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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은 길

VIS VITALIS 2020. 12. 29. 21:20

The Road Not Ta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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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ERT FROST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스페셜 칼럼D] 오해되는 시, 가지 않은 길

[중앙일보] 입력 2016.01.03 16:33 수정 2016.01.03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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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의 ‘가지 않은 길: 모두가 사랑하고 거의 모두가 오해하는 시에서 미국 찾기’(2015) 표지.]


최근 안철수 의원이 트위터에 올려 화제가 된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의 ‘가지 않은 길’은, 시인의 고국인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애송되는 시다. 재미있는 건, 그만큼 많이 잘못 해석되는 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 시의 100주년을 맞아 뉴욕타임스의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David Orr)가 ‘가지 않은 길: 모두가 사랑하고 거의 모두가 오해하는 시에서 미국 찾기’라는 책(사진1)을 냈을 정도로.

‘가지 않은 길’은 일상생활에서 취한 상징을 쉬운 언어로 노래하는 프로스트의 특성이 잘 살아있는 시다. 그런데 어떻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 해석한다는 것일까? 먼저 시 전문을 보자. 필자가 직접 국문 번역한 것과 영어 원문을 함께 소개하겠다.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작


노란 숲 속에 길이 둘로 갈라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두 길을 한꺼번에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여행자이기에, 오랫동안 서있었다,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구부러지는 데까지
눈 닿는 데까지 멀리 굽어보면서;

그리고 다른 한 길을 택했다,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좋은 이유가 있는 길을,
풀이 우거지고 별로 닳지 않았기에;
그 점을 말하자면, 발자취로 닳은 건
두 길이 사실 비슷했지만,

그리고 그 날 아침 두 길은 똑같이
아직 밟혀 더럽혀지지 않은 낙엽에 묻혀있었다.
아, 나는 첫 길은 훗날을 위해 남겨두었다!
길은 계속 길로 이어지는 것을 알기에
내가 과연 여기 돌아올지 의심하면서도.

어디에선가 먼 먼 훗날
나는 한숨 쉬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택했다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The Road Not Taken

by Robert Frost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바로 이 마지막 연에만 사람들이 주목하면서 오해가 발생한다고 오어를 비롯한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한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라는, 자기계발서나 CEO 자서전에 단골로 나오는 교훈을 이야기하는 시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중간부분, 특히 제2연의 번역이 틀리는 경우가 많아 그 오해가 더 굳어지곤 한다.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마지막 부분 못지않게 중간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제2연과 제3연에서 화자(話者)는 그가 택한 길이나 가지 않은 길이나 "똑같이 아름답고" "발자취로 닳은 건 두 길이 사실 비슷"했으며, “그 날 아침 두 길은 똑같이 아직 밟혀 더럽혀지지 않은 낙엽에 묻혀있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화자는 마지막에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택했다"고 말하는 것일까. 평론가들은 그가 "한숨 쉬며" 그 말을 하는 사실에 주목하라고 한다. 그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 미련이 남은 상태에서 자신이 택한 길이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이었다고 기억을 윤색해서 자신의 선택에 자부심을 불어넣고 그것으로 위안 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확신이 없기에 “한숨 쉬며”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의 이야기일까. 그렇지도 않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두 길은 똑같이 매혹적으로 보였고, 한 길을 택해서 거의 끝까지 걸은 "먼 먼 훗날"에도 가지 않은 길이 더 좋았는지는 미지로 남을 뿐이다. 더구나 화자가 말하는 시점은 아직 그 "먼 먼 훗날"이 아니라, 막 갈림길 중 한 길로 접어든 순간이다. 그는 "먼 먼 훗날" 자신이 한숨을 쉬게 될 것을 예상하면서도 어느 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두 길을 한꺼번에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여행자이기에." 그게 우리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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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 1941년의 모습.]


이 시의 제목인 ‘가지 않은 길’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 아니라 ‘내가 가지 않은 길’이며, 이 시는 어느 길을 택하더라도 가지 않는 길에 미련이 생기는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이야기다. 프로스트(사진2) 자신의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영문학자 윌리엄 프리차드(William H. Pritchard)가 쓴 프로스트 전기(1984)에 따르면, 프로스트는 이 시가 자신의 친구이며 또한 시인인 에드워드 토머스(Edward Thomas)로부터 영감 받은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그들은 종종 함께 걸었는데, 토머스는 어느 길로 가든지 꼭 다 걷고 나면 다른 길로 갈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 ‘가지 않은 길’은 사실 프로스트 자신의 말대로 습관적으로 선택을 후회하는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농담”을 포함하고 있다. 미국의 여러 광고에서 감동적인 음악이 흐르며 “나는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택했다,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라는 시구가 떠오르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시의 진실을 알고 나면 맥이 빠지거나 심지어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여자 교도소의 생활을 코믹하게 그려낸 인기 미국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Orange Is the New Black)’의 2013년 에피소드에서 엘리트 계층 출신 주인공이 동료 죄수들에게 이 시의 진짜 의미를 설명했다가 죽여버리겠다는 소리만 듣는다.

그러나 이 시의 진정한 의미는 ‘남들이 걷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광고 문구나 CEO 자서전 스타일 교훈보다 더 깊고 은은한 울림을 지니고 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길을 택하든 가지 않은 길은 단지 가지 않았기에, 내가 밟지 않은 낙엽이 소복이 쌓인 채 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아름답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숙명적인 동경과 아쉬움도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덧붙여, 그러니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에 너무 빠지지 말고, 그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겨두고, 내가 선택한 길을 가라는 뜻도 있을지 모르겠다.

 

사진 크게보기

[미국 화가 조지 이네스(1825~1894)의 그림 ‘몬트클레어, 11월’]


프로스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이 시인보다 반세기 앞선 미국 풍경화가 조지 이네스(George Inness)의 그림 ‘몬트클레어, 11월’(사진3)이 떠오른다. 프랑스 바르비종파(Ecole de Barbizon)의 영향을 받아 형태와 색조 변화가 부드럽고 미묘한 그림이다. 온통 노란 숲 속에 한 나그네가 소복한 낙엽을 밟고 서있다. 그는 지금 프로스트의 시처럼 숲 속의 두 갈래 길을 “눈 닿는 데까지 멀리 굽어보고” 있는 게 아닐까 -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망설이면서.

우리의 2016년도 이런 망설임과 선택의 연속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길을 택하든, 가지 않은 길은 그 미지로 인한 신비와 아쉬움을 황홀한 안개처럼 두르고 저 멀리에 있을 것이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스페셜 칼럼D] 오해되는 시, 가지 않은 길

 

 

어느 날 눈길을 헤치고 들판을 걸어가면서 자신의 행로가 지니는 의미를 반추해본다. 누가 보지 않아도 똑바로 걷자. 혹시라도 내 행로가 뒤에 올 누군가의 행로를 비틀거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똑바로 살자. 내 인생이 다른 인생의 거울이 될 수도 있다. 아마 이런 뜻의 잠언(箴言)이리라.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던 세도정치기에도 순백(純白)의 설원(雪原)에 서면 누구나 맑은 영혼으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나 보다.
1985년에 북한 문예출판사에서 발간한 <한시집> 안에도 이 시가 실려 있는데 그 책에는 제목은 야설(野雪), 지은이는 임연 이양연(李亮淵 - 이량연이라고 읽기도 합니다)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한문학자 안대회 교수는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과 1917년에 장지연이 편찬한 '대동시선(大東詩選)' 등에 이 시가 순조 때 활동한 시인 이양연(1771 영조 47~1853 철종 4)의 작품으로 나와 있다고 했다.

대동시선(大東詩選) 8권(卷之八) 30장(張三十)에 나와 있는 이 시는 제목이 '穿雪(천설)'로 되어 있고 내용 중 '답(踏)'자가 '천(穿)'자로, '일(日)자가 '조(朝)'자로 되어 있는 것 두 글자가 다를 뿐 의미는 똑같다.
북한에서 발간한 한시집에도 이 두 글자는 대동시집과 같은 글자를 쓰고 있다고 한다.


야설野雪

穿雪野中去 不須胡亂行  천설야중거 불수호란행
今朝我行跡 遂作後人程  금조아행적 수위후인정
눈을 덮어쓴 들판속으로 가니, 어지럽게 가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 아침 나의 행적은 좇아오는 뒷 사람을 위한 행로가 될 것이다.

雪朝野中行  눈온 아침에 들길을 갈니
開路自我始  길을 여는 것은 나 부터라
不敢少逶迤  감히 삐둘거리며 걷지 못함은
恐誤後來子  뒤에 올 사람을 무서워이다.

 

逶迤 위이 逶 구불구불 갈 위 迤 비스듬할 이 뜻풀이부 관련한자단어·성어 1. (에두른 길이)구불구

逶迤 

(위이)

  • 1(에두른 길이)구불구불함
  • 2위이(委蛇)



“임연당(臨淵堂) 이양연(李亮淵)”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시에도 뛰어나, 사대부로서 농민들의 참상을 아파하는 민요시를 많이 지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진숙(晋叔)이며, 호는 임연(臨淵)이다. 1830년(순조 30) 음보(蔭補)로 선공감(繕工監)에 제수되고, 1834년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38년(헌종 4)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를 거쳐, 1842년 공조참의가 되었고, 1850년(철종 1) 동지중추부사, 이듬해 호조참판·동지돈녕부사 겸부총관에 제수되었다.

문장에 뛰어났고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역대의 전장(典章)·문물(文物)·성력(星曆)·술수(術數)·전제(田制)·군정(軍政) 등에 널리 통하였다. 늙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문장이 전아간고(典雅簡古)하여 후학들이 다투어 암송하였다. 시에도 뛰어나 사대부로서 농민들의 참상을 아파하는 민요시를 많이 지었는데, 그 중《야설(野雪)》이란 시는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애송(愛誦)하였다고 한다.

저서에《침두서(枕頭書)》 《석담작해(石潭酌海)》 《가례비요(嘉禮備要)》 《상제집홀(喪祭輯笏)》등이
있고, 민요시《촌부(村婦)》 《전가(田歌)》 《해계고(蟹鷄苦)》등을 남겼다. 묘는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麻長面)에 있으며, 묘갈명은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묘지명은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이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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