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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釋同異之辨 : 유교와 불교의 동질성과 이질성에 대한 논고: 불씨잡변,
先儒謂儒釋之道。
句句同而事事異。今且因是而推廣之。此曰虛。彼亦曰虛。此曰寂。彼亦曰寂。然此之虛。虛而有。彼之虛。虛而無。此之寂。寂而感。彼之寂。寂而滅。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유가(儒家)와 석씨(釋氏)의 도(道)는 문자의 구절(句節) 구절은 같으나 일[事]의 내용은 다르다.”하였다. 이제 또 이로써 널리 미루어 보면, 우리(유가(儒家))가 허(虛)라고 하고, 저들(불가(佛家))도 허라 하고, 우리가 적(寂)이라 하고 저들도 적(寂)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허(虛)는 허(虛)하되 있는 것이요, 저들의 허(虛)는 허(虛)하여 없는 것이며, 우리의 적(寂)은 적(寂)하되 느끼는 것이요, 저들의 적(寂)은 적(寂)하여 멸(滅)하는 것이다.
*. 유가와 불가가 비슷한 이유는 적(寂)은 불교의 śamatha의 번역으로 보이는데, 이는 마땅한 말이 없어, 밑에 나오는 주역의 계사전의 단어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짝으로 쓰이는 vipaśyana는 觀,照의 의미이다. 寂而滅은 불교에서 주장이 아니다, 불교는 照而寂, 寂而照을 말한다. 寂而滅이 아니다.
此曰知行。彼曰悟修。此之知。知萬物之理具於吾心也。彼之悟。悟此心本空無一物也。此之行。循萬物之理。而行之無所違失也。彼之修。絶去萬物。而不爲吾心之累也。
우리는 지(知)와 행(行)을 말하고, 저들은 오(悟)와 수(修)를 말한다. 우리의 지는 만물의 이치가 내 마음에 갖추어 있음을 아는 것이요, 저들의 오(悟)는 이 마음이 본래 텅 비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 것이며, 우리의 행(行)은 만물의 이치를 따라 행하여 잘못되거나 빠뜨림이 없는 것이요, 저들의 수(修)란 만물을 끊어 버려 내 마음에 누(累)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 이것도 정도전의 오해이다. 불교는 아무것도 없음이 결코 아니다. 이렇게 텅 비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오해는 ‘無’자 번역에서 기원한다. ‘無’는 산스크리트어의 부정사 'na'에 해당되는데, 문장 부정으로 ‘있다/없다’의 ‘없다’인 ‘無’가 아니라, 영어의 not 의미이다. 즉 'I am not student'는 '나는 학생이 없다'가 아니라, '학생이 아니다'라고 해야 한다. 이를 일괄적으로 '없다'로 번역해 놓은 것이 작금의 번역이라 이런 견해로 확 변해 버린 것이다. 물론 있다는 것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없다'를 강조할수도 있겠지만, 이는 불교의 근본 교설이 아니다. 心本空無一物也이란 ‘마음은 본래 공하여 한 물건도 없다’가 아니라, ‘마음은 본래 공하여 한 물건도 아니다’가 좀더 가깝다. ‘없다’가 되면, 정도전 견해처럼 되어 버린다. 그래서 絶去萬物(만물을 끊어 버린다)는 이상한 단멸의 논리가 나온다.6 번뇌를 끊는다는 것도 하열한 사람들을 위해 있는 방편설에 불과하다. 산스크리트어에는 '끊는다(絶去)'는 말 자체가 없다. 번뇌가 실은 그 자체(sva-bhāva)가 언어적 허구에 기초하고 있다.
참고로 언어는 언어일뿐 그 취지를 알았으면 언어도 버려야 한다. 그러나 이 별 상관도 없는 언어를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이런 미묘한 차이점이 우리말과 산스크리트에서 대단히 잘 보인다는 점을 보여 주고자 함이다. 언어는 전달 수단인 언어일 뿐이지, 언어에 그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다.
此曰心具衆理。彼曰心生萬法。所謂具衆理者。心中原有此理。方其靜也。至寂而此理之體具焉。及其動也。感通而此理之用行焉。其曰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是也。
우리는 마음속에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고, 저들은 마음이 만법을 낳는다고 하니, 이른바 모든 이치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마음 가운데에 원래 이 이(理)가 있어 바야흐로 이(理)가 정(靜)할 때에는 지극히 고요하여 이 이치의 체(體 본체)가 갖추어지고, 이(理)가 동(動)하게 되어서는 느끼고 통하여 이 이치의 용(用 작용)을 행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아도 감(感)하여 천하의 모든 연고[故]를 드디어 통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 心生萬法(마음이 만법을 낳는다)는 말도 전혀 잘못된 견해이다. 무엇이 心이고 무엇이 萬法인가? “역易은 무사야无思也하며 무위야无爲也하야 寂然不動하여 感而遂通天下之故이다.” 라고 주역의 계사전(周易 繫辭傳)에서 말하는데, 이는 불교와 같은 내용이다. 오히려 이(理)를 상정하여 조용할때 체(體 본체)가 갖추어 진다거나, 동(動)하여 용(用 작용)하여 작용을 논하는 자체가 “역易은 무사야无思也하며 무위야无爲也하야 寂然不動하여 感而遂通天下之故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정도전이 과연 알고 하는 얘기일까?
所謂生萬法者。心中本無此法。對外境而後法生焉。方其靜也。此心無有所住。及其動也。隨所遇之境而生。其曰應無所住而生其心。
그러나 이른바 만법(萬法)을 生한다는 것은 마음 가운데에 본래 이 법이 없는 것인데 외계(外界)를 대한 후에 법이 생긴다. 그러므로 바야흐로 법(法)이 정(靜)할 때에는 이 마음이 머물러 있는 곳이 없고, 법(法)이 동(動)하게 되어서는 만나는 바의 경계(境界)에 따라 생긴다는 것이니, 말하기를, “ 마땅히 주(住)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이 생긴다.”고 한다.
*. 應無所住而生其心도 불설이 아니고, 보살의 수행을 위한 방편설이다. 즉 보살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마음을 쓰라는 것이 그 요지이다. 참고로 하단에 산스크리트 원문을 참조하여 놓았으니, 범어 원문에서 그 의미가 무얼 말하는지 보라. 참고로 동정(動靜)간에 서서있지 않음인데, 정도전의 견해는 정할때는 머물러 있지 않고, 동할때는 경계가 생긴다 번역하니, 도대체 무얼 말하는 지 알수 없다.
按)此一段 出般若經 言應無所住者 了無內外 中虛無物 而不以善惡是非 介於胸中也 而生其心者 以無住之心 應之於外 而不爲物累也 謝氏解論語無適無莫 引此語
【안】 이 말은 《반야경(般若經)》에서 나온 것으로, 應無所住(마땅히 주착하는 바가 없다)라는 것은 안팎이 없는 것을 요달하여, 그 가운데 허하여 물(物)이 없어, 선악으로 시비를 가슴 가운데에 두지 않는 것이다. 而生其心(그 마음에 생기는 것)이란 것은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밖에 응하여 물(物)에 누(累)되지 않는다 이니, 사씨(謝氏)가 《논어》의 ‘무적무막(無敵無莫)’이란 글을 해석할 때에 이 말을 인용하였다.
하고
又曰。心生則一切法生。心滅則一切法滅
또 말하기를, “마음이 일어나면 일체(一切)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일체의 법도 사라진다.”
按)出起信論 是也。此以理爲固有。彼以法爲緣起。何其語之同而事之異如是耶。
【안】 기신론(起信論)에서 나왔다는 것이 이것이다. 우리는 '이(理)'가 고유(固有)하다고 하는데, 저들은 법(法)이 연기(緣起) 한다 하니, 어쩌면 그 말은 같은데, 일은 이렇게도 다른가?
*. 心生則一切法生。心滅則一切法滅, 여기서 법(法)은 dhārma와 bhāva(존재)의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를 살펴보라. 필자는 오역으로 여기의 법(法)은 bhāva(존재)의 번역이라는 것을 주창한 바가 있다.
理/氣의 논쟁도 전부 언어적인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다. 플라톤 이후로 서구 철학은 모두 이런 형이상학적인 본질론을 플라톤 이후로 대대적으로 추구하는데, 이런 추구는 2,000년 뒤에서야 칸트에 의해, 그런 관념론적인 진리는 부정 당한다. 이런 이데아의 본질이 실제있는지는 차치하고, 언어적으로 보면, 전부 언어 구조의 내부에서 구성된 진실을 추구한 결과라는 것이 칸트 주장의 요체이다. 이 간단한 사실들을 서구에서 알아내는 데는, 무려 2천 년의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따라서 ‘고유한 실체로 理가 있다’고 하는 정도전의 주장은 그것이 실제 있는지 없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자신이 만든 언어 구조를 열심히 따라간 것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은 이를 눈치채고는, 원리로는 '법(法)이 연기(緣起)'하는 것을 '이(理)'와 유사한 것인데, 어떻게 사(事)로는 생기고 멸하는 이분법으로 그렇게 다르냐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도 상당히 타당한 점이 있다. 여기서 '일체법 연기'는 'sarva(一切)-dharma(法) praty_ītya(緣)-sam_ut_pāda(起)'로, '존재의 인연'은 'bhāva(存在)-hetu(因)-praty_aya(緣)'으로, 한문으로는 같은 연(緣)이지만, 이처럼 범어로는 다르게 표현된다. 이런 번역의 차이가 중국어 번역 과정에서 표현이 될 리가 만무하므로, 정도전이 지적하는 현상이 일어 난다. 그러므로, 정도전의 문제 제기는 사실은 대단히 날카로운 지적이다. 불교에서도 스스로도 이런 문제가 있는 줄은 전혀 생각도 안 하는데, 정도전이 이런 맹점을 찌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불교 번역의 문제점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불교가 이랬다면, 진작 망했을 것이다.
此則曰酬酢萬變。彼則曰隨順一切。其言似乎同矣。然所謂酬酢萬變者。其於事物之來。此心應之。各因其當然之則。制而處之。使之不失其宜也。如有子於此。使之必爲孝而不爲賊。有臣於此。使之必爲忠而不爲亂。至於物。牛則使之耕而不爲牴觸。馬則使之載而不爲踶齕。虎狼則使之設檻置阱而不至於齩人。蓋亦各因其所固有之理而處之也。
우리는 “(내가 있어서) 만 가지 변화를 수작(酬作)한다.” 하는데, 저들은, “(나를 떠나서) 일체에 수순(隨順)한다.”하니 그 말이 같은 것 같으나, 그러나 이른바 ‘만 가지 변화를 수작한다.’는 것은, 그 어떤 사물이 올 때 마음이 그것에 응하여 각각 그 마땅한 법칙에 따라 알맞게 처하여, 그 마땅함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만일 여기에 아들 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효자(孝子)가 되게 하고 적자(賊子)가 되지 못하게 하며, 여기에 신하 된 사람이 있으면 충신(忠臣)이 되게 하고 난신(亂臣)이 되지 못하게 하며, 물(物)에 이르러서도 소[牛]는 밭을 갈고 사람을 떠받지는 못하게 하며, 말은 물건을 싣되 사람을 물지는 못하게 하며, 호랑이는 함정을 만들어 사람을 물지 못하게 하나니, 대개 그 각각의 진실을 가지고 있는 이치에 인하여 처하게 하는 것이다.
若釋氏所謂隨順一切者。凡爲人之子。孝者自孝。賊者自賊。爲人之臣。忠者自忠。亂者自亂。牛馬之耕且載者。自耕且載。牴觸踶齕。自牴觸踶齕。聽其所自爲而已。吾無容心於其間。佛氏之學如此。自以爲使物而不爲物所使。若付一錢則便沒奈何他此。其事非異乎。然則天之所以生此人。爲靈於萬物。付以財成輔相之職者。果安在哉。其說反復。頭緖雖多。要之。此見得心與理爲一。彼見得心與理爲二。彼見得心空而無理。此見得心雖空而萬物咸備也。
만일 석씨(釋氏)의 이른바 ‘일체에 수순(隨順)한다.’는 것은 무릇 남의 아들된 사람의 경우에, 효자되는 사람은 스스로 효자되고 적자(賊子)되는 사람은 스스로 적자되며, 남의 신하된 사람의 경우는, 충성하는 사람은 스스로 충신되고, 난(亂)하는 사람은 스스로 난신(亂臣)되며, 소나 말이 밭 갈고 물건을 싣고 하는 것이 스스로 갈고 싣고 하며, 사람를 떠받고 물고 하는 것도 스스로 떠받고 물고 하여, 스스로 하는 대로 들어 줄 뿐이요, 내 마음을 그 사이에 씀은 없다.
불씨의 학이 이와 같은지라 저들 스스로가 물(物)을 부리기는 하되 물에게 부림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일 돈 한 푼을 주어도 곧 그것을 어찌할 줄을 모른다면 그 일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즉 하늘이 이 사람을 내어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고, 재성(財成)ㆍ보상(輔相)의 직책을 준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 설이 반복되어 두서(頭緖)가 비록 많으나, 요컨대 우리는 마음과 이치가 하나라고 본 것이요, 저들은 마음과 이치가 둘이라고 본 것이며, 저들은 마음이 공(空)함으로써 이치도 없다고 보았고, 우리는 마음이 비록 공(空)하나 만물의 이치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본 것이다.
*. 유교는 일원론이고 불교는 이원론이라고 하는 점은 불교의 근본 주장인 ‘중도(中道)’를 전연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이해한 결과이다. 문제는 정도전은 언어구조에서 가정된 주체라는 존재를 항상 가정하고 논지를 전개함을 알 수 있다. 즉 그의 논지는 언어 구조 안에 한정되어 있다.
故曰。吾儒一。釋氏二。吾儒連續。釋氏間斷。然心一也。安有彼此之同異乎。蓋人之所見。有正不正之殊耳。四大身中誰是主。六根塵裏孰爲精。
그러므로 말하자면, 우리 유가는 하나이고 석씨는 둘이며, 우리 유가는 연속이고 석씨는 간단(間斷)인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마찬가지이니 어찌 우리와 저들의 같고 다름이 있겠는가? 다만 사람의 보는 것이 옳게 보았느냐 잘못 보았느냐에 있을 뿐이다.
석씨는 그 마음을 체험한 경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네 원소로 된 몸[四大身] 가운데 어느 것을 주(主)라 하고 / 四大身中誰是主
여섯 감관의 번뇌[六根塵] 속에 무엇을 정(精)이라 할까 / 六根塵裏孰爲精.
*. ‘연속(連續)’은 상견(常見)이며, ‘간단(間斷)’은 단견(斷見)이다. 이는 언어적 양 측면일 뿐이다. 이 두 가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불교이므로, 정도전의 견해는 불교의 주장과 전연 다른 그가 이해하는 바의 불교일 뿐이다.
按)地水火風四大 和合爲一身 而別其四大則本無主 色聲香未觸法六根塵 相對以生 而別其六根則本無精 猶鏡像之有無也 黑漫漫地開眸看。終日聞聲不見形。
【안】 〈대(大)는 그 이상 더 큰 것이 없다는 뜻으로 번역하여 원소라 함.〉지(地 : 뼈) 수(水 : 피ㆍ고름) 화(火 : 온기) 풍(風 : 호흡) 이 사대(四大)가 화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었으나 그 네 가지 원소를 따로 떼내면 본래 주(主)가 없는 것이고, 눈에 대한 빛깔과 귀에 대한 소리와 코에 대한 냄새와 입에 대한 맛과 피부에 대한 감촉이 여섯 가지[六根]의 번뇌인데 그것이 서로 대경(對境)이 되어 생기지만, 그 6근(六根)을 따로 떼내면 본래 정(精)이 없으므로, 마치 거울에 비치는 형상을 있다고 하지만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캄캄한 어두운 땅에서 눈을 떠 보라 / 黑漫漫地開眸看
온종일 소리는 들리어도 형체를 볼 수 없다네 / 終日聞聲不見形
按)以慧照用則雖黑漫漫地開眸看 暗中有明 猶鏡光之暗中生明也 此釋氏之體驗心處。謂有寧有跡。謂無復何存。惟應酬酢際。特達見本根。
【안】 지혜로써 용(用)에 비추면 비록 캄캄한 어두운 땅에서 눈을 떠 보아도 그 캄캄한 속에 광명이 있나니, 마치 거울 빛이 어두움 속에서도 광명이 있는 것과 같음이다.
하였고, 우리 유가에선 마음의 체험한 경지를 말하기를,
있다고 한들 어찌 자취가 있으며 / 謂有靈有跡
없다고 하면 다시 어찌 있으랴 / 謂無復何存
오직 사물에 응하여 수작할 즈음에 / 惟應酬酢際
다만 통달하여 본근을 볼 뿐이다 / 特達見本根
按)朱子詩 此吾儒之體驗心處。且道心但無形而有聲乎。抑有此理存於心。爲酬酢之本根歟。學者當日用之間。就此心發見處體究之。彼此之同異得失。自可見矣。
【안】 이는 주자의 시이었다
또 도심(道心)이란 본래 형체가 없거늘 소리가 있겠는가? 역시 이 이치를 마음에 간직하여 수작의 본근을 삼아야 하리니, 배우는 자가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이 마음의 발현되는 곳에 나아가서 실제로 체험하고 궁구(窮究)해 본다면, 그들과 우리와의 같은 점과 다른 점과 옳게 본 것과 잘못 본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 정도전이 주장한 내용과 불교의 주장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여기서 ‘리(理)’를 찾거나 보는 곳에서 體를 구한다면, 이는 언어적 진실을 구하는 일일 뿐이다.
請以朱子之說申言之。心雖主乎一身。而其體之虛靈。足以管乎天下之理。理雖散在萬物。而其用之微妙。實不外乎人之一心。初不可以內外精粗而論也。然或不知此心之靈而無以存之。則昏昧雜擾。而無以窮衆理之妙。不知衆理之妙。而無以窮之。則偏狹固滯。而無以盡此心之全。此其理勢之相須。蓋亦有必然者。
주자(朱子)의 설로써 거듭 말하건대, 마음이 비록 한 몸의 주(主)가 되지만 그 체(體)의 허령(虛靈)함은 족히 천하의 이치를 주관할 수 있고, 이치가 비록 만물에 흩어져 있지만 그 용(用)의 미묘(微妙)함은 실로 사람의 한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니, 처음부터 어느 것이 안이고 밖이고, 어느 것이 정(精)하고 조(粗)함임을 논(論)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혹 이 마음의 신령스러움을 알지 못하여 이것을 간직함이 없다면 어둡고 뒤섞이어 모든 이치의 묘함을 궁구하지 못할 것이요, 모든 이치의 묘함을 알지 못하여 궁구함이 없으면, 막히어 이 마음의 온전함을 다하지 못하리니 이것은 그 이론으로나 사세로 보아 서로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是以。聖人設敎。使人默識此心之靈。而存之於端莊靜一之中。以爲窮理之本。使人知有衆理之妙。而窮之於學問思辨之際。以致盡心之功。巨細相涵。動靜交養。初未嘗有內外精粗之擇。及其眞積力久。而豁然貫通焉。亦有以知其渾然一致。而果無內外精粗之可言矣。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가르침을 베풀되, 사람들에게 이 마음의 신령스러움을 제 스스로가 알아 단정(端正)하고 엄숙(嚴肅)하고 정일(精一)한 가운데에 이 마음을 간직하여 이 이치를 궁구하는 근본으로 삼게 하며, 사람들에게 모든 이치의 묘함이 있는 줄을 알아,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는 그 즈음에 궁구하여 마음을 극진히 하는 공(功)을 이룩하되, 크고 작음을 서로 흐뭇하게 하고 동(動)하거나 정(靜)함을 함께 길러갈 뿐, 처음부터 그 어느 것이 안이고 밖이고, 어느 것이 정하고 조함임을 택하지 않게 하나니, 참으로 오랫동안 힘을 쌓아 활연(豁然)히 관통하는 데에 이르면 역시 혼연히 하나가 되는 줄을 알아서 과연 안이고 밖이고 정하고 조함이 없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今必以是爲淺近支離。而欲藏形匿影。別爲一種幽深恍惚艱難阻絶之論。務使學者。莽然措其心於文字言語之外。而曰道必如是然後可以得之。則是近世佛學詖淫邪遁之尤者。而欲移之以亂古人明德新民之實學。其亦誤矣。朱子之言。反復論辨。親切著明。學者於此。潛心而自得之可也。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꼭 이러한 것을 천근(淺近)하고 지리(支離)하게 여겨 형체를 숨기고 그림자를 감추려 하면서 따로이 일종의 궁벽하고 황홀하고 까다롭고 앞뒤가 막힌 논리를 만들어, 힘써 배우는 자로 하여금 막연히 그 마음을 문자와 언어 밖에 두게 하여 말하기를,
“도(道)는 반드시 이같이 한 후에야 얻을 수 있다.”하니 이것은 근세의 불씨의 학의 피ㆍ음ㆍ둔ㆍ사(詖淫遁邪)가 더욱 심한 것인데, 이것을 옮겨와서 옛 사람의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의 참된 학을 어지럽히고자 하니 그 또한 잘못이다. 주자의 말이 이 모든 것을 되풀이하고 변론하여 친절하게 밝혔으니, 배우는 자는 이에 잠심(潜心)하여 스스로 얻어야 할 것이다.
*. 이처럼 ‘체(體)의 허령(虛靈)함’을 보는 것 등 조차도 불교에서는 논의 대상이 아니다. 이는 지해(知解)라 하여 불교에서는 이 역시 배척한다. 아무튼, 신 유학파의 주장은 비록 선불교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이는 태생적으로 선불교의 것을 신유학에서 도입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도전이 여기서 말하는 불교는 불교의 모습이 아니라, 정도전이 자기 마음대로 본 불교의 이해일 뿐으로, 대부분은 잘못된 것을 전거하여 자기 마음대로 세운 불교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도전이 그토록 주장하는 유교가 기실은 불교라는 점이다. 정작 그 자신도 그걸 모르고서, 불교는 제거해야만 마땅한 대상이라고 핏대를 세워 주장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그가 세운 성리학도 이런 어처구니 없음을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정도전이 주장하는 그런 유교 수준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정도전은 극단까지 추구한다면, 불교라는 종착역에 이를 것이다.
정작 그는 그가 추구했던 것이 다름 아닌 바로 불교이라는 것을 그는 과연 몰랐을까?
<應無所住而生其心>에 대한 산스크리트 원문 참조.
*. "應無所住而生其心" 번역에서 정도전은 ‘應’을 부사인 오늘날처럼 ‘마땅히’가 아니라, ‘응하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구절을 범어에서 직역을 하면, “보살에 의해 안_서서있는 마음짓기를 빼게하였버려야 합니다."이고, 그리고 부연하여 '그 어느 곳에서라도 서서있는 마음짓기가 빼 내였버려서는 아니됩니다"가 된다. 즉 ‘應’은 '~였버려야'에 해당이 되어, 이를 범어 문법 용어로는 '미래수동분사'라하는데, 한문은 원시적인 언어인지라, 이런 것이 전연 표지가 되지 않으므로 부사 '마땅히'가 정도가 될 것이다.
'無所住'는 우리말로 하면, '안_서서있는'이다. 범어늬 부정하는 방식은 우리말의 '안_'과 같아, 말 그대로 '안_서서있는'으로 된다. 이는 '서서있다가 아니다'와도 늬앙스가 약간 다르다. '서서있다가 아니다'의 경우는 '서서있다'는 것을 주어로 하여 부정을 하지만, '안_서서있다'는 아예 '안_서'있는 것이다. 이것이 범어의 언어적인 '無住'의 의미가 된다. 즉 '주함이 없다'도 아니고, '주함이 아니다'도 아니고, 우리말로 하자면 '안 주함'이라는의미이다. 이것이 불교의 '無'에 대한 범어의 늬앙스이다. 언어는 언어일 뿐이나, 언어에 뭐가 잇다고 생각하면 아니 되지만, 그래도 언어로 구사할 때도 본래 의미 그대로 근사하게 할 필요도 있다. 이런 범어의 본래 언어의 구조를 이해하면, 무얼 의미하는지 보다 정밀하게 대조해 볼 수 있다.
'서서있는'는 '서있는'과도 늬앙스가 다르다. 이렇게 중복하면 '중복 완료형'이 된다 하는데, 이는 우리말의 '서서있는'과 '서있는'의 늬앙스 차이를 '중복 완료'라 한다. '마음짓기'는 '마음작용'인데, 이는 분사형의 중성으로 유정물(有情物)이 아니라, 무정물(無情物)로 주격과 대격이 같은 격인데, 이는 우리말로 하자면, "마음짓기(가/를) 빼 내였버려야 합니다"로 주어/목적어 2가지가 다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즉 요체는 이 문장 구조에서 "마음짓기(가/를)'은 피동작주(patient)로, '보살에 의해'는 주동작주(agent)로 사역을 유지하면서 수동태 구조이다. 즉 '빼게한다'는 사역동사를 대상인 '마음작용'에 수동태로 연결해 놓은 것이다.
이렇게 '주어'를 없애는 이유는 바로 'an_ātman(무아,無我)'의 도리를 그대로 문장 구조 형성에서도 보여 주고, 불교 교설대로 그대로 산스크리트로 조성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이 한구절 만이라도 산스크리트 의미 그대로 보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파악을 하게 되므로, 실로 산스크리트는 한국말 화자에게는 복음과 같다. 언어는 언어일 뿐이지만, 이처럼 반면 교사인 거울로 삼아 거꾸로 비추어 볼 수 있다. 한국 사람이 범어를 하게 되면, 엉망진창인 중국어와는 달리 저절로 불교를 이해하게 된다.
참고로 소위 말해 대학자라는 정도전도 ‘應’을 번역함에 있어, '응하여'라고 동사로 번역하고 있음을 보라!
범어를 우리말로 보면, 유치원생도 다 알 수 있는 내용을, 모호한 한문으로 보면, 이처럼 대학자도 쉽게 오역을 하고도, 왜 부끄러운 줄도 모르게 되며, 심지어는 뻔뻔하게 이같은것을 남에게도 강요하여, 고생길에 함께 들어 가게 하고 만다. 이처럼 부정확한 함정에 한번 들어 가면, 여기 보이는 정도전 견해처럼 엉뚱한 것에 엮이어 평생을 다람쥐 쳇바퀴처럼 뱅뱅 돌게 된다.
그리고 참고로, 정작 이 문장도 '보살에 의해서'라는 대 전제가 붙어 있음으로, 이는 보살이 해야하는 수행으로 방편설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앞뒤를 잘라 버리고는, 잘못 착각하여 불타의 궁극 교설이라고 여기면 아니 된다.
이로써 정확치 않은 한문 불경의 문제점을 범어로 어떻게 보는 가를 간단한 예제를 통해 검토해 보았다.
범어는 여러 가지 문법 장치가 되어 있어, 한문처럼 모호하지가 않음을 알 수 있겠다. 더욱 중요힌 것은 우리말 화자가 보면, 그 뜻을 너무나 쉽게, 그리고 너무나 정확하게 그 미묘한 뉘앙스까지도 표현이 됨을 알 수 있다.
언어는 지시하는 손 가락인지라 그렇다고 언어에 뭔가 있다고는 여겨서도 되지 않겠지만, 그러나 범어로 보면, 따로 그 내용이 무엇이지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 구절들이 무얼 의미하는 지를 매우 정확히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확한 산스크리트를 지표로 삼아 부처님의 가르키는 바로 각자가 스스로의 견해를 명확히 검증하여 보고, 일상사 생활에 그 지시한 바를 잘 구현하기 바란다.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이 하라'고 당부하신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이 시대에 들어와, 산스크리트를 만난 것이 큰 행운일 것이다.
- 육긍대부가
안휘성 선주지방의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남전선사를 참문하고 여쭈었다.
“저는 집에서 유리병에다 거위 한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위가 점점 자라 병 밖으로 꺼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병을 깨뜨리지 않고 거위를 꺼내고 싶습니다. 물론 거위를 다치지 않게 말입니다. 스님께서는 거위를 제대로 꺼낼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남전선사가 “대부여~!” 하고 부르자,
대부가 “예!” 하고 대답했다.
남전선사가 말했다. “나왔구려.”
이에 대부가 깨친 바가 있었다. - 배휴는
어느 절에 갔더니 그 절에 祖師님들을 모셔 놓은 영각에 가서 조사의 影像을 보고 스님들에게 묻기를,
"선사의 영상은 저기 걸려 있는 데 선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읍니까?"
하니, 수 백 명 되는 대중이 있어도 답하는 사람이 없으니, 배휴가
"이 절에 공부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 마침 黃檗禪師가 그 절 부근에 토굴을 묻고 있었는데 대중들이 말하기를 아마 그 분이 참선하는 분 같다고 하며 황벽스님을 모셔왔다. 배휴가 황벽스님에게 물었다.
"先師의 영상은 저기 있는 데, 선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황벽스님이 벽력같은 소리로
"배휴야!" 하고 부르자, 배휴가 "예."하고 대답했다.그러자 황벽스님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디에 있느냐?"
이때 배휴가 활연히 道를 알았다.
- 贈東林總長老
蘇軾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동림 총장로께 드리다
맑은 시냇물 소리가 곧 부처님의 무진설법이니
푸른 산 빛이 어찌 부처님의 청정법신이 아니겠는가.
하룻밤사이 팔만사천 게송을 다른 날
어떻게 남에게 들어 보일 수 있겠는가. - 물론
받아 들이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다소 다르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범어는 그 지시하는 바가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이 무얼
지시하는지 한국 사람이라면 정확히 파악이 되게 된다. 한문에서 보이는 코끼리 다리 만지기식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물론 한문처럼 오히려
모호한 기술이 오히려 그 본래 뜻을 잘 드러낸다고 하는 주장도 물론 있긴 있고, 그런 주장도 나름대로 언어의 또 다른 측면을 일 깨운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도 하다. 필요에 따라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면 될 뿐이다.
- 대승기신론은 산스크리트 원문이 현재 없어. 이 부문은 아직 논란의 대상이다. AD5세기에 진제에 의해 국역으로 번역이 되었고, 7말 8세기초에 서역승인 실차난타가 신역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 참고로
an_ātman(무아,無我)란, 우리말로 하면, '안_아뜨만'인데, 이는 '아뜨만이 아니다(=비아(非我))'와도 늬앙스가 다름을 우리말로 보면,
알 수 있다. 즉 ‘무아,無我’처럼 말하는 것은 '我가 없다'로 되어,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