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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부도천(퍼옴)山是山水是水

VIS VITALIS 2007. 12. 21. 19:15

야부 송(頌)

야부(冶父)스님은 속성은 추(秋)씨요 이름은 삼(三)이다. 생몰연대가 뚜렷하지 않다. 다만 송나라(1127-1130)사람으로 군의 집방직(執方職)에 있다가 재동(齊東)의 도겸(道謙)선사에게 도천(道川)이라는 호를 받았고 정인게성(淨因繼成)의 인가를 얻어 임제(臨濟)의 6세 손이 된다.
다만 야부(야보)라는 호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야부라는 스님의 게송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게송(偈頌)이 한 경지를 뛰어넘은 진정 중국선의 극치를 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금강경 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밥이 오면 밥 먹고, 잠 오면 잠잔다.”(飯來開口睡來合眼)은 나의 머리에 충격에 가까운 청량미를 주었다. 그것은 한 경지를 뛰어넘어 다시 순 경지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마치 공부를 하여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을 한 후 마지막에 금의환향하는 본능적 삶의 귀결점을 찾은 것과 같았다.
그는 특히 금강경을 통해 자기의 견해를 송으로 후학들에게 많이 알려졌는데, 간결하면서도 한번에 내리치는 듯한 그의 활구(活句)는 후학들에게 큰 안락과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야부도천(冶父道川)스님의 송을 다시 음미해보고자 여기 발췌하여 싣는다.

마하대법왕 摩訶大法王
무단역무장 無短亦無長
본래비조백 本來非皂白
수처현청황 隨處現靑黃

크고 크신 대법왕이시여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음이로다.
본래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지만
곳에 따라 청황으로 나타나도다.

화발간조염 花發看朝艶
임조축만상 林凋逐晩霜
질뇌하태격 疾雷何太擊
신전역비광 迅電亦非光

꽃피어 아침의 고운 모습 보이고
나무들 낙엽 지니 늦서리 내리도다.
천둥은 어찌 그리 크게 치는 가
빠른 번개도 역시 빛이 아니로다.

범성원난측 凡聖元難測
용천기도량 龍天豈度量
고금인불식 古今人不識
권립호금강 權立號金剛

범부, 성인 원래 측량키 어려워
천용 팔부 인들 어찌 헤아리리오.
예나 지금이나 아는 사람 없어서
방편으로 금강이라 이름 하네.

원제영상 猿蹄嶺上
학려임간 鶴唳林間
단운풍권 斷雲風犈
수격장단 水激長湍
최호만추상오야 最好晩秋霜午夜
일성신안각천한 一聲新雁覺天寒

원숭이는 고개위에서 울고
학은 숲속에서 우는데
조각구름은 바람에 걷히고
물은 긴 여울져 흐르도다.
가장 좋은 늦가을의 서리 내린 한 밤에
새끼 기러기 한 소리가 찬 하늘을 알리네.

격장견각편지시우 隔墻見角便知是牛
격산견연편지시화 隔山見煙便知是火
독좌외외천상천하 獨坐巍巍天上天下
남북동서찬구타와 南北東西鑽龜打瓦

담 넘어 뿔을 보면 문득 소 인줄 알고
산 넘어 연기를 보면 문득 불 인줄 알도다.
홀로 앉아 높고 높음이여 천상천하거늘
동서남북에서 거북과 기와로 점을 치도다.

이희아불희 爾喜我不喜
군비아불비 君悲我不悲
안사비새북 鴈思飛塞北
연억구소귀 燕憶舊巢歸

너는 기뻐도 나는 기쁘지 않네.
그대 슬퍼도 나는 슬프지 않으이
기러기는 북쪽 집으로 날아갈 것을 생각하고
제비는 옛집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도다.

허공경계기사량 虛空境界豈思量
대도청유이갱장 大道淸幽理更長
단득오호풍월재 但得五湖風月在
춘래의구백화향 春來依舊白花香

허공 경계를 어찌 사량하겠는가.
대도가 맑고 깊어 그 이치 더욱 길도다.
다만 五湖에 풍월이 있음을 안다면
봄이 옴에 여전히 백화가 향기로우리.

신재해중휴멱수 身在海中休覓水
일행영상막심산 日行嶺上莫尋山
앵음연어개상사 鶯吟燕語皆相似
막문전삼여후삼 莫問前三與後三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면 물을 찾지 말고
매일 산위를 행하면서 산을 찾지 말지어다.
꾀꼬리 울음과 제비 지저귐이 서로 비슷하니
前三과 더불어 後三을 묻지 말지어다.

산시산수시수불재심마처 山是山水是水佛在甚麽處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시느냐?

유상유구개시망 有相有求皆是妄
무형무견타편고 無形無見墮偏枯
당당밀밀하증간 堂堂密密何曾間
일도한광삭태허 一道寒光爍太虛

상이 있고 구함이 있음은 이 모두 妄 이요
無形 無見은 치우친 소견에 떨어짐이로다.
당당하고 밀밀하여 어찌 간격이 있으리오.
한 길 찬 빛이 큰 허공을 빛내도다.

금불부도로 金佛不度爐
목불부도화 木佛不度火
니불불도수 泥佛不度水

금불은 화로를 지나지 못하고
목불은 불은 건너지 못하며
니불은 물을 건너지 못하도다.

종일망망 終日忙忙
나사무방 那事無妨
불구해탈 不求解脫
불락천당 不樂天堂
단능일념귀무념 但能一念歸無念
고보비로정상행 高步毘盧頂上行

종일 바빴다
어떤 일에도 방해되지 않아
해탈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천당을 즐기려 하지 않는다.
다만 능히 한 생각 무념으로 돌아가면
높이 비로정상을 걸으리라.

운기남산우북산 雲起南山雨北山
나명마자기다반 驢名馬字幾多般
청간호묘무정수 請看浩渺無情水
기처수방기처원 幾處隨方幾處圓

구름은 남산에 일고 비는 북산에 내리며
나귀이름에 馬字가 얼마나 많던고.
청컨데 넓고 아득한 無情水를 보라
어느 곳이 모를 따르고 어느 곳이 둥글더냐?

정인설사법 正人說邪法
사법실귀정 邪法悉歸正
사인설정법 邪人說正法
정법실귀사 正法悉歸邪
강북성지강남귤 江北成枳江南橘
춘래도방일반화 春來都放一般花

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설하면
邪法이 다 正法으로 돌아오고
삿된 사람이 바른 법을 설하면
正法이 다 사에 돌아가리라
강북에선 탱자가 되고 강남에서 귤이 된다.
봄이 오면 모두 같이 꽃이 필걸세

파정칙운횡곡구 把定則雲橫谷口
방하야월락한담 放下也月落寒潭

파정하면 구름이 골짜기에 걸리고
방하하면 달이 찬 못에 떨어진다.

방복은명주 蚌腹隱明珠
석중장벽옥 石中藏碧玉
유사자연향 有麝自然香
하용당풍립 何用當風立
활계간래흡사무 活計看來恰似無
응용두두개구족 應用頭頭皆具足

조개 속엔 밝은 구슬 숨어 있고
돌 속엔 푸른 옥 감추었네.
사향이 있어 자연히 향기 나고
어찌하여 바람 앞에 섰으리오
살림살이 보면 흡사 없는 듯하여
응용하면 낱낱이 구족하리다.

산당정야좌무언 山堂靜夜坐無言
적적요요본자연 寂寂寥寥本自然
하사서풍동림야 何事西風動林野
일성한안려장천 一聲寒鴈唳長天

고요한 밤 산당에 말없이 앉아
적적하고 고요함이 본래 그대로인데
무슨 일로 서풍이 임야를 흔드나
한 소리 기러기가 장천을 울리는 것을

입해산사도비력 入海算沙徒費力
구구미면주홍진 區區未免朱紅塵
쟁여운출가진보 爭如運出家珍宝
고목생화별시춘 枯木生花別是春

바다에 들어 모래를 세는 것은 힘만 소비하는 것
구구히 홍진에 허덕임을 면치 못하리.
내 집에 보배를 꺼내어 본들
고목에 꽃이 피는 특별한 봄만 하리.

자소래래관원방 自小來來慣遠方
기회형악도소상 幾廻衡岳渡瀟湘
일조답착가향로 一朝踏着家鄕路
시각도중일월장 始覺途中日月長

소 시절부터 돌아다녀 먼 길은 익숙하다
형악산을 돌아 소상 강 건너기 몇 번이던가
하룻날 아침에 고향 길 밟으니
도중에서 보낸 세월이 긴 것을 알았네.

원관산유색 遠觀山有色
근청수무성 近廳水無聲
춘거화유재 春去花蕕在
인래조불경 人來鳥不驚

멀리 바라보는 산은 빛깔이 있는데
가까이 물소리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네.
봄은 가버렸지만 꽃은 아직도 피어있고
사람이 와도 새가 놀라지 않더라.

구죽생신순 舊竹生新筍
신화장구지 新花長舊枝
우최행객로 雨催行客路
풍송편범귀 風送片帆歸
죽밀불방유수과 竹密不妨流水過
산고기애백운비 山高豈礙白雲飛

묵은 대에서 새순이 나고
새 꽃은 옛 가지에서 피어
비는 나그네 길 재촉하고
바람은 조각배의 길을 돌리네.
대나무 빽빽해도 물 흐름 방해치 않고
산이 높다한들 흰 구름을 흘러감을 막으리오.

모탄거해수 毛呑巨海水
개자납수미 芥子納須彌
벽한일륜만 碧漢一輪滿
청광육합휘 淸光六合輝
답득고향전지온 踏得故鄕田地穩
갱무남북여동서 更無南北與東西

한 터럭이 큰 바다를 삼키고
겨자 속에 수미산을 드리운다.
푸른 하늘에 달 둥그니
맑은 빛이 육합에 빛나도다.
고향땅 전지를 둘러보니
다시 남북동서랄 것이 무언가

여도단수 如刀斷水
사화취광 似火吹光
명래암거 明來暗去
나사무방 那事無妨
가리왕가리왕 歌利王歌利王
수지원연랑 별유호상량 誰知遠煙浪 別有好商量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고
불로써 빛을 부는 것과 같도다.
밝음이 오면 어둠이 가시니
무슨 일이라도 방해되지 않도다.
가리왕 가리왕이여!
누가 遠煙浪에 달리 좋은 사량 있음을 알리오.

사대원무아 四大元無我
오온실개공 五蘊悉皆空
확락허무리 廓落虛無理
건곤만고동 乾坤萬古同
묘봉억억상여고 妙峯嶷嶷常如故
수관전호괄지풍 誰管顚號括地風

사대가 원래 아가 없음이요
오온이 다 공하도다.
텅 비어 허무한 이치
하늘땅은 만고에 같도다.
묘봉은 높고 높아 옛과 같으니
땅을 휩쓸고 가는 회오리바람 누가 막으리오.

조유남악 朝遊南嶽
모왕천태 暮往天台
추이불급 追而不及
홀연자래 忽然自來
독행독좌무구계 獨行獨坐無拘繫
득관회처차관회 得寬懷處且慣懷

아침에는 남악 산에서 놀고
저물면 천태 산에 가도다.
�으려 해도 미치지 못하더니
홀연히 저절로 오네.
홀로 행하고 홀로 앉아 걸림이 없으니
너그러운 생각이 있음에 또한 너그러워 짐이로다.

일권타도화성관 一券打倒化城關
일각적번현묘채 一脚趯翻玄妙寨
남북동서신보행 南北東西信步行
휴멱대비관자재 休覓大悲觀自在
대승설초상설 大乘說最上說
일봉일숙흔 一棒一倏痕
일장일악혈 一掌一握血

한 주먹으로 화성의 관문을 타파하고
한 발로 현묘의 울타리를 차서 뒤엎도다.
남북동서를 마음대로 행하니
대비 관자재를 찾지 말지어다.
대승설 최상승 설이여,
한 방망이 한 가닥 흔적이요
한 손바닥 한줌의 피로다.

여군동보우동행 與君同步又同行
기좌상장세월장 起坐相將歲月長
갈음기손상대면 渴飮飢飡常對面
불수회수갱사량 不須回首更思量

그대와 함께 걷고 함께 행했네.
않고 일어서기 함께한 오랜 세월
목마르면 마시고 주리면 먹으며 서로대한 것들
바라건대 머리 돌려 다시 생각지 말지어다.

억천공불복무변 億千供佛福無邊
쟁사상장고교간 爭似常將古敎看
백지상변서흑자 白紙上邊書黑字
청군개안목전관 請君開眼目前觀
풍적적수연연 風寂寂水漣漣
사가인지재어선 謝家人秖在魚船

억척 부처님 공양은 복이 끝이 없으나
옛 가르침을 항상 보고 지니는 것만 하겠는가?
백지위에 검은 글자를 써서
청건데 그대가
눈을 열어 목전을 바로 볼지어다.
바람은 고요하고 물결은 잔잔한데
집 떠난 사람 마침 저 어선위에 있네.

양약고구 良藥苦口
충언역이 忠言逆耳
냉난자지 冷暖自知
여어음수 如魚飮水
하수타일대용화 何須他日大龍華
금조선수보리기 今朝先授菩提記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린다.
차고 더운 것은 스스로 아는 것은
고기가 물을 먹는 것과 같다.
어찌 모름지기 다른 날에 용화세계를 기다리리오.
오늘 아침에 먼저 수기를 받았음이로다.

타고롱비파 打鼓弄琵琶
상봉양회가 相逢兩會家
군행양유안 君行楊柳岸
아숙도두사 我宿頭沙
강상만래소우과 江上晩來疎雨過
수봉창취접천하 數峯蒼翠接天霞

북치는 이와 비파타는 이가
한 집에서 서로 만났다.
그대는 버들언덕을 거닐고
나는 나루터에서 잠을 잔다.
강위엔 때늦은 성근비 지나가고
봉우리마다 푸른빛이
노을 하늘에 닿아 있네.

상시천혜하시지 上是天兮下是地
남시남혜여시여 男是男兮女是女
목동당착목우아 牧童撞着牧牛兒
대가제창나나리 大家齊唱囉囉哩
시하곡조만년환 是何曲調萬年歡

위는 하늘이고 밑은 땅이다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다.
목동이 목동을 만나니
이무슨 곡조인가 만년의 기쁨이로다.

시법비법불시법 是法非法不是法
사수장용활발발 死水藏龍活鱍鱍
시심비심불시심 是心非心不是心
핍새허공고도금 逼塞虛空古到今
지자시절추심 秖者是絶追尋
무한야운풍권진 無限野雲風捲盡
일륜고월조천심 一輪孤月照天心

옳은 법이다 그른 법이다 하면
이는 법이 아니다.
죽은 물에 숨은 용이 활발하도다.
옳은 마음 그릇 마음이라 하면
이것은 마음이 아니다.
허공은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렇다.
다만 이것이니라.
�아도 찾지 못함이로다.
한 없이 펼쳐져 있는 구름
바람이 다 거두어들이고
둥근달이 고고히 천심을 비추네

차파삼자배파문 借婆衫子拜婆門
예수주여이십분 禮數周旅已十分
죽영소계진부동 竹影掃階塵不動
월천담저수무흔 月穿潭底水無痕

노파에 적삼을 빌려 입고
노파에 문전에서 절을 하니
예의는 충분한 것 같아
대 그림자를 쓸어도
움직임은 하나도 없어
달이 연못을 뚫었지만
흔적조차 없구나.
     야보 도천 ( 冶父 道川 ) (1127 ~1130)  

 

     宋나라 사람으로 생몰연대는 확실치 않으며 , 속성은  추秋 씨  이름은 삼三 이다,         軍의 執方職에 있다가  齊東의 道謙禪師에게  法化되어 道川이라는 호를 받았고          淨因斷成의 인가를 얻어 臨濟의; 6世孫이 되었다.
         그리고  "야부" 란 말은 사람의 이름일 경우  " 야보 "라고 발음 해야 옳다
         < 통상  " 야부 " 라 하는 것은 이렇게 된 사연임>
冶父스님은 속성은 추(秋)씨요 이름은 삼(三)이다
생몰연대가 뚜렷하지 않다
다만 송나라(1127-1130)사람으로 군의 집방직(執方職)에 있다가
재동(齊東)의 도겸(道謙)선사에게 도천(道川)이라는 호를 받았고
정인게성(淨因繼成)의 인가를 얻어 임제(臨濟)의 6세 손이 된다
그는 특히 금강경을 통해 자기의 견해를 송으로 후학들에게 많이
알려졌는데 간결하면서도 한번에 내리치는 듯한 그의 활구(活句)가
백미이다.

야부는 군인이었다
궁수로 근무했다 한다
출신은 곤산의 적씨(狄氏)였고 이름이 적삼(狄三)이었다
여기 삼(三)은 대가족 집안의 세 번째 아들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경덕(景德)의 도겸선사를 찾아가 법(法)을 묻자
예의 그 조주 무자 화두를 들려주었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알겠느냐?”
새벽부터 밤까지 직무도 보지 않고 화두를 안고 낑낑대는 것을 보다못한
상관이 화가 뻗쳐 곤장을 쳤는데 볼기짝을 맞는 순간에 적삼은 홀연히
깨쳤다

이에 도겸이 그의 이름을 고쳐주었다.
“이제까지 너는 적삼(狄三)이었지만, 지금부터는 도천(道川)이다.
지금부터 등뼈를 곧추세워 정진한다면 그 도(道)가 시냇물(川)처럼 불어날
것이지만, 조금이라도 게으르고 방심(放心)하면 한심한 인간으로 다시
떨어질 것이다.”

그가 남긴 작품은 이 <금강경> 송이 유일하다
<오등회원>에는 이 책이 건염(建炎) 초 1127년에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적혀 있다
그의 나머지 삶은 베일에 싸여있다

   冶父道川 (야부도천)

 

得樹攀枝未足奇(득수반지미족기) 나뭇가지 잡음은 족히 기이한 일이 아니니
懸崖撒手丈夫兒(현애살수장부아) 벼랑에서 손을 놓아야 비로소 장부로다.
水寒夜冷魚難覓(수한야냉어난멱) 물은 차고 밤도 싸늘하여 고기 찾기 어려우니 留得空船載月歸(유득옹반재월귀) 빈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 오도다.
  冶父道川

 

多年石馬放毫光 여러 해 동안 돌말이 빛을 토하니
鐵牛哮吼入長江 쇠소가 울면서 장강으로 들어간다.
虛空一喝無蹤跡 허공 향한 저 고함소리 자취도 없더니
不覺潛身北斗藏 어느 사이 몸을 숨겨 북두에 들었는고.
 冶父道川

 

千尺絲綸直下垂 천 척의 낚싯줄을 곧게 드리우니
一波재(겨우 재?제?)動萬波隨 한 물결 일어나매 많은 물결 따라 인다.
夜靜水寒魚不食 밤은 고요하고 물을 차서 고기는 물지 않고
滿船空載月明歸 배에 허공만 가득 싣고 밝은 달 속에 돌아온다.

 

이 시의 원작자는 釋德誠이라는 당나라의 고승이라 함.



● 冶父道川

 

山堂靜夜坐無言 산 집 고요한 밤, 말없이 앉았으니
寂寂寥寥本自然 고요하고 고요해서 본래 이러하구나.
何事西風動林野 무슨 일로 서풍은 잠든 숲 깨워
一聲寒雁淚長天 한 소리 찬 기러기 장천을 울며 가는고.

 

 

● 冶父道川

 

法相非法相 법상과 비법상이여
開拳復成掌 주먹을 펴니 다시 손바닥이로다.
浮雲散碧空 뜬구름이 푸른 하늘에서 흩어지니
萬里天一樣 만리의 하늘이 온통 푸른 하늘이더라.

冶父道川

 

蚌腹隱明珠 조개 속에 진주가 들어 있듯
石中藏碧玉 돌 속에 옥이 감추어 있듯
有麝自然香 사향을 지니면 저절로 향기로운데
何必當風立 하필이면 바람 앞에 서야 하랴.
  冶父道川

 

若要天下行 만약 천하에서 행하고자 할진대
無過一藝强 한가지 재주를 뛰어나게 하라

冶父道川

 

三佛形儀總不眞 법,보, 화신의 형상과 거동은 다 진실이 아니고
眼中瞳子面前人 눈 가운데 동자는 그대 앞의 사람이라.
若能信得家中寶 만약 능히 집에 있는 보배를 믿기만 하면
啼鳥山花一樣春 새 울고 꽃 피는 것이 한결같은 봄이로구나.
 

● 冶父道川 (야보도천)

 

蚌腹隱明珠 (방복은명주)   조개 속에 진주가 들어 있듯

石中藏碧玉 (석중장벽옥)   돌 속에 옥이 감추어 있듯

有麝自然香 (유사자연향)   사향을 지니면 저절로 향기로운데

何必當風立 (하필당풍립)   하필이면 바람 앞에 서야 하랴.

 

 

 

 

 

 

 

 

 

中国古代有个禅宗和尚(青源惟信禅师)“得道”以后说:“老僧三十年前来参禅时,见山是山,见水是水;及至后来亲见知识,有个入处,见山不是山,见水不是水;而今得个休歇处,依然见山是山,见水是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성철 스님의 얘기(이 말은 송나라 청원 유신 선사의 말로 성철 스님이 대중화했다

http://blog.sina.com.cn/s/blog_6e60f10d0100o9s1.html

 

공안의 세계(20) 청원유신선사 / 불교신문

 

 老僧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기 전에는 "산을 보면 곧 산이고 || 물을 보면 곧 물이었다(看見山就是山 看見水就是水)" 그후 어진 스님을 || 만나 禪法을 깨치고 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 || 더욱 정진해 불법도리를 확철대오하고 난 지금은 "그전처럼 역시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依前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대중들이여, ||  三般見解(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각기 다른 것이냐. || 만약 이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이 노승은 그에게 || 拜服하겠다.

 

宋代 임제종 황룡파 청원유신선사(?~1117)의 유명한 상당법어다. 청원의 "山是山 水是水"는 이 공안을 설파한 수많은 법문과 선문답들 중 가장 히트한 최우수작이다. 선종 최고로 저명한 공안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 화두는 극히 평이해 보이지만 그 도리는 결코 간단치 않다. 우선 표면상으로만 보면 마치 한 바퀴를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온 것 같은 3단계의 구조다. 그러나 제1, 3의 두 단계는 엄청난 질적 차이를 갖는 하늘과 땅 사이다. 1단계는 無識(Having-no Knowledge)이고, 3단계는 無知 (Havingno-Knowledge). 沒有知識 "無識"과 일체의 分別心을 떠나 어떠한 지식에도 안주하지 않는 반야空觀 絶對知 "無知"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1단계는 모든 것은 라고 주장하는 세속적 진리에서 감각적直覺的으로 사물을 대하고 산과 물을 구별하는 알음알이다. 그러나 제3단계는 모든 것이 이라는 입장에서 모순의 한복판에 있는 "자아의 부정"을 다시 부정함으로서 극복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순 해결 후의 자아의식이며 고차원적 진리다. 선은 부정을 통한 無分別智를 획득한 후의 분별을 통해 진정한 개성적 존재를 긍정한다. 山水天地僧俗을 구분하는 우리의 통속적 상식은 단순한 외형적 모양을 따른 것으로 이때의 산과 물은 분별적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산과 물, 하늘과 땅은 본래의 自性的 존재고 진정한 개성적 존재다. 선은 이 같은 개성적 존재를 "本來面目"이라고도 하고 후기 선종의 자연사상에서는 흔히 평상심무분별지無心之心이라 한다. 3단계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은 선의 변증법적 인식론이 설파한 고차원적 진리에서의 個性 인정이다. R. G. H Sui(중국인 2세 미국생물학자 겸 동양철학자)는 저서 "선과 과학-無知 "에서 지식을 "이성의 " "直覺 ", "무지의 "로 분류했다. 1단계의 "산과 산"이 인간의 직각적, 이성적 알음알이에 의한 감각의 식별이라면 제3단계의 山是山 "無知의 지"가 인정하는 진여당체다. 청원유신이 설파한 선종 사유방식의 3단 논법과 변증법을 좀 더 살펴보자. 공안 "山是山 水是水"는 전형적인 선종의 二道相因的 사유방식이다. 二道相因은 먼저 한 가지 意義를 정립한 후 그것을 다시 깨트려 버린다. 즉 긍정을 해놓고 즉각 부정을 하는 긍정-부정이다. 두 번째 단계인 "부정"은 또 다시 새로운 의의를 정립해 처음 세운 의의를 섭취해 버린다. 이렇게 돼 긍정-부정-긍정의 변증법적인 3단논법,  三般見解가 전개된다. 중국 선학은 이 같은 제1, 3단계의 往還的, 회호적 관계를 "二道相因"이라 한다. 일찍이 위진 남북조시대의 승조대사(384~413) "계급/단계/계위을 점차로 쫓아내 쫓아낼 게 없게 되는 데까지 이른다(階級漸遣 以至無遣也)"고 설파한 바 있다. 청원의 "山是山 水是水"에 대한 삼반 견해에서 마지막 제3단계는 바로 승조가 설파한 "무견無遣"의 경지다. 다시 말해 계급적 차별성의 완전한 극복이다. 청원유신의 법문이 垂示하고 있는 삼반 견해는 3종의 層次(차별)을 갖는 존재에 대한 인식방법이다. 청원의 사물에 대한 전혀 다른 3가지 관조방법은 본질적이며 심도 깊은 不同의 차이점을 갖고 있다. 동서고금에 이 같은 3단계 분류법의 인식론이 제기된 예는 허다하다. 우선 <文字> "도덕편" "上學은 정신으로서 듣고, 中學은 마음으로 듣고,下學은 귀로 듣는다"고 했다.<文字>의 분류에 청원의 三般見解를 대입시키면 제1단계는 하학, 2단계는 중학, 3단계는 上學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깨치고 난 후의 "山是山 水是水"는 영적 자각을 일으킨 정신에서 보는 산과 물이다. 조문원의 <法藏碎金錄>에는 "에는 세 가지설이 있는데 얕고 깊음에 따라 覺觸之覺, 覺悟之覺, 覺照之覺으로 나눈다"고 했다. 첫째의 은 단순한 감관 작용의 인식을 따라 사물의 존재를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인정하는 범부의 일상적 인식이다. 두 번째는 깨달음을 성취해 일체에 명석해 사물의 실상과 허상을 능히 구분할 수 있음을 말한다. 셋째는 大覺의 경지로 무릇 (자성. 주체적 인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달통의 도인이 갖는 인식이다. 14세기 독일의 신비주의 종교학자인 에크하르트(1260~1327)는 지식을 상. .  3등급으로 나누어 下學은 몸을 알고, 中學은 마음을 알고, 上學은 정신을 안다고 했다. 서양철학은 또 진리를 감각의 진리, 이해의 진리, 이념의 진리 등 3종류로 구분하기도 한다. 청원유신이 계층적으로 분류한 三般見解도 기본적으로 이 같은 인식론 등과 같은 맥락이다. 晁文元의 분류가 더욱 명료하고 투철하다 하겠다. 청원의 삼반견해는 조문원의 분류법을 선적인 표현으로 바꾼 것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청원의 제1단계 "山是山"은 최하급인 감각층에서의 존재 이해다. 다시 말해 사물의 이해를 단순한 감관적 감각에 의지하는 범부의 보편적 인식단계다. 2단계의 "山不是山 水不是水"는 중간급 인식인데 역시 感知단계이긴 하지만 선의 안목이 트여 산과 물이 진여불성이라는 본체의 현현이거나 그 상징일 뿐이라는 견해다. 1단계 보다 한 단계 올라선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경지"는 인식주체(사람)가 객체(사물)에 대해 지성적 분해, 또는 정감적 投射작용을 일으켜 대상의  등에 대해 크고 작은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말하자면 인식 대상의 본질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진 상태다. 여기서는 산과 물에 이미 사람의 性靈과 정감이 들어가 있어 물리적 의미의 자연 山水가 아니다. 공자가 말한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도 이 같은 경지라고 할수 있다. 이런 시 구절도 있다. "내가 청산을 보니 아주 곱고 사랑스럽구나, 짐작컨대 청산이 나를 봐도 또한 같으리라.(我見靑山多憮媚 料靑山見我也如是)" 역시 나(주체)와 산(객체) 互換작용을 이룬 상태다. 3단계의 "依前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는 제2단계서 한층 더 진보한 단계로 주체와 객체 간의 한계나 대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物我一體. 여기서는 주체와 객체가 의기투합해 내가 있고 도 있으며 또 나도 아니고 도 아니다. 산을 보는 사람의 정신이 一念(Universal Mind)으로 뭉치고 감각적, 이성적 지성 따위는 완전히 녹아 없어져 산과 물의 이 없다. 이것이 지혜 분별을 내던진 無知(Having no-Knoweledge). 1단계 범부의 "見山是山 見水是水"는 기계적이고 본능적인 사물의 관조다. 따라서 그 인식의 심도는 원초적이고 표피적인 저급이다. 그러나 제3단계 道人 "依前見山是山 見水是水"는 자연의 질서가 유지되는 원리와 존재계의 심연을 깨달은 참구 후의 見性에서 보는 관조다. 자연의 질서란 을 본질로 한 현상계의 전개다. 이는 無心으로서만이 감지할수 있는 비밀이다. "부정"을 통해 현상계 저위로 올라가 실체를 또렷이 내려다 보고 다시 현상계로 돌아와 頭頭物物의 존재 당체를 주체적으로 긍정할수 있게 되면 바로 悟道의 경지다. 깨침을 이같이 변증법적으로 현실회향이 이루어져야 완전한 해탈이 된다. 이런 오도의 경지에서 현실을 긍정하되 결코 현실에 물들거나 끄달리지않는 삶이 "平常心是道" "밥먹고 물마시는 평상의 생활(平常飮啄)"이다. 道人 平常心是道는 외형적으론 세속 법부의 일상생활과 똑같이 밥먹고 물을 마시지만 내용에서는 나와 밥이 분명히 구분되는 원초적 생활형태와는 전혀 다른 나와 밥이 따로 없는 物我一體의 경지다. 지금까지의 복잡하고 난해한 설명을 쉬운 예로 비유해 보자. 가령 어른들이 어린 아이에게 저 산너머에 마을이 있다고 하면 철부지인지라 그대로 믿는다.(1단계) 조금 성장을 하면 어른들의 얘기에 의심을 품고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부정적 생각을 갖는다.(2단계) 그러다가 어느날 여행을 가느라고 비행기를 탄다. 마침 그 비행기가 지난 날 어른들이 말한 산 너머 마을 위를 지난다. 그는 이때 확실히 산 너머에 마을이 있음을 확인한다. 비행기를 타고 지나면서 산 너머 마을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이후로는 다시는 산 너머에 마을이 있다는 얘기를 의심치 않는다.(3단계) 청원의 "三般見解"가 설파하는 무명에서 견성까지의 과정도 마치 이런 어린아이의 산너머 마을 확인과 같은 것이다. 묻는다교외별전의 선에서는 사람을 어떻게 교화하시는지요. 답한다세계가 존재한 이래 해와 달이 서로 바뀐 예가 없느니라. 古佛 조주종심(778-897)과 한 납승의 선문답이다. 해와 달이 바뀐 예가 없다는 조주의 답은 해는 해고, 달은 달이라는 얘기다. 山是山 水是水와 같은 얘기다. "日月不曾換"은 해는 낮에, 달은 밤에 뜨고 기둥은 세로로 서고, 문턱은 가로로 눕는다는 현상계의 실상을 긍정하는 平常心을 체득하는 게 선의 요체임을 설파한 一句. 해는 해고 달은 달이라는 평상심시도의 달관도 청원유신이 설파한 제3단계의 "산은 산"과 똑같은 경지/계다. 원래 조주 고불의 선사상은 平常心是道가 그 핵심이다. 임안부의 五雲悟선사의 상당법어를 들어 보자. 월당老漢은 행하면서 을 못 보고, 앉으면서 앉음을 못 보고, 옷입을 때 옷입음을 보지 못하고, 밥 먹을 때 밥 먹는것을 못 본다. 貧僧과 그는 한 선상 위에 앉아 證面의 제각기 꿈을 주었다. (빈승)는 행하면 을 보고, 앉으면 를 보는데 내가 옳은지 月堂이 옳은지 말해보라. 여기서도 月堂은 제2단계의 否定的 깨침이고 五雲은 긍정와 부정을 뛰어넘은 절대긍정인 제3단계의 깨침으로 그 급수와 격이 다르다. 진정으로 깨친 자는 결코 현실세계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절대긍정으로 현실을 수용한다. 다만 그의 긍정은 현상계의 본체를 완전히 파악한 般若空觀의 긍정임을 유의하면 된다.

 

이은윤<중앙일보 종교전문 대기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佛果圓悟禪師碧巖録 (No. 2003_ 重顯頌古 克勤評唱 ) 

和尚子莫妄想。天是
T2003_.48.0194b07: 天地是地。山是山水是水。僧是僧俗是俗。良
T2003_.48.0194b08: 久云。與我拈面前按山來看。便有僧出問云。
T2003_.48.0194b09: 學人見山是山水是水時如何。門云。三門爲
T2003_.48.0194b10: 什麼從這裏過。恐爾死却。遂以手劃一劃云。
T2003_.48.0194b11: 識得時。是醍醐上味。若識不得。反爲毒藥也。
T2003_.48.0194b12: 所以道。了了了時無可了。玄玄玄處直須呵。
T2003_.48.0194b13: 雪竇又拈云。乾坤之内宇宙之間。中有一寶。
T2003_.48.0194b14: 祕在形山。掛在壁上。達磨九年。不敢正眼覷
T2003_.48.0194b15: 著。而今衲僧要見。劈脊便棒。看他本分宗師。
T2003_.48.0194b16: 終不將實法繋綴人。玄沙云。羅籠不肯住。呼
T2003_.48.0194b17: 喚不回頭。雖然恁麼。也是靈龜曳尾。雪竇頌
T2003_.48.0194b18: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스님은 스님이요

세속은 세속이다.

승은 승이요

속은 속이다

 

 

 

 

 

 

 

江西省 瑞州의 洞山에 주석했던 良价(807∼869)와 撫州曹山에 주석했던 本寂(840∼901)

 

 

《撫州曹山本寂禪師語錄》卷2:

 

五位旨訣

 

正中來者太過也全身獨露萬法根源無咎無譽

偏中至者中孚也隨物不礙木舟中虛虛通自在正中偏者巽也虛空破片處處圓根塵寂爾偏中正者兌也水月鏡像本無生滅豈有蹤跡兼中到者重離也正不必虛偏不必實無背無向又曰心機泯色空忘更無覆藏全體露現是曰正中偏山是山。水是水。無人安名無物比倫是曰偏中正躶躶赤洒洒面目堂堂盡天盡地獨尊無是曰正中來宛如寰中天子不借禹湯堯舜令眼見耳聞終不借他力耳之不入聲中聲之不塞耳根裏頭才轉身塵中未帶名曰兼中至不是心不是境不是事不是理來離名狀天真忘性相是曰兼中到

曹山本寂禪師語錄()

」(CBETA 2020.Q3, T47, no. 1987B, p. 544b24-c11)

風澤中孚

 

《雲門匡真禪師廣錄》卷1:上堂云諸和尚子莫妄想天是天地是地水是水僧是僧俗是俗良久云與我拈案山來看便有僧問學人見見水是水時如何師云三門為什麼從這裏過進云與麼則不妄想去也師云還我話頭來」(CBETA 2020.Q3, T47, no. 1988, p. 547c11-15)

 

《圓悟佛果禪師語錄》卷6:黃運使請上堂云大眾一句截流鐵壁銀山莫湊泊萬緣俱透照地照天絕羅籠明明無覆藏歷歷非照用三世諸佛出興唯此一事歷代祖師傳持亦此一心所以般若如大火般若如無盡藏般若如泛海舟檝般若如照夜明燈若向下委曲提持則敲床豎拂瞬目揚眉或語或默說有說無若向上提掇擊石火似閃電光有時行棒有時行喝有時箭鋒相拄有時佛眼覷不見雖然如是猶有向上向下忽遇其中人却沒許多般事只是見成所以道水是水天是天地是地不移易一絲毫正當恁麼時還委悉麼萬邦有道歸皇化偃息干戈樂太平」(CBETA 2020.Q3, T47, no. 1997, p. 740b27-c10)

 

大慧宗杲(だいえ そうこう、元祐4年(1089年) - 隆興元年8月10日(1163年9月9日))は、中国代の臨済宗普覚禅師。俗姓は奚。は曇晦。号は妙喜・雲門、または仏日大師。宣州寧国県の出身。

真の禅法をめぐって

曹洞宗に属した宏智正覚と、真の禅法をめぐって激しく対立した。宗杲は、公案を用いることによって言語による思考に大きな疑問を抱えつつ坐禅し、その疑問を打ち破ることにより悟りへと向かうという、臨済宗の禅法を正しいものと認めた。対立する正覚は、悟りという目標を設定することによって無明と悟りという二元論的構造が生じることを避けるために、坐禅すること自体が坐禅の目的であるような自己完結的な禅法の中で本来具有している仏性が顕れるとしたので、宗杲はこれを「黙照禅」と呼んで批判した。

この臨済宗と曹洞宗の理論的な対照は、宗杲と正覚の当時から現在の日本にまで継続している。しかし当時の中国社会では、宗杲の理論が支持を受け、臨済宗が大いに隆盛することとなった。

日本の南北朝時代の臨済僧中巌円月は、東陽徳輝を通じて大慧宗杲の法に連なる。

関連項目

外部リンク

 

 

 

 

《大慧普覺禪師語錄》卷17:或又執箇一切平常心是道以為極則天是天地是地水是水僧是僧俗是俗大盡三十日小盡二十九凡百施為須要平常一路子以為穩當定將去合將去更不敢別移一步怕墮坑落塹長時一似雙盲人行一條拄杖子寸步拋不得緊把著憑將去步步依倚一日若道眼谿開頓覺前非拋却杖子撒開兩手十方蕩蕩七縱八橫東西南無可不可到這裏方得自在如今人能有幾箇放得杖撒得手昔因真淨和尚新開語其時我老和尚在五祖堂中作首座五祖一日廊下見僧把一冊文字祖曰爾手中是甚文字僧曰是真淨和尚語錄祖遂取讀即讚歎曰慚愧末世中有恁地尊宿乃喚首我老和尚時在後架洗聞呼很忙走出祖曰我得一本文字不可思議所謂善說法要爾試看休去歇去一念萬年前後際諸方如今有幾箇得到這田地他却喚作勝妙境界舊時寶峯有箇廣道者便是這般人一箇渾身都不理會都不見有世間事間塵勞昧他不得雖然恁麼却被這勝妙境界障却道眼須知到一念不生前後際斷處正要尊宿如水潦和尚因採藤次問馬祖如何是祖師西來意祖曰近前來向爾水潦纔近前馬祖當胸一蹋蹋倒水潦忽然大悟不覺起來呵呵大笑」(CBETA 2020.Q3, T47, no. 1998A, p. 882b5-c1)

 

 

 

 

 

 

 

靑原行思

 

청원행사선사(靑原行思禪師)와 정거사(淨居寺)

 

宋代 청원산 정거사에 주석 했던 임제종 황룡파

청원유신선사(?~1117)의 유명한 상당 법어다.

 

山是山 水是水

 

이 老僧이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기 전에는,

산을 보면 곧 산이고 물을 보면 곧 물이었다.

(看見山就是山 看見水就是水)

그 후 어진 스님을 만나 禪法을 깨치고 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見山不是山 水不是水)

더욱 정진해 불법도리를 확철대오하고 난 지금은,

그전처럼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依前見山只是山 水只是水).

 

대중들이여, 이 三般見解(세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각기 다른 것이냐.

만약 이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이 노승은 그에게 拜服하겠다.

 

청원의 "山是山 水是水"는 이 공안을 설파한 수많은 법문과 선문답들 중 가장 힛트 한 최우수작이다. 선종 최고 저명 공안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 화두는 극히 평이해 보이지만 그 도리는 결코 간단치 않다. 우선 표면상으로만 보면 마치 한바퀴를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온 것 같은 3단계의 구조다. 그러나 제1, 제3의 두 단계는 엄청난 질적 차이를 갖는 하늘과 땅 사이다.

 

제1단계는 無識(Having-no Knowledge)이고, 제3단계는 無知의 知(Having no-Knowledge)다. 沒有知識의 "무식"과 일체의 분별심을 떠나 어떠한 지식 에도 안주하지 않는 반야空觀의 絶對知인 "무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제1단계는 모든 것은 라고 주장하는 세속적 진리에서 감각적, 直覺的으로 사물을 대하고 산과 물을 구별하는 알음알이다. 그러나 제3단계는 모든 것이 이라는 입장에서 모순의 한복판에 있는 "자아의 부정"을 다시 부정함으로 서 극복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순해결 후의 자아의식이며 고차적 진리다.

 

선은 부정을 통한 無分別智를 획득한 후의 분별을 통해 진정한 개성적 존재를 긍정한다. 山水, 天地, 僧俗을 구분하는 우리의 통속적 상식은 단순한 외형적 모양을 따른 것으로 이때의 산과 물은 분별적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산과 물, 하늘과 땅은 본래의 自性的 존재고 진정한 개성적 존재다. 선은 이 같은 개성적 존재를 "本來面目"이라고도 하고 후기 선종의 자연사 상에서는 흔히 평상심, 무분별지 無心之心이라 한다.

 

제3단계의 "산은 산, 물은 물"은 선의 변증법적 인식론이 설파한 고차적 진리에서의 個性 인정이다. R.G.H Sui(중국인 2세 미국생물학자겸 동양철학자)는 저서 "선과 과학-無知의 知"에서 지식을 "이성의 知"와 "直覺의 知", "무지의 知"로 분류했다.

제1단계의 "산과 산"이 인간의 직각적, 이성적 알음알이에 의한 감각의 식별이라면 제3단계의 山是山은 "無知의 지"가 인정 하는 진여당체다.

 

청원유신이 설파한 선종 사유방식의 3단 논법과 변증법을 좀더 살펴 보자. 공안 "山是山 水是水"는 전형적인 선종의 二道相因的 사유방식이다. 二道相因은 먼저 한 가지 意義를 정립한 후 그것을 다시 깨트려 버린다. 즉 긍정을 해놓고 즉각 부정을 하는 긍정-부정이다. 두번째 단계인 "부정"은 또 다시 새로운 의의를 정립해 처음 세운 의의를 섭취해 버린다. 이렇게 돼 긍정-부정-긍정의 변증법적인 3단논법, 즉 三般見解가 전개된 다. 중국선학은 이 같은 제1, 제3단계의 往還的, 회호적 관계를 "二道相因"이라 한다.

일찌기 위진 남북조시대의 승조대사(384~413)는 "계급을 점차로 쫓아내 쫓아낼게 없게 되는데까지 이른다(階級漸遣 以至無遣也)"고 설파한 바 있다. 청원의 "山是山 水是水"에 대한 삼반견해에서 마지막 제3단계는 바로 승조가 설파한 "無遣"의 경지다. 다시 말해 계급적 차별성의 완전한 극복이다.

 

청원유신의 법문이 垂示하고 있는 삼반견해는 3종의 層次(차별)을 갖는 존재 에 대한 인식방법이다. 청원의 사물에 대한 전혀 다른 3가지 관조방법은 본질적이며 심도 깊은 不同의 차이점을 갖고 있다. 동서고금에 이 같은 3단계 분류법의 인식론이 제기된 예는 허다하다. 우선 <文字> "도덕편"은 "上學은 정신으로서 듣고, 中學은 마음으로 듣고, 下學은 귀로 듣는다"고 했다. <文字>의 분류에 청원의 三般見解를 대입시키면 제1단계는 하학, 제2단계는 중학, 제3단계는 上學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깨치고 난후의 "山是山 水是水"는 영적 자각을 일으킨 정신에서 보는 산과 물이다.

 

조문원의 <法藏碎金錄>에 "覺에는 세가지 설이 있는데 얕고 깊음에 따라 覺觸之覺, 覺悟之覺, 覺照之覺으로 나눈다" 고 했다. 첫째의 覺은 단순한 감관 작용의 인식을 따라 사물의 존재를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인정하는 범부의 일상적 인식이다. 두번째는 깨달음을 성취해 일체에 명석해 사물의 실상과 허상을 능히 구분할 수 있음을 말한다. 셋째는 大覺의 경지로 무릇 性(자성, 주체적 인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달통의 도인이 갖는 인식이다.

 

14세기 독일의 신비주의 종교학자인 에크하르트(1260~1327)는 지식을 상, 중, 하 3등급으로 나누어 下學은 몸을 알고, 中學은 마음을 알고, 上學은 정신을 안다고 했다. 서양철학은 또 진리를 감각의 진리, 이해의 진리, 이념의 진리 등 3종류로 구분하기도 한다. 청원유신이 계층적으로 분류한 三般見解도 기본적으로 이 같은 인식론등과 같은 맥락이다. 晁文元의 분류가 더욱 명료하고 투철하다 하겠다. 청원의 삼반견해는 조문원의 분류법을 선적인 표현으로 바꾼 것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청원의 제1 단계 "山是山"은 최하급인 감각층에서의 존재 이해다. 다시 말해 사물의 이해를 단순한 감관적 감각에 의지하는 범부의 보편적 인식단계다.

 

제2단계의 "山不是山 水不是水"는 중간급 인식인데 역시 感知단계이긴 하지만 선의 안목이 트여 산과 물이 진여불성이라는 본체의 현현이거나 그 상징일뿐이라는 견해다. 제1단계 보다 한 단계 올라선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경지"는 인식주체(사람)가 객체(사물)에 대해 지성적 분해, 또는 정감적 投射작용을 일으켜 대상의 形, 質. 理등에 대해 크고 작은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말하자면 인식 대상의 본질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진 상태다. 여기서는 산과 물에 이미 사람의 性靈과 정감이 들어가 있어 물리적 의미의 자연 山水가 아니다. 공자가 말한 지혜로운 자는 물(動)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靜)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도 이 같은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 귀절도 있다. "내가 청산을 보니 아주 곱고 사랑스럽구나, 짐작컨대 청산이 나를 봐도 또한 같으리라.(我見靑山多憮媚 料靑山見我也如是)" 역시 나(주체)와 산(객체)이 互換작용을 이룬 상태다.

 

제3단계의 "依前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는 제2단계서 한층 더 진보한 단계 로 주체와 객체간의 한계나 대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物我一體다. 여기서는 주체와 객체가 의기투합해 내가 있고 物도 있으며 또 나도 아니고 物도 아니다. 산을 보는 사람의 정신이 一念(Universal Mind)으로 뭉치고 감각적, 이성적 지성 따위는 완전히 녹아 없어져 산과 물의 相이 없다. 이것이 지혜 분별을 내던진 無知(Having no-Knoweledge)다.

 

제1단계 범부의 "見山是山 見水是水"는 기계적이고 본능적인 사물의 관조다. 따라서 그 인식의 심도는 원초적이고 표피적인 저급이다. 그러나 제3단계 道人의 "依前見山是山 見水是水"는 자연의 질서가 유지되는 원리와 존재계의 심연을 깨달은 참구후의 見性에서 보는 관조다. 자연의 질서란 空을 본질로 한 현상계의 전개다. 이는 無心으로서만이 감지할 수 있는 비밀이다. "부정"을 통해 현상계 저위 로 올라가 실체를 또렷이 내려다 보고 다시 현상계로 돌아와 頭頭物物의 존재 당체를 주체적으로 긍정할 수 있게 되면 바로 悟道의 경지다. 깨침을 이같이 변증법적으로 현실회향이 이루어져야 완전한 해탈이 된다. 이 같은 오도의 경지에서 현실을 긍정하되 결코 현실에 물들거나 끄달리지 않는 삶이 "平常心是道"고 "밥 먹고 물 마시는 평상의 생활(平常飮啄)"이다. 道人의 평상심시도는 외형적으론 세속 법부의 일상생활과 똑같이 밥 먹고 물을 마시지만 내용에서는 나와 밥이 분명히 구분되는 원초적 생활형태와는 전혀 다른 나와 밥이 따로히 없는 物我一體의 경지다.

 

지금까지의 복잡하고 난해한 설명을 쉬운 예로 비유해 보자. 가령 어른들이 어린 아이에게 저 산 너머에 마을이 있다고 하면 철부지인지라 그대로 믿는다.(제1단계) 조금 성장을 하면 어른들의 얘기에 의심을 품고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부정적 생각을 갖는다.(제2단계) 그러다가 어느날 여행을 가느라고 비행기를 탄다. 마침 그 비행기가 지난날 어른들이 말한 산 너머 마을위를 지난다. 그는 이때 확실히 산 너머에 마을이 있음을 확인한다. 비행기를 타고 지나면서 산 너머 마을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이후로는 다시는 산 너머에 마을이 있다는 얘기를 의심치 않는다.(제3단계)

 

청원의 "삼반견해"가 설파하는 무명에서 견성까지의 과정도 마치 이 같은 어린아이의 산 너머 마을 확인과 같은 것이다.

 

묻는다:교외별전의 선에서는 사람을 어떻게 교화하시는지요. 답한다:세계가 존재한 이래 해와 달이 서로 바뀐 예가 없느니라. 古佛 조주종심(778-897)과 한 납승의 선문답이다. 해와 달이 바뀐 예가 없다는 조주의 답은 해는 해고, 달은 달이라는 얘기다. 山是山 水是水와 같은 얘기다. "日月不曾換"은 해는 낮에, 달은 밤에 뜨고 기둥은 세로로 서고, 문턱은 가로로 눕는다는 현상계의 실상을 긍정하는 平常心을 체득하는 게 선의 요체임을 설파한 一旬다. 해는 해고 달은 달이라는 평상심시도의 달관도 청원유신이 설파한 제3단계 의 "산은 산"과 똑같은 경지다. 원래 조주고불의 선사상은 평상심시도가 그 핵심이다.

 

임안부의 五雲悟선사의 상당법어를 들어 보자. 월당老漢은 행하면서 行을 못보고, 앉으면서 앉음을 못보고, 옷 입을 때 옷 입음을 보지 못하고, 밥 먹을 때 밥 먹는 것을 못본다. 貧僧과 그는 한 선상위에 앉아 증면의 제각기 꿈을 주었다. 나(빈승)는 행하면 行을 보고, 앉으면 坐를 보는데 내가 옳은지 月堂이 옳은지 말해 보라. 여기서도 月堂은 제2단계의 否定的 깨침이고 五雲은 긍정와 부정을 뛰어넘은 절대긍정인 제3단계의 깨침으로 그 급수와 격이 다르다. 진정으로 깨친 자는 결코 현실세계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절대긍정으로 현실을 수용한다. 다만 그의 긍정은 현상계의 본체를 완전히 파악한 반야空觀의 긍정임을 유의하면 된다.

 

이은윤<중앙일보 종교전문 대기자>

 

‘산은 산, 물은 물’

“모든 분별 망상 거두어 낸 자리”

 

이제 가을단풍이 마을의 가로수까지 내려앉았다. 아침 일찍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관악산 줄기인 삼성산을 올라갔다. 거기 삼성산 칠부능선쯤에 삼막사가 자리하고 있어서 예전부터 자주 걸어 올라갔던 산길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산길을 걷다보니 땀이 차고 다소 몸이 지친다. 약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삼막사 앞에 서서 확 트인 전경을 바라다본다. 온산이 울긋불긋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 좋다.' 작은 탄성이 터져 나온다. 산은 그렇게 가을과 함께 서 있었다.

 

한 때 성철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라는 법어를 내려 그 오묘한 말씀에 궁금증을 자아내며 그것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이것은 성철스님이 종정을 수락할 때 법어의 한 내용인즉 "아아! 시회대중은 아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구나"의 그 구절이다. 그것이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담배 연기 희뿌연 주막에 앉아 그 말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나름대로 자신들이 이해한 바를 펼쳐가며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거기에는 선의 깨달음이 안겨다주는 담백함과 어떤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알고 싶었다. 정말 궁금했다. 그러나 끝내는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이 선어는 사실 청원유신(靑原惟信) 선사의 법어에 등장한다. 더 올라가면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의『완릉록(宛陵錄)』에서 그 첫 모습을 보인다. 청원유신선사는 당나라 때 임제종 황룡파의 스님이다. 그는 많은 대중을 앞에 두고 단상에 올라 상당법어를 한다.

 

“노승이 삼십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다.’그 뒤 선지식을 만나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을 때‘물은 물이 아니고 산은 산이 아니었다’그러나 이제 마지막 쉴 곳인 깨달음을 얻고 보니‘산은 진정 산이고 물은 진정 물이도다.”

 

[0614b29] 吉州青原惟信禪師上堂。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見山是山見水是水。及至後來親見知識有箇入處。見山不是山。見水不是水。而今得箇休歇處。依然見山秖是山。見水秖是水。大眾這三般見解是同是別。有人緇素得出。許汝親見老僧。(『속전등록(續傳燈錄)』 제22권)

 

선사는 참선하기 이전에‘산은 산, 물은 물이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바라볼 때 산은 분명 물이 아니고 산이며, 물은 산이 아니고 물이다. 그래서 산을 보면 산이라고 말하고 물을 보면 물이라고 말한다. 나는 네가 아닌 나요, 너는 내가 아닌 너이다.

 

그런데 훗날 선지식을 만나 참선을 하면서 어느 정도 경지에 들게 되자(有箇入處) 물은 물이 아니고 산은 산이 아니었다. 산과 물은 서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울려 있기에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연기적 관계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산이 산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산의 실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연기적 자기 비움으로 보여진다. 그렇게 산과 물은 자기 비움으로 부정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궁극의 경지가 아니다. 거기에도 일종의 망상과 생각의 단견이 작용한 것이다. 자기 비움이라 할지라도 그 자기 비움의 부정 속에만 빠져 들면 그것도 또한 병이다.

 

마지막으로 이제 쉴 곳을 찾았을 때(今得箇休歇處), 다시 말해서 궁극적으로 깨달았을 때 산은 진정 산이고 물은 진정 물로 돌아와 있었다. 모든 분별 망상을 거두어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니 산은 그대로 산이요, 물은 그대로 물이다. 거기에 어떤 생각의 군더더기가 앉을 겨를이 없다. 생각을 비워내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그 정도로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 생각과 분별망상의 끈을 베어내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이다.

 

황벽선사는 이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언어와 침묵, 움직임과 고요함, 모든 소리와 색깔이 모두 깨달음이거늘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겠는가? 머리 위에서 머리를 찾지 말며 부리 위에서 부리를 더하지 말라. 다만 차별적인 견해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산은 산, 물은 물, 승(僧)은 승, 속은 속일 뿐이다.” (『완릉록』)

 

사실 이 '산은 산, 물은 물이다'라는 선어는 화두이다. 그것은 위의 상당법어에서 청원유신 선사의 이어지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신 선사는 말한다.

 

“대중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은가, 다른가? 흑과 백을 분명히 가르는 답을 들고 나온다면, 나의 뜻을 알아차렸다고 인정해 줄 것이다.”

 

그 세 가지 견해가 같다고 말해도 틀리고 다르다고 말해도 틀린다. 앞서와 같이 단계를 나누어 설명한다 해도 그것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각으로 지어낸 내용이며 이미 분별의 작용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계적으로 설명하는 것 또한 불교교학을 차용하여 선의 맛을 보여주는데 유용한 구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어떤 사유의 흔적도 따라잡을 수 없는 화두로 인도하는 옳기는 하지만 말이다.

 

청원유신 선사나 성철 스님이나 왜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동어반복적인 말을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끝 모를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을까? 진정 모를 일이다. 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했을까? 왜 그럴까?

 

고명석 / 조계종 포교연구실 책임연구원

 

未悟、初悟、徹悟

 

‘선시禪詩’가 일반 순수문학의 시가詩歌와는 다소 다른 점은 문자의 화려함이나 기술적 노련미에 달려있지 않고, 그 담겨진 내용[內蘊]의 진위성眞僞性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경詩境이‘깨달음’이라는 특수영역으로 진리의 본질인 불성佛性에 대한 철저한 앎知이 없이는 그 명칭을 얻기 힘들다. 때문에, 선시를 감상하려면 “본래면목”의 내함內涵에 대한 체험이나 탐토探討가 선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청원유신靑原惟信선사는「見山見水의 3단계」법문으로서, 실수實修를 통한 깨달음을 말하였는데:

“1)이 늙은이가 30년 전 참선수행을 아직 시작치 않았을 때,‘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을 뿐’이었으나,

2)그 뒤에 이르러서 선지식을 친견하고 입처入處가 있었는데, ‘산은 산이 아니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3)하지만, 오늘 크게 쉬고 보니, 예같이 ‘산은 단지 산일뿐이고 물은 물일뿐이다.’”(『五燈』卷 17「惟信」)

 

이 3단계의 게시揭示는“未悟、初悟、徹悟”로 “참선하기 전의 견해”、“참선을 시작한 뒤 얼마간의 깨달음이 있었을 때의 견해”와 “완전히 깨닫고 난 뒤의 견해”로 구별하여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제 1단계에서 유신선사는 산과 물을 분명하게 구분하였는데, 산은 물이 아니며 물은 산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긍정성인 경계. 제 2단계는 구별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긍정성도 없는 오직 부정성인 경계. 제 3단계는 구별성과 긍정성이 함께 있는 경계다.

제 1단계 가운데는“주관과 객관의 이원성二元性이 존재한다. 산과 물 및, 우리들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물과 구별관계가 있을 때, 자신은 사물과 구별을 시도한다. …… 이 가운데,‘나我’는 구별을 낳는 문[基礎]으로,‘나’를 만물의 중심에 놓는다.” 이 때의‘나’란‘自我’로서, 깨침의 본질인‘眞我’가 아니다. 이 단계에서 비록‘眞我’는 체달치 못했지만,‘자아’에서‘無我’로의 비약과 동시에 제 2단계에 진입한다. 이 때,“어떠한 분별도、어떤 객체화작용도、어떤 긍정성과 주객체의 이원적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皆空’이 된다.”하지만, 이“皆空”은 분별에 대한 부정인‘무분별’을 뜻하는 것으로, 전과 다름없이 일종의 차별 가운데 떨어져 있다. …… 여기서 분별의 부정성인 무분별의 관념을 다시 철저히 부정함으로서 제 3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끝으로 제 3단계에 이르렀을 때, 완전히 새로운 분별형식을 띠는데, 이는 끊임없는‘自我’부정을 통한 무분별의 층마저 극복된 ‘眞我’의 분별경계로,“산이란 산일뿐이며, 물은 물일 따름이다.” 이 3단계에서의 산과 물(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은 그 총체성과 개체성 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보이는데, 이 때의‘산과 물’이란 우리들의 주관적 입장에서 보이는 객체가 더 이상 될 수 없다.

 

그래서 원안(元安. 834~898. 唐나라 때 스님)은 “고향집에서 어리석음만은 면할 수 있었네.”라고 “청원유신의 제 3단계”를 노래했다.

 

決志歸鄕去(결지귀향거),   고향에 꼭 돌아가겠다고 결심하고서,

乘船渡五湖(승선도오호).   배에 올라 방방곡곡을 다닌 것 같다.

擧篙星月隱(거고성월은),   삿대를 의지해 달빛 머리 위에 이고,

                                    별빛을 받으면서 밤길을 재촉하다가,

停棹日輪孤(정도일륜고).   아! 홀로 떠오른 밝은 해를 보고서야

                                    비로소 노 젓기를 멈추었다네.

解纜離邪岸(해람리사안),   닻줄 풀어 사견의 언덕을 벗어났고,  

張帆出正途(장범출정도).   돛을 펼쳐 정견의 길로 나아갔다네.

到來家蕩盡(도래가탕진),   고향집엔 원래 무엇 하나 있지도 않았건만,

免作屋中愚(면작옥중우).   때마침 고향집에서 어리석음만은 벗을 수 있었네.

 

( 이 시는 원래 禪宗에서 제자를 깨우치기 위해 만든 公案의 이름으로, ≪五燈會元 ․ 卷六≫의「낙포 원안장(洛浦元安章)」에 나오는 글로서: 「어떤 중이 스님에게 묻기를:“ ‘학인이 고향에 돌아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야합니까?’하니, 원안스님께서 대답하시길:‘고향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가족들은 뿔뿔이 다 흩어져 아무도 살지 않는다면, 자네는 어디로 돌아갈 건가?’라고 하시니, 중이 대답하길:‘그렇다면 돌아갈 곳이 없겠습니다!’고 했다. 이에,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길:‘뜰 앞의 남은 눈은 태양이 녹이지만, 방안의 하늘거리는 티끌은 누구더러 치우라할꼬?’”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이 게송을 읊으셨다고 한다. )

[출처] 靑原行思-청원유신선사의 '山是山 水是水'|작성자 byuns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