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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교학을 공부하게 되었는가?" -김성철(현재 경주동국대 교수)
VIS VITALIS
2017. 10. 30. 11:07
나는 왜 불교학을 공부하게 되었는가?" 김성철(중앙승가대 강사, 치과의사) 나에게 죽음이 처음 문제가 된 것은 국민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 때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이 하도 황당해서 당시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같은 반 친구 몇몇이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때 내가 다짜고짜 끼여들어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우겨댔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는 죽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 친구가 네 머리 위에서 폭탄이 터져 몸뚱이가 가루가 돼도 죽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친구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나도 하하하고 웃었다. 그리곤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후 입시공부에 분주했던 평범한 중학생활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미술반 선배의 유혹에 끌려 모 여고생들과 함께 하는, 문학 서클에 들어갔다. 입시 공부의 사슬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거기서 하늘같은 고2, 고3 선배님들이, 같은 또래의 여학생들 앞에서, 우리 1학년 후배들에게 '인생'과 '철학'에 대해 훈계하는 것을 듣고 일면 한없는 존경의 마음을 품기도 했지만, 그런 고상한 문제에 대해 무지한 나에 대해 일면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일주일에 한번씩 그 문학 서클 모임에 참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모임의 한 친구가 죽었다.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7월 17일 제헌절 휴일을 기해 서클에서 대성리로 물놀이를 갔는데, 한 친구가 그만 익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는 남녀 고등학생들이 함께 서클 모임을 갖는 것을 교칙에 의해 금하고 있었고 우리 학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불법 서클에 다닌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나는, 여학생들과의 물놀이라는 범죄 행위만은 도저히 저지를 수 없었기에 그 날 놀이에 참석하지 않았다. 함께 갔던 친구들은 모두 혹독한 정학 처분을 받았다. 나는 그 때, 다행히 처벌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에 안도했을 뿐, 가까운 친구의 그런 죽음을 보고도,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곧 여름방학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희망자를 모아 대천 해수욕장으로 해양훈련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죽음의 공포가 나의 가슴 속에 처절하게 각인되고 말았다. 해양훈련 인솔교사들은 얼마 전에 일어났던 대성리에서의 익사사고를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물에 들어가기 전에는 유격훈련에 버금갈 정도의 준비운동을 시켰다. "안전선 밖으로 나가면 죽어!" "준비운동 없이 물에 들어가면 심장이 멈춰!" 만일의 사고를 우려하여 지나칠 정도로 주의를 주는 인솔교사들의 훈계는 처절한 무상의 법문이었다. 사실 그랬다. 죽음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눈 앞 물결 위의 안전선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후 죽음에 대한 생각은 망령처럼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언젠가는 나도 죽는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가 막혔다. 그러다가 고3이 되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1년간은 공부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학년말이 되어 진로를 결정할 때가 되었다. 대학에 입학하면 그림도 실컷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도 실컷 하고, 읽고 싶은 책도 실컷 읽고 싶었다. 나는 이과반에 속해 있으면서 미술에 소질이 있었기에, 주변에서는 양쪽의 재능을 살릴 수 있는 건축공학과를 가라고 권했고, 나도 남들이 장래 희망을 물으면 으레 건축가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건축설계사 자격을 따려면 몇 년간을 설계사무실에서 일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번 민이 생겼다. '남이 시키는 일 하기는 싫은데….', '빨리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은데….' 그러던 중 고3 지도에 찌든 화학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 치과대학 가라. 내 친구 중 치과의사가 있는데 하루 네 시간 진료하고 남는 시간에 골프 치더라." 귀가 솔깃했다. 나는 남들이 골프칠 시간에 하고 싶은 것 실컷 해야지. 그리곤, 치과대학을 지원하였고 합격자 발표를 본 다음, 다짜고짜 서점에 가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구입하였다. 철학 책들을 읽으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닥치는 대로 독서를 하였다. 난삽하기 그지없는 다양한 사상서들을 이를 악물고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런 독서 생활과는 별도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제만 풀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육신의 죽음 후에도 영혼은 살아 남는다면, 그 영혼이란 것이 지금 살아 있는 순간에도 존재할 테니 그 영혼의 존재를 지금 확인해 보자.' 그러던 중 어떤 <철학개론서>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하고 감탄을 하였다. '눈이 눈을 볼 수 없고 귀가 귀를 들을 수 없듯이 자기 자신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몸은 죽어도 죽지 않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마치 화두와 같이 계속, 대학 초년생인 나의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대학 생활을 보내는 동안 나의 부친과 친분이 있으셨던 탄허 스님께서 가끔 집에 들르셨다. 스님의 인격과 학식을 너무나 흠모했기에, 나는 스님께 감히 나의 문제를 여쭈어 볼 염을 내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꾸벅 인사만 올리곤 했다. 회원은 아니었지만 불교학생회 수련회에 끼어 통도사에서 지냈던 일. 송광사 청운스님이 말씀하시던 수행담. 백봉거사의 법회. 이렇게 나의 부친께서 형성해 주신, 불교적인 집안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젖어서 생활하던 중 서가에서 운허스님 번역의 {능엄경}을 꺼내 읽게 되었다. {능엄경}을 읽던 중 파사익왕의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 대답하신 내용을 본 후, 그동안 품었던 의문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즉, 죽은 다음에도 없어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는지 알려 달라는 늙은 <파사익>왕의 간청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몸은 늙고 쇠락하지만 <보는 정기>만은 늙거나 쇠락하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해 주시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능엄경}의 묘한 논리는 나를 매혹시켰다. 그 후 나는 치과의사라는 생업 이외에 불교 공부를 나의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곤 동국대학교 학생편람을 구해 불교학과 교과과정을 알아 본 후 그 내용에 맞추어 불교를 독학하기 시작하였다. 가끔 다리 꼬고 앉아 참선 흉내도 내었다. '이 뭐꼬'를 화두로 삼았다. {능엄경} 원문을 스스로 해석해 본 후 번역문과 대조하면서 혼자 한문 공부도 하였다. {구사학}이나 {유식철학}등 김동화 선생님의 저술들을 두 번, 세 번 곱씹듯이 읽으면서, 그 내용들을 암기하였다. 그런데, 김동화 선생님의 저술 중에 유독 용수 보살의 <중관사상>에 대한 개론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론} 원문을 직접 보기로 작정을 하고 <대정신수대장경> 전질을 구입해서 낱말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중론}을 정독하였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는 동안, 결혼도 했고 졸업도 했고 군대도 마쳤고, 병원 개업도 했으며 집도 한 칸 마련하였고 아이도 둘을 낳았다. 우연히 월간지를 보다가 <삼일선원>이란 곳에서 각성스님의 {도서} 강의가 있다는 광고기사를 보고 찾아갔다. 6개월간에 걸친 {도서} 강의를 꼬박 다 들었다. 거기서 지금은 교원대학교 교수로 계신 이성도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 선생님에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학사편입을 하고 싶다고 말하자, 이 선생님은 그 당시 동국대 대학원생이었던 박상필(현 불교방송국 P.D.) 선생을 소개해 주셨다. 박선생의 권유에 따라, 우선 이기영 선생님의 강의를 한 학기 청강하기로 하였다. 몇 주가 지난 후 박선생이 다니는 대학원이 인도철학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기영 선생님이, 불교학과가 아니라 인도철학과에 재직하고 계신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한 학기가 지난 후 인도철학과 대학원 입학 시험을 보게 된 것이다. 전문적인 불교 공부의 밑거름이 되는 다양한 원전 언어에 대한 훈련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로 하여금 인도철학과를 선택케 만든 이런 묘한 인연에 대해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공부할 자료가 부족했기에, 어쩔 수 없이 {중론} 원전을 직접 읽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그 분야를 나의 전공으로 삼게 되어,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지금, 남들은 부러워한다. 경제적인 여유도 있고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겉보기에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고학생의 생활과 같이, 그야말로 다시는 되풀이하지 못할 처절한 인고의 기간이었다. 지금은 그런 생활에 이력이 났지만 누가 물으면, 가능하면 한 마리의 토끼만 잡으라고 권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