외에도 황진영 작가는 이번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와 함께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다음은 황진영 작가의 인터뷰 일문일답이다. 

-MBC와의 인연이 각별하다고 들었다. 어떤 인연인지?

▲MBC는 내 친정과 같은 존재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간 MBC 드라마국에서 기획요원으로 일했다. 드라마국 PD님들께 정말 많이 배웠다. 원작 추천도 하며 작가로서 제대로 된 ‘기본’을 쌓을 수 있었다. 내가 작가로서 자질이 있다면, 그 공은 모두 MBC로 돌린다. 언젠가 최고의 작품을 쓸 역량이 된다면 그 작품은 꼭 MBC에서 선보이고 싶다.

-이번 작품을 집필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이육사 선생님이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는 열일곱 번의 감옥 수감에도 불구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은 그가 ‘시인’이었기 때문이다.‘시인’은 ‘직시’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바로 보고, 느끼고, 통찰하는 사람들이다. 
단지 못 본 척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도 이육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이육사의 삶은 우리에게 ‘너희도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보는 ‘이육사’는?

▲독립투사의 삶을 힘겹게 살며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절정’으로 꾸몄던 분이라고 본다. 인생에서 ‘절정’을 일궈내며 자신에게 당당하고 또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다.

-집필시 참고했던 자료가 있다면?

▲출판된 이육사 선생님 관련 책과, 논문들은 거의 모두 참조를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참조했던 것은 이육사 선생님의 '시'이다. 시조를 포함, 40여 편의 이육사 선생님의 시를 A4지에 손 글씨로 써서 벽에 붙여놓고, 그 위에 또 역사 연표를 작성해서 붙여놓고 수시로 봤다. 

이 시대,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이육사 선생님은 어떤 마음으로 '절정', '청포도>, '광야'를 쓰셨는지 고민했다. 

-열연한 '절정' 배우들에 대한 평가는?

▲김동완 씨가 이육사로 분하면서 풋풋하고 서정적인, 그러면서도 강직함을 품고 있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독립투사가 탄생한 느낌이었고 서현진 씨는 리딩 때 발성이 좋다고 고두심 선생님께서 콕 찍어 칭찬도 해주실 만큼 언제나 열심히 하고 또 진지하다.

또 이승효 씨는 조용하다가도 연기를 시작하면 180도 달라진 모습이 너무 매력적인 배우다. 이번엔 '절정'의 윤세주가 됐지만 다음에 어떤 작품에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 지 기대된다.

지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의 외모만으로도 충분희 윤희의 캐릭터를 표현해준 윤지혜 씨와 오현경 고두심 박성웅씨 같은 훌륭한 배우들은 분량이 적은 데도 불구하고 출연해줘 너무 감사하다. 특히 고두심 선생님은 리딩 때도 특집극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며 분위기를 잡아주셨다. 

-향후 집필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현대물이든 시대극이든 이 시대를 사는 개인의 삶을 다룬 드라마를 쓰고 싶다. 그동안 재미있게 봤고 좋아했던 작품들은 모두 MBC에서 방송됐던 작품들이다. '여명의 눈동자', '옥탑방 고양이', '네 멋대로 해라', '뜨거운 것이 좋아', '내 약혼녀 이야기' 등과 같은 바운더리 안의 작품들은 꼭 써보고 싶다.

-이후 준비 중인 작품이 있는지..

▲현재 탈북청소년 등장하는 시나리오로 영화 제작 중에 있다.

-이번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는?
▲'절정'은 이육사의 삶을 다룬 작품이지만 한편으로 ‘밝은 눈’을 가진 이육사가 만나고 겪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일양과 세주, 문석, 이만, 윤희, 진섭 등. 그들을 보고 느끼고 겪었던 것이 이육사의 삶이고, 이육사의 삶은 ‘시’로 표현됐다.

'절정' 인물들은 조금씩은 요즘의 우리를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시청자분들께서 공감이 가는 인물이 있다면 왜 공감이 되는지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인지 한 번쯤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조연경 기자 j_rose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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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영 작가, 2007 KT 디지털컨텐츠공모전 대상 수상! 
박중섭 작가는 시나리오부문 최우수상 수상!

[img1]

최근 한국영화계 ‘최대의 큰 손’은 KT입니다. 올해 처음으로 KT가 디지털컨텐츠공모전을 열었는데 역시 ‘큰 손’답게 ‘역대 최고수준의 상금’인 4억원을 내놓았습니다. 그 공모전의 다양한 디지털컨텐츠 분야들 중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역시 ‘영화시나리오 부문’입니다. KT 디지털공모전은 크게 두 분야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영상컨텐츠 부문과 기획안 부문입니다. 영화시나리오는 그 중에서 기획안 부문에 속해 있지요. 양대 분야는 다시 복잡다단한 장르로 나뉘는데, 모든 장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한 작품에 대하여 ‘대상’을 수여합니다. 올해 KT 디지털컨텐츠공모전에서 영상컨텐츠 부문은 대상을 뽑지 못했습니다. 대신, 기획안 부문에서는 대상을 뽑았습니다. 이를테면 2007년 KT 공모전 최고의 상이지요. 상금이 자그만치 5천만원(!)입니다. 자 이제 박수칠 준비를 해주세요...심산스쿨 출신의 황진영 작가가 바로 이 KT 공모전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황진영 작가는 심산반 14기/김대우반 1기 출신입니다. 황진영은 가장 ‘심산스쿨스러운’ 작가이기도 합니다. 심산스쿨스럽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잘 노는 녀석이 글도 잘 쓴다”입니다. 황작가는 심산스쿨동문회 록밴드인 [미안하다 뺀드한다]의 여성 보컬리스트입니다. 지난 연말의 콘서트에서 Green Day의 [Basket Case]와 러브홀릭의 [인형의 꿈]을 멋들어지게 불러제꼈던 바로 그 아가씨지요. 당시 제가 그녀를 소개할 때 “얼굴 착해, 몸매 착해, 성격 착해...그런데 왜 애인이 없는지 몰라?”라고 소개했는데, 이제 그 조건에 두 가지를 더 넣어야 될 형편입니다. “글 잘 써, 돈 잘 벌어...”^^

[img2]

황작가의 쾌거(!) 못지 않게 신나는 것은 영화시나리오 부문의 최우수상을 수상한 사람이 또 역시 심산스쿨 출신의 박중섭 작가라는 사실입니다. 박작가는 심산스쿨 김대우반 1기 출신입니다. KT 디지털컨텐츠공모전 영화시나리오부문 최우수상의 상금은 2천만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영화시나리오부문에 책정된 상금의 대부분(!)을 저희 심산스쿨 출신 작가들이 수금(!)해왔다는 거지요. 단순히 금액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이 두 작가들이 자신들의 능력과 가능성을 만천하에 알렸다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도 기쁩니다. 황진영 작가의 시나리오 제목은 [정조애사 경모궁의 봄노래]이고, 박중섭 작가의 시나리오 제목은 [그들의 레이스]입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2007 KT 디지털컨텐츠공모전‘의 홈페이지(www.ktaward.co.kr)에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simsanschool.com/index.php?mid=board_kgpA45&cpage=3&page=18&document_srl=80564&sort_index=readed_count&order_type=desc





문화문학출판

이육사의 황혼·광야, 초판본으로 만난다

기사전송 2016-04-20, 21: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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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초판본 이육사 시집



이육사지음/모루와정/8천원
40세라는 짧은 일생 동안 무려 17번의 투옥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변절하지 않고 시적 감수성을 잃지 않은 일제강점기의 저항시인 이원록(이육사). 

1945년 해방 한해 전인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한 그를 기려 시인 김광균, 신석초, 오장환, 이용악 등이 최초로 만든 시집이 있었다. ‘초판본 육사시집’이 그것이다. ‘이육사’로 유명한 이 저항시인의 본명은 원록.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해 무장투쟁에 나섰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당시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이후 호는 그의 본명보다 더욱 유명한 이름이 됐다. 육사는 일생 동안 숱한 옥고를 치르면서도 조국 광복의 향한 염원을 잃지 않았다. 

이번에 다시 출간된 초판본은 ‘황혼’, ‘광야’, ‘절정’ 등 이육사 대표 명시 20편이 수록돼 있다. 1930년대의 서적은 현대 독자가 편히 읽기엔 활자 상태가 좋지 않고, 같은 판본이라도 각권마다 인쇄 상태가 부분 부분 매우 다르다. 이 책은 여느 복각본 시집들과 달리 초판본 시집 세 권을 비교해, 그 중 인쇄 상태가 가장 나은 것을 저본으로 하고, 나머지 두 권에서 더 선명한 활자를 따와 가독성을 최대한 높였다. 독자들은 이 복각본 시집을 통해 암울한 시대를 올곧게 버틴 ‘超人’(초인) 이육사를 스킨십하듯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 ‘절정’이 그리운 시대다. 남승렬기자



육시랄 놈의 역사 ‘이육사’<이한수의 공감 팩션> MBC 광복절 특선 드라마 『절정』
이한수 | 승인 2016.02.16 11:07

조국 독립 투쟁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면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의열단 ‘김원봉’을 알게 해준 영화 『암살』을 만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를 계기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아낌없이 받쳤는데도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원통한 고혼들을 찾아 함께 떠나 봅시다. 앞 기사에서도 언급했듯이 약산 ‘김원봉’은 남북 협상에 이바지하려고 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국 국민당 ‘장제스’와 가까웠고 군자금도 지원받은 적이 있다는 빌미로 북 정권에 의해 숙청당합니다. 북의 정권을 세운 이들 중에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항일 투쟁을 한 조선의용군 출신들이 많고 그들은 ‘장제스’를 원수로 여겼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할 수도 있지만 그놈에 이념이란 게 우릴 이토록 갈라지게 만드는구나 싶은 원통함도 있습니다.

그런데 ‘김원봉’과 밀양에서 앞뒷집에 살고 “형, 동생” 하며 지낸 석정 ‘윤세주’는 사람들이 더 모릅니다. 둘은 고향 친구이기도 하면서 의열단을 같이 만든 평생 동지입니다. 그런데 ‘김원봉’은 중국 충칭(중경) 임시정부 광복군에 남고 친구 ‘윤세주’는 의용대를 조직하여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결합하기 위해 옌안(연안)으로 갔습니다. 먼저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절친 사이인 둘은 이념 문제로 결별하게 되었을까요? 아니면 정치선전 활동을 군사작전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역할을 나누었을 뿐인 걸까요? 

  
 
‘윤세주’ 의사를 찾아가기 위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시인 ‘이육사’를 먼저 만나 봅시다. ‘윤세주’는 ‘이육사’를 독립투사로 이끈 선배이자 ‘이육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입니다. ‘이육사’의 정신사를 추적해 가면 그 처음과 끝에 ‘윤세주’가 있습니다. 곧 ‘윤세주’ 의사의 지고지순한 삶을 그린 소설이나 영화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며 ‘이육사’를 그려낸  MBC 광복절 특선 드라마 『절정』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영화는 ‘이육사’가 일본 유학중 관동대학살(1923년)을 목격하고 일본 자경단에게 쫓길 때 ‘윤세주’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고 그의 영향을 받아 일제 식민 지배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육사’는 일본 유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했으며, ‘윤세주’가 대구에 있던 ‘이육사’를 찾아와 조국 독립운동에 뜻을 함께 하게 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육사’가 일본에 가서 겪은 관동대학살은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관동지방(지금의 도쿄 주변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나 15만 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더 끔찍한 것은 일본 정부가 일본인의 소요를 막으려고 조선인들에게 원한의 화살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이때 무고하게 학살당한 조선인이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 <절정> 의 한 장면 (출처 : MBC)

조선인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거짓말을 하여 교회당에 모아놓고 몰살시키는 것을 ‘이육사’가 목격하는 장면입니다. 너무나 끔찍한 장면이라 차마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실제 장면은 너무도 잔혹해서 눈 뜨고 보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재일 조선인 ‘오충공’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숨겨진 손톱자국』 이 관동대학살의 생생한 실제 장면을 많이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이육사’는 이 끔찍한 현장에 실제로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육사’가 관동지진 조선인 대학살 사건을 알고 일제의 본질을 직시하게 되었다는 것을 영화는 ‘이육사’가 살육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것으로 그렸지만 이는 정확한 사실은 아닙니다. ‘이육사’가 일본으로 유학은 간 때는 관동대학살이 있고 한 해 뒤인 1924년이었습니다. 유학을 가서 그 전 해에 있었던 이 끔직한 사건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육사’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100년 전 쯤에 일어난 사건을 소설로 접한 저도 이리 원한이 사무치는데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김용필’ 선생님의 단편 소설 「관동 지진과 조선인 대학살」을 한번 읽어보세요. 소설 형식을 빌어 쓴 보고서라고 볼 수 있을 만큼 검증된 사료를 충실하게 반영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 원통함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육사’는 일본에서 일제의 만행을 알게 되면서 내면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유학을 그만두고 귀국한 뒤에 얼마 안 있어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1926년부터 27년까지 중국 북경의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아시아의 정세를 폭넓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 무렵 북경은 의열단의 본거지가 있었던 곳이었으니 ‘이육사’가 의열단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을 겁니다. ‘윤세주’가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으로 투옥되어 있다가 출옥한 해가 1927년이고 ‘이육사’가 중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의 범인으로 혐의를 받아 투옥된 해도 1927년입니다. ‘이육사’는 평생의 정신적 지주 ‘윤세주’를 이때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육사’가 처음 투옥되었을 때 그의 수인 번호가 264였습니다.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었지요. 진범이 ‘장진홍’으로 밝혀지고 곧 풀려나긴 하지만 그 뒤로 ‘이육사’는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혀 걸핏하면 투옥이 됩니다. 짧은 평생에 17번이나 감옥살이를 하지요. ‘이육사’는 처음에 필명을 ‘李戮史’로 썼다고 합니다. 戮(죽일 육) 史(역사 사), ‘육시랄 놈’이라는 욕설이 있지요. ‘이놈에 육시랄 역사’라고 필명을 썼으니 ‘이육사’의 국권 상실에 대한 비통한 심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됩니다. ‘肉瀉(설사할 사)’라는 필명을 쓴 적도 있는데 그가 얼마나 자조적이었는지도 짐작이 됩니다. 그가 국내 공작에 실패를 거듭하고 가까운 문인들이 변절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가슴 아프고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을까요. 나중에 필명을 ‘陸(땅 육)史’로 바꾸어 쓰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부인이 戮(죽일 육)을 陸(땅 육)으로 바꾸어 주었다고 그리고 있는데 사실은 집안 어른(이영우)의 조언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육사’가 ‘윤세주’와 자주 만나 교유한 건 그가 1930년 대구 중외일보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할 때라고 봐야 합니다. ‘윤세주’는 3.1만세운동 주도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아서 중국으로 피신해 ‘이회영’ 선생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서 공부하고 ‘김원봉’과 1919년 11월에 ‘의열단’을 창립하고 국내로 파견되었습니다. 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로 투옥되었다가 1927년에 출옥합니다. 윤세주는 1927년 출옥하여 ‘중외일보사’에서 기자로 일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이육사’가 ‘윤세주’를 만나 알게 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윤세주’는 1932년 중국 남경으로 건너가 고향 ‘밀양’ 선배인 ‘김원봉’과 함께 [조선청년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이육사’를 이 학교에 가입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이육사’는 1933년에 간부학교를 졸업하고 6월에 국내로 침투하면서 상해에서 중국 대문호 ‘루쉰’을 만나고 동지들과도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그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증표를 바칩니다. 그가 증표를 바친 이가 바로 ‘윤세주’입니다. 그만큼 ‘윤세주’는 사상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이육사’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이육사’는 1941년도 발행된 조광(朝光) 1월호의 연인기(戀印記)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떤 사람에게 그 어떤 증표 하나라도 절실히 남기고는 싶으나 목숨 이외에 예의에 어그러지지 않게 건넬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나는 분신처럼 아끼며 수중에 간직해 오던 비취인장(翡翠印章) 한면에 “贈S.1933.9.10.陸史”라고 새겨 S에게 건넸다.”  (‘S’는 ‘석정 윤세주’ - 필자 주)

그는 간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공작 임무를 맡고 1934년 7월에 서울로 들어옵니다. 비밀 작전을 수행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한 예가 동지 ‘노윤희’의 변절로 ‘이육사’가 체포되고 만 사건입니다. 뼈아픈 배신을 겪은 것이지요. 극에서 그리고 있는 ‘노윤희’는 실존인물 ‘최정희’입니다. 처남의 변절로 구속되고 구속 중 생후 2년 된 아들의 죽음(실제로는 3년 전에 죽음)까지 겪어야 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이육사’는 심적으로 너무 나약해집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진 ‘이육사’는 가족들과 떨어져 살면서 주로 집필활동을 하게 됩니다. 건강 상태가 나빠지고 조직에서는 나약한 감상주의자라 공작 일을 맡길 수 없다고 하자 좌절하여 병원을 전전하게 됩니다. 1938년 서울로 이사 간 뒤로는 주로 시 창작에 몰두하고 이 때 대표작들이 대부분 나옵니다. 그의 대표작 <절정>과 <청포도>도 이때 나온 작품입니다. 그는 자신이 나약한 지식인에 불과하다는 좌절감에 빠지고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이때 ‘서진섭’ 등 문인들과 어울려 지내지만 그들의 친일 행위에 ‘이육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고 배신자 ‘노윤희’, ‘서진섭’은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다니는 친일 매국노가 됩니다.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서진섭’이 바로 실존 인물 ‘서정주’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육사’는 ‘서정주’, ‘신석초’ 등과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미당 서정주’의 매국 행각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신석초’ 또한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회원이었다가 변절한 사람입니다. 암살단으로 활동하기에는 너무 심약하다 하여 밀려나고 같이 어울리던 문인들은 다들 매국노로 변절해 버리니 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내가 실의에 빠진 ‘이육사’를 돌보아 주면서 건강을 되찾고 부부의 정이 돈독해지는 듯한데 ‘태항산’ 전투 소식을 접합니다. ‘이육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투사들의 소식을 듣고 그대로 평안히 지낼 수가 없어 다시 중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중국으로 가 ‘조선의용대’ 지휘관이 된 ‘윤세주’를 만나 그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고 그의 죽음을 눈 앞에서 직접 목격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 <절정> 의 한 장면 (출처 : MBC)

영화에서는 ‘이육사’가 그토록 존경하던 ‘윤세주’와 그 유명한 ‘태항산’ 전투에 동참하여 ‘이육사’의 항일 의지가 너무나 감동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실은 ‘윤세주’가 죽고 난 뒤인 1943년에 ‘이육사’는 중국으로 넘어가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중경)’을 거쳐 중국 공산당 팔로군의 본거지 ‘옌안(연안)’으로 갔고 다시 임무를 맡아 국내에 잠입했다가 바로 체포되어 순국합니다. ‘이육사’가 이토록 따르려 했던 석정 ‘윤세주’는 어떤 분일까요.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가 중국에서는 항일 영웅으로 떠받들어 모셔지고 있다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연변의 조선족 문인들에게 물어보니 그는 시골 촌로도 다 아는 너무 잘 알려진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이육사’의 삶을 좆다가 석정 ‘윤세주’를 알게 되고 그 삶을 뒤좇아 가보니 우리의 뒤틀린 역사가 너무너무 원통합니다. 이놈에 육시랄 역사…….

이한수  hansu8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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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080

이육사의 외가는 허씨 집안이다. 육사의 외조부는 의병장이고 외조부의 형제인 왕산 허위는 의병 총 대장이었다. 허씨 집안 전체가 무장 의병투쟁에 투신한 것이다. 

나중에 허위는 고종의 부름을 받고 지금의 검찰총장, 대법원장 서리, 비서실장까지 고위 공직에 모두 올랐으나, 항상 의병투쟁을 독려하고 지원하는 행동을 비밀리에 지속적으로 펼쳤다. 

끝내 허위는 관직을 모두 버리고 의병을 다시 조직, 서울의 일제들을 소탕하러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한강 이북에서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밀고자 때문에 체포 당한 뒤 일제가 지은 서대문 감옥 1호 사형수가 되었다. 허위는 죽는 순간까지도 일제 앞에 당당했다. 

죽지 않고 살아 남은 허씨 집안의 후대들은 모두 국외로 망명해서 무장 독립투쟁을 하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숨져갔다. 집안 전체가 멸절하다시피 되었다. 육사는 외삼촌이 만주에서 독립 투쟁을 할 때 국내 군자금을 모금하는 비밀 연락책으로도 활동했다. 생전에 안중근은 왕신 허위와 그의 집안을 아주 높이 불렀다.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 가는 도로 이름은 왕산로다. 육사의 외가인 왕산 허위의 애국적 삶을 기리고자 지은 이름이다. 퇴계로는 육사의 14대 조부인 이퇴계를 기리고자 지은 도로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