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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VIS VITALIS 2018. 4. 29. 17:52

시간-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니체는 괴테와 실러를 한자리에서 논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 역시 무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사고 속에서 공간은 배제할 수 있으나 시간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오관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감각 기관만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감각이 청각이라고 한다면 시각의 세계는 사라진다. 즉, 창공, 별 등등이 사라져버린다. 촉각이 없다고 한다면 깔끄러운 것, 매끄러운 것, 주름진 것 등등이 사라진다. 미각과 후각이 없다고 한다면 코와 구강 안에 위치한 감각 역시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청각만이 남는다. 이렇게 되면 공간이 배제된 세계가 가능해진다. 이는 개인들의 세계이다.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개인들의 세계, 수백만, 아니 수천만이나 되는 개인들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들은 말을 통하여 의사소통을 한다.


 우리는 언어만큼 복잡한, 아니 이보다 더욱 복잡한 언어를 상상할 수도 있는데, 이는 음악이라는 언어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의식과 음악으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 수도 있다. 음악은 악기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은 반박이 가능하다. 음악 자체가 악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악기는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저러한 악보를 생각해보면 피아노나 바이올린이나 플류트 등과 같은 악기가 없더라도 그 음악을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세계만큼이나 복잡한 세계, 음악과 우리들의 의식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질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음악은 세계에 부가된 무엇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세계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세계에서도 시간은 항상 존재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계기(繼起)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나 우리들 각자가 어두운 방에 있다고 가정하면 시각의 세계는 사라지고, 각자의 육신도 사라진다. 우리가 육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예컨대, 나는 손으로 책상을 집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이 손과 책상에 대해 의식한다. 하지만 무언가가 흘러간다. 무엇이 흘러갈까? 그것은 지각일 수도 있고, 감각일 수도 있으며, 혹은 그저 기억과 상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항상 무언가가 흘러간다. 여기서 테니슨의 아름다운 시구가 생각난다. 그는 첫 연에서 이렇게 썼다.


“시간은 한밤중에 흐른다.”

 

 이는 매우 시적인 생각이다.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소리 없는 시간의 강물은 ―이러한 비유는 불가피하다― 땅속을, 들을 지나고 있고 공간을 지나고 있으며 별들 사이를 흐르고 있다.


 시간이란 본질적인 문제이다. 내 말은 우리가 시간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의식은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끊임없이 변하는데 이러한 계기가 바로 시간이다. 앙리 베르그손은 형이상학의 가장 큰 문제가 시간이라고 했다.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여타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내가 보기엔 다행스럽게도 그 문제가 해결될 위험은 없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언제나 이 문제 때문에 조바심할 것이다. 우리도 성 어거스틴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내가 그 질문을 받지 않았을 때는 나는 시간이 무언지 알고 있었다. 내가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 인간은 20세기 내지 30세기 동안 시간의 문제를 숙고해왔으나 이 문제에 있어서 많은 진전을 보았는지는 의심스럽다. 우리는 항상 저 고대인이 느꼈던 당혹감을 느낀다. 내가 항시 인용하는 문구에서 헤라클레이토스가 느꼈던 당혹감 말이다. “어떤 사람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다.” 왜 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는가? 첫째, 강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둘째 ―여기서 우리는 이미 형이상학적인 것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신성한 공포의 근원처럼 느껴진다―, 우리 자신 역시 하나의 강물이며, 우리들 또한 흐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문제이다. 이는 덧없는 것을 다루는 문제이다. 즉, 시간은 지나간다. 다시 브왈로(Boileau)의 아름다운 시구를 보자.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그 순간에 어떤 것은 우리로부터 이미 멀어져간다.”


 나의 현재 ―혹은 나의 현재였던 것― 는 이미 과거이다. 그러나 흘러가는 그 시간은 영원히 흘러가버린 시간은 아니다. 예컨대, 나는 지난주 금요일에 여러분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한 주일이 지나는 동안에 우리들 모두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일한 사람들이다. 나는 내가 여기서 논의를 하고 있었고, 여기서 이야기하고 사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지난주에 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아무튼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기억은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들의 상당 부분은 우리들의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상당 부분이 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튼, 우리는 시간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 문제를 풀 수는 없지만 이미 제시된 해답을 검토할 수는 있다. 가장 오래된 해답은 플라톤이 제시한 것이다. 이어, 플로티누스가, 그 다음으로는 성 어거스틴이 해답을 제시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인간이 발명한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지금 인간의 발명품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들이 종교인이라면 아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영원이라는 아름다운 발명품이라고 말이다.


 영원이란 무엇인가? 영원이란 우리의 모든 과거의 총합이다. 영원이란 우리의 모든 과거, 모든 의식적인 존재의 모든 과거이다. 모든 과거, 즉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과거이다. 그리고 영원이란 모든 현재이다. 모든 도시와 사람들 그리고 행성들 사이의 공간을 포함하는 지금 이 순간이다. 그리고 영원이란 미래이다. 아직은 태어나지 않은 미래, 하지만 항상 존재하는 미래이다.


 신학자들은 영원이란 이 다양한 시간들이 기적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플로티누스의 말을 인용할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시간의 문제를 깊이 생각한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세 가지 시간이 있는데, 이 세 가지 시간이란 현재이다. 그 하나는 현재의 현재로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순간이다. 즉, 내가 말했던 순간이다. 그 순간은 이미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현재로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미래의 현재인데, 이는 우리들이 희망이나 두려움을 갖고 바라보는 시간일 것이다.


 이제 플라톤의 해답부터 살펴보자. 플라톤의 해결은 자의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이제 설명하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시간이란 영원의 가변적인 이미지라고 말했다. 그는 영원부터, 영원한 존재부터 시작한다. 영원한 존재는 다른 존재들에게 자신을 투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신의 영원 속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계기적으로 투사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은 영원의 가변적인 이미지이다. 영국의 위대한 신비주의자 윌리암 브레이크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영원의 선물이다.” 만약 우리들에게 전존재가 주어진다면...... 그 존재는 우주보다 더 크고, 세계보다 더 크다. 그런 존재가 우리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모습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전멸되고 무화되고 죽어버릴 것이다.


 반면에, 시간은 영원의 선물이다. 이러한 영원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연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낮과 밤이 있고, 시간이 있고, 분(分)이 있고, 기억이 있고, 현실적인 감각이 있다. 그리고 미래, 아직은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예측할 수 있고, 또 두려워하는 미래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들에게 연속적으로 주어진다. 우리는 우주의 전 존재를 짊어질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이를 벗어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영원의 선물일 것이다. 영원 때문에 우리는 연속적으로 살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들의 삶이 낮과 밤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잠에 의해 우리의 삶이 중단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다행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보내고 난 다음에 잠을 잔다. 잠이 없다면 삶을 견디지 못할 것이며, 기쁨을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모든 것이 주어지지만, 그것은 점진적으로 주어진다.


 윤회란 사라진 관념이다. 범신론자들이 믿고 있듯이 우리는 동시에 모든 광물이고, 행성이고, 동물이고,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른다. 다행히도 우리는 자신을 개별적인 존재라고 믿고 있다. 만일 우리가 압도당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전존재의 충만성 때문에 전멸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성 어거스틴을 살펴보자. 이 사람만큼 시간의 문제를, 시간에 대한 의문을 강렬하게 느낀 사람도 없다. 성 어거스틴은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자신의 영혼은 불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느님에게 시간이 무엇인지 계시해 주십사하고 빌었다. 막연한 호기심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이 문제를 모르고서는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이 문제는 본질적인 문제, 형이상학의 본질적인 문제가 되었다. 성 어거스틴이 그토록 열렬하게 얘기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그것은 제논의 역설이다. 제논의 역설은 공간에 관한 것이나, 여기서는 이를 시간에 적용하기로 한다. 운동에 대한 금언 혹은 아포리아 가운데서 가장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탁자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운동체는 다음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 물체는 중간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보다 앞서 중간의 중간에 도달해야 하고, 그보다 앞서 중간의 중간의 중간에 다달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된다. 운동하는 물체는 책상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 말고도 기하학의 예를 들 수도 있다. 한 점을 생각해보자. 이 점은 아무런 연장(延長)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무한한 수의 점들이 연속적으로 모이면 직선이 된다. 그리고 무한한 수의 직선이 모여 면이 되고, 이 면들이 무한히 모이면 입방체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점이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면 연장이 없는 점들의 총합이 ―비록 그 수가 무한하다 할지라도― 어떻게 해서 연장을 가진 선분이 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선분을 이야기할 때 나는 지구에서 달에까지 이르는 직선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 만지고 있는 탁자와 같은 이런 선분을 생각하고 있다. 이 선분 또한 무한한 수의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튼,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생각해왔다.


 버틀란트 럿셀은 이렇게 설명한다. 정수 다시 말해서, 1, 2, 3, 4, 5, 6, 7, 8, 9, 10 이렇게 무한히 계속되는 자연 급수가 있다. 그러나 다른 급수도 생각할 수 있다. 그 급수는 정확히 첫째 급수의 절반의 크기다. 이는 1에 2가 대응하고, 2에 4가 대응하고, 3에 6이 대응하고......하는 식으로 짝수들로 구성된다. 또 다른 급수를 들 수도 있다. 아무 숫자나 선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365를 택했다면, 1은 365에 대응하고 2는 365의 제곱에 대응하고, 3은 365의 세제곱에 대응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다양한 급수를 만들 수가 있는데, 이들 급수는 모두가 무한하다. 바꿔 말해서, 초한수(n?meros trnasfinitos)에서 부분집합들은 숫자적으로 볼 때 전체 집합보다 작은 것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 수학자들은 이런 사고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들의 상상력으로는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 현재라는 순간을 살펴보자. 현재라는 순간은 무엇인가? 현재라는 순간은 약간의 과거와 약간의 미래로 이루어진 순간이다. 현재 그 자체는 앞서 말한 기하학의 점과도 같다. 현재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우리 의식의 직접적인 소여가 아니다. 아무튼, 우리는 현재가 있으며, 이 현재는 점차적으로 과거가 되고, 미래가 된다고 알고 있다.


 시간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이 있다. 그 중 하나는 거의 모든 사람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으로, 시간을 하나의 강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강물은 시원으로부터, 알 수 없는 시원으로부터 흘러나와 우리들에게 도착한다. 다른 이론은 영국사람, 브래들리의 형이상학적인 이론이다. 브래들리는 이와는 정반대라고 얘기한다. 즉,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흘러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가 과거로 변하는 순간이 바로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이론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시간의 원천을 과거에 둘 수도 있고 미래에 둘 수도 있다. 하지만 둘 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항상 시간의 강물 앞에 있다. 이제, 시간의 근원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플라톤은 다음과 같은 해결을 제시했다. 시간은 영원에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영원이 시간보다 앞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앞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영원이 시간에 속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시간은 운동으로 측정된다고 말하는 것도 오류이다. 운동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운동은 시간을 설명할 수가 없다. 성 어거스틴이 쓴 아주 아름다운 문장이 있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Non in tempore, sed cum tempore Deus creavit caela et terram).


 창세기의 첫 구절은 세상의 창조, 즉 바다와 땅과 어둠과 빛의 창조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시간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천지창조보다 앞선 시간이란 없다. 세상은 시간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그 이래로 모든 것이 계속되고 있다.


 조금 전에 설명한 초한수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 내 상상력으로 그러한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런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우리는 자연 급수의 경우 짝수의 숫자는 홀수의 숫자와 같다는 사실, 즉 무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365를 제곱한 급수의 수도 전체 수와 같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시간의 두 순간이라는 사고를 받아들이는 게 어떨까? 7시 4분과 7시 5분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어떨까? 이러한 두 순간 사이에 무한수의, 혹은 초한수의 순간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틀란트 럿셀은 우리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베른하임(Bernheim)은 제논의 역설이 공간화 된 시간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생명의 충동이며, 우리는 그것을 세분할 수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아킬레스가 1미터를 달리는 동안 거북이는 1센티를 갔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먼저 아킬레스가 큰 걸음으로 달린다고 말한 다음에, 거북이가 달렸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공간에 적합한 측정 방법을 시간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윌리암 제임스처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5분의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해보자. 5분의 시간이 흐르기 위해서는 5분의 절반이 흘러야만 한다. 2분 30초가 흐르기 위해서는 이의 절반이 흘러야만 한다. 2분 30초의 절반이 흐르기 위해서는 또 이 시간의 절반이 흘러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 되면 5분은 절대로 흘러갈 수가 없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제논의 아포리아는 시간에 적용해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는다. 화살의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제논은 날아가는 화살은 매 순간마다 멈추어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운동이란 불가능하다. 부동(不動)의 총합이 운동을 구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공간이 있다고 가정할 때 그 공간은 ―무한히 나누어질 수는 없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점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 우리가 현실적인 공간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면 시간 역시 순간들로, 순간의 순간들로, 각각의 단위들의 단위들로 세분될 수 있다.


 만약 세계가 우리들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또한 우리들 각자가 세계를 꿈꾸고 있다면, 우리들은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옮겨가며, 우리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세분(細分)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떨까?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것이다. 우리들의 지각만이, 우리들의 감정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세분은 상상적인 것이지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사고도 있다. 이러한 사고 또한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등질적인 시간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뉴튼이 확립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뉴튼 이전 시대에 확립된 함의였다. 뉴튼이 수학적인 시간에 대하여 말할 때 ―다시 말해서 전우주를 통해서 단 하나의 시간만이 흐른다고 할 때― 그 시간은 지금 빈 공간을 흐르고 있는 시간이며, 별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시간이며, 균질적으로 흐르고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영국의 형이상학자 브래들리는 이렇게 생각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말했다.


 다양한 계열의 시간, 즉 그들 사이에 아무런 관련도 없는 여러 계열의 시간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a, b, c, d, e, f......라고 불리우는 한 계열을 생각해보자. 이것들은 그들 사이에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어떤 시간은 다른 시간보다 선행하거나 후행하고, 이 시간과 저 시간은 동시적이다. 하지만 다른 계열, 즉 α, β, γ......로 이루어진 시간을 상상할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여러 가지 시간 계열을 가정할 수 있다.


 왜 단 하나의 시간 계열만을 가정하는가? 여러분들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받아들일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시간들이 있으며, 그와 같은 시간 계열들은 ―물론 그 계열을 구성하는 원소들은 선행하거나 후행하거나 동시적이다― 선행하지도, 후행하지도, 동시적이지도 않다. 이는 상이한 계열들이다. 우리들 각자의 의식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쯔를 생각해 보자.


 우리들 각자는 일련의 사건들을 체험하며, 이 일련의 사건들은 다른 일련의 사건들과 평행할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왜 이런 사고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이러한 사고를 통해 우리는 보다 광대한 세계, 현재의 세계보다 훨씬 더 경이로운 세계에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하나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시간은 하나라는 사고는 ―내가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현대 물리학이 폐기해버렸다. 시간은 다양하다. 무엇 때문에 뉴튼이 가정했던 것처럼 시간은 단 하나의 시간, 절대 시간뿐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이제 다시 영원이라는 주제로, 영원적인 것에 대한 사고로 돌아가자. 영원적인 것은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영원적인 것은 원형의 세계이다. 예컨대, 영원적인 것 속에는 삼각형들이란 없다. 단 하나의 삼각형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삼각형은 등변 삼각형도 이등변 삼각형도 부등변 삼각형도 아니다. 이 삼각형은 이들 세 삼각형인 동시에, 어느 삼각형도 아니다. 그러한 삼각형을 지각할 수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삼각형이 존재한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우리들 각자는 인간의 원형을 복사한 존재로, 시간적이며 죽어야 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문제점은 인간이 각기 플라톤적 원형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절대적인 것은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하며,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시간은 영원의 이미지이다.


 마지막 얘기는 시간이 왜 연속적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영원적인 것에서 빠져나오는 동시에 영원적인 것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미래라는 생각은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우리들의 열망과 상응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모든 인간들, 즉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무시간적 ―시간보다 선행하지도 후행하지도 않는― 이며, 시간 밖에 있는 영원한 원천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이러한 열망은 생명의 충동 속에 남아 있다. 또한,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도에는 과일이 떨어지는 그러한 순간은 없다고 말하는 형이상학자들이 있다. 과일은 떨어지려고 하거나 땅에 떨어져 있을 뿐, 떨어지는 순간이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 가지로 나누었던 시간 ―과거, 현재, 미래― 중에서 가장 난해하고,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 현재라는 사실은 얼마나 이상한가! 현재는 점(点)과 마찬가지로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장이 없는 점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명백한 현재란 약간의 과거와 약간의 미래일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시간의 경과를 느낀다. 내가 시간의 경과에 대해서 말할 때, 여러분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내가 현재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추상적인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란 우리들 의식의 직접적인 소여가 아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신들이 과거로부터 미래로, 혹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지나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괴테가 소원했듯이, “멈추어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라고 시간에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없다. 현재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순수한 현재를 상상할 수 없다. 순수한 현재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는 항상 과거의 일부분과 미래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시간에 있어서 이는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경험에서 시간은 언제나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물과도 같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 고대의 비유를 뒤따르고 있다. 마치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무런 진보도 이룩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언제나 우리는, 강물에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강물은 그 강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방금 보았던 강물과 이 강물 사이에서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저 헤라클레이토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조금은 변하고 조금은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신비한 그 무엇이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들 각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기억이란 그 상당 부분이 떠들썩한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것이 본질적인 것이다.


 예컨대, 현재의 내가 되기 위해서 내가 팔레르모에서, 아드로게에서, 제네바에서, 스페인에서 살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동시에 그런 장소에 있었던 나는 현재의 나가 아니라는 것을 느껴야만 한다. 현재의 나는 타자(他者)이다. 이것이 우리가 결코 풀 수 없는 문제, 즉 변화하는 자기동일성의 문제이다. 아마 변화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것의 변화에 대하여 말할 때 그 말은 그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식물이 자란다고 말한다. 이 말은 어린 식물이 보다 더 큰 식물로 대체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식물이 다른 것으로 변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덧없는 것 가운데 영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라는 생각은 고대 플라톤의 생각이, 즉 시간이란 영원적인 것의 가변적인 이미지라는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시간이 영원적인 것의 이미지라면 미래는 미래를 향한 영혼의 운동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는 다시 영원적인 것으로 돌아갈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고뇌로 이루어져 있다. 성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매일 죽는다.” 이 말은 서글픈 말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난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으며, 태어나고 있다. 따라서 시간의 문제는 여타의 형이상학적 문제보다 더 우리에게 와닿는다. 다른 문제들은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들 각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어쩌면 우리는 언젠가 그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 어거스틴의 말처럼 그러는 동안에도 내 영혼은 그것을 알고 싶어서 불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