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서스의 하얀 동그라미
코카서스의 하얀 동그라미 재판
베르톨트 브레히트 작
이재진 역
등장인물
@계곡 소유권 다툼
염소사육 집단농장 '갈린스크'의 대표들 : 늙은 농부, 농부 여, 젊은 농부, 아주 젊은 노동자
과실주 재배 집단농장 '로자 룩셈부르크'의 회원들: 늙은 농부, 농부 여, 농학사, 젊은 트랙터 여자 기사, 상이 군인, 그 외 남녀 농부들
기 타 : 중앙에서 온 감정관, 가수 아르카디 짜이체와 그외 악사들
@ 지체 높은 아이
제오르기 아바슈뷜리 총독
총독부인 나텔라
총독아들 미헬
집행관 샬봐
살찐영주 아르센 카쯔베키
중앙에서 온 전령기병
의사인 니코 미카체와 미카 로라체
군인 샤샤봐
하녀, 그루쉐 바흐나째
세 명의 건축기사
네 명의 몸종 : 앗샤, 마샤, 술리카, 뚱보 니나
유모
주방녀
요리사
오양간 지기
궁전 관리들
총독과 살찐영주의 무장기병과 군인들
거지와 청원자들
우유 판 노인
두 귀부인
여관 주인
머슴
병장
졸병 '머저리'
농부 내외
장사꾼 셋
그루쉐의 오빠, 라브렌티 봐흐나째
오빠의 부인, 아니코
이들의 머슴
잠시동안 그루쉐의 시어머니였던 농부 부인
부인의 아들, 유숩
수사 아나스타시우스
결혼축하객들
아이들
@ 하얀 동그라미 재판
마을 서기 아쯔닥
경찰 샤우봐
도망중인 대공
살찐 영주의 조카
의사
반신불수
절름발이
협박자
여관주인의 며느리, 루도뷔카
가난한 농부 할멈
할멈의 사위, 도둑 이라클리
세 대지주들
변호사 일로 슈보라째와 산드르 오보라째
아주 늙은 부부
1. 계곡 소유권 논쟁
(전화로 파괴된 코카서스의 어느 마을, 페허의 잔해를 깔고 사람들이 빙 둘러 앉아서는 농주를 마시기도 하고 담배도 피운다. 이들은 두 집단농장에서 모인 농부들인데 대개가 아낙네와 노약자로, 간간히 군인들도 섞여 있다. 수도에서 온 국가재건위원회 감정관도 보인다)
좌측 농부 여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기 저 언덕받이가 바로 나찌군 탱크를 우리가 세 대나 저지했던 곳 입니다. 사과 과수원은 그전에 벌써 망쳐져 있었고요.
우측 농부 노인 우리의 그 좋던 염소젖 농장도 고만 쑥밭이 되었다니!
좌측 트랙터기사 여 불을 지른 건 나였읍니다. 동무들. (사이)
감정관 그럼 제가 잠시 보고서를 낭독하겠습니다. 염소사육장 '갈린스크'에서 온 대표들이 이 곳 '누카'에 참석해 있습니다. 농장은예전 히틀러 군대가 진군해 왔을 때 관계당국의 철수명령에 따라 동부지역으로 사육염소들을 몰고 이주 하였던 바, 지금은 다시 옛 터전인 이 계곡으로 옮겨 오고자 하는 것이죠. 농장 대표들이 마을과 임지 등을 시찰한 결과 파손 정도가 심각한 수준으로 판명 되었습니다. (우측에 앉아 있던 대표들이 머리를 끄덕여 인정한다) 그런데 이웃 마을인 '로자 룩셈부룩크' 과일 재배 농장측에서는- (우측을 향해서) 예전 갈린스크 농장소유의 목초지였던 계곡의 임지가 지금은 풀 한 포기도 찾기 힘들 정도로 황폐해져서 오히려 과일재배나 포도농원으로 재개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이유신청을 해왔죠. 네, 그래서 본인은 재건위의 감사관 자격으로 두 농장이 서로 합의를 통해 갈리스크 농장의 재 이주 여부를 결정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우측 노인 다른 것보다도 우선 발언에 대한 시간규제를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소. 우리는 갈린스크 농장에서 예까지 사흘 밤 사흘 낮을 도와서 길을 왔는데 고작 한나절로 이야기를 끝내란 말이오!
좌측 상이군인 동무, 옛날처럼 이젠 마을이고 일손이고 시간이고 간에 넉넉하지가 않단 말이요.
젊은 트랙터기사 여 생활 필수품이 아니면 모두 절제하는 마당에 담배도 배급제, 술도 배급젠데 토론도 마찬가지로 절제되어야 합니다.
우측 노인 (한숨을 내뱉으며) 제기랄 파쑈놈들! 좋소, 본론부터 끄집어 내서 왜 우리 소유였던 골짜기를 우리가 다시 소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겠소. 이유를 대자면 한도 없지만 제일 간단한 방법으로 시작 하지요. 마키네 야바키째, 염소젖 치즈 좀 끌러 내봐라.
(우측 농부아낙네가 큰 광주리에서 천으로 싸놓은 큼직한 치즈덩어리 하나를 꺼낸다. 박장대소)
우측 노인 모두들 맛들 보시오. 동무들 어서 들어 봐요.
좌측 늙은 농부 (미심쩍은듯) 설마하니 와이로로 쓰는 거는 아니겠지?
우측 노인 (주변의 왁자한 웃음소리를 자르며) 와이로로 쓴다구? 수랍! 네 이놈, 땅도둑놈아! 네가 치즈만 먹겠냐. 골짜기 땅까지 말아 먹을 거라는 건 세상 천지가 다 안다. (웃음소리) 너 같은 놈한테 바랄 건 없다만서도 말이라도 똑바로 해봐라. 치즈 맛이 좋은가?
좌측 노인 정히 말하라니깐, 자네 말대롤세.
우측 노인 그래? (씁쓰름한 투로) 그렇다면 자네는 치즈의 칫자도 모르는 위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네.
좌측 노인 모르긴 누가 모른다는거야. 아니깐 치즈맛이 좋다는 것 아닌가.
우측 노인 내 말은 치즈가 맛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일세. 예전의 치즈맛이 나질 않아요. 왜 옛날 그 맛이 안나느냐? 지금 농장의 풀은 이 골짝의 옛 풀만치 염소들 입맛에 달지가 않기 때문이지. 풀이 그풀이 아닌고로 치즈도 그 치즈가 아니다 이 말씀이오. 내 말도 회의록에 써 넣어 주시오.
좌측 노인 자네들 치즈가 맛만 좋은데 뭘 그래?
우측 노인 맛만 좋다고? 이만 해갖곤 중등품에도 못 미쳐요. 젊은 것들이 뭐라고 공론을 해도 지금 목초지는 못써. 한마디론 살 곳이 못 된다니깐. 아침에 일어나도 아침냄새가 제대로 나지 않는단 말이오. (군데군데 웃음소리)
감정관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이 양반들이 겉으로는 웃어도 할아버지 말씀은 잘 알아 들었을 겁니다. 동무들, 고향을 왜 사랑합니까. 밥맛도 내 고향 밥맛이 더 낫고, 하늘도 더 높고, 바람이 불어도 더 감미롭기때문이 아니겠소? 내 고향에서나 목소리도 크게 울리는 법. 흙도 얌전히 갈리고, 그렇지 않습니까.
우측 노인 골짜기 땅은 원래부터 우리꺼요.
군인 원래부터라니, 원래부터 짊어지고 나온 사람이 어디 있담. 자네 몸뚱아리도 소싯적엔 캇츠베키 영주 소유물이었지, 자네 소유가 아니었네.
우측 노인 법대로 따진다면 우리 골짜기란 말이었네.
젊은 트랙터기사 여 법, 법 하지만 여지껏도 그놈의 법이 맞는지는 연구심사를 해야지요.
우측 노인 그야 두말할 이야기인가, 사람이 태어난 생가 바로 옆으로 어떤 나무든지 한그루 서 있는 것하고, 아니면 또, 어떤 시렁뱅이든지 아무런 놈이나 이웃이랍시고 옆에 와서 같이 사는게 똑같을 수 있겠나? 우리는 이리로 돌아 올테야. 왠지 알아? 와서 네놈들, 땅도둑놈들하고 이웃 할거요. 웃을 사람 있으면 웃어봐.
좌측 노인 (웃음을 터트린다) 그럼 이제 이웃사촌이니까. 우리 카토바흐탕농학사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우리 농학사께서 골짜기를 어떻게 연구하고 계신지?
우측 노인 여 골짜기 얘기를 지금껏 하면서도, 중요한 얘기는 아직 제대로 안나온 것 같아요. 가옥들로 말하자면 백프로 파괴된 상태는 아니고, 목초지의 경우 기초 석벽은 그런대로 남아있는 편입니다.
감정관 국가복구지원은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곳에 오던 그곳에 머물던간에, 그 점은 잘 아시고들 있겠지요.
우측 노인 여 감정관 동무, 우리가 여기서 무슨 흥정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내가 동무가 쓰고있는 모자를 뺏고 나서 내것을 대신 내밀면서 '이게 더 나은 거요'라면 좋겠어요? 실제로 더 낫다는 게 맞는다 해도, 어찌 됐든 자기가 갖고 있던 것에 애착은 남는 것 아니겠어요?
젊은 트랙터기사 여 땅돼기라지만 빵떡 모자식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적어도 우리 고장에서는 아돼요, 동무.
감정관 서로 서로 진정합시다. 맞는 말씀입니다. 땅은 어디까지나 뭔가 유용한 것을 생산해내는 도구로 생각해야지요. 그렇지만 땅에 대한 사랑, 이 사랑도 인정을 하고 들어야 되지 않겠어요? 토론을 계속 진전시키기에 앞서 한마디 제안을 드리고 싶은데, 여러분들이 갈린스크 농장에서 오신 동무들에게 이 문제의 골짜기 땅을 어떻게 쓰실 작정인지 설명을 해주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우측 노인 그럽시다.
감정관 그래요, 카토가 말하면 쓰겠구만.
감정관 농학사 동무!
좌측 농학사 여 (몸을 세운다. 군인복장을 하고 있다) 동무들, 작년 겨울이었지요. 우리가 바로 여기 산중에서 빨치산으로 싸울 때 나누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군을 퇴치한 후에 우리의 과일농장을 열 배정도로 확장하자는 것이었는데, 배수시설계획은 제가 맡았지요. 산중턱에 있는 호수를 이용해서 저수지를 쌓게 되면 삼백 핵타르의 불모지에 농수공급이 가능해집니다. 그렇게되면 유실수뿐입니까, 포도 재배도 바라볼 수 있지요. 프로젝트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갈린스크 농원소유였던 문제의 이 골짜기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이 다만 문제지요. 여기 청사진이 들어 있습니다. (감정관에게 서류를 건넨다)
우측 노인 우리 농장에서는 말 사육목장 건립도 새로이 계획하고 있는데 그것도 회의록에 기록해 주시지요.
젊은 트랙터기사 여 동무들, 이 계획안은 우리가 산두더지 노릇을 하면서도 밤낮으로 궁리에 궁리를 짜서 드듬은 것이오. 총 몇자루에, 장정할 실탄조차 궁색했던 시절이었지요. 연필 한자룬들 조달이 쉬웠던가요. (양측에서 박수)
우측 노인 로자 룩셈부르크 농장의 동무들과, 고향을 수호한 모든 분들의 노고를 치하하겠소. (양측은 악수를 주고 받고 서로를 얼싸안는다)
좌측 농부 여 우리 군인들, 우리 남편들과 당신 남편들이 기름진 고향 땅으로 다시 돌아와야 된다는 오직 그 일념 뿐이었지요.
젊은 트랙터기사 여 시인 마야콥스키의 말이 꼭 맞아요. '소련인민의 고향은 이성의 고향이어야 한다!' (우측에 앉았던 대표들은 노인들만 남겨놓고 모두 일어나서 감정관과 함께 농학사가 만든 청사진 도면을 연구한다. '저수지 낙차차가 22미터나 되네!', '이쪽 암벽을 폭파하는군', '그렇다면 시멘트와 다이나마이트만 있으면 되는 건가', '물줄기를 이렇게 뽑아 내리는구만'. '기가 막힌데', 등등 감탄구가 튀어나온다)
우측 아주 젊은 노동자 (우측에 앉아 있는 노인을 향해서) 언덕 사이사이에 밭이란 밭은 다 물줄기가 들어가게 돼요. 와서 좀 보세요. 알레코 할아버지.
우측 노인 난 안 봐. 청사진치고 세상에 잘못된 것이 있단 말여? 그런 식으로 꼼짝없이 설복당하고 싶지는 않아.
군인 설복 시키려는게 아니라 청사진을 함께 검토해 보자는 것 아닙니까?
(웃음소리)
우측 노인 (마지못해 일어나서 도면을 들여다보러 걸어간다) 이 땅도둑놈들은 자기네들이 기계와 청사진을 앞세우고 오면, 이런 지경에 한 마디 반대도 못할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
우측 농부 여 알레코 베레쉬뷜리, 우리 쪽의 새 건설계획에도 할아버지는 제일 회의적이잖아요? 세상이 다 알고 있지요.
감정관 회의록을 어떻게 쓰면 될까요? 여러분들이 이번 건설계획을 위해 옛날 골짜기를 포기, 자진퇴거에 동의하는 걸로 쓸까요?
우측 농부 여 전 동의하겠어요. 알레코 할아버지는 어떻게 하실래요?
우측 노인 (도면을 들여다 보면서) 이 도면의 사본을 떠서 우리에게도 한부 주시도록 청합시다그려.
우측 농부 여 그럼 됐어요. 우리 앉아서 식사나 하도록 해요. 도면의 사본이 할아버지 손까지 와서 그걸 놓고 토론을 하게 되면 결말은 뻔하죠. 할아버지는 제가 잘 알지요. 우리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일테고. (양측 대표들 웃는 얼굴로 다시 얼싸안는다)
좌측 노인 갈린스크 농장 만세다! 계획하고 있는 말 사육농장도 짓기만 하면 번성할 거요!
좌측 농부 여 동무들. 갈린스크 농장 대표들과 감정관 동무께서 이 자리에 배석하신 영광을 기리고자, 오늘 연극을 한 편 기획했습니다. 가수 아르카디 짜이체가 출연하고 연출하는 이 연극은 우리 현안문제와도 상관이 없지 않습니다. (박수, 젊은 트랙터기사가 가수를 부르러 간다)
우측 농부 여 동무들, 동무들이 준비한 이 연극은 틀림없이 훌륭한 연극일거요. 골짜기와 맞바꾸는 셈이니.
좌측 농부 여 아르카디 짜이체는 싯귀를 무려 21,000 수나 왼대요.
좌측 노인 그분 지휘로 극을 연습했지. 쉽게 모실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아마 당 중앙 문공부에서도 자주 북부 공연을 위해 부탁을 잘 드려야 할 거요, 동무.
감정관 우리는 주로 경제개발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좌측 노인 (싱긋 웃으면서) 포도재배나 트랙터의 분배는 관장하면서도, 시나 노래에는 관심이 없나 보군요. (젊은 트랙터 여기사의 손에 끌려서 가수 아르카디 짜이체가 원형으로 둘러선 사람들 가운데로 들어온다. 체구가 다부지고 선이 굵은 외모의 남자다. 가수를 따라서 악사들이 악기를 하나씩 갖고 들어온다. 극중 관객들, 박수로 환영한다)
젊은 트랙터 기사 이 분이 감정관 동무세요, 아르카디씨. (가수는 둘러선 사람들에게 인사한다)
우측 농부 여 뵙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선생님 노래는 학교 다닐 때부터 교실 에서 배웠으니까요.
가수 이번 작품은 노래도 많이 나옵니다. 농장의 여러분들이 모두 같이 어울려서 연기를 하게 됩니다. 옛날 탈도 몇짝 갖고 왔습니다.
우측 노인 옛날 예적의 이야기인가요?
가수 아주 옛날의 전설이지요. '하얀 동그라미 재판'이라는 제목인데 중국에서 온 이야기입니다. 물론 작품을 약간 수정해 보았습니다. 유라, 탈을 꺼내서 보여 드려라. 동무들, 어려운 토론을 막 하신 참인데, 여러분께 즐거움이 될 수 있다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늙은 시인의 목소리가 소련제 트랙터의 그늘에서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들어 주십시오. 포도주는 함부로 섞으면 안 좋다는 말도 있지만, 지혜는 옛것과 새것이 훌륭하게 어울리는 법이지요. 자, 공연을 올리기에 앞서서 식사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뱃 속이 든든해야 할테니까.
이구동성으로 맞습니다. 모두들 다 마을회관으로 가십시다. (식사하러 가는 걸음이 경쾌하다. 웅성거리는 와중에 감정관이 가수에게 다가가서)
감정관 아르카디씨, 공연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실은 오늘밤이라도 티풀리스로 돌아가야 할 사정이 있어서.
가수 (무관심하게) 워낙은 이야기가 두 개 나옵니다. 서너시간 잡으면 될 성싶은데.
감정관 (붙임성있는 목소리로) 어떻게 좀 짧게 안될까요?
가수 안됩니다.
2. 지체 높은 아이
가수 (가수가 악사들 앞에 앉아 있다. 어깨 위에는 양가죽으로 된 검은 망도를 걸치고 있고, 쪽지가 여러개 끼어있는 낡은 이야기 책의 책장을 넘기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 피로 얼룩진 시대에 저주의 곳이라고 불리우는 이 도시에 게오르기 아바슈뷜리라는 총독이 살았답니다. 총독은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었고, 아름다운 부인과 건강한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루지니엔 지방의 다른 총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거지들이 문지방을 넘나들었고 무수히 많은 군인들이 총독을 호위했으면 궁정 뜰에는 청원자들로 가득 넘쳤습니다. 게오르기 아바슈뷜리 같은 이런 총독을 여러분께 어찌 간단하게 상세한 설명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자기의 삶을 즐겼다고나 할까. 어느 부활절 일요일 아침에 총독은 가족과 함께 교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궁전의 아치문으로부터 거지들, 정원사들, 삐쩍마른 아이들, 목발을 짚은 병신들이 탄원서 등을 쳐들고 쏟아져 나온다. 이들 뒤로 무장한 군인들, 그 뒤로 값진 의상을 입은 총독 가족들이 나타난다)
거지 탄원자들 - 총독님, 자비를 베푸십시오. 세금은 견딜 수 없이 과중합니다.
- 소인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발을 잃었습니다. 어디서 이 보상을!
- 제 동생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총독님 오해일 뿐입니다요.
- 굶어죽을까 걱정이 됩니다요.
- 소인의 막내 자식만은 군복무를 면하게 해 주십시오.
- 총독님 제발 좀 들어 보세요. 배수 관리가 뇌물을 받아 처먹었습니다요.
(관리 하나가 탄원서를 받아 모으고, 또 다른 하나는 자루에서 동전을 꺼내 뿌려준다. 군인들이 가죽 회초리를 후려치며 군중들을 밀어낸다)
군인 물러나라, 교회 문을 막지마라.
(총독부부와 집행관의 뒤를 따라 궁문으로부터 총독의 아들이 호화찬란한 유모차에 실려 나온다. 군중들이 다시 그 아이를 구경하려고 앞으로 몰려든다)
가수 (매질을 당하며 군중들이 밀려가는 사이에) 이 부활절에 처음으로 백성들은 후계자가 될 이 아이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총독이 애지중지하는 이 지체높은 이이에게 바싹 붙어 의사 둘이 따르고 있었습니다.('영식이구나'- '밀지 좀 말아요, 볼 수가 없어요.' '경하드립니다. 총독 각하.') 막강한 영주 카츠베키까지도 성당문에 나타난 이 아이에게 경외함을 나타냈으니, (한 살찐 영주가 앞으로 다가와 총독 가족에게 문안한다.)
살찐 영주 즐거운 부활절이요, 나텔라 아봐슈뷜리. (명령 소리가 들리더니 먼지를 뒤집어 쓴 기병이 뛰어들어와 서류마리를 총독에게 전한다. 총독이 눈짓을 하자 젊고 잘생긴 집행관이 이 기병에게로 가서 저지한다. 잠깐 침묵이 흐르는 사이에 살찐 영주는 미심쩍게 그 기병을 위 아래로 훑어본다.) 날씨 한번 좋고만요. 어젯 밤 비가 쏟아질 때는 이번 부활절은 잡쳤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청천 하늘이 아니겠습니까. 나텔라 아바슈뷜리, 나는 담백한 것을 좋아하는 성미라서 맑은 하늘을 좋아합니다. 어린 이 미헬을 좀 보시지. 벌서 총독의 체취를 풍기는군, 찌찌찌. (아이를 간지른다.) 즐거운 부활절이요. 꼬마 각하, 찌찌찌.
총독부인 이봐요, 아르센. 형님께서는 동편에 새 별관을 짓기로 결정하셨지 뭡니까. 그 앞에 있는 마을은 집들이 흉하기 때문에 다 허물어 버리고 그대신 정원으로만 쓰게 된답니다.
살찐 영주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늘 지겨운 소식만 들렸는데. 형님, 전쟁은 어찌 되고 있습니까? (총독이 외면하자 쫓아들며) 작전상 후퇴라면서요? 그런 사소한 반격은 늘 받게 마련입니다. 전황이 좋은가 싶으면 또 나빠지고 그게 바로 병가지상사 아닙니까? 별일 아니겠지요?
총독부인 아기가 기침하네! 여보, 당신 들으셨지요? (유모차에 바싹 붙어 서있는 품위를 풍기는 두 의사에게 눈총을 준다) 아기가 기침한다구요.
첫째 의사 (둘째에게) 니코 미카체씨, 미지근한 물에 목욕시키면 안된다고 말씀드린 바 있는데 잊으신 모양이구려? 목욕물 온도 조절에 약간의 실수가 있었나 봅니다, 마님.
둘째 의사 (역시 정중하기 그지없다)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이요, 미카 로라체씨. 우리의 경외하는 미쉬코 오보라체님이 지시한대로 목욕물을 맞추었으니까요. 오히려 전날밤의 통풍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님.
총독부인 좌우간 애나 얼른 살펴봐요. 여보, 애가 열이 있는 것 같아요.
첫째 의사 (애를 내려다보며) 마님 조금도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목욕물 온도를 조금만 높이면 이런 일은 다시 없을 겁니다.
둘째 의사 (눈꼬리를 사납게 꼬며) 미카 로라체선생, 두고 봅시다. 마님, 염려 놓으십시오.
살찐 영주 쯔쯔쯔! 난 간장이 뜨끔거리기만 해도 의사놈 종아리를 50대 때리도록 하지요. 사실 말이지 지금 너무 세상이 어수룩해 졌어요. 옛날 같으면 두말할 것 없이 참수형감이지요.
총독부인 교회 안으로 들어갑시다. 여기는 아무래도 맞바람이 치는 것 같아요. (총독 가족과 시종들의 행렬이 교회문으로 꾸부러져 들어간다. 살찐 영주도 뒤따른다. 집행관이 행렬에서 빠져나와 총독에게 기병을 가리킨다)
총독 샬바, 미사가 끝나기 전에는 안된다.
집행관 (기병에게) 총독께서는 미사를 올리시기 전에는 어떤 보고로도 방해 받고 싶지 않으시단다. 더구나 보고라는 게 들어보나마나 기분 잡치는 내용일테니 말일세. 부엌에 가서 뭐 좀 얻어 먹기나 하게. (집행관은 행렬에 끼어들고, 기병은 투덜대며 궁전 안으로 들어간다. 궁전문으로부터 군인 하나가 나와 그 문에 선다)
가수 도시는 이제 조용하다. 교회 앞 광장에는 비둘기떼들이 뒤뚱거리고, 어떤 근위병 하나가 하녀와 수작을 걸고 있다. 하녀는 소쿠리를 들고 강쪽에서 올라오고 있는데, (큼직한 푸른 잎사귀가 보이는 소쿠리를 팔에 끼고 하녀 하나가 아취문으로 막 들어가려 한다)
군인 이봐, 아가씨! 교회에는 안가고 부활절미사에 슬쩍 빠지시는군?
그루쉐 옷을 입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부활절 만찬에 거위 한 마리가 더 필요하다고 나더러 가지고 오라는 거예요. 거위라면 내가 잘알걸랑요.
군인 거위 한 마리라?! (의심쩍은 듯 가장하며) 거위가 진짜 들어 있는지 보아야겠다. (그루쉐 어리둥절) 계집의 말은 곧이 곧대로 믿는 법이 아닌 것. '거의 한 마리 가지러 갔었어요' 요런 소릴 할 때는 흔히 뭔가 심상치 않은 짓거리가 있었다는 뜻이거던.
그루쉐 (단호히 다가가 거위를 보여준다) 여기 있잖아요. 열두근은 실히 되고 옥수수만으로 사육된 거예요. 틀림이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짓겠어요.
군인 거위 박사시라! 총독께서 친히 잡수신다 이거지. 그건 그렇고 그러니까 아가씨는 지금 막 강가에 갔었단 말씀이렷다.
그루쉐 그래요. 거위장에 갔었어요.
군인 그래, 강 밑쪽 거위장에 갔었다!? 그러니까 강 윗편에 있는 그 유명한 풀밭에는 얼씬도 안하셨다는 게지?
그루쉐 풀밭이 있는 강가에는 이불깃을 빨 때에나 간다구요.
군인 (의미심장하게) 그렇다니까.
그루쉐 그렇다니, 뭐가요?
군인 (눈을 찡긋하며) 바로 그렇다고.
그루쉐 풀밭이 있는 강가에서 이불깃을 빨면 왜 안된다는 거죠?
군인 (어울리지 않게 크게 웃는다) '이불깃을 빨면 왜 안된다는 거죠?' 환장하겠군, 환장하겠어.
그루쉐 군인아저씨를 이해할 수가 없군요. 뭘 그리 환장한다는 거예요.
군인 (교활하게) 남정네가 뜻하시는 바를 여정네께서 아시게 되면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해 질 걸.
그루쉐 그 뻔한 풀밭이 어떻다는 건지 알 수 없군요.
군인 알 수 없다고, 건너편 덤불 속에서 내다 보면 훤히 다 보인다해도? 그렇고 그런 여정네가 '이불깃을 빨러 왔어요.' 이러다가 그렇고 그런 일이 생겨도?
그루쉐 그렇고 그런 일이 생기다니요? 군인아저씨, 무슨 뜻인지 이젠 그만 말해 줄 수 없어요?
군인 일어날 수도 있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소리지.
그루쉐 대낮에 한 번 발목을 물에 담글 뿐인데 그런 걸 가지고 군인아저씨는 왈가왈부하는 거구만요.
군인 조금만 더, 발목 조금 위로.
그루쉐 조금 더 위라니요? 기껏해야 종아리 정도인데.
군인 종아리보다 조금만 더. (낄낄댄다)
그루쉐 (화를 내며) 시몬 샤샤봐, 부끄러운 줄을 좀 아세요. 어느 여정네가 대낮에 물에 발이나 담그는 것을 기다리며 풀숲에 앉아 숨어 있다니, 더구나 주제에 혼자는 그 짓도 못할 거고 다른 군인과 어울려. (뛰어 나간다)
군인 (뒤에다 대고) 다른 놈하고 어울리다니. (군인이 그루쉐를 뒤따라 뛰어 나가고 가수는 다시금 이야기를 계속해 나간다)
가수 도시는 조용하기만한데 무장군인들이 웬일인가? 총독의 궁성은 평화롭기만 한데 왠일로 이곳이 이제 요새가 되어 있단 말인가? (교회문에서 살찐 영주가 빠른 걸음으로 나온다.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오른쪽 궁정문 앞에 무장기병이 기다리고 있다. 영주는 이 둘을 보고 신호를 주면서 천천히 지나치더니, 갑자기 몸을 돌린다.그 중의 하나는 문을 통해 궁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무장기병은 멈춰 서서 문을 지킨다. 뒷쪽 여러 곳에서 숨죽여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제 위치로!' 궁성이 포위되어 있는 것이다. 멀리서 교회 종소리, 교회문에서 총독 가족이 섞인 행렬이 나온다) 총독은 자기 궁성으로 돌아갔지만 철통같이 에워싸인 이 궁성은 바로 함정이 되었구나. 털을 다듬어 거위를 구워 놓았지만 식탁에 오를 수도 없었네. 점심시간은 만찬의 시간이 아니라 바로 죽음의 시간이 되고 말았으니!
총독부인 (지나가며) 정말이지 이 지겨운 집구석에서는 더 살 수가 없어. 그런데도 총독께서는 조금도 내 생각은 안해 주시고 우리 미헬을 위해서만 집을 짓도록 하시니, 미헬밖에는 모르셔.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미헬뿐이라고.
총독 자네 들었나? 동생 카츠베키가 '즐거운 부활절이오' 하고 인사하는 꼴을?! 그야 그렇다치고 내 생각에는 이곳 눅카에서는 어제 저녁에 비가 오지 않았거든. 동생놈이 있던 곳에는 비가 왔던 모양인데 그 녀석이 어디 있었을까?
집행관 조사를 해 봐야겠습니다.
총독 그래. 지체하지 말도록. 하지만 내일! (행렬은 궁정문으로 꾸부러진다. 이때 궁정문에서 되돌아 나와 있던 기병이 총독 앞으로 나선다)
집행관 중앙에서 온 저 기병이 소식을 가지고 왔는데 들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각하? 오늘 아침 긴밀한 소식을 가지고 이 곳에 도착했습니다.
총독 (걸음을 옮기며) 식사시간 전에는 안된다, 샬바!
집행관 (행렬은 모두 궁정 안으로 들어가고 두 무장기병만 남아 궁정문을 지킨다. 연락기병에게) 총독께서는 식사 전에는 어떤 군사적인 보고로도 부담받고 싶지 않다신다. 오후에는 일류급 건축기사들을 식사에 초대했고 그들과 면담이 있으시니 시간이 없으시고. 저기 벌써들 오셨구만. (세 사람이 나선다. 기병이 나가고, 집행관은 세 건축기사에게 인사한다) 여러분, 각하께서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각하께서는 여러분들만을 위하여 시간을 내신답니다. 거대한 건물 신축에 관해서지요. 어서 드시지요.
건축기사 중 하나 페르시아의 전쟁이 악화일로라는 불안한 소문이 떠들썩한데도 각하께서는 이런 신축 사업에까지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집행관 오히려 그런 소문때문에 더 그러시는 것 아닐까요? 하여간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페르시아는 멀기만 합니다. 여기 근위대는 총독 각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서슴없이 바칠 것이고. (궁성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귀를 째는듯한 여인의 비명소리, 명령하는 소리, 집행관이 혼비백산해서 궁성문으로 뛰어간다. 무장기병 하나가 나오며 집행관에게 창을 들이민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이 자식아, 창을 저리 치워! (미친듯 근위병에게 뛰어가) 무장을 해체시켜! 총독께서 쿠데타에 걸려드신 걸 모른단 말야! (지적을 받은 근위대의 무장기병들은 꼼짝을 안한다. 집행관을 차갑게 외면해 버리고는 무관심한 채로 성에서 나온 기병에게로 합세한다. 집행관이 궁성입구로 들어가려고 난리다)
건축기사 중 하나 그 영주들이야! 어젯밤에 수도에서 대공과 총독에 반항하는 영주들의 회합이 있었거든. 여러분, 몸조심하는 게 좋겠시다. (서둘러 퇴장한다)
가수 오, 위대한 자들의 어리석음이여! 힘없는 자를 위에 영원히 군림하고 돈으로 산 권력으로 안전을 꿈구다니!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폭력을 쉽게 믿으며. 그러나 오랫동안은 지속될 수 있어도 영원히는 안되는 법! 오, 시대의 전환이여! 너, 민중의 희망은 드디어 왔구나. (성문으로부터 포박당한 채 총독이 다 죽을 상을 하고 나온다. 양쪽에 완전무장한 군인 둘이 따른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거대한 자여! 거드름피고 꼿꼿히 걸으려면 걸어봐라! 궁성에서는 적의에 찬 눈빛만이 네 뒤를 따를 뿐! 건축기사가 네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관 짜는 목공이면 족하리라. 네가 들어갈 곳은 새로 지은 궁전이 아니요, 조그만 땅 구덩이일 뿐! 눈 먼 자여! 네 주위를 돌아보라! (묶인 총독은 주위를 둘러본다) 네가 한 짓이 이제 마음에 드는가? 부활절 미사를 마치고 진수성찬을 들러 가려 했으나 네가 가야할 곳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는 그곳일 뿐! (연행되어 끌려 나간다. 근위병이 그 뒤를 따른다. 뿔나팔의 경적이 들리고 성문 뒤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린다) 거대한 자의 집에 파멸이 오면 힘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함께 당하는 법 권세있는 자들의 행운은 맛보지 못했어도 그들의 불행을 때로는 함께 나누어 갖는 법 내닫는 수레에 매달려 땀 흘리는 짐승들은 정신없이 치닫는다. (성문에서 혼비백산한 하인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인들 (뒤죽박죽으로) 짐 보따리! 셋째 마당으로 모두 가져가! 닷새 먹을 식량을 준비해라!
- 마님께서 기절하셨다.
- 마님이 피신하셔야 된다. 이리로 모셔 와라.
- 우리는 어쩌지?
- 그놈들이 우릴 돼지 멱따듯 죽일텐데.
- 하나님 맙소사, 어찌될고?!
- 시내는 벌써 피바다가 되었대.
- 다 헛소리라고. 총독께서 영주들 회합에 참석해 달라는 간청을 받았을 뿐이래. 큰 싸움 없이 해결될 거라는데, 믿을만한 소식통에서 들었다구. (두 의사도 앞마당으로 뛴다)
첫째 의사 (둘째 의사를 잡아 세우려든다) 니코 미카체, 아바슈비리 마님을 모시는 것은 당신의 의무가 아니겠소?
둘째 의사 내 의무라고? 네 놈이 할 일이지!
첫째 의사 애기 당번이 누구요? 니코 미카체, 나요 당신이요?
둘째 의사 미체 로라체, 그 벌레같은 어린 놈 때문에 썩은 냄새나는 이 집구석에 잠시인들 더 머물 것 같소? (싸움박질을 한다. '직무태만이요.' '직무 좋아하시네.' 등의 소리만 들릴 뿐이다. 결국 두 번째 의사가 첫 번째를 때려 눕힌다.) 염라대왕한테로 꺼져. (퇴장)
하인들 - 저녁때까지는 시간이 있어요. 그때까지는 군인놈들이 고주망태가 안되거든요.
- 하극상이 있었다는데, 누가 몰라?
- 근위병들은 내뺏대.
- 어떻게 된 건지 누가 좀 속시원히 말할 수 없어?
그루쉐 멜리봐 어부아저씨가 그러시는데요, 시내 밤하늘에 붉은 꼬리를 단 혜성을 보았대요. 그건 불길한 징조라는군요.
하인들 -어제 서울에 소문이 쫙 퍼졌는데, 페르시아전쟁에서 아주 졌다누만.
- 영주들이 무서운 반란을 일으켰대요. 그러니까 말야 대공께서는 벌써 줄행랑을 치셨다는구먼. 대공을 모시던 총독들은 모두 목이 잘린다는구먼.
- 이 집의 어린것은 해치지 않는대요. 내 동생이 근위대에 있걸랑요. (시몬 샤샤봐가 들어와서는 수라장 속에서 그루쉐를 찾는다)
집행관 (궁정문에 나타난다) 모두 세번째 마당으로 가져 가! 짐 싸는 걸 모두들 도우라니까! (집행관은 하인들을 족쳐댄다. 시몬이 마침내 그루쉐를 찾는다)
시몬 여기 있었군, 그루쉐. 어떻게 할 거야?
그루쉐 글쎄요, 저 산 너머에 농장을 가진 오빠가 계신데, 위급하면 -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하실거죠?
시몬 난 상관없어. (자세를 가다듬고) 그루쉐 봐흐니체양, 내 신상에 대한 염려만으로도 난 만족해. 총독부인 아바슈뵐리를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았어.
그루쉐 그런데 근위병들이 반기를 들었다면서요?
시몬 (진지하게) 들었지.
그루쉐 마님을 호위하는 게 그럼 위험하지 않겠어요?
시몬 티플리스에선 이런 말들을 하지: 도마위에 고기가 칼을 무서워 하랴.
그루쉐 당신은 고기가 아니라 사람이에요, 시몬 샤샤바. 마님이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시몬 마님과는 물론 아무 상관이 없지. 그래도 명령을 받았으니까 떠나야지.
그루쉐 군인 아저씨는 정말 앞뒤가 꽉 막혔군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소득도 없이 위험속에 빠지다니. (궁에서 그루쉐를 부르는 소리가 난다) 셋째 마당으로 가야돼요, 급해요.
시몬 급하다니 우리 이제 다투지 맙시다. 제대로 다투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아가씨께 묻겠는데, 아가씨는 부모님이 계신가?
그루쉐 아뇨, 오빠뿐이에요.
시몬 시간이 없으니 다음 질문을 하겠소. 아가씨는 물 속의 싱싱한 고기처럼 건강한가요?
그루쉐 오른쪽 어깨죽지 밑이 가끔 결릴 때가 있지만, 아직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누구에게 아직껏 부담을 준 적이 없어요.
시몬 그야 다 아는 사실. 부활절임에도 개의치않고 거위를 잡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당신이지. 세번째 질문은, 아가씨는 참을성이 없는 편인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그루쉐 참을성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의미도 없이 전장에 나가 아무런 소식도 주질 않는다면 견딜 수 없겠지요.
시몬 소식은 있을 거요. (궁정에서 다시 그루쉐를 찾는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인데...
그루쉐 시몬 샤샤바, 세째 마당으로 가야하고 너무 급해서 대답을 미리 하겠어요. '예' 라고.
시몬 (몹시 당황해서) 이런 말이 있지, '급하다고 갓쓰고 똥누랴?' 또 이런 말도 있어.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친다.' 하긴 나로 말하면 출신이....
그루쉐 쿠츠크...
시몬 아가씨께서 내 뒷조사를 벌써 다 해 놓으셨구먼! 좋아. 난 건강하고, 부양할 사람도 없고, 한 달 봉급이 10냥, 그리고 특별경리하사로서 20냥 따로 받지. 진심으로 청혼하는 바이요.
그루쉐 시몬 샤샤바, 알겠어요.
시몬 (십자가가 달려있는 가는 목걸이를 목에서 풀며) 그루쉐 봐흐나체, 이 십자가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이오. 은으로 된 것이지. 이걸 부디 목에 걸기 바라오.
그루쉐 고마워요. 시몬.
(시몬이 목걸이를 걸어준다)
시몬 이제 말 안장을 채우러 가야겠어. 이해해 주리라 믿소. 아가씨도 세번째 마당으로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소, 꾸중이 심할텐데.
그루쉐 알았어요, 시몬.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시몬 아직도 총독을 지지하는 부대가 있어요. 마님을 그곳까지만 모셔다 드리고 오겠어. 전쟁이 끝나는 대로 돌아오리다. 두 주일이 될 지 삼 주일이 될 지 모르지만, 돌아올 때까지 그 시간이 나의 각시에게 너무나 긴 시간이 아니길 바랄 뿐이요.
그루쉐 시몬 샤샤봐, 난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염려말고 싸움터로 가세요, 군인아저씨.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 잔혹한 싸움터로. 누구나 다 되돌아 올 수는 없는 그 곳으로! 당신이 돌아오시면 저는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푸른 잎으로 덮힌 느릅나무 아래서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푸른 잎이 다 떨어진 그 느릅나무 아래서도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마지막 병사가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당신이 싸움터에서 돌아오시면 내 문 앞에 낯선 사내의 장화따윈 없을 거예요. 내 옆에 비워놓은 당신 베개는 고스란히 놓여 있을 것이고 나의 입술은 그 순결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거예요. 당신이 돌아오시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예전과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시몬 고맙소, 그루쉐 봐흐나체! 그럼 잘 가오! (머릴 깊이 숙여 인사하고, 그루쉐도 역시 맞절을 한다. 그루쉐는 뒤돌아 봄이 없이 급히 뛰어나간다. 궁정문으로부터 집행관이 등장) (거칠게) 마차에 어서 말을 끌어 묶어! 멍청히 서있지 말고, 이 병신같은 놈아! (뻣뻣이 서 있다가 나간다. 궁정문에서 엄청나게 큰 상자를 등에 얹고 하인 둘이 기어나온다. 그 뒤를 하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총독부인이 허겁대며 나오고 하녀 하나는 아기를 안고 뒤따른다)
총독부인 돌보는 것들이 하나도 없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네. 미헬은 어디있지? 애를 그렇게 함부로 안지 말어! 상자는 마차로 가지고 가야지. 총독나리는 어떻게 되셨느냐, 샬봐?!
집행관 (머리를 흔들며) 빨리 떠나셔야 합니다.
총독부인 시내에서는 무슨 소식이라도 있었나?
집행관 없습니다. 아직은 조용한 모양입니다만, 일 초도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저 상자는 마차에 실을 자리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만 고르십시오. (집행관은 급히 나간다)
총독부인 필요한 것만이라고! 어서 상자를 열어라. 꼭 가져가야 될 물건들을 이러줄테니. (상자를 끌어 내려 연다) (이것 저것 비단옷을 가르키며) 그 푸른 놈하고 모피달린 그것도 가져가자. 의사놈들은 어데들 있노? 빌어먹을 두통이 다시 시작되는데, 관자놀이가 뻐겨지기 시작하는구나. 진주로 된 단추달린 그 옷도 집어넣고 ...(그루쉐 들어온다) 뭐 그리 꾸물대고 다니냐, 응?. 얼른 보온 우유병을 가져와! (그루쉐가 뛰어나가 보온병을 들고 들어오고는 총독부인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묵묵히 거든다) (젊은 시녀를 노려보다가) 소매를 찢는구나, 저년이!
젊은 시녀 마님, 고정하세요. 옷은 전혀 손상이 없습니다요.
총독부인 내가 덜미를 잡았기에 망정이지. 오래전부터 네년 행실을 보아왔다. 집행관녀석에게 꼬리칠 생각만 하고! 죽어봐라, 이 화냥년아! (때린다)
집행관 (들어와서) 어서 서두르십시오, 나텔라 아바슈뵐리! 시내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퇴장)
총독부인 (젊은 시녀를 놓아준다) 아이구 맙소사! 그 놈들이 내게도 덤벼들지 않을까? 내게 무슨 죄가 있다고? (모두들 말이 없다. 직접 상자속을 뒤져대기 시작한다) 비단 웃도리는 어데 있지? 도와라 좀! 미헬은 어떠냐? 자고 있나?
보모 예, 마님.
총독부인 그럼 애를 잠시 내려 놓고 침실에 가서 염소 가죽으로 만든 장화를 좀 가지고 오너라. 풀밭을 길을 때 필요하니까. (유모는 어린애를 내려놓고 뛰어간다. 젊은 시녀에게) 뭘 빈둥거리고 있어, 요년! (도망친다) 거기 서 있지 못해. 매질을 당하기 전에! (사이) 짐을 싸놓은 꼴 좀 봐. 성의도 없고 조심성도 없고, 일일이 지시를 해야 한다니까. 이런 때는 하인배들의 본성이 들어나기 마련이지. 마샤! (손으로 지시를 내린다) 처먹기나 할 줄 알지 고마움을 전혀 모르는 것들, 어데 두고 보자구.
집행관 (매우 흥분되어) 나텔라, 빨리 갑시다. 고등법원의 일로 오르멜리아니 판사님을 폭동 일으킨 양탄자 모직공들이 지금 막 목을 매달아 죽였답니다.
총독부인 그건 또 왜? 저 은빛 옷도 가져가야겠다. 천냥짜리라고. 저기 저것도 그리고 모피 옷은 모두 챙겨라. 포도빛 비단옷은 어디 박혀 있지?
집행관 (총독부인을 끌어당기려 든다) 앞동네에서도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장 떠나야 됩니다. (하인 하나가 도망쳐 나간다) 아이는 어데 있죠?
총독부인 (유모를 부른다) 마로! 어서 아기 준비를 끝내라. 어데 쳐박혀 있는 거냐?
집행관 (물러나며) 어쩌면 마차는 버려두고 말을 타고 가야 될 것 같군요. (총독 부인은 옷가지 속을 뒤적여, 가지고 갈 옷더미 위에 집어 던진다. 그랬다가는 다시 뽑아 팽개치고, 소음이 들려온다. 북소리. 하늘이 붉어오기 시작한다)
총독부인 (황급히 옷가지를 쑤셔댄다.) 포도빛 비단옷을 찾을 수가 없네. (어깨를 으쓱흐며 두번째 부인에게) 옷더미를 몽땅 마차로 가지고 가거라. 그런데 마로는 어데 가서 오지 않는 거야. 네년들 모두 미쳤냐? 제일 밑에 있다지 않았어?
집행관 (되돌아 와) 서둘러요, 어서!
총독부인 (둘째 부인에게) 몽땅 마차 안에 집어 넣어!
집행관 마차는 못가지고 가요. 말타고 나는 갈테니까 따라오시던지 마음대로 하세요.
총독부인 마로! 아기를 데려오너라. (둘째 부인에게) 마샤, 찾아 봐! 아냐, 우선 마차에 옷가지를 실어라. 날더러 말타고 가라니. 정신나간 소리지. (몸을 돌리다가 뻘건 하늘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불이야! (뛰쳐 나가고, 집행관이 그 뒤를 따른다. 둘째 부인이 머릴 저으며 옷보따리를 들고 따라 나간다. 궁정문에서 하인배들이 나온다)
주방녀 저기 불타는 곳이 동쪽 궁문인가 봐요.
요리사 모두들 내빼 버렸군. 생활필수품을 실은 마차까지 내팽개치고!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도망친다?!
오양간 지기 그래요, 이곳은 한동안 재수없는 곳이 될 겁니다. (세번째 몸종에게) 슬리카, 담요 몇장 가져 올테니 우리 꺼져 버립시다.
유모 (장화를 들고 궁정문에서 나온다) 마님!
뚱뚱한 여인 마님은 떠나버리셨다우.
유모 그럼 아기는? (아이에게로 달려가 안아 올린다) 아기를 놓고 가다니, 짐승만도 못한 것들! (그루쉐에게 건네주며) 잠깐 안고 있어. (거짓 꾸며서) 마차를 좀 둘러 봐야겠어. (총독 부인을 뒤쫑아 나간다)
그루쉐 주인 나리께서는 어떻게 되셨을까?
오양간 지기 (목따는 시늉을 하며) 싹뚝!
뚱뚱한 여인 (그 시늉을 보고는 기절을 하며) 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바슈뷜리나리께서! 아침미사 때 제단에 올린 피와 우유처럼, 나좀 데려가 줘. 우리는 이제 모두 끝장이야. 죄 많은 우리도 모두 총독 나리처럼 죽어야 한단 말여.
여자3 (달랜다) 진정하세요, 니나 아줌마. 아줌마는 누가 모시고 갈거예요. 아주머니야 뭐 잘못한 게 있나요.
뚱뚱한 여인 (끌려 나가며) 아이고 하나님! 빨리 빨리, 그 놈들이 오기 전에 어서! 곧 그 놈들이 온다고.
여자3 마님보다도 니나 아줌마가 더 마음 아파하시는군. 그것들은 우는 것 까지도 남을 시킨다니까. (그루쉐가 안고 있는 어린 것을 보며) 아이를! 그걸 어쩌려고 그래?
그루쉐 이 애를 놓고 갔네요.
여자3 맞바람이 분다고 야단법석을 떨더니 그런 미헬을 그 년이 놓고 가?! (하인배들은 어린 것 주위로 모여든다)
그루쉐 눈을 뜨네요!
오양간 지기 차차리 애를 놓고 가! 저 애를 데리고 있다가 무슨 변을 당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해. 짐을 가져 올테니 기다려들. (궁으로 사라진다)
주방녀 말뚝이 말이 맞아. 그놈들이 싸움을 시작하게 되면 일가 친척 들끼리 서로 죽인다고. 일용품을 가져 올께. (모두가 떠나고 두 여자와 아기를 안고 있는 그루쉐만이 그곳에 여전히 서 있다)
여자3 애를 놓아 버리라구. 그렇게 못 알아들어?
그루쉐 유모가 잠깐만 아이를 데리고 있으랬걸랑요.
주방녀 그 년은 안 돌아와, 이 멍청아!
여자3 아이에게서 손을 떼.
주방녀 군인들은 총독부인의 뒤를 쫓기 보다는 이 아이의 뒤를 쫓게 될 거야. 이 아이는 대를 이을 애라고, 자네는 착한 처녀아이지만 현명하진 못해. 내 말은 이애가 문둥병을 앓는다고 해도 상속자라는 것보다는 덜 위험해. 그러니 도망칠 궁리나 하라고. (외양간 지기가 짐더미들을 갖고 돌아와서는 여자들에게 나눠준다. 그루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루쉐 (완강하게) 이 아이는 문둥이가 아니에요. 이 아이는 보통아이처럼 사람을 쳐다봐요.
주방녀 그러면 자네가 아이를 쳐다보지 않으면 될 거아냐. 너와 같이 어리석은 여자에게 사람들은 짐을 지우게 하는 거야. 자네가 다리가 길다고 야채를 가져 오라고 하면 그대로 하지. 소달구지를 갖고 있으니까 자네를 태워줄 수 있어. 하지만 서둘러. 맙소사, 벌써 온동네가 불타고 있네!
여자3 전혀 짐을 싸지 않았어? 이 봐, 무장기병들이 병영에서 오는데는 순식간이야. (두 여자와 외양간 지기는 떠난다)
그루쉐 나도 갈래요. (그루쉐는 아이를 내려놓고는 잠시동안 아이를 들여다본다. 그리곤 근처에 흩어져 있는 가방에서 옷가지를 꺼내 여전히 자고 있는 아이에게 덮어준다. 그러고 나서 자기 짐을 가지러 궁으로 들어간다. 말발굽소리와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술취한 무장기병들과 함께 살찐 영주가 들어온다. 한 병사가 창 끝에 총독의 머리를 꽂은 채 들고 있다)
살찐 영주 이리, 한 가운데로! (군인들 중 한 명이 다른 놈의 등 위로 올라가서 머리를 받아 궁정문 위에 매어 달아 보인다) 거기는 가운데가 아니야, 좀 더 오른쪽으로. 좋아. 이 놈들아 난 한다면 철저히 하는 놈이야. (그 사이 군인은 망치로 머리카락에 못질을 해서 고정시킨다) 오늘 아침에 교회문 앞에서 내가 게오르기 아바슈뷜리에게 말했었지. : '난 맑은 하늘을 좋아하지요.' 그러나 사실은 청천벽력을 더 좋아하는 거라구. 그럼, 그렇고 말고. 유감스럽게도 고것들이 어린 것을 데리고 내뺏군. 난 그 녀석을 꼭 찾아야 해. 온 그루지니엔지역을 뒤져서라도 그 녀석을 찾아와! 천냥 상금이다! (주위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그루쉐가 교회문을 향해간다. 살찐 영주는 무장기병들을 데리고 나간다. 다시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그루쉐는 보따리를 들고 궁정문을 향해 다가간다. 그곳에 거의 다 가서는 아이가 아직도 거기 있는지 보기 위해 둘러본다. 이때 가수의 노래가 시작된다. 그루쉐는 굳은 듯이 서 있다)
가수 문과 문 사이에 막 섰을 때 하녀는 들었다. 아니 조용히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어린것이 자기를 부르는, 흐느끼는 소리가 아닌, 아주 또렷또렷한 소리를, '아줌마, 도와주세요!' 하여간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계속해서, 흐느끼지 않고, 또렷또렷한 소리로 말하기를, '아줌마, 아세요?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듣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은 귀가 멀어서 사랑하는 연인들의 속삭임을 듣지 못해요. 더구나 이른 아침에 종달새 소리도 듣지 못하고 힘에 겨운 농부들이 기도할 때 스며나는 탄식소리도 듣지 못하는 법이에요.' 이런 소리를 들으며 어린것을 또 한번 둘러 보려고 하녀는 다시 돌아 섰다네. (그루쉐는 몇 발자국 아이에게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들여다 본다) 잠시라도 어린 것 옆에 앉아 있으려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올 때까지 만이라도 이 아이의 엄마가 아니면 어느 누군가라도 올 때까지. (아이를 마주보고 아기상자에 기댄 채 앉는다) 그때까지만은 남아 있으려고, 온 시내를 휩싸고 있는 위험은 너무 컸기에 화염과 고통으로 뒤덮힌 위험은! (조명이 점점 어두워진다. 저녁이 되고 밤이 된 것처럼. 그루쉐는 궁으로 들어가 등과 우유를 가져와서는 아이에게 우유를 먹인다) (큰 소리로) 선으로 향한 유혹은 얼마나 끔찍한가! (그루쉐는 이제 아이 곁에서 잔뜩 주의깊은 눈으로 밤을 지샌다. 작은 등불을 켜서 아이를 비추는가 하면 비단옷으로 아이를 따뜻하게 감싸주기도 한다. 간혹 귀를 기울여 살피곤 하면서 누군가 접근하는 사람이 있나 돌아본다) 하녀는 오랫동안 아이 곁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 되고, 밤이 되고, 아침 먼동이 틀 때 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서 그렇게 오랫동안 보았다. 조용한 숨소리를, 움켜쥔 작은 손을! 아침나절이 될 때 유혹은 너무 강해져 하녀는 일어서 허리를 굽히고는, 한숨을 쉬며 아이를 안고 그곳을 떠났다네! (그루쉐는 가수가 말하는 대로 한다) 몰래 훔친 물건인양 어린 것을 품에 안고, 하녀는 도둑처럼 그 곳을 살그머니 빠져 나갔다.
3. 북쪽 산악지대로의 도주
가수 그루쉐 봐흐나체가 도심을 떠나 그루지니엔의 넓은 국도를 지나 북쪽 산악지대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노래를 불렀다, 우유를 샀다네.
악사 이런 어진 여인이 피에 굶주린 자들과 덫을 놓는 자들의 손아귀로 부터 어찌 벗어날 것인가? 인적이 드문 험한 산길을 힘겹게 걸어서 그루지니엔의 국도를 지나며 노래를 불렀네, 우유를 샀다네. (그루쉐 봐흐나체는 걷는다. 등에는 아이가 든 자루 주머니를 메고, 한 손에는 보따리를, 다른 한 손에는 커다란 지팡이를 집고 있다)
그루쉐 (노래한다)
-노래시작-
장군 네 명이 이란으로 갔지.
첫째는 전쟁을 하지 않았고
둘째는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셋째에게는 날씨가 너무 나빴고
넷째에게는 병사들이 제대로 싸워주질 않았다네.
장군 네 명이 떠났지만
도착한 장군은 없었다네.
소쏘 로바킷체가
이란으로 진격했지.
소쏘는 힘겨운 싸움을 이끌었고
재빠른 승리를 쟁취했다.
날씨도 아주 좋았고,
부하 군인들은 정말 잘도 쳐부셨어.
소쏘 로바킷체는
우리의 영웅이지.
[노래끝]
(오두막집이 나타난다)
그루쉐 (아이에게) 점심먹을 시간이다. 자, 풀 숲에 얌전히 앉아 있어 보자꾸나. 착한 그루쉐아줌마가 우유 한 통을 얻어 올테니까. (그루쉐는 어린애를 바닥에 앉혀 놓고는 오두막집의 문을 두드린다. 늙은 농부가 문을 연다) 우유 한 통 구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옥수수 떡도요, 할아버지?
노인 우유라고? 우유같은 건 없어. 군인 양반들이 도시서 와서는 우리 염소들을 몽땅 가지고 갔소. 우유가 정 필요하다면 군인들에게나 가 보슈.
그루쉐 하지만 아기 줄 우유 한 통이야 여유가 있겠지요, 할아버지?
노인 자선사업하란 말여, 뭐야?
그루쉐 누가 공짜라고 했어요? (지갑을 꺼내며) 영주들 처럼 지불할 거예요. 흥청망청 물쓰듯 하는 그런 사람들처럼 말예요. (늙은 농부가 웅얼거리며 우유를 가져온다.) 그런데, 한 통에 얼마죠?
노인 세냥! 우유가 비싸졌어.
그루쉐 세냥이라뇨? 한 모금도 안되는데? (늙은 농부는 아무 소리 않고 사정없이 문을 닫아 버린다.) 미헬, 들었니? 세 냥이래! 우리는 그 정도 능력은 없어. (돌아가 앉아서는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 자, 한 번 더 해 보자. 빨아봐, 세 냥을 생각하면서! 젖이 나올 리는 없지만, 나온다고 생각해 봐, 그러면 한 결 낫지. (아이가 빨지 않으니까 머릴 저으면서 일어서서 문으로 돌아가 서는 다시 두들긴다.) 할아버지! 문 좀 열어 주세요. 돈을 낼께요. (낮은 소리로) 벼락맞을 늙은이 같으니라구! (늙은 농부가 다시 문을 연다) 반 냥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었지만 이 아이가 먹을 게 필요해서요. 한 냥이면 되겠죠?
노인 두 냥.
그루쉐 문은 또 닫지 말아요. (한참동안 보따리를 뒤진다) 여기 있어요, 두 냥이에요. 하지만 우유를 잘 막아주셔야 해요. 우린 아직 갈 길이 멀거든요. 정말 지겹고 끔찍해요.
노인 우유가 필요하면 군인들을 때려 죽여!
그루쉐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며) 갈증을 풀기에는 너무 비싸구나. 마셔라 미헬. 일주일 임금의 반이란다. 여기 사람들은 우리가 돈을 밑구멍으로 번다고 여기나 봐. 이 봐, 미헬. 너 때문에 난 짐이 너무 무겁단다. (아이를 감싼 비단옷을 살핀다) 천 냥 짜리 외투는 있어도 우유 살 돈은 한 푼 없구나. (시선을 뒤로 돌린다) 저기 마침 부유한 피난민을 실은 마차가 있구나. 얻어 탈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만, 한 번 가보자. (간이 숙박소 앞. 비단 외투를 입고 그루쉐가 두 귀부인에게로 간다. 아이는 팔에 안고서)
그루쉐 저, 부인들께서도 이 곳에서 하룻밤 묵으시려고 하시나요! 온통다 만원이고 타도 갈 마차도 없으니 정말 끔찍하군요. 우리 마부 녀석이 그냥 되돌아가고 말았어요. 그래서 거반 오리나 걸어서 왔지 뭐에요. 그것도 맨발로! 내 페르시아산 신발 - 거 있잖아요. 왜, 굽 높은 거! 그런데 어째 여긴 아무도 없죠?
늙은 부인 주인이 꾸물대는군요. 서울에서 난리가 생긴 이래 온 나라가 예의범절이고 뭐고가 이젠 다 없어요. (점잖은 주인이 아주 보기 좋은 긴 수염을 한 모습으로 들어오고, 그 뒤를 머슴이 따라온다.)
주인 이 늙은이를 용서하시지요. 부인들을 기다리게 했군요. 내 손자 녀석이 언덕배기에 활짝 만발한 복사꽃 나무를 보여 준다기에, 그만. 옥수수밭 너머 쪽이죠. 그곳에 과실수를 재배합니다. 벚나무 몇 그루도 있고요. 과수원 서쪽 편은 (가리킨다) 바닥에 돌이 많아요. 그래서 농부들이 양이나 치고요. 부인들께서는 만발한 복숭아 꽃을 한 번 보십시오. 분홍 천지는 정말 일품입니다요.
늙은 부인 주위환경이 아주 풍요롭군요.
주인 하나님의 은총이지요. 저 아래 남쪽은 꽃이 만발하겠죠? 남쪽에서 오신 분들이 틀림없습죠?
젊은 여자 사실 경치같은데 신경쓸 겨를이 없었어요.
주인 (정중하게) 먼지를 보니 이해하겠습니다. 이곳으로 오는 큰 길을 여유있게 걸으면 기가 막힙니다. 물론 서두르실 필요가 없을 때 말 이지요.
늙은 부인 목도리를 둘러라, 얘야. 이 곳 저녁바람이 좀 차구나.
주인 부인들께선 장가타우의 얼음산을 넘어 내려 오셨군요.
그루쉐 그래요. 제 아들이 감기에 걸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네요.
늙은 부인 제법 방이 있는 간이 숙소구만요! 들어가도 되겠지요?
주인 부인들께선 방을 원하시는구만요? 하지만 이 간이 숙소는 모두 만원입니다. 부인, 그리고 하인 놈들도 도망을 쳤거든요. 유감스럽습니다만 더 이상 손님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소개장을 가지고 오셨다해도 어렵습니다.
젊은 여자 그렇지만 이런 길바닥에서 밤을 지샐 수는 없다구요.
늙은 부인 (냉냉하게) 얼마지요?
주인 아! 부인들께서도 이해를 하실 겁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여관이란 곳이 많은 피난민들이 방을 찾는 바람에, 물론 지체높고 귀한 분들입니다만 관청에서 감시를 받는 사람들이라 특별히 조심해야만 하거든요. 그래서....
늙은 부인 이보세요 주인장, 우린 피난민들이 아니에요. 우린 산 중에 있는 여름별장을 찾아가는 길이란 말예요. 환대를 요구하는 식의 그런 생각은 없어요, 전혀. 물론 어느 때 보다도 그런 도움이 필요하긴 하지만.
주인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이며) 지당한 말씀이지요.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작은 방이 하나 있는데 부인들 마음에 드실는지 어떨지. 일 인당 예순 냥은 받아야 합니다. 부인들은 일행이시죠?
그루쉐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어쨌든 간에 저도 머물 곳이 필요하거든요.
젊은 여자 예순 냥이라니! 지독한 날강도군.
주인 (차갑게) 부인, 난 추호도 날강도가 되고 싶지는 않소. 그럼 .... (들어가려고 몸을 돌린다)
늙은 부인 우리가 날강도구 뭐구 따질 겨를이 있냐? 들어가자. (안으로 들어간다. 머슴이 뒤를 따른다)
젊은 여자 (믿어지지 않는듯이) 방 하나에 백 팔십 냥이라니! (그루쉐에게 눈을 돌려)하지만 애때문에 안돼요! 울기라도 하면 어쩌지요?
주인 방 값은 백 팔십 냥입니다. 두 사람이건 세 사람이건 간에.
젊은 여자 (그 말을 듣고 그루쉐에게 태도를 바꿔) 그렇다고 길바닥에서 지내도록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부인, 자 들어 갑시다. (이들은 간이숙소로 들어간다. 무대 다른 쪽에서 짐을 몇 개든 채 머슴이 뒷편으로 부터 나온다. 그 뒤를 늙은 부인이 따르고 그리고 젊은 여자와 애를 안은 그루쉐가 들어온다) 백 팔십 냥이라고! 우리 이고르가 집으로 실려온 이래 이 정도로 흥분한 적은 없었어요.
늙은 부인 또 이고르 이야기냐?
젊은 여자 엄밀히 말해 우린 네 명이에요. 아이도 사람은 사람이니까요. 안그래요? (그루쉐에게) 최소한 반은 지불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루쉐 그건 불가능해요. 이봐요, 내가 급히 떠나는 바람에 집행관이 내게 넉넉하게 돈을 챙겨주는 것을 까먹었단 말예요.
늙은 부인 예순 냥도 없나요?
그루쉐 그건 지불하겠어요.
하인 침대같은 것은 없시다. 덮을 거랑 푸대는 저기 있소. 손수 각자들 알아서 잘 정돈해
보시구려. 다른 사람들처럼 땅구덩이 속에서 자지않는 것 만으로두 기쁘게 여기슈. (나간다)
젊은 여자 들었지요? 즉시 주인을 만나야겠어. 저 놈은 채찍으로 흠뻑 맞아야 된다구요.
늙은 부인 네 남편처럼?
젊은 여자 너무 하시는군요. (운다)
늙은 부인 어떻게 침대 비슷한 거라도 만든다?
그루쉐 제가 해보죠. (그루쉐는 아이를 내려놓는다.) 일을 쉽게 처리하려면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 도와야 겠지요. 당신들은 아직 마차가 있더군요. (바닥을 쓴다) 저는 정말 놀랐어요. 제 남편이 점심 전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여보, 아나스타시아 카타리노브시카! 잠간 눕구료. 당신은 걸핏하면 편두통이 생기지 않소?! (푸대들을 끌고 와서 침대를 만든다. 여자들이 일하고 있는 그루쉐를 주시한다) '게오르기' 하고 제가 총독에게 말했지요. '식사에 60명이나 손님들을 초대앴는데 제가 누워서 쉴순 없어요. 더구나 하녀들만 믿을 수도 없고 그리고 미헬 게오르뷩츠는 나 없이는 먹지도 않아요,' (미헬에게) 봐라, 미헬, 모든 게 잘 되었지, 내가 뭐랬니! (그루쉐는 두 여자가 자기를 이상하게 살피며 속살대는 것을 순간적으로 알아 차린다.) 자, 어쨌든 맨바닥보다 나을 거예요. 담요 두 장을 포개서 깔아 놨거든요.
늙은 부인 (거만스럽게) 그런데 당신 침대 만드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군. 부인, 손 좀 보여 주시지.
그루쉐 (놀라며) 무슨 말씀이세요?
젊은 여자 손 좀 내놔 보라니까! (그루쉐는 자기 손을 부인들에게 내민다)
젊은 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거칠어! 하녀예요!
늙은 부인 (문으로 가서 밖으로 소리친다) 주인양반!
젊은 여자 이 사기꾼, 들통이 났구나. 무슨 죄를 지었는지 불어, 이 것아.
그루쉐 (당황하며) 난 아무 죄도 짓지 않았어요. 난 혹시 마차나 함께 타고 갈까 하고 생각했지요. 한 구간이라도 말이에요. 제발 소란 피우지 마세요, 알아서 갈테니까.
젊은 여자 (늙은 부인이 계속 주인을 부르는 동안) 그럼, 가야지. 하지만 경찰하고 말야, 꼼짝말고 여기있어, 이 년!
그루쉐 하지만 난 예순 냥을 지불하려 했어요. 여기 보세요. (돈 주머니를 보여준다) 자, 보세요. 여기 돈이 있어요. 10냥 짜리 4개, 5냥짜리 1개, 아니지 이것도 10냥자리군. 합쳐서 예순냥이에요. 아기를 마차에 태우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 뿐이라구요.
젊은 여자 흥, 마차에 타려 했다구? 이제야 실토를 하는군.
그루쉐 마님,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 미천한 몸입니다. 제발 경찰은 부르지 마세요. 하지만 이 아이는 귀한 집 아이에요. 이 옷을 보세요, 이 애는 도망중이에요, 당신들처럼.
젊은 여자 귀한 집 아이라고? 그런 소리를 누군 못해. 아버지가 황태자시고, 그렇지?
그루쉐 (늙은 부인에게로 사납게) 소리 좀 치지 말아요, 대체 당신들은 인정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나요?
젊은 여자 (늙은 부인에게) 조심해요, 무슨 짓을 할 지 몰라요. 저 년은 위험해요! 사람살려! 사람 죽인다!
하인 (들어오면서) 대체 무슨 일이슈?
늙은 부인 저 년이 이 곳으로 신분을 감추고 들어왔오, 귀부인 행세를 하면서. 도둑년이 틀림없어.
젊은 여자 게다가 위험한 년이야. 우릴 죽이려 했어. 경찰이 처리할 문제라고. 아이고, 또 편두통이 일어나네.
하인 요즘 경찰같은 것이 어데 있소. (그루쉐에게) 물건들을 챙겨, 아가씨. 그리고 잽싸게 꺼져버려.
그루쉐 (화가 나서 아이를 끌어 안고)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 군인들이 네년들 머리통을 벽에다 박아댈 거다.
하인 (그루쉐를 밖으로 밀면서) 입닥쳐, 곧 주인영감이 올지 몰라. 그 노인네는 농담같은 건 몰라.
늙은 부인 (젊은 여자에게) 잘 살펴봐, 저 것이 벌써 무얼 훔쳤는지도 모른다! (오른쪽에서 여자들은 부리나케 뭔가 도둑맞은 게 있나, 살펴 보고 그루세와 하인은 왼쪽에서 문을 나선다.)
하인 그러게 사람을 보고 믿어야 되는 법이여. 앞으로는 사람을 사귀기 전에 먼저 사람부터 잘 살펴 보라구.
그루쉐 자기들과 같은 신분의 사람이면 좀 점잖게 대해 줄줄 알고 그만.
하인 저런 사람들은 그런 생각 안하는 법이야. 저런 게으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을 흉내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살아 가면서 한 번이라도 막일을 해 보았거나, 허드랫일을 했다고 보이면 저 것들은 가만 있질 않지. 잠깐 기다려, 옥수수빵하고 사과 몇 개 가지고 올께.
그루쉐 괜찮아요.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가는 게 낫겠어요. 그리고 밤길을 계속 가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겠지요. (떠나간다)
하인 (그루쉐 쪽으로 낮게 소리친다) 다음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계속 가라구! (그루쉐는 사라진다)
가수 그루쉐 봐흐나체가 북쪽으로 가고 있을 때 캇츠베키영주의 기병들은 이 여인의 뒤를 쫓는다.
악사들 어떻게 맨발의 아녀자가 기갑병의 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피에 굶주린 사냥개들, 덫을 놓는 그런 자들로 부터! 어두운 밤에도 그들은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추적자들은 피곤을 모르는 법. 살육자들은 잠도 오래 자지 않는 법. (두 무장기병이 큰길을 터버터벅 걷는다)
병장 임마, 넌 별 볼일 없는 놈이야. 가슴이 텅 비었기 때문이다, 이거야. 고참정도 되면 척 보고도 삼십리라고. 그저께 내가 그 뚱보년 데리고 재미좀 볼 때 시키는 대로 그년 남편을 네 놈이 붙들고 있었잖아, 그리고 그 놈의 뱃대기를 걷어 차기도 했지. 헌데 훌륭한 졸병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했느냐 아니면 마지못해 시키는대로 했느냐 이거야! 네놈 속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었어, 임마. 네놈은 속이 텅빈 허수아비거나 때려야 소리나는 종대가리야. 진급하기는 틀렸다구. (얼마간 아무 말없이 걷는다) 요리조리 요령 피우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란 말야. 쩔뚝 거리지 말엇! 내가 노새 팔아먹었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워낙 값을 잘 쳐준다는데 할 수 없었다고. 쩔뚝거리면서 은근히 걷기 싫다는 암시를 주시겠다는 거지. 나는 네놈을 잘 안다구. 그래봐야 이익될 게 없어. 손해면 손해지. 노래나 불러!
두 무장기병 (노래한다.)
[노래시작] 슬픔에 잠겨 정해진 길을 따라
싸움터로 향하네
사랑하는 각시를 집에 두고서
친구들이 각시의 순결을 지켜주려나,
싸움터에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병장 더 크게!
두 무장기병 교회당 뒷뜰에 묻히게 되면
사랑하는 각시가 한 줌의 흙을 뿌리며
말하리라.
여기 내게 오곤하던 그이의 두 발이 고이 쉬네요.
나를 감싸주곤 하던 그이의 두 팔도.
[노래 끝]
(말없이 얼마를 또 걷는다)
병장 훌륭한 군인은 마음과 몸이 늘 긴장이 되어 있어야하는 거여. 상관을 위해서 죽음까지도 불사하지, 고참께서는 언제나 이 몸에게 인정하시는 눈빛을 내리시나 오매불망 기다리는 거야. 그보다 더 흐뭇한 보상은 없다고 감지덕지하면서, 네 놈은 허지만 그런 눈빛을 받지도 못하고, 더구나 네 놈은 뒈질 거야. 빌어먹을, 이런 멍청한 놈을 데리고 어떻게 총독의 아들놈을 찾아낸다? 환장하겠군. (다시 걷는다)
가수 그루쉐 봐흐나체가 씨라강가에 이르렀을 때 도주의 길은 그녀에게 너무나 힘들었고 그 가련한 어린것은 무겁기만 하였다.
악사들 옥수수 밭 속으로 스며드는 불그레한 아침 햇살에도 밤을 지새운 이들에게는 춥기만 하구나.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는 농가에서 그곳에서 들리는 조반짓는 즐거운 소리도, 도망치는 이 여인에게는 위협으로만 들린다. 어린 것을 힘겨웁게 끌고온 여인에게는 이제는 어린 것이 너무나 무거운 짐일뿐! (그루쉐는 농가 마당 앞에 선다)
그루쉐 속옷을 또 지려 놨구나. 기저귀가 없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니. 미헬, 우리는 헤어져야 돼. 이 정도면 시내에서 꽤 멀리 떨어진 편야. 군인들이 이곳까지 따라와서 너를 해치진 못 할거야. 농부아줌마는 친절할 거다. 우유 냄새로 보아 젖맛도 좋을 것 같구나. 그럼 잘 살아, 미헬. 내등에 달라 붙어 날더러 빨리 가라는듯 밤새껏 발버둥질 치던 일은 잊어 버릴께. 너도 잊어 내 빈 젖꼭지 말야. 내 마음 만이라도 알아주렴. 정말 너랑 늘 같이 있고 싶어, 네코는 정말 너무 귀엽거든. 그래도 더는 안돼, 풀밭에서 네가 걸음마하는 것을 정말 보고싶단다. 그때는 오줌 싸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돌아가야돼. 아줌마 그분이 곧 돌아 오실거야. 군인아저씨지, 그 분이 와서 아줌마를 찾지 못하면? 미헬, 너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겠지. (한 뚱뚱한 아낙네가 우유통을 들고 문으로 간다. 그루쉐는 아낙네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가렸다가 집 쪽으로 조심스럽게 간다. 문으로 살금살금 다가가서는 아이를 문지방 앞에 내려 놓는다. 그리고 나서 나무 뒤에 숨어서 기다린다. 아낙네가 다시 문으로 나오다가 포대기 뭉치를 발견한다)
아낙네 에고머니나! 대체 여기 뭐가 있지? 여보!
농부 (나오면서) 무슨 일이야? 아침도 제대로 못 먹게스리.
아낙네 (아이에게) 네 어미는 어디 있냐? 엄마가 없어? 사내 아이같은데 그리고 값비싼 포대기네. 귀한 집 아이인가 봐요. 아이를 마구 문 앞에 버리다니. 원 이놈의 세상!
농부 우리가 즈그들 멕여 살린다고 생각해?! 어림없지. 아이를 마을 목사에게나 갖다줘, 잔말말고.
아낙네 목사님이 아이를 어떻게 해요. 애한테는 엄마가 필요하다구요. 이런! 이놈이 눈을 뜨네. 우리가 이 아이를 키울 수도 있지 않겠어요?
농부 (큰소리로) 안돼!
아낙네 내가 아이를 의자옆 한 구석에 잠자리를 마련해주면 될 거예요. 광주리 하나만 갖다 놓으면 되거든요. 밭에 갈 때는 데리고 가고요. 봐요, 아이가 웃잖아요? 여보, 우린 거처할 곳도 있으니 아이를 키울 수 있어요. 더 이상 잔소리 말아요. (아낙네는 아이를 안고 들어가고, 농부가 따지면서 따라 들어간다. 그루쉐가 나무 뒤에서 모습을 나타내며 웃는다. 그리고 급히 오던 길로 되돌아 떠난다)
가수 왜 그리 즐거워하는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아가씨?
악사들 가엾은 어린 것이 새 부모에게 미소를 던져서, 그래서 즐거워요. 사랑하던 그 아이에게서 벗어나서, 그래서 기쁘고요.
가수 그런데 슬픈 이유는?
악사 허전하게 혼자가니 슬프군요. 마치 강도 당한 사람처럼 온 재산을 빼앗긴 사람처럼!
(그루쉐는 처음 얼마 동안을 걷다가 두명의 무장기병을 만난다. 이들은 창을 들이댄다)
병장 처녀씨, 우리는 군인 아저씨야. 어디서 오시는 길인가? 언제 출발했고, 적과 불법적으로 내통하고 있는 것 아냐? 적은 지금 어디 있어? 저 너머에서 적은 어떤 움직임을 보이고 있나? 언덕 동향은, 계곡은 상황이 어떻지? 그놈들 사기는 어느 정도인가? (그루쉐는 놀라 서 있다)
그루쉐 그 사람들은 철통 같아요. 당신들은 돌아가는게 좋을 거예요.
병장 필요하면 삼십육계야 식은 죽 먹기지. 그런데 아가씨 왜 그렇게 창끝을 쳐다 보시지? '군인은 전장에서 한 순간도 자기 창을 손에서 떼어 놓지 않는다.' 이것이 군율이다. 잘 알아둬 이 머저리. 좋아, 아가씨는 어디로 가시려는 거지?
그루쉐 제 약혼자에게로요, 군인 아저씨. 시몬 샤샤바라고 늑카의 궁정 근위병이에요. 그이에게 내가 편지를 하면, 그이가 당신들 뼈를 모두 분질러 버릴 거예요.
병장 시몬 사샤바, 물론 그 녀석을 알고 있지. 그놈이 내게 열쇠를 주었거든. 아가씨를 가끔 살펴봐 달라고 말야, 머저리, 우리가 마음에 안드시나봐. 우리의 순수한 의도를 밝혀야 되겠다. 아가씨, 원래 나는 진지한 놈이에요. 얼핏보면 농담으로만 들리지만 그속에는 진지함이 숨어있다 이거요. 이제 아가씨 한테서 어린애를 하나 얻어내야 겠소.
(그루쉐는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병장 머저라, 이제야 우리말을 알아들으신 모양이다. 저런, 그 비명 소리 한번 감칠 맛이 있는데. '장교님, 화로에서 국수부터 꺼내 놓고요. 찢어진 속옷을 우선 갈아 입고요, 소령님!' 농담도 집어치우고 창검도 집어치웁시다, 아가씨. 이 지역에서 우리는 어린아이를 하나 찾고 있소. 도시에서 도망쳐서 이곳에 나타났다는데 그런 아이에 대해 들은 적이 있나? 값비싼 옷을 입은 귀티 나는 아이 말야.
그루쉐 아니요. 전혀 듣지 못했어요.
가수 뛰어라, 친절한 여인아. 죽음을 쫓는 자들이 다가온다. 가련한 어린 것을 도와라, 가련한 여인아! 그래서 여인은 뛴다. (그루쉐는 갑자기 몸을 돌려 혼비백산한 채 되돌아서 뛴다. 무장기병들이 서로 쳐다보고는 욕질하며 그 뒤를 따른다)
악사들 참혹한 그런 시대에도 친절한 사람들은 사는 법.
(방 안에서는 뚱뚱한 아낙네가 아이가 담긴 광주리 위로 머리를 숙여 들여다 본다. 그때 그루쉐 봐흐나체가 쏜살같이 들어온다)
그루쉐 아이를 빨리 숨겨요. 무장 기병들이 와요. 내가 그애를 문 앞에 버렸었어요. 하지만 그 애는 내 애가 아녜요. 귀한 집 아이예요.
아낙네 누가 온다고. 무슨 기병들이?
그루쉐 묻지 좀 말아요. 무장기병들이 저 애를 찾으러 온다구요.
아낙네 우리집에는 그놈들이 찾을 것은 없어. 하지만 처녀하고는 할 말이 좀 있을 것 같구만.
그루쉐 귀티나는 옷을 벗겨요. 그옷 때문에 들통이 나요.
아낙네 옷을 입혀라, 벗겨라. 이 집에선 내 맘대로야, 이 방에서 잔소리 하지 마라. 왜 아이를 길에다 버렸어? 그건 죄악이에요.
그루쉐 (밖을 내다보며) 군인들이 나무 뒤에까지 다가 왔어. 내가 공연히 뛰어 도망왔나봐, 군인들을 오히려 자극시켰어. 어쩌면 좋지?
아낙네 (역시 밖을 내다보더니 갑작스레 크게 놀랜다) 오 세상에, 무장 기병들이야.
그루쉐 이 아이를 잡으러 오는 거예요.
아낙네 저들이 들어오면 어쩌우?
그루쉐 아주머니께서 절대로 아이를 주면 안돼요. 아주머니 애라고 하세요.
아낙네 알았수.
그루쉐 군인들이 이 아이를 창으로 찔러 죽일 거예요. 아줌마가 아이를 내준다면 말예요.
아낙네 하지만 그놈들이 아이를 달라면? 집에 추수절에 쓸 은돈이 있는데.
그루쉐 아이를 주어 버리면, 애를 창으로 찔러 죽일 거에요. 여기 아줌마 집에서요. 그러니 아줌마 애라고 말 하세요.
아낙네 그래요. 하지만 그놈들이 믿지 않으면?
그루쉐 자신있게 말하면...
아낙네 그놈들이 우리집을 몽땅 불을 질러 버릴텐데.
그루쉐 그러니까 아줌마 애라고 말해야 돼요. 애 이름은 미헬이에요. 이름을 괜히 말했나봐. (아낙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루쉐 머리를 그렇게 좀 끄덕이지 마세요. 그리고 떨지 마세요. 그놈들이 눈치채요.
아낙네 그래요.
그루쉐 '그래요'하는 소리는 더이상 듣지 못하겠어요. (아낙네를 흔든다) 아주머닌 애가 없어요?
아낙네 (중얼거리듯) 전쟁에 나갔지.
그루쉐 그렇담 어쩌면 아드님도 저런 무장기병이 됐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아드님이 아이들을 찔러죽여야 되겠어요? 그럴 경우 아주머니는 아드님을 혼줄이 나게 호통을 치시겠죠? '에미 앞에서 어이 창을 마구 휘두르느냐, 에미가 너를 그렇게 키웠단 말이냐, 에미에게 할 말이 있으면 목이나 냉큼 닦고 오지 못하겠니!'
아낙네 그야 그렇지, 그놈이 내게 그럴 순 없지.
그루쉐 약속해 주세요. 군인들에게 저 애가 아주머니 애라고 말하겠다구요.
아낙네 그래요.
그루쉐 왔어요. (문을 두드린다. 여자들은 대답을 안한다. 무장기병들이 들어온다. 아낙이 깊게 절한다)
병장 오 저기 있구만, 네놈한테 뭐랬어? 내 코말이야. 저 여자 냄새 맡는 거. 이봐요, 아가씨 당신한테 묻겠는데 왜 도망 거지? 아가씨 데리고 내가 재미라도 보려 든다고 생각을 했단 말이지. 틀림없이 무엇인가 수상한 그런 짓이 있어, 털어놔 봐!
그루쉐 (그사이 농부부인은 계속해서 머리를 굽실거린다) 화덕에 우유를 올려놨었지요. 그것이 생각났을 뿐이에요.
병장 내가 음흉스럽게 너를 훑어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는 잘 알고도 남아. 우리 둘이 벌일 수도 있는 일을 내가 마음먹고 있다고 말야. 그러니까 징그러운 눈빛으로, 내말 알아듣겠어?
그루쉐 나는 쳐다 보지 않았어요.
병장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단 말이지, 그렇지? 좀 솔직해 보시지 그래. 내가 그런 개같은 놈일 수도 있다 이거지. 그럼 좋아, 솔직하게 보여주마. 우리 둘만 있으면 여러 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아낙에게) 아주머닌 마당에 할 일이 없수? 닭들 먹이를 좀 준다던지.
농부부인 (갑자기 무릎을 꿇으면서) 군인 나으리, 전 아무것도 몰랐어요. 내집에 불일랑 지르지 마세요.
병장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농부부인 저애하고는 아무 상관없어요. 저것이 내집 문앞에다 애를 버렸습니다요. 맹세해요.
병장 (아이를 보면서 휘파람을 분다) 아, 광주리 속에 뭔가 작은 것이 있는데 그래. 머저라, 천냥 냄새가 난다. 노파를 밖으로 끌어 내고 꽉 붙들고 있어. 심문을 좀 해보셔야 되겠구만. (농부 부인이 졸병에 의해 말없이 밖으로 끌려 나간다)
병장 그러니까 내게서 하나 얻어 가지려고 하던 아이가 벌써 여기있단 말씀이지.
(병장은 광주리 쪽으로 바싹 다가간다)
그루쉐 장교님, 그애는 제 아이에요. 당신들이 찾는 아이가 아니란 말예요.
병장 애를 좀 살펴 봐야겠다. (광주리 위로 머리를 숙인다)
(그루쉐가 절망스럽게 둘러본다)
그루쉐 내 아이예요, 내 아이란 말예요.
병장 귀티나는 옷이야. (그루쉐가 아이를 뺏기 위해서 병장에게 거칠게 달라 붙는다. 병장은 그루쉐를 밀어 붙이고는 다시 광주리 위로 머리를 숙인다. 그루쉐는 절망에 빠져 주변을 살피다 커다란 나무토막을 본다. 절망 속에 그것을 집어들고는 병장의 머리통을 후려 갈긴다. 병장은 쓰러진다. 그루쉐는 재빨리 아이를 끌어 안고는 밖으로 뛴다)
가수 무장기병들을 피해 도주하며 22여일의 긴 여정끝에 장가타우 빙산의 발치에 이르러 그루쉐 봐흐나체는 결국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 들였다.
악사들 이 가엾은 여인은, 가엾은 어린것을 자기 아이로 받아 들였다. (설얼은 개울 위에 그루쉐 봐흐나체는 웅크려서 오목한 손에 물을 떠서 아이에게 먹인다)
그루쉐 (노래한다)
[노래시작] 아무도 너를 데려가려 하지 않기에
내가 너를 데려가게 되는구나.
널 데려갈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가물은 세월속에 암흑의 날들을
나와 함께 편안히 보내자꾸나.
너를 너무나 오래 데리고 다녔기에
상처난 발을 이끌며
우유가 너무 비싸기도 해서
네가 더욱 귀엽게 되었구나. (널 앞으로도 버려 두지 않을 거야)
너의 귀한 웃옷을 이제 벗어 던지고
넝마 쪼가리에 너를 감싸마
빙산에 흐르는 물로 씻기고
그 물로 네게 새 이름을 주마 (견뎌 내야만 해)
[노래 끝]
(그루쉐는 아이의 비싼 옷을 벗겨 버리고 낡은 천 조각으로 아이를 감싼다)
가수 그루쉐 봐흐나체가 무장기병들로 부터 쫓기면서 동편 산허리에 있는 마을로 가는 빙산의 좁은 다리에 다다랐을 때, 서금서금한 좁은 다리에 관한 노래를 부르며, 어린 것과 자신의 생명을 과감히 맡겼다. (바람이 불어 친 후 저녁 어스름한 속에서 빙산의 좁은 다리가 드러난다. 거긴 밧줄하나가 끊어져 한쪽이 절벽 아래로 늘어져 있다. 장사꾼들 즉 여자 하나와 남자 둘이 다리 앞에서 망설이며 서 있다. 그루쉐가 아이를 데리고 다가온다. 그중 한 남자는 막대기를 갖고 흔들거리며 늘어진 밧줄을 잡으려 한다.)
남자 1 색시, 서두를 것 없어요. 아무러나 산을 넘지는 못할테니.
그루쉐 하지만 전 애를 데리고 동편에 사는 저희 오빠에게 죽어도 가야 해요.
여자 상인 죽어도라니, 죽어도가 어데있어?! 나야말로 죽어도 저 산을 넘어야 된다고, 남편이 죽어서 양탄자를 팔아야하는 여자가 아툰이란 마을에 있는데 그 양탄자도 내가 죽어도 사야 된단 말이야. 지금 그런데 죽는다고 그렇게 할 수 있나? 그 여자도 마찬가지고 안드레이가 두 시간 동안 밧줄을 낚고 있어요. 저이가 줄을 낚는다 해도 어떻게 그 줄을 붙들어 맬 것인지 그것도 문제예요.
남자 1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해봐.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애.
그루쉐 (큰소리로) 다리가 아주 낡은 것은 아니에요. 건너가 볼 만은 하겠어요.
여자 상인 나 같으면 그런 경솔한 짓은 안해. 귀신이 뒤쫓아 온다 해도. 그건 말할 나위없이 자살행위거든.
남자 1 (크게 소리친다) 야호!
그루쉐 소리치지 말아요! (여자상인에게) 소리치지 말라고 좀 해 주세요.
남자 1 하지만 아래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고. 어쩌면 길을 잃은 사람들일지도 몰라.
여자 상인 그런데 왜 저 사람이 소리치면 안된다는 게야? 자네가 뭐 뒤가 구린 게 있나? 저들이 색시를 쫓아오고 있나?
그루쉐 별 수 없이 당신들에게 말을 해야겠군요. 무장기병들이 내 뒤를 쫓아오고 있어요. 제가 한 사람을 때려 눕혔거든요.
남자2 물건들을 치워요! (여자 상인이 바위 뒤에다 자루 하나를 감춘다)
남자 1 왜 진작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 (다른 이들에게) 만약 저 놈들이 이 색시를 잡는다면 갈기갈기 찢어 죽일거야.
그루쉐 길 좀 비켜 줘요. 흔들 다리 위로 건너가겠어요.
남자2 건너갈 수 없어요. 바닥이 2000길이 넘는다구.
남자 1 우리가 저 밧줄을 낚아 올릴 수 있다손 쳐도 될까 말까요. 우리가 줄을 두 손으로 잡을 수는 있으나, 무장기병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건너갈 게 아니오.
그루쉐 저리 비켜요! (멀지 않은 곳에서 '저기 위쪽으로!' 하는 소리가 난다)
여자 상인 상당히 가까이 왔어요. 어쨌거나 다리 위로 아이를 데려갈 수 없어요. 그러면 틀림없이 다리가 무너질 지 모른다고. 아래를 봐요. (그루쉐는 심연을 내려다 본다. 밑으로부터 다시 또 기병들의 소리가 들린다)
남자2 2000길이야.
그루쉐 하지만 저 사람들은 더 소름이 끼쳐요.
남자 1 아이 때문에도 안된다고. 저놈들이 당신 뒤를 쫓는 것 때문이라면 죽든 말든 모험을 하시오. 하지만 그 아이 생명까지 모험에 걸어서는 안되오.
남자2 더구나 애를 데리고는 너무 무거울 걸.
여자 상인 어쩌면 저 여자 혼자서는 그 위로 건너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애를 이리 줘요. 내가 숨겨 줄께. 그리고 당신 혼자 다리를 건너요.
그루쉐 그렇게는 못해요. 우리는 한 몸이에요. (아이에게) 함께 가자꾸나, 꼭 달라붙어서 (노래한다)
[노래시작] 밑은 천길 낭떠러지, 애야
아슬 아슬한 다리란다.
하지만 우리에겐, 애야
이 길 외엔 다른 길이 없단다.
내가 택한 길
그 길을 너도 가야 된단다.
내가 주는 빵을
너도 먹어야 되듯이.
얼마 안되는 음식도 나누어야만 하는구나.
내 것 중에 세 쪽을 주마.
하지만 그것이 충분한 지는
나도 알 수 없구나.
[노래끝]
해보겠어요.
여자 상인 저런, 해보다니!
그루쉐 부탁이에요. 막대기를 던져 버리세요. 아니면 저 놈들이 와서 밧줄을 끌어 올려 내 뒤를 쫓아오게 돼요. (그루쉐는 흔들거리는 다리에 오른다. 여자 상인은 다리가 부서지는 것처럼 보이자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그루쉐는 계속해서 간다. 결국 건너편에 도착한다.)
남자 1 건넜구나.
여자 상인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더니 속이 상해서) 전생에 무슨 죄가 그렇게 많길래 저것이.... (무장기병들이 올라온다. 병장의 머리가 칭칭 감겨져 있다)
병장 당신들 애를 데리고 있는 여자 하나 못 보았소?
남자 1 (남자2가 막대기를 절벽 아래로 던지는 사이) 예, 저쪽에 있소. 이 다리가 당신들은 견뎌내지 못할 거요.
병장 머저라, 은혜는 꼭 갚아주마. (건너편에서 그루쉐가 웃으며 아이를 기병에게 보여준다. 흔들 다리를 뒤로 하고 계속해서 간다. 바람이 분다)
그루쉐 (미헬에게 눈을 돌리면서) 넌 바람을 절대 무서워해선 안돼. 바람도 역시 불쌍한 놈일 뿐이야. 바람은 구름을 밀어 내고는 혼자 추워서 어쩔 줄을 모르지.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눈이야, 미헬. 그렇게 나쁘진 않지. 눈이 작은 소나무를 덮어줘야만 겨울에 죽질 않거든. 이제 너에 대한 노래를 하나 부를테니 들어보렴. (노래한다)
[노래시작]
너의 아버지는 강도
너의 어머니는 창녀
그래도 네 앞에서는
가장 정직한 사람도 머릴 숙이게 될 거야.
호랑이의 아들은
어린 말들에게도 먹이를 주게 되고
뱀의 자식은
에미들에게 우유를 갖다 주겠지.
4. 북방 산악 지대에서
가수 누이동생은 이레를 걸었다. 얼음산을 넘어, 비탈길을 내려 걸었다. 내가 오빠의 집에 들어서면 오빠가 일어나서 나를 감싸 안아주리라 생각하면서. '너 왔구나' 이렇게 말할 거고 '벌써 오래 전부터 널 기다렸단다. 여기 이 사람이 내 처란다. 그리고 여긴 내 농장이야. 결혼해서 내 것이 되었지. 말 11필과 젖소 31마리야. 앉아라! 아이랑 함께 식탁에 앉아 먹어라.' 오빠의 집은 아늑한 계곡에 있었다. 누이동생이 오빠에게로 왔을 때, 누이는 긴 여독으로 인해 병이 들었다. 오빠가 식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뚱뚱한 농부 부부는 이제 막 식사를 하려는 중이었다. 라프렌티 봐흐나체는 이미 목에다 턱받이를 두르고 있고 이때 그루쉐가 머슴에게 의지하고 창백한 모습으로 아이와 함께 들어온다)
라프렌티 봐흐나체 어디서 오는 길이냐, 그루쉐?
그루쉐 (힘없이) 양가타우 고개를 넘어 왔어요, 오빠.
머슴 제가 건초곳간 앞에서 발견했지요. 어린 것을 데리고 있더구만유.
올케 가서 말이나 보살펴줘라. (머슴 나간다)
라프렌티 내 처 아니코야.
올케 아가씬 눅카에서 하녀로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루쉐 (거이 쓰러질 지경이 되어) 맞아요, 그랬어요.
올케 그거 괜찮은 일자리 아니어요? 꽤 좋다고 들었는데.
그루쉐 총독이 죽음을 당했어요.
라프렌티 그래, 거기 소동이 있었다고들 하더라. 당신 아주머니도 말하지 않았소. 기억나오, 아니코?
올케 이곳 동네는 아주 조용하지. 도시 사람들은 언제나 무슨 일을 저질러야 직성이 풀리는지. (문으로 가면서 소리친다) 소쏘, 소쏘야 아직 화로에서 빵을 꺼내지 말어, 알겠어? 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부르며 나간다)
라프렌티 (낮고 빠른 소리로) 애 아버지는 있냐? (그루쉐가 머리를 흔들자) 그럴 줄 알았다. 무슨 생각을 짜내야겠어. 네 언니는 깐깐하니.
올케 (돌아온다) 머슴들이란! (그루쉐에게) 아가씨, 아이가 있어요?
그루쉐 제 아이예요. (쓰러진다. 라프렌티가 일으켜 세운다)
올케 아이고머니나, 시누이가 병중이에요. 어쩌죠? (라프렌티가 그루쉐를 난로 곁 의자로 데려가려 한다. 아니코가 깜짝 놀라 손짓하며 벽에 기대놓은 자루 위에 앉히게 한다)
라프렌티 (벽으로 그루쉐를 데려가며) 앉아라 앉아. 몸이 좀 허약해 졌을 뿐이야.
올케 홍진이나 아니었으면 좋겠네!
라프렌티 그럴 때는 반점이 있는 법이야. 몸이 허약해서 그래. 염려하지 말아요, 아니코. (그루쉐에게) 앉으니까 좀 낫지?
올케 아이가 아가씨 애래요?
그루쉐 내 아이예요.
라프렌티 지 남편에게 가는 중이라는구만.
올케 그래요?! 고기가 식어요. (라프렌티가 앉아서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식은 음식을 들어서는 안돼요, 기름기가 식으면 나쁘다니까요. 당신 위장이 약한 것 알잖우. (그루쉐에게) 아가씨 남편이 도시에 없다면 그럼 대체 어디 있우?
라프렌티 산 넘어 남자와 결혼했다더군.
올케 오, 산 넘어요. (앉아서 음식을 먹는다)
그루쉐 저를 어딘가에 좀 눕혀 주셨으면 해요, 오빠.
올케 (계속 심문하듯) 폐결핵이면 우리 모두 전염이 될텐데. 그래 아가씨 남편은 농장이 있나요?
그루쉐 그이는 군인이에요.
라프렌티 하지만 아버지 농장을 물려받게 된다누만, 작지만서두.
올케 그럼 전쟁에 나가지 않은 모양인데, 왜 안나갔죠?
그루쉐 (간신히) 아니에요. 그분은 전쟁에 나갔어요.
올케 그런데 아가씬 왜 농장으로 가려 하지요?
라프렌티 아, 서방이 전쟁에서 돌아오면 당연히 농장으로 돌아올테지.
올케 하지만 지금 당장 그리로 가려하니 말예요.
라프렌티 그야 뭐 거기서 기다리려는 거겠지.
올케 (날카롭게 소리친다) 소쏘, 빵 탄다.
그루쉐 (고열에 웅얼거리며) 농장, 군인, 기다려, 앉아라, 먹어!
올케 분명 홍진이에요.
그루쉐 (갑작스레) 그래요, 그분은 농장이 있어요.
라프렌티 애가 너무 허약한 것 같애, 아니코. 여보, 당신은 빵이나 살펴보지 그래.
올케 하지만 언제 시누 남편이 돌아올까요. 소문처럼 만일 전쟁이 새로 터졌다면 말예요. (소리치며 뒤뚱뒤뚱 걸어간다) 소쏘 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소쏘!
라프렌티 (잽싸게 일어서며 그루쉐에게로 간다) 얼른 옆방에다 잠자리를 깔아주마. 올케는 참 심성이 좋은 사람이다. 좌우간 우선 식사나 하자.
그루쉐 (아이를 오빠에게 넘겨준다) 받아요! (오빠는 아이를 받으며 주변을 돌아본다)
라프렌티 하지만 여기 오래 머물 순 없을 거다. 올케는 예법을 많이 따진단다. (그루쉐가 힘없이 쓰러진다. 오빠가 붙잡는다)
가수 누이는 몹시도 아팠습니다. 줏대없는 오빠는, 누이에게 그래도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습니다. 겨울은 길었어요. 겨울을 짧았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아무 것도 눈치채어서는 안되었고 쥐들조차도 이빨로 갈아대지를 못했습니다. 봄이 와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루쉐는 헛간에 있는 베틀에 앉아 있다. 그루쉐와 바닥에 쪼그린 아이는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다)
그루쉐 (베 짜면서 노래한다)
[노래시작]
사랑하는 님이 떠나갔기에
약혼녀는 구걸하며 그분 뒤를 따랐다네
구걸하며 때로는 울면서, 울면서 그리고 당부하면서!
사랑하는 이야, 사랑하는 사람아.
전장엘랑 가시거든
적군과 싸우시거든
전투하는 속엘랑 깊숙히 들어가지 마세요
싸움터 뒷전으로도 가지 마세요.
앞에도 붉은 불꽃이
뒤에는 붉은 연기가
그러니 싸움터 중간에 끼어드세요.
기수 옆에 기대어 서세요.
앞에 선 사람들은 쉽게 죽게 마련이고
뒷편에 선 사람도 죽음을 면치 못하지요.
중간에 선 사람들만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법.
[노래 끝]
미헬, 우리는 약삭 빨라야 돼. 바퀴벌레처럼. 올케언니 눈에 띄지 않게 해서, 이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 할 정도로 말야. 그래야 우린 눈 녹는 계절이 올 때까지 여기 머물 수 있거든. 춥다고 울지마. 가난하고 게다가 추위에 떨다니, 정말 참기 어렵구나. (라프렌티가 들어온다. 여동생에게로 와 앉는다.)
라프렌티 너희들 왜 마부처럼 그렇게 뒤집어 쓰고 앉아 있니? 이 방이 너무 추운 거 아냐?
그루쉐 (서둘러 담요를 벗어졌기며) 춥지 않아요, 오빠.
라프렌티 추우면 이곳에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 안돼. 그땐 올케가 싫은 소리를 할거야. (잠시 있다가) 신부님이 네게 어린애에 관해서는 캐묻지 않았겠지?
그루쉐 물어보시긴 했지만 난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요.
라프렌티 잘했다. 아니코에 대해 네게 말을 좀 해야겠다. 언니는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야. 단지 좀 예민하다고나 할까? 이웃 사람들이 우리집에 대해 무슨 소리라도 할까 보아 올케언니는 걱정이란다. 아주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니까. 한 번은 소젖 짜는 처녀애가 구멍이 난 양말을 신고 교회에 왔는데, 그 이후부터는 올케언니는 교회갈 때마다 양말을 껴신는단다. 지나치긴 하지만 보수적인 집안 태생이라. (귀를 기울인다) 쥐가 있는 거 아니냐? 여기서 지내면 안되겠구나.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같은 소음이 들린다) 뭐가 떨어지는 거지?
그루쉐 물통이 새나 봐요.
라프렌티 응, 물통인 모양이구나. 이제 네가 이곳에 온 지 벌써 반년이 되었지? 올케언니 얘기하고 있었던가? 언니에게는 물론 무장기병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언니는 마음이 약한 여자야. 네가 왜 새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것도 그래서 모르고 있어. 그러니까 어제는 이런 걱정을 늘어놓더라. (이들은 계속해서 눈녹아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언니가 너의 그 군인 양반을 끔찍이나 걱정하더라. '군인 양반이 돌아와서 시누를 찾지 않으면 어쩌죠?' 이렇게 말하면서 잠을 못 이루더라. '봄이 오기 전에는 돌아올 수 없을 꺼야' 이렇게 내가 말했다. 정말 좋은 여자야. (물방울이 좀 더 빠르게 떨어진다) 언제 네 생각에는, 언제 그러니까 그 사람이 돌아올 것 같으냐? 네 생각에도 봄이 오기 전에는 어림없겠지? (그루쉐는 말이 없다) 그 사람이 영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구나. (아무 말이 없다.) 하지만 봄이 되고 이 곳과 고갯길에 눈이 녹으면 여기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될 거다. 놈들이 너를 찾아 올거고 그러면 사람들은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떠들어댈 거다. (떨어지는 물방울 두들기는 소리가 더 커지고 줄기차게 되었다)
라프렌티 그루쉐, 눈이 지붕에서 녹아 흐르고 있어, 봄이 온 거야!
그루쉐 그렇군요.
라프렌티 (성급하게) 어떻게 해야 될 지 말해주마. 우선 일자리가 있어야 발을 붙이고, 어린애가 있으니까 (한숨을 쉰다) 남편이란 게 있어야 되는 거여. 그래야 사람들이 말이 없거던. 네게 맞는 사내를 하나 구하려고 은밀하게 수소문을 해 보았는데, 얘야, 하나 구하기는 했단다. 어떤 노파와 얘기가 되었는데 아들이 하나 있대요. 산너머 사는데 조그만 농장도 가지고 있어. 그 노파가 승낙을 했단다.
그루쉐 하지만 전 아무하고도 결혼할 수 없어요. 전 시몬 사샤봐를 기다려야만 한다구요.
라프렌티 물론 안다. 그걸 다 생각했단다. 넌 그 사내하고 잠잘 필요는 없고 단지 서류상의 남편일 뿐이야. 그래서 내가 그런 사내를 찾은 거란다. 지금 얘기가 된 그 늙은 노파의 아들은 다 죽어 가는 목숨이야. 그것 참 기가 막히지 않니? 그치는 목숨이 달랑달랑하거든. 우리가 말해온대로 더구나 '산너머 남자' 란 말야. 그리고 네가 그 사람한테로 가기만 하면 즉시 그 사람은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된다고. 그러면 넌 벌써 과부가 되는 거고, 어떠냐?
그루쉐 미헬을 위해서 도장찍힌 서류는 필요하겠죠.
라프렌티 도장만 찍히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 도장없이는 페르시아의 왕조차도 자기가 왕이라 주장할 수 없지. 그리고 거처할 곳도 생기고.
그루쉐 그 할머니는 뭣 땜에 그렇게 하지요?
라프렌티 400냥 주기로 했다.
그루쉐 오빤 그 돈이 어디서 났수?
라프렌티 (겸연쩍은 듯) 아니코의 우유 판 돈으로.
그루쉐 거긴 우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렇게 하지요.
라프렌티 (일어서면서) 이 일을 즉시 노파에게 알리마. (급히 나간다)
그루쉐 미헬, 너 때문에 일이 너무 복잡하게 되는구나. 우리는 서로 맺어서는 안될 인연을 맺었나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조그만 일까지 자선의 손길을 뻗히다니. 미헬, 그날 눅카에서 부활절 일요일 말야. 나도 빨리 도망치는 건데 그랬어. 이제야 나도 알겠다. 내가 어리석은 계집인 것을.
가수 신랑은 죽음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데, 신부가 도착했다.
신랑의 어머니는 문 앞에서 기다리다
신부를 서둘러 끌어들였다.
신부는 아이를 데리고 왔고 결혼식하는 동안은
오빠가 감추고 있었다.
(중간 벽으로 방이 나뉘어져 있다. 한편에는 침대가 놓여 있고 휘장막이 쳐진 뒷켠 벽에는 몹시 병들어 있는 남자가 꼿꼿이 누워 있다. 다른 한쪽으로 시어머니가 그루쉐를 잡아 끌고 뛰쳐 들어온다. 그뒤로 라프렌티가 아이를 데리고 있다)
시어머니 서둘러요, 서둘러. 그렇지 않으면 저놈이 죽어요. 식을 올리기도 전에 말예요. (라프렌티에게) 하지만 애가 딸려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잖수.
라프렌티 그게 무슨 상관이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이런 상태에선 아이가 있으나 없으나 매일반 아닙니까?
시어머니 저놈에게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난 창피스럽게 살 순 없어요. 우린 점잖은 집안이에요. (울기 시작한다) 내 아들 유숩이 결혼하는데 하필이면 벌써 아이가 있는 여자라니, 될 말인가요?
라프렌티 좋아요. 200냥 더 드리겠소. 농장은 할머니의 소유로 남고, 2년 동안 내 동생이 이곳에 살 수 있다는 권리도 서류상으로 적어 넣겠습니다.
시어머니 (눈물을 닦으며) 장례식 비용도 안돼요. 며늘아이가 내게 일손이나 되어 주었으면 다행이겠구만유. 근데, 수사는 어딜 갔지? 부엌 창문으로 넘어 나간 모양이군. 유숩이 죽어간다는 소리가 알려지면 온 동네가 뜯어먹겠다고 달라붙을 텐데, 아이고 맙소사. 내가 그 양반을 데리고 올께요. 하지만 아이는 눈에 띄지 않게 해줘요.
라프렌티 눈에 안띄게 할테니 염려 마시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수사요, 신부가 아니고?
시어머니 누구면 어때요. 내가 미쳤지, 혼례 전에 수수료의 반을 지불하다니. 그 돈으로 술을 퍼마시러 선술집에 갔지 뭡니까? 제발 좀.... (뛰어 나간다)
라프렌티 돈 때문에 신부를 쓰지 않고, 값싼 수사를 택한 게로군. 불쌍한 할망구.
그루쉐 시몬 사샤봐를 이곳으로 보내 주세요. 그이가 오면 말예요.
라프렌티 그러마. (병자를 보며) 저 사람 한번 보지 않겠냐? (그루쉐는 미헬을 끌어 안고, 고개를 젓는다) 꼼짝도 하지 않는구나, 우리가 너무 늦게 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귀를 기울인다. 다른 쪽에 이웃 사람들이 들어와 주위를 둘러 보면서 벽쪽에 기대 선다. 이들은 웅얼거리며 기도를 시작한다. 시어머니가 수사를 데리고 들어온다)
시어머니 (깜짝 놀라 짜증을 부리며 수사에게) 그럴 줄 알았다니까. (하겐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며)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 아들놈의 색시 될 처녀가 지금 막 대처에서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갑작스레 올리게 되었구만요. (수사를 데리고 침실방으로 들어간다) 동네방네 떠벌일 줄 알았다니까. (그루쉐에게) 결혼식을 즉시 진행해야 할 것 같다. 여기 서류가 있어요. 나와 신부 오빠가... (라프렌티는 잽싸게 미헬을 그루쉐로부터 다시 뺏어 안고는 뒷편으로 숨으려 한다. 시어머니가 나가라고 손짓한다) 나와 신부의 오빠가 이 혼인의 증인입니다. (그루쉐는 수사 앞에 절을 한다. 이들은 침대가 놓인 자리로 간다. 시어머니가 휘장 막을 뒤로 젖힌다. 수사가 라틴어로 결혼 예문을 빠르게 외운다. 그 사이 시어머니는 라프렌티에게 손짓을 하여 아이를 보이지 말라고 난리다. 라프렌티는 아이의 울음을 달래려고 애에게 결혼식을 보여 주고 있는 중이다. 그루쉐가 아이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라프렌티는 아이의 손을 잡아 흔들어 보인다)
수사 그대는 남편에게 충실하고, 남편에 복종하며, 착한 아내가 될 것이며, 죽는 순간까지 헤어짐이 없이 남편에 순종할 것인가?
그루쉐 (아이를 바라보면서) 예.
수사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대는 아내에게 충실하며 죽을 때까지 함께 하며 아내를 보살피는 남편이 되겠는가? (죽어가는 사람이 대답을 안하자 수사는 자기 질문을 되풀이하고는 주위를 둘러본다.)
시어머니 물론 그렇게 하겠지요. 당신은 '예' 하는 소릴 듣지 못하셨수?
수사 좋을대로. 이로써 결혼식이 성립되었음을 선언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종부성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시어머니 그런 거 없어요. 결혼식만도 비용이 많이 들었어요. 이제 조객들을 돌봐야겠구만. (라피렌티에게) 칠백냥이라고 했지요.
라프렌티 육백이요. (지불한다) 나는 손님들한테 가서 수인사는 나누지 않겠소. 그럼 잘 살아, 그루쉐. 과부가 된 내 동생이 방문하게 된다면 네 올케로부터 환영의 인사를 받게 될 거다. 그러면 나도 마음이 편하게 되겠다. (간다. 지나갈 때 조객들은 무관심하다)
수사 그런데, 저 아이는 도대체 누굽니까?
시어머니 아이라니요? 난 안보이는데. 당신도 애 같은 것은 보지 못했어요. 그래야 나도 술집에서 당신이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보지 못한 게 되는 거라구. 자, 갑시다. (그루쉐는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조용히 하라고 타이르고는 시어머니와 함께 옆방으로 가서 이웃에게 소개를 받는다)
시어머니 이 아이가 제 며느리예요. 이 애는 하나밖에 없는 우리 유숩을 그나마 죽기 전에 서방으로 받아들였구만요.
여자 1 유숩이 일년은 누워 있었지요, 그렇죠? 우리 아들 봐씰리가 군대에 끌려갈 때 유숩도 전송하러 나왔었지요.
여자 2 시골에서야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옥수수는 주렁주렁 익어 가는데 농부는 침대에만 누워 있으니 말예요. 더이상 고통을 받지 않는 게 오히려 유숩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여자 2 (은밀히) 처음에는 군대에 끌려가기 싫어서 누워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이제 죽음을 맞다니!
시어머니 자, 모두 앉아서 떡이나 드시지요. (시어머니가 그루쉐에게 눈짓을 하고, 두 사람은 침실로 가 바닥에서 떡이 든 쟁반을 집어든다. 손님들과 수사가 바닥에 앉아서 낮은 소리로 환담을 시작한다)
농부 (수사에게서 수사복에서 꺼낸 술병을 건네 받는다) 어린애가 있다 그 말씀이지요? 유숩에게는 가당치 않은 일이지요.
부인 3 어쨌든 저 색시는 봉잡은 거라우. 저런 가망없는 상태에 있는 사내와 결혼을 하긴 했으니.
시어머니 저것들이 이젠 제멋대로 지껄여 대는군. 장례 음식을 처먹으면서 말야. 저 녀석이 오늘 죽지 않으면 내일 새로 떡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루쉐 제가 만들께요.
시어머니 어제 저녁 기병들이 들렀었는데, 누가 왔나 하고 나갔다가 들어와보니 저 애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더라. 그래서 너희에게로 급히 사람을 보낸 거지.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귀를 기울인다)
수사 결혼식에 참석한 축하객 여러분, 그리고 장례식에 오신 조객 여러분네들, 우리는 신혼의 보금자리이자 마지막 죽음의 자리를 바라보며 착잡한 심경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신부는 면사포를 쓰고 있는데 신랑은 지금 땅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신랑의 몸은 벌써 깨끗하게 씻겨져 있습니다. 신혼의 보금자리인지라 그나마 죽어가면서도 마지막 욕망은 꿈틀거리게 마련이니까요. 손님네들, 인간의 운명은 이렇게도 가지각색으로 다르답니다. 거처를 얻기 위해 죽기까지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육신이 흙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에 결혼하는 사람도 있으니 -아멘.
시어머니 (주의 깊게 듣고는) 앙갚음하는군. 내 저런 싸구려를 데려 오는 게 아니었는데. 능히 그럴 줄 알았어. 비싼 게 그래도 점잖지. 수라에 성스러움이 물씬거리는 양반이 하나 있긴 한데, 비싸도 웬만큼 비싸야지. 50냥짜리 수사는 품위가 없어. 경건해 봐야 50냥 정도 이상은 안된단 말야. 술집으로 데리러 갔을 때 뭐라고 연설을 하며 고함을 쳤는지 알아. '전쟁은 끝났습니다. 평화를 두려워하십시오 ' 들어가 보아야겠다.
그루쉐 (미헬에게 떡을 주며)떡을 먹으면서 얌전히 있어, 미헬! 우리는 이제 떳떳한 사람이 되었단다. (두 사람은 떡쟁반을 손님들 쪽으로 내어간다. 죽어가던 사람이 회장막 뒤에서 몸을 일으켜 머리를 내밀고 두 사람을 살핀다. 그리고는 다시 쓰러져 눕는다. 수사가 승복으로부터 술병 두 개를 꺼내더니 옆에 앉아있는 농부에게 준다. 세 명의 악사가 들어오자 수사가 그들에게 싱긋이 웃음을 보낸다)
시어머니 (악사들에게) 이곳에는 무슨 일로들 오셨소, 악기까지 들고.
악사들 여기 아나타시우스 사제가 (수사를 가리키며) 이 곳에서 결혼식이 있다고 하더군요.
시어머니 무엇이, 이 중놈아! 나더러 세 놈이나 더 먹여대라는 거야. 이보셔들, 지금 저 안에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구요.
수사 예술가들에게는 보기 드문 기회겠지요. 은은한 결혼 축하곡을 연주하면서 동시에 경쾌한 장송곡을 연주할 수도 있으니.
시어머니 연주를 하든말든 맘대로들 하시구려. 어쨌든 음식은 축이 날테니. (악사들이 뒤섞인 연주를 한다. 부인들이 떡을 건네 준다)
수사 트럼펫이 마치 애 녀석들 울어대는 소리 같구먼, 원 세상에 자네는 무슨 북을 그 모양으로 치나?
농부 (수사 옆에서) 신부가 다리를 흔들며 춤을 추면 좋겠구만.
수사 다리를 흔들라고, 아니면 엉덩이를 흔들라고?
농부 (수사 옆에서 노래한다)
[노래시작]
엉덩방덩 처녀는 늙은이를 얻었네
혼례를 올린다고 야단 법석을 떨더니
농거리에 지나지 않았구나
혼인서약을 하자마자 딴청을 부렸으니
어울린 것은 오직 혼례식 촛불뿐이었다네
[노래끝]
(시어머니가 주정뱅이를 밖으로 밀어 낸다. 음악이 갑자기 그친다. 손님들은 당황한다. 사이)
손님들 (큰 소리로) - 여러분들 들으셨지요? 대공이 되돌아 왔대요.
- 하지만 영주들이 아직도 저항을 한다누만요.
- 오, 그 페르시아왕 말이예요. 그 왕이 대공에게 많은 군인들을 보내주었다는군요. 그래서 그루지니엔을 평정케 했다는군.
-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요? 페르시아왕은 대공과 원수지간인데.
- 하지만 사회질서가 문란한 것을 더 큰 원수로 여긴다는군.
- 좌우간 전쟁은 끝났어. 군인들이 벌써 돌아오고들 있대요. (그루쉐가 떡쟁반을 떨어뜨린다)
여자 1 (그루쉐에게) 몸이 불편하우? 우리 유숩 때문에 너무 신경을 써서 그렇지. 앉아서 좀 쉬어요, 색시.
손님들 - 이제 모두가 정상이 될 거야. 예전처럼 말이지.
- 세금은 껑충 뛰겠군. 전쟁비용은 우리가 물게 마련이니까.
그루쉐 (힘없이) 군인들이 돌아온다고 누가 말씀하셨나요?
남자 1 내가.
그루쉐 그럴 리가 없어요.
남자 1 (어떤 여자에게) 목도리를 보여 봐요. 이것을 페르시아 전쟁에서 돌아오는 군인한테 샀단 말이요. 페르시아 제품이요.
그루쉐 (목도리를 자세히 살핀다) 돌아오는군요. (오랫동안 침묵이 흐른다. 그루쉐는 떡고물을 주워 담으려는 듯 무릎을 꿇고 앉는다. 윗 옷에서 빠져나온 줄에 걸려 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잡고 입을 맞추며 기도하기 시작한다)
시어머니 (손님들 말없이 그루쉐를 주시하자) 뭘하는 거야? 손님들 시중은 안들고. 시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그런 쓸짝없는 일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손님들 (그루쉐는 이마를 땅에 묻은 채 꼼짝 않고 있고, 손님들은 다시 떠들어댄다.)
- 군인들한테 페르시아 말안장을 살 수 있대요. 목발하고 바꾼 사람들도 많다는군요.
- 군인들은 양쪽이 다 전쟁에서 패한 셈이지만 높은 양반들은 그래도 어느 한쪽은 전쟁을 이기는 법이래요.
- 어쨌거나 전쟁은 이제 끝난 거라구. 군대에 끌려가지 않는 것만 해두 어디야. (침대에 있던 농부가 몸을 일으킨다. 잔뜩 귀를 기울인다)
- 우리에게야 한 일 주일 정도 날씨가 좋으면 그만이지.
- 금년에는 배나무가 영 형편없어.
시어머니 (음식을 청하면서) 떡을 좀 더 드시지요. 마음 놓고들 드세요. 아직 많이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빈 쟁반을 갖고 작은 방으로 간다. 병든 사람을 쳐다보지 않고 바닥에 잔뜩 떡이 담겨 있는 쟁반을 집으려고 허리를 굽힌다. 이때 농부가 쉰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유숩 저것들 아가리에 얼마나 떡을 더 처넣으실 작정이슈. 돈을 뭐 내가 똥구멍으로 까 내놓는 줄 아슈. (시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 넋을 잃고 쳐다본다. 농부는 휘장막을 걷어 올리며 기어나온다) 그러니까, 저 사람들 말인즉 전쟁이 끝났다 이거요?
부인1 (다른 방에서 그루쉐에게 친절하게) 이봐요, 색시. 전장에 누가 나갔수?
남자 그렇담, 군인들이 돌아온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겠소?
유숩 멍하니 쳐다보지 좀 마세요. 마누라랍시고 나한테 내맡긴 그 계집은 어데 있수?
(아무런 대답이 없자 침대에서 일어나 후들거리며 속옷만 걸친 채 어머니 앞을 지나 다른 방으로 건너간다. 노파는 벌벌 떨며 떡쟁반을 든 채 아들의 뒤를 따른다)
손님들 (유숩을 보자 놀라 소리친다.) 하나님 맙소사, 아이고머니나, 유숩이가! (모두들 법석을 떨며 일어나고 부인들은 문으로 몰린다. 그루쉐는 아직 무릎을 꾼 채로 머리를 들고 유숩을 올려다본다)
유숩 장례식 음식이라, 네놈들에게나 제격이겠다. 꺼져 버려. 몽둥이로 쫓아내기 전에!
(손님들 황급히 집을 나선다)
유숩 (그루쉐에게 퉁명스럽게) 계산이 빗나갔다 이거지? (그루쉐가 아무런 말도 않자, 유숩은 몸을 돌려 노파가 들고 있는 쟁반으로부터 옥수수떡을 집어든다)
가수 이 무슨 혼란인가.
신부는 이제 정말로 남편을 갖게 되었으니.
낮에는 어린 것이, 밤에는 남편이 있구나.
사랑하는 분은 밤낮으로 이곳으로 오고 있는데,
이 부부는 서로 쳐다만 볼 뿐
피할 수도 없는 이 좁은 방에서.
(유숩은 벌거벗은 채 높다란 나무로 된 욕조에 앉아 있고, 시어머니가 물통으로 물을 부어 준다. 옆방에서 미헬 곁에 그루쉐가 웅크리고 앉아 있고, 미헬은 돗자리 짜는 놀이를 하고 있다)
유숩 어머니가 하실 게 아니라 계집이 할 일이에요. 여편네는 도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 거요?
시어머니 (부른다) 그루쉐! 서방이 널 찾는구나.
그루쉐 (미헬에게) 여기 구멍이 두 군데나 뚫려 있구나, 기우고 있거라.
유숩 (그루쉐가 들어 오자마자) 등 좀 밀어!
그루쉐 임자 혼자 할 수 없나요?
유숩 '임자 혼자 할 수 없나요?' 솔을 집어, 빌어먹을! 네년은 내 여편네야 아니면 낯선 계집이야? (시어머니에게) 너무 차요.
시어머니 내가 가서 더운물 가져오마.
그루쉐 제가 가져올께요.
유숩 당신은 여기 있어! (시어머니가 달려간다) 더 세게 밀어, 왜 멍청하게 서 있어? 벌거벗은 사내쯤은 실컷 보았을텐데. 그럼 아이는 하늘에서 공짜로 떨어졌단 말여?
그루쉐 임자 생각처럼 좋아하다 얻은 애는 아니예요.
유숩 (이죽거리며 그루쉐에게 몸을 돌린다) 당신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그루쉐는 등밀던 짓을 멈추고 물러선다. 시어머니가 들어온다) 저런 요망스런 계집을 내게 여편네라고 떠 맡기신 거예요?
시어머니 저 애가 아직 마음이 동하지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유숩 조심해서 부어요. 아유, 조심하랬잖아요. (그루쉐에게) 시내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이곳에 온 것이지. 그야 물어볼 필요도 없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겠어. 이 집구석에 끌고 들어온 저 애녀석도 상관안해. 하지만 네년하고의 잠자리는 견딜 수 없다 이거야. 이건 자연의 이치와도 어긋나는 일이라고. (시어머니에게) 더 부어요. (그루쉐에게) 네 그 군인 녀석이 온다 해도 네 년은 벌써 남편이 있는 몸이라구.
그루쉐 알아요.
유숩 그 군인 녀석은 돌아오질 않어. 아예 그런 기댈랑 하지 말어.
그루쉐 그렇지 않아요.
유숩 당신은 나를 모욕하고 있어. 당신은 내 마누라야, 그런데 내 여편네가 아니란 말야? 당신이 누워야 될 곳이 비어 있다, 이거야. 그렇다고 다른 계집이 그곳에 누울 수도 없는 형편이고. 아침 일찍 밭에 나가면 피곤해 죽을 지경이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망둥이 새끼처럼 눈이 멀뚱히 떠진다 이거야. 하나님이 당신을 내 계집으로 만드셨는데 계집으로 할 일을 왜 안 하느냐구. 밭농사가 웬만해야 시내에 가서 계집을 끼고 자지. 게다가 거기까진 길도 멀고 말야. '계집이란 밭에 나가 잡풀이나 뽑으며 다리나 벌려야 하느니라' 이곳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고,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그루쉐 듣고 있어요. (나지막히) 내가 임자를 모욕한다는 얘긴 옳지 않아요.
유숩 옳지 않대요. 물 부어요. (시어머니가 부어준다) 아유.
가수 냇가에 앉아 빨래를 하다가
흐르는 냇물 속에서 그이의 모습을 보았다.
달이 흘러가면 갈수록 그이의 얼굴도 희미해졌고
빨래를 짜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바람소리 잦은 단풍나무 사이에서 그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달이 흘러감에 따라 그이의 목소리는 더욱 아득해졌다.
원망과 한숨은 점점 커지고,
눈물과 땀방울은 무수히 쏟아졌다.
달이 흘러감에 따라 어린 것은 무럭무럭 자라고.
(어느 작은 개울가에서 그루쉐가 웅크리고 앉아 빨래를 물에 담근다. 멀지 않은 곳에 아이들 몇명이 서 있다. 그루쉐가 미헬에게 말한다)
그루쉐 저애들과 놀아봐, 미헬. 하지만 대장을 하겠다고 우겨선 안돼. 네가 제일 어리니까
(미헬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아이들에게로 간다. 놀이가 진행된다)
제일 큰 아이 오늘은 '목 자르기' 놀이야. (뚱뚱한 아이에게) 넌 살찐 영주야, 그러니까. 웃어. (미헬에게) 넌 총독이야. (여자아이에게) 넌 총독부인. 총독의 머리가 잘려 떨어지면 우는 거야. 그리고 내가 머리를 자르는 거야. (나무 칼이 보인다) 이놈으로. 먼저 총독이 궁정 마당으로 끌려나오는 거야. 제일 앞에 총독이 서고 끝으로 총독부인이 나오는 거다. (열이 만들어져 뚱뚱한 아이가 웃으면서 앞장선다. 그 뒤로 미헬과 제일 큰 녀석이 나오고 여자애가 울며 따라나온다)
미헬 (멈춰 서서) 나도 머릴 자를래.
제일 큰 아이 그건 내가 해야 해. 넌 제일 꼬마야. 총독이 제일 쉬워. 꿇어 앉아 머리를 디밀기만 하면 돼. 아주 간단하다구.
미헬 나두 칼 줘.
제일 큰 아이 이건 내 꺼야. (미헬을 발로 찬다)
여자애 (그루쉐에게 소리친다) 이 애가 함께 놀려 하지 않아요.
그루쉐 (웃으면서) 오리 새끼도 수영은 할 줄 안단다.
제일 큰 아이 웃을 수 있다면 네가 살찐 영주를 해도 돼. (미헬이 머리를 흔든다)
뚱뚱한 아이 내가 제일 잘 웃어. 먼저 저 애더러 네 머리를 한 번 자르게 하고 그 다음에 너하고 나하고 저 애 머리를 자르자. (제일 큰 녀석이 마지못해 하면서 나무칼을 미헬에게 주고는 무릎을 꿇는다. 뚱뚱한 녀석이 앉아서 허벅지를 치며 목청껏 웃는다. 여자아인 큰 소리로 운다. 미헬이 큰 칼을 휘두르며 머리를 내리치면서 넘어진다)
제일 큰 아이 아우! 내가 제대로 목을 내리치는 법을 보여주겠어!
(미헬이 달아나고 아이들이 뒤를 쫓는다. 그루쉐가 웃으면서 애들을 쳐다본다. 그루쉐가 몸을 돌리자 시몬 사샤봐가 냇가의 맞은 편에 서 있다. 시몬은 다 낡은 군복을 입고 있다)
그루쉐 시몬!
시몬 그루쉐 봐흐나체입니까?
그루쉐 시몬!
시몬 (사무적으로) 안녕하십니까, 건강하시구요?
그루쉐 (기뻐하며 일어서서는 깊이 머리 숙여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군인 아저씨. 천만다행으로 건강하게 돌아오셨군요?
시몬 송사리야 어디 간들 큰 변을 당할 리가 있을라구.
그루쉐 선머슴에게는 용기면 족하지만, 영웅에게는 운이 따르는 법.
시몬 그러면 이곳은 어떠하오? 겨울은 견딜만 했소? 이웃들은 친절하던가요?
그루쉐 겨울은 견디디가 조금 어려웠어요. 이웃사람들은 늘 그렇지요, 시몬.
시몬 물어도 되겠소? 아가씨는 아직도 빨래를 할 때 물 속에 다리를 담그는 버릇이 남아 있는지?
그루쉐 대답은 '아니오'예요. 덤불 속에서 훔쳐보는 눈이 있다면서요.
시몬 아가씨는 지금 군인 아저씨라 하시던데. 경리병이 여기 와 있소.
그루쉐 20냥 받는 그런 경리병이 아닌가요?
시몬 숙소도.
그루쉐 (눈에 눈물이 고인다) 막사 뒤 대추나무 아래였지요.
시몬 바로 그곳이었소. 늘 회상하고 있었음을 알겠소.
그루쉐 늘 그랬지요.
시몬 그리고 잊지 않았구료. (그루쉐 머리를 흔든다) 왜 그래, 무엇인가 잘못되었나?
그루쉐 시몬 사샤봐, 나는 이제 눅카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일이 생겼어요.
시몬 일이 생겼다니?
그루쉐 무장 기병 하나를 내가 때려 눕혔어요.
시몬 그랬다면 그루쉐 봐흐나체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루쉐 시몬 샤샤봐, 내 이름도 예전의 이름과는 다르게 되었어요.
시몬 (잠시 후에) 이해할 수가 없소.
그루쉐 여자들은 자기의 이름이 언제 바뀌죠, 시몬? 그걸 당신에게 설명해 드리겠어요. 하지만 우리들 사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어요. 모든 게 우리들 사이에선 전과 똑같아요. 제 말을 꼭 믿어 주셔야 돼요.
시몬 우리들 사이에선 달라진 게 없다면서 또 달라진 이름은 웬말이요?
그루쉐 어떻게 설명드릴 수가 있어요. 순식간에 게다가 개울을 사이에 두고서. 당신 다리를 건너 오실 수 없나요?
시몬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을런지도 모르지.
그루쉐 정말 그래야 돼요. 건너오세요. 시몬, 어서요!
시몬 아가씬 너무 늦게 돌아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루쉐는 시몬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얼굴이 눈물범벅이다. 시몬은 머리를 숙이고 몸이 굳어 있다. 막대기를 집어들더니 칼로 깍는다)
가수 무척이나 많은 말들이 오고갔고
수없이 많은 말들이 침묵 속에 파묻혔다.
군인은 돌아왔다.
어디서 왔는지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
들어보시라, 마음 속에 간직은 하면서
말하지 않는 군인의 이야기를!
싸움은 새벽녘에 시작되었는데
한낮에 이르러 피로 얼룩지게 되었고
첫 번째 사람이 내 앞에서 쓰러졌고,
두 번째 사람이 내 뒤에서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이 내 옆에서 쓰러졌다오.
첫 번째 사람은 밟아 버리고,
두 번째 사람은 피했고,
세 번째 사람은 중대장이 해치웠지요.
나의 동료 하나는 칼에 맞아죽고,
다른 형제는 연기에 질식해 죽었습니다.
저들이 불을 내질러
내 목덜미는 타는 듯 했으나
장갑 낀 두 손과
양말 속의 발가락들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나무 꽃잎을 먹으며 단풍나무 즙을 마셨습니다.
물위에서, 때론 물 속에서 잠을 잤던 것이오.
시몬 풀밭에 어린애 모자가 보이는데, 혹 어린 것이 벌써 생긴 거요?
그루쉐 그래요, 시몬. 그 아이를 어떻게 숨기겠어요. 당신에게 성가신 일은 없을 거예요. 제 아이는 아니에요.
시몬 사람들은 흔히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고들 하지. 부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마시오. (그루쉐는 머리를 수그린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가수 기다림도 헛되이 그리움만 컸었구나.
언약은 깨어졌고, 그 이유도 알려주지 못하는구나.
들어 보시오.
마음 속에 간직한 채 말하지 못하는 이 여인의 이야기를!
당신이 전쟁터에서 싸움을 할 적에요, 군인 아저씨.
그 잔인한 전쟁, 그 혹독한 전쟁 속에서 말예요.
전 아이를 만났어요.
그 가엾은 처지의 아이를.
인정 때문에 아이를 차마 떼어 놓을 순 없었지요.
내버려 두면 죽을 것 같은 그 어린것에 손길이 갔지요.
바닥에 눕혀 있는
버려진 어린것에 허리를 굽힐 수 밖에 없었답니다.
내게 속하지도 않은 것에 마음을 온통 찢겼지요.
그 낯선 것에.
누군가는 도와줘야 하겠지요.
어린 나무는 물이 필요하거던요.
목동이 잠들면 어린 소는 길을 잃는 법
더구나 도움을 청하는 울음소리는
견딜 수가 없는 법이에요.
시몬 당신에게 주었던 그 십자가를 돌려주시오. 아니, 그보단 차라리 냇물 속으로 던져 아니예요. (몸을 돌려 가려 한다)
그루쉐 시몬 샤샤봐, 떠나지 말아요. 저앤 내 애가 아니예요. 제 애가 아니란 말이에요! (아이들의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얘들아, 왜 그러니?
목소리 군인들이 왔어요. 군인들이 미헬을 데려가요! (그루쉐가 넋을 잃고 서 있다. 무장 기병 두 명이 미헬을 끌며 그루쉐에게 다가온다)
무장 기병 처자가 그루쉐지? (그루쉐가 끄덕인다) 이 애가 당신 아인가?
그루쉐 그래요. (시몬이 떠나간다) 시몬!
무장 기병 우리는 당신 보호하에 있는 이 아이를 도시로 데려오라는 법정 명령을 받았소 왜냐하면 이 아이가 총독 게오르기 아바슈뷜리의 아들인 미헬 아바슈뷜리라는 의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요. 여기 도장이 찍힌 영장이 있소. (군인들은 아이를 데리고 떠난다)
그루쉐 (쫓아가며 소리친다) 애를 나둬요. 제발, 제 아이란 말예요!
가수 무장 기병들이 아이를 끌고간다.
그 귀중한 어린것을.
이 불행한 여인은 군인들의 뒤를 쫓아 시내로 따라간다.
그 위험한 곳으로.
낳은 어미는 아이를 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기른 어미는 법정에 서게 되었다.
누가 이 사건을 판결하게 되는지,
누구에게 이 아이를 넘겨 줄런지?
누가 재판관이 되는지,
공정한 사람인가 아니면 그릇된 사람인가?
도시는 불탔다.
재판관석에는 아쯔닥이 앉아있었다.
5. 재판관의 이야기
가수 이제 재판관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재판관이 되었는지.
판결을 어떻게 내렸으며,
도대체 어떤 재판관이었는지.
커다란 폭동이 일어났던 부활절 주일에
대공이 자리에서 쫓겨나고
저 어린것의 애비인
아바슈빌리 총독의 목이 떨어진 바로 그 날.
면서기 아쯔닥은 숲속에서 쫓기는 사람을 보고는
자기 오두막집에 그 사람을 숨겨 주었습니다. (넝마를 걸치고 술이 잔득 취한 채 아쯔닥은 거지로 변장한 도주자를 오두막집으로 들어가도록 거들어 준다)
아쯔닥 헐떡대지마, 당나귀 새끼처럼. 오뉴월의 감기 콧물처럼 들락거려 봐야, 경찰 손에서 빠져 나가지 못해. 일어서 봐! (오두막집 벽을 뚫고 나가려는 듯 뒤뚱대는 도주자를 다시 붙잡는다) 앉아서 처먹기나 해. 여기 치즈덩이가 있어. (상자를 들쑤셔서 넝마에 싼 치즈덩이를 꺼낸다. 도주자는 정신없이 먹어 제낀다) 오랫동안 처먹지 못했군 그래. (도주자는 씩씩 거린다) 야, 이 미친놈아, 왜 그리 뺑소니를 치던 거야. 경찰이 네 놈을 보았을 리가 없는데.
도주자 틀림없소.
아쯔닥 혼비백산이라? (도주자는 넋나간 듯 빼꼼이 쳐다본다) 무서워서 똥줄이 터졌지? 흠, 그렇게 쩝쩝거리지 좀 말어. 대공나리나 아니면 개자식이나 그렇게 먹어대는 거야. 난 그런 꼴 참지 못해. 자기 마음내키는대로 냄새 풍기는, 거룩하게 태어난 그런 양반이면 몰라도 자네 같은 놈은 못참아. 내가 판사나리한테 그런 양반에 대해 들은 적이 있지. 그 양반은 시장터에서 밤을 먹다가 대중 앞에서 아랑곳없이 방귀를 뀌어 버리셨다는 거야. 네놈 쳐먹은 것 보고 있으면 왜 그런지 끔찍한 생각이 들어. 왜 한 마디 말도 없지? (사납게) 네놈 손 좀 이리 내밀어봐. 말 안들려? 손을 이리 주어 보라니까. (도주자는 머뭇거리며 손을 내민다) 희구나. 그러니까 빌어먹는 놈이 아니었어. 새빨간 거짓말로, 어영부영 사기를 치신다. 저런 놈을 쓸만한 인간으로 대접해서 숨겨주다니. 대지주의 몸으로 왜 도망을 치는 거지? 틀림없어. 부인하려 들지마. 네놈의 죄의식에 싸인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일어선다) 나가! (도주자는 불안에 떨며 쳐다본다) 무얼 꾸물대고 있어, 농부등이나 처먹고 놈이!
도주자 쫓기고 있소. 아량을 베풀어 주시오. 원하는대로 배상하리라.
아쯔닥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배상을 하겠다고? 뻔뻔해도 분수가 있지. 흥정을 하시겠다? 물린 놈이 오히려 피맛을 안다더니 농민들 돈이나 빨아 먹는 놈이 뻔뻔스럽게도 돈을 가지고 흥정을 하시겠다 이거야. 나가, 당장!
도주자 입장을 이해하고 깊이 양찰해 주시오. 하룻밤을 숨겨주면 십만 냥 내리다, 어떻소?
아쯔닥 무엇이 어째? 나를 사겠다는 거야, 십만 냥에? 그 돈으로 땅 몇 평을 사라고. 십오만 냥 하자, 돈은 어디 있소?
도주자 수중에 없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소. 허나 틀림없이 보내 드릴테니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오.
아쯔닥 염려하고도 남는다. 꺼져 버려! (도주자는 일어나 비틀거리며 문 쪽으로 간다. 이 때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소리 아쯔닥! (도주자는 허둥대며 반대쪽 귀퉁이로 달려가 움직일 줄 모른다.)
아쯔닥 (소리친다) 아무하고도 얘기하고 싶지 않아. (문으로 다가가) 짐승처럼 또 이리저리 냄새나 맡고 다니나, 샤우봐?
경찰 샤우봐 (밖에서 비난조로) 아쯔닥 자네 또 토기 한 마리를 몰래 잡았어. 그런 일 다시는 없을 거라고 내게 약속하지 않았나!
아쯔닥 (강경하게) 알지도 못하는 일에 주제넘게 끼어들지 말어. 토끼란 놈은 풀이란 풀은 모두 뜯어 처먹는 위험하고도 해로운 짐승이야. 잡풀은 남아나질 않지. 그러니까 싸그리 잡아 없애야 한다구.
샤우봐 아쯔닥, 너무 내게 심하게 굴지 좀 말게. 자네를 물고 늘어지지 않으면 내 밥줄이
끊어진다구. 자네는 인정 많은 사람 아닌가?
아쯔닥 나는 인정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야. 몇 번 말해야 알아듣겠나, 나는 생각이 깊은 사람일 뿐이라고.
샤우봐 (꼬시듯) 알고 있어, 아쯔닥. 자네야말로, 정말 자네 말마따나 사려기픈 사람이지. 그래서 묻겠는데, 영주의 토끼를 누가 흠쳐 갔으면 그런 파렴치한 인간을 나같이 배우지 못하고 하나님이나 믿고 사는 놈은 대체 어떡하면 좋겠나? 나는 경찰이거든.
아쯔닥 샤우봐, 이 사람아. 부끄러운 줄 좀 알게나. 멀뚱이 서서 내게 질문이라시고 하다니. 하기사 질문 던지는 것처럼 유혹적인 일은 없지. 자네가 계집이라고 가정하고, 누노브나 뭐 그런 부정한 계집이라고 치고, 자네가 내게 넙적다리를 드러내 보이면서 이 넙적다리를 어떡하면 좋아요? 근질거려서 못 참겠는데요. 이런 경우 이것도 질문은 질문이니 이 계집이 무슨 짓을 하건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건가? 그래, 나는 토끼를 잡지만 자네는 인간을 잡는 놈이야! 인간은 신의 형상에 맞추어 창조되었지만, 토끼는 그렇지 않아, 이 점 자네도 알겠지. 그러니까 나는 토끼를 잡아먹지만 자네는 인간을 잡아 먹는 놈이라구. 샤우봐, 하나님께서도 중죄 하실 걸세. 그러니 자네 집에 가서 회개나 하라구. 잠깐, 여기 자네에게 넘겨줄 것이 있어. (벌벌 떨고 서 있는 도주자에게 눈길을 보내더니)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조용히 집에 가서 회개나 하라고. (사정없이 문을 닫는다. 도주자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라 이거지? 네 놈을 넘겨주지 않았다고? 짐승만도 못한 경찰관에게는 빈대새끼 한 마리도 넘겨 주기 싫다고.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 경찰 정도로 벌벌 떨지 말라구. 나이도 꽤 처먹은 것이 겁은 더럽게 많군. 치즈덩이나 마저 먹어. 그렇지만 가난뱅이처럼 먹어야 네 놈이 잡히지 않는 법이야. 가난뱅이가 어떻게 해치우는지 한 번 보여 주지. (잡아 끌어 앉히고는 치즈덩이를 쥐어 준다) 이 상자가 식탁이라고 치고 팔꿈치를 식탁에 세우고, 접시에 있는 치즈덩이를 감싸는 거야. 어느 순간에 나꿔채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기야 그렇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는 거니까. 칼을 작은 낫처럼 움켜 쥐고 탐욕스럽게 들여다 보지 말고, 서글픈 듯 쳐다보라고. 탐나는 것은 모두 사라지듯 치즈덩이가 벌써 반쯤 없어진 것을 서운한 듯 말이야. (유심히 훑어보며) 그 놈들이 자네 뒤를 쫓는 것을 보면 자네가 쓸만한 인물인 셈인데, 그 놈들이 사람을 잘못 보고 그러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구만. 티플리에서 지주 하나를 목 매단 적이 있었지. 터키 사람이었지. 다른 지주들과는 달리 농민들에게 절반을 나누어 준 것이 아니고 절반의 절반만 나누어 주었고 세금도 남보다 두 배 이상이나 거두워 들였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지. 이 지주의 끈질긴 노력은 놈들이 보면 전혀 죽일 혐의가 없었음에도 날강도나 되듯 목을 매달아 죽였던 거야. 터키놈이란 이유 하나 때문이었지. 태생이야 이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 아닌가. 정의고 뭐고 없는 거지. 이 지주는 본디오 빌라도가 사도신경에 나타나는 것 처럼 억울하게 교수형대로 올라간 거라구. 그러니 한마디로 난 자네를 믿을 수가 없다는 거야.
가수 이렇게 하여 아쯔닥은 늙은 거지에게 잠자릴 제공했다. 이 거지가 바로 다름아닌 민중의 압박자인 대공이란 사실을 알고는 수치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스스로 자기자신을 법정에 고발해 판결을 받고자 경찰관에게 눅카로 끌고가도록 명령했다네. (법정 마당에 무장기병 셋이 쭈그리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기둥에는 법관복을 입은 사람 하나가 걸려 죽어 있다. 결박을 당한 채 아쯔닥이 샤우봐를 끌고 들어온다.)
아쯔닥 (소릴 지른다) 천하의 도적, 민중의 압박자인 대공이 도주하는 것을 이 몸이 도와주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소. 공개재판을 통해, 정의의 이름으로 이 몸에 중벌을 내릴 것을 요구하는 바이오.
무장 기병 1 주둥이 나발대는 이 어릿광대는 누구야?
샤우봐 우리 면서기 아쯔닥이라우.
아쯔닥 나는 비천한 놈이요, 반역자요,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놈이요. 결박을 해서 나를 서울로 데려가 고발조치 하라는 나의 요구를 샅샅이 고해라, 이 평발놈아! 대공놈을 그러니까 도둑들의 우두머리에게 나도 모르게 잠자리를 제공했던 것을! 우리 움막에 흘리고 간 서류를 보고서야 뒤늦게 알아차렸던 것까지. (무장 기병들이 서류를 들여다 본다. 샤우봐에게) 저 놈들은 읽지를 못해. 보시오, 여기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놈이 자기자신을 스스로 고발하고 있소! 그리고 또, 모든 것이 밝혀지도록 밤을 새며 나를 이끌고 이곳으로 달려 오도록 강요한 것도 샅샅이 고해라!
샤우봐 우격다짐으로 몰아친 것은 좋지 않아, 아쯔닥!
아쯔닥 주둥이 꾹 다물고 있지 못해, 샤우봐! 자네가 무엇을 안다고. 자네가 혼비백산할 그런 새 시대가 온거라구, 자네는 끝장이야, 경찰같은 것은 씨도 없이 말려 버릴 거라구. 샅샅이 조사하면 모든게 폭로될 거란 말이야. 이럴 때에는 오히려 스스로 신고하는 편이 훨씬 나은 거지. 왜냐구, 민중의 눈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거든. 그래서 신기리장수 골목에서도 내가 이렇게 소리쳤던 것이 아닌가?! (손짓을 크게 하며 무장기병에 곁눈질을 보내며 재현한다) '본의아니게 나는 도둑왕초를 도망치게 하였소. 형제들이여, 이 몸을 찢어 죽여주시오!' 누구보다도 먼저 벌을 받고자 했던 것이오.
무장 기병 1 그래 거기서 무엇이라고들 답변하던가?
샤우봐 도살장 골목에서는 위로의 말들을 하였고, 그 신기리 장수 골목에서는 눈물이 나도록 깔깔대고 웃어대더만. 그것 뿐이었소.
아쯔닥 여기서는 그렇지 않을 거요. 여러분들은 타협을 모르는 군인들이란 것을 잘 알고 있소. 형제들, 재판관은 어디에 있소? 나는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무장 기병 1 (교수형된 사람을 가리키며) 여기 재판관이 있네. 형제라고 우리를 부르지 말어. 오늘 저녁은 유난히 우리들 귀가 예민하다구.
아쯔닥 '여기 재판관이 있네.' 이야말로 그루지니엔에서는 일찌기 들어보지도 못하던 대답이군. 시민 여러분, 각하께서는 어디에 있소, 총독각하께서는? (교수대를 가르키며) 여보쇼, 여기 총독각하께서 걸려 있소. 세무소장은 어디에 있소? 검사나리 붸르보는? 주교는? 경찰서장은? 여기있소, 여기, 여기, 모두 여기 걸려있소. 형제들이여, 이것이 바로 내가 여러분에게서 듣고자 했던 바로 그 대답이었소.
무장 기병 2 잠깐! 무엇이 그래 바로 바라던 것이라고, 이 주둥아?
아쯔닥 페르시아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동지들, 페르시아에서 일어났던 바로 그대로.
무장 기병 2 페르시아에서 그래 어떤 일이 있었는데?
아쯔닥 사십년전 그곳에선 모두가 처형되었소, 고관들, 세리들. 기이한 인물이었던 우리 할아버지께서 이런 것을 다 보았소. 삼일동안이나 도처에서...
무장 기병 2 고관들이 교수형을 당했을 때, 그럼 누가 통치를 했지?
아쯔닥 어떤 농부였지.
무장 기병 2 그럼 군대는 누가 통솔하고?
아쯔닥 쫄병이 했지, 어떤 쫄병이.
무장 기병 2 급료는 그럼 누가 지불하고?
아쯔닥 염색업자가. 어떤 염색업자가 급료를 지불했지.
무장 기병 2 양탄자 직조공이 아니고?
무장 기병 1 그런데 어째서 그런 일이 다 일어났지, 페르시아 밑닦기야?
아쯔닥 그런 일이 왜 일어났느냐구? 거기에 꼭 특별한 이유가 필요할까? 이보게, 왜 우물쭈물 거리는 게야? 바로 전쟁때문이었어! 너무나 긴 전쟁때문이었지. 게다가 정의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그때 있었던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할아버지께서 가지고 오셨지. 나와 이 경찰관 친구가 그 노래를 들려줌세. (샤우봐에게) 오랏줄을 잘 잡고 있어, 그래야 제 맛이 난다구. (노래한다. 샤우봐가 포승줄을 잡고 있다)
[노래시작]
우리의 아들들은 왜 이젠 피를 흘리지 않고,
왜 우리의 딸들은 울지를 않는가?
왜 이젠 계집소들만이 도살장에서 피를 흘리는가?
아침나절 우르미 호수가 잡풀만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왕이 새로운 영토를 갖고자 할 때,
농부는 우유 판 돈을 바쳐야 한다.
온 세상 하늘을 정복한답시고
초가지붕까지 뜯어간다.
우리의 사내들이 온 사방으로 끌려가야
높은 양반들은 집에 앉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네.
쫄병들이 서로 찔러 죽일 때,
사령관들은 서로 악수를 나눈다네.
과부들로부터 뜯어낸 금화가 진짜인지
이빨로 물어 뜯을 수는 있어도
칼날은 힘없이 문들어 짤라진다.
전쟁에는 졌어도,
무기를 위한 비용은 벌써 지불되었네.
그런게 사실이지? 그런 게 사실이지?
[노래 끝]
샤우봐 그렇고 말고, 그렇지 그래. 그렇고 말구.
아쯔닥 끝까지 마저 듣고 싶은가? (무장 기병 1이 끄덕인다)
무장 기병 2 (경찰관에게) 저 친구가 자네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 주었나?
샤우봐 그럼, 목소리가 좀 내가 좋지는 않지만.
무장 기병 2 그건 그래. (아쯔닥에게) 계속해 봐.
아쯔닥 두 번째 소절은 평화에 관한 이야기일세. (노래한다)
[노래시작]
감투는 넘쳐 흘러, 감투 쓴 사람들의 꼬리가
길거리까지 흘러 넘쳤네.
강물이 넘쳐 강뚝을 넘으면
논밭을 황폐하게 휩쓰는 법
살이 쪄 바지를 내리지도 못하는 부유한 자들이 제국을 다스리고
서넛도 셀 수 없는 이 자들의 식탁에는
수십 가지 음식이 널려 있다.
농부가 옥수수를 재배하고 살 사람을 둘러보면
오직 배고픔에 허덕이는 사람들 뿐이고
베짜는 직조공은 넝마를 걸치고 베틀에서 내린다네.
그런 게 사실이지? 그런 게 사실이지?
샤우봐 그렇고 말고, 그렇지 그래. 그렇고 말구.
아쯔닥 그래서 우리의 아들들은 이젠 피흘리지 않으며,
우리의 딸들은 더 이상 울지를 않네.
그래서 도살장에서 계집소들만이 피를 흘리고
우르미 호수가 잡풀만이
아침나절 눈물을 흘린다네.
무장 기병 1 (잠시후) 그 따위 노래를 지금 이런 곳에서 불러도 된다는 거야?
아쯔닥 뭐가 잘못 되었나?
무장 기병 1 저기 불타오르는 게 보이지 않나? (아쯔닥이 둘러 본다. 하늘이 온통 불꽃으로 벌겋다,) 시내 외곽에서야. 오늘 아침 카쯔베키 영주께선 아바슈뷜리 총독의 머리를 잘라 버리셨는데, 양탄자 직조공들이 소위 그 놈의 페르시아 병에 걸려 카츠베키 영주도 역시 진수성찬을 퍼먹는 그런 부류라고 생각하고는, 오늘 점심때 결국 재판관나리의 목을 매달아 죽였던 거여. 그러나 우리가 그 직조공 놈들을 묵사발 만들어 버렸지. 한 놈 조지는데 두냥씩 받고 말야, 알아 듣겠나?
아쯔닥 (한참 후에) 알아 듣겠소. (무장 기병들의 시선을 피하고는 옆으로 슬슬 피해 달아나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는 손에 머리를 박는다)
무장 기병 1 (모두들 한바탕 술을 마시고는 무장 기병 3에게) 잘 봐 두라고, 어떻게 되나. (기갑병 1과 2가 아쯔닥 쪽으로 가서는 도망 못가게 길을 막는다.)
샤우봐 군인 양반들, 저 친구가 사실 그렇게 속속들이 썩은 인간은 아닙니다. 어쩌다가 닭서리나 하고 여기저기서 토끼 사냥은 좀 하지만요.
무장 기병 2 (아쯔닥에게 다가가) 어수선한데 무언가 한탕 해 보려고 네놈이 이 곳에 온 것이지? 그렇지!
아쯔닥 (올려다 보며) 왜 이곳으로 왔는지 나도 사실은 잘 모르겠소.
무장 기병 2 네놈도 저 양탄자 직조공들에 동참하는 놈들 중의 하나지? (아쯔닥 머릴 흔든다) 그런데 그 노랜 무슨 뜻이야?
아쯔닥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노래라니까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숙한 분이셨지요.
무장 기병 2 좋아. 그런데 임금을 지불했다는 염색공 이야기는 뭐야?
아쯔닥 페르시아에서 그랬었다니까.
무장 기병 1 대공나리를 네놈 손으로 직접 요절을 못 냈다고 자아비판을 한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한다?
아쯔닥 대공나리를 피신토록 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소?
샤우봐 내가 증언을 할 수 있소. 정말 도망가도록 해 준거요. (무장 기병들은 악을 쓰는 아쯔닥을 교수대로 질질 끌고 가다가 놓아 주고는 징그럽게 웃어 제낀다. 아쯔닥도 같이 웃어 준다. 제일 크게 웃는다. 아쯔닥의 포승줄을 풀어 주고는 모두들 마시기 시작한다. 살찐 영주가 젊은 사내와 함께 등장한다)
무장 기병 1 (아쯔닥에게) 이제 드디어 네 놈이 말하는 심판의 순간이 도래하고 있는기라. (또 한 번 박장대소)
살찐 영주 동지들, 무슨 일이길래 이리들 웃고 난리들이요? 나는 심각한 얘기를 해야 겠소. 그루지니엔 영주들은 어제 아침 대공정부를 무너뜨렸소. 전쟁을 계속 고집하는 대공을 따르는 총독들을 모두 물리친 것이요. 유감스럽게도 대공만은 도망치고 말았소. 이런 엄청난 역사적인 순간에 양탄자 직조공들이, 이런 발광밖에 모르는 놈들 같으니라고. 이 놈들이 글쎄 어리석게도 혁명의 실끈을 잡기는 커녕 누구나 다 경외하는 우리의 재판관을, 친애하는 일로 오르벨리아니 재판관을 목 매달아 죽였단 말입니다. 쯔쯔쯔.... 등지 여러분, 우리는 평화가 필요합니다. 평화말입니다. 이 그루지니엔의 평화가! 그리고 정의도! 여기 여러분께 그래서 본인의 사촌인 비째르간 카츠베키를 데리고 왔소. 재주가 뛰어난 젊은이요. 이 곳의 새 재판관이 되는 것이 어떨까 하오. 결정은 민중 여러분 스스로 하시오.
무장 기병 1 그러니까 우리가 직접 재판관을 선출한다, 이 말씀이시요?
살찐 영주 바로 그렇소. 민중 스스로 이 출중한 젊은이를 추천해 주시오. 동지들, 의논들 해보시오. (무장 기병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동안에) 침착하게 있어, 이 문둥아. 이 자리는 네 것이야. 대공이 잡히는 날이면 그 때는 이런 거지. 발싸게 같은 놈들과 이러쿵 저러쿵 시비 걸 필요도 없다구.
무장 기병들 (자기들끼리)
- 대공이 아직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저 것들이 겁이 잔뜩 들어 있는 기라.
- 저 면서기 덕을 우리가 톡톡히 보는 셈이지. 저 놈이 대공을 도망치게 했거든.
- 불안하니까 저 것들이 동지들 운운하며 '민중 여러분이 스스로 결정하시오.' 이렇게 우리에게 아양떠는 소리를 하는 거다.
- 이제와서 뭐 그루지니엔에 정의를 구현하신다고?
- 농거리는 농거리로 조져야 된다. 농거리에 머물게. 면서기에게 물어 보자. 저 놈은 정의 나부랭이가 무엇인지 알거든. 야, 임마....
아쯔닥 나한테 하는 소리요?
무장 기병 1 (말을 계속 이어) 너 같으면 영주의 조카를 재판관으로 모시겠나?
아쯔닥 정말 나한테 묻는 거요? 설마 나한테 묻는 것은 아니겠지?
무장 기병 2 그렇다니까! 장난삼아 해보자고!
아쯔닥 그러니까, 저 친구를 철저하게 시험해 보자 이런 뜻인가? 내말이 맞지? 죄진 놈이 하나 여기 있다면 그 놈을 가지고 어떻게 다루는지 그 후보자의 능력을 평가하고 싶다 이거지? 아주 듬직한 놈이 하나 있다면?
무장 기병 3 가만 있자, 총독 마누라쟁이의 의사 두 놈이 저 아래 잡혀 있는데, 그 놈들을 데려오지.
아쯔닥 잠깐, 그건 안돼. 재판관이 임명 안된 상태에서는 진짜배기 범죄자를 선택해서는 안되는 것야. 재판관야 어떤 곰동지라도 상관없지만 좌우간 그 자리에 그런 놈이라도 일단 임명 돼 있어야 하는 법이라 이거야. 그래야 법이란 것이 손상을 받지 않거든. 법이란 놈은 원래 백혈구를 만드는 비장과 같이 예민한 놈이라 주먹으로 때려 조질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놈이 없으면 죽음이 밀려오는 법이지. 그 두놈은 목 매달아 죽어버려. 재판관이 아직 자리에 없는 때니까 법의 손상은 있을 수 없다구. 정의를 구현한답시고 엄숙하게 지껄여대는 것처럼 웃기는 일은 없어. 예를 들어보지, 어떤 재판관이 어린아이 주려고 옥수수를 훔친 어떤 여자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려는데 법관옷을 입지 않았거나 혹은 판결을 내리면서 긁적거리다가 옷이 거의 다 흘러내리고, 옳다구나 또 넓적다리를 긁어 댄다면 그런 판결은 치욕이요, 법은 법대로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벌거벗은 재판관 보다는 법관옷이나 법관모자가 판결을 내리는 셈이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법이고 뭐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법이라고. 포도주 한 통 맛보려고 우선 개자식에게 시음하라고 줘 봐, 한 모금도 안 남지. 다 마셔 버렸을 테니까.
무장 기병 1 그래, 어떻게 해보자는 것인가, 이 덥석부리 친구야?
아쯔닥 그럼 이몸이 피고역을 한번 해보여 드리리다. 한 사람 떠올랐소. (무장 기병들의 귀에다 무언가 속삭인다)
무장 기병 1 자네가?
(모두들 죽어라 웃어댄다)
살찐 영주 그래 어떻게들 결정을 보았나?
무장 기병 1 결정을 보았습니다. 시험을 한번 해 보기로 말이죠. 여기 이 쓸만한 친구가 피고 역할을 하겠답니다. 저 후보가 앉을 재판관석이 여기 있습니다.
살찐 영주 그것 참 흔치 않은 일이군. 하지만 나쁠 건 없지. (조카에게) 문둥아, 누워서 떡먹기다. 배운대로 본때를 보여줘라. 구렁이 같은 놈인지, 족제비 같은 놈인지.
조카 살캥이 같이 해보죠. 아저씨.
(조카는 의자에 앉고, 살찐 영주는 그 뒤에 선다. 무장기병들은 층계에 앉아 있고, 아쯔닥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대공의 모습을 흉내내며 들어온다)
아쯔닥 여기 혹 나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나는 바로 대공이다.
살찐 영주 저 놈이 누구라고?
무장 기병 2 대공이래. 저 놈은 정말 대공을 알거든요.
살찐 영주 좋을대로 해.
무장 기병 1 재판을 시작해라.
아쯔닥 들어라. 나는 전쟁 도발로 인해 기소되었다. 우습지도 않다, 가소롭단 말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혹 부족할 것 같아 변호사들을 이 곳에 대동했다. 오백은 실히 되리라. (자기 주위에 많은 변호사가 있는 듯 뒤를 가리킨다) 내 변호사들이 앉을 자리가 이 법정에는 부족하겠구나. (무장 기병들이 웃어대고, 살찐 영주도 함께 웃는다)
조카 (무장 기병들에게) 나보고 이 사건을 맡아 보란 말이요? 우선 말해 두겠는데 뭔가 예사롭지가 않아, 재수 없는 냄새가 난다구.
무장 기병 1 시작해라.
살찐 영주 (씨익 웃으며) 단 번에 조져버려, 문둥아.
조카 알았어요. 그루지니엔 민중과 대공의 재판이다. 피고는 할 말이 있는가?
아쯔닥 있다 마다. 전쟁에 패했다는 소식을 이 몸도 익히 알고 있다. 그 당시 카츠베키 아저씨와 같은 애국자들의 충고를 받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므로 카츠베키 아저씨를 증인으로 신청하는 바이다. (무장 기병들이 웃는다)
살찐 영주 (무장 기병들에게 친밀하게) 기가 막힌 놈이군 그래, 응?
조카 요구는 기각한다. 전쟁을 선포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피고가 기소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일쯤은 통치자야 이따금씩 하는 법이니까. 문제는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쯔닥 말도 안되는 소리. 나는 전쟁을 수행한 적이 없다. 수행 시켰을 뿐이다. 즉 영주들에게 전쟁을 수행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물론 그놈들이 전쟁을 일부러 망쳐 놓았다.
조카 피고는 그러니까 명령 통수권을 가졌던 자체를 통째로 부인하는 것이오?
아쯔닥 부인하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 나는 언제나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유모에게 명령하기 시작했고 뒷간에서 똥 쌀 때도 명령하라고 교육을 받았다. 명령하는 데는 이력이 나 있다. 관리들에게 국가 금고를 훔치라고 늘 명령했다. 내가 명령을 하니까 장교들이 졸병들을 패대는 것이다. 또 엄하게 명령을 내리니까 대지주 양반들이 농부의 여편네들을 끼고 자는 것이다, 카츠베키 아저씨도 내 명령에 따라 뚱뚱한 배를 가지고 있단 말이다.
무장 기병들 (박수를 쳐대며) 그놈 잘 헌다- 대공 만세!
살찐 영주 문둥아, 답변을 해주어야지. 내가 옆에 있다.
조카 피고에게 답변을 하겠습니다. 법정의 품위에 어울리게. 피고는 법정의 품위를 지키시오.
아쯔닥 동의한다. 나는 재판을 계속할 것을 명령한다.
조카 내게 명령할 필요는 없소. 그러니까 영주들 간청에 못 이겨 전쟁을 선포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럼 영주들이 전쟁을 망쳐 놓았다는 주장은 또 무엇이오?
아쯔닥 군인들을 넉넉히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돈을 슬쩍 떼어 먹고, 병든 말을 보냈고, 진격 나발이 불 때는 사창굴에 쳐박혀 술을 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키츠베키 아저씨를 증인으로 신청하는 바이다. (무장 기병들이 웃는다)
조카 이 나라의 영주들이 싸움을 하지 않았다는 믿기 어려운 주장을 내세운단 말이요?
아쯔닥 아니다. 영주들이 싸우기는 했다. 하지만 군수물자계약을 위해 전쟁을 했던 것이다.
살찐 영주 너무 지나친데, 저 놈은 양탄자 직조공들과 말투가 같아.
아쯔닥 그래? 나는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살찐 영주 교수형! 교수형이다!
무장 기병 1 조용히 좀 하슈, 계속 하시지요. 각하.
조카 조용히들 하시오. 이제 판결을 내리겠소. '교수형에 처함' 목을 매단다.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선고는 끝났다. 상고는 기각한다. 압송하라!
살찐 영주 (신경질적으로) 압송하라! 압송! 압송!
아쯔닥 젊은 양반, 내 진지하게 충고하리다. 공개석상에서는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한숨에 몰아세우는 말투를 써서는 끝장이야. 늑대처럼 울어제쳐서는 개 같은 하수인의 자리를 얻지는 못하는 법이다.
살찐 영주 목 매달아라!
아쯔닥 영주들이 대공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얘기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되면 대공이고 영주들이고 모두 목을 매달게 마련이지. 더구나 내가 받은 판결이 전쟁에 졌다는 이유인데 영주들은 전쟁에 패하기는 커녕 승리한 것이란 말이다. 3863000냥을 군마에 지불케 하고는 한마리도 우송하지 않았던 것이다.
살찐 영주 못 매라!
아쯔닥 군대 급식비로 824000냥을 지불하고도 쌀 한톨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살찐 영주 목 매달아!
아쯔닥 그러니까 영주들은 전쟁의 승리자인 셈이다. 전쟁에서 잃은 사람은 다름아닌 이 법정에서 나와 있지 않은 많은 그루지니엔 민중들이란 말이다.
살찐 영주 동지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아쯔닥에게) 자넨 꺼지는 게 좋겠어. 악담이 너무 심해. (무장 기병들에게) 자, 동지들. 이제 새 재판관을 결정해 보는 게 어때!
무장 기병 1 예, 그렇게 합시다. 저 법관복을 벗겨 내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등을 타고 이미 교수형을 당한 사람의 옷을 걷어 낸다.) 이봐 자네는 (조카에게) 꺼져 버려! 이 정의로운 의자에는 걸맞는 놈이 앉아야 된다구. (아쯔닥에게) 이리 나와 법관석으로 가게. (아쯔닥이 망설인다) 거기 앉아, 이 사람아. (무장기병들이 아쯔닥을 끌어 앉힌다) 재판관은 늘 망나니였으니 이제 망나니가 정말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 (법관 옷을 걸쳐 주고 술바구니를 머리에 얹는다) 봐라, 여기 이 재판관을!
가수 온 나라는 내란에 휩싸여 있었고,
지배자들은 불안에 떨고 있을 그때
무장 기병들은 아쯔닥을 재판관으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아쯔닥은 2년 동안이나
재판관 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수와 악사 커다란 불기둥이 일어나고
시내마다 피바다로 가득차 넘칠 때,
밑바닥에서는 거미와 바퀴벌레들이 기어 나왔다.
성문 앞에는 도살자가,
교회 제단 앞에는 신을 욕되게 하는 자가 서 있었을 때,
그 때 아쯔닥은 법관의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사과를 깎으면서 아즈닥이 재판관석에 앉아 있다. 샤우봐가 비를 들고 법정을 쓸고 있다. 한 쪽에는 반신불수가 휠채어에 앉아 있고, 고소를 당한 의사와 절름발이 한 사람이 서 있다. 다른 쪽에는 공갈협박혐의로 고소당한 젊은이가 있다. 무장 기병 하나가 군기발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다.)
아쯔닥 소송사건이 너무 많으므로 오늘 본 법정은 동시에 두 사건씩 취급하겠다.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공지사항을 전한다. 바쳐라! (손을 내민다. 공갈협박혐의자만이 돈을 꺼내준다) 본 법정의 명예를 실추시킨 자들은 (반신불수를 힐끗보며) 형벌을 받게 될 거다. (의사에게) 피고는 의사이고, 자네는 (반신불수에게) 이 의사를 고발했는데, 이 의사 때문에 지금과 같은 꼴이 되었는가?
반신불수 그렇습니다, 저 의사놈 때문에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쯔닥 그렇다면 직업상의 직무 유기가 되겠군.
반신불수 직무유기 정도가 아닙니다. 저 인간에게 의학공부 하는데 필요한 돈을 빌려 주었드랬습니다만 한 푼도 되돌려 갚지 않았습니다요. 더군다나 환자들을 공짜로 치료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졸도를 하고 말았습죠.
아쯔닥 능히 그럴 만 하겠다. (절름발이에게) 그런데 자네는 무슨 일이지?
절름발이 저는 환자입니다요, 나리.
아쯔닥 저 의사가 자네 다리를 치료했나?
절름발이 제 다른 쪽 다리를 했습죠. 왼쪽 발에 관절염이 있었는데 수술받은 곳은 오른 쪽 발이었거든요. 그래서 절뚝거리게 되었습죠.
아쯔닥 그런데 공짜였단 말이지?
반신불수 500냥자리 수술을 공짜로 하다니! 한 푼 안받고! 자선사업을 한 거죠. 저런 인간에게 학자금을 빌려주다니. (의사에게)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단 말여. 공짜로 수술하라고?
의사 재판관 각하, 수술전에 수술비용을 받는 것이 상례입니다. 환자란 수술 전에 돈을 순순히 내는 법이니까요. 그야 뭐 인간이면 자명한 일이겠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이 경우는 제 비서가 미리 수술비를 받았으리라 제가 믿고 수술에 임했기 때문에 착오가 일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신불수 착오가 생겼다고?! 좋은 의사는 실수하지 않는 법이야. 수술하려면 미리 자세히 알 아 봐야지.
아쯔닥 그 말이 옳다. (샤우봐에게) 다른 소송사건은 어떤 것이요, 검사양반?
샤우봐 (세차게 비질을 한다.) 공갈협박입니다.
협박자 재판관 나리, 소인은 죄가 없습니다. 소인은 그 문제의 지주나리한테 자기 질녀를 정말 강간을 했는지 알아 보려고 했을 뿐인데, 지주나리께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아주 친절하게 밝히면서 제게 돈을 집어 주더구만요. 그래서 그 돈으로 소인의 아저씨가 음악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 주었습니다.
아쯔닥 아하! (의사에게) 그런데 당신은 당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형벌을 낮출만 한 이유를 댈 수가 있겠소?
의사 있고 말고요,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 아닙니까?
아쯔닥 좋은 의사는 책임감이 투철해야 됨을 자네도 잘 알고 있을 법한데, 더군다나 돈 문제가 아닌가? 어떤 의사가 삔 손가락을 고치는데, 엉터리 의사 같으면 놓쳐 버렸을테지만 혈액순환에 이상이 있다고 진단을 하고는 1000냥을 긁어 먹었다는 거야. 또 한 번은 쓸개가 웬만 한데도 이리저리 진찰을 하고는 한 재산을 모으기도 했다누만. 의사 양반, 자네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곡물상점 주인 욱쓰가 자기 아들에게 의학을 가르쳤다는데 실은 장사를 배우라는 뜻이었다 이거야. 우리나라에서도 의과 대학에서 장사를 잘 배울 수 있는 거라 이거지. (협박자에게) 그 지주의 이름이 무엇인가?
샤우봐 이름을 밝히지 말라 했습니다요.
아쯔닥 그럼 판결을 내리겠다. 이 공갈협박의 경우 본 법정에서는 증거가 확실한 것으로 간주한다. (반신불수에게) 피고는 1000냥의 벌금형에 처한다. 또 한 번 졸도를 하게 되면 저 의사가 공짜로 머리 진찰을 해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절단 수술도. (절름발이에게) 자네는 손해배상으로 꼬냑 한 병을 받도록 선고한다. (협박자에게) 지주에게서 받은 돈의 절반을 저 검사나리에게 지불해야 한다. 본 법정에 대지주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벌금이다. 끝으로 본 법정은 피고인에게 의학을 공부할 것을 권하는 바이다. 이 분야에 재주가 있어 보이니까. 그리고 의사, 당신은 의사로서 용서될 수 없는 큰 실수을 범한 고로 무죄를 선고한다. 다음 사건!
가수와 악사 아! 하고자 한다해서 모두가
옳지만은 않구나
그러나 옳은 일들은 또 얼마나 무서운가
그러니 법의 모습은 안개에 갇힌 듯 막연하고.
그래서 정의를 가다듬고 밝혀 줄
사람을 찾으니
아쯔닥이 우리에게 단돈 한 푼을 받으며
이를 보여주는 구나.
(국도 옆에 붙어있는 간이 숙박소에게 아쯔닥이 나오고 그 뒤를 긴 수염의 주인이 따른다. 하인과 샤우봐가 재판관석을 질질 끌며 뒤따른다. 무장기병 하나가 군깃발을 들고 보초를 선다.)
아쯔닥 이 곳으로 갖다 놓게. 이곳은 제법 공기도 좋고 저 쪽에서 불어오는 레몬나무 숲 향기도 그윽하구나. 법정을 야외에서 갖는 것도 일품이다. 바람이 부니 법의 옷자락이 나부끼고 벌거벗겨진 법정의 모습이 들어나는구나. 샤우봐,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이 시찰재판은 몹시 힘들다. (주인에게) 그러니까 며느리에 관한 일이라 하셨지요?
노인 나으리, 우리 가문의 명예가 걸린 문제올시다. 사업때문에 산너머에 가 있는 아들을 대신해서 제가 고소를 하는 바 입니다. 이 놈이 그 못된 짓을 저지른 하인 녀석이고 여기 이 애가 변을 당한 며늘아이입니다.
(풍만한 몸매를 가진 며느리가 나온다. 차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아쯔닥 (앉는다) 바쳐라. (주인은 한숨을 쉬면서 돈을 준다) 자, 그럼 형식절차는 이 정도로 해두고. 그러니까 강간사건인가?
주인 나리, 마굿간에서 저 놈이 우리 루도뷔카 며늘아이를 짚더미에 눕히고 있는 참에 제가 들이닥쳤습니다요.
아쯔닥 옳거니, 마굿간이라. 말들은 기가 막히더군. 누리끼리한 그 조그마한 말이 특별히 내 마음에 들었다.
주인 제 아들 대신에 소인이 즉시 루도뷔카에게 회개하도록 물론 조처를 취했습니다.
아쯔닥 (진지하게) 그 놈이 내 마음에 썩 들었다.
주인 (차갑게) 뭐라고? 저 놈이 강제로 끼고 잤다고 루도뷔카가 고백했는데도요.
아쯔닥 차일을 벗어라, 루도뷔카. (시키는데로 한다.) 루도뷔카, 본 법정은 네가 마음에 든다. 사실이 어떠했는지 고해 보아라.
루도뷔카 (외운다) 새로 태어난 망아지를 보려고 마굿간에 갔는데 글쎄, 저 하인이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제게 하질 않겠어요. '오늘은 몹시 덥구만.' 그리고는 제 왼쪽 젖가슴에 손을 얹는 거예요. 그때 제가 말했죠. '이러지 마세요.' 그런데도 계속해서 망칙스럽게 손으로 더듬거리는 거예요. 저는 참을 수가 없이 화가 났지요. 흉칙스런 생각을 미쳐 깨닫지도 못하는데 어느새 제게 찰싹 달라붙는 거였어요. 시아버님께서 들어 오셔서 모르고 제 발을 밟는 바람에 들통이 난 거죠.
주인 (설명하듯이) 제 아들놈 대신에 말입니다.
아쯔닥 (하인에게) 네가 시작한 게 사실이냐?
하인 그렇습니다요.
아쯔닥 루도뷔카, 단 것을 좋아하나?
루도뷔카 그러믄요. 해바라기씨 까먹는 거.
아쯔닥 목욕탕에는 으례 오래 앉아 있지?
루도뷔카 한 반시간 정도지요, 뭐.
아쯔닥 검사양반. 자네 칼을 저 바닥에 놓게나. (샤우봐 그대로 한다) 루도뷔카, 가서 검사 양반의 칼을 잡아 올려라. (루도뷔카가 궁둥이를 흔들면서 칼이 있는 곳으로 가서 집어든다)
아쯔닥 (루도뷔카를 가리키며) 여러분들 보았소? 엉덩이를 어떻게 흔드는지. 범죄의 부분이 드러난 거요. 강간은 증명이 되었다. 너무 많이 먹고, 특히 단 것을 좋아하고, 따뜻한 물 속에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고, 게으름을 피우다보니 몸이 나긋거려 결국 저 불쌍한 놈을 그 곳에서 강간하게 된 것이다. 네 년이 그 궁뎅이를 가지고 마음대로 싸다닐 수 있다고, 더구나 이 법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더란 말이냐? 그 위험한 무기를 가지고 법정을 의도적으로 공격한 셈이다. 아들 대신에 네 시애비가 타고 다니곤 하던 그 작은, 누리끼리한 말을 이 법정에 헌납하도록 판결한다. 나와 함께 마굿간으로 가보자. 이 법정은 현장을 직접 보고 싶구나. 루도뷔카. (그루지니엔의 국도를 따라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아쯔닥은 군인들이 메고다니는 재판관석에 앉아 돌아다닌다. 샤우봐가 교수대를 끌고, 하인은 조그만 말을 끌고 그의 뒤를 따른다.)
가수와 악사 높은 양반들이 서로 물어뜯고 쓰러지면,
밑의 것들은 기쁘기만 하였다.
이제는 더이상 빼앗고 훔치는 싸움도 없었다.
그루지니엔의 꽃 만발한 국도를 지나
속임수 저울로 무장한 채
가난한 사람들의 재판관
아쯔닥이 자리를 옮겼다.
부유한 자에게서 받은 돈을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돌려 주었다.
채 마르지 않은 판결의 붉은 도장,
이 도장의 자국이 이 재판관의 상징이었다.
건달들의 보호를 받으며
때로는 공정하고 때로는 그릇된
그루지니엔 대지를 떠돌며
재판관 아쯔닥은
그 자리를 옮겼다. (작은 행렬이 멀어진다)
오시오, 사랑하는 이웃에게로
날이 잘 다듬어진 도끼를 가지고
골치 아프게 하는 성경귀절일랑 집어 치우고
차라리 허튼 소리를 하며
쓸데없는 설교 나부랭이가 무슨 소용이리요.
보시요,
도끼들이 기적을 행하는 것을
이제 아쯔닥의 기적을
믿으시오.
(아즈닥이 탄 재판관석이 포도주 술집에 놓인다. 대지주 세사람이 아쯔닥 앞에 선다. 샤우봐는 아쯔닥에게 포도주를 갖다 준다. 귀퉁이에는 시골 노파가 서 있고, 마을사람들이 밖에 서서 들여다 보고 있는 모습이 열려진 문으로 보인다. 무장 군인 하나가 군깃발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다)
아쯔닥 검사나리께서 말씀이 있겠다.
샤우봐 소 한 마리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대지주 쓰루에게 속하는 소 한마리가 오주일 전부터 피고 할머니의 집에 머물고 있다 합니다. 이 할머니는 또 훈제된 고깃덩이의 절도 혐의로 고소되었고, 대지주 슈테프가 이 할미에게 밭의 소작료를 지불하라고 요구하자 이 때문인지 자기 소들이 죽어갔다고 합니다.
대지주들 - 훈제 고깃덩이 말입니다, 나리.
- 소 한마리 때문입니다, 나으리.
- 밭뙤기를 떼 주었는뎁쇼, 나리.
아쯔닥 할미, 하실 말씀 있으시오?
노파 나으리, 오주 전 아직 컴컴한 새벽녘에 누군가 제 집문을 두드렸습니다요. 밖에는 털복숭이 사내가 소를 한 마리 끌고 와서는 말하길, '착한 할멈, 기적을 행하는 꺽정성자 올시다. 아드님이 전쟁에 나가 죽었다해서 아드님 생각하라고 소를 한 마리 가져왔으니 잘 키우시오.'
대지주들 - 나리, 그 놈이 바로 이라클리 도둑입니다.
- 저 노파의 사위 녀석입니다! 소도둑, 불 싸지르는 놈이지요.
-목을 쳐 죽여야 마땅합니다요!
(밖에서 여인의 비명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우왕좌왕 뒤로 물러난다. 커다란 도끼를 들고 이라클리 도둑이 들어온다)
대지주들 도둑 이라클리다. (성호를 그린다)
도둑 안녕들 하슈, 여러분네들! 포도주 한 잔 얻어 마십시다.
아쯔닥 검사영감, 손님에게 포도주 한 통 갖다주구려. 그래 당신은 누구요?
도둑 이곳 저곳 떠다니는 세상을 등지고 사는 놈 입습죠, 나리. 하사하신 포도주 고맙습니다. (샤우봐가 갖다준 포도주잔을 비운다) 한 잔 더 주쇼.
아쯔닥 아쯔닥이라고 하오. (일어나서 머릴 숙여 인사한다. 도둑도 그런 식으로 답례한다.) 이 법정은 낯선 은둔자를 환영하는 바이오. 할미, 이야기를 계속해 보시오.
노파 나으리, 첫날 밤에는 그 꺽정성자가 정말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지요. 소 한 마리 였거든요. 그런데 몇 일 지난 후 한밤중인데 지주나리들의 머슴들이 몰려와서는 소를 뺏아 가려는 거예요. 하지만 집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소를 내버려둔 채 뺑소니를 치는데 머리에는 주먹만한 혹들이 났더군요. 그제야 소인은 꺽정성자님이 머슴녀석들의 마음을 바꾸어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알았습니다요.
(도둑은 크게 웃는다)
대지주1 그 머슴녀석들이 무엇때문에 그렇게 딴사람이 됐는지 나는 알고 있소.
아쯔닥 알았다,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라. 계속 하시구려.
노파 나으리, 그리고 바로 저 슈테프 지주나리가 그 다음 차례로 아주 착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요. 저 나리가 악독한 사람이란 것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뎁쇼. 그러니까 꺽정성자님이 손을 쓰셔서 한 뼘 밖에 안되는 소작농에서 나오는 소작료를 저 지주나리가 면제해 주게 된 것입습죠.
대지주2 밭에서 소들이 칼을 맞고 죽어간단 말이야. (도둑이 크게 웃는다)
노파 (아쯔닥의 손짓을 받고) 그리고 어느날 아침에는 훈제된 고깃덩이가 창문으로 날아 들어 왔습죠. 가슴팍에 맞아서 아직도 몸을 잘 쓰지를 못하지요. 보세요, 나으리. (몇 발 걸어 보인다. (도둑이 웃는다) 나으리, 이 늙은 가난뱅이 여편네에게 고깃덩이가 그냥 날아올라가 이 세상천지에 어찌 있겠습니까요. 이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도둑은 흐느끼기 시작한다)
아쯔닥 (자리에서 일어나) 할멈, 이 법정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소. 제발 이 곳에 앉아 주시구료. (노파는 주저주저 재판관석에 앉는다. 아쯔닥은 포도주잔을 든 채, 바닥에 앉는다)
아쯔닥 할미를 구루지니엔의 어머리라고 부르고 싶구료. 고통을 참고 견디는 아들들을 전쟁에서 빼앗긴, 그루지니엔의 어미라고! 주먹으로 얻어 맞은 여인아, 소 한 마리를 얻게 되면 눈물을 흘리며 희망에 부푸는. 얻어 맞지 않으면 또 그것을 더욱 신기하게 여기는 할미야! 우리 저주 받을 인간들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구려. (대지주들에게 고함을 쳐댄다) 기적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놈들! 네 놈들은 모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죄로 500냥씩 벌금에 처한다. 어서 꺼지지 못해! (대지주들은 슬며시 나간다)
아쯔닥 할미야, 그리고 경건한 양반아, 우리 검사양반과 이 아쯔닥과 함께 포도주 통을 비우자꾸나.
가수와 악사 이와 같이 아쯔닥은 한 덩이의 빵을 주무르 듯
법을 자기 방식대로 만들어 나갔다.
훼손되어 망가진 법의 모서리로
민중을 인도하니
하잘것 없고 비천한 사람들은
드디어 한 사람을,
마침내는 빈 손으로도 매수할 수 있는
재판관 아쯔닥을 얻게 되었다.
칠백 이십일 동안이나 거짓 저울로
이들의 소송사건을 저울질하였고
건달들의 말투로 판결을 내렸으며
아쯔닥이 앉은 재판석 위에는
교수대의 석가래가 걸려 있었고
뼈가 숨어있는 법의 판결이 아쯔닥에게서 솟아 나왔다.
가수 무질서의 시대가 끝나자
대공은 다시 돌아왔다.
총독의 부인이 돌아오자 결국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새로이 죽어 갔고
도시 외곽이 또 다시 불타게 되자
아쯔닥은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쯔닥의 재판관석이, 다시금 법정 안에 놓여 있었다. 아쯔닥은 바닥에 앉아 샤우봐와 이야기하며 신을 깁고 있다. 밖이 소란하다. 벽 뒤로 살찐 영주의 목이 창에 꽃혀 지나간다)
아쯔닥 이봐, 샤우봐. 자네가 내 밑에서 일한 날짜를 난 잘 기억하고 있네. 어쩌면 분까지 정확하게. 정말 오랫동안 자네에게 이성이란 재갈을 물려 놓았지. 입이 찢어지고 피가 나도록 말야. 이성의 모진 매를 가하기도 했고, 논리의 이름아래 자네를 혹사 시키기도 했었지. 자네는 원래부터 허약한 인간이야. 자네를 간교하게 논리의 와중에 밀어 넣으면 허겁대며 그 속에 빠져버리는 그런 놈이란 말여. 자네의 속성에 맞춰 좀 더 높은 차원의 것에 침을 좀 삼켜 보아야 된단 말일세. 점 더 높은 차원의 것은 물론 여러가지가 될 수 있지. 그러니 이제 자네가 내게서 벗어날 때가 되었네. 그러면 저속하기 그지없는 자네의 그 충동에 따라 다시 날뛸 수가 수가 있겠지. 자네의 그 감출 수 없는 본능에 따라 말일세. 자네의 그 펑퍼짐한 발바닥에 인간적인 모습을 갖도록 가르치는 그 본능 말이지. 이제 혼란의, 무질서의 시대를 겪었지만. 그런데도 위대한 새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단 말이야. '혼란의 노래'에서 내가 지적하는 그런 시대는. 그 멋진 시대를 추억하며 다시 한 번 우리끼리 불러봄세. 앉게나. 가락을 틀리지 말고. 걱정할 것 없어, 누가 들으면 어떤가. 훌륭한 운률의 노래라네. (노래한다)
[노래시작] 누나야, 얼굴을 가려라.
오빠야, 칼을 가지고 오너라.
걷잡을 수 없는 시대가 오고 말았다.
귀하신 분들은 고난에 휩싸이고
미천한 사람들은 기쁨에 넘치고 있다.
도심에서 말하기를 : 세도 부리는 자들을 시내에서 내몰자!
그리하여 관공서에 난입했고
노비문서가 찢겨 졌다.
주인들을 커다란 맷돌에 잡아 묶었다.
이런 날들 미처 예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쫓겨나고 말았다.
박달나무로 만든 교회의 자선함이 박살나고
그 화려한 성당의 마루바닥은 조각을 내어
침대를 만든다.
빵을 가지고 있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는 곳간을 갖게 되었고
곡물 배급을 받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 곡물을 배급한다.
샤우봐 오,오,오,오!
아쯔닥 장군아, 어데 있소? 제발, 제발이지 질서를 찾아주시오.
지체 높던 양반의 아들은 이제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마님의 아이는 부리던 여종의 아들이 된다.
시의원님들은 헛간에 잠자리를 구하고,
담벽에서나 겨우 잠자리를 찾던 사람들이
이제는 침대에 사지를 뻗고 누웠고나.
쪽배를 노 젖는 자들이 이제는 큰 배를 소유하게 되었고
배의 임자들은 멍하니 자기들 배를 쳐다보아도
이제는 자기들 배가 아니니.
주인들은 다섯 사람을 피신하였더니, 이 사람들이 말하기를 :
이제는 당신들이 직접 찾아가 보시오.
우리는 갈 데까지 갔으니,
샤우봐 오,오,오!
아쯔닥 장군아, 어데 있소? 제발, 제발, 제발이지 질서를 바로 잡아주오!
[노래끝]
그래, 무질서가 조금만 더 지속되었더라도 우리에게 무슨 변화가 오고야 말았을 거야. 그런데 이제 내가 생명을 구해준 그 대공나리가 서울로 다시 돌아온 거야. 페르시아가 대공에게 군대를 빌려주어서 질서를 다시 회복하고 있는 거지. 시 외곽이 불타기 시작했고! 내가 늘 앉고는 하던 저 두꺼운 책을 이리 가지고 오게. (샤우봐가 재판관석에서 책을 가져다 주자 아쯔닥이 펼쳐본다) 이것이 법전이야. 늘 이용하곤 했지. 자네가 증언할 수 있겠지.
샤우봐 예, 늘 깔고 앉으셨지요.
아쯔닥 이제는 좀 더 자세히 뒤져 봐야겠다. 그 놈들이 나를 작살을 내게 될테니 말야. 못가진 사람들을 눈감아 주었으니, 크게 댓가를 치루게 될 거라구, 나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펴 주었으니 그 놈들이 술주정을 트집잡아 나를 목 매달아 죽일 것일세. 부자놈들의 주머니를 털어 먹었어. 변명의 여지가 없다구. 더군다나 어디 숨을 데도 없어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내가 돕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샤우봐 누가 오는데요.
아쯔닥 (헐레벌떡 일어나더니 벌벌 떨며 재판관석으로 간다) 이제 끝장이야. 그렇다고 대담한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더욱 고소해할테고. 무릎을 꿇고 부탁하네, 나를 불쌍히 여겨 내곁을 떠나지 말게나. 침이 말라 오는군. 죽음의 공포를 느끼네. (총독 부인 나텔라 아바슈뷜리, 집행관 그리고 무장군인 하나가 들어 온다)
총독부인 샬봐, 저 작자는 누구야?
아쯔닥 마님, 분부만 기다리는 그런 충직한 놈입니다요.
집행관 작고하신 총독 각하의 부인, 나텔라 아바슈뷜리 마님께서 이제 돌아 오셨다. 두 살 먹은 아들 미헬 아바슈뷜리를 찾고 계신데, 수소문을 해보신 결과 전에 하녀로 있던 인간이 그 아드님을 산너머로 끌고 갔다 한다더라.
아쯔닥 명령대로 철저히 규명해 올리겠습니다요. 나리.
집행관 그 계집은 아드님을 자기 친자식이라고 나불댄다더라.
아쯔닥 명령대로 그 계집의 목을 치겠습니다. 나으리.
집행관 이상이다.
총독부인 (퇴장하며) 저 인간은 마음에 안드는데.
아쯔닥 (머릴 깊숙히 숙인 채 문까지 뒤따른다) 분부하신대로 모두 착오없도록 하겠습니다요, 마님.
6. 하얀 동그라미 재판
가수 이제 아바슈뷜리 총독의 아이에 관한 재판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누가 진정한 어머니인가를 판가름하는, 그 유명한 하얀 동그라미 재판을 통해서! (눅카 법정. 무장기병들이 미헬을 끌고 들어와서는 법정을 지나 뒷 쪽으로 나간다. 아이가 끌려 들어오는 동안 무장기병 하나가 그루쉐에게 창을 들이대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문에서 꼼짝 못하게 한다. 그 다음에야 그루쉐도 입장이 허락된다. 그루쉐 옆에는 죽은 총독의 부엌살림을 맡던 주방녀가 서 있다. 멀리서 소음이 들리고 벌겋게 불타고 있다)
그루쉐 애가 참 숙성해요. 벌써 혼자 세수를 한다니까요.
주방녀 그래도 임자는 운이 좋은 편이야. 진짜 재판관이 아닌, 바로 그 아쯔닥이 재판을 하니 말이야. 아쯔닥은 술고래에다 아는 게 하나도 없대요. 큰 도둑들도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는군. 일 뒤를 모두 혼동을 해서 그렇대. 부자들이 돈을 엄청나게 처넣어서 매수를 해도 적다고만 한다는 거야. 오히려 우리같은 것들이 때로는 다행스럽게 풀려난다는 거예요.
그루쉐 정말 오늘은 운이 따라야 되는데.
주방녀 운운 하지 말어. (성호를 긋는다) 얼른 나는 기도나 드리는 게 좋겠어. 재판관이 고주망태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들릭락 말락하게 기도를 한다. 그루쉐는 아이를 보려고 애를 쓴다) 이런 험한 세상에 왜 그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그 아이를 고집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임자 애도 아닌데.
그루쉐 미헬은 내 아이에요. 내가 키웠거든요.
주방녀 그래, 그 놈의 여편네가 다시 돌아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뒷 일은 생각도 안해 보았단 말야?
그루쉐 처음에는 돌려주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다가 마님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주방녀 그러니까, 남의 옷을 걸쳐도 어쨌거나 따뜻하기는 매한가지라는 게야? (그루쉐 끄덕인다) 임자 하고싶은 대로 나도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겠어. 임자는 정말 착한 사람이니까. (기억을 더듬는다) 나는 다섯 냥씩 받으며 그 아이를 돌보았지. 부활절 일요일 저녁, 그러니까 난리가 일어난 저녁에 그루쉐가 그 어린 것을 데리고 떠났지 (가까이 오는 군이 샤샤봐를 보고는) 그렇지만 시몬에게는 임자가 못된 죄를 진거야. 내가 자세히 설명을 했는데도 이해를 못하는군.
그루쉐 (시몬을 보지도 않고) 이해를 못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신경 쓸 시간이 없어요.
주방녀 저 애가 임자 자식이 아니라는 것은 물론 저이도 알고 있어. 허지만 임자는 이미 결혼한 몸이라 죽기 전에는 자기와는 다시 결혼 할 수 없다는 점을 견디지 못하는 거라구. (그루쉐는 시몬을 보며 인사한다)
시몬 (침통하게) 맹세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리는 바이요. 이몸이 저 애의 애비라고.
그루쉐 (조용히) 고마워요. 시몬.
시몬 부인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슨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오.
주방녀 그럴 필요 없지요. 지금 결혼한 것을 알잖수.
시몬 그루쉐가 처리할 문제겠지요. 일을 어렵게 엉키게 만들 필요는 없겠습니다. (무장기병 둘이 들어온다)
무장 기병들 재판관이 어디 있나? 누가 재판관 보지 못했소?
그루쉐 (몸을 돌려 얼굴을 가리고) 앞에 서서 나를 가려줘요. 눅카에 오는게 아닌데 그랬어. 머리를 내리친 군인을 만나게 되면....
무장 기병 1 (아이를 끌고 왔던 군인이 나선다) 재판관은 여기 없는데 (무장기병 둘이서 계속 찾는다)
주방녀 제발 재판관에게 별 일이 없어야 할텐데. 다른 재판관이 오면 임자는 소 엉덩이에 뿔나는 것보다도 희망이 없다고. (또 다른 무장기병 등장)
무장 기병 2 재판관에 대해 물었던 무장기병이 새로 들어온 무장기병에게 보고한다) 늙으이 둘하고 애 하나 뿐입니다. 재판관은 도망 쳤습니다.
무장 기병 3 계속 찾아라! (처음 무장기병 둘은 급히 나가고, 세 번째 군인은 서 있다. 그루쉐가 비명을 지른다. 무장기병이 돌아 본다. 바로 병장이다. 얼굴에는 커다란 흉터가 보인다)
무장 기병 1 (문에서) 무슨 일인가, 쇼타? 저 여자를 아는가?
병장 (한참 쳐다보고는) 몰라.
무장 기병 1 (문에서) 그 계집이 아바슈뷜리 댁 아이를 훔쳤다는군. 뭔가 낌새만 맡아도 봉잡는 답니다. (병장은 씨부렁거리며 나간다)
주방녀 저 놈이었나? (그루쉐 끄덕인다) 내 생각에는 저 놈이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아. 그러면 지가 총독 애를 뒤쫓던 게 발각이 나거든.
그루쉐 (안도의 숨을 쉬며) 내가 바로 저 사람들 손에서 그 애를 구해냈다는 것을 잊어먹었구만유. (총독 부인이 집행관과 변호사 둘을 데리고 들어 온다)
총독부인 천한 것들이 없으니 천만다행이구나. 원 냄새를 견딜 수가 있어야지. 금방 두통이 일어나거든.
변호사 부인, 부탁입니다. 말씀하실 때 될 수 있는 대로 매사에 신경을 좀 써 주십시오. 새 재판관을 우리가 얻게 될 때까지만이라도요.
총독부인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이래요, 일로 슈보라쩨. 순박하고 꾸밈이 없는 마음을 지닌 백성을 나도 사랑한다고요. 다만 두통을 일으키는 그 놈의 악취 얘기 좀 했을 뿐인데.
변호사 2 방청객은 없을 겝니다. 도시 외곽에 있었던 소요사태 때문에 대부분 주민들은 문을 잠그고 집에 쳐박혀 있거든요.
총독부인 저 년이 그 계집인가?
변호사 1 제발 좀, 나텔라 아바슈뷜리 부인, 대공이 재판관을 확실히 재임명할 때까지만이라도 욕지거리는 삼가해 주십시요. 현재 재판관 자리에 앉아 있는 일찌기 보기드문 아주 저속한 그 재판관을 내쫓을 때 까지 말입니다. 지금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요! (무장기병들이 법정으로 들어온다)
주방녀 아쯔닥이 천한 것들 편이라는 것을 아니까 마님께서 지금 당장 임자 머리채를 휘어 잡지 못하는 거라우. 아쯔닥은 사람 얼굴 보고 처리한다우. (두 무장기병이 밧줄을 기둥에 맨다. 아쯔닥이 묶인 채 끌려 들어온다. 샤우봐도 역시 묶인 채 뒤따라 끌려 들어온다. 맨 마지막으로 대지주 셋이 뒤따른다)
무장 기병 1 뺑소니를 쳐보시겠다는 거야, 응? (아쯔닥을 때린다)
대지주 1 끌어올리기 전에 법관 옷을 벗겨라. (무장기병들과 대지주들이 아쯔닥의 법의를 벗겨 내린다. 다 낡은 속옷이 드러난다. 그 중 하나가 아쯔닥을 냅다 질러댄다)
무장 기병 (다른 무장기병에게 밀어 부치며) 네 놈이 그래, 정의 나부랭이를 구현해 보시겠다고? 자, 여기 정의가 있다! (고함소리 속에 '정의 간다!' 그러면 '그런 것을 무엇에 쓰라고!' 하면서 아쯔닥을 이리저리 밀어 던지자 결국 아쯔닥은 기진맥진해 쓰러진다. 그러자 다그쳐 일으켜 세워지는 동아줄에 잡아 끈다)
총독부인 ('공놀이' 할 때에 미친 듯이 박수갈채를 보내고는) 저 인간은 첫눈에 벌써 내 맘에 안들었다구.
아쯔닥 (피에 범벅이 되어 숨을 몰아쉬며) 보이지 않는다, 수건 좀 다구.
무장 기병 2 무엇이 보고 싶은데?
아쯔닥 너희 개 백정놈들을 보겠다. (속옷으로 눈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안녕들 하신가 개 백정나리들! 어찌들 지내시우, 개 쌍놈들아. 개쌍놈의 집 안에는 똥냄새가 구수하게 나겠구나. 이제 다시 핥을 만한 밑구멍을 찾았나? 네놈들끼리 서로 물고 뜯고 지랄하다 모두 뒈지고 말겠단 말이지, 이 개새끼들아?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기사가 병장과 함께 들어온다. 가죽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훑어본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한다.)
기사 조용히들 해라. 대공각하의 친서를 가지고 왔다. 새 재판관을 임명하시는 내용이다.
병장 (고함친다) 일동 차렷! (모두 꼼짝않는다)
기사 이 나라에서 가장 지체 높은 분의 생명을 구해준 바로 그 사람이 새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그러니까 눅카 사람 아쯔닥이다. 그 사람이 누구냐?
샤우봐 (아쯔닥을 가리키며) 교수대에 있습니다요, 나리.
병장 (호통친다) 무슨 짓들이냐?
무장 기병 삼가 보고 드립 니다. 재판관 나리는 원래 재판관 나리였는데 지주들의 고발에 따라 대공 폐하의 적으로 간주 되었던 것입니다.
병장 (지주들을 가리키며) 끌어 내라! (끊임없이 굽실거리는 지주들이 압송된다) 나리께서 더 이상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조치하라. (먼지를 뒤집어쓴 기사와 함께 병장 퇴장)
주방녀 (샤우봐에게) 저 여자가 아까 박수 갈채를 보냈어요. 나리께서 물론 보셨을 거구만유.
변호사 1 진퇴양난이로고. (아쯔닥은 기절한 상태였다. 부축을 받으며 내려와 제 정신이 든다. 다시 법의가 입혀지고 비틀거리며 무장 기병들 틈에서 나온다)
무장 기병 나리, 불손한 일은 없을 겝니다. 무슨 분부를 내리시겠습니까?
아쯔닥 없다! 벌레만도 못한 놈들. 기회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벨을 팔아 먹는 놈들 같으니. (샤우봐에게) 네 죄를 풀어준다. (결박에서 풀려난다) 달콤하고 붉은 놈으로 한 통 갖다 주게. (샤우봐 나간다) 내 눈앞에서 꺼져버려. 이제 재판을 시작해야 되겠다. (무장 기병들 물러난다. 샤우봐가 포도주 통을 들고 되돌아 온다. 힘들여 마신다) 엉덩이가 섭섭하구나. (샤우봐가 법전을 갖고와 재판관석에 놓는다. 그 위에 아쯔닥이 앉는다) 바쳐라! (조심스레 의논하던 고소인들의 안색이 밝아지며 안도의 미소가 감돈다. 쑤근대는 소리)
주방녀 맙소사.
시몬 '우물물은 이슬방울로 채워지지 않는 법'이거늘.
변호사 1, 2 (기대에 가득찬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쯔닥에게 다가간다)
- 나리, 아주 어처구니 없는 사건입니다.
- 피고가 어린 것을 유괴해서는 되돌려 주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쯔닥 (그루쉐를 쳐다보며 변호사들에게 손을 내민다) 아주 쓸만한 여인이로고. (돈을 더 받는다) 재판을 시작한다. 순전히 진실만을 얘기해 주기를 바란다. (그루쉐에게) 특별히 네게 부탁해 둔다.
변호사 1 고명하신 재판장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민중 속담이 있습니다.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 지혜로운....
아쯔닥 본 법정은 변호사가 받는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자 한다.
변호사 (놀라며) 무슨 말씀이신지? (아쯔닥은 부드럽게 엄지와 검지를 비벼 보인다) 아, 예. 500냥 입니다. 나리. 법정에서는 너무 의아스러운 질문이라 그만 대답하기가.
아쯔닥 모두들 들었느냐? 질문이 의아스럽다니! 내가 묻는 것은 당신과는 관심사가 달라. 당신이 좋은 변호산지 알려고 묻는 것이요.
변호사 1 (머리를 숙이고) 고맙습니다, 나리. 고명하신 재판관님! 이 세상에는 핏줄보다 더 강한 인연은 없습니다. 모자간 보다 더 깊은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찌 에미에게서 어린 자식을 빼앗을 수 있단 말입니까, 재판관님! 어미는 사랑의 성스러운 오묘함 속에서 아이를 잉태하였고, 그 몸 속에 품었으며, 자기의 피를 나누어 먹였으며 고통 속에서 분만 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 거친 짐승만도 못한 사나운 것은 어린 것을 강탈하여 미친듯이 산을 넘어 도망쳤고, 먹이지를 않고, 그늘 속에 처박아 놓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 자연의 법칙이란게 원래....
아쯔닥 (말을 끊으며 그루쉐에게) 변호사께서 하신 말씀에 혹 할 말이 있는가?
그루쉐 내 아이예요.
아쯔닥 고작 그 한마디 뿐인가? 그 것을 증명하리라 믿는다. 하여간 내게 말하는 게 좋을 게다. 왜 네 아이라고 판결을 내려야 하는지.
그루쉐 온 정성과 지혜를 짜서 그 애를 키웠어요. 늘 먹을 것을 장만해 주었고, 한데서 잠잔 적도 별로 없어요. 그 아이 때문에 겪은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도 없구, 내 주머니에서 나간 돈도 꽤 된다구요. 내 일신의 편안함 같은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구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그리고 아주 어려서부터 할 수 있는 데까지 일을 하도록 가르쳤어요. 애는 아직 어리지만요.
변호사 1 재판장 각하, 저 인간과 아이 사이에는 전연 혈육 관계가 성립되지 않음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쯔닥 본 법정은 그 점을 참작 하겠소.
변호사 1 감사합니다. 남편을 잃은 실의에 빠진 여인이, 이제는 자기 자식까지 잃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어미가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재판장 각하! 나텔라 아바슈뷜리 부인 ..
총독부인 (나직하게) 재판장, 모질고 모진 운명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내 자식을 되돌려 줄 것을 단신에게 간청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옵니다. 빼앗긴 이 애미의 애타는 심정을 털어 놓게 된 것이 어찌 이 몸의 탓이겠습니까. 불안에 떨며 잠 이루지 못하던 나날들. 그리고 ....
변호사 2 (말을 막는다) 이 부인을 괄세한 것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남편의 소유였던 궁정의 출입도 막는가 하면 재산에 대한 상속 문제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런 문제는 상속자에게만 달렸다는 등 쌀퉁맞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니 저 아이 없이는 어떤 일에도 손을 쓸 수가 없는 형편인 것입니다. 변호사 수고비 조차도 지불할 수가 없는 지경이란 말씀입니다. (낭패한 듯 쩔쩔매며 쏟아져 나오는 그의 말을 막으려고 애써 손짓 발짓을 하는 변호사 1에게) 일로 슈보라쩨씨, 왜 말문을 막으시는 거여, 어쨌든 아바슈비리 부인의 재산에 관한 재판이 아닙니까?
변호사 1 산드로 오보라째씨, 제발! 우리 이미 협약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아쯔닥에게) 물론 재판의 결과에 따라 귀하신 부인께서 막대한 아바슈뷜리의 재산을 받게 되는지도 결정이 나는 것이긴 하겠지만, "도"라고 일부러 말씀드리는 것은 그 보다는 한 에미의 인간적인 비극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텔라 아바슈뷜리 부인께서 처음 뼈를 깎는 듯한 진술에서 밝힌 바와 같습니다만, 미헬 아바슈뷜리 아기가 재산 상속자가 아니다 하더라도 어찌 이 애절하게 사랑하는 이 부인의 자식이 아니란 말입니까?
아쯔닥 잠깐! 법정은 유산을 인간애의 증거로 변호함에 크게 감명을 받고 있소.
변호사 2 감사합니다, 각하. 일로 슈보라제 변호사! 저 아이를 자기 수중에 움켜잡은 저 인간이 아이의 친 에미가 아님을 우리는 확실하게 증거를 댈 수가 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사실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겠습니다. 미헬 아바슈뷜리 아기는 어머니가 피란통에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 불행하게도 아수라장으로 인해 집에 혼자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궁전의 주방에서 일을 맡고 있던 하녀 그루쉐가 그 부활절 일요일에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는데 본 사람이 있습니다.
주방녀 마님은 옷 챙기느라 정신 없었다구요.
변호사 2 (개의치 않고) 일 년 가량 지난 후 그루쉐는 애를 데리고 산악 마을에 나타나서 결혼을 했는데....
아쯔닥 어떻게 산악 마을까지 갔는가?
그루쉐 걸어서요, 나리. 그리구 저 애는 내 아이에요.
시몬 내가 저 아이 애비입니다, 나리.
주방녀 저 아이를 제가 보살펴 주었습니다, 나리. 다섯 냥씩 받고요.
변호사 2 저 사람은 그루쉐의 약혼자입니다, 각하. 그러니 진술의 신빙성이 없습니다요.
아쯔닥 그럼, 자네가 산악 마을에서 결혼했다는 그 사내인가?
시몬 아닙니다. 그루쉐는 어떤 농부와 결혼했습니다.
아쯔닥 (그루쉐에게 가까이 오도록 손짓을 하고) 어떻게 된 거지?
아쯔닥 (시몬을 가리키며) 저 놈이 침대에서 맥을 못추나? 사실대로 말하렸다.
그루쉐 우리는 그런 사이도 아니었어요. 저 애 때문에 결혼하게 된 거예요. 거처할 곳을 마련하려고요. (시몬을 가리키며) 저 이는 전쟁에 나가 있었어요. 나리.
아쯔닥 그런데 이제 다시 너와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거구나, 응?
시몬 재판기록부에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루쉐 (화를 내며) 결혼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몸이라니까요, 나리.
아쯔닥 그러면, 저 아이는 화냥질해서 낳은 것이구나? (그루쉐 대답이 없다) 하나 묻겠다. 저 아이는 누구냐? 거지 발싸개같은 후레자식이냐? 아니면 부유한 집 안의 귀한 자식이냐?
그루쉐 (뾰루퉁해서) 저 애는 보통 흔한 아이에요.
아쯔닥 그러니까 내 말은, 처음부터 귀티를 풍겼느냐 이거다.
그루쉐 코가 너무 돋보였지요.
아쯔닥 코가 유난히돋보였다. 본 재판관은 이 점을 아주 중요한 답변으로써 참작하겠다. 본인이 판결을 내릴 때에 우선 밖에 나가 장미꽃 향기를 맡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겠지. 오늘도 이런 짓거리가 필요할 것 같다. 하여튼 이제 간단히 끝마치겠다. 더 이상 새빨간 진술을 들을 수가 없어. (그루쉐에게) 특히 네 입에서 나오는 거짓 진술 말야. (피고석을 향해) 너희들 모두가 나를 우습게 보고 헛지랄을 치려 드는데, 너희들 인간성을 잘 안다구. 너희들은 사기꾼들이야.
그루쉐 (갑작스레) 왜 간단하게 끝내려는지 난 잘 알아요. 돈을 받아 먹는 것을 보았단 말이에요.
아쯔닥 주둥이 닥쳐! 그래 내가 네 년에게서 한 푼이라도 받아 먹었단 말여?
그루쉐 (주방녀가 말리는 데도) 한 푼도 없는데....
아쯔닥 바로 그거라구. 너희들 배곯는 것들에게서는 한 푼도 받지를 못해. 그러니까 나더러는 굶어 죽으라는 말이지. 정의니 어쩌고 하면서 돈 낼 생각은 없단 말이야? 백정에게 가면 돈 낼 줄을 알면서, 재판관에게는 초상집 잔칫날 받은 기분으로 온단 말이지.
시몬 (큰소리로) 조상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눈독을 들이시는 구먼.
아쯔닥 (선뜻 도전을 받아 들이며) 부잣집 외상 보담이야 거렁뱅이 맞돈이 난거여.
시몬 동정 못다는 며느리, 맹돌 발라 머릴 빗소.
아쯔닥 놀던 계집이 절단나도 엉덩이짓은 남지.
시몬 고쟁이를 열두 벌 입어도 보일 것은 다 보이오.
아쯔닥 꼴에 수캐라고 다리들고 오줌 누는군.
시몬 방귀 뀐 놈이 되레 성낸다더니.
그루쉐 법정 한 번 깨끗하구만, 변호사들을 데리고 온 저 여자처럼 말을 멋드러지게 못한다고 우리에게 불리 판결을 내릴테지.
아쯔닥 바로 그렇다. 너희들은 모두 멍청한 놈들이다. 혼줄을 당해야 마땅하다구.
그루쉐 기저귀 하나 갈아 채우지 못하는 저런 여편네에게, 높으신 몸이란 그런 이유 하나 때문에 아이를 넘겨주려는 속셈이군. 법이 무엇인지 나보다도 모르는 주제에!
아쯔닥 하긴 그렇다. 나는 무식한 놈이다. 이 법관 옷을 벗기면 이 속에는 걸친 것도 없다. 보려면 보거라! 먹고 마시는 입 외에는 관심도 없고 단지 수도원에서 몇 자 배웠을 뿐이다. 그러니 네년에게는 법정 모독 죄로 벌금 열 냥을 선고 한다. 하기사 너같이 어리석은 계집도 드물 게다. 내게 대들다니 말야. 실눈을 뜨고 엉덩이를 흔들어 대도 잘 봐줄까 말까한 판에. 벌금 이십냥!
그루쉐 삼십 냥이 되더라도 당신이 어떻게 정의를 처리 하는지 할 말은 해야겠지요. 고주망탱이 영감! 무슨 권리로 당신이 주인 행세를 하며 내게 함부로 하는 거지요? 마치 교회 창문을 올라가 설교하는 이사야처럼! 수도원에서 당신 어머니로부터 당신을 데려가 키운 것은, 당신 어머니가 어쩌다가 수수 한 쟁반 슬쩍 했다고 혼내주라는 것은 아니었을 거예요. 당신 앞에서 벌벌떠는 나를
그루쉐 보고도 부끄럽지 않은가요? 그런데도 당신은 집을 훔친 놈들에게서 자기 집을 다시 찾으려 드는 사람을 방해나 하는, 주인과 도둑의 구별도 못하는 그런 놈들의 하수인이 되고 만 것이란 말예요. 우리의 사내들이 싸움터로 끌려 가도록 쌍심지나 키는 당신은 돈에 팔리는 인간에 불과해요. (아쯔닥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눈에 광채가 인다. 판사망치로 조용히 하라는 듯 책상을 두드린다. 그러나 건성으로. 그루쉐가 욕설을 계속 퍼붓자 그 소리에 박자를 맞춰 두드린다) 당신에 대한 존경심은 한 톨도 없어요. 하고 싶은 짓은 무엇이든지 하는 한갓 도둑놈보다도, 칼을 든 강도보다도 못해요, 여럿이 한 통속이 되어 내게서 아이를 빼앗아 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점만은 당신에게 말해 두겠어요, 당신이 가질 직업이라면 차라리 어린애 매춘이나 고리대금업자가 나을 거예요. 주위 사람들을 마구 깔아 뭉개는 이런 사람들은 교수대에 목 매달아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끔직한 벌을 받아야 된다구요.
아쯔닥 (앉는다) 이제 30 냥이다. 더 이상 네 년하고 술집에서 하듯 아웅다웅하고 싶지 않다.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이 어떻게 되겠니. 여긴 술집이 아니야. 네 년 사건에 대해서는 더이상 다룰 마음이 없어 졌다. 이혼하겠다던 그 두 사람은 어디 있나? (샤우봐에게) 데려 오너라. 한 십오분 정도 그 소송사건을 다루겠다.
변호사 1 (샤우봐가 나가는 사이에) 마님, 이제는 말 한 마디 안해도 승소는 사실입니다요.
주방녀 (그루쉐에게) 임자가 다 망쳐 놓고 말았어. 애를 빼앗기는 그런 판정을 내릴 거야. (아주 나이 많은 부부가 등장한다)
총독부인 샬봐, 들여 마시는 향수병 좀 줘요.
아쯔닥 바쳐라! (노인네들 영문을 모른다) 그러니까 이혼을 하겠다는 것이지요? 함께 산 지가 얼마나 되었소?
노파 사십년 되었습죠, 나으리.
아쯔닥 그런데 무슨 일로 이혼하려는 것이요?
노인 서로 마음에 안들어서지요. 나리.
아쯔닥 언제부터?
노파 늘 그랬었습죠, 나으리.
아쯔닥 노인네들 소원을 생각해 보고 다른 사건이 종결지워지면 판결을 내리리다. (샤우봐가 두 노인네들을 뒤로 끌어낸다) 그 아이를 데려 오너라. (그루쉐에게 가가이 오도록 손짓을 하고 몸을 숙여 말한다. 퉁명스럽지는 않다) 보아하니 정의고 나발이고 더 떠들고 싶은 모양인데 확실한 것은 저 아이는 네 것이 아니야. 이 봐, 만약 자기 아이라고 우기면 결국 저 아이가 부유해지는 것을 막는 셈인데, 그래도 괜찮나? 임자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기만 하면 된단 말이야. 그렇게만 말하면 당장 저 아이는 궁전을 갖게 되고 마굿간에는 말들이 우글거리게 될 거고 문전에는 거지들로 들썩거리고 수 없이 많은 군인들이 보위를 해 줄 것이고 궁전 뜰에는 청원하는 사람들로 들끓게 될 거라고, 안 그런가? 그래 어떻게 할 건가? 저 아이가 부자 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겠지? (그루쉐 말이 없다)
가수 분노를 참는 저 여인의 말을 들어 보시오. 마음 속에 간직만 하고 말하지 않는 그 이야기를. (노래한다)
[노래시작]
황금신을 신게 된다면
저 아이는
힘없는 이 몸을 업신 여기고
못된 짓을 하며
나를 비웃을 거예요.
아, 권력을 휘두르고 악을 행하려면
너무나 큰 힘이 들테니
언젠가는 자기의 차가운 가슴을
견뎌 내지는 못할 거예요.
굶주리는 사람이 아니라
굶주림을 아기는 두려워 해야 돼요.
아기는 어두움을 무서워 해야 돼요.
그 밝은 빛을 말고요. [노래 끝]
아쯔닥 임자, 내가 임자를 이해할 것 같소.
그루쉐 아이를 줄 수 없어요. 내가 키웠거든요. 저 아이는 나만 알아요. (샤우봐가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다)
총독부인 넝마를 입고 다니네!
그루쉐 그렇지 않아요. 좋은 옷으로 갈아 입힐 시간을 주지 않아서 그래요.
총독부인 돼지 우리에서 키웠구먼!
그루쉐 (머리 끝까지 골이 나서) 돼지는 내가 아니예요. 그런 사람은 따로 있어요. 당신 애는 어디다 팽개 쳤지요?
총독부인 네 년에게 혼줄을 내주마. 요 개같은 년. (그루쉐에게 덤벼든다. 변호사들이 붙들어 말린다) 저것은 도둑년이야. 지금 당장 매를 흠뻑 맞아야 할 년이라고!
변호사 2 (입을 막으며) 나텔라 아바슈뷜리 부인, 제발. 약속을 하셨지 않습니까. 재판관 각하, 부인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아쯔닥 피고인과 고소인은 들으시오! 본 법정은 여러분들의 진술을 경청했지만, 누가 이 아이의 진짜 엄마인가 하는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소. 재판관으로서 본인은 어린 것에게 엄마를 찾아 줄 의무가 있는 것이오. 그래서 시험을 한 번 해 보겠소. 샤우봐, 곱돌을 하나 가져와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시요. (샤우봐는 백묵으로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고소인과 피고 양인은 동그라미 옆에 마주 서시오. (총독 부인과 그루쉐는 동그라미 옆에 선다) 아이 손을 잡으시오. 아이를 동그라미에서 힘껏 끌어 내는 여자가 진정한 어머니 올시다.
변호사 2 (재빨리) 재판관 각하, 이의를 재기 합니다. 저 아이가 상속자로서 깊이 연류되어 있는 이 거대한 아바슈뷜리 재산의 행방이 석연치 않은 이런 시합으로 결정 짓는다는 것은 곤란합니다. 더구나 우리의 고소인은 저 인간만큼 큰 힘이 없습니다. 저 인간은 육체노동을 해온 탓에 이런 일에는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아쯔닥 부인은 영양 섭취가 썩 좋아 보이는데. 잡아 당겨! (총독 부인은 아이를 자기 쪽으로 잡아 끈다. 그루쉐는 아이를 놓아 버리고 정신 나간 듯 서 있다)
변호사 1 (총독 부인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피는 못 속인다니까!
아쯔닥 (그루쉐에게) 어찌된 일이냐? 잡아 당기질 않았잖아.
그루쉐 힘을 줄 수가 없었어요. (아쯔닥에게 달려 들어) 나으리, 나리께 나쁘게 말씀드린 것을 취소하고 용서를 구하겠어요. 아이가 말을 잘 할 수 있게 되면 일은 간단하게 돼요. 그때까지만 내가 애를 맡겠어요. 저 애는 이제 겨우 몇 마디밖에 못 알아 듣거든요.
아쯔닥 법정을 감화시키려 들지 말어. 자네는 몇 마디나 지껄릴 줄 안다고, 좋다! 내가 확신을 갖게끔 또 한 번 시합을 해 보겠다. (두 여인은 또 한 번 제자리에 선다)
아쯔닥 당겨! (그루쉐는 이번에도 아이를 놓아 버린다)
그루쉐 (절망적으로) 저 아이는 내가 키웠어요. 그런데 나보고 찢어 당기라구요? 나는 할 수 없단 말예요.
아쯔닥 (일어 난다) 이제 비로소 본 법정은 누가 이 아이의 진정한 어머니인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루쉐에게) 네 아이를 데리고 이 곳을 떠나거라. 아이를 데리고 이 도시에 머물지 않는 게 좋을거다. (총독 부인에게) 어서 꺼져 버려, 사기죄로
아쯔닥 형벌을 내리기 전에. 재산은 시에 반입되어 어린 아이들을 위한 공원을 설립하는데 쓰이도록 하고 나의 이름을 따라 '아쯔닥공원'이라 이름을 붙이도록 한다. (총독 부인은 실신한다. 집행관이 끌고 나가고 변호사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그루쉐는 꼼짝 않고 서 있다. 샤우봐가 아이를 데려다 준다. 법관복을 벗어야 겠다. 너무 무덥구나. 나에게 이제 주인공의 자리는 필요 없다. 그대신 작별을 위한 조촐한 춤놀이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저 밖 풀밭에서. 너무 호들갑을 떨다가 한가지 일을 잊었고나. 그러니까 이혼 사건을 끝내야 할 것을. (재판관석을 책상 삼아 서류 위에 무엇인가 쓰고는 나갈 참이다. 춤음악이 벌써 시작되었다.)
샤우봐 (서류를 읽어 보고는) 잘못된 것 같습니다. 두 노인의 이혼을 서명한 게 아니라 그루쉐와 농부의 이혼이 되었거든요.
아쯔닥 다른 사람을 이혼 시켰다구? 그것 참 잘못되었구나. 하지만 일수 불퇴다. 나는 번복하는 법이 없지. 그러다간 질서라는 게 있을라구. 자, 그대신 놀이 마당으로 모두 초대합니다. 춤을 마다할 사람은 모두 초대합니다 (그루쉐와 시몬에게) 모두 합쳐서 사십 냥 받을 게 있구만.
시몬 (돈 지갑을 꺼내며) 너무나 싸구먼요, 나으리. 정말 감사합니다.
아쯔닥 (돈을 집어 넣는다) 요긴하게 쓰것다.
그루쉐 오늘 밤중에 이 도시를 떠나자꾸나, 미헬. 응? (아이를 업으려 한다. 시문에게) 아이가 마음에 들어요?
시몬 (자기 등에 아이를 들쳐 업는다) 아이가 마음에 썩든다고 삼가 보고 드리는 바 입니다.
그루쉐 이제 말하겠어요. 우리가 사랑을 언약한 그 부활절날 이 아이를 얻었어요. 그러니 이 아이는 우리 사랑의 결실이에요. 미헬, 우리 춤추자. (그루쉐는 미헬과 춤을 춘다. 시몬은 주방녀를 잡고 춘다. 노부부도 역시 춤을 추고, 아쯔닥은 생각에 잠겨 있다. 춤추는 무리에 가리워졌다가는 다시 보이곤 한다. 몇 쌍이 더 들어와 춤을 추고 아쯔닥의 모습은 점차 사라진다.)
가수 이 날 저녁으로 아쯔닥은 사라지고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루지니엔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잊지 않았고
그 사람의 법관 시절을
짧았지만 그 나름대로 구현한
정의의 황금 시절로
오랫동안 기억하였다. (사람들은 춤을 추며 나가고 아쯔닥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동그라미 재판의 이야기를 들은 관객 여러분,
이 옛날 이야기의 숨은 뜻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주어진 것은 그것을 유용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돌려져야 된다는 것을,
아이는 활짝 피게 해줄 수 있는 에미에게
마차는 좋은 마부에게
그래서 잘 굴러간다면.
그러니 골짜기는
결실을 가져오는 마을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