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밀素密,
평소에 친밀하였으면서도
숙종실록보궐정오 25권, 숙종 19년 12월 24일 癸巳 1번째기사 1693년 청 강희(康熙) 32년전 좌의정 조사석의 졸기국역원문.원본 보기
전 좌의정(前左議政) 조사석(趙師錫)이 귀양지인 고성(固城)에서 졸(卒)하였다. 조사석은 온화하고 후덕하여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해학[詼諧]을 잘하였다. 왕후의 가까운 친척으로 김석주(金錫胄)와는 평소에 친밀하였으면서도 점차로 훈척(勳戚)을 의심할 수 있어 힘껏 깨끗한 언론을 부지하게 하였으므로 임금의 돌보심을 입어 정승에 임명되기는 하였으나 당인(黨人)들이 매우 꺼려하였다. 이사명(李師命)과 홍치상(洪致祥)이 유언 비어를 만들어 비난하면서 동조(東朝)와 함께 아울러 무고하기를, 역적인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과 가까운 족속이 된다고 하였고, 박세채(朴世采)와 남구만(南九萬)이 동평군 항을 논하다가 죄를 입게 되자 조사석이 변명하여 구원하기를 매우 힘써 하였으며, 항을 배척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다가 마침내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되었다. 기사년002) 환국(換局) 뒤에 엄중한 전교를 만나 은거하면서 스스로 뜻을 세워 행하려고 도모하다가 도리어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죄에 얽혀 고성(固城)에 귀양갔다가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다. 처음 사초(史草)를 쓴 자가 자기보다 뛰어난 것을 미워하고, 또 처지(處地)가 불행하다는 것으로 이사명(李師命)의 무리가 임금을 속이는 흉측한 말을 본받아 서술하고 추잡하게 중간 역할을 하였다고 헐뜯는 말을 추가하여 더욱 극도로 보잘것없었으므로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놀라워 하였었다. 그러나 조사석이 일찌감치 동평군 항의 집안과 끊어버리지 못하고 그 뒤로 비난을 받는 것은 사류(士流)들이 또한 신정(申晸)에게 부끄러움이 있다고 애석해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90면
【분류】
인물(人物)
[註 002]기사년 : 1689 숙종 15년.
○癸巳/前左議政趙師錫, 卒於固城謫所。 師錫和厚有風度, 善詼諧, 以濯龍近親。 且與金錫冑素密, 而能漸貳勳戚, 力扶淸議焉。 被上眷遇, 加卜拜相, 黨人甚忌之。 師命、致祥, 蜚語造謗, 竝與東朝而誣之, 與逆杭爲近屬, 朴世采、南九萬之論杭被罪也。 師錫伸救甚力, 斥杭不少貸, 遂忤上旨。 己巳後, 遭嚴敎, 屛居自靖, 旋被臺彈, 搆罪竄固城。 至是卒, 修初史者, 惡其異已, 且以處地之不幸, 祖述師命輩誣上之凶言, 追加醜詆厲階之說, 尤極無狀, 識者駭之。 然師錫不能早絶杭家, 以來讒口, 則士流又惜其有愧於申晸也。
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實錄補闕正誤卷之二十五終
【태백산사고본】 27책 2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90면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