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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거

VIS VITALIS 2008. 12. 12. 11:22

달려라, 라피도!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잊혀진 영웅 라이거
한겨레  남종영 기자
» 에버랜드 사파리에 있는 라이거, 라피도와 크리스
#1.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겨?”

“당연히 백수의 왕자 사자가 이기지.”

“아니야. 호랑이가 이길걸?”

“너희들 라이거 들어봤니? 바로 사자와 호랑이를 합쳐 놓은 지상 최대의 맹수야. 사자보다 크고 호랑이보다 센 놈이야. 누구와 붙어도 무릎 꿇지 않지.”

#2.

그때 텔레비전을 켜면 포마토가 나왔다. 뿌리에는 감자가 열리고 가지에는 토마토가 열릴 것이라고 했다. 엄마들은 하드를 빠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과학자가 되라고 했다. 대학에는 유전공학과가 생겼고, 문방구의 아이들은 로봇 피겨를 들었다 놓았고, 문방구 옆 서점에서는 유에프오(UFO) 특집이 별책부록으로 딸린 소년잡지를 팔았다.


1989년 어느 날 저녁, 9시뉴스 앵커는 지상 최고의 맹수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내보내고 있었다. 이튿날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사자·호랑이 튀기 라이거 첫선’(조선일보 1989년 9월28일)

#3.

라피도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다가도 호랑이처럼 ‘가르릉’거린다. 황백색 몸통에는 희미한 줄무늬가 있고, 머리에는 갈기가 나다가 말았다. 그의 아빠는 사자, 엄마는 호랑이. 그는 경기 용인 에버랜드 사파리의 열두 살 된 라이거다. 1989년 한국 최초의 라이거 삼남매에 이어 세 번째 태어난 라이거.

지난 10월까지 라피도는 동생 크리스와 함께 사파리에 나가 앉아 있었다. 가을 하늘은 쓸쓸했다. ‘지상 최고의 맹수’ 라이거에게 환호를 보내던 과학소년들은 어른이 됐고, 인터넷 게임에 열중인 아이들은 라피도를 무심히 지나간다.

“라이거가 뭔 줄 아니?”

“호랑이와 사자와의 잡종? 우히히, 고양이처럼 생겼다.”

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 하루 종일 맹수사에서 앉아 있던 라피도(앞)와 크리스(뒤)가 오랜만에 사파리에 나왔습니다. 라피도는 몸무게 230kg에 이르는 거구이고 크리스는 160kg의 날쌘 체구를 지녔습니다. 둘은 오빠 동생 사이이죠.

달려라, 라피도!

‘지상 최대의 맹수’에서 눈길받지 못하는 동물로…마지막 라이거 스타 라피도 스토리

라피도는 한국의 마지막 라이거 스타입니다. 1~2년 안에 생을 마감할지 모릅니다.

라피도는 경기 용인 에버랜드 동물원에서 1997년 여름에 태어났습니다. 라피도의 아빠는 사자 사룡, 엄마는 호랑이 명랑이었습니다. 사룡이와 명랑이는 어렸을 적 인공포육실에서 우정을 나누다가 다 커서는 사파리 안으로 들어와 사랑을 키웠습니다. 사룡이가 일곱 살, 명랑이가 여섯 살 때였지요. 사룡이는 명랑이를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명랑이는 어느새 배가 불렀고 바둑이 같은 새끼를 낳았지요. 라피도를 받았던 인공포육실의 이양규(39) 과장도 “처음엔 호랑이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 사자, 호랑이, 라이거를 비교해보세요. 라이거는 사자의 갈기가 나다가 말았고, 호랑이의 줄무늬는 희미합니다. 모두 고양이과 동물이란 점에서 같지요.

처음엔 호랑이인 줄 알아

라피도는 에버랜드 사파리에서 세 번째로 태어난 라이거 손님이었습니다. 맨 처음 한국에 태어난 라이거는 1989년 사자 용식이와 호랑이 호영이가 낳은 대호·용호·야호 삼남매였습니다. 라이거 삼남매는 단연 동물원의 인기 스타로 군림했어요. 국내 신문과 방송은 물론 외국에서 찾아온 기자들로부터 카메라 세례를 받았고, 심지어 삼남매를 키운 사육사 아저씨도 인터뷰하느라 바쁠 정도였으니까요. “한 해 동안 300만명이 삼남매를 관람했다”고 당시 신문은 기록하고 있죠. 그러다가 8년 만에 라피도가 태어난 거예요. 오랜만에 동물원에 경사가 났다며 사육사 아저씨들은 방긋방긋 웃었어요.

라피도 또한 잦은 인터뷰와 화보 촬영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텔레비전에만 자그마치 여섯 번 출연했습니다. 사자와 호랑이를 합쳐 놓은 ‘지상 최대의 맹수’라는 찬사가 뒤따랐지요.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겨?”라고 물으면 “라이거가 이기지.” 아이들은 당시 그렇게 퀴즈를 내며 놀았어요.

라피도는 겁이 많긴 했지만 온순해서 사육사 아저씨들이 귀여워했어요. 라피도는 사육사인 이양규 아저씨를 잘 따랐습니다. 아저씨가 ‘라피도’ 하고 부르면 쫄랑쫄랑 쫓아갔고, ‘기다려’ 할 때는 기다렸고, ‘앉아’ 할 때는 앉았고, ‘서’ 할 때는 섰습니다. 아저씨는 라피도가 갓난 새끼일 때부터 젖병을 물려 키웠거든요.

» 한국 최초의 라이거 탄생 소식을 알린 신문기사. 사자·호랑이의 ‘튀기’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라피도는 아저씨와 하는 산책도 좋아했어요.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며 청룡열차를 기다리는 소년들과 회전목마를 타고 도는 소녀들에게 꼬리를 쫑긋 올리고 인사를 했지요. 아이들은 라피도를 무서워하다가도 이내 머리를 쓰다듬고 웃었어요.

그해 9월 라피도는 긴 여행을 하기도 했어요. 정말이지, 그렇게 건물이 높고 사람이 많은 곳은 처음이었어요. 마천루의 가장 낮은 골목에서 한 꼬마가 다가오더니, 라피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습니다. ‘어흥’ 하고 라피도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꼬마는 “무서워, 무섭단 말이야!” 하고 앙앙 울었어요. 라피도는 뻥한 눈으로 카메라를 쳐다봤죠. 이 사진은 1997년 9월7일 <조선일보>에 실렸습니다.

“6일 오후, 라이거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려던 꼬마. 자존심 상한 라이거가 ‘어흥’ 하고 포효하자,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이래 봬도 나는 백수의 왕, 꼬마에게 질 수는 없지.’ 라이거는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기자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기사를 썼지만, 사실 라피도는 무서웠어요. 사람들의 ‘움찔’하는 시선, 우중충한 하늘, 차가운 바람. 그곳은 서울 명동이었죠.

» 라피도와 이양규 아저씨에겐 팬레터도 끊이질 않았어요.
서울에 적응한 라피도는 그해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을 받았습니다. 국군 퍼레이드 대열에 함께 무개차에 올라가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서 태어난 왕 중의 왕 라이거’를 보러 온 시민들에게 답례를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저씨와 함께 무개차에 오르려는 순간,

“어흥, 어흥, 어흥!”

휘날리는 태극기 물결과 장갑차와 탱크 소리에 라피도의 시야는 그만 샛노래졌습니다.

“라피도 괜찮아. 이제 너는 컸으니까,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가 된지 모르지.”

한 살 반이 되자 라피도의 몸은 어느덧 120㎏까지 불어 있었습니다. 라피도가 달려들어 얼굴을 비빌 때, 아저씨는 이제 애정만 생기는 건 아니었습니다. 라피도는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맹수였습니다. 아저씨는 라피도와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라피도는 다른 호랑이나 사자처럼 동물원 사파리로 들어갔습니다.

뒤늦게 들어간 사파리에 적응 못해

» 라피도와 사육사 이양규 아저씨. 그 때는 아저씨가 이름만 불러도 알아봤지만,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라피도는 아침이면 사파리 공원으로 나가 전시됐습니다. 어렸을 적 인공포육실에서 함께 뒹굴던 호랑이·사자 친구들은 이미 사파리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뒤늦게 나간 라피도는 적응하기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라피도는 오전 10시에 사파리에 나가 자기 자리에 앉아 있다가 오후 6시면 맹수사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라피도는 서서히 잊혀졌습니다. 관람객들은 호랑이와 사자의 결투를 더 재밌어했고, 영묘하게 생긴 백호와 백사자 앞에서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판다와 펭귄과 프레리독, 사막여우들은 인터뷰를 했지만, 이제 라피도를 찾아오는 기자들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사파리에 나가 있는 시간도 줄어들었습니다. 지난해 들어온 백사자가 라피도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대신 라피도는 야간 사파리를 하는 밤에 서너 시간만 그 자리에 나가 관람객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야간 사파리가 끝난 지난가을 이후에는 맹수사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만 했죠.

지난 11월 말 아저씨와 함께 기자들이 라피도를 찾아왔습니다. 라피도는 오랜만에 밖으로 나갔습니다. 라피도는 아저씨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기자들을 태운 지프차가 라피도에게 다가갔지만, 라피도는 성난 엔진 소리를 듣고 몇 발짝 걷더니 ‘헉헉’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라피도는 이미 12살이었습니다. 사자·호랑이는 보통 15년 안팎을 사는데, 라이거는 이보다 2~3년 일찍 세상을 떠납니다. 맹수는 죽기 직전까지도 잘 표시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영준 동물운영팀 과장이 말했습니다.

“라피도는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거예요. 어쩌면 오늘이나 내일이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죠. 우리는 라피도와 얘기할 수 없으니까….”

라피도는 훈김을 피우며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하늘에서 첫눈이 내렸습니다.

» 어렸을 적 라피도는 에버랜드 직원들과 함께 근처 지체장애인시설 등 사회복지시설에 가서 재롱을 떨곤 했어요. 그때만 해도 동물치유프로그램의 실전강사이자,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동물스타였죠.

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