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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옷 갈아입은 광화문 글판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VIS VITALIS 2016. 3. 3. 10:16

국민일보

봄옷 갈아입은 광화문 글판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포토에세이]

입력 2016-03-02 16:58 수정 2016-03-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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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옷 갈아입은 광화문 글판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기사의 사진
사진=구성찬 기자

 


최하림 시인은 1987년 열음사에서 낸 시집 <겨울 깊은 물소리> 가운데 ‘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날 아침 하두 추워서 갑자기 큰 소리로 하느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외쳤더니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은 공기조각들이 부서져 슬픈 소리로 울었다. 밤엔 눈이 내리고 강 얼음이 깨지고 버들개지들이 보오얗게 움터올랐다. 
나는 다시 왜 이렇게 봄이 빨리 오지라고 이번에는 지넌번 일이 조금 마음 쓰여서 외치고 싶었으나 봄이 부서질까 보아 조심조심 숨을 죽이고 마루를 건너 유리문을 열고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봄이 왔구나 봄이 왔구나라고.”
 

딱 1년전 광화문 글판엔 “꽃 피기 전 봄 산처럼 꽃 핀 봄 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이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함민복 시인의 ‘마흔번째 봄’에서 발췌한 글귀입니다. 발췌문만 보고 원문을 안보면 너훈아만 알고 나훈아는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꽃 피기 전 봄 산처럼 
꽃 핀 봄 산처럼 
꽃 지는 봄 산처럼 
꽃 진 봄 산처럼 
나도 누군가의 가슴 
한번 울렁여보았으면”
 

교보생명은 1997년 여름부터 빌딩에 글귀를 내걸기 시작했습니다. 6월 글판에 올라온 건 “개미처럼 모아라 여름은 길지 않다”였습니다. 이솝우화에서 발췌했다고 합니다. 보험회사 답습니다.

그해 겨울 대한민국은 유래없는 IMF 구제금융 사태를 겪습니다. 1998년 1월 교보의 선택은 “봄에 밭을 갈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였습니다. 춘추에 실린 공자님 말씀입니다. 별 반응이 없었는지 한달만에 교체됐습니다. 

3회째부터 글판은 고은 시인의 시로 질적 도약을 합니다.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낯선 곳’에서 발췌 인용된 문구였습니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 광화문 사거리에서 만나는 교보의 글귀에서 작은 위로를 받았으면 합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