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일찍이 천하도(天下圖)를 만들어 놓고 한숨쉬며 말하기를, “내가 이 그림을 보면 내 가슴이 환히 넓어짐을 깨닫는다.”고 하였으니, 그 뜻을 세워 요긴한 부분을 엿본 것이 이미 원대(遠大)하였는데, 어찌 구차하게 당단(堂壇)을 열어서 그 일신을 함께하기를 즐겨 하였겠는가?
김영
[ 金坽 ]옛날의 군자(君子)는 매우 뛰어난 행실이 있어 자연히 세상 사람들의 뜻할 수 없는 바에 어긋났던 것을 지칭하기 어렵고 오직 성현(聖賢)이어야만 지칭할 수 있는데, 공자(孔子)께서는 이르기를, “백이(伯夷)가 인(仁)을 찾아서 인(仁)을 얻었다.”고 하였고, 맹자(孟子)는 이르기를, “성인(聖人)의 청백한 자이다.”라고 하였으니, 후세에 백이와 숙제(叔齊)를 논의하는 자가 모두 이 칭송을 계술(繼述)하여 감히 바꾸지 않았음은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저 오도(吾道)는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을 높이 받들고 있는데, 저 두사람은 성인을 즐거이 보좌하지 않았으나 이러한 것을 성문(聖門)에서 말하지 않았던 바이다. 그렇지만 성인에 비기는 것으로 자주 일컬었던 것은 하늘에서 부여한 바의 그 성명(性命)을 온전히 하여 그 적합한 곳에 극진히 하고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서 환히 크게 정해진 세상 밖에 우뚝 섰던 것이 천고(千古)의 훈계를 삼을 만하다고 여겨서가 아니겠는가? 내가 고죽국(孤竹國)의 옛터를 지날 때에 백이ㆍ숙제의 사당[夷齊廟]을 보고서 머리를 숙이고 이리저리 거닐다가 머물러 서서 그 사람됨을 상상해보며 그 뒤로 지금까지 여러 천년이 되도록 능히 계승할 자가 없었음을 한스럽게 여겼었는데, 내가 영남(嶺南)에 귀양 가기에 미쳐 계암(溪巖) 김 선생(金先生, 김영)의 명성을 듣고서 그가 현인(賢人)이었음을 알았다.
선생의 휘(諱)는 영(坽)이고 자(字)는 자준(子峻)으로, 신라의 대보(大輔) 김알지(金閼智)가 실은 시조이고, 그 뒤에 왕자(王子) 김흥광(金興光)이 광주(光州)에 옮겨 은거하여 드디어 광주인(光州人)이 되었다. 왕자의 손자 김길(金吉)은 고려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삼중 대광(三重大匡) 공신(功臣) 사공(司空)이 되었는데, 그 뒤로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대대로 계승해 보상(輔相)이 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 사는 곳을 호칭하여 ‘평장동(平章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김천리(金天利)는 우리 공정왕(恭定王, 태종) 때에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책록(策錄)되고 벼슬이 밀직사(密直使)에 이르렀으며, 그 뒤 3대를 지나 휘 효로(孝盧)는 예안(禮安)으로 옮겨 살면서 숨어 벼슬하지 않았는데, 참판(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분이 선생의 증조(曾祖)이시고, 조부 휘 수(綏)는 생원(生員)으로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휘 부륜(富倫)은 생원으로 도산(陶山) 이 선생(李先生, 이황(李滉))에게 학문을 배웠고 호(號)는 설월당(雪月堂)인데, 추천을 받아 현감(縣監)이 되었다.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부호군(副護軍) 신수민(申壽民)의 따님이시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설월당 공이 도산(陶山)에서 들었던 것으로써 가르치어 지도하였는데, 선생은 효덕(孝德)이 있는 성질을 타고나 부모께서 자신에게 원하는 바는 반드시 힘써 행하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빨리 고쳐서 혹시 또 하는 바가 없었다. 어려서나 성장해서나 처음부터 끝까지 길사(吉事)와 흉사(凶事)를 받들어 행하고 애경(愛敬)이 두루 미치며, 동류들과 사귐에 있어 무릇 상도(常道)를 좇아서 마음을 다하였던 것이 지성(至性)에서 발현되어, 한결같이 ‘선비가 될려면 의지가 높고 행실이 결백하여 오직 내 속마음에 스스로 선택해서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여겼다. 귀로는 세상의 일에 기울이지 않아서 사람들과 거처할 때 혹시 비속(卑俗)한 말로 서로 희롱하는 것을 보면 단호히 일어나서 떠나며 자신이 더럽혀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였으며, 사람들의 착한 것을 보면 문득 마음을 기울여 함께 하여 입을 열어 말하였고 악한 것을 보면 번번이 그 앞에서 힐책하여 물리쳐 끊어 용납하는 바가 없었다. 독실하게 학문을 연구하며 옛 성현(聖賢)의 글을 외어서 그 뜻을 통하여, 반드시 내 성령(性靈)에 도달하고 숙학(宿學)들에게 들으며 선생이 도덕(道德)을 강론한 가르침은 번번이 공경히 따라서 이른바 ‘내 정취(情趣)를 넓히는 것’을 찾았었는데, 혹시 어떤 경우에 시(詩)를 지으면 뛰어나게 홀로 우뚝 선 뜻이 있어 식자(識者)들이 깜짝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서애(西厓) 유 상국(柳相國, 유성룡(柳成龍))이 체찰사(體察使)가 되어서 영남(嶺南)을 진무(鎭撫)할 때에 공이 도보(徒步)로 병사들이 주둔한 곳에 찾아가서 뵈었는데, 마침 명(明)나라의 총병(摠兵) 오유충(吳惟忠)과 유격장(遊擊將) 노득공(盧得功)을 만나자, 두 사람이 선생의 군자(君子)다움을 보고서 이끌어 앉게 한 다음 공경히 대우하고 작은 나라의 포의(布衣)라 하여 그 예의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돌아가기에 미쳐서는 또 글을 지어 주어 은근한 뜻을 다하였으니, 선생의 위의(威儀)와 충정이 서로 안팎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몸을 굽혀 사모하여 쏠리게 하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선생은 광해군(光海君) 4년인 임자년(壬子年, 1612년)에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임되었고, 4년 뒤에 추천으로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광해군이 인도(人道)에 어긋나는 짓을 하자, 공은 간하여도 바꾸어지지 않을 줄을 알고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누차 불러도 이르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 모후(母后,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고 정사(政事)가 더욱 혼란해지므로, 드디어 세상에 뜻을 끊고 집안에 숨어 살면서 조심스레 홀로 몸을 다스리며 학문에 열중하지 않는 날이 없었고, 때때로 제생(諸生)들과 더불어 학사(學舍)에 가서 경전(經典)의 뜻을 강론하는가 하면 혹은 산택(山澤)의 경관이 좋은 곳을 찾아 놀면서 봄 가을에 기후가 화창하고 햇빛이 밝을 때는 마음이 쏠리는 대로 따라가다가, 나의 정신을 기쁘게 할 것이 있으면 술잔을 기울이고 거문고를 타면서 나의 즐거움만 즐기고, 세상 속의 일이 자신에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써 혹 가슴속에 간여하지 않았다. 몇 해가 지난 뒤 계해년(癸亥年, 1623년 광해군 15년)에 인조(仁祖)의 반정(反正)이 있어 그날로 인목 대비를 맞아 궁중(宮中)으로 돌아와서 아첨했던 간신들을 전부 주륙(誅戮)한 다음, 덕망(德望)이 있는 옛 신하와 초야(草野)에 있는 여러 현자(賢者)들을 불러 기용하였는데, 맨 먼저 공을 승진시켜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을 삼았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조금 지나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하였지만 사양하고 나가지 않자, 임금이 조리(調理)하고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반적(叛賊) 이괄(李适)이 한양 도성(都城)을 범하여 임금이 공산(公山, 공주(公州))으로 행차하고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는데, 선생은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위태로운데도 부질없이 앉아서 모면하기를 청하는 것은 의리가 아니라’고 여겨, 출발하여 도성 밖에 이르렀다가 반적이 평정되어서 임금이 도성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서야 돌아서면서 아들 김요형(金耀亨)을 머물러 두어 사직하겠다는 상소를 올렸었는데,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장려하였다. 대관(臺官)이 ‘아들을 시켜 상소하게 하는 것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등용된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이르면서 탄핵할 것을 아뢰었으나, 임금은 따르지 아니하고 체차(遞差)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임명하였다가 형조(刑曹)의 낭관(郎官)으로 전임시켰지만 선생은 출발하지 않았다. 이에 여러 훈신(勳臣)과 권귀(權貴)들이 미워하여 벼슬길에 나아감과 물러섬을 관망하려고 의주 판관(義州判官)으로 내보내어 임명하고는 자못 규율 안의 죄를 시행하게 되었으나 선생은 오히려 돌아보지 않았다. 마침내 사직하여 체차되었고, 임금도 역시 죄주지 않았었는데, 그 뒤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 두 번이나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집의(執義), 세자 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삼았고, 한 번 사간원 헌납 겸 보덕(司諫院獻納兼輔德)을 삼았으며, 일곱 번이나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삼았으나 소명(召命)이 내릴 때마다 번번이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 호란(胡亂)에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자 청(淸)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에워싸서 아침저녁에 닥칠 화가 위급하므로, 영남(嶺南)의 선비들이 의병(義兵)을 일으켰는데, 선생은 집안의 재산을 내놓아 의병의 군량(軍糧)을 도왔다. 그 이듬해 봄에 남한산성을 지키지 못하자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서 통곡하며 동방 예의(禮義)의 나라가 오랑캐에게 굴욕당하여 명(明)나라를 끝까지 받들지 못함을 마음 아파하였는데, 비통 분개하는 말이 지은 시(詩)에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해 가을에 또 사간원 사간에 임명하였으나 또 출발하지 않았는데, 이로부터 다시는 벼슬을 제수하는 명이 있지 않았다. 선생은 문을 닫고 자신을 보존하여 마치 병들어 팔다리 뼈대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하면서 20년 동안 방문 바깥을 나가지 않았고, 손님이 이르러도 귀천(貴賤)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앉아서 보았는데, 사람들이 그 뜻을 미루어 생각할 수 없었으나 사림(士林)들은 더욱 고상하게 여겼다. 신사년(辛巳年, 1641년 인조 19년) 3월 21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명이 65세였다. 그해 10월 28일에 예안현(禮安縣)의 서북쪽 연곡산(燕谷山) 묘향(卯向)의 묘원에 장사지내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49년째 되던 해인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연신(筵臣)이 임금에게 아뢰어서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선생의 기개(氣槪)와 지조(志操)가 뛰어나다고 하여 그 혼령을 현귀(顯貴)하게 한 것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천하도(天下圖)를 만들어 놓고 한숨쉬며 말하기를, “내가 이 그림을 보면 내 가슴이 환히 넓어짐을 깨닫는다.”고 하였으니, 그 뜻을 세워 요긴한 부분을 엿본 것이 이미 원대(遠大)하였는데, 어찌 구차하게 당단(堂壇)을 열어서 그 일신을 함께하기를 즐겨 하였겠는가? 일찍이 정학(正學)을 듣고서 좋아하게 되고 밝히게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늘에서부터 받은 것은 견고한 마음이라 덕(德)이 이루어졌으니 옥(玉)처럼 깨끗하였는데, 행위를 도(道)에 한결같이 하고 거취(去就)를 의리에 따라 결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선생에게서 그 범하지 못할 빛이 있음을 보았고 그 빼앗을 수 없는 의지가 있음을 알았으니, 반드시 기강이 문란한 세상의 녹봉(祿俸)을 받는 벼슬에 끌려가지 않았던 것은 사람들이 모두 질정(質定)하였던 바이다.
계해년(癸亥年)에 인조가 즉위하여 궁궐이 깨끗해진 날에 이르러서야 권세 있던 자들의 음흉한 짓이 평온하게 되고 비색(否塞)한 데에서 태평함을 취하였으므로, 법도는 변경한 것이 없고 사직(社稷)을 정상적으로 받들게 되어 추악한 것들이 갑작스레 제거되자 나라 안이 복종하여 선왕(先王)의 시대와 더불어 다름이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선조(先朝) 때의 유명한 공경 대부(公卿大夫)들로 배척당한 이와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지내던 선비들이 소명(召命)에 달려와서 조정에 모이지 않음이 없었고, 혹시 임금의 은지(恩旨)가 내렸을 때 머뭇거리지 않았는데, 오직 선생은 여러 번 예를 갖추어 부지런히 불렀는데도 찬명(贊命)의 반열에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니, 평생 동안 몸을 바쳐 그 뜻을 돌렸다고 하더라도 어찌 기쁨이 있었겠는가? 당시의 사람들이 혹시 선생을 의심하기보다는 천지(天地)를 의심하는 자는 적었고, 더러 화(禍)에 걸려들까 순리에 맡겼다고 풀이하기도 하지만 선생은 오히려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헌문왕(憲文王, 인조)이 비방하여 해치는 자의 말을 받아들여 의심하지 않아서 선생으로 하여금 마침내 자신의 행하고 싶을 대로 하다가 세상을 떠나게 두었으니, 대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정치할 때에 백이와 숙제가 떠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릇 어진 군주(君主)는 앞뒤 똑같은 것이다. 나라가 흥하고 망할 때 처하여 당하였던 바가 달랐으며, 또 순수하고 경박했던 풍속이 같지 않았을 것인데, 이때에 신하된 자의 위치에서 속마음에 저울질한 바가 있어 경중(輕重)이 본래 정해졌을 것이므로, 자신의 의지와 의리를 힘써 아뢰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선생이 평생 동안 시기의 닥치는 그대로에 순응한 바로서 번번이 질병을 이유로 들어 사양하였는데, 그가 평상시에 처신하는 바가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임금이 내린 벼슬을 받아 실제로 부임하지 않았음을 더욱 믿도록 하여 자신의 기대했던 바를 따르려고 하였으니, 그 길은 위이(逶迤)되었지만 그 마음은 공자(孔子)께서 일컬었던 바 ‘일민(逸民, 학덕(學德)을 지니고 은둔해 지내는 사람)’의 마음으로서 고금의 선비들이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어(語)에 이르기를, “욕심이 없는 자는 비록 성인(聖人)이라 할지라도 제지하질 못한다.”고 하였는데, 헛된말이 아닐 것이다.
동계(桐溪) 정온(鄭蘊)은 기개와 지조가 한 시대를 가리울 정도여서 좀채로 남을 허여(許與)함이 적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자준(子峻)은 우리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유진(柳袗) 공은 말하기를, “나의 벗은 그 기상이 청천 백일(靑天白日)과 같다.”고 하였으니, 두 공의 선생에 대한 말은 모두 비등한 바가 있어서 말한 것이다. 김시양(金時讓) 공이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에 일찍이 선생을 탄핵하였다가 늦게야 탄식하기를, “내가 지금에 와서, 내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을 알았다.”고 하였으니, 대체로 선생이 끝내 지조를 변경하지 않음을 보고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이었다. 선생의 덕행(德行)과 학문으로 시대가 맞지 않은 때를 당하였기에, 천거되어 임금을 보좌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히지는 못하였지만 그 명성은 족히 탐욕스러운 세상에 격려하도록 하였으므로 오도(吾道)에 공이 있음이 컸으며, 그 밖에 말과 행동으로써 재결(裁決)했음이 컸던 것은 미루어서 상상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반드시 조목조목 열거한 다음에야 알겠는가?
시문(詩文)은 타고난 성품과 학문에 따라 그 가운데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뛰어나게 상쾌하며 우아하고 힘차서 세속(世俗)과 더불어 뒤섞이지 않았다. 그러나 구차스럽게 보이지 않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저술(著述)에 소홀하였고, 비록 때로 더러 뜻을 나타내어 시문을 만든 것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초고(草稿)를 모아 두지 않았으며, 간간이 또한 사물에 접촉하여 회포를 읊었다고 할지라도 입으로 한번 읊조리고는 말았고 초고에 붙이지 않았다. 심지어 문을 닫고는 절대로 다시는 한묵(翰墨)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서 서로 전한 것이 적었으며, 문인(門人)과 자제(子弟)들이 기록해 둔 몇 권의 유고(遺稿)가 본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글씨를 잘 썼으나 남을 위하여 글자를 써 주지 않았으며, 편지 역시 말로써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자신이 쓰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소장되어 전하는 것이 없다. 선생은 집 옆에 시내가 있고 시냇가에 바위가 있는데, 선생이 때때로 그 위를 거닐며 자호(自號)를 계암(溪巖)이라고 하였다.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정자(正字) 홍사제(洪思濟)의 따님인데, 부녀자의 덕행이 있어 선생의 배우자가 될 만하였다. 4남을 낳았는데, 맏아들 김요형(金耀亨)과 둘째 아들 김요립(金耀立)은 모두 재능과 학식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으며, 셋째 아들 김요두(金耀斗)는 진사(進士)로 고상한 행실이 있었고, 넷째 아들 김휘세(金輝世)는 세상을 피하여 나가지 않았었는데, 품계를 뛰어넘어 좌랑(佐郞)을 임명하였다. 김요형은 아들이 없어 아우 김휘세의 아들 김석창(金碩昌)을 양자로 삼았고, 김요립은 1남 김선창(金善昌)을 두었으며, 김요두는 2남 김시창(金是昌)ㆍ김용(金鏞)을 두었고, 김휘세는 3남 김석창ㆍ김후창(金厚昌)ㆍ김원창(金遠昌)을 두었다. 김선창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여택(金汝澤)이고 사위는 송현도(宋顯道)이다. 김용은 4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김후창은 1남 3녀를 낳았는데, 딸로 맏이는 황한(黃憫)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김원창은 4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송현도는 3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안팎의 손자ㆍ증손이 매우 번창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가법(家法)이 잘 정돈되어 선생의 남은 공적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선생을 어디에 둘 것인가? 이를 인(仁)이라 일러야 할까 청(淸)이라 일러야 할까? 그 형적을 없이하고 그 마음을 닫으니, 가히 신명(神明)으로 이해하여야지 일로써 찾기는 어렵도다. 옛사람 같음이여 옛사람 같음이여, 어찌 그렇게 멀리 염려하고 깊게 생각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