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과 적극의 변증법!
생략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스스로를 더 모르는 셈이다.
생략이 불가피하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생략이라면 더욱 문제라는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생략 그 자체의 문제가 갖는 문제성으로도 나아갈 필요가 있다.
우리의 발바닥은 우리가 흔히 말하고 생각하는 행동 또는 실천 또는 삶이라는 용어에 담겨있는 뜻을 말한다.
뜻에서 발까지의 거리는 참으로 멀다. 그것은 극복가능한 것일지는 모르나 그 사실은 인식가능하다.
그 인식 가능은 자기인식에 대한 역모에 해당한다. 자기가 자기자신에 대해 반체제인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체계에 대해 자신이 요주의 인물이 된다는 것은 불안을 동반하는 해방이다. 행방불명 또는 실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유이다. 소묘의 단순함으로 나 자신에 대한 정체를 파악했던 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 소묘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다. 체제 자체는 밖으로의 창이 없지만 그 자체의 취약성 때문에 벽에 구멍이 난다. 그 구멍을 통해서 바늘 귀에 실이 꿰어지듯 몸과 발과 땅을 보게된다. 발見이고 발明이다. 함몰에서 탈출이 발生하는 것이다. 이것을 굳이 불안이라는 바구니에 강조해 담을 필요는 없다. 어쩌면 희망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파괴없이 생성은 없으니까 말이다. 사회와 나를 멈춰 세우고 그 누군가가 또는 그 무엇이 또는 곡두가 또는 넋이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 한방울이 다른 방울들과 헤어져 그 물결에서 빠져나올 때 그 물결은 더 이상 그 이전의 물결 그 힘을 잃는다. 사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사람이 빠져나가면 그 사회는 그 한 사람만큼의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사회 그 자체의 힘을 잃게 된다. 부속품의 신화가 만연하여 그 대체가능성에 주눅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산업예비군이니 실업이니 말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실이다. 이미 무너진 것이다. 구멍은 작을지라도 그런 뜻이다. 구멍이 없다면 그 세계는 닫힌 세계이다. 절대적 외곽은 바깥이 없으니 구멍이 없는 것이니까. 별도 이제 더 이상 구멍이 아니다. 구멍은 발바닥 꼴이다. 머리에 그 꼴이 각인될 때 이성은 마침내 자연 앞에 머리 숙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고지순한 것도 아니고 아비규환도 아니다. 곧 도덕이나 종교도 아니고 자본주의적 시장제도 또한 아니다. 그것은 뒤섞여 슬기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슬기는 구멍들로 이루어져 있다. 적극적인 것보다 소극적인 그러니까 삼가하면서 이루어지는 적극적인 행동들이다. 그 적극성과 소극성의 상호교정적인 과정을 통해 새로운 변증법은 굴러간다. 소극과 적극의 변증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