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솔성지위도
[ 率性之謂道 ]
天命之謂性 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 솔성지위도 "하늘이 명하는 천명을 일컬어 性성품이라 하고, 그 性성을 따르는 것을 일컬어 道도라 하며" 修道之謂敎 수도지위교
天命之謂性,What Heaven has conferred is called The Nature
率性之謂道,an accordance with this nature is called The Path of duty
修道之謂教。the regulation of this path is called Instruction.
道也者,不可須臾離也,可離非道也。The path may not be left for an instant. If it could be left, it would not be the path.
是故君子戒慎乎其所不睹,恐懼乎其所不聞。莫見乎隱,莫顯乎微。
On this account,
the superior man
does not wait till he sees things, to be cautious,
nor till he hears things, to be apprehensive.
There is nothing more visible than what is secret, and nothing more manifest than what is minute.
故君子慎其獨也。Therefore the superior man is watchful over himself, when he is alone.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While there are no stirrings of pleasure, anger, sorrow, or joy, the mind may be said to be in the state of Equilibrium. ;
發而皆中節When those feelings have been stirred, and they act in their due degree,謂之和 there ensues what may be called the state of Harmony.;
中也者,天下之大本也;This Equilibrium is the great root from which grow all the human actings in the world,
和也者,天下之達道也。and this Harmony is the universal path which they all should pursue.
致中和,天地位焉,Let the states of equilibrium and harmony exist in perfection, and a happy order will prevail throughout heaven and earth,
萬物育焉。 and all things will be nourished and flourish.
Zhong Yong:
What Heaven has conferred is called The Nature; an accordance with this nature is called The Path of duty; the regulation of this path is called Instruction. The path may not be left for an instant. If it could be left, it would not be the path. On this account, the superior man does not wait till he sees things, to be cautious, nor till he hears things, to be apprehensive. There is nothing more visible than what is secret, and nothing more manifest than what is minute. Therefore the superior man is watchful over himself, when he is alone. While there are no stirrings of pleasure, anger, sorrow, or joy, the mind may be said to be in the state of Equilibrium. When those feelings have been stirred, and they act in their due degree, there ensues what may be called the state of Harmony. This Equilibrium is the great root from which grow all the human actings in the world, and this Harmony is the universal path which they all should pursue. Let the states of equilibrium and harmony exist in perfection, and a happy order will prevail throughout heaven and earth, and all things will be nourished and flourish.
天命之謂性,率性之謂道,修道之謂教。道也者,不可須臾離也,可離非道也。是故君子戒慎乎其所不睹,恐懼乎其所不聞。莫見乎隱,莫顯乎微。故君子慎其獨也。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發而皆中節,謂之和;中也者,天下之大本也;和也者,天下之達道也。致中和,天地位焉,萬物育焉。 | ||
Zhong Yong: | What Heaven has conferred is called The Nature; an accordance with this nature is called The Path of duty; the regulation of this path is called Instruction. The path may not be left for an instant. If it could be left, it would not be the path. On this account, the superior man does not wait till he sees things, to be cautious, nor till he hears things, to be apprehensive. There is nothing more visible than what is secret, and nothing more manifest than what is minute. Therefore the superior man is watchful over himself, when he is alone. While there are no stirrings of pleasure, anger, sorrow, or joy, the mind may be said to be in the state of Equilibrium. When those feelings have been stirred, and they act in their due degree, there ensues what may be called the state of Harmony. This Equilibrium is the great root from which grow all the human actings in the world, and this Harmony is the universal path which they all should pursue. Let the states of equilibrium and harmony exist in perfection, and a happy order will prevail throughout heaven and earth, and all things will be nourished and flourish. |
도올_중용강의
[도올] 중용 11강 – 치중화(致中和), 천지위언(天地位焉), 만물육언(萬物育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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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풍 ・ 2021. 5. 9.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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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중화(中和) 라는 개념이 나왔죠.
희로애락지미발(喜怒哀樂之未發), 위지중(謂之中)
발이개중절(發而皆中節), 위지화(謂之和)
‘희로애락이 발현하기 전의 원초적인 상태를 중(中) 이라하고,
발현하여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것을 화(和) 라고 한다’ 그래서 이제 여기 중(中) 과 화(和) 라는 개념이 나왔는데, 이거를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지만 이 중 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항상 메스메티컬 미들 그런 ‘평면적인 가운데’ 라는 의미가 아니라 항상 그 거대한 우주적인 원에 있어서의 가장 그 ‘dynamic eqiulibrium, 동적평형(動的平衡)’의 어떤 포인트다. 이러한 이미지, 그 발현되지 않았다고 하는 그 반드시 시간적인, 동양 사상은 항상 그 시간적인 어떤 직선적 선 상에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미발(未發)은 어린애고 발(發)은 어른이냐? 미발 이라는 건 과거고, 발은 미래냐? 그게 아니라 미발(未發)과 기발(旣發) 이라고 할까? 이런 미발(未發)과 이발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 끊임없이 교차되는 상황이예요.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서 항상 그 중에 평형이 있고 그것이 발현될 때 그것이 화(和)를 이룩해야 되고 이런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중 이라는 것은 뭐냐? 이것은 근원적으로 ‘나의 존재의 근원’이란 말이죠. 나의 존재의 근원. 그러기 때문에 바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죠.
중야자(中也者) 천하지대본야(天下之大本也)
화야자(和也者) 천하지달도야(天下之達道也)
중(中) 이라고 하는 것은 천하(天下) 라는 건 인간을 말한다고 그랬잖아요? 여기 대본(大本)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중 이라고 하는 것은 천하지대본야. 그 다음에 화야자(和也者) 화라고 하는 것은, 화야자는 천하지 뭐라고 그랬어요? 이것은 달도다. 카 진짜 기막힌 말씀이죠. 말씀 하나하나가 이렇게 명료하다. 이 사람들 얘기가. 그런데 이 달도(達道) 라는 걸 갖다가 주자라는 분이 여기에 이 달(達) 이라는 말을 전체를 중용에 나오는 달이라는 말을 ‘보편적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유되어 있는 이런 식으로 보편적이라는 의미로만 썼어요. 나는 그렇게 보질않고 이 달(達) 이라는 것은 보편 이라는 의미 그런 의미 보다는, 대본(大本) 이라는 건 큰 근본 아니야? 인간 존재의 아주 근원적인 하나의 그룬트 라고 한다면 화(和) 라는 것은 바르게 중절 해야 되는 거니까 이 화(和) 라는 것은 발현되어서 그 마디마디 상황에 들어맞는 것이므로 그것은 인생의 도달해야 할 목표죠. 이 달도(達道) 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달성되어야 할 길이다’ 그래서 Something to achieve 달성되어야할 목표. the way to achieve.
[05:05] 그런데 우리나라 주자학자들이 전부 주희가 이 달도(達道) 라는 걸 갖다가 그냥 ‘모든 사람들에게 구유되어 있는 보편적인 길이다’ 이렇게 해버리는 바람에 그런 다이내믹이 사라진다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은 중(中) 이라는 것을 기본으로 대본(大本)으로 깔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고 고요하게 있을 때는 중(中)으로 돌아가죠. 그러니까 이 중(中) 이라는 것은 이걸 기본으로 본다면 이건 신독(愼獨)의 세계라는 거죠. 중(中)은 신독(愼獨)의 세계고, 화(和) 라는 것은 오히려 오륜(五倫)의 세계죠.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관계에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신독(愼獨) 이라는 건 그 고독이, 인간이 고독하다는 존재감이지만 나 라는 존재는 이미 고독하지만 관계 속에서 이루어 지는 거야. 벌써 엄마 아버지 없이 내가 태어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엄마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내가 태어났고 거기에는 부자관계 모자관계가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자라나면서 형제가 있었고 그 다음에 친구들이 생겼고 결혼하면 또 부부관계가 있고, 인간 존재라는 것은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는 동양에서 독신 이라는 건 인정이 안되는 거니까 당연히 애 낳고 살아야 되는 거고 그렇게 되면 인간 존재 라는 것은 결국 어떠한 경우에도 고독하지만 고독한 존재라는 건 나의 존재를 내가 이해하는 방식이예요. 그러나 나의 존재의 현실이라는 건 철저히 조화로운 관계를 달성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달도(達道) 라는 거예요. 화(和) 라는 것은 달도(達道)다.
‘동양 사상은 조화(調和) 사상이다’ 개소리야. 조화 사상이 아니라 어떻게 조화를 달성하냐?를 고민하는 철학이다 그런 얘기지. 서양 사상은 어떻하면 인간 세상을 분열시키냐? 는 이런 미치광이 철학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늘 나라와 이 땅의 세계를 분열시키고, 인간과 하나님을 분열시키고,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를 분열시키고, 자연과 인간을 문명을 분열시키고 이런 모든게 그런 분열과 대립을 가르치는데 우리는 그러한 모든 관계를 조화롭게 달성해야만 하는 그 모든 책임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왜 우리가 존재하느냐? 그것은 조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거죠.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도 의미가 없고, 사회 정의도 의미가 없고 그런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나의 존재 라는 것은 나 개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런 존재 방식을 고독한 나의 존재를 내가 책임 지고 나가면서 조화를 달성해 나간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조화가 안된다는 거야. 결국은 인간이 고독한 존재라고 하는 신독의 그런 것을 철저하게 내가 내 존재의 책임을 질 때 만이 우리는 비로소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거죠. 친구지간에 우리가 훌륭한 친구가 된다는 것도 그 A라는 친구와 B라는 친구가 위대한 서로간의 친구가 될려면 그야말로 관포지교가 될려면, 관중이던 포숙이던 두 사람이 다 신독의 세계에서 완벽한 경지를 간 사람들 이란 말이야. 완벽한 자기 존재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숙한 인간들 사이에서 진정한 조화가 이루어 지는 거죠. 그냥 조화를 운운하면서 찐드기 붙고 그냥 맨날 술이나 처먹고 그냥 오늘은 이 친구 집가서 그냥 담 넘어 들어가고 맨날 이런 새끼들은 그건 진짜 그건 버러지 새끼들이지. 무슨 동양 사상이라 그래.
[09“40] 그러니까 동양 사상은 치열한 겁니다. 이게 치열한 거예요. 그러니까 인문주의 라는게 요새 인문학이 뭐 부상한다 그러는데 인문학 이라는게 이게 얼마나 처절한 건지? 알아야 된다구. 하나님이 없는 건데, 하나님이 없는 게 인문학인데! 종교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인문학 이라는 거는. 얼마나 무서운 고독을 떠 맡지 않으면 인문학을 할 수 없는 거라고. 인문학 이라는게 우리가 본질적으로 인류의 근대 정신 이라는 걸, 동양의 인문정신 이라는 게 얼마나 치열하고 우리가 처절하게 실천해야 할 과제 상황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달성 돠어야만 할 세계라는 거죠. 끊임없이 인문 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달성 되어야만 할 세계. 그러기 때문에
이 중(中) 이라는 것은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고,
이 화(和) 라고 하는 것은 천하지달도야(天下之達道也)
그러면 이게 끝까지 다 올 것 같은데 또 한 말씀이 자사의 말씀이 남아 있는 거예요. 대단한 분이죠? 하시는 말씀이 뭐냐면
치중화(致中和), 천지위언(天地位焉), 만물육언(萬物育焉)
이게 얼마나 대단한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아까 중야자는 천하지대본야 인간 존재 이건 천하 사람들을 말하는가 하면 이건 모든 인간의 가장 큰 근본이 중(中) 이라는 거야. 그리고 화(和) 라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달성해야 할 그러한 도(道)다. ‘치중화(致中和), 이 중과 화를 여기 치(致) 라는 것은 이게 본 동사가 되는 거죠. 이 중화(中和)가 목적어가 되고, 이 치(致) 라는 것은 참 어려운데, 영어로 하면 consumate 지극(至極)하게 한다. 그 중과 화에 관한 모든 가치를 지극하게 발현을 한다. 인간이 대본(大本)과 달도(達島)의 중화(中和)를 지극하게 하면, 이거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주체죠. 인간의 문제죠. ’천지위언(天地位焉), 그렇게 하면 하늘과 땅이 자리가 잡히고‘ ’만물육언(萬物育焉), 만물이 잘 자라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게 말로 슬쩍 넘어 갈 때는 뭐 그럴 듯 해요. 다 두리뭉실 한게.
그러면 내가 중과 화를 실천을 하면 하늘과 땅이 자리가 잡히고 만물이 자라난다는 게 인간의 도덕적인 가치의 세계인데 어떻게 이것이 자연적인 세계에까지 이런 얘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 이게 사실은 오늘날 현대 과학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 우리 감각으로는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죠. 이게 잘 이해가 안되는 거거든. 근데 이런 거 하나 고민안하고 학문의 세계에서 넘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미 존재라고 하는게 여기서 위(位) 라는게 있지만 이 중용에는 벌써 이런 말씀을 할 적에는 인간 존재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그 중용적인 존재라고 하는 인간 존재라는 건 이미 천지와 더불어 있는 존재라고 하는 그것이 여기 전제되어있다 말이죠. 이게 소위 주역에서 말하는 삼재(三才) 사상인데, 이런 삼재 사상이 여기에는 벌써 들어가 있다는 거야. 인간 존재의 규정 자체가 나 라는 생명체 자체가 하늘과 땅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거거든. 이건 무슨 얘기냐 하면은 동양에서 말하는 하늘과 땅이라고 하는 것은 저 Sky하고 Earth를 말하는게 아니란 말이예요. 여기 천(天) 이라는 것과 지(地) 라는 것은 천은 무형의 세계에요. 하늘이 이게 저 푸른 하늘 이게 아니고 하늘 이건 무형(無形)의 세계이고 땅 이라는 건 이건 유형(有形)의 세계라는 거죠. 다른 말로 하면 하늘은 형이상자(形而上者) 라고 하고, 땅은 형이하자(形而下者) 라고 그러는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천(天) 이라는 건 하나의 시간 개념이고, 지(地) 라는 건 공간 개념 이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이게 추상적인 거라고.
[16:30] 그렇기 때문에 이게 인간 존재로 가면, 이 하늘 천(天) 이라는 이 무형적인 세계가 인간에게서는 혼(魂)이 되는 거고, 이 땅의 요소가 백(魄)이 되는 거란 말이야. 그래 내가 죽으면 나의 땅은 백(魄)으로 땅으로 스며들어 가고, 나의 하늘은 혼(魂)이 되어서 하늘로 다시 날라가는 거예요. 이 혼(魂)의 세계가 뭐냐면? 신(神),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신적인 정신세계란 말이야. 근데 우리 말에 정신이라는 것도 이 백(魄)의 세계라는 건 뭐야? 이게 정(精) 이거든 하초(下焦)의 정(精)의 문제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정신(精神) 이라는 말 자체가 지금 왜곡되어 있는거죠. 이 정(精) 이라는 것은 이게 동양 사상을 아까 사상의학적으로 말한다면 이 정(精) 이라는 건 신수(腎水)의 문제고, 이 신(神) 이라는 건 폐(肺)의 문제인 거죠. 그러니까 이 정신(精神)의 문제라든가 이런 것이 전부 결부된 어떤 세계관의 문제란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지극(至極)한 존재로서 중화(中和)를 달성해야만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갖게 된다는 얘기는 나 라는 존재가 이게 하나의 조그만 생명체인 동시에 ’이거 자체가 천지(天地)라고 하는 우주다‘. 그러니까 나 라고 하는 존재에 있어서 치중화(致中和) 라는 것은 뭐냐하면? 나 라는 존재에서 ’하늘이 있을 때 있어야 되고, 땅이 있을 때 있어야 된다‘ 이런 얘기죠. 이게 뒤바뀌면 나는 미치광이가 되는 거고 이상해 지는 거죠.
그런데 주자 한테도 그런 질문을 주자가 ’오신지천지만물(吾身之天地萬物), 나의 오신에 중화를 하면 천지가 바르게 된다‘ 이런 말을 쓰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것이 뭐냐면? 하늘과 땅이 무형과 유형의 세계가 이게 뒤에 나오지만 무형의 하늘은 나의 존재를 덮는 거고 복(覆), 유형의 세계인 땅에서는 나의 존재를 싣는 거 재(載) 란 말이예요. 복재(覆載) 거든, 위에서 덮고 밑에서 싣고. 이 복재의 가운데에 하늘과 땅에서 모든 생성하는 모든 사물이 이게 만물(萬物) 이라고 그러는 거거든. 이 만물 중에서 최령(最靈)한 존재가 인간이고 지금 사람이고 그러니까 천지와 만물 이라는게 이게 다 내 몸에 있어서의 천지 만물 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천지 만물과 내 몸은 분리가 안되는 거야.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을 너무 그렇게 애매하게 하지 마시고, 그 주자 시대 때만 하더라도 얼마나 그 학생들이 치열하냐? 하면 ’아 지금 천지가 뒤바뀌고 지진이 나고 막 대화재가 나고 무슨 변란이 나고 이런 상황에 성현이 나타나서 자기 몸에 중화 만을 지극하게 하면 그런 우주적 재난에서 우리가 구원될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 다니까? ‘지진이 나는데 그럼 내 몸에 중화만 잘 하면 지진에서 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주자가 대답하는 게 이러거든 ‘아무리 대단한 성인이라도 물리적인 제이지변의 상황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제약적이다’ 그거는 상식적으로 어렵지 않느냐? 내 몸에 중화를 잘 취한다고 해서 천지가 뒤흔들렸다가 갑자기 안녕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그러나 한 몸에라도 중화를 치(致)하면 천하가 비록 어지러울지라도 그 나의 몸의 천지 만물(天地萬物)은 안태(安泰)함을 얻을 것이다’. ‘그 한 몸에 중화를 치(致)하지 못하면 천하가 비록 다스려질 지라도 내몸의 천지만물은 괴착(乖錯)되고 말 것이다.’
[21:50] 이런 말씀을 하는데 이 말은 애매한 듯이 들리지만 여러분들은 이게 사대부의 철학이라고 말할 적에 사실 천재지변으로 우리 환경이 위기상황에 처하는 것은 별로 많지 않은 거예요. 결국은 다스리는 새끼들이 전부 중화(中和)를 상실해가지고 미치광이가 되가지고 이 천지를 다 망쳐버리는 거거든. 그러니까 주자가 천재지변에 무슨 성인이 할 수 있는 거는 상당히 제한돼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정말 중화를 취하는 삶을 살며는 이 천지가 얼마나 도움을 받겠냐? 이 말은 뭐냐면 인간 존재가 이미 천지의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큼 우리 문명이 비대해졌다는 얘기예요. 그 문명에 대해서 인간은 책임을 져야한다. 그러니까 ‘치중화면 천지가 바르게 선다는 거는 너무도 당연한 얘기 아니냐’는 거예요. 주자의 얘기가. 그러니까 한 놈이 중화가 없는 상황에서 한 사람이 잘못되는데 4대강 천지가 다 뒤집어 버리는 거야. 이건 아주 리얼한 아날로기가 이건 너무, 그러니까 그 사이에 있는 4대강에 있는 땅과 하늘에 이게 위(位)가 막 개판이 되니까 그 사이에 있는 만물이 다 제대로 자랄 수 있습니까? 생태계 파괴되고 뭐하고, 왜 북한산에다가 뭐 케이블 카를 놓겠다 그러고 이 지랄하고 그러는 거예요 왜? 그런 것들이 지금 뭐냐하면 천지위(天地位)를 바꾸는 거 아녜요? 그러니까 도가 철학은 인간에다가 이건 하찮은 새끼들이 너무 같지않게 지랄을 하고있기 때문에, 얘들한테는 천지 운영권을 맡길 필요가 없다고 해서 ‘아예 너는 포기하고 꺼져달라’ 이거야 도가는. 근데 그게 되나? 유가는 뭐냐하면 그렇게 인간을 폄하해서 우주 앞에 겸손한 존재라고 말해봤자, 그런 얘기는 들을 때는 통쾌한데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책임이 있어야 될거 아니냐? 그러니까는 유가 철학은 인간에게 이제는 천지 우주의 경영권을 인간에게 줄 수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천지가 너희들이 경영주니까 이건 책임지고 경영해달라. 그렇게 지금 문제가 심각하다는 거니까.
그러니까 ‘치중화(致中和), 천지위언(天地位焉), 만물육언(萬物育焉)’ 이라는 얘기는 ‘인간에게 천지만물의 운영권이 이미 맡겨졌다’ 라는 얘기예요. 그 의식을 가지고 자사는 지금 이걸 쓰고 있는 거예요. 이걸 이해 못하면 이 중용의 성론(性論) 이라는게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니까 인간 존재 라는 것이 지금 얼마나 위기 상황에 있느냐는 거를 이미 2,500년 전에 자사라는 사상가가 이걸 절절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치중화(致中和)하면, 천지위언(天地位焉)이요, 만물육언(萬物育焉)’ 이라는 얘기는 이거는 절절한 얘기라는 얘기에요. 왜? 천지 그 자체가 하나의 나와 같은 그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 천지는 뭐냐하면 이것은 객관적인 하늘이 저기있고 땅이 저기 있어서 그냥 객관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물리적 사태가 아리라 천지 라는 것 자체가 생명의 생명적 사태라는 것이죠. 생명적 사태가 그 무슨 말이냐면은 뒤에가서 계속 반복을 하겠지만 천지 라는 것 자체가 가치가 배제될 수 없는 세계라는 거죠. 지금 현대 과학은 천지라는 건 마치 무슨 펙트다 객관적인 사태로 있고 우리가 거기에 던져진 인간이고 인간은 그 펙트만을 조사하면 된다. 이게 넌센스 라는 얘기죠.
‘지금 우주에 산소가 있다’. ‘그게 펙트다’ 웃기는 얘기예요. 30억년 전에 가면 산소 없었어요? 지금 이 대기에 산소가 없었어요? 이 산소 라는 거는 남조류니 이런 세균이 생겨나면서 끊임없이 이런 광합성하고 이래가지고 그 치열하게 30억년을 쌓여서 지금 최근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산소가 있다는 자체가 생명의 소산이라니까? 그게 가치의 세계 라니까? 가치의 재화 라니까? 그러니까 하늘고 땅이 하나의 객관적인 사태가 아니라 생명들이 카~ 치열하게 노력을 해서 지금 우리가 살만하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산소를 카~ 이렇게 해가지고 축척을 해서 이렇게 오니까 산소가 너무 과해졌거든, 산소가 이게 굉장히 무서운 거거든 산소가 좋은 것만은 아니거든 산소가 과해지면 다 죽거든. 그 식물로만 다 번성하니까 그때에 또 기발나게 폐 호흡을 해가지고 먹고사는 ‘산소호흡을 해가지고 CO2를 배출해서 니들 먹고 살아라’ 하는 동물들이 꼬무락꼬무락 또 태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는 이 광합성과 이 폐호흡에 의한 이 순환구조가 생겨나면서 지금 하늘과 땅이라는 게 된거거든. 이거 없이는 하늘과 땅이라는 게 안되는 거거든. 하늘과 땅이라는 이것 자체가 이러한 태극적 형상이 이것은 생명으로 충만된 잠깐의 지금 가치적인 세계예요. 이게 언제 또 때릴지 몰라. 그러면 다 끝나는 거야. 그러니깐 ‘이 소중한 태극의 천지의 자리가 이렇게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이것을 인간이 지켜야 된다’ 라는 거대한 담론(談論)이 자사에게 있는 거죠.
이걸 그냥 ‘객관적인 사태다’ 이게 물리학이고 생물학이고 화학이고 이게 다 개똥이라는 얘기야. 그건 절대 펙트가 아니예요.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이 다루고 있는 모든 세계가 생명의 사실이고 가치의 세계라는 거예요. 객관적인 생명이 배제된 물리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는 불교에서도 모든 게 중생 아녜요? 돌맹이도 중생이예요. 모든게 생명을 가지고 있는 거죠. 돌맹이가 왜 그게 생명이 아닙니까? 돌맹이 없으면 우리가 못 살아요. 닭도 그냥 부지런히 돌맹이를 처먹잖아.
그러기 때문에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그러한 가치적 순환 구조에 있다고 말할 적에 결국 인간이 중화(中和)를 지극(至極)하게 함으로써 천지가 비로소 자리를 잡고, 이런 천지의 무형과 유형 형이상과 형이하의 세계가 하나의 순환구조를 이룩하면서 끊임없는 창조의 구조로 바로 간다는 거죠. 근데 그 핵심에 지금 인간이 들어 앉았다는 거죠. 이 얼마나 막중한 존재냐? 이 존재를 자각하지 않으면 천지가 망가지게 생겼다. 만물이 다 같이 망가지게 생겼다. 최근에 후쿠시마 문제도 이게 땅도 방구를 꾸어야지 그러니까 지진이 일어나는 거죠. 지구 판들이 이렇게 꽉 눌리기 때문에 픽 근데 그 재해 피해보다는 원전 피해가 더 큰거 아니에요? 인간의 재해가 훨씬 더 자연의 재해보다 크다 이말이죠. 이런한데에 대해서 인간은 책임을 느껴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은 이 중용은 마지막에 ‘치중화(致中和)하면, 천지위언(天地位焉)이요, 만물육언(萬物育焉)’ 이라는 말로 끝나는 거예요.
[31:40] 전체적으로 생각하면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에서부터 시작해서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해서 성도교(性道敎)의 문제가 나왔고 그 다음에 도(道) 라는 것을 끄집어 내가지고 ‘잠시라도 그건 떠날 수 없는 거다’ 라는 ‘가리(可離)면 비도야(非道也),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고서 신독(愼獨)이 나오고 그러고 나서 중화(中和)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그것을 제일 마지막에 ‘천지만물이 위육(位育), 바른 자리를 갖고 자라게 된다’고 하는 이 중용의 지금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으로부터 ‘천지위언(天地位焉) 만물육언(萬物育焉)’ 까지의 이 1장의 테마는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 이게 얼마나 방대한 인류의 문제를 이 짧은 언어 속에 이렇게 압축적으로 집어 넣을 수 있겠는가? 지금 현대인들은 도저히 이런 사유(思惟)를 달성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중용 1장의 모든 테마를 나머지 32장이 전개해 나가고 있는 거죠.
이 ‘천지위언 만물육언’ 이라는 이러한 테마를 가지고서 결국은 이게 천당을 가자는게 아니잖아요? 인간 존재는 천지만물과 더불어 살아야 된다고 하는 그러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과제 상황은 뭐냐? 이 천지 만물과 더불어 같이 flourish, 더불어 번영하면서 같이 살아가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 그러니까 모든 종교의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상황이 아니라 천지만물을 어떻게 위육(位育) 하느냐 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최대의 과제고 인간이 우리 인문학이 지향하는 그리고 모든 종교가 지향해야 할 그리고 과학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고 관상하는 것이죠. 그렇게함으로써 결국은 어떻게 인간이 이 땅위에서 번영할 것이냐? 우리가 천지만물이라는 것도 우리 시대 좋으니까 잘해 처먹고 난 돼지고 간다. 결국은 내 후손들이 영속적으로 이 땅 위에서 같이 번영해 나가냐? 하는 거를 고민하지 않으면 그건 안된다는 거죠.
근데 종교라는 것은 이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건 고통스럽고 고뇌에있고 죄악의 덩어리고 이러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한다. 이 구원(救援) 이라는 사상이 근원적으로 잘못된 사상이라는 거죠.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은 천지만물과 같이 위육(位育) 해야 되는 존재라는 거예요. 그 존재 상황을 그 긴박한 사명감을 인간은 인식해야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래적 구원 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이 중용 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인간의 과제 상황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이것으로써 강의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