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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중론 제 15 관자성품 해설

VIS VITALIS 2016. 6. 25. 00:07

용수중론 제 15 관자성품 해설

                                                   작성자: 스믈

 

구마라집 번역 관자성품에 대해 대정신수대장경에는 觀有無品, , \Svabhāva.蕃本, \Bhāvaabhāva.中論)+><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구마라집 번역은 觀有無品이고 梵本“Svabhāva”, 蕃本“Bhāvaabhāva”로 되어 있다는 것이니 제목은 관유무품이라 하거나 관자성품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이 품의 내용상 유()와 자성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무르띠T. R. V. Murti에 따르면 인도철학의 두 가지 사상적 전통 곧 유아론파와 무아론파에서 야기된 갈등을 해소하려는 의도에서 중관학의 변증법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이는 마치 서구의 합리론과 경험론을 칸트가 비판론을 통해 그 내적 모순을 드러낸 것과 같다고 한다. 무르띠는 인도철학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중관파에 의해 초래되었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하 ?근본중송(根本中頌)? 번역본의 제15장을 읽고 이해한 바에 기초하여 유와 자성에 대한 용수의 비판을 검토하기로 한다.(유와 자성에 대한 논의는 주로 나카무라 하지메의 견해에 의존한다.)

 

1. 유()의 개념

 

() 또는 있음은 광범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유인력(萬有引力)이라고 할 때의 만유는 자연과 우주를 포괄하는 물리적인 존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론?에서 논의되는 유()는 주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주장하는 법유(法有)일 것이므로 이와 관련하여 논의하기로 한다.

나카무라 하지메는 설일체유부에서 법유(法有)를 주장하게 된 것은 제행무상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무상하지 않은 존재를 필요로 한다. 만약 무상하지 않은 존재가 전혀 없다면 무상이라는 주장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불교인 이상 무상을 떠나서 상주하는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허락될 수 없지만, 무상인 사물을 무상하게 하는 더욱 고차적인 원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또한 그는 있음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원래 있음이라는 개념은 두 종류로 나누어질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이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있다는 것이다. 중세 이후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전자는 본질essentia’이고 후자는 존재existentia’이다. 그리고 전자를 다루는 것은 형식논리학이고, 후자를 다루는 것은 존재론이다.”

 

() 또는 있음을 ‘~이다‘~이 있다로 구분하는 것은 와쯔지데츠로(和辻哲郎)로부터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나카무라 하지메는 초기불교에서 ‘~ 존재의 틀을 의미했던 법이 설일체유부에 의해서 ‘~인 존재의 틀이 있다로 바뀌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다로부터 ‘~이 있다, 다시 말하면 본질essentia로부터 존재existence로 바뀌어간 것이 법유法有설이 성립하게 된 이론적 근거라고 말하고 있다. 나까무라 하지메가 든 예를 살피면 가령 식()각각을 구분해서 인식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본질essentia에 해당하고 그 인식하는 것의 존재existence를 주장하게 되면 자성 또는 자상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까무라 하지메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더하고 있다.

 

법유설은 ‘~인 틀이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고, 본질essentia을 보다 높은 영역에서 존재existentia로서 포착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법유설은 작용을 단순하게 작용으로서 보지 않고, 작용을 작용으로서 나타나게 하는 틀, 혹은 본질이 형이상학적 영역에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자성

 

dhṛ(유지하다)에서 파생한 법은 주석가들에 의해 자상(自相)이나 사물(vastu 또는 bhāva)로 간주되기도 한다. 자상(고유한 본질)은 자성(고유한 본성)과 같은 뜻이다. 자상이나 자성이라고 하는 것은 개별적인 사물은 변화하고 생멸하지만 법은 고유한 본질 곧 자상을 가지는 것으로서, 더욱 고차원적인 영역에서 변치 않고 존재하기 때문에 법은 있다’, 또는 실재한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설일체유부는 법을 사물이라고 간주하였는데, 그 때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경험적인 사물이 아니라, 자연적 사물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틀로서의 사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설일체유부가 모든 사물의 실재를 주장했다고 말해지고, 그들이 법이나 그 법의 본질인 자성이나 자상을 사물이라는 용어로 말한다고 해도, 설일체유부가 자연적 존재로서의 사물의 실재를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사물을 그렇게 있도록 하는 존재의 틀, 다시 말해 사물의 본질을 실체로 간주한 것이다.

 

?일수로가론壹輸盧迦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凡諸法, , 名異義同. 是故, 或言或言或言或言或言莫不皆是有之差別正音云私婆婆或譯爲自體體或譯爲無法有法或譯爲無自性性. 壹輸盧迦論 (No. 1573 龍樹 造 瞿曇般若流支 譯) T30.253c21-25

(무릇 여러 법은 체, , , , , ()라고 하여, 이름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 그러므로 혹은 체라고 말하고, 혹은 성이라고 말하고, 혹은 법이라고 말하고, 혹은 유라고 말하고, 혹은 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 유의 차별이 아닌 것이 없으니, 바르게 음독하여 말하자면 사바바私婆婆svabhāva(범어), sabhāva(팔리어)이다. 혹은 번역하여 자체체, 무법유법, 무자성성無自性이라고 한다.)

 

3. 중론 15장 관자성품의 해설

 

이태승은 번역서 해설에서 ?근본중송?의 근본목적은 <귀경게>에서 나타나듯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연기(緣起)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곧 나가르주나는 불교의 근본교설이 불타가 설한 연기임을 밝히고 그것의 논증을 위해 게송들을 저술하였다.” “연기에 대한 설명과 논증이 전체 27장에 걸쳐 시도되고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중론 15장 관자성품 역시 연기를 드러낸 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칼루파하나는 제15(The chapter on “The Examination of Self-nature”(Svabhāva-parīkṣa))을 비록 11게송으로 이루어져 짧지만 가장 중요한 장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칼루파하나는 제15장의 핵심을 자성(또는 실체substance)개념과 연기는 어울릴 수 없으며 사물(또는 사건이나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적이라는 것에 두고 있다.

 

중론 15장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시작한다.

 

衆縁中有性 是事則不然

性從衆縁出 即名爲作法

na saṃbhavaḥ svabhāvasya yuktaḥ pratyayahetubhiḥ/

hetupratyayasaṃbhūtaḥ svabhāvaḥ kṛtako bhavet//

자성이 연과 인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자성이 연과 인에 의해 생긴 것[이라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될 것이다.(이 태승 번역, 이하 동일)

 

칼루파하나는 性從衆緣出 卽名爲作法“If substance were to arise as a result of causes and conditions, it has to be made(kṛiaka).”(만약 실체가 원인과 조건의 결과로서 생겨난다면 그것은 만들어져야만 한다.)로 이해하고 있다.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kṛiaka것이라면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성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지 다른 이나 다른 것에 의해 만들어지지kṛiaka 않는다는 정의를 전제로 하고 있는 논의라고 할 것이다. (, kṛiaka)이 인연의 작동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니 실체는 만들어진 것(, kṛiaka)이 될 수 없을 것이다. kṛiaka가 인연과 관련되어서만 쓰이는 특수한 용례를 가지는 용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동태로 쓰인 것이니 자성의 정의와는 어긋난다고 할 것이다. 칼루파하나는 자성Self-nature이나 실체substance를 독특한 것 the “unique”, 함께 공유되지 않는 것 the “unshared”, 독립적인 것 the “independent”이라는 뜻을 포함한 관념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제2게송의 내용이기도 하다. nirapekṣa(의존하지 않는 것, 不觀待, 不待)만들어진kṛiaka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3게송에서는 타성(他性)을 언급하고 있다.

 

15-3) 法若無自性 云何有他性

自性於他性 亦名爲他性

 

15-3) kutaḥ svabhāvasyābhāve parabhāvo bhaviṣyati/

svabhāvaḥ parabhāvasya parabhāvo hi kathyate//

自性이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떻게 他性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른 존재의 自性他性이라 불려지기 때문이다.

 

칼루파하나는 3게송의 自性於他性 亦名爲他性“for self-nature of other-nature is called self-nature”(왜냐하면 타성의 자성이 자성으로 불리기 때문이다.)로 보고 있다. 자성 또는 실체가 존재하지exist 않는다면 타성이나 어떤 다른 실체(a different substance)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칼루파하나는 실체substance를 동일성identity으로, 타성otherness을 상이성difference으로 보는 관점에서 존재(existence, bhāva)를 이해할 때 동일성과 상이성이 없다면 존재 그 자체가 무의미하며 존재가 무의미하다면 비존재(non-existence, abhāva) 역시 소용없다고 말하고 있다. 동일성이니 상이성이니 하는 관념은 연기의 인식뿐만 아니라 변화의 인식 또한 방해한다는 것이다.

15장 관자성품 제6게송에서 붓다의 가르침(buddha-śāsana)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전거를 인용하는 게송은 제 7게송이라 할 수 있다.

 

15-7) 佛能滅有無 如化迦旃延

經中之所説 離有亦離無

 

15-7) kātyāyanāvavāde cāstīti nāstīti cobhayam/

pratiṣiddhaṃ bhagavatā bhāvābhāvavibhāvinā//

?가전연迦旃延에 대한 가르침?에서 세존은 존재와 비존재를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있다’, ‘없다의 양자를 모두 부정하셨다.

 

 

칼루파하나는 카짜야나에 대한 붓다의 교설(the Buddha’s discourse to Kaccāyana)이 나오는 제7게송을 주목하고는 제10게송과 제 11게송에 나오는 상주론eternalism과 단멸론annihilationism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가르주나가 자성과 타성이라는 개념(conception)을 포기했을 때 그는 상주론eternalism과 단멸론annihilationism이라는 관념들(notions)을 거부했던 부처님을 다만 따랐을 뿐인 것이다.”

 

위에서 칼루파하나의 이해를 살펴보았듯이 제 15장 관자성품은 자성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유()를 공박하는 것이 주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록 자성이라는 개념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점은 있으나 하이데거의 존재Sein 개념에 대한 비판도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존재에 대한 비판이 성공적으로 성립될 때 비존재에 대한 비판은 부수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수반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1.

 

구마라집 한역 중론 15(SAT database 자료).

 

中論 (No. 1564 龍樹 造 鳩摩羅什 譯 靑目 釋 ) in Vol. 30

 

T1564_.30.0019c16: 17中論卷第三

龍樹菩薩 造 

梵志青目 釋

姚秦 三藏 鳩摩羅什 譯

 

觀有無品第十五 十一偈

 

問曰諸法各有性以有力用故如瓶有瓶性布有布性是性衆縁合時則出

答曰

 

衆縁中有性 是事則不然

性從衆縁出 即名爲作法

 

若諸法有性不應從衆縁出何以故若從衆縁出即是作法無有定性

 

問曰若諸法性從衆縁作有何咎

答曰

 

性若是作者 云何有此義

性名爲無作 不待異法成

 

如金雜銅則非眞金如是若有性則不須衆縁若從衆縁出當知無眞性又性若決定不應待他出非如長短彼此無定性故待他而有

 

問曰諸法若無自性應有他性

答曰

 

 

法若無自性 云何有他性

自性於他性 亦名爲他性

 

諸法性衆縁作故亦因待成故無自性若爾者他性於他亦是自性亦從衆縁生相待故亦無無故云何言諸法從他性生他性亦是自性故

 

問曰若離自性他性有諸法有何咎

答曰

 

離自性他性 何得更有法

若有自他性 諸法則得成

 

汝説離自性他性有法者是事不然若離自性他性則無有法何以故有自性他性法則成如瓶體是自性依物是他性

 

問曰

若以自性他性破有者今應有無

答曰

有若不成者 無云何可成

因有有法故 有壞名爲無

 

若汝已受有不成者亦應受無亦無何以故有法壞敗故名無是無因有壞而有復次

 

若人見有無 見自性他性

如是則不見 佛法眞實義

 

若人深著諸法必求有見若破自性則見他性若破他性則見有若破有則見無若破無則迷惑若利根著心薄者知滅諸見安隱故更不生四種戲論是人則見佛法眞實義是故説上偈復次

 

佛能滅有無 如化迦旃延

經中之所説 離有亦離無

 

刪陀迦旃延經中佛爲説正見義離有離無若諸法中少決定有者佛不應破有無若破有則人謂爲無佛通達諸法相故説二倶無是故汝應捨有無見復次

 

若法實有性 後則不應異

性若有異相 是事終不然

 

若諸法決定有性終不應變異何以故若定9有自性不應有異相如上眞金喩今現見諸法有異相故當知無有定相復次

 

若法實有性 云何而可異

若法實無性 云何而可異

 

若法定有性云何可變異若無性則無自體云何可變異

 

復次

 

定有則著常 定無則著斷

是故有智者 不應著有無

 

若法定有有相則終無無相是即爲常何以故如説三世者未來中有法相是法來至現在轉入過去不捨本相是則爲常又説因中先有果是亦爲常若説定有無是無必先有今無是則爲斷滅斷滅名無相續因由是二見即遠離佛法

 

問曰

何故因有生常見因無生斷見

答曰

 

若法有定性 非無則是常

先有而今無 是則爲斷滅

 

若法性定有則是有相非無相終不應無若無則非有即爲無10先已説過故如是則墮常見若法先有敗壞而無者是名斷滅何以故有不應無故汝謂有無各有定相故若有斷常見者則無罪福等破世間事是故應捨

 

 

참고자료 2.

 

중론 15장 범본과 구마라집 한역본 자료(번역: 경주 동국대 김성철)

 

 

15 觀有無品(11) 에 대한 관찰

svabhāvaparīikṣā nāma pañcadaśamaṃ prakaraṇam 自性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5(11)

 

15-1) 衆緣中有性 是事則不然 性從衆緣出 卽名爲作法

여러 인연 가운데 그 自性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못하다. 自性이 여러 인연에서 나온다면 지어진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15-1) na saṃbhavaḥ svabhāvasya yuktaḥ pratyayahetubhiḥ/

hetupratyayasaṃbhūtaḥ svabhāvaḥ kṛtako bhavet//

自性이 여러 에 의해 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 모여 생기는 自性作爲된 것이 되리라.

 

15-2) 性若是作者 云何有此義 性名爲無作 不待異法成

自性이 만일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떻게 말이 되겠느냐? 自性이란 지어지지 않고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된 것을 일컫는다.

15-2) svabhāvaḥ kṛtako nāma bhaviṣyati punaḥ katham/

akṛtrimaḥ svabhāvo hi nirapekṣaḥ paratra ca//

더우기 어째서 그야말로 自性이 만들어진 것이겠느냐? 왜냐하면 自性이란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또 다른 것에 의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5-3) 法若無自性 云何有他性 自性於他性 亦名爲他性

존재가 그 自性이 없다면 어떻게 他性이 있겠는가? 他性에 있어서 自性은 역시 他性이라고 부른다.

15-3) kutaḥ svabhāvasyābhāve parabhāvo bhaviṣyati/

svabhāvaḥ parabhāvasya parabhāvo hi kathyate//

自性이 없다면 어떻게 他性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다른 존재에 있어서의 自性他性이라고 불려지기 때문이다.

 

15-4) 離自性他性 何得更有法 若有自他性 諸法則得性

自性他性을 떠나서 어떻게 다시 사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自性他性이 존재한다면 모든 사물은 그 自性이 있을 수 있다.

15-4) svabhāvaparabhāvābhyāmṛte bhāvaḥ kutaḥ punaḥ/

svabhāve prabhāve vā sati bhāvo hi sidhyati//

더우기 自性他性 兩者를 떠나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왜냐하면 自性이나 他性이 존재할 때에 (비로서) 사물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15-5) 有若不成者 無云何有成 因有有法故 有壞名爲無

가 만일 성립하지 않는다면 가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라는 이 있기 때문에 가 파괴될 수 있고 그것을 라고 부른다.

15-5) bhāvasya cedaprasiddhirabhāvo naiva sidhyati/

bhāvasya hyanyathābhāvamabhāvaṃ bruvate janāḥ//

만일 존재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비존재도 실로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가 변화함을 사람들은 비존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15-6) 若人見有無 見自性他性 如是則不見 佛法眞實義

만일 를 보거나 自性이나 他性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佛法의 참된 意義를 보지 못한다.

15-6) svabhāvaṃ parabhāvaṃ ca bhāvaṃ cābhāvameva ca/

ye paśyanti na paśyanti te tattvaṃ buddhaśāsane//

自性이나 他性, 존재나 비존재를 (있다고) 보는 사람들,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

 

15-7) 佛能滅有無 如化迦延 經中之所說 離有亦離無

가전연을 교화하던 경전에서 설하신 바 도 떠나있고 도 역시 떠나있다고 하신 것과 같이 부처님은 능히 壞滅시키신다.

15-7) kātyāyanāvavāde cāstīti nāstīti cobhayam/

pratiṣiddhaṃ bhagavatā bhāvābhāvavibhāvinā//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兩者는 까뜨야야나에게 내리신 설법에서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해 보여줌으로써 세존에 의해 부정되었다.

 

15-8) 若法實有性 後則不應異 性若有異相 是事則不然

만일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다시 변하지는 않아야 하리라. 만일 自性이 달라지는 모습을 띈다면 이것은 옳지 못하다.

15-8) yadyastitvaṃ prakṛtyā syānna bhavedasya nāstitā/

prakṛteranyathābhāvo na hi jātūpapadyate//

만일 가 근본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근본이 변화한다는 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15-9) 若法實有性 云何而可異 若法實無性 云何而可異

만일 사물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만일 사물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15-9) prakṛtau kasya cāsatyāmanyathātvaṃ bhaviṣyati/

prakṛtau kasya ca satyāmanyathātvaṃ bhaviṣyati//

本性이 존재한다면 무엇에 있어서 變異가 존재하겠는가? 本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있어서 變異가 존재하겠는가?

 

15-10) 定有則著常 定無則著斷 是故有智者 不應著有無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됨에 집착하는 것이고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斷滅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있다거나 없다는데 집착해서는 안된다.

15-10) astīti śāśvatagrāho nāstītyucchedadarśanam/

tasmādastitvanāstitve nāśrīyeta vicakṣaṇaḥ//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常住에 대한 집착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斷滅的 견해이다. 그러므로 明晳는 존재성이나 비존재성에 依據해서는 안된다.

 

15-11) 若法有定性 非無則是常 先有而今無 是則爲斷滅

만일 사물이 결정적인 자성을 가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恒常(되다는 말)(), 미리 존재하다가 지금은 없어졌다면 斷滅(했다는 말)이 된다.

15-11) asti yaddhi svabhāvena na tannāstīti śāśvatam/

nāstīdānīmabhūtpūrvamityucchedaḥ prasajyate//

실로 自性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그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는다면 <常住>(이라는 過失에 떨어지고),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은 <斷滅>이라는 過失에 떨어진다.

 

 

 

 





용수중론 제 15 관자성품 해설


 

구마라집 번역 관자성품에 대해 대정신수대장경에는 觀有無品, , \Svabhāva.蕃本, \Bhāvaabhāva.中論)+><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구마라집 번역은 觀有無品이고 梵本“Svabhāva”, 蕃本“Bhāvaabhāva”로 되어 있다는 것이니 제목은 관유무품이라 하거나 관자성품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이 품의 내용상 유()와 자성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무르띠T. R. V. Murti에 따르면 인도철학의 두 가지 사상적 전통 곧 유아론파와 무아론파에서 야기된 갈등을 해소하려는 의도에서 중관학의 변증법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이는 마치 서구의 합리론과 경험론을 칸트가 비판론을 통해 그 내적 모순을 드러낸 것과 같다고 한다. 무르띠는 인도철학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중관파에 의해 초래되었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하 ?근본중송(根本中頌)? 번역본의 제15장을 읽고 이해한 바에 기초하여 유와 자성에 대한 용수의 비판을 검토하기로 한다.(유와 자성에 대한 논의는 주로 나카무라 하지메의 견해에 의존한다.)

 

()의 개념

 

() 또는 있음은 광범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유인력(萬有引力)이라고 할 때의 만유는 자연과 우주를 포괄하는 물리적인 존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론?에서 논의되는 유()는 주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주장하는 법유(法有)일 것이므로 이와 관련하여 논의하기로 한다.

나카무라 하지메는 설일체유부에서 법유(法有)를 주장하게 된 것은 제행무상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무상하지 않은 존재를 필요로 한다. 만약 무상하지 않은 존재가 전혀 없다면 무상이라는 주장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불교인 이상 무상을 떠나서 상주하는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허락될 수 없지만, 무상인 사물을 무상하게 하는 더욱 고차적인 원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또한 그는 있음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원래 있음이라는 개념은 두 종류로 나누어질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이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있다는 것이다. 중세 이후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전자는 본질essentia’이고 후자는 존재existentia’이다. 그리고 전자를 다루는 것은 형식논리학이고, 후자를 다루는 것은 존재론이다.”

 

() 또는 있음을 ‘~이다‘~이 있다로 구분하는 것은 와쯔지데츠로(和辻哲郎)로부터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나카무라 하지메는 초기불교에서 ‘~ 존재의 틀을 의미했던 법이 설일체유부에 의해서 ‘~인 존재의 틀이 있다로 바뀌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다로부터 ‘~이 있다, 다시 말하면 본질essentia로부터 존재existence로 바뀌어간 것이 법유法有설이 성립하게 된 이론적 근거라고 말하고 있다. 나까무라 하지메가 든 예를 살피면 가령 식()각각을 구분해서 인식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본질essentia에 해당하고 그 인식하는 것의 존재existence를 주장하게 되면 자성 또는 자상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까무라 하지메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더하고 있다.

 

법유설은 ‘~인 틀이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고, 본질essentia을 보다 높은 영역에서 존재existentia로서 포착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법유설은 작용을 단순하게 작용으로서 보지 않고, 작용을 작용으로서 나타나게 하는 틀, 혹은 본질이 형이상학적 영역에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자성

 

dhṛ(유지하다)에서 파생한 법은 주석가들에 의해 자상(自相)이나 사물(vastu 또는 bhāva)로 간주되기도 한다. 자상(고유한 본질)은 자성(고유한 본성)과 같은 뜻이다. 자상이나 자성이라고 하는 것은 개별적인 사물은 변화하고 생멸하지만 법은 고유한 본질 곧 자상을 가지는 것으로서, 더욱 고차원적인 영역에서 변치 않고 존재하기 때문에 법은 있다’, 또는 실재한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설일체유부는 법을 사물이라고 간주하였는데, 그 때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경험적인 사물이 아니라, 자연적 사물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틀로서의 사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설일체유부가 모든 사물의 실재를 주장했다고 말해지고, 그들이 법이나 그 법의 본질인 자성이나 자상을 사물이라는 용어로 말한다고 해도, 설일체유부가 자연적 존재로서의 사물의 실재를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사물을 그렇게 있도록 하는 존재의 틀, 다시 말해 사물의 본질을 실체로 간주한 것이다.

 

?일수로가론壹輸盧迦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凡諸法, , 名異義同. 是故, 或言或言或言或言或言莫不皆是有之差別正音云私婆婆或譯爲自體體或譯爲無法有法或譯爲無自性性. 壹輸盧迦論 (No. 1573 龍樹 造 瞿曇般若流支 譯) T30.253c21-25

(무릇 여러 법은 체, , , , , ()라고 하여, 이름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 그러므로 혹은 체라고 말하고, 혹은 성이라고 말하고, 혹은 법이라고 말하고, 혹은 유라고 말하고, 혹은 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 유의 차별이 아닌 것이 없으니, 바르게 음독하여 말하자면 사바바私婆婆svabhāva(범어), sabhāva(팔리어)이다. 혹은 번역하여 자체체, 무법유법, 무자성성無自性이라고 한다.)

 

3. 중론 15장 관자성품의 해설

 

이태승은 번역서 해설에서 ?근본중송?의 근본목적은 <귀경게>에서 나타나듯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연기(緣起)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곧 나가르주나는 불교의 근본교설이 불타가 설한 연기임을 밝히고 그것의 논증을 위해 게송들을 저술하였다.” “연기에 대한 설명과 논증이 전체 27장에 걸쳐 시도되고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중론 15장 관자성품 역시 연기를 드러낸 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칼루파하나는 제15(The chapter on “The Examination of Self-nature”(Svabhāva-parīkṣa))을 비록 11게송으로 이루어져 짧지만 가장 중요한 장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칼루파하나는 제15장의 핵심을 자성(또는 실체substance)개념과 연기는 어울릴 수 없으며 사물(또는 사건이나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적이라는 것에 두고 있다.

 

중론 15장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시작한다.

 

衆縁中有性 是事則不然

性從衆縁出 即名爲作法

na saṃbhavaḥ svabhāvasya yuktaḥ pratyayahetubhiḥ/

hetupratyayasaṃbhūtaḥ svabhāvaḥ kṛtako bhavet//

자성이 연과 인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자성이 연과 인에 의해 생긴 것[이라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될 것이다.(이 태승 번역, 이하 동일)

 

칼루파하나는 性從衆緣出 卽名爲作法“If substance were to arise as a result of causes and conditions, it has to be made(kṛiaka).”(만약 실체가 원인과 조건의 결과로서 생겨난다면 그것은 만들어져야만 한다.)로 옮기고 있다.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kṛiaka것이라면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성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지 다른 이나 다른 것에 의해 만들어지지kṛiaka 않는다는 정의를 전제로 하고 있는 논의라고 할 것이다. (, kṛiaka)이 인연의 작동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니 실체는 만들어진 것(, kṛiaka)이 될 수 없을 것이다. kṛiaka가 인연과 관련되어서만 쓰이는 특수한 용례를 가지는 용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동태로 쓰인 것이니 자성의 정의와는 어긋난다고 할 것이다. 칼루파하나는 자성Self-nature이나 실체substance를 독특한 것 the “unique”, 함께 공유되지 않는 것 the “unshared”, 독립적인 것 the “independent”이라는 뜻을 포함한 관념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제2게송의 내용이기도 하다. nirapekṣa(의존하지 않는 것, 不觀待, 不待)만들어진kṛiaka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3게송에서는 타성(他性)을 언급하고 있다.

 

15-3) 法若無自性 云何有他性

自性於他性 亦名爲他性

 

15-3) kutaḥ svabhāvasyābhāve parabhāvo bhaviṣyati/

svabhāvaḥ parabhāvasya parabhāvo hi kathyate//

自性이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떻게 他性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른 존재의 自性他性이라 불려지기 때문이다.

 

칼루파하나는 3게송의 自性於他性 亦名爲他性“for self-nature of other-nature is called self-nature”(왜냐하면 타성의 자성이 자성으로 불리기 때문이다.)로 보고 있다. 자성 또는 실체가 존재하지exist 않는다면 타성이나 어떤 다른 실체(a different substance)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칼루파하나는 실체substance를 동일성identity으로, 타성otherness을 상이성difference으로 보는 관점에서 존재(existence, bhāva)를 이해할 때 동일성과 상이성이 없다면 존재 그 자체가 무의미하며 존재가 무의미하다면 비존재(non-existence, abhāva) 역시 소용없다고 말하고 있다. 동일성이니 상이성이니 하는 관념은 연기의 인식뿐만 아니라 변화의 인식 또한 방해한다는 것이다.

15장 관자성품 제6게송에서 붓다의 가르침(buddha-śāsana)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전거를 인용하는 게송은 제 7게송이라 할 수 있다.

 

15-7) 佛能滅有無 如化迦旃延

經中之所説 離有亦離無

 

15-7) kātyāyanāvavāde cāstīti nāstīti cobhayam/

pratiṣiddhaṃ bhagavatā bhāvābhāvavibhāvinā//

?가전연迦旃延에 대한 가르침?에서 세존은 존재와 비존재를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있다’, ‘없다의 양자를 모두 부정하셨다.

 

 

칼루파하나는 카짜야나에 대한 붓다의 교설(the Buddha’s discourse to Kaccāyana)이 나오는 제7게송을 주목하고는 제10게송과 제 11게송에 나오는 상주론eternalism과 단멸론annihilationism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가르주나가 자성과 타성이라는 개념(conception)을 포기했을 때 그는 상주론eternalism과 단멸론annihilationism이라는 관념들(notions)을 거부했던 부처님을 다만 따랐을 뿐인 것이다.”

 

위에서 칼루파하나의 이해를 살펴보았듯이 제 15장 관자성품은 자성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유()를 공박하는 것이 주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록 자성이라는 개념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점은 있으나 하이데거의 존재Sein 개념에 대한 비판도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존재에 대한 비판이 성공적으로 성립될 때 비존재에 대한 비판은 부수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수반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1.

 

구마라집 한역 중론 15(sat자료).

 

中論 (No. 1564 龍樹 造 鳩摩羅什 譯 靑目 釋 ) in Vol. 30

 

T1564_.30.0019c16: 17中論卷第三

龍樹菩薩 造 

梵志青目 釋

姚秦 三藏 鳩摩羅什 譯

 

觀有無品第十五 十一偈

 

問曰諸法各有性以有力用故如瓶有瓶性布有布性是性衆縁合時則出

答曰

 

衆縁中有性 是事則不然

性從衆縁出 即名爲作法

 

若諸法有性不應從衆縁出何以故若從衆縁出即是作法無有定性

 

問曰若諸法性從衆縁作有何咎

答曰

 

性若是作者 云何有此義

性名爲無作 不待異法成

 

如金雜銅則非眞金如是若有性則不須衆縁若從衆縁出當知無眞性又性若決定不應待他出非如長短彼此無定性故待他而有

 

問曰諸法若無自性應有他性

答曰

 

 

法若無自性 云何有他性

自性於他性 亦名爲他性

 

諸法性衆縁作故亦因待成故無自性若爾者他性於他亦是自性亦從衆縁生相待故亦無無故云何言諸法從他性生他性亦是自性故

 

問曰若離自性他性有諸法有何咎

答曰

 

離自性他性 何得更有法

若有自他性 諸法則得成

 

汝説離自性他性有法者是事不然若離自性他性則無有法何以故有自性他性法則成如瓶體是自性依物是他性

 

問曰

若以自性他性破有者今應有無

答曰

有若不成者 無云何可成

因有有法故 有壞名爲無

 

若汝已受有不成者亦應受無亦無何以故有法壞敗故名無是無因有壞而有復次

 

若人見有無 見自性他性

如是則不見 佛法眞實義

 

若人深著諸法必求有見若破自性則見他性若破他性則見有若破有則見無若破無則迷惑若利根著心薄者知滅諸見安隱故更不生四種戲論是人則見佛法眞實義是故説上偈復次

 

佛能滅有無 如化迦旃延

經中之所説 離有亦離無

 

刪陀迦旃延經中佛爲説正見義離有離無若諸法中少決定有者佛不應破有無若破有則人謂爲無佛通達諸法相故説二倶無是故汝應捨有無見復次

 

若法實有性 後則不應異

性若有異相 是事終不然

 

若諸法決定有性終不應變異何以故若定9有自性不應有異相如上眞金喩今現見諸法有異相故當知無有定相復次

 

若法實有性 云何而可異

若法實無性 云何而可異

 

若法定有性云何可變異若無性則無自體云何可變異

 

復次

 

定有則著常 定無則著斷

是故有智者 不應著有無

 

若法定有有相則終無無相是即爲常何以故如説三世者未來中有法相是法來至現在轉入過去不捨本相是則爲常又説因中先有果是亦爲常若説定有無是無必先有今無是則爲斷滅斷滅名無相續因由是二見即遠離佛法

 

問曰

何故因有生常見因無生斷見

答曰

 

若法有定性 非無則是常

先有而今無 是則爲斷滅

 

若法性定有則是有相非無相終不應無若無則非有即爲無10先已説過故如是則墮常見若法先有敗壞而無者是名斷滅何以故有不應無故汝謂有無各有定相故若有斷常見者則無罪福等破世間事是故應捨

 

 

참고자료 2.

 

중론 15장 범어와 구마라집 번역 자료

 

 

15 觀有無品(11) 에 대한 관찰

svabhāvaparīikṣā nāma pañcadaśamaṃ prakaraṇam 自性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5(11)

 

15-1) 衆緣中有性 是事則不然 性從衆緣出 卽名爲作法

여러 인연 가운데 그 自性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못하다. 自性이 여러 인연에서 나온다면 지어진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15-1) na saṃbhavaḥ svabhāvasya yuktaḥ pratyayahetubhiḥ/

hetupratyayasaṃbhūtaḥ svabhāvaḥ kṛtako bhavet//

自性이 여러 에 의해 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 모여 생기는 自性作爲된 것이 되리라.

 

15-2) 性若是作者 云何有此義 性名爲無作 不待異法成

自性이 만일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떻게 말이 되겠느냐? 自性이란 지어지지 않고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된 것을 일컫는다.

15-2) svabhāvaḥ kṛtako nāma bhaviṣyati punaḥ katham/

akṛtrimaḥ svabhāvo hi nirapekṣaḥ paratra ca//

더우기 어째서 그야말로 自性이 만들어진 것이겠느냐? 왜냐하면 自性이란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또 다른 것에 의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5-3) 法若無自性 云何有他性 自性於他性 亦名爲他性

존재가 그 自性이 없다면 어떻게 他性이 있겠는가? 他性에 있어서 自性은 역시 他性이라고 부른다.

15-3) kutaḥ svabhāvasyābhāve parabhāvo bhaviṣyati/

svabhāvaḥ parabhāvasya parabhāvo hi kathyate//

自性이 없다면 어떻게 他性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다른 존재에 있어서의 自性他性이라고 불려지기 때문이다.

 

15-4) 離自性他性 何得更有法 若有自他性 諸法則得性

自性他性을 떠나서 어떻게 다시 사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自性他性이 존재한다면 모든 사물은 그 自性이 있을 수 있다.

15-4) svabhāvaparabhāvābhyāmṛte bhāvaḥ kutaḥ punaḥ/

svabhāve prabhāve vā sati bhāvo hi sidhyati//

더우기 自性他性 兩者를 떠나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왜냐하면 自性이나 他性이 존재할 때에 (비로서) 사물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15-5) 有若不成者 無云何有成 因有有法故 有壞名爲無

가 만일 성립하지 않는다면 가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라는 이 있기 때문에 가 파괴될 수 있고 그것을 라고 부른다.

15-5) bhāvasya cedaprasiddhirabhāvo naiva sidhyati/

bhāvasya hyanyathābhāvamabhāvaṃ bruvate janāḥ//

만일 존재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비존재도 실로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가 변화함을 사람들은 비존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15-6) 若人見有無 見自性他性 如是則不見 佛法眞實義

만일 를 보거나 自性이나 他性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佛法의 참된 意義를 보지 못한다.

15-6) svabhāvaṃ parabhāvaṃ ca bhāvaṃ cābhāvameva ca/

ye paśyanti na paśyanti te tattvaṃ buddhaśāsane//

自性이나 他性, 존재나 비존재를 (있다고) 보는 사람들,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

 

15-7) 佛能滅有無 如化迦延 經中之所說 離有亦離無

가전연을 교화하던 경전에서 설하신 바 도 떠나있고 도 역시 떠나있다고 하신 것과 같이 부처님은 능히 壞滅시키신다.

15-7) kātyāyanāvavāde cāstīti nāstīti cobhayam/

pratiṣiddhaṃ bhagavatā bhāvābhāvavibhāvinā//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兩者는 까뜨야야나에게 내리신 설법에서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해 보여줌으로써 세존에 의해 부정되었다.

 

15-8) 若法實有性 後則不應異 性若有異相 是事則不然

만일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다시 변하지는 않아야 하리라. 만일 自性이 달라지는 모습을 띈다면 이것은 옳지 못하다.

15-8) yadyastitvaṃ prakṛtyā syānna bhavedasya nāstitā/

prakṛteranyathābhāvo na hi jātūpapadyate//

만일 가 근본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근본이 변화한다는 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15-9) 若法實有性 云何而可異 若法實無性 云何而可異

만일 사물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만일 사물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15-9) prakṛtau kasya cāsatyāmanyathātvaṃ bhaviṣyati/

prakṛtau kasya ca satyāmanyathātvaṃ bhaviṣyati//

本性이 존재한다면 무엇에 있어서 變異가 존재하겠는가? 本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있어서 變異가 존재하겠는가?

 

15-10) 定有則著常 定無則著斷 是故有智者 不應著有無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됨에 집착하는 것이고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斷滅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있다거나 없다는데 집착해서는 안된다.

15-10) astīti śāśvatagrāho nāstītyucchedadarśanam/

tasmādastitvanāstitve nāśrīyeta vicakṣaṇaḥ//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常住에 대한 집착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斷滅的 견해이다. 그러므로 明晳는 존재성이나 비존재성에 依據해서는 안된다.

 

15-11) 若法有定性 非無則是常 先有而今無 是則爲斷滅

만일 사물이 결정적인 자성을 가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恒常(되다는 말)(), 미리 존재하다가 지금은 없어졌다면 斷滅(했다는 말)이 된다.

15-11) asti yaddhi svabhāvena na tannāstīti śāśvatam/

nāstīdānīmabhūtpūrvamityucchedaḥ prasajyate//

실로 自性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그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는다면 <常住>(이라는 過失에 떨어지고),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은 <斷滅>이라는 過失에 떨어진다.