船山徹 著 『佛典(ぶってん)はどう漢譯(かんやく)されたのか: ス-トラが經典(きょうてん )になるとき』. (東京: 岩波書店, 2013), 87-119쪽.
아래는
번역과 관련된 학설이라고 할 수 있는
300년대 석도안(314-385)의 5失本 3不易
400년대 구마라집(344-413)의 번역 불가능성 주장(번역은 남이 씹은 뒤 준 음식물과 같아 원래의 맛이 다 사라짐)
500년대 언종(彦琮, 557~610)의 8비
600년대 현장(602-664)의 5種不譯. (현장 계열 후대 학승들의 기록에 나옴)
이 실려 있는 <<불전을 어떻게 한역 되었나>>(후나야마 토우루, 2013)의 제4장을 대체적으로 번역해본 것입니다. 구나발타라 부분은 한글대장경에서 가져온 것도 있습니다. 특히 도안 스님의 삼불역은 한문 원문에 대한 번역이 책에는 없는데 따로 번역해봤습니다.
첫 번째 부분(然般若經。三達之心覆面所演。聖必因時, 時俗有易。而刪雅古以適今時。一不易也。)은 난해하여 그 해석이 구구하고 일부 글자들은 후대의 인용에서는 달라지기도 하여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하여 올립니다.
제4장 외국승의 어학능력과 구마라집·현장의 번역론1)
앞 장에서 역주譯主를 설명할 때 『승만경勝鬘經』을 한역할 때의 역주가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 394-468)였지만 그는 원문原文을 읽었을 뿐이고 실제로 번역을 한 이는 보운(寶雲2), 376-449)이었다는 것을 소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소박한 질문을 던지면, 구나발타라 같은 인도인은 어느 정도로 중국어를 알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제4장에서는 먼저 이런 점에 관해 역주를 맡았던 외국승의 중국어 능력의 유무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역사자료를 통해 중국어가 되는 외국승려, 중국어가 되지 않는 외국승려 등의 경우를 역사자료로부터 알 수 있는 한도에서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그 위에서 인도와 중국 두 나라 언어를 잘하는 번역자들의 번역이론을 소개하고, 더불어 번역의 가능성과 불가능성과 관련된 것들을 다룬다.
1. 중국어회화로 고심했던 구나발타라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 394-468)는 중국말로 공덕현(功德賢)이라 하며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대승(大乘)을 배웠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마하연(摩訶衍)이라 부른다. 본래는 바라문(婆羅門) 출신이다.3)원가(元嘉) 12년(435)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후에 단양군(丹陽郡)에서 『승만경(勝鬘經)』과 『능가경(楞伽經)』을 번역하였다. 이때에는 참여한 무리가 7백여 명이었다. 보운(寶雲)이 전역(傳譯)을 하고, 혜관(慧觀)이 붓을 잡았다. 말이 오가며 자문하고 분석하여 오묘한 본지를 터득했다.4)
후에 초왕(譙王: 南譙王, 劉義宣)이 형주(荊州)를 평정하였다. 함께 신사(辛寺)로 가서 머물 것을 청하므로 방과 전각을 다시 세웠다. 곧 신사에서 『무우왕경(無憂王經)』ㆍ『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ㆍ『무량수경(無量壽經)』 1권ㆍ『니원경(泥洹經)』ㆍ『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ㆍ『상속해탈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波羅蜜了義經)』ㆍ『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 3권ㆍ『제일의오상략경(第一義五相略經)』ㆍ『팔길상경(八吉詳經)』 등의 여러 경전을 내었다. 이전에 펴낸 것과 아울러 백여 권에 이르렀다. 항시 제자 법용(法勇)으로 하여금 번역을 옮겨 말을 헤아리도록 하였다.5)
초왕(譙王: 南譙王, 劉義宣)이 청하여 『화엄(華嚴)』 등의 경전을 강의하게 하였다. 구나발타라가 스스로 아직 송나라 언어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여기고서, 부끄럽고 안타까운 생각을 품었다. 곧바로 아침저녁으로 예배하고 참회하며 관세음에게 청하여, 신명이 응해 주기를 빌었다.
드디어 꿈속에 흰 옷을 입고 손에 칼을 든 사람이 나타났다. 한 사람의 머리를 받쳐 들고, 그의 앞에 이르러 물었다.
“무엇 때문에 걱정을 하는가?”
구나발타라가 갖추어 사실대로 아뢰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크게 걱정할 것 없다.”
곧바로 칼을 가지고 머리를 바꾸어 새 머리로 얹히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보라고 하였다.
“아프지 않은가?”
구나발타라가 대답하였다.
“아프지 않습니다.”
갑자기 환히 트이면서 깨달아, 마음과 정신이 희열에 젖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도의 의미를 송나라의 말로 갖추어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제야 강의를 하였다.6)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소설 〈뒤바뀐 머리 Die vertauschten Köpfe-Eine indische Legende〉(1940)7)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이다. 위 이야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장어를 쓰는 능력이 아니고 회화능력이다. 구나발타라는 광주에 도착한 것이 40세 되던 435년이고 430년대 후반에 건강健康에, 이어 형주로 가 역경을 한 것이 440년대에서 450년대 초반까지이다. 453년 효무제가 중흥사中興寺를 세웠고 구나발타라는 거기에서 468년 나이 75세에 입적하게 된다. 중국에 도착해 5년이 지난 시점에 역경을 하고 있었지만 중국어 회화는 거의 할 수 없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출삼장기집』 권2에 따르면 구나발타라의 역장에는 보운寶雲과 그 제자인 법용法勇, 보리菩提 두 제자가 전역傳譯으로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승만경에 한하지 않고 구나발타라 역업譯業에는 전적으로 중국인 통역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 통역이 필요했던 구나발마
구나발타라에 조금 앞서 건강健康에서 활약했던 구나발마求那跋摩는 431년(이 해에는 윤6월이 들어있다) 정월에서 9월28일 급서할 때까지 10개월 정도 건강에 머무르며 경론을 번역하였다. 고승전 권3에 따르면 『보살선계경』 10권을 생전에 번역을 완료하지 못해 그의 사후 제자들이 남아있는 3장을 스승을 대신하여 역출譯出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구나발마 사후에도 번역이 속행가능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없이도 역경이 가능할 정도로 잘 정비된 체제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나발마전에는 건강 도착 후 역경 이전에 법화경과 화엄경을 강의하였다고 하는데 구나발마는 당시 65세로 때로 통역에 의지하였다고 한다.
3. 중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던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
중국어 회화를 하지 못했던 것이 명백한 이로는 동진에서 이름을 날렸던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8)가 있다. 위진魏晉 명사名士들의 일화를 기록한 세설신어世說新語(남조 송의 유의경劉義慶:403∼444 찬술)에는 “고좌도인高座道人은 한어漢語를 하지 못한다.”라고 나온다.
4. 파라마르타(진제)의 중국어능력
유가행파의 난해한 논서를 번역하여 이름이 높은 진제(499-569)에게는 역업을 보좌하는 중국인 제자인 혜개慧愷(지개智愷라고도 부름)가 있었다. 혜개의 아비달마구사론서阿毘達磨俱舍釋論序에는 “법사께서는 여러 지방으로 다니신지 오래 되었으므로 한자의 발음과 의미를 상세히 이해하고 있어 무릇 무엇을 번역하더라도 통역이 필요하지 않습니다.”9)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의 말일 뿐이고 실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진제의 역경활동이 50에서 70세경 사이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만년의 진제가 통역 없이도 회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난해한 유식교리학의 용어를 통역 없이 그것도 구어가 아닌 정규 문어체로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얘기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진제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의 브로큰broken 중국어로 말을 하면 그 제자들이 그것을 듣고 정규 문장어로 곧바로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10)
5. 회화를 할 수 있는 것과 한역을 할 수 있는 것의 차이
회화능력과 한역작성능력은 구별된다. 불전 한역은 선행하는 번역서가 있을 경우 가능한대로 참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행 번역서의 조사, 장단점의 검토는 한인 승려에게 주어졌다.
수의 비니다유지, 나연제야사, 당의 파라파가라밀다라, 보리유지, 반라밀제, 반야의 역장에서는 역주와 별도로 ‘전역傳譯’, ‘도어度語’, ‘역어譯語’로 명기된 ‘역번문譯梵文’ 담당자가 있었다. 이로부터 역주는 총책임자이고 실질적인 번역자는 이들인 것으로 추측된다.
6. 『반야등론般若燈論』 한역에서의 필수筆受의 교체
《辯正論》卷4:「論凡二十七品。為十五卷。논論은 모두 27품으로 열다섯 권으로 되어 있다. 若內人立義皆標人名。無名者例稱自部。若外人立義亦標人名。無名者例稱外人。縛解品已前, 慧賾執筆, 觀業品已後, 法琳執筆。於是, 起四年夏, 訖六年冬。박해품縛解品까지는 혜색11)이 집필執筆(=필수筆受)하였고 관업품觀業品 이후는 법림12)이 집필하였다. (정관貞觀) 4년(630) 여름에 시작하여 6년(632) 겨울에 마쳤다.」(CBETA, T52, no. 2110, p. 513, c17-21)
박해품縛解品까지인 전반 9권과 관업품觀業品 이후 후반 6권을 비교해보면 문장 표현상의 체재體裁에 차이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 여게왈如偈曰, 논자게왈論者偈曰처럼 왈曰을 쓰고 있는데 후자의 경우 왈曰을 쓰지 않고 언言이나 설說을 쓰고 있다. 이것은 한역표현을 선택하는 일은 필수가 맡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7. 스스로 번역할 수 있었던 외국인
본장에서 지금까지 다뤘던 사례는 외국인의 중국어능력에 대하여 부정적인 측면을 주로 하였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외국인이면서 통역에 의지하지 않고 역경譯經에 종사했던 사례도 실제로 존재하였다.
사나굴다: 북주의 무제武帝년간(559-560)에 장안에 와 개황開皇 5년(585) 이후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번경飜經에 종사하였는데 속고승전에는 “전도傳度를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不勞傳度”13)라고 나온다. 인도 승려인 그가 중국어에 능통한 것은 뛰어난 어학적 소질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류기간과도 무관하지 않다.
법지法智: 사나굴다와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법지에 관해 속고승전14)에는 “法智妙善方言. 지방언어15)를 빼어나게 잘했다. 執本自傳。범본을 들고 스스로 전傳하였다. 不勞度語。도어度語를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譯業報差別經等。업보차별경 등을 번역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법지의 아버지는 북위와 동위 시대에 역경을 행했던 반야유지이다. 법지는 원래 중천축국인이지만 중국에 머문 기간이 길어지고 중화 풍습에 동화되었다고 속고승전에 나온다.
담피曇皮: 반야유지의 차자이고 법지의 아우16)인 담피는 毘尼多流支와 那連提耶舍의 역장에서 각각 전역傳譯17)과 도어度語18)로 참여하였다.
비슷한 사례로 오吳의 지겸支謙과 서진西晉의 축숙란竺叔蘭이 있다. 서진시대에 많은 대승경전을 역출했던 돈황의 축법호가 중국어를 잘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후한시대 월지국 출신의 지루가참 역시 중국어에 능통하였고 안세고 또한 “곧 중국어를 두루두루 학습하였다. 即通習華言19)”라고 한다.
8. 범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한인들
구마라집 동시대에 장안에서 활약하였던 양주 출신의 축불염竺佛念이나 남조 송에서 여러 가지 역경에 종사하였던 보운寶雲이 순수한 한인漢人인지 서역의 피가 섞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의 현장과 의정義淨, 북송의 유정惟淨은 한인이었다. 이중 의정의 역장에서의 역할은 신역新譯, 철문綴文, 정자正字로 기록되어 있어 역주가 일인삼역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9. 구마라집의 역경관(譯經觀)
《高僧傳》卷2:「天竺國俗, 甚重文製。其宮商體韻, 以入絃為善。凡覲國王, 必有贊德。見佛之儀。以歌歎為貴。經中偈頌皆其式也。但改梵為秦失其藻蔚。雖得大意殊隔文體。有似嚼飯與人。非徒失味。乃令嘔噦(얼)也。」(CBETA, T50, no. 2059, p. 332, b25-29)
천축국의 국민성은 몹시도 문학작품을 중시한다. 그 성조의 리듬은 오선악보에 놓아도 훌륭할 것이다. 무릇 국왕을 알현하려면 반드시 덕을 찬미하고 부처님을 뵙는 의례에 있어서도 시가詩歌로 찬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경전 가운데의 게송은 모두 그런 형식의 것이다. 다만 범문을 중국어로 바꾸게 되면 그 아름다운 문조(文藻)[조위藻蔚: 文辭美煥]를 잃게 되는데 대의(大意)는 잡아내겠지만 완전히 문체文體에 어긋남이 생겨나게 된다. 마치 밥을 씹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되면 맛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토를 재촉하는 것과 같다.20)
문맥상 이것은 번역에 관한 일반적 진술은 아니고 운문 번역을 주로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인다.
구마라집은 고승전에 따르면 한시를 짓는 능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구마라집의 비관적 번역관은 범어 운문의 뉘앙스nuance가 한어로는 전혀 전해지지 않는 것을 깊이 자각한 것에서 온 것이다. 구마라집은 범어와 한문 간의 번역불가능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운문에 관해 말한 것이지만 산문도 포함한 역경관譯經觀으로 일반화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10. 간결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한역을 지향했던 구마라집
구마라집이 번역한 주된 문헌의 하나인 『대지도론』은 반야경의 주석서인데 이 논서는 백 권이나 되지만 실은 원전의 전역全譯이 아니고 초역抄譯이다. 이것은 중국에서의 경전 편집작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6장 참조)
구마라집의 제자 승예僧叡는 대지석론서大智釋論序에서 대지도론의 한역에서 원문을 생략했던 이유을 “(구마라집) 법사는 중국인이 간결성을 좋아하는 까닭에 (서품 이외는) 생략하여 간략히 하였다.”21)라고 적고 있다.
구마라집은 번역에 있어 이해하기 쉬운 문장을 목표로 했기에 때로는 축어역과는 멀어져 일부 생략하거나 말을 보충하여 이해하기 쉽게 하는 조작을 행하였다. 금강반야경의 각종 한역(구마라집, 담마유지, 진제, 현장, 의정 역)을 범어원전과 상세히 비교 검토한 스탠포드 대학 종교학과 교수 폴 해리슨(Paul Harrison)은 “마치 현대의 연구자들이 번역할 때에 괄호를 사용하여 그 속에 말을 보충하여 자신의 해석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을 구마라집은 행하였는데 다만 그는 그것을 본문 중에서 괄호를 사용하지 않고 행하였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역에 있어 의역파와 직역파로 나눈다면 구마라집은 의역파에 해당된다. 바로 이러한 점이 구마라집이 번역한 법화경, 유마경, 금강반야경이 중국불교사를 통하여 후대까지 영원히 계속 읽혀지는 이유이다.
11. 음역을 좋아한 구마라집
구마라집이 의역파意譯派이니 일반적인 중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원어의 음역을 한다거나 우직하게 직역한다거나 하는 경향이 적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재미있게도 그의 번역에는 뜻에 닿게 하려고 의역을 하는 측면과 함께 음역하거나 원문의 어순을 반영하여 번역하는 측면도 있다.
예를 들자면 법화경의 경우 서진의 축법호 역 『정법화경正法華經』 총지품은 다라니를 의역하였지만 구마라집 역 『묘법연화경』 다라니품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음역하여 고치고 있다.
보리수는 깨침의 나무을 의미하는 범어 bodhi-vṛkṣa 또는 bodhi-druma에 대응되는 역어인데 구마라집 무렵에 처음으로 확립되었다.
300년대 말까지 이 말의 한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불수佛樹: 오의 지겸 역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 『유마힐경』, 『문수사리문보살서경文殊師利問菩薩署經』, 서진의 축법호 역 『보요경普曜經』. 예외적으로 쓰였지만 구마라집 역 『대지도론大智度論』
도수道樹: 오의 지겸 역 『태자서응본기경』, 『유마힐경』, 서진의 축법호 역 『보요경』
각수覺樹: 동진의 승가제바 역 『중아함경』
구마라집 역의 여러 경전에서는 원어 보디bodhi에 충실한 음역에 기초해 보리수菩提樹를 정역定譯으로 하는 것이 통례通例이다.
구마라집과 동시대 사람인 축불염(竺佛念)의 경우 역어가 일정하지 않은데 다음과 같다.
도수道樹: 『보살영락경』, 『비나야毘奈耶』
도수道樹와 불수佛樹: 『보살종도술천강신모태설광보경菩薩從兜術天降神母胎說廣普經』, 『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
구마라집 이후의 경우
보리수菩提樹: 불타야사(佛陀耶舍)·축불념(竺佛念) 공역의 『사분율四分律』
보리수는 구마라집이 창안한 것으로 이 음역은 구마라집 이전에는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전 모두冒頭의 정형구定型句인 “이렇게 나에 의하여 들리어졌다. evaṃ mayā śrutam22)= 여시아문如是我聞” 또한 과거에 쓰이던 “문여시聞如是”를 구마라집이 바꿔 번역했을 가능성이 높다. 동시대의 축불염일 가능성도 일응 잔존한다. 『대지도론』을 번역할 때 evaṃ「如是」mayā「我」śrutam「聞」으로 축자逐字번역할 필요성을 느껴 그렇게 바꾸었을 가능성이 높다.
12. 수나라 언종의 팔비(八備)설
번역을 남이 씹고 남겨둔 음식물 같은 것으로 보는 구마라집의 생각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이 한역한 것을 읽는 것 보다는 범어를 익혀 원전을 읽는 편이 좋을 것인데 이렇게 주장한 중국인으로는 수隋나라 때 역장에 빈번히 참여했던 언종(彦琮, 557~610)이 있다. 그는 범어원전을 직접 배울 것을 주장하였고 그럴 수 없어 번역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번역자는 팔비(八備)라 불리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팔비23)는 다음과 같다.
所備者八。갖춰져야 할 것이 여덟 가지이다.
⑴ 誠心愛法, 志願益人, 不憚久時, 其備一也。
정성스런 마음으로 불법을 사랑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뜻하고 서원하였으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꺼리지 않으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첫 번째이다.
⑵ 將踐覺場, 先牢戒足, 不染譏惡。其備二也。
장차 부처님 도량覺場에서 실천하여 먼저 계족戒足24)을 굳건히 하고 남을 비꼬는 악행譏惡에 물들지 않아야 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두 번째이다.
⑶ 筌曉三藏, 義貫兩乘, 不苦闇滯。其備三也。
통발로 고기를 잡듯이25)삼장에 밝아지고 뜻으로는 소승과 대승을 꿰뚫게 되어 어리석음에 걸려 고생하지 않게 되어야 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세 번째이다.
⑷ 旁涉墳史, 工綴典詞, 不過魯拙。其備四也。
두루[旁] 분사墳史26)(전적과 사서)를 섭렵하여 고전문장[典詞]을 공교롭게 엮을 수 있어, 지나치게[過] 노졸(魯拙: 老鈍하고 拙劣함. 質樸粗疏)해서는 아니 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네 번째이다.
⑸ 襟抱平恕, 器量虛融, 不好專執。其備五也。
마음의 포부[襟抱]는 공평함과 용서함[平恕]으로, 기량(器量:사람의 재능과 도량)은 허융(虛融: 冲虚融和)으로, 한쪽으로만 집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야 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다섯 번째이다.
⑹ 沈於道術, 澹於名利, 不欲高衒。其備六也。
도술(道術)에 침잠하고 명성과 이익에 담박하여 높이 자랑하려 하지 말아야 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여섯 번째이다.
⑺ 要識梵言, 乃閑正譯, 不墜彼學。其備七也。
반드시 범어를 알아 정역正譯에 익숙해지더라도[閑27)] 범학(梵學)에 떨어져서는 아니 되니 이것이 갖춰야 할 일곱 번째이다.
⑻ 薄閱蒼雅。粗諳篆隷。不昧此文。其備八也。
창아(蒼雅: 『삼창(三蒼)』28)ㆍ『이아(爾雅)』29)등의 자서(字書)를 말함)를 널리 열람하고, 전서와 예서를 대략 외워 이러한 글들에 어두워지지 않아야 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여덟 번째이다.
13. 현장의 구역(舊譯) 비판
현장스님이 당태종과 대화하면서 구마라집이나 보리유지의 『금강반야바라밀경』 번역에 관해 비판하고 있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卷7:「帝又問:「《金剛般若經》一切諸佛之所從生,聞而不謗,功逾身命之施,非恒沙珍寶所及。加以理微言約,故賢達君子多愛受持,未知先代所翻,文義具不?」
法師對曰:현장법사가 대답하였다.
「此經功德, 實如聖旨。이 경의 공덕은 실로 폐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西方之人, 咸同愛敬。서역 사람들 모두 똑같이 (이 경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있습니다. 今觀舊經,亦微有遺漏。이제 이 경전의 옛 번역[舊經]을 보면, 또한 적으나마 유루(遺漏)가 있습니다. 據梵本具云『能斷金剛般若』,舊經直云『金剛般若』。범본에 따르면 『능단금강반야』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 경전의 옛 번역은 곧바로 『금강반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欲明菩薩以分別為煩惱,而分別之惑,堅類金剛,唯此經所詮無分別慧,乃能除斷,故曰『能斷金剛般若』,故知舊經失上二字。보살은 분별을 번뇌로 삼으며 분별의 미혹은 견고한 종류의 금강인지라 오로지 이 경에서 말한바 분별이 없는 슬기[慧]만이 이에 능히 잘라 없앨 수 있고 그래서 『능단금강반야경』이라 말하고 있고 그래서 이 경전의 옛 번역은 위의 두 글자를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又如下文,三問闕一,二頌闕一,九喻闕三,如是等。什法師所翻舍衛國也,留支所翻婆伽婆者,少可。또한 아래 문장에서와 같이, 세 가지 질문에 하나가 빠져있고, 두 게송에서 하나가 빠져있으며, 아홉 가지 비유에서 세 가지가 빠져있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구마라집 법사가 번역한 사위국舍衛國이나 보리유지가 번역한 바가바婆伽婆는 그저 그런 정도입니다. 」
帝曰:「師既有梵本,可更委翻,使眾生聞之具足。然經本貴理,不必須飾文而乖義也。」故今新翻《能斷金剛般若》,委依梵本。奏之, 帝甚悅。」(CBETA, T50, no. 2053, p. 259, a13-28)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는 현장 스님처럼 “금강을 분쇄하는 반야바라밀”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금강으로 무엇이든 분쇄하는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위 경전의 범본은 현재 여러 가지인 것이 확인되고 있고 대본大本과 약본略本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현장이 본 것은 전자인데, 구마라집이 본 것은 후자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일부 문장이 빠진 것은 역자 문제가 아니라 원본의 상위 문제인 것이다.
-사위국舍衛國보다 실라벌室羅筏, 바가바婆伽婆보다 박가범薄伽梵을 현장스님이 선호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방산석경房山石經이나 당 현종의 주석의 대상이 된 것은 구마라집의 『금강반야경』이고 明·淸까지도 그러하여 현장 역은 중국인의 금강경 이해에 있어서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14. 현장의 오종불번설
현장에게는 오종불번이라는 번역이론이 있었다고 전승되고 있는데 오종불번이란 의역해서는 안될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는 설이다. 다시 말하면 의역하지 말고 음역에 그쳐야 할 다섯 장르genre를 열거한 것이다. 오종불번에 관해서는 보통 남송의 법운 <<번역명의집>>(1143)에 보이는 한 구절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꽤나 후대의 저작이므로 보다 초기의 기록인 경소(景霄, -927-)30)의 <<사분율행사초간정기>>권2에 나오는 현장(玄奘, 602-664)설을 소개한다.
<<사분율행사초간정기>>는 도선(道宣, 596-667)율사의 <<사분율행사초>>에 대한 주석서로 809-903 무렵 사이에 찬술되었다. 찬자인 경소는 후당(923-936)시기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현장 스님과 200년 이상의 차이가 있으나 의정, 불공, 반야의 설이라고 볼 이유도 없으니, 현장 스님의 영향을 받아 당나라 학승들이 정리한 현장설로 보아 큰 문제가 없다.
《四分律行事鈔簡正記》卷2:「問: 毗尼翻律。為正翻義翻耶。答: 乃是義翻非正譯。故
諸家相承。引唐三藏譯經。有翻者有不翻者。
여러 파의 전승에서는 당나라 삼장의 역경에서는 번역할 것과 번역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음을 인용하고 있다.
且不翻有五。또한 번역하지 말아야 할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
一, 生善故不翻。1. 선업을 낳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佛陀云覺。菩提薩埵此云道有情等。불타는 각이란 뜻의 불타나 도, 유정을 뜻하는 보리살타 같은 말들을 今皆存梵名。지금은 모두 범어이름으로 존치하고 있는데 意在生善故。그 뜻은 선업을 낳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二, 秘密不翻。2. 비밀스러운 것이기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陀羅尼等。다라니 같은 것들이다.總持之教。총지(다라니, 주문)의 가르침은 若依梵語諷念加持。即有感微。범어에 의지하여 가호가 있기를 암송해야 곧 미묘함을 감득할 수 있지 若翻此土之言。全無靈驗故。중국말로 번역할 것 같으면 전혀 영험이 없기 때문이다.
三, 含多義故不翻。3. 여러 뜻을 함축하기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薄伽梵。一名具含六義。一, 自在(不永繫屬二種生死故)。二, 熾盛(智火猛熖燒煩惱薪)。三, 端嚴(相好具足所莊嚴故)。四, 名稱(有大名聞遍十方故)。五, 吉祥(一切時中常吉利故。如二龍主水七步生蓮也)。六, 尊貴(出世間所尊重故)。박가범bhagavān과 같은 말은 하나의 이름에 여섯 뜻이 구체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자재, 치성熾盛, 단엄, 명칭, 길상, 존귀. 今若翻一。便失餘五。故存梵名。이제 하나의 뜻으로 번역하게 되면 나머지 다섯 가지 뜻을 문득 잃게 되니 범어 이름을 존치해두는 것이다.
四, 順古不翻。(번역할 수 있지만) 옛날 하던 대로 따르기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阿耨菩提。從漢至唐。例皆不譯。아뇩보리같은 말은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전례에 따라 모두 번역하지 않는다.
五, 無故不翻。(중국 땅에는 그러한 사물들이) 없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閻浮樹影透月中, 生子八斛瓮大。此間既無。不可翻也。염부수jambu31) 그림자는 달에까지 비치고 8곡斛(800升)들이 항아리 크기의 열매를 낳는데 이 땅에는 없기에 번역할 수가 없는 것이다.
除茲[巳>已]外, 並皆翻譯。就翻譯中。復有二種。一正翻。二義翻。若東西兩土。俱有促呼喚不同。即將此言用翻彼語[1]梵。如梵語莽茶利迦。此云白蓮華。又如梵語斫摳。此翻為眼等。皆號正翻也。若有一物西土即有。此土全無。然有一類之物。微似彼物。即將此者用譯彼言。如梵云尼拘律陀樹。此樹西土其形絕大。能蔭五百乘車。其子如油麻。四分之一。此間雖無其樹。然柳樹稍[2]積似。故以翻之。又如三衣翻臥具等並是(云云)。今此毗尼翻彼律。蓋是義翻。」(CBETA, X43, no. 737, p. 24, a19-b15 // Z 1:68, p. 77, a1-b3 // R68, p. 153, a1-b3) [1]梵字疑剩。[2]積字疑剩。
1. 生善不翻
2. 秘密不翻
ex) 혜원(慧遠, 523-592) <<대반열반경의기>>
隋 淨影寺 沙門 釋慧遠 述 《大般涅槃經義記》卷1〈壽命品〉:「第三呪詞。何故不翻。翻改失用,多不神驗。所以不翻」(CBETA, T37, no. 1764, p. 626, c25-26)
胡 吉藏(549-623) 撰 《法華義疏》卷12〈陀羅尼品 26〉:「問:諸經中何故不翻呪耶?
答:呪語多含此間無物以擬之;若欲翻之,於義不盡,又失其勢用。如此間禁呪之法,要須依呪語法而誦之則有神驗,不得作正語而說。」(CBETA, T34, no. 1721, p. 629, c8-12)
3. 多義不翻
박가범薄伽梵은 세존世尊으로 대개 번역되고 있고 현장 또한 실제로는 세존이라고 번역하였으나 술어의 다의성 맥락에서 음역하라는 현장의 의도에서 볼 때는 모순된다고 할 수 없다.
박가범의 여러 뜻에 관해서는 현장 역 <<불지경론佛地經論>>에 자세하다.
龍樹菩薩 造, 後秦 龜茲國 三藏法師 鳩摩羅什 奉 詔譯 《大智度論》卷2〈序品 1〉:「「阿羅」名「賊ari」,「呵han」名「殺」,是名「殺賊」。如偈說:
「佛以忍為鎧, 精進為剛甲,
持戒為大馬, 禪定為良弓,
智慧為好箭; 外破魔王軍,
內滅煩惱賊, 是名阿羅呵。」
復次,「阿a」名「不」,「羅呵√ruh」名「生」,是名「不生」。佛心種子,後世田中不生,無明糠脫故。
復次,「阿羅呵√arh」名「應受供養」。佛諸結使除盡,得一切智慧故,應受一切天地眾生供養,以是故,佛名阿羅呵。」(CBETA, T25, no. 1509, p. 71, b20-c1)
중국인인 梁나라 법운은 羅漢에 불생, 살적, 응공의 뜻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 宋나라 승량은 열반이라는 말이 다의적이라 하나로 의역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4. 順古不翻: 아뇩보리는 번역용례가 드물고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생략으로 보인다. 현장은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음역이나 무상정득각 또는 무상정등보리같은 의역을 사용했고 현장 이전의 번역에도 음역과 의역이 함께 쓰였다. 이런 점에서 실태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5. 無故不翻: jambu에 대한 현장의 음역은 염부閻浮가 아니라 섬부贍部.
제3항(多義不翻)과 제5항(無故不翻)은 번역불가능성의 사태를, 나머지(生善不翻, 秘密不翻, 順古不翻)는 번역가능성의 사태이지만 번역하지 않는 게 좋다는 쪽이다.
15. 구마라집설과 현장설
구역을 대표하는 구마라집은 번역불가능성을 의식하여 문장의 뜻이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도록 읽기 쉬운 번역을 추구하였고 특정 문맥에 따라서는 음역을 하는 것도 중시하였다.
신역을 대표하는 현장은 구마라집을 비롯하여 구역에는 부정확한 점이 많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보다 정확한 축어역逐語譯을 추구하였고 당나라 시기의 발음에 대응시키고자 하는 생각으로 새로운 음역어를 다수 만들어내었다. 현장 계열의 설로 보이는 오종불번설에는 그 다섯 가지 항목 이외에는 정확히 의역하여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구역의 지겸과 구마라집은 ‘유마힐’32)이라고 하였는데 현장은 ‘무구칭無垢稱’이라고, 구역의 ‘수보리須菩提’33)라고 음역하였지만 현장은 ‘선현善現’이라고 의역하였다. 다만 현장은 Śāriputra를 ‘사리자舍利子’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는 오종불번의 제4항인 “옛날 하던 대로 따르기에 번역하지 않는다.順古不翻”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16. 문체의 문文과 질質을 오가는 전통과 논쟁
시대를 거슬러 구마라집 이전 사람들의 번역관을 살펴보면 문文과 질質이 키워드keyword이다.
문文은 문아文雅 곧 우아優雅한 품격이 있어, 사대부士大夫들이 읽기 쉬운 문체文體를 의미한다. 원문에 불필요한 반복이 있으면 문장의 뜻을 간결하게 이해하려고 삭제하는 입장이다.
질質은 질실質實 · 질박質朴 곧 허식虛飾을 폐廢하고 실직實直하게 축어적, 직역적인 문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중국어에서 꽤나 읽기 어려운 문체로 원문에 번잡한 반복이 있어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입장이다.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논어·옹야(雍也)』편
오의 지겸이 유기난과 나눴던 논의
전진의 석도안이 혜상慧常과 나눴던 논쟁
전진의 석도안이 조정趙政과 나눴던 논쟁
오의 지겸, 서진의 축숙란, 전진~후진의 축불염은 문文을 중시하였고
후한의 지루가참, 서진의 축법호는 질質을 중시하였다고 한다.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문’파文派는 자유역파自由譯派에, ‘질’파質派는 직역파直譯派에 해당된다. ‘문’파文派는 간簡(간략簡略)을, ‘질’파質派는 번繁(번다繁多) 곧 번잡하면 번잡한대로 원문을 그대로 두고 번역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다.
가칭 음역중시파音譯重視派와 의역중시파意譯重視派라는 말을 쓴다면 질’파質派인 지루가참은 음역중시파에, ‘문’파文派인 지겸은 의역중시파에 해당된다. 그러나 ‘질’파質派에 속하는 축법호는 『정법화경正法華經』을 보면 인명人名과 같은 고유명사까지도 의역하고 있고 음역은 극단적으로 적다. ‘질’파質派=음역중시파는 아니다.
17. 도안(道安, 312-385)의 오실본삼불역설五失本三不易說
문질文質논쟁에서 다루는 내용은 영원한 테마.
동진(東晉)시대에는 양양(襄陽)에서, 전진(前秦)시대에는 장안에서 활약했던 석도안은 여러 면에서 불교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문질文質에 관해 일정한 결론을 내림. 승려는 세속의 인연을 끊고 석가의 자식이 된 이상 석을 성씨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 산일된 문헌인 종리중경목록이라는 경록을 지은 것으로도 유명. 석도안이 불전번역론과 관련하여 남긴 이론이 오실본삼불역34)이라 불리는 것.
(1) 오실본
인도원전을 중국어로 번역하게 되면 잃게 되는 것을 다섯 조항으로 열거한 것이 오실본이다.
『출삼장기집』에 도안이 지은 「마하발라야바라밀경초서摩訶鉢羅若波羅蜜經抄序」가 실려 있다.
譯胡為秦。有五失本也。
범어를 번역하여 중국어로 하면 본래의 것(本=經)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그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一者, 胡語盡倒而使從秦。一失本也。
첫째, 범어는 모두 도치되어 있는데 중국말(의 어순)에 따르도록 (변경을 가)하는 것이니 첫 번째 실본이다.
二者, 胡經尚質。秦人好文。傳可眾心, 非文不合。斯二失本也。
둘째, 범어경전은 (문질 두 가지 중) 질(質: 質朴)을 숭상하고, 중국인은 문(文: 文雅)을 숭상한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들도록 전하고자 한다면 문(文)이 아니면 (그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지 않게 되니 이것이 두 번째 실본이다.
三者, 胡經委悉, 至於嘆詠。丁寧反覆。或三或四。不嫌其煩。而今裁斥。三失本也。
셋째, 범어경전은 위실(委悉)35)하여 (부처님이나 보살에 대한) 영탄(詠嘆=嘆詠)에 이르러, 정녕코 반복하여, 혹은 세 번 혹은 네 번이나 하면서 그 번다함을 싫어하지 않는데 지금 (중국에서는) 잘라내고 배척해버리니 (이것이) 세 번째 실본이다.
四者, 胡有義[16]記, 正似亂辭。尋說向語, 文無以異。或千五百刈而不存。四失本也。
넷째, 범어에는 의기(義記-義說【宋】【元】【明】)가 있어 참으로 난사(亂辭)36)와 비슷하다. 설명을 찾고 언어로 나아가나 글이 그것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어 (중국어로 옮기면서) 때로는 천오백이나 (되는 분량이) 삭제되어 존재하지 않게 되니 (이것이) 네 번째 실본이다.
五者, 事已全成。將更傍及。反騰前辭, 已乃後說, 而悉除此。五失本也。
다섯째, (범어 원전에서는) 일이 이미 모두 이루어진 뒤 장차 다시 (그 일을) 방급(傍及)37)하려고 할 적에는 앞의 말에 거꾸로 올라가 (반복한 뒤에야) 뒤의 말에 이르지만 (중국어로 옮길 적에는) 모두 이런 것을 삭제하니 (이것이) 다섯 번째 실본이다.」
제1은 어순이 서로 다르다는 것인데 한역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변경이다.
제2는 위진魏晉 무렵 성행했던 문체에 관한 논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3, 4, 5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2 이하는 원문생략의 문제와 관련된다.
제3의 예: 『장아함경』 권2 「유행경遊行經」과 Mahā-parinibbāna-suttanta.
佛告阿難:「汝聞跋祇國人數相集會,講議正事不?」
答曰:「聞之。」 《長阿含經》卷2 (CBETA, T01, no. 1, p. 11, a24-26)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하였다. 너는 발지국 사람들이 자주 서로 모여 나랏일을 토의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느냐. (아난이) 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Kin ti te Ānanda suttaṃ, Vajjī abhiṇhaṃ sannipātā sannipāta-bahulā ti?’
‘Sutaṃ me taṃ bhante Vajjī abhiṇhaṃ sannipātā sannipāta-bahulā ti.’
(Mahā-parinibbāna-suttanta, Dīgha Nikāya II, PTS, p. 73
유행경에서는 단순히 ‘들었습니다 聞之’로 처리하고 반복되는 것을 생략하였는데 한역에서는 흔하다고 한다.
제4는 본문 중에 포함된 주해류注解類를 말하는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히 이해되지 않는다.
(2) 삼불역
출삼장기집에 실려 전해지는 석도안 스님의 마하발라야바라밀경초서摩訶鉢羅若波羅蜜經抄序에는 오실본에 이어 삼불역三不易(석도안스님 연구자로 이름이 높은 횡초혜일橫超慧日38)이 1958년에 최초로 주장) 또는 삼불이三不易(전통적인 이해와 중국인 학자의 이해)를 언급하고 있다. 한문 원문은 아래와 같다.
然般若經39)。三達之心覆面所演。聖必因時, 時俗有易。而刪雅古以適今時。一不易也。
반야경은 삼달(三達)40)의 심心이 복면소연(覆面所演)한 것이다.41)성인은 반드시 시절[時]을 원인으로 한다. 시절의 풍속[時俗]은 변화함이 있는데 고아古雅[雅古: 端雅古朴]한 것을 깎아내고 지금의 시절에 맞추니 첫 번째 불역이다.
愚智天隔, 聖人叵階。乃欲以千歲之上微言。傳使合百王之下末俗。二不易也。
어리석은 범부와 지혜로운 이는 천지차이가 있어 성인(의 지위에) 오르기는 어렵다. 이에 천세의 위쪽에 있는[千歲之上] 미묘한 말씀을 전傳하여 백왕의 아래쪽[百王之下] 말세의 풍속[末俗]과 합치시키고자 하는 것이니 두 번째 불역이다.
阿難出經, 去佛未久。尊大迦葉令五百六通迭察迭書。今離千年而以近意量[21]截。彼阿羅漢乃兢兢若此。此生死人而平平若此。豈將不知法者勇乎。斯三不易也。
아난이 경經을 낼 적에는 부처님이 입적하신지 오래되지 않은 때였고 존자 대가섭이 육통의 오백 아라한이 번갈아 살피고 번갈아 쓰게 하였다. 이제 천년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비근卑近한 생각[近意]으로 헤아려 절단하니 저 아라한들이 이렇듯 조마조마함이 이러하고 이 생사를 윤회하는 인간들이 예사롭기가 이러하다. 장차 법을 모르는 자들의 용맹함은 어찌할 것인가? 이것이 세 번째 불역이다.
涉茲五失經三不易。譯胡為秦。詎可不慎乎。
이 오실경42)삼불역을 두루 살펴 범어를 중국어로 옮겨야 할 것이니 어찌 가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不易이 용이하지 않다는 뜻인지 바꿔서는 안 된다는 뜻인지 지금 여기에서 결론을 내리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三不易의 포인트point는 인도 원전을 가능한 한 충실히 지켜서 재현해야 된다는 점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1) 『佛典はどう漢譯されたのか: ス-トラが經典になるとき』/ 船山徹 著. 東京: 岩波書店, 2015(c2013), 87-119쪽.
2) 진(晉)나라 때 승려. 양주(凉州) 사람이다. 젊어서 스님이 되어 융안(隆安) 초에 법현(法顯), 지엄(智儼)과 거의 한 무렵에 서역(西域)을 향해 떠났다. 유사(流沙)를 건너고 설령(雪嶺)을 넘어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북인도에 가서 영적(靈蹟)을 찾고 범서(梵書)를 연구했다. 음자고훈(音字古訓)을 배웠다. 나중에 장안(長安)에 돌아와 불타발타라에게서 공부하고, 도장사(道藏寺)에서 『불소행찬경』 번역에 종사했다. 원가(元嘉) 26년 육합사(六合寺)에서 입적했다. 세수(世壽) 74세였고, 저서에 『서역유기(西域遊記)』 1권이 있다.
3) 求那跋陁羅,此云功德賢,中天竺人,以大乘學,故世號摩訶衍,本婆羅門種。『고승전』 3권(ABC, K1074 v32, p.794b21-b22)
4) 於是京師遠近冠蓋相望,大將軍彭城王義康、丞相南譙王義宣,竝師事焉。頃之,衆僧共請出經於祇洹寺,集義學諸僧,譯出『雜阿含經』,東安寺出『法鼓經』,後於丹陽郡,譯出『勝鬘』、『楞伽經』,徒衆七百餘人。寶雲傳譯,慧觀執筆,往復諮析,妙得本旨。『고승전』 3권(Ap.795a0BC, K1074 v32, 1-a07)
5) 後譙王鎭荊州,請與俱行,安止辛寺,更創房殿。卽於辛寺,出『無憂王』、『過去現在因果』,及一卷『無量壽』、一卷『泥洹』、『央掘魔羅』、『相續解脫波羅蜜了義』、『現在佛名經』三卷、『第一義五相略』、『八吉祥』等諸經,幷前所出凡百餘卷,常令弟子法勇傳譯度語。
6) 譙王欲請講『花嚴』等經,而跋陁自忖(촌),未善宋言,有懷愧歎,卽旦夕禮懺請觀世音乞求冥應。遂夢有人白服持劍,擎(경)一人首來,至其前曰:“何故憂耶?”跋陁具以事對,答曰:“無所多憂。”卽以劍易首,更安新頭。語令迴轉曰:“得無痛耶?”答曰:“不痛。”豁然便覺,心神悅懌(역)。旦起,道義皆備領宋言,於是就講。『고승전』 3권(ABC, K1074 v32, p.7 95a01-a22)
7) だまされた女/すげかえられた首 (光文社 古典新訳 文庫) 2009/1/20 初版, トーマス マン Thomas Mann (原著), キシ ヨシハル 岸 美光(翻訳)
8) 진(晉)나라 때의 서역(西域) 승려. 범명(梵名)은 Śrīmitra다. 시리밀다라(尸梨密多羅)로도 불리며, 의역(意譯)은 길우(吉友)다. 원래 구자국(龜茲國)의 왕자였는데,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출가했다. 경론(經論)에 정통했고, 밀법(密法)에 해박했다. 영가(永嘉) 연간(307-312)에 중국에 왔는데, 마침 전란을 만나자 강을 건너 건강(建康)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사람들이 그를 “고좌高座”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천자(天資)가 높고 풍신(風神)이 당당하여 왕도(王導)의 흠모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명성이 날로 드러나 사람들이 다투어 사귀기를 원했다.
처음에 강동(江東)에는 주법(呪法)이 없었는데, 스님이 『공작왕경(孔雀王經)』을 번역해 여러 가지 신주(神呪)를 보여주었다. 또 제자 멱력(覓歷)에게 고성범패(高聲梵唄)의 법을 전수했다. 함강(咸康) 연간(335-342)에 입적했고, 세수(世壽) 80여 세였다. 석자강(石子岡) 동쪽에 장사지냈다. 성제(成帝)가 그의 풍격을 존경하여 무덤 옆에 사찰을 세웠는데, 후세에 사문(沙門)이 같은 곳에 절을 지으니 고좌사(高座寺)라 불렀다.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권2에 따르면 생전에 번역한 경전은 『대공작왕신주(大孔雀王神呪)』와 『공작왕잡신주(孔雀王雜神呪)』 각 1권이 있다고 한다.
9) 《阿毘達磨俱舍釋論》卷1:「法師遊方既久。精解此土音義。凡所翻譯。不須度語。」(CBETA, T29, no. 1559, p. 161, b11-12)
10) 후나야마 토오루는 진제삼장연구라는 책을 엮은 바 있고 그 책의 첫 편에 “진제 활동과 저작의 기본적 특징”이라는 논문을 실은 바도 있어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가 되러 궁금해진다. 한역에 있어 4대한역가 중에서도 첫째로 손꼽을 수 있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있는 까닭에 법현의 경우를 투사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11) 혜색[慧賾] 580-636 수당(隋唐) 시기의 승려. 형주(荊州) 강릉(江陵) 사람이고, 속성(俗姓)은 이(李)씨다. 9살 때 출가하여 처음에는 강릉사(江陵寺)에서 지냈다. 12살 때 대흥법석(大興法席)이 이루어졌을 때 법주(法主)가 되었다. 나중에 경사(京師) 청선사(淸禪寺)에서 지냈다. 경전에 해박했고 시문을 잘 지었으며, 서화(書畵)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감상에도 정통해서 사대부들과 많이 어울렸다. 저서에 『반야등론(般若燈論)』을 편찬했는데, 『중론(中論)』이라고도 부른다. 그 밖의 저서에 『영집(詠集)』이 있다.
12) 법림[法琳] 572-640 당나라 때의 승려. 영천(潁川, 河南 許昌)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진(陳)씨다. 『속고승전(續高僧傳)』 권25에 따르면 어릴 때 출가하여 유석백가(儒釋百家)의 학문을 연구했고, 특히 삼론(三論)에 정통했다. 일찍이 수나라 인수(仁壽) 원년(601)에 장안(長安)에 와서 도술(道術)을 익혔고, 의녕(義寧) 원년(617) 도복(道服)을 입고 도관(道館)에서 살았다. 평소 노장(老莊)에 통달하여 담론이 맑고 기발했기 때문에 도속(道俗)에서 모두 그를 좇았다. 당고조(唐高祖) 무덕(武德) 원년(618) 다시 석문(釋門)으로 돌아왔다. 4년(621) 경사(京師) 법제사(濟法寺)에 머물렀는데, 당시 태사(太史) 부혁(傅奕)이 12가지 조항으로 대책(對策)을 올려 불법(佛法)을 금지할 것을 주청하자 스님도 글을 올려 잘못됨을 지적하고 『파사론(破邪論)』 1권을 지어 변란(辯難)했다. 부혁이 이치에 밀려 한 마디 말도 못했고, 황제도 폐불(廢佛)에 대한 논의를 중지했다. 나중에 이중경(李仲卿) 등의 배불론(排佛論)에 대항하여 다시 『변정론(辯正論)』 8권을 지어 논의를 꺾어버렸다. 정관(貞觀) 연간에 칙명으로 용전사(龍田寺) 주지를 지내고, 아울러 역경(譯經)에 필수(筆受)로 참여했다. 13년(639) 겨울 도사(道士) 진세영(秦世英)의 참언 때문에 투옥되었다가 칙명으로 사면되어 익부(益部)의 사찰로 옮겨졌다. 가는 도중 백뢰관(百牢關) 보리사(菩提寺)에 이르렀을 때 병으로 입적했다. 세수(世壽) 69세다. 도속(道俗)이 모두 통곡하면서 동산(東山)에 묻었다. 저서에 시부(詩賦)와 찬송(讚頌), 비지(碑誌), 기전(記傳), 삼교계보(三敎系譜)와 대승교법(大乘敎法) 등 30여 권이 있다. 당시 사람 언종(彦琮)이 스님의 별전(別傳) 3권을 지었는데, 호법(護法)했던 사실이 잘 나와 있다.
13) 《續高僧傳》卷2:「僉以崛多, 言識異方, 字曉殊俗。故得宣辯自運。不勞傳度。理會義門, 句圓詞體。文意粗定, 銓本便成。筆受之徒不費其力。」(CBETA, T50, no. 2060, p. 434, a23-26)
14) 「時又有優婆塞。姓瞿曇氏。名達[13]磨般若。隋言法智。父名般若流支。備詳餘傳。智本中天國人。流滯東川, 遂[14]嚮華俗。而門世相傳祖習傳譯。高齊之季為昭玄都。齊國既平佛法同毀。智因僧職轉任俗官。[15]再授洋州洋川郡守。隋氏受禪。梵牒即來。有勅召還使掌翻譯。法智妙善方言。執本自傳。不勞度語。譯「業報差別經」等。」《續高僧傳》卷2 (CBETA, T50, no. 2060, p. 434, c13-21)[13]磨=摩【宋】【元】【明】【宮】*。[14]嚮=鄉【宋】【元】【明】【宮】。[15]再=冊【宋】【元】【明】【宮】。
15) 역대삼보기에는 방언 대신에 수나라 말과 범어라고 적고 있다. 「智既妙善隋梵二言。執本自翻無勞傳譯。」《歷代三寶紀》卷12 (CBETA, T49, no. 2034, p. 102, b24-25)
16) 「般若流支次子曇皮」《歷代三寶紀》卷12 (CBETA, T49, no. 2034, p. 102, c7)
17) 大乘方廣總持經一卷 번역할 때 「傳譯」《歷代三寶紀》卷12 (CBETA, T49, no. 2034, p. 102, c7)
18) 百佛名經一卷 번역할 때 「度語」《歷代三寶紀》卷12 (CBETA, T49, no. 2034, p. 103, a4)
19) 「以漢桓之初。始到中夏。才悟機敏一聞能達。至止未久。即通習華言。於是宣譯眾經改[10]胡為漢。」《高僧傳》卷1 (CBETA, T50, no. 2059, p. 323, b4-6)[10]胡=梵【元】【明】。한나라 환제(桓帝)12) 초기에 처음으로 중국에 이르렀다. 그는 재주와 깨달음이 빠르고 민첩하여 한 번 듣기만 해도 능숙하였다. 그래서 중국에 이른지 오래지않아 곧 중국말을 완전하게 익혔다. 『고승전』 1권(ABC, K1074 v32, p.765b01)
20) 이는 후나야마의 번역이다. 아래는 한글대장경 고승전 개정판 번역이다.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는 것이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고승전』 2권(ABC, K1074 v32, p.778c01)
21) 「法師以秦人好簡故裁而略之。」《出三藏記集》卷10 (CBETA, T55, no. 2145, p. 75, a28-29)
22) evaṃ mayā śrutam ekasmin samaye까지를 정형구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23) 大唐 西明寺 沙門 釋道宣 撰 《續高僧傳》卷2:「且儒學古文變猶紕繆。世人今語傳尚參差(치)。況凡聖殊倫東西隔域。難之又難論莫能盡。必慇懃於三覆。靡造次於一言。歲校則利有餘。日計則功不足。開大明而布範。燭長夜而成務。宣譯之業未可加也。經不容易理藉名賢。常思品藻終慚水鏡。兼而取之。所備者八。誠心愛法志願益人不憚久時其備一也。將踐覺場先牢戒足不染譏惡。其備二也。筌曉三藏義貫兩乘不苦闇滯。其備三也。旁涉墳史工綴典詞不過魯拙。其備四也。襟抱平恕器量虛融不好專執。其備五也。沈於道術澹於名利不欲高衒。其備六也。要識梵言乃閑正譯不墜彼學。其備七也。薄閱蒼雅。粗諳篆隷。不昧此文。其備八也。八者備矣。」(CBETA, T50, no. 2060, p. 439, a15-29)
24) <불교> ‘계’(戒)를 달리 이르는 말. 사람 몸의 발과 같이 계가 불자를 열반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다.
25) 筌曉라는 말은 여기에서만 용례가 보여 전筌의 뜻을 확정하기 어렵다. 전筌은 고기 잡는 통발, 제蹄는 토끼 등을 잡는 올무인데 흔히 전제(筌蹄)라는 말로 같이 쓰여 어떤 목적을 이루는 수단을 비유적으로 뜻하기도 한다. 온전할 전全과 관련시켜 ‘완전히’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다.
26) 삼분오전[三墳五典] 중국의 고서(古書) 이름. 三墳은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의 글이요, 五典은 소호(少昊)·전욱(顓頊)·고신(高辛)·당우(唐虞)의 글임. 이 밖에 팔괘(八卦)의 해설을 ‘팔삭(八索)’, 구주(九州)의 기록을 ‘구구(九邱)’라 하는데, 여러 설(說)이 있어 일정하지 않음.<좌전左傳 소공12년두주昭公十二年杜注>
• 풀이 : 『삼분(三墳)』과 『오전(五典)』. • 의미 : 중국의 고대 문화와 관련한 전적을 가리키는 전고다. • 출전 : 『좌전(左傳)』 소공(昭公) 12년조. • 내용 : 춘추시대 초나라 영왕(靈王)과 그의 대신 자혁(子革)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초나라 사관 의상(倚相)이 잰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갔다. 초왕이 “저 사람은 우수한 사관이니 잘 대해야 할 것이오. 그는 『삼분(三墳)』과 『오전(五典)』, 『팔색(八索)』과 『구구(九丘)』를 읽어 알고 있소”라고 말했다. • 영향 : 초나라 영왕이 언급한 책이 어떤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역사와 문화 및 문물제도와 관련된 서적일 것으로 추측한다. 이 전고는 간단하게 줄여서 ‘전분(典墳)’ 또는 ‘분전(墳典)’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분적(墳籍)’이나 ‘구분(丘墳)’ 등으로도 쓴다.
27) 嫺(한: 1. 우아하다(優雅--) 2. 단아하다(端雅--) 3. 조용하다 4. 익다, 익숙하다)의 뜻으로 보인다.
28) 삼창[三蒼•三倉] 중국 한(漢) 나라 때에 편찬되었던 사전이름. 창힐편(蒼頡篇)•원력편(爰歷篇)•박학편(博學篇)의 3편으로 이루어졌음. 후에 이 3편을 합하여 맨 앞의 편명을 따서 창힐편(蒼頡篇)이라 하고, 이를 삼창(세편으로 이루어진 창힐편이란 의미)이라 하였음. 삼창은 고려 시대 국학에서 생도들이 ≪국어(國語)≫•≪설문해자(說文解字)≫ •≪자림(字林)≫•≪이아(爾雅)≫ 등의 사전류와 함께 유교경전을 학습할 때 이용했던 중요 학습사전이었음.
29) 이아[爾雅]: 「이아」는 소학서의 한 종류로 중국의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훈고서이며, 세계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취급된다. 「이아」는 ‘석명(釋名)’, 또는 「이아」 속에 1편으로 분류되어 있는 ‘석언(釋言)’이라고도 한다. 3권 19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아」는 한(漢, 기원전 206년~220년)나라 이전에 만들어졌으며, 저자 또는 편자는 분명하지 않다. 「이아」는 주공(周公, ?~?)1) 또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의 제자였던 자하(子夏, 기원전 507년~기원전 420년?)가 지었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주나라(周, 기원전 1046년~기원전 256년)에서 한나라까지의 여러 학자들이 여러 가지 경서들에 수록되어 있는 본문의 뜻을 새겨서 풀이한 주석을 채록한 책이라고도 한다. 「이아」는 13경의 하나로 중국의 가장 오래된 자전이며, 주석서3)이자 자해서4)이다. 「이아」는 5경 즉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春秋)」에 수록된 한자들의 음과 뜻과 풀이하였으므로 여러 경전들의 내용을 해석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아」는 훈고학에서 한자의 뜻을 풀이할 때에도 지침서로 사용되었다. ‘이아’는 각 지역의 방언을 소통시켜 공동어인 바른 말 즉 아언(雅言)에 이르게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런데 현재 「이아」는 전해지지 않으며, 서진(西晉, 265년~316년)의 학자 곽박(郭璞, 276년~324년)이 「이아」의 경문(經文)을 풀이하여 주석을 단 「이아주(爾雅注)」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남아 있다.
30) 경소 [景霄] : 오대(五代) 때의 승려. 대주(臺州) 단구(丹丘) 사람이고, 속성(俗姓)은 서(徐)씨다. 성격이 엄격하고 강인해서 남들과 잘 사귀지 않았다. 금화(金華) 백화산(白華山)에 머물면서 초학자들을 가르치며 지도했다. 저서에 『간정기(簡正記)』 20권이 있는데, 값어치가 날로 높아졌다. 오월(吳越)의 전류(錢鏐)가 불러 임안(臨安) 죽림사(竹林寺)에 머물게 했다. 천성(天成) 2년(927) 요청을 받아 북탑사(北塔寺)에서 법단(法壇)에 올랐고, 항주(杭州) 진신보탑사(眞身寶塔寺)에 머물다가 입적했다. 宋高僧傳 卷16
31) 【염부수閻浮樹】 閻浮, 梵語 jambu, 巴利語同. 又作譫浮樹․ 贍部樹․ 剡浮樹․ 染部樹․ 潛謨樹. 略稱閻浮. 屬於落葉喬木. 學名 Eugenia jambolana. 原産於印度. 四·五月間開花, 結深紫色果實, 稍帶酸味, 種子可作藥用. 依大智度論卷三十五載, 印度爲閻浮樹茂盛之地, 故得閻浮提之名;又流於此樹林間之諸河多含沙金, 故稱爲閻浮檀金. 此外, 起世因本經․立世阿毘曇論卷一南剡浮提品等皆說有「閻浮大樹王」, 此樹枝幹高廣, 樹葉厚密, 能遮避風雨, 果實甘美無比;或係印度人想像中之理想樹. [起世經卷一․南本涅槃經卷九․善見律毘婆沙卷十七․釋迦方志卷上․碧巖錄第十四則․翻譯名義集卷七]<<佛光大辭典 p6337-中≫
32) The Vimalakīrti Nirdeśa Sūtra (Sanskrit: विमलकीर्तिनिर्देशसूत्र )에 나오는 거사. nirdeśa는 가르침instruction, 조언advice의 뜻이라고 한다.
33) 須菩提(しゅぼだい、スブーティ、梵: सुभूति, Subhŭti)는 석가10대 제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무쟁제일無諍第一이라 불리고 있다.
34) 오실본삼불역이 실려있는 「마하발라야바라밀경초서摩訶鉢羅若波羅蜜經抄序」 전문은 다음과 같다. 《出三藏記集》卷8:「摩訶鉢羅若波羅蜜經抄序第一 [9]道安法師 昔在漢陰十有五載。講放光經歲常再遍。及至京師漸四年矣。亦恒歲二。未敢墮息。然每至滯句首尾隱沒。釋卷深思。恨不見護公叉羅等。會建元十八年正車師前部王。名彌第。來朝。其國師。字鳩摩羅跋提。獻[10]胡[11]大品一部四百二牒言二十千[12]失盧。[*]失盧三十二字。[*]胡[13]人數經法也。即審數之。凡十七千二百六十首盧。殘二十七字都并五十五萬二千四百七十五字。天竺沙門曇摩蜱執本。佛護為譯。對而撿之。慧進筆受。與放光光讚同者。無所更出也。其二經譯人所漏者。隨其失處稱而正焉。其義異不知孰是者。輒併而兩存之。往往為訓其下。凡四卷。其一[14]經五卷也。譯[*]胡為秦。有五失本也。一者[*]胡語盡倒而使從秦。一失本也。二者[*]胡經尚質。秦人好文。傳可眾心非文不合。斯二失本也。三者[*]胡經委悉至於嘆詠。[15]丁寧反覆。或三或四。不嫌其煩。而今裁斥。三失本也。四者[*]胡有義[16]記正似亂辭。尋說[17]向語文無以異。或千五百[18]刈而不存。四失本也。五者事已全成。將更傍及。反騰前辭已乃後說而悉除此。五失本也。然般若經。三達之心覆面所演。聖必因時[19]時俗有易。而刪雅古以適今時。一不易也。愚智天隔聖人叵階。乃欲以千歲之上微言。傳使合百王之下末俗。二不易也。阿難出經去佛未久。[20]尊大迦葉令五百六通迭察迭書。今離千年而以近意量[21]截。彼阿羅漢乃兢兢若此。此生死人而平平若此。豈將不知法者勇乎。斯三不易也。涉茲五失經三不易。譯[*]胡為秦。詎可不慎乎。正當以不[22]開異言。傳令知會通耳。何復嫌大匠之得失乎。是乃未所敢知也。前人出經。支讖世高。審得[*]胡本難繫者也。叉羅支越。[23]斵鑿之巧者也。巧則巧矣。懼竅成而混沌終矣。若夫以詩為煩重。以[24]尚為質朴。而刪令合今。則馬鄭所深恨者也。近出此撮欲使不雜推經言旨。唯懼失實也。其有方言古辭。自為解其下也。於常首尾相違句不通者。則冥如合符。厭如復[25]折。乃見前人之深謬。欣通外域之嘉會也。於九十章蕩然無措疑處。毫芒之間泯然無微疹。已矣乎。南[26]摸一切佛過去未來現在佛如諸法明(天竺禮般若辭也明智也外國禮有四種一罽耶二波羅南三婆南四南[27]摸南[*]摸屈體也[28]此跪此四拜拜佛外道國主父母通拜耳禮父母云南[*]摸薩迦薩迦供養也)。摩訶(大也)鉢羅若(智也)波羅(度也)蜜(無極)經抄(天竺經無前題前題皆云吉法吉法竟是也道安為此首目題也)。」(CBETA, T55, no. 2145, p. 52, b8-c26)[9](晉)+道【明】。[10]胡=梵【元】【明】*。[11]大=天【明】。[12]失=首【宋】*【元】*【明】*。[*12-1]失=首【宋】*【元】*【明】*。[*10-1]胡=梵【元】【明】*。[13]〔人〕-【宋】【元】【明】。[14]經=紙二紙異者出別為一卷合【宋】【元】【明】。[*10-2]胡=梵【元】【明】*。[*10-3]胡=梵【元】【明】*。[*10-4]胡=梵【元】【明】*。[*10-5]胡=梵【元】【明】*。[15]丁寧=叮嚀【元】【明】。[*10-6]胡=梵【元】【明】*。[16]記=說【宋】【元】【明】。[17]向=句【明】。[18]刈 벨 예=剗 깎을 잔, 깎을 전【元】【明】。[19]〔時〕-【宋】【元】【明】。[20]尊+(者)【宋】【元】【明】。[21]截=裁【宋】【元】【明】。[*10-7]胡=梵【元】【明】*。[22]開=聞【宋】【元】【明】。[*10-8]胡=梵【元】【明】*。[23]斵=斷【明】。[24]尚=書【宋】【元】【明】。[25]折=析【宋】【元】【明】。[26]摸=無【宋】*【元】*【明】*。[27]摸=莫【元】【明】。[*26-1]摸=無【宋】*【元】*【明】*。[28]此跪=跪也【宋】【元】【明】。[*26-2]摸=無【宋】*【元】*【明】*。
cf) 樸揚 智周 撰 《因明入正理論疏前記》卷1:「五失者: 一, 迴倒梵語. 二, 改質從文. 三, [1]慰慇重委細而說遂乃那之. 四, 凡有所說, 正似究詞, 細尋不爾, 今而不存. 五, 事[巳>已]合成, 將欲傍說, 重勝前意, 生起後說。三不易者: 逕三達之心覆面者說淺智加減, 一不易也. 愚智天隔, 聖必依時, 佛出世時眾根利, 末代根鈍, 遂易古雅之言, 而應今時之性. 此則改千代之上[2]徵言, 同百王之下末俗, 二不易也. 五百羅漢, 結集三藏, 迭相監察, 猶恐謹失, 凡立獨稱, 更為第品, 三不易也。」(CBETA, X53, no. 853, p. 808, a19-b2 // Z 1:86, p. 457, a7-14 // R86, p. 913, a7-14)[1]慰字疑剩。[2]徵疑微。
35) 委悉(위실): (일이나 뜻을) 자세(仔細)하고 완전(完全)하게 앎. 아주 자상하게 앎. 이와 같이 사전에 나와 있으나 悉에는 ‘알다’는 뜻 외에도 ‘다하다(궁구하다)’, ‘갖추다’는 뜻이 있으므로 ‘자세하게 다 갖추다’는 뜻으로 보아 무방해 보인다. 후나야마는 ‘위곡委曲을 진盡하다’로 보고 있다.
36) ①한시(漢詩)의 끝에 적은 한 편(篇)의 대의(大意)를 이르는 말 ②조리가 닿지 않는 어지럽고 난잡(亂雜)한 말
37) 傍及(방급): 推及;遍及。 南朝 梁 劉勰 《文心雕龍·原道》:“心生而言立,言立而文明,自然之道也。傍及萬品,動植皆文。”
38) 横超慧日(おうちょうえにち, 1906-1995): 일본의 불교학자. 대곡大谷대학 명예교수. 중국불교 전공.
39) 經을 ‘지나다’는 뜻의 경逕으로 적고 있는 후대 문헌들도 적지 않다.
40) 삼달(三達): 삼명(三明) 또는 삼증법(三證法)이라고도 함. 숙명지(宿命智), 생사지(生死智), 누진지(漏盡智) 증명(證明).
1. pūrva-nivāsānusmṛti-jñāna 宿命通 2. divya-cakṣus 天眼通 3. āśrava-kṣaya-jñāna 漏盡通
41) Oslo대학의 Christoph Harbsmeier는 Early Chinese buddhist translators on translation: A brief introduction with textual data란 논문에서 “然般若逕三達之心 The core of the threefold prajnā-knowledge 覆面所演。has been propounded by people long dead.(세 가지 지혜의 핵심은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에 의해 제시되었다”로 영문번역하고 있는데 복면覆面을 ‘오래 전에 죽은 사람’으로 풀고 있다. 본서에서는 “반야경은 부처님이 설한 것으로 성자는 반드시 때를 고려하여 설하므로”(横超慧日 1983)라고 하고 있다.
cf) 《佛開解梵志阿[颱-台+(犮-乂+又)]經》卷1:「佛知其意,即為出舌,先舐(핥을 지)左耳,却舐右耳,復舐髮際,以舌覆面,徐引舌下。阿颰(태)歎曰:「如佛者難值,萬世時有舌相乃爾,安得不知?」」(CBETA, T01, no. 20, p. 263, b24-27)
42) 이를 통해 오실본의 ‘本’이 ‘經’의 뜻임을 알 수 있다.
1
제4장 외국승의 어학능력과 구마라집·현장의 번역론1)
앞 장에서 역주譯主를 설명할 때 『승만경勝鬘經』을 한역할 때의 역주가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 394-468)였지만 그는 원문原文을 읽었을 뿐이고 실제로 번역을 한 이는 보운(寶雲2), 376-449)이었다는 것을 소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소박한 질문을 던지면, 구나발타라 같은 인도인은 어느 정도로 중국어를 알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제4장에서는 먼저 이런 점에 관해 역주를 맡았던 외국승의 중국어 능력의 유무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역사자료를 통해 중국어가 되는 외국승려, 중국어가 되지 않는 외국승려 등의 경우를 역사자료로부터 알 수 있는 한도에서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그 위에서 인도와 중국 두 나라 언어를 잘하는 번역자들의 번역이론을 소개하고, 더불어 번역의 가능성과 불가능성과 관련된 것들을 다룬다.
1. 중국어회화로 고심했던 구나발타라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 394-468)는 중국말로 공덕현(功德賢)이라 하며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대승(大乘)을 배웠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마하연(摩訶衍)이라 부른다. 본래는 바라문(婆羅門) 출신이다.3)원가(元嘉) 12년(435)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후에 단양군(丹陽郡)에서 『승만경(勝鬘經)』과 『능가경(楞伽經)』을 번역하였다. 이때에는 참여한 무리가 7백여 명이었다. 보운(寶雲)이 전역(傳譯)을 , 혜관(慧觀)이 붓을 잡았다.집필執筆(=필수筆受)를 맡았다. 말이 오가며 반복하여 자문하고 분석하여 오묘한 본지를 터득했다.4)
후에 초왕(譙王: 南譙王, 劉義宣)이 형주(荊州)를 평정하였다. 함께 신사(辛寺)로 가서 머물 것을 청하므로 방과 전각을 다시 세웠다. 곧 신사辛寺에서 『무우왕경(無憂王經)』ㆍ『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ㆍ『무량수경(無量壽經)』 1권ㆍ『니원경(泥洹經)』ㆍ『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ㆍ『상속해탈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波羅蜜了義經)』ㆍ『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 3권ㆍ『제일의오상략경(第一義五相略經)』ㆍ『팔길상경(八吉詳經)』 등의 여러 경전을 내었다. 이전에 펴낸 것과 아울러 백여 권에 이르렀다. 항시 제자 법용(法勇)으로 하여금 번역을 옮겨 말을 헤아리도록 하였다.傳譯*度語5)
초왕(譙王: 南譙王, 劉義宣)이 청하여 『화엄(華嚴)』 등의 경전을 강의하게 하였다. 구나발타라가 스스로 아직 송나라 언어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여기고서, 부끄럽고 안타까운 생각을 품었다. 곧바로 아침저녁으로 예배하고 참회하며 관세음에게 청하여, 신명이 응해 주기를 빌었다.
드디어 꿈속에 흰 옷을 입고 손에 칼을 든 사람이 나타났다. 한 사람의 머리를 받쳐 들고, 그의 앞에 이르러 물었다.
“무엇 때문에 걱정을 하는가?”
구나발타라가 갖추어 사실대로 아뢰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크게 걱정할 것 없다.”
곧바로 칼을 가지고 머리를 바꾸어 새 머리로 얹히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보라고 하였다.
“아프지 않은가?”
구나발타라가 대답하였다.
“아프지 않습니다.”
갑자기 환히 트이면서 깨달아, 마음과 정신이 희열에 젖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도의 의미를 송나라의 말로 갖추어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제야 강의를 하였다.6)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소설 〈뒤바뀐 머리 Die vertauschten Köpfe-Eine indische Legende〉(1940)7)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이다. 위 이야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장어를 쓰는 능력이 아니고 회화능력이다. 구나발타라는 광주에 도착한 것이 40세 되던 435년이고 430년대 후반에 건강健康에, 이어 형주로 가 역경을 한 것이 440년대에서 450년대 초반까지이다. 453년 효무제가 중흥사中興寺를 세웠고 구나발타라는 거기에서 468년 나이 75세에 입적하게 된다. 중국에 도착해 5년이 지난 시점에 역경을 하고 있었지만 중국어 회화는 거의 할 수 없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출삼장기집』 권2에 따르면 구나발타라의 역장에는 보운寶雲과 그 제자인 법용法勇, 보리菩提 두 제자가 전역傳譯으로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승만경에 한하지 않고 구나발타라 역업譯業에는 전적으로 중국인 통역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 통역이 필요했던 구나발마
구나발타라에 조금 앞서 건강健康에서 활약했던 구나발마求那跋摩는 431년(이 해에는 윤6월이 들어있다) 정월에서 9월28일 급서할 때까지 10개월 정도 건강에 머무르며 경론을 번역하였다. 고승전 권3에 따르면 『보살선계경』 10권을 생전에 번역을 완료하지 못해 그의 사후 제자들이 남아있는 3장을 스승을 대신하여 역출譯出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구나발마 사후에도 번역이 속행가능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없이도 역경이 가능할 정도로 잘 정비된 체제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나발마전에는 건강 도착 후 역경 이전에 법화경과 화엄경을 강의하였다고 하는데 구나발마는 당시 65세로 때로 통역에 의지하였다고 한다.
3. 중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던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
중국어 회화를 하지 못했던 것이 명백한 이로는 동진에서 이름을 날렸던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8)가 있다. 위진魏晉 명사名士들의 일화를 기록한 세설신어世說新語(남조 송의 유의경劉義慶:403∼444 찬술)에는 “고좌도인高座道人은 한어漢語를 하지 못한다.”라고 나온다.
4. 파라마르타(진제)의 중국어능력
유가행파의 난해한 논서를 번역하여 이름이 높은 진제(499-569)에게는 역업을 보좌하는 중국인 제자인 혜개慧愷(지개智愷라고도 부름)가 있었다. 혜개의 아비달마구사론서阿毘達磨俱舍釋論序에는 “법사께서는 여러 지방으로 다니신지 오래 되었으므로 한자의 발음과 의미를 상세히 이해하고 있어 무릇 무엇을 번역하더라도 통역이 필요하지 않습니다.”9)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의 말일 뿐이고 실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진제의 역경활동이 50에서 70세경 사이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만년의 진제가 통역 없이도 회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난해한 유식교리학의 용어를 통역 없이 그것도 구어가 아닌 정규 문어체로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얘기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진제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의 브로큰broken 중국어로 말을 하면 그 제자들이 그것을 듣고 정규 문장어로 곧바로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10)
5. 회화를 할 수 있는 것과 한역을 할 수 있는 것의 차이
회화능력과 한역작성능력은 구별된다. 불전 한역은 선행하는 번역서가 있을 경우 가능한대로 참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행 번역서의 조사, 장단점의 검토는 한인 승려에게 주어졌다.
수의 비니다유지, 나연제야사, 당의 파라파가라밀다라, 보리유지, 반라밀제, 반야의 역장에서는 역주와 별도로 ‘전역傳譯’, ‘도어度語’, ‘역어譯語’로 명기된 ‘역번문譯梵文’ 담당자가 있었다. 이로부터 역주는 총책임자이고 실질적인 번역자는 이들인 것으로 추측된다.
6. 『반야등론般若燈論』 한역에서의 필수筆受의 교체
《辯正論》卷4:「論凡二十七品。為十五卷。논論은 모두 27품으로 열다섯 권으로 되어 있다. 若內人立義皆標人名。無名者例稱自部。若外人立義亦標人名。無名者例稱外人。縛解品已前, 慧賾執筆, 觀業品已後, 法琳執筆。於是, 起四年夏, 訖六年冬。박해품縛解品까지는 혜색11)이 집필執筆(=필수筆受)하였고 관업품觀業品 이후는 법림12)이 집필하였다. (정관貞觀) 4년(630) 여름에 시작하여 6년(632) 겨울에 마쳤다.」(CBETA, T52, no. 2110, p. 513, c17-21)
박해품縛解品까지인 전반 9권과 관업품觀業品 이후 후반 6권을 비교해보면 문장 표현상의 체재體裁에 차이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 여게왈如偈曰, 논자게왈論者偈曰처럼 왈曰을 쓰고 있는데 후자의 경우 왈曰을 쓰지 않고 언言이나 설說을 쓰고 있다. 이것은 한역표현을 선택하는 일은 필수가 맡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7. 스스로 번역할 수 있었던 외국인
본장에서 지금까지 다뤘던 사례는 외국인의 중국어능력에 대하여 부정적인 측면을 주로 하였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외국인이면서 통역에 의지하지 않고 역경譯經에 종사했던 사례도 실제로 존재하였다.
사나굴다: 북주의 무제武帝년간(559-560)에 장안에 와 개황開皇 5년(585) 이후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번경飜經에 종사하였는데 속고승전에는 “전도傳度를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不勞傳度”13)라고 나온다. 인도 승려인 그가 중국어에 능통한 것은 뛰어난 어학적 소질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류기간과도 무관하지 않다.
법지法智: 사나굴다와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법지에 관해 속고승전14)에는 “法智妙善方言. 지방언어15)를 빼어나게 잘했다. 執本自傳。범본을 들고 스스로 전傳하였다. 不勞度語。도어度語를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譯業報差別經等。업보차별경 등을 번역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법지의 아버지는 북위와 동위 시대에 역경을 행했던 반야유지이다. 법지는 원래 중천축국인이지만 중국에 머문 기간이 길어지고 중화 풍습에 동화되었다고 속고승전에 나온다.
담피曇皮: 반야유지의 차자이고 법지의 아우16)인 담피는 毘尼多流支와 那連提耶舍의 역장에서 각각 전역傳譯17)과 도어度語18)로 참여하였다.
비슷한 사례로 오吳의 지겸支謙과 서진西晉의 축숙란竺叔蘭이 있다. 서진시대에 많은 대승경전을 역출했던 돈황의 축법호가 중국어를 잘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후한시대 월지국 출신의 지루가참 역시 중국어에 능통하였고 안세고 또한 “곧 중국어를 두루두루 학습하였다. 即通習華言19)”라고 한다.
8. 범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한인들
구마라집 동시대에 장안에서 활약하였던 양주 출신의 축불염竺佛念이나 남조 송에서 여러 가지 역경에 종사하였던 보운寶雲이 순수한 한인漢人인지 서역의 피가 섞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의 현장과 의정義淨, 북송의 유정惟淨은 한인이었다. 이중 의정의 역장에서의 역할은 신역新譯, 철문綴文, 정자正字로 기록되어 있어 역주가 일인삼역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9. 구마라집의 역경관(譯經觀)
《高僧傳》卷2:「天竺國俗, 甚重文製。其宮商體韻, 以入絃為善。凡覲國王, 必有贊德。見佛之儀。以歌歎為貴。經中偈頌皆其式也。但改梵為秦失其藻蔚。雖得大意殊隔文體。有似嚼飯與人。非徒失味。乃令嘔噦(얼)也。」(CBETA, T50, no. 2059, p. 332, b25-29)
천축국의 국민성은 몹시도 문학작품을 중시한다. 그 성조의 리듬은 오선악보에 놓아도 훌륭할 것이다. 무릇 국왕을 알현하려면 반드시 덕을 찬미하고 부처님을 뵙는 의례에 있어서도 시가詩歌로 찬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경전 가운데의 게송은 모두 그런 형식의 것이다. 다만 범문을 중국어로 바꾸게 되면 그 아름다운 문조(文藻)[조위藻蔚: 文辭美煥]를 잃게 되는데 대의(大意)는 잡아내겠지만 완전히 문체文體에 어긋남이 생겨나게 된다. 마치 밥을 씹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되면 맛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토를 재촉하는 것과 같다.20)
문맥상 이것은 번역에 관한 일반적 진술은 아니고 운문 번역을 주로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인다.
구마라집은 고승전에 따르면 한시를 짓는 능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구마라집의 비관적 번역관은 범어 운문의 뉘앙스nuance가 한어로는 전혀 전해지지 않는 것을 깊이 자각한 것에서 온 것이다. 구마라집은 범어와 한문 간의 번역불가능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운문에 관해 말한 것이지만 산문도 포함한 역경관譯經觀으로 일반화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10. 간결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한역을 지향했던 구마라집
구마라집이 번역한 주된 문헌의 하나인 『대지도론』은 반야경의 주석서인데 이 논서는 백 권이나 되지만 실은 원전의 전역全譯이 아니고 초역抄譯이다. 이것은 중국에서의 경전 편집작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6장 참조)
구마라집의 제자 승예僧叡는 대지석론서大智釋論序에서 대지도론의 한역에서 원문을 생략했던 이유을 “(구마라집) 법사는 중국인이 간결성을 좋아하는 까닭에 (서품 이외는) 생략하여 간략히 하였다.”21)라고 적고 있다.
구마라집은 번역에 있어 이해하기 쉬운 문장을 목표로 했기에 때로는 축어역과는 멀어져 일부 생략하거나 말을 보충하여 이해하기 쉽게 하는 조작을 행하였다. 금강반야경의 각종 한역(구마라집, 담마유지, 진제, 현장, 의정 역)을 범어원전과 상세히 비교 검토한 스탠포드 대학 종교학과 교수 폴 해리슨(Paul Harrison)은 “마치 현대의 연구자들이 번역할 때에 괄호를 사용하여 그 속에 말을 보충하여 자신의 해석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을 구마라집은 행하였는데 다만 그는 그것을 본문 중에서 괄호를 사용하지 않고 행하였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역에 있어 의역파와 직역파로 나눈다면 구마라집은 의역파에 해당된다. 바로 이러한 점이 구마라집이 번역한 법화경, 유마경, 금강반야경이 중국불교사를 통하여 후대까지 영원히 계속 읽혀지는 이유이다.
11. 음역을 좋아한 구마라집
구마라집이 의역파意譯派이니 일반적인 중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원어의 음역을 한다거나 우직하게 직역한다거나 하는 경향이 적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재미있게도 그의 번역에는 뜻에 닿게 하려고 의역을 하는 측면과 함께 음역하거나 원문의 어순을 반영하여 번역하는 측면도 있다.
예를 들자면 법화경의 경우 서진의 축법호 역 『정법화경正法華經』 총지품은 다라니를 의역하였지만 구마라집 역 『묘법연화경』 다라니품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음역하여 고치고 있다.
보리수는 깨침의 나무을 의미하는 범어 bodhi-vṛkṣa 또는 bodhi-druma에 대응되는 역어인데 구마라집 무렵에 처음으로 확립되었다.
300년대 말까지 이 말의 한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불수佛樹: 오의 지겸 역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 『유마힐경』, 『문수사리문보살서경文殊師利問菩薩署經』, 서진의 축법호 역 『보요경普曜經』. 예외적으로 쓰였지만 구마라집 역 『대지도론大智度論』
도수道樹: 오의 지겸 역 『태자서응본기경』, 『유마힐경』, 서진의 축법호 역 『보요경』
각수覺樹: 동진의 승가제바 역 『중아함경』
구마라집 역의 여러 경전에서는 원어 보디bodhi에 충실한 음역에 기초해 보리수菩提樹를 정역定譯으로 하는 것이 통례通例이다.
구마라집과 동시대 사람인 축불염(竺佛念)의 경우 역어가 일정하지 않은데 다음과 같다.
도수道樹: 『보살영락경』, 『비나야毘奈耶』
도수道樹와 불수佛樹: 『보살종도술천강신모태설광보경菩薩從兜術天降神母胎說廣普經』, 『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
구마라집 이후의 경우
보리수菩提樹: 불타야사(佛陀耶舍)·축불념(竺佛念) 공역의 『사분율四分律』
보리수는 구마라집이 창안한 것으로 이 음역은 구마라집 이전에는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전 모두冒頭의 정형구定型句인 “이렇게 나에 의하여 들리어졌다. evaṃ mayā śrutam22)= 여시아문如是我聞” 또한 과거에 쓰이던 “문여시聞如是”를 구마라집이 바꿔 번역했을 가능성이 높다. 동시대의 축불염일 가능성도 일응 잔존한다. 『대지도론』을 번역할 때 evaṃ「如是」mayā「我」śrutam「聞」으로 축자逐字번역할 필요성을 느껴 그렇게 바꾸었을 가능성이 높다.
12. 수나라 언종의 팔비(八備)설
번역을 남이 씹고 남겨둔 음식물 같은 것으로 보는 구마라집의 생각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이 한역한 것을 읽는 것 보다는 범어를 익혀 원전을 읽는 편이 좋을 것인데 이렇게 주장한 중국인으로는 수隋나라 때 역장에 빈번히 참여했던 언종(彦琮, 557~610)이 있다. 그는 범어원전을 직접 배울 것을 주장하였고 그럴 수 없어 번역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번역자는 팔비(八備)라 불리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팔비23)는 다음과 같다.
所備者八。갖춰져야 할 것이 여덟 가지이다.
⑴ 誠心愛法, 志願益人, 不憚久時, 其備一也。
정성스런 마음으로 불법을 사랑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뜻하고 서원하였으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꺼리지 않으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첫 번째이다.
⑵ 將踐覺場, 先牢戒足, 不染譏惡。其備二也。
장차 부처님 도량覺場에서 실천하여 먼저 계족戒足24)을 굳건히 하고 남을 비꼬는 악행譏惡에 물들지 않아야 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두 번째이다.
⑶ 筌曉三藏, 義貫兩乘, 不苦闇滯。其備三也。
통발로 고기를 잡듯이25)삼장에 밝아지고 뜻으로는 소승과 대승을 꿰뚫게 되어 어리석음에 걸려 고생하지 않게 되어야 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세 번째이다.
⑷ 旁涉墳史, 工綴典詞, 不過魯拙。其備四也。
두루[旁] 분사墳史26)(전적과 사서)를 섭렵하여 고전문장[典詞]을 공교롭게 엮을 수 있어, 지나치게[過] 노졸(魯拙: 老鈍하고 拙劣함. 質樸粗疏)해서는 아니 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네 번째이다.
⑸ 襟抱平恕, 器量虛融, 不好專執。其備五也。
마음의 포부[襟抱]는 공평함과 용서함[平恕]으로, 기량(器量:사람의 재능과 도량)은 허융(虛融: 冲虚融和)으로, 한쪽으로만 집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야 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다섯 번째이다.
⑹ 沈於道術, 澹於名利, 不欲高衒。其備六也。
도술(道術)에 침잠하고 명성과 이익에 담박하여 높이 자랑하려 하지 말아야 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여섯 번째이다.
⑺ 要識梵言, 乃閑正譯, 不墜彼學。其備七也。
반드시 범어를 알아 정역正譯에 익숙해지더라도[閑27)] 범학(梵學)에 떨어져서는 아니 되니 이것이 갖춰야 할 일곱 번째이다.
⑻ 薄閱蒼雅。粗諳篆隷。不昧此文。其備八也。
창아(蒼雅: 『삼창(三蒼)』28)ㆍ『이아(爾雅)』29)등의 자서(字書)를 말함)를 널리 열람하고, 전서와 예서를 대략 외워 이러한 글들에 어두워지지 않아야 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여덟 번째이다.
13. 현장의 구역(舊譯) 비판
현장스님이 당태종과 대화하면서 구마라집이나 보리유지의 『금강반야바라밀경』 번역에 관해 비판하고 있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卷7:「帝又問:「《金剛般若經》一切諸佛之所從生,聞而不謗,功逾身命之施,非恒沙珍寶所及。加以理微言約,故賢達君子多愛受持,未知先代所翻,文義具不?」
法師對曰:현장법사가 대답하였다.
「此經功德, 實如聖旨。이 경의 공덕은 실로 폐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西方之人, 咸同愛敬。서역 사람들 모두 똑같이 (이 경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있습니다. 今觀舊經,亦微有遺漏。이제 이 경전의 옛 번역[舊經]을 보면, 또한 적으나마 유루(遺漏)가 있습니다. 據梵本具云『能斷金剛般若』,舊經直云『金剛般若』。범본에 따르면 『능단금강반야』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 경전의 옛 번역은 곧바로 『금강반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欲明菩薩以分別為煩惱,而分別之惑,堅類金剛,唯此經所詮無分別慧,乃能除斷,故曰『能斷金剛般若』,故知舊經失上二字。보살은 분별을 번뇌로 삼으며 분별의 미혹은 견고한 종류의 금강인지라 오로지 이 경에서 말한바 분별이 없는 슬기[慧]만이 이에 능히 잘라 없앨 수 있고 그래서 『능단금강반야경』이라 말하고 있고 그래서 이 경전의 옛 번역은 위의 두 글자를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又如下文,三問闕一,二頌闕一,九喻闕三,如是等。什法師所翻舍衛國也,留支所翻婆伽婆者,少可。또한 아래 문장에서와 같이, 세 가지 질문에 하나가 빠져있고, 두 게송에서 하나가 빠져있으며, 아홉 가지 비유에서 세 가지가 빠져있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구마라집 법사가 번역한 사위국舍衛國이나 보리유지가 번역한 바가바婆伽婆는 그저 그런 정도입니다. 」
帝曰:「師既有梵本,可更委翻,使眾生聞之具足。然經本貴理,不必須飾文而乖義也。」故今新翻《能斷金剛般若》,委依梵本。奏之, 帝甚悅。」(CBETA, T50, no. 2053, p. 259, a13-28)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는 현장 스님처럼 “금강을 분쇄하는 반야바라밀”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금강으로 무엇이든 분쇄하는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위 경전의 범본은 현재 여러 가지인 것이 확인되고 있고 대본大本과 약본略本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현장이 본 것은 전자인데, 구마라집이 본 것은 후자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일부 문장이 빠진 것은 역자 문제가 아니라 원본의 상위 문제인 것이다.
-사위국舍衛國보다 실라벌室羅筏, 바가바婆伽婆보다 박가범薄伽梵을 현장스님이 선호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방산석경房山石經이나 당 현종의 주석의 대상이 된 것은 구마라집의 『금강반야경』이고 明·淸까지도 그러하여 현장 역은 중국인의 금강경 이해에 있어서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14. 현장의 오종불번설
현장에게는 오종불번이라는 번역이론이 있었다고 전승되고 있는데 오종불번이란 의역해서는 안될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는 설이다. 다시 말하면 의역하지 말고 음역에 그쳐야 할 다섯 장르genre를 열거한 것이다. 오종불번에 관해서는 보통 남송의 법운 <<번역명의집>>(1143)에 보이는 한 구절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꽤나 후대의 저작이므로 보다 초기의 기록인 경소(景霄, -927-)30)의 <<사분율행사초간정기>>권2에 나오는 현장(玄奘, 602-664)설을 소개한다.
<<사분율행사초간정기>>는 도선(道宣, 596-667)율사의 <<사분율행사초>>에 대한 주석서로 809-903 무렵 사이에 찬술되었다. 찬자인 경소는 후당(923-936)시기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현장 스님과 200년 이상의 차이가 있으나 의정, 불공, 반야의 설이라고 볼 이유도 없으니, 현장 스님의 영향을 받아 당나라 학승들이 정리한 현장설로 보아 큰 문제가 없다.
《四分律行事鈔簡正記》卷2:「問: 毗尼翻律。為正翻義翻耶。答: 乃是義翻非正譯。故
諸家相承。引唐三藏譯經。有翻者有不翻者。
여러 파의 전승에서는 당나라 삼장의 역경에서는 번역할 것과 번역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음을 인용하고 있다.
且不翻有五。또한 번역하지 말아야 할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
一, 生善故不翻。1. 선업을 낳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佛陀云覺。菩提薩埵此云道有情等。불타는 각이란 뜻의 불타나 도, 유정을 뜻하는 보리살타 같은 말들을 今皆存梵名。지금은 모두 범어이름으로 존치하고 있는데 意在生善故。그 뜻은 선업을 낳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二, 秘密不翻。2. 비밀스러운 것이기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陀羅尼等。다라니 같은 것들이다.總持之教。총지(다라니, 주문)의 가르침은 若依梵語諷念加持。即有感微。범어에 의지하여 가호가 있기를 암송해야 곧 미묘함을 감득할 수 있지 若翻此土之言。全無靈驗故。중국말로 번역할 것 같으면 전혀 영험이 없기 때문이다.
三, 含多義故不翻。3. 여러 뜻을 함축하기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薄伽梵。一名具含六義。一, 自在(不永繫屬二種生死故)。二, 熾盛(智火猛熖燒煩惱薪)。三, 端嚴(相好具足所莊嚴故)。四, 名稱(有大名聞遍十方故)。五, 吉祥(一切時中常吉利故。如二龍主水七步生蓮也)。六, 尊貴(出世間所尊重故)。박가범bhagavān과 같은 말은 하나의 이름에 여섯 뜻이 구체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자재, 치성熾盛, 단엄, 명칭, 길상, 존귀. 今若翻一。便失餘五。故存梵名。이제 하나의 뜻으로 번역하게 되면 나머지 다섯 가지 뜻을 문득 잃게 되니 범어 이름을 존치해두는 것이다.
四, 順古不翻。(번역할 수 있지만) 옛날 하던 대로 따르기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阿耨菩提。從漢至唐。例皆不譯。아뇩보리같은 말은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전례에 따라 모두 번역하지 않는다.
五, 無故不翻。(중국 땅에는 그러한 사물들이) 없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閻浮樹影透月中, 生子八斛瓮大。此間既無。不可翻也。염부수jambu31) 그림자는 달에까지 비치고 8곡斛(800升)들이 항아리 크기의 열매를 낳는데 이 땅에는 없기에 번역할 수가 없는 것이다.
除茲[巳>已]外, 並皆翻譯。就翻譯中。復有二種。一正翻。二義翻。若東西兩土。俱有促呼喚不同。即將此言用翻彼語[1]梵。如梵語莽茶利迦。此云白蓮華。又如梵語斫摳。此翻為眼等。皆號正翻也。若有一物西土即有。此土全無。然有一類之物。微似彼物。即將此者用譯彼言。如梵云尼拘律陀樹。此樹西土其形絕大。能蔭五百乘車。其子如油麻。四分之一。此間雖無其樹。然柳樹稍[2]積似。故以翻之。又如三衣翻臥具等並是(云云)。今此毗尼翻彼律。蓋是義翻。」(CBETA, X43, no. 737, p. 24, a19-b15 // Z 1:68, p. 77, a1-b3 // R68, p. 153, a1-b3) [1]梵字疑剩。[2]積字疑剩。
1. 生善不翻
2. 秘密不翻
ex) 혜원(慧遠, 523-592) <<대반열반경의기>>
隋 淨影寺 沙門 釋慧遠 述 《大般涅槃經義記》卷1〈壽命品〉:「第三呪詞。何故不翻。翻改失用,多不神驗。所以不翻」(CBETA, T37, no. 1764, p. 626, c25-26)
胡 吉藏(549-623) 撰 《法華義疏》卷12〈陀羅尼品 26〉:「問:諸經中何故不翻呪耶?
答:呪語多含此間無物以擬之;若欲翻之,於義不盡,又失其勢用。如此間禁呪之法,要須依呪語法而誦之則有神驗,不得作正語而說。」(CBETA, T34, no. 1721, p. 629, c8-12)
3. 多義不翻
박가범薄伽梵은 세존世尊으로 대개 번역되고 있고 현장 또한 실제로는 세존이라고 번역하였으나 술어의 다의성 맥락에서 음역하라는 현장의 의도에서 볼 때는 모순된다고 할 수 없다.
박가범의 여러 뜻에 관해서는 현장 역 <<불지경론佛地經論>>에 자세하다.
龍樹菩薩 造, 後秦 龜茲國 三藏法師 鳩摩羅什 奉 詔譯 《大智度論》卷2〈序品 1〉:「「阿羅」名「賊ari」,「呵han」名「殺」,是名「殺賊」。如偈說:
「佛以忍為鎧, 精進為剛甲,
持戒為大馬, 禪定為良弓,
智慧為好箭; 外破魔王軍,
內滅煩惱賊, 是名阿羅呵。」
復次,「阿a」名「不」,「羅呵√ruh」名「生」,是名「不生」。佛心種子,後世田中不生,無明糠脫故。
復次,「阿羅呵√arh」名「應受供養」。佛諸結使除盡,得一切智慧故,應受一切天地眾生供養,以是故,佛名阿羅呵。」(CBETA, T25, no. 1509, p. 71, b20-c1)
중국인인 梁나라 법운은 羅漢에 불생, 살적, 응공의 뜻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 宋나라 승량은 열반이라는 말이 다의적이라 하나로 의역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4. 順古不翻: 아뇩보리는 번역용례가 드물고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생략으로 보인다. 현장은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음역이나 무상정득각 또는 무상정등보리같은 의역을 사용했고 현장 이전의 번역에도 음역과 의역이 함께 쓰였다. 이런 점에서 실태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5. 無故不翻: jambu에 대한 현장의 음역은 염부閻浮가 아니라 섬부贍部.
제3항(多義不翻)과 제5항(無故不翻)은 번역불가능성의 사태를, 나머지(生善不翻, 秘密不翻, 順古不翻)는 번역가능성의 사태이지만 번역하지 않는 게 좋다는 쪽이다.
15. 구마라집설과 현장설
구역을 대표하는 구마라집은 번역불가능성을 의식하여 문장의 뜻이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도록 읽기 쉬운 번역을 추구하였고 특정 문맥에 따라서는 음역을 하는 것도 중시하였다.
신역을 대표하는 현장은 구마라집을 비롯하여 구역에는 부정확한 점이 많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보다 정확한 축어역逐語譯을 추구하였고 당나라 시기의 발음에 대응시키고자 하는 생각으로 새로운 음역어를 다수 만들어내었다. 현장 계열의 설로 보이는 오종불번설에는 그 다섯 가지 항목 이외에는 정확히 의역하여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구역의 지겸과 구마라집은 ‘유마힐’32)이라고 하였는데 현장은 ‘무구칭無垢稱’이라고, 구역의 ‘수보리須菩提’33)라고 음역하였지만 현장은 ‘선현善現’이라고 의역하였다. 다만 현장은 Śāriputra를 ‘사리자舍利子’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는 오종불번의 제4항인 “옛날 하던 대로 따르기에 번역하지 않는다.順古不翻”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16. 문체의 문文과 질質을 오가는 전통과 논쟁
시대를 거슬러 구마라집 이전 사람들의 번역관을 살펴보면 문文과 질質이 키워드keyword이다.
문文은 문아文雅 곧 우아優雅한 품격이 있어, 사대부士大夫들이 읽기 쉬운 문체文體를 의미한다. 원문에 불필요한 반복이 있으면 문장의 뜻을 간결하게 이해하려고 삭제하는 입장이다.
질質은 질실質實 · 질박質朴 곧 허식虛飾을 폐廢하고 실직實直하게 축어적, 직역적인 문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중국어에서 꽤나 읽기 어려운 문체로 원문에 번잡한 반복이 있어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입장이다.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논어·옹야(雍也)』편
오의 지겸이 유기난과 나눴던 논의
전진의 석도안이 혜상慧常과 나눴던 논쟁
전진의 석도안이 조정趙政과 나눴던 논쟁
오의 지겸, 서진의 축숙란, 전진~후진의 축불염은 문文을 중시하였고
후한의 지루가참, 서진의 축법호는 질質을 중시하였다고 한다.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문’파文派는 자유역파自由譯派에, ‘질’파質派는 직역파直譯派에 해당된다. ‘문’파文派는 간簡(간략簡略)을, ‘질’파質派는 번繁(번다繁多) 곧 번잡하면 번잡한대로 원문을 그대로 두고 번역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다.
가칭 음역중시파音譯重視派와 의역중시파意譯重視派라는 말을 쓴다면 질’파質派인 지루가참은 음역중시파에, ‘문’파文派인 지겸은 의역중시파에 해당된다. 그러나 ‘질’파質派에 속하는 축법호는 『정법화경正法華經』을 보면 인명人名과 같은 고유명사까지도 의역하고 있고 음역은 극단적으로 적다. ‘질’파質派=음역중시파는 아니다.
17. 도안(道安, 312-385)의 오실본삼불역설五失本三不易說
문질文質논쟁에서 다루는 내용은 영원한 테마.
동진(東晉)시대에는 양양(襄陽)에서, 전진(前秦)시대에는 장안에서 활약했던 석도안은 여러 면에서 불교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문질文質에 관해 일정한 결론을 내림. 승려는 세속의 인연을 끊고 석가의 자식이 된 이상 석을 성씨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 산일된 문헌인 종리중경목록이라는 경록을 지은 것으로도 유명. 석도안이 불전번역론과 관련하여 남긴 이론이 오실본삼불역34)이라 불리는 것.
(1) 오실본
인도원전을 중국어로 번역하게 되면 잃게 되는 것을 다섯 조항으로 열거한 것이 오실본이다.
『출삼장기집』에 도안이 지은 「마하발라야바라밀경초서摩訶鉢羅若波羅蜜經抄序」가 실려 있다.
譯胡為秦。有五失本也。
범어를 번역하여 중국어로 하면 본래의 것(本=經)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그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一者, 胡語盡倒而使從秦。一失本也。
첫째, 범어는 모두 도치되어 있는데 중국말(의 어순)에 따르도록 (변경을 가)하는 것이니 첫 번째 실본이다.
二者, 胡經尚質。秦人好文。傳可眾心, 非文不合。斯二失本也。
둘째, 범어경전은 (문질 두 가지 중) 질(質: 質朴)을 숭상하고, 중국인은 문(文: 文雅)을 숭상한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들도록 전하고자 한다면 문(文)이 아니면 (그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지 않게 되니 이것이 두 번째 실본이다.
三者, 胡經委悉, 至於嘆詠。丁寧反覆。或三或四。不嫌其煩。而今裁斥。三失本也。
셋째, 범어경전은 위실(委悉)35)하여 (부처님이나 보살에 대한) 영탄(詠嘆=嘆詠)에 이르러, 정녕코 반복하여, 혹은 세 번 혹은 네 번이나 하면서 그 번다함을 싫어하지 않는데 지금 (중국에서는) 잘라내고 배척해버리니 (이것이) 세 번째 실본이다.
四者, 胡有義[16]記, 正似亂辭。尋說向語, 文無以異。或千五百刈而不存。四失本也。
넷째, 범어에는 의기(義記-義說【宋】【元】【明】)가 있어 참으로 난사(亂辭)36)와 비슷하다. 설명을 찾고 언어로 나아가나 글이 그것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어 (중국어로 옮기면서) 때로는 천오백이나 (되는 분량이) 삭제되어 존재하지 않게 되니 (이것이) 네 번째 실본이다.
五者, 事已全成。將更傍及。反騰前辭, 已乃後說, 而悉除此。五失本也。
다섯째, (범어 원전에서는) 일이 이미 모두 이루어진 뒤 장차 다시 (그 일을) 방급(傍及)37)하려고 할 적에는 앞의 말에 거꾸로 올라가 (반복한 뒤에야) 뒤의 말에 이르지만 (중국어로 옮길 적에는) 모두 이런 것을 삭제하니 (이것이) 다섯 번째 실본이다.」
제1은 어순이 서로 다르다는 것인데 한역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변경이다.
제2는 위진魏晉 무렵 성행했던 문체에 관한 논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3, 4, 5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2 이하는 원문생략의 문제와 관련된다.
제3의 예: 『장아함경』 권2 「유행경遊行經」과 Mahā-parinibbāna-suttanta.
佛告阿難:「汝聞跋祇國人數相集會,講議正事不?」
答曰:「聞之。」 《長阿含經》卷2 (CBETA, T01, no. 1, p. 11, a24-26)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하였다. 너는 발지국 사람들이 자주 서로 모여 나랏일을 토의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느냐. (아난이) 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Kin ti te Ānanda suttaṃ, Vajjī abhiṇhaṃ sannipātā sannipāta-bahulā ti?’
‘Sutaṃ me taṃ bhante Vajjī abhiṇhaṃ sannipātā sannipāta-bahulā ti.’
(Mahā-parinibbāna-suttanta, Dīgha Nikāya II, PTS, p. 73
유행경에서는 단순히 ‘들었습니다 聞之’로 처리하고 반복되는 것을 생략하였는데 한역에서는 흔하다고 한다.
제4는 본문 중에 포함된 주해류注解類를 말하는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히 이해되지 않는다.
(2) 삼불역
출삼장기집에 실려 전해지는 석도안 스님의 마하발라야바라밀경초서摩訶鉢羅若波羅蜜經抄序에는 오실본에 이어 삼불역三不易(석도안스님 연구자로 이름이 높은 횡초혜일橫超慧日38)이 1958년에 최초로 주장) 또는 삼불이三不易(전통적인 이해와 중국인 학자의 이해)를 언급하고 있다. 한문 원문은 아래와 같다.
然般若經39)。三達之心覆面所演。聖必因時, 時俗有易。而刪雅古以適今時。一不易也。
반야경은 삼달(三達)40)의 심心이 복면소연(覆面所演)한 것이다.41)성인은 반드시 시절[時]을 원인으로 한다. 시절의 풍속[時俗]은 변화함이 있는데 고아古雅[雅古: 端雅古朴]한 것을 깎아내고 지금의 시절에 맞추니 첫 번째 불역이다.
愚智天隔, 聖人叵階。乃欲以千歲之上微言。傳使合百王之下末俗。二不易也。
어리석은 범부와 지혜로운 이는 천지차이가 있어 성인(의 지위에) 오르기는 어렵다. 이에 천세의 위쪽에 있는[千歲之上] 미묘한 말씀을 전傳하여 백왕의 아래쪽[百王之下] 말세의 풍속[末俗]과 합치시키고자 하는 것이니 두 번째 불역이다.
阿難出經, 去佛未久。尊大迦葉令五百六通迭察迭書。今離千年而以近意量[21]截。彼阿羅漢乃兢兢若此。此生死人而平平若此。豈將不知法者勇乎。斯三不易也。
아난이 경經을 낼 적에는 부처님이 입적하신지 오래되지 않은 때였고 존자 대가섭이 육통의 오백 아라한이 번갈아 살피고 번갈아 쓰게 하였다. 이제 천년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비근卑近한 생각[近意]으로 헤아려 절단하니 저 아라한들이 이렇듯 조마조마함이 이러하고 이 생사를 윤회하는 인간들이 예사롭기가 이러하다. 장차 법을 모르는 자들의 용맹함은 어찌할 것인가? 이것이 세 번째 불역이다.
涉茲五失經三不易。譯胡為秦。詎可不慎乎。
이 오실경42)삼불역을 두루 살펴 범어를 중국어로 옮겨야 할 것이니 어찌 가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不易이 용이하지 않다는 뜻인지 바꿔서는 안 된다는 뜻인지 지금 여기에서 결론을 내리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三不易의 포인트point는 인도 원전을 가능한 한 충실히 지켜서 재현해야 된다는 점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1) 『佛典はどう漢譯されたのか: ス-トラが經典になるとき』/ 船山徹 著. 東京: 岩波書店, 2015(c2013), 87-119쪽.
2) 진(晉)나라 때 승려. 양주(凉州) 사람이다. 젊어서 스님이 되어 융안(隆安) 초에 법현(法顯), 지엄(智儼)과 거의 한 무렵에 서역(西域)을 향해 떠났다. 유사(流沙)를 건너고 설령(雪嶺)을 넘어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북인도에 가서 영적(靈蹟)을 찾고 범서(梵書)를 연구했다. 음자고훈(音字古訓)을 배웠다. 나중에 장안(長安)에 돌아와 불타발타라에게서 공부하고, 도장사(道藏寺)에서 『불소행찬경』 번역에 종사했다. 원가(元嘉) 26년 육합사(六合寺)에서 입적했다. 세수(世壽) 74세였고, 저서에 『서역유기(西域遊記)』 1권이 있다.
3) 求那跋陁羅,此云功德賢,中天竺人,以大乘學,故世號摩訶衍,本婆羅門種。『고승전』 3권(ABC, K1074 v32, p.794b21-b22)
4) 於是京師遠近冠蓋相望,大將軍彭城王義康、丞相南譙王義宣,竝師事焉。頃之,衆僧共請出經於祇洹寺,集義學諸僧,譯出『雜阿含經』,東安寺出『法鼓經』,後於丹陽郡,譯出『勝鬘』、『楞伽經』,徒衆七百餘人。寶雲傳譯,慧觀執筆,往復諮析,妙得本旨。『고승전』 3권(Ap.795a0BC, K1074 v32, 1-a07)
5) 後譙王鎭荊州,請與俱行,安止辛寺,更創房殿。卽於辛寺,出『無憂王』、『過去現在因果』,及一卷『無量壽』、一卷『泥洹』、『央掘魔羅』、『相續解脫波羅蜜了義』、『現在佛名經』三卷、『第一義五相略』、『八吉祥』等諸經,幷前所出凡百餘卷,常令弟子法勇傳譯度語。
6) 譙王欲請講『花嚴』等經,而跋陁自忖(촌),未善宋言,有懷愧歎,卽旦夕禮懺請觀世音乞求冥應。遂夢有人白服持劍,擎(경)一人首來,至其前曰:“何故憂耶?”跋陁具以事對,答曰:“無所多憂。”卽以劍易首,更安新頭。語令迴轉曰:“得無痛耶?”答曰:“不痛。”豁然便覺,心神悅懌(역)。旦起,道義皆備領宋言,於是就講。『고승전』 3권(ABC, K1074 v32, p.7 95a01-a22)
7) だまされた女/すげかえられた首 (光文社 古典新訳 文庫) 2009/1/20 初版, トーマス マン Thomas Mann (原著), キシ ヨシハル 岸 美光(翻訳)
8) 진(晉)나라 때의 서역(西域) 승려. 범명(梵名)은 Śrīmitra다. 시리밀다라(尸梨密多羅)로도 불리며, 의역(意譯)은 길우(吉友)다. 원래 구자국(龜茲國)의 왕자였는데,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출가했다. 경론(經論)에 정통했고, 밀법(密法)에 해박했다. 영가(永嘉) 연간(307-312)에 중국에 왔는데, 마침 전란을 만나자 강을 건너 건강(建康)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사람들이 그를 “고좌高座”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천자(天資)가 높고 풍신(風神)이 당당하여 왕도(王導)의 흠모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명성이 날로 드러나 사람들이 다투어 사귀기를 원했다.
처음에 강동(江東)에는 주법(呪法)이 없었는데, 스님이 『공작왕경(孔雀王經)』을 번역해 여러 가지 신주(神呪)를 보여주었다. 또 제자 멱력(覓歷)에게 고성범패(高聲梵唄)의 법을 전수했다. 함강(咸康) 연간(335-342)에 입적했고, 세수(世壽) 80여 세였다. 석자강(石子岡) 동쪽에 장사지냈다. 성제(成帝)가 그의 풍격을 존경하여 무덤 옆에 사찰을 세웠는데, 후세에 사문(沙門)이 같은 곳에 절을 지으니 고좌사(高座寺)라 불렀다.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권2에 따르면 생전에 번역한 경전은 『대공작왕신주(大孔雀王神呪)』와 『공작왕잡신주(孔雀王雜神呪)』 각 1권이 있다고 한다.
9) 《阿毘達磨俱舍釋論》卷1:「法師遊方既久。精解此土音義。凡所翻譯。不須度語。」(CBETA, T29, no. 1559, p. 161, b11-12)
10) 후나야마 토오루는 진제삼장연구라는 책을 엮은 바 있고 그 책의 첫 편에 “진제 활동과 저작의 기본적 특징”이라는 논문을 실은 바도 있어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가 되러 궁금해진다. 한역에 있어 4대한역가 중에서도 첫째로 손꼽을 수 있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있는 까닭에 법현의 경우를 투사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11) 혜색[慧賾] 580-636 수당(隋唐) 시기의 승려. 형주(荊州) 강릉(江陵) 사람이고, 속성(俗姓)은 이(李)씨다. 9살 때 출가하여 처음에는 강릉사(江陵寺)에서 지냈다. 12살 때 대흥법석(大興法席)이 이루어졌을 때 법주(法主)가 되었다. 나중에 경사(京師) 청선사(淸禪寺)에서 지냈다. 경전에 해박했고 시문을 잘 지었으며, 서화(書畵)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감상에도 정통해서 사대부들과 많이 어울렸다. 저서에 『반야등론(般若燈論)』을 편찬했는데, 『중론(中論)』이라고도 부른다. 그 밖의 저서에 『영집(詠集)』이 있다.
12) 법림[法琳] 572-640 당나라 때의 승려. 영천(潁川, 河南 許昌)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진(陳)씨다. 『속고승전(續高僧傳)』 권25에 따르면 어릴 때 출가하여 유석백가(儒釋百家)의 학문을 연구했고, 특히 삼론(三論)에 정통했다. 일찍이 수나라 인수(仁壽) 원년(601)에 장안(長安)에 와서 도술(道術)을 익혔고, 의녕(義寧) 원년(617) 도복(道服)을 입고 도관(道館)에서 살았다. 평소 노장(老莊)에 통달하여 담론이 맑고 기발했기 때문에 도속(道俗)에서 모두 그를 좇았다. 당고조(唐高祖) 무덕(武德) 원년(618) 다시 석문(釋門)으로 돌아왔다. 4년(621) 경사(京師) 법제사(濟法寺)에 머물렀는데, 당시 태사(太史) 부혁(傅奕)이 12가지 조항으로 대책(對策)을 올려 불법(佛法)을 금지할 것을 주청하자 스님도 글을 올려 잘못됨을 지적하고 『파사론(破邪論)』 1권을 지어 변란(辯難)했다. 부혁이 이치에 밀려 한 마디 말도 못했고, 황제도 폐불(廢佛)에 대한 논의를 중지했다. 나중에 이중경(李仲卿) 등의 배불론(排佛論)에 대항하여 다시 『변정론(辯正論)』 8권을 지어 논의를 꺾어버렸다. 정관(貞觀) 연간에 칙명으로 용전사(龍田寺) 주지를 지내고, 아울러 역경(譯經)에 필수(筆受)로 참여했다. 13년(639) 겨울 도사(道士) 진세영(秦世英)의 참언 때문에 투옥되었다가 칙명으로 사면되어 익부(益部)의 사찰로 옮겨졌다. 가는 도중 백뢰관(百牢關) 보리사(菩提寺)에 이르렀을 때 병으로 입적했다. 세수(世壽) 69세다. 도속(道俗)이 모두 통곡하면서 동산(東山)에 묻었다. 저서에 시부(詩賦)와 찬송(讚頌), 비지(碑誌), 기전(記傳), 삼교계보(三敎系譜)와 대승교법(大乘敎法) 등 30여 권이 있다. 당시 사람 언종(彦琮)이 스님의 별전(別傳) 3권을 지었는데, 호법(護法)했던 사실이 잘 나와 있다.
13) 《續高僧傳》卷2:「僉以崛多, 言識異方, 字曉殊俗。故得宣辯自運。不勞傳度。理會義門, 句圓詞體。文意粗定, 銓本便成。筆受之徒不費其力。」(CBETA, T50, no. 2060, p. 434, a23-26)
14) 「時又有優婆塞。姓瞿曇氏。名達[13]磨般若。隋言法智。父名般若流支。備詳餘傳。智本中天國人。流滯東川, 遂[14]嚮華俗。而門世相傳祖習傳譯。高齊之季為昭玄都。齊國既平佛法同毀。智因僧職轉任俗官。[15]再授洋州洋川郡守。隋氏受禪。梵牒即來。有勅召還使掌翻譯。法智妙善方言。執本自傳。不勞度語。譯「業報差別經」等。」《續高僧傳》卷2 (CBETA, T50, no. 2060, p. 434, c13-21)[13]磨=摩【宋】【元】【明】【宮】*。[14]嚮=鄉【宋】【元】【明】【宮】。[15]再=冊【宋】【元】【明】【宮】。
15) 역대삼보기에는 방언 대신에 수나라 말과 범어라고 적고 있다. 「智既妙善隋梵二言。執本自翻無勞傳譯。」《歷代三寶紀》卷12 (CBETA, T49, no. 2034, p. 102, b24-25)
16) 「般若流支次子曇皮」《歷代三寶紀》卷12 (CBETA, T49, no. 2034, p. 102, c7)
17) 大乘方廣總持經一卷 번역할 때 「傳譯」《歷代三寶紀》卷12 (CBETA, T49, no. 2034, p. 102, c7)
18) 百佛名經一卷 번역할 때 「度語」《歷代三寶紀》卷12 (CBETA, T49, no. 2034, p. 103, a4)
19) 「以漢桓之初。始到中夏。才悟機敏一聞能達。至止未久。即通習華言。於是宣譯眾經改[10]胡為漢。」《高僧傳》卷1 (CBETA, T50, no. 2059, p. 323, b4-6)[10]胡=梵【元】【明】。한나라 환제(桓帝)12) 초기에 처음으로 중국에 이르렀다. 그는 재주와 깨달음이 빠르고 민첩하여 한 번 듣기만 해도 능숙하였다. 그래서 중국에 이른지 오래지않아 곧 중국말을 완전하게 익혔다. 『고승전』 1권(ABC, K1074 v32, p.765b01)
20) 이는 후나야마의 번역이다. 아래는 한글대장경 고승전 개정판 번역이다.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는 것이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고승전』 2권(ABC, K1074 v32, p.778c01)
21) 「法師以秦人好簡故裁而略之。」《出三藏記集》卷10 (CBETA, T55, no. 2145, p. 75, a28-29)
22) evaṃ mayā śrutam ekasmin samaye까지를 정형구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23) 大唐 西明寺 沙門 釋道宣 撰 《續高僧傳》卷2:「且儒學古文變猶紕繆。世人今語傳尚參差(치)。況凡聖殊倫東西隔域。難之又難論莫能盡。必慇懃於三覆。靡造次於一言。歲校則利有餘。日計則功不足。開大明而布範。燭長夜而成務。宣譯之業未可加也。經不容易理藉名賢。常思品藻終慚水鏡。兼而取之。所備者八。誠心愛法志願益人不憚久時其備一也。將踐覺場先牢戒足不染譏惡。其備二也。筌曉三藏義貫兩乘不苦闇滯。其備三也。旁涉墳史工綴典詞不過魯拙。其備四也。襟抱平恕器量虛融不好專執。其備五也。沈於道術澹於名利不欲高衒。其備六也。要識梵言乃閑正譯不墜彼學。其備七也。薄閱蒼雅。粗諳篆隷。不昧此文。其備八也。八者備矣。」(CBETA, T50, no. 2060, p. 439, a15-29)
24) <불교> ‘계’(戒)를 달리 이르는 말. 사람 몸의 발과 같이 계가 불자를 열반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다.
25) 筌曉라는 말은 여기에서만 용례가 보여 전筌의 뜻을 확정하기 어렵다. 전筌은 고기 잡는 통발, 제蹄는 토끼 등을 잡는 올무인데 흔히 전제(筌蹄)라는 말로 같이 쓰여 어떤 목적을 이루는 수단을 비유적으로 뜻하기도 한다. 온전할 전全과 관련시켜 ‘완전히’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다.
26) 삼분오전[三墳五典] 중국의 고서(古書) 이름. 三墳은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의 글이요, 五典은 소호(少昊)·전욱(顓頊)·고신(高辛)·당우(唐虞)의 글임. 이 밖에 팔괘(八卦)의 해설을 ‘팔삭(八索)’, 구주(九州)의 기록을 ‘구구(九邱)’라 하는데, 여러 설(說)이 있어 일정하지 않음.<좌전左傳 소공12년두주昭公十二年杜注>
• 풀이 : 『삼분(三墳)』과 『오전(五典)』. • 의미 : 중국의 고대 문화와 관련한 전적을 가리키는 전고다. • 출전 : 『좌전(左傳)』 소공(昭公) 12년조. • 내용 : 춘추시대 초나라 영왕(靈王)과 그의 대신 자혁(子革)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초나라 사관 의상(倚相)이 잰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갔다. 초왕이 “저 사람은 우수한 사관이니 잘 대해야 할 것이오. 그는 『삼분(三墳)』과 『오전(五典)』, 『팔색(八索)』과 『구구(九丘)』를 읽어 알고 있소”라고 말했다. • 영향 : 초나라 영왕이 언급한 책이 어떤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역사와 문화 및 문물제도와 관련된 서적일 것으로 추측한다. 이 전고는 간단하게 줄여서 ‘전분(典墳)’ 또는 ‘분전(墳典)’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분적(墳籍)’이나 ‘구분(丘墳)’ 등으로도 쓴다.
27) 嫺(한: 1. 우아하다(優雅--) 2. 단아하다(端雅--) 3. 조용하다 4. 익다, 익숙하다)의 뜻으로 보인다.
28) 삼창[三蒼•三倉] 중국 한(漢) 나라 때에 편찬되었던 사전이름. 창힐편(蒼頡篇)•원력편(爰歷篇)•박학편(博學篇)의 3편으로 이루어졌음. 후에 이 3편을 합하여 맨 앞의 편명을 따서 창힐편(蒼頡篇)이라 하고, 이를 삼창(세편으로 이루어진 창힐편이란 의미)이라 하였음. 삼창은 고려 시대 국학에서 생도들이 ≪국어(國語)≫•≪설문해자(說文解字)≫ •≪자림(字林)≫•≪이아(爾雅)≫ 등의 사전류와 함께 유교경전을 학습할 때 이용했던 중요 학습사전이었음.
29) 이아[爾雅]: 「이아」는 소학서의 한 종류로 중국의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훈고서이며, 세계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취급된다. 「이아」는 ‘석명(釋名)’, 또는 「이아」 속에 1편으로 분류되어 있는 ‘석언(釋言)’이라고도 한다. 3권 19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아」는 한(漢, 기원전 206년~220년)나라 이전에 만들어졌으며, 저자 또는 편자는 분명하지 않다. 「이아」는 주공(周公, ?~?)1) 또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의 제자였던 자하(子夏, 기원전 507년~기원전 420년?)가 지었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주나라(周, 기원전1046년~기원전 256년)에서 한나라까지의 여러 학자들이 여러 가지 경서들에 수록되어 있는 본문의 뜻을 새겨서 풀이한 주석을 채록한 책이라고도 한다. 「이아」는 13경의 하나로 중국의 가장 오래된 자전이며, 주석서3)이자 자해서4)이다. 「이아」는 5경 즉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春秋)」에 수록된 한자들의 음과 뜻과 풀이하였으므로 여러 경전들의 내용을 해석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아」는 훈고학에서 한자의 뜻을 풀이할 때에도 지침서로 사용되었다. ‘이아’는 각 지역의 방언을 소통시켜 공동어인 바른 말 즉 아언(雅言)에 이르게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런데 현재 「이아」는 전해지지 않으며, 서진(西晉, 265년~316년)의 학자 곽박(郭璞, 276년~324년)이 「이아」의 경문(經文)을 풀이하여 주석을 단 「이아주(爾雅注)」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남아 있다.
30) 경소 [景霄] : 오대(五代) 때의 승려. 대주(臺州) 단구(丹丘) 사람이고, 속성(俗姓)은 서(徐)씨다. 성격이 엄격하고 강인해서 남들과 잘 사귀지 않았다. 금화(金華) 백화산(白華山)에 머물면서 초학자들을 가르치며 지도했다. 저서에 『간정기(簡正記)』 20권이 있는데, 값어치가 날로 높아졌다. 오월(吳越)의 전류(錢鏐)가 불러 임안(臨安) 죽림사(竹林寺)에 머물게 했다. 천성(天成) 2년(927) 요청을 받아 북탑사(北塔寺)에서 법단(法壇)에 올랐고, 항주(杭州) 진신보탑사(眞身寶塔寺)에 머물다가 입적했다. 宋高僧傳 卷16
31) 【염부수閻浮樹】 閻浮, 梵語 jambu, 巴利語同. 又作譫浮樹․ 贍部樹․ 剡浮樹․ 染部樹․ 潛謨樹. 略稱閻浮.屬於落葉喬木. 學名 Eugenia jambolana. 原産於印度. 四·五月間開花, 結深紫色果實, 稍帶酸味, 種子可作藥用. 依大智度論卷三十五載, 印度爲閻浮樹茂盛之地, 故得閻浮提之名;又流於此樹林間之諸河多含沙金, 故稱爲閻浮檀金. 此外, 起世因本經․立世阿毘曇論卷一南剡浮提品等皆說有「閻浮大樹王」, 此樹枝幹高廣, 樹葉厚密, 能遮避風雨, 果實甘美無比;或係印度人想像中之理想樹. [起世經卷一․南本涅槃經卷九․善見律毘婆沙卷十七․釋迦方志卷上․碧巖錄第十四則․翻譯名義集卷七]<<佛光大辭典 p6337-中≫
32) The Vimalakīrti Nirdeśa Sūtra (Sanskrit: विमलकीर्तिनिर्देशसूत्र )에 나오는 거사. nirdeśa는 가르침instruction, 조언advice의 뜻이라고 한다.
33) 須菩提(しゅぼだい、スブーティ、梵: सुभूति, Subhŭti)는 석가10대 제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무쟁제일無諍第一이라 불리고 있다.
34) 오실본삼불역이 실려있는 「마하발라야바라밀경초서摩訶鉢羅若波羅蜜經抄序」 전문은 다음과 같다. 《出三藏記集》卷8:「摩訶鉢羅若波羅蜜經抄序第一 [9]道安法師 昔在漢陰十有五載。講放光經歲常再遍。及至京師漸四年矣。亦恒歲二。未敢墮息。然每至滯句首尾隱沒。釋卷深思。恨不見護公叉羅等。會建元十八年正車師前部王。名彌第。來朝。其國師。字鳩摩羅跋提。獻[10]胡[11]大品一部四百二牒言二十千[12]失盧。[*]失盧三十二字。[*]胡[13]人數經法也。即審數之。凡十七千二百六十首盧。殘二十七字都并五十五萬二千四百七十五字。天竺沙門曇摩蜱執本。佛護為譯。對而撿之。慧進筆受。與放光光讚同者。無所更出也。其二經譯人所漏者。隨其失處稱而正焉。其義異不知孰是者。輒併而兩存之。往往為訓其下。凡四卷。其一[14]經五卷也。譯[*]胡為秦。有五失本也。一者[*]胡語盡倒而使從秦。一失本也。二者[*]胡經尚質。秦人好文。傳可眾心非文不合。斯二失本也。三者[*]胡經委悉至於嘆詠。[15]丁寧反覆。或三或四。不嫌其煩。而今裁斥。三失本也。四者[*]胡有義[16]記正似亂辭。尋說[17]向語文無以異。或千五百[18]刈而不存。四失本也。五者事已全成。將更傍及。反騰前辭已乃後說而悉除此。五失本也。然般若經。三達之心覆面所演。聖必因時[19]時俗有易。而刪雅古以適今時。一不易也。愚智天隔聖人叵階。乃欲以千歲之上微言。傳使合百王之下末俗。二不易也。阿難出經去佛未久。[20]尊大迦葉令五百六通迭察迭書。今離千年而以近意量[21]截。彼阿羅漢乃兢兢若此。此生死人而平平若此。豈將不知法者勇乎。斯三不易也。涉茲五失經三不易。譯[*]胡為秦。詎可不慎乎。正當以不[22]開異言。傳令知會通耳。何復嫌大匠之得失乎。是乃未所敢知也。前人出經。支讖世高。審得[*]胡本難繫者也。叉羅支越。[23]斵鑿之巧者也。巧則巧矣。懼竅成而混沌終矣。若夫以詩為煩重。以[24]尚為質朴。而刪令合今。則馬鄭所深恨者也。近出此撮欲使不雜推經言旨。唯懼失實也。其有方言古辭。自為解其下也。於常首尾相違句不通者。則冥如合符。厭如復[25]折。乃見前人之深謬。欣通外域之嘉會也。於九十章蕩然無措疑處。毫芒之間泯然無微疹。已矣乎。南[26]摸一切佛過去未來現在佛如諸法明(天竺禮般若辭也明智也外國禮有四種一罽耶二波羅南三婆南四南[27]摸南[*]摸屈體也[28]此跪此四拜拜佛外道國主父母通拜耳禮父母云南[*]摸薩迦薩迦供養也)。摩訶(大也)鉢羅若(智也)波羅(度也)蜜(無極)經抄(天竺經無前題前題皆云吉法吉法竟是也道安為此首目題也)。」(CBETA, T55, no. 2145, p. 52, b8-c26)[9](晉)+道【明】。[10]胡=梵【元】【明】*。[11]大=天【明】。[12]失=首【宋】*【元】*【明】*。[*12-1]失=首【宋】*【元】*【明】*。[*10-1]胡=梵【元】【明】*。[13]〔人〕-【宋】【元】【明】。[14]經=紙二紙異者出別為一卷合【宋】【元】【明】。[*10-2]胡=梵【元】【明】*。[*10-3]胡=梵【元】【明】*。[*10-4]胡=梵【元】【明】*。[*10-5]胡=梵【元】【明】*。[15]丁寧=叮嚀【元】【明】。[*10-6]胡=梵【元】【明】*。[16]記=說【宋】【元】【明】。[17]向=句【明】。[18]刈 벨 예=剗 깎을 잔, 깎을 전【元】【明】。[19]〔時〕-【宋】【元】【明】。[20]尊+(者)【宋】【元】【明】。[21]截=裁【宋】【元】【明】。[*10-7]胡=梵【元】【明】*。[22]開=聞【宋】【元】【明】。[*10-8]胡=梵【元】【明】*。[23]斵=斷【明】。[24]尚=書【宋】【元】【明】。[25]折=析【宋】【元】【明】。[26]摸=無【宋】*【元】*【明】*。[27]摸=莫【元】【明】。[*26-1]摸=無【宋】*【元】*【明】*。[28]此跪=跪也【宋】【元】【明】。[*26-2]摸=無【宋】*【元】*【明】*。
cf) 樸揚 智周 撰 《因明入正理論疏前記》卷1:「五失者: 一, 迴倒梵語. 二, 改質從文. 三, [1]慰慇重委細而說遂乃那之. 四, 凡有所說, 正似究詞, 細尋不爾, 今而不存. 五, 事[巳>已]合成, 將欲傍說, 重勝前意,生起後說。三不易者: 逕三達之心覆面者說淺智加減, 一不易也. 愚智天隔, 聖必依時, 佛出世時眾根利, 末代根鈍, 遂易古雅之言, 而應今時之性. 此則改千代之上[2]徵言, 同百王之下末俗, 二不易也. 五百羅漢, 結集三藏, 迭相監察, 猶恐謹失, 凡立獨稱, 更為第品, 三不易也。」(CBETA, X53, no. 853, p. 808, a19-b2 // Z 1:86, p. 457, a7-14 // R86, p. 913, a7-14)[1]慰字疑剩。[2]徵疑微。
35) 委悉(위실): (일이나 뜻을) 자세(仔細)하고 완전(完全)하게 앎. 아주 자상하게 앎. 이와 같이 사전에 나와 있으나 悉에는 ‘알다’는 뜻 외에도 ‘다하다(궁구하다)’, ‘갖추다’는 뜻이 있으므로 ‘자세하게 다 갖추다’는 뜻으로 보아 무방해 보인다. 후나야마는 ‘위곡委曲을 진盡하다’로 보고 있다.
36) ①한시(漢詩)의 끝에 적은 한 편(篇)의 대의(大意)를 이르는 말 ②조리가 닿지 않는 어지럽고 난잡(亂雜)한 말
37) 傍及(방급): 推及;遍及。 南朝 梁 劉勰 《文心雕龍·原道》:“心生而言立,言立而文明,自然之道也。傍及萬品,動植皆文。”
38) 横超慧日(おうちょうえにち, 1906-1995): 일본의 불교학자. 대곡大谷대학 명예교수. 중국불교 전공.
39) 經을 ‘지나다’는 뜻의 경逕으로 적고 있는 후대 문헌들도 적지 않다.
40) 삼달(三達): 삼명(三明) 또는 삼증법(三證法)이라고도 함. 숙명지(宿命智), 생사지(生死智), 누진지(漏盡智) 증명(證明).
1. pūrva-nivāsānusmṛti-jñāna 宿命通 2. divya-cakṣus 天眼通 3. āśrava-kṣaya-jñāna 漏盡通
41) Oslo대학의 Christoph Harbsmeier는 Early Chinese buddhist translators on translation: A brief introduction with textual data란 논문에서 “然般若逕三達之心 The core of the threefold prajnā-knowledge 覆面所演。has been propounded by people long dead.(세 가지 지혜의 핵심은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에 의해 제시되었다”로 영문번역하고 있는데 복면覆面을 ‘오래 전에 죽은 사람’으로 풀고 있다. 본서에서는 “반야경은 부처님이 설한 것으로 성자는 반드시 때를 고려하여 설하므로”(横超慧日1983)라고 하고 있다.
cf) 《佛開解梵志阿[颱-台+(犮-乂+又)]經》卷1:「佛知其意,即為出舌,先舐(핥을 지)左耳,却舐右耳,復舐髮際,以舌覆面,徐引舌下。阿颰(태)歎曰:「如佛者難值,萬世時有舌相乃爾,安得不知?」」(CBETA, T01, no. 20, p. 263, b24-27)
42) 이를 통해 오실본의 ‘本’이 ‘經’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제4장 외국승의 어학능력과 구마라집·현장의 번역론1)
앞 장(제3장)에서 역주譯主를 설명할 때 『승만경勝鬘經』을 한역할 때의 역주가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 394-468)였지만 그는 원문原文을 읽었을 뿐이고 실제로 번역을 한 이는 보운(寶雲2), 376-449)이었다는 것을 소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소박한 질문을 던지면, 구나발타라 같은 인도인은 어느 정도로 중국어를 알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제4장에서는 먼저 이런 점에 관해 역주를 맡았던 외국승의 중국어 능력의 유무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역사자료를 통해 중국어가 되는 외국승려, 중국어가 되지 않는 외국승려 등의 경우를 역사자료로부터 알 수 있는 한도에서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그 위에서 인도와 중국 두 나라 언어를 잘하는 번역자들의 번역이론을 소개하고, 더불어 번역의 가능성과 불가능성과 관련된 것들을 다룬다.
1. 중국어회화로 고심했던 구나발타라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 394-468)는 중국말로 공덕현(功德賢)이라 하며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대승(大乘)을 배웠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마하연(摩訶衍)이라 부른다. 본래는 바라문(婆羅門) 출신이다.3)원가(元嘉) 12년(435)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후에 단양군(丹陽郡)에서 『승만경(勝鬘經)』과 『능가경(楞伽經)』을 번역하였다. 이때에는 참여한 무리가 7백여 명이었다. 보운(寶雲)이 전역(傳譯)을 , 혜관(慧觀)이 붓을 잡았다.집필執筆(=필수筆受)를 맡았다. 말이 오가며 반복하여 자문하고 분석하여 오묘한 본지를 터득했다.4)
후에 초왕(譙王: 南譙王, 劉義宣)이 형주(荊州)를 평정하였다. 함께 신사(辛寺)로 가서 머물 것을 청하므로 방과 전각을 다시 세웠다. 곧 신사辛寺에서 『무우왕경(無憂王經)』ㆍ『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ㆍ『무량수경(無量壽經)』 1권ㆍ『니원경(泥洹經)』ㆍ『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ㆍ『상속해탈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波羅蜜了義經)』ㆍ『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 3권ㆍ『제일의오상략경(第一義五相略經)』ㆍ『팔길상경(八吉詳經)』 등의 여러 경전을 내었다. 이전에 펴낸 것과 아울러 백여 권에 이르렀다. 항시 제자 법용(法勇)으로 하여금 번역을 옮겨 말을 헤아리도록 하였 다.傳譯*度語5)
초왕(譙王: 南譙王, 劉義宣)이 청하여 『화엄(華嚴)』 등의 경전을 강의하게 하였다. 구나발타라가 스스로 아직 송나라 언어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여기고서, 부끄럽고 안타까운 생각을 품었다. 곧바로 아침저녁으로 예배하고 참회하며 관세음에게 청하여, 신명이 응해 주기를 빌었다.
드디어 꿈속에 흰 옷을 입고 손에 칼을 든 사람이 나타났다. 한 사람의 머리를 받쳐 들고, 그의 앞에 이르러 물었다.
“무엇 때문에 걱정을 하는가?”
구나발타라가 갖추어 사실대로 아뢰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크게 걱정할 것 없다.”
곧바로 칼을 가지고 머리를 바꾸어 새 머리로 얹히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보라고 하였다.
“아프지 않은가?”
구나발타라가 대답하였다.
“아프지 않습니다.”
갑자기 환히 트이면서 깨달아, 마음과 정신이 희열에 젖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도의 의미를 송나라의 말로 갖추어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제야 강의를 하였다.6)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소설 〈뒤바뀐 머리 Die vertauschten Köpfe-Eine indische Legende〉(1940)7)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이다. 위 이야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장어를 쓰는 능력이 아니고 회화능력이다. 구나발타라는 광주에 도착한 것이 40세 되던 435년이고 430년대 후반에 건강健康에, 이어 형주로 가 역경을 한 것이 440년대에서 450년대 초반까지이다. 453년 효무제가 중흥사中興寺를 세웠고 구나발타라는 거기에서 468년 나이 75세에 입적하게 된다. 중국에 도착해 5년이 지난 시점에 역경을 하고 있었지만 중국어 회화는 거의 할 수 없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출삼장기집』 권2에 따르면 구나발타라의 역장에는 보운寶雲과 그 제자인 법용法勇, 보리菩提 두 제자가 전역傳譯으로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승만경에 한하지 않고 구나발타라 역업譯業에는 전적으로 중국인 통역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 통역이 필요했던 구나발마求那跋摩
구나발타라에 조금 앞서 건강健康에서 활약했던 구나발마求那跋摩는 431년(이 해에는 윤6월이 들어있다) 정월에서 9월28일 급서할 때까지 10개월 정도 건강에 머무르며 경론을 번역하였다. 고승전 권3에 따르면 『보살선계경』 10권을 생전에 번역을 완료하지 못해 그의 사후 제자들이 남아있는 3장을 스승을 대신하여 역출譯出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구나발마 사후에도 번역이 속행가능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없이도 역경이 가능할 정도로 잘 정비된 체제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나발마전에는 건강 도착 후 역경 이전에 법화경과 화엄경을 강의하였다고 하는데 구나발마는 당시 65세로 때로 통역에 의지하였다고 한다.
3. 중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던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
중국어 회화를 하지 못했던 것이 명백한 이로는 동진에서 이름을 날렸던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8)가 있다. 위진魏晉 명사名士들의 일화를 기록한 세설신어世說新語(남조 송의 유의경劉義慶:403∼444 찬술)에는 “고좌도인高座道人은 한어漢語를 하지 못한다.”라고 나온다.
4. 파라마르타(진제)의 중국어능력
유가행파의 난해한 논서를 번역하여 이름이 높은 진제(499-569)에게는 역업을 보좌하는 중국인 제자인 혜개慧愷(지개智愷라고도 부름)가 있었다. 혜개의 아비달마구사론서阿毘達磨俱舍釋論序에는 “법사께서는 여러 지방으로 다니신지 오래 되었으므로 한자의 발음과 의미를 상세히 이해하고 있어 무릇 무엇을 번역하더라도 통역이 필요하지 않습니다.”9)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의 말일 뿐이고 실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진제의 역경활동이 50에서 70세경 사이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만년의 진제가 통역 없이도 회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난해한 유식교리학의 용어를 통역 없이 그것도 구어가 아닌 정규 문어체로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얘기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진제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의 브로큰broken 중국어로 말을 하면 그 제자들이 그것을 듣고 정규 문장어로 곧바로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10)
5. 회화를 할 수 있는 것과 한역을 할 수 있는 것의 차이
회화능력과 한역작성능력은 구별된다. 불전 한역은 선행하는 번역서가 있을 경우 가능한대로 참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행 번역서의 조사, 장단점의 검토는 한인 승려에게 주어졌다.
수의 비니다유지, 나연제야사, 당의 파라파가라밀다라, 보리유지, 반라밀제, 반야의 역장에서는 역주와 별도로 ‘전역傳譯’, ‘도어度語’, ‘역어譯語’로 명기된 ‘역번문譯梵文’ 담당자가 있었다. 이로부터 역주는 총책임자이고 실질적인 번역자는 이들인 것으로 추측된다.
6. 『반야등론般若燈論』 한역에서의 필수筆受의 교체
《辯正論》卷4:「論凡二十七品。為十五卷。논論은 모두 27품으로 열다섯 권으로 되어 있다. 若內人立義皆標人名。無名者例稱自部。若外人立義亦標人名。無名者例稱外人。縛解品已前, 慧賾執筆, 觀業品已後, 法琳執筆。於是, 起四年夏, 訖六年冬。박해품縛解品까지는 혜색11)이 집필執筆(=필수筆受)하였고 관업품觀業品 이후는 법림12)이 집필하였다. (정관貞觀) 4년(630) 여름에 시작하여 6년(632) 겨울에 마쳤다.」(CBETA, T52, no. 2110, p. 513, c17-21)
박해품縛解品까지인 전반 9권과 관업품觀業品 이후 후반 6권을 비교해보면 문장 표현상의 체재體裁에 차이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 여게왈如偈曰, 논자게왈論者偈曰처럼 왈曰을 쓰고 있는데 후자의 경우 왈曰을 쓰지 않고 언言이나 설說을 쓰고 있다. 이것은 한역표현을 선택하는 일은 필수가 맡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7. 스스로 번역할 수 있었던 외국인
본장에서 지금까지 다뤘던 사례는 외국인의 중국어능력에 대하여 부정적인 측면을 주로 하였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외국인이면서 통역에 의지하지 않고 역경譯經에 종사했던 사례도 실제로 존재하였다.
사나굴다: 북주의 무제武帝년간(559-560)에 장안에 와 개황開皇 5년(585) 이후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번경飜經에 종사하였는데 속고승전에는 “전도傳度를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不勞傳度”13)라고 나온다. 인도 승려인 그가 중국어에 능통한 것은 뛰어난 어학적 소질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류기간과도 무관하지 않다.
법지法智: 사나굴다와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법지에 관해 속고승전14)에는 “法智妙善方言. 지방언어15)를 빼어나게 잘했다. 執本自傳。범본을 들고 스스로 전傳하였다. 不勞度語。도어度語를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譯業報差別經等。업보차별경 등을 번역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법지의 아버지는 북위와 동위 시대에 역경을 행했던 반야유지이다. 법지는 원래 중천축국인이지만 중국에 머문 기간이 길어지고 중화 풍습에 동화되었다고 속고승전에 나온다.
담피曇皮: 반야유지의 차자이고 법지의 아우16)인 담피는 毘尼多流支와 那連提耶舍의 역장에서 각각 전역傳譯17)과 도어度語18)로 참여하였다.
비슷한 사례로 오吳의 지겸支謙과 서진西晉의 축숙란竺叔蘭이 있다. 서진시대에 많은 대승경전을 역출했던 돈황의 축법호가 중국어를 잘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후한시대 월지국 출신의 지루가참 역시 중국어에 능통하였고 안세고 또한 “곧 중국어를 두루두루 학습하였다. 即通習華言19)”라고 한다.
8. 범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한인들
구마라집 동시대에 장안에서 활약하였던 양주 출신의 축불염竺佛念이나 남조 송에서 여러 가지 역경에 종사하였던 보운寶雲이 순수한 한인漢人인지 서역의 피가 섞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의 현장과 의정義淨, 북송의 유정惟淨은 한인이었다. 이중 의정의 역장에서의 역할은 신역新譯, 철문綴文, 정자正字로 기록되어 있어 역주가 일인삼역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9. 구마라집의 역경관(譯經觀)
《高僧傳》卷2:「天竺國俗, 甚重文製。其宮商體韻, 以入絃為善。凡覲國王, 必有贊德。見佛之儀。以歌歎為貴。經中偈頌皆其式也。但改梵為秦失其藻蔚。雖得大意殊隔文體。有似嚼飯與人。非徒失味。乃令嘔噦(얼)也。」(CBETA, T50, no. 2059, p. 332, b25-29)
천축국의 국민성은 몹시도 문학작품을 중시한다. 그 성조의 리듬은 오선악보에 놓아도 훌륭할 것이다. 무릇 국왕을 알현하려면 반드시 덕을 찬미하고 부처님을 뵙는 의례에 있어서도 시가詩歌로 찬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경전 가운데의 게송은 모두 그런 형식의 것이다. 다만 범문을 중국어로 바꾸게 되면 그 아름다운 문조(文藻)[조위藻蔚: 文辭美煥]를 잃게 되는데 대의(大意)는 잡아내겠지만 완전히 문체文體에 어긋남이 생겨나게 된다. 마치 밥을 씹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되면 맛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토를 재촉하는 것과 같다.20)
문맥상 이것은 번역에 관한 일반적 진술은 아니고 운문 번역을 주로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인다.
구마라집은 고승전에 따르면 한시를 짓는 능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구마라집의 비관적 번역관은 범어 운문의 뉘앙스nuance가 한어로는 전혀 전해지지 않는 것을 깊이 자각한 것에서 온 것이다. 구마라집은 범어와 한문 간의 번역불가능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운문에 관해 말한 것이지만 산문도 포함한 역경관譯經觀으로 일반화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10. 간결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한역을 지향했던 구마라집
구마라집이 번역한 주된 문헌의 하나인 『대지도론』은 반야경의 주석서인데 이 논서는 백 권이나 되지만 실은 원전의 전역全譯이 아니고 초역抄譯이다. 이것은 중국에서의 경전 편집작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6장 참조)
구마라집의 제자 승예僧叡는 대지석론서大智釋論序에서 대지도론의 한역에서 원문을 생략했던 이유을 “(구마라집) 법사는 중국인이 간결성을 좋아하는 까닭에 (서품 이외는) 생략하여 간략히 하였다.”21)라고 적고 있다.
구마라집은 번역에 있어 이해하기 쉬운 문장을 목표로 했기에 때로는 축어역과는 멀어져 일부 생략하거나 말을 보충하여 이해하기 쉽게 하는 조작을 행하였다. 금강반야경의 각종 한역(구마라집, 담마유지, 진제, 현장, 의정 역)을 범어원전과 상세히 비교 검토한 스탠포드 대학 종교학과 교수 폴 해리슨(Paul Harrison)은 “마치 현대의 연구자들이 번역할 때에 괄호를 사용하여 그 속에 말을 보충하여 자신의 해석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을 구마라집은 행하였는데 다만 그는 그것을 본문 중에서 괄호를 사용하지 않고 행하였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역에 있어 의역파와 직역파로 나눈다면 구마라집은 의역파에 해당된다. 바로 이러한 점이 구마라집이 번역한 법화경, 유마경, 금강반야경이 중국불교사를 통하여 후대까지 영원히 계속 읽혀지는 이유이다.
11. 음역을 좋아한 구마라집
구마라집이 의역파意譯派이니 일반적인 중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원어의 음역을 한다거나 우직하게 직역한다거나 하는 경향이 적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재미있게도 그의 번역에는 뜻에 닿게 하려고 의역을 하는 측면과 함께 음역하거나 원문의 어순을 반영하여 번역하는 측면도 있다.
예를 들자면 법화경의 경우 서진의 축법호 역 『정법화경正法華經』 총지품은 다라니를 의역하였지만 구마라집 역 『묘법연화경』 다라니품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음역하여 고치고 있다.
보리수는 깨침의 나무을 의미하는 범어 bodhi-vṛkṣa 또는 bodhi-druma에 대응되는 역어인데 구마라집 무렵에 처음으로 확립되었다.
300년대 말까지 이 말의 한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불수佛樹: 오의 지겸 역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 『유마힐경』, 『문수사리문보살서경文殊師利問菩薩署經』, 서진의 축법호 역 『보요경普曜經』. 예외적으로 쓰였지만 구마라집 역 『대지도론大智度論』
도수道樹: 오의 지겸 역 『태자서응본기경』, 『유마힐경』, 서진의 축법호 역 『보요경』
각수覺樹: 동진의 승가제바 역 『중아함경』
구마라집 역의 여러 경전에서는 원어 보디bodhi에 충실한 음역에 기초해 보리수菩提樹를 정역定譯으로 하는 것이 통례通例이다.
구마라집과 동시대 사람인 축불염(竺佛念)의 경우 역어가 일정하지 않은데 다음과 같다.
도수道樹: 『보살영락경』, 『비나야毘奈耶』
도수道樹와 불수佛樹: 『보살종도술천강신모태설광보경菩薩從兜術天降神母胎說廣普經』, 『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
구마라집 이후의 경우
보리수菩提樹: 불타야사(佛陀耶舍)·축불념(竺佛念) 공역의 『사분율四分律』
보리수는 구마라집이 창안한 것으로 이 음역은 구마라집 이전에는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전 모두冒頭의 정형구定型句인 “이렇게 나에 의하여 들리어졌다. evaṃ mayā śrutam22)= 여시아문如是我聞” 또한 과거에 쓰이던 “문여시聞如是”를 구마라집이 바꿔 번역했을 가능성이 높다. 동시대의 축불염일 가능성도 일응 잔존한다. 『대지도론』을 번역할 때 evaṃ「如是」mayā「我」śrutam「聞」으로 축자逐字번역할 필요성을 느껴 그렇게 바꾸었을 가능성이 높다.
12. 수나라 언종의 팔비(八備)설
번역을 남이 씹고 남겨둔 음식물 같은 것으로 보는 구마라집의 생각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이 한역한 것을 읽는 것 보다는 범어를 익혀 원전을 읽는 편이 좋을 것인데 이렇게 주장한 중국인으로는 수隋나라 때 역장에 빈번히 참여했던 언종(彦琮, 557~610)이 있다. 그는 범어원전을 직접 배울 것을 주장하였고 그럴 수 없어 번역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번역자는 팔비(八備)라 불리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팔비23)는 다음과 같다.
所備者八。갖춰져야 할 것이 여덟 가지이다.
⑴ 誠心愛法, 志願益人, 不憚久時, 其備一也。
정성스런 마음으로 불법을 사랑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뜻하고 서원하였으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꺼리지 않으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첫 번째이다.
⑵ 將踐覺場, 先牢戒足, 不染譏惡。其備二也。
장차 부처님 도량覺場에서 실천하여 먼저 계족戒足24)을 굳건히 하고 남을 비꼬는 악행譏惡에 물들지 않아야 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두 번째이다.
⑶ 筌曉三藏, 義貫兩乘, 不苦闇滯。其備三也。
통발로 고기를 잡듯이25)삼장에 밝아지고 뜻으로는 소승과 대승을 꿰뚫게 되어 어리석음에 걸려 고생하지 않게 되어야 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세 번째이다.
⑷ 旁涉墳史, 工綴典詞, 不過魯拙。其備四也。
두루[旁] 분사墳史26)(전적과 사서)를 섭렵하여 고전문장[典詞]을 공교롭게 엮을 수 있어, 지나치게[過] 노졸(魯拙: 老鈍하고 拙劣함. 質樸粗疏)해서는 아니 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네 번째이다.
⑸ 襟抱平恕, 器量虛融, 不好專執。其備五也。
마음의 포부[襟抱]는 공평함과 용서함[平恕]으로, 기량(器量:사람의 재능과 도량)은 허융(虛融: 冲虚融和)으로, 한쪽으로만 집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야 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다섯 번째이다.
⑹ 沈於道術, 澹於名利, 不欲高衒。其備六也。
도술(道術)에 침잠하고 명성과 이익에 담박하여 높이 자랑하려 하지 말아야 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여섯 번째이다.
⑺ 要識梵言, 乃閑正譯, 不墜彼學。其備七也。
반드시 범어를 알아 정역正譯에 익숙해지더라도[閑27)] 범학(梵學)에 떨어져서는 아니 되니 이것이 갖춰야 할 일곱 번째이다.
⑻ 薄閱蒼雅。粗諳篆隷。不昧此文。其備八也。
창아(蒼雅: 『삼창(三蒼)』28)ㆍ『이아(爾雅)』29)등의 자서(字書)를 말함)를 널리 열람하고, 전서와 예서를 대략 외워 이러한 글들에 어두워지지 않아야 되니 이것이 갖춰져야 할 여덟 번째이다.
13. 현장의 구역(舊譯) 비판
현장스님이 당태종과 대화하면서 구마라집이나 보리유지의 『금강반야바라밀경』 번역에 관해 비판하고 있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卷7:「帝又問:「《金剛般若經》一切諸佛之所從生,聞而不謗,功逾身命之施,非恒沙珍寶所及。加以理微言約,故賢達君子多愛受持,未知先代所翻,文義具不?」
法師對曰:현장법사가 대답하였다.
「此經功德, 實如聖旨。이 경의 공덕은 실로 폐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西方之人, 咸同愛敬。서역 사람들 모두 똑같이 (이 경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있습니다. 今觀舊經,亦微有遺漏。이제 이 경전의 옛 번역[舊經]을 보면, 또한 적으나마 유루(遺漏)가 있습니다. 據梵本具云『能斷金剛般若』,舊經直云『金剛般若』。범본에 따르면 『능단금강반야』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 경전의 옛 번역은 곧바로 『금강반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欲明菩薩以分別為煩惱,而分別之惑,堅類金剛,唯此經所詮無分別慧,乃能除斷,故曰『能斷金剛般若』,故知舊經失上二字。보살은 분별을 번뇌로 삼으며 분별의 미혹은 견고한 종류의 금강인지라 오로지 이 경에서 말한바 분별이 없는 슬기[慧]만이 이에 능히 잘라 없앨 수 있고 그래서 『능단금강반야경』이라 말하고 있고 그래서 이 경전의 옛 번역은 위의 두 글자를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又如下文,三問闕一,二頌闕一,九喻闕三,如是等。什法師所翻舍衛國也,留支所翻婆伽婆者,少可。또한 아래 문장에서와 같이, 세 가지 질문에 하나가 빠져있고, 두 게송에서 하나가 빠져있으며, 아홉 가지 비유에서 세 가지가 빠져있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구마라집 법사가 번역한 사위국舍衛國이나 보리유지가 번역한 바가바婆伽婆는 그저 그런 정도입니다. 」
帝曰:「師既有梵本,可更委翻,使眾生聞之具足。然經本貴理,不必須飾文而乖義也。」故今新翻《能斷金剛般若》,委依梵本。奏之, 帝甚悅。」(CBETA, T50, no. 2053, p. 259, a13-28)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는 현장 스님처럼 “금강을 분쇄하는 반야바라밀”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금강으로 무엇이든 분쇄하는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위 경전의 범본은 현재 여러 가지인 것이 확인되고 있고 대본大本과 약본略本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현장이 본 것은 전자인데, 구마라집이 본 것은 후자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일부 문장이 빠진 것은 역자 문제가 아니라 원본의 상위 문제인 것이다.
-사위국舍衛國보다 실라벌室羅筏, 바가바婆伽婆보다 박가범薄伽梵을 현장스님이 선호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방산석경房山石經이나 당 현종의 주석의 대상이 된 것은 구마라집의 『금강반야경』이고 明·淸까지도 그러하여 현장 역은 중국인의 금강경 이해에 있어서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14. 현장의 오종불번설
현장에게는 오종불번이라는 번역이론이 있었다고 전승되고 있는데 오종불번이란 의역해서는 안될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는 설이다. 다시 말하면 의역하지 말고 음역에 그쳐야 할 다섯 장르genre를 열거한 것이다. 오종불번에 관해서는 보통 남송의 법운 <<번역명의집>>(1143)에 보이는 한 구절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꽤나 후대의 저작이므로 보다 초기의 기록인 경소(景霄, -927-)30)의 <<사분율행사초간정기>>권2에 나오는 현장(玄奘, 602-664)설을 소개한다.
<<사분율행사초간정기>>는 도선(道宣, 596-667)율사의 <<사분율행사초>>에 대한 주석서로 809-903 무렵 사이에 찬술되었다. 찬자인 경소는 후당(923-936)시기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현장 스님과 200년 이상의 차이가 있으나 의정, 불공, 반야의 설이라고 볼 이유도 없으니, 현장 스님의 영향을 받아 당나라 학승들이 정리한 현장설로 보아 큰 문제가 없다.
《四分律行事鈔簡正記》卷2:「問: 毗尼翻律。為正翻義翻耶。答: 乃是義翻非正譯。故
諸家相承。引唐三藏譯經。有翻者有不翻者。
여러 파의 전승에서는 당나라 삼장의 역경에서는 번역할 것과 번역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음을 인용하고 있다.
且不翻有五。또한 번역하지 말아야 할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
一, 生善故不翻。1. 선업을 낳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佛陀云覺。菩提薩埵此云道有情等。불타는 각이란 뜻의 불타나 도, 유정을 뜻하는 보리살타 같은 말들을 今皆存梵名。지금은 모두 범어이름으로 존치하고 있는데 意在生善故。그 뜻은 선업을 낳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二, 秘密不翻。2. 비밀스러운 것이기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陀羅尼等。다라니 같은 것들이다.總持之教。총지(다라니, 주문)의 가르침은 若依梵語諷念加持。即有感微。범어에 의지하여 가호가 있기를 암송해야 곧 미묘함을 감득할 수 있지 若翻此土之言。全無靈驗故。중국말로 번역할 것 같으면 전혀 영험이 없기 때문이다.
三, 含多義故不翻。3. 여러 뜻을 함축하기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薄伽梵。一名具含六義。一, 自在(不永繫屬二種生死故)。二, 熾盛(智火猛熖燒煩惱薪)。三, 端嚴(相好具足所莊嚴故)。四, 名稱(有大名聞遍十方故)。五, 吉祥(一切時中常吉利故。如二龍主水七步生蓮也)。六, 尊貴(出世間所尊重故)。박가범bhagavān과 같은 말은 하나의 이름에 여섯 뜻이 구체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자재, 치성熾盛, 단엄, 명칭, 길상, 존귀. 今若翻一。便失餘五。故存梵名。이제 하나의 뜻으로 번역하게 되면 나머지 다섯 가지 뜻을 문득 잃게 되니 범어 이름을 존치해두는 것이다.
四, 順古不翻。(번역할 수 있지만) 옛날 하던 대로 따르기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阿耨菩提。從漢至唐。例皆不譯。아뇩보리같은 말은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전례에 따라 모두 번역하지 않는다.
五, 無故不翻。(중국 땅에는 그러한 사물들이) 없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는다. 如閻浮樹影透月中, 生子八斛瓮大。此間既無。不可翻也。염부수jambu31) 그림자는 달에까지 비치고 8곡斛(800升)들이 항아리 크기의 열매를 낳는데 이 땅에는 없기에 번역할 수가 없는 것이다.
除茲[巳>已]外, 並皆翻譯。就翻譯中。復有二種。一正翻。二義翻。若東西兩土。俱有促呼喚不同。即將此言用翻彼語[1]梵。如梵語莽茶利迦。此云白蓮華。又如梵語斫摳。此翻為眼等。皆號正翻也。若有一物西土即有。此土全無。然有一類之物。微似彼物。即將此者用譯彼言。如梵云尼拘律陀樹。此樹西土其形絕大。能蔭五百乘車。其子如油麻。四分之一。此間雖無其樹。然柳樹稍[2]積似。故以翻之。又如三衣翻臥具等並是(云云)。今此毗尼翻彼律。蓋是義翻。」(CBETA, X43, no. 737, p. 24, a19-b15 // Z 1:68, p. 77, a1-b3 // R68, p. 153, a1-b3) [1]梵字疑剩。[2]積字疑剩。
1. 生善不翻
2. 秘密不翻
ex) 혜원(慧遠, 523-592) <<대반열반경의기>>
隋 淨影寺 沙門 釋慧遠 述 《大般涅槃經義記》卷1〈壽命品〉:「第三呪詞。何故不翻。翻改失用,多不神驗。所以不翻」(CBETA, T37, no. 1764, p. 626, c25-26)
胡 吉藏(549-623) 撰 《法華義疏》卷12〈陀羅尼品 26〉:「問:諸經中何故不翻呪耶?
答:呪語多含此間無物以擬之;若欲翻之,於義不盡,又失其勢用。如此間禁呪之法,要須依呪語法而誦之則有神驗,不得作正語而說。」(CBETA, T34, no. 1721, p. 629, c8-12)
3. 多義不翻
박가범薄伽梵은 세존世尊으로 대개 번역되고 있고 현장 또한 실제로는 세존이라고 번역하였으나 술어의 다의성 맥락에서 음역하라는 현장의 의도에서 볼 때는 모순된다고 할 수 없다.
박가범의 여러 뜻에 관해서는 현장 역 <<불지경론佛地經論>>에 자세하다.
龍樹菩薩 造, 後秦 龜茲國 三藏法師 鳩摩羅什 奉 詔譯 《大智度論》卷2〈序品 1〉:「「阿羅」名「賊ari」,「呵han」名「殺」,是名「殺賊」。如偈說:
「佛以忍為鎧, 精進為剛甲,
持戒為大馬, 禪定為良弓,
智慧為好箭; 外破魔王軍,
內滅煩惱賊, 是名阿羅呵。」
復次,「阿a」名「不」,「羅呵√ruh」名「生」,是名「不生」。佛心種子,後世田中不生,無明糠脫故。
復次,「阿羅呵√arh」名「應受供養」。佛諸結使除盡,得一切智慧故,應受一切天地眾生供養,以是故,佛名阿羅呵。」(CBETA, T25, no. 1509, p. 71, b20-c1)
중국인인 梁나라 법운은 羅漢에 불생, 살적, 응공의 뜻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 宋나라 승량은 열반이라는 말이 다의적이라 하나로 의역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4. 順古不翻: 아뇩보리는 번역용례가 드물고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생략으로 보인다. 현장은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음역이나 무상정득각 또는 무상정등보리같은 의역을 사용했고 현장 이전의 번역에도 음역과 의역이 함께 쓰였다. 이런 점에서 실태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5. 無故不翻: jambu에 대한 현장의 음역은 염부閻浮가 아니라 섬부贍部.
제3항(多義不翻)과 제5항(無故不翻)은 번역불가능성의 사태를, 나머지(生善不翻, 秘密不翻, 順古不翻)는 번역가능성의 사태이지만 번역하지 않는 게 좋다는 쪽이다.
15. 구마라집설과 현장설
구역을 대표하는 구마라집은 번역불가능성을 의식하여 문장의 뜻이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도록 읽기 쉬운 번역을 추구하였고 특정 문맥에 따라서는 음역을 하는 것도 중시하였다.
신역을 대표하는 현장은 구마라집을 비롯하여 구역에는 부정확한 점이 많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보다 정확한 축어역逐語譯을 추구하였고 당나라 시기의 발음에 대응시키고자 하는 생각으로 새로운 음역어를 다수 만들어내었다. 현장 계열의 설로 보이는 오종불번설에는 그 다섯 가지 항목 이외에는 정확히 의역하여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구역의 지겸과 구마라집은 ‘유마힐’32)이라고 하였는데 현장은 ‘무구칭無垢稱’이라고, 구역의 ‘수보리須菩提’33)라고 음역하였지만 현장은 ‘선현善現’이라고 의역하였다. 다만 현장은 Śāriputra를 ‘사리자舍利子’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는 오종불번의 제4항인 “옛날 하던 대로 따르기에 번역하지 않는다.順古不翻”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16. 문체의 문文과 질質을 오가는 전통과 논쟁
시대를 거슬러 구마라집 이전 사람들의 번역관을 살펴보면 문文과 질質이 키워드keyword이다.
문文은 문아文雅 곧 우아優雅한 품격이 있어, 사대부士大夫들이 읽기 쉬운 문체文體를 의미한다. 원문에 불필요한 반복이 있으면 문장의 뜻을 간결하게 이해하려고 삭제하는 입장이다.
질質은 질실質實 · 질박質朴 곧 허식虛飾을 폐廢하고 실직實直하게 축어적, 직역적인 문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중국어에서 꽤나 읽기 어려운 문체로 원문에 번잡한 반복이 있어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입장이다.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논어·옹야(雍也)』편
오의 지겸이 유기난과 나눴던 논의
전진의 석도안이 혜상慧常과 나눴던 논쟁
전진의 석도안이 조정趙政과 나눴던 논쟁
오의 지겸, 서진의 축숙란, 전진~후진의 축불염은 문文을 중시하였고
후한의 지루가참, 서진의 축법호는 질質을 중시하였다고 한다.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문’파文派는 자유역파自由譯派에, ‘질’파質派는 직역파直譯派에 해당된다. ‘문’파文派는 간簡(간략簡略)을, ‘질’파質派는 번繁(번다繁多) 곧 번잡하면 번잡한대로 원문을 그대로 두고 번역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다.
가칭 음역중시파音譯重視派와 의역중시파意譯重視派라는 말을 쓴다면 질’파質派인 지루가참은 음역중시파에, ‘문’파文派인 지겸은 의역중시파에 해당된다. 그러나 ‘질’파質派에 속하는 축법호는 『정법화경正法華經』을 보면 인명人名과 같은 고유명사까지도 의역하고 있고 음역은 극단적으로 적다. ‘질’파質派=음역중시파는 아니다.
17. 도안(道安, 312-385)의 오실본삼불역설五失本三不易說
문질文質논쟁에서 다루는 내용은 영원한 테마.
동진(東晉)시대에는 양양(襄陽)에서, 전진(前秦)시대에는 장안에서 활약했던 석도안은 여러 면에서 불교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문질文質에 관해 일정한 결론을 내림. 승려는 세속의 인연을 끊고 석가의 자식이 된 이상 석을 성씨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 산일된 문헌인 종리중경목록이라는 경록을 지은 것으로도 유명. 석도안이 불전번역론과 관련하여 남긴 이론이 오실본삼불역34)이라 불리는 것.
(1) 오실본
인도원전을 중국어로 번역하게 되면 잃게 되는 것을 다섯 조항으로 열거한 것이 오실본이다.
『출삼장기집』에 도안이 지은 「마하발라야바라밀경초서摩訶鉢羅若波羅蜜經抄序」가 실려 있다.
譯胡為秦。有五失本也。
범어를 번역하여 중국어로 하면 본래의 것(本=經)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그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一者, 胡語盡倒而使從秦。一失本也。
첫째, 범어는 모두 도치되어 있는데 중국말(의 어순)에 따르도록 (변경을 가)하는 것이니 첫 번째 실본이다.
二者, 胡經尚質。秦人好文。傳可眾心, 非文不合。斯二失本也。
둘째, 범어경전은 (문질 두 가지 중) 질(質: 質朴)을 숭상하고, 중국인은 문(文: 文雅)을 숭상한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들도록 전하고자 한다면 문(文)이 아니면 (그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지 않게 되니 이것이 두 번째 실본이다.
三者, 胡經委悉, 至於嘆詠。丁寧反覆。或三或四。不嫌其煩。而今裁斥。三失本也。
셋째, 범어경전은 위실(委悉)35)하여 (부처님이나 보살에 대한) 영탄(詠嘆=嘆詠)에 이르러, 정녕코 반복하여, 혹은 세 번 혹은 네 번이나 하면서 그 번다함을 싫어하지 않는데 지금 (중국에서는) 잘라내고 배척해버리니 (이것이) 세 번째 실본이다.
四者, 胡有義[16]記, 正似亂辭。尋說向語, 文無以異。或千五百刈而不存。四失本也。
넷째, 범어에는 의기(義記-義說【宋】【元】【明】)가 있어 참으로 난사(亂辭)36)와 비슷하다. 설명을 찾고 언어로 나아가나 글이 그것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어 (중국어로 옮기면서) 때로는 천오백이나 (되는 분량이) 삭제되어 존재하지 않게 되니 (이것이) 네 번째 실본이다.
五者, 事已全成。將更傍及。反騰前辭, 已乃後說, 而悉除此。五失本也。
다섯째, (범어 원전에서는) 일이 이미 모두 이루어진 뒤 장차 다시 (그 일을) 방급(傍及)37)하려고 할 적에는 앞의 말에 거꾸로 올라가 (반복한 뒤에야) 뒤의 말에 이르지만 (중국어로 옮길 적에는) 모두 이런 것을 삭제하니 (이것이) 다섯 번째 실본이다.」
제1은 어순이 서로 다르다는 것인데 한역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변경이다.
제2는 위진魏晉 무렵 성행했던 문체에 관한 논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3, 4, 5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2 이하는 원문생략의 문제와 관련된다.
제3의 예: 『장아함경』 권2 「유행경遊行經」과 Mahā-parinibbāna-suttanta.
佛告阿難:「汝聞跋祇國人數相集會,講議正事不?」
答曰:「聞之。」 《長阿含經》卷2 (CBETA, T01, no. 1, p. 11, a24-26)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하였다. 너는 발지국 사람들이 자주 서로 모여 나랏일을 토의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느냐. (아난이) 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Kin ti te Ānanda suttaṃ, Vajjī abhiṇhaṃ sannipātā sannipāta-bahulā ti?’
‘Sutaṃ me taṃ bhante Vajjī abhiṇhaṃ sannipātā sannipāta-bahulā ti.’
(Mahā-parinibbāna-suttanta, Dīgha Nikāya II, PTS, p. 73
유행경에서는 단순히 ‘들었습니다 聞之’로 처리하고 반복되는 것을 생략하였는데 한역에서는 흔하다고 한다.
제4는 본문 중에 포함된 주해류注解類를 말하는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히 이해되지 않는다.
(2) 삼불역
출삼장기집에 실려 전해지는 석도안 스님의 마하발라야바라밀경초서摩訶鉢羅若波羅蜜經抄序에는 오실본에 이어 삼불역三不易(석도안스님 연구자로 이름이 높은 횡초혜일橫超慧日38)이 1958년에 최초로 주장) 또는 삼불이三不易(전통적인 이해와 중국인 학자의 이해)를 언급하고 있다. 한문 원문은 아래와 같다.
然般若經39)。三達之心覆面所演。聖必因時, 時俗有易。而刪雅古以適今時。一不易也。
반야경은 삼달(三達)40)의 심心이 복면소연(覆面所演)한 것이다.41)성인은 반드시 시절[時]을 원인으로 한다. 시절의 풍속[時俗]은 변화함이 있는데 고아古雅[雅古: 端雅古朴]한 것을 깎아내고 지금의 시절에 맞추니 첫 번째 불역이다.
愚智天隔, 聖人叵階。乃欲以千歲之上微言。傳使合百王之下末俗。二不易也。
어리석은 범부와 지혜로운 이는 천지차이가 있어 성인(의 지위에) 오르기는 어렵다. 이에 천세의 위쪽에 있는[千歲之上] 미묘한 말씀을 전傳하여 백왕의 아래쪽[百王之下] 말세의 풍속[末俗]과 합치시키고자 하는 것이니 두 번째 불역이다.
阿難出經, 去佛未久。尊大迦葉令五百六通迭察迭書。今離千年而以近意量[21]截。彼阿羅漢乃兢兢若此。此生死人而平平若此。豈將不知法者勇乎。斯三不易也。
아난이 경經을 낼 적에는 부처님이 입적하신지 오래되지 않은 때였고 존자 대가섭이 육통의 오백 아라한이 번갈아 살피고 번갈아 쓰게 하였다. 이제 천년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비근卑近한 생각[近意]으로 헤아려 절단하니 저 아라한들이 이렇듯 조마조마함이 이러하고 이 생사를 윤회하는 인간들이 예사롭기가 이러하다. 장차 법을 모르는 자들의 용맹함은 어찌할 것인가? 이것이 세 번째 불역이다.
涉茲五失經三不易。譯胡為秦。詎可不慎乎。
이 오실경42)삼불역을 두루 살펴 범어를 중국어로 옮겨야 할 것이니 어찌 가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不易이 용이하지 않다는 뜻인지 바꿔서는 안 된다는 뜻인지 지금 여기에서 결론을 내리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三不易의 포인트point는 인도 원전을 가능한 한 충실히 지켜서 재현해야 된다는 점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1) 『佛典はどう漢譯されたのか: ス-トラが經典になるとき』/ 船山徹 著. 東京: 岩波書店, 2015(c2013), 87-119쪽.
2) 진(晉)나라 때 승려. 양주(凉州) 사람이다. 젊어서 스님이 되어 융안(隆安) 초에 법현(法顯), 지엄(智儼)과 거의 한 무렵에 서역(西域)을 향해 떠났다. 유사(流沙)를 건너고 설령(雪嶺)을 넘어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북인도에 가서 영적(靈蹟)을 찾고 범서(梵書)를 연구했다. 음자고훈(音字古訓)을 배웠다. 나중에 장안(長安)에 돌아와 불타발타라에게서 공부하고, 도장사(道藏寺)에서 『불소행찬경』 번역에 종사했다. 원가(元嘉) 26년 육합사(六合寺)에서 입적했다. 세수(世壽) 74세였고, 저서에 『서역유기(西域遊記)』 1권이 있다.
3) 求那跋陁羅,此云功德賢,中天竺人,以大乘學,故世號摩訶衍,本婆羅門種。『고승전』 3권(ABC, K1074 v32, p.794b21-b22)
4) 於是京師遠近冠蓋相望,大將軍彭城王義康、丞相南譙王義宣,竝師事焉。頃之,衆僧共請出經於祇洹寺,集義學諸僧,譯出『雜阿含經』,東安寺出『法鼓經』,後於丹陽郡,譯出『勝鬘』、『楞伽經』,徒衆七百餘人。寶雲傳譯,慧觀執筆,往復諮析,妙得本旨。『고승전』 3권(Ap.795a0BC, K1074 v32, 1-a07)
5) 後譙王鎭荊州,請與俱行,安止辛寺,更創房殿。卽於辛寺,出『無憂王』、『過去現在因果』,及一卷『無量壽』、一卷『泥洹』、『央掘魔羅』、『相續解脫波羅蜜了義』、『現在佛名經』三卷、『第一義五相略』、『八吉祥』等諸經,幷前所出凡百餘卷,常令弟子法勇傳譯度語。
6) 譙王欲請講『花嚴』等經,而跋陁自忖(촌),未善宋言,有懷愧歎,卽旦夕禮懺請觀世音乞求冥應。遂夢有人白服持劍,擎(경)一人首來,至其前曰:“何故憂耶?”跋陁具以事對,答曰:“無所多憂。”卽以劍易首,更安新頭。語令迴轉曰:“得無痛耶?”答曰:“不痛。”豁然便覺,心神悅懌(역)。旦起,道義皆備領宋言,於是就講。『고승전』 3권(ABC, K1074 v32, p.7 95a01-a22)
7) だまされた女/すげかえられた首 (光文社 古典新訳 文庫) 2009/1/20 初版, トーマス マン Thomas Mann (原著), キシ ヨシハル 岸 美光(翻訳)
8) 진(晉)나라 때의 서역(西域) 승려. 범명(梵名)은 Śrīmitra다. 시리밀다라(尸梨密多羅)로도 불리며, 의역(意譯)은 길우(吉友)다. 원래 구자국(龜茲國)의 왕자였는데,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출가했다. 경론(經論)에 정통했고, 밀법(密法)에 해박했다. 영가(永嘉) 연간(307-312)에 중국에 왔는데, 마침 전란을 만나자 강을 건너 건강(建康)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사람들이 그를 “고좌高座”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천자(天資)가 높고 풍신(風神)이 당당하여 왕도(王導)의 흠모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명성이 날로 드러나 사람들이 다투어 사귀기를 원했다.
처음에 강동(江東)에는 주법(呪法)이 없었는데, 스님이 『공작왕경(孔雀王經)』을 번역해 여러 가지 신주(神呪)를 보여주었다. 또 제자 멱력(覓歷)에게 고성범패(高聲梵唄)의 법을 전수했다. 함강(咸康) 연간(335-342)에 입적했고, 세수(世壽) 80여 세였다. 석자강(石子岡) 동쪽에 장사지냈다. 성제(成帝)가 그의 풍격을 존경하여 무덤 옆에 사찰을 세웠는데, 후세에 사문(沙門)이 같은 곳에 절을 지으니 고좌사(高座寺)라 불렀다.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권2에 따르면 생전에 번역한 경전은 『대공작왕신주(大孔雀王神呪)』와 『공작왕잡신주(孔雀王雜神呪)』 각 1권이 있다고 한다.
9) 《阿毘達磨俱舍釋論》卷1:「法師遊方既久。精解此土音義。凡所翻譯。不須度語。」(CBETA, T29, no. 1559, p. 161, b11-12)
10) 후나야마 토오루는 진제삼장연구라는 책을 엮은 바 있고 그 책의 첫 편에 “진제 활동과 저작의 기본적 특징”이라는 논문을 실은 바도 있어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가 되러 궁금해진다. 한역에 있어 4대한역가 중에서도 첫째로 손꼽을 수 있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있는 까닭에 법현의 경우를 투사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11) 혜색[慧賾] 580-636 수당(隋唐) 시기의 승려. 형주(荊州) 강릉(江陵) 사람이고, 속성(俗姓)은 이(李)씨다. 9살 때 출가하여 처음에는 강릉사(江陵寺)에서 지냈다. 12살 때 대흥법석(大興法席)이 이루어졌을 때 법주(法主)가 되었다. 나중에 경사(京師) 청선사(淸禪寺)에서 지냈다. 경전에 해박했고 시문을 잘 지었으며, 서화(書畵)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감상에도 정통해서 사대부들과 많이 어울렸다. 저서에 『반야등론(般若燈論)』을 편찬했는데, 『중론(中論)』이라고도 부른다. 그 밖의 저서에 『영집(詠集)』이 있다.
12) 법림[法琳] 572-640 당나라 때의 승려. 영천(潁川, 河南 許昌)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진(陳)씨다. 『속고승전(續高僧傳)』 권25에 따르면 어릴 때 출가하여 유석백가(儒釋百家)의 학문을 연구했고, 특히 삼론(三論)에 정통했다. 일찍이 수나라 인수(仁壽) 원년(601)에 장안(長安)에 와서 도술(道術)을 익혔고, 의녕(義寧) 원년(617) 도복(道服)을 입고 도관(道館)에서 살았다. 평소 노장(老莊)에 통달하여 담론이 맑고 기발했기 때문에 도속(道俗)에서 모두 그를 좇았다. 당고조(唐高祖) 무덕(武德) 원년(618) 다시 석문(釋門)으로 돌아왔다. 4년(621) 경사(京師) 법제사(濟法寺)에 머물렀는데, 당시 태사(太史) 부혁(傅奕)이 12가지 조항으로 대책(對策)을 올려 불법(佛法)을 금지할 것을 주청하자 스님도 글을 올려 잘못됨을 지적하고 『파사론(破邪論)』 1권을 지어 변란(辯難)했다. 부혁이 이치에 밀려 한 마디 말도 못했고, 황제도 폐불(廢佛)에 대한 논의를 중지했다. 나중에 이중경(李仲卿) 등의 배불론(排佛論)에 대항하여 다시 『변정론(辯正論)』 8권을 지어 논의를 꺾어버렸다. 정관(貞觀) 연간에 칙명으로 용전사(龍田寺) 주지를 지내고, 아울러 역경(譯經)에 필수(筆受)로 참여했다. 13년(639) 겨울 도사(道士) 진세영(秦世英)의 참언 때문에 투옥되었다가 칙명으로 사면되어 익부(益部)의 사찰로 옮겨졌다. 가는 도중 백뢰관(百牢關) 보리사(菩提寺)에 이르렀을 때 병으로 입적했다. 세수(世壽) 69세다. 도속(道俗)이 모두 통곡하면서 동산(東山)에 묻었다. 저서에 시부(詩賦)와 찬송(讚頌), 비지(碑誌), 기전(記傳), 삼교계보(三敎系譜)와 대승교법(大乘敎法) 등 30여 권이 있다. 당시 사람 언종(彦琮)이 스님의 별전(別傳) 3권을 지었는데, 호법(護法)했던 사실이 잘 나와 있다.
13) 《續高僧傳》卷2:「僉以崛多, 言識異方, 字曉殊俗。故得宣辯自運。不勞傳度。理會義門, 句圓詞體。文意粗定, 銓本便成。筆受之徒不費其力。」(CBETA, T50, no. 2060, p. 434, a23-26)
14) 「時又有優婆塞。姓瞿曇氏。名達[13]磨般若。隋言法智。父名般若流支。備詳餘傳。智本中天國人。流滯東川, 遂[14]嚮華俗。而門世相傳祖習傳譯。高齊之季為昭玄都。齊國既平佛法同毀。智因僧職轉任俗官。[15]再授洋州洋川郡守。隋氏受禪。梵牒即來。有勅召還使掌翻譯。法智妙善方言。執本自傳。不勞度語。譯「業報差別經」等。」《續高僧傳》卷2 (CBETA, T50, no. 2060, p. 434, c13-21)[13]磨=摩【宋】【元】【明】【宮】*。[14]嚮=鄉【宋】【元】【明】【宮】。[15]再=冊【宋】【元】【明】【宮】。
15) 역대삼보기에는 방언 대신에 수나라 말과 범어라고 적고 있다. 「智既妙善隋梵二言。執本自翻無勞傳譯。」《歷代三寶紀》卷12 (CBETA, T49, no. 2034, p. 102, b24-25)
16) 「般若流支次子曇皮」《歷代三寶紀》卷12 (CBETA, T49, no. 2034, p. 102, c7)
17) 大乘方廣總持經一卷 번역할 때 「傳譯」《歷代三寶紀》卷12 (CBETA, T49, no. 2034, p. 102, c7)
18) 百佛名經一卷 번역할 때 「度語」《歷代三寶紀》卷12 (CBETA, T49, no. 2034, p. 103, a4)
19) 「以漢桓之初。始到中夏。才悟機敏一聞能達。至止未久。即通習華言。於是宣譯眾經改[10]胡為漢。」《高僧傳》卷1 (CBETA, T50, no. 2059, p. 323, b4-6)[10]胡=梵【元】【明】。한나라 환제(桓帝)12) 초기에 처음으로 중국에 이르렀다. 그는 재주와 깨달음이 빠르고 민첩하여 한 번 듣기만 해도 능숙하였다. 그래서 중국에 이른지 오래지않아 곧 중국말을 완전하게 익혔다. 『고승전』 1권(ABC, K1074 v32, p.765b01)
20) 이는 후나야마의 번역이다. 아래는 한글대장경 고승전 개정판 번역이다.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는 것이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고승전』 2권(ABC, K1074 v32, p.778c01)
21) 「法師以秦人好簡故裁而略之。」《出三藏記集》卷10 (CBETA, T55, no. 2145, p. 75, a28-29)
22) evaṃ mayā śrutam ekasmin samaye까지를 정형구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23) 大唐 西明寺 沙門 釋道宣 撰 《續高僧傳》卷2:「且儒學古文變猶紕繆。世人今語傳尚參差(치)。況凡聖殊倫東西隔域。難之又難論莫能盡。必慇懃於三覆。靡造次於一言。歲校則利有餘。日計則功不足。開大明而布範。燭長夜而成務。宣譯之業未可加也。經不容易理藉名賢。常思品藻終慚水鏡。兼而取之。所備者八。誠心愛法志願益人不憚久時其備一也。將踐覺場先牢戒足不染譏惡。其備二也。筌曉三藏義貫兩乘不苦闇滯。其備三也。旁涉墳史工綴典詞不過魯拙。其備四也。襟抱平恕器量虛融不好專執。其備五也。沈於道術澹於名利不欲高衒。其備六也。要識梵言乃閑正譯不墜彼學。其備七也。薄閱蒼雅。粗諳篆隷。不昧此文。其備八也。八者備矣。」(CBETA, T50, no. 2060, p. 439, a15-29)
24) <불교> ‘계’(戒)를 달리 이르는 말. 사람 몸의 발과 같이 계가 불자를 열반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다.
25) 筌曉라는 말은 여기에서만 용례가 보여 전筌의 뜻을 확정하기 어렵다. 전筌은 고기 잡는 통발, 제蹄는 토끼 등을 잡는 올무인데 흔히 전제(筌蹄)라는 말로 같이 쓰여 어떤 목적을 이루는 수단을 비유적으로 뜻하기도 한다. 온전할 전全과 관련시켜 ‘완전히’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다.
26) 삼분오전[三墳五典] 중국의 고서(古書) 이름. 三墳은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의 글이요, 五典은 소호(少昊)·전욱(顓頊)·고신(高辛)·당우(唐虞)의 글임. 이 밖에 팔괘(八卦)의 해설을 ‘팔삭(八索)’, 구주(九州)의 기록을 ‘구구(九邱)’라 하는데, 여러 설(說)이 있어 일정하지 않음.<좌전左傳 소공12년두주昭公十二年杜注>
• 풀이 : 『삼분(三墳)』과 『오전(五典)』. • 의미 : 중국의 고대 문화와 관련한 전적을 가리키는 전고다. • 출전 : 『좌전(左傳)』 소공(昭公) 12년조. • 내용 : 춘추시대 초나라 영왕(靈王)과 그의 대신 자혁(子革)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초나라 사관 의상(倚相)이 잰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갔다. 초왕이 “저 사람은 우수한 사관이니 잘 대해야 할 것이오. 그는 『삼분(三墳)』과 『오전(五典)』, 『팔색(八索)』과 『구구(九丘)』를 읽어 알고 있소”라고 말했다. • 영향 : 초나라 영왕이 언급한 책이 어떤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역사와 문화 및 문물제도와 관련된 서적일 것으로 추측한다. 이 전고는 간단하게 줄여서 ‘전분(典墳)’ 또는 ‘분전(墳典)’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분적(墳籍)’이나 ‘구분(丘墳)’ 등으로도 쓴다.
27) 嫺(한: 1. 우아하다(優雅--) 2. 단아하다(端雅--) 3. 조용하다 4. 익다, 익숙하다)의 뜻으로 보인다.
28) 삼창[三蒼•三倉] 중국 한(漢) 나라 때에 편찬되었던 사전이름. 창힐편(蒼頡篇)•원력편(爰歷篇)•박학편(博學篇)의 3편으로 이루어졌음. 후에 이 3편을 합하여 맨 앞의 편명을 따서 창힐편(蒼頡篇)이라 하고, 이를 삼창(세편으로 이루어진 창힐편이란 의미)이라 하였음. 삼창은 고려 시대 국학에서 생도들이 ≪국어(國語)≫•≪설문해자(說文解字)≫ •≪자림(字林)≫•≪이아(爾雅)≫ 등의 사전류와 함께 유교경전을 학습할 때 이용했던 중요 학습사전이었음.
29) 이아[爾雅]: 「이아」는 소학서의 한 종류로 중국의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훈고서이며, 세계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취급된다. 「이아」는 ‘석명(釋名)’, 또는 「이아」 속에 1편으로 분류되어 있는 ‘석언(釋言)’이라고도 한다. 3권 19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아」는 한(漢, 기원전 206년~220년)나라 이전에 만들어졌으며, 저자 또는 편자는 분명하지 않다. 「이아」는 주공(周公, ?~?)1) 또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의 제자였던 자하(子夏, 기원전 507년~기원전 420년?)가 지었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주나라(周, 기원전1046년~기원전 256년)에서 한나라까지의 여러 학자들이 여러 가지 경서들에 수록되어 있는 본문의 뜻을 새겨서 풀이한 주석을 채록한 책이라고도 한다. 「이아」는 13경의 하나로 중국의 가장 오래된 자전이며, 주석서3)이자 자해서4)이다. 「이아」는 5경 즉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春秋)」에 수록된 한자들의 음과 뜻과 풀이하였으므로 여러 경전들의 내용을 해석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아」는 훈고학에서 한자의 뜻을 풀이할 때에도 지침서로 사용되었다. ‘이아’는 각 지역의 방언을 소통시켜 공동어인 바른 말 즉 아언(雅言)에 이르게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런데 현재 「이아」는 전해지지 않으며, 서진(西晉, 265년~316년)의 학자 곽박(郭璞, 276년~324년)이 「이아」의 경문(經文)을 풀이하여 주석을 단 「이아주(爾雅注)」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남아 있다.
30) 경소 [景霄] : 오대(五代) 때의 승려. 대주(臺州) 단구(丹丘) 사람이고, 속성(俗姓)은 서(徐)씨다. 성격이 엄격하고 강인해서 남들과 잘 사귀지 않았다. 금화(金華) 백화산(白華山)에 머물면서 초학자들을 가르치며 지도했다. 저서에 『간정기(簡正記)』 20권이 있는데, 값어치가 날로 높아졌다. 오월(吳越)의 전류(錢鏐)가 불러 임안(臨安) 죽림사(竹林寺)에 머물게 했다. 천성(天成) 2년(927) 요청을 받아 북탑사(北塔寺)에서 법단(法壇)에 올랐고, 항주(杭州) 진신보탑사(眞身寶塔寺)에 머물다가 입적했다. 宋高僧傳 卷16
31) 【염부수閻浮樹】 閻浮, 梵語 jambu, 巴利語同. 又作譫浮樹․ 贍部樹․ 剡浮樹․ 染部樹․ 潛謨樹. 略稱閻浮.屬於落葉喬木. 學名 Eugenia jambolana. 原産於印度. 四·五月間開花, 結深紫色果實, 稍帶酸味, 種子可作藥用. 依大智度論卷三十五載, 印度爲閻浮樹茂盛之地, 故得閻浮提之名;又流於此樹林間之諸河多含沙金, 故稱爲閻浮檀金. 此外, 起世因本經․立世阿毘曇論卷一南剡浮提品等皆說有「閻浮大樹王」, 此樹枝幹高廣, 樹葉厚密, 能遮避風雨, 果實甘美無比;或係印度人想像中之理想樹. [起世經卷一․南本涅槃經卷九․善見律毘婆沙卷十七․釋迦方志卷上․碧巖錄第十四則․翻譯名義集卷七]<<佛光大辭典 p6337-中≫
32) The Vimalakīrti Nirdeśa Sūtra (Sanskrit: विमलकीर्तिनिर्देशसूत्र )에 나오는 거사. nirdeśa는 가르침instruction, 조언advice의 뜻이라고 한다.
33) 須菩提(しゅぼだい、スブーティ、梵: सुभूति, Subhŭti)는 석가10대 제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무쟁제일無諍第一이라 불리고 있다.
34) 오실본삼불역이 실려있는 「마하발라야바라밀경초서摩訶鉢羅若波羅蜜經抄序」 전문은 다음과 같다. 《出三藏記集》卷8:「摩訶鉢羅若波羅蜜經抄序第一 [9]道安法師 昔在漢陰十有五載。講放光經歲常再遍。及至京師漸四年矣。亦恒歲二。未敢墮息。然每至滯句首尾隱沒。釋卷深思。恨不見護公叉羅等。會建元十八年正車師前部王。名彌第。來朝。其國師。字鳩摩羅跋提。獻[10]胡[11]大品一部四百二牒言二十千[12]失盧。[*]失盧三十二字。[*]胡[13]人數經法也。即審數之。凡十七千二百六十首盧。殘二十七字都并五十五萬二千四百七十五字。天竺沙門曇摩蜱執本。佛護為譯。對而撿之。慧進筆受。與放光光讚同者。無所更出也。其二經譯人所漏者。隨其失處稱而正焉。其義異不知孰是者。輒併而兩存之。往往為訓其下。凡四卷。其一[14]經五卷也。譯[*]胡為秦。有五失本也。一者[*]胡語盡倒而使從秦。一失本也。二者[*]胡經尚質。秦人好文。傳可眾心非文不合。斯二失本也。三者[*]胡經委悉至於嘆詠。[15]丁寧反覆。或三或四。不嫌其煩。而今裁斥。三失本也。四者[*]胡有義[16]記正似亂辭。尋說[17]向語文無以異。或千五百[18]刈而不存。四失本也。五者事已全成。將更傍及。反騰前辭已乃後說而悉除此。五失本也。然般若經。三達之心覆面所演。聖必因時[19]時俗有易。而刪雅古以適今時。一不易也。愚智天隔聖人叵階。乃欲以千歲之上微言。傳使合百王之下末俗。二不易也。阿難出經去佛未久。[20]尊大迦葉令五百六通迭察迭書。今離千年而以近意量[21]截。彼阿羅漢乃兢兢若此。此生死人而平平若此。豈將不知法者勇乎。斯三不易也。涉茲五失經三不易。譯[*]胡為秦。詎可不慎乎。正當以不[22]開異言。傳令知會通耳。何復嫌大匠之得失乎。是乃未所敢知也。前人出經。支讖世高。審得[*]胡本難繫者也。叉羅支越。[23]斵鑿之巧者也。巧則巧矣。懼竅成而混沌終矣。若夫以詩為煩重。以[24]尚為質朴。而刪令合今。則馬鄭所深恨者也。近出此撮欲使不雜推經言旨。唯懼失實也。其有方言古辭。自為解其下也。於常首尾相違句不通者。則冥如合符。厭如復[25]折。乃見前人之深謬。欣通外域之嘉會也。於九十章蕩然無措疑處。毫芒之間泯然無微疹。已矣乎。南[26]摸一切佛過去未來現在佛如諸法明(天竺禮般若辭也明智也外國禮有四種一罽耶二波羅南三婆南四南[27]摸南[*]摸屈體也[28]此跪此四拜拜佛外道國主父母通拜耳禮父母云南[*]摸薩迦薩迦供養也)。摩訶(大也)鉢羅若(智也)波羅(度也)蜜(無極)經抄(天竺經無前題前題皆云吉法吉法竟是也道安為此首目題也)。」(CBETA, T55, no. 2145, p. 52, b8-c26)[9](晉)+道【明】。[10]胡=梵【元】【明】*。[11]大=天【明】。[12]失=首【宋】*【元】*【明】*。[*12-1]失=首【宋】*【元】*【明】*。[*10-1]胡=梵【元】【明】*。[13]〔人〕-【宋】【元】【明】。[14]經=紙二紙異者出別為一卷合【宋】【元】【明】。[*10-2]胡=梵【元】【明】*。[*10-3]胡=梵【元】【明】*。[*10-4]胡=梵【元】【明】*。[*10-5]胡=梵【元】【明】*。[15]丁寧=叮嚀【元】【明】。[*10-6]胡=梵【元】【明】*。[16]記=說【宋】【元】【明】。[17]向=句【明】。[18]刈 벨 예=剗 깎을 잔, 깎을 전【元】【明】。[19]〔時〕-【宋】【元】【明】。[20]尊+(者)【宋】【元】【明】。[21]截=裁【宋】【元】【明】。[*10-7]胡=梵【元】【明】*。[22]開=聞【宋】【元】【明】。[*10-8]胡=梵【元】【明】*。[23]斵=斷【明】。[24]尚=書【宋】【元】【明】。[25]折=析【宋】【元】【明】。[26]摸=無【宋】*【元】*【明】*。[27]摸=莫【元】【明】。[*26-1]摸=無【宋】*【元】*【明】*。[28]此跪=跪也【宋】【元】【明】。[*26-2]摸=無【宋】*【元】*【明】*。
cf) 樸揚 智周 撰 《因明入正理論疏前記》卷1:「五失者: 一, 迴倒梵語. 二, 改質從文. 三, [1]慰慇重委細而說遂乃那之. 四, 凡有所說, 正似究詞, 細尋不爾, 今而不存. 五, 事[巳>已]合成, 將欲傍說, 重勝前意, 生起後說。三不易者: 逕三達之心覆面者說淺智加減, 一不易也. 愚智天隔, 聖必依時, 佛出世時眾根利, 末代根鈍, 遂易古雅之言, 而應今時之性. 此則改千代之上[2]徵言, 同百王之下末俗, 二不易也. 五百羅漢, 結集三藏, 迭相監察, 猶恐謹失, 凡立獨稱, 更為第品, 三不易也。」(CBETA, X53, no. 853, p. 808, a19-b2 // Z 1:86, p. 457, a7-14 // R86, p. 913, a7-14)[1]慰字疑剩。[2]徵疑微。
35) 委悉(위실): (일이나 뜻을) 자세(仔細)하고 완전(完全)하게 앎. 아주 자상하게 앎. 이와 같이 사전에 나와 있으나 悉에는 ‘알다’는 뜻 외에도 ‘다하다(궁구하다)’, ‘갖추다’는 뜻이 있으므로 ‘자세하게 다 갖추다’는 뜻으로 보아 무방해 보인다. 후나야마는 ‘위곡委曲을 진盡하다’로 보고 있다.
36) ①한시(漢詩)의 끝에 적은 한 편(篇)의 대의(大意)를 이르는 말 ②조리가 닿지 않는 어지럽고 난잡(亂雜)한 말
37) 傍及(방급): 推及;遍及。 南朝 梁 劉勰 《文心雕龍·原道》:“心生而言立,言立而文明,自然之道也。傍及萬品,動植皆文。”
38) 横超慧日(おうちょうえにち, 1906-1995): 일본의 불교학자. 대곡大谷대학 명예교수. 중국불교 전공.
39) 經을 ‘지나다’는 뜻의 경逕으로 적고 있는 후대 문헌들도 적지 않다.
40) 삼달(三達): 삼명(三明) 또는 삼증법(三證法)이라고도 함. 숙명지(宿命智), 생사지(生死智), 누진지(漏盡智) 증명(證明).
1. pūrva-nivāsānusmṛti-jñāna 宿命通 2. divya-cakṣus 天眼通 3. āśrava-kṣaya-jñāna 漏盡通
41) Oslo대학의 Christoph Harbsmeier는 Early Chinese buddhist translators on translation: A brief introduction with textual data란 논문에서 “然般若逕三達之心 The core of the threefold prajnā-knowledge 覆面所演。has been propounded by people long dead.(세 가지 지혜의 핵심은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에 의해 제시되었다”로 영문번역하고 있는데 복면覆面을 ‘오래 전에 죽은 사람’으로 풀고 있다. 본서에서는 “반야경은 부처님이 설한 것으로 성자는 반드시 때를 고려하여 설하므로”(横超慧日1983)라고 하고 있다.
cf) 《佛開解梵志阿[颱-台+(犮-乂+又)]經》卷1:「佛知其意,即為出舌,先舐(핥을 지)左耳,却舐右耳,復舐髮際,以舌覆面,徐引舌下。阿颰(태)歎曰:「如佛者難值,萬世時有舌相乃爾,安得不知?」」(CBETA, T01, no. 20, p. 263, b24-27)
42) 이를 통해 오실본의 ‘本’이 ‘經’의 뜻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