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계제(階梯) (깨달음의 길도 한 걸음 씩) 후지모토 아키라 [藤本 晃 (慈照)]
깨달음의 계제(階梯) (깨달음의 길도 한 걸음 씩)
후지모토 아키라 [藤本 晃 (慈照)] 문학 박사 · 서교사(誓教寺)주지
제1회 ◎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누군가 알고 있을까?" -2005.07.22-
제2회 ◎ "후진을 위해, 깨달음을 설명하여 밝히게 되었다" -2005.08.22-
제3회 ◎ "깨달음이 진행되는 것으로 윤회가 감소" -2005.09.04-
제4회 ◎ "배우고 확신함이 깨달음의 열쇠" -2005.11.05-
(patipadâ 2005. 4월호 게재)
제1회
◎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누가 알고 있을까?"
1. 깨달음이란 말은 알고 있지만 내용은 모르겠다.
「깨달음」은 매우 유명한 말입니다. 내용은 잘 모르더라도 그것이 불교에서 목표로 하는 궁극의 목표이고, 이 목표에 도달한 사람이 「깨달은 사람·부처」가 되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로만 유명한 것이 그런대로 심상치 않은 것입니다. 말은 유명할만하지만 내용을 잘 모른다는 것은 어쨌든 말만이 혼자 걸어가는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열기 전부터 「깨달음」이라는 말은 알려져 있었습니다.
「"깨달음"이란 어쨌든 좀처럼 도달할 수 없는 생명의 최고의 상태 같다」라는 것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실제로 부처가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의 세상에는 있지 않다」라는 것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인도의 성실한 수행자들은 모두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모른 채 그 「깨달음」을 목표로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부처가 세상에 나타났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열었다」라는 이야기가 퍼졌을 때 사람들은 「부처? 깨달음? 그게 뭐야?」라고 물었던 것이 아니라 「부처가 드디어 이 세상에 나타났는가!」라고 감탄했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열었던 일이 널리 알려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고 부터는 바라문교 등의 다른 종교의 사람이나 성실한 사람은 불교에 출가하여 불제자가 되거나, 재가에 남아서 열성적인 불교신자가 되거나 하여 많은 사람들이 각각 깨달음의 단계를 열었습니다. 시초에서 대부분 알 수 없었습니다만, 완전하게 깨달음을 연 사람끼리는 「저 사람은 깨닫고 있다」라고 서로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덧붙여서 말하면, 불교에서는 지금의 세상에서 최초로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혼자서 완전한 깨달음을 연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부처」라고 부르고, 그 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지도로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이 완전한 깨달음을 연 제자들은 그 깨달음의 계제(階梯)를 부르는 이름으로서 "아라한"이라고 불러서 구별하고 있습니다.
한편, 일부의 불성실한 종교인들은 불교를 모방하여 「자기도 "깨달음"을 열었다」라든가 「자신도 세상의 일을 무엇이라도 안다」라고 퍼뜨렸습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어차피 분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깨달음」이라는 간판만 세우고 속여서 보시를 받으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짜 깨달음을 내세워 속이는 것은 사람들이 올바른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길을 틀리게 합니다. 최악의 죄·정법(正法)을 비방하는 행위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명예를 손상하는 일을 당하더라도 마음도 움직이지 않고 내버려두었습니다만, 부처님의 가르침 특히 「깨달음」에 대한 속이는 것·거짓말에는 결코 잠자코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을 방해하는 것은 그만큼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상대에게나 청중에게나 알지 못하는 깨달음의 내용을 그냥 설명하여도 낭비니까 정말의 한마디로서 상대를 놀리어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을 흉내 내어서 「"깨달음"의 내용은 이렇다」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나는 이렇게도 말합니다만, 그것에 대해 당신은 어떻습니까?」라고 달리 말하는 방식으로 하여 상대가 그것이상 무엇도 말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서 청중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았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러면 당신과 함께 논의하여 봅시다.」라고 말한 것만으로서 무섭게 되어 몸도 경직되어서 그 정해진 시간에 지정된 장소에 오는 일조차 될 수 없게 되었던 종교인도 많이 있었습니다. 정말의 진실한 일부분이라도 보였다면, 게다가 「진실을 보여 줍시다」라고 말한 것만으로도 가짜가 자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깨달음"이나 "윤회"는 인도의 일반적인 "사상"인가 ?
그래도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의 인도에서는 「윤회로부터의 해탈」등 「깨달음」에 관계있을 법한 글귀가 여러 가지 종교의 문헌에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는 그런 말은 어느 종교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말해도 석가모니 부처님시대 이전부터 전해져 있었던 종교문헌자체가 거의 없었고 구전(口傳)으로 계승되는 "베다" 정도이었습니다.
"베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시대 이전부터 "바라문"들 사이에서 불러지며 전해져 오고 있었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문헌입니다. 현재는 네 번째의 "아타르바베다"를 더해 네 가지 "베다"로 말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대에는 세 가지만이 성립하고 있었습니다.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루베다" 입니다.
이러한 "베다"는 왕족을 섬기는 바라문[지식인]들이 왕족의 제사를 집행할 때 부르는 "축사"로서 내용은 신들이나 자연을 찬양하거나 기도하거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윤회"나 "깨달음" 그 "사상"이나 말조차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대 이후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바라문교뿐만 아니라 모든 인도를 대표하는 종교철학서로 알려져 있는 "우파니샤드" 문헌들에는 그 최초 시기의 것으로 이미 "윤회"나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을 말하는 듯한 문구가 약간이지만 보여 집니다. "우파니샤드" 가운데의 최초 시기의 것으로 "윤회와 해탈의 사상"의 단편(斷片)이 보이며, 그렇지만 그 설명은 너무 짧아서 애매하고 분명하지 않는 것으로서 현대의 학계에서는 「"우파니샤드"가 만들어진 시대에서 싹터서 점차적으로 발전한 인도의 일반적인 "윤회와 깨달음의 사상"이 뒤에 불교에도 받아 들여져 이윽고 불교로서 정밀한 체계로 꾸며졌다」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불교의 윤회나 깨달음의 교설이 도리의 길이 정연하고 체계적인 것에 반하여 "우파니샤드"는 정리되지 않고 명료하지 않아 원시적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단지 그것뿐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계나 문명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사상"도 처음에는 원시적인 수준의 아이디어가 점차 발전하고 체계화하였을 것이라는 "진화론"적인 깊은 믿음이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파니샤드"란 "곁에서 섬긴다, 앉는다"는 뜻으로 바라문들이 대대로 스승에게서 듣고 전한 가르침을 모은 것입니다.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주로 베다의 해설이기 때문에 "축사(祝詞)"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만, 아무래도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불교나 기타 다양한 철학·종교의 영향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무엇이더라도 있는 문헌 같은 느낌으로 됩니다만, 어느 것도 그냥 들은 것으로서 스스로 체험하거나 발견한 것은 없습니다. "우파니샤드" 문헌들은 수백 년에 걸쳐 많이 제작되었습니다만, 그 최초의 한 권으로부터 이미 자신의 체험이 아니라 그냥 듣고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 "우파니샤드"의 최초의 한 권인 "챤도갸 · 우파니샤드"에 "윤회"라고 부르기에는 치졸한 하늘과 지상을 사후 영혼이 왕복하는 사상이 말해지고 있습니다만, 그것마저도 원래 왕족에게만 전해지는 가르침이었던 것을 바라문이 간절히 부탁해서 가르쳐 준 것입니다. 정직한 바라문들이 왕이나 바라문의 이름도 가르침을 듣기에 이른 경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이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험에 근거한 윤회와 깨달음의 교설 이전에는 "윤회"도 "깨달음"도 인도에서조차 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덧붙여서 말하면, 현대의 인도나 학계에서는 "신분제도 속에서 바라문이 최상이고 왕족은 두 번째이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시대 무렵부터 바라문계급이 필사적으로 주장해 온 것이 주효(奏效)했다는 것입니다. 원래의 등급은 왕족이 제일이고 바라문은 두 번째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반드시 이 순서대로 나옵니다. 왕족이 당시의 지식인인 바라문들을 내각에 고용하고 정치나 제사를 집행하는 역할을 맡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바라문들이 섬기고 있던 왕족이 흥망을 반복하는 한편 바라문들은 어떤 왕족에게도 섬기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혈통이나 전통이 하나의 왕족보다 길어지고 역사의 대표 격이 되었을 뿐입니다.
3. 깨달음도 윤회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체험한 사실
원래 깨달음도 윤회도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다른 종교인들이 먼저 소박한 아이디어를 내고, 그리고 인도 안에서 머리를 짜내어서 점차 복잡한 체계를 붙여 완성시킨 "사상"인 것은 아닙니다. 윤회는 원래 윤회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누구도 깨닫지 못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한 사실에서 해탈·깨달음도 해보면 깨달은 사람만이 체험으로써 알았던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지금의 세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음으로 경험하고 체험한 그 내용을 어떤 말로 설명했을 뿐입니다. 말을 가다듬은 "사상"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음 체험하여 알았던 참인데, 바로 그 정밀한 단계를 순서대로 세워서 자세하고 유창하게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현대의 학계에서도 역사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어떤 우파니샤드도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이후에 만든 것을 알 수 있고, 현재로서는 "우파니샤드의 처음 두 권만은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이전 것이다"라는 데까지 양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두 권도 결국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에 만들어 졌다고 인정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초기경전을 읽으면 어느 우파니샤드도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새로운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경전 속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세 가지 베다의 이름은 여러 번 거론 하고 있습니다만, (네 번째 아타루바 베다는 아직 만들어 지지 않았습니다) 우파니샤드 문헌에서는 무엇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세 가지 베다를 만든 10대 선인[十大仙人]의 자손인 바라문들과 아는 사이로서 10대 선인의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까지의 가족이나 선인들의 생활상황도 바라문의 어떤 가계(家系)가 석가족의 노예를 조상으로 한 것까지 뭐든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 지식의 대부분은 왕족으로서 석가국의 왕자였던 시절에 습득한 것, 게다가 출가하고 나서 깨달음을 열 때까지의 육년 동안 돌아다닐 때에 습득한 것입니다. 깨달음을 열고나서는 10대 선인의 자손을 포함한 유명한 바라문들이 석가모니 부처님께 가르침을 얻고자 방문하여 석가모니 부처님과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라문들이 그 당시 이미 만들었다고 한다면 우파니샤드 것만을 우연히 알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한 뒤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한 윤회나 깨달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우파니샤드의 "사상"이나 문장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윤회나 깨달음은 어차피 깨달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나=아(我)"를 말하는 바라문교가 끊임없이 "윤회" 전변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도 자기모순이므로 우파니샤드로서는 계속 후대에 만들어진 문헌에서도 "윤회"나 "깨달음"의 문구는 여전히 짧고 모호하여 명료하지 않는 어중간한 그대로인 것입니다.
"깨달음"의 말만은 인도에서 옛날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만, 그 내용이었던 것이 인도 문헌에 조금이라도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전부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음으로 밝히고 난 뒤의 일입니다. 그것도 불교 이외의 것은 치졸한 비유 정도의 것입니다.
4. 단번에 깨닫는가? 서서히 깨닫는가?
- 돈오설(頓悟說)과 점오설(漸悟說) -
인도의 여러 종교뿐만 아니라 같은 불교 가운데에서도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고는 단언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대한 견해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단번에 확 "깨닫는다"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돈오(頓悟)"설과 서서히 깨달음을 열어서 마지막에 완전하게 "깨닫는다"라고 하는 이른바 "점오(漸悟)"설입니다.
확 깨닫는다, 라는 쪽은 선종(禪宗)의 일부(一部)나 천태종 등 대승불교의 설(說)이고, 서서히 깨닫다다, 라는 것은 북전부파불교(北傳部派佛敎)의 일파(一派)·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구사론(倶舎論)"에 바탕을 둔 구사종(倶舎宗) 등 이른바 "소승"불교의 설입니다.
설일체유부와 마찬가지로 "소승"이라고 보이는 남전상좌부(南傳上座部)가 보존하여 유지하는 팔리 경전에서는 "구사론"과 마찬가지로 예류(預流)、일래(一来)、불환(不還)、아라한(阿羅漢)의 4단계 깨달음을 설하였므로 위의 분류에 따르면 서서히 깨닫는 "점오(漸悟)"설이라는 것이 됩니다.
이것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시작은 대승처럼 "깨달음"을 한마디로서 설명하고 있지만, 나중에 그 "사상"을 "소승"이 4단계로 분류 발전시킨 것일 것이다"라고 봅니다만, 이것도 "사상"은 점차 발전한다고 하는 "진화론"적인 사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으로서는 대승과 소승의 성립순서가 반대로 되어 버립니다. 초기경전이나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상좌부·설일체유부 등의 부파불교가 처음에 있었고, 그 이후로 대승이 성립 발전하였기 때문에 팔리어 경전이나 부파불교에 제대로 남아있는 깨달음의 4단계가 대승경전을 만들 때에 고의적으로 제외되었다, 혹은 단순히 누락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대승경전을 만든 사람들은 깨달음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거나 흥미가 솟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대승경전에도 깨달음의 4단계의 일단(一端)은 보입니다. 언젠가는 완전한 깨달음을 여는 것이 결정된 "불퇴전(不退轉)·정정취(正定聚)"의 지위는 4단계의 최초인 예류과(預流果)에 해당되고, 다음으로 바뀌어 때어나는 때는 그대로 깨닫는다고 하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지위는 3단계의 불환과(不還果)의 영향을 받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어느 것도 단편적이고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이 경전(팔리)에서 "깨달음은 점차로 완성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문제는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는 인도 출신의 스님이 단신으로 들어간 일은 있어도 정식적인 교단으로서 들어간 기록은 없습니다. 당연히, 초기불교는 중국에 뿌리 내리지 않았습니다. 초기경전도 몇 가지 한역은 되었던 것입니다만, 그 후 불타거나 분실되거나 하여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스님의 눈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고, 약간 남은 한역초기경전도 대승경전에 비하여 그다지 열심히 연구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초기불교를 알지 못한 채 중국 · 한국, 일본불교에서 나중에 이러한 문제가 일어났던 것뿐입니다
제2회
◎ "후진을 위해, 깨달음을 설명하여 밝히게 되었다"
5. "깨달음"은 학습할 수 있는 것인가?
깨달음의 내용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는 알려져 있지 않고,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에도 불교이외에는 전해지지 않고, 불교 안에서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을 그대로 기록한 초기경전(완전하게 현존하는 것은 팔리어 경전뿐입니다)밖에 설하여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종교서적을 읽더라도 헛수고입니다만, 초기경전을 읽으면 깨달음이란 어떠한 것인가 지식으로써 배우는 것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솟아나올지도 모릅니다. "선생의 지도를 받고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도달 할 수없는 깨달음을 단지 경전의 설명만으로서 배울 수 있는 것일까?" 혹은 "지식으로써 알은 것만으로서 무엇이 도움이 될까?"
그 대답은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라고 말하더라도 "그러면 예, 이것이 대답입니다"라고 쓰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의 내용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로서 설법한 사실, 그것이 경전으로서 남아있는 사실, 이것이 그대로 대답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을 넘어서 본래 말로서 될 수 없는 깨달음의 내용을 어떻게든 말로서 설명되었다고 하는 것은 말의 설명일 뿐 단순한 지식으로써 만이라도 좋으니까 먼저 배우십시오, 그것만이더라도 수행의 길잡이가 되고 격려가 됩니다, 라는 뜻입니다.
깨달음의 설명은 물론 깨달음 그 자체가 아니라 단순한 지식입니다. 거기에서 정말 열심히 수행하면 길(道)이 점점 열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경전에 설하여져 있는 깨달음의 설명을 읽으면, 그 지식수준의 설명만이더라도 체험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압도적인 진실이 있다고 알 수 있습니다. 그 진실을 말의 수준이더라도 안다면 우리들의 마음도 달라집니다.
6. 깨달음의 계제(단계)는 4단계와 그 전의 단계
깨달음은 사사문과(四沙門果=수행자가 얻는 네 가지 결과)로 4단계가 있습니다.
예류과(預流果)、일래과(一来果)、불환과(不還果)의 순서로 하나씩 단계를 나아가 아라한과(阿羅漢果)로서 완성됩니다.
"단계를 나아간다."라는 것은 번뇌가 차례로 없어지고, 동시에 그만큼의 지혜가 서서히 나타나오는 것입니다.
번뇌가 없어진다는 것은 "갖고 싶은 것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욕심의 번뇌가 나오지 않는다." "갓난아기는 항상 순진하고 더러움이 없다"라고 하는 것처럼 이따금 표면화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다시 결코 생겨나지 않는 뿌리째 없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아라한과에서는 모든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고 마음속에 지혜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크게 나누면 욕심과 분노와 무지의 세 종류입니다. 상세하게 나누면 천오백 몇 가지나 있다고 알려진 번뇌의 하나하나가 뿌리째 없어질 때마다 그만큼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불완전하더라도 예류과로서 이미 깨달은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연 그 무렵 육년간 함께 수행하고 있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최초로 설법하게 되었습니다. 그 설법을 들은 것만으로 마음이 변화된 최초의 한 사람에게 석가모니 부처님은 "콘단냐는 깨달았다, 콘단냐는 깨달았다"라고 기쁨의 목소리를 냈었습니다. 그 때의 설법을 들었을 뿐인데 번뇌를 송두리째 없앤 깨달음은 4단계의 첫 번째 예류과(預流果)입니다. 그 후 다섯 명 모두 제대로 명상수행을 하여 얼마 안 되어 다섯 명 모두 최고의 아라한과(阿羅漢果)까지 도달하였습니다.
* 다섯 비구 :
콘단냐(Kondanna:倧蓮如, 교진여),
아사지(Assaji:阿說示),
마하나마(Mahanama:摩訶男),
밧디야(Bhaddhiya: 婆提),
바파(Vappa:婆頗)
예류과의 하나 앞의 단계도 있습니다. 불법을 향한 마음이 아주 가깝게 정면을 향하고 있는 상태로서 아직 예류과에 도달되어 있지 않지만 다시는 결코 깨달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류과로 향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예류향(預流向)이라든가 예류도(預流道)라고 불립니다.
일래과로부터 아라한과까지에도 거기에 향하여 가는 단계도 있기 때문에, 예류향을 포함하여 네 가지 향(向)과 네 가지 과(果)로 모두 8종류가 깨달은 사람과 깨달음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사람·성자(聖者)의 그룹입니다. 그것 이외의 사람은 범부·일반인입니다. 8종류를 합쳐서 사쌍팔배(四双八輩)라고도 불리며, 출가나 재가를 포함한 이 사람들이 넓은 의미의 승가[상가]·부처님의 가족입니다. 부처님의 가족이 되면 아라한과에 도달할 때까지는 괴로움도 번민도 아직 있습니다만, 서로 도우므로 매우 안심입니다.
경전에서 설하여지고 있는 각 단계의 깨달음의 내용을 첫 번째 단계의 예류과로부터 순서대로 최고의 아라한과까지로 살펴보고, 그러고 나서 깨달음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 예류향이라는 단계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6-1. 예류과
예류과로서 없어지는 번뇌는 무지에 바탕을 둔 세 가지뿐이다.
최초의 깨달음 · 예류과는 상세하게 나누면 천오백이나 있다고 말하여지는 번뇌 가운데 단 세 가지 삼결(三結)만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깨달음을 결정짓는 세 가지입니다.
* 삼결(三結) : 몸과 마음을 결박하여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하는 세 가지 번뇌. 유신견(有身見), 의(疑), 계금취(戒禁取).
첫 번째는 "유신견(有身見)"이라고 불리는 번뇌.
이것은 욕심도 분노도 아닌 무지(無知)로 분류되는 잘못된 견해· 삿된 견해[사견(邪見)]입니다. "내 몸" "나라는 마음과 몸의 집합체" 어떻게 불러도 좋은 것입니다만, 어쨌든 무언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번뇌가 먼저 뿌리째 없어집니다. 명상하거나 집중하여 불법의 이야기를 한창 듣거나 하고 있을 때에 한 순간이지만 “나[我]”가 있지 않는, 무엇도 없는 순간을 "체험"하고 "아아! '내'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납득하는 지혜가 생겨나고, 유신견(有身見)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무상(無常)을 깨닫는다, 무아(無我)를 깨닫는 것이 불교이다"라고 알려져 있는 그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한 순간만이더라도 "체험"하여 "내가 있다"라는 사견·번뇌가 단순히 지식으로써 아는 것이 아닌 정말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무상(無常): 물(物)․심(心)의 모든 현상은 한 찰나에도 생멸 변화하여 항상 머무는 것이 없음.
*무아(無我): 일체의 존재는 무상한 것으로 ‘나’라는 존재도 없다는 말.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첫 번째의 유신견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번뇌입니다. 이 두 가지도 무지에 근거하는 사견입니다. "의(疑)"와 "계금취(戒禁取)"입니다.
"의(疑)"란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한 채 꾸물대고 있는 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류과로 깨달으면 이 우물쭈물한 상태나 진위(眞僞)를 잘못 보는 일이 없게 됩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많은 철학이나 종교가 나란히 있고, 진리를 찾아서 그 스승들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곳곳에서 여러 가지 설(說)을 배우고 있었으니까, 한가지만 가르치는 철학자나 종교인들보다 상당히 박식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예리한 질문을 하면 따돌리든지 대답하지 않고 거꾸로 잘라버리는 종교인들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진리를 찾는 박식한 자들은 그런 종교인에게는 빨리 단념하고 다음의 스승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와서 질문하면 명석한 대답이 돌아오므로 먼저 감복합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런 수행이 있으니까 해 보라 라고 권유하게 되면 즉시 시작하여 바로 예류과의 결과를 냅니다. 그 자리에서 출가하여 마침내 아라한까지 되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진리를 눈앞에 두고 어떤 의심도 없이 우물쭈물 헤매지 않으므로 결과도 바로 나오는 것입니다.
현대의 우리들도 저쪽의 철학을 기웃거리거나 이쪽의 종교를 하루 체험하거나 본지(本誌: patipadâ 2005. 4월호 ) "빠티빠다[道]"를 손에 넣기도 하거나 진리를 찾아서 꽤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 우리들도 무아(無我) 무상(無常)을 실제로 '체험'하여 예류과로 되면 "앗! 역시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알고, 이 길을 의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이제 "저쪽의 종교도 괜찮구나, 이쪽의 명상법도 괜찮을까"라고 어슬렁거리지 않습니다.
셋 번째의 없어지는 번뇌는 계금취(戒禁取)입니다. 관습이나 고행 등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 고집도 예류과로 깨달으면 없어집니다.
여인을 금하는 산이나 사원 대단한 의미나 종교적 뜻이 있는 것처럼 기묘한 습관이나 기묘한 행위가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일상의 세세한 것에도 계금취·얽매임은 잘 볼 수 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올 때는 오른발부터 나오지 않으면 안 되고, 집에 돌아가면 윗도리는 오른쪽 소매부터 벗지 않으면 안 되는 것 등. 종교의식에서도 향은 한 개를 꽂는다, 세 개를 꽂는다, 아니야 두 개로 꺾어서 누인다. 두 개 세 개로 좋으나 둘로 꺾어서 누인다, 염주는 왼손에 잡는다, 오른손에 잡는다, 양손에 건다, 목에 건다, 등등 종단에 따라 관례가 완전히 다릅니다.
어떤 관습도 약속한 일도 각각의 방법 문화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여도 자유입니다만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올바르고 이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이 계금취(戒禁取)입니다. 진리가 아닌 자신이 정한 관습에 자신이 묶여있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예류과의 사람에게는 없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욕심도 분노도 아니고 무지에 바탕을 둔 삿된 견해[사견(邪見)]입니다.
덧붙여서 말하면, 자신의 고집이 아닌 올바른 계율, 예를 들면, "죽이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진리에 의거한 이유가 있으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변명 없이 무모하든 어떻게 하든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올바른 계율에 무모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얽매임·계금취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예류과로서 없어지는 것은 단지 이 세 가지 번뇌뿐입니다. 게다가 모든 견해·사견·무지에 관한 것으로서 욕심도 분노도 무엇도 없어지지 않으므로 예류과로 되어도 화를 잘 내는 성격도 욕심이 많은 마음도 아직 거의 변하여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무지(無知)만이 사라지고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어딘가에 단념하는 기분이 생겨나고 심한 집착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예류과의 특별한 혜택
예류과에 도달한 사람은 진리를 한 순간만이더라도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이더라도 마음이 확 달라져 있습니다. 마음이 바뀌어 버렸으므로 마음이 결정하는 그 뒤의 나아가는 길도 깨달음의 방향으로 크게 전환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류과로 된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완전한 깨달음을 열고 최고의 아라한과에 도달 하는 것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제 결정코 완전한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에서 물러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에로의 거룩한 흐름에 들어가서 책임지고 맡았으므로 예류과라고 부릅니다.
언젠가 반드시라고 해도 언제까지 노력하면 끝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면 상당히 걱정되므로 석가모니 부처님은 "여덟 번째에는 다시 바뀌어 태어나지 않습니다. 일곱 번째 바뀌어 태어나는 사이에는 반드시 깨닫는 것입니다."라고 한정지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한 것이 아니라 천안통(天眼通)으로서 다른 사람의 환생(還生)을 많이 관찰하고 사실로써 확인된 것입니다.
경전에는 예류과로 깨달았기 때문에 금생에서 바로 아라한과까지 도달한 근성(根性)이 있는 사람의 수도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 한 생애로서 정해지지 않더라도 죽어서 다시 바뀌어 태어나 일곱 번 윤회하는 사이에는 반드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도 지옥이나 아귀(유령)로 바뀌어 태어나는 것은 누구나 싫어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행여나 하여 "예류과의 사람은 천계(天界)나 인계(人界)에만 바뀌어 태어나고, 지옥·축생(無我)·아귀세계에 태어나는 일은 결코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윤회자체는 괴롭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선취(善趣)라고 불리는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좋은 지위에만 바뀌어 태어나는 것입니다.
선취(善趣)에만 윤회하는 것이니까 예류과의 사람은 당연히 에류과가 되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는 여섯 종류의 악업(惡業)만은 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아라한을 죽이고, 부처님의 신체를 다치게 하는 일, 불교의 가족·승단을 이간질시키는 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하거나 그 가짜를 유포시키는 일. 이 여섯 가지의 악업만은 예류자(預流者)는 거부반응을 일으켜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예류자(預流者)라고는 말하더라도 이 여섯 가지 이외의 악업이라면 가끔씩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격은 아직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류자(預流者)는 어떤 악업을 하여도 그것을 숨기거나 속이거나 하는 거짓말쟁이의 성격만은 고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나쁜 일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참회합니다. 자신이 저지른 악을 계속 숨기거나 숨기기 위해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하는 그 마음에 "아니야 ~"라는 기분으로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류자는 어떤 악도 정직하게 인정하고 스스로 제대로 참회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솔직하게 노력하고, 악을 범하더라도 참회하고 고쳐 세울 것이고, 그렇게 큰 나쁜 일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정직하니까 사람들로부터 상당히 신뢰받게 될 것입니다. 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제3회
◎ "깨달음이 진행되면 윤회가 줄어든다"
6-2 일래과(一來果)
일래과로서는 번뇌는 약해질 뿐이다?
예류과에 도달하고부터는 설법을 듣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습니다. 명상수행도 하고, 이제 한 순간 "내가 있지 않다, 무엇도 없다"라는 순간을 "체험"하면 두 번째 단계의 일래과에 도달합니다. 일래과에서는 유신견(有身見) 의(疑) 계금취(戒禁取)의 삼결(三結)은 당연히 없어지고 있습니다만, 그 외에 욕심 분노 무지의 세 가지 번뇌가 모두 약하게 됩니다.
일래과 다음의 불환과는 다시 조금 극적으로 단계가 오르므로, 이 언뜻 보기에 어중간한 일래과를 학계에서는 "아라한과가 당연히 제일로 확정되고, 그러고 나서 예류과와 불환과, 그리고 상당히 지난 뒤 일래과가 더해져서 깨달음이 4단계에 맞춰진 것이다"라고, "사사문과(四沙門果)설(說)"이 시대를 지나서 점차로 발전한 그 마지막에 군더더기처럼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뒤의 사람들이 깨달음의 단계를 서서히 결정했다면 왜 비교적 명확한 세 단계만으로서 끝나지 않고 일래과도 더해져서 4단계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요? 조금 붓이 미끄러져 사족을 붙여 버렸던 것은 아닐까요? 어떤 이유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원래, 사사문과(四沙門果)설(說)은 어떠한 경전에 설해진 것에도 일치하고 있고, 그것이 설해지는 경전 어디에도 후대의 늘리거나 덧붙인 흔적은 보이지 않고, 게다가 사사문과(四沙門果)는 있다고 온갖 경전에 말하여져 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도 "사사문과(四沙門果)는 처음부터 4단계로 확정하고 있었다. 확정된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이다"라는 결론 이외에 무엇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라는 최대의 사견이 없어져서 예류과에 도달하고부터 세 번째 불환과에 도달할 때까지의 이 일래과는 번뇌가 완전히 없어진 것도 아니고, 선정(禅定)에 들어서 범천(梵天)의 세계에 노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일념(一念)으로 불도를 배우고 명상수행에 몰두하고 그래도 마음이 성장하는 기미는 이제 한 순간 "무아"의 "체험"이외 전연 느껴지지 않는 수수한 단계입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눈치 채기 어렵더라도 "이전처럼 심하고 끈질기게 갖고 싶어 하지 않게 되었다, 심하고 끈질기게 화가 나지 않게 되었다, 이전보다는 일체의 사물을 명석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마음의 수준은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나아가는 정도도 천오백이나 되는 번뇌의 어느 것이 특히 약해질지는 아마 사람에 의해서 각각 미묘하게 다를 것입니다. 그것을 모두 정리하여 한마디로 표현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삼결(三結)이 없어졌다, 더하는, 욕심, 분노, 무지가 약해진 단계"로 되는 것입니다.
일래과의 특별한 혜택
일래과에 도달하면 윤회가 뒤에 단 한 번만으로서 끝나게 됩니다. 완전히 깨달은 것은 아니며 선정에 들어 범천계(梵天界)에 노는 것도 아직 없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위해 이제 한 번만 다시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한번만 이 세계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일래(一來)"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위해 바뀌어 태어나는 지위는 물론 지옥 축생 아귀의 삼악취(三悪趣)는 아닙니다. 즐거움을 느끼고 받아들일 뿐인 천계이더라도 수행은 될 수 없습니다. 수행하여 깨달음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사람 세계에 바뀌어 태어납니다. 또 번뇌가 약해지고, 그만큼만의 지혜가 나타나므로 사람들로부터 점점 신뢰를 얻습니다.
6-3 불환과(不還果)
선정을 체험하여 불환과로
일래과를 넘어서 불환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시 한 번 더 "무아"를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일래과에 도달한 수행자가 다음에 불환과에 도달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명상에 익숙하여 선정에 들어가 선정의 세계·범천계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한 순간의 "무아"뿐만 아니라 압도적인 선정체험이 불환과에 도달하는 열쇠가 됩니다.
천(天=하늘)과 범천(梵天)의 차이 - 천(天)은 욕계(欲界)의 생명 -
불환과에 도달한 대부분의 수행자가 체험하고 있는 선정의 세계·범천계[梵天界=색계초선천(色界初禪天)]와 우리들이 지금 있는 세계 사이에는 조금이나 조금이라도 넘을 수 없는 벽, 단절(斷絶)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아는 한의 지구상의 모든, 게다가 태양계와 은하계를 포함하여 알 수 있는 우주의 모든 것은 눈이나 귀나 신체 등을 통한 감각에 의해서 알려진 세계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욕계(欲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욕계란 "욕망으로 가득 차있다"라는 뜻으로 좋은 것입니다만, 좀 더 차분하고 온화하게 관찰하여도 우리들이 알고 있는 자신이나 세계의 모든 것은 역시 모두 눈과 귀와 코와 혀나 신체로서 얻어진 감각·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므로 그런 감각을 갖고 싶어 하고 있는, 그런 감각만으로서 성립하고 있는 세계라고 하는 뜻으로서 "욕계(欲界)"입니다.
욕계는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이 모든 우주와 그곳에 사는 우리들 인간이나 동식물들만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평소에는 알 수 없는 생명의 차원도 불교는 태연하여서 이것도 욕심 세계입니다, 라고 소개하여 줍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의 지위를 다섯 가지로 정리합니다. 아래의 순위부터 순서대로 지옥, 축생, 아귀, 사람, 하늘의 다섯입니다. 모든 생명은 다섯 가지 중의 어느 하나에 바뀌어 태어나고[환생] 죽음으로 바뀌고 하여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귀와 사람의 사이에 아수라(阿修羅)를 따로 세워서 육도윤회로서 분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하여도 하늘과 사람만이 좋은 지위·선취(善趣)이고, 나쁜 지위·악취(悪趣)는 지옥, 축생, 아귀의 삼악취(三悪趣)이고, 또는 아수라를 추가하여 사악취(四悪趣)입니다. 아수라는 좋아하지 않은 생명의 단계입니다.
이 오(육)도윤회[五(六)道輪廻]의 지위는 전부 욕계의 감각만으로 성립하고 있는 세계입니다. 축생의 일부분에는 눈이나 귀가 듣지 않는 생명도 있고 반대로 천인에는 눈이나 귀의 감각만 있어서 혀나 몸으로서는 감각을 받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그들의 생명을 전부 정리하여 결국은 오감 가운데 하나의 감각을 받아서 여섯 번째의 감각[육감(六感)]·마음으로서 맛보고 있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이 육도윤회(六道輪廻)의 지위에도 우리들은 어떤 수행도 없이 바뀌어 태어날 수 있습니다. 지옥이나 축생이나 아귀에 바뀌어 태어나는 것은 간단합니다. 눈이나 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화여 화내거나, 원망하거나, 욕심을 부리거나,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하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나 천인으로 바뀌어 태어나는 것은 조금 어렵지만, 그렇더라도 마찬가지로 눈이나 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에 바탕을 두어서 자애로운 마음을 가진다든지 그런 마음으로서 타인을 위해서 뭔가 하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나 명상 등을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만으로, 언제 까지나 마음껏 떠 올리면 오도(五道) 가운데 하나에 바뀌어 태어나고 마음껏 떠 올리면 괴롭게 된다든지 합니다. 그것이 욕계입니다.
하늘[天]과 범천의 차이 - 범천은 색계 · 무색계의 생명 -
명상에 익숙하여 눈이나 귀 등의 오감(五感)에 의지하지 않고 게다가 여섯 번째의 감각·마음으로서 생각하는 망상도 전혀 없고, 마음이 순수하게 움직일 뿐인 상태에 도달한다면 그것이 선정(禅定)입니다. 몸도 망상개념도 모두 분리되어서 마음만이 온화하게 생멸(生滅)을 계속합니다.
이 선정상태도 깨달음이 아니라 윤회의 세계입니다. 마음이 모든 감각으로부터 벗어난 것만으로서 마음은 쭉 계속 흘러가지만, 그 에너지가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선정(禅定)으로부터 일어나서 마음의 개념을 포함한 육감(六感)의 세계로 돌아오면 원래대로의 몸이나 개념이 돌아옵니다. 선정상태는 번뇌를 없어지게 하여 지혜가 나타나는 깨달음의 상태가 아니라 번뇌가 그 사이만큼은 단순히 작동하지 않고 번뇌가 그냥 멈춘 상태인 것입니다.
선정상태도 윤회의 세계이기 때문에 거기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세계"라고 말하여도 선정상태 마음만의 "세계"이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지구라든지 우주 등의 세계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은하의 끝까지 찾아도 우주 어디에도 선정의 세계는 "없습니다". 하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이나 귀가 느낄 수 없을 뿐입니다. 마음만의 세계로서 확실히 "있습니다."
선정에 도달하여 마음만으로서 그 선정세계에 놀 수도 있지만 선정에 도달한 사람이 죽으면 선정상태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반대로 이 보통의 욕심의 세계에 미련이 없기 때문에 선정의 세계에 바뀌어 태어납니다. 이 선정의 세계를 범천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직 욕계수준의 천인의 세계·천계(天界)를 훨씬 넘은 세계입니다. 거기에 사는 생명은 천인·신들과는 비교가 안 될 수준의 범천이라 불리는 생명입니다.
범천계는 그 위에 세밀히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명상의 대상이 되는 어떤 물질이 약간 있는 색계와 그것마저도 없는 정말 마음만의 무색계(無色界)입니다. 색계 무색계의 두 범천계와 우리들의 욕계를 합하여서 삼계라고 말합니다.
범천계도 윤회의 세계인 것이지만 육도윤회(六道輪廻)의 천계에는 우리들은 보통 범천계를 포함하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윤회하는 세상을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로 분류 할 때는 오도윤회[五道輪廻]의 가운데 지옥부터 욕계천(欲界天)까지가 욕계라고 명시하고, 그것에 색계·무색계의 두 범천도 "천(天)"에 포함합니다. 이제 오도(五道)에서도 삼계에서도 윤회의 전 세계를 나타내어 말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삼계로 나눈 때의 색계·무색계가 오도윤회의 천계에 포함되지 않고, 윤회도 깨달음도 아닌 마음만의 모호한 지위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엿한 윤회의 지위입니다. 수행하지 않으면 이르지 못할 특별한 지위라고 할 뿐인 것입니다.
불환과(不還果)에서는 오하분결(五下分結)이 없어진다
불환과에 도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정에 들어가서 범천계를 체험하고, 그렇게 하여 세 번째의 "무아"를 체험하고 몸으로 감각을 맛보는 욕계에 대한 집착만은 완전히 없어져 버립니다. 욕계에 대한 집착이 완전히 없어지므로, 불환과에서는 마음을 욕계에 연결하는 다섯 종류의 집착·오하분결(五下分結)이 모두 없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하분결이란 아래의 지위·욕계에 결부되는 번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섯 가지는 무엇일까요? 천오백 종류의 집착·번뇌 가운데 욕계에 대한 집착을 단지 다섯 가지로 정리하여 없애므로 깜짝 놀라고 있어서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하분결이란 예류과에서 이미 없어지고 일래과에서도 이미 없어지고 있다고 재확인 된 유신견(有身見)·의(疑)·계금취(戒禁取)와 뒤의 두 가지인 심한 욕심·심한 분노뿐입니다.
무지에는 변하지 않는 삼결(三結)과 욕심과 분노의 가운데 심한 것이 없어질 뿐입니다. 이것으로는 "욕심·분노·무지가 약해진다."라고 말한 일래과와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 것입니다. 일래과에서는 약해졌을 뿐인 하계·욕계에 대한 집착·번뇌가 불환과에서는 완전히 없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불환과에 있는 자의 마음에는 더 이상 속세에 대한 욕심도 분노도 없기 때문에 이 세계에 관한 모든 것에 마음은 이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냥 담담하게 일상생활의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배가 고프면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만 무언가를 먹고, 누구와 무엇이 있어도 불교의 일 이외라면 자신이 먼저 타인을 용서하고 자신이 참회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집착이 완전히 없어져 지혜가 어느 정도 대담하게 나타나므로 다른 생명에 대한 자비에 넘친 마음을 가진 조용한 성자라고 하는 느낌이 됩니다.
대신 불환과에서는 원래 선정을 즐기고 있던 사람은 범천계에 대한 집착만은 남습니다. 혹은 일래과에서는 선정에 이르지 못하고 있던 사람에게는 범천계를 체험하여 불환과에 도달한 것으로서 범천계에 대한 집착이 새롭게 생겨납니다.
세 번째의 "무아"를 체험하여 불환과에 도달한 사람도 욕계에 대한 집착은 없어지지만, 아직 완전히 없어지기에는 과감히 시작하지 않고 욕계에서 없는 깨끗한 상태에 대한 집착이 생깁니다. 이 집착을 색계(色界)에 대한 욕(欲)·색탐(色貪)과 무색계에 대한 욕(欲)·무색탐(無色貪)이라고 말합니다.
불환과에 도달하면 범천계에 태어난다
불환과에 도달한 사람은 욕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므로 사후에는 욕계의 어디에도 바뀌어 태어나지 않습니다. 지옥 등의 삼악취는 말할 것도 없고 욕계천에도 사람 세계에도 윤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욕심의 세계에 더 이상 결코 돌아오지 않으므로 "불환"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완전히 깨닫지 않고 범천계에 대한 집착이 있으므로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면 범천계에 바뀌어 태어납니다. 범천계에는 부모의 몸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확 변하여 나타나므로 불환과의 사람을 화생자(化生者)라고 부릅니다.
이 욕계에는 더 이상 바뀌어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 점은 최고의 아라한과와 비슷하지만 범천계에 바뀌어 태어나 버리므로 이제 한 번만의 윤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범천계에서의 터무니없이 긴 선정상태의 수명이 다하면 그것으로 완전히 없어져서 거기에서 다른 지위로 바뀌어 태어나는 것은 이제 없습니다.
선정에는 깨닫지 않아도 들어간다
여기서 주의하기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불환자(不還者)는 죽으면 반드시 범천계에 바뀌어 태어납니다만, 범천계에 바뀌어 태어나는 생명의 모두가 불환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명상하여 선정에 들어가는 것은 인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부터 가장 저명한 수행의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제사를 집행하는 바라문의 전통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출가하여 명상을 즐기는 유행자(遊行者)의 전통으로 전해져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은 출가하기 전 왕자시절부터 선정의 첫 단계·색계초선(色界初禪)에 들어가 즐기고 있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하여 바로 제자로 들어간 두 사람의 스승은 각각 선정(禅定) 최고와 최고의 한 단계 아래의 달인이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도 곧 두 스승처럼 선정의 최고의 단계까지 도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은 최고단계까지의 선정 모두를 "이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아니다. 겨우 범천계에 왕생 할 뿐이다"라고 버렸던 것입니다.
깨달음의 단계에 도달하지 않고, 결국 "나"가 있다는 유신견이 없어지지 않고, 무상이나 무아를 한 순간도 체험하지 못한 채 단지 명상에 힘써서 선정에 도달한 사람은 그 훌륭함에 사로잡힙니다. 그 한 방법으로서 이 욕계에 대한 집착도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선정을 즐긴 뒤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욕심을 즐기거나 합니다.
이러한 범부의 선정자는 죽은 뒤에 범천계에 윤회하지만, 거기에서의 수명을 마치고 선정의 공덕이 없어지면 다시 욕계의 어딘가에 윤회하여 버립니다. 욕계의 즐거움에 대한 집착이나 이전에 행한 선악업(善惡業)의 업이 욕계에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윤회의 고통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나"는 없다」라는 무아(無我)·무상(無常)을 체험하여 깨달음의 단계에 들어간 사람이 선정에 도달하여 범천계의 훌륭함을 체험하면 역시 그 훌륭함에 집착하지만 어딘가에 이 훌륭함도 뜻은 무상이라고 밝히는 것도 있습니다.
이러한 성자는 범천계에 집착하는 대신 욕계에 대한 집착을 시원스럽게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범천계에는 바뀌어 태어납니다만, 그곳에서의 수명을 마치면 이제 만족하므로 아무런 집착을 남기는 것이 없이 어디에도 윤회하지 않고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욕계의 천인들에게는 예류과에 도달한 성자의 천인과 단지 선업의 결과로서 태어난 범부의 천인들이 있습니다. 범부 천인들의 일부는 사람들이 깨달음을 열기도 하고, 불환자로서 범천에 가버리기도 하고, 자신의 욕심의 세계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것이 싫어서 쾌락이나 공포에 의해서 방해를 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몇 번인가 방해 한 마(魔)는 그러한 천인입니다.
우리들도 깨닫고 있지 않더라도 유혹이나 위협에는 충분히 주의하여 자기를 훈계(訓戒)합시다.
제4회
◎ "배움과 확신이 깨달음의 열쇠"
6-4 아라한과
아라한과에서 모든 번뇌가 없어진다
마지막의 아라한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적어도 이제 한 번만 "무아"를 체험합니다. 그래서 최소의 경우 단 네 번만으로서 한 순간의 "무아"를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아라한과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불환과에 도달했을 때 이미 선정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아라한이란 모든 번뇌가 완전히 없어진 사람입니다. 번뇌가 전혀 없기 때문에 지혜가 아무런 제한도 없이 바로 작용합니다. 아라한은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다·응공(応供)" 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만, 번뇌라고 하는 "적(敵)을 죽였다"라는 즉, 번뇌를 완전히 없앴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지금까지 해왔던 업이 모두 없어집니다. 좋은 결과도 나쁜 결과도 내지 못한 채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하는 행위도 업이 되지 않습니다. 나쁜 것은 본래부터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만 착한 것도 그냥 할뿐입니다. 업이라는 에너지가 되어서 뒤에 공덕의 결과를 내는 것에는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될 라고 말한다면 모두가 무상이라고 완벽하게 체험하여 모든 번뇌가 없어졌으므로 어딘가에 바뀌어 태어나고 싶다든가, 더 이것저것 하고 싶다, 이것저것 부족하다고 하는 기분이 전혀 생겨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업이 결과를 내고 싶더라도 겨우 금생의 생이 끝날 때까지 입니다.
아라한에서 깨닫고 나서는 새로운 행위도 어떤 착한 행위도 그냥 하고 있는 것만으로서 공덕이어서 내세의 바뀌어 태어남에 이끄는 업에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분노는 말할 것도 없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욕심마저 완전히 없으므로 종자에 불을 놓거나 어린 싹을 뜯는 듯한 그 행위에서는 결코 새로운 싹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까지의 모든 업을 지우고, 새로 어떠한 업도 만들지 않는 아라한이 죽을 때는 등불이 꺼지는 상태에 비유됩니다. 아라한은 불을 켜게 하는 밀랍이나 기름처럼 이 한 생애만의 목숨을 이어 나가는 에너지가 다하면 거기서 그냥 문득 없어질 뿐입니다.
연료가 다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에 어디에도 옮겨 붙지 않으며 꺼진 등불이 그 후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고 찾는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없어지면 없어질 뿐 그것으로서 끝납니다. 정말 없어짐이 한 순간이어서 나중은 없어짐조차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재가 아라한"은 무리
불환과까지는 어떻게든 담담하게 일상생활이나 경제활동을 노력하여 일하지만 아라한이 되면 이제 무리입니다. 담담함조차도 일상의 가정생활이나 경제활동 등을 영위할 수 없게 됩니다. 아라한은 출가자로서 어떤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어떤 생명에도 평등한 입장이 아니면 생활 할 수없는 것입니다.
불환까지 재가에서 노력하고 있었던 사람 혹은 독자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던 사람이 이제 어떤 사람도 아라한과에 도달할 때에는 이제 참지 못하고 집을 뛰어나와서 석가모니 부처님 곳에 가서 출가를 원하여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여러 경전에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불환과에 도달했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순간에 아라한과에 도달하고 바로 출가를 원하여 허가되었습니다. 출가자는 쓰레기장에서 넝마를 모아서 기운 분소의(糞掃衣)를 입습니다.
그것을 직접 만들 수 있도록 하라고 말해서 헌 옷 조각을 찾고 있는 도중에 그 사람은 날뛰는 소에 받치어서 죽어 버렸습니다. 친척도 없었으므로 그 사람의 시신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화장하여 묘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입문하기 전"인 사람들을 위해서 왜? 라고 제자들이 깜짝 놀라므로 이 사람은 아라한이다, 라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쳐주었습니다. 이 경우처럼 옷 등을 준비하거나 수계하여 정식으로 출가하기 전에 이미 아라한과에 도달한 경우마저도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현대의 학계에서는 "출가하여 입문하기 전부터 재가 인 채로 아라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라한과만은 출가하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재가 아라한"도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출가하지 않으면 아라한이 될 수 없다"라고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수행자의 형식이나 자격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라한이 될 때는 또는 아라한이 되어 버렸다면 출가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재가에서는 있을 수 없다"라고, 마음이 완전히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버리기 때문에 재가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식에 얽매여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은 재가도 출가도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단계를 나아가는 데에 아무런 차별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면 재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출가의 쪽이 재가생활의 얽매임에 방해되지 않기 때문에 수행에 전념하기 쉽습니다.
또 출가하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의 생활과 인연을 끊을 각오와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도 재가 때보다는 마음도 강하고 훌륭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게다가 출가하는 것 자체가 불법의 융성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기 때문에 매우 공덕 있는 행위입니다.
아라한과에서 없어지는 번뇌는 오상분결(五上分結)
번뇌가 모두 사라진다고 말하더라도 불환과에서 욕계에 대한 것은 모두 없어지기 때문에 아라한이 될 때까지에 남아있는 것은 범천계에 대한 것뿐입니다. 그것은 다섯 가지뿐입니다. 범천계 즉 삼계 가운데의 상위(上位)의 두 세계에 대한 다섯 가지 번뇌이기 때문에 오상분결(五上分結)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오상분결(五上分結)은 색탐(色貪)·무색탐(無色貪)·도거(掉挙)·만(慢)·무명(無明)입니다.
색탐과 무색탐은 각각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범천계에 조차 바뀌어 태어나는 것 없이 그냥 없어지는 것입니다.
도거(掉挙)·만(慢)·무명은 상위 두 세계에 뿐만 아니라 욕계에 대하여서도 말하여지는 번뇌이지만, 이 세 가지가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불환과까지는 어떻게 하여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했다, 이 단계까지 도달 했다"라는 성취감이 있습니다. 이것이 도거(掉挙)입니다.
아라한은 그것이 없습니다. 무아·무상을 체험하고 있어도, 아무리 하여도 임시의 「"내가" 했다」라는 감각·만(慢)은 남아 있습니다. 아라한은 이것도 없습니다. 그것들을 포함하여 아무리 하여도 약간 남아 있던 무지의 뿌리, 무명이 아라한과에서 완전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일은 끝나고 하여야 할 것은 하여 마치고, 하여야 할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수명의 나머지가 다하여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는 자신을 위해하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의 깨달음을 위해서만 활동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행복하게 되어주십시오. 깨달음을 열어 주십시오."라는 마음만으로 활동합니다.
7. 법수행(法隨行=법에 따라 행함)과 신수행(信隨行=믿음에 따라 행함) [예류향(預流香)]
최고의 아라한과는 말할 것도 없이 예류과도 갑자기 도달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이 "차례차례로 배우고 차례차례로 행하고 차례차례로 길을 나아가는 것에 의해서 최고의 지혜가 완성됩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최고의 깨달음으로 향하는 배움·수행·걸음의 첫 걸음도 석가모니 부처님은 정중하게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 첫 걸음이 범부의 길과 성자의 길의 갈림길입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길이 점점 열립니다.
성자의 길 입구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가르침에 대한 이해·법수행과 부처님에 대한 믿는 마음·신수행입니다. 양쪽 모두 겸비하고 있지 않더라도 어느 쪽으로부터도 성자의 길에 들어갑니다. 사람에 따라서 가르침의 이해로부터 불도에 들어가는 경우와 신심으로부터 불도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기뻐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법에 따라서 가는 깨달음의 길[법수행(法隨行)]입니다. 부처님의 존재를 기뻐하고 부처님에 마음을 결정한다면 그것은 믿음에 따라 가는 깨달음의 길[신수행(信隨行)]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깨달음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은 무상"이라든지 "나는 없다"라고 말하여서 "아 과연, 그렇다면 마음 편하다"라고 무심코 납득하여 기뻐지게 된다면 법수행 타입 입니다.
"뭐라고 싫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처럼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라고 듣고 싶지 않다면 아직 조금 불상(佛像)이나 그림이 장식되어 있는 곳에 우연히 가서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마음이 안정된다면 신수행 타입 입니다. "불상이 있어 왠지 기분 나쁘구나"라고 느낀다면 아직 조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들어가는 경우도 가르침 들어가는 경우도, 신(信)·정진(精進)·념(念)·정(定)·혜(慧)의 오근(五根)이 있습니다. 오근으로서 열심히 공부와 수행에 힘쓰면 길[道]이 점점 열리고, 이윽고 한 순간 "무아"를 체험하고 예류과에 도달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결코 깨달음의 길에서 물러남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수행과 법수행 자체가 이미 예류과로 향하는 길·예류향이므로 깨닫지는 않고 있어도 성자의 동료 부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寶)가 지켜지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큰 안심입니다.
크게 안심한 예류향의 사람은 이이와 같이 노력합니다. "비록 뼈와 살과 근육만으로 되어도, 신체의 피와 살이 말라 버려도, 인간의 힘 인간의 정진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달성해야 할 것을 달성할 때까지는 이 노력을 결코 멈추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스승으로 받들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제자로 인정하는 부처님의 가족입니다.
8 끝으로
단계별로 자세하게 말해지고 있는 불교의 깨달음의 계제를 개략적으로 관찰하였습니다.
그 단계 모두에 있어서 깨달음의 내용이 엄밀하게 정의되고 있었으므로 "나는 조금 깨달을는지도"라고 착각하거나, 사람을 속이려고 말을 퍼뜨리는 듯한 애매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종교에서 "깨달음, 깨달음"이라고 말만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 깨달음의 내용까지를 훔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초기경전에만 깨달음의 내용이 명확하게 설하여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내용을 지식적으로 말로서 아는 것에 의하더라도 깨달음은 결코 불가능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최초의 첫 걸음으로부터 서서히 열어서 가는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단숨에 정상까지 오르는 방법은 없고, 그 대신 먼저 발밑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면 좋은 것을 알 수 있으므로 훨씬 높음을 향하여서 땅 바닥에서 절벽을 기어 오르는 힘이 솟아나옵니다.
이처럼 불법을 지식으로서 배우는 것 자체가 깨달음으로의 첫 걸음·법수행의 일부라고 자신에게 타이르고 기분을 분별하고 또 손으로 하여도 없는 것을 잘난 듯이 문장으로 하였습니다.
내용에 어떤 잘못이 있더라도 이를 통해 독자 여러분께 폐가되지 않도록. 여러분이 함께 헤매지 않고 깨달음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http://blog.daum.net/0hee20/105
☆特別連載 パーリ経典を読んで初めて分かった「仏教のゴール」に到るプロセス 悟りの階梯 (悟りの道も一歩ずつ) 藤本 晃(慈照)文学博士・誓教寺住職 第二回 ◎『後進のため、悟りは説き明かされた』 -2005.08.22- 第三回 ◎『悟りが進むと輪廻が減る』 -2005.09.04- 第四(最終回) ◎『学びと確信が悟りの鍵』 -2005.11.05-up |
第一回 ◎『悟りって何なのか誰か知ってる?』 |
1. 悟りって言葉は知ってるけど、 「悟り」は、とても有名な言葉です。内容はよく分からなくても、それが仏教で目指す究極のゴールで、そのゴールに達した人が「悟った人・仏陀」になることは、よく知られています。でも、この、言葉だけ有名なことが、結構くせ者です。言葉は有名だけど中身がよく分からないものは、とかく言葉だけが一人歩きします。 インドでは、今の世で釈尊が初めて悟りを開かれる前から、「悟り」という言葉は知られていました。「『悟り』とは、とにかく滅多に到達することができない、生命の最高の状態らしい」ということも知られていました。「過去には実際に仏陀がいたようだけど、今の世にはいない」ということも知られていました。インドの真面目な修行者たちはみんな、それがどんなものか分からないまま、その「悟り」を目指して修行していたのです。 そんな状況でしたから、「仏陀が世に現れた」「釈尊が悟りを開かれた」という話が広まった時、人々は、「仏陀?悟り? 何それ?」と尋ねたのではなく、「仏陀が、とうとうこの世に現れたか」と感嘆したのです。 釈尊が悟りを開かれたことが知れ渡り、仏陀の教えが広まってからは、バラモン教など他の宗教の人も、真面目な人は仏教で出家して仏弟子になったり、在家のまま熱心な仏教信者になったりして、多くの人がそれぞれの段階の悟りを開きました。端からはおよそ分かりませんが、完全に悟りを開いた人同士は、「あの人は悟っている」と、お互いによく分かっていたようです。 ちなみに仏教では、今の世で最初に、誰にも教えられずに一人で完全な悟りを開かれた釈尊だけを「仏陀」と呼び、その後、釈尊の指導で釈尊と同じく完全な悟りを開かれたお弟子さんたちは、その悟りの階梯の呼び名で「阿羅漢」と呼んで区別しています。 一方、一部の不真面目な宗教家たちは、仏教にあやかって「自分も『悟り』を開いた」とか「自分も世の中のことが何でも分かる」などと言いふらしました。一般の人々にはどうせ見分けが付かないと考えて、「悟り」という看板だけ立てて、騙してお布施をもらおうと考えたのです。 悟りの偽物を出して騙すことは、人々が正しく悟りを目指す道を誤らせる、最悪の罪・誹謗正法の行為です。釈尊は、ご自分が個人的に中傷されても心も動きませんし、放っておきましたが、仏陀の教え、特に「悟り」に対する騙し・ウソ偽りには、決して黙っていませんでした。人々が悟りに向かう道を邪魔することは、それほど重大な過ちだったのです。 釈尊は、相手にも聴衆にも分からない悟りの内容をただ説明しても無駄ですから、ホンの一言で相手をからかって、自分で恥をかくようにしてあげました。例えば釈尊の言葉だけを真似て「『悟り』の内容はこうだ」と言う人には、「私はこうも言いますが、それについてあなたはどうですか?」などと別の言い方をして、相手がそれ以上何も言えないようにしてあげました。それだけで、聴衆には何が真実で何がウソか分かりました。 釈尊が「ではあなたと議論しましょう」とおっしゃっただけで、恐ろしくなって身体も硬直して、その決められた日時に指定された場所に来ることさえできなくなった宗教家も大勢いました。真実のホンの一部でも見せたら、さらには「真実を見せてあげましょう」と言っただけでも、偽物は自滅するしかないのです。 2.「悟り」や「輪廻」はインド共通の「思想」? それでも釈尊以降のインドでは、「輪廻からの解脱」など「悟り」に関係ありそうな文言が、いろいろな宗教の文献に見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 釈尊以前には、そんな言葉はどの宗教にも見られなかったのです。と言っても、釈尊の時代以前から伝わっていた宗教文献自体がほとんどなく、口頭伝承のヴェーダくらいのものでした。 ヴェーダは、釈尊の時代以前からバラモンたちの間で唱えられ伝えられていた、インド最古の宗教文献です。現在では第四のアタルヴァ・ヴェーダを加えて四ヴェーダを数えますが、釈尊の時代にはまだ三つだけが成立していました。リグ・ヴェーダ、サーマ・ヴェーダ、ヤジュル・ヴェーダです。これらヴェーダは、王族に仕えるバラモンたちが王族の祭祀を執行する時に唱える「祝詞」で、内容は神々や自然を讃えたり祈ったりするものですから、「輪廻」や「悟り」が、その「思想」も言葉さえも見られないのは当然です。 ところが釈尊の時代以後に製作され始めた、バラモン教のみならず全インドを代表する宗教哲学書と言われているウパニシャッド文献群には、その最初期のものに既に「輪廻」やそれからの「解脱」を説くかのような文言が、僅かですが見られます。ウパニシャッドの中の最初期のものに「輪廻と解脱の思想」の断片が見られ、でもその説明は短か過ぎて曖昧で不明瞭ですので、現代の学界では「ウパニシャッドが製作された時代から芽生えて徐々に発展した、インド共通の『輪廻と悟りの思想』が、後に仏教にも取り入れられ、やがて仏教で精密な体系に調えられた」と見ています。 でもそう結論する理由は、他愛のないものです。仏教の輪廻や悟りの教説が理路整然として体系的なのに対して、ウパニシャッドのものが未整理で不明瞭で原始的だからという、ただそれだけのことなのです。そこには、機械や文明の発展と同様に「思想」も、始めは原始的なレベルのアイデアが徐々に発展して体系化するはずだという「進化論」的思い込みがあるのでしょう。でも事実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ウパニシャッドとは「側に仕える、座る」という意味で、バラモンたちが代々師匠から聞き伝えた教えを集めたものです。教えと言っても主としてヴェーダの解説ですから「祝詞」の説明の域を出ないはずなのですが、どうしても当時流行り始めた仏教やその他のいろいろな哲学・宗教の影響が入ります。それで総合的に何でもある文献のような感じになりますが、どれもただ聞いたもので、自分で体験したり発見し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ウパニシャッド文献群は何百年もかけてたくさん製作されましたが、その最初の一本から既に、自分の体験ではなく、ただの聞き伝えなのです。 そのウパニシャッドの、最初の一本とされるチャンドーギャ・ウパニシャッドに、「輪廻」と呼ぶには稚拙な、天と地上を死後の魂が往復する思想が説かれていますが、それさえも、もともと王族のみに伝わる教えだったものを、バラモンが頼み込んで教えてもらったものです。正直なバラモンたちが、王やバラモンの名前も、教えを聞くに至った経緯までも記録しています。そんなわけですから、釈尊の体験に基づく輪廻と悟りの教説以前には、「輪廻」も「悟り」も、インドでさえその内容は知られていなかったのです。 ちなみに、現代のインドや学界では「身分制度の中でバラモンが最上で王族は二番目だ」と言いますが、これは釈尊の時代頃からバラモン階級が必死に主張してきたことが功を奏したものです。もともとの格は王族が第一で、バラモンは第二です。初期経典では必ずこの順番で出ます。日本の天皇家とその祭祀を勤める神主たちの主従関係に準えれば、インドの王族とバラモンの関係も想像できると思います。王族が、当時の知識人であるバラモンたちを大臣などとして雇い、政治や祭祀を執行する役目を負わせていたのです。 日本でも古代王権では祭政一致で、執行役を雇っていました。インドでは、バラモンたちが仕えていた王族が興亡を繰り返す一方、バラモンたちはどの王族にも仕えて祭祀を勤めましたから、血統や伝統が単一の王族より長くなって、歴史の代表格になっただけです。 3.悟りも輪廻も釈尊が体験した事実 そもそも、悟りも輪廻も、釈尊や他の宗教家たちがまず素朴なアイデアを出し、それからインド中で頭をひねって徐々に複雑に体系付けて完成させた「思想」なのではありません。輪廻は、もともと輪廻し続けているのに誰も気付かなかった明らかな事実、それからの解脱・悟りも、やってみれば悟れた人だけが体験として分かった明らかな事実です。その事実を、今の世界では釈尊が初めて体験し、体験したその内容を何とか言葉にして説明しただけです。言葉を練り上げる「思想」ではなく、単なる事実ですから、それまで全く知られていなかった内容が、釈尊が初めて体験して分かったところで、すぐに、その精密な階梯を順序立てて詳しく流暢に説明できたのです。 現代の学界でも、歴史を調べれば調べるほど、どのウパニシャッドも釈尊より後に製作されたことが分かり、現在では「ウパニシャッドの最初の二本だけは釈尊より古いはず」というところまで譲歩しています。でも、その二本もいずれ、釈尊より後に作られたと認められるでしょう。 何よりも、初期経典を読むと、どのウパニシャッドも釈尊より新しいものであることが分かるのです。経典の中で釈尊は、三ヴェーダの名は何度も挙げていますが(第四のアタルヴァ・ヴェーダはまだ製作されていませんでした)、ウパニシャッド文献のことは、何もおっしゃっていないのです。 釈尊は三ヴェーダを製作した十大仙人の子孫であるバラモンたちと知り合いで、十大仙人の釈尊当時までの家系や仙人たちの生活状況も、バラモンのある家系が釈迦族の奴隷を先祖とすることまで、何でもご存じでした。その知識の多くは、王族として釈迦国の王子であった頃に学ばれたもの、さらには、出家してから悟りを開かれるまでの六年間の遊行時代に学ばれたものです。悟りを開かれてからは、十大仙人の子孫を含む名高いバラモンたちが、釈尊のもとに教えを乞いに訪れて、釈尊と交流していました。そんな釈尊が、バラモンたちがその当時既に製作していたなら、ウパニシャッドのことだけたまたまご存じなかったということは、あり得ません。 釈尊が入滅された後に、釈尊が初めて説かれた輪廻や悟りの教えを基にして、ウパニシャッドの「思想」や文章が製作されたのです。でも輪廻や悟りは、どうせ悟りを体験しないと分かりませんし、「我」を説くバラモン教が絶え間なく「輪廻」転変する心を説くのも自己矛盾ですので、ウパニシャッドでは、ずーっと後代に製作された文献でも、「輪廻」や「悟り」の文言は相変わらず短くて曖昧で不明瞭で中途半端なままなのです。 「悟り」の言葉だけはインドで古くから知られていましたが、その内容めいたものがインドの文献に少しでも触れられるようになったのは、全部、釈尊が初めて明らかにされてから後のことです。それも、仏教以外のものは稚拙な喩え話程度のものです。 4.一気に悟る? 徐々に悟る? インドの諸宗教だけでなく同じ仏教の中でも、「悟り」がどんなものかよく分かっているとは言い切れないようです。 中国や日本の仏教では、「悟り」についての見解が、大きく二つに分かれています。一気にパッと「悟る」と主張するいわゆる「頓悟」説と、徐々に悟りを開いて最後に完全に「悟る」とするいわゆる「漸悟」説です。パッと悟る方は禅宗の一部や天台宗など大乗仏教の説で、徐々に悟るものは、北伝部派仏教の一派・説一切有部の『倶舎論』に基づく倶舎宗など、いわゆる「小乗」仏教の説です。 説一切有部と同じく「小乗」と見なされる南伝上座部が保持するパーリ経典では、『倶舎論』と同様に預流、一来、不還、阿羅漢の四段階の悟りを説きますから、上の分類に従えば、徐々に悟る「漸悟」説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これについて学界では「始めは大乗のように『悟り』を一言で説明していたが、後にその『思想』を『小乗』が四段階に分類発展させたのだろう」と見ますが、これも「思想」は徐々に発展するはずという「進化論」的思考に過ぎません。何よりも、これでは大乗と「小乗」の成立順序が逆になってしまいます。初期経典やそれに基づく上座部、説一切有部などの部派仏教が始めにあって、それから後、大乗が成立発展したのですから、パーリ経典や部派仏教にしっかり残されている悟りの四段階が、大乗経典を製作する時に故意に除外された、あるいは単に抜け落ちたと考えるのが妥当です。大乗経典を製作した人々には、悟りの具体的な内容は理解できなかったか、興味が湧かなか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 でも大乗経典にも、悟りの四段階の一端は見られます。いつかは完全な悟りを開くことが決定した「不退転・正定聚」の位は、四段階の最初・預流果に当たり、次に生まれ変わる時はそのまま悟るとする「一生補処」の位は、第三段階の不還果の影響を受けているでしょう。でも、どれも断片的で揃っていません。 何よりも釈尊ご自身が、経典(パーリ経典)の中で「悟りは順々に完成するもの」と明言されていますので、「頓悟」と「漸悟」の問題は、始めから起こらないはずのものだったのです。中国にはインド出身のお坊さんが単身で入ったことはあっても、正式な教団として入った記録はありません。当然、初期仏教は中国に根付きませんでした。初期経典も、幾つか漢訳はされたのですが、その後焼かれたり紛失したりして中国や日本のお坊さんの目にはほとんど留まらず、僅かに残った漢訳初期経典も、大乗経典に比べてあまり熱心に研究されませんでした。そのように初期仏教を知らないままの中国・日本仏教で、後にこのような問題が起こっただけなのです。 【次回予告】 悟りは四段階の階梯を一つずつ進む道程。その第一の階梯『預流果』が今明らかにされます。 HOME→初期仏教研究:会員広場→悟りの階梯 |
第二回 ◎『後進のため、悟りは説き明かされた』 |
5. 「悟り」は学習できるもの? 悟りの内容は、釈尊以前には知られていず、釈尊以後にも仏教以外には伝わらず、仏教内でも、釈尊の言葉をそのまま記録した初期経典(完全に現存するのはパーリ経典だけです)にしか説かれていません。ですから、他のどんな宗教書を読んでも無駄ですが、初期経典を読めば、悟りとはどんなものか、知識として学ぶことはできます。 ここで、疑問が一つ湧くかもしれません。「師の指導を受けてきっちり修行しないと到達できない悟りを、ただ経典の説明だけで学べるものでしょうか?」あるいは「知識として知っただけで何か役に立つのでしょうか?」 悟りの説明は、もちろん悟りそのものではなく、単なる知識です。そこから本当に頑張って修行すれば、道がどんどん開けるのです。でも、経典に説かれている悟りの説明を読むと、その、知識レベルの説明だけでも、体験した人だけが語れる圧倒的な真実があると分かります。その真実に、言葉のレベルでも触れると、私たちの心も変わります。 6. 悟りの階梯は四段階とその前の段階 悟りは、四沙門果(修行者が得る四つの結果)と言われるように、四段階あります。 「段階を進む」とは、煩悩が順に消えて、同時に、その分だけ智慧が徐々に現れてくることです。 大きく分ければ欲と怒りと無知の三種類、細かく分ければ千五百幾種類もあると言われる煩悩の、一つ一つが根こそぎ消える度に、その分だけ、智慧が現れます。 不完全でも、預流果で既に悟りです。釈尊が悟りを開かれてすぐの頃、六年間一緒に修行していた五人の修行者たちに最初に説法されました。その説法を聴いただけで心が変化した最初の一人に、釈尊は「コンダンニャは悟った、コンダンニャは悟った」と喜びの声をあげられました。その時の、説法を聴いただけである煩悩を根こそぎ消した悟りは、四段階の最初の、預流果です。その後五人ともしっかり瞑想修行して、間もなく、五人とも最高の阿羅漢果にまで達しました。 預流果の一つ前の段階もあります。仏法に向かって心がググッと正面向いている状態で、まだ預流果にもなっていないけど、もう決して、悟りの道から離れません。これは預流果に向かう段階ですから、預流向とか預流道と呼ばれます。 一来果から阿羅漢果までにもそこに向かう段階もありますから、預流向を含めて四つの向と四つの果の全部で八種類が、悟った人と悟りから離れない人・聖者のグループです。それ以外の人は凡夫・一般人です。八種類合わせて四双八輩とも呼ばれる、出家も在家も含めたこの人々が、広い意味のサンガ・仏陀の家族です。仏陀の家族になったら、阿羅漢果に達するまでは苦しみも悩みもまだありますが、お互いに助け合えますので、大安心です。 経典に説かれている各段階の悟りの内容を、第一段階の預流果から順に最高の阿羅漢果まで見て、それから、悟りから決して離れない預流向という段階を見ることにしましょう。 6-1. 預流果 預流果で消える煩悩は無知に基づく三つだけ 最初の悟り・預流果では、細かく分ければ千五百もあると言われる煩悩の中、たった三つ(三結)だけが消えています。でもそれは、悟りを決定付ける三つです。 一つ目は、「有身見」と呼ばれる煩悩。 「無常を悟る、無我を悟ることが仏教だ」と言われる、その無常、無我を一瞬だけでも「体験」して、「我がある」という邪見・煩悩が、単なる知識として分かるのではなく、本当に消えるのです。 二つ目と三つ目は、一つ目の有身見が消えれば、自然に消える煩悩です。 「疑」とは、「何が真実か分からないままぐずぐずウジウジしていること」です。預流果に悟ると、このウジウジ状態や真偽を見誤ることがなくなります。 古代インドではたくさんの哲学や宗教が並び立ち、真理を求めてその師匠たちを尋ね歩く人もたくさんいました。尋ねる人たちはあちこちでいろいろな説を学んでいましたから、一つのことだけ教える哲学者や宗教家たちより結構物知りでした。そのためか時に鋭い質問をすると、はぐらかしたり答えられなくて逆ギレしたりする宗教家たちが結構いました。真理を求める物知りたちは、そんな宗教家にはさっさと見切りを付けて、次の師匠を探しに行きました。 その人たちが釈尊のもとに来て質問すると、明晰な答えが返ってくるので、まず感服します。そして釈尊に、こんな修行があるからやってみたら? と勧められると、すぐに始めて、すぐに預流果などの結果を出します。その場で出家してやがて阿羅漢にまでなる人も、大勢いました。真理を目の前にして何の疑いもなく、ぐずぐず迷わないので、結果もすぐに出るのです。 現代の私たちも、あっちの哲学をかじったりこっちの宗教を一日体験したり本誌『パティパダー』を手に取ったり、真理を求めてかなり彷徨っています。その私たちも、無我、無常を実際に「体験」して預流果になれば、「あっ、やっぱりこれが真実か」と分かり、この道を疑わなくなるのです。その後はもう「あっちの宗教もいいかな、こっちの瞑想法もいいかな」などとウロウロしません。 三つ目の消える煩悩は、戒禁取。 女人禁制の山や寺、火渡り、滝に打たれる行など、大変な意味や宗教的意義があるかのような奇習や奇行が、世の中にはたくさんあります。どれも伝統文化ですから、それを守る人々をないがしろにするのはよくありません。せっかく人が歩いている炭火に「無意味だ」と言っていきなり水を掛けたりするのは失礼です。でも、そこに文化以上の、何かの真実があるわけではないと分かっていますから、ありがたがる気持ちはなくなるのです。 日常の細かいことにも、戒禁取・こだわりはよく見られます。朝、家を出る時は右足から出ないといけない、家に帰ったら上着は右袖から脱がないといけないなど。宗教儀式でも、線香は一本立てる、三本立てる、いいや二つに折って寝かせる、数珠は左手に掛ける、右手に掛ける、両手に掛ける、首に掛けるなど、宗派によってしきたりが全く違います。 どのようなしきたりも約束事も、それぞれの仕方、文化ですからどのようにしても自由なのですが、「私がやっているのが正しい、これでなければいけない」とこだわったら、それが戒禁取です。真理ではなく、自分が決めた習慣に自分が縛られているのです。この態度は、預流果の人には消えています。これも、欲でも怒りでもなく無知に基づく邪見です。 ちなみに、自分のこだわりではなく正しい戒律、例えば「殺さない」などでしたら、真理に基づく理由がありますから、自分の幸福のためには言い訳なしに、がむしゃらに、何としても守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正しい戒律にがむしゃらになるのは、自分のこだわり・戒禁取とは別ものです。 預流果で消えるのは、この、たった三つの煩悩だけです。しかも全て見解・邪見・無知に関するもので、欲も怒りも何も消えていませんから、預流果になっても怒りっぽい性格も欲深な心も、まだほとんど変わっていません。ただ、どうしようもない無知だけが消えて、全ては無常だと分かっていますから、どこかに諦めの気持ちが生まれ、激しい執着は減っています。 預流果の特典 預流果に達した人は、真理を一瞬だけでも「体験」していますから、それだけでも心はガラッと変わっています。心が変わってしまいましたので、心が決めるその後の進路も、悟りの方向に大きく転換しています。 まず、預流果になった人はいつか必ず完全な悟りを開いて、最高の阿羅漢果に達することが決定しています。もう決して、完全な悟りに向かう道から退くことはないのです。完全な悟りへの聖なる流れに入った、預かったので、預流果と呼ばれます。 いつか必ず、と言われても、いつまで頑張れば済むのか分からないと結構心配ですので、釈尊は、「八回目にはもう生まれ変わりません。七回生まれ変わる間には完全に悟れます」と限定しておられます。これも釈尊が決めたことではなく、天眼通で他者の生まれ変わりをたくさん観察して、事実として確認されたことです。経典には、預流果に悟ってから今生ですぐに阿羅漢果にまで達した根性のある人のことも多く記されていますが、この一生涯で決められなくても、死んでまた生まれ変わって七回輪廻する間には、必ず悟れるのです。 それでも、地獄や餓鬼(幽霊)に生まれ変わるのは、誰でも嫌です。お釈迦様は念のため、「預流果の人は天界か人界にだけ生まれ変わり、地獄、畜生、餓鬼界に生まれることは決してない」ともおっしゃっています。輪廻自体は苦しいですが、その中でも善趣と呼ばれる、悟りを目指せる好い境涯にだけ生まれ変わるのです。 善趣にだけ輪廻するのですから、預流果の人は当然、それをすれば必ず地獄に堕ちる六種類の悪業だけはできなくなっています。母殺し、父殺し、阿羅漢殺し、仏陀の身体を傷つけること、仏教の家族・サンガを仲違いさせること、仏陀の教えを貶したりその偽物を流布させること。この六つの悪業だけは、預流者は拒否反応を起こして、できないのです。 ということは、預流者とは言っても、この六つ以外の悪業ならまだまだ犯してしまうかもしれないということです。それほど、人格はまだ不完全なのです。 ただし預流者は、どんな悪業をしても、それを隠し通したり、ごまかしたりするウソつきの性格だけは直っています。自分の悪事を正直に告白して懺悔します。自分の犯した悪を隠し続けたり、隠すためにごまかしたりウソをついたりする、その心のいや~な気分に耐えられないのです。 預流者はどんな悪も正直に認め、自分できちんと懺悔します。このような人は結局、素直に頑張りますし、悪を犯しても懺悔して立ち直れるでしょうし、それほど大それた悪事もしないでしょうし、正直だから人々から結構信頼されるでしょうと、容易に想像できます。 【次回予告】悟りの段階を進むにつれて、煩悩が弱まり輪廻する回数も残り少なくなります。『一来果』から『不還果』まで達すればゴールはもうすぐ。第三回『悟りが進むと輪廻が減る』をお楽しみに HOME→初期仏教研究:会員広場→悟りの階梯 |
第三回 ◎『悟りが進むと輪廻が減る』 |
6-2 一来果 一来果では煩悩は弱まるだけ? 預流果に達してからは、説法を聴くだけではもう進みません。瞑想修行もして、もう一瞬だけ、「私がいない、何もない」瞬間を「体験」すると、第二段階の一来果に達します。 一来果では、有身見、疑、戒禁取の三結は当然消えていますが、その他に、欲、怒り、無知の三煩悩が、いずれも弱くなります。 一来果の次の不還果がまたちょっと劇的に段階が上がりますので、この一見中途半端な一来果は、学界では「阿羅漢果が当然第一に確定し、それから預流果と不還果、それからだいぶ後に一来果が加わって、悟りが四段階に揃えられたのだろう」と、四沙門果「説」が時代を経て徐々に発展したその最後に付け足しのように成立したものと見られています。 でも、後の人々が悟りの段階を徐々に決めたのなら、どうして比較的明確な三段階だけで終わらず、一来果も加えて四段階に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 ちょっと筆が滑って、蛇足を付けてしまったのでしょうか? 何の理由も見出せません。 そもそも、四沙門果の記述はどの経典に説かれるものも一致していますし、それが説かれる経典のどこにも、後代の増広や付加の跡は見られませんし、しかも四沙門果はありとあらゆる経典に説かれていますから、学問的にも「四沙門果は最初から四段階で確定していた。確定したのは釈尊ご自身だ」と結論する以外に、何もできないのです。 「私がいる」という最大の邪見が消えて預流果に達してから第三の不還果に達するまでのこの一来果は、煩悩が完全に消えたわけでもない、禅定に入って梵天の世界に遊べるわけでもない、ただひたすら仏道を学び瞑想修行に明け暮れ、それでも心が成長した気配は、もう一瞬の「無我」の「体験」以外およそ感じられない地味な段階です。でも、自分でも気付き難くても「以前のように激しくしつこく欲しがらなくなった、激しくしつこく怒らなくなった、以前よりはものごとを明晰に処理できるようになった」など、心のレベルは進んでいます。 その進みの度合いも、千五百もある煩悩のどれが特に弱まるかも、おそらく人によってそれぞれ微妙に違うのでしょう。それを全部まとめて一言で表現すると、釈尊がおっしゃったように「三結が消えた、プラス、欲、怒り、無知が弱まった段階」になるのです。 一来果の特典 一来果に達すると、輪廻が後たった一回だけで済むようになります。完全に悟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し、禅定に入って梵天界に遊ぶこともまだできません。完全な悟りのために、もう一回だけ再挑戦しないといけません。もう一回だけこの世界に戻るから、「一来」と呼ばれるのです。 完全な悟りのために生まれ変わる境涯は、もちろん地獄、畜生、餓鬼の三悪趣ではありません。楽を感受するだけの天界でも、修行はできません。修行して悟りを完成させるために、人界に生まれ変わります。 6-3 不還果 禅定を体験して不還果に 一来果を超えて不還果に達するためには、最低もう一度だけ「無我」を「体験」しないといけません。でも一来果に達した修行者が次に不還果に達する時は、ほとんどの場合、瞑想に習熟して禅定に入り、禅定の世界・梵天界を体験しています。一瞬の「無我」だけでなく圧倒的な禅定体験が、不還果に達する鍵になります。 天と梵天の違い-天は欲界の生命- 不還果に達したほとんどの修行者が体験している禅定の世界・梵天界と、私たちが今いる世界の間には、ちょっとやそっとでは超えられない壁、断絶があります。 私たちが知る限りの地球上の全て、さらに太陽系や銀河系を含む、知り得る宇宙の全ては、目や耳や身体などを通した感覚によって知られる世界です。これを仏教では、欲界と呼んでいます。欲界とは「欲望に満ちている」という意味でも良いのですが、もっと穏やかに観察しても、私たちが知っている自分や世界の全ては、やっぱり全部、目や耳や鼻や舌や身体から得られる感覚・情報を感受しているだけですから、そんな感覚を欲しがっている、そんな感覚だけで成り立っている世界という意味で「欲界」です。 欲界は、私たちが知り得るこの全宇宙と、そこに住む私たち人間や動物たちだけ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が普段は知ることができない生命の次元も、仏教は平気で、これも欲の世界です、と紹介してくれます。仏教では全ての生命の境涯を五つにまとめます。下のランクから順に地獄、畜生、餓鬼、人、天の五つです。全ての生命は、この五種類の中のどれかに生まれ変わり死に変わりして絶え間なく輪廻しているのです。 餓鬼と人の間に阿修羅(争う・競争する生命)を別に立てて六道輪廻として分類する場合もあります。どちらにしても天と人だけが好い境涯・善趣で、悪い境涯・悪趣は、地獄、畜生、餓鬼の三悪趣、または阿修羅を加えて四悪趣です。阿修羅は好くない生命の段階です。 この五(六)道輪廻の境涯は全部、欲界、感覚だけで成り立っている世界です。畜生の一部には目や耳が利かない生命もいますし、逆に天人には目や耳の感覚だけがあって舌や身体では感覚を受けないそうですが、それらの生命を全部まとめて、結局は五感のどれかで感覚を受け取って六番目の感覚・心で味わっている生命の世界です。 この五(六)道輪廻のどの境涯にも、私たちは何の修行もなしに生まれ変われます。地獄や畜生や餓鬼に生まれ変わるのは簡単です。目や耳から入る情報に基づいて怒ったり恨んだり欲しがったり他人を羨んだりしていればよいのです。人間や天人に生まれ変わるのは少し大変ですが、それでも、同じく目や耳から入る情報に基づいて慈しみの心を持ったり、その心で他人のために何かしてあげればよいのです。仏教で言う修行や瞑想など、する必要は全くありません。普通の生活をするだけで、いつまでも思う存分、五道のどれかに生まれ変わり、思う存分、苦しんだり苦しんだりできます。それが欲界です。 天と梵天の違い-梵天は色界・無色界の生命- 瞑想に習熟して、目や耳などの五感に頼らない、しかも六番目の感覚・心で考える妄想も全くない、心が純粋にはたらくだけの状態に達したら、それが禅定です。身体も妄想概念も全部切り離して、心だけが穏やかに生滅し続けます。 この禅定状態も、悟りではなく、輪廻の世界です。心が全ての感覚から離れただけで、心はずーっと流れ続けますが、そのエネルギーが尽きて滅す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禅定から起って、心の概念を含めた六感の世界に戻ると、元通りの身体や概念が戻ってきます。禅定状態は、煩悩を滅して智慧が現れる悟りの状態ではなく、煩悩が、その間だけは単にはたらいていない、ただの煩悩休止状態なのです。 禅定状態も輪廻の世界ですから、そこにも生命がいます。「世界」と言っても、禅定状態の心だけの「世界」ですから、私たちが考える地球とか宇宙などの世界とは随分違います。銀河の果てまで探しても、宇宙のどこにも、禅定の世界は「ありません」。でも、ないのではなく、私たちの目や耳では感受できないだけです。心だけの世界として、ちゃんと「あります」。 禅定に達して心だけでその禅定世界に遊ぶこともできますが、禅定に達した人が亡くなると、禅定状態への執着が強く、逆にこの普通の欲の世界への未練がありませんから、禅定の世界に生まれ変わります。この禅定の世界を、梵天界と呼んでいます。まだ欲界レベルの天人の世界・天界を遥かに超えた世界です。そこに住む生命は、天人・神々とは比べものにならないレベルの、梵天と呼ばれる生命です。 梵天界は、さらに細かく二種類に分けられます。瞑想の対象にもなる、何らかの物質が僅かにある色界と、それさえもない、本当に心だけの無色界です。色界、無色界の二つの梵天界と、私たちの欲界を合わせて、三界と言います。 梵天界も輪廻の世界なのですが、五(六)道輪廻の天界には、私たちは普通、梵天界を含めて考えてはいません。あまりに次元が違うからです。でも、輪廻する全世界を欲界・色界・無色界の三界に分類する時は、五道輪廻の中の地獄から欲界天までが欲界だと明示し、それに色界・無色界の二つの梵天も「天」に含めます。これで、五道でも三界でも、輪廻の全世界を言い表したことになるのです。 三界に分けた時の色界・無色界が五道輪廻の天界に含まれない、輪廻でも悟りでもない、心だけの怪しげな境涯というわけではありません。れっきとした輪廻の境涯です。修行しないと達せられない、特殊な境涯だというだけのことです。 不還果では五下分結が消える 不還果に達したほとんどの人が禅定に入って梵天界を体験し、そうでなくても三度目の「無我」を「体験」し、身体で感覚を味わう欲界への執着だけは完全に消えてしまいます。欲界への執着が完全に消えますので、不還果では心を欲界に結び付ける五種類の執着・五下分結が全て消えると言います。下分結とは、下の境涯・欲界に結び付ける煩悩ということです。その五つとは何でしょうか? 千五百種類もの執着・煩悩の中、欲界に対する執着をたった五つにまとめて消し去るからには、あっと驚くものであって欲しいものです。 ところが五下分結とは、預流果で既に消え、一来果でも既に消えていると再確認された有身見、疑、戒禁取の三結と、後の二つは、激しい欲、激しい怒りだけです。無知の中では相変わらずの三結と、欲と怒りの中では激しいものが消えるだけなのです。これでは『欲、怒り、無知が弱まる』と言われた一来果と、ほとんど変わりません。 でも、決定的に違う点があるのです。一来果では弱まるだけだった下界・欲界への執着・煩悩が、不還果では完全に消えていることです。不還者の心にはもはや俗世間に対する欲も怒りもありませんから、この世界に関する全てのことに、心はもう揺れません。ただ淡々と日常生活の仕事をこなして過ごすだけです。お腹が空いたら、身体を維持するためにだけ何かを取り入れる、誰と何があっても、仏教のこと以外なら自分がすぐに引いて他者を許し、自分を懺悔するのです。この世への執着が全く消えた分、智慧がかなり大胆に現れますから、他の生命に対する慈悲に溢れた、心静かな聖者という感じになります。 その代わり不還果では、もともと禅定を嗜んでいた人は梵天界への執着だけは残ります。あるいは、一来果まで禅定に達せずにいた人には、梵天界を体験して不還果に達したことで、梵天界への執着が新たに生まれます。三度目の「無我」を「体験」して不還果に達した人も、欲界への執着は消えますが、まだ完全に滅するには踏み切れず、欲界でない清らかな状態への執着が生まれます。この執着を色界への欲・色貪と無色界への欲・無色貪と言います。 不還果に達すると梵天界に生まれる 不還果に達した人は欲界への執着が消えていますから、死後には欲界のどこにも生まれ変わりません。地獄などの三悪趣はもとより、欲界天にも人界にも輪廻しないのです。この欲の世界にもはや決して帰らないので、「不還」と呼ばれます。 と言ってもまだ完全に悟っていず、梵天界への執着がありますから、この世界での生が終わると、梵天界に生まれ変わります。梵天界には親の身体から生まれるのではなく、ただパッと化けて現れるので、不還者のことを化生者とも言います。 この欲界にはもはや生まれ変わらないので、その点は最高の阿羅漢果と似ていますが、梵天界に生まれ変わってしまうので、もう一回だけ輪廻があります。ただし、梵天界でのとてつもなく長い禅定状態の寿命が尽きると、それで完全に滅して、そこから他の境涯に生まれ変わることは、もうありません。 禅定には悟らなくても入れる ここで気を付けてほしいことがあります。不還者は亡くなると必ず梵天界に生まれ変わりますが、梵天界に生まれ変わる生命の全てが不還者とは限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瞑想して禅定に入ることは、インドでは釈尊以前から最も著名な修行の一つでした。それは祭祀を行うバラモンの伝統ではなく、独自に出家して瞑想を楽しむ遊行者の伝統に伝わっていました。 釈尊ご自身、在家の王子の頃から禅定の最初の段階・色界初禅に入って楽しんでいました。釈尊が出家してすぐに弟子入りした二人の師匠は、それぞれ禅定の最高と最高から一つ下の段階の達人でした。釈尊ご自身も、すぐに両師と同様、禅定の最高の段階まで達しました。 でも釈尊は、最高の段階までの禅定の全てを、「これは悟りに至る道ではない。せいぜい梵天界に往生するだけだ」と、捨てられたのです。 悟りの段階に達していず、つまり「私」がいるという有身見が消えず、無常や無我が一瞬も「体験」できていないまま、ただ瞑想に励んで禅定に達した人は、その素晴らしさに囚われます。その一方で、この欲界に対する執着も、消え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禅定を楽しんだ後は、日常生活の中で欲を楽しんだりします。 このような凡夫の禅定者は、死後に梵天界に輪廻しますが、そこでの長寿を終え、禅定の功徳が切れたら、また欲界のどこかに輪廻してしまいます。欲界の楽に対する執着や、以前に行った善悪業のカルマが欲界に引き込むのです。そうして輪廻の苦しみが続きます。 でも「『私』はない」と無我、無常を「体験」して悟りの段階に入った人が禅定に達し、梵天界の素晴らしさを体験すると、やはりその素晴らしさに執着しますが、どこかに、この素晴らしさも所詮は無常だという諦めもあります。 このような聖者は、梵天界に執着する代わりに欲界への執着をあっさり捨ててしまいます。ですから梵天界には生まれ変わりますが、そこでの長寿を終えるともう満足していますので、何の執着も残らず、どこにも輪廻せず、ただ消えてしまうのです。 同様に、欲界の天人たちには、預流果に達した聖者の天人とただ善業の結果で生まれた凡夫の天人たちがいます。凡夫の天人たちの一部には、人々が悟りを開いたり不還者として梵天に往ったりして自分の欲の世界から完全に離れていくのが嫌で、快楽や恐怖によって邪魔をしようとする者もいます。釈尊を何度か邪魔したマーラ(魔)は、そのような天人です。 私たちも、悟っていなくても、誘惑や脅しには充分気を付けて自己を戒めましょう。 【次回予告】『阿羅漢』までまっすぐ続く悟りの流れに、教えを学ぶことと仏陀への揺るぎない信頼だけで入れます。最終回『学びと確信が悟りの鍵』をお楽しみに。 HOME→初期仏教研究:会員広場→悟りの階梯 |
第四回(最終回) ◎『学びと確信が悟りの鍵』 |
6ー4 阿羅漢果 阿羅漢果で全ての煩悩が消える 最後の阿羅漢果に達するためにも、最低もう一度だけ「無我」を「体験」します。というわけで最低の場合、たった四回だけ一瞬の「無我」を「体験」するだけでも、最高の阿羅漢果に達することはできます。ただしほとんどの場合、不還果に達した時に既に禅定を体験しています。 阿羅漢とは、全ての煩悩が完全に滅した人です。煩悩が全くありませんので、智慧が何の制限もなくストレートにはたらきます。阿羅漢には「供養を受けるに相応しい・応供」という意味もありますが、煩悩という「敵を殺した」つまり煩悩を全滅させたという意味もあります。 阿羅漢になると、これまで行ってきた業が全て時効になります。善い結果も悪い結果も出さないまま消えてしまうのです。それだけでなく、これから行う行為も、業にはなりません。悪いことはもとよりできなくなっていますが、善いことも、ただ行うだけです。業というエネルギーになって後に功徳の結果を出すには至らないのです。 そのようにこれまでの全ての業を消し、新たに何の業も作らない阿羅漢が亡くなる時は、灯火が消える状態に喩えられます。阿羅漢は、火を灯させるロウや油のように、この一生涯分の命を続けさせるエネルギーが尽きたら、そこでただ、フッと消えるだけです。燃料が尽きていますので、次にどこにも燃え移りませんし、消えた灯火がその後どうなるのかと探すこともできません。消えたら消えただけ、それで終わりです。本当の滅が一瞬あって、後は滅さえないのです。ないものについては、もう何も言えません。 「在家阿羅漢」は無理 不還果までは何とか淡々と日常生活や経済活動を勤めていけますが、阿羅漢になると、もうダメです。淡々とさえも、日常の家庭生活や経済活動などの関係が営めなくなります。阿羅漢は出家者として、どんなしがらみからも自由で、どんな生命にも平等な立場でないと生活できないのです。不還まで在家で頑張っていた人、あるいは独自に修行していた人がもう何人も、阿羅漢果に達する時には、もう我慢できなくて家を飛び出して釈尊の所に行って出家を願い出て認められました。そんなお話が、幾つもお経に残っています。 ある人の場合、不還果に達していたのですが、釈尊にお会いしてお話を聞いた途端に阿羅漢果に達し、すぐに出家を願い出、許可されました。出家者はゴミ捨て場などからボロ切れを集めて縫い合わせた糞掃衣を着用します。それを自分で作るようにと言われてボロを探している途中、その人は暴れ牛に跳ねられて死んでしまいました。身寄りもありませんでしたので、その人の遺体を釈尊が火葬して、お墓まで作られました。こんな「入門前」の人のためにどうして? とお弟子さんたちが驚きますので、この人は阿羅漢だよ、と釈尊が教えてあげました。 そのためでしょうか、現代の学界では「出家して入門する前から、在家のままで阿羅漢になることもできるはずだ、阿羅漢果だけは出家しないと達せられないというわけではない」と「在家阿羅漢」もあり得ると見ていますが、どうもポイントがずれています。 仏教では「出家しないと阿羅漢になれない」などと、悟りを目指す修行者の形式や資格を問う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阿羅漢になる時は、また、阿羅漢になってしまったら、出家しないといられない、在家ではいられない」と、心が完全に執着から離れてしまいますので、在家生活が営めなくなることを言っているのです。形式にこだわって言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 修行は在家でも出家でもできます。悟りの段階を進むにも、何の差別もありません。ただし、阿羅漢になったら在家ではいられません。何よりも、出家の方が在家生活のしがらみに妨げられないので、修行に専念し易いです。また出家するだけでも、これまでの生活と縁を絶つ覚悟と決心が必要ですから、同じ人でも在家の時よりは心も強く立派になっていると考えられます。さらに、出家すること自体が、仏法の興隆のために一生を捧げることですから、大変功徳のある行為です。 阿羅漢果で消える煩悩は五上分結 煩悩が全て消えると言いましても、不還果で欲界に対するものは全て消えていますから、阿羅漢になるまでに残っているのは、梵天界に対するものだけです。それは、五つだけです。梵天界、つまり三界の中の上位の二界に対する五つの煩悩ですから五上分結と呼ばれています。 五上分結は、色貪、無色貪と、掉挙、慢、無明です。色貪と無色貪は、それぞれ色界と無色界に対する執着です。これが消えますので、梵天界にさえ生まれ変わることなく、ただ滅するのです。 掉挙、慢、無明は、上位の二界に対してだけでなく欲界に対しても言われる煩悩ですが、この三つが、最後まで残っているのです。不還果まではどうしても完全ではありませんから、まだ「やった、この段階まで達したぞ」という達成感があります。これも掉挙です。阿羅漢にはそれはありません。無我、無常を「体験」していても、どうしても仮の「『私が』やったぞ」という感覚・慢も残ります。これも阿羅漢にはありません。それらを含めて、どうしても僅かに残っていた無知の根っこ、無明が、阿羅漢果で完全に消え去るのです。 7 法随行と信随行(預流向) 最高の阿羅漢果はもとより、預流果にさえも、いきなり到達でき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釈尊ご自身が「順々に学び、順々に行い、順々に道を進むことによって、最高の智慧が完成します」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 その、最高の悟りに向かう学び、行い、歩みの最初の一歩も、釈尊は丁寧に示して下さっています。その第一歩が、凡夫の道と聖者の道の分かれ目です。正しい方向に進めば、道がどんどん開けます。 聖者の道の入口は、二つあります。教えに対する理解・法随行と、仏陀に対する信心・信随行です。両方兼ね備えていなくても、どちらからでも、聖者の道に入れます。人によって、教えの理解から仏道に入る場合と、信心から仏道に入る場合があるのです。 仏陀の教えを聞いて喜び、理解できるなら、それは法に随って行く悟りへの道。仏陀の存在を喜び、仏陀に心定まるなら、それは信に随って行く悟りへの道です。このどちらかがあるなら、悟りへの道は開かれています。 例えば、「全ては無常」とか「我はない」などと言われて、「あっなるほど、それなら気楽だ」と思わず納得して嬉しくなるようなら、法随行タイプ。「何て嫌なことを言うのだ。せっかく私が頑張っているのに」などと聞きたくなくなるなら、まだちょっと。仏陀の像や絵が飾ってある所に偶然行って、何となく気持ちよくなって心が落ち着くなら、信随行タイプ。「像があって何だか気持ち悪いなあ」と感じるなら、まだちょっと、ということです。 信心から入る場合も教えから入る場合も、信・精進・念・定・慧の五根はあります。五根で頑張って学びと修行に励むと、道がどんどん開け、やがて一瞬だけ「無我」を「体験」し、預流果に達します。そうなればもう決して悟りの道から退きません。でも信随行と法随行自体が既に預流果に向かう道・預流向ですので、悟ってはいなくても、聖者の仲間、仏陀の家族の一員として、仏法僧の三宝に守られています。これだけでも大安心です。 大安心した預流向の人は、このように頑張ります。「たとえ骨と皮と筋だけになっても、身体中の血肉が乾いてしまっても、人間の力、人間の精進、人間の努力によって達成すべきものを達成するまでは、この努力を決して止めはしません」。 このような人が、釈尊を師と仰ぎ、釈尊が弟子と認める、仏陀の家族です。 8 おわりに 段階別に詳しく説かれている仏教の悟りの階梯を概観しました。その段階の全てにおいて悟りの内容が厳密に定義されていましたので、「私、ちょっと悟っちゃったかも」などと錯覚したり、人を騙そうとして言いふらせるような曖昧なものでは全くないことがよく分かります。 そのためか、いろいろな宗教で「悟り、悟り」と言葉でだけは言っていますが、この悟りの内容までは、さすがにパクれなかったようです。今でも、釈尊の言葉をそのまま伝える初期経典にだけ、悟りの内容が明確に説き残されているのです。 このような悟りの内容を知識的に言葉で知ることによっても、悟りは決して不可能な夢物語ではなく、最初の一歩から徐々に切り開いて行ける道であることが分かります。また、一気に頂上まで登る方法はなく、その代わり、まず足下から一歩ずつ進めばよいことが分かりますので、遥かな高みに向かって、地の底から崖をよじ登る力が湧いてきます。 このように仏法を知識として学ぶこと自体が、悟りへの第一歩・法随行の一部だと自分に言い聞かせて、分を弁えず、まだ手にしてもいないことを、偉そうに文章にしました。内容にどのような誤りがありましても、それによって読者の皆様に迷惑が掛かりませんように。皆様が共に、迷わず悟りへの道を歩んでいけますように。 【著者】藤本晃(慈照) http://www.j-theravada.net/sakhi/pali_sutta2.html |
藤本 晃(ふじもと あきら、1962年-)は、日本の浄土真宗の僧侶(山口県下松市誓教寺住職)[1]、パーリ仏教の研究者。(博士(文学))[1]。京都大学地域研究統合情報センター共同研究員。
略歴
1962年、山口県下松市の寺院に次男として誕生[1]。山口県立下松高等学校を卒業後、学習院大学文学部哲学科進学。卒業後、龍谷大学大学院仏教学専攻修士課程修了、並びにカルガリー大学大学院宗教学専攻修士課程修了[1]。
1992年に誓教寺住職に就任。1998年に広島大学大学院博士課程に進学し、2002年に修了[1]。博士(文学)[1]。
著作リスト
- 『功徳はなぜ廻向できるの? - 先祖供養・施餓鬼・お盆・彼岸の真意』(国書刊行会、2006年)
- 『廻向思想の研究 - 餓鬼救済物語を中心として』(国際仏教徒協会、2006年)
- 『死者たちの物語 - 『餓鬼事経』和訳と解説』(国書刊行会、2007年)
- 『お布施ってなに? - 経典に学ぶお布施の話』(国書刊行会、2007年)
- 『仏教の正しい先祖供養 - 功徳はなぜ廻向できるの?』(サンガ、2008年)
- 『悟りの階梯 - テーラワーダ仏教が明かす悟りの構造』(サンガ、2008年)
- 『ブッダの神通力 - 禅定と六神通と悟りへの道』(サンガ、2011年)
- 『お葬式の才覚 - 日本人なら知っておきたい』(新人物往来社、2011年)
- 『浄土真宗は仏教なのか?』(サンガ、2013年)
- 『『アビダンマッタサンガハ』を読む』(サンガ、2013年)
- 『日本仏教は仏教なのか? 第1巻(仏教の起源)』(サンガ、2015年)
- 『悟りの4つのステージ - 預流果、一来果、不還果、阿羅漢果』(サンガ、2015年)
博士論文
- 『パーリ仏教における業報輪廻思想 - 自業自得の法則と布施の指定説の相克』(博士(文学)、甲種、広島大学、2002年)
翻訳書
- 『ブッダの実践心理学 - アビダンマ講義シリーズ』1-8(アルボムッレ・スマナサーラ著、サンガ、2005年)
인도유럽어족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베다어(산스크리트 베다어)로 작성된 최고(最古)의 성전이다. 학자들은 기원전 수십세기 전부터 구전되어 오던 내용을 기원전 1500년~기원전 1200년 경 문자로 편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브라만교 전통에서는 베다를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천상의 영역에서 신의 영감과 계시을 받은 리시(rishi, 성자)를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베다를 하늘의 성전이라는 뜻의 슈루티(Sruti)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본래는 《리그베다(Rig-Veda)》,《사마베다(Sama-Veda)》,《야주르베다(Yajur-Veda)》가 베다문헌의 전통적인 '3베다' 성전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여기에 민속 신앙의 성향이 짙은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까지 포함해 '4베다'로 부르고 있다. 리그베다는 찬가, 사마베다는 노래, 야주르베다는 공물 제의, 아타르바베다는 마법과 주술에 관한 지식을 주로 담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공물제의에 참여하는 네 명의 제관들의 역할(찬가, 노래, 제사집행, 주술)에 따라 나뉘어졌다고도 알려져 있다.
4베다는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뉘는데 삼히타(Samhita), 브라마나(Brahmana), 아라냐카(Aranyaka), 우파니샤드(Upanishad)가 대표적인 베다 분류법이다. 만트라(Mantra)로도 불리는 삼히타는 찬가와 기도문을 담고 있는 본집이자 진언이다. 브라마나는 삼히타에 수록된 문헌으로 기도, 주문, 공물을 바칠 때의 법식을 담은 비디(vidihi)와 그에 대한 교육적인 내용, 즉 제례의 유래와 의의를 담은 아르타 바다(artha-vada)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라냐카는 마을에서 떨어져 숲에서 따로 수련하는 은자들을 위해 작성된 것으로, 아라냐(aranya)는 그 자체가 숲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파니샤드는 우주의 원리에 대한 심오한 사상과 베다 해석 방식을 담은 것으로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며 베다의 궁극이란 뜻의 베단타(Vedanta)로 불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다 [Vedas, véda]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